1-4.
가스라기는 그 모든 일을 눈으로 보지 못했지만, 귀로 들은
것만으로도 대충 짐작은 할 수 있었다. 남자가 가스라기를 지켜준
것이다. 기분이 좋았다. 엄마가 죽고 난 후에 누군가에게 보호를
받는 것은 처음이었다. 가스라기는 짐승 새끼가 어미 품으로 파고
들듯이, 남자의 품속에서 꼼틀거렸다.
죽은 짐승을 보며 씁씁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던 남자가 비로
소 품안의 가스라기를 깨달았는지 화들짝 놀라며 밀어냈다.
"너는‥‥‥."
가스라기는 아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응. 가스라기야. 생각나?"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나를 이리로 데려온 거냐?"
"응. 이 샘에서 씻으며 상처가 낫거든. 살쾡이한테 물렸을 때도
하루 만에 나았거든. 그런데 사흘이나 걸렸다. 많이 아팠나 봐."
"어떻게 데려왔지?"
"업고 왔지."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 소리가 아닌 모양이다.
"분명히 점혈을 해두었는데 어떻게 그걸 풀고 움직일 수 있었느
냐는 말이다."
가스라기는 점혈(點穴)이라는 게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갸우
뚱거렸다. 곰곰 생각해보니 손목을 꾹 눌러서 몸을 못 움직이게
만들었던 그 신기한 힘을 말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걸 어떻게
풀었는지는 가스라기 자신도 모른다. 대답할 말이라곤 고작 이것
뿐이었다.
"용을 쓰니까 움직이던데?"
남자는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더 묻지 않았다.
물어봤자 신통한 대답이 나올 것 같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것이다. 남자는 가스라기를 외면하고 샘가로 걸어가서 손끝으로
샘의 물을 찍어 맛을 보더니 눈을 약간 크게 떴다.
"이건 명계의 물‥‥‥. 기연(奇緣)이구나. 생각보다 빨리 회복된
이유가 있었어."
명계(冥界)가 뭔지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샘이 효과가 있었다는
말 같다. 가스라기는 신이 나서 쫑알거렸다.
"그렇지? 좋지? 이거 저승샘이라고 불러. 뭐든지 다 고쳐."
"그럴듯한 이름이다."
그렇게 중얼거린 남자가 이번에는 제 옷을 내려다보았다. 핏물
에 젖고 흙투성이에다, 가스라기가 한쪽 어깨를 거의 잘라놓아서
꼴이 말이 아니었다. 가스라기는 지레 움츠러들었다.
"저, 저기, 일부러 그런 거 아냐. 그 옷이 피, 먹는 것 같아서,
벗기려는데 어떻게 벗겨야 할지 몰라서, 할 수 없이 찢었어."
남자는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놀랐다.
"찢었다고?"
"으응."
"네가?"
"응,"
"말도 안 되는 소리. 천의(天衣)는 하계인의 쇠붙이에는 상하지
않는다."
"쇠가 아니라 이걸로 잘랐어."
가스라기가 허리춤에 매달린 뼈칼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남
자는 더 다그쳐 묻는 것도 바보짓 같았는지 다시 그녀를 외면하고
눈을 감았다. 잠시 후 남자의 몸에 변화가 일었다. 정확히는 옷에
일어난 변화였다. 은은한 광택처럼 빛이 도는가 싶더니 붉게 물든
핏물과 흙물이 사라졌다. 뿐인가. 잘라낸 부분이 상처가 아물듯
붙어버렸다. 순식간에 백설같이 흰 새 옷으로 변했다. 가스라기는
입을 딱 벌렸다.
"우와, 신기해!"
가스라기는 남자에게 바짝 다가가서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만져봐도 돼?"
눈을 뜬 남자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다가, 불쑥
물었다.
"너는 도대체 사람이냐, 요수냐?"
"요수가 뭐야?"
남자는 세 번째로 가스라기를 외면하고 몸을 돌렸다. 아까 쫓아
왔던 괴상한 짐승이 자욱한 피바다 속에 벌렁 누워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가스라기가 물었다.
"저런 게 요수야? 나랑 하나도 안 닮았네. 나 아니네."
"저건 요수 중에 요마(妖魔), 야구자(野狗者)라는 짐승이다."
"헤에, 처음 봐."
"이제부터는 자주 보게 될 거다."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어딘가 우울하게 들렸다. 가스
라기도 괜히 울적해졌다.
"왜?"
"내 피 냄새를 맡고 이런 놈들이 몰려들기 시작할 테니까."
남자의 얼굴에 근심이 어렸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야 하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니 가스라기도 걱정이 됐다. 남
자는 씁쓸하게 덧붙였다.
"당장은 돌아갈 수도 없군."
가스라기의 눈에 반색이 떠올랐다. 그녀는 이렇게 끔찍하게 생
긴 짐승들이 데로 몰려오는 것보다도, 남자가 훌쩍 떠나버리는
것이 더 걱정이었다. 돌아갈 수 없다고 하니 몹시 기뻤다.
"그럼 안 가는 거야?"
남자는 가스라기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뭔가 신중하게 생각하
는 것 같더니, 천천히 대답했다.
"백 일 정도는 더 이 샘에서 치료를 해야겠다. 요수들 때문에
좀 위험하겠지만‥‥‥."
"응! 그래!"
가스라기는 기분 좋게 외치고는 자기 가슴을 탕탕 쳤다.
"걱정 마! 아무것도 못 오게 할게. 귓도리 한 마리도 못 오게
내가 꼭 지켜줄게!"
남자는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가스라기는 눈을 깜
빡거리면서 그를 바라보다가 불쑥 물었다.
"그런데, 뭐라고 불러야 해?"
"음?"
"이름!"
그가 잠깐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천군."
"‥‥‥아?"
그 이름을 소리 내어 불러보려던 가스라기는,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자 당황했다. 소리란 둥글어야 하는 법인데 그의 이름은
마치 네모 같아서 가스라기의 목과 입으로는 소리를 낼 수가 없었
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귀로는 듣는데, 입으로는 낼 수 없는
소리라니. 몇 번이나 시도해보다가 가스라기는 결국 포기했다.
"어려워, 이름. 소리가 잘 안 나."
천군은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하계인들의 입으로는 낼 수 없는 소리니까."
"어려워. 뜻도 모르겠어."
가스라기는 괜히 심술이 나서 투덜거렸다.
"이름의 뜻이라‥‥‥. 네 이름의 뜻도 나는 모르겠구나."
그 말을 듣고, 가스라기는 샘 옆의 풀꽃 하나로 손을 뻗었다.
꽃씨를 털어 손바닥에 올리고는 그것을 천군의 코앞으로 들이밀고
씨앗을 세게 비볐다. 천군이 물었다.
"씨앗?"
가스라기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손바닥에 대로 훅 숨을 불었
다. 씨를 싸고 있던 껍데기와 잔털이 일어났다. 그녀는 뭉개진
씨 알맹이를 손가락으로 골라내고, 그 까끄라기만 남긴 채 다시
그에게 내밀었다.
"이런 거. 이게 가스라기야."
천군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스라기는 손에 남은 까끄라
기를 털어냈다.
"그 이름은 무슨 뜻이야?"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잠깐 하늘을 쳐다보다가 천군은 말했다.
"천(天)은 하늘이라는 뜻이다."
"하늘?"
"그래, 하늘."
"그럼‥‥‥ 그 다음은?"
"군(君)은 사람을 높여 부르는 말이다."
가스라기는 쉽게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다
가 갑자기 손뼉을 짝 쳤다.
"아, 알았어. 그거구나. 님! 맞지? 마을 여자들은 시집가면 남자
를 낭군이라고 해. 서방님이라고도 해. 그거지?"
천군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가스라기는 그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그럼 하늘님? 하늘님이네."
가스라기는 팔짝팔짝 뛰면서 그의 주변을 춤추듯 맴돌았다.
"좋아라. 하늘님, 하늘님, 배고프지 않아? 밥 먹자. 굴에 가면
고기 말린게 있어."
팔짝거리던 가스라기의 발끝에 뭔가가 툭 채였다. 죽은 요마의
몸뚱이였다. 천군은 그녀가 비명이라도 지를 줄 알았다. 하지만
가스라기는 쪼그리고 앉아서 요마의 시체를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
보는 것이었다.
"하늘님, 이거 먹을 수 있을까?"
졌다. 천군은 풋,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가스라기가 눈이
동그래져서 돌아보았다. 천군은 재빨리 기침으로 얼버무렸다. 사
실 웃음소리에 가장 놀란 것은 천군 자신이었다.
"건드리지 마라, 그건."
그는 외려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버려두면 알아서 깨끗이 정돈이 될 테니까."
하늘님의 음성이 딱딱하건 말건 가스라기는 아랑곳없이 신나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알았어, 하늘님!"
백 일. 앞으로 백 일 동안 하늘님은 그녀와 함께 산다. 가스라기
에게 그것은 무척이나 긴 시간이었다. 열 손가락과 발가락을 다
합해도 셀 수 없는 길고 긴 낮과 밤이었다. 가스라기는 그것이
영원이라고 믿었다. 하루를 살다 가는 벌레에게 내년이란 영원히
오지 않는 시간과 마찬가지이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