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사흘이 지났다. 남자는 아직도 눈을 뜨지 않았다. 가스라기는
남자의 곁을 떠나지 않고 꼬박 붙어 있었다. 물론 샘에 담가두는
것 외에 달리 보살펴줄 방법은 없었다.
이따금 그녀는 남자의 가슴에 귀를 댔다. 아직 살아 있는 건지
걱정이 돼서다. 한참이 지나서야 '쿵' 하고 심장 뛰는 소리가 들린
다. 남자의 고동은 몹시 느렸다. 가스라기의 심장이 열 번 뛸 동안
한 번을 뛰는 정도다. 그래도 그 심장 소리를 들으면 가스라기는
마음이 놓였다.
사흘 내내 굴에도 돌아가지 않고 밥도 먹지 않고 샘에 붙어
있었으니 이러다간 자기가 먼저 굶어 돌아가시게 생겼다. 남자가
물속으로 미끄러지지 않도록 잘 기대 앉혀놓고는 뱀딸기라도 찾아
보려고 일어나 샘을 나왔을 때였다.
수풀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멀리서 웅성웅성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사람 소리다. 이 숲에는 사람들이 저렇게 많이 들어온
적이 없다. 가스라기는 화들짝 놀라 배고픈 것도 잊었다.
소리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귀를 기울여보니 샘으로
오는 것은 아니고 가스라기의 집, 굴 쪽을 향한 것 같다. 하지만
굴도 이 근처다. 언제 이쪽으로 들이닥칠지 모른다. 가스라기는
안절부절못하다가 남자를 한번 돌아보고는 굴 족으로 냅다 뛰어갔다.
숲에 들이닥친 것은 귓도리골 사람들이었다. 모두 남자로, 몇몇
은 손에 몽둥이까지 쥐고 있었다. 열댓 명쯤 되었는데 대부분 젊은
장정이었고, 딱 한 명만 늙은이였다. 늙은이는 마을에서 가장 나이
가 많은 촌장으로, 수릿날 제일 먼저 그네를 탔던 그르매의 할아버
지다.
가스라기가 사는 굴을 향해 다가가는 장정들은 자못 기세가
등등했다. 하지만 젊은이들 뒤를 천천히 따르는 촌장은 그다지
마땅치 않은 표정이었다. 촌장은 늙은 사람이라 예로부터 전해져
오는 풍습을 어기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스라기에게 잘해
주어서도 안되지만 해코지를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십수 년 전의 일이다. 귓도리골에 만삭의 여자 하나가 굴러들어
왔다. 그 여자는 가스라기였다. 가스라기는 죄인이다. 그것도 부모
를 죽이거나 자식을 팔아넘기는 패륜의 죄를 저지른 자들이다.
처음에는 그런 줄도 모르고 마을에 들여놓고 밥도 해주고 병구
완도 해주었다. 그런데 몸을 추스르고 말을 할 수 있게 된 그
여인네가 자신이 가스라기라는 사실을 밝혔다. 마을 사람들은 화
들짝 놀라 여인을 숲으로 내쫓았다. 그 여인은 얼마 뒤 숲에서
몸을 풀었다. 응애응애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 이후 마을 사람들은
끓는 물에 들어간 콩처럼 안절부절못했다. 가스라기를 곁에 둔
마을에는 안 좋은 일이 시시때때로 일어나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랄 수 있는 것은 가스라기 어미와 아기의 목숨
을 하늘이 거둬가주는 것뿐이었다. 어미의 몸이 가히 좋지 않아
보였기 때문에, 잘하면 그리될 것도 같았다.
하지만 질긴 것이 목숨이라더니, 곧 죽을 것 같던 가스라기
모녀는 악착같이 살아남았다. 그리고 아예 귓도리숲에 정착해서
마을의 우환거리가 되었다. 그때도 마을 사람들은 이대로 있을
수 없다, 원래 저 가스라기도 살던 마을에서 쫓겨났을 것이 아니냐,
우리도 다른 마을로 쫓아내자 하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당시의
촌장이 말렸다. 가스라기가 이 마을에 깃들게 된 것도 다 하늘이
정한 일이니 그대로 따르는 것이 사람의 도리라고 했다. 분명히
저 가스라기를 쫓아낸 마을에는 그전보다 훨씬 나쁜 일이 있어났
을 거라고도 했다.
그때만 해도 마을 사람들은 촌장의 말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요즘 젊은것들은 말을 들어먹지 않는다. 남아도
는 힘을 쓸 곳이 없어 항상 씨근대는 녀석들이 걸핏하면 가스라기
를 마을에서 쫓아내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어미 가스라기가 죽고
딸만 남게 된 이후로는 그런 소리가 더 잦아졌다. 나이 좀 든
축들은 촌장의 눈치만 보았다. 마음은 쫓아내고 싶지만 동티가
날까 봐 두렵기도 했던 거다.
그러다가 사흘 전 수릿날 하늘 오르기를 가스라기가 훔쳐보려
했다는 계집애들의 마릉ㄹ 듣고 한차례 마을이 시끄러웠다. 거기까
지는 괜찮았는데 그날 오밤중에 또 아주 큰일이 일어났다. 피비가
내린 것이다. 자다가 소피보러 나왔던 아낙이 그 피비를 맞고 그대로
까무러쳤다. 그리고 마을이 발칵 뒤집혔다. 이건 분명히 가스라
기 때문이라고 결론이 모아지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원래 가스
라기를 끼고 사는 마을에서는 잘못된 일은 모두 가스라기 탓이기
때문이다.
급기야 혈기왕성한 젊은 놈들이 주축이 되어 가스라기를 내쫓자
고 말이 모아졌고, 이렇게 득달같이 몰려오게 된 것이다. 촌장도
이번에는 어쩔 수가 없었다.
'큰일이나 일어나지 않으면 좋으련만.'
촌장은 한숨을 내쉬면서 젊은것들의 뒤를 따라 가스라기의 굴을
향해 다가갔다. 얼핏 보기에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선두의 장정들은 목이 뻣뻣해지도록 긴장한 채 조심조심 다가가고
있었다.
"왜 왔어!"
굴 안쪽이 아니라 뒤쪽 수풀에서 불쑥 소리가 들려오자 장정들
이 으악 놀라서 돌아보았다. 거기 서 있는 것은 물에 젖은 옷을
입고 풀머리 산발한 가스라기였다. 꼭 낮귀신같았다.
장정들은 주춤주춤 물러나면서 촌장을 바라보았다. 몰려올 때
는 그리 기세등등하더니 막상 가스라기를 앞에 두자 겁이 난 모양
이다. 촌장은 내심 웃음이 났다. 따지고 보면 저 가스라기가 태어
난 해에 손녀를 보았으니, 그르매와 같은 열다섯 어린 계집애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천방지축 젊은 놈들도 어렸을 적부터 '가스라
기와 상관한 사람은 동티가 나게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랐으니
겁이 안 날 수가 없다. 이럴 경우를 대비해서 촌장이 따라온 것이기
도 했다. 결국 사고는 젊은것들이 치고 뒷감당은 어르신네가 하는
게 세상 이치다.
"물을 게 있다."
촌장이 가스라기 앞으로 한 걸음 나서며 말했다. 가스라기는
독 오른 짐승 같은 눈으로 촌장을 쏘아보면서 어서 말하라는 듯이
턱을 치켜들었다.
"사흘 전에 피비가 내렸다. 네 짓이 아니냐?"
가스라기의 대답은 명쾌했다.
"아냐."
하지만 '아, 그러냐?' 하고 물러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못 믿겠다. 네 탓이 아니라면 그런 불길한 일이 왜 일어나겠
느냐?"
가스라기가 입술을 삐죽였다. 어차피 안 믿을 거면서 묻긴 왜
물어. 한두 번 겪는 일도 아니니 별로 마음 상하지는 않았다. 그저
빨리 이 사람들을 숲 밖으로 내몰고 샘으로 돌아가 남자를 살펴보
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아니라며 아냐. 됐지? 어서 나가."
촌장 뒤에서 눈치만 보고 있던 사내 하나가 참다못해 불쑥 나섰
다.
"나가라니? 꼭 여기가 제 땅인 것처럼 말하네. 원래 이 숲은
우리 마을 것이니 나가야 하는 건 우리가 아니라‥‥."
기세 좋게 말하던 사내는, 가스라기가 찌릿 노려보자 어물어물
말끝을 흐리며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촌장이 말을 대신 맺어주
었다.
"이제 이 마을에서 나가줘야겠다. 십 수 년을 살게 해줬으니
우리도 할 만큼 한 거다. 다른 마을로 가거라."
가스라기는 두 눈을 몇 번 깜빡거리다가 주먹을 꼭 쥐고 물었다.
"왜?"
"가스라기 네 탓으로 우리 마을이 입은 피해가 한둘이 아니다.
그동안 차마 내치지 못하고 네가 하늘에 지은 죄를 씻기를 기다려
왔다만 이제는 더 못참겠다고 이렇게 젊은이들이 일어섰구나."
가스라기의 입에서 하 웃음이 비어져 나왔다. 그녀는 자신이
무슨 죄를 지었는지 알지 못했다. 죄를 모르니 어떻게 씻어야 하는
지도 몰랐다. 모르는 죄 때문에 구박하더니 모르는 죄 씻음을 하지
않았다고 이젠 살던 곳에서 나가라고 한다. 웃지 않을 수가 없다.
"싫어."
가스라기는 웃음을 거두고 또박또박 대답했다.
"안 나가. 여긴 내 집이야. 내 숲이야. 너희들이 나가."
그녀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가스라기는 사람과 똑같이 생겼
다. 하지만 사람이 아니다. 사람들이 사람 취급을 해주지 않으니
사람이 아닌 거다. 마을 사람들에게 그녀는 짐승이었다. 그래서
가스라기는 온힘을 다해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안 나가면 다 잡아먹어버릴 거야아아!"
순간, 피비린내 나는 서늘한 바람이 가스라기의 등 뒤쪽에서
불어왔다. 그쪽을 바라보고 있던 마을 사람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저, 저‥‥."
젊은이 하나가 가스라기의 등 뒤쪽을 가리키면서 벌벌 떨었다.
모두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주춤주춤 물러나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비명을 지르며 들고 왔던 몽둥이도 내팽개친 채 마을
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촌장도 젊은이들 못지않게 빠른 걸음
으로 도망쳤다.
안간힘을 다해 소리를 버럭버럭 지른 가스라기는 한편 어리둥절
하고 한편 뿌듯했다. 제가 내지른 소리에 마을 사람들이 겁을 먹고
달아난 것이 기쁘긴 했지만, 정말로 짐승이 된 것 같아서 기분이
야릇했다. 그때, 등 뒤에서 기묘한 소리가 들렸다.
수릅, 수르릅. 길고 끈끈한 혓바닥을 날름대는 듯한 소리였다.
피비린내 나는 서늘한 바람도 점점 짙어졌다. 가스라기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마을 사람들을 달아나게 만든 그것을 가스라기
는 그제야 똑바로 보게 되었다.
키는 가스라기의 두 배만 했다. 머리는 거대한 들개처럼 생겼고,
몸은 벌거벗은 사람이다. 눈은 꼭 커다란 두 개의 등잔 같은데
거기 깨알만 한 눈동자 하나가 데굴데굴 굴러다닌다. 귀밑까지
찢어진 입에서 나온 긴 혓바닥이 물에 젖은 채찍처럼 꿈틀거린다.
몸은 비쩍 마르고 키는 장대처럼 큰데 두 손 두 발 모두 땅에
대고 네 발로 기는 자세다.
가스라기는 지금껏 저런 짐승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가스라
기가 숲에서 솔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한 가지 교훈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한 적을 만나면 도망간다. 저놈이 뭘까,
왜 나타났을까 따위는 궁금해 하지 않는다. 생각은 도망을 치고
난 다음에 한다. 괜히 맞서 싸우려고 하면 다치거나 죽을 뿐이다.
괴이한 짐승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가스라기는 있는 힘껏 두
다리에 힘을 싣고 뛰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 괴상망측한
것이 쿵, 쿵, 껑충한 두 다리를 움직여 쫓아오기 시작했다. 수르릅,
수르릅, 혀 감기는 소리도 뒤따라왔다. 뛰는 동안에도 소름이 오싹
오싹 끼쳤다.
축축한 숲의 땅이 발밑으로 쏜살처럼 지나갔다. 거친 나뭇가지가
얼굴을 때렸다. 여기저기 쓸리고 긁혀도 가스라기는 이를 앙다
물고 그저 내뛰었다. 나무 사이를 가로질러 덤불을 뛰어넘고 순식
간에 샘에 도착했다. 그런데 샘이 텅 비어 있었다.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가버린 거야?'
가슴이 휑해져서 걸음을 우뚝 멈췄다. 뒤에 흉악한 짐승이 쫓아
오고 있다는 사실도 까맣게 잊었다.
"이리 와."
소리가 들렸다. 휙 고개를 돌려보니 샘 저편 나무 아래 그 남자
가 서 있었다. 한쪽 어깨가 거의 잘려 너덜거리는 옷을 찾아 입은
모양이다. 가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이, 그리고 살아난 것이 기뻐서
가스라기는 환호를 지르며 그를 향해 냅다 달려갔다.
"눈 떴구나!"
가스라기는 남자의 목에 두 팔을 감고 좋아라 얼굴을 비벼댔다.
"잘됐어! 잘됐어!"
그녀를 쫓아오는 괴상망측한 짐승을 보고도 놀라지 않던 남자가
이 거침없는 행동에 순간 당황해버린 모양이다. 돌에 새겨진 것처
럼 변화가 없던 눈이 커지고, 입은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 지 알 수 없다는 듯이 미미하게 떨렸다.
하지만 지금은 당혹감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가스라기를
쫓아온 괴이한 짐승의 눈이 남자를 향했다. 등잔 같은 눈알을 떼굴
떼굴 굴려 안과 밖을 뒤집자 시뻘건 혈관이 툭툭 튀어나온 눈알
뒤편이 보였다. 긴 혓바닥을 굴려 추레한 입술을 핥으며 입맛을
다셨다. 그다음 순간, 아가리를 쩍 벌리더니 길고 축축한 혓바닥을
휘릭 뻗었다.
남자는 한 팔로 가스라기의 허리를 단단히 잡았다. 물에 젖은
작은 몸뚱이가 찰싹 감겨왔다.
턱으로 가스라기의 머리를 눌러
고개를 돌리지 못하도록 고정시키는 것과 동시에, 남은 한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땅바닥에 떨어져 있던 삭정이 하나가 둥실 떠오
르더니 그 손에 잡혔다.
쇠가죽 채찍처럼 힘센 혀가 가스라기와 남자의 몸을 한꺼번에
휘감으려고 달려들었다. 남자는 삭정이를 뻗어 그 혀에 맞섰다.
어린애 팔뚝만 한 굵기의 혓바닥과 손가락보다 가는 삭정이가
마주쳤다. 꾸에엑, 비명을 지르며 짐승은 뒤로 튕겨 나갔다.
남자의 품안에 든 가스라기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궁금해서
뒤를 돌아보려고 꼼지락거렸다. 그러나 남자가 그녀의 머리를 꾹
누른 채로 말했다.
"가만히 있어.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닐 테니."
남자는 가스라기를 안은 채로 삭정이를 앞으로 겨누고 짐승을
향해 다가갔다. 짐승은 몹시 아팠던지 땅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앙상한 몸은 보기보다 유연해서 고통에 몸부림치며 뒹구는 모습이
마치 팔다리를 가진 뱀이 엉키는 것 같다. 남자가 짐승의 머리맡에
서서 삭정이를 내리며 나지막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삿된 것이나 생명은 생명, 부득불 살계를 여니 부디 편히 귀천
하기를."
그 순간, 나뒹굴던 짐승이 불균형한 팔다리를 세우며 벌떡 일어
났다. 그러고는 두 팔을 번쩍 들어올리더니 손톱을 세우고 위에서
와락 덮쳤다.
남자가 삭정이를 앞으로 내뻗었다. 힘만 주면 부러질 것 같은
가는 삭정이가 짐승의 배에 꽂혔다. 무른 두부에 쇠젓가락이 박히
듯이 삭정이가 통째로 다 들어갔다. 그러고 나서 남자는 미끄러지
듯이 짐승의 그림자를 벗어나 뒤로 물러섰다.
짐승의 눈자위에 핏발이 불거지더니, 실핏줄 몇 개가 터졌다.
삭정이가 꽂힌 배에서 피분수가 뿜어졌다. 뿜어진 핏방울은 남자
의 발치 앞까지 떨어졌다. 짐승이 천천히 앞으로 쓰러졌다.
쿵!
먼지가 일고, 근처의 숲에서 푸드덕 새가 날아올랐다. 남자의
입에서 나지막한 한숨 소리가 흘러나왔다. 갑자기 출현한 괴이한
짐승으로 인해 흔들린 숲의 고요는, 실로 한순간에 제자리를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