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109)

*가 스 라 기 (上)*

인언(引言)

세상 서쪽 끝에 음양의 기운이 닿지 않는 나라가 있어

계절의 변화도 낮밤도 없고

사람들은 입지도 먹지도 않은 채 늘 잠들어 있다가

만 년에 한 번 깨어나 숨을 쉬었다.

그들은 잘 때 언제나 꿈을 꾸었고

꿈을 실제고, 만 년에 한 번 보는 실제를

꿈으로 여겼는데

그 꿈속에는 세상 동쪽 끝의 나라가 보였다.

세상 동쪽 끝에 음양의 기운이 들끓는 나라가 있어

해와 달이 지지 않고 늘 하늘에 떠 있으며

사람들은 잠도 꿈도 모르는 채로

언제나 온몸을 피로 적시며 끝없이 싸워댔다.

만 년에 한 번, 피 묻은 칼을 내리고 쉬게 되는

그날까지.

一.  달의 서(序)

하지만 이것은 그런 이상한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다. 해와 달도

있고, 계절과 낮밤도 있으며, 풍요로운 아홉 주(州)와 거친 변황(邊荒)

의 여덟 땅, 백성을 다스리는 황제와 제후가 있는 나라의 이야기다.

없는 것이 없기에 사람들은 자기네 나라를 삼라(森羅)라고 불렀다.

그리고 삼라는 세상 동쪽 끝과 서쪽 끝 가운데 있어 음양이 모두

조화롭다고 믿었다.

귓도리골은 이 삼라의 동쪽, 환주(晥州)의 한구석에 있다. 일년에 

한 번 도성에서 관인이 내려와 세곡을 거둬갈 때를 빼면 이방인이 찾아

오는 일도 드문 한적한 마을이다.

오월 오일, 하늘과 땅 사이에 문이 열려 신경의 기운을 모시기에 가장

좋다는 수릿날에는 마을이 조금 떠들썩해졌다. 열 살에서 열다섯 살

사이의 계집애들이 새벽부터 창포물에 머리를 감고 몸단장을 한 뒤

해가 뜨면 신경나무 앞으로 모였다. 하늘 오르기를 하기 위해서다.

"올해는 누가 제일 먼저 올라가는 거야?"

"당연히 그르매 언니가 제일 먼저지."

찬물에도 위아래가 있다고, 도토리 같은 계집애들 사이에도 우두머리가 

있고 졸개가 있다. 이번 수릿날 우두머리는 그르매라는 소녀다.

그르매는 심호흡을 하고는 신령나무 굵은 가지에 매인 그네를 바라보았다.

그네 앞에는 높디높은 장대가 하나 서 있고, 장대 끝에는 방울이 매달려

있다. 하늘방울이라고 한다. 그네를 높이 뛰어 하늘방울을 차서 울리면

하늘에 오른 것이 된다. 수릿날 하늘방울을 가장 크게, 여러 번 울린

소녀는 소원하는 것을 모두 이룰 수 있다고 했다.

"그르매 언니, 올라가기 전에 먼저 소원을 빌어요."

그르매가 두 손을 모으고 남들이 들을세라 입속으로 우물우물 소원을

빌기 시작하자, 지켜보던 계집애 중 하나가 짓궂게 놀렸다.

"언니, 비나리는 남들이 다 듣게 입 밖으로 내야 영험이 있대요."

계집애들이 킥킥 웃어댔다. 어른들은 모르지만, 또래들은 그르매가

은밀히 비는 소원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르매는 짐짓

시치미를 뗐다.

"안 들렸니? 난 큰 소리로 한다고 했는데. 그럼 다시 해볼까?"

치맛자락에 손을 문질러 닦고 본격적으로 목소리를 높여 비나리를

읊기 시작하는데.

"천지신명이시여, 제가 이 그네를 타고 하늘 끝까지 오를 수 있게

해주사이다. 그리하여 저 구름 위를 거니는 선인을 뵐 수 있게 해

주사이다. 선인의 눈에 들어 선총을 받고 복락을 누리다가 다음 생에는

저 또한 선인으로 태어나게 해주사이다."

이것은 수릿날마다 무수한 소녀들이 입에 담은 비나리다. 선인은 불에

타지 않고 물에 젖지 않으며 바람과 구름을 밟고 다니고 벼락을 무기로

쓰는 불멸자다. 선인의 거처는 저 아득한 하늘 위에 있어 범인은 삼생이

지나도록 밟아보지 못하고, 윤회를 거듭하며 선업을 쌓은 자들만이 선골을 

지닌 몸으로 다시 태어나 선계에 입문한다고 한다.

귓도리골의 소녀들은 각별히 이 하늘 오르기를 중히 여겼는데, 까닭인즉

수백 년 전 귓도리골의 한 처녀가 그 꿈같은 일을 이루었다는 전설이 있기

때문이다. 그 처녀는 그네를 타던 중 마침 하늘을 가로질러 가던 선인의 

눈에 들었다고 한다. 선인은 복숭앗빛 뺨을 가진 처녀를 어여삐 여겨, 그네

가 높이 치솟았을 때 옥대를 풀어 처녀를 낚아챘다. 그네가 다시 땅으로 

내려왔을 때는 텅 비어 있었고, 처녀의 가족들은 딸을 잃은 줄 알고 밤새 

목 놓아 곡을 했다. 그러나 수십 년 후 백발이 성성해진 형제들 앞에 진주관

을 쓰고 비단 스란치마를 입은 처녀가 사라졌던 그날과 똑같은 어여쁜 모습

으로 찾아와 그동안 선계에서 꿈같은 나날을 보냈으며 이제 선총을 입고 선

골로 다시 태어나게 되어 작별인사를 하러 왔노라했다. 가족들이 모두 기뻐

하며 이레 밤낮 동안 잔치를 벌였는데, 잔치가 끝난 다음 날 새벽 처녀는 

온데간데없고 진주관과 스란치마만이 허물처럼 그 자리에 남아 있었다더라

하는 옛이야기를, 귓도리골의 소녀라면 누구나 어릴 적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들어본 적이 있었다.

시침 뚝 떼고 진지한 얼굴로 소원을 비는 시늉을 한 그르매 또한 그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어렸을 적에는 선인의 등에 업혀 하늘을 훨훨 나는 꿈을 꾸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 열다섯이 된 그르매는 그 전설을 진심으로 믿지 않았다. 

구름 위를 나는 선인에게 하찮은 인간 여자의 미모 따위가 무슨 가치가 있겠

는가. 아마도 그 전설은, 부모가 허락하지 않는 총각과 눈이 맞아 야반도주를

한 딸의 사연에 이리저리 살을 붙인 이야기일 거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하여

그르매는 입 밖으로 낸 것과는 전혀 다른 소원을 마음속으로 빌었다.

'올해에도 부디 그 젊은 관인께서 다시 마을에 오게 해주세요. 그분을 다시

한 번 만나보게 해주세요.'

관인이란 큰 도성에 살며 나라를 다스리는 일을 맡은 귀한 사람들을 일컫는다.

언감생심, 궁벽한 귓도리골의 한낱 처녀 아이가 올려다볼 나무가 아니니, 허황

하기로야 선인을 바라는 것에 못지않았다.

하지만 마을에서 제일 나이 많은 노인도 실제로는 본 적 없는

선인과 달리 관인은 최소한 일 년에 한 번은 얼굴을 볼 수 있지

않은가. 큰 말을 타고 있던 헌앙한 생김새가 아직도 눈에 선하고,

단정하고도 준엄한 목소리가 지금껏 귀에 삼삼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니 제발 그분과 인연 맺도록 허락해주소서, 하늘이여'

하고 진짜 소원을 맘속으로 읊은 뒤 그르매는 치맛자락을 휘감아

끄트머리를 허리춤에 꽂아 넣고 두터운 그넷줄을 두 손으로 암팡

지게 잡고서는 오늘을 위해 아껴둔 고운 가죽신 신은 발 하나를

그네 위에 올렸다. 그러나 다음 발을 마저 올리기 전에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신령나무 뒤쪽 수풀 속에서 거뭇하게 움직이는 그림

자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림자는 짐승처럼 빠르게 가시덤불 사

이를 기어왔다. 그르매의 입에서 비명이 토해졌다.

"가스라기!"

그르매의 비명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가스라기는 수풀 깊은 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저리 가!"

"쫓아버려!"

찢어지는 고함 소리가 뒤따라왔다. 어느 모진 년이 집어던진

돌멩이가 방금 전까지 숨어 있던 수풀에 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가스라기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기었다. 두 발로 서서 달릴

수도 있지만, 가시덤불의 키가 낮았다. 가스라기는 뛰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빨리 길 수 있었다. 덤불이 출렁이고, 가시가 얼굴과

몸을 할퀴어댔다.

계집애들의 소리가 아득하게 뒤로 멀어진 다음에야 달리던 것을

멈추고 납작 엎드렸다. 출렁이던 가시덤불도 고요해졌다.

잠시 후 가스라기는 덤불조차 흔들리지 않을 만큼 조심조심

기어서 아까와는 다른 방향으로 신령나무를 향해 다가갔다. 계집

애들이 짹짹거리는 소리가 아슴푸레 들려왔다.

"후아, 갔다. 갔어. 무서워 죽는 줄 알았네."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

계집애들이 안심하는 소리를 듣고 가스라기도 안심했다. 진작

이랬어야 했는데, 아까는 욕심이 지나쳐서 너무 가까이 갔다가

그만 들켜버린 거다.

"혹시 돌에 맞은 거 아닐까?"

한 계집애가 걱정스러운 듯이 중얼거렸다.

"아냐, 안 맞게 던졌어. 맞는 소리도 안 들렸잖아."

돌 던진 계집애가 화들짝 놀라며 부정했다. 그러자 다른 계집애

들도 휴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가스라기가 가까이 오는 것은

싫지만, 그렇다고 정말 다치게 할 생각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가스

라기에게 해코지를 하면 더 큰 해코지를 당하게 될 테니까.

"저기, 근데."

한 계집애가 문득 입을 열었다. 무리 중에서도 나이 어린 막내둥

이었다.

"언니들, 가스라기는 왜 재수가 없는 거야?"

막내둥이의 자발없는 질문에, 계집애들은 모두 뜨악했다. 그도

그럴밖에. 하늘이 왜 파란색이냐고 물으면 일단은 말문이 막히는

것이다. 계집애들은 아주 어릴 적부터 동구 밖 귓도리숲에 사는

가스라기는 말을 걸어서도, 눈을 마주쳐서도 안 되는 천고의 죄인

이라고 어른들에게 배웠다. 가스라기에게 행여 친절을 베푸는 자

는 천고의 죄가 옮겨 묻어 신벌을 받게 된다고 들었다.

"그걸 말이라고 하니? 재수가 없으니까 없는 거지."

"아니, 그러니까 왜 재수가 없느냐고."

"없어서 없다니까!"

"하지만‥‥‥."

"하지만이 아니지! 연전에 향이 언니 혼례 때도, 가스라기가

숲에서 엿보았잖아. 그래서 어찌되었어? 신랑을 태우고 오던 나귀

의 발목이 부러졌잖아."

"그래, 그래. 가막쇠 할아버지도 떡이 목에 걸려서, 생신 날

제사상 받을 뻔하셨잖아."

"그뿐이야? 삼 년 전에는‥‥‥."

"하지만 언니, 그렇게 재수 없는 가스라기면 왜 숲에 살게 내버

려둬? 어른들이 몽둥이 들고 들어가서 내쫓으면 되잖아."

"무서워서 어떻게 그런다니?"

"무섭긴 뭐가 무서워? 방금도 우리가 돌 던지니까 그냥 도망갔

잖아. 가만 보니까 우리랑 별로 다르게 생기지도 않았던데 뭘."

"어머, 어째! 너 가스라기 얼굴을 똑바로 쳐다본 거야? 무슨

경을 치려고!"

막내둥이를 둘러싸고 계집애들이 호들갑 떠는 것을 가만히 지켜

보던 그르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제 그만, 됐어!"

깜짝 놀란 계집애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르매는 몹시 기분이 

나빴다. 하필 자신이 하늘 오르기를 하기 직전에 가스라기가 나타

났다는 사실이 몹시도 마음에 걸렸다.

부정한 가스라기가 제 소원을 모두 망쳐버릴 것만 같았다. 작년

에 마을에 왔던 젊은 관인에게 무슨 변이 생긴다거나, 다시 만나도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거나, 혹은 일 년 사이에 혼처를

정해 이미 내자가 생겨버렸다거나‥‥‥, 그르매는 세게 고개를 저

었다.

'안 돼, 안 돼. 이런 생각은 해서도 안 돼. 지금은 그냥 그네에

올라서 소원을 비는 거야. 불길한 생각 같은거 잊어버려. 가스라기

따위도 잊어버려.'

주눅이 든 계집애들을 향해 그르매는 부러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렇게 수다만 떨다가는 날 저물겠다. 자꾸 그러면 나 혼자

노을 질 때까지 그네 타버린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아직 솜털이 보송보송한 계집애들이라 조금 전까지 일은 금세

잊고 앵앵거렸다. 그르매는 킥킥 웃고서는 다시 옷자락을 매만지

고 그네를 향해 다가갔다.

"좋은 것만 보고, 좋은 것만 생각하고, 좋은 것만 꿈꾸면서 올라

야 해. 너희들도 그렇게 해."

어머니에게 들은 말을 어린 동생들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

되뇌며 그르매는 그네에 올랐다. 첫 번째 발구름을 시작할 때 이미 

그녀의 머릿속에 가스라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스라기는 언제나 그곳에 있었다. 귓도리숲에서 태어

났고, 버려졌다. 지금도 가스라기는 도둑고양이처럼 숨어서 훔쳐

보고 있었다.

그네에 몸을 싣고 신령나무 위로 날아올라가는 그르매가 가스라

기의 눈동자에 담겼다. 몇 번 힘껏 그르매의 등을 밀어주다가 멀찍

이 물러서서 부러움 섞인 탄성을 뱉어내는 다른 계집애들도 가스

라기의 까만 눈동자에 담겼다. 가스라기의 눈동자는 점점 몽롱해

졌다.

그르매는 이제 신령나무 가지가 휘청휘청할 만큼 높이 바람을

타고 올라갔다. 가스라기의 눈에도 그르매가 보고 있는 풍경이

보이는 듯했다.

숨 막히게 가까워졌다가 멀어지는 하늘, 그리고 발밑을 스쳐

가는 땅. 귓가를 가르는 바람과 가슴 가득 밀려드는 세찬 공기.

계집애들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다가, 이윽고 더 이

상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순간만이 남게

될 것이다. 보이는 것은 오직 하늘뿐. 들리는 것도 오직 하늘을

가르는 바람 소리뿐. 하늘 오르기라는 건 분명 그런 것일 거다.

만약 가스라기가 가스라기가 아니었다면, 저 계집애들과 마찬

가지로 귓도리골의 평범한 딸로 태어났더라면 그녀도 저들 속의

한 사람이 되어 그네를 탔을 것이다. 가스라기가 가스라기가 아니

었다면.

하늘 높이 뜬 해를 향해 솟구치는 그르매를 좇던 가스라기의

눈시울이 아릿하게 젖어들 무렵, 문득 계집애들 하이에서 놀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 저길 봐!"

가스라기는 또 들킨 줄 알고 재빨리 납작 엎드렸다. 하지만

계집애들은 돌을 집어 들지도 않았고, 가스라기가 숨은 쪽을 보고

있지도 않았다. 가스라기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다시 들고 계집애

들이 보는 곳을 따라 시선을 오렸다.

계집애들은 하늘을 보고 있었다. 실처럼 가는 흰 안개 같기도

하고 구름 같기도 한 무엇이 청청한 하늘을 반으로 가르며 지나가

고 있었다.

"서‥‥‥ 선흔이야!"

"선인이 지나가고 있어!"

"그르매 언니! 언니, 잘됐어!"

세찬 바람에 숨이 막혀 대꾸는 못했지만, 그르매 역시 하늘을

가로지르는 선흔을 보고 있었다. 선흔(仙痕)이란 선인이 하늘을

지나가는 흔적이다. 선흔을 목격하는 것은 상서로운 일이라 꿈에

서 선흔을 본 것만으로도 큰 인물이 될 아들을 낳았네, 밭을 매다가

금이 든 항아리를 찾았네 하는 이야기들이 있다. 하물며 하늘 오르

기를 할 때 선흔이 나타난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길조다.

그르매의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이 떠올랐다. 됐다, 된 거다. 그네

에 오르기 전 있었던 불길한 일 같은 건 확실히 지워진 셈이다.

그녀의 은밀한 소원은 분명히 이루어질 것이다.

하늘과 땅 중간에 젊은 관인의 헌앙한 모습이 떠오르는 듯했다.

당장이라도 손을 뻗어 그를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 순간 그르매가 탄 그네가 높이 솟구쳐 하늘방울을 올렸다.

하늘에는 선흔이 지나가고,

하늘과 땅 중간에는 한 소녀가 그네를 타고 있을 때,

가스라기는 낮은 가운데서도 가장 낮은 곳에 몸을 엎드리고

그 모든 것을 하염없이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날은, 하늘과 땅 사이가 열리는 수릿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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