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뒤늦은 고백
세연이 퇴원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배에서 여태껏 느끼지 못한 거센 태동이 느껴졌다.
“왜 이러지.”
장난치지 마, 아가야.
세연은 배 속의 아이에게 그렇게 속삭이며 배를 어루만졌다.
퇴원 수속을 밟는 사이, 어쩐지 병원 내부가 조금은 부산스럽다고 느껴졌다. 아마도 저와는 별 상관없는 일이겠지만 공연히 마음이 소란해졌다.
“저, 선생님.”
그녀는 지나가던 간호사에게 말을 건넸다.
“혹시 무슨…….”
세연은 이내 다시 입을 다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제가 알아서 무엇 하겠는가. 게다가 본래 병원이란 크고 작은 사건 사고가 생겨서 오는 곳이니까 부산스러운 것도 당연한 일일 터였다.
하지만 오늘 같은 느낌이 든 적은 없었는데.
분명히 자유를 되찾아서 이제 날아가기만 하면 되는데, 어쩐지 발밑이 푹 꺼진 기분이었다. 그냥 하염없이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를 손에 잡아채야만 할 것 같기도 했다.
……아마 호르몬 탓이겠지.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의사가 세연을 보러 왔다.
그녀는 가장 꼭대기 층에서 아주 소수의 제한된 환자들만 진료하고 있어, 말 그대로 주치의로서 환자의 상태를 세세하고 면밀하게 파악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리하여 오늘도 의사는 세연에게 잔소리나 다름없는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식사는 절대 거르지 말고 규칙적으로 하되 먹기 싫은데 억지로 먹다가 체하는 일은 없게 하라는 것부터 끝없는 잔소리가 이어졌다.
세연은 성실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뭐 더 물어보고 싶은 거 있어요?”
“저, 선생님.”
물어보고 싶은 것.
한 가지 있었다. 별 의미는 없는 질문이겠지만.
“혹시, 그 사람은 그 뒤로 안 왔나요?”
우태경이 자신을 놓아주기로 했다는 걸 변호사를 통해 몇 번이나 듣고 서류까지 받았고, 심지어 인사도 나누었지만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정말 이렇게 간단히 자유를 되찾은 걸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기쁜데, 이게 단지 기쁨인 건지 알 수 없었다. 조금은 어안이 벙벙한 기분 같기도 했다. 아직 실제로 체감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리라.
하지만, 또 한 가지.
무언가 딱 꼬집어 말하기 어려운 형체 모를 불안감이 가슴 한쪽에서 점점 차올랐다. 그 불안이 어디서 기인하여 왜 이렇게 점점 부피를 키우는지 알 수가 없었다.
“…….”
그 사람.
그게 누굴 뜻하는지 대번에 알아챈 의사는 입을 다물었다. 유리알 너머 그녀의 눈이 조금 암담한 빛을 담았다. 기껏 좋아진 산모의 상태를 고려하였을 때 전하지 않는 게 좋을 말이었다.
“글쎄요. 꼭 와야 하나요?”
보기 싫은 거 아니었어요?
의사는 그렇게 덧붙이며 애써 장난스럽게 웃어 보였다.
세연은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닌데…….”
“나는 산모분 주치의예요.”
의사는 세연의 뒷말을 잘라 내며 말했다.
“한 가지 더 권고하자면, 관심 갖지 않는 게 좋을 거예요. 그러니까 내 말은, 서로가 서로에게. 그렇지 않아요?”
그런 말을 하는 걸로 보아서, 의사는 이미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세연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어차피 더는 만나서 괴롭힐 일도 없잖아요.”
“…….”
당연한 말이었다. 그걸 바라 왔고.
그런데, 왜 자꾸 마음이 소란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불안정하게 뛰는 가슴을 누르며 세연이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네.”
* * *
병원 건물 1층.
응급실 앞을 지날 무렵.
“아!”
갑작스럽게 배에 극심한 통증을 느낀 세연은 그만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온몸에서 힘이 풀리고 눈앞이 빙빙 돌았다.
‘아, 괜히 혼자…….’
세연은 후회감에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세연아, 내일 엄마가 정말 안 가도 돼?’
퇴원을 앞두고 세연을 데리러 오겠다던 엄마였다. 어려서부터 손이 필요할 때마다 한 번도 도움을 준 적이 없었는데.
그런 제안이 조금 기쁘기도 하고 어쩐지 낯설기도 했지만, 세연은 고개를 저었다.
‘응. 나 혼자 해도 되니까 올 필요 없어. 신경 쓰지 마. 괜찮아.’
엄마에게 굳이 오가며 고생하지 말라고 한사코 거절하고, 혼자 퇴원 수속을 밟은 뒤 병원을 나서던 찰나였다.
아침까지만 해도 별 이상이 없었는데, 대체 왜…….
세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아이가 발로 배를 차는 건지 강한 태동과 함께 배에 통증이 느껴졌다. 극심한 고통을 이기며 어떻게든 일어나 벽에 몸을 기대었지만, 이마에는 순식간에 진땀이 배어났다.
그때였다.
저 멀리서부터 앰뷸런스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병원에서 빠져나가기 전에 이런 통증을 느껴서 다행인가 싶기도 한데, 어쩐지 다행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유 모를 불길한 예감이 머리를 스치는 가운데, 세연은 애써 몸을 일으켰다. 도와 달라고 손이라도 흔들어야 할 것 같았다.
“비켜 주세요!”
그런 세연을 제대로 못 본 건지, 구급대원들이 다급하게 들것에 실린 남자를 응급실 안으로 밀어 넣었다. 남자의 손에는 피로 물든 손목시계가 쥐어져 있었다.
“…….”
구급차에 실려 온 남자가 세연을 빠르게 스쳐 지났다. 얼굴이 가려져 있었지만, 세연은 그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온통 붉은 피로 물든 남자의 손에 쥐어진 것.
지난 5년간 한 번도 우태경의 손목에서 사라진 적 없었던, 그에게 선물한 시계였다.
그 사실이 한때는 어리석은 희망을 품게 하기도, 바보 같은 기대를 낳게 하기도 했다. 바뀌는 건, 변하는 건 없다는 걸 알면서도 한 번쯤은 묻고 싶기도 했다.
당신도, 혹시 당신도 나를.
나를 조금쯤은, 아주 조금쯤은 사랑하느냐고.
“……우태경…… 씨?”
말끝이 떨렸다.
모포까지 온통 피로 물든 눈앞의 남자를 믿을 수가 없었다.
널 놔주겠다고. 잘 지내라며, 건강하라며 인사하던 그였다.
이제 더 이상은 널 붙잡아 둘 이유가 없는 것 같다던, 그런 그였다.
그랬는데, 당신이 왜…….
“우태경 씨!”
어느새 몸을 일으킨 세연은 멀어지는 그를 따라 달렸다.
* * *
병실 밖에 우두커니 앉아 있던 세연은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잠든 우태경을 보았다. 주치의는 이곳이 그가 교통사고를 당한 뒤로 줄곧 입원해 있던 병실이라고 했다.
‘모르셨습니까?’
몰랐다.
교통사고를 당했다던 그가 사실은 자해와 자살 시도로 정신과 폐쇄 병동에 입원해 있을 줄은. 정말이지 꿈에도 몰랐다. 교통사고조차 거짓말이라고 여겼으니까.
‘다행히 운이 좋은 편이기는 했지만, 앞으로도 행운이 따를 거라고 장담할 순 없습니다.’
이번에 죽지 않은 건 순전히 운이라며 고개를 젓던 주치의는 세연의 배를 보고 말을 아꼈다. 본래 면회도 금지된 곳이지만, 세연과의 관계를 아는 그는 곁을 지키도록 허락해 주었다.
애초에 이 여자 때문에 정신이 나가 버린 그였다. 차라리 이 여자를 곁에 둔다면, 다시 자살 소동을 벌어진 않겠다는 판단하에 내린 결정이었다.
‘들어가 보세요.’
들어갈 수 없었다.
세연은 병실 밖에서 몸을 덜덜 떨면서 우태경을 지켜보았다. 시체처럼 수척하고 창백해서, 이대로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모습이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멀쩡해 보이던 사람이, 그새 이렇게 될 수가 있는 걸까. 마지막으로 보던 날에도 조금 수척해 보이긴 했지만, 당신이 대체 왜, 이렇게까지…….
차라리 교통사고로 죽었으면 좋았을 거라고 악담을 퍼부었지만, 사실은 남자가 정말 죽을까 봐 두려웠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을 완전히 놓아준다 해도 세상 어딘가에서 지켜보고 있을 것만 같던 남자였다. 그런 남자가, 정말 이대로 죽어 버릴 수도 있는 건가.
생각만으로도 온몸이 덜덜 떨릴 정도로 두려웠다.
어쩌면 내가 잠들어 있을 때, 당신도 그랬을까.
모르겠다. 하지만…….
나를 보내 준다는 게 당신에겐 대체 어떤 의미였을까.
세연은 눈을 감았다.
‘이제 더는 널 붙잡아 둘 이유가 없는 것 같아.’
어쨌든 네가 가진 건 내 아이니까, 최소한의 배려는 하겠다던 남자였다.
그 말을 믿었다.
저도 모르게 습관처럼 비참한 심정이 되어 버려서, 보내 준다는 말에도 성큼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그토록 바란 말이었는데도.
역시 고작 그뿐이었다고, 자신은 소유물에 불과했으리라고. 손에 쥐고 있으면 별다른 의미는 없지만, 잃는다고 생각하면 짜증스러운 그 정도였을 뿐이라고.
역시나 그랬다고.
그러나, 더는 그게 큰 의미가 없었다.
무엇을 기대하고 무엇을 바랄 수 있을까. 처음부터 텅 비어 있는 곳에서 사랑을 찾던 자신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지난날의 어리석음마저 과거로 남기고 정리하여 떠나려 했다.
그랬는데.
대체 왜.
지난 몇 년간 수없이 반복했던 질문이었다.
나를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대체 왜.
당신은 왜 오래전부터 나를 지켜보고, 내가 당신을 사랑하도록 만들었을까.
대체, 왜.
“…….”
아주 오랫동안, 아무리 같은 질문을 반복해도 그 답을 찾을 수 없었다.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남자를 본 순간 처음으로 다른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건 가정부터 잘못된 게 아니었을까.
당신은 나를, 사랑했던 게 아닐까.
하지만.
하지만 이제 와서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다고.
모든 건, 너무 늦었는데.
세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손바닥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아…….”
입술 사이로 가느다란 울음이 비집고 새어 나왔다.
또다시 도돌이표를 그리려는 지금의 상황이 너무도 끔찍해서 현실감이라곤 없었다. 이토록 지난한 과정이 대체 뭘 위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
아프도록 깨문 입술 위로 의미 모를 눈물만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 * *
우태경은 꼬박 이틀이 지나서야 눈을 떴다.
“…….”
처음 눈을 뜬 순간, 일그러진 얼굴 위에 어린 건 오직 좌절과 절망뿐이었다. 낯익은 병원 천장과 형광등을 보며 그는 죽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극도의 절망감에 빠졌다.
뭐가 잘못된 거지.
이제는 살 이유가 없는데.
이 삶이 내게는 지옥인데.
“…….”
그때였다.
내가 또다시 환영을 보나.
“…….”
몇 번이나 눈을 깜빡여 보았지만, 여전히 눈앞에는 말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정세연이 있었다. 이번에도 약을 먹으면, 널 못 보게 될까.
“……세연아.”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태경은 입을 조그맣게 달싹여 보았다.
못 들었을까. 환영이니까.
환영에 불과한데도 그녀는 웃지 않았다. 환상 속에서는 항상 웃어 주던 그녀였는데, 이제는 제 망상으로도 그녀를 웃게 할 수 없었다.
이젠 약을 먹어도 너를 보니까, 그럼 조금 더 살아 있어도 괜찮은 걸까.
여자의 부른 배를 보며 태경은 잠시 우스운 상상을 했다.
“…….”
내 아이를 낳아 기르는 너의 모습도 이렇게 환영으로나마 볼 수 있을까 하고.
‘그 사람이 제 아이 만나는 거, 원치 않아요.’
그 사람.
제 아이.
정세연이 변호사에게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는 걸 전해 듣고, 멀리서나마 볼 수 있으리란 희망도 접은 지 오래였다. 그러니, 살아 있을 이유 같은 건 하나도 없는데.
그런데.
“…….”
아무리 눈을 감았다 떠도 여전히 정세연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꿈인가.
꿈이겠지. 네가 우는 걸 보니 역시 꿈인 모양이다.
그런데 왜 오늘은 떠나질 않을까.
꿈에서 너는 언제나 등을 돌려 내게서 떠나갔는데.
“…….”
떠나가던 뒷모습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아.”
태경은 그제야 붉은 피가 엉겨 붙은 시계가 여전히 손에 쥐어져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정세연이 준 시계, 그리고 손바닥 안쪽에 감춘 아주 조그만 선물도.
그 감촉을 느낀 그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펜 하나 허용하지 않는 의사가 어쩐 일이지. 내가 시계로 머리를 내리치거나 이 조그만 걸 삼킬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태경은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려 등신처럼 붕대 위로 손목시계를 찼다.
이따 의사가 보면 분명히 한 소리 들을 게 뻔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죽지 않았다면 제 몸에서 떼어 내서는 안 되는 것이니까.
정세연이 남기고 간 유일한 것들.
너의 흔적.
태경은 손안에 든 조그마한 것을 꼭 말아 쥐었다.
그때였다.
정세연이 한 발짝 제 앞으로 걸어왔다. 제게서 등을 돌려 떠나가는 게 아니라, 도리어 가까이 오고 있었다.
꿈이라면 이럴 수 있나.
아무래도 환영인가.
그렇게 생각하던 차였다.
“우태경 씨.”
눈앞의 여자가 제게 말을 걸어온 것은.
* * *
“세연……아?”
태경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눈만 몇 번 깜빡였다.
“정말 너야?”
잠시 입을 꾹 다문 여자가 자신을 노려보았다. 그녀는 곧 손목에 찬 시계를 가리키며 말했다.
“풀어 봐요.”
“…….”
“이거 풀어 보라고요.”
“싫어.”
“왜요.”
“네가 준 거잖아.”
“그래서요.”
분노를 담은 세연의 말끝이 떨렸다. 저도 모르게 꽉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게 당신한테 무슨 의미가 있는데요.”
“…….”
“내가 준 선물 중에 정말 마음에 드는 게 하나라도 있었어요?”
어차피 다 거짓말이잖아, 당신은.
“하나도……. 단 하나도 우태경 씨한테 어울리지 않았는데.”
그가 가진 것들에 비해 한없이 초라한 것들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의 손목을 차지하고 있는 시계를 볼 때마다, 한편으론 설레었고 한편으론 괴로웠다. 언제나 그런 나날들을 보냈다.
“그냥, 날 기대하게 만들려고. 날 묶어 둘 뿐인, 그런 거였잖아요. 바보 같은 기대 때문에 내가 당신을 떠나지 못하게.”
그의 손목 위에 놓인 시계는 세연의 목을 옥죄는 목줄이나 다름없었다.
오늘은 그가 자신을 사랑할 것 같았다가, 내일은 그가 자신을 사랑할 리가 없을 것 같았다. 하루에도 수십 번씩 희망을 품었다 또다시 절망하고, 혼자 상처받기를 반복했다.
“아니야, 난…….”
우태경은 금방이라도 깨질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세연과 눈을 마주친 순간, 그의 얼굴이 한층 더 일그러졌다.
“…….”
세연은 도저히 그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하고 고개를 휙 돌리며 애꿎은 입술만 깨물었다.
깨달은 것이다. 저도 모르게 관성처럼 어리석은 기대를 하고 말았다는 것을.
그의 곁에 있는 한, 자신도 정신을 차릴 수 없을 것이다.
아마 우리는 영원히 이런 짓을 반복하겠지. 무의미하고, 아무런 소용도 없이. 죄 없는 누군가만 그 사이에 끼어 희생될 뿐인 애증의 관계.
세연은 배를 감싸 안았다.
비단 그와 태경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부모님이 그랬던 것처럼. 한때 서로 사랑했으나 이제는 애정의 불꽃이 사그라든 수많은 남녀가 그러하듯. 그저 어리석은 한낱 미련일 뿐.
“다시 줘요.”
“…….”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말고, 나한테 다시…….”
태경의 팔을 걷어붙이며 손가락으로 가리키던 세연의 동공이 흔들렸다.
팔에 자리한 무수히 많은 상처와 흉터들. 자해와 자살 시도의 흔적.
의사에게 이미 들었지만, 두 눈으로 보는 건 완전히 달랐다.
“이게 다…… 뭐예요?”
세연의 음성이 떨렸다.
황급히 팔을 숨기려던 태경은 곧 체념한 듯 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게 나야.”
그가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인지 얘기했잖아. 네가 생각하는, 그런 완벽한 인간과는 거리가 멀다고.”
“아무리 그래도…… 대체, 왜 이런…….”
세연은 말문이 막혀서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인데, 오히려 태경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렸다.
내 상처를 이렇게 보여 주면, 너는 내 곁에 있을까.
제발 가지 말라고 매달리면 돼? 아니면, 불쌍한 척이라도 할까?
이런 상처 같은 거, 아무것도 아닌데.
네가 없는 동안 나는 더 무너졌는데.
내가 이미 너로 인해 얼마나 망가졌는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인지 더 보여 줄까?
그럼 돼?
그러면 넌 내 곁에 있어 줄 거야?
그렇게 묻고 싶었다. 미친 사람처럼 여자에게 매달리고 싶었다. 아니, 이미 미쳤으니까. 그걸 핑계로 매달려서 물고 늘어지고 싶었다.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말아요.”
“그게 네가 바라는 거야? 그럼 그렇게 할게. 그럼…….”
그의 말끝에 미련이 감도는 걸 느낀 세연이 곧장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내가 바라는 건, 우태경 씨가 날 놔주는 거예요. 이건 서로에게 좋은 일이 아니잖아요.”
태경의 얼굴이 곧장 일그러졌다. 그는 저도 모르게 세연을 붙잡고 매달렸다.
“하지만, 난 네가 없으면…….”
“…….”
“네가 떠나면 더 엉망이 될 거야. 나는 죽을지도 몰라. 정말이야.”
“그런 말 하지 말아요. 협박 같은 거 이제 나한테 안 통해요.”
“…….”
“난 우태경 씨 떠날 거예요.”
세연의 얼굴에는 한 치도 흔들림이 없었다. 한때 사랑했던 사람을 보는 눈빛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었다. 이미 그들은 서로 갈라진 길을 가기로 했고, 그건 제 입으로 약속한 바였다.
“……그래. 그게 맞는 거니까.”
괴롭지만 체념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태경은 천천히 시계를 풀어서 세연에게 건넸다.
“…….”
세연은 잠시 입술을 깨물며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시계를 어디 넣지도 않고, 그저 손에 들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세연아.”
제 흔적이라곤 하나도 남기지 않고 그대로 뒤돌아 떠날 것처럼 보이는 여자를, 태경이 불러 세웠다.
“마지막으로 줄 게 있어.”
“……뭔데요.”
“선물.”
선물이라는 말에 언젠가 몸값이라며 주었던, 자신을 오히려 더 초라하게 만들던 선물들이 떠올랐다. 세연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손, 내밀어 봐.”
그녀는 못 미더운 얼굴로 손바닥을 펴서 내밀었다.
땀으로 흠뻑 젖어 있던 태경의 손안에서 무언가가 톡 떨어졌다. 아주 조그마한 것이 세연의 손바닥 위에 담겼다.
“……이게 뭐예요?”
세연은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반사적으로 질문이 튀어 나온 순간, 이미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이거…….”
태경이 형편없이 떨리는 손으로 쥐고 있던 것.
“…….”
세연은 그 형체를 확인하기 위해 손을 펴 보았다.
돌고래.
조악하게 만들어진 조그마한 돌고래였다. 돈 받고 팔 만한 것처럼 생기지 않은 푸른 돌고래. 그 돌고래의 등 위에 붉은 핏자국이 어려 있었다.
비록 얼룩이 생기긴 했지만, 대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이건 한때 젤리 봉투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봉투를 뜯어서 돌고래가 나오는지 확인하는 건, 그때 세연의 작은 즐거움이기도 했다. 비록 제가 뜯은 젤리 봉투에서는 한 번도 나오지 않았지만.
그러니, 이건…….
세연의 머릿속에 한 남자가 떠올랐다.
언젠가, 편의점에 찾아오곤 했던 의문의 손님. 마스크로 가려진 얼굴에 커다란 체격. 도움이 필요한 순간마다 오는 그가, 가끔은 보디가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거 드릴게요.’
남자가 저 대신 편의점 앞에서 담배 피우던 남자를 쫓아 주던 날. 그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왔던 돌고래였다. 이후로는 두 번 다시는 나오지 않았던.
“…….”
그러나, 세연은 여전히 믿기 어렵다는 표정으로 말없이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손끝이 파르르 떨려서 눈을 감고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뾰족한 꼬리가 손바닥 안쪽을 찔렀다.
“이걸 왜, 어떻게 당신이…….”
여태까지 갖고 있어요.
그날의 남자에게서 나던 향기가 코끝에 맴돌았지만, 세연은 또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애써 외면하려는 눈가에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맺혀 있었다.
“네가 준 거잖아.”
“…….”
“이제 돌려줄게.”
“…….”
“내가 가질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욕심을 부렸어.”
“…….”
“감히 내가 너를…… 욕심냈어.”
남자의 메마른 입가에 버석한 미소가 어렸다.
“그러면 안 된다는 거 알면서도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랬어.”
“그게 무슨…….”
세연은 왈칵 쏟아지려는 눈물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왜 그랬는데요?”
“…….”
“대체, 대체 당신이 왜…….”
대답을 알 것만 같은데, 그 대답을 바라는 자신이 싫었다. 그런 자신을 향해 울지 마, 하고 나지막이 속삭이는 남자의 손을 뿌리치지 못하는 것도.
“…….”
눈물을 들키기 싫어 고개를 돌리던 찰나.
“세연아.”
“…….”
“마지막으로.”
“…….”
“정말 마지막으로, 한 시간만.”
“…….”
“딱 한 시간만 들어 줬으면 하는 얘기가 있어.”
“…….”
“그건, 가능해?”
“…….”
“만약 네가 그것도 싫다면…….”
남자의 애처로운 음성 끝이 파르르 떨렸다. 자신을 붙잡은 손길 역시 마찬가지로 형편없이 덜덜 떨렸다. 세연은 손끝으로 눈물을 닦아 내며 다시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래요. 얘기해 봐요.”
* * *
태경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세연을 처음 만난 날부터, 대학 시절 내내 바라봐 온 것, 입사 후에 지켜본 것까지. 그녀의 뒤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그때의 자신은 어떤 심정이었는지도.
의외로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 놓는 태경의 표정은 담담했다. 아주 오래도록 해묵은 비밀을 털어 내는 사람처럼 조금은 평온해 보이기도 했다.
“…….”
그가 얘기를 모두 마쳤을 때, 세연은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다. 지금 느끼는 감정을 무어라 표현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저 혼란스러웠다.
“이제 왜 내가 네 개새끼인지 알겠지.”
태경이 피식 웃으며 스스로를 자조하듯 고개를 가로저었다.
“처음부터 그랬어. 네 뒤만 졸졸 쫓아다니는 개새끼가 바로 나였어.”
“왜…… 말하지 않았어요.”
세연은 조금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자신이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고 있었으면서, 대체 왜 그랬을까.
왜 단 한 번도, 지금 이 순간조차도 제 마음을 말하진 않는 걸까.
“내가 얼마나 당신을…….”
이 순간조차 사랑했다는 말을 저 혼자 입에 담고 싶지 않아서, 세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내 마음을 다 알고 있었잖아요. 그런데 왜…….”
“나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니까.”
‘팀장님은 완벽하시잖아요.’
언젠가 고백하던 날, 세연의 들뜬 목소리가 떠올랐다.
태경은 여전히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좌우로 내저었다.
“네가 날 알면, 내 밑바닥을 보면.”
그럼…….
마른 입술을 깨물던 남자가 어렵게 입을 떼었다.
“날…… 떠날 거라고 생각했어.”
입 밖으로 꺼내는 것만으로도 괴롭다는 듯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리면서.
매일같이 꾸던 악몽.
네가 날 떠나가는 꿈.
그리하여 곁에 있으면서도 한 번도 제 마음을 온전히 전하지 못했다.
결국 이렇게 될 것을.
이럴 거라면, 내 곁에 있을 때만이라도.
단 한 번만이라도…….
“……사랑해.”
태경은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뒤늦은 고백을 전했다.
늦어도 너무 늦어서, 더 이상 닿지 않을 마음을.
“내가 널 너무 사랑해서.”
메마른 입술 위로 하염없이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 입술을 잠시 깨물던 남자가, 울음을 토해 내듯이 말했다.
“네가, 사라질 것 같았어.”
가장 끔찍한 상상이 현실이 되어서야, 네게 이런 말을 하는 바보 같은 나를 용서해 줘.
“너를 잡아 둘 방법을 몰라서 어리석은 짓만 했지만, 그건 진심이야.”
태경은 고해 성사를 하듯이 고개를 숙인 채 읊조렸다.
“그래서, 널 보내 주려고 했어.”
“…….”
“네가 떠났을 때, 나는 너무 괴로웠지만, 더 이상 내 곁에 있다간 너는 죽고 말 테니까.”
눈물범벅이 된 남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가 세상에서 사라지면 나는…….”
가장 끔찍한 말을 내뱉었다는 듯이 다시금 얼굴을 일그러뜨리면서.
“살 수가 없겠지. 숨도 쉴 수 없을 거고, 살아갈 이유가 없을 거야.”
“…….”
“그러니까, 더는 널 물지 않게, 멀리 떠나보내려고 했어.”
“…….”
“나는 한번 물면 다신 놓지 않는 개새끼니까.”
하지만.
“세연아.”
태경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여자를 다급히 붙잡고, 수척한 뺨을 기댔다.
“미안하지만 난, 약속 못 지키겠어.”
그러고는 어린애처럼 보채듯이 애원했다.
“아니, 약속한 대로 보내 줄 테니까, 그냥 너를 볼 수만 있게 해 줘.”
“…….”
“가까이서 보지 않아도 돼.”
“…….”
“이미 너한테 나는, 끔찍한 사람이니까.”
“…….”
“그러니까, 굳이 말을 나누지 않아도 되고, 네 목소리를 들려주지 않아도 돼.”
‘태경 씨.’
자신을 부르던,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여자의 음성.
‘사랑해요.’
노래라도 부르는 듯 부드럽고 달콤한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던 나날들.
지나가 버린 그날들을 떠올린 태경은 비참함에 몸을 무너뜨리며 오열했다.
그러니, 평생 못 듣게 된다고 하여도, 제발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게.
“그냥…… 널 볼 수만 있게 해 줘.”
제발, 제발…….
태경은 여자의 손을 더듬으며 매달렸다. 어떻게든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아이 핑계로라도, 널 멀리서라도 볼 수 있게 해 줘.”
“…….”
“그것만 바랄게.”
다른 건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계속해서 매달렸지만, 세연은 한참이나 아무런 말이 없었다.
태경은 조바심 어린 얼굴을 들어 올려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애써 티 내지 않았을 뿐, 언제나 그랬다. 정세연이 기쁜지 슬픈지, 어떤 기분이고 어떤 생각을 하는지. 그걸 알아채는 일이 그의 일상이었다.
지금, 정세연은 아마도…….
“……우태경 씨.”
무슨 생각을 하는지 살피려는데, 정세연이 갑작스런 말을 던졌다.
“다시 말해 봐요.”
대체 뭘 다시 말하라는지 모르겠다. 지금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정세연의 심리라면 언제나 모르는 법이 없는 그였는데, 지금은 하나도 모르겠다.
그는 망가졌다.
사소한 말조차도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뭘?”
태경은 말을 처음 배우는 사람처럼 어물거리다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조금 전에, 나한테 했던 말이요.”
어느덧 세연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잔뜩 배어났다.
“당신이 예전엔 나한테 단 한 번도 한 적 없는, 그 말…… 말이에요.”
“…….”
잠시 멍하니 있던 태경은 뒤늦게 입을 열었다.
그래. 내가 너에게 단 한 번도 그 말을 한 적이 없구나.
널 바라보는 눈빛도, 네게 닿는 손길도, 그리고 네 이름을 부르는 것도.
그 모든 일들이 언제나 내겐 널 사랑한다는 말과 같았는데, 정작 네게 단 한 번도 소리 내어 그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어리석게도.
“내가.”
내가 감히, 널.
“널 사랑해, 세연아. 그러니까…….”
“아…….”
널 보게 해 달라고 애걸하려고 했는데.
세연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왜, 왜 울어, 세연아. 왜…….”
태경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처럼 당황한 얼굴로 세연에게 매달렸다. 그러나, 그녀는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그친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내가 듣고 싶었던 건 언제나 그 말이었어요.”
“…….”
“당신이 그렇게 말해 줬다면,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당신 곁에 남았을 거예요.”
자신을 강제로 묶어 두려던 지난날이 떠오른 듯 세연이 얼굴을 찌푸렸다. 미간을 살짝 좁혔을 뿐인데, 그걸 보자 순식간에 심장이 쿵 하고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그건…….”
내가 잘못했다고, 정말 죽을죄를 지었다고 손이라도 모아서 싹싹 빌어 보려던 순간. 정세연이 꽤 단호한 음성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물론, 결혼하는 남자 곁에 남을 순 없었겠지만.”
천하의 등신 새끼.
스스로를 저주하듯 속으로 욕을 퍼붓던 태경은 그 말에 눈을 번뜩였다.
너무 늦어 버린, 뒤늦은 고백이라도. 이제 와 아무 의미 없다 해도 혹시라도 널 붙잡을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세연, 세연아.”
태경은 다급하게 세연을 붙잡았다.
난 너만 곁에 있어 준다면 결혼 같은 건 하지 않을 거라고. 집안도, 가족도, 배경도, 사회적 지위도 중요하지 않고, 내가 가진 모든 걸 다 포기할 수 있다는 말을 더듬더듬 내어놓으면서.
“진심이에요?”
태경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필요 없어. 나는 너만 있으면 돼. 진심이야. 그러니까…….”
너무 마음이 급해서 심장이 졸아붙는 기분이었다. 뭐라도 말을 꺼내야 할 것 같은데, 지금이 유일한 기회 같은데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이제 내가 뭘 하면 돼?”
태경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등신처럼 세연에게 답을 구했다. 등신도 이런 상등신이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제게는 앞뒤 재고 따지고 가릴 여유가 없었다.
“내가 뭘 하면…… 네가 날, 다시…….”
진땀을 흘리며 숨을 다급히 몰아쉬자, 진정이라도 시켜 주려는 듯 태경의 어깨 위에 살며시 손을 얹은 세연이 미간을 구겼다.
어떻게 그 모든 일들을 없던 일로 하고, 다시 이전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미 깨져 버린 잔해를 그러모아 다시 이어 붙인다는 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앞의 남자를 한 번 더 믿어 보고 싶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한없이 어긋나 있어, 도저히 맞닿지 않던 조각들을 함께 맞춰 가면서.
세연은 곧 차분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사랑한다고 말해요.”
“…….”
“사랑하니까, 옆에 있어 달라고.”
“…….”
“난 그거면 충분해요.”
“…….”
태경은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감았다.
아주 오랫동안 꾸었던 악몽.
그 꿈속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들은 너는, 곧장 내게 등을 돌려 사라졌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건 사실…….
……두려움이란 이름의 허상이었던 것을.
태경은 사랑을 선택했다가 이내 파국으로 치달아 자살하고 말았던 큰형 우태주를 떠올렸다. 아주 오래도록 자신도 마치 그처럼 되리라는 허상과도 같은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다.
마음을 내보이는 건 약점을 내보이는 것이라고 오래도록 믿어 온 그였다. 한낱 감정 같은 것에 기대어 선택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고 확신해 온 그였다.
하지만, 더는 아니었다. 이제 가장 겁나는 건 정세연을 잃는 것이다. 오직 그뿐이었다.
그리하여, 태경은 허상에 불과한 두려움 앞에 정면으로 마주 섰다.
“사랑해, 세연아.”
그러고는 덜덜 떨리는 손을 맞잡으며 세연의 부른 배를 응시했다.
언젠가 꾸었던 또 다른 악몽.
다른 남자의 손을 잡고, 그의 아이를 낳아 기르는 너.
그것 역시 아주 오래도록 꾸었던 악몽 속 정세연의 모습이었다. 제 아이를 가진 정세연을 보고서도 그랬다.
태경은 그 악몽에서 벗어나려는 사람처럼 몸부림치며 애써 입을 열었다.
“사랑해.”
아주 오랫동안, 너 하나만을.
그러니까, 제발.
“네 아이의 아빠가 될 수 있게 해 줘.”
그는 첫사랑이자 제 생애 마지막 사랑이 될 단 한 사람,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유일한 여자를 향해 애원했다.
“그럼 난 뭐든지 할게. 아이에게 정말 좋은 아빠가 되도록 노력할게. 네가 자라면서 받았던 서러움 같은 거, 우리 아이는 절대로 느끼지 않도록.”
“…….”
“너랑 내 아이가, 우리 아이가 행복한 아이로 자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게. 그러니까, 너만 괜찮다면…….”
태경은 손에 끼고 있던 반지를 빼서 내밀었다.
남몰래 왼손에 끼고 있던 반지.
그건 언젠가 정세연에게 주었던 것과 같은 디자인의 반지였다.
“세연아, 나랑…….”
세연의 가느다란 손가락에는 맞지도 않을 반지를 보며 애가 타서 그만 입술을 깨물었다. 제 심장을 꺼내어서 주어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 그 마음을 전할 길이 없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던 세연이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 청혼하는 거예요?”
태경은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감히 그래도 된다면…….”
고작 이런 걸 내밀고 있지만, 이런 형편없는 나라도 좋다면.
만약, 그렇다면.
“나랑 결혼해 줘, 세연아.”
보잘것없는 자신을 그대로 내보이는 일은 쉽지 않아서, 태경은 결국 온몸을 덜덜 떨면서 청혼했다. 손에 맞지도 않는 반지를 내민 말도 안 되는 청혼 때문일까.
결국 세연의 입가에 울음이 번졌다.
“…….”
제발 울지 말라고, 고작 이런 모습이라 미안하다며 매달렸으나 세연은 그 뒤로도 한참이나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눈물만 흘렸다.
“그럴게요.”
그녀가 겨우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고서야, 태경은 그제야 자신이 마지막 힘까지 모조리 짜내었다는 걸 깨닫고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우태경 씨!”
“…….”
입가에는 알 수 없는 미소를 걸친 채, 자신을 부르는 세연의 음성을 마치 꿈처럼 여기면서.
* * *
“아니, 이게 무슨 일이야!”
“환자분, 지금 제 말 들리세요?”
한 병실에 두 사람이 연달아 쓰러지며, 화들짝 놀란 의료진이 달려왔다.
태경이 쓰러진 뒤, 충격을 받았는지 뒤따라 정신을 잃은 세연은 그대로 눈을 감고 자신을 붙잡는 손길에 힘없이 흔들렸다.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를 듣지도 못한 채.
“…….”
눈을 떴을 땐 두 사람은 같은 병실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그건 오직 VVIP만이 가능한 대우였다. 각자 다른 주치의를 둔 사람들이 한 병실에 누워서 동시에 진료를 받는다는 건.
특별 대우 덕분인지 곁에 전용 회복제를 둔 덕분인지, 우태경은 하루가 다르게 회복되어 갔다.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잤다. 그리하여 태경의 주치의는 매번 씩 웃으며 병실에서 나왔다.
짧은 회진을 돌고 나서 향하는 마지막 병실. 그 앞에서 제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세연의 주치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가관이네.”
각자 환자 침상에 누운 두 사람이 서로 손을 맞잡고 잠들어 있었다.
“부부가 쌍으로 아주…….”
부부 맞나?
저도 모르게 부부라는 말을 내뱉던 주치의는 이내 차트에 이것저것 끄적이며 쓸데없는 의문에 신경을 껐다.
뭐, 아이를 가진 데다 손에 똑같은 반지를 나눠 낀 걸 보면 부부 아니겠어. 저건 누가 봐도 결혼반지인데.
그렇게 생각하던 주치의는 이내 피식 웃고는 고개를 저었다.
그 난리를 치더니, 어휴.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한숨을 내쉬던 그녀는 이내 씩 웃으며 병실 밖으로 나갔다. 태경의 주치의 입가에 어렸던 미소의 의미를 이해하면서.
* * *
그날 이후.
다행히도 세연에게 극심한 통증이나 격한 태동이 느껴지는 일은 없었다.
대체 그날은 왜 그랬을까 하고 고개를 갸웃하는 그녀를 향해, 주치의는 어쩌면 아이가 아빠를 구하려고 한 건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아빠를 살릴 방법이 엄마뿐이라는 걸 알았을 테니까.
“효자라서 좋겠어요.”
벌써부터 효도하는 아이를 가져서 좋겠다는 말을 들은 세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들이에요?”
“…….”
의사는 아차 하는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산모는 안 그렇게 생겨서는 의외로 예리한 구석이 있었다. 하긴 세상 순하게 생겨서는 한 남자를 죽음으로 몰 정도로 지독한 사랑싸움을 해 댄 것만 봐도 사람은 겉만 봐선 모를 일이다.
그러나, 결국 제 발 저린 의사는 산모를 향해 으름장을 놓았다. 산모가 또 은근히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듣는 편이긴 하니까.
“32주 전에 성별 밝히면 안 되는 거 알죠? 전 아무 말도 안 했습니다.”
“네.”
“남편분한테도 비밀 지켜야 해요.”
남편.
태경을 이르는 말. 한때는 제 가슴을 스산하게 만들던 말이었다. 그러나, 이제 세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왼손에 그와 같은 반지를 낀 채로.
“꼭 비밀 지킬게요.”
몇 차례 더 당부한 뒤에야 겨우 안심한 기색이 된 의사가 병실에서 나갔다. 홀로 남은 세연은 배를 감싸 안고 침대 헤드에 기댔다.
아들이라니.
남자들과 친하게 지내 본 적이 없는데 과연 아들을 잘 키울 수 있을까. 첫 아이가 아들이란 소식에 조금 걱정이 된 것도 잠시, 아마 괜찮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아이에게 정말 좋은 아빠가 되도록 노력할게.’
‘너랑 내 아이가, 우리 아이가 행복한 아이로 자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게.’
그렇게 약속한 아빠가 있으니까. 아빠가 네게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으니까.
그리고, 네가 벌써부터 아빠를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평소엔 태동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아이는 태경이 곁에 있을 때면 신난다는 듯이 발차기를 해 댔다. 그리 아프지 않은, 가끔은 흥겨움마저 느껴지는 움직임이었다.
“세연아, 뭐 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배를 쓰다듬고 있는데, 때마침 병실 문이 열렸다. 세연은 의사와 면담을 마치고 돌아온 태경을 향해 뽐내듯이 말했다.
“태경 씨, 그거 알아요?”
“뭐?”
“나 우리 아이 성별 알아요.”
“……어?”
생각지도 못한 말에 태경이 눈을 크게 떴다.
“뭔데?”
알려 달라며 한참이나 졸랐지만, 세연은 끝내 말해 주지 않았다. 아직 32주가 안 되어 의사 선생님이 비밀로 하라고 하셨다면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선생님 말이라면 뭐든지 듣는 모범생 기질은 여전했다.
하여간, 정세연.
태경의 입가에는 미소가 어렸다. 제가 애타게 조르면 조를수록 도리어 재미있어 하는 것 같기에, 한참이나 더 조르다가 이내 체념하듯이 포기했다.
그런 태경을 향해 세연이 물었다.
“태경 씨는 성별 중요해요?”
“궁금하긴 한데.”
사실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건강하기만 하면 돼.”
“나도 그래요.”
세연은 태경을 향해 새끼손가락을 내밀며 엷게 웃었다.
“아이에게 좋은 아빠가 되어 줄 거죠?”
“그럼.”
태경은 새끼손가락을 마주 걸었다. 가느다랗고 조그마한 손가락이 부러지지 않을까 염려되어 아주 살짝 힘을 주면서.
“너한테 약속한 것들, 다 지킬 거야.”
태경은 확인 도장이라도 찍듯이 세연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배시시 웃는 사랑스러운 두 볼과 입술에도 연이어 제 온기를 나누었다.
“간지러워요.”
세연이 몸을 뒤로 물리며 웃자, 태경은 그녀를 따라 미소 지었다. 환한 웃음이 드리운 그의 얼굴에 이제 병색이라곤 흔적조차 찾아볼 수가 없었다.
며칠 뒤.
두 사람은 나란히 손을 잡고 퇴원했다.
태경이 퇴원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본가로 찾아가는 것이었다.
파혼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
* * *
“파혼하겠습니다.”
데리고 놀던 여자 때문에 자살 시도로 실려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변호사를 불렀다는 건 전해 들었다. 그러니 아예 짐작하지 못한 건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파혼이라니.
우 회장은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듯 눈을 감았다.
“네가 무슨 선택을 하려는 건지, 알고 있는 거냐, 태경아.”
“네. 압니다.”
“태주가 가던 길을 가겠다는 거냐.”
“…….”
큰형이 간 길을 뒤따라가는 것.
한때는 두려웠다. 순간의 감정으로 헛된 선택을 해서 결국 모든 걸 잃고 추락할까 봐. 패배자라 불리는 사람이 되는 게 죽기보다 더 싫었다. 그래서 겁을 내었다.
사랑하는 여자에게 등을 돌려, 제 사랑을 하찮고 보잘것없는 존재로 전락시켰다. 그게 자신과 여자를 지키는 방법이 되리라고 믿었다.
하지만, 그러다 정세연을 영영 잃을 뻔했다. 하마터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를 제 손으로 망쳐 버릴 뻔했다. 그건 자기 자신에게 내리는 사망 선고와도 같았다.
지난한 과정을 거쳐 비로소 그걸 깨달은 지금. 태경에게 후회나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다른 것 따윈 아무래도 좋았다. 무엇도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네.”
태경은 짧게 고개만 끄덕였다. 언젠가 우태주가 그러했듯이 무릎을 꿇고 정세연을 받아 달라고 간청하지 않았다.
그럴 필요도, 가치도 없는 인간들이었다. 가족이란 이름으로 묶여 있을 뿐, 결코 가족이 될 수 없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향해 태경은 씩 미소 지었다. 무언가를 깨달은 사람만이 지어 보일 수 있는, 약간의 안타까움이 뒤섞인 미소. 한때 큰형이 제게 지어 보이던 미소였다.
비록 그들의 눈에는 자신이 패배자겠지만, 제 눈에는 그들이 패배자였다. 그들은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무엇이 진정한 행복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두 분이 아직도 모르시는 게 하나 있습니다.”
아마 당신들은 죽을 때까지 모를 것이다.
“형은 그 여자를 잃어서 죽은 게 아니에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우 회장이 눈을 게슴츠레 떴다. 주애령 역시 마찬가지였다.
“잠시나마 인간처럼 살았는데,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었을 뿐입니다.”
태경은 눈앞의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부모라는 이름을 갖고는 있으나, 절대로 누군가의 부모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을.
“당신들처럼 사는 건, 인간 같지 않은 삶이니까.”
당신들.
그건 낳아 주었다고 해서 부모가 아니라는 의미를 담은 호칭이었다. 그저 자신을 이 세상에 존재하게 했을 뿐, 그 외에는 아무 의미 없는 사람들이었다.
“한때는 이곳에서 싸워서 이겨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승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고, 그게 제게 주어진 역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더는 아닙니다.”
태경은 입가에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보이기 위한 미소가 아니라, 진심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웃음이었다.
“전 이곳에 속한다는 이유로 주어지는 것들, 아무것도 필요 없습니다.”
사실이었다.
그는 언제나 밑바닥부터 올라간 사람이었다. 그러니, 다시 정상에 오르기까지 모든 걸 제 손으로 일구어야 한대도 잘 해낼 수 있었다.
오직 한 사람만 제 곁에 있어 준다면.
“우성이란 이름에 속할 이유, 더는 없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태경은 뒤돌아섰다.
후회라곤 한 점도 남기지 않고서.
* * *
파혼 소식은 곧 채린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변호사를 통해 전달된 서류에 담긴 건, 결혼으로 인해 약속되었던 거래의 대부분은 그대로 이어 가겠다는 내용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 그런 게 뭐 대수겠는가. 하나뿐인 딸이 이렇게 파혼을 당하게 되었는데.
그러나 길길이 날뛰며 거의 뒤로 넘어갈 지경인 부모와는 달리, 정작 당사자는 태연한 표정이었다.
“어쩐지 이럴 것 같더라. 그때 보니까 장난이 아니더라고.”
기다란 다리를 꼬고 앉아 있던 채린은 피식 웃으며 서류를 툭 책상 위에 내던졌다.
‘그 여자는 제가 기르던 개나 다름없습니다.’
절대로 서툴러 보이지 않던 남자의 서툰 거짓말. 그게 뭘 위한 것인지는 여자의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제게 큰 의미가 없다는 말로 그저 그 여자를 감싸고 지키기 위함이라는 걸.
“데리고 놀다 버리긴 무슨.”
정세연을 찾으며 달려오던 우태경의 다급한 모습이 떠올랐다. 사라진 여자를 쫓아 헐레벌떡 달려가던 남자는 오직 그 여자의 이름만을 외쳤다. 마치, 개가 짖으며 제 주인을 찾듯이.
“그게 바로 개새끼지 뭐야, 그럼.”
채린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웃어서 눈물이라도 나올 것 같았다.
“이채린!”
“채린아, 너!”
평소 나무라는 법이 없던 아버지와 결코 큰 소리 내는 법이 없는 어머니마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소리쳤지만, 한 번 터진 실소는 끊이지 않았다.
“너 지금 웃음이 나오니?”
“뭐, 적어도 제가 손해 본 건 없잖아요.”
손 안 대고 코 푼 격이기도 했다. 굳이 결혼이라는 형식적인 관계로 묶이지 않고도 원하는 바를 얻었으니, 오히려 손해는 그쪽이 보았을 터였다.
“적당한 남자는 우태경 말고도 많이 있을 테니까 전 별로 상관없어요.”
채린은 툭툭 털고 일어났다.
“결혼이 그리 급한 것도 아니고, 꼭 결혼을 발판 삼아야 할 이유도 없고.”
그녀는 커다란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뒤돌아섰다.
“게다가 파혼 소식 같은 게, 제 커리어에 영향을 줄 만큼 대단한 것도 아니니까요. 잠깐 씹다 말 가십거리 하나 던져 준 것일 뿐이겠죠.”
“넌 뒤에서 다들 네 얘기를 어떻게 할 줄 알고 그렇게 태연히……. 어휴, 머리야.”
“엄마도 참.”
채린은 씩 웃었다.
“저도 그런 약점 하나쯤은 있어야 인간미가 살지 않겠어요?”
한동안 누군가는 채린을 불쌍하게 보거나 우습게 여길지도 모르고, 누군가는 그녀를 동정하다 못해 그녀에게 친근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제아무리 동정심을 가장하여 깎아내리려고 해도 채린은 그들의 위에 서 있었고,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럼 대체 뭐가 문제일까. 한낱 소문 따위야 시간이 지나면 잊히기 마련인데.
“저 이제 그만 나가 볼게요.”
별것 아니라는 듯 여유 있는 미소를 걸친 그녀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다시금 가볍게 몸을 움직였다. 오늘도 정신없이 굴러갈 하루였다.
견고한 그녀의 세상을 지키기 위해 언젠가는 좀 더 나은 상대를 물색해야 하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만, 그건 조금 더 나중의 일이었고 그녀는 당장 오늘을 살아야 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 하나의 결점도 찾을 수 없는, 정말이지 완벽한 모습으로.
* * *
우태경 부사장이 우성의 경영직에서 물러났다. 표면적으로는 건강상의 이유라 알려졌으나, 실제로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니냐는 소문이 암암리에 돌았다.
교통사고 이후 건강 문제로 몇 차례나 자리를 비우던 그였기에 각종 루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일축되었다. 중요한 건 이제 승계 판도가 완전히 뒤집히는 게 아니냐는 것이었다.
뒤숭숭한 분위기를 쇄신해 보려는 것인지, 우 회장은 꽤 오래도록 공석으로 두던 부회장직에 걸맞은 인재를 낙점하겠다고 발표했다. 말이 인재이지, 우씨 일가 내의 누군가일 것이었다.
아무래도 가장 유력한 건 우희경이었다.
불미스러운 스캔들로 잠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긴 했으나 어쨌든 그건 외적인 부분이었으니, 꾸준히 경영자로서의 능력 자체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는 우태준보다는 낫다는 평이 다수였다.
그리하여 대부분 우희경을 예상했지만, 부회장직은 결국 우태준에게 넘어갔다.
그럼 그렇지.
어떤 이들은 씁쓸함을 담아 쓰디쓴 미소를 지었고, 어떤 이들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제아무리 혁신을 추구하더라도 딸에겐 경영권을 넘기지 않는 게 우성의 관례였다.
우 회장의 고리타분한 신념이 담긴 결정이기도 했다. 어찌 되었든 사람들은 이번의 결정이 그리 좋은 판단은 아니라 여겼다.
그렇지 않아도 내수 시장은 이미 한계에 부딪힌 데다, 미국 지사에서도 부정적인 평이 대다수였던 무능력한 우태준이 경영권을 물려받는다면 우성의 앞날이 캄캄한 건 당연지사였다.
한때 가장 선망받는 기업이라 불리던 곳들도 순식간에 도산하는 게 자유 경제 시장의 이치였다. 대한민국이 망해도 우성이 망할 일은 없다는 말도 이젠 옛말이 되려는 듯했다.
우태준이 부회장이라니. 미리 이직이라도 해야 하는 것 아니냐며 사내 분위기가 뒤숭숭했다. 그러나, 그 누구도 이 소식을 들은 우희경의 마음과 같을 순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 대체 어떻게……!”
그녀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우태경을 꺾은 건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이었다. 그러니 부회장직은 응당 제가 차지해야 할 몫이었다.
그러나, 되돌아온 건 고작 부사장직이란 푸대접뿐이었다. 매번 이런 식이다. 아무리 해도 넘을 수 없는 견고한 벽처럼, 차별 속에 그녀는 언제나 뒤로 밀려나야만 했다.
공공연한 차별 속에 자랐지만 도저히 그걸 당연하다고 받아들일 수 없는 그녀였다. 한때는 동생이 태어나며 제 위치가 애매하게 되었다는 생각에 우태경을 증오하다시피 미워했다.
미움 뒤에 어린 건 질투였고, 질투를 부추기는 건 부모였다. 어차피 손을 들어 줄 것도 아니면서, 가만히 있다가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으리란 불안만을 자극했다.
하지만 대체 뭘 위한 것인가.
돌아오는 건 언제나 겨우 이런 푸대접뿐인데.
우희경은 분에 못 이겨 씩씩대었다. 차라리 우태경에게 질 때는 능력 탓이라고 여길 수나 있었다. 무능력한 오빠에게 밀린 건 누가 보아도 명백한 차별이었다.
“제가 고작, 이런 대접이나 받으려고……!”
“네가 태경이를 꺾었으니 그 자릴 차지하는 게 당연한 것 아니냐.”
“그럼 오빠는 대체 뭘 했는데요. 대체 뭘 했다고 오빠가…….”
우희경은 파르르 떨며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 등신 머저리 같은 새끼가 부회장이 된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우태경을 제외하면 이제 집안에 남은 아들이 없었다.
“…….”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입을 다물었다. 그들에겐 그저 아들이 필요한 것이다. 우씨 성을 가진 남자가. 그 사실을 이런 식으로 절감하자, 기가 막혀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하!”
아무리 말해도 꿈쩍도 않는 우 회장을 보며 그녀는 다시 독기를 품었다.
그래. 천하의 우태경도 무너뜨린 나인데, 우태준쯤이야.
이준혁.
너만 되돌아온다면…….
정세연도 우태경에게 다시 돌아간 마당에, 왜 여태껏 연락이 없는지 모를 일이었다. 비서실 직원들을 통해 이준혁의 행방을 수소문했으나, 그는 마치 세상에서 지워진 듯 자취를 감추었다.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이준혁.
우희경은 핏발 선 눈으로 이준혁의 자취를 좇았다. 뜻밖의 소식으로 그의 행방을 알게 되리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한 채.
* * *
우태준이 부회장직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익명의 남자가 언론사에 우성의 비리를 제보하면서 폭로전이 시작되었다.
한때 우성에 깊게 몸을 담았다던 남자는 모르는 게 없었다. 정계 로비 의혹부터 언론 유착은 물론이고 갑질 논란과 사생활 추문까지 하루가 다르게 그 남자로부터 우성의 진면모가 밝혀졌다.
그 남자를 시작으로 연이어 터져 나온 각종 비리 고발이 매일같이 뉴스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국민 친화적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쌓아 오던 우성은 순식간에 추락했다.
갑질 논란에 휩싸인 우희경은 경영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되었고, 갑질은 물론이고 온갖 비리의 온상인 데다 상간남 소송까지 걸린 우태준은 어쭙잖게 해외로 도주하려다 구속되었다.
우 회장 역시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암암리에 소문으로만 떠돌던 명백한 정경 유착 정황이 속속들이 밝혀졌으며, 동조한 것으로 알려진 주애령 역시 비난의 타깃이 되었다.
검찰 수사를 손쉽게 피해 오던 그들이지만 이번만은 다를 것이라며 벼르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우성 일가를 깡그리 감옥에 보내어 정의를 구현해야 한다는 입장이 우세했다.
이 모든 건 태경이 사직서를 내던진 지 정확히 일주일만의 일이었다. 매일같이 나오는 우성에 대한 뉴스를 보며, 세연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그 사람, 아직 사랑해요?’
그렇게 묻던 준혁의 얼굴이 떠올랐다.
“…….”
세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당신은 끝까지…….
어디선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던 게 틀림없었다. 태경이 우성에서 나오기가 무섭게 이러한 일이 벌어진 것을 보면. 세연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과 미안함에 눈물을 흘렸다.
‘이젠 인간답게 살아 보려고요.’
남자와 나누었던 마지막 말을 떠올리면서.
죗값을 치르겠다던 남자는 사태가 심각해지고 여론이 들끓어 우성이 도저히 법적인 구속망을 피할 길이 없어졌을 무렵, 스스로 자신의 정체를 밝히며 다시금 화력을 돋우었다.
비리를 제보한 남자가 우희경의 비서실장으로 밝혀지고, 그가 행한 일들이 알려지며 세간에 한층 더한 충격을 안겼다.
단지 소문으로만 듣고 영화로만 보았던 일들이 세상에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점에서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영화보다 현실이 더하다며 사람들이 혀를 내두른 탓에 공교롭게도 기업이나 재벌, 정치인들의 어두운 뒷면을 다룬 영화들이 개봉하기가 무섭게 줄줄이 망했을 정도였다.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이준혁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일들을 하였다며 자신의 죄를 낱낱이 자백하였다.
다만, 그는 우희경의 지시가 아닌 자신의 출세를 위한 선택이었다고 증언하였다. 누가 보아도 지시에 따른 일 같았으나, 무슨 이유인지 확고할 정도로 같은 입장을 고수했다.
수사 진행이 느려도 한참 느린 우씨 일가와 달리, 이준혁은 도주 우려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구속부터 재판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좋은 집안 출신이 아닌 데다 든든한 배경이 없는 게 죄라면 가장 큰 죄였다.
이러한 점이 대중의 공분을 사서 이준혁을 위한 모금이 진행되기도 했으나 일각에서는 그의 죄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주장을 하여 결국 무산되었다.
이 모든 일을 지켜보던 세연은 입술을 깨물었다.
“…….”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하기로 결심하며.
* * *
“485호. 면회다.”
“…….”
제 이름을 잃고 숫자로 불리는 건 이제 익숙하다.
우성 일가와 달리 가진 것도 배경도 없는 준혁의 재판이 거침없이 빠르게 진행되며 징역형을 받자, 사람들은 법 앞의 평등이 지켜지지 않는 현실에 분개했고 더러는 그를 가엾게 여겼다.
그러나, 수감된 뒤로 준혁의 마음은 오히려 편했다. 자신 역시 결코 죄가 없거나 그 죄가 가볍지 않은데, 우성 일가에 대한 분노로 인해 다소 가려졌을 뿐이다.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아갈 뿐입니다.’
이게 맞는 거라고 그는 확신했다.
억울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을 받았을 때나 법정에서 마지막으로 발언할 기회가 생겼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의 죗값을 받을 생각 외에 다른 생각이나 허튼 희망을 품지 않았다. 불우하게 자란 유년 시절이 밝혀지며 동정론이 우세할 때도 기대를 걸지 않았다.
그게 맞는 것이니까. 지금 감옥에 있는 건 그저 제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뿐이다.
이곳은 편안했다.
자신을 찾을 사람도 없으니, 더 이상 시끄러운 일들에 휘말리지 않아도 되었다. 시민 단체가 손을 내밀기도 했고 자신의 유명세를 위해 굳이 변호 일을 자처하겠다던 사람들도 있었다.
감형이니 기부니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준혁은 일절 거부 의사를 밝혔다. 그는 그저 죗값을 치르고서 새로운 삶을 살고 싶을 뿐이었다.
지금, 면회라는 말에 끌려 나와 만난 눈앞의 변호사를 보고도 그랬다. 그는 준혁이 이미 예상했던 바와 같은 뻔한 말을 늘어놓았다.
“기부 의사를 밝힌 분이 있습니다.”
“…….”
“익명으로 처리해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
변호사는 아주 짤막한 글이 적힌 종이를 보여 주며 말했다. 뭐가 되었든 당연히 거절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글씨를 본 순간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부디 건강하시길 바랄게요.〉
언젠가 많이 보았던 글씨.
누군지 알고 싶지 않았는데, 알 수밖에 없었다. 제가 지은 무수히 많은 죄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러니 이건 당연한 일인데도 그녀는 자신의 희생으로 여기는 것 같아 죄스러웠다.
당신은 지금 행복할까.
지금쯤 배가 몹시 불렀을 여자를 생각한다면 아이를 낳은 후에 터뜨리는 편이 적절했다. 그러나, 시기상 불가피한 일이라 어쩔 수 없이 지금 같은 선택을 했을 뿐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남자가 그 여자에게 돌아간 이후를 고른 것만이 그가 해 줄 수 있는 전부였다. 그런데도 당신은 고작 이런 걸 배려라고, 고맙다고 여겼을까.
준혁은 까칠한 얼굴로 마른 입술을 잠시 깨물었다.
“그분한테 저도 보답은 하고 싶은데.”
만일 글로 써서 전할 수만 있었다면, 언젠가 여자에게 받았던 아주 작은 선물을 동봉하여 편지를 보내고 싶었다. 당신에게도 행운이 존재하여, 부디 행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제 말, 전해 주세요.”
“그러겠습니다.”
변호사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
준혁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잘 지내요. 정세연 씨.〉
〈건강해요.〉
〈아기도, 당신도.〉
그리고, 이건 편지에 담고 싶지 않지만…….
당신의 남편이 될 남자 역시 건강하길 바랄게요. 그게 당신에게 기쁨을 줄 테니까.
무엇보다도 당신이 행복해지길 바라요. 언제나 그랬듯이 당신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으니까.
부디…… 잘 지내요, 정세연 씨.
나 역시 행복할 수 있도록.
준혁은 제 마음속에 마지막 말을 담으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
아주 엷은 미소에는 어떠한 후회도, 미련도 없었다. 과거의 일들을 매듭짓고, 새 삶을 살아갈 준비가 된 사람만이 지어 보일 수 있는 미소였다.
* * *
우 회장은 휠체어를 타고 포토 라인 앞에 등장했다. 대부분의 재벌들이 언제나 그렇듯, 죄 앞에서는 연약한 모습을 보이다 뒤돌아서면 대중을 기만하는 게 바로 그들의 본성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런 방법이 통하지 않으리라는 여론이 우세했다. 하루가 다르게 들끓는 대중들의 반응만 보아도 지금까지와는 다르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우 회장에 비하면 주애령은 조금 더 나은 처지였다. 정경 유착 정황이나 불법 비자금에 연루된 문제에서도 실상 남편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그러나, 민심이 돌아선 틈을 타서 인신공격이나 다를 바 없는 진실 규명이 시작되었다. 수십 년 전, 우 회장과 결혼 예정이었던 언니인 주효정을 청부 살인했다는 것이 주 내용이었다.
대중들의 관심은 이러한 자극적인 흥미 위주의 가십거리에 꽂히기 마련이라, 우 회장보다는 도리어 주애령의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에 훨씬 더 많이 오르내렸다.
평소였다면 쉽사리 묻어 버릴 수 있는 한낱 가십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퍼져 나가고, 일부 언론에서도 이를 집요하게 조명하며 결국 진상을 밝혀냈다.
주효정이 죽던 날, 주애령의 행보는 꽤 미심쩍었다. 교통사고 현장에 있던 수많은 목격자들과 당시 관계자들이 일부러 낸 사고가 틀림없다며 여러 차례 주장하기도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언론은 결코 한쪽의 입장만을 조명하진 않았다.
주애령 역시 당시 교통사고로 인해 자궁을 적출했고, 머리를 다치며 감정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는 의사의 소견이 밝혀졌다.
의사는 본인 역시 커다란 고통과 괴로움을 겪을 만한 일을 일부러 했을 리는 만무하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비록 주애령 측에서 의도적으로 의사의 소견을 언론에 공개한 것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러한 내용을 제 어머니의 입이 아닌 언론으로 접한 우태경은 할 말을 잃었다. 그건 형제들 중 누구도 몰랐던 얘기였다. 그녀가 정신 병동에 입원했다는 연락을 받고서도 그랬다.
“…….”
대체 기사에 나오는 여자가 제 어머니가 맞는지. 남의 입을 통해 듣는 여자가 정말 저를 세상에 있게 한 어미이긴 한지. 애당초 서로에 대해 제대로 아는 바가 있기는 했나.
“하…….”
태경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 * *
태경은 제 어머니라 불리는 여자와 마주 앉아 한참을 말없이 있었다. 좋은 사이가 아니란 건 알지만, 부디 가족 중 누구라도 와 주면 좋겠다는 주치의의 권고에 따른 일이었다.
좋은 사이는 무슨. 정확히는 남보다도 못한 사이였다. 가족 같은 게 그 여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기나 할까.
알 수는 없었지만, 지금 한가롭게 병문안이나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태경에게도 선택지는 없었다.
그러나 사실은, 여자의 말을 들어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왜 그렇게 언제나 잔인하고 냉정하였는지.
어쩌면 자신 역시 이 여자를 한 번쯤은 이해해 보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
자신을 배 속에 품어 보지도, 낳아 본 적도 없는 여자. 언제나 타인처럼 낯설던 여자가 태경을 말없이 응시했다. 화장기 하나 없이도 기품이 어린 얼굴에는 감정이라곤 없었다.
“난 일평생 망가진 사람이었다.”
여자는 지난 삶을 고백하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태주를 잃고 나서도 눈물 한 방울 제대로 흘리지 못하는 내가, 그런 나 자신이 무엇보다 괴로웠다.”
“…….”
“사람들이 무어라 떠드는지 이제 너도 알겠지. 그게 한낱 뜬소문만은 아니라는 것도.”
사실이었구나.
태경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 주변에 듣는 이가 아무도 없으니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걸 느끼면서.
“나는 일평생 이미 그 죗값을 다 받았다고 생각했다. 자식을 내 배 속에 품을 수도 없었고, 다섯이나 되는 자식을 품에 안고도 예뻐할 줄을 몰랐어.”
“…….”
“사랑이 뭔지, 기쁨이 뭔지. 그런 건 느낄 수도 없었어. 보기에 예쁜 게 있으면 가졌지만, 오직 그뿐이었지. 짧은 즐거움을 느낀 적도 없었다.”
“…….”
그날 이후. 모든 걸 갖고도 행복하지 못했던 여자.
한때는 제 언니의 남편이 될 남자를 사랑하여 그를 차지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라도 할 수 있었다던 여자가 지독하게도 낯설었다.
여자의 입에서 사랑이라는 말이 나온다는 건, 그가 태어나 단 한 번도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일이었으니까.
“만일 그날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난 아무것도 갖지 못한다 해도 절대로 같은 선택을 하진 않을 거다. 정말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을 테니까.”
네가 한 말처럼.
주애령은 태경의 눈을 보며 말했다. 정세연을 택하기 위해 집에서 나가겠다던 그날을 두고 하는 말인 듯했다. 그녀가 제 어리석음을 인정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믿을 수 없는 건.
“미안하다.”
사과를 건네는 제 어미의 모습이었다.
단 한 번도 어머니다운 어머니가 되지 못했던 여자에게 난생처음으로 받은 사과. 무언가 울컥할 만한 상황인 것도 같은데, 지금 느끼는 감정을 뭐라 형언하면 좋을지 몰랐다.
마치 무생물인 줄 알았던 것이 실은 심장이 뛰고 피와 살이 있는 인간이라는 걸 확인하는 순간의 기이함이라 해야 할까. 아니면…….
“…….”
태경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어 그저 침묵을 지켰다. 그런 제 아들을 바라보며, 주애령은 다시금 담담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정말로 미안하다. 너에게도, 네 누나나 형에게도 정말 미안한 마음뿐이야.”
* * *
“오늘 뉴스 속보입니다.”
우태준은 미국행 비행기를 타려고 했지만 해외 도주 의사는 없었다는 희대의 명언을 남기며 구속되었고, 우 회장 역시 휠체어를 탄 모습으로 연일 뉴스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었다.
아무리 채널을 돌려 봐도 우성이라는 두 글자가 빠지는 뉴스가 없었다. 주애령이 심신 미약을 근거로 우성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을 끝으로, 우희경은 텔레비전을 꺼 버렸다.
이 모든 지긋지긋하고 환멸 나는 소식을 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나마 재판장을 오가는 정도에서 그치는 제가 운이 좋은 축에 속한다니. 도저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아아악!”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리 지르던 그녀는 한 남자를 떠올리며 미친 듯이 숨을 헐떡였다.
이준혁.
우태경에게 정세연이 있었다면, 자신에게는 이준혁이 있었다.
내 오랜 개새끼.
절대로 자신을 배신하지 않으리라고 여긴 그런 존재. 제가 시궁창에서 건져 올린 사람이었다. 꽤 쓸 만한 쥐새끼를 발견한 건 우연이었지만, 선택은 자신의 의지였다.
자신이 손을 내밀던 순간.
‘나랑 손잡으면, 지금처럼 살지 않아도 되는데.’
‘…….’
아주 희미한 빛이 어리던, 그의 검은 눈동자를 우희경은 기억하고 있었다.
밑바닥 인생으로 태어난 지리멸렬한 삶. 존재 자체가 부정당하고 세상에서 지워진 채 그늘 아래서 살아가야 했던 남자.
그리하여 단 한 번도 희망의 빛을 담아 본 일이 없는 눈동자는 한없이 검고 깊었다. 그 어두컴컴한 빛깔 위에 얼핏 빛이 어리는 걸 본 우희경이 엷게 미소 지었다.
‘…….’
그걸로 두 사람은 손을 맞잡았다. 오직 서로의 필요를 위해서.
그 사실을 잊지 않았는지, 이준혁은 그녀에게 언제나 충성을 다했다. 어떤 일을 맡겨도 해치워 냈다. 가끔은 그런 그가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애초에 사람 취급을 하지 않기도 했지만.
‘실수 없이 처리하겠습니다.’
언제나 그렇게 말하며 깍듯하게 고개를 숙이던 남자. 그가 대체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지 궁금했다. 때로는 오직 그런 이유로 무언가를 시키기도 했다.
단 한 번도 그 남자를 사람 취급해 본 적이 없었다. 어떤 생을 살았는지 뻔히 알면서도 동정하지 않았다. 그게 네 역할이라고, 당연하게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우희경은 변호사가 건넨 이준혁의 증언들을 보며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상황을 만든 주제에 책임을 지겠다는 게 무슨 뜻일까. 이게 네 마지막 충성심 같은 건가.
“…….”
그 순간, 그와 마지막으로 통화하던 날 들었던 정세연의 음성이 떠올랐다.
그 맹랑한 여자애가 자신을 이해한다고 했다. 차별을 받는다는 게 얼마나 기분 더러운 일인지도 안다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 이용하는 게 정당화되는 건 아니라고 했나.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건방지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우희경은 힘없이 피식 웃었다.
만일 모든 걸 가질 수 있는데 단 하나만 가질 수 없다면, 과연 너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웃기지 마. 내 입장이 되어 보지도 않았으면서.
완벽한 삶을 살고 싶었고, 차별을 딛고 성공하고 싶었다. 그 누구보다 승리를 거두고 싶었다. 언제나 빈칸을 채워서 퍼즐을 완성하고 싶었다.
어쩌면 그 모든 건 잘못이 아니었다. 그녀의 세상에서는 누구나 그런 걸 바라니까. 어떤 더러운 짓을 해서라도 이기면 그만이라고 배워 왔으니까.
하지만, 과연 그게 정답일까. 지금 온 세상이 그들을 비난하는데, 과연 자신이 옳고 남들이 틀렸다고 당당히 주장할 수가 있는 것일까.
대체 무엇이 잘못된 걸까. 언제, 어디서부터…….
그때였다.
조그만 손이 팔을 톡톡 두드렸다.
“…….”
면접교섭권을 이용해 한 달에 고작 두 번 정도만 만날 수 있는 딸이었다.
“왜. 엄마한테 할 말 있어?”
우희경은 여전히 찌푸린 얼굴로 딸을 내려다보았다.
“…….”
응, 하고 대답하는 대신 아이는 고개만 끄덕였다. 바깥세상에서 말을 잃은 아이는 제게도 어김없이 입을 닫았다. 오직 아빠와만 말을 한다고 했다.
싱긋 웃는 딸의 얼굴에서 이젠 전남편이 되어 버린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남을 밟고 올라가서라도 승기를 거머쥘 타입이 못 되어서 그렇지, 나쁘지는 않은 사람이었다.
제 세상에선 찾아볼 수 없던 쓸데없는 낭만 같은 게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우희경의 부모에게선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른바 평범한 부부 관계를 원했다.
솔직히 우스웠다. 결혼기념일 따위를 챙기느라 장미 꽃다발을 보내오던 이상한 남자가. 평범한 가정에서 자란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유난을 떠는 모습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결혼 전에도 그랬다.
‘전 제 부모님처럼 사는 건, 큰 의미 없다고 생각합니다. 희경 씨와는 제대로 된 결혼 생활을 하고 싶어요.’
남자는 얼굴을 붉히며 꽤 진심 어린 음성으로 말했지만, 전혀 와닿지 않았다. 저러니까 경영권 승계를 받을 턱이 없다고 고개를 저었을 뿐.
자신에게 굳이 이 남자를 갖다 붙인 아버지에게 짜증을 느꼈지만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도저히 맞지 않는 남자였다.
언젠가 이혼을 앞두던 날, 그 남자가 말했다.
사실은, 고작 정략결혼에 불과한 이 결혼을 어떻게든 지키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고. 당신에게 그런 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건 알지만, 한 번쯤은 말해 주고 싶었다고.
너무 뒤늦은 말에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저는 단 한 번도 제 결혼 생활을 지키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았으면서도 후회가 되었다. 무엇을 후회하는지도 모르면서.
그저 이건 다 우태경 그 새끼가 망친 거라며 소리를 질러 댔다. 패배감에 분을 이기지 못하고 파르르 떠는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전남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 동생이 아니었다고 해도 크게 달라질 건 없었을 거야.’
‘…….’
‘당신에겐 이 결혼이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는 걸 잘 아니까.’
‘…….’
‘그걸 잘 알면서도…… 한동안은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 같아.’
전남편은 도리어 자신이 미안하다고 했다. 그런 걸 바란 게 폭력이 되어서 당신을 가정 밖으로 내몰았던 게 아닌가 싶다는 말로.
하지만, 따스한 말과 달리 유책 배우자인 그녀가 가질 수 있는 건 고작 딸을 한 달에 두 번 볼 수 있다는 면접교섭권에 불과했다. 아이가 엄마 만나길 꺼려했으니 당연한 결정이기도 했다.
우희경은 손톱 하나하나가 곱게 칠해져 있고, 값비싸고 화려한 반지를 손가락 마디마다 끼고 있어, 누가 보더라도 다 가진 사람인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반짝반짝 빛이 나는 가운데, 결혼반지를 빼 버려 유일하게 텅 빈 네 번째 손가락을 보자 우습게도 패배자의 심정이 되었다.
대체 무엇을 가졌는가. 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런 짓들을 벌였고, 대체 무엇을 위해서 살아왔단 말인가. 무얼 가지기 위해서.
참담한 심경으로 미간을 좁히는 사이, 딸이 그리던 그림을 불쑥 눈앞에 내밀었다. 칭찬이라도 해 달라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그림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키가 크고 작은 사람들이 서로서로 손을 잡고 옆으로 늘어서 있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환하게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위에 삐뚤빼뚤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사이좋게 지내요.’
“…….”
언젠가 아이가 그렸다던 가족 그림을 떠올렸다.
수많은 인파에 둘러싸인 제 뒷모습을, 아이와 전남편이 손을 잡고 멀찍이 서서 물끄러미 바라보는 그림이었다. 그림 속에서도 자신은 한 아이의 엄마나 한 남자의 아내가 되지 못했다.
게다가 자신은 손에 아주 커다란 망치를 들고 마구 휘두르며 괴물처럼 불을 내뿜고 있었다. 제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온통 고통과 슬픔만이 가득했다.
“아…….”
그녀는 저도 모르게 한숨과도 같은 탄식을 내뱉었다. 아주 오래도록 우태경을 원망했었다. 만일 그가 제 스캔들을 터뜨리지 않았더라면 모든 게 지금과 같진 않았으리라 믿었다.
하지만, 오직 그뿐이었을까. 아이가 입을 닫은 이유가 정말 그것 하나였을까.
우희경은 고개를 저었다.
어려서부터 엄마라는 말에 자신을 돌보는 이모를 가리키던 아이였다. 우희경 역시 제 아빠를 닮아 쓸데없는 잔정이 많고 욕심이나 경쟁심이 별로 없는 아이가 마음에 차지 않았다.
오직 딸이라는 이유로 취급도 받지 못한 자신의 어두운 그림자가 제 딸 위로 드리웠다. 이래서야 패배자밖에 되지 않을 아이. 이 아이만큼은 자신처럼 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하여 더욱 더 성공하고 싶었고, 떳떳한 엄마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널 혼자 버려두고 난 대체 뭘 위해서 아등바등했던 걸까.
성공을 바란 것은 잘못이 아니었다. 그러나 바라는 걸 이루기 위한 수단이 잘못된 것만은 확실했다. 그 때문에 정당한 욕망마저도 추악해져 버린 것이다.
우희경은 아이가 내민 그림 속의 자신을 보고 애써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게.”
그녀는 사랑스러운 딸의 뺨을 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커다란 눈 가득 고인 눈물을 참으려 이를 악물었으나, 저도 모르게 붉은 입술 사이로 울음기가 새어 나갔다.
“앞으로는…… 사이좋게 지낼게.”
빈틈없이 붉은색이 칠해진 예쁜 입술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왈칵 울음을 토해 내었다. 이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온 것은 너무나 뒤늦은 후회만이 담겨 있는 애처로운 울음소리였다.
* * *
온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던 일들을 뒤로 한 채, 시간이 흘렀다. 그러나 꺼지지 않는 관심 속에서 죄지은 자들이 치는 몸부림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각자의 죄목에 따라 어떤 값을 치러야 할지 대략적인 윤곽이 정해지며, 또다시 세간의 관심이 들끓었다. 이러한 가운데 우성 내에서 처벌을 피한 우희주와 우태경이 재조명되었다.
우희주는 진작부터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 있었으니, 이러한 사건들이 터지기 직전에 부사장직에서 물러난 우태경이 한층 더 주목과 재평가를 받았다.
갑질은커녕 평사원으로 입사하여 다른 사원들과 격의 없이 잘 어울리고, 그 흔한 비자금 조성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욱 그랬다.
물론 이러한 추앙은 정세연이라는 여자에 대한 행적이 가려져 있어 가능한 일이었다. 그가 살면서 지은 커다란 죄는 오직 정세연에게 저지른 일들이었다.
그러니, 정작 태경에게 중요한 건 세간의 평가 따위가 아니었다. 그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불안한 얼굴로 초조하게 수술실 앞을 서성이고 있었다.
다름 아닌 세연의 출산일이었다.
“…….”
수술 날짜를 잡고 일주일 전부터 미리 입원한 세연을 살뜰하게 보살폈지만, 이미 약해진 몸을 건강하게 만드는 건 무리였다.
혹시라도, 만에 하나라도,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어쩌지.
기나긴 한숨을 토해 내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온갖 불안한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아서 그만 미칠 것 같았다. 아이가 태어난다는 기쁨을 느낄 새도 없이 최악의 상황만이 떠올랐다.
이전에 축 늘어져 며칠이나 정신을 잃었던 세연의 모습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헛구역질이 치밀었다.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얗게 질린 채 그는 머리를 감싸 쥐고 덜덜 떨었다.
제 곁에 붙잡아 두기 위해 억지로 임신을 시켰다는 게 얼마나 잘못된 일이었나. 신이 있다면 죗값을 치르라는 의미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가 버릴 것 같았다.
제발, 이번만은…….
태경은 세상의 모든 신에게 빌었다. 제 종교와 다를 바 없는 여자를 앗아 가지 말아 달라고. 그 여자에겐 아무런 죄가 없으니, 제발 이런 식으로는 벌을 내리지 말아 달라고.
“그만 좀 앉아 있지…….”
세연의 어머니는 괴로워하는 태경을 안타깝게 바라보다가, 가까이 다가가 그의 어깨를 두드리며 안심시켜 주었다. 자신이 순산했으니 세연 역시 그럴 것이라고 하면서.
“딸은 엄마 체질 닮는다니까, 세연이도 별 탈 없을 거야.”
“감사합니다, 어머니.”
태경은 세연의 어머니에게 잠시 기대어 가쁜 숨을 내쉬었다. 등을 쓸어내리는 주름지고 거친 손이 그에게 안정을 주었다.
그녀는 일만 하느라 몸이 약해진 상태에서 세연을 낳아야 했다.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남편 때문에 혼자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가야 했지만, 감사하게도 건강하고 예쁘게 태어난 딸이었다.
그런 딸이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아이를 가졌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떻게 눈앞의 남자가 밉고 원망스럽지 않았겠는가.
다만, 남자는 아주 오래도록 그녀에게 도움을 준 사람이었다. 지나가던 길에 딸의 얼굴을 보러 왔다며 잠시 식당에 들른 날. 딸이 화를 내며 가 버린 이후로 쭉 그래 왔다.
연락을 끊어 버린 딸 대신, 남자는 때때로 세연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려 주었다. 얼마나 다른 사람들에게 능력을 인정받고 지내는지, 최근에는 어떤 일을 하고 지내는지도.
제 딸과 어떠한 관계로 보이진 않아, 단순한 상사치고는 조금 지나치다 싶은 친절이라고 생각했다.
하나 그녀는 남자에게 받은 모든 메시지들을 저장해 두었다. 제 딸의 소식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기 때문에.
‘기특한 내 새끼.’
언젠가 받은 세연이 일하는 사진을 보며, 거칠고 갈라진 손끝으로 딸의 얼굴을 쓸었다. 속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잘난 내 딸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표현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대체 왜 그랬을까 하고 뒤늦게 피눈물을 흘리던 그녀에게 남자의 과한 친절은 세상에 둘도 없는 감사한 은혜처럼 느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세연의 오빠가 감옥에 갈 때 최소한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변호사를 선임해 준 것도, 모든 걸 잃고 술에 빠져 매일같이 폭력을 휘두르던 남편으로부터 자신을 구해 준 것도 이 남자였다.
너무 오랜 세월 무기력해진 그녀로서 혼자서는 감히 이혼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했다. 그러니, 이 남자에게 커다란 빚을 진 것이다. 그가 언제나 제 은인이라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제가 꼭 갚을게요.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그럴 때마다 남자는 엷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어서 기쁘네요.’
본래 도움 주는 곳이 많다던 남자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고 손이 닳도록 빌며 감사하다는 말만을 되풀이했다. 그가 제 딸과 어떤 관계인지는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로.
그러던 어느 날.
남자가 찾아와 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정세연 씨, 제가 반드시 책임질 겁니다.’
결코 남에게 고개를 숙일 것 같지 않은 남자가, 자신의 허름한 옷자락에 매달려 애걸했다.
‘그러니 제발……. 살려만 주세요.’
끊임없이 흐르던 남자의 눈물에서, 그녀는 숨길 수 없는 사랑을 알아채었다. 과거에 이 남자를 보던 제 딸의 눈빛도 다르지 않았다는 것 역시.
그리하여, 모든 걸 정리하고 이곳으로 와 임신한 딸의 곁을 지켰다. 가엾은 딸을 돌보지 못했던 지난 세월을 속죄하고, 남자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서.
이 모든 사실은 세연으로서는 절대로 알 수도, 알지도 못할 일이었다. 오직 태경과 세연의 어머니, 두 사람의 비밀로 간직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도 영원히.
그러니, 지금으로선 딸이 부디 무사하게 아이를 낳아, 남자와 가정을 꾸리고 잘 살았으면 하는 바람뿐이었다. 그녀는 메마른 얼굴로 수술실 앞에서 두 손을 모아 빌었다.
부디 내 딸이, 못난 어미를 만나 받은 것 하나 없이 자란 딸이 이제는 건강하게 아이를 낳아서 화목한 가정을 꾸리고 살 수 있기만을 바라면서.
* * *
얼마나 지났을까.
안에서 희미한 아기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하더니, 수술실 불이 꺼졌다. 태경은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간호사가 아이를 안고 나왔다.
“축하드려요. 건강한 왕자님이에요.”
“아…….”
눈앞의 아이를 보니 어쩐지 어질했다. 아이의 얼굴을 보거나 품에 안아 볼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그는 그저 간호사를 붙잡고 매달렸다.
“세연이, 아니, 산모는요? 건강엔 이상 없나요? 괜찮은 것 맞습니까?”
태경은 다급하게 세연의 상태에 대해 물었다.
몸이 너무 약해져 있어 제왕 절개를 택했고, 다리 아래가 마비되는 기분을 느끼면 패닉이 오는 산모도 있다는 말에 곧바로 전신 마취를 택했다.
그러나, 전신 마취를 했다가 두 번 다시 깨어나지 않을까 봐 두려웠다.
‘그런 일은 흔치 않아요. 그러니까 쓸데없는 걱정은 그만 좀 하세요.’
이전에도 세연의 주치의를 붙잡고 늘어지자, 의사는 그런 경우는 웬만해선 잘 없다며 태경을 떼어 냈다. 산모의 상태가 좋진 않지만 전신 마취에서 깨어나지 않는 일까지 생기지는 않을 거라고.
일반적으로 환자의 안위에 대해 그렇게까지 장담하는 일이 잘 없는 대형 병원에서 그 정도의 말을 내뱉은 건 거의 확신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안을 이기지 못해 동동거리는 태경을 향해 의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치 지긋지긋한 찰거머리를 보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이전엔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었던 경멸 어린 시선을 근래 들어 무척이나 자주 받고 있었다. 그러나 태경은 개의치 않았다. 중요한 건 그의 정세연이었다.
“산모도 아기도 건강해요.”
곧이어 나온 의사가 태경의 어깨를 두드렸다.
“숨 좀 쉬고 물어보세요, 숨 좀.”
태경은 그제야 자신이 숨도 참고 간호사에게 매달려 있었다는 걸 알아채었다.
“아기, 안아 보셔야죠. 산모가 얼마나 고생해서 열 달이나 품고 있던 아이인데.”
“아.”
세연이 괜찮다는 말에야 겨우 시야의 안개가 걷히고 나니, 뒤늦게 아기의 얼굴이 보였다.
“엄마 닮았구나.”
다행이다.
그렇게 말하는 태경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엄마를 닮아 더없이 사랑스러운 아기였다. 이 아이에게 제 성을 붙이고 나면, 정세연의 아이가 제 아이가 될 것이다.
이 모든 게 가능할 수 있었던 건, 네가 있어서였어. 모든 건 네 덕분이야, 아가야.
태경은 감격스러운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세상에서 가장 작아 보이는 손이 그의 엄지손가락을 쥐었다. 조그만 게 어찌나 힘이 센지 놓질 않았다. 아빠를 알아봤다는 듯이.
“……그래. 내가 네 아빠야.”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아이를 품에 안았다.
우태경이 진정으로 아빠가 된 순간이었다.
* * *
“…….”
회복실로 옮겨진 세연이 눈을 뜨기가 무섭게, 곁에 앉아 있던 태경이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마치 빛과 같은 반응 속도였다.
“세연아, 정신이 좀 들어?”
“물…….”
“금식이래.”
“아…….”
목 안쪽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게다가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 세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좁혀진 미간을 보고 덜컥 가슴이 내려앉은 태경이 불안감을 이기지 못하고 매달렸다.
“왜, 너무 목말라? 아니면 수술할 때 많이 아팠어? 지금은 어때? 괜찮아?”
“…….”
질문 세례가 쏟아지는 가운데 세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 마취가 덜 풀려 멍한 가운데에도 어이가 없었다.
“아픈지 어떻게 알아요. 마취한 상태였는데.”
세연은 태경을 흘겨보며 말했다.
“태경 씨가 유난 떨어서 전신 마취했잖아요.”
아이를 품에 안아 볼 수 있게 부분 마취를 하고 싶었는데, 전신 마취를 택한 건 오직 태경 탓이었다. 두 손을 벌벌 떨면서 네가 잘못되면 어쩌냐는 반응에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게 왜 유난이야.”
그걸 유난이라고 말하는 게 태경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다들 그를 보고 유난이라고 하는 것인지.
“네가, 네 건강이 위험할 수도 있다고 했잖아.”
네가 잘못될 거라고 생각하면, 또다시 이전처럼 정신을 잃고 누워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 생각만으로도 너무나 끔찍했다.
태경은 순식간에 땀이 배어든 손으로 세연을 붙잡았다.
“네가 위험하면, 나는…….”
온 세상이 무너질 것만 같아서, 너무 두려워서 견딜 수가 없는데.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입 밖으로 내뱉는 것만으로도 온몸에서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우태경 씨가 나한테 제일 위험한 존재예요.”
기도 차지 않는다는 듯이 혀를 찬 세연의 입에서 나온 말이 가슴에 비수처럼 꽂혔다.
“자기 맘대로 임신시킨 사람이 누군데.”
……두 번 다신 안 그럴게.
고개를 푹 숙이고 개미보다도 작은 목소리로 읊조리고 있으려니, 세연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엄마에게 혼나는 아이처럼 주눅 든 남자가 과연 예전에 자신이 알던 우태경이 맞을까. 그런 생각으로 남편을 밉지 않게 흘겨보던 세연이 고개를 돌리며 아이를 찾았다.
“아기는 어디 있어요? 건강해요?”
“응. 건강하대.”
“우태경 씨 닮았어요?”
“아니.”
태경은 그 말에 간신히 미소를 되찾았다.
“널 닮아서 아들인데도 너무 예뻐. 엄마가 안 예쁜 데가 없어서 그런지.”
“이렇게 부었는데 무슨 소리예요.”
세연은 살짝 눈을 흘기며 아쉬움이 섞인 소리를 했다.
“남자아인데 당신 닮았으면 좋았을걸.”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로는 우태경을 닮은 아이가 태어나길 바라 온 그녀였다. 처음 본 순간부터 반하지 않을 수 없는 남자였으니까. 제 아들도 그렇게 멋지길 바랐다.
그러나, 아이를 본 순간 이런 아쉬움 같은 건 곧바로 씻겨 내려갔다.
“아…….”
세연이 눈물을 글썽였다. 제 아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존재가 세상에서 가장 특별해 보이는 게 바로 부모의 마음이었다.
“안녕, 아가야. 엄마야.”
엄마라는 말이 입에서 잘 떨어지지 않았다. 세연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아기를 보았다. 태경이 그녀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 주자 머쓱한 듯 애써 웃으며 말했다.
“엄마보단 아빠 닮았는데.”
아빠.
아빠라는 말로 불린 건 처음이라, 잠시 당황하던 태경이 이내 아이를 보며 씩 웃었다. 옅은 갈색 머리칼도 모로 보나 세연을 닮았는데, 그녀의 눈엔 제가 이렇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안 예뻐할 거야?”
“어떻게 안 예뻐해요. 이렇게 예쁜 아기를.”
“나도 그래.”
태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널 만난 후로 이렇게 사랑스러운 존재는 처음이야.”
사랑스러운 아기를 볼 수 있는 시간은 짧았다. 너무 짧아서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두 사람은 병실로 돌아갔다.
“하지만, 나한테 너보다 사랑스러운 사람은 없을 거야, 세연아.”
아기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리 떨어진 뒤에야 태경은 세연의 귀에 작게 속삭였다.
“건강하게 아이 낳아 줘서 고맙고, 무엇보다 네가 건강해서……. 정말 너무 고마워.”
그는 세연에게 연신 고맙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무리 말해도 제 맘을 다 전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보다 조금 더 제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말이 있어, 태경은 아직 부기가 덜 빠진 세연의 얼굴과 여전히 부푼 배 위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그러니까 이제 우리, 결혼하자.”
“갑자기 무슨…….”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삽시간에 세연의 두 눈에 눈물이 고였다.
어느새 태경의 손에 들린 눈앞의 반지가 영롱하게 빛났다.
태경이 내민 결혼반지에 그녀가 눈물을 글썽이며 애써 고개를 끄덕인 순간, 그는 사랑하는 여자의 이마 위에 깊이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
* * *
“나, 결혼해.”
세연은 청첩장을 내밀었다.
“뭐?”
갑작스러운 결혼 소식에 친구들이 전부 입을 떡 벌리고 소리를 질렀다. 연애 한 번 하지 않던 그녀가 갑자기 결혼이라니. 게다가, 결혼 상대가…….
“우태경?”
거의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커다래진 친구들의 두 눈이 일제히 세연을 응시했다.
“내가 아는 그 우성 그룹 우태경 맞아?”
“근데 이젠 우성에서 나온 거 아니야?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대체 어떻게 만난 건데?”
“…….”
세연은 잠시 입을 다물고 빙긋 미소 지었다. 어쩌다 그 남자와 결혼까지 이르게 되었냐는 말에 무어라 답해야 할지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지금까지 지나온 그 모든 일들을, 때로는 씁쓸했고 때로는 달콤했던 그 모든 시간을 대체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도저히 설명할 길이 없어, 세연은 그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냥, 같이 일하다 보니까.”
“아, 그래! 예전에 세연이네 팀장님이었잖아!”
“와, 같이 일한다고 결혼하는 게 말이 돼?”
친구들은 중간 과정이 너무 생략된 말이 아니냐며, 언제부터 연애를 시작했는지 어쩌다 결혼을 하기로 한 건지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러니까, 그게…….”
세연은 최대한 에둘러 대답했지만, 이미 친구들의 머릿속에는 드라마 한 편이 그려진 모양이었다.
“미쳤다, 미쳤어! 그게 가능해?”
친구들이 얼굴을 붉히며 연신 소리를 지르는 걸 보면서, 세연은 저도 모르게 쑥스러운 마음에 수줍게 웃었다. 예상은 했지만 훨씬 더 격한 반응이었다.
벌써부터 이런 반응이라니.
전할 소식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쩌면 한층 더 커다란 충격이 될 소식이 남아 있었다.
“근데.”
잠시 머뭇거리던 세연은 호들갑스러운 친구들을 진정시키며 겨우 입을 열었다.
“실은 할 말이 한 가지 더 있어.”
“뭔데?”
“있잖아, 나 사실…….”
그사이, 임신해서 아이를 미리 낳았다는 얘기를 하자 다들 기절초풍해서 거의 뒤로 넘어갈 지경이었다. 연애 한 번 안 하던 정세연이, 속도위반에 심지어 벌써 애 엄마라니.
“뭐? 네가 애 엄마라고?”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친구들이 양옆에서 세연을 붙잡고 마구 흔들어 대며 외쳤다.
A대 경영학과 수석을 차지할 때도, 우성전자에 입사했을 때도 이런 반응은 아니었다. 그러니, 갑작스러운 결혼 소식도, 속도위반도 모두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던 것만은 확실했다.
* * *
몇 달 뒤.
아름다운 계절, 5월이 찾아왔다.
초여름의 싱그러운 바람이 머리칼을 흩뜨리는 계절의 끝자락.
그날은 바로 세연의 청첩장에 새겨진 날짜였다.
결혼식은 언론에 공개되지 않고 간소하게 치러졌다.
회사 사람들이나 가까운 친구들을 초대하긴 했으나 식장 내부에는 휴대폰을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는 조건이 붙을 정도로 통제되었다. 아이의 얼굴이 알려지길 원치 않은 탓이었다.
어쩌면 신부 대기실에 앉아 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신부를 감추려는 건지도 모르고. 이미 감출 수조차 없을 정도로 두 사람의 이야기는 일파만파 퍼져 나간 지 오래였지만.
재벌 3세 팀장과 평범한 사원의 만남.
우성 그룹에서 유일하게 불미스러운 일에 엮이지 않은 데다, 평범한 여자와의 사랑을 택하기 위해 우성을 나왔다는 일화까지 알려지며, 태경에 대한 대중의 호감도는 하늘을 찔렀다.
그러니, 세연에 대한 궁금증이 치솟는 것도 당연했다.
대중들이 대체 그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하는 가운데, 태경의 신부가 A대 출신에 미모의 재원이라는 소문이 알음알음 퍼지며 모두가 두 사람의 만남을 축복했다.
“하아…….”
사랑과 부러움을 한 몸에 받는 오늘의 주인공은 정작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써 심호흡을 하고 있었다.
신부 대기실에 앉아서 하객들을 맞이하는 가운데, 저 멀리서 아이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분명히 잠들었다고 했는데도 자꾸 깨서 울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순한 아이라 한번 잠들면 깨는 법이 없는데도 그랬다.
실은 아이가 깰까 봐 불안한 게 아니라 다른 이유가 그녀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모양이었지만.
과연 이걸 불안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아마 긴장감 탓이겠지.
세연은 떨리는 숨결을 내쉬며 차가워진 손을 주물렀다. 한 끼도 먹지 않았는데, 물 한 방울도 입에 댈 수 없었다. 정신이 없어서 그렇기도 했지만, 너무 긴장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잘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말해 줄 남자가 손을 당장 잡아 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미리 신부의 모습을 보지 않아야 잘 산다는 미신 아닌 미신 때문에 대기실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 신랑이었다.
신랑, 우태경.
신부, 정세연.
세연은 차게 식은 손으로 청첩장을 더듬었다. 입가에는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
나란히 찍힌 둘의 이름이 거짓말 같았다. 언젠가 남몰래 꿈으로만 그려 보던 그날이 정말로 찾아왔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그때였다.
“정 대리님!”
왁자지껄한 무리가 신부 대기실 안으로 들어서는 소리에, 세연은 청첩장을 등 뒤로 감추고 고개를 들었다.
“다들 오셨어요?”
세연이 환히 웃으며 하객들을 반겼다. 조금 전의 긴장한 기색은 찾아볼 수조차 없을 정도로 환하고 아름다운 미소였다.
“세상에…….”
“너무 예뻐요!”
“정말 너무 예쁘다, 세연 씨.”
세연을 본 모두가 저마다 한마디씩 감탄의 말을 내뱉었다. 새하얀 드레스로 몸을 감싼 그녀는 누가 보더라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새 신부였다.
갑작스럽게 퇴사하던 날,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늘지고 어두운 모습이 지금 그녀와 동일인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을 정도로. 눈앞의 세연은 아름답고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정 대리님, 그렇게 퇴사하셔서 다들 걱정 많이 했는데.”
“이제 대리님이 아닌가? 어쨌든 정말 축하드려요.”
“축하해, 세연 씨.”
다들 저마다 웃으며 축하의 인사를 건네지만, 지난날 갑작스러운 퇴사와 결혼 소식 사이에 무언가 모종의 관계가 있으리라고 짐작하는 건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사이에 벌어진 일들을 그들이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아니, 짐작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세연은 그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땐 정말 몸이 안 좋아서요. 별일 아니었는데, 걱정해 주셔서 다들 감사합니다.”
“그런데, 실은 퇴사하실 때 이미 임신 중이셨던 거 아니에요?”
임신 초기이지만 배가 살짝 부른 주은이 귓속말이라도 건네는 듯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슬쩍 속도위반? 하고 물었다. 뒤늦게 들어선 박 과장이 그런 주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주은 씨도 짓궂게 참.”
어차피 결혼식 전에 태어난 아이이니 속도위반이 아닐 수 없는데 굳이 그걸 콕 찍어서 말할 필요가 있나.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철이 없을꼬 하는 표정의 박 과장을 본 주은이 헤헤 웃으며 입을 다물었다.
한편 세연은 밀려드는 하객들을 맞이하고 빠르게 기념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 틈을 타서 박 과장은 회사 사람들과 함께 대기실에서 나왔다.
“엄마, 나 화장실.”
“알았어.”
자꾸만 보채는 세윤의 손을 잡고 화장실로 향하던 차였다.
“왔어?”
박 과장은 태경의 하객으로 온 인사팀 동기를 마주치고 환히 웃었다. 동기는 팔짱을 끼고 서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거 봐. 내가 뭐랬어?”
그녀가 시니컬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인사과에서 일하며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들은 수없이 많이 봤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그 정세연이 다른 사람도 아닌 우태경의 옆자리를 꿰찰 거라고 상상이나 했느냐고. 게다가 속도위반으로 아이까지 낳아서 결혼식장에 들어설 줄이야.
“이래서 사람 겉으로만 봐서는 모르는 법이라니까.”
“그러게.”
보채는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 안으며 박 과장이 웃었다. 언젠가, 태경의 결혼 소식에 충격을 받던 세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차라리 잘못 들은 것이길 바라던 제 복잡한 심경도.
갑작스러운 퇴사 소식을 끝으로 연락이 닿지 않던 그녀가 결혼 소식을 알렸을 때, 박 과장은 무척이나 놀랐지만 금세 더없이 기쁜 마음이 되었다.
언제나 세연이 행복하길 바라던 그녀였으니까.
“축하해, 세연 씨.”
딸을 데리고 화장실에 다녀온 뒤, 박 과장은 다시 신부 대기실로 향했다. 행복으로 가득한 얼굴인 그녀에게 딸과 함께 축하를 전하기 위해서. 다행히 대기실은 조금 한산했다.
“박 과장님.”
세연은 박 과장의 손을 붙잡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언제나 그녀의 삶에 기쁨이 가득하길 빌어 준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이유 없는 친절을 베풀어 준 인생에 몇 안 되는 사람. 그러니, 만난 것만으로도 너무나 감사한 그런 인연이었다.
“정말…… 너무 감사해요.”
두 사람이 눈시울을 붉히며 서로 축하와 감사를 전하는 사이, 이제 어디든 신나게 뛰어다닐 정도로 자란 세윤이 대기실을 한 바퀴 돌고 와서는 또박또박 물어 왔다.
“아기 봐도 돼요?”
“그럼.”
세연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신난다!”
다른 결혼식과 달리 아기가 있다는 말에 이미 들떠 있던 세윤이었다. 아이는 허락을 받기가 무섭게 대기실에서 뛰어나갔다. 한껏 흥분한 아이의 등 뒤로 커다란 리본이 나풀거렸다.
“세윤아, 엄마랑 같이 가야지!”
그런 딸의 뒤를 박 과장이 다급히 쫓아갔다. 어찌나 재빠른지 인파 사이로 섞여 드는 아이의 손을 낚아채 단단히 붙잡고는 신부 대기실 뒤편의 작은 방으로 향했다.
“어머.”
박 과장은 저도 모르게 입을 가리며 탄성을 내뱉었다.
세연을 닮았는지 순한 기질의 아기는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아직 어린 아기에 불과하지만 이목구비 하나하나가 뚜렷하고 잘생긴 아이였다.
“엄청 예쁘다!”
세윤은 소리를 질렀다. 조금 전 보았던 천사처럼 예쁜 이모랑 아기가 똑같이 생겼다면서 조잘대었다.
“쉿, 아기 깰라.”
딸에게 주의를 주긴 했지만, 박 과장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아들은 엄마를 닮는다는 말이 맞는지, 새하얀 턱시도를 입은 잘생긴 아기에게선 예쁘장한 느낌이 물씬 풍겼다.
“히잉, 같이 놀고 싶은데…….”
“지금은 코 자니까, 이따 일어나면 세윤이가 놀아 줘.”
“응, 알았어!”
세윤은 함박미소를 지으며 손뼉을 쳤다. 신나는 일이 있으면 박수하며 활짝 웃는 게 아이의 버릇이었다. 몇 번인가 손을 마주치던 아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제 머리를 가리켰다.
“예쁜 머리핀도 꽂아 줄 거야.”
“머리핀?”
“응. 이렇게.”
잠시 눈을 휘둥그렇게 뜨던 박 과장은 딸이 가리키는 제 머리 위 커다란 머리핀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 미소는 딸아이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얘는 남자애야, 세윤아.”
“말도 안 돼!”
딸이 입을 가리며 소리를 지르자, 박 과장은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며 쉿 하고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딸을 껴안은 그녀 역시 곧 웃음이 터져, 두 사람은 이마를 맞대고 웃었다.
“…….”
그사이, 천사 같은 아기는 여전히 곤히 잠들어 있었다. 얼마나 좋은 꿈을 꾸는지 입가와 통통한 볼에 사랑스러운 미소를 띠고서.
* * *
잠시 후.
예식이 시작되자, 식장 내의 불이 모두 꺼지고 정적만이 흘렀다.
환한 조명이 단 한 사람을 비추었다.
“…….”
태경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감히 꿈에서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던 순간이 지금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잔잔한 음악과 함께 한 걸음씩 제게로 걸어오는 신부를 보니 눈시울이 뜨거워져, 금방이라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
그런 태경을 향해 환히 미소 지으며 다가오는 여자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았다. 여신이라고 해도 좋고 그 뭐라 해도 좋았다. 그 존재가 무엇이라도 눈앞의 여자를 사랑할 테니까.
태경은 눈물을 참기 위해 주먹을 힘껏 말아 쥐며 제게로 다가오는 신부를 한없이 바라보았다.
세연아.
언젠가 상상했던 너의 결혼식에서, 너는 언제나 내게서 한 걸음씩 멀어졌었다.
나는 그런 너를 무력하게 지켜보는 수밖에 없었고, 너는 그대로 내게서 떠나갔다.
서로에게 맞는 길을 찾아서, 갈라진 각자의 길을 걸어가는 게 맞는 거라고. 애써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너의 결혼식이 아닌, 나의 결혼식에서 널 보고 있는 게 현실이 맞는 걸까. 어쩌면 모든 건 망상이고 환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던 순간, 신부가 제 앞에 멈춰 섰다.
“태경 씨.”
아, 사랑스러운 네 목소리.
언제 들어도 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은 그 음성에 태경은 떨리는 손을 신부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곧, 두 사람은 허공에서 떨리는 손길로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
“…….”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며 웃는 순간, 여기저기서 박수와 함성 소리가 들렸다. 행복한 비명에 파묻힌 채, 태경은 꿈을 꾸듯 제 신부를 바라보았다.
다른 남자가 아닌, 제 곁에 선 신부를.
정세연.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사랑.
그 한마디로 모든 마음을 담을 수 있다면, 나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겠지. 그리고 그 말이, 오롯이 너를 뜻한다는 걸 이제는 안다.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같은 방향으로 돌아섰다.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리는 곳을 향해서. 귀여움을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높은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곳에 조그마한 인영이 어렸다.
“지호야!”
세연을 닮은 아들이 꽃수레를 보행기 삼아 까르르 웃으며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태경의 가슴이 너무 벅차서 이보다 심장이 더 크게 뛸 수 없을 것 같았다.
꿈에서는 언제나 자신을 스쳐 지나가 다른 남자의 품에 안기던 아이였다. 그 아이가 제게 입을 오물거리며 아빠, 하고 달려오는 게 꿈만 같았다.
아니, 정말이지 꿈만 같은, 아니 꿈보다도 더 아름다운 현실이었다. 꿈 따위에는 비할 바 없이 행복했다.
“꺄아!”
태경은 사랑하는 아이를 번쩍 들어 올려서 한 팔에 안고, 다른 팔에는 사랑하는 아내를 금방이라도 깨질 것처럼 소중히 감싸 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까르르 웃는 아이를 따라 환하게 웃으며 세연과 함께 아들의 볼에 입을 맞추었다. 여기저기서 플래시가 터지는 사이, 태경은 세연의 귓가에 입술을 대었다.
“세연아.”
더없이 사랑스러워, 도저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너.
네게 전할 단 하나의 말이 있다면.
그건 바로…….
“사랑해.”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이 자리에서 약속할게.
“영원히.”
너와 우리 아이만을 사랑하겠다고.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