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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내가 네 개새끼야
08 뒤늦은 고백
에필로그-Happily ever after
07 내가 네 개새끼야
비포장도로 위를 달리는 낡은 차가 탈탈 소리를 내었다. 시리도록 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좁고 울퉁불퉁한 길을 서행하는 차는 끊임없이 비틀거리고 삐걱거렸다.
몸도, 마음도 온통 고장 난 자신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지금 태경은 이루 표현할 수 없는 환희에 휩싸여 있었다. 온몸의 세포가 하나씩 깨어나, 꼭 다시 태어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아무것도 상관없었다.
이깟 고물차를 몰면서도 구름 위를 달리는 것 같았으니까.
이제 곧 정세연을 만난다. 오직 그 사실만이 중요했다.
드디어 제 것을 되찾는 순간이 온 것이다. 이제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가리라. 그녀를 붙잡아서 다시 제 곁에 묶어 둔다면, 그는 금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근거 없는 희망이 차올랐다. 끝이 보이지 않던 기나긴 터널 끝에 빛이 스며드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
태경은 이내 저 멀리 점처럼 보이는 사람을 발견했다.
새하얀 등대를 등지고 선 여자의 뒤로 거센 파도가 일렁였다. 에메랄드빛의 물결이 방파제에 부딪치고 나면 이내 부글거리는 거품이 되어 다시 스르르 잠겨 들기를 반복했다.
눈부신 햇살이 잔물결 위로 새하얗게 부서지고 여자의 온몸을 감싸던 그 순간.
태경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했다. 운전대를 잡은 손에는 바짝 힘이 들어갔다.
저 멀리 손짓하는 여자의 형체가 한층 더 또렷하게 보였다.
너다.
너였다. 정말 너였다.
눈을 감아도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명백하게 너였다.
태경은 여자에게 시선을 고정해 둔 채 달렸다.
조금 수척해진 것 같기도 했지만, 여전히 예쁘고 사랑스러웠다. 이 세상에서 제게 그런 것이라곤 오직 하나뿐이라, 눈을 감고도 알아볼 수 있는 단 한 사람.
정세연.
정말로 정세연이었다.
“……세연, 세연아.”
메마른 입가에서 지독히도 달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다란 입매 끝에 버석한 미소가 어렸다. 이름의 주인이 결코 듣지 못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끊임없이 불렀다.
얼마나 더 달렸을까.
어느새 정세연의 부드러운 머리칼이 거센 바닷바람에 흩날리는 게 보였다. 머리를 쓰다듬으면 네 머리칼이 손가락 사이로 사라락 소리를 내며 빠져나가곤 했는데.
그때의 감촉이 고스란히 떠올라 온몸이 전율했다. 벅차오르는 희열감을 견딜 길이 없어서, 당장이라도 차에서 뛰어내려 정세연에게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지. 난 널 온전히 데려가야만 하니까.
그는 어리석은 짓거리를 하지 않기 위해 운전대를 한층 더 꽉 붙잡고 서서히 속도를 줄였다.
이대로 조금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
그의 정세연은 아무것도 모르고 다급하게 태경을 향해 손을 흔들어 댔다. 부른 배를 소중히 감싼 채로. 감히 꿈에도 바라지 못했던 일이다. 다른 남자가 아닌 제 아이를 가진 정세연이라니.
게다가 자신을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마구 흔드는 모습은 마치 태경에게 어서 오라고 반기는 것 같았다. 오랜만이라고, 보고 싶었다고.
태경은 저도 모르게 덩달아 손을 마주 흔들 뻔하다가, 핸들을 잡은 손을 꽉 말아 쥐면서 속으로만 외쳤다.
그래, 세연아. 어서 와.
가슴이 미친 듯이 뛰었다.
정세연이 다시 제게 돌아왔다.
아, 네가 정말, 내게 다시…….
입가에 흘러넘치는 환희를 주체하지 못하던 그는 삽시간에 기쁨을 가라앉혔다. 한낱 감정 때문에 일을 그르쳐서는 안 되었다.
“…….”
제 의지로 감정을 제어하는 일 따위를 해 본 게 얼마만인가. 아무리 약을 쏟아붓듯이 먹어도 되지 않더니, 정세연을 보고 나니 그제야 몸이 제 의지대로 움직였다.
태경은 고개를 들어 잠시 정세연을 보았다. 너무도 사랑스러운 여자가 두 눈 가득 담겼다.
그래. 나는 네가 있어야 해.
그러니까, 세연아.
난 두 번 다시는 널 놓치지 않을 거야.
* * *
잠시 후, 낡은 차는 여자의 앞에 멈춰 섰다.
경계 어린 눈빛으로 다가온 정세연이 이내 차에 올라탔다. 차 문이 열리는 순간, 비릿한 바닷바람 사이로 정세연 특유의 체향이 코끝에 밀려왔다.
“…….”
그 순간, 태경은 이를 세게 악물었다. 좋아서 미칠 것만 같았다.
드디어 네가 내게 온 것이다. 그것도 두 발로 걸어서 제게 돌아왔다.
그는 치솟는 흥분과 떨림을 애써 가라앉히며, 문을 잠갔다.
철컥.
낡고 오래된 차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잠겼다.
아.
이제 어떤 얼굴로 널 돌아볼까.
온몸이 전류가 흐르는 듯한 희열감에 휩싸였다. 정세연에게 처음 고백 받던 그날처럼. 사냥감을 이리 저리 몰아서 기어코 덫에 밀어 넣은 맹수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내 눈앞의 너는 현실일까. 이것 역시 환상이나 꿈이 아닐까.
아니, 아무래도 상관없어.
세연아, 네게 어떤 말부터 건네면 좋을까.
“…….”
그때였다.
“기사님, 죄송한데 빨리 좀 가 주세요.”
세연의 작고 보드라운 손이 그의 어깨를 머뭇머뭇 짚었다.
너다.
정말로 너다.
환상이나 꿈 따위가 아닌, 현실의 정세연이었다. 과거에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며 어루만지던 손길이 몸에 닿는 순간, 더는 망설일 것도 없었다.
“저, 기사님.”
태경은 환희에 몸을 떨며 그 손을 붙잡았다.
“세연아.”
두 번 다시는 놓치지 않을 손을.
“잘 지냈어?”
* * *
“어, 어떻게 당신이……!”
태경을 본 세연은 귀신이라도 만난 것처럼 새하얗게 질렸다.
아니, 차라리 귀신을 보았다면 이처럼 끔찍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잘못 본 건 아닐까. 이 모든 게 꿈은 아닐까.
세연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며 현실을 부정하려 애썼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현실 앞에서 그녀가 할 수 있는 유일한 거라곤, 본 적도 없는 최 기사를 찾는 일이었다.
“최 기사님이…… 분명히……!”
“서운하네. 이제 내 얼굴 못 알아봐?”
그럴 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얼굴.
꿈에도 잊을 수 없던 남자.
우태경.
바로 그 우태경이었다.
너무도 끔찍한 그 남자, 우태경이 제 손을 붙잡은 채 뺨에 가져다 대었다.
“네가 그렇게 사랑하던 얼굴이잖아.”
그러고는 눈을 감고 세연의 손바닥에 뺨을 비볐다. 아이처럼.
“이, 이거…….”
세연의 눈에 그는 마치 사랑을 원하는 어린애처럼 보였다. 제게 그런 것 따윈 바라지도 않는 주제에, 가증스럽게도.
“이거 놔요!”
그녀는 붙잡힌 손을 뿌리치려 몸을 떨었다. 눈앞의 남자가 끔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
제 반응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한참이나 저 좋을 대로 뺨을 비비던 남자가 잠시 후에 고개를 들었다. 처음으로 마주 본 정면에 세연은 저도 모르게 경악했다.
얼굴이, 왜…….
세상이 무너져도 이 남자만은 절대로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남자가 지금 한 번도 본 적 없는 수척하고 메마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신을 보는 눈빛도 정상적이지 않았다.
그게 자신을 잃었기 때문일까. 어쩌면, 그에게 자신이…….
……아니. 그럴 리 없었다.
교통사고를 당했으니까 그렇겠지. 이 남자의 상태가 자신과 무슨 상관일까.
관성처럼 엉겨 붙으려는 어리석은 기대를 떼어 내며 세연이 고개를 돌렸다.
“저기요! 누구 없어요?”
세연은 여전히 한 손을 태경에게 붙잡힌 채, 창문을 두드렸다. 밖에서 도와줄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도 그랬다. 벼랑 끝에 내몰린 듯 절박한 상황에서는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가 없었다.
“…….”
그걸 보는 태경의 입가에는 실소가 터져 나왔다. 이 와중에도 정세연이 귀엽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거리를 하는 어리석음마저.
그리하여 자신에게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는 모습에도 비참한 심정이 들지 않았다. 도리어 정세연이 이곳에서 빠져나갈 길이라곤 없다는 반증인 것 같아, 기쁜 마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맞아. 아무도 없어.”
“…….”
“괜히 힘 빼지 마, 세연아. 어차피 밖에서도 못 여니까.”
이곳은 인적이 끊긴, 버려진 등대였다. 게다가, 누가 있다고 하더라도 자신을 도와줄 리 없었다. 그 사실을 절감한 세연의 눈이 검게 젖어 들었다.
그때였다.
저 멀리서 여러 대의 차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이곳과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고급스러운 차가 진입하는 걸 본 세연은 한층 더 아득한 얼굴이 되어 파르르 떨리는 눈을 감았다.
“조금만 기다려.”
태경이 그런 세연의 뺨을 쓸며 말했다.
“이제 집에 가야지.”
“싫어!”
“집으로 돌아가자, 우리.”
그 말을 끝으로, 앞좌석에서 내린 태경이 가드에게 무어라 말하는 게 보였다.
“안 돼! 싫어……!”
우리 같은 소리 하지 마.
당신과 내가 함께 돌아갈 집은 이 세상에 없어.
그렇게 말을 끝맺기도 전에, 세연은 낡은 차에서 억지로 끌려 나왔다.
“가자.”
남자의 손에 세게 붙잡힌 순간, 발버둥 치려던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거부할 때마다 남자에게 제압당한 걸 기억하고 있는 몸은 무력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아니야.”
처참한 현실을 부인하려는 듯 세연이 고개를 저었다. 눈앞의 남자가 거짓말 같았다.
분명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피를 많이 흘렸는데, 그래서 병원에 있다고 했는데.
그랬던 남자가 어떻게 알고 자신을 찾아와 이렇게 다시 데려가려는 걸까.
아무것도 믿을 수 없었다.
“어떻게…… 당신이 대체 여길 어떻게 알고…….”
“진정해. 배 속에 있는 내 아이도 놀라니까.”
아이 얘기에 세연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애초에 자신을 잡아 두기 위해 아이를 만들려던 그였다. 아이의 존재를 알게 된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만지지 마!”
세연은 다가오는 손을 세게 뿌리치고 본능적으로 배를 감싸 안았다. 아버지 자격도 없으면서 마치 제 새끼처럼 구는 태도에 신물이 올라왔다. 당장이라도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너 같은 새끼 자식 아니야. 내 아이야.”
세연은 자신을 결박하고 있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증오와 분노가 뒤섞인 눈길이었다.
“정말 서운해서 못 살겠네.”
그러나, 태경의 얼굴에는 동요의 빛이 조금도 없었다. 지금 그에게는 오직 정세연을 되찾았다는 기쁨밖에 없는 듯했다. 한때 갖고 놀다가 잃어버렸던 장난감을 되찾은 아이처럼.
“같이 만들어 놓고 왜 그래, 세연아.”
그가 세연의 귓가에 잔인하게 속삭였다.
“나랑 하루 종일 붙어먹은 거 기억 안 나?”
“어떻게 그런……!”
세연은 귀를 틀어막았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더러운 말에 제 귀가 더러워지면, 아이에게도 고스란히 영향이 갈 것 같았다.
그러나 배 속에 든 아이 귀를 틀어막을 방도는 없어, 세연은 분에 못 이겨 씨근덕거리며 태경을 노려보았다.
“네가 성모 마리아도 아닌데 성령으로 잉태했을 리는 없고.”
“…….”
“나한테 빠져 있던 네가 다른 남자를 만난 것도 아니고.”
“…….”
“여러모로 내 새끼가 맞는데 대체 왜 그래.”
우태경의 손이 강제로 세연의 배를 쓰다듬었다.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이 끔찍한 감각이었다.
“내 새끼 배고서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다 왔어, 세연아. 응?”
세연은 파르르 떨리는 눈을 감았다.
그의 말대로 배 속에 든 건 우태경의 아이였다.
한때는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지만,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남자의 아이를 소중한 보물인 양 배 속에 품고 있었다.
대체 왜. 무엇을 위해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키려던 배 속의 아이를 원망하게 된 현실이 너무도 끔찍해 차라리 혀를 깨물고 죽어 버리고 싶었다. 이렇게 붙잡혀 있지 않았다면 당장이라도 몸을 돌려 바다로 뛰어들었을지도 몰랐다.
“이제 집에 가자, 세연아.”
너랑 나, 우리 아이 셋이서.
그렇게 덧붙이는 말에 세연은 다시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 감옥으로 다시 끌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놔! 절대 안 가!”
너 같은 새끼랑은 일 초도 같이 있기 싫어! 놔, 이거 놓으라고!
그렇게 외치며 한참이나 몸부림치던 세연은 이내 태경의 품 안에서 축 늘어졌다. 애초에 상대가 안 되는 일이었다. 아무리 두 팔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해 봐도 소용없었다.
제가 아무리 발을 들어 올려도 태경의 가슴에나 겨우 닿았다. 그러니 이 커다란 남자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한때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고 따스했던 품이, 이제는 너무 끔찍해 한 순간도 견딜 수 없는 것으로 추락하기까지.
“…….”
그 모든 일을 잊으려는 듯, 세연은 혼절했다.
* * *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태경은 내내 정세연을 품에 끌어안고 있었다.
“…….”
발버둥 치다 분에 못 이겨 쓰러진 여자는 마치 곤히 잠든 것처럼 보였다. 고르게 내뱉는 옅은 숨소리도 평안했다. 이러고 있으려니 과거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한때, 그 시절로.
그때조차도 감히 그리지 못했던, 제 아이를 가진 정세연이 너무 사랑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태경은 여자의 뺨을 가늘게 쓸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
어느 곳 하나 빠짐없이 어여쁜 여자의 이마와 뺨, 입술, 그리고 부른 배 위로 입을 맞추었다. 경건함마저 느껴지는 조심스러운 입맞춤이었다.
그때였다.
“……아.”
아빠를 알아본 걸까.
입술 아래 희미한 태동이 느껴져, 태경은 저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내 아이.
너와 내 아이.
우리 아이.
아이라는 말에 희열감을 느끼는 날이 올 줄이야.
태경은 그렇게 생각하며 세연의 배를 한층 더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진료 기록이나 초음파 사진을 고려해 주 수를 계산해 보았을 때, 지금쯤 안정기에 접어들었을 거라고 했다.
안정기.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배 속에 들어 있는 아이가 그들에게 안정을 되찾아 줄 것만 같았다.
“…….”
태경은 세연이 지내던 집에서 떼어 온 초음파 사진을 꺼내어 들여다보았다. 이 자그마한 것이, 아직 제대로 된 인간 같지도 않은 형체가 그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싫어! 이거 놔! 안 갈 거야!’
조금 전,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온몸으로 거부하던 정세연이 떠올랐다.
지금은 완강하게 저항하지만, 아이가 태어나면 모든 걸 포기하고 제 곁에 주저앉을 것이다. 얼마가 걸리든 상관없었다. 정세연은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래. 너는 그런 사람이니까. 마음이 여리고 착해서, 끔찍하게 싫은 남자의 아이를 소중히 배고 있는 여자니까.
자신을 보는 시선에서는 경멸과 증오만이 느껴졌다. 그 시선마저도 지금 그에겐 햇살 같았다. 정세연을 잃은 뒤, 끝없는 어둠으로 빠져들었던 그였다.
아무리 자신이 싫다고 울고 발버둥 치며 거부해도, 그런 그녀가 제 곁에 있다는 사실만이 유일한 세상의 빛이자 희망이었다. 기나긴 어둠에서 빠져나갈 유일한 통로였다.
태경은 세연을 끌어안고 입술 위로 입을 맞추었다. 정신을 잃고 축 늘어진 여자는 말캉하고 보드라운 입술을 내주었다. 그 감촉이 못 견디게 좋았다.
손가락 사이로 흐트러지는 머리칼의 감촉이나 보드라운 뺨 역시 그랬다. 어디 하나 사랑스럽지 않고 좋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사랑스러움이란 추상을 빚어내면 이 여자가 될 것 같았다.
사막에서 드디어 물 한 방울을 찾아낸 사람처럼, 그는 제 의지대로 밀어내지 못하는 여자의 입술을 베어 물고 마구 빨았다. 무뢰한처럼 입 안에 제 혀를 밀어 넣고 타액을 빨아 삼켰다.
달았다.
너무 달아서 끔찍했다.
단맛이라면 질색인 그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단맛이 바로 정세연이었다. 너무 사랑해서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 이미 미쳐 버린 지 오래였다.
……내가 정말 미친놈이 맞긴 하네.
그의 본모습을 아는 가족들이 전부 미친놈이라며 혀를 내두를 적에는 그러려니 하고 말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별로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남들이 뭐라고 해도 좋았다.
그는 미친놈이었다.
정세연을 만난 뒤론 언제나 그랬다는 걸, 그는 이제야 절감했다. 우태경은 정말이지 미쳐 있었다. 어떤 약도 듣지 않을 정도로 단단히 돌아 버린 지 오래였다.
이 광기를 잠재울 수 있는 건 오직 정세연 하나뿐인데, 바로 그 정세연이 너무 좋아서 미쳐 버린 지 오래였다.
그러니 그는 약이 없는 불치병에 걸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마셔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는 바닷물을 통째로 들이켜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세연아.”
더없이 사랑스럽고 예쁜 것.
이 세상에서 유일한 나의 것.
태경은 광기에 찌든 눈길로 세연을 내려다보았다.
새빨갛게 부푼 입술 아래, 새하얀 목덜미가 희게 빛났다. 한때 표식처럼 남겼던 제 흔적이 온통 지워진 목덜미는 이제 누구의 것도 아니라는 듯 텅 비어 있었다.
“…….”
씁쓸함과 안도감이 동시에 교차했다.
제 것도 아니지만 타인의 것이 되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그랬다.
자신을 피해 도망친 정세연이 이준혁과 단둘이 지냈다는 말에 눈을 까뒤집었던 그였다. 그것도 언젠가 그녀가 남편과 함께 지내길 바란다던 바닷가 마을의 조그마한 집에서.
‘너 같은 새끼 자식 아니야.’
그럼 누구 새끼인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이준혁과 붙어먹는 정세연의 모습이 떠올라서 그만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같이 만들어 놓고 왜 그래, 세연아.’
다시 만나면 진심 어린 좋은 말들만 전하고 싶었는데. 그런 다짐 따위는 날려 버린 지 오래였다. 감정 조절 같은 건 단 하나도 제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
‘나랑 하루 종일 붙어먹은 거 기억 안 나?’
제멋대로 움직이는 주둥이가 여자가 싫어할 만한 말을 미친 듯이 쏟아 내었다.
끔찍하다는 표정으로 귀를 막으며 진저리치는 걸 보면서도.
눈앞의 여자를 자극하고 도발해서라도 제게 반응하는 걸 보는 게 좋았다. 자신이 싫어서 날뛰는 걸 보는 것마저도 좋았다.
아직 제게 일말의 감정이라도 남아 있다는 증거 같아서.
애증이던 사랑이 증오로 뒤집힌 순간이었지만, 그마저도 사랑의 일부인 것 같아서.
“하아…….”
우태경이 발정 난 개새끼처럼 들러붙어 입을 맞추고 목덜미를 물고 빠는 동안, 정세연은 단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그래도 좋았다. 너무 좋아서 미친 지 오래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게 저 혼자만의 감정이라도 상관없었다.
언제는 그러지 않았던 적이 있었나. 한낱 마음 따위야 갖지 못한다 해도, 몸만이라도 좋았다. 곁에 있어 주기만 한다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신음하며 새하얀 살결을 온통 울긋불긋하게 물들여 갔다. 엉망이 된 몰골을 내려다보니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되었다. 정세연의 몸만이라도, 아주 일부라도 제 것이 된 것 같았다.
“…….”
우태경은 희번들한 눈길로 주변을 살피며 정세연을 끌어안았다.
제 주인을 지키려는 충직한 개처럼.
* * *
세연이 가까스로 눈을 떴을 때, 그녀는 절망했다. 창밖의 풍경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서울이었다.
서울로 돌아왔다.
이제는 벗어날 수 없는 끔찍한 현실로 돌아온 것이다.
도저히 믿을 수 없어서 세연은 다시 눈을 감았다. 이제 자신을 꼭 안고 있는 남자의 품에서 벗어날 길이라곤 없을 것이다. 하지만…….
배 속에서 아주 미약한 태동이 느껴졌다. 저 말고 다른 일로도 이미 충분히 괴로운 걸 알아서인지, 엄마에게 제 존재를 드러내는 일이 없는 아이였다.
아니야.
세연은 끔찍하다는 듯 눈을 감았다. 하필이면 이 남자의 품에 안긴 순간 아이의 태동을 느끼게 되다니. 마치 아이가 아빠를 알아본 것만 같아서, 너무나도 끔찍했다.
이런 사람은 네 아빠 아니야.
너는, 너는 내 아이야.
언젠가 좋은 남자를 만나서, 좋은 남편을 맞이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제 아이에게는 자신과 달리 좋은 아빠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배 속의 아이에게 영영 아빠 같은 건 없을 것이다.
우태경은 절대로 아빠가 될 수 없는 남자였다.
그럴 자격도, 그럴 입장도 안 되는 인간이었다. 아이 따위는 그저 자신을 가두기 위한 무기로 쓸 뿐, 곧 다른 여자와 결혼까지 앞둔 남자였다.
……미안해.
하필이면 내가 고작 이런 사람을 만나서. 아무것도 모르고 바보같이 사랑해서. 그래서 너를 원치 않는 아이로 만들고, 아빠 없는 아이로 만들어서 미안해.
가슴속에서 피눈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단지 제가 이런 남자에게 잡혀서 인생을 망쳤다는 것보다 세상의 빛 한 번 못 본 아이가 어떻게 살아가게 될지 생각하니 미칠 것 같았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배 속의 아이에게 한없이 죄스러웠다.
너를 지켜 주겠다고 했는데.
너만은 행복하게 해 주려 했는데.
나와 달리…… 너에겐 좋은 부모와 가정을 갖게 해 주고 싶었는데.
“…….”
그 모든 걸 앗아 간 남자가 자신을 결박해 왔다. 되돌아온 장난감을 절대로 놓치지 않으리라는 듯이. 소중해서가 아니라, 그저 자신이 제 것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리하여, 세연은 이대로 주저앉을 수 없었다.
절대로.
하지만, 대체 어떠한 방도가 있을까.
그녀는 빠져나갈 길이라곤 없는 지독한 현실에서 도망치듯 혼절했다.
* * *
“깼어?”
“…….”
세연은 몇 번인가 정신을 잃은 듯 잠들었다 깨어났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품에 끌어안고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는 다정한 손. 마치 예전 같았다.
지난 5년.
행복하다고 믿었던 시간이었다. 언젠가는 그 역시 자신을 사랑해 줄지도 모른다는 부질없는 희망과 기대를 품었던 시간이기도 했고.
함께하던 시간들이 이제는 아주 오래된 과거처럼 느껴졌다.
그 모든 것이 오래된 상자에 담긴 빛바랜 옛날 사진 같았다. 이제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없는, 아무 힘도 없는 추억이었다. 왜곡된 기억은 오히려 자신을 조롱하기까지 했다.
“…….”
세연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세연아.”
“…….”
제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러 오는 남자가 꿈같았다. 언젠가 꾸었던 부질없는 꿈처럼 남자가 자신을 재차 불렀다.
“세연아.”
귓가에 와 닿는 남자의 목소리는 파도처럼 부서져, 다시금 한없이 밀려 나갔다.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고 새하얀 물거품이 되어 이내 다시 파도 아래로 잠겨 들었다.
어차피 다 거짓이면서. 어리석은 환상을 품게 만든 것뿐이면서.
그런데도…….
자신을 사랑스럽게 바라보던 눈길. 다정하게 뺨을 쓸던 손과 입을 맞춰 오던 붉은 입술.
더 이상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것들이 잔상처럼 남아 자신을 괴롭혔다.
“…….”
세연은 그만 눈을 감아 버렸다. 아무것도 보지 않고, 아무것도 듣지 않기 위해서.
“…….”
이제 남자는 더 이상 자신을 부르지 않았다. 그저 손끝으로 제 몸을 가만히 쓸었다.
남자의 손이 이마와 뺨을 지나, 잠시 입술에 머무르다 목덜미를 간질였다. 그 익숙한 손길에 세연이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그걸 알아채기라도 한 건지, 남자가 목덜미께를 지분거렸다. 어쩐지 손끝에 와 닿는 감각이 따끔거렸다. 조금 화끈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잠시 미간을 찌푸리던 세연이 다시 눈을 떴다.
“…….”
가늘게 뜨인 두 눈에 경악이 어렸다. 유리창에 비친 제 모습을 확인한 탓이었다. 새하얀 목덜미가 온통 울긋불긋하게 물들어 있었다.
전염병이라도 걸린 것 같은 이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과거에 그의 집과 호텔에 감금되어 있을 때, 매일같이 보던 제 모습이었다. 마치 제 것이라는 표식이라도 남겨 둔 듯한 모습.
“……미친 새끼.”
세연이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도망쳐서라도 부숴 버리고 싶던 오만한 남자의 흔적이 목덜미에 똑똑히 아로새겨져 있었다. 그걸 본 두 눈에 불꽃이 튀었다. 어떻게든 되갚고 싶었다. 자신을 너덜너덜하게 만든 만큼 눈앞의 남자에게도 상처를 내고 싶었다.
“우태경 씨.”
“일어났어?”
자신을 보는 따스한 눈길.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정한 목소리.
가증스럽고 역겨웠다.
“말 안 한 게 있는데.”
세연의 차가운 눈빛과 비아냥 섞인 음성이 태경의 가슴을 찔렀다.
“이 아이, 이준혁 씨 아이예요.”
“뭐라고?”
그 말을 들은 남자가 세연을 억세게 붙잡았다.
“다시 말해 봐.”
조금 전까지의 조심스러운 손길과 달리, 한층 거센 힘이 느껴지는 우악스러운 손길이었다. 그 손이 세연의 옷을 찢어발기려는 듯 목덜미 근처를 움켜쥐었다.
“내가 가진 건 이준혁 씨 아이라고요. 그러니까, 이제 더는…….”
“아, 그래?”
세연을 온몸으로 내리누르며, 태경이 씩 미소 지었다. 예상과 달리 여유로운 미소였으나, 점차 거칠어지는 태경의 손길에 당황한 세연이 말을 더듬었다.
“왜, 왜 이래요.”
설마 임신 중인데.
임신 중인 여자를 이전처럼 감금하고 강제로 안으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던 세연이었다.
눈앞의 남자를 뭘 보고 믿었을까. 애초에 제 옆에 붙잡아 두기 위해 억지로 임신시킨 것부터 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 아닌데.
“왜?”
남자는 대체 뭐가 문제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미소까지 짓고 있었다.
“들릴까 봐 걱정돼서?”
태경이 턱으로 앞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앞 좌석이 막혀 있는 차였다. 소리가 들릴 일은커녕 남에게 보일 일도 없었다.
“난 네가 화대도 주길래 이런 차는 흔히 타 봤을 정도로 아주 크게 성공한 줄 알았는데, 꼭 그렇지도 않은가 봐?”
화대.
그 말을 들은 세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도망치던 날, 우태경에게 보냈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우태경 씨 화대예요.]
[당신이 날 산 게 아니라, 내가 당신 산 거예요.]
[몸값, 비싸게 쳤어요.]
[나만큼은 아니지만.]
자신을 우습게 여겼던 남자에게 되갚아 주고 싶었다. 이제 영영 도망갈 수 있을 것이라 믿고 보낸, 기만과 조롱이 가득한 메시지였다.
지금 자신을 보는 우태경의 눈빛이 명백하게 말하고 있었다.
감히 너 따위가 나를.
그래. 이 남자는 그걸 견딜 수 없는 것이다. 감히 제게 기어오른 개새끼를.
세연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이거 놔요.”
“그래도 비싸게 쳐 줬으니까 몸값은 해야지.”
“하지 말아요! 임신 중인 거 몰라서 하는 소리예요?”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제 새끼를 가졌다는 걸 모르는 것도 아닌데.
“어차피 내 새끼도 아니라며.”
“왜 이래요. 다, 당신 아이인 거 알잖아요.”
“글쎄. 확인해 보기 전까진 모르겠는데.”
“이거 놔, 놓으라고!”
경악한 세연이 몸부림쳤지만 소용없었다. 다른 남자의 이름이 세연의 입에서 나온 뒤로 그의 눈빛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이런 남자를 도발하려 들다니. 제 어리석음을 탓하는 사이 세게 입술을 부딪쳐 온 남자가 입 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으읍!”
거칠고 두툼한 혀가 입 안을 휘젓고 세연의 혀를 빨아 대었다. 막아 내거나 벗어날 수 없을 정도로 거친 입맞춤이었다.
세연은 미친 듯이 발버둥 쳤다. 오직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으읍, 으으읏, 놔, 으읏!”
그러나, 아무리 해도 벗어날 수 없었다. 비명마저 남자의 입술에 틀어막혀 입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세연은 제 입 안을 정신없이 휘젓고 샅샅이 핥아 대는 남자의 혀를 깨물었다. 순식간에 훅 끼치는 피비린내가 역했다. 입덧을 다시 할 것처럼 구역질이 치밀었다.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한참이나 제 입술을 빨아 댄 남자가 임신하며 한층 더 커다랗게 변한 가슴을 움켜쥐었다. 커다란 손안에 꽉 차는 말캉한 살이 손가락 사이를 비집고 나왔다.
“아읏!”
남자의 강한 악력을 느끼기가 무섭게, 순식간에 가슴께가 젖어 들었다.
“…….”
세연은 저도 모르게 경악하며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자신도 알지 못했던 일이었다. 가슴을 세게 주무르거나 움켜쥔 일이 없어 몰랐던 것이다.
“왜 벌써 젖이 나와?”
태경이 세연의 가슴을 한층 더 세게 주무르며 물었다. 임신 중에 젖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는 사실을 그로서는 알 길이 없었으니, 그저 흥미롭다는 뉘앙스였다.
“나도 몰라, 이거 놔요! 제발…… 아파! 아프단 말이야!”
몸부림을 치자, 남자가 부드럽게 가슴을 주물렀다. 민감해진 감각 탓에 세연이 저도 모르게 허리를 떨며 몸을 뒤로 물리려 했다.
그러나, 손아귀에서 힘이 조금 빠졌다고 해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도리어 남자는 세연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 마치 젖을 빨기라도 할 것처럼.
“안정기라고 들었는데, 문제없지 않아?”
“그게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야. 놔! 놔, 이거! 저리 치워!”
“왜 상관이 없어. 애 아빠가 알아야지.”
“당신은 아빠 아니야. 내 아이야!”
“왜 아빠가 아니야. 아깐 내 아이 맞다며. 이준혁도 아니고 나도 아니면, 뭐 성모 마리아처럼 성령으로라도 잉태하셨나?”
우태경이 한껏 비아냥거렸다.
언젠가, 아이를 낳아 기르는 제 첫째 누나를 두고 마더 테레사인지 성모 마리아인지 모를 행세를 하고 있다고 비웃던 그였다.
절대로 그런 사람이 아닌데 애를 낳더니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생겼는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대관절 이유를 모르겠다던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런 사람은 절대로 애 아빠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아이를 사랑할 줄도 모르고, 사랑할 생각도 없는 사람이었다.
한때는 그걸 환경의 탓으로 돌렸다. 넘치는 부를 갖고 태어났으나 자신 못지않게 불행하게 자란 그를 동정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제는 결코 아니었다.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했다고 해서 모두가 자식에 대한 애정이 없는 건 아니다. 그건 세연 자신만 보더라도 명백했다.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에 오히려 자식을 더 잘 키우고 싶었다.
그런 제 아이가 이 남자 때문에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에 비참한 존재가 되었는데. 애 아빠를 운운하며 이런 식으로 굴다니.
“당신이 대체 무슨 상관이에요.”
머리끝까지 화가 난 세연이 떨리는 음성으로 소리쳤다.
“당신 아이라고 해도, 이 애가 당신한테 무슨 의미가 있다고!”
“왜 의미가 없어, 세연아.”
태경이 피식 웃었다.
그건 결국 제 아이가 맞다고 인정하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정세연의 입에서 나오니, 확인이라도 받은 기분이 들었다.
반면 세연은 남자의 태연자약한 미소에 속이 메슥거렸다. 그 잘난 미소를 보는 것만으로도 토할 것 같았다.
“네 배 속에 든 것 아니었으면 지금 내가 널 찾을 수 있었겠어?”
역시나.
예상은 한 치도 틀림이 없었다.
우태경은 지금 배 속의 아이를 그저 자신에게 채워 둘 족쇄나 수갑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임신하지 않았다면, 네가 과연 내 곁에 돌아왔을까?”
“애를 빌미로 날 잡아 두겠다고 하는 거예요?”
이미 알고 있었지만, 상대의 입을 통해 다시 듣는 건 달랐다.
그 순간, 그가 죽어 간다던 우희경이 말이 떠올랐다.
잠시만 와 달라고. 얼굴만 비추고 나면 다시 정세연 씨를 보내 주겠다고. 그렇게 말했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말이었다. 우태경이 자신을 다시 보내 줄 리 있나.
그가 어떤 사람인데.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경을 헤맸다던 그에게 어떠한 변화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들이 그러하듯, 당신도 조금쯤은 정신을 차렸을지 모른다고.
그건 그저 헛된 기대였다.
아니. 당신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어. 앞으로도 절대로 변하지 않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세연은 우태경에게 매달렸다. 그리고 빌며 애원했다.
“제발 이러지 말아요.”
그에겐 아이에 대한 권리가 없었다. 아이를 함께 만들었다고 해서 곧바로 부모가 될 권리가 생기는 건 아니었다. 그는 제 아이의 부모가 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우태경 씨 아이인 거 세상에 알리지 않고 나 혼자 키울 거예요. 그러니까, 제발…….”
“내 아이인데 왜 너 혼자 키워.”
당연한 말을 또다시 하나하나 설명해야 했다. 그 지난한 과정을 다시 겪어야 한다는 사실에 몸서리치면서도 세연은 입을 열어 또박또박 말했다.
“이 아이를 나 혼자 낳으면, 난 미혼모가 될 거고 아이는 아버지 없는 자식이 될 거예요.”
제 입으로 말하고 그걸 다시 제 귀로 들으니 확인 사살이라도 당하는 것 같았다. 비참하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참혹한 결과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우태경 씨 옆에서 아이를 낳으면…….”
세연은 저도 모르게 말을 멈추고 몸을 떨었다. 끔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난 내연녀에 불륜녀가 될 거고, 이 아인 사생아예요.”
우태경과 이채린의 결혼식이 연기되었다고 했다. 그게 언제쯤인지는 몰라도, 어차피 그는 결혼할 것이다. 자신이 아닌 다른 여자와.
그러니, 제발.
“당신 자식이잖아요. 제발 그렇게 만들지 말아요. 제발 부탁이에요.”
그러지 않아도 이미 난 충분히 비참하니까. 더 이상 날 처참하게 만들지 말아 줘요.
세연은 참담한 심정으로 애원했다.
“미혼모 자식보단 우성 그룹 사생아가 낫지 않아?”
하지만, 되돌아온 건 비웃음뿐이었다.
“지금 네가 아이를 혼자 키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닐 텐데.”
“…….”
“우성 그룹 사생아로는 못 키워도, 신원 불명의 미혼모 자식으로는 키울 수 있다 이건가?”
“…….”
“그게 네 대단한 모성애인가 봐?”
도리어 제 선택이 자신만을 위한 선택이라는, 그런 비웃음만이 되돌아왔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말아요.”
세연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당신이 그렇게 만들었잖아요! 당신 때문에, 내 삶이, 내 인생이 이렇게 되어 버린 건데!”
“아니지. 네가 선택했잖아.”
네 손으로 내린 선택이 아니었느냐고.
태경이 잔인하게 말했다.
“내 곁에 있기 싫어서.”
그러니까 네 책임이지.
그렇게 덧붙인 남자가, 확인 사살이라도 하듯이 방아쇠를 당겼다.
“그러게 처음부터 얌전히 내 옆에 있었으면 좋았잖아.”
너도, 이 아이도.
내연녀든 사생아든, 그 무엇으로든.
“어떻게 자기 자식을……. 당신은 정말 인간도 아니야.”
“뭘 새삼. 그걸 이제 알았어?”
“놔, 이 개새끼야!”
세연이 분에 못 이겨 씨근덕거렸다. 그리하여 그 순간 우태경의 눈동자에 스친 빛을 보지 못했다. 그녀의 눈에 보이는 건 오직 비열한 웃음뿐이었다.
“그래. 개새끼는 나야. 세연아.”
“…….”
“네가 아니라, 바로 나라고.”
“…….”
“내가 네 개새끼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처음부터 말했잖아. 한번 물면 안 놓을 거라고.”
처음 고백하던 날의 경고.
그게 이런 식으로 되돌아올 거라고, 과연 상상이나 했을까.
“그러니까, 두 번 다시 도망갈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애초에 네 두 발로 걸어 들어온 거잖아.
남자가 한층 더 잔인하게 속삭였다. 우태경이라는 끔찍한 감옥에 발을 들인 건 그녀라고.
하지만, 이제 세연은 더 이상 제 책임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내 의지가 아니었다는 거, 알고 있어요. 당신이 그렇게 만든 거잖아.”
“아, 이제 알았어?”
이제야 깨달았느냐는 표정을 지으며, 태경이 세연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근데 어쩌지? 이미 늦었는데.”
그렇게 말하며 익숙하게 옷을 끌어 내린 태경이 세연의 가슴 위로 얼굴을 파묻었다. 속옷 위로 넘치듯이 꽉 차오른 살의 감촉을 느끼다 이내 속옷마저 벗겨 버리고 젖꼭지를 입에 물었다.
“하지 마, 하지 말라니까!”
“소용없어, 세연아.”
그 말 그대로였다.
가슴에 달라붙은 얼굴을 밀어내려 애썼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태경이 젖을 빨아 대기 시작하자, 세연은 저도 모르게 몸을 비틀며 신음했다.
새하얀 젖 방울이 사방으로 튀다 못해 가슴 아래로 흘러내렸다. 코끝에 끈끈한 신음을 흘리며 젖을 빠는 남자가 찰거머리 같았다.
“그만해! 제발, 제발 그만해!”
세연이 울음을 터뜨리고 그를 향해 마구 손을 휘두르며 때렸지만, 남자는 미동조차 없었다. 도리어 세연의 손목을 한 손에 그러쥐어 결박하고 한층 더 거세게 젖꼭지를 빨아 대었다.
임신 전에는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부푼 가슴에서 젖이 빠져나가는 감격이 생경해서 세연은 한층 더 크게 울부짖었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 쳐도 소용이 없었다.
“흐흐흑, 흐흑, 흑…….”
세연은 결국 흐느끼며 몸을 축 늘어뜨렸다. 그러고는 남자의 품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한 채, 강제로 젖을 빨렸다. 젖이 흘러나오며 민감해진 젖꼭지가 평소보다 빠르게 부어올랐다.
“흐윽, 으으읏, 흣!”
남자가 퉁퉁 부은 젖꼭지를 죽죽 빨다가 혀로 간질일 때마다 저도 모르게 허리가 움찔거렸다. 너무 싫었다. 끔찍하게, 진저리쳐질 정도로 싫었다.
하지만, 몸은 여전히…….
세연은 다시금 까무러치듯 눈을 감아 버렸다.
눈을 감으면 두 번 다시 깨어나지 않기를 빌면서.
* * *
꿈을 꾸었다.
대학에 갓 입학했던, 희망찬 그 시절의 꿈.
대학에 입학했다는 건 여태까지 접하지 못한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그에 더해, 좋은 대학에 입학했다는 것은 한층 더 폭넓은 길이 열릴 가능성을 의미했다.
A대에 입학한 뒤, 세연은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보고 만났다.
학교에는 이름만 들으면 알 수 있는 집안의 딸도 있었고,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를 비롯한 유명 인사들도 있었다. 이전의 세상에서는 실제로 만나게 되리라곤 꿈도 못 꾸던 사람들이었다.
비록 온종일 아르바이트며, 과외며 학점 관리에 치여서 살았지만, 접할 수 있는 세상이 조금 넓어졌다는 이유만으로도 대학 생활은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버티기 힘든 순간도 많았지만, 그래도 자신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 자리를 잃었을 무렵 다행스럽게도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어 자취 비용을 아낄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 따른 일 중 하나였다.
그 무렵, 세연은 우성관에서 종종 수업을 듣곤 했다.
집안 내에 A대 출신이 여럿 있었던 덕분인지, 캠퍼스 내에는 우성 그룹에서 지어 준 우성관이 있었다. 그곳은 사회대 건물이었고, 세연은 심리학과에서 열리는 과목을 찾아 들었다.
경영학 주 전공에 통계학 복수 전공.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것처럼 빠듯한 와중이었지만 심리학 강의는 청강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게 욕심이라는 생각이 들던 시기에도 그랬다.
먼 미래에 좋은 부모가 되고 싶은 마음으로 시작한 청강이었으나, 강의를 통해서 세연은 이전에 미처 생각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배웠다.
모든 사람과 꼭 잘 지낼 필요는 없고, 상처만 주는 관계는 벗어나는 게 답일 수 있다는 것. 화목한 가정이란 사실 처음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환상에 불과했다는 것도 그랬다.
인간의 기나긴 역사에서 그런 개념이 생긴 게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니라고. 가족이 반드시 사이가 좋아야만 한다는 생각이 오히려 여러분을 불행하게 만들 수 있다고.
좋은 가족을 갖지 못해 항상 박탈감을 갖고 있던 세연에게는 조금 위안이 되는 말이었다.
하지만, 대학에 와서 친해진 친구들의 가정은 달랐다. 겉보기엔 곱게 자란 아가씨 같은 세연의 외모가 한몫했던 모양인지 그녀의 주변에는 유복한 가정의 친구들이 꽤 많았는데, 그들은 대개 부유하면서도 화목한 가정을 가지고 있었다.
막연히 부자들은 불화할 거라고 생각해 온 세연에게 그 사실은 한층 더 커다란 충격이 되었다.
드라마에서 흔히 보듯이 부자들은 가족들 사이가 좋지 못할 거라고 여겼으니까. 진정한 사랑 따위는 하지 않고, 조건에 맞춰서 결혼을 하며 커다란 정 없이 아이를 기를 것이라고.
그러나 세연이 친구들을 통해 두 눈으로 보게 된 것은 도리어 그와 정반대였다. 물론 저마다 각자의 사정이 없는 집이란 세상에 없으니, 친구들이 자란 환경이 완벽하다고만 할 수는 없지만, 경제적 풍요와 여유로움을 기반으로 한 가족 간의 유대는 무엇보다 끈끈했다.
시험이 끝나고 엄마나 아빠와 데이트를 한다며 집에 가는 친구들의 뒷모습을 세연은 이따금씩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자신은 부모님을 상대로 데이트 같은 말을 입에 담아 본 적이 없었다. 여유라곤 부릴 새도 없이 고된 삶에 찌들어 있거나 가장의 역할은 내팽개치고 오직 밖으로만 나도는 부모였으니까.
친구들과 세연의 차이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방학이 되면 온종일 아르바이트를 하고 토익 점수를 올리느라 바쁜 세연과 달리, 친구들은 매번 해외여행을 갔다. 어려서부터 영어권 국가에 살다 와, 원어민이나 다를 바 없어 영어 공부에 힘쓰지 않아도 되는 친구들도 있었다.
더러는 마음이 맞는 친구들끼리 함께 몇 달씩 유럽 여행을 가기도 했다. 친구들은 함께 가지 못하는 세연을 위해 기념품을 사다 주었다. 그녀의 입장을 이해해 주는 좋은 친구들이었다.
하지만, 세연과 달리 친구들은 집안 형편에 대한 걱정이라곤 별로 없었다. 오직 앞으로 취업이 잘될지, 어떤 진로를 택하면 좋을지 같은 얘기를 할 때만 말이 통했다.
이미 스무 살이 되면서 부모님에게 손을 벌려 본 적이 없는 세연과 달리, 친구들은 지속해서 부모님의 경제적 지원을 받을 생각이었다. 그 정도만 하더라도 독립이라고 말했다.
만일 취업하더라도 부모님께 월급보다 많은 금액의 용돈을 받기로 하고, 월급은 모두 저축할 예정인 친구들도 있었다.
다달이 나가는 자취 비용으로 동동거리는 세연과 달리, 친구들은 그런 걸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학교와 5분 거리에 위치한 오피스텔을 사 주시는 부모님이 있었으니까.
이렇게 집안 형편이 크게 차이가 나는데도, 친구들은 세연을 무시하지 않았다. 기본적으로 좋은 친구들이기도 했지만, 세연이 열악한 상황에서도 언제나 좋은 성적을 거두기 때문이었다.
‘너는 진짜 괴물이야.’
경영대 전체 수석으로 졸업하던 날. 한 친구는 세연을 가리켜 괴물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세연이 얼마나 큰 뜻을 품고 얼마나 좋은 곳에서 일할지 관심을 갖는 동기들도 많았다.
‘졸업하자마자 취업이라니. 역시 너답다.’
‘우성전자 입사한 거 정말 축하해, 세연아!’
아무리 A대생이라고 해도 이제 대학이 취업을 장담하지 못하게 된 세상이었다. 세연이 졸업과 동시에 칼같이 우성전자에 입사하자 대부분 축하 인사를 건넸지만 더러는 아쉬워하기도 했다.
‘네 머리로 행시를 보지, 왜 취업을 하려고 해.’
학교의 절반 이상이 한 번쯤은 행정 고시를 준비하는 분위기 속에서 이에 도전할 생각조차 없는 세연은 조금 특이하게 비추어지기도 했다.
‘…….’
조금 무례하다면 무례할 수도 있는 말에, 세연은 그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남들이 보는 것과 달리 그녀 자신은 대단한 성공이나 명예를 바라지 않았다.
세연이 바라는 건, 우습게도 평범한 삶이었다. 이처럼 미친 듯이 노력해야만 겨우 평범이라는 것의 언저리라도 맴돌 수 있어 노력한 것뿐이다. 워낙 가진 게 없는 그녀이니까.
안정적이고 연봉이 높은 직장에 다니며 돈을 모으고,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고 싶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굳이 결혼을 해야 할 필요는 없다며 비혼주의인 친구들도 있었지만, 개중에 누군가는 일찍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기도 했다.
세연 역시 결혼하고 싶었다.
제 친구들의 부모님처럼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싶었다. 좋은 남자를 만나, 제 아이만은 좋은 가정에서 잘 기르고 싶었다.
하지만, 쉽사리 남자를 사귀기는 두려웠다. 대학 시절부터 그랬다. 인기는 많았지만 남자가 영 불편했다.
그녀가 아는 남자 중 제대로 된 이가 아무도 없어서 그런지도 몰랐지만, 아무래도 두려운 이유는 따로 있었다. 엄마처럼 남자를 잘못 만나서 인생을 망칠까 봐서였다.
그게 단지 기우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 모든 노력과 걱정도 부질없이, 제 인생은 이제 송두리째 무너졌으니까.
* * *
눈을 떴을 때.
세연은 다시금 태경의 집에 갇혀 있었다.
집이라는 이름을 가진 감옥이었다. 처음부터 그랬다. 자신만 몰랐을 뿐.
“…….”
집에 돌아온 뒤 태경과 수없이 싸웠다. 싸우고 울고 빌고 달래고 모든 걸 다 해 보았다. 하지만, 아무것도 소용없었다. 결론은 하나뿐이다.
“우태경 씨.”
그리하여, 세연은 종국에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집으로 끌려온 이상, 이제 어떠한 희망도 없었다. 더 이상 희망 같은 걸 품을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이곳에 있을게요.”
그녀는 겨우 입을 열어 금방이라도 깨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이 바라는 대로, 얌전히. 그럼 되는 거죠?”
세연은 고개를 들어 흐릿한 눈으로 태경을 보았다.
“어쨌든 당신 아이라면서요.”
분명히 보고 있는데, 남자가 무슨 표정을 짓는지 알 수 없었다. 남자의 얼굴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게 눈물 때문이라는 걸, 세연은 아주 뒤늦게 깨달았다.
“당신한테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게요.”
“…….”
“그냥, 이 아이 낳아서 조용히 기를 수 있게 해 주세요.”
“…….”
“당신 아이라는 거, 우리만 알면 되잖아요.”
세상은 아이의 존재를 모르길 바란다고.
세연은 피눈물을 흘리는 심정으로 애써 말했다. 태어나기도 전에 지워진 존재였다.
“…….”
“당신 곁에서 당신 아이 엄마로 살게요.”
그러니까 그 이상은, 아무것도 바라지 말아 줘요.
그렇게 말하고 세연은 눈을 감았다. 너무 지쳐서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었다. 눈물이 흐르는데, 왜 흐르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눈물을 떨어뜨리며 그와의 싸움을 떠올렸다.
이 집에 되돌아오던 날부터, 숱하게 싸우던 일들을.
* * *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뿌옇고 흐릿한 기억 속에서 태경이 그녀에게 말했다.
“애새끼만 아니면 넌 당장이라도 다른 남자 만났겠지.”
“…….”
“넌 항상 그 생각밖에 없었어. 아니야?”
“…….”
“네가 원하는 대로 결혼하고 화목한 가정 꾸려서 살 수 있는 남자라면 넌 날 떠났을 거잖아. 그게 네가 바라는 거니까.”
“…….”
왜 당신이, 왜 결혼을 앞둔 당신이.
마치 내가 당신을 버리고 떠나는 것처럼. 내가 당신을 배신하는 것처럼 말하는 걸까.
세연은 볼 안쪽 살을 세게 깨물었다.
눈앞의 남자와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함께 살고 싶었다. 단란한 가정이니 화목한 가정이니 하는 그런 것. 누군가는 신화나 다름없고 실상 가짜에 가깝다는 그걸 가져 보고 싶었다.
비록 허상에 불과한 거라고 해도, 누군가는 실제로 손에 넣는 것이니까.
그건 오래도록 세연의 꿈이었다. 하지만, 그의 곁에 있기 위해서 포기하려 했던 꿈이었다. 언젠가부터 자신의 꿈은 우태경이 되었으니까. 이런 사람인 줄도 모르고.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세연은 바르르 떨며 되받아쳤다.
“지금 나한테 이러는 순간에도 당신은 결혼을 앞두고 있잖아요.”
“그거면 돼?”
숱한 싸움을 거친 뒤, 처음으로 변주된 대답이었다.
“내가 결혼하지 않으면. 그럼 돼?”
“…….”
한때는 그걸 바랐다.
당신이 결혼하지 않기를 바랐다. 결혼이 아니더라도 내가 당신 곁에 있을 수 있기를 바랐다. 내 욕심이 법적으로 어긋나지 않는 선에 있기를, 간절히 바랐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내가 원한다고 그럴 것도 아니잖아요.”
기대하는 게.
기대하고 또다시 실망하는 게.
그 비참함을 다시 느끼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
“상관없어요.”
세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요. 당신 같은 사람이 결혼을 하든 말든 이미 나한텐 상관없는 일인데.”
입가에는 스스로에 대한 자조 섞인 미소만이 떠올랐다.
“이제 와 그런 게 다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 * *
또 언제였던가.
세연의 기억은 어느 날 오후로 향했다.
너무 많이 싸워서 모든 게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안개라도 낀 것처럼 흐릿한 기억 언저리. 언제쯤인지는 모르겠지만, 우태경이 가정부에게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이전에 일하던 사람과 달리 싹싹한 가정부는 미묘하게 세연의 어머니를 닮아 있었다. 처음 해 보는 일이라며 세연에게 주책스럽게 말을 건네는 것 역시 그랬다.
일부러 그런 사람을 골랐을까.
그럴 수도 있었다.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절연한 어머니를 닮은 가정부를 고용할 리 없겠지만, 우태경이라면 가능한 일이었다. 마음이 약해진 자신을 멋대로 휘두르려는 거겠지.
세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실소를 지었다. 아니, 짓는다고 생각했지만 입가에는 아무런 미동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멍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있었다.
“전복은 죽으로 해 주세요. 뜨거운 거 잘 못 먹으니까 조금 식혀 주시고.”
“…….”
누가 들으면 끔찍하게 자신을 위하기라도 하는 듯한 말이었다. 어차피, 자신을 마음대로 할 거면서. 아무렇게나 대하고 원하는 대로 휘두를 거면서.
가정부에게 여러 가지를 부탁한 우태경이 세연에게 다가왔다.
“다녀올게.”
“…….”
세연은 등을 돌린 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보는 태경의 심정은 참담했다. 언제나 제게 등을 돌리고, 오직 불신만이 가득한 뒷모습을 보여 주었다.
어떻게 해도 도저히 당신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참담하기는 세연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시 만난 이후로는 이전처럼 강제로 취하거나 손을 대지는 않았지만, 이미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기분이었다.
마치 도망치기 이전으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아니, 사실이 그랬다. 이전이나 다를 바 없었다. 자신을 등 뒤에서 지켜보는 시선마저 감옥 같았다.
“세연아.”
남자의 부름에 세연은 움찔 몸을 떨었다.
한때 제게 인사를 시키기 위해 가슴을 빨던 남자가 떠올라, 저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그래도 임신 중이라는 걸 고려해 주기라도 하는 건지, 남자는 더 이상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그 대신, 기어코 배 위에 입을 맞추고 나갔다.
“다녀올게.”
저 멀리 문이 닫히자, 세연은 눈을 감았다 떴다.
“…….”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집 안에 전복죽 냄새가 났다.
잠시 후, 그릇 가득 담은 전복죽을 쟁반에 받쳐서 들고 온 가정부가 환히 웃으며 말했다.
“아유, 사모님. 이게 다 뭐예요? 남편분이 이렇게 살뜰하셔서 정말 좋으시겠어요.”
남편.
그 말이 멍하니 누워 있던 세연을 자극했다.
“남편 아니에요.”
“예?”
가정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저 법적으로 미혼이에요. 남편 없어요.”
세연은 독기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저 사람은 곧 결혼할 거고, 그럼 저는 내연녀 정도 될 거예요.”
내연녀. 그렇게 말하는 것도 웃겼다. 그나마 제 처지를 가장 듣기 좋게 말하는 거 아닌가.
“어쩌면, 불륜녀나 상간녀일 수도 있고.”
그사이, 몹시 경악한 얼굴이 된 가정부가 손을 내저었다.
“아……. 제가 그만 큰 실수를……. 어쩌죠. 제가 잘 몰라서…… 아이고, 죄송해요.”
가정부는 혹시나 잘리는 게 아닐까 싶어 전전긍긍하며 세연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이분이 무슨 잘못이 있어.
이를 악물고 가시 돋친 말을 내뱉던 세연은 이내 몸을 축 늘어뜨렸다. 엄마뻘 되는 여자의 얼굴을 보자 가슴이 아렸다.
“아니에요, 아주머니. 신경 쓰지 마시고 먼저 들어가 보세요.”
“제가 일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눈치가 없었어요. 죄송해요, 사모님.”
“죄송하실 일 아닌데요, 뭘. 내일 뵐게요.”
“예, 그럼 들어가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도망치듯 떠난 가정부는 그 말을 끝으로 영영 사라졌다.
세연은 두 번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었다.
* * *
모든 걸 포기한 이후.
세연은 거의 죽은 사람처럼 초점을 잃었다. 하지만, 그런 자신과 다르게 남자는 멀쩡했다.
사고로 다 죽어 간다더니, 전혀.
집에 돌아온 뒤로 세연이 본 그는 이상이라곤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밥도 잘 먹고 잠도 잘 잤다. 몸이 어디 하나 크게 고장 난 것도 아니다.
망가진 건 오직 저뿐이었다.
때때로 그 사실에 지독한 좌절감이 들었다.
모든 걸 포기한 지금도 이따금 분노만은 치밀었다.
남자는 시도 때도 없이 세연의 곁에 와서 그녀를 살뜰히 보살피려 들었다.
손끝 하나 스치지 않더라도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쉰다는 사실조차 싫었다. 지금은 자신을 건드리지 않더라도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의심과 분노만이 커져 갔다.
“저리 가요.”
세연은 들끓는 분노를 담아 남자를 밀쳐 내었다. 그러고는 사납게 노려보며 말했다.
“당신, 사고 난 것도 다 거짓말이었지?”
그렇게 물으면서도 머릿속에서는 남자가 차에 치이고 피를 흘리는 영상이 수없이 재생되었다. 도저히 조작하거나 거짓으로 꾸며 낼 수 없다는 걸 알지만, 그런 것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그냥 내 마음 흔들기 위해서 만들어 낸 거잖아! 날 또 속이고 이렇게 가둬 두려고!”
미친 듯이 소리 지르던 세연이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깨물었다. 사고 소식에 저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렸다는 걸 들킨 것만 같아서 죽고 싶었다.
“…….”
그런 세연을 보는 태경의 심정은 한층 더 참담해졌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녀에겐 오직 불신만이 가득했다.
언젠가 사경을 헤맬 때, 정세연이 절대로 돌아오지 않겠다며 완강히 거부했다던 우희경의 전갈이 떠올랐다.
만약, 그날 사고로 제가 죽었다고 하더라도 정세연은 장례식조차 오지 않았을 것이다.
당연한 일이다.
이제 여자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
아니, 언제는 자신을 사랑했나. 사랑한다는 착각에 빠져 있었을 뿐.
정세연은 단 한 순간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 모조리 자신이 꾸며 낸 환상에 불과했다.
“……그래.”
태경은 입가에 비열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차피 넌, 날 사랑하지 않을 테니까.
“어차피 흔들리지도 않았잖아.”
그 말을 들은 세연은 분노에 못 이겨 바들바들 떨었다.
대체 어디까지 자신을 기만하려는 걸까.
우희경이 그랬다.
그가 죽어 간다고. 정말 위험한 상태라고. 뉴스에 보도된 것보다 오히려 실제 상태가 더욱 좋지 않다고. 그 모든 게 마치 자신이 떠났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듯했다.
덜컥 겁이 났다. 사랑했던 사람이 정말 잘못될까 봐.
그 순간,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었다.
당신이 나를 잃어서 조금이라도 괴로운 걸까.
차가 쌩쌩 달리는 차도로 걸어 들어가던 남자. 허공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무어라고 읊조리는 듯한 입 모양이 마치…… 제 이름을 말하는 것만 같았다.
세연아.
정세연.
그럴 리 없었다.
만약 그렇다고 해도, 믿을 수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론 멍청한 기대를 했는지도 모른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려 도리어 우희경의 연락을 끊어 버렸던 자신이었다.
두 번 다시는 그의 소식을 알 수 없는 곳으로 도망가려 했다. 서로가 헛된 기대를 접고 각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처음부터 접점이라곤 없었던 것처럼.
“그럴 줄 알았어.”
그날의 어리석음을 감추려는 듯 세연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인 거,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요.”
“…….”
“모든 건 교통사고로 위장된다고, 당신 입으로 그랬으니까.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어.”
“…….”
“사고를 당했는데 이렇게 멀쩡할 리가 없잖아요.”
세연은 차라리 다리 하나가 부러졌거나 목숨이라도 잃었어야 했다는 표정이었다. 독기 오른 그녀를 바라보던 태경은 잠시 말을 잃었다.
무어라 말하고도 싶은데, 입이 막혀 버린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정세연이 이렇게까지 냉정하게 나올 거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아니,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두려웠고, 불안한 거였겠지. 같이 있는 순간에도.
네가 이렇게 돌아설 거라는 걸 알아서.
그걸 알았는데도 미칠 것 같았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정세연을 보는 일. 자신을 경멸하고 증오하고, 차라리 죽기를 바라는 여자를 보는 일이 이렇게까지 괴로울 줄은 몰랐다.
한편, 아무 말 없는 남자를 보며 세연은 한층 더 확신했다.
그럼 그렇지. 당신 같은 인간을 한순간이라도 믿고 걱정한 내가 멍청한 거지.
다시 만났던 순간.
우희경이 말한 대로 그의 몸이 바스러져 버린 건 아닌지 저도 모르게 곁눈질로 확인하던 자신을 죽이고 싶었다.
지금도 그가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에 일말의 의미를 부여하려는 그런 어리석은 자신이 지긋지긋하고 환멸 나서 목이라도 졸라 버리고 싶었다.
“내가 죽었어도 안 왔겠지, 넌.”
“물론이죠.”
세연은 입가에 웃음기를 머금으며 잔인하게 말했다.
“그 자리에 내가 갈 이유가 없잖아요.”
“…….”
“지금 우태경 씨 옆에 있을 이유 없는 것처럼.”
“…….”
잔인하게 변해 버린 여자를 아득한 눈길로 보던 태경이 이내 입을 열었다.
“그래. 이유 같은 건 필요 없지.”
그는 애써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말했다.
“뭐가 되었든, 넌 내 옆에 있어야 하니까.”
“마음대로 해요.”
당신 곁에 날 잡아 둔다고 해서 이전처럼 다시 사랑할 것도 아니니까. 어차피 몸 같은 거,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거니까.
“어차피 마음대로 할 거잖아.”
“…….”
그런 정세연을 보던 우태경의 얼굴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그래. 마음대로 할게.”
태경은 그렇게 말하며 정세연을 거칠게 침대에 밀어 눕혔다. 여자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런 여자에게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날 봐.”
그 말에 증오만이 가득한 눈길이 그를 향했다.
“…….”
모든 게 부질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는 여자를 강제로 품에 안아 넣었다.
* * *
세연이 다시 눈을 떴을 땐 점심 즈음이었다.
온몸이 너덜너덜한 가운데, 저 멀리 부엌에서 맛있는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정말이지 아무것도.
이미 입덧은 끝났는데 구역질이 치밀었다. 그건 이 집에서의 기억 때문이었다. 아무것도 모르고 행복을 꿈꾸었던 시절의 기억들에 신물이 차올라서.
“…….”
세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쩐지 갑갑함이 느껴지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예전에 받았던 반지. 이 집에서 도망치며 빼놓고 간 반지. 우태경은 그 반지를 다시 세연의 손가락에 껴 놓고 나간 상태였다.
세연은 그 반지를 빼서 던져 버렸다.
-!
쨍한 소리를 낸 반지가 데굴데굴 굴러서 어딘가로 사라졌다. 아마 가구 아래로 들어가 버린 것 같았다. 눈앞에 보이지 않게 되니 속이 다 시원했다.
하지만,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대체 어디까지 자신을 기만하려는 걸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뭔지 알 수 없었다. 알고 싶지도 않았다.
다시 눈을 감으려던 찰나였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새로 온 가정부는 걱정스러운 마음을 감추려는 듯이 최대한 상냥하게 웃으며 세연을 대했다.
“…….”
이전 사람에 비해 훨씬 젊은 연령대였고 쓸데없는 말도 걸지 않았다.
하지만, 화장으로 애써 가려도 드러나는 혈색이 나쁜 얼굴이나 쪼글쪼글하게 주름지고 갈라진 손등, 그리고 지친 기색이 엄마를 연상시켰다.
“……네.”
세연은 여자의 시선을 피하며 짧게 대답했다.
“그럼 식사하시겠어요?”
“…….”
세연은 버석하게 마른 눈으로 여자의 등 뒤를 바라보았다. 제가 좋아하는 것들이 한가득 차려져 있어, 잔칫상처럼 보였다. 그건 언젠가 우태경이 제 생일을 챙겨 주던 날을 연상시켰다.
“아뇨.”
“입맛이 통 없으세요? 큰일이네.”
임신 중에는 잘 드셔야 할 텐데.
그렇게 덧붙인 여자는 어쩐지 조바심이 난 얼굴이었다.
“…….”
이상했다.
막말로 세연이 자신의 딸도 아닌데 한 끼라도 굶으면 큰일 난다는 듯 눈에 띄게 동동거리고 있었다. 밥상을 차린 것보다도 세연이 먹는 걸 두 눈으로 보고 확인하는 게 더 중요한 임무인 듯했다.
“그 사람이 저 밥 먹이래요?”
“…….”
잠시 곤란한 표정으로 웃어 보인 여자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냥, 한 입이라도 꼭 드시게 하라고…….”
아마 걱정되셔서 그런 거겠죠. 임신 중이시니까.
여자는 변명하듯이 뒤늦게 그런 말들을 덧붙였지만 세연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지긋지긋하다는 생각뿐이었다. 모든 것들이.
“…….”
세연은 고개를 들어 흐릿한 눈으로 아주머니를 보았다.
“만약, 제가 안 먹으면요?”
“그럼 어쩔 수는 없지만…….”
“제가 안 먹으면 혹시 아주머니께 무슨 영향이 있나요?”
세연의 말을 들은 여자의 얼굴에 곤란한 기색이 어렸다. 그녀는 한참이나 머뭇거리더니 버석하게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화장을 지우면 색깔이라곤 없을 듯한 입술이었다.
“이건, 말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여자가 세연의 눈을 맞추지 못하고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그러시면 아마 제가 내일부터 못 나오게 될 것 같아요. 애들이 아직 어려서 잘리면 안 되는 상황이라……. 죄송하지만 부탁 좀 드릴게요. 그래도 임신 중이신데 억지로 드실 필요는 없고, 그냥 조금만…….”
또 시작이야.
사람을 협박하고 강요하고 제멋대로 휘두르는 짓.
너무 지긋지긋하고 신물이 나서 구역질이 치밀었다. 온몸이 벌벌 떨리고 오한이 일었다.
세연도 알고 있었다. 아무리 스트레스를 받는다 해도 먹지 않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스트레스만으로도 배 속의 아이는 영향을 받을 것이다.
지금 제 상태가 이 지경이라면 아이는 괜찮을까.
결코 좋은 상태일 리 없었다.
만약, 아이가 잘못된다면.
언젠가 어떡하지, 하고 조바심을 내며 가정했던 최악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나갈 수 있을까.
그럼, 이곳에서 나갈 수 있게 될까.
아이가 사라지면, 다시 도망갈 수 있을까.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던 세연은 실소를 머금었다. 미친 게 분명했다. 미쳐 버린 사람 곁에 있으니 그녀 자신도 미쳐 가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요. 먹을게요.”
세연은 식탁으로 가 숟가락을 들었다. 그러고는 잠시 허공을 응시했다.
“…….”
우태경이 어딘가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을 것이다.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줄게.
어차피 아무것도 소용없으니까.
세연은 밥을 한 숟가락 떠서 입 안에 넣었다.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도 계속해서 밥을 꾸역꾸역 밀어 넣었다.
“그러다 체하시겠어요!”
여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저 밥을 입 안에 넣고 씹어서 삼키는 것만을 반복했다.
얼마나 그랬을까.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
손에 힘이 빠졌다. 들고 있던 숟가락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사모님!”
사모님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난 그런 사람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세연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눈을 떴을 땐, 우태경이 제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싫어.’
그렇게 생각했지만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온몸이 마비된 것 같은 상태였다. 손가락 하나도 제 의지대로 까딱할 수 없다는 걸 깨닫자 극한의 공포가 밀려왔다.
“…….”
새하얗게 질린 창백한 얼굴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땀이 말 그대로 비 오듯이 쏟아졌다.
“세연아!”
제 이름을 미친 듯이 부르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말, 너무 미워서 보고 싶지 않은 사람.
밉다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끔찍하게 싫은 사람.
하지만 이제 더는 미워하고, 싫어하고, 증오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가슴속에 치밀던 분노마저도 느낄 수 없었다. 그저 모든 게 텅 비어 버린 듯했다.
“…….”
세연은 멍한 얼굴로 허공을 향해 눈을 깜빡였다. 태경의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세연은 다시 눈을 감았다.
“세연아, 눈 좀 떠 봐! 정세연, 세연아!”
“보호자 분, 잠시만 비켜 주세요.”
아마 의사이거나 간호사일 것 같은 사람의 단호하면서도 차분한 음성이 들렸다. 제 손을 잡고 미친 듯이 매달리던 남자를 옆으로 밀어내는 모양이었다.
지금 여기, 병원인가 봐.
대체 언제, 어떻게 실려 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럼 여기는 안전한 곳일까.
이곳에서라면 벗어날 수가 있을까.
세연은 힘없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반도 채 뜨이지 않는 눈에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새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도, 옅은 색의 바지를 입고 달리는 간호사도, 환자복을 입은 환자도.
“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에 수없이 새겨진, 우성 병원.
아. 아니구나.
세상에 내가 도망칠 곳은, 그럴 곳이라고는 없구나.
세연은 몸을 축 늘어뜨리며 다시 눈을 감았다.
이대로 영영 뜨지 않고 싶었다.
두 번 다시는.
* * *
그날 이후.
정신을 잃은 세연은 긴 꿈에 빠졌다.
아주 긴 꿈이었다.
이건 꿈이야.
꿈이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깨어날 수 없었다. 잔인한 현실로부터 도망칠 유일한 도피처를 찾아낸 사람처럼 한없이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꿈에서 자신은 등에 백팩을 멘 대학생이었다.
“…….”
대학생 세연이 책가방을 메고 이쪽을 쳐다보며 웃고 있었다. 제 얼굴이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새하얗게 빛났다. 마치 이대로 모든 게 잘될 것처럼.
A대를 상징하는 동상 앞에 서서, 기념사진이라도 찍으려는 듯이 환히 웃는 모습.
그러나, 잠시 후 먹구름이 몰려오듯 점차 제 얼굴 위로 어둠이 드리워져 갔다. 현실이 어깨를 무겁게 짓눌러 왔다. 터덜터덜 어디론가 걸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아직 앳된 얼굴에 가득한 그늘과 축 늘어진 어깨가 더없이 안쓰러웠다. 매일매일을 치열하게 사느라 피땀을 흘리던 지난날의 자신. 그 애는 제가 보기에도 너무 지쳐 있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한시도 쉬지 못하고 미친 듯이 달리는 여자애. 이렇게 달려서 바라는 게 고작 제자리에 마음 편히 서서 숨 좀 돌리고 싶은 것뿐인, 가엾은 여자애.
힘내. 다 잘될 거야.
그렇게 지난날의 자신에게 위로를 건네려던 순간.
“어서 오세요.”
어느새 자신은 편의점에 서서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꿈인지 기억인지 모를, 그런 꿈이었다.
세연의 등 뒤로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
앳된 얼굴을 한 자신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뒤돌아섰다.
이 사람은 누구지.
처음 보는 손님이었다.
“…….”
할 말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제자리에 가만히 서 있던 이상한 손님.
마스크로 얼굴이 반 이상 가려져 있어, 보이는 거라곤 날카로운 눈매뿐이다. 큰 키에 다부진 어깨, 커다란 체격이 매끈한 정장에 감싸져 있었다.
정장 차림인 것을 보면 근처 회사에 다니는 사람인가.
아마 그런 모양이었다.
똑같은 성인인데, 직장인과 대학생은 확연히 태가 달랐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어쩐지 대학 시절에도 이런 느낌일 것 같았다.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위축시키고 주눅이 들게 만드는 부류의 사람.
게다가 왜일까.
제 얼굴 위로 고정된, 의미를 알 수 없는 시선.
“…….”
‘뭐 필요한 거 있으세요?’
평소 같으면 먼저 그렇게 물었을 텐데, 어쩐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남자가 제게서 시선을 떼어 내고 무언가를 찾는 듯 눈길을 돌리자 그제야 숨을 내쉬었다.
“아.”
그때 저도 모르게 숨을 참고 있었다는 걸, 세연은 뒤늦게 깨달았다.
“…….”
내일이 시험이라 그런가.
그래서 공연히 과민해진 것이라고 생각하며, 손님이 들어오기 전 보고 있던 강의 자료를 다시 꺼내 든 그녀였다.
교수님의 말이라면 농담 한 마디까지 전부 빽빽이 필기해 둔 강의 자료. 이미 너덜너덜해질 정도로 보고 또 보아서 다 외워 버렸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세연이 눈치를 살피며 강의 자료를 넘겨 보던 때였다.
분명 남자는 저 멀리 가 버렸는데 등 뒤가 따가웠다. 언젠가부터 따라붙던 그 시선은 제가 고개를 뒤로 돌리면 사라지곤 했다.
왜 그러지.
알바생이 딴짓을 해서 언짢은가.
세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따금 그런 손님들이 있었다. 편의점 알바생이 할 일을 다 하고 틈새 시간에 짬짬이 밥을 먹거나 공부를 한다는 게 무척이나 거슬린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사람들이.
만일 세연이 일부러 농땡이를 피운다고 해도 그렇게까지 거슬려 하진 않을 것 같은데, 식사나 공부까지 하는 건 주제넘는 짓이라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지친 발걸음으로 찾은 곳에서 또다시 지친 얼굴을 보는 게 짜증 나는 걸까. 아니면, 알바생 주제에 이 공간을 마치 손님처럼 이용한다는 점이 불쾌한 걸까.
아마 이 시간에 편의점을 찾는 사람들은 대부분 피로한 하루를 보냈기 때문에 다들 날이 서 있는 게 아닐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세연은 바짝 긴장하며 강의 자료를 등 뒤로 숨겼다. 저 남자 역시 언짢게 여길지도 모르니까.
“…….”
이윽고 남자가 이쪽으로 한 걸음씩 다가올 때, 세연은 또다시 바짝 긴장해서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남자가 가까이 다가설 때마다 느껴지는 향에 조금씩 숨통이 트였다.
담배 냄새가 아니라면, 냄새에 그리 예민하지 않은 세연이었다.
하지만, 남자에게서 나는 옅은 향기는 어쩐지 코끝에 오래도록 맴돌았다. 숲속에 서 있는 듯 머리가 조금 맑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몰려오려던 졸음이 금세 달아났다.
“…….”
남자의 체향이 조금 익숙한 것 같기도 해 고개를 갸웃하던 세연은 이내 그 정체를 알아채었다.
대학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어 우성 장학생 면접을 보러 간 날. 그날을 떠올리게 하는 냄새였다.
‘사장님, 죄송한데 저 나가 봐야 해요!’
아르바이트하는 식당에 오후 손님이 몰리며 정신이 없었던 탓에, 면접까지 시간이 촉박해 세연은 앞치마도 벗지 못하고 허겁지겁 밖으로 뛰어나갔다.
대학에 입학하기도 전에 아르바이트 자리부터 구했던 그녀였다. 서울에선 과외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 말에 앞뒤 가리지 않고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형편에 맞지 않는 서울 살이를 위해 지원했던 대학 기숙사도 떨어져, 당장 나갈 돈이 한두 푼이 아니었다.
다른 친구들이 드디어 대학에 와서 연애도 하고 동아리도 가입하겠다며 부푼 꿈을 키울 때, 세연은 그런 것에 눈 돌릴 시간이 없었다.
게다가 아버지가 무슨 일을 벌인 건지 아님 또 사장님 소리에 혹해서 남들에게 명의라도 빌려준 건지, 소득 분위가 생각보다 높게 잡혀서 오직 우성 장학금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세연은 구슬땀을 흘리며 면접장으로 달려갔다. 이러다 지각하는 건 아닌지, 이미 면접 차례를 놓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때였다.
저 멀리서 조금 낮고 갈라진 목소리가 들렸다.
“정세연 학생.”
희망의 목소리였다.
“네!”
희망이 샘솟은 세연이 그쪽으로 달려갔다.
정신없이 면접장으로 뛰어 들어가려던 자신을 붙잡아 주던 남자.
“모자.”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남자가 건네준 손수건. 재빠르게 땀을 닦으려 얼굴을 묻었을 때, 남자의 향이 가슴 깊숙이 스며들었다.
“……감사합니다.”
모르는 남자의 향에 가슴이 두근거린 건 처음이었다.
세연은 저도 모르게 볼을 붉히며 웃었다. 어쩐지 저답지 않게 환한 미소를 보인 것 같아서 잠시 후 입술을 깨물긴 했지만.
그날의 기억은, 오직 남자의 향으로만 남았다. 눈앞의 남자 역시 마스크를 하고 있는 데다 비슷한 체향이 나서, 어쩐지 그날의 좋은 기억 위로 이 남자가 오버랩 되었다.
좋은 냄새가 나는 사람. 다음에 또 왔으면 좋겠다.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다가, 남자에게 담배를 달라는 말을 듣고 이내 뒤돌아서서 담배를 꺼내던 세연이 미간을 확 찌푸렸다.
담배 피우는 사람이구나.
남자에게서 나던 상쾌한 향 위로 갑자기 세연이 싫어하는 매캐한 담배 연기가 피어오르며 온통 뒤덮이는 기분이었다. 얼굴 위로 까닭 모를 실망감이 어렸다.
아마 그래서였던 것 같다. 담배라도 피우려는 듯 밖에서 서성거리던 남자를 지켜보다가, 나가서 조금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했던 건.
“죄송한데, 여기 앞은 금연이에요.”
분명 담배를 피우려던 것 같은데, 남자는 딴청을 피우며 담뱃갑을 흔들어 보였다.
“안 피우는데.”
세연은 순식간에 머쓱해졌다.
거짓말 아니냐고 따져 물을 수도 없으니 도리어 죄송하다고 말하며 돌아서려는 순간, 구석진 자리에서 담배 피우는 남학생이 보였다.
“…….”
편의점 앞은 금연이라고 몇 번이나 말해도 매번 못 들은 체하던 사람이었다. 아마 예전에 세연에게 번호를 묻고 거절당한 일을 보복하려는 것 같았다.
그때, 뒤에 서 있던 남자가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여기, 금연입니다.”
세연의 인생에서 몇 안 되는, 남자의 이유 없는 친절이었다.
‘저기요. 예쁘셔서 그런데 번호 좀 주세요.’
‘혹시 남자 친구 있어요?’
‘제 이상형이에요.’
‘나랑 만날 생각 없어요?’
언제나 자신에게 접근해 오는 남자들의 목적은 결국 하나였다. 제아무리 친절이나 우정을 가장해도, 그들의 목표는 세연과 사귀거나 만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 손님은 달랐다.
커다란 마스크로 얼굴을 반이나 가린 남자.
도움을 주고도 생색 하나 내지 않던, 조금 이상한 사람.
“저기요.”
남자를 향해 세연 역시 용기를 내었다. 그녀는 미리 챙겨 두었던 젤리를 주섬주섬 들고 나와서 내밀었다.
살면서 남자에게 선물 같은 걸 줘 본 일이 없는데, 이런 걸 줘도 되나.
“이거 드세요. 제가 잠 깰 때 먹는 거예요.”
남자에게 건넨 젤리 봉지에서는 돌고래가 나왔다. 세연이 갖고 싶던 거였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호들갑을 떨며 조잘대다가,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생전 처음 보는 남한테 이런 말을 왜 했을까.
세연은 자책하며 후다닥 집으로 향했다.
* * *
고된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길.
외지고 어두운 길을 홀로 걸으며, 세연은 몇 번이나 뒤를 휙 돌아보았다.
“…….”
인기척을 느낀 것도 같은데, 막상 뒤돌아보면 아무도 없었다.
요즘 들어 유독 밤길에 사람이 없었다. 여학생들은 몇 명씩 더러 지나가는 걸 봤는데, 남자들은 이상할 정도로 다니지 않았다. 술에 취해서 고성을 지르던 남학생들도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다. 무서웠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세연은 질질 끌리는 발걸음에 애써 경쾌함을 넣으려 탁탁 발소리를 내며 집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책상 앞에 앉아 창가를 내다보았을 때, 이상한 걸 발견했다.
“어?”
어디서 본 것만 같은 형체를 가진 그림자였다. 검은 그림자는 가로등 아래 꽤 길게 드리워 있었다. 크기를 보아서는 아마 남자인 듯했다.
이 시간에 왜 저러고 서 있는 걸까.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세연은 이내 신경을 끄기로 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 사람도 밤을 새워야 하는 모양이지. 아니면 여자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일 수도 있고.
……좋겠다. 부럽다.
책상 앞에 턱을 괴고 앉아서, 세연은 저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했다. 저렇게 기다려 주는 애인이 있는 사람들은 정말 좋을 것 같다고.
위험한 밤길에 여자 친구를 데려다주는 남자들을 볼 때면 들었던 생각이었다. 비록 자신은 연애를 할 겨를도, 용기도 없었으나 부러운 마음까지 없지는 않았다.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세연은 이내 고개를 저으며 정신을 차렸다. 편의점 아르바이트까지 마친 뒤에는 너무 피곤했다. 이대로 그냥 자고 싶기도 했지만, 그럴 순 없었다.
“…….”
세연은 여전히 미동도 없는 그림자를 슬쩍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만, 나도 그때까지만 공부하다 자야지.
그러나, 그림자는 계속해서 제자리를 지켰다. 그림자가 사라지기를 기다리다 어느새 책상에 엎드려 잠들었던 세연은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눈을 떴다.
벌써 동이 틀 무렵이었다.
“……어, 언제 잤지.”
부스스 몸을 일으킨 세연이 저도 모르게 창밖을 내다보았다.
“이젠 없어졌네.”
그 남자는 대체 왜 저 자리에 밤새도록 서 있었을까.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세연은 이미 페이지 번호까지 다 외운 듯한 수업 자료를 들고 집을 나섰다.
“…….”
가로등 아래를 지날 무렵이었다.
그림자가 드리웠던 자리가 텅 비어 있었다. 분명히 비어 있는 자리인데, 이상하게 온기가 느껴졌다. 자취방 뒤에 산이 있어서 그런지 조금 시원한 나무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
세연은 저도 모르게 잠시 뒤돌아서서 그 자리를 지켜보다가, 이내 다시 몸을 돌려 학교로 뛰어갔다.
“…….”
의문의 남자도, 세연도 사라진 자리에는 두 사람의 향기만이 한데 뒤섞여 허공에 맴돌았다. 그 위로 새벽녘의 이른 햇살이 텅 빈 자리를 잔잔히 비추었다.
* * *
어느새 세연의 기억은 태경을 처음 보았던 날로 향했다.
입사 후, 그에게 처음 인사하던 날.
“안녕하세요. 이번에 입사한 기획팀 사원 정세연입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긴장감에 사로잡힌 세연은 배운 대로 그렇게 인사하며 고개를 숙였다.
“우태경 팀장입니다.”
눈앞의 남자는 어디서 본 것만 같은 낯익은 느낌이었다.
역시 뉴스나 기사에서 봐서 그런가.
“잘 부탁해요.”
태경이 악수를 청하려는지 손을 내밀었다. 가지런히 내민 손을 잡기가 조금은 긴장이 되어서, 세연은 잠시 망설이다 그의 손을 잡았다. 마주 잡고 흔드는 유쾌한 악력에 긴장이 풀렸다.
인사를 마친 뒤, 태경은 이내 산뜻하게 뒤돌아섰다.
그가 떠난 자리엔, 좋은 냄새가 났다.
“…….”
세연은 저도 모르게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손수건을 꺼내어 주던 남자.
이따금 편의점을 찾아오던 남자.
그리고, 집 앞에 머물던 그림자의 향기.
언젠가 그녀의 일생에서 만났던, 이유 없이 친절했던 사람들의 환영과 기분 좋은 향기가 그의 등 뒤로 겹쳤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상쾌한 향을 맡으며, 세연은 어느새 얼굴을 붉혔다. 난생처음으로 가슴이 잘게 두근거렸다.
첫사랑의 시작이었다.
* * *
그날 이후.
사랑에 빠진 지난날의 자신이 보였다.
“좋아해요.”
“태경 씨가 너무 좋아요.”
처음이었다. 누군가를 그렇게 좋아해 본 일은. 좋아한다는 말로 벅찬 마음을 다 담을 수가 없어서, 사랑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첫사랑이었다. 짝사랑이자 저 혼자만의 외사랑이기도 했다.
“태경 씨.”
남자가 자신을 돌아보았다. 근사한 미소를 입가에 걸치고서.
우태경.
내 첫사랑.
처음엔 달콤했다. 너무 달아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 남자를 보는 것만으로도 설레던 나날. 한 번도 허락될 수 있으리라 여기지 못했던 그의 옆자리. 그 근처라도 맴돌 수 있다는 게 너무 설레고 벅찼다.
그때의 기억을 가진 심장이 다시금 미친 듯이 뛰었다. 행복했다. 제게 감히 허용될 것이라 생각해 보지 못했던 행복이었다.
이렇게 커다란 행복을 느낀다는 게 가끔은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이렇게 혼자만 너무 행복해서 벌을 받을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감히 분수에 맞지도 않는 남자를 마음에 담고 곁을 맴돈다는 것도 그랬다. 안 될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음을 접지 못했다. 어리석은 희망과 미련이, 짝사랑이 그녀를 붙들어 놓았으니.
그리고, 결국 어떤 일들이 벌어졌더라. 너무나도 많은 일들이 일어나 도저히 다 떠올릴 수조차 없었다.
꿈속에서 세연은 이내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을 감았다. 수많은 분노와 증오, 슬픔, 그리고 상처로 가득한 그 모든 기억들을 지우기 위해서.
“…….”
다시 눈을 떴을 때.
어느새 세연은 바닷가에 서 있었다.
저 멀리 보이는 건 시리도록 푸른 바다와 그 절벽 위에 자리한 새하얀 집.
준혁과 함께 지내던 바로 그 집이었다.
눈앞에 바닷물이 끊임없이 밀려오고 밀려 나가는 게 보였다. 짓궂은 바닷바람이 머리를 온통 헝클어 놓고 지나가기도 했다.
“아……!”
저 멀리 환한 햇살 아래, 돌고래 한 마리가 튀어 올랐다.
어린 시절, 수족관에 갇혀 있던 바로 그 돌고래였다.
사육사의 지휘 아래 묘기를 부리던 돌고래. 조금 갈라진 주둥이로 세연과 같은 아이들에게 기쁨을 주기 위해 가까이 다가오던 돌고래.
돌고래는 지금 자유로워 보였다. 갑갑한 수족관에서 벗어나, 드넓은 바다에 완전히 적응한 듯이 행복한 얼굴로 헤엄치고 있었다. 물 위로 솟아올랐다가 바다로 뛰어들기를 반복하면서.
세연은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발걸음을 떼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바닷물로 걸어 들어갔다. 발, 다리, 허리가 서서히 물에 잠겨 들었다. 이내 온몸이 흠뻑 젖었다. 가슴까지 잠기자 조금 압박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두렵거나 무섭지 않았다.
쏴아아―.
머리 위로 쏟아지는 물줄기가 시원했다.
어느새 세연은 돌고래가 되어, 바다를 헤엄쳤다. 때로는 물 위로 튀어 올라 포물선을 그리다 다시 첨벙 소리를 내며 푸른 바닷물 안으로 몸을 담그기도 했다. 행복한 미소를 지으면서.
행복하다.
맞아. 내가 바란 행복이 바로 이거야.
이제 나는 자유야.
두 번 다시는 수족관으로 돌아가지 않아. 영원히 바다에서 살래.
* * *
우태경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깨어나지 않는 세연을 바라보았다. 의사는 산모가 임신 중이라 쓸 수 있는 약이 많지는 않지만, 가능한 선에서 모든 조치를 취했다고 했다.
“그런데 왜, 눈을 뜨지 않는 겁니까.”
그는 절망에 빠진 얼굴로 의사에게 물었다.
“환자 본인의 의지예요.”
눈을 뜨지 못할 상황이 아니라, 눈을 뜨기를 거부하는 것 같다고 의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태경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정세연을 제 곁으로 억지로 끌고 온 뒤, 하루하루가 다르게 그녀가 망가져 가는 걸 알고 있었다. 몸도, 마음도 실시간으로 피폐해져 가는 것을 결코 모를 수 없었다.
하지만, 이 정도였나.
“그럼, 어떻게…….”
뒷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방법이라는 게 있기는 한가. 이대로 그저 지켜봐야만 하는 건가.
이렇게 널 잃어버릴지도 모를 상황에서 무력하게 두 손을 놓고 있어야 하는 걸까.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그럼.”
우태경이 더듬더듬 손을 뻗어 의사의 가운을 붙잡으며 말했다.
“하…….”
의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 우선 이것 좀 놓으시고요.”
그녀는 인상을 팍 찌푸리며 애써 화를 억누르듯 태경을 떼어 냈다.
그러지 않아도 이미 굉장히 많이 참고 있었다. 무책임한 보호자를 만날 때마다 소리 지르며 화를 낼 순 없으니까.
대형 병원으로 내원하는 환자들 중엔 어지간히 심각한 수준이 많았다. 그러니 처음 보는 것도 아니건만 분노가 치솟았다.
이건 사람을 물에 빠뜨려 놓고 익사 직전에 구해 달라며 건져 온 꼴이었다. 그냥 홑몸도 아니고 생명을 담고 있는 산모인데, 애초에 물에 밀어 넣지 말았어야지 이제 와서 뭐 어쩌자는 건지.
“아니. 대체 산모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은 거예요?”
의사가 결국 더는 참지 못하고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소리를 지르며 태경을 노려보았다.
“…….”
갑자기 말하는 법을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이 멈춰 버린 그를 향해서.
의사는 눈앞의 남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대한민국에 우성 그룹 막내아들 우태경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나. 게다가 이곳은 우성 병원이었다.
우성 병원에서 이른바 VVIP중의 VVIP로 손꼽히는 우씨 일가. 그중에서도 가장 직계에 속하는 그를 모르려야 모를 수 없었다. 그러니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너무나 잘 알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는 톡 쏘는 듯한 차가운 말투로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우태경을 노려보았다.
이 남자는 결코 임신한 여자의 보호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에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우태경 같은 남자가 저 여자를 책임지고 결혼할 리 있겠나. 배 속에 든 아이도 재벌가의 수많은 사생아 중 하나가 되고 말겠지.
두 사람이 대체 무슨 관계인지 그녀가 알 바는 아니라 하더라도, 어쨌든 제 아이를 가졌을 여자를 이렇게 만들어서 데려왔다는 점에서 같은 여자로서 분통이 터졌다. 그건 짐승도 안 할 짓이 아니냐며 태경을 향해 마구 퍼부어 댔다.
“애초에 산모를 이렇게 방치하시면 안 되죠. 옆에서 관리를 잘해 주셨어야지.”
의예과 재학 시절부터 교수에게 성질 좀 죽이라는 얘기를 수없이 들어 온 그녀였다. 하지만, 이제 그녀 자신이 산부인과 교수이자 의사가 되어 강제할 사람이 없으니 성질 죽이는 일은 쉽지 않았다.
“…….”
그사이, 태경은 입술조차 달싹이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었다.
입이 있으나 할 말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도리어 관리를 하려다 이 사단이 난 것이다. 차라리 놔두었으면 이렇게는 안 되었을 텐데.
차라리 제가 찾아내지 않았으면.
차라리 제가 그대로 두었다면.
제 곁을 떠나게 놔두었다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자 온몸이 벌벌 떨렸다.
이제 나는 널 죽일 수밖에 없구나.
내 사랑이라는 건 널 가두는 지옥이 된 지 오래니까.
“…….”
그런 태경을 보며 의사는 쯧쯧 혀를 차다가 이내 산모의 수면이나 식사 등을 체크하려는 듯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태경이 더듬거리며 겨우 일련의 상황들을 설명하자, 그녀는 한층 더 기가 막힌다는 듯이 눈을 치켜떴다. 투명한 유리알 너머 조금 깐깐한 인상을 주는 눈이 다시금 분노로 일렁였다.
“제정신이에요?”
산모와 아이를 한 번에 죽일 생각이 아니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며 마구 화를 내던 그녀는 이내 한숨을 푹푹 내쉬며 팔짱을 낀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신경 안정제라도 투여하면 좋겠는데, 지금은 몸이 너무 약해져서 약을 쓸 수도 없고…….”
우성 병원은 산모에게 약물을 처방할 때 꽤 보수적인 편이었다. 게다가 산모에게 지속적으로 신경 안정제를 쓰는 건 출산 이후 아이에게 부작용을 유발할 수 있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겁니까?”
“우선 안정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 봐야죠.”
의사는 죽은 듯이 누워 있는 세연을 가리키며 말했다.
“입원하고, 침대에서 꼼짝도 말고 누워만 있어야 할 것 같아요. 무슨 말인지 아시죠?”
산모에게는 손가락 하나 가져다 대지 말라고 했다. 세연의 몸에 남은 태경의 흔적들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걸 알아듣는지 마는지 초점을 잃은 남자가 느릿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네.”
쯧쯧.
정신이 나갔네, 나갔어.
의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그나마 눈앞의 남자는 걱정이라도 하고 후회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그조차 안 하는 남자들도 있다는 걸 아는 그녀는 마음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혹시 산모분 어머니나 친정 식구들 아무도 안 계세요?”
“있긴 한데…….”
끊어 내도록 만들었다.
오직 제게만 기대게 하기 위해서. 이 여자를 온전히 차지하고 싶어서. 제 욕심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
유일한 의지처의 정체가 실은 너무나도 끔찍한 남자라는 걸 알았을 때, 그게 정세연에게 얼마나 큰 충격이 될지 모르고.
“남편이 별로 의지가 안 되면, 친정에서라도 도움 주시면 좋겠어요.”
별로 의지가 안 되는 남편.
그 말이 태경의 가슴을 콕 찔러 왔다. 아니, 사실 남편도 아니었다.
‘그 사람 남편 아니에요.’
가정부를 향해 독기 어린 말을 내뱉던 세연의 얼굴이 떠올랐다. 밥을 먹는 것도 거부하는 그녀를 어떻게든 먹이기 위해, 어머니를 닮은 경력 짧은 가정부를 고용한 게 실책이었다.
아니, 그런 생각을 한 것 자체가 잘못이었던 걸까.
목적을 위해 사람을 이용하는 짓. 그저 한 판의 장기짝처럼 손쉽게 남의 인생을 휘두르고 멋대로 주무르려는 짓이 그에겐 너무 익숙해서 잘못이라는 걸 깨닫지 못했다.
여전히 CCTV며 도청 장치가 설치된 집은 말 그대로 그녀를 가둬 둔 감옥이었다. 그는 간수고 그녀는 죄수였다. 이런 관계에서, 제가 세연의 남편이 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걸 뼈저리게 깨달은 태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 같은 건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니,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네. 알겠습니다.”
* * *
그날 이후.
우태경은 한시도 빠짐없이 병실 앞을 지켰다.
혹시라도 세연이 깨어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깨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마치 영원한 잠에 빠진 사람처럼 보이는 그녀가 이대로 죽어 버릴 것 같았다.
태경은 이따금 손가락을 세연의 코 아래에 가져다 대었다. 미약하게 숨을 쉬고는 있으나, 언제 끊어질지 모를 듯이 연약한 숨결이었다.
이 숨이 끊어지면, 제 목숨도 끊어지고 말겠지.
그러면, 나도 너를 따라서…….
아니, 여자는 그조차도 거부할 것 같았다.
죽어서라도 제게 벗어나기만을 원할 여자였다. 교통사고를 당하고도 왜 죽지 않았냐는 듯 표독스러운 눈길로 자신을 보던 여자를 떠올렸다.
한때 오직 달콤한 말만을 뱉어 내던 입에서 나오는 거라곤 독설뿐이고, 그건 비수가 되어 전부 제 가슴에 꽂혔다. 그러나 아무리 피를 흘려도 괜찮았다. 상관없었다.
왜냐면…….
태경은 세연의 입가를 매만졌다. 감히 손가락을 입술 위에 가져다 대지도 못하고, 허공만을 쓸었다.
이 입술이 미소를 그려 내면, 얼마나 예쁜지. 또 얼마나 반짝이는지, 그는 알고 있었으니까.
그걸 보지 못한다면, 그는 더 이상 살 수 없을 테니까.
그런데, 그걸 영영 잃었다.
이대로 너는 두 번 다시 깨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내게서 도망가기 위해, 아주 먼 길을 떠나 버릴지도 모른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길을.
그 생각이 태경을 미칠 듯이 몰아세웠다. 바로 뒤가 낭떠러지인 절벽 끝에서 바늘 하나 위에 간신히 발을 걸치고 서 있는 기분이었다. 너무 괴로워서 도저히 더는 견딜 수가 없었다.
“세연아.”
그는 잠든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미동조차 없어,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닿지 않는 것 같았다.
“널 보는 게 너무 괴로워.”
태경의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날 사랑하지 않는 네 모습을 보는 게. 정말 죽을 것처럼 괴로워.”
그리고, 너무 두려워.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건, 널 영영 잃는 거야.”
그러니까, 제발…….
제발 떠나지 마.
태경은 그렇게 말하며 세연의 발치에 얼굴을 파묻었다. 수척해진 뺨 위로 뒤늦은 후회의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 * *
기나긴 꿈의 끝자락.
한참이나 바다에서 헤엄치던 세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
저 멀리, 어딘가에서 누군가 구슬피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하게 가슴이 에는 듯한 깊은 슬픔이 느껴졌다.
고개를 뒤로 돌리자, 자신은 다시 바닷가에 서 있었다. 여전히 멀리서 처절할 정도로 온몸을 무너뜨린 새카만 그림자가 흐느껴 울고 있었다.
당신은 누구지.
대체 왜 거기서 울고 있을까.
세연은 한 발짝씩 그에게 다가갔다. 발아래 고운 모래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가락 사이로 스르륵 빠져나갔다.
“…….”
이내 발걸음을 멈추었을 때, 그제야 그림자의 정체를 알아본 세연의 얼굴이 경악으로 질렸다. 더 이상 구슬픈 울음소리 같은 건 어디서도 들리지 않았다.
고개를 쳐든 남자의 얼굴에는 비열한 미소만이 담겨 있었다. 마치 조금 전의 눈물은 그저 자신을 붙잡아서 다시 수족관에 가두기 위한 덫에 불과했다는 듯이.
싫어. 데려가지 마. 제발, 제발 부탁이야.
세연이 도리질을 쳤다. 비명을 지르고 싶은데,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마치 목소리를 잃어버린 것만 같았다. 어느새 부글부글 끓어오르기 시작한 온몸이 물거품으로 변해 갔다.
안 돼. 안 돼. 제발-!
한없이 몸부림치던 세연은, 결국 눈을 뜨고 말았다.
* * *
“정신이 좀 드세요?”
“…….”
긴 꿈에서 빠져나온 세연은 아무 말 없이 눈만 깜빡였다. 식은땀 때문인지 뺨이 온통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벌어진 입에서는 쉬어 빠지고 갈라진 목소리만이 새어 나왔다.
“아…….”
“정말 다행이에요. 꼬박 며칠을 안 깨어나셔서 다들 걱정했는데. 보호자분도 병실을 떠나질 못하시고 밤낮으로……. 아, 마침 저기 보호자분 오시네요.”
보호자분.
그 말을 들은 세연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온몸이 파들파들 떨렸다.
날 데리러 오는 거야.
날 또 끌고 가겠지. 날 가둬 두고, 어떻게 할지 몰라.
제발, 제발 오지 말라고 해 주세요. 부탁이에요.
찰나의 순간 마음속에 수많은 말들이 맴돌았지만, 단 한마디도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목소리를 잃은 사람처럼,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처럼.
“아악!”
저 멀리 남자의 그림자를 본 것만으로도 두려움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던 그녀는 다시금 혼절하고 말았다. 몸에서는 열이 들끓었다.
세연의 상태를 살핀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하아…….”
이번엔 또 열이네.
산모에게 고열은 무척이나 위험한 신호였다. 고작 1도 정도만 체온이 올라도 태아에겐 치명적인 영향을 주니까. 수액과 비타민제를 섞어서 링거를 맞혔으나, 열이 쉽게 떨어지질 않았다.
“저, 저는…… 싫어, 제발. 부탁이에요.”
태경은 그런 세연을 멀찍이 떨어져서 지켜보았다.
열 때문인지 이전처럼 죽은 듯이 잠들어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고열에 들떠 헛것이 보이는지 헛소리를 해 댔다. 주로 무언가 빌고 애원하는 듯한 말이었다.
꿈에서조차 나는 너를 괴롭히고 있는 모양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태경은 입술을 깨물었다. 메마른 입술 위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제발.”
이 모든 상황을 견디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가장 견디기 어려운 건, 자신을 피해 도망가려는 세연의 입에서 나오는, 다른 남자의 이름이었다.
이준혁.
“준혁 씨. 우리 도망가야 해요.”
“세연아, 제발……!”
귀를 막고 얼굴을 파묻어 보아도 괴로움을 견뎌 낼 재간이 없어, 태경은 애걸하듯이 세연의 발치에 매달렸다. 이러다간 그만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제발 그 새끼 이름 좀 그만 불러.”
청부 살인까지 손대 본 적은 없었다. 하고 싶었던 적은 많았지만, 잘못되었을 때 제 인생도 같이 무너지는 걸 잘 알기 때문에. 그러나 이렇게까지 절실한 적이 있었나.
이준혁 그 새끼를 죽이고 싶었다. 정세연이 임신한 내내 다른 남자와 같이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게 하필 이준혁이라는 게 못 견디게 괴로웠다.
언젠가, 세연과 이준혁의 소개팅 날.
우희경의 지시를 빌미로 세연에게 접근하려던 남자의 눈빛이 떠올랐다. 무표정한 얼굴을 가장하고 있지만, 도저히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다는 듯이 탐나는 눈빛으로 세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새끼가 제 것을, 감히.
우희경은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정세연에게 이준혁을 가져다 붙여서, 자신을 도발하려 했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수준 낮은 도발이었다.
고작 그런 것에 단 한 번도 넘어가 본 적이 없는데, 이번만은 달랐다.
말 그대로 미칠 것 같았다. 언젠가 정세연이 꿈꾸던 바닷가 마을에서 이준혁과 둘이 지낸다는 걸 생각할 때마다 그랬다.
우희경이 바라는 두 사람의 그림이 어떤 것일지 알기에 더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정세연이 이준혁과 함께 아침을 맞이하고, 밥을 먹고, 창가를 바라보며 파도 소리를 듣고, 함께 잠들고, 그리고…….
태경은 주먹을 쥐며 눈을 감았다. 손등에 튀어나온 굵은 핏줄이 한층 더 불거졌다. 만약 배 속의 아이 아버지가 정말로 이준혁이었다면, 청부 살인도 필요 없었을 것이다.
제 손으로 방아쇠를 당겼을 테니까.
그런데, 그랬는데…….
“준혁 씨, 여긴 안전한 곳이에요?”
“세연아, 제발…….”
“무서워요. 그 사람이 오면 어떡해요.”
그 사람.
나는 너한테 그런 존재가 되었구나.
“그 사람, 그 사람이 올까 봐 무서워요. 우리 빨리…….”
그 사람. 완벽한 타인을 지칭하는 그 말과 우리라는 말에서 느껴지는 간극.
내가 너한테 그 새끼보다 못한 존재가 되었구나. 아니, 이 세상에서 나보다 못한 존재가 네게 더 있기는 한가.
비참했다. 너무나 비참해서 세상에서 제 존재 따위는 지운다고 하더라도 상관없을 정도로.
태경이 괴로워하며 몸부림치는 사이, 정세연의 호흡이 차츰 일정한 리듬을 되찾아 갔다.
“준혁 씨, 부디…… 건강해요.”
그 말을 끝으로 잠시 눈을 떴던 세연은 저 멀리 앉아 있는 태경의 얼굴을 보고 또다시 경기를 일으켰다.
“아, 안 돼!”
얼굴에는 오직 짙은 공포만이 드리웠다. 한때 사랑했던 사람을 보는 눈빛으로는 조금도 생각할 수 없었다. 허공을 향해 두 팔을 휘젓던 정세연이 이내 까무러치듯 정신을 잃었다.
세연아. 이러다간 네가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전에 네 사랑을 잃은 내가 먼저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너를, 네 사랑을 잃은 나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어떠한 가치도, 쓸모도 없는데.
태경은 초점을 잃은 눈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 뺨을 온통 적셨다.
“세연아.”
여자의 이름을 부르며 무릎을 꿇고 기어가 매달렸다.
“내가 어떻게 하면 돼.”
메마른 가지처럼 한층 더 가느다랗게 변해 버린 자그마한 손이 버석거렸다. 그는 세연의 손을 붙잡고 그 위로 뺨을 기댔다.
“대체 어떻게 하면…….”
태경의 검은 눈동자에 암담한 심경이 고스란히 비쳤다.
“네가 날, 다시 사랑할까.”
그는 하염없이 흐느꼈지만, 알고 있었다.
그런 일은 없을 것이다.
두 번 다시는.
* * *
시간이 지나며, 세연의 열은 차츰 떨어져 갔다. 그런 그녀를 지켜볼 수조차 없는 태경은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정말 죽을 수도 없었다. 혹시라도 그 소식이 충격이 되어 세연의 건강을 해칠까 봐.
“선생님.”
태경은 의사의 가운을 움켜쥐고 매달렸다. 제가 간절히 빌어서 정세연이 건강을 되찾을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무릎이라도 꿇고 애원했을 것이다.
“아무래도 제가 눈에 안 보이는 게 낫습니까?”
……제가 죽는 게 나을까요.
정세연에게 자신은 차라리 그날 교통사고로 죽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럼 개의치 않고 자유로운 삶을 살아갔을 텐데. 네가 자유롭게 날아갈 수도 있었는데.
굳이 그런 널 잡아 와서 또다시 날개를 꺾고 팔다리를 잘라서 가두려 했다. 내 이기심과 탐욕이 널 망쳤다. 그러니 네가 나를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보는 것도 당연하지.
“저를, 저를 끔찍하게 여기는데…….”
그런데, 당연하다는 걸 알면서도 매번 가슴이 찢어졌다. 살아서 이런 고통을 겪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지금 네가 그런 걸까. 날 보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끔찍해서, 그냥 눈을 감아 버리는 게 나은 걸까.
“어떻게 하면 살릴 수 있을까요.”
“…….”
팔짱을 낀 채 서서 한동안 말없이 태경을 내려다보던 의사가 입을 떼었다.
“결혼 안 하셨죠, 두 분?”
뻔한 질문이었다.
우성 그룹 우태경은 대외적으로 미혼이었고, 어떠한 배경도 없어 보이는 평범한 여자와 결혼할 리는 없었다. 심지어 환자인 산모는 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모양이었다.
물론 그게 본래부터 그런 것인지 이 남자를 만나서 그렇게 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쩌면 후자가 아닐까 생각하며 의사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끔 임신과 출산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남자들이 있어요. 제 새끼 낳는 건데도 그러더라고요. 한 여자한테는 인생이 뒤집어지는 일인데. 남자들은 자기 배로 열 달을 품다가 생살 찢어 가며 낳는 게 아니라서 그런지.”
의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직업의 반은 보람이었고 반은 분개하는 일이었다. 아이 아버지는커녕 한 여자의 남편이 될 자격조차 없는 사람들이 세상에 너무 많았다.
그나마 대학 병원인 이곳에서도 이럴 정도인데, 일반 병원에서는 얼마나 더 기가 막힌 일들이 많은지 동기들에게 보고 듣는 그녀로서는 분을 삭일 날이 없었다.
‘선영아, 넌 성질 좀 죽여라. 그래서 환자 어떻게 볼래?’
의예과 시절부터 수십 수백 번은 들었던 말. 하지만, 지도 교수의 말과 달리 성질을 죽이는 날은 앞으로도 오지 않을 것 같았다. 세상엔 그런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이 득시글거리니까.
“요즘 같은 세상에도 애 낳는 건 목숨 걸고 하는 일이에요.”
임신은 물론이고 출산 시에도 얼마나 위험한 일을 감당해야 하는지 아느냐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의사가 태경에게 물었다.
“사랑하시죠?”
“…….”
황망한 표정의 태경이 고개만 간신히 끄덕였다.
“그럼, 최소한의 안정감은 주세요. 그러지 않고서 어떻게 여자가 아이를 낳고 기르겠다는 결심을 하겠어요.”
이 아이는 나 혼자만의 아이라고, 그러니 혼자 키울 거라고.
언젠가 정세연이 그렇게 말했었다. 혼자 아이를 낳고, 혼자 기르겠다고.
또 그런 말도 했다. 당신 곁에서 오직 아이의 엄마로서 없는 사람처럼 살겠다고.
그렇게 말하던 네가 너무 지쳐 보여서, 사실은 네 발아래 무릎을 꿇고 울며 빌고 싶었다.
세연아.
내가 어떻게 해야 해.
어떻게 해야, 네가 날 다시 사랑할까.
나를 사랑하지 않는 네가 너무나도 막막해서 숨이 막혀 온다. 네가 곁에 있는데도 숨을 쉴 수가 없어서, 한없이 숨통이 조여 온다.
이게 바로 네가 내게 느꼈던 감정이겠지.
이미 우리는 서로의 지옥이 되었구나.
“…….”
네가 바라는 건, 내 곁에 머무는 일 따위가 아닐 터였다. 어떻게든 내 곁을 떠나는 것, 이 지옥을 벗어나는 것만이 널 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세연아. 네가 눈만 뜬다면 그럼 널 보내 줄게. 네가 바라던 대로, 네게 완전한 자유를 줄게. 그럼 너는 다시 살아갈 수 있겠지. 너는 어둠 속에서도 혼자 빛나는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세연아.
부탁이야. 한 번만 다시 눈을 떠 줘. 어떻게든 다시 살아나 줘, 제발…….
태경의 눈앞에 지난날의 세연이 스쳐 지났다.
‘감사합니다!’
내민 손수건에 구슬땀을 흘리면서도 환히 웃던 여자애.
‘이거 드세요.’
지독하게 단맛이 나는 젤리를 내밀고 총총 사라져 가던 그 애.
‘팀장님.’
조금 붉어진 얼굴로 자신을 부르던 정세연.
‘태경 씨.’
제 이름을 부르며 환히 웃던 정세연.
‘사랑해요.’
감히, 네 사랑을 받았었다.
고작 이런 나 따위가 네게 그런 걸 받은 시절이 있었다.
그 사랑이 탐이 나서 그 애를, 그 사랑스럽던 여자를, 제 손으로 망가뜨렸다.
너무 사랑스러워서 잠시라도 손안에 넣고 싶던 빛이었다. 그 빛을 제 손으로 꺼뜨렸다. 그러니, 두 번 다시는 그 빛을 손에 넣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그건 당연한 일이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아주 멀리서 너를 지켜보는 일이다. 그건 내게 이미 익숙한 일이니까. 어쩌면, 처음부터 그게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태경은 눈을 감았다. 언젠가의 꿈같은 장면이 눈앞에 스쳤다.
‘결혼 축하해요, 정세연 씨.’
‘감사합니다, 팀장님.’
우리의 관계는 딱 거기까지.
그 편이 훨씬 좋았을 것이다. 너에게도, 나에게도.
그렇게 나만의 사랑으로, 나만의 감정으로 지나가 버리면 되었을 일이었는데. 좋은 일이라곤 없는 내 삶에 굳이 너를 끌어들일 필요가 없었는데.
“…….”
뜨거운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뒤늦은 후회로도, 그 무엇으로도 지나간 시간들을 되돌릴 길이 없어, 그는 멍하니 서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 * *
고열에 달떠 헛소리를 하던 세연은 새벽이 지날 무렵에야 겨우 다시 열이 내렸다. 더 이상 준혁과 함께 태경을 피해 도망치는 악몽은 꾸지 않았지만, 상상도 못한 목소리가 들렸다.
“세연아.”
꿈인가.
아무래도 꿈인 모양이었다.
이건 들릴 리가 없는 목소리니까.
정신을 차리고도 두 번 다시는 눈을 뜨지 않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내내 눈을 감고 있던 세연이었다. 그리하여 정말 꿈속으로 영영 빠져들던 그녀였다.
“…….”
세연이 아주 천천히 눈을 떴다. 병원 천장의 불빛마저 제 눈을 무참히 찔러 오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눈꺼풀을 겨우 몇 번 깜빡였다. 그러자, 눈앞에 믿을 수 없는 사람이 보였다.
“……어, 엄마.”
거짓말.
엄마가 여기 있을 리가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엄마. 정말로 엄마였다.
몇 년 만에 보는 엄마의 얼굴.
“세연아.”
딸을 본 엄마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다. 샛노랗게 뜬 푸석푸석한 얼굴 위로 뜨거운 눈물만이 흘러내리는 걸 보다가, 결국 세연은 엄마의 손을 붙잡고 어린애처럼 매달려 울었다.
“엄마, 엄마…….”
* * *
한참이나 서로를 부둥켜안고 울던 두 사람이 말없이 훌쩍였다.
엄마는 세연이 어떻게, 왜, 어쩌다 누구의 아이를 임신했는지 묻지 않았다. 세연 역시 아버지나 오빠의 소식을 묻지 않았다. 그러나, 마치 물어보기라도 한 듯이 엄마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오빠는…….”
만나는 여자들이 자주 바뀌던 세연의 오빠는 여러 집을 전전하며 지내다, 어느 날 갑자기 연락이 끊겼다고 했다. 그러다, 한 여자에게서 연락이 왔다고 했다.
당신 아들은 사기 혐의로 재판이 진행 중이고, 교도소에 들어갈 것 같다고. 처음엔 평소처럼 전전긍긍하며 어떻게든 오빠를 빼내려 백방으로 알아본 엄마였다.
그러나, 변호사를 만난 이후로는 그런 생각을 접었다고 했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래도 성정이 나쁜 아이는 아니라고 믿었던 어미와 세상의 시선은 완전히 달랐다.
아이를 지키고 보호하고 싶었다. 오직 엄마라는 이유만으로.
하나 그게 과연 아이를 지키는 길이었을까. 오히려 제 과보호가 아이를 한층 더 나쁜 길로 내몬 게 틀림없었다. 이미 아들은 너무 먼 강을 건넜고, 더는 아무리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았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모정으로 품을 수 있는 부분인지, 또 진정 아이를 위한다면 어떻게 했어야 했는지. 뒤늦게 생각했지만 이미 모든 건 너무 늦어 있었다.
듣는 내내 세연은 입술만 깨물었다.
“네 아버지랑은 헤어지기로 했어.”
세연이 연락을 끊은 뒤, 자신만만하게 큰소리치던 세연의 아버지는 물론, 함께 투자한 마을 사람들도 큰 실패를 맛보았다. 그 뒤로는 점점 더 폭력성이 짙어져만 갔다고 했다.
이미 부부라기보단 가족이라는 굴레에 묶인 진절머리 나는 인연이 된 지 오래였다. 그럼에도 놓지 못하고 있던 낡은 끈을, 그녀는 이제야 비로소 놓을 수 있었다고 했다.
“대체 왜 그랬을까.”
그렇게 말하며 읊조리는 엄마에게 세연은 조심스레 입을 떼었다. 사실은, 어려서부터 엄마를 붙잡던 자신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오래도록 죄책감을 갖고 있었다고.
세연의 엄마는 처음에는 화들짝 놀랐고, 금세 후회와 미안이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자신이 그런 말을 했냐며 스스로 자책하는 순간, 눈에는 다시 눈물만이 글썽였다.
“그때 네가 얼마나 어렸는데, 그런 걸 다 기억할 줄 몰랐지.”
“…….”
“자식 때문에 참고 산 것도 있겠지만, 내가 미련이 남았던 거지.”
젊은 시절, 세연의 엄마는 아버지와 같은 회사를 다녔다.
조금 답답할 정도로 고분고분하고 순응적인 성격인 자신과 달리, 세연의 아버지는 잔꾀가 많고 유들유들하게 일을 넘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저 불성실한 것뿐이었는데, 이상하게 젊은 시절엔 그런 게 멋져 보였다고. 아마 자신에게 없는 거라서 더 대단하게 보인 모양이라고.
게다가 얼굴이 잘생기고 인기도 많아서 다른 것들이 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며 엄마는 덧붙였다.
그래서, 네 아버지를 사랑했다고.
사랑이라는 말에 세연은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한 번도 그렇게는 생각해 보지 못했던 일이었다. 한때는 연인이었을 그들의 모습을 떠올려 본 적이 없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그 지긋지긋하고 환멸 나는 관계가 연인의 연장선이리라고는. 증오와 무관심을 손바닥 뒤집듯이 반대로 뒤집고 나면, 뒷면에 숨기지 못한 애정이 있으리라고는.
“…….”
세연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하고 고개만 겨우 끄덕였다.
* * *
세연과 엄마는 꽤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간이침대에 누운 엄마는 옛날이야기라도 들려주려는 듯이 이런저런 말을 꺼냈다. 아주 어린 시절을 제외하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엄마는 나 가졌을 때 어땠어?”
세연은 한참을 망설이다 용기 내어 물어보았다.
할머니는 세연을 두고 부모가 원치 않는 아이였다고 했다.
그렇지 않아도 여유롭지 않은 살림에 하필 태어난 게 딸이라, 항상 자신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던 할머니였다. 가세가 기운 후로는 더욱 그랬다.
“갑자기 애가 생기니까 걱정도 되고, 조금 막막하기도 했지만.”
엄마의 메마른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설렜지.”
“…….”
“딸이라는 걸 알고는 더 그랬고.”
남편을 닮은 예쁜 아이가 태어나길 바랐다고 했다. 네 아빠가 얼굴 하나는 반반하지 않느냐고 말하는 웃음기 배인 목소리 끝에는 씁쓸함이 묻어났다.
“너 배 속에 있을 때, 과일도 예쁘게 생긴 것만 골라서 먹었어.”
엄마는 세연의 손끝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그렇게 낳은 딸인데…….”
그녀가 잠시 갈라진 입술을 깨무는 게 보였다.
“자라면서는 네 신경 하나도 못 써 준 것 같아서. 엄마가 너무 미안해.”
뼈마디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바싹 마른 손이었다. 일평생 고생만 했던 손. 한때는 반드시 성공해서 호강시켜 주고 싶었던 손이기도 했다.
“나도.”
울음이 차올라서 세연이 입술을 깨물었다.
“미안해. 내가 이런 꼴이 되어서, 정말 미안해, 엄마.”
“그런 말 하지 마, 세연아.”
엄마가 태경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 또 주치의에게 무슨 말을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지금의 그녀는 그저 세연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 주는 게 가장 큰 목표인 것처럼 보였다.
“엄마가 미안해.”
다시 눈물을 흘리며 엄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는 항상 자랑스러운 딸이었는데, 그런 너에게 아무것도 해 주질 못해서.”
“…….”
“네가 가족을 의지하지 못하게 하고, 도리어 어린 너한테 기대서.”
“…….”
“정말 미안해.”
엄마는 세연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었다. 거친 손 때문에 살결이 베이는 것 같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아기처럼 엄마의 품에 파고들어서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 내었다.
* * *
다음 날.
엄마는 자주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병실에서 나갔다. 근처에서 머물고 있으니, 언제든 필요하면 부르라는 말도 했다.
그런 챙김이 낯설면서도 좋았다. 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온몸을 불덩이처럼 달구던 열은 가라앉은 지 오래였다. 아마 남자가 오고 있지 않아서, 그를 보지 않아서 가능한 일인 듯했다.
아침에는 의사가 세연의 상태를 살피러 왔다.
“몸은 좀 괜찮아요?”
“네.”
세연은 약간 멍한 표정으로 의사를 응시했다.
“다행이네.”
다행.
다행이라고 할 수 있나.
다행이긴 했다. 자신이 일어났다는 소식에 가장 먼저 달려왔어야 했을 남자가 보이지 않았으니. 눈을 뜨면 다시 그 남자에게 붙잡혀서 끌려갈 것만 같은 악몽에 시달렸는데.
우태경은 온종일 찾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자신을 만나러 온 건.
“안녕하세요, 정세연 씨.”
우태경의 변호사였다.
“…….”
세연은 아무런 말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고개만 끄덕였다.
변호사가 내민 서류에는 아이가 태어날 때까지 필요한 모든 병원비와, 태어난 이후의 양육비 일체를 지급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혼한 부부와 마찬가지로 면접교섭권은 갖기를 원하나, 만일 세연이 원치 않으면 아이를 멀리서 지켜보는 정도에 그치거나 아예 만나지 않겠다고도 했다.
세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사람이 제 아이 만나는 거, 원치 않아요.”
또다시 어떤 식으로 아이를 이용하려 들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아이를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이를 만든 이유도 오직 자신을 잡아 두기 위한 것뿐, 어떠한 애정도 없다는 걸 잘 아니까.
“알겠습니다.”
변호사는 서류의 한 지점을 가리키며, 우희경이 세연에게 약속했던 대로 해외에서 지내는 데에 어떠한 어려움도 없게 해 주겠다는 의미라고 했다. 그러니 외국에 나가서 살 수도 있었다.
“네, 그럴게요.”
세연은 여전히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기계적인 답변만 토해 냈다. 정말로 우태경이 자신을 놓아주려는 걸까. 이렇게 갑자기, 하루아침에.
“그 대신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리 어려운 건 아닌 듯합니다만.”
변호사는 말끝을 흐렸다.
“그게 뭐죠?”
조건이라는 말에 저도 모르게 방어적인 자세로 변한 세연이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이번엔 또 어떤 조건일까. 결국 또다시 자신을 잡아 두기 위한 초석에 불과한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바짝 날을 세우고 있었으나, 곧 이어진 변호사의 말은 의외였다. 우태경이 그녀를 마지막으로 만나서 얼굴을 보고 인사하길 바란다고 했다. 그게 전부라고.
“만일 원치 않으시면, 이대로 사인하고 끝내시면 됩니다.”
끝을 낸다는 말이 우스웠다. 한 번도 시작되지 않은 관계가, 시작도 전에 끝을 맺으려 한다는 게.
“…….”
세연은 변호사가 내민 서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보내 줄게, 널.
새하얀 종이 위에 빽빽이 적힌 검은 글씨가 그렇게 말해 오는 듯했다.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지만, 그게 사실이라고.
세연은 서로에게 독하고 모질었던 지난 시간을 떠올렸다. 서로를 할퀴고, 상처 내고, 피를 흘리고, 함께 지옥으로 빠져들던 시간을. 그 모든 걸 정리해서 끝을 맺고 싶었다.
“한 번은 얼굴 보고 얘기할게요.”
세연은 단서를 덧붙였다.
“대신, 조금 멀리 떨어져서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 * *
얼굴을 보고 인사하자던 남자는 한참이나 아무런 말이 없었다.
“…….”
남자의 옅은 한숨이 침묵을 깨뜨렸다.
“이제 더는 널 붙잡아 둘 이유가 없는 것 같아.”
서로 같이 있어 봐야, 이런 일만 생길 뿐이고.
헛웃음을 지으며 입매를 늘어뜨린 남자가 세연을 응시했다.
“어쨌든 네가 가진 건 내 아이니까, 최소한의 배려는 하려고.”
“…….”
“보내 줄게. 네가 원하던 대로.”
바라던 말이었다. 그렇게 하기로 약속한 일이고.
하지만, 세연은 냉큼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고 눈앞의 남자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
항상 승리자의 여유가 드리워 있던 얼굴에 완연한 패색이 어려, 제가 이겼는데도 조금도 유쾌하지 않았다. 자신을 처음 되찾던 날처럼, 얼굴이 몹시 상한 것 같기도 했다.
자신을 걱정한 걸까.
아마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것에 의미를 부여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하여 세연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비로소 꺼내 들 수 있는 말을 하기 위해서.
“아주 오랫동안, 우태경 씨를 사랑했어요. 어리석다는 거 아는데, 알면서도 사랑했어요.”
“…….”
사랑했다.
온전한 과거를 담은 말에 가슴이 찢어졌지만, 태경은 그저 묵묵히 앉아서 들었다.
“사실 내 마음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난 모르겠어요. 우태경 씨를 처음 본 순간부터 너무 좋았으니까. 일부러 내가 당신을 좋아하도록 만든 거라고 해도, 이미 난 너무 오래전부터 당신을 사랑하게 되어 버려서 그게 어떤 차이가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
“어쩌면 나는 한동안, 조금은 더 우태경 씨를 사랑할지도 몰라요. 너무 밉고 원망스럽지만, 당신을 사랑하는 게 내겐 아주 오래도록 해 온 일이라 하루아침에 그쳐지진 않아요.”
아주 약간의 희망을 담으려던 우태경이 곧 눈동자에서 초점을 없앴다.
어떤 것도 기대하지 않아야 했다. 그럴 자격이 없으니까.
“그렇지만 이제 난 태경 씨보다 나 자신을 더 사랑하고 싶어요. 우태경 씨 곁이 아니더라도 행복할 수 있도록.”
세연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태경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건강해.”
그가 바라는 건, 오직 그뿐이었다.
“고마워요.”
* * *
태경은 텅 빈 집으로 돌아왔다.
“…….”
정세연과의 추억이 가득한 집. 여전히 그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
‘첫사랑이에요.’
두 볼을 붉히며 그렇게 고백하던 여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제게도 그랬다. 첫사랑이었다. 그건 생에 두 번 다시는 찾아오지 않을, 마지막 사랑을 의미하기도 했다. 그러니 이제 끝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이 생을 지속할 이유가 없었다.
“…….”
태경은 소파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한때 정세연이 몸을 눕히고 자신을 기다리던, 바로 그곳에. 그러고는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 무너지듯 눈을 감았다.
우태주.
큰형의 영정 사진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다. 그의 장례식에서 마주했던 환한 웃음이 선명히 그려졌다.
천하의 등신 새끼.
그렇게 욕하던 지난날의 자신도.
형이 간 길이, 내가 걷게 될 길인 걸 모르고. 한 치 앞을 못 보고.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야 사는 게 뭔지 알 것 같다던 형이 왜 죽음을 택했는지 지금은 알 수 있었다.
그는 도저히 이전처럼은 살 수 없었던 것이다. 그 여자가 없는, 사랑 없이 살아가는 삶.
‘태경아.’
태경은 큰형을 마지막으로 보았던 날을 떠올렸다.
정말, 정말 마지막으로 본 날을.
* * *
가족과 집안을 등지고 나가 여자를 선택했던 우태주.
뒤늦게 정식으로 허락이라도 받고 싶은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그가 불쑥 본가에 찾아온 일이 있었다. 물론 문전박대를 당하고 쫓겨나듯이 돌아가야 했지만.
등신 새끼.
그런 우태주의 뒷모습을 보며 태경이 속으로 혀를 차던 때였다.
‘태경아.’
‘…….’
자신을 발견한 우태주가 손을 흔들며 이쪽으로 걸어왔다. 쫓겨나는 주제에 표정만은 더없이 환했다. 그의 말대로 정말 행복한 사람처럼.
‘잘 지내?’
‘어.’
태경은 대충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다행이네.’
우태주는 별로 나누고 싶지 않은 시시콜콜한 일상 얘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그가 요즘 어디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네 형수 되는 사람은 어떻게 지내는지, 낮에는 뭘 하고 식사는 뭘 먹는지.
‘…….’
하나같이 쓸모라곤 없는 얘기들이었다.
태경은 전혀 귀담아듣지 않았다. 흥미가 없기도 했지만, 패배자의 이야기는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혼자서 제 얘기를 늘어놓던 우태주가 씩 웃었다.
‘난 요즘 사는 게 행복하다. 진짜 행복이 뭔지 이제야 알 것 같아.’
그는 태경의 책상 앞에 놓인 두꺼운 책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런 거, 지나고 나면 큰 의미 없는 것들이야. 너무 마음 쓰지 마.’
뭐래.
태경은 그저 별 말 같지도 않은 소릴 한다고 생각했다.
안 그래도 할 일이 많아서 짜증 나 죽겠는데.
우태주의 눈에 자신은 아직도 받아쓰기나 하는 초등학생쯤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영락없는 어린애 취급을 하려는 건지 그가 머리라도 쓰다듬으려는 듯이 손을 내밀었다.
‘치워.’
그는 태경의 날선 반응에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넌 여전하네.’
여전하다는 말이 우스웠다. 그럼 달라질 게 뭐가 있지.
달라질 일도, 달라져야 할 일도 없는데.
‘잘 지내, 태경아.’
나가기 전, 우태주가 한 번 더 뒤를 돌아보았다.
‘건강하고.’
‘가.’
잘 가도 아닌, 가.
태경은 고개를 간단히 끄덕여 보였다. 그러고는 마치 축객령이라도 하듯 인사를 건넸다.
우태주는 그걸 끝으로 제 시야에서 사라졌다. 영원히.
“…….”
만약, 지금 아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그게 살아생전 그를 볼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란 걸 알았더라면.
우태주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실은 먼 과거의 일임을, 여자가 떠나고 혼자 남은 그가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태였다는 걸 알았더라면.
그럼 자신은 그에게 조금이라도 더 다정했을까.
최소한, 잘 가라는 인사는 건넬 수 있었을까.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이제는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왜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를 떠올리며 행복을 말했는지.
‘진짜 행복이 뭔지 이제야 알 것 같아.’
그러고는 왜 돌연 목숨을 끊어 버린 건지. 이제는 모두 다 알 수 있었다.
우태주는 이미 지나가 버린 행복에 갇히길 바랐다. 시간이 흐르며 모든 게 퇴색될 추억이겠지만, 빛이 바래 버리지 않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영영 과거에 갇혀 빠져 나오지 않기를 선택한 것이다. 영원히 추억 속에 살기 위하여, 제 손으로 시간을 멈추면서까지.
* * *
우태주가 죽은 지, 정확히 5년 뒤였나.
‘태경 씨.’
그의 일상에 정세연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태경 씨가, 너무 좋아요.’
두 볼을 붉게 물들인 채로. 한없이 반짝이는 눈을 하고서.
거짓말.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래도 좋았다.
처음이었다.
하루가, 일상이, 매 순간이 행복했던 건. 행복이라는 단어가 제 인생과 어울리기는 하는 말인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좋았다.
정세연. 그 이름을 가진 여자가 못 견디게 좋았다. 행복한 모든 순간은 모조리 그 여자와 함께한 순간이었다.
그게 언제더라.
첫눈이 오던 날이었나.
정세연을 품에 안고 눈이 내리는 걸 하염없이 보던 날이 떠올랐다.
본래 자신에겐 그런 감성적인 취미 따위가 없었다.
눈이든 비든 거추장스럽고 궂은 날씨에 불과했다. 햇볕이 내리쬐는 쨍쨍한 날도 눈을 찌푸리게 만드는 짜증스러운 날씨라 여겼다.
그런 그가 굳이 첫눈이 내리는 걸 보고 있었다. 단 걸 끔찍이도 싫어하는 그가, 정세연이 좋아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핫초코에 새하얀 마시멜로까지 둥둥 띄워서 먹었다.
정세연은 제 품에 안겨 있어 몰랐겠지만, 태경은 연신 미간을 찌푸렸다.
이런 걸 왜 먹지.
정말 토 나오게 달았다. 그렇게 단 걸 입에 댄 건, 단연컨대 정세연이 주었던 젤리 이후로 처음이었다.
우태경에게 단맛이란 혀가 아릴 정도로 마비되는 걸 의미했다. 사람들은 정말 그런 느낌을 좋아하는 건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맛있죠?’
하지만, 단맛은 정세연을 웃게 했다. 조그마한 손으로 머그잔을 쥔 정세연이 환하게 웃으며 두 볼을 따스하게 밝혔다.
‘응.’
그래서 등신처럼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 사랑스러운 미소가 지워지는 걸 보고 싶지 않아서, 먹고 싶지 않은 액체를 입 안에 머금다가 이내 목 뒤로 넘겼다.
‘올해의 첫눈이에요.’
품에 안긴 채, 정세연이 자신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첫눈이 내리면, 태경 씨랑 같이 보고 싶었어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정세연은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학 다닐 때, 친구들이 그랬거든요. 첫눈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맞는 거라고.’
별 이유 같지 않은 이유였다.
굳이 눈 같은 걸 왜 맞지. 좋아하는 사람과 첫눈은 또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건지.
별로 이해가 가진 않았지만 그는 구색을 맞추려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눈을 맞는 건 왠지 태경 씨가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았어요.’
어떻게 알았지.
품 안의 여자는 생각보다 예리한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단 걸 끔찍하게 싫어한다는 것이나, 첫눈 따위에 의미를 부여하며 함께 보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알아채지 못했다.
다행이었다.
여자의 얼굴에 어린 행복한 미소를 조금이라도 지우고 싶지 않았으니까.
‘전 같이 보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그 미소를 바라보며 태경은 곧 함께 맞이할 크리스마스 계획을 떠올렸다. 다가오는 크리스마스를 위해 조그마한 나무를 주문해 둔 그였다.
매년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받지 못해서 일찍이 산타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던 정세연은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해 보는 게 어린 시절의 꿈이었다고 했다.
그 말 한마디에 매년 크리스마스에 트리를 꾸미고, 그 아래 선물을 놔두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그였다. 정작 자신은 이런 번잡한 건 사람을 시켜서 하는 일이라 믿었지만.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연약하기 짝이 없는 정세연에게 무슨 힘이 있어서 제가 좋아하던 걸 끊어 버리게 하고, 싫어하던 걸 하게 만드는지 알 수 없었다. 심지어 강제하는 것도 아닌데.
우태경에게 정세연은 언제나 그랬다.
마치 자신의 주인처럼.
그리하여 정세연 앞에 서면 태경은 항상 개새끼가 된 기분이었다.
진짜 개처럼 꼬리가 달렸다면 들키고 말았겠지. 널 보기만 해도 미친 듯이 꼬리를 흔들어 대었을 테니까.
내가 너만 보면 얼마나 기쁨에 겨워서 혼자만의 행복에 취하는지, 너는 모르겠지.
어쩌면 끝까지 모르는 편이 너에겐 좋을 것이다. 네 말대로 이제 나는 너와 상관없는 사람이니까. 마음이 여리고 쉽게 감상에 젖는 너인데, 공연한 감상 같은 걸 남기고 싶지는 않아.
이미 변호사를 통해 주변을 정리해 둔 그였다. 유언장에는 그의 장례를 비공개로 치러 달라는 것과 몇 년이 지난 뒤에 그가 죽은 사실을 공개해 달라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네게 피해가 갈 일은 조금도 없었으면 좋겠어, 세연아.
내 소식을 들을 무렵, 너는 이미 아주 먼 곳에 있을 테고 언젠가 네가 말한 대로 넌 내 장례식에 올 필요조차 없을 테니까. 그러니까, 아마 괜찮을 거야.
네가 원하는 세상에서 자유롭게 살아가기를.
그렇게 빌며, 태경은 몸을 일으켰다.
지난 5년간.
단 한 번도 풀어 본 적 없던 손목시계를, 천천히 풀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