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균열의 시작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짓을 했을까.
“아아, 정말…….”
출근길에 세연은 머리를 감싸 쥐고 자책했다. 커다란 두 눈에는 눈물마저 글썽거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나니 수치심이 마구 몰려왔다.
‘내가 정세연 씨 보고 싶게 만들어 봐요.’
태경의 입에서 나온 그 한마디.
어쩌면 도발에 가까운 말에 곧바로 넘어가 버린 것이다. 자신을 만나지 않는 사이에 다른 여자를 만날까 봐. 그게 두렵고 싫어서.
그 짧은 순간, 세연의 머릿속을 스친 생각은 하나였다.
그가 자신을 보고 싶어 하도록 만들 방법.
‘나도 정세연 씨가 마음에 들어요.’
언젠가 태경의 입에서 나왔던 말.
다른 여자를 닮았다던 눈빛을 제외하고 그가 자신에게 마음에 들어 하는 거라면, 아마도…….
‘내가 엄마 젖을 못 먹고 자라서 그런지 젖 빠는 걸 좋아해요.’
그 말을 떠올린 세연은 두 눈을 감고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이거, 이따 밤에 돌려주세요.”
그녀는 브래지어를 벗어서 남자가 샤워 중인 욕실 안으로 던져 넣고 후다닥 호텔에서 빠져나왔다. 도발이라면 도발이었다. 어떻게든 관심을 붙잡아 두고 싶었다.
“아아아.”
세연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대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지금쯤 얼마나 황당해하고 있을까.
이제 와 그런 생각을 해 봤자 이미 저지른 일 뒤에 남는 건 후회뿐이었다. 게다가 속옷 없이 돌아다니고 있자니 마치 발가벗고 다니는 기분이었다.
브래지어 없이도 예쁘게 모양 잡힌 가슴이지만, 커다란 탓에 걸을 때마다 출렁거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온통 가슴에 와 닿는 것 같았다.
세연은 가방에서 카디건을 꺼내어 입었다.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오는 사무실이 추워서 미리 가방에 넣고 다니던 카디건이었다. 실내에서는 꽤나 유용했지만, 푹푹 찌는 더운 날씨에는 맞지 않는 옷차림이었다.
그 탓에 지하철 안에서 세연을 힐끔거리는 사람들의 눈빛이 한층 더 짙어졌다. 누가 보아도 옷차림 때문에 보내는 시선이라는 걸 알면서도, 세연은 팔짱을 껴서 애써 가슴 앞을 가렸다.
지하철역에서 사무실까지. 그리 멀지 않은 길이 마치 천 리 길같이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거의 탈진한 채로 사무실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팀원들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어머, 세연 씨. 오늘 덥지 않아? 웬 카디건이야?”
“아……. 몸이 좀 안 좋아서요.”
세연은 팔짱을 끼듯이 앞을 여미며 말끝을 흐렸다.
“아이고, 정말? 괜찮아? 어디가 안 좋은데?”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일찍 출근해 자리를 정돈하던 박 과장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몇 안 되는 여직원들이 세연을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평소 피곤하거나 아픈 티를 내지 않는 세연이 얼굴까지 창백하게 질려 있으니 컨디션이 많이 나쁘거나 혹은 생리 중이라는 신호로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세연 씨, 피곤하면 오늘 먼저 들어가. 하루 정도는 그래도 돼.”
“아, 그 정도는 아니에요. 괜찮아요, 과장님.”
“아이, 괜찮아. 사람 몸이 먼저인데 진짜로 눈치 볼 필요 없다니까? 아님 혹시 지금 약 필요해?”
애 엄마답게 각종 상비약을 챙겨 다니는 박 과장이 가방을 집어 들자, 세연이 손사래를 쳤다.
“저 정말 괜찮아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연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두 볼을 발그레하게 붉혔다. 살뜰하게 챙겨 주는 박 과장이 엄마처럼 느껴져, 마음까지 따스해지는 것 같았다. 물론 그녀는 자신의 엄마와는 무척 다르지만.
“감사하긴 뭘.”
박 과장은 세연의 어깨를 살짝 두드려 주었다. 그녀의 눈에 세연은 참 예뻤다. 이런 딸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건 다른 팀원들의 눈에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흐뭇한 미소를 띤 채 두 사람을 지켜보던 팀원들이 저마다 한마디씩 던졌다.
“세연 씨도 참 자로 잰 듯한 모범생이야. 과장님 저렇게 말씀하시면 하루 정도는 쉬어도 되는데.”
“그러니까. 이렇게 말 잘 듣고 착한 딸 있으면 소원이 없겠어. 얼마나 키우기 편할까? 우리 따님은 말을 듣는 법이 없는데. 아주 자식이 상전이야, 상전.”
“그치. 나도 이번엔 정말 세연 씨 같은 딸 낳고 싶다니까.”
셋째를 낳을지 고민하던 박 과장이 입을 떼자, 유 대리가 눈을 크게 떴다.
“과장님, 정말로 셋째 낳으시게요?”
“응. 요즘 임신 준비하는데, 만만치가 않아.”
“왜요?”
“알잖아. 이 나이쯤 되니까 일단 체력이 안 돼, 체력이. 뭘 좀만 하려고 해도 둘 다 뻗어 버린다니까. 근데 하늘을 봐야 별을 따지, 보기도 전에 기절하는데 애가 생기겠냐고.”
“저는 아직 애 하나뿐인데도 벌써부터 그렇다니까요? 밤마다 방어전 벌이다가 서로 피해 다녀요, 요즘은.”
나이대가 높은 팀원들의 꽤 노골적인 수다에 세연은 얼굴을 붉혔다.
태경 아래서 미친 듯이 흔들리던 지난밤이 떠올랐다.
‘재울 생각 없는데.’
몇 번이나 그렇게 하고도 지친 기색이 없어 보인 그였다. 결국 기절하다시피 해서 곯아떨어진 건 이쪽이었다.
카디건 아래 그가 남긴 흔적들이 생생하게 떠올라, 얼굴이 한층 더 뜨겁게 달아오르던 찰나였다. 세연의 맞은편에 서 있던 유 대리가 갑자기 등 뒤의 누군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팀장님.”
일순간 세연의 뒷목이 쭈뼛 섰다.
“좋은 아침입니다.”
“안녕하세요.”
세연은 박 과장을 따라 다급히 고개를 숙이며 태경에게 인사했다.
“…….”
팀원들을 향해 가볍게 미소 지은 그는 어젯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끔한 모습이었다. 눈앞의 남자가 제가 밤새도록 안겼던 바로 그 남자라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세연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쳐들었다.
“…….”
일순간이지만 태경의 눈길이 세연에게 닿아 있었다. 그는 씩 미소 지었다.
마치 어젯밤과 오늘 아침의 일을 모두 기억한다는 듯이.
“…….”
세연은 저도 모르게 다급히 시선을 피하며 얼굴을 붉혔다. 둘만의 비밀이라도 생긴 것 같은 기분에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카디건 끝자락을 손에 꼭 말아 쥐며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러나 도저히 진정이 되질 않았다.
그가 곁에 다가오는 순간부터 피톤치드 향이 밀려들었다. 숲속 한가운데 서 있는 것처럼 상쾌함이 느껴지는 가운데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따스함이 섞여 있었다.
태경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을 때면 코끝으로 한껏 밀려오던 그 향.
어쩌면 제 몸에도 스며들어 있을지 모를 그의 체향.
벅차는 마음에 어깨를 옹송그리던 바로 그 순간.
세연은 문득, 언제나 말끔한 차림새에 멋진 모습으로 출근하던 태경을 떠올렸다.
“……아.”
그 언젠가, 다른 여자를 밤새 안고도 저렇게 태연한 표정으로 출근했을까. 도저히 지난밤의 일을 가늠할 수 없는 모습이 되어서.
금세 시무룩해진 세연이 고개를 떨구었다. 한껏 조바심이 나 저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면서.
“정세연 씨는 어디 안 좋아요?”
“네?”
예상치 못한 태경의 질문에 화들짝 놀란 세연이 눈을 크게 떴다.
“이 날씨에 왜 그런 차림이에요. 덥지 않아요?”
“아, 그게…….”
세연이 머뭇거리는 사이, 붉고 가느다란 입매에 미소가 어렸다. 대답이 정말 궁금한 게 아니라 놀리기 위해 꺼낸 말인 것 같았다.
이렇게 카디건을 껴입고 있는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 텐데, 저런 질문이라니. 조금 원망스러울 정도로 짓궂다고 생각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무어라 할 말이 없었다.
“세연 씨 오늘 몸이 좀 안 좋대요, 팀장님. 이따 먼저 들어가라고 하려고요.”
세연이 애꿎은 입술만 꼭 깨무는 사이, 박 과장이 실드라도 쳐 주려는 듯 나서서 그녀의 편을 들었다.
태경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전 괜찮은데…….”
박 과장이 가만히 있으라는 듯 한쪽 눈을 찡긋했다. 이 기회에 좀 쉬어도 된다는 의미였다.
그 사이 태경은 멀어져 갔다.
조금 전 느꼈던 시선은 착각이었을까. 어제의 일이 그녀에게만 의미가 있었던 걸까. 오늘 아침에 애써 용기 내어 했던 짓은…… 결국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었나.
머릿속이 한없이 복잡해진 순간.
“정세연 씨.”
잠시 걸음을 멈춘 태경이 고개를 뒤로 돌렸다.
“네?”
“들어가기 전에, 잠깐 나 좀 보고 가요.”
태경이 세연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담은 입가가 매끄럽게 빛났다.
“줄 게 있어서.”
“……네, 알겠습니다.”
태경이 사라지고 나자, 팀원들은 아무래도 팀장님이 일거리를 더 얹어 주려는 모양이라고 고개를 저으며 위로를 건넸다. 하지만 세연의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줄 게 있어서.’
그 정체가 무엇인지 이미 알 것 같았으니까.
가슴이 세차게 뛰어, 온몸에서 쿵쿵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세연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카디건을 한층 더 여미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지 않으면, 심장이 곧 가슴 밖으로 뛰쳐나올 것 같아서.
* * *
점심 무렵이었다.
“와, 이게 무슨 일이야?”
틈날 때마다 담배 피우러 나가는 삼인방을 비롯하여 양 대리 주변에 직원들 여럿이 모여 있었다. 평소와 달리 가십거리가 있는 모양이었다.
가십은 지루한 직장 생활을 견디는 활력소이자, 사람들 간의 결속력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하여 악성 루머 같은 것이 끊이지 않는 모양이라고, 세연은 생각했다.
“세연 씨, 세연 씨.”
양 대리가 세연을 향해 가까이 오라는 듯 손짓했다.
“네, 대리님. 무슨 일이세요?”
세연이 가까이 다가가자, 그는 한껏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이듯 말했다.
“이거 기사 봤어?”
“무슨 기사요?”
“몰랐어? 지금 난리 났잖아.”
양 대리는 누가 있는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주변을 살핀 뒤, 신난 표정으로 휴대폰 화면을 들이밀었다.
세연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기사를 보려는 사이, 그 짧은 순간도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답답한 표정이 된 양 대리가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아니다. 내가 지금 보내 줄게.”
그는 세연에게 뉴스 기사 링크를 메시지로 보내 주었다.
“……!”
세연은 그만 입을 틀어막았다.
기사에 대문짝만하게 뜬 얼굴의 주인공은 태경의 둘째 누나이자 우성전자 부사장인 우희경이었다. 그녀는 해주건설 차남과 결혼하여 그 사이에 아이를 하나 두고 있었다.
그러나, 기사 속 우희경 옆에는 배우 차주원이 있었다.
자취방에 텔레비전이 없어 세상과 담쌓고 지내는 세연이지만, 근래 가장 핫한 배우인 차주원을 모를 수는 없었다. 광고며 예능이며 그가 빠지는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재벌 3세인 우희경과 라이징 스타 차주원의 스캔들이라니. 정계와 연예계의 만남인 데다 한쪽이 유부녀에 애 엄마이니 불미스러운 스캔들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실시간으로 폭발하듯 달리는 댓글에는 두 사람의 관계가 스캔들 축에도 못 끼는 스폰일 것이란 입장이 우세했다.
비난의 화살은 차주원과 우희경 양쪽에게 거의 동등할 정도로 쏟아졌지만, 어쩐지 우희경 쪽에 더 기울어 있었다. 차주원에 대해서는 앞길이 막혔다는 식의 동정 여론도 있었으므로.
“아, 나 차주원 좋아하는데. 이제 끝났네.”
“대박이다. 요즘 광고도 많이 찍었잖아요. 그거 다 어떡해? 이미지 손상으로 계약 해지하면 몇 배로 토해 내야 하는 거 아닌가?”
“근데 이거 사실 아니라고, 차주원 소속사에서 고소한다는데요? 허위 사실 유포하지 말래요.”
악성 루머 유포자에 대해 강경 대응을 하겠다는 내용의 기사가 뒤이어 떴다.
“그럼 뭐 해. 이미 지라시 다 돌았고, S일보에서 나온 기사인데, 누가 믿냐, 소속사 말을.”
팀원들은 벌써부터 주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느니 우희경이 책임지고 부사장직에서 물러나야 한다는 둥 수군거렸다.
스캔들이 주식에 미치는 영향이 상당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주식이라곤 손도 대지 않는 세연으로선 속이 터진다고 울화를 터뜨릴 일은 없었다.
다만 콘퍼런스 콜이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인지라, IR팀 입사 동기들이 꽤 곤혹을 치르겠구나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잠깐, 그러고 보니…….
‘미친놈아!’
태경에게 걸려 온 한 통의 전화. 휴대폰 너머로 대뜸 욕하던 여자.
‘이 여자 때문이에요?’
설마 이 여자가 너의 질투심을 자극한 거냐고 되묻던, 황당함마저 어린 웃음기가 가득했던 태경의 얼굴.
이제 와 생각하니 그 여자와 모종의 관계라고 하기엔, 그게 일반적인 반응은 아닌 듯했다.
세연은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혹시, 그 여자가 우희경은 아니었을까.
우성 그룹의 경영권 다툼이 시작되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서로를 끌어내리고 깎아내리기에 바쁜, 이미 가진 자들이 하나라도 더 갖기 위하여 각축전을 벌이는 치졸한 싸움이.
하지만, 설마.
설마 그랬을까. 우희경은 그의 친누나인데.
그러나, 만일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면, 대체 그 여자는 누구고, 왜 태경에게…….
머릿속이 복잡해진 세연은 고개를 돌려 저 멀리 태경을 바라보았다.
여느 때와 같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한 모습이었다. 그런 그에게 미친놈이라는 말은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역시 기사가 뜬 걸 모르지 않을 텐데도 내색은커녕 불편한 기색조차 없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아니야.
세연은 잠시 후 고개를 저었다.
하긴, 남들 보는 자리에서 티를 낼 수도 없겠지. 가족사를 공적인 자리까지 끌고 와야 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일까.
태경과 가까이 앉은 이들 역시 기사를 보고도 감히 수군거릴 생각조차 못 하는 눈치였다.
그래. 설마 그럴 리 없겠지.
아무리 우성 그룹은 경영권 다툼이 치열하다고 해도 우희경은 그의 누나였다. 아무리 그래도 누나이고 같은 회사 부사장인데 그렇게 흠집을 낼까.
설마, 그럴 리 없겠지.
게다가 그녀가 아는 태경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치졸하고 야비한 방식으로 상대의 흠집을 내는 태경이라니.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세연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헛된 생각을 머리에서 지우려 했다. 완벽한 그의 이미지 위로 조금씩 일어나기 시작한 미세한 균열을 애써 무시하면서.
* * *
세연은 팀장실로 갈 생각에 초조해져 정신없이 일했다. 오후 시간이 어떻게 가는지도 몰랐다. 점심시간에 팀원들과 잡담을 나눈 이후로는 기사나 메시지 한 번 확인할 새가 없었다.
-!
세연이 메일 창을 켠 순간, 오전 내내 읽지 않았던 메시지 팝업 창이 뒤늦게 떴다.
[안녕하세요.]
‘누구지?’
세연이 메시지 창을 누르자, 누군가 길게 보내 놓은 메시지가 쭉 떴다.
[정세연 씨 이번에 소개받기로 한 이준혁입니다.]
[죄송하지만, 저희 팀에 갑자기 일이 터져서 한동안 만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다음번에 다시 연락드려도 될까요?]
“……아, 맞다.”
세연이 까맣게 잊고 있던, 어떻게 거절하면 좋을지 고민했던 소개팅남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가 우희경의 비서실장직을 맡고 있다고 했다.
박 과장이 눈을 빛내며 세연에게 소개해 준 이유이기도 했다.
‘진짜 괜찮은 사람이야. 이건 비밀인데, 세연 씨만 알고 있어. 아직 젊은데도 우희경 부사장 비서실장이라니까.’
메시지가 도착한 시간을 확인해 보니, 기사가 뜨기도 전이었다.
사내 분위기가 이렇게 떠들썩한데 비서실은 얼마나 바쁘고 정신없을까. 어떻게 거절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세연으로선 남자의 사과가 괜히 미안했다.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저희 팀도 이제 곧 바빠질 예정이라 약속 잡기 어려울 것 같았어요.]
세연이 뒤늦은 답장을 하기가 무섭게, 남자에게서 다시 답장이 왔다.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저 정말 괜찮아요. 바쁘실 텐데 신경 쓰지 마시고, 이번 일 잘 마무리되셨으면 좋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는데…….”
한 차례 더 거절하려던 세연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으레 하는 말이겠지.
[네. 좋은 하루 보내세요.]
세연 역시 형식적인 인사치레를 한 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연락을 끝마쳤다. 조금은 홀가분한 기분이 되어 고개를 들었을 때, 공교롭게도 저 멀리 서 있던 태경과 눈이 마주쳤다.
“…….”
단순한 우연의 일치인데, 이상하게 등 뒤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마치 아까부터 계속 세연을 보고 있었던 것만 같은 느낌이 든 탓이었다.
하지만 만일 보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세연이 누구와 연락을 하는지, 무슨 내용을 주고받는지 그가 알 리 있을까. 그럴 리가 없었다.
분명, 그럴 리가 없는데…….
세연은 조금 얼어붙은 얼굴로 태경을 바라보았다. 팔짱을 낀 채 파티션에 기대어 서 있던 그가 가늘게 눈을 휘어 접으며 미소 지었다.
“…….”
그걸 보는 세연의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었다.
태경의 얼굴에 어린 건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듯한 미소였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행동을 하는지까지. 모조리 다.
분명 웃고 있지만 세연을 꿰뚫어보는 듯한 차가운 시선. 더없이 근사하지만, 미묘한 만족감이 어린 미소. 그 미소를 보자 불현듯 지난밤, 그들을 뒤따라오던 의문의 차가 떠올랐다.
그리고…….
‘야, 이 미친 새끼야! 내가 너 미친놈인 건 진작 알았지만, 장난 좀 친 것 가지고 이렇게까지 뒤통수를 쳐? 미친 거 아니야?’
태경의 휴대폰 너머로 들리던 앙칼진 목소리.
오늘 아침 뜬 우희경과 차주원의 스캔들 기사.
그리고, 취소된 소개팅.
……이 모든 건, 그저 우연의 일치일까.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세연은 곧 고개를 저었다.
제가 뭐 그리 대단한 사람이라고.
자의식 과잉이었다. 다른 남자와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에 괜스레 저 혼자 찔린 것뿐이면서.
자꾸만 오늘따라 이상하게 과민해지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드는 건, 아마 가슴 때문에 신경이 곤두선 탓일 터다.
세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카디건을 여미고, 뻣뻣한 동작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아이처럼 고개를 푹 숙이며 휴대폰을 옆으로 밀어 놓았다.
‘사실 잘못한 건 없는데…….’
태경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고, 조금이라도 그의 마음에 들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게 되고. 그런 게 본래 짝사랑의 증상이라 해도, 왜 이렇게까지 매번 눈치를 보게 되는 걸까.
세연이 그렇게 자책하며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돌린 사이, 누군가 살며시 다가왔다.
“세연 씨.”
“네?”
박 과장이었다. 그녀는 목소리를 한껏 낮추며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입 모양만 벙긋거렸다.
“혹시 소개팅 취소된 거 아냐? 지금 이 난리가 났으니.”
“아, 네. 아무래도 바쁘셔서 만나기 어려우실 것 같다고 정식으로 사과하셨어요. 전 괜찮아요. 일이 급하죠.”
“그러게. 지금 일이 좀 세게 터져서.”
안타까운 얼굴로 입술을 살짝 깨문 박 과장은 곧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평소 같으면 기사 나오기도 전에 다 막았을 텐데, 어떻게 이게 나갔나 몰라.”
“그러게요. 웬만한 건 다 막는다고 들었는데 어쩐 일인지…….”
세연 역시 의외라고 생각하긴 했다.
정계며 언론과 유착되어 있다는 비난을 받을 정도로 불미스러운 일에 대한 기사화를 막아 온 우성 그룹이었다.
우씨 일가의 사생활과 관련된 건 물론이고, 판매 실적에 대해서도 입맛대로 기사를 냈다. 그러니, 이런 기사가 그리 쉽게 터질 리는 없었을 텐데.
왜일까.
설마, 아니, 아무래도…….
세연이 알 수 없는 위화감에 휩싸여 저 멀리 태경을 곁눈질하는 사이, 박 과장이 세연의 어깨를 짚으며 토닥였다.
“미안해.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내가 다 아쉽다.”
“아니에요, 과장님. 신경 쓰지 마세요. 이제 지옥 주간이니까 저도 열심히 일하려고요.”
“그래. 어려운 거 있으면 꼭 물어보고.”
“네. 근데, 저 어려운 거 되게 많은데…….”
세연은 말끝을 흐리며 박 과장을 올려다보았다. 불편한 생각들을 떨쳐 내기 위해 일부러 더 환하게 웃는 얼굴로.
그건 세연의 오랜 버릇이었다. 저를 좀먹는 부정적인 감정들을 몰아내기 위해 억지로 웃고 괜스레 밝게 행동하는 것.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박 과장의 눈에는 신입 특유의 애교 있는 모습으로 비쳤을 뿐이지만.
“원래 신입 때는 다 그런 거야. 혼나면서 배우는 거지, 뭐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 있나? 그러니까 뭐든 어려워 말고 물어봐.”
“네, 그럴게요. 감사합니다.”
세연이 구김살 없는 얼굴로 한층 더 밝게 웃으며 싹싹하게 대답했다. 감사 인사와 함께 꾸벅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저 멀리 서 있던 태경은 어느새 사라진 채였다.
“…….”
마치 단 한 번도 그곳에 서 있지 않았던 것처럼. 조금 전에 보았던 모습이 환영처럼 느껴질 정도로 텅 비어 있는 자리를, 세연은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 * *
똑똑.
“들어와요.”
세연은 호흡을 가다듬고 팀장실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그녀는 태경의 안색부터 살폈다.
“…….”
온종일 우희경의 스캔들 기사로 회사가 떠들썩한데, 그만이 다른 세상에 사는 것처럼 아무 일도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일부러 괜찮은 척하고 있는 건 아닌지. 도리어 걱정이 될 지경이었다.
“저, 팀장님. 괜찮으세요?”
세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뭐가?”
“부사장님, 기사 떴잖아요.”
“그래서요?”
되돌아온 건 생판 남의 얘기를 들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커다란 표정 변화 없이 무표정한 얼굴이지만, 입가에 미묘한 미소가 스쳤다고 느낀 건 착각일까.
“내가 안 괜찮을 이유 있어요?”
하는 말만 들어서는 조금 까칠한 것 같기도 한데, 웃음기가 잔뜩 섞인 말투였다.
세연은 어느 쪽에 장단을 맞추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그사이, 의자를 빙글 돌리며 한층 더 깊숙이 기대어 앉은 태경이 테이블을 톡톡 두드렸다.
“어차피 한두 번 걸린 것도 아니고, 별일도 아닌데. 정세연 씨가 왜 그 사람을 걱정해요.”
그 사람.
누나를 부르는 호칭치고는 거리감이 느껴진다 싶었다.
“아니, 그분을 걱정한다기보다는, 주가도 그렇고 아무래도 가족이니까, 혹시 팀장님이…….”
“내 걱정이에요?”
“……네.”
“기특하네.”
태경이 삽시간에 부드러워진 얼굴로 세연의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착하기도 하지.”
그는 커다란 손으로 세연의 가느다란 허리를 잡아 감싸고, 어린애 대하듯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명백한 애 취급에 얼굴을 붉히고 있으려니, 색이 옅은 머리칼이 그의 손가락 사이에서 결 좋게 흩어졌다.
“근데 내 생각엔.”
그가 세연의 상기된 여린 뺨을 손끝으로 쓸어내리며 말했다.
“지금 정세연 씨가 남 걱정할 때가 아닌 것 같은데.”
“으읏!”
어느새 목덜미를 타고 내려온 기다란 손끝이 옷 위로 도드라진 젖꼭지를 꾹 누른 순간,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온 새된 신음에 세연은 그만 입을 틀어막았다.
“기억나죠?”
대체 언제 꺼내 든 건지 모를 브래지어가 기다란 손가락 끝에서 달랑거렸다.
“이따 밤에 돌려 달라고 했잖아.”
세연의 얼굴이 이보다 더 빨개질 수 없을 정도로 새빨갛게 익었다. 간신히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내가 이거 잃어버리지도 않고 하루 종일 잘 맡아 두고 있는데, 혹시 칭찬해 줄 생각 없어요?”
“……자, 잘하셨어요.”
“그게 끝이에요?”
세연은 눈을 피하며 그렇게 말하자, 태경은 김이 샌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그걸로는 부족한 걸까.
그녀는 떨리는 손을 내밀어 완벽하게 정돈된 태경의 머리를 손끝으로만 살짝 조심히 쓰다듬었다. 조금 전 태경이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나 따라 하는 거야?”
태경이 피식 웃었다. 정작 그 자신은 세연을 어린애 대하듯 해 놓고, 똑같은 취급을 받으니 황당한 모양이었다.
“내가 바란 칭찬은 그런 게 아닌데.”
“그럼…….”
“키스해 줘요.”
태경이 세연의 허리를 끌어당겨 제 위에 앉히며 말했다. 그의 체향이 코끝에 물씬 풍겨 눈앞이 어지러웠다.
게다가 이런 자세라니.
세연은 반사적으로 팀장실 문부터 살폈다. 다행히도 굳게 닫혀 있어, 결코 열릴 리 없어 보였다. 오갈 데를 모르고 떨리는 시선이 이윽고 태경의 입술에 닿았다.
“…….”
세연은 태경의 목덜미에 팔을 두른 채, 서서히 고개를 기울였다. 서로의 숨결이 조금씩 얽혔다. 긴장감에 휩싸인 몸을 어쩌지 못하고 머뭇거린 순간.
“흐읏!”
카디건 안으로 불쑥 들어온 손이 가슴을 그러쥐었다. 기울어진 자세와 속옷을 입지 않은 탓에 덜렁거리는 커다란 가슴이 그보다 큰 태경의 손아귀 아래서 손쉽게 짓이겨졌다.
“빨리.”
태경이 세연의 가슴을 주무르며 재촉했다.
“으읏, 네.”
셔츠 위로 그의 손길이 닿았을 뿐인데, 그 사실만으로도 온몸에 열기가 피어났다.
세연이 조금 흐릿해진 눈가를 발갛게 물들이며 입술을 포개었다. 밤새 맞닿아 있었던 입술은 여전히 한없이 부드럽고 따뜻해서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그녀는 조금 벌어진 입술 틈새로 자그마한 혀를 천천히 밀어 넣으려다 살짝 간질이는 데 그쳤다. 분명 태경은 무척이나 능숙하게 했던 것 같은데, 막상 제가 하려니 쉽지 않았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턱없이 부족한, 서툰 키스였다. 어쩐지 부끄러웠다. 세연이 그의 아랫입술을 살짝 빨고는 몸을 뒤로 무르려 하자, 태경이 그녀의 가슴을 세게 움켜쥐었다.
“읏!”
“칭찬해 줄 마음이 없나 본데.”
카디건이 순식간에 어깨까지 끌어 내려지고, 그 안에 숨겨져 있던 셔츠 단추가 하나씩 톡톡 풀어졌다.
태경이 손끝으로 셔츠 자락을 살짝 잡아당기자, 세연의 가슴이 훤히 드러났다.
“상은 내가 알아서 받아야겠어.”
태경은 예쁘게 모양 잡힌 가슴을 손에 쥐며 젖꼭지를 입에 물었다.
“태경, 씨……!”
여기서 이러면 안 된다고 말하려던 세연은 한층 더 입을 세게 틀어막았다. 거세게 빠는 힘 때문인지 신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어느덧 세연은 태경의 머리를 껴안고 몸을 떨며 전율했다. 엉덩이 아래 단단해진 남자의 열기가 느껴졌다. 지난밤을 떠올리게 하는 열감이었다.
저도 모르게 앞뒤로 허리를 움직이려던 세연이 의식적으로 움직임을 멈추려 애썼지만, 쾌감을 기억하는 다리 사이가 빠듯하게 조여 왔다.
이대로 여기서 안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니.
미친 게 분명했다.
그사이, 한참이나 가슴을 빨던 태경의 입술이 점점이 자국을 남기며 위로 올라왔다. 그는 곧 세연의 목덜미에 흔적을 남기며 타액에 젖은 젖꼭지를 손끝으로 잡아 비틀었다.
“으읏, 팀장님, 흣, 목은……!”
“카디건으로 여기까지 꽁꽁 싸매고 있어요.”
그가 울혈을 한층 더 세게 빨며 속삭였다.
“정세연 씨 가슴이 얼마나 예쁜지는 나만 알고 싶으니까.”
그 말에 세연의 두 뺨이 한층 더 발갛게 물들었다. 태경은 그런 세연의 뺨을 한 손에 그러쥐고 입을 맞추었다.
“흐읍!”
조금 전의 서툰 키스 때문에 느꼈던 갈증을 해소하려는 듯, 그의 혀가 익숙하게 세연의 입 안을 유영하며 서로의 혀를 얽고 타액을 빨아들였다.
바로 이거였다.
태경의 키스는 언제나 능숙하게 세연을 달아오르게 했다. 저절로 뒤틀리는 허리는 물론이고, 비비 꼬이는 다리 사이가 흠뻑 젖을 정도로.
“하아, 하, 하아…….”
한참 뒤, 젖은 입술이 떨어져 나가자 두 입술 사이에 타액이 가느다란 실처럼 이어졌다. 그가 살짝 부푼 세연의 입술을 손끝으로 매만지며 물었다.
“몸, 많이 안 좋아요?”
가느다란 허리를 감싼 손이 아랫배를 살살 쓰다듬었다. 어젯밤의 격렬한 정사 탓에 조금 쓰라린 것도 같았지만, 세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닌데…….”
“다행이네요.”
태경이 새하얀 어깨 위로 입을 맞추고, 장난스럽게 살짝 깨물며 말했다.
“안 좋아도 그냥 보낼 생각 없었거든.”
그가 잇자국 위로 입술을 가져다 대며 귓가에 속삭였다.
“내가 오늘도 정세연 씨 만나고 싶어졌다는 뜻이에요.”
“……정말요?”
세연은 꿈에서 깨어난 지 얼마 안 된 사람처럼 멍한 얼굴로 되물었다. 오늘 아침의 일을 괜히 저질렀다고, 바보 같은 짓이라고 자책했던 게 오히려 아둔하게 느껴졌다.
아니, 지금도 그랬다. 벅차서 설레면서도 한편으론 믿을 수 없어 어리석은 질문을 하는 지금 이 순간도. 이 남자 앞에 있으면 언제나 바보가 되는 것 같았다.
“그럼 이 차림으로 집에 가려고 했어요?”
“아, 아뇨.”
세연은 바보처럼 헤실거리다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자신이 남긴 흔적을 내보이지 말라는 듯 태경이 옷을 추슬러 주었다. 세연은 빠르게 단추를 채우고 다시 카디건을 입으며 목덜미까지 전부 덮어서 가렸다.
그걸 본 태경이 조금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먼저 내려가 있어요.”
기다란 손끝에는 카드가 걸려 있었다.
뜻밖에도 그가 내민 것은, 임원용 엘리베이터 카드였다.
잠시 후.
주변을 살핀 세연은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없는 걸 확인한 뒤에야 임원용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이곳으로 향하는 길엔 점점 사원들이 보이지 않더니, 이제는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아까 태경에게 카드를 받아 들며 했던 걱정은 역시 괜한 우려였다.
‘다른 사람들이 타면 어떡해요?’
‘이 시간에 아무도 안 타. 내가 타거든.’
과연 그의 말대로였다. 바글바글한 일반 엘리베이터와 달리, 태경이 알려 준 임원용 엘리베이터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세연은 조금 낯선 얼굴로 엘리베이터 내부를 둘러보았다. 그녀가 타고 나서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긴 했지만, 그땐 미동조차 없다가 태경이 건네준 카드를 찍고 나서야 버튼이 눌렸다.
엘리베이터는 층마다 서지 않고 곧바로 주차장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차가 없는 세연으로서는 이용해 본 적이 없었으나, 만약 차가 있었다 하더라도 가 볼 일이 없는 임원용 주차장이었다.
똑같이 평사원으로 시작한다고 해도 역시 재벌 3세는 다르구나.
팀장급이었지만, 태경은 임원용 엘리베이터와 임원용 주차장을 쓰고 있었다.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어쩐지 약간의 박탈감과 함께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나 출생 배경에 따라 삶이 달라진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잘사는 친구들이 많은 대학에 다닐 때나 사회에 나오고 나서 몸소 느끼는 바는 또 달랐다.
세연은 옅은 한숨을 내쉬다 고개를 저었다.
뭐, 어쩌면 꼭 나쁘게만 생각할 건 아닌지도 몰랐다.
양 대리의 말에 따르면 세연이 입사하기 전, 그녀의 대학 부근에 있던 구사옥에서는 임직원과 평사원이 같은 엘리베이터를 썼다고 했다.
수다스러운 그는 신입 시절 괜한 두려움에 임원과 엘리베이터를 같이 타기 싫어 계단으로 걸어 내려간 적도 있었다며 과거 이야기를 한참이나 늘어놓곤 했다.
신사옥을 지으며 임원용 엘리베이터를 따로 만든 건, 직원들이 굳이 임원과 마주쳐서 서로 불편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배려 차원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세연이 이런 것 하나하나 박탈감을 느끼는 이유는 아마 태경에게 느껴지는 거리감 때문인지도 몰랐다.
평소에는 평범한 팀장님과 신입 사원의 관계 같다가도, 이럴 때면 태경과 자신의 세상이 너무도 달라, 도저히 같은 선상에 설 수 없다는 걸 다시금 절감하게 되니까.
세연은 쓸데없는 생각으로 복잡해진 머리를 거울에 기댔다. 좀 전에 달아오른 두 뺨이 여전히 식을 줄을 몰랐다.
거울 속의 자신은 조금 이상해 보여서, 세연은 공연히 애꿎은 옷매무새를 정리했다. 그사이 엘리베이터는 어느새 주차장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태경의 기사로 보이는 남자가 세연을 맞이했다. 남자의 등 뒤에는 고급스러운 검은색 세단이 어두운 조명 아래에서도 매끈하게 빛을 내었다.
세연은 운전면허도 없고 차에 관심도 없어 차종이나 브랜드 로고 따위를 알아보지 못하는 까막눈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저 차가 막연히 비싸고 좋은 차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뜻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는 세연을 향해 기사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곧장 차 문을 열어 주었다. 정중하게 허리를 굽히며 타라는 듯 손바닥을 뻗어 가리켰다.
“이쪽으로.”
세연은 반사적으로 등 뒤의 엘리베이터를 힐끗 돌아보았다.
아직 태경이 내려오지도 않았는데. 먼저 타도 되는 걸까.
“제가 먼저 타도 될까요?”
“집에 먼저 들어가 계시라고 하셨습니다.”
“집이요?”
집이라니. 태경의 집을 말하는 걸까.
세연이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
때마침 울린 메시지 알림 음에, 그녀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정리하고 금방 갈 테니까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정말 태경의 집이라니. 집에 가 보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세연은 조금 얼떨떨한 표정으로 기사가 시키는 대로 차에 올라탔다. 그는 각이 잡힌 정중한 태도로 차 문을 닫아 주고는 허리를 굽혔다.
“감사합니다.”
지나친 친절이 낯선 세연은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안전벨트를 맸다.
* * *
“와…….”
태경의 집에 도착한 뒤, 세연은 감탄사만을 연발했다.
태어나서 단 한 번도 이런 집을 두 눈으로 본 적이 없었다.
차가 어두운 길을 달린 탓에 집이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지도 짐작할 수 없었다. 차가 멈춰 섰을 때쯤엔 주변에 집이라곤 한 채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무척이나 한적한 곳인 듯했다.
게다가 높다란 담벼락이 집을 감싸고 있어서, 처음에는 이곳이 집인 줄도 몰랐다. 세연의 눈에 이곳은 다른 누군가가 들어오거나 감히 들여다볼 수조차 없는 견고한 성 같았다.
집 안으로 들어오기까지 몇 차례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내내 쭈뼛대던 세연은 이제 감탄사만을 내뱉었다.
집 자체도 크고 넓었지만 층고가 너무 높았다. 키가 그리 작은 편도 아니건만 거인국에 들어온 소인이 된 기분이 들었다.
“편히 계세요.”
마실 것을 종류별로 내온 사용인이 그렇게 말하고 사라졌지만, 세연은 안절부절못하고 제가 있어도 될 자리가 어디인지 찾았다.
바닥에 앉을까. 아니야. 소파에 앉아도 되겠지. 손님이니까.
그렇지만 혼자 앉기에 소파도 너무 크고 넓었다. 대체 어디쯤 앉아 있는 게 적당한지 알 수가 없었다. 세연은 고민 끝에 최대한 정중앙 자리를 찾아서 조심스럽게 몸을 기댔다.
‘빨리 왔으면 좋겠다.’
아직 아무런 연락이 없는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던 세연은 조금씩 노곤해졌다. 태경이 없는 그의 집에서 귀가만을 기다리고 있노라니, 이상한 감상에 젖어 들었다.
언젠가 결혼하면 이런 기분일까. 퇴근하고 먼저 집에 돌아와 남편을 기다리고 있으면.
남편.
그 단어를 되뇌는 세연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행복한 미소가 떠올랐다.
“…….”
그러나, 가정을 꾸리고 가족을 만든다는 게 과연 달콤한 환상과 같을 수 있을까.
먼 미래의 가정을 그리던 세연은 현재 자신의 가족이 떠올라 급격히 어두워진 낯빛으로 고개를 툭 떨구었다.
가족이라는 존재는 세연에게 언제나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그렇게 애써도 잘하고 있다는 칭찬이나 격려 한마디 들어 본 일이 없었다.
그들에게 세연이 잘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언제나 1등인 아이가 또 1등을 하는 건, 너무나 당연해서 굳이 칭찬해 줄 필요조차 없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도 괜찮다며, 스스로를 다독이며 살아왔다.
세연의 마음을 알아주기에 엄마는 너무 지치고 고단해 보였으니까. 어린 세연을 돌봐 주기는커녕, 언제고 이 지긋지긋한 곳에서 탈출하기만을 바라던 엄마였다.
가엾은 엄마.
가족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언제나 엄마부터 먼저 생각이 났다.
그러나, 정작 엄마에게 세연은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할 때만 가끔 입에 오르내리지, 평소에는 언제나 세연의 아버지와 오빠를 쫓아다니기에 바빴으니.
어려서부터 엄마는 몹시 지친 얼굴로 세연에게 말했다.
‘너라도 잘해야지.’
‘네 아빠에 오빠도 전부 저 모양 저 꼴인데, 너까지 엄마 속 썩이면 되겠어?’
‘서울까지 보내 놨으면 네 돈으로 학교 다녀야지.’
‘좋은 회사 들어갔으니까, 엄마 용돈 좀 부쳐 줘. 힘들어서 못 살겠어.’
며칠 전, 아버지가 사고를 쳤으니 돈 좀 보내 달라던 엄마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녀가 돈을 보냈으니 어찌저찌 해결이 되긴 했을 테지만, 그게 끝이 아니라는 걸 세연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엄마에게 아버지나 오빠의 뒤치다꺼리는 그만하라고 아무리 말해도 소용이 없었다. 세연 역시 엄마를 놓지 못하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
……바보같이.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으름장을 놓았지만, 정말 마지막이 될 수 있을까. 이런 형편에 좋은 남자를 만나서 가정을 꾸린다는 게 가능한 일인가.
그저 말도 안 되는 욕심 아닐까.
서울에 집 한 채는커녕 방 한 칸 구하기 힘든 세상이었다. 제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하는 처지에 결혼이 가당키나 할까.
이 넓은 집에서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어느새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항상 노력했는데, 그런데도 왜…….
어려서부터 그랬다.
언제든 자신을 버리고 떠날 준비가 된 것 같은 엄마를 붙잡기 위해서, 과외 한번 시키지 않고 학원을 보내지 않아도 1등 하는 딸이라는 자랑이 되기 위해서, 세연은 죽도록 노력했다.
비록 그런 세연에게 커다란 칭찬이 돌아오진 않았지만, 엄마는 최소한 세연을 버리고 나가지는 않았다.
그렇게 세월이 지났다. 이제는 굳이 엄마에게 버림받지 않기 위해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 엄마가 집을 떠나더라도 혼자 살 수 있는 다 큰 성인이 되었으니까.
하지만, 그사이 너무 무기력해져 그마저도 포기하고 살아가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 죄책감이 들어서, 세연은 도저히 엄마를 놓을 수가 없었다.
대신 분노의 화살은 아버지와 오빠에게 향했다.
사업이 망한 지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사장님 소리를 포기 못 해서 한탕을 노리는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쏙 빼닮은 오빠.
아들이자 장남이라는 이유로 오냐오냐 자라서, 제 손으로 하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이 가난한 집안 형편만 원망하면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 그런 사람.
세연은 가족 같지도 않은 가족을 떠올리며 진저리 쳤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세연이 좋은 집에서 잘 교육받고 자란 모범적인 아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건 오로지 세연이 한 피나는 노력의 결실이었다.
어려서부터 절대 가족들 누구와도 비슷한 삶을 살지 않을 거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으니까.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픈 엄마지만, 결코 그 삶을 닮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세연의 꿈은 항상 언젠가 좋은 남자를 만나서 따스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었다.
일적으로 성공을 거머쥐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세연이 아등바등 살았던 건 기본적으로 성공하기 위해서가 아닌 안정적으로 살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열심히 일하는 것도 착실히 커리어를 쌓아서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어서일 뿐이다. 남들 눈에는 세연이 대단한 야심가처럼 비칠 때도 있었지만 사실 그녀는 지극히 안정 지향형이었다.
남들이 다 한다는 주식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투자니 사업이니 하는 게 전부 두려웠다. 아버지가 그랬듯이 욕심을 부리다 한순간에 모든 걸 잃고 길거리로 나앉고 싶지 않았다.
제 성격에 더 잘 맞는 직업은 공무원처럼 잘릴 위험이 없는 직업인지도 모른다. 경력을 쌓다가 적당히 공기업으로 이직하거나, 공무원 시험을 봐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쯤에는, 좋은 남편과 사랑스러운 아이가 있는 화목한 가정을 가질 수 있으려나.
“…….”
남편.
세연은 아주 잠시, 헛된 꿈을 꾸듯 그 자리에 태경의 얼굴을 그려 넣어 보았다.
“……말도 안 돼.”
입가에 금방 실소가 새어 나왔다.
제 옆자리에 태경이라니. 그런 건, 꿈에서도 불가능한 일인데.
저처럼 평균 이하의 배경을 가진 사람이 감히 그의 옆에 설 수 있을 리 없었다. 지금 그의 곁에 가까이 갈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꿈을 꾸는 것이나 다를 바 없었다.
이 커다란 집이 세연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태경에게 자신은 걸맞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어차피 언젠가는 각자의 길을 갈 것이다.
태경은 그에게 어울리는 길을, 세연은 그녀에게 어울리는 길을.
그때쯤이면 과분한 상대에게 품었던 마음도 현실의 벽에 부딪혀 사라지게 될까.
지금 태경을 마음에 담은 것처럼,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날이 오게 될까.
‘술에서 깨더라도 제 마음은 그대로일 거예요. 절대로 변하지 않아요.’
그렇게 호언장담했던 마음이, 변하는 날이.
“…….”
도저히 그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오늘 아주 잠깐 의구심을 품었다 해도, 여전히 세연의 눈에 태경은 더없이 완벽한 남자였다. 그리고 그건 그녀에게 몹시 중요했다. 어차피 그와 결혼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아버지를 만난 엄마와 달리, 자신은 반드시 완벽하고 좋은 남자를 만나야 한다고 어려서부터 생각해 왔던 세연이었으니까.
남자를 잘못 만나면 인생이 망하리라는 두려움이 기저에 깔려 있어, 무의식적으로 저도 모르게 완벽한 남자를 찾았다.
하지만, 좋은 남자라니.
그가 완벽한 남자라는 건 변하지 않는 사실인데. 좋은 남자라는 말을 붙이는 건 왜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다.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상대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지금의 관계가, 마치…….
오직 몸뿐인 관계 같아서일까.
거기서 마음을 바라면, 비참해지는 건 자신뿐이었다.
괜찮아. 꼭 마음이 없어도 몸을 섞을 수 있는 거니까.
그래. 그런 거니까.
그가 마음에 들어 하는 건, 내 몸이니까.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그것만으로도 일단은 잠시 그의 곁에 머물 수 있으니까.
세연은 애써 그렇게 되뇌며,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어떤 것도.
* * *
집 안의 공기는 적막했다.
저 멀리 소파에 익숙한 인영이 보였다. 옅은 갈색빛을 띤 긴 머리가 검은 소파 아래로 늘어져 있었다. 세연이었다.
태경을 기다리다 지쳐 쓰러져 잠든 모양이었다.
아마 세연이라면 남의 집에 들어온 게 어색해서 어디에 있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하다가, 차마 방에 들어가진 못하고 소파에나 앉아 있었을 것이다.
리모컨이 언제나 두는 자리에 고스란히 있는 걸 보면, 텔레비전 한번 켜 보지 못하고 뻣뻣하게 앉아 있다가 잠든 게 분명했다.
태경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머금은 채 발소리를 죽이고 세연에게 다가갔다.
“잘 자네.”
그는 곤히 잠든 세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녀를 볼 때면, 언제나 바짝 긴장해 있는 조그마한 소동물을 보는 기분이었다.
태경의 세상에 몇 없는 무해한 존재.
이렇게 다루기 쉬울 수 있나. 가끔은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그의 손짓 하나에도 움찔 몸을 떨며 민감하게 반응했고, 언제나 홀린 듯이 반짝이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때로는 취한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더없이 순한 눈망울.
손 한 번만 까딱이면 개처럼 꼬리를 흔들며 달려오는 여자였다. 부끄럼은 또 어찌나 많은지 밤새 벗은 몸을 보고도 아침이 되면 새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한껏 풀어진 채 잠들어 있는 모습을 지금 그가 보고 있다는 걸 그녀가 알면 어떤 반응을 할까. 아마 벌떡 일어나서 제 얼굴을 가리려는 어리석은 시도를 하겠지. 생각만으로도 웃음이 나왔다.
“정말 재밌어, 정세연.”
태경은 웃음기 어린 얼굴로 오늘 아침 그녀가 내민 속옷을 손가락에 감고 빙빙 돌렸다.
‘이거요. 이따가 주세요.’
샤워 중이던 그에게 내던지듯 건네고 갔던 속옷은 이내 태경의 손바닥 안에 착 감겼다. 브래지어는 곧 세연의 옆에 툭 떨어졌다.
태경은 떨어진 모양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 수줍은 성격에 이걸 들이밀 줄이야. 대체 어떻게 그런 생각을 다 한 건지, 기특하기까지 했다.
세상에서 가장 부끄럼을 많이 타는 여자는 조금만 밀어내도 버려질까 봐 두려워하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정말이지 순하고 고분고분한 여자였다. 그래서 예뻤고,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가까이 두고 그에 맞게 귀여워하고 예뻐해 줄 터였다. 마치 개처럼.
그게 정세연에 대한 우태경의 생각이었다.
태경은 언젠가 정세연이 술에 취해 읊조리던 말을 떠올렸다.
‘팀장님은 완벽하시잖아요.’
그는 개를 쓰다듬는 주인처럼 다정한 손길로 세연의 머리를 쓸었다.
“완벽한 인간 같은 건 세상에 없어, 세연아.”
그렇지만, 부디 깨어나지 않기를. 어리석고 또 어리석은 꿈에서. 언제까지나 술에 취한 사람처럼 제게 취한 채로 환상에 빠져 살기를.
태경은 그런 바람을 담아 세연의 머리칼을 하염없이 쓰다듬었다. 손가락 사이로 사르륵 하고 빠져나가는, 그 감각이 마음에 들었다.
* * *
새벽녘, 동이 틀 무렵이었다.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세상의 모든 빛이 전부 모여드는 것 같았다. 눈이 너무 부셔서 잠에서 깨어나지 않을 수 없는 지경이 되어, 세연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아…….”
눈을 뜬 곳은 소파가 아닌 침대였다. 몸에 휘감긴 새하얀 이불에서 태경의 체향이 희미하게 풍겼다. 분명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언제 눈이 감겼는지도 모르게 잠든 모양이었다.
“일어났어?”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세연은 화들짝 놀라 몸을 굳혔다. 그제야 자신이 태경의 품에 안겨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단단함이 느껴지는 품은 따스하고 포근했다.
“먼저 가 있으라고 했더니, 자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피곤했나 봐요.”
세연은 정신을 차리려는 듯이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태경 씨는 언제 일어났어요?”
“글쎄.”
태경은 가만히 미소 지었다. 그는 불면증이 있었다. 그래서 한숨도 자지 못했다고 하면, 정세연이 어떤 반응을 할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밤을 지새우는 일 따위는 흔하다고. 밤새도록 너를 바라보고 있었다고.
그렇게 말하는 대신, 태경은 세연의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당겨 안았다.
“지금도 피곤해?”
“아뇨, 지금은…….”
그가 짓궂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 나서야 질문의 의도를 알아챈 세연이 얼굴을 붉혔다.
“……아.”
“하루 더는 못 기다려. 이제 이런 여유 부릴 시간이 없을 테니까.”
어느덧 성큼 다가온 지옥 주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러나, 세연은 아무리 힘들고 피곤해도 상관없었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를 만날 수만 있다면.
“전, 앞으로도 시간 괜찮은데.”
“나는 몰라도 넌 안 괜찮을걸?”
그를 기다리다가 기절하듯이 잠들 정도로 체력이 약한 세연이었다. 태경이 뺨을 살짝 꼬집으며 놀리듯이 말했다.
“이리 와요.”
태경이 세연의 가슴을 손에 그러쥐며 허리를 끌어당겼다. 마치 종이 인형처럼 세연은 그가 이끄는 대로 딸려 갔다. 어느새 태경의 허벅지 위에 앉은 세연의 옷은 반쯤 벗겨져 있었다.
“어, 언제…….”
“좀 아플지도 몰라. 정세연 씨 잘 때, 내내 물고 빨았거든.”
“읏!”
농담 섞인 말이 진심인지 그냥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태경이 젖꼭지를 비틀자 공연히 쓰라린 것 같기도 했다. 세연은 저도 모르게 가슴 앞을 반사적으로 가렸다.
“이제 와서?”
“그치만…….”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그의 앞에 설 때면 항상 가슴이 떨렸고, 제 몸을 보이는 건 매번 부끄러웠다.
자신과 다르게 태경은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원래 다 그런 건가.
벗은 몸을 보는 것도, 보이는 것도 여전히 부끄러운데.
그러나, 그에게 안기고 싶은 욕망이 언제나 부끄러움을 이기곤 했다. 세연은 열기로 가늘어진 눈을 휘어 접으며 가슴을 가리고 있던 팔을 천천히 내렸다.
“이리 와요.”
그녀는 시키는 대로 태경의 목에 팔을 둘렀다.
열기 오른 단단한 품은, 더없이 따스했다.
* * *
그날을 끝으로 세연은 한동안 태경을 만나지 못했다.
지옥 주간이라 불리는 시즌이 공연히 지옥 주간이 아님을, 팀원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던 토할 정도로 바쁘다는 말을 이해하게 되었다. 연일 계속되는 야근에 눈 밑이 퀭해질 정도였다.
밤에는 편의점 야간 아르바이트에, 낮에는 과외를 하고, 학기마다 학점을 꽉꽉 채워 들으면서도 장학금을 놓치지 않던 대학 시절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집에 들어가서 겨우 잠만 자고 다시 나오는 생활이 반복되었다. 입사 이후 처음으로 자료 발표를 도맡게 된 그녀로서는 부담감이 한층 더했다.
하지만 몸이 힘든 것보다도 더 참기 어려운 건, 태경을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같은 사무실 내에 있는데도 얼굴을 보기가 어려웠다. 비단 지옥 주간 탓은 아닌 듯했다.
우희경 부사장이 건강상의 이유로 자리를 비우고 있었고, 태경이 전무로 승진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그게 사실이라면 여러모로 정신이 없을 터였다.
그러나, 거의 반시체가 되어 가는 사람들 틈에서 쌩쌩한 건 태경뿐이었다. 이전부터 체력이 정말 좋다고는 느꼈지만, 지금의 그는 무슨 일이 생겨도 절대로 무너지지 않는 강철 체력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세연이 비실거리며 곧 쓰러질 듯 사무실 내부를 돌아다닐 때마다, 저 멀리 홀로 멀쩡한 태경이 보였다. 그를 보면 기운이 나는 것도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하고 초조했다.
자신과 달리 체력이 떨어지지 않는 그라면, 지금 같은 시기에도 다른 누군가를 만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그나마 다행이라면, 모두가 야근을 하고 새벽까지 서로 자료를 보내느라 연락을 주고받고 있으니, 총괄 책임을 맡은 그가 다른 여자를 만날 가능성은 다소 희박하다는 점이었다.
투자 승인을 위한 내부 임원 보고 당일.
데이터 정리나 피피티를 만드는 역할이 전부인 게 신입이라지만, 세연은 이례적으로 발표를 맡게 되었다. 태경의 제안이었다.
‘정세연 씨가 한번 해 보죠.’
‘……네?’
고작 신입에게 발표를 맡기다니.
모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항간의 소문대로 우성 장학생 출신을 키우기 위해 밀어주는 것 아닌가 하는 의혹이나 불만을 품은 이들조차 자신이 발표를 맡고 싶어 하진 않았다.
도리어 팀장님이 언제나 엄격하게 대하는 대상인 세연을 가엾게 여겼다. 비록 내부 보고라 하나 이건 조 단위의 투자를 승인받는 자리라 무척이나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이런 큰일을 왜 제게 맡긴 건지, 의중을 짐작할 수 없었다. 따로 만나서 물어볼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니 더욱 그랬다. 어쨌든 잘 해내야 한다는 생각으로 세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긴 했지만, 세연은 지금 긴장감에 쓰러질 것만 같았다. 아침부터 오후 세 시까지 물 한 방울 입에 대지 않고 아무것도 먹지 않았으나 배가 고프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긴장하는 일이 있으면 아무것도 먹질 못하는 게 세연의 나쁜 습관이었다. 지나친 부담감과 중압감이 밀려와,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는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자료만 계속 들여다보는 것뿐이었다.
원래도 다른 이에게 징징대지 못하는 성격이기도 했지만, 저마다 각자 맡은 역할이 있으니 모두가 바쁜데 누굴 붙잡고 하소연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누가 손이라도 잡아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세연이 핏기가 가신 얼굴로 긴장하고 있던 그때, 태경이 그녀를 불렀다.
“정세연 씨, 잠깐 나 좀 봐요.”
“네.”
세연은 여전히 바짝 긴장한 채로 팀장실로 들어갔다.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뒤돌아선 태경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잘할 것 같은데, 왜 이렇게 긴장해.”
태경이 세연의 차가운 손을 잡으며 말했다. 커다란 손에서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다.
“워낙 잘하잖아.”
“……정말요?”
항상 태경에게 혼났던 세연으로선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하지만…… 저 맨날 혼나기만 했는데…….”
“잘하니까 더 잘하라고 그런 거지.”
그가 세연의 볼을 살짝 꼬집어 주자, 조금 긴장이 풀렸다.
“손은 왜 이렇게 차가워. 아무것도 못 먹고, 괜찮겠어요?”
“네. 끝나야 먹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 일단 잘해요. 알았지?”
“네.”
태경의 커다란 손이 감싸 주자, 시체처럼 차가웠던 손끝에 차츰 온기가 돌았다. 세연은 조금 핏기를 되찾은 얼굴로 팀장실에서 나왔다.
-!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폰에서 메시지 알림 음이 울렸다.
세연은 눈을 크게 떴다.
그날 이후 한 번도 메시지를 받아 본 일이 없던, 태경의 개인 연락처였다.
[잘할 수 있을 거예요.]
메시지를 본 세연의 눈가가 살짝 젖어 들었다.
[힘내.]
뭐든지 저 혼자 힘으로 헤쳐 나가야 했던 숱한 지난날들이 떠올랐다.
아무리 타인과 함께하는 일이더라도 결국 혼자만의 힘으로 해내야 하는 순간이 왔을 때, 그때마다 느꼈던 지독한 고독과 불안감이 떠올랐다.
세상에 혼자 남겨지는 것 같았던 그런 순간, 누군가 이렇게까지 자신을 지지하고 응원해 준 적은 없었다. 가슴 한편이 뭉클해졌다.
‘잘할 수 있을 거야.’
세연은 태경이 해 준 말을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힘내자.’
발표 자료를 쥔 손은 여전히 덜덜 떨렸다. 언제나 발표 직전에는 이렇게 긴장되지만, 막상 시작하면 잘할 수 있으리라는 것을 숱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세연은 몇 번이나 심호흡을 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오래도록 내쉬기를 반복하고 나니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얼굴 가득 환한 웃음을 띤 채 회의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안녕하세요.”
긴장감을 감추기 위해 한층 더 침착하고 차분해진 음성으로, 세연은 발표 진행을 시작했다.
* * *
회의가 끝났을 때는 거의 탈진 상태였다. 이대로 쓰러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다. 팀원들이 비틀거리는 세연의 어깨를 두드리며 추켜세웠다.
“세연 씨, 정말 고생 많았어.”
“역시 그냥 들어온 신입이 아니네. 일당백이라니까.”
입사 시험에서 일등이었던 세연이 면접까지 잘 봐서 유명했던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면서 세연 본인조차 잊고 있던 얘기를 꺼내는 팀원도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날카로운 질의응답이 오가는 자리인데, 시작 직전까지 덜덜 떠는 세연의 모습에 다 같이 긴장했다가, 막상 잘 해내는 모습에 한시름 놓았다. 회의가 끝나고 나니 모두들 긴장이 풀린 모양인지 호들갑을 떨며 너스레 섞인 칭찬을 건네 왔다.
“감사합니다.”
세연은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정작 자신은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마 손 떨림이 멈춘 걸로 보아선 크게 긴장하지 않고 해낸 모양이었다. 항상 그랬듯이.
양 대리가 프린트해 준 자료의 순서가 뒤바뀌어 있었던 바람에 정신이 없긴 했지만, 다행히도 놀라거나 당황한 기색 없이 수습하여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만일 잘 넘기지 못했더라면 분위기가 몹시 싸해질 수도 있는 상황이었으니. 평소 신입을 좋게 생각하던 전무가 너그러이 넘어가 준 것도 다행이었다.
“에이씨, 내가 분명히 몇 번이나 확인했는데 말이야.”
양 대리가 면목 없다는 얼굴로 머리를 벅벅 긁으며 세연에게 다가왔다. 자료 프린트가 잘못되는 게 신입 시절엔 더러 있는 일이니 여러 번 확인하라는 훈수까지 두며 저 대신 해 주겠다고 나선 그였다.
별 이상 없는 파일 순서를 두고 조금 수정하자고 해서 발표 직전에 전부 파쇄하고 다시 프린트하기까지 했는데. 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긴 건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잘못 프린트된 자료가 하필 다른 사람도 아닌 전무에게 간 것 역시.
“하필이면 그게 왜 전무님한테 갔냐. 진짜 미안하다, 세연 씨.”
“아니에요. 제가 한 번 더 체크했어야 했는데…….”
이미 그렇게 된 거 다 끝난 마당에 선배에게 뭐라고 할 수도 없으니, 세연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양 대리가 주축인 담배 삼인방이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에이, 그거 티도 안 나던데. 정세연 씨 진짜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술술 말하더라. 그걸 다 외우는 거야?”
“아뇨. 그냥 급하니까 저도 모르게 입에서 나온 것 같아요.”
“대단하다, 대단해.”
감정을 숨기는 일에 원체 능숙한 덕분에 긴장하거나 불안해도 전혀 티가 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극도로 불안한 상황에서 기지를 발휘하여 어려움을 넘긴 것 역시 마찬가지고.
좋은 버릇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이런 때에는 꽤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뭐가 되었든 잘 끝나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세연은 조금 가벼워진 마음으로 싱긋 웃었다.
그때, 누군가 뒤늦게 회의실에서 나온 태경을 향해 말했다.
“팀장님, 저희 회식이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그래야죠. 다들 고생 많았어요.”
태경의 시선이 잠시 세연에게 느릿하게 닿았다.
“……정세연 씨도.”
“팀장님……?”
세연은 그의 기분이 미묘하게 조금 가라앉은 것 같다고 느꼈지만, 태경이 곧 환히 웃으며 그녀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고생 많았어요.”
* * *
회식은 초저녁에 끝났다.
초반에는 다들 2차, 3차까지 가자며 큰 소리를 쳤지만, 평균 연령대가 높은 팀원들은 연일 이어진 야근에 체력이 고갈되어 도저히 버티지 못했다.
여전히 쌩쌩하다며 허세를 부리면서도 우선 오늘은 집에 가서 편히 발 뻗고 자자며 흩어졌다.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는 사이, 태경은 사무실로 향했다.
“…….”
어제까지만 해도 팀원들과 밤늦게까지 함께 남아 있던 사무실은 불이 꺼진 채 텅 비어 있었다. 익숙한 어둠을 헤치고, 태경은 팀장실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제일 위에 있는 서랍을 열자, 프린트된 발표 자료 한 부가 나왔다.
‘팀장님, 제가 수정 좀 했습니다.’
양 대리는 신입인 세연보다 자신이 검수하는 편이 좋으니, 제가 나서서 살펴보다가 더 나은 방향으로 순서를 바꾸었다고 생색을 내며 태경에게 새로 프린트된 자료를 내밀었다.
‘아까 드린 건 파쇄하겠습니다.’
‘괜찮아요. 내가 하죠.’
그러나, 말과 달리 태경은 자료를 파쇄하지 않았다. 다른 이들과 순서 배치가 다른 그 자료는 전무에게 갔다.
어차피 그가 있는 자리에서 전무가 세연을 크게 혼낼 리는 없다는 계산하에 벌인 일이었다.
신입인 정세연의 잘못은 곧 팀장인 제 잘못이 될 테고, 전무는 지독히도 태경의 눈치를 보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이 대체 뭘 보고 싶었던 건지 모르겠다.
정세연이 그 자리에서 무능력하게 울음이라도 터뜨리길 바랐나.
글쎄. 차라리 그랬다면, 지금처럼 기분이 더럽진 않았을 것 같았다.
거짓말이라곤 못할 것 같았던, 그 순진무구한 얼굴. 그를 좋아한다고 수없이 속삭이던 그 입술에서 거짓말이 막힘없이 술술 나왔을 때, 그의 기분은 처참할 정도로 가라앉았다.
조금 전까지 핏기 없이 온몸을 떨던 여자는 환하게 웃으며 회의실 분위기를 밝혔다. 누가 보아도 그녀가 오늘 물 한 모금 입에 대지 못했다는 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활기찬 모습이었다.
감정을 숨기고 태연한 모습을 보이는 게 직장인의 기본이라고 해도 모두가 그런 능력을 갖추는 건 아니다. 유독 실전에 강한 사람들이 있었고, 태경 역시 그런 이들을 수없이 봐 왔다.
그러나 정세연은 결이 달랐다.
그녀는 감정을 숨기는 게 몸에 배어 있었다. 오직 그의 앞에서만 감추지 못했다. 왜냐면, 그를 좋아하니까. 너무 좋아서, 너무 좋다고 온몸으로 그렇게 외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언젠가 그 마음이 변하거나 식는다면.
태경은 꼬리를 흔들며 달려오던 개가 그를 배신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였다. 어차피 마음 같은 건, 한낱 감정이란 건 하루아침에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그게 얼마나 기분 더러운 일인지 태경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저만 보도록 가둬 놓으면 어떨까.
세상과의 연결 고리를 하나씩 잘라 낸다면. 한낱 감정 따위가 변한다고 해도 돌이킬 수 없게 만들어 버린다면. 그럼 갈 곳이 없어서라도 주저앉지 않을까.
정세연은 상상조차 하지 못하겠지만, 그녀를 초대했던 집은 앞으로 그녀의 감옥이 될 예정이었다. 그게 언제가 될지는 조금 더 고민해 보아야겠지만.
세상이 주는 불쾌감을 안고 들어섰을 때, 그 집에 정세연이 항상 있다면 어떨까. 하루 종일 자신을 기다리고, 저만을 생각하고 있다면.
상상만으로도 그림이 나쁘지 않았다. 그 집은 여자에게 썩 잘 어울렸다. 그녀를 가둬 놓을 장소로.
만약 그래야만 한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개라는 건 모름지기 주인이 시키는 대로 짖으라면 짖고 기라면 기어야 하는 법이니까.
“…….”
양 대리가 다시 내밀었던 새 자료는 이내 태경의 손안에서 형편없이 구겨졌다.
* * *
며칠 뒤.
세연은 처음으로 오전 반차를 내고 집에서 뒹굴거렸다. 반차라고 해 봐야 조금 늦게 출근하는 것뿐이지만, 오랜만에 맞이한 꿀 같은 휴식이었다.
-!
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한 세연이 약간 어두운 표정으로 메시지 창을 켰다.
엄마가 이번엔 또 무슨 일일까.
그렇게 생각한 세연은 곧 두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엄마가 보낸 메시지가 반가운 적이 없건만, 이번에는 의외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세연. 뭐 하고 지내. 요즘.회사는 잘 다니고? 너 이제곧.생일인데. 주말에 집 한번.내려와라.]
식당에서 일하는 중인지 맞춤법도, 띄어쓰기도 엉망인 메시지였지만, 세연의 입가에는 저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랐다.
어쩐 일이지.
평소 생일이라고 챙겨 준 적이 없는 가족들이었다. 오빠와 세연의 생일이 일주일도 차이 나지 않는 까닭에 오빠 생일에 사 온 케이크를 얻어먹는 게 전부였고, 선물은 바라지도 않았다.
더 어린 시절, 아빠가 번듯하게 사장님 소리를 듣던 시절에는 좀 달랐을지도 모르지만, 사업에 실패하고 난 뒤로 그는 평생 용돈 한 번 준 적이 없었다.
그나마 엄마는 미역국이라도 끓여 주긴 했으니까 올해도 그러려나. 그 외에는 생일이라고 별다를 게 없었는데, 굳이 내려오라는 말을 다 하다니.
꽤 의아하다 싶긴 했지만 그래도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좋았다. 마침 한고비 넘긴 시점이라 그런지 컨디션이 좋았던 터라 세연은 금세 답장을 보냈다.
[알았어. 이번 주말에 내려갈게.]
그렇게 보낸 뒤, 세연은 공연히 메시지 목록을 쭉 내려 보았다. 친구들, 팀원들과 주고받았던 메시지를 지나, 며칠 전 태경에게 받은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잘할 수 있을 거라고 진심을 담아 응원해 주던 메시지를 볼 때마다 괜히 마음이 뭉클했다.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든든해졌다.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마음 깊이 의지해 본 일이 없었다.
세연은 태경의 개인 연락처를 손끝으로 매만졌다. 숫자 하나하나가 다 멋져 보였다. 태경에게 잘 어울리는 조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이 멋지니까, 숫자도 멋진가.’
숫자 따위가 멋질 리 있나.
그저 콩깍지가 단단히 쓰인 것뿐이겠지만, 세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숫자와 잘 어울리는 남자를 떠올렸다.
‘……보고 싶다.’
그를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벅찼고, 못 견디게 보고 싶었다. 그냥 출근을 할 걸 그랬나, 하는 직장인으로서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사람이 사람을 이렇게 좋아할 수가 있는 일인가.
세연은 이따금 자기 자신이 신기했다. 누군가를 이렇게 열렬히 좋아해 본 건 태경이 처음이었다. 회사에 가면 매일 보는데도 또 보고 싶었다.
만일 연락처의 주인에게 편히 연락을 해도 되는 사이라면, 가장 먼저 보고 싶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다. 물론 그와 아무 사이도 아닌 세연으로서는 절대로 전할 수 없는 말이겠지만.
보고 싶어요.
절대로 닿지 못하고 들리지 않을 거리에서만 할 수 있는 말.
가슴 가득 차오르는 그 말 한마디를 전하지 못하고, 세연은 입으로만 되뇌었다. 이미 외울 정도로 수백 번이나 본 태경의 메시지를 또다시 들여다보면서.
“대체 왜 이렇게 다정한 거야.”
자신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면서.
세연은 원망하는 마음이 생겨 괜히 입술을 꼭 깨물었다. 짝사랑하는 사람에겐 이유 없는 다정함이 죄였다. 다정은 도저히 마음을 끊어 내지 못하게 만드니까.
이렇게 다정하게 대해 주는데도 아무런 사이도 아니라는 게 서글프게 느껴졌다. 제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니 태경을 원망할 자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가끔은…… 좀 미워.”
세연은 그의 연락처를 손끝으로 톡톡 두드렸다.
“……어?”
전화가 걸린 건 순식간이었다. 아무래도 통화 버튼을 잘못 누른 듯했다. 경쾌하게 울려 퍼지는 연결음에 당황하며 급하게 끊으려던 찰나였다.
-왜.
휴대폰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티, 팀장님!”
세연은 반사적으로 침대에서 튕겨 일어나 손가락을 깨물었다.
-무슨 일이에요.
“죄, 죄송해요. 제가 잘못 걸었어요. 그게, 전화를 걸려던 건 아니고, 그냥 전화번호를 쳐다만 보고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까…….”
세연은 당황해서 변명을 늘어놓았다. 보고만 있었는데 번호가 눌렸다니. 고양이라도 길렀으면 고양이가 누른 거라는 변명이라도 할 텐데.
게다가 나오는 대로 말하고 보니 안 해도 될 말들이었다. 이런 바보 같은 말을 왜 했을까. 고개를 가로저으며 어떻게든 수습하려 애쓰던 찰나, 태경의 음성과 맞물렸다.
-왜. 나 보고 싶어서?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네?”
세연은 예상치 못한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진심인지 농담인지 모를 웃음기가 배어난 목소리였다.
-연락처를 왜 들여다보고 있어요, 쓸데없이. 나 보고 싶으면 출근해요.
“아니, 그게……. 그건 맞는데, 저 오늘 오전 반차라서요.”
-알아. 누구 하나 없다고 사무실이 텅 빈 것 같던데.
마치 그녀의 빈자리를 느끼기라도 했다는 듯한 말에 가슴이 뛰었다. 또 이유 없는 다정함에 어리석은 기대를 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지금 이 순간이 좋았다.
-빈자리가 있어서 그런지 좀 허전하기도 하고.
세연을 눈을 감고 태경의 목소리를 들었다. 어쩐지 조금 더 달콤하게 들렸다. 마치 귓가에 속삭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이불에 몸을 파묻으려다, 문득 걱정이 들었다.
저야 집이지만 태경은 출근해서 사무실에 있는 시간일 텐데.
뒤늦게 이제야 이런 생각이 든 것에 자책하며 세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지금, 통화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마침 밖이라서.
밖이라고 하기엔 그의 세상엔 소음이 제거된 듯 주변이 무척 조용했지만, 세연은 의아함을 느끼기보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에요.”
태경의 입장에선 갑작스럽게 걸려 온 전화에 불과할 테지만, 그래도 당장 끊을 생각은 없는 모양이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반차 쓰고 뭐 해요?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 있어요.”
-…….
태경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말하고 보니 너무 할 일 없는 사람처럼 보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이렇게 곧이곧대로 털어놓는 걸까. 바보처럼. 뒤늦은 후회감이 밀려왔다.
“아, 아니, 저 평소에는 집에서 하는 일 많아요. 오늘은 오랜만에 집이니까 그런 거지, 원래는 저…….”
내가 집에서 뭘 하더라.
생각해 보니 원래도 집에서 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최근에는 매일같이 야근하고 집에 오면 자기에 바빴다. 세연은 말끝을 흐리며 주변을 다급히 둘러보았다.
-뭐 하는데?
태경이 여전히 웃음기 배인 목소리로 되묻는 순간.
때마침 예전에 완성해 놓은 작은 퍼즐과 책장에 꽂힌 책 몇 권, 그리고 영어 공부를 위해 사 놓은 문제집이 보였다. 그 옆에는 하다 만 뜨개질 키트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별것 아닌 것들이었지만, 세연은 구세주라도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그냥, 조그만 퍼즐도 맞추고, 책 읽고, 영어 공부하고, 또 요즘엔 뜨개질도 하고…….”
-뜨개질?
태경은 그렇게 되묻고는 이어 아아, 하고 곧이어 알겠다는 듯한 목소리를 내었다.
-봤어요. 점심시간에 모여서 하는 거.
어쩐지 다른 의미로 웃음기가 배어난 음성이었다.
“아, 보셨어요?”
그가 이미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세연은 공연히 머쓱해져 머리를 긁적였다.
우성전자 점심시간은 본래 휴식과 운동, 취미 생활의 장이었다. 사측에서는 사원 복지를 위해 자전거 등을 구비해 두고, 점심시간에 이용하도록 장려했다.
그뿐만 아니라 트레이닝 프로그램을 포함한 각종 클래스가 열렸다. 그중 마침 뜨개질이 포함되어 있었고, 해당 클래스를 듣고 온 박 과장이 뜨개질을 전파한 것이다.
처음엔 할머니도 아닌데 무슨 뜨개질을 하시냐며 놀리던 직원들도 생각 없이 손을 움직이고 있으면 마음이 편해진다는 이유로 하나둘씩 키트를 구입했다.
세연도 마찬가지였다. 온종일 책상 앞에 앉아서 답이 없거나 끝이 나지 않는 문제들과 씨름하는 게 회사원의 일이기에, 차라리 뜨개질을 통해 머리를 비우고 몸을 움직이는 게 편했다.
언제부터인가 이따금 점심시간에 여직원들이 모여서 차나 커피를 마시며 잔잔한 음악을 틀어 놓고 뜨개질을 했다. 아이를 둔 사원들은 주로 목도리를 떴고, 세연이 선택한 건 손바닥만 한 컵 받침이었다.
한가운데엔 자수로 귀여운 돌고래 모양을 새기려던 컵 받침.
완성해서 사무실에 놔두면 유용하게 쓸데가 있으리라는 생각이었지만, 아직까지 완성하지 못하고 있었다. 최근에는 너무 바빠서 그런 시간을 가질 여유조차 없었던 탓이었다.
세연은 얼른 완성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뜨다 말았던 컵 받침을 집어 들었다.
“나중에, 제가 만든 거 보여 드릴까요?”
세연은 나중이라는 말에 기대감을 담아 보았다. 이제 겨우 형체가 잡혀 가는 조그만 컵 받침이 그를 한 번 더 만나기 위한 빌미가 되길 바라면서.
-아니. 관심 없는데.
그러나 되돌아온 답변은 단칼에 그러한 기대감을 잘라 버렸다. 얼굴을 보지 않고 목소리만 들어서일까. 꽤 단호한 음성이 냉정하게 느껴졌다.
“아, 네…….”
세연은 당혹감에 말끝을 흐렸다.
“그쵸, 아무래도 이런 거는 관심 없으시겠죠…….”
순식간에 풀이 죽은 세연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손에 들고 있던 컵 받침을 떨구었다.
-장난인데. 다음에 한번 보여 줘요.
“정말요?”
만약 세연에게도 토끼처럼 커다란 귀가 있었다면 쫑긋하고 바짝 섰을 것 같았다. 다음이라는 건 그 정도로 솔깃한 말이었다.
다음. 그럼 대체 그 다음이 언제일까.
언제인진 몰라도 기약할 수 없는 다음이 다시 찾아왔다는 사실에 목이 메었다. 세연은 애써 목소리를 쥐어짜 내듯 물었다.
“그럼, 혹시 오늘 저녁에 보여 드릴까요?”
-왜. 회식 자리에서 자랑이라도 하려고?
오늘 회식이었구나.
세연은 눈을 크게 떴다. 완전히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회식이 끝나고 따로 만나긴 어렵겠지.
“아, 아뇨. 그건 아니고…….”
그럼 또 언제가 좋을까.
세연이 머리를 굴리려는 사이, 태경이 다정한 음성으로 질문을 던졌다.
-이번 주말엔 뭐 해요?
“네? 이번 주말이요?”
저도 모르게 두 눈을 크게 뜨던 세연은 이내 아쉬운 얼굴이 되어 입술을 깨물었다.
“아, 고향에 있는 집 내려가기로 했어요.”
왜 하필이면.
아쉬운 마음에 세연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저 평소엔 주말에 진짜 하는 일 없어요. 정말 아무것도 안하고 맨날 집에서 누워만 있는데, 하필이면…….”
-아까는 집에서 하는 일 많다며.
“아니, 그건…….”
세연이 거짓말하다 들킨 아이처럼 당황하자, 태경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속상해 말아요. 나도 주말엔 본가 들어가야 하거든.
“아, 매 주말마다 가시는 거예요?”
-아니. 이번 주만. 주말마다 가면 못 견딜 것 같은데.
태경은 차 뒷좌석에 앉아 발을 까딱였다. 앞자리의 기사가 빨리 출발해야 한다는 듯이 점점 더 곤란한 얼굴이 되어 갔지만, 그의 기준에는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나도 너무 이른 시간은 어렵고, 대신 올라오는 날 저녁 어때요?
그는 세연의 뺨을 쓸어내리듯 손끝으로 유리창을 쓸며 말했다. 주말 아침부터 짜증 나는 얼굴들을 볼 생각을 하니, 완충제 역할을 해 줄 것이 필요했다.
그게 바로 정세연이 될 터였다.
“네! 좋아요!”
아무것도 모르는 정세연의 밝은 목소리를 듣자 웃음이 터졌다. 그녀가 자신의 집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으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려오고 데려다줄 필요도 없게.
하지만, 지금은 아니니까. 고스란히 데려다 놓았다 고스란히 데려올 수밖에 없겠지.
-집에 데려다줄까?
“네? 태경 씨가요?”
화들짝 놀란 그녀의 얼굴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커다란 눈을 뜨고 그를 올려다보던, 새하얀 토끼같이 귀엽던 표정이. 태경은 낮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내가 갈 순 없지. 정세연 씨 집 멀잖아.
“아…….”
-내일 아침에 데려다주라고 할게요. 오늘 밤에, 우리 집으로 오면.
“……네. 그럴게요.”
달콤한 속삭임에 세연의 가슴이 지나치게 두근거렸다.
오늘 회식을 마치고 그를 만날 수 있다니. 게다가, 내일 아침까지 밤새 같이 있을 수 있다니.
행복감에 몸을 떨던 세연의 머릿속에 불현듯 의문이 스쳤다.
그럼 저녁 약속은 어떻게 되는 걸까. 오늘에 이어 주말에도 자신을 또 만나 줄까.
세연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럼 혹시, 저 서울 올라오면, 저녁에도 다시 볼 수 있을까요?”
-그러라고 기사 붙여서 보내는 거잖아, 세연아. 딴 길로 새지 말라고.
“아아, 네!”
뒤늦게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세연의 입가에 미처 감출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마치 그도 자신과 계속 함께 있고 싶어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제 마음과 다를 바 없이.
꿈은 아니겠지.
세연이 살짝 파인 볼우물을 손가락으로 꼬집으며 꿈인지 현실인지 확인하는 사이, 태경이 간단히 통화를 마무리했다.
-그럼 이따 봐요. 회식 때.
“…….”
세연은 끊어진 전화와 약 15분간의 통화 시간을 아쉬운 눈길로 쳐다보았다.
아무리 세게 움켜쥐어도 결국 손가락 사이로 스르륵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아무리 눈앞에 화려하게 펼쳐져도 결국 허상에 불과한,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 조금 전의 여운을 되새기면서.
* * *
오늘의 회식 자리는 지옥 주간이 무사히 끝났다는 기쁨과 축하를 빙자하여 신입이 술 마시는 걸 구경하려는 자리였다.
다들 아무리 술을 마셔도 쉽게 취하지 않는 신입이 취하는 걸 보고 싶어 했다. 언제나 반듯한 그녀가 술에 취해서 주정을 부린다면 꽤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정세연 씨, 내 술도 한잔 받아!”
“자아, 사랑하는 만큼!”
일찍이 취한 사원들이 술을 술잔 가득 따라 주었지만, 신입으로서 선배들이 주는 술을 거절하기가 어려웠던 세연은 주는 대로 전부 받아 마셨다.
술이 약하긴 하지만 어차피 얼굴에는 크게 취한 티가 안 나니까. 그것만은 다행이었다.
하지만…….
세연은 아쉬운 눈길로 태경의 빈자리를 훑었다.
회식이 끝나면 보자고 하더니, 그새 잊어버린 걸까.
그는 먼저 자리를 피해 주겠다며 카드만 내밀고 돌아간 지 오래였다. 그 바람에 팀원들은 더 비싼 걸 시키자며 신이 났고, 세연은 종류별로 시켜 대는 술을 연거푸 마셔야만 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세연은 택시를 잡아서 팀원들을 먼저 태워 보냈다. 그들이 사라지고 나자, 온몸에서 힘이 탁 풀렸다. 취하지 않은 척하려고 애쓰고 있던 마지막 힘마저도 다 써 버린 것 같았다.
“……춥다.”
세연은 비틀비틀 걸으며 어깨를 옹송그렸다. 밤이라 그런지 날씨가 꽤 쌀쌀하고 추워 택시를 잡으려니 쉽게 잡히지 않았다.
그녀가 서 있는 곳은 직장인들이 떼를 지어서 택시를 잡으려고 나와 서 있는 큰길가였다. 저마다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드는 사이, 혼자 남은 세연은 가로수 옆에 서서 몸을 기댔다. 취기가 오르는 게 느껴졌다.
“아……. 큰일 났다.”
이대로 기대어 서 있으면 잠들어 버릴 것 같았다. 술에 취한 채 몸에 긴장이 풀리면 어디서든 꾸벅꾸벅 졸다가 잠드는 게 그녀의 술버릇이었다.
“여기, 여기요!”
애써 몸을 일으킨 세연이 저 멀리서 오는 택시를 향해 손을 흔들던 찰나였다.
택시를 앞지른 검은 세단이 세연 앞에 섰다. 그 안에서 한 남자가 문을 열고 내렸다. 곧이어 번듯한 차림새에 키도, 몸집도 커다란 남자가 그녀를 집어삼키듯 머리 위로 새카만 그림자를 드리웠다.
“내가 태워 줄까?”
“팀장님!”
세연이 반쯤 풀린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꼬부라지는 혀를 애써 펴며 태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
“왜, 왜 아직 여기 계세요?”
“이럴 줄 알고 데리러 왔지.”
“근데 저는, 저, 집에 가야 되는데.”
누가 봐도 만취한 정세연을 내려다보던 태경이 웃었다. 회식이 끝난 뒤 그를 만난다고 그렇게 신나 하더니, 취해서 오늘 아침의 약속을 잊은 모양이었다.
“내일 데려다줄 테니까, 우리 집으로 가요.”
“정말요? 왜요?”
“내가 지금 정세연 씨 꼬시는 중이거든. 아까 누가 했던 것처럼.”
컵 받침을 완성하면 보여 준다던 서툰 수작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한껏 취한 세연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그렇게 안 하셔도…….”
세연은 손을 젓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아무렇게나 마구 흔들고 있었다. 바람결에 펄럭거리는 깃발처럼 새하얀 손이 휘적거렸다.
“저는 이미 넘어가 있어요.”
“조심해.”
넘어간다는 말과 함께 꼭 넘어질 것처럼 몸을 기울인 세연이 비틀거리자, 태경이 그녀를 품에 안아 넣었다. 단단한 팔에 붙잡힌 채, 세연은 태경을 꿈꾸듯이 올려다보았다.
이거, 꿈인가.
꿈이겠지. 꿈인가 보다.
정말 꿈이 맞다면 좋겠다. 그럼 꼭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말이 있었다.
“있잖아요. 혹시, 팀장님, 아니, 태경 씨, 저, 저 좋아하세요?”
“…….”
세연은 술에 취해 반쯤 감긴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헛소리를 내뱉는데도 말없이 자신을 내려다보며 웃고 있는 남자가 꿈같았다.
아, 그래. 꿈. 꿈이니까. 그러니까 이렇게 이런 말도 용기 내어 할 수 있는 거겠지.
자신의 술버릇은 기절하듯이 잠들어 버리는 거니까.
나 이미 잠들었나 봐. 그러니까 지금은 꿈인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며 세연은 한껏 용기를 내었다. 다른 이가 보기엔 술주정에 불과한 웅얼거림이었지만.
“저, 저 좀 좋아해 주세요.”
“내가, 널?”
“네! 아니, 좋아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태경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세연이 불쑥 몸을 일으켰다. 그 바람에 다시금 비틀거리자, 그가 단단한 팔로 세연을 한층 더 강하게 끌어당겨 안았다.
“조심하라니까.”
“그게, 왜냐면, 팀장님은, 아니, 태경 씨는…….”
조심하라는 말 따위는 들리지도 않는지, 한참 휘청거리던 세연은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가끔은, 막 절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한데, 좋아한다고 말은 안 해 주니까. 막 헷갈려요.”
“그게 중요해?”
“네! 네! 중요해요!”
세연이 제자리에서 콩콩 뛰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태경의 품 안에 갇혀 있으니 몸을 뒤로 물릴 수 없어 이런 식으로 움직이려는 모양이었다.
“완전히 취했네.”
술주정뱅이.
태경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세연의 뺨을 꼬집었다.
“아니에요. 저 술주정뱅이 아니에요. 저는, 그런 사람 싫어해요. 술 막 많이 마시고, 담배 피우고……. 그런 거. 진짜 싫어요.”
“알아.”
“아니, 그런 것만 알지 말고, 제가 좋은지, 말해 주세요. 저를, 저를…….”
……좋아하세요?
세연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취해서인지 아니면 꿈이라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입술을 새하얗게 변할 때까지 세게 물어도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통증이 느껴지는 곳은 도리어 가슴이었다. 가슴이 알싸하게 아팠다. 아무리 꿈이라고 해도, 몇 번이나 그렇게 묻고 있는 자신이 비참했다.
날 좋아하냐고, 우리는 대체 무슨 사이냐고.
언제나 그렇게 묻고 싶었다.
그러나, 꿈속에서조차 그녀가 바라는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세연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더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아니에요. 말하지 마세요. 어차피 절, 안 좋아하실 거잖아요. 그럼 나는…….”
……너무 슬플 것 같아요.
“세연아.”
눈가에 눈물을 글썽이는 사이, 태경이 달콤한 음성으로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좋지도 않은 여자한테 이렇게 하는 남자가 어디 있어.”
“저, 정말요?”
세연은 이제 완전히 초점이 풀린 눈으로 태경을 보았다. 이러다 꿈속에서도 길거리에서 잠들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걸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그럼, 그렇게 말해 주세요. 저는,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싶어요.”
세연은 그렇게 말하며 보챘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에 목숨 거는 철부지 어린애들처럼.
“내일이면 기억도 못 할 거면서.”
태경은 정세연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술에 취하는 패턴이 사람마다 다르긴 하지만, 정세연은 특이점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한참을 졸거나 잠들고 나서야 술에서 깨었고, 자신이 잠들었다는 걸 깨닫지 못했다.
저 멀리 가로수에 기대어서 꾸벅꾸벅 졸려는 걸 데리러 왔으니, 지금은 거의 비몽사몽 한 상태나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니 꿈처럼 여기는 건지도 몰랐다. 이런 용기를 내는 걸 보니까.
“어차피 기억 못 할 테니까, 한 번만 말해 줄게. 그러니까 잘 들어.”
태경은 세연을 끌어당겨서 이마 위에 입을 맞추며 나지막이 속삭였다.
“좋아해요, 정세연 씨.”
“아…….”
그 말을 듣고 나서야 세연은 입가에 행복한 미소를 띠며 툭 쓰러지듯 잠들었다. 무슨 마법의 단어라도 되는 것처럼. 어이가 없었다.
“너는.”
태경은 그녀의 눈가에 반짝이는 눈물을 손끝으로 닦아 주었다.
“그런 게 뭐 그렇게 중요한 건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면서.
* * *
새벽이 어슴푸레하게 밝아 오는 시각.
“먼저 나갈게.”
태경은 세연의 발그레한 뺨에 입을 맞추고 나갔다. 여전히 술이 덜 깨서 해롱거리는 모습 때문에 보기만 해도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꾹 참으면서.
“……네. 잘 다녀오세요.”
그 사실을 모르는 세연은 눈도 제대로 못 뜬 채로 인사했다. 회식 자리 후 태경과 보낸 밤의 여파로 취기에 열기까지 더해지고 나니, 도저히 몸을 일으킬 기운조차 없었다.
저 멀리 문이 닫히고 나니, 그제야 잠이 조금 깨었다.
‘나가서 배웅할걸.’
세연은 이불로 몸을 감싸며 뒤늦게 후회했다. 그러나 도저히 자리에서 일어날 상태가 아니었다. 머리는 어지럽고 눈앞이 빙빙 돌았다.
‘으, 머리 아파.’
싫다고 거절하지 못하고 주는 대로 다 받아 마신 게 문제였다. 세연은 이불을 말아 쥐며 몸을 한층 더 웅크리고 머리를 베개 위에 깊이 파묻었다.
‘그래도…….’
좋았다.
이불에서 묻어나는 태경의 체향이. 술 마신 다음 날이면 속이 울렁거려서 뭘 먹기도, 냄새를 맡는 것도 싫었지만, 그의 체향만은 이렇게 누워서 온종일 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더 있고 싶었다. 어색하고 불편한 얼굴로 쭈뼛쭈뼛 들어서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이곳을 떠나기가 서운하고 아쉬웠다.
세연은 이 집이 좋았다.
난생처음 본 멋지고 좋은 집이어서가 아니라, 태경의 흔적이 묻어나는 집이어서 좋았다. 집 구석구석에 담긴 주인의 취향과 그의 체향이 더없이 좋았다.
이 집 자체가 바로 그인 것만 같아서.
그래도.
그래도 오늘 고향에 내려갔다가 올라오면 다시 태경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어느새 만남의 장소가 되어 버린 이곳에서.
세연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조금만 더 자고 일어나서 씻어야지.’
그녀는 두 시간 뒤로 알람을 맞추어 두고 다시 눈을 감았다. 가물거리는 어젯밤의 기억을 꿈처럼 여기며 다시금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좋아해.’
내가 널.
꿈속에서는 태경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해 주었다. 그는 다정하게 세연을 껴안아 주었고, 이마 위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며 고백해 왔다.
‘좋아해요, 정세연 씨.’
비록 깨어나면 끝나 버릴 한낱 꿈에 불과하지만, 잠든 세연의 입가에는 행복한 미소가 어렸다.
* * *
태경은 본가로 들어가 곧장 식당으로 향했다.
점심 식사를 위해서였다. 누가 보아도 아침 식사에 가까운 시각이건만, 우씨 집안의 모든 이들이 이걸 점심 식사라고 칭했다.
“왔니.”
기다란 테이블의 정중앙에 앉아 있던 태경의 어머니, 주애령이 고개를 들었다. 이른 아침 겸 점심을 먹는 건 그녀의 습관이었다.
“네, 어머니.”
태경은 상사를 대하듯 깍듯하게 고개 숙인 뒤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어려서부터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은 자리였다.
태경이 앉자 다섯 남매의 자리 중 오직 두 자리만 채워졌다. 먼저 채워져 있던 건 셋째 우태준의 자리였다. 미국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그는 태경에게는 둘째 형이었다.
태경은 우태준에게 인사를 건네는 대신 오 남매 중 첫째이자 장남인 우태주의 빈자리에 눈길을 던졌다.
“…….”
지난 5년 동안 한결같이 비어 있었고,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비어 있을 자리였다.
자리의 주인이 더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의자를 치우면 그만일 텐데, 주애령은 고집스럽게 그대로 놔두었다. 정작 장례식 내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으면서, 그게 무슨 죽은 아들을 위한 대단한 추모라도 되는 것처럼.
태경은 그 옆자리로 시선을 옮겼다. 오 남매 중 둘째이자 태경에겐 큰누나인 우희주의 자리였다. 그 자리 역시 비어 있었다.
우희주는 이번에도 바쁘다는 이유로 불참했지만, 그녀가 식사 자리에 불참하기 시작한 건 꽤 오래된 일이었다. 아마도 제 배가 부르는 수고를 감수해 가며 아이를 낳은 뒤부터였을 것이다.
그 옆에 자리한 우태준이 태경의 인사를 기다리다 못해 먼저 손을 들어 인사했다.
“오랜만이다.”
태경이 먼저 아는 척하지 않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티 내지 않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언제나 지는 것을 싫어했고, 타인 때문에 화가 나거나 약이 오르는 상황을 못 견뎠다.
지금도 본인은 아량 넓은 형 노릇을 하며 꽤 멋져 보이려고 한 모양인데, 태경의 눈에는 그런 작은 행동거지 하나하나마저도 전부 덜 떨어져 보였다.
욕심에 비해 능력이 따르지 못하는 우태준은 언제나 변변치 못한 형이었다.
오죽하면 그의 뒤에 태어난 우희경의 이름을 지을 때, 태준의 이름 끝 글자를 돌려 쓰는 대신 다른 글자를 붙였겠는가.
우희경은 둘째 오빠가 모자란 덕분에 자신의 이름이 우희준이 아니게 되어 몹시 감사하다며 대놓고 비아냥거리곤 했다. 태경은 노골적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으나, 동의하는 바였다.
“그러게.”
태경이 간단하게 대답하며 고개를 돌리자, 우태준의 이마에 곧바로 핏줄이 돋았다. 이를 악무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역시 그를 화나게 만드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먹자.”
평소에는 싸움 구경을 즐기는 주애령이었지만, 오늘만은 불필요한 싸움을 보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태경과의 싸움에서 패배한 우희경이 근신 중이라 그런지도 몰랐다.
주애령이 수저를 들고 나서야, 우태준과 태경이 이어서 수저를 들었다. 그들은 말없이 식사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식사 자리이지만, 따스함만은 찾아볼 수 없었다. 고요한 식탁 위에는 오직 냉기만이 흘렀다.
그러나 태경은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우희경이 없으니 꽤 조용해서 마음에 들었다. 우 회장이 그녀에게 자택에서 근신하라는 불호령을 내렸으니 한동안은 이렇게 조용할 것이다.
우 회장은 오늘도 함께 자리하지 않았다. 그는 본래 점심 식사를 함께하는 편이 아니었다. 어머니와는 점심 식사를, 아버지와는 저녁 식사를 하는 게 그들의 불문율이었다.
아버지를 만나려면 저녁까지 있어야 할 테지만, 태경으로서 지금 그를 만나야 할 용건은 없었다. 나중에 골프를 치든 따로 식사 자리를 마련할 일이지, 결코 오늘은 아니었다.
예상했던 대로 조용하기 짝이 없는 점심 식사 자리를 대신하여, 꽤 재밌는 일을 구상해 두었으니 굳이 아버지를 만나서 힘을 뺄 필요가 없었다.
오늘의 메인 디시는 정세연이었다.
이 짜증 나는 곳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받았던 스트레스를 풀어 줄 해소제.
영문도 모르고 집으로 향한 그녀에게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태경은 이미 알고 있었다. 모든 건 그가 짜 놓은 판 위에서 진행되는 한 편의 연극과도 같을 것이다.
제가 원하는 그림을 만드는 건 태경에게 꽤 쉬운 일이었다. 오늘도 마찬가지로 그가 원하는 대로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 태경은 지금 꽤 만족스러웠다.
모든 것들이.
그는 별 의미 없이 수저를 기계적으로 움직이며, 지난번의 가족 식사 자리를 떠올렸다.
* * *
몇 주 전, 저녁 식사 자리.
글쎄. 저녁이 맞나.
기억대로라면 그때는 주애령이 아닌 우 회장이 함께 있었으니 저녁 식사 자리가 맞을 것이다. 떠올리기가 무섭게 그날의 몹시 시끄러웠던 소란이 다시 귓가에 들리는 것 같았다.
“애는 왜 데려왔어? 자리도 없는데.”
“내 마음이지. 그게 오랜만에 본 조카한테 할 소리야?”
입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둘째 형 우태준이 오랜만에 얼굴을 들이밀고는 우희경과 아웅다웅하고 있었다.
“애 밥 좀 챙겨 줘요.”
우희경은 조금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보모에게 밥을 먹여 달라며 딸을 밀어냈다.
아이들이 태어날 때마다 의자가 하나씩 늘어났지만, 우희경의 아이는 의자를 받지 못했다. 우씨가 아니니 이 집안의 아이가 아니라고 여긴 탓이었다.
오직 우씨 성을 가진 이들만 앉을 수 있는 자리라고 공언하듯 이른바 며느리와 사위로 불리는 이들은 애초에 겸상하지 못했다.
별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건만, 우희경은 기분 나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밥을 깨작거렸다. 그나마 그녀가 좋아하는 반찬들이 있어 그 몇 가지만 뒤적이고 있었다.
우희경이 얼마나 짜증 난 상태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우태준이 눈치 없이 젓가락으로 그녀를 가리키며 지적했다.
“희경아, 그 나이 먹고 편식하면 애가 뭘 보고 배우겠냐?”
“어머, 오빠. 같은 부모 입장으로 애들은 건드는 거 아니지.”
우희경이 정색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것도 잠시, 입가에는 곧 미소가 어렸다. 본격적으로 공격하기 직전에 잠시 쉬어 가듯 머금은 미소였다.
“기왕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오빠는 요즘 조기 교육하는 것 같더라?”
“조기 교육?”
우태준이 멍청하게 되묻자, 우희경이 톡 쏘아붙였다.
“스폰 말이야. 오빠 요즘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면서 개나 소나 스폰해 주는 것 같던데, 애들이 정말 좋은 거 보고 배우겠다. 혜준이는 벌써 아이돌 하나 찍어 놓지 않았어? 역시 조기 교육의 힘이 대단해.”
“아니, 그건…….”
우태준이 무어라 대꾸하기도 전에 우희경이 한 차례 더 와다닥 쏘아붙였다.
“아아, 알겠다. 그게 아니면, 머리는 좀 딸려도 남의 돈으로 해외 명문대 박사까지 할 수 있다고 자신감이라도 불어넣어 주려는 거야? 결혼한 여자랑 살림 차리는 대신 연구실 차려 주면서? 뭐, 아무래도 오빠 닮았음 머리가 딸릴 테니까 이쪽이 더 정확하겠다. 그치?”
“야, 너!”
“그게 무슨 소리냐, 태준아.”
태준이 소리를 지르려는 찰나, 가만히 듣고 있던 우 회장이 입을 열었다. 스폰이라면 별로 개의치 않을 그였지만, 일반인인 데다 유부녀를 만난다는 건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우 회장의 반응을 본 우희경이 의미심장한 눈길로 태경을 힐끗 쳐다보고 피식 웃었다.
굳이 우태준이 만나는 일반인에 유부녀인 여자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따로 있을 터였다. 우희경 입에서 태경이 만나는 일반인인 정세연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리 없었다.
이 자리에 오면서 설마 그 정도도 예상하지 못했을까.
태경은 너나 잘하라는 듯한 표정으로 그 시선을 가볍게 무시했다.
그사이, 우태준은 진땀을 뻘뻘 흘리며 우 회장에게 별 의미 없는 해명을 하고 있었다.
“아, 아버지.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저는 그 사람 유학비 지원해 주고 우성 이름으로 연구실 하나 만들어 준 것 말고는 없습니다. 거기에 다른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글쎄요. 제가 듣기론 그 여자가 오빠와 모종의 관계라던데요. 결혼해서 애도 하나 있는 유부녀라던데, 그런 소문은 저도 믿고 싶진 않았어요. 뭐, 그 여자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긴 하지만 전부 말하자니 제 입이 다 아플 것 같네요.”
우희경이 유부녀라는 말에 유독 힘주어 말하며 고개를 저었다. 열받은 우태준이 씩씩거리며 노려보았지만, 증거 자료를 아버지 앞에 내밀까 봐 두려워 입 한 번 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지는.’
태경은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우희경 자신도 애 하나 있는 유부녀이면서 배우 차주원과 스폰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 말만 해도 저렇게 밀리진 않을 텐데, 우태준에게 그런 머리가 있을 턱이 없었다. 조금만 관심을 기울이면 개나 소나 알 수 있는 정보를 모르고 있는 것도 멍청하기 짝이 없었고.
“오빠가 워낙 가리는 게 없잖아요. 주면 주는 대로 다 받아먹는 사람이니까. 편식이라는 걸 모르고.”
“야! 이 계집애가 보자 보자 하니까 너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제 앞에서 큰소리 내는 걸 싫어하는 우 회장이 미간을 찌푸렸다.
“다들 조용히 해라. 밥 좀 먹자.”
“네. 우리 그만하자, 이제. 조카가 들으면 오빠를 뭐라고 생각하겠어.”
“어휴, 저게 진짜!”
우태준이 열이 뻗친 얼굴로 씩씩거렸지만, 우희경은 싱긋 눈웃음을 보이며 어깨만 으쓱했다. 명백한 승리였다.
그 와중에 태경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우태준을 도우려면 도와줄 수도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 굳이 미리부터 떠들면서 힘을 빼거나 점수 깎을 필요가 없었다. 알아서 싸우게 내버려 두면 그만이니까.
“그러고 보니까, 아버지.”
우희경의 눈길이 이번에는 태경에게 향했다.
“태경이가 여자 하나 어머니 호텔로 데려왔잖아요. 혹시 아세요?”
태경은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들 간의 폭로전이 시작되리라는 예고이자, 총성 없는 전쟁의 시작이었다.
“태경이가?”
여자를 호텔에 데려갔다는 말에 우 회장이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뜨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자식들의 사생활과 관련하여 사무적으로 정기적인 보고를 받아 왔으나, 태경에 대해서는 그다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던 그였다. 그도 그럴 것이, 우태경은 관심을 보이는 여자조차 없는 아이였으니까.
“태경이는 언제나 정석대로지.”
우 회장의 귀에는 주애령의 호텔에 데려왔다는 말만이 제대로 들어간 것 같았다. 그건 부모에게 감출 이유도, 그 정도의 의미도 없다는, 명백하게 가지고 놀다 버릴 여자란 뜻이었다.
그런 여자야 신경 쓸 필요도 없었다. 우 회장 역시 여자를 그저 데리고 놀다 내던지는 예쁜 소모품처럼 여기는 사람이었다.
모든 면에서 자신을 빼닮았지만 여자에 대한 흥미만은 보이지 않던 막내아들이 드디어 여자에 관심이라는 걸 갖게 되었구나 하는 감상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별 대수롭지 않은 반응에 우희경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짜증스럽게 이맛살을 찌푸렸다. 언제나 태경을 편애하는 그였으니까. 그러나, 진정한 공격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그런데 그 여자, 일반인이에요. 사내에서 만났으니 무려 사내 연애인 셈이죠.”
우희경이 사내 연애, 라는 말을 유독 강조하며 말했다.
“근데 팀장님이 신입한테 그러시면 안 되죠. 안 그래요, 우 팀장님? 아니다. 회식 끝나고 취해서 걷지도 못하는 여자를 업어 간 거니까, 이건 연애가 아니라 범죄인가?”
우희경이 비아냥거렸다.
상대방을 한껏 열받게 해서 이내 자신의 페이스에 휘말리게 만드는 것이 그녀의 방식이었다.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태경은 여유 있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우희경이 말하는 그날.
회식을 마친 후 호텔에 간 건, 정세연이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었다. 커다란 의미도 없었고 정세연도 알 필요가 없을 정도의 일이었는데, 굳이 그 의미도 없는 날을 들쑤시는 게 우스웠다.
워낙 여자라곤 만나지 않던 자신이었으니 뭐 하나라도 걸려들었다 이거겠지. 그러니 별 의미 없는 패를 이런 식으로 성급하기 짝이 없게 내미는 것일 테고.
“누굴 시켜서 알아봤는진 모르겠지만, 제대로 파악하는 게 좋겠는데.”
태경은 고개를 저으며 여유 있게 대답했다.
“그 여자만 데려간 것도 아니고, 난 데려다만 주고 바로 나왔거든. 술에 취한 사원들한테 숙소 잡아 주는 게 팀장으로서 못 할 일은 아니지 않나?”
“야, 웃긴다, 너. 그게 다는 아니잖아? 다른 사람들이야 눈에 훤히 보이는 가림막 같은 거였겠지. 그리고 그날 분명히 네가…….”
“글쎄.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한 건 상사로서의 배려고, 연애는 누나가 하는 게 연애겠지. 요즘 라이징 스타 차주원 씨랑 즐거운 시간 보내고 계시잖아?”
태경이 차주원이 광고 중인 신제품 티브이를 턱 끝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
우희경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연예인 만나는 게 대수도 아니니 평소라면 개의치 않았을 테지만, 오늘따라 아이를 데려온 탓이었다.
그녀는 혹시라도 들은 건 아닌지 확인하려는 심산으로 저 멀리서 식사 중인 아이를 흘낏 바라보았다. 그 사이 기회를 노리고 있던 우태준이 끼어들었다.
“야, 뭐야! 그렇게 따지면 너도……!”
“연애하는 건 좋은데, 조심 좀 해.”
우태준이 그 둘의 관계를 스폰에 불륜이라고 말하며 한층 더 타격을 주려는 찰나, 태경이 그쯤에서 끼어들어 가로막았다.
우 회장 앞에서 그런 말을 하는 건 아버지 얼굴에 먹칠하는 격이었다. 그야말로 끊임없이 연예계의 내로라하는 스타들과 스폰에 불륜 관계를 맺어 왔으니까.
따라서 태경은 연애라는 말에 방점을 찍으며 비아냥거렸다.
“굳이 떠들썩하게 연애하느라 신문 1면에 날 필요는 없지 않나? 아무리 애정과 관심이 필요하다고 해도 말이야. 대중의 인기, 뭐 이런 걸 원하는 거면 차라리 누나가 연예계 데뷔를 해. 돈이라면 대 줄 테니까. 아, 그러기엔 이게 좀 모자란가?”
태경이 비열하게 웃었다.
그는 우희경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 하며 되갚아 주고 있었다. 액면가가 안 되지 않느냐는 듯이 손으로 얼굴을 가리키자, 외모 콤플렉스를 가진 우희경이 곧바로 소리를 질렀다.
“야! 이 미친 새끼가 말을 그따위로 해?”
충분히 예쁜 외모를 가진 그녀였지만,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언제나 자식들을 서로 비교하고, 외적인 가치를 저울질하는 집안에서 자란 데다 빼어난 외모를 가진 연예인들과 자주 어울리다 보니 자격지심을 갖게 된 모양이었다.
모순적이게도 우희경이 주로 연예인을 데리고 노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인지도 몰랐다. 모든 걸 가진 자신에게 없는 걸 채우기 위해서.
“이게 다 걱정해서 하는 말 아니겠어? 매형이 애 아빠라고 해도 유책 배우자로 불필요하게 재산 더 떼어 줄 필요는 없잖아. 자산이 조금 부족할 뿐이지 돈이 아쉬운 사람도 아닌데. 뭐, 그게 누나가 해주건설에 투자하는 방법이라면 인정할게.”
나 같으면 안 그러겠지만.
태경이 그렇게 덧붙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약점만 골라서 콕콕 찌르는 모습이 가히 미친놈답다고, 우태준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바들거리는 여동생을 보니 고소한 생각이 드는 한편, 저 미친놈과 싸우는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는 점에 위안마저 얻고 있었다.
한편, 태경의 도발에 거의 넘어갈 지경이었던 우희경이 간신히 미소를 되찾았다. 아직 제대로 된 증거는 없었지만, 그녀는 우태경이 여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있었다.
남들은 그가 여자에 관심이 없다고 했지만, 우희경의 눈에 그건 무관심이 아니라 증오에 가까웠다. 어쩌면 공포심 같기도 했다.
그랬던 우태경이 조금이라도 관심을 보인 여자가 생겼다는 건, 우희경의 눈에는 드디어 약점이 생긴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 온 그 잘난 동생의 약점이었다.
“그럼, 그 여자는 너한테 예전에 기르던 개나 다름없다 이거지?”
그 말을 듣자, 순식간에 태경의 눈빛이 돌변했다.
우희경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 개는 한때 우태경의 인생에 유일한 결점이었다. 우희경과 그의 사이가 틀어지게 된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존재이기도 했다.
그녀가 우태경이 저대로 무너지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순간, 어느새 태경의 입가에는 다시 여유로운 미소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래. 그 여자는 내가 기르던 개새끼나 다름없어.”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순순히 인정한 후, 태경은 고개를 돌려 사용인을 손짓해서 불렀다. 그러고는 사용인이 조심스럽게 꺼내어 건넨 무언가를 식탁 위로 내던졌다.
“대신, 개새끼라 해도 제 건 제 거니까 건드리지 않는 편이 서로 간에 좋겠죠, 우희경 씨?”
“너, 이, 이런…….”
사진을 집어 들기가 무섭게 낯이 뜨거워진 희경이 말을 잇지 못하고 손을 부들거렸다. 그건 차주원과 우희경의 관계에 대해 모아 둔 자료와 수위 높은 사진들이었다.
이건 경고였다.
제 것을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명백한 경고.
반대로 뒤집어 보자면, 그 여자가 우태경에게 꽤 커다란 의미라는 암시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희경에겐 그렇게 말하며 태경을 한 차례 더 몰아붙일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아무리 연예인과 스폰 관계를 맺는 게 만연한 재벌가라 하더라도 아버지 앞에서 반나체로 남편 외의 남자를 껴안고 있는 사진을 보이고 싶진 않은 법이었다.
“흐음.”
게다가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듯, 우 회장이 거북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꼭 그녀에게만 하는 반응이었다. 그걸 본 우희경은 한층 더 열이 올라 소리를 질렀다.
“야! 너 이런 거 다 불법이야! 알아?”
“웃기네. 너도 아영 씨 집에 도청 장치 설치해 놓고 사람 붙여서 미행했잖아.”
우희경이 불리해지는 꼴을 재미나게 구경하고 있던 우태준이 불쑥 나서서 태경의 역성을 들었다. 제가 한 짓은 생각 안 하고 불법을 운운하는 꼴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내가 언제? 증거 있어? 증거 있냐고!”
“증거 있지! 왜 없어?”
“그럼 내놔 봐! 지금 꺼내 보라고, 어디! 그리고 오빠도 저번에 나한테 그랬잖아. 내가 지금 보여 줘?”
당연히 증거를 모아 두긴 했지만, 굳이 누굴 시켜 식사 자리까지 가져올 생각은 못 했던 우태준이 허둥거렸다. 게다가 그 역시 우희경에게 불법적인 일을 자행한 건 마찬가지라 그리 떳떳한 입장은 못 되었다.
태경이 발을 뒤로 빼고 나니 두 사람이 다시 끝이 보이지 않는 치졸한 싸움을 시작했다.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었다.
그는 도움을 바라는 눈길로 몇 번이나 이쪽을 쳐다보았지만, 태경은 그저 팔짱을 끼고 앉아서 어느새 다시 불똥이 우태준에게 튀는 것을 지켜보았다.
입가에는 미소마저 어려 있었다. 구경꾼의 자리는 언제나 재미있는 법이었다.
그사이, 몹시 재밌는 구경을 한다는 듯이 이 모든 상황을 관망하던 우 회장이 입을 열었다.
“태경아.”
그의 음성에 일순간 모두가 입을 닫고 우 회장의 입에서 나올 말만을 기다렸다.
“나는 네가 선을 지킬 거라고 믿는다.”
그렇게 말하는 우 회장의 얼굴에는 애정이 듬뿍 묻어났다.
그 애정이라는 게 그리 대단하지 않으며, 막내로 태어나 형들을 모조리 짓밟고 올라선 본인과 동일시하는 것에 불과하다는 걸 태경은 알고 있었다. 그리하여 별로 기쁘지도, 감격스럽지도 않은 애정이었다.
중요한 건 정세연을 만나도 상관없다는 말이었다. 그 선이라는 것만 지킨다면 관여하지 않겠다는 말은 허락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건 태경에게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다른 이도 아닌 그가 고작 감정 하나로 선을 지키지 못할 리 있나. 그런 건 성정이 너무 물러서 등신 같았던 큰형이나 저지른 실수였지, 태경이 할 법한 일은 아니었다.
“…….”
한편, 우희경은 아직도 분을 삭이지 못한 채 씩씩대며 입술을 깨물었다. 우태경에게 타격을 입히긴커녕, 저 미친놈이 해결해야 할 일을 굳이 나서서 대신 해 준 셈이었다.
‘고마워.’
태경은 우 회장에게 대답하기 전에, 우희경을 향해 입 모양을 벙긋거렸다.
“저게……!”
“네, 아버지.”
그러고는 그녀가 뭐라 말하지 못하게 입을 막아 버리듯 우 회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약이 바짝 오른 얼굴로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시선을 무시하며, 태경은 환하게 웃었다.
모든 걸 가진 진정한 승리자의 얼굴이었다.
“물론입니다.”
* * *
태경이 지난번의 승리를 되새기며 묵묵히 점심 식사를 이어 가던 시각.
세연은 찌뿌둥한 몸을 일으켰다.
쏴아아-.
물줄기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새하얀 몸 위로 부서졌다. 아직은 술이며 잠이 덜 깬 것 같았지만, 샤워를 하니 조금 눈이 뜨이는 기분이었다.
세연은 몸을 씻고 나와서 간단하게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아, 여기 있다.’
어제 세연이 입었던 옷은 드레스 룸 중앙에 각이 잡힌 채 걸려 있었고, 그 옆에는 그녀가 입을 만한 것으로 보이는 옷 몇 벌이 함께 걸려 있었다. 본래 입었던 옷보다 훨씬 예쁘고 좋아 보였다.
아마 미리 정리해 둘 테니 편한 대로 고르시라고 일러 주고 사라진 아주머니의 말이 이런 의미인 것 같았다. 어제 입은 옷을 또 입기는 그래서 준비해 준 걸까.
여자 옷이라곤 없는 드레스 룸에 제가 입을 옷이 걸려 있으니, 어쩐지 조금 쑥스러우면서도 좋았다. 이건 마치…… 태경과 동거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동거라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연애 한 번 못 해 본 주제에 동거를 생각하다니.
스스로를 자책하던 세연은 발그레한 볼을 붉히며 입술을 깨물었지만,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감출 길이 없었다. 그녀는 곧 고개를 세차게 젓고서 옷을 골랐다.
‘뭘 입지.’
저도 모르게 새 옷을 향해 내밀려던 손이 잠시 멈칫했다.
“…….”
새 옷들은 예쁘긴 했지만, 멋대로 입기는 조금 꺼려졌다. 세연의 평소 스타일을 고려한 건지 단정해 보이긴 하나 약간 값비싼 느낌이 드는 게 자신에게 잘 안 어울릴 것 같기도 하고.
세연이 망설이는 사이, 안쪽에 걸려 있던 검은색 레이스 속옷이 보였다. 옷은 여러 벌을 놓아둔 대신, 속옷은 오직 한 벌만이 걸려 있었다. 아마 선택권이 없는 듯했다.
“아…….”
세연은 입술을 깨물며 얼굴을 붉혔다.
이런 게 태경의 취향일까.
자신이 입어 온 조금 무난하고 더러는 유치했던 속옷들을 떠올리자,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게다가 그녀가 입을 속옷을 태경이 알고 있다는 것도 조금 부끄러웠다.
‘어차피 다 볼 텐데.’
그렇게 생각하니까 또 한 번 얼굴이 달아올랐다.
세연은 순진한 얼굴을 붉히며 걸려 있는 속옷과 어제 입고 온 옷을 다시 입었다. 회식 이후에 날 법한 고기나 술 냄새 같은 게 싹 가신 옷에서는 상쾌한 향이 느껴졌다.
공연히 소맷자락을 끌어당겨 냄새를 킁킁 맡아 보았다. 태경의 냄새와 조금 비슷한 것 같았다. 그의 냄새가 자신에게도 온종일 머물러 있으리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그녀는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정돈하고는 가방을 손에 들었다. 입사 후에 출근용으로 샀지만, 무척 저렴한 축에 속하는 가방에서는 사용감이 느껴졌다.
이 가방을 든 채로 새 옷을 입었으면 하나도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세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저도 모르게 새 옷으로 향하려는 아쉬운 눈길을 떼어 내었다.
어차피 어울리지 않으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비단 새 옷뿐만은 아니었다. 이곳의 많은 것들은 세연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나, 어울리진 않아도 익숙해질 수는 있을 것이다. 이 집에 머무는 것도 며칠 전보다는 조금 더 어색함이 가신 느낌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리하여 아주 조금이라도 더 태경에게 다가갈 수 있다면.
그녀는 기분 좋게 미소 지으며 사용인의 안내에 따라 밖으로 나갔다.
세연을 기다리고 있던 기사가 깍듯이 인사를 건넨 뒤 차 문을 열어 주었다.
“감사합니다.”
세연은 방긋 웃으며 차에 올라탔다. 누군가 차 문을 열어 주는 것도, 정중하게 인사해 주는 것도 이제는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어쩌면 익숙해진 것보다는 가슴속에 설렘이 가득하니 뭐든 개의치 않게 된 것인지도 몰랐다. 오늘 또다시 태경을 만날 것이다. 바로 이곳에서.
세연은 조금씩 멀어지는 태경의 집을 뒤돌아보았다.
“…….”
곧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리란 생각을 하니, 얼굴에는 기분 좋은 기대감이 어렸다.
* * *
태경의 집에서 세연의 고향까지는 꽤 먼 거리였다.
편안한 뒷좌석에 몸을 기대고 있던 세연은 점차 노곤해져, 졸다가 깨기를 반복했다. 몇 번이나 그러고 나니 취기는 물론이고 졸음도 가셨다.
“…….”
세연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풍경을 바라보았다. 점점 높다란 건물들이 사라지고, 키가 낮고 낡은 건물들이 듬성듬성 보였다.
국도를 빠져나와 좁다란 길로 들어선 뒤로는 전형적인 시골의 모습이었다. 오래되고 낡은 것들. 그건 누군가에겐 한없는 정겨움을, 누군가에겐 부끄러움과 열등감을 안겨 주었다.
안타깝게도 세연은 후자였다. 태경과 함께 있던 지난밤을 떠올리던 그녀는, 문득 그의 기사에게조차 자신의 집을 보여 주기 창피하단 생각이 들었다.
파란 슬레이트 지붕을 가진 오래되고 낡은 집. 집 앞에 있는 페인트 가게는 거의 폐업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어쩌면 동네 아저씨들을 불러 모은 술 취한 아버지가 그곳에 있을 터였다.
세연은 다급히 손을 들었다.
“기사님, 저 여기서 세워 주세요.”
공교롭게도 그녀가 말을 꺼낸 곳은 길 한복판이었다. 하루에 버스가 몇 대 지나다니지 않아, 여기서 내리면 집까지 걸어가야 했지만 상관없었다. 그런 건 익숙했으니까.
다만 집 주소를 미리 알려 주었으니 굳이 여기서 세워 달란 이유를 물어 오지 않을까 긴장이 되었다. 하나 다행히 기사는 군말 없이 길가에 세워 주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까지 오는 내내 말 한마디 걸지 않으며 세연을 편히 쉬도록 해 주던 그였다. 아마 태경의 지시이자 배려인 것 같았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기사는 차를 멈춘 뒤, 오토바이 한 대가 지나가고 나서야 다른 차가 더 오지 않는지 주변을 살피고는 세연의 문을 열어 주었다. 세심한 배려였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모시러 오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세연은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고는 주변을 살폈다. 혹시라도 기사 딸린 좋은 차에서 내리는 모습을 누가 보는 건 아닌지 이제 와 새삼 의식이 되었다. 다행히도 인적이라곤 없었다.
세연은 가방을 손에 들고 씩씩하게 길을 걸었다. 가로등도 몇 개 없어서 저녁에는 정말 깜깜하지만 지금은 낮이니 괜찮았다.
다만 자갈이 고스란히 드러난 울퉁불퉁한 길 때문에 낮은 구두 굽에서 딱딱한 소리가 났다. 서울에서는 상상조차 못 할 일이었지만, 여기선 흔한 일이었다.
온통 흙길에 가로등도 없고 버스도 몇 대 다니지 않는 곳. 80년대 영화에나 나올 법한 오래되고 낡은 간판들이 즐비하고 낙후된 곳.
사는 사람들조차 깡촌이라고 부르는, 이곳이 바로 세연의 고향이었다.
아마도 한때는 새마을 운동의 여파였으리라 짐작되는 파란 슬레이트 지붕들은 그때 그 시절 이후로 단 한 번도 변화의 바람을 겪어 보지 못했다.
세연의 집도 마찬가지였다.
어느덧 집 앞에 도착한 그녀는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페인트 가게 뒤편에 딸린, 낡디낡은 파란 슬레이트 지붕 집. 그나마도 아버지가 다시 사업을 한답시고 일을 벌였다가 돈을 몽땅 날린 바람에 몇 번이나 이사해 겨우 정착한 집이었다.
몇 번의 실패 이후, 세연의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제 손으로 돈을 벌어 온 일이 없었다. 세연에게 등록금은 물론이고, 용돈 한 번 준 적이 없었다.
페인트 가게는 차려만 놓았지 실상 백수나 다를 바 없었다. 하는 일이라곤 하루 종일 동네 아저씨들과 술을 마시고 침을 튀겨 가며 자신이 왕년에 얼마나 대단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다시 재기할 것인지에 대해 떠들어 대는 것뿐이었다.
그런 주제에 그는 가족들에게 쉽게 큰소리를 쳤다. 하루 종일 식당에서 뼈 빠지게 일하고 돌아온 엄마가 밥상을 차리고 집안일을 하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했다.
혹시 오늘도 아빠가 집에 있는 건 아닌지.
대낮부터 담배와 술 냄새에 절어서 취해 있을 아버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서리치게 싫었다. 마주치기는커녕 자신이 집에 왔다는 걸 알리고 싶지도 않았다.
세연은 문 앞에 서서 잠시 망설이며 인기척을 살폈다. 다행히도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어쩌면 또 동네 아저씨들과 술 마시러 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래, 주말이니까.
드르륵.
세연은 그렇게 생각하며, 끼익 소리를 내는 낡은 미닫이문을 천천히 열어젖혔다.
* * *
“하아…….”
집 안으로 들어서기가 무섭게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몇 년째 팔리지 않는, 아니, 팔 생각조차 없이 쌓아 둔 페인트 통 위에는 켜켜이 먼지가 쌓여 있었고, 술 냄새와 담배 냄새가 뒤엉킨 탓에 악취가 사방에서 진동을 했다.
“냄새.”
세연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리며 코를 잡았다. 이 냄새 때문에 학창 시절에는 아침과 저녁으로 몸을 씻었다. 담배 냄새가 제 몸에 배는 게 죽기보다 싫어서.
담배 냄새가 세상에서 제일 싫은 세연이었다. 술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대낮부터 술 마시고 담배를 뻑뻑 피워 대는 아버지를 보며 자란 탓에, 그녀는 술과 담배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뿐이었다.
술이야 사회생활을 하느라 어쩔 수 없이 마신다지만, 담배는 정말 아니었다. 끔찍하게도 싫었다. 동네에서 유명한 양아치였던 오빠가 일찍부터 담배를 배운 것도 한몫했을 터였다.
오빠를 떠올리자 세연의 얼굴이 곧바로 구겨졌다.
그녀는 오빠와는 애초에 담쌓은 관계였다. 어려서부터 그랬다. 세연이 유명한 모범생이자 전교 1등이었다면, 오빠는 유명한 양아치였다.
어릴 때는 뒷골목에서, 나이 들어서는 잘생기고 반반한 얼굴로 만나는 여자들에게 돈이나 뜯어내는 양아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온몸이 술과 담배 냄새로 찌든 그런 날건달에 백수.
어려서부터 가난한 집안 환경을 탓하며 나쁜 길로 빠져든 그는 이제 불법 도박으로 인생 역전을 노리고 있었다. 한때는 세연에게 주기적으로 돈 좀 빌려 달라는 연락을 해 오기도 했다.
숱한 경험 끝에 거절하는 법을 깨달은 세연은 칼같이 오빠의 연락을 끊어 내었다. 싸가지 없는 년이라는 욕을 먹어도 개의치 않았다. 그런 사람이 제 오빠라는 사실이 언제나 창피하고 싫었다.
고향을 자주 찾지 않는 편인 세연이 집에 오기 싫은 이유는 아버지와 오빠, 똑 닮은 주제에 서로를 경멸하고 한심하게 여기는 두 사람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둘 다 집에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텅 비어 있다니.
‘왜 아무도 없지.’
누가 있었다고 해도 오랜만에 서울에서 딸이 왔다고 반기러 나오지는 않았지만, 이처럼 텅텅 비어 있는 걸 본 적이 없었다.
세연은 아버지나 오빠가 지긋지긋한 집구석이라고 부르는 허름한 집 안을 둘러보았다. 그나마 그녀가 입사 후에 우성 전자 사원들이 쓸 수 있는 복지 포인트 같은 걸 이용해서 바꿔 준 새 가전제품만이 어울리지 않게 빛을 내었다.
‘식기세척기는 또 어디 갔지.’
엄마는 세연이 사다 준 식기세척기를 잘 쓰지 않았다. 거친 손으로 고무장갑도 끼지 않은 채 찬물에 설거지를 하는 것보단 백번 나을 텐데도 전기세가 많이 나온다는 이유로 미련하고 고집스러울 정도로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이 이유는 아닌 듯했다. 아예 자취를 감춘 걸 보니 어디다 갖다 주었거나, 아니면 팔아 버린 건지도 몰랐다.
“아, 진짜…….”
집에 오기가 무섭게 세연의 가슴이 꽉 막힌 듯이 답답해졌다. 낙후된 깡촌도, 허름한 집도, 별로인 가족도 전부 다 그랬다.
시골에 산다는 건 누군가에겐 여유로운 삶을 위한 선택일 것이다. 세연의 마을에도 더러 조용한 시골 마을에 귀농하겠다며 내려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단지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열등감에 찌들어 사는 게 얼마나 우스운 일인지 세연은 알고 있었다. 그런 마음이라면 어디에 살아도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
진짜 문제는 이곳이 얼마나 낙후되었는지가 아닌, 제 고향을 창피하고 부끄럽게 여기고 이곳에서의 삶이 실패한 인생의 반증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아버지나 오빠처럼.
하지만, 머리로는 알면서도 사람 마음이라는 게 다스리기 쉽지 않은 법이다. 자기 자신에게도 그런 부정적인 여파가 있음을 새삼 느끼며, 세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게다가, 태경을 떠올리면…….
아, 아니야. 그만 생각하자.
세연은 애써 그를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이곳에서 그를 떠올리고 있으면, 너무나 비참해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재빠르게 다시 문간으로 향했다.
‘엄마 식당으로 가야겠다.’
말 그대로 지긋지긋한 집구석에서 탈출하듯 빠져나오려던 찰나였다.
“어, 세연아?”
대낮부터 진탕 술을 퍼마신 동네 아저씨들, 그리고 그들과 어깨동무를 한 채 한없이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걸어오던 아버지와 마주친 건.
“이야, 맞네, 맞어! 정 사장네 딸, 세연이!”
얼큰하게 취해서 새빨개진 얼굴로 술 냄새를 풍기는 아저씨들이 세연을 향해 반가운 미소를 짓고 하나둘씩 아는 척을 해 왔다.
“아니, 이게 누구여? 큰 회사 다니는 잘난 딸내미 세연이 아니냐!”
“우성전자 들어간 세연이? 아이구, 얼굴 좀 보자. 정 사장 닮아서 딸이 아주 미인이네. 부잣집에 시집가서 팔자 펴겠어.”
“그럼. 세연이는 완전히 일등 신붓감이지.”
세연이 가장 싫어하는 말들이었다.
보수적인 동네 분위기 탓에 여자애는 공부시켜 봐야 나중에 시집 잘 가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는 어른들이 아직도 있었다.
그래도 세연은 공부만 잘하는 게 아니라 얼굴도 예뻐서 다 갖췄다며 그걸 칭찬이랍시고 떠들었지만, 전혀 달갑지 않은 말인지라 칭찬으로 들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게다가 젊어서부터 반반했던 얼굴을 가진 아버지를 닮았다는 말을 듣는 것도, 세연이 이룬 성과들을 마치 자신의 것처럼 뿌듯해하는 아버지의 표정을 보는 것도 다 고역이었다.
“안녕하세요.”
세연이 싫은 표정을 애써 감추며 고개만 꾸벅 숙이고 나가려던 순간. 아버지가 페인트 가게 입구에 놓인 낡은 테이블 앞에 앉으며 세연에게 손짓했다.
“그, 너 여기 좀 앉아 봐라.”
“네? 왜요?”
세연은 의아하다는 듯이 아버지를 돌아보았다. 아저씨들이 먹다 남은 소주를 꺼내 들었으니, 술상이나 다름없었다. 아무리 개차반이어도 세연을 술상에 앉힌 적은 없는 아버지였다.
“그려. 여기 좀 앉어 봐.”
머리가 듬성듬성 빠진 뒷집 아저씨가 좋은 얘기가 있다며 세연을 불렀다. 바람이라도 넣으려는 듯이 대기업 다니는 잘난 딸이라며 추켜세웠지만, 결국 그 끝은 돈이 좀 있냐는 말이었다.
소주 한 병을 새로 꺼내며 아버지가 세연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미 눈은 완전히 풀려 있어, 거의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너, 지금 집 보증금 얼마나 된댔지?”
“그건 왜요?”
세연이 미간을 좁히며 까칠하게 되묻자, 아버지가 곧바로 소리를 지르며 욕을 했다.
“애비가 묻는데 대답이 왜 그따위야, 이 싸가지 없는 년이!”
“하…….”
세연이 미간을 구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진 것 없는 남자의 열등감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표출되었다.
그는 평소엔 세연이 이룬 것들을 제 것처럼 자랑하고 뻐기다가, 조금만 마음에 안 들게 행동하면 싸가지가 없다느니 재수가 없다느니 하며 욕을 해 댔다.
“아이, 정 사장. 왜 그려. 오랜만에 온 딸내미한테.”
이 집에서 세연이 유일한 돈줄이라는 사실을 아는 아저씨들이 일부러 그녀의 역성을 들며 아버지를 타일렀다.
“너 아버지가 오늘 좋은 소식 듣고 기분이 들떠서 간만에 좀 취해서 그래. 네가 이해해.”
간만은 무슨.
저들끼리 위해 주려는 듯 꼬박꼬박 사장이라고 부르며 아버지 편을 들어 주는 꼴을 보고 있으려니 코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분명 익숙한 일이건만, 분노로 온몸이 떨렸다.
“아저씨, 저 잠깐 얘기 나누게 자리 좀 비켜 주시겠어요?”
“아, 그려. 돈 얘기 오가는 자리에 남이 있으면 쓰나. 우리가 나갈게.”
동네 아저씨들은 세연의 살벌한 기세에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나갔다.
그사이, 낡은 테이블에 몸을 기댄 아버지가 술주정을 하듯이 입을 웅얼거렸다. 한 번 큰소리를 치고 나면 취기가 더욱 오르는 모양이었다.
“야, 넌 꼭 그래야 하냐. 넌 니 애비가 여기 촌구석에 처박혀서 이렇게 살면 좋겠냐고.”
“그만하세요.”
“아니, 내가 여기서 이런 거나 하고 살 인간이 아니다, 이 말이야. 그걸 몰라? 모르냐고!”
“그 말 지금 몇 년째 하는지, 알고는 계세요?”
“이번엔 진짜 모처럼 만에 엄청나게 큰 인생 역전의 기회가 왔는데, 이게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주둥이 놀리기는…….”
만취한 세연의 아버지가 무언가를 꺼내어 내밀었다. 거의 빼앗듯이 손에 든 세연은 금세 경악한 얼굴이 되었다. 거액의 돈을 빌렸다는 차용 증서였다.
“지금, 이게 대체 뭐예요? 또 무슨 일을 벌이신 거예요!”
“야, 세연아, 정세연.”
만취한 아버지의 얼굴에 갑작스레 담긴 웃음이 비굴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엔 어떻게든 딸을 구슬려서 한 푼이라도 받아야 한다는 생각뿐인 것 같았다.
“아니, 이번엔 진짜 좋은 정보가 하나 있다니까? 그게 복덕방 김 씨가 물어 왔는데. 출처가 아주…….”
“전 돈 못 드려요.”
세연이 칼같이 아버지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더 이상 일 벌리지 않으시기로 약속하셨잖아요.”
“아이씨, 그게, 저당을 잡아 놔서 무를 수도 없는데…….”
“저당이요? 대체 뭘요?”
가진 게 없으니 저당 잡을 것도 없는데 대체 무슨 소리인가.
아버지의 손끝에서 팔랑거리던 종이 뭉치를 뒤지던 세연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엄마 식당을 담보로 잡아서 돈을 빌리다니. 온몸이 분노로 활활 타오르다 못해 거의 쓰러질 지경이 되었다. 그마저도 모자라서 세연에게 손을 벌리려는 거였다.
“돈이 없으면 하질 말아야죠. 제가 지금 그런 돈이 어디 있어요!”
세연의 월급에서 몇 푼이라도 보내 달라는 둥 지금 살고 있는 집 보증금이라도 빼 달라는 둥 생떼를 부리던 아버지가 결국 또다시 소리를 질렀다.
“이게 아주 보자 보자 하니까, 너 먹이고 키운 게 얼만데 돈 좀 번다고 애비한테 유세야, 유세는! 지금까지 키웠는데 돈 좀 달란 소리도 못 하냐?”
“언제 절 먹이고 키우셨어요. 집에다 돈 한 푼 갖다 준 적 없으시면서. 저 대학 다니는 내내 모은 돈도 이런 식으로 날리셨잖아요.”
대체 어디까지 해야 하는 걸까.
대체 내가 어디까지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한때는 달라면 줬다. 도움이 되어야만 이 집에서 의미가 있는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매번 퍼다 주고도 되돌아오는 건 언제나 원성뿐이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다고 해도 이처럼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아무것도 받지 못한 채 매번 주었지만, 그 사실을 기억하는 건 오직 자신뿐이다.
보답받지 못할, 되돌아오지 못할 시간과 마음이 한낱 부스러기가 되어 눈앞에서 흩어져 내렸다. 처음부터 아무런 의미도 없었으니, 지금도 그러했다.
“대체 뭘 해 주셨는데요, 저한테!”
결국 머리끝까지 분노가 차오른 세연이 소리를 질렀다. 이 집에 살면서 난생처음으로 내 본 큰소리였다. 분에 못 이겨 씩씩대자 눈가에는 눈물만이 그렁그렁하게 맺혔다.
“저한테 부모 노릇해 준 거 하나 없이, 지금 이렇게 구는 거. 미안한 줄 아셨으면 좋겠어요. 부모가 되어선 자식 생일날에 하는 말이 이런…….”
기가 차서 더 이상 말도 나오지 않았다.
세연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말해 봐야 입만 아픈 얘기, 떠들 필요도 없다 싶었다. 그러자, 도리어 자신을 무시한다고 느꼈는지 비틀거리며 일어선 아버지가 세연의 뺨이라도 치려는 듯이 손을 높이 쳐들었다.
“이게 어디 시건방지게 애비를 똑바로 쳐다보고 또박또박 말대꾸야!”
어린 시절에는 이런 위협이 두려웠다. 그러나 이제는 눈물도 나지 않았다.
젊은 사람에게 버릇없다고 말하는 건 나이 든 사람들이 논리적으로 밀리거나 할 말이 없을 때 꼬투리 잡는 것에 불과하다는 걸 깨우친 탓이었다.
“저 갈게요. 앞으로 볼 일 없을 거예요.”
세연은 경멸 어린 시선으로 아버지를 노려보다 신발을 신고 밖으로 휙 나갔다.
“야! 정세연! 너 이리 들어와서 앉아! 이리 안 와?”
일평생 열등감에 찌들어 말 그대로 실패한 인생을 살았던 남자가 악을 썼다. 곧이어 쌍욕이 뒤섞인 고성과 술잔이며 술병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때는 저 남자의 애정을 바라기도, 자신의 희생으로 저 남자의 생이 조금 더 나아지기를 바라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 더는 아니었다.
세연은 일말의 미련 하나 남기지 않고 산뜻하게 뒤돌아섰다.
등 뒤의 남자를 제 마음에서 영원히 잘라 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