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 차 |
프롤로그
01 잘못된 고백
02 균열의 시작
03 유일한 사람
프롤로그
“전무님, 저 결혼합니다.”
세연은 떨리는 손으로 청첩장을 내밀었다.
정확히 한 달 뒤의 날짜가 찍혀 있는 청첩장이었다.
“…….”
눈앞의 남자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곤란한데.”
잠시 후, 남자가 픽 웃으며 청첩장을 받아 들었다.
기다란 손가락 사이에 간당간당하게 매달린 종잇장이 위태로워 보였다.
톡, 톡.
남자의 손끝이 느릿하게 테이블을 두드리는 걸 지켜보다 못해, 세연은 그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정세연 씨.”
남자가 건조한 목소리로 세연을 불렀다.
“우리가 언제 날짜 잡자는 얘길 했었나?”
“……네?”
“아마 안 했던 것 같은데.”
“…….”
세연이 눈만 깜빡이는 사이, 남자가 입꼬리를 지그시 끌어 올렸다.
“난 여름은 별로예요. 너무 덥거든.”
테이블 아래, 치마 끝자락을 꼭 움켜쥔 세연의 손이 덜덜 떨렸다. 순식간에 손바닥에 땀이 배어들었다.
어쩌면 예상한 반응이었다.
아니, 이런 비상식적인 반응을 정말 예상할 수 있었던가?
“신부가 더 그렇지 않나? 드레스 입는 거 힘들 텐데.”
얼핏 들으면 세연을 생각해 주는 말처럼 들리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으니까.
“나야 두 번째 결혼식이라 별 상관없겠지만, 정세연 씨는 괜찮겠어요?”
“전무님, 그런 말 아닌 거 아시잖아요.”
“그럼 어떤 말인데?”
남자가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리며 물었다.
“뭐, 헤어지기라도 하자고?”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남자의 손에서 청첩장이 깔끔하게 반으로 갈라졌다.
이럴 줄 알았어.
세연은 파르르 떨리는 손을 들어 관자놀이 부근을 짚었다.
갈기갈기 찢긴 청첩장이 흰 눈처럼 테이블 위로 쏟아져 내렸다.
“정세연 씨.”
“…….”
“앞으로 말 같지 않은 소리 할 거면 사람 불러내지 말아요.”
“…….”
“내 애 들쳐 업고 결혼식장 들어갈 거 아니면 이런 짓도 하지 말고.”
세연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정말 말 같지 않은 소리를 하는 건 바로 눈앞의 남자였다.
남의 감정을 짓밟고, 마음을 무시하고 이용하는, 오만하기 짝이 없는 사람.
“만난 김에 이만 룸으로 가죠?”
“싫습니다.”
“날 자극하지 말아요. 몸만 더 달아오르니까.”
“……대체 왜 이러세요?”
“뭘?”
“전무님, 곧 결혼하실 거잖아요.”
세연은 분노를 감추지 못하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
여전히 몸을 뒤로 젖힌 채 고개를 비스듬하게 기울인 남자가 세연을 응시했다.
지독하게 색정적이면서도 나른한 그 모습이 한때는 좋았다. 너무 좋아서 제정신이 아닐 정도로.
“그게 왜요?”
하지만 더는 아니었다.
“하…….”
세연의 입에서 그만 헛웃음이 터졌다. 눈앞의 남자는 상식이라는 게 통하질 않았다. 언제나 그랬다. 무슨 바보 같은 기대를 한 걸까.
긴장으로 인한 떨림도 멈추었다. 그저 분노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전무님은 결혼하시는데, 저는 왜 안 되죠?”
“정세연 씨가 나랑 같습니까?”
감히 너 따위와 내가 동일 선상에 놓일 수 있느냐는 질문이었다.
고작 개새끼에 불과한 네가.
“그리고, 내 결혼이 정세연 씨와 대체 무슨 관계가 있죠?”
“정말, 어떻게…….”
기가 막혀서 말문이 막혔다. 더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자신의 처지를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도, 무엇을 바라는지도 전부 알았다. 알면서도 좋아했다. 마지막까지 미련의 끈을 놓지 못한 채, 저 남자를 좋아했다.
그러나 남아 있던 마음마저도 전부 사라진 지금, 세연의 입가에는 실소만이 남았다.
“그렇죠. 전무님은 저를 인간으로도 안 보시는 거죠. 전무님께 저는 그저 짖으라면 짖는 개에 불과하니까요.”
“그럴 리가. 인간이 개한테 발정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나쁜 새끼.”
“그런 말은 못하는 줄 알았는데. 욕도 잘하는 줄은 몰랐네.”
“욕 못하는 사람 있어요? 안 하는 거지.”
“그럼 해 봐. 내 밑에 깔려서. 듣기만 해도 꼴려서 싸 버릴 것 같거든.”
“전무님!”
머리끝까지 새빨갛게 달아오른 세연이 소리를 질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평소와 달리 카페 내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멀찍이 서서 아무것도 안 들린다는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는 종업원들을 제외하고는.
J호텔 1층 카페테리아.
세연이 일부러 이곳을 만남의 장소로 고른 이유는 딱 한 가지였다.
바로 남자의 어머니가 소유한 호텔이라는 점. 일가친척들이 자주 드나들고 사방이 전부 보는 눈인 곳.
여기라면 남자가 제멋대로 굴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하나 그렇게 여긴 자신이 바보였다.
“어떻게 여기서까지 그런 말을…….”
언제나 그랬듯 이번에도 남자에게 휘말렸다는 사실에 분이 풀리지 않았다. 세연은 그를 노려보며 한참을 씨근덕거렸다.
세연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혔지만, 그걸 본 남자는 도리어 재밌다는 듯 웃었다. 명백한 조소였다.
“왜? 이런 말 못하는 사람 있어? 안 하는 거지. 네가 이럴까 봐 참은 것뿐이야.”
남자가 저열한 미소를 머금었다.
한때는 밤잠을 설칠 정도로 가슴 설렜던 그 미소가, 이제 더는 근사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참지 말 걸 그랬어. 화내는 거 보니까 더 꼴리네.”
“미친 새끼.”
“그만 꼴리게 해. 여기서 쌀 수는 없잖아.”
끝까지 더러운 말을 입에 담은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고 근사한 모습으로.
“그럼 이만 룸으로 올라갈까요, 정세연 씨?”
순식간에 매너를 갖춘 신사처럼 돌변하는 남자를 보자 세연은 기가 찼다.
그는 누가 보아도 매너 좋은 잘생긴 남자일 것이다. 흠잡을 데 하나 없이, 완벽한 남자.
한때는 세연 역시 그의 가면에 속았다. 모든 게 거짓인 걸 알고 나서도 그랬다. 거짓이더라도 달콤했고, 그 달콤함에 취해 모든 걸 잊을 수 있었다. 미련하고 또 미련하게도.
그러나 이제는.
“아뇨. 그럴 일 없습니다.”
세연은 이제 그 가면도, 남자도 모조리 박살 내 버리고 싶었다.
“앞으로도 그럴 일 없을 거고요.”
조금 비틀거렸지만, 그녀는 입가의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가 실수했네요. 말씀하신 대로 저는 전무님 결혼과 아무 관계없습니다.”
세연은 ‘관계’라는 단어에 한 글자씩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전무님과 저, 처음부터 아무 관계도 아니었으니까요.”
“……아무 관계도 아니다.”
남자의 입가에서 바람이 빠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가 거리를 좁혀 한 발짝씩 다가오자, 세연은 저도 모르게 몸을 굳혔다. 남자의 미소가 어떤 의미인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세연아, 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해.”
남자의 숨결이 세연의 귓가를 덥혔다.
“네 손으로 시작했잖아, 우리 관계. 잊었어?”
잊었을 리가.
세연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의 자신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