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의 기록
도살자라는 이름도, 용사라는 명칭도 모두 옛날 일이 되고, 모두가 정화된 세계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시기. 아주 조금 걸음이 느린 마법사의 이야기.
#1.
「정화 1년, 1월 1일. 저녁 시간 직전. 드물게 날씨가 따뜻해 눈 대신 비가 잔뜩 내리는 날.
새해를 맞아 오늘부터 일기를 쓰기로 했다. 정화 1년이라는 이 정체불명의 이름은 요즘 사람들 사이에서 꽤 유행하는 연호인데, 작년에 처음으로 세상이 정화되었다고 해서 다들 작년을 ‘정화 원년’, 올해를 ‘정화 1년’ 따위의 호칭으로 부르던 모양이다. 일행들에게 그걸 알려 주었더니 용사……. 아니, 아르미온과 세온과 인형이 기뻐하면서 춤을 추었다. 케르츠나 나나 그걸 보고 엄청 웃었다.
그나저나 용사에게 이름이 붙은 이후로 자꾸 실수하게 된다. 어울리는 이름이긴 한데 너무 오랫동안 용사라고 불러서 그쪽이 입에 붙었단 말이지. 실수로 잘못 부르기라도 하면 세온이 지어 준 이름이랍시고 엄청 집요하게 교정하려 들고…….
아무튼 간에. 원래는 신변잡기를 기록하는 일 따위 귀찮아서 잘 하지 않지만, 이건 단순히 일상을 기록하기 위해서만 시작하는 일기는 아니다. 일전에 저주를 상쇄하기 위한 목적으로 달아 놓은 꼬리가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아, 꼬리의 상태를 기록하고 꼬리를 마음대로 움직이는 요령을 정리해 놓으려는 목적도 있다.
이건 예전부터 했어야 되는 건데 내가 너무 게을렀다. 원래 신체 부위를 새로 붙이거나 교체하면 상태가 괜찮은지 꼬박꼬박 관찰하고 일지를 써야 하건만 한동안 그걸 까먹고 있었다. 아무리 흑탑을 나왔다고는 해도 일지를 꼬박꼬박 작성하는 건 마법사의 기본 자질인데 이걸 까먹다니,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참 게을러터졌다는 자각 정도는 있다.
아무리 불의 정령의 꼬리라 문제가 없다고는 해도, 원래 신체의 이식은 상당한 위험과 불확실성을 감당해야 하는 일이다. 관리를 잘못하면 꼬리에 문제가 생기거나 본체에까지 영향이 올 수도 있고 말이야. 이제부터라도 제대로 관찰 일지를 작성해서,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기면 처치할 수 있도록 하자.
해야 할 일 1. 매일 꼬리를 움직여 보고 통증이나 마비 증상이 있는지 확인하기. 꼬리가 멋대로 움직이거나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증상을 기록하고 원인 해결을 위해 실험하기.
해야 할 일 2. 매일 꼬리를 만져서 촉감을 확인하고 감각을 체크하기.
다만 다른 사람이 있을 땐 하지 말자. 케르츠 그 자식, 내가 꼬리를 만지면 신기하다는 듯 구경하면서 웃는단 말이야. 차라리 세온이나 인형처럼 노골적으로 놀리면 받아치기라도 하지, 그 자식은 놀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냥 넘어가 주는 것도 아니고…….」
* * *
“야, 그만 좀 쫑알쫑알 떠들어라! 아주 시끄러워 죽겠네!”
[하넨이 시끄럽대요! 꼬리가 빳빳이 섰어요!]
“그만 떠드는 게 좋을까요? 하지만 아직 잘 시간이 오려면 한참 남았는데요? 가만히 있으면 심심하지 않나요?”
[어차피 지금 하넨은 대단한 일을 하지도 않으니까 조금 더 놀아도 괜찮을 거예요! 나는 세온하고 놀고 싶어요! 인형도 나랑 세온이랑 같이 놀고 싶어요!]
“맞아요, 세온하고 놀아요! 예쁜 세온하고 놀래요!”
“아르미온, 그래도 너무 소리 지르며 노는 건 안 좋아요……. 그리고 인형 너, 아무리 용사한테 들러붙었다곤 해도 너무 개구쟁이가 된 거 아니야? 왜 이렇게까지 난리 법석이야?”
하넨은 한숨을 푹 내쉬며 일기장을 탁 닫아 버렸다. 모처럼 일기라도 써 보려고 마음먹었는데 어째 상황이 도와주지를 않는다. 이번에 들른 도시의 여관은 방이 거의 다 차서 4인실밖에 남지 않았고, 심지어 바깥에서는 비가 엄청 내리는 바람에 오후 5시밖에 되지 않은 지금도 창밖이 새까맸다. 기름이나 먼지 섞인 비가 아니라 받아서 식수로 써도 될 만큼 깨끗한 물이라는 점이 신기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이 날씨에 바깥에 나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밤이 되려면 멀었고, 어디 나가서 놀 수도 없으니 아르미온이나 인형이 심심함에 몸부림치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던 와중 세온이 ‘그러고 보니 아르미온에게 인형이 깃들면 어떻게 될까요?’ 따위의 영양가 없는 화두를 꺼냈고, 그 쓸데없는 의견이 지나치게 진지하게 받아들여진 결과 이 난장판이 벌어졌다. 하넨도 어지간해선 이런 생각까지 하고 싶진 않지만, 아무래도 그때 세온의 입을 다물게 하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세온, 나랑 놀아요! 나는 세온을 정말 좋아해요!]
“맞아요, 나는 세온이 정말 좋아요!”
[나는 세온이 정말 예쁘다고 생각해요! 예쁜 세온이랑 놀래요!]
“맞아요, 세온은 내가 본 사람 중에서 가장 예뻐요! 나만 보고 싶어요!”
용사가 두 명, 시끄러운 세 살 어린애가 두 명, 한창 꿀 떨어지는 연애를 하고 있어서 눈에 콩깍지가 낀 서투른 연인이 두 명……. 귀에서 피가 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시끄러운지라 도저히 일기 따위를 쓰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케르츠는 하넨과 마찬가지로 시끄러운지 노골적으로 귀를 막고 있었는데, 원래 청력이 비상한지라 귀를 막아도 별 소용은 없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인형은 물리적으로 소리를 내는 것도 아니라서 귀를 막아 봤자 의미가 없고.
“용사님, 잠깐, 사람들 다 보는 데서 막 이렇게 껴안고 빙글빙글 돌고 그러면……!”
“아르미온이라고 불러 주기로 했잖아요! 아직도 헷갈리면 어떻게 해요? 그래도 세온은 예쁘고 귀여우니까 괜찮지만!”
[맞아요, 세온은 정말로 귀엽다고 나는 생각해요! 실제로 세온은 세상에서 두 번째로 귀여운 사람이에요! 인형이라는 강력한 챔피언이 없었더라면 세온이 가장 귀여웠을…….]
“음, 세온? 이건 내 생각이 아니에요. 아무래도 인형이 저에게 깃들어서 너무 흥분한 모양이에요. 세온이 두 번째라니 무슨 이상한 소리를.”
[인형은 세온에게 도움을 청하고 있어요! 나는 세온과 관련된 일이라면 늘 심술궂어져요! 세온은 인형을 도와주지 않을 거예요? 네?]
“너 그냥 나한테 돌아올래? 아무래도 내 판단력을 빌리는 쪽이 제일 제정신 같아 보이는데.”
겨우 아르미온의 목 조르기에서 빠져나온 인형이 팟 뛰어올라 세온에게 안기자, 슬그머니 귀에서 손을 뗀 케르츠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저 커플이 은근히 귀엽기는 하다. 용사야 워낙 대놓고 들이대니 보는 재미가 있고, 세온은 그나마 좀 어른스럽게 굴려고 하지만 본인도 꽤나 서투른 구석이 있어서 구경하며 낄낄거리기 좋고…….
“마법사님도 즐거우신 모양이네요.”
“엉? 갑자기 무슨 뜬금없는 소리를……. 아, 진짜 또!”
어느새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살랑살랑 좌우로 흔들리는 꼬리를 노려보며 하넨은 짜증 섞인 비명을 내질렀다. 케르츠는 오히려 그 모습이 더 유쾌했는지 한참 동안 웃음을 피식피식 터뜨렸다.
#2.
「정화 1년. 1월 4일. 점심 식사 직후. 따뜻해 보일 정도로 푹신한 눈이 하염없이 내리는 날.
감정의 변화에 따라 꼬리가 마음대로 움직이는 현상은 정말이지 짜증이 난다. 처음에는 이식 과정에서 무언가 잘못되어서 그런 줄 알았는데, 가진 마법서를 다 뒤져서 다시 찾아보니 이것 자체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모양이다. 팔이나 다리 같은 다른 부위와는 달리, 꼬리의 경우엔 오히려 감정에 따라 멋대로 움직이는 쪽이 더 긍정적인 징후라고 한다. 꼬리 이식 시술 자체는 처음이 아니지만, 그걸 내 몸에다가 하는 건 처음이라서 여기까지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말이야, 아무리 긍정적이니 뭐니 해도 당사자인 내 입장에서는 엄청 짜증이 난다고. 깜짝 놀랄 때면 꼬리가 부풀어서 빳빳이 선다든지(어감이 좀 이상하긴 한데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다), 조금 마음이 누그러지면 꼬리 끝이 나도 모르게 좌우로 흔들흔들한다든지. 내 의지대로 신체 부위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게 얼마나 곤란한 일인지 알아?
이거 은근히 불편한데 좀 어떻게 방법이 없나? 나 혼자서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고, 다른 마법사에게 물어보는 것도 방법이라면 방법이지만 지금 흑탑의 마법사라도 마주치면 곤란하다.
그쪽 출신의 마법사들 중에 나한테 원한 가진 사람이 많다는 소문이 여기까지 들려온단 말이야. 쫌생이 같은 인간들. 물론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은 안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이 나를 원망스럽게 여기는 것도……. 아니, 이런 생각은 하지 말고. 아무튼 괜히 그치들과 안 좋게 얽히기라도 하면 얼마나 귀찮아질지.
그렇다면, 일단 되는 대로 주변에 물어볼까. 가장 직접적으로 해결책을 줄 수 있는 쪽을 알고 있긴 한데, 어쩐지 이쪽은…….」
* * *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은 곧 살아 있다는 증거나 다름없다.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고 인형은 판단하고 있다.]
“어, 그래……. 네게 물어보면 대충 그런 대답이 나올 거라고는 예상했어.”
원론적이지만 별로 듣고 싶지는 않은 대답이 돌아왔다. 결국 이렇게 될 거라고 하넨 또한 내심 짐작은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신은 한때 ‘감정’을 잃고 망가졌던 전력이 있으니 감정의 표현과 관련된 문제에서만큼은 보수적인 입장을 보이는 게 당연하다. 설령 그게 ‘꼬리로 감정이 다 드러나는 걸 어떻게 좀 해 줄 수는 없는가?’라는 문제라곤 해도 말이다.
[표정과 비슷한 요소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사람의 표정은 감정에 따라 변하고 때로는 자기 마음대로 조절되지 않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다고 표정을 없애고 싶어 하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좀 어떻게 안 되냐?”
[시간이 해결해 주길 기다리는 편이 가장 빠르다. 하넨이 자기 꼬리에 익숙해지면 꼬리의 움직임을 제어하기도 쉬워질 거다.]
“그렇기야 하겠지만.”
[인형은 하넨이 꼬리의 움직임을 너무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럴 거면 놀리지나 말든지. 양심은 어디다 갖다 팔았냐?”
[놀리는 게 아니라 즐거워하는 거다. 인형과 동료들은 하넨의 감정을 관찰하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있다.]
말이라도 못하면 밉지나 않지! 하넨이 한숨을 푹 내쉬자 인형은 마치 위로하기라도 하듯 그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그나저나 이 솜뭉치, 세온에게 돌아왔을 때는 정말이지 멀쩡하게 말하는구나 싶었다. 용사에게 가면 지나치게 흥분 상태라서 대화가 잘 안 통하고, 케르츠에게 가면 지나치게 차분하고 얌전해서 말을 걸기도 무섭다.
진지한 이야기를 하려면 그나마 후자 쪽이 낫긴 하지만, 일전에 인형이 케르츠에게 했던 행동을 보았을 때 후자는 의외로 폭력성이 강한 것 같기도 해서……. 폭신폭신한 솜뭉치 다리로, 툭 치는 듯한 가벼운 움직임으로 케르츠의 머리를 후려갈기는데 쇳덩어리 부딪치는 굉음이 났던 일을 하넨은 도무지 잊을 수가 없었다.
역시 세온과 함께 있는 인형이 최고라고 그는 진지하게 생각했다. 물론 인형이 자신에게 기생(?)할 가능성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았다. 성직자인 케르츠나 순진한 용사, 본성이 워낙 선한 세온이라면 몰라도 하넨은 아직 인형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었다. 적어도 하넨 본인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은 나머지 세 명과는 다르다. 하넨은 그 씁쓸한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며 인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게다가 이 꼬리는 불의 정령의 것이다. 매우 따뜻하다.]
“그렇다고 이게 인형 전용 베개는 아니거든? 머리 안 치우냐?”
[하지만 따뜻하다. 베고 자기에 매우 좋다.]
“어차피 잠도 안 자면서! 야, 세온! 이 인형 좀 떼어 가!”
“안 되겠어요, 하넨 씨! 지금은 아르미온 떼어 내기도 벅차서…….”
“세온, 세온도 꼬리 달래요? 귀여울 것 같은데! 특히 밤에는 말이에요, 세온의 꼬리가 바짝 선다든지 살랑살랑 움직인다든지 하는 걸 보면 분명 더 즐거울 테니까!”
“남의 꼬리로 이상한 망상 하지 마라, 아르미온! 난 이제 갈 거야.”
저쪽은 저쪽대로 사이좋게 달라붙어 있어서 놀고 있었기에, 하넨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용사는 그런 쪽으로 눈을 뜬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지 한창 욕구가 왕성해서, 하넨이 가든 말든 세온을 껴안고 뒹굴거리며 이런저런 못된 소리들을 늘어놓고 있었다. 오히려 나이가 훨씬 많은 세온은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개져선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모습이 꽤나 귀여웠다.
“어, 벌써 가시게요? 미안해요, 도움이 못 되어서…….”
“아니, 세온 네가 미안해할 필요는 없지. 그나저나 너, 밤에 인형 보낼 거면 미리 말이나 하고 보내라. 가끔 머리맡에서 인형이 가만히 앉아 있으면 사념인 줄 알고 깜짝 놀란단 말이야. 아무리 좋을 때라고는 해도 자꾸 그러면 섭섭하다?”
“아니, 그, 저도 보내고 싶어서 보내는 건 아니거든요! 놀리지 마세요!”
“응? 놀리는 거 아니야. 그냥 너희 둘을 보면서 즐거워하는 것뿐이지.”
하넨이 킥킥 웃자 세온의 얼굴은 아예 폭발할 듯 달아올라 버렸다. 그가 일부러 꼬리로 빗자루처럼 바닥을 죽죽 쓸고 다니자 인형은 금방 떨어져 나갔고, 하넨은 꼬리를 흔들거리며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그는 방 한편에서 눈을 감은 채 기도문을 외우는 케르츠를 잠시 바라보다가 책상에 앉았다. 기분이 좋은 척 일부러 꼬리를 흔들거리던 아까와는 달리 지금 하넨의 꼬리는 축 처져 있었고, 그의 표정 또한 별로 밝은 편은 아니었다.
‘인형은 역시나 도움이 안 되고, 그러면 다른 방법을 찾는 수밖에 없겠지.’
남의 힘을 빌리기 곤란한 상황이라면 직접 해 보는 수밖에 없다. 그는 짐을 뒤져서 한동안 쓰지 않던 약품 주머니를 꺼냈다. 원래 그의 지팡이에는 독이나 마비, 저주 계열의 마법을 수월하게 발동시키기 위한 액체 약품 주머니가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그러나 세상이 정화되어 독 관련 마법이 힘을 잃은 이후로는, 불 계통의 마법을 연구하느라 이 약품 주머니를 잘 쓰지 않았다.
‘어디 보자, 신경 마비 효과가 있는 독을 대략 이 정도쯤?’
정화 이후의 세상에선 과거에 비해 독의 위력이 약해졌는지라 계량을 잘 해야 한다. 어중간하게 마비독을 주입하면 약효가 돌지 않아 소용이 없고, 지나치게 많이 주입하면 꼬리뿐만이 아니라 본체에까지 효과가 돌아서 더 고생하고 만다.
게다가 마비독의 부작용을 상쇄하기 위해선 그와 관련된 다른 약품도 함께 배합해야 하는데, 이 약품도 독성은 약해지고 다른 효과가 더 강화되어서 배합에 주의가 필요하다. 잘못 비율을 맞췄다간 약품이 이상하게 융합되어서 아예 엉뚱한 효과를 내게 될 테니…….
“왜 갑자기 다시 독을 연구하고 계신 겁니까, 마법사님?”
느닷없이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하넨은 꼬리를 바짝 세우며 후다닥 뒤돌아보았다. 어느새 기도를 마친 케르츠가 바로 옆까지 다가와선 하넨이 하는 양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너, 너는 기척이라도 좀 내고 다가와라! 깜짝 놀랐잖아.”
“미안합니다. 그런데 독과 관련된 연구는 꼬리를 얻은 이후로 그만두신 거 아니었습니까? 무슨 바람이 불어서 다시 하고 계시죠?”
“아니, 뭐. 내가 그만둔다고 한 적은 한 번도 없는데…….”
마침 도움이 되는 꼬리도 얻은 김에 한동안 불에 대한 연구를 하고 있었을 뿐, 하넨이 아예 독에 대한 연구를 그만둔 건 아니었다. 게다가 남이야 무슨 연구를 하든 상관없지 않나? 설령 그만뒀다 쳐도, 잠시 그만뒀다가 재개하기 위해 그가 누군가의 허락을 받아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렇게 질문해 오는 케르츠의 시선에 묘한 걱정이 어려 있어서, 여기서 어중간하게 얼버무리기도 영 내키지가 않았다.
“아니 뭐, 별건 없고……. 꼬리가 제멋대로 안 움직이게 좀 고정시키려고 했던 것뿐이야.”
“고정……? 신경 마비가 아니고요? 그거 마비독 같습니다만.”
“마비독으로 마비시키면 결과적으로 그게 고정이지 뭐, 내가 너한테 이런 것까지 시시콜콜 다 설명해야 하냐?”
하넨은 가볍게 콧방귀를 뀌고는 다시 약품 배합에 열중했다. 케르츠의 따가운 눈빛이 느껴지는 걸 보니 저쪽은 하넨의 대답이 영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지만, 딱히 하넨이 케르츠의 심기에 맞춰 움직여 줘야 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거 잘못하면 큰일 나는 거 아닙니까? 기껏 얻은 귀한 꼬리가 썩는다든지, 본체에 영향이 온다든지.”
“안 큰일 나게 잘 할 테니까 걱정 마. 흑탑의 마법사가 이런 일에서 실수를 하지는 않아. 물론 지금의 흑탑은 거의 망조가 들었다고들 하지만…….”
말하다 보니 괜히 씁쓸해져서 하넨은 입을 비죽였다.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해 기껏 고위급 마법사까지 보냈건만, 그 결과가 흑탑의 쇠퇴를 불러왔다는 건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그나마 재능 있고 다른 분야의 마법을 발전시킬 여지가 있는 마법사들은 죄다 바깥으로 뛰쳐나가고, 기존의 마법을 이미 너무 깊게 받아들여 다른 분야에 손을 뻗을 조건조차 되지 않는 이들은 서서히 힘을 잃고 쇠락해 간다는 이야기가 듣고 싶지 않아도 들려온다.
물론 독과 저주가 지금까지 지나치게 강한 위력을 발휘했고, 그 분야의 쇠락이 오히려 세계 전체의 균형에는 더 긍정적인 영향을 준다고도 한다. 실제로 독이 지배하는 세계보다는 독이 없는 세계가 더 행복하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실제로 독의 연구를 그만두고 불의 마법을 연구하기 시작한 이후로 하넨의 건강도 많이 나아졌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저는 마법사님이 되도록이면 그쪽 분야에는 손을 안 댔으면 좋겠군요. 이제는 굳이 필요도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그 꼬리도, 감정에 따라 조금 움직이는 걸 제외하면 결론적으론 별문제가 안 되고요.”
“…….”
“정 기분이 나쁘셨다면 앞으로는 놀리거나 웃지 않겠습니다. 세온이나 아르미온도 그 정도는 배려해 주겠죠. 굳이 몸에도 좋지 않은 독을 써서 그렇게 무리를 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넌 입 다물고 있어.”
그렇다곤 해도, 케르츠의 그 말이 묘하게 신경을 거스르는 것만은 어쩔 수가 없어서.
“……마법사님?”
“네 날개는 네 의지에 상관없이 멋대로 움직이는 일 따위 없잖아. 그거면 됐지 남의 몸에 붙은 부착물까지 왈가왈부하고 싶냐? 너도 네 의사와는 상관없이 멋대로 퍼덕거리는 박쥐 날개 같은 거 달았으면 뭐 나랑 달랐을 것 같아?”
“…….”
“그리고 독 마법에 대해서도 말이야, 내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뭐가 그렇게 불만인데? 내가 바보도 아니고 어련히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잘 하지 않겠어? 독 마법이 약해졌다고는 해도 내가 평생 연구해 온 건 독 관련 마법이란 말이야. 아무리 이제 불 마법을 배우고 있다곤 해도 조금 미련을 가지는 건 당연한 거 아니야?”
갑작스러운 하넨의 짜증에 당황했는지 케르츠가 말을 잃고 머뭇거렸다. 물론 하넨도 머리로는 알고 있다. 이게 이렇게까지 짜증을 내고 화를 퍼부을 문제는 아니고, 지금의 자신은 그냥 괜히 기분이 나빠져서 케르츠에게 화풀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케르츠도 꼭 저런 식으로 말을 할 건 없지 않았던가. 이제는 굳이 필요도 없다느니, 되도록이면 손을 안 댔으면 좋겠다느니. 가뜩이나 인형도 시큰둥하니 도와주지 않으려 해서 기분이 상해 있는데……. 하넨은 약품 주머니를 챙겨 가방에 쑤셔 넣고는 자리에서 확 일어났다. 케르츠는 그를 잡으려 했는지 팔을 뻗었지만 하넨은 곧바로 그의 손을 뿌리쳤다.
“네가 도살자의 삶을 버렸으니 나도 그러란 거냐? 내가 꼭 그래야만 해?”
흠칫, 케르츠가 굳은 틈을 타 하넨은 성큼성큼 걸어 방을 나가 버렸다. 딱히 목적지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3.
「정화 1년 1월 5일, 아침 식사 이후. 내린 눈이 녹지 않아 사방이 하얗게 물든 날.
어제는 괜히 케르츠에게 화를 내고 말았다. 딱히 갈 곳도 없어서 도시를 배회하다가, 거의 눈사람이 되다시피 해서 한밤중에야 여관에 돌아왔더니 세온과 아르미온이 놀라서 뛰쳐나왔다. 아무래도 내가 소리를 지르고 나가서 둘 다 걱정했던 모양이다.
케르츠는 나를 보고 뭐라 말하려다가 결국 아무 말도 안 하고는 꿍하니 돌아서 버렸다. 심지어 하룻밤 자고 일어난 지금도 그러고 있다. 아니 뭐, 내가 너한테 무슨 나쁜 말이라도 했냐? 내가 좀 짜증을 낸 건 사실이지만 네가 화날 만한 말을 하진 않았잖아. 그냥 너에게 괜히 화풀이를 했을 것뿐……. 음, 화날 만했나.
그래도 바깥에 나갔던 성과가 아예 없지는 않았다. 도시를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어떤 마법사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 [언데드]를 다루는 마법사. 단순히 시체를 되살려 움직이게 하는 수준이 아니라, 생물의 일부를 일시적으로 언데드화시켜서 다치더라도 통증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마법을 잘 다룬다는 모양이다. 환지통을 앓는 사람에게는 특효라나 뭐라나. 감정을 느껴도 그게 꼬리로는 향하지 않게 만든다면, 꼬리가 감정에 반응하는 걸 차단해 마음대로 움직이는 걸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더 좋은 소식은, 그 마법사가 불에 대한 마법을 연구하고 있어 관련된 자료를 원한다는 점이다. 그 마법사에게 찾아가 내가 연구한 불과 관련된 자료를 공유하고, 그 마법사가 부린다는 언데드 관련 마법을 배워 오면 그것도 나름대로 좋지 않을까?
물론 인형이나 케르츠는 탐탁지 않게 보겠지만, 그게 뭐. 너희도 늘 내 마음에 쏙 들게 굴지는 않았잖아. 이 정도는 좀 봐주라고.
아무튼 오늘 저녁에는 나 혼자 나가서 그 마법사를 만나 봐야겠다.」
* * *
“마법사님.”
“…….”
“마법사님.”
“여기 마법사 없다.”
“그럼 이불 바깥으로 삐져나온 이 꼬리는 누구 겁니까.”
“졸려, 귀찮게 굴지 마.”
삐져나온 꼬리를 침대 바닥에 탁탁 치며 항의하자 케르츠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꼬리를 가지고 놀리거나 비웃지 않겠다고 했던 전날의 이야기는 전부 까먹은 모양이었다. 물론 하넨도 딱히 진심으로 기대했던 바는 아니었으므로 크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
“어제 그렇게 주무시고도 또 졸리십니까? 식사한 지 얼마 되지도 않으셨잖아요.”
“세온이 아침에 그랬어. 먹고 바로 누우면 소 된대.”
“그거 부정적인 의미의 속담 아니었습니까? 게으르게 굴면 안 된다는 뜻이잖아요.”
“그랬던가? 나는 충분한 휴식을 취해야 소처럼 건강하게 일을 할 수 있다는 뜻인 줄 알았는데.”
“어느 쪽이 진짜인지는 물어봐야 알겠지만, 하여튼 마법사님은 소가 아니지요. 먹고 자면 소화가 안 됩니다.”
“아마 그건 소도 마찬가지 아닐까……. 아무튼 졸려. 좀 자게 내버려 두라고.”
지금 조금이라도 눈을 붙여 둬야 밤에 잠이 안 온다는 핑계를 대고 나갈 수 있다. 하넨은 이불을 빼앗기지 않도록 양손과 꼬리로 잡은 채 몸을 웅크렸다. 케르츠는 머리맡에 앉아서 몇 번 이불을 잡아당기다가 곧 그만두었다.
이왕이면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 볼일이나 봐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넨은 생각했지만, 아쉽게도 케르츠는 그럴 생각이 별로 없어 보였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고, 그저 머리맡에 앉아 계속 하넨을 바라보다가 말을 툭 내뱉었다.
“혹시 기분이 안 좋아서 그러십니까?”
“뭐?”
“어제 일 때문에 기분이 안 좋으신 것 같아서요. 어제는, 그……. 제가 너무 무신경하게 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넨은 슬그머니 이불에서 머리를 빼고 케르츠를 올려다보았다. 사과라기에는 다소 뚱하고 심드렁한 시선이 머리 위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뭔가 어긋났다는 건 알지만 구체적으로 어디서 어긋났는지는 모르겠다는, 희미한 난처함과 당혹감이 섞인 태도. 그 모습을 보자 하넨은 괜히 맥이 빠지고 말았다.
“모르겠습니다는 뭐야, 모르겠습니다는.”
“제가 정확히 이해를 한 상황은 아니어서. 모르는 걸 안다고 할 수는 없잖습니까.”
“…….”
“마법사님이 제가 한 말 중 어느 부분에 기분이 상하셨다는 건 알겠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 원인은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이왕이면 설명을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만.”
저 말 역시 다소 무신경함이 섞여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하넨은 그냥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하넨이 좀 지나치게 화를 낸 감도 있고, 이제껏 이런 문제로 화를 낸 적도 없었으니 저이가 당황하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솔직히, 하넨이 화를 냈던 이유 자체도 대단히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이었다고 말하긴 어려웠으므로. 어떤 관점에서 보자면 지나친 떼 쓰기처럼 보일 수도 있고, 또 어떻게 보자면 억지를 부리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지금 이 순간, 하넨이 해야 할 일은 왜 자기 마음을 몰라 주냐며 떼를 쓰는 게 아니라.
“딱히 네 잘못은 아니야. 그냥 내가 요즘 괜히 생각이 많아졌을 뿐이지. 어젠 너한테 짜증 내고 소리 질러서 미안했다.”
“생각이 많아졌다고요.”
“그래. 사실 요즘, 그런 생각이 자주 들곤 하거든. 아무래도 나는 너희 셋과는 다르구나 하는…….”
이건 또 무슨 엉뚱한 소리인가, 그렇게 말하려는 걸 꾹 참는 듯한 케르츠를 바라보다가 하넨은 피식 웃었다. 입 밖으로 내뱉고 보니 역시나 별로 논리적인 소리는 아니었다. 말을 꺼낸 스스로가 생각하기에도 대단히 뜬금없어서, ‘이 마법사가 어제 눈을 맞고 오더니 열병이라도 걸렸나’ 하는 소리를 들어도 할 말은 없다.
그래도 진심이다. 적어도 하넨의 입장에서는 말이다.
“다르다니, 어디가 말입니까?”
“너희는 미련 따위 없이 변할 수 있잖아. 남기고 간 것이 아쉬워서 뒤돌아보지 않고, 그저 순수하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데…….”
“……?”
“그런데 나는 그게 잘 안 되는 것 같아서.”
하넨은 침대에 엎드린 채 꼬리를 흔들거리며 부족하나마 설명을 늘어놓았다.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세 사람은 뒤돌아보지 않고 나아가는데, 자신은 자꾸 발이 걸려 헛디디거나 아쉬움에 뒤돌아보게 된다. 최근 하넨은 그 사실을 꽤 진지하게 체감하고 있었다.
세온이야 애초에 이계의 사람이니 과거에 남기고 온 것 따위는 없다. 용사 아르미온 또한 이제 갓 세 살이 된 어린 생물이니 정화 이전의 세계에 아쉬움 따위가 남았을 리도 없다.
심지어 케르츠조차도 미련을 남기지는 않았다. 케르츠가 버려야만 하는 도살자의 오명은 애초부터 케르츠에게 짐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고, 케르츠에게 남은 성기사로서의 영광은 굳이 버릴 이유가 없을 만큼 자랑스럽고 소중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면 하넨은 어떨까. 그 또한 잃은 것이 있고 얻은 것이 있다. 그러나 그가 잃은 것은 한때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졌던 ‘흑탑의 마법사’라는 지위고, 비록 몸을 갉아먹기는 했지만 평생토록 애착을 가지고 연구해 온 독과 저주의 마법이다.
물론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불의 정령의 꼬리를 얻었고 불과 관련된 마법을 배울 수 있게 되었지만, 꼬리는 주인의 의사 따위 고려하지도 않은 채 제멋대로 움직이고 불의 마법은 아직 제대로 연구되지도 않아 서툴기 짝이 없다. 아직은 이것이 온전한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지금으로선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많다고, 아쉬워하고 미련을 가지고 뒤돌아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케르츠는 하넨의 그 설명을 들으며 가만히 침묵했다. 지금 하넨은 엎드린 채 베개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기에, 케르츠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무슨 표정을 짓는지 하넨은 알 방도가 없었다.
다만 지금 이 순간, 케르츠가 좌우로 느리게 흔들리는 꼬리 대신 다른 무언가를 보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하넨은 생각을 천천히 정리하려 애쓰며 느린 말을 내뱉었다. 모호하기만 하던 생각이 혀끝을 거치며 조금씩 확실해졌다.
“변화하려면 무언가를 버려야 해. 때로는 달갑지 않은 걸 받아들여야 할 때도 있고.”
“…….”
“물론 시간이 지나면 버린 것의 빈자리가 채워지기도 할 테고, 달갑지 않던 것도 서서히 달가워지겠지만. 그래도……. 그러려면 시간이 걸리잖아. 정화 원년, 정화 1년이 된다고 해서 모두가 땡 하고 바뀔 수는 없어. 설령 당장은 바뀐 것처럼 보이더라도 한동안은 익숙한 삶의 방식이 그리워진다고. 내가 독을 연구한 것도 그래서고…….”
“……그러니까 시간이 필요하단 말씀이군요, 마법사님은.”
“그래. 고작 꼬리 문제 가지고 이야기가 여기까지 온 게 좀 우스꽝스럽긴 한데.”
하넨은 흠흠 헛기침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말만 그렇게 했을 뿐 케르츠가 정말 우스꽝스럽다는 말에 동조한다면 한 대 차 버릴 작정이었지만, 케르츠는 다행히도 그러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계기가 사소하다 하여 그 마음까지 가짜가 되는 건 아니지요. 저는 미처 생각이 닿지 못했던 부분이 있었군요. 이제 이해했습니다.”
“이해해 줘서 고맙다. 솔직히 좀, 쪼잔한 부분도 있긴 하다만…….”
“쪼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는 할 필요가 없었던 고민의 일부를 겨우 엿보았다는 기분이군요. 저는 버리고 싶은 걸 버렸고, 계승하고 싶은 걸 계승했지만……. 모두가 그럴 수 있는 건 아니지요.”
아마 저 사내라면 버리기 싫은 게 있어도 시원하게 버리지 않았을까. 잠시 생각하던 하넨은 그럴 리 없음을 깨달았다. 되짚어 보면 정화 전의 케르츠는 하넨 이상으로 제 신념을 버리길 두려워하던 사람이었으니까.
케르츠가 자신과 같은 처지였다면 더 울고불고하며 자기 것을 못 버려 낑낑거리지 않았을까, 내심 그 모습을 상상하며 재미있어하던 하넨은 케르츠의 알쏭달쏭한 시선을 놓치고 말았다. 흥미와 재미를 벗어난, 무언가 다른 감정도 품은 듯한 그 눈빛을.
“그렇다면 제가, 최대한 마법사님의 속도에 맞추려고 노력하겠습니다.”
“마, 맞춰?”
“네. 마법사님이 변하는 속도에 맞출 수 있도록. 저는 이제 두려움도, 미련도 없으니 이 정도는 얼마든지 해 드릴 수 있습니다.”
하넨의 눈이 동그래졌다. 역공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보잘것없는, 그러나 하넨에게는 확실한 타격을 선사한 그 한 마디. 그러나 정작 말을 꺼낸 본인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화제를 돌려 버려, 하넨은 제가 느낀 바를 곱씹을 틈조차 없이 다음 화제에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 문제는 해결하신 셈이죠?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하고, 이따가 외출할 때 같이 따라가 드리도록 하지요.”
“그래, 그건 고맙……. 잠깐만, 뭐라고?”
“밤에 산책할 핑계를 대려고 지금 주무시는 척하는 거 아닙니까. 누워만 있으면 정말 소가 될지도 모르니 적당히 하고 일어나세요. 소화 안 됩니다.”
“어, 어떻게 알았어. 너 혹시 내 일기장 봤냐?!”
“그러고 보니 요즘 일기도 쓰셨지요? 딱히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마법사님의 평소 패턴이 그래서 적당히 때려 맞춰 본 것뿐입니다만. 산책 나가고 싶을 땐 늘 낮잠을 자지 않습니까?”
저절로 털이 빳빳이 부풀어 올라 하늘로 치솟는 꼬리를 내리려 노력하며 하넨은 케르츠를 노려보았다. 케르츠는 모른 척 웃으며 고개를 돌렸지만, 어쩐지 지금은 그 노골적인 배려가 더 고깝게 느껴졌다.
“괜히 방해하고 그러면 화낼 거야.”
“대체 뭘 하시려는진 모르겠지만 말리지는 않을게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일단은 같이 갑시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세상 아닙니까?”
하긴, 성기사님이 있어 주면 든든하기야 하겠지. 하넨은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어차피 속내도 다 까발려졌으니 더 미룰 필요는 없다. 더 시간이 지나기 전에 마법사를 만나러 나갔다 오는 수밖에.
#4.
「정화 1년 1월 5일, 어떤 감정을 이야기해야 할지 복잡한 밤. 눈이 또 온다.
빌어먹을 성격파탄자 자식!
피곤하다. 자세한 내용은 내일 적어야겠다.」
* * *
“두 분이서 외출하시는 거예요?”
“그래, 이 녀석들아. 간만에 단둘이 있으려니까 아주 째지지? 잠깐 케르츠랑 어디 좀 나갔다 올게.”
[단둘이 아니다. 인형도 함께 있다! 게다가 오늘은 나와 아르미온도 인형과 외출을 할 작정이다.]
“너희도 외출한다고? 그러고 보니 둘 다 나가려고 단단히 싸맸구나……. 그런데 그 큼지막한 망태기들은 뭐야?”
[인형이 직접 만든 특제 망태기다. 인형의 정성이 듬뿍 들어간 덕분에 많은 물건을 집어넣어도 무겁지 않다!]
“찢어지지 않는 것도 아니고, 무겁지 않다는 건 정성이 아니라 마법의 영역 아니야……? 아무튼 잘 다녀와. 추운데 너무 싸돌아다니지 말고.”
혹시라도 인형이 무언가 눈치채고 말리려 드는 거 아닌가, 하넨은 내심 걱정했지만 의외로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형은 세온과 아르미온을 부하처럼 이끌고 거들먹거리며 외출할 준비를 하는 중이었다. 두 어린애들 또한 커다란 망태기를 하나씩 등에 메고 즐거워하며 하넨을 바라볼 뿐 딱히 의심하는 기색은 없었다.
저들의 외출 목적은 무엇일지 신경이 안 쓰일 리는 없었으나 하넨은 신경을 끄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지금 어중간하게 질문해 봤자 좋지 않다. 잘못하다 오히려 하넨이 질문 공세를 얻어맞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하넨은 케르츠를 데리고 곧장 바깥으로 나갔다. 하얗고 푹신한 눈으로 가득 덮여 있던 거리는 지나다니던 사람들의 발자국으로 길이 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사람이 많은 대로변에서나 통하는 이야기일 뿐, 좁은 골목길은 아직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아 어제 내린 눈이 그대로 쌓여 있었다.
사람 없는 골목길에선 오직 뽀득거리며 눈 밟는 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차분해지는 듯해, 하넨은 아까보다 조금 더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디로 가시려는 작정인지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신체의 일부를 언데드화하는 마법을 지닌 마법사. 유사 세온 같은 상태를 구현할 수 있어.”
“세온 본인이 듣는다면 꽤나 복잡한 심경이겠군요…….”
“시끄러워. 어차피 약물적 처치가 아니라 마법에 불과하니 내가 원할 땐 언제든 해제할 수 있고, 꼬리로 감정이 흘러가는 것만 차단할 생각이니 그 외의 부작용도 없다고. 내가 꼬리 조절에 능숙해질 때까지만 임시로 쓸 거야. 그 마법사가 불 관련 연구에 흥미를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있어서, 내 연구 자료하고 그자의 마법을 교환하려고.”
“그렇다면 나쁘지는 않겠지요. 마법사님이 그걸로 만족하신다면야. 그런데 그 마법사, 실력은 확실한 겁니까?”
“소문에 따르면 그렇다고 하지만 나야 모르지. 그래도 확인해서 손해 볼 일은 없잖아? 소문만 요란한 뜨내기였다면 그냥 돌아가면 그만이고, 아니면 좋은 거고…….”
물론, 기분이 좋아졌다고 해서 완전히 긴장을 놓은 건 아니지만 말이다. 하넨은 꼬리로 낼 수 있는 [불꽃]의 화력을 북돋울 수 있는 약품들을 잔뜩 챙겨 온 상태였다. 그는 품 안의 약품들을 만지작거리며 한숨처럼 말했다.
“그리고 말이지, 솔직히 말하자면 실력이 확실한 쪽이 더 위험할지도 몰라.”
“무슨 뜻입니까?”
“이런 세계에서 언데드 관련 마법의 ‘실력’이 확실하다면, 그 실력은 어디서 쌓았겠어.”
“……!”
“그러니까 네가 따라오겠다고 했을 때 거절하지 않았던 거야. 나도 상대가 흑탑 출신일 확률을 고려해 만반의 준비를 했지만, 그래도 세상일이란 게 어떻게 흘러갈지 모르니까.”
“그러셨군요. 어쩐지 화내지 않고 순순히 같이 가자고 하시더니.”
“너는 네 동료들을 만나면 반갑겠지만 나는 무섭다고. 흑탑의 붕괴에 대해 어떤 책임을 물을까 싶어서…….”
푸념처럼 가볍게 투덜거렸을 뿐인데도 케르츠의 얼굴은 어색하게 굳었다. 단순한 농담이라고, 그렇게까지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 없다고 웃으며 말하려다가 하넨은 그냥 모른 척하기로 했다. 늘 자기만 세상의 모든 비극을 짊어진 것처럼 굴던 녀석이 모처럼 남의 일로 씁쓸해하는 꼴이 꽤 재미있기도 했고, 무엇보다―가끔은 어리광을 부리는 것도 그럭저럭 편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혹시 무슨 일이 생기면 나나 제대로 지키라고. 나 없으면 너희들 돈줄도 없어지는 거 알긴 아냐?”
“애초에 이게 돈줄 문제였습니까……. 아무튼 조심하지요.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점 하나는 확실히 알겠으니.”
“아니, 그렇다고 너무 겁먹지는 말고. 나는 어디까지나 최악의 상황을 말한 것뿐이야. 내 전공 분야가 아니어서 직접 못 할 뿐이지, 신체 일부를 언데드화시키는 마법 자체는 난이도가 그렇게 높지 않아. 아마 상대가 흑탑 밖의 마법사라 해도 그 정도는 할 수 있을걸?”
그래도 케르츠가 너무 심하게 긴장했으므로 적당히 달래거나 긴장을 풀어 줄 필요는 있었다.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걸은 끝에 두 사람은 마법사가 산다는 집에 도달했다. 특별히 음산하지도 않고, 낡거나 독특한 모습도 아닌 평범한 마법사의 공방이었다.
다만 신경 쓰이는 점이 없지는 않았다. 공방 벽 옆쪽에 달라붙어 지금도 열심히 돌아가고 있는 냉각용 마법 설비였다. 물론 냉각 설비야 어느 실험을 하든 필요한 거니 갖추고 있다 해서 특별히 이상할 건 없지만, 어쩐지 저 냉각 설비는 디자인이 좀 익숙한 게…….
“야, 케르츠. 돌아가자.”
“네?”
“어쩐지 감이 안 좋아. 꼬리 같은 건 아무래도 좋으니 어서 돌아가 잠이나 잘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잠깐, 설마.”
그때였다. 굳게 닫혀 있던 공방의 문이 마치 손님을 인식하기라도 하듯 스르륵 열렸다. 물론 상식적으로 따지자면 그저 안에서 누군가 손님을 맞으러 나왔다고 보는 편이 더 논리적이겠지만, 이 경우에는 더 논리적인 가설이라 해서 더 마음을 안정시켜 주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이미 늦은 것 같습니다만.”
“그러게, 늦은 것 같다……?”
케르츠의 팔을 잡고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면서도, 하넨의 머릿속에서는 지금 이 상황과 조건에 들어맞는 이들의 리스트가 착착 자리 잡혀 갔다. 흑탑에서 언데드화를 전공했던 사람, 흑탑을 나오는 와중에도 자기 실험실의 설비를 죄다 챙겨 올 만큼 뻔뻔하고 욕심 많은 녀석. 이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을 굳이 떠올리자면, 그러니까.
“뭐야, 손님이냐? 왔으면 빨리 들어오기나 할 것이지 왜 어중간하게 바깥에서……. 어?”
하넨에게는 대단히 낯익은 얼굴이 문밖으로 빼꼼 튀어나왔다. 마치 살아 있는 언데드처럼 창백한 안색도, 흑탑의 마법사들 사이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선명한 금안도, 분명 하넨이 아는 사람의 얼굴이어서.
“자, 잠깐만. 너 설마……. 하넨?!”
일이 안 풀리려면 이렇게도 되는구나. 하넨은 창백해질 대로 창백해진 얼굴로 케르츠의 뒤에 냅다 숨어 버렸다.
* * *
“마법사님, 잠시만. 제 뒤에 숨으셔 봤자.”
“하넨, 너 하넨 맞지?”
“사람 잘못 봤어! 그, 잠깐 지나가던 사람일 뿐이야! 아무 용건 없으니까 가던 길 그냥 갈게!”
“그런 허술한 변명으로 될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만……. 잠깐만요, 마법사님. 그렇게 끌어당기지 마시고.”
“넌 눈치도 없냐? 가자고, 빨리!”
평소에는 그렇게나 빠릿빠릿하던 케르츠가 오늘따라 영 굼떴다. 물론 케르츠의 말대로 이미 들킨 시점에서 허술하게 변명해 봤자 별 소용은 없겠지만, 그래도 이런 상황에선 누구라도 도망치고 싶은 게 당연하지 않을까?
“이상하다, 내가 잘못 봤나? 이렇게까지 덜떨어지고 멍청한 목소리라면 분명 내 동료 하넨이 맞는데?”
“누가 덜떨어지고 멍청하단 거야! 아, 아니. 이게 아니라……!”
하넨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빽 지르자 케르츠는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하넨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꽤나 추태기는 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아니, 흑탑 출신일지도 모른다는 것 정도는 짐작했지만 설마 저자일 줄은 몰랐단 말이다. 언데드 관련 마법은 물론이요, 저주와 관련된 분야라면 흑탑 내에서도 따라올 사람이 없던 그……!
“역시 맞잖아?”
“아니, 내가 일부러 널 찾으려다가 여기에 온 게 아니라고! 그냥 모른 척 좀 해 주면 안 되냐, 에보크!”
“네가 정말 하넨이라면, [모른 척할 수는 없지. 나무가 되어 그 자리에 뿌리라도 박혀 버려라!]”
삐이, 귓가를 울리는 이명과 동시에 도망치려던 다리의 감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물론 정말로 다리가 나무뿌리로 바뀐 건 아니다. 이건 단순한 원망의 말, 저주 하나만큼은 흑탑의 그 어떤 마법사에게도 지지 않을 사내의 [주문]에 몸이 사로잡혀 버렸을 뿐이다.
“여기서 도망치는 건 좀 아니지 않아? 네게도 양심이란 게 있다면 여기서 꽁무니를 빼진 말아야지.”
“애초에 꽁무니를 빼는 게 아니라……. 아니, 그 전에 양심은 무슨 양심이야? 내가 너한테 무슨 빚이라도 졌냐?!”
“돈을 빌리진 않았다 쳐도, 마음의 빚 정도는 받아 낼 자격이 있지 않나 싶은데?”
하넨은 저주의 술식을 풀기 위해 낑낑거렸지만 이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애초에 상대가 저주의 최고 권위자인 에보크였고, 무엇보다 하넨은 저주보다 독과 관련된 마법에 더 애착이 있었고 재능도 그쪽이 더 뛰어났다. 공격 수단이라면 화염이나 독을 쓰면 되니 아예 없지는 않은 셈이지만, 문제가 뭐냐면.
“……케르츠. 에보크 저 자식, 심장과 뇌를 제외한 전신이 언데드야. 어설프게 공격해 봤자 소용이 없어.”
“잘 기억하고 있었네? 난 또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그러니 어설프게 독이라도 걸 생각 하지 마.”
“허세 부리긴, 세상이 정화된 이후로 저주의 힘도 약화된 걸 뻔히 아는데……!”
“그렇긴 해도 본 실력이 아예 망가진 건 아니거든? 네 옆의 경호인이 내 목을 따 버린다 쳐도 말이야, 너에게 걸린 저주가 없어지진 않아. 그러니까 괜히 도망칠 생각은 말고.”
하넨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상대를 노려보았다. 언데드화에 일가견이 있는 사내답게, 에보크는 일부러 자신의 몸을 언데드로 만들어 저주나 독 따위의 효과를 경감시키는 효과를 노렸다. 보통은 저러느니 그냥 시체를 구해다가 언데드 사역마를 만드는 게 일반적이고, 어지간한 미친놈들이 모여 있던 흑탑에서도 저런 짓까지 하는 사람은 흔치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면, 만일의 경우 심장과 뇌만 어떻게 하면 된단 뜻입니까?”
“그 부위는 보호의 마법이 걸려 있으니까 그렇게 쉽게 되지는……. 아니, 잠깐만. 케르츠 너는 왜 갑자기 이렇게 태평해? 지금 이거 위험한 상황이라고!”
“글쎄요, 어떨까요.”
케르츠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하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 중대한 사태에도 이상할 정도로 심드렁한 케르츠의 태도에 하넨은 기가 막혔지만, 지금 그는 케르츠에게만 신경을 쏟을 수 없었다. 당장 눈앞의 마법사가 자신에게 어느 정도의 분노를 품고 있는지, 어떤 식으로 자신을 엿 먹일 작정인지, 거기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했다.
“그, 우리 말이야, 그래도 흑탑에 있을 땐 좀 친하지 않았어? 그러니까 이왕이면 대화로.”
“애초에 너야말로 대화로 해결할 생각 없지 않아? 도망갈 궁리밖에 안 하면서. 게다가, 세계가 이렇게 된 이상 흑탑 이야기를 하는 데 의미가 있나? 흑탑은 어차피 이제 다 무너져 가고 있잖아?”
“아니, 그건……. 아무튼, 그, 미안하게 됐다! 나도 세계가 정화되면서 흑탑이 그렇게 될 줄은 몰랐다고! 물론 알았어도 정화를 안 할 수는 없었겠지만!”
듣는 입장에서 썩 기분 좋을 발언은 아니겠지만 그래도 하넨은 진심이었다. 설령 정화의 결과로 흑탑이 쇠락할 걸 진작부터 알았대도, 그렇다고 세계의 멸망을 두고 볼 수도 없는 노릇 아니던가. 그러니 하넨의 행동이나 결정이 바뀔 리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변함없이 뻔뻔하기 그지없구나, 너답게도.”
“내가 뭐, 다짜고짜 저주부터 걸어대는 너도 변함없이 음침한 주제에!”
“그도 당연하지 않겠어? 세상이 이렇게 된 바람에 저주의 힘도 형편없이 바닥을 쳤는데. 게다가 언데드화의 위력도 줄어들었는지, 이 팔다리도 마음대로 움직이질 않아! 이 꼴이 되었는데도 희망을 가지고, 음침하지 않은 삶을 살라고 넌 말할 수 있어? 응?”
“……!”
그렇다 하여 저 마법사가 느낄 분노나 허탈감을 아예 모른 척하겠다는 소리는 아니다. 세상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변한다 하여 변화에 뒤처진 상태에서 겪는 혼란이나 고통이 가짜로 치부될 수는 없으니까.
에보크는 마치 움직임이 불편한 사람처럼 문을 짚은 채 비스듬히 서 있었다. 아마 실제로 불편할 것이다. 언데드화가 불완전해졌다는 에보크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그의 몸은 예전만 못해서 움직임이 상당히 둔해져 있을 테니까. 관리를 잘못한다면 아예 썩는 냄새가 나기 시작할지도 모르고.
그래도 한때는 연구도 함께 하며 꽤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 저렇게 된 꼴을 보니, 하넨도 속이 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성질머리는 좀 괴팍해도 남을 이용하려 드는 성미는 아니고, 나름대로 법도를 지킬 줄 아는 사내라 그럭저럭 좋게 보았건만…….
“지금은 네 독도 예전만 못하지? 그러니 대답해 봐, 하넨. 넌 정화 이후의 삶에 정말 한 점의 후회도 없냐?”
“…….”
“아쉬움도, 미련도 정말 아예 없어? 세계가 정화되길 바랐지만 이 정도로 변하길 바라지는 않았다고, 하다못해 흑탑이 충격을 흡수할 시간 정도는 있어도 괜찮지 않았겠냐고, 그런 생각은 안 해? 기존의 마법을 잃다시피 한 마법사들의 처지가 불합리하거나 슬프다고 생각하진 않아?”
에보크는 답을 바라듯 하넨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케르츠 또한 그저 상황을 지켜보기만 할 뿐 이렇다 할 말을 꺼내지는 않았으므로, 지금 이 침묵을 깨뜨리기 위해 말을 꺼내야 할 사람은 오직 하넨뿐이었다.
분명 방금 전 케르츠와도 이런 뉘앙스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시의 하넨은 아쉬움에 대해, 미련에 대해 이야기했다. 세상의 변화로 인한 당혹감이, 잃은 것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이 없을 수는 없다고. 자신은 다른 세 사람과는 달리 변하는 속도가 느릴 수밖에 없다고.
확실히, 그때는 그렇게 말했지만.
한때 동료였던 마법사를 앞에 두고서, 자신의 대답을 기대하듯 물끄러미 바라보는 지금의 케르츠를 앞에 두고서도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아쉬움과 미련을 모래주머니처럼 발목에 매달고도, 낯설고 익숙지 않은 장애물들을 새로이 맞닥뜨리면서도―그렇다 할지라도, 주저앉거나 뒤돌아볼 수는 없음을 알기에.
하넨은 가만히 숨을 들이쉬고는 대답을 내뱉었다. 마법의 주문이나 성기사의 기도문만큼이나 힘이 담긴 한 마디를.
“글쎄다, 난 모르겠지만 적어도 후회는 안 해.”
“후회는 없다고?”
“그래. 어쩌면 우리에게 벌어진 일은 불합리가 맞을지도 모르지. 우리가 신전처럼 직접 세상을 망가뜨린 것도 아니고, 그저 세상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을 뿐인데 세상이 바뀌자마자 모든 것이 무너져 버렸으니까.”
“……그런데도 후회하지 않는 거냐?”
“그게 뭐 어쨌다고? 불합리함을 느낄 수야 있겠지만 거기에 슬픔 따위는 없어.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하넨은 시원스럽게 단언했다. 에보크는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지만 또 한편으로는 희미한 호기심 또한 느끼는 모양이었다. 마법사의 호기심만큼은 믿어도 괜찮다는 걸 알기에 하넨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정화 이전의 삶은 불합리하지 않았냐? 변하지 않은 채 점점 나빠지기만 하는 세상을 살아가던, 그 시절에는 아쉬움과 미련이 없었어? 만약 없었던 것처럼 느껴진다면, 그건 우리가 수많은 불합리를 밟고 서 있었기 때문이겠지.”
“…….”
“세상은 불완전하니까 불합리나 부조리는 언제나 존재하고, 과거에는 그 불합리가 다른 방향으로 향했다가 이제는 우리에게 화살이 돌아온 거야. 솔직히 너도 부정하진 않겠지, 과거의 우리가 적어도 흑탑 밖의 사람들보단 나은 처지였단 걸. 어떤 이들은 선조의 영광도, 자신을 유지할 이성도 잃은 채 아득한 세상을 떠돌고 있었으니까.”
과거에 편하게 살았으니 이제는 그 대가를 치를 때가 되었다, 따위의 말을 하고 싶은 게 아니다. 그저 받아들이라고, 모든 변화가 마음에 들 수는 없다는 사실 정도는 인정하라고, 하넨은 오직 그 말만을 하고 싶을 뿐이었다.
설령 변화가 달갑지 않다 해도 무를 수는 없다. 변화의 좋은 구석만 쏙 빼먹고 좋지 않은 구석은 뼈 발라내듯 버릴 수도 없다. 자신이 소중하게 여기던 무언가가 더는 귀중하거나 쓸모 있는 취급을 못 받는대도,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면 그 미련을 버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우리는 어쩌면 이 세상에 적응하기 어려운 인간상일지도 모르고, 그만큼 변화가 느릴 수밖에 없겠지. 그래도 변화하려고 노력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 그 과정에서 많이 힘들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고, 솔직히 지금도 꽤나 힘들지만……. 그래도 후회는 없어. 이게 내 대답이다.”
거기까지 말을 내뱉은 후, 하넨은 긴 한숨을 내쉬며 에보크와 케르츠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에보크 쪽은 그렇다 쳐도 잘 자란 어린애를 보듯이 뿌듯한 케르츠의 시선이 꽤나 신경 쓰이는데, 이 인간은 아까부터 대체 누구의 편을 들고 있는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아무리 저주에 걸려 발이 묶여 있다고는 해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아무런 도움도 안 주고 가만히 있을 줄이야…….
아니지, 잠깐. 하넨은 문득 묘한 사실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케르츠도 다리를 묶는 저주에 걸려 있었던가? 분명 저이가 저주의 말을 내뱉을 때 호명했던 건 하넨의 이름뿐이었는데?
“잘 살고 있는 모양이네.”
“……?”
“그렇게 잘 살고 있으면, 한번 흑탑도 들르고 그럴 것이지. 여태껏 어디서 뭐 하고 돌아다녔냐……!”
그 순간이었다. 갑자기 확 덮쳐 와서는 팔로 목을 조르는 언데드 마법사의 행동에 하넨은 기겁을 하고 말았다. 과장되고 갑작스러운 행동과는 달리 목을 졸라 오는 팔은 그렇게까지 힘이 세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장난이라도 하듯 가벼웠다.
답답함보다는 어리둥절함에 휩싸인 하넨이 당황해 발버둥 치는 동안 케르츠가 폭소를 터뜨렸다. 그제야 하넨의 머릿속에 섬광 같은 깨달음이 덮쳐 왔다. 어째서 케르츠가 이상할 정도로 차분하고 태연했는지, 마치 사태를 관망하는 듯한 태도만 보였는지…….
“자, 잠깐. 뭐야 이게? 너 나한테 복수라도 하려던 거 아니었어?!”
“아니, 그냥 널 놀려 먹고 싶었을 뿐인데? 네 쪽 경호인이 의외로 눈치가 빠르더라고.”
“엄밀히 말하자면 전 이 사람의 경호인이 아닙니다만……. 저에게는 저주를 걸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별다른 살의도 없어 보였으니 일단 지켜보았을 뿐입니다.”
“야, 케르츠! 그럼 말을 했어야지!”
“마법사님의 표정이 변하는 게 꽤나 재미있어서. 게다가 마법사님도 충분히 눈치챌 수 있는 문제 아니었습니까?”
“눈치라니, 뭘.”
“애초에 이 마법사는 불 계통 마법의 연구 자료를 찾고 있었지요. 그렇다는 건, 당신이 상상하던 것만큼 과거에 얽매인 자는 아니라는 뜻이겠지요.”
케르츠가 아무렇지도 않게 다리를 들어 올려 보이자 하넨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아니, 그러니까. 지금 거기까지 계산을 다 해 놓았으면서 정작 하넨에게는 아무 말도 안 한 채 구경만 했다는 뜻 아닌가.
예전 같았더라면 하넨이 비슷한 시늉만 해 보여도 배신이라며 빽빽거렸을 녀석이 이젠 사람을 놀려 먹기까지 한다. 감개무량하다고 해야 할지, 도살자 키워 봐야 소용없다(?)며 한탄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전개였다.
잠시 후 에보크는 하넨을 놓아주었고, 하넨은 씩씩거리며 두 사람을 노려보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이건 케르츠가 아니라 하넨이 먼저 눈치챘어야 하는 문제였다. 애초에 에보크라는 마법사 자체가 그렇게까지 고지식하거나 과거에 얽매이는 성격도 아니었고, 종종 하넨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신도 새로운 마법을 배워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 적 있으니…….
“뭐, 흑탑을 나온 마법사들 중에는 네게 원한을 가진 사람도 꽤 많은 모양이니까. 경계하는 태도 자체는 좋지 뭐.”
“그걸 알면서도 나한테 그런 장난을……. 됐다, 젠장할. 네놈이 그럼 그렇지. 케르츠 너도 말이야, 아무리 악의가 없어 보인다고 해도 저 녀석이 무슨 짓을 벌일 줄 알고 그렇게 태평해?”
“아뇨, 그렇게까지 긴장을 놓지는 않았습니다만. 무슨 일이 벌어지든 대처할 준비는 해 놓았어요. 이를 테면…….”
[제 곁에 늘 당신이 계시니, 이 발길 막는 것은 무엇 하나 존재할 리 없습니다.]
케르츠가 그 속삭임 같은 기도 한 마디를 읊조린 순간 하넨의 다리가 갑자기 가벼워졌다. 그와 거의 동시에 에보크의 얼굴이 낭패감으로 물들었다.
“뭐, 뭐야?!”
“보셨죠? 마법사의 저주 정도는 금방 해제할 자신이 있기에.”
“아니, 자, 잠깐만. 내 저주를 푼 건 그렇다 치고 방금 그건 대체 뭔데? 마법도 아니고, 신관들의 힘과 비슷하지만 그 작자들은 모든 힘을 잃었는데?”
“저는 말쿠테른의 도살자라고 불렸던 이들 중 하나입니다. 지금에 와서는 조금 다른 이름으로 불리고 있습니다만.”
“다른 이름이라니, 설마……?”
벌써 눈치를 챈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에보크를 바라보며, 케르츠뿐만이 아니라 하넨도 피식 웃음을 흘렸다. 어차피 자기 일도 아니건만 누군가가 케르츠의 정체를 듣고 놀랄 때면 하넨 또한 괜히 기분이 좋아지곤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자세한 건 들어가서 이야기하자. 아무리 언데드라곤 해도 손님에게 내줄 차 한 잔 정도는 있겠지?”
#5.
「정화 1년 1월 6일, 케르츠도 에보크도 널브러져 자고 있는 새벽. 일출이 뚜렷하게 보이는 맑은 날씨.
에보크와 꽤나 오랜 이야기를 나누었다. 흑탑의 동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는데, 딱히 별 이유가 있다기보단 나나 그놈이나 사람 이야기보단 마법 이야기를 더 좋아하기 때문이다. 듣자하니 그 녀석은 ‘체온을 가진 언데드’가 되고 싶다고 한다. 불 마법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도 그 탓이라고 한다. 체온이나 감각 등, 생명을 가진 것들의 특성을 조금씩 신체에 추가하다 보면 죽어 버린 몸을 조금이나마 원활하게 움직일 수 있다는 논리였다.
다만 아쉽게도, 그놈은 나와의 대화에서 꽤 재미를 본 모양이지만 나는 그러질 못했다. 정화 이후로는 언데드화 마법의 위력도 영 시원치가 못해서, 통각을 없애는 것 정도는 가능해도 내가 원하는 것처럼 꼬리로 가는 감정 자체를 차단하는 일은 불가능할 듯하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허탕이다 이 말이다. 빌어먹을 자식, 도움이 안 될 거면 남의 꼬리 가지고 놀리지나 말 것이지!
에보크는 여기서 같이 살며 연구를 하지 않겠냐고 나에게 제안했다. 나는 언데드의 체온에 대해 연구하고, 자기는 꼬리의 감정을 차단할 방법을 다시 연구하면 괜찮지 않겠냐는 이야기였다. 물론 나쁜 제안은 아니다. 혼자 연구하는 것보다야 둘 이상의 마법사가 같이 연구를 진행할 때 효율이 높아지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다만…….
그 제안은 일단 거절해 두었다. 에보크가 싫어서 그렇다기보단, 그냥 아직은 그러고 싶지 않을 뿐이다. 연구도 물론 즐겁지만 지금은 세상을 여행하는 쪽이 더 즐겁다. 요즘은 애인지 어른인지 도무지 분간이 안 가는 용사도, 순진해 보이지만 묘하게 심지가 굳은 세온도, 늘 까불거리지만 그래도 근본은 대단한 존재인 인형도, 그리고…….
케르츠가 꿈지럭거리고 있다. 일기 쓰는 걸 들키면 놀림받을지도 모르니 여기까지 하자.」
* * *
“벌써 가려고? 추울 테니 차라도 한 잔 마시고 천천히 가지.”
“아니, 나나 케르츠나 아침도 먹어야 하고……. 무엇보다 여관에 남겨 두고 온 일행이 있어서. 지금쯤 걱정하고 있을지도 몰라.”
“단둘이 오붓하게 여행하는 게 아니었단 말이야?”
“아니야! 어제부터 넌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에보크의 공방에서 하룻밤 묵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후, 하넨과 케르츠는 이른 새벽에 공방을 나섰다. 언데드라서 음식을 섭취할 이유가 없는 에보크의 공방에는 음식이 아예 없었고, 어제 저녁 식사도 제대로 하질 않아서 굶주린 두 사람은 부지런히 여관으로 향해야만 했다.
소득이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는 하룻밤이었다. 흑탑의 동료와 간만에 조우한 건 괜찮은 일이었지만, 결국 꼬리의 움직임을 개선하는 데는 실패했으니 말이다. 그래도 다행인 건, 여관에 돌아갔을 때 인형이나 다른 동료들에게 댈 만한 핑계가 생겼다는 점이다. 하넨이 흑탑의 오랜 동료를 만나고 왔다고 하면, 다들 신기하게 여길 뿐 특별히 이상하게 보지는 않을 거다. 심지어 거짓말도 아니다.
“야, 인형이랑 꼬맹이들한테는 적당히 말 맞춰 줘야 해.”
“인형이 그런 일로 화를 낼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아마 인형도 분명 당신을 이해해 주지 않을까요? 그 또한 저와 마찬가지로 당신이 느린 속도로나마 변화하길 기다려 줄 겁니다.”
“……기다려 주는 건 너 하나면 충분하니 됐어.”
“무슨 말씀입니까? 아무튼, 정 원하신다면 맞춰는 드리지요.”
케르츠가 이해를 못 했으니 하넨은 그냥 모른 척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케르츠의 말대로 인형이든 용사든 세온이든 하넨의 진의를 안다 한들 화를 내진 않겠지만, 그래도 부끄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꼬리의 감각을 차단하는 건 나중으로 미루자고, 분명 나중에는 더 괜찮은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객실 문을 열어젖힌 순간.
“케르츠와 하넨이 드디어 왔어요!”
“정말 네 말이 맞았네. 이제 슬슬 올 거라고 그러더니.”
[인형은 성기사가 어디에 있든 그 위치를 알 수 있다. 케르츠의 위치를 안다면 하넨이 오는지 안 오는지 가늠하는 일도 어렵지는 않다.]
“어, 어제는 연락도 없이 안 들어와서 미안했어. 그건 그렇고……. 그 선물 상자는 대체 뭐야?”
하넨과 케르츠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요란하게 꾸며진 선물 상자와 그 위에 서서 춤을 추는 인형이었다. 세온과 아르미온은 인형이 춤추는 박자에 맞춰 박수를 쳐 주며 즐거워하는 중이었다.
“이게 다 뭡니까, 대체?”
[인형은 어제 나와 아르미온의 도움을 받아 약초를 잔뜩 따 왔다. 조금 추운 날씨라서 고생하긴 했지만, 어떤 약초는 새하얀 눈에 덮인 채 며칠을 버텨야만 싹을 틔우는 법이다.]
“그런 약초가 다 있어? 나는 처음 듣는데. 무슨 효과야?”
[신체의 움직임을 조금 더 세밀하게 조정할 수 있는 약초다. 이를테면, 꼬리라든지.]
하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인형은 마치 모든 걸 알기라도 하듯 뽐내는 자세로 춤을 마무리하더니, 펄쩍 점프해서 하넨의 품에 뛰어들어 왔다.
[표정은 감정에 영향을 받기 마련이지만, 표정이 자기 의도와는 달리 과하게 바뀌어 불편함을 느낀다면 그건 좋지 않다. 꼬리 또한 마찬가지일지도 모른다. 이 약초를 먹어 가며 꾸준히 연습한다면, 분명 하넨의 꼬리 움직임을 조절하기도 쉬워질 것이다.]
“너, 너…….”
[그리고 한 가지 말해 두고 싶은 게 있다. 독은 적당히 쓰면 약이 된다. 저주는 다른 방향으로 작용하면 기원과 축복이 된다. 하넨이 자신의 과거를 완전히 버릴 필요는 없다. 하넨이 과거 쌓았던 지식은, 분명 다른 방향으로 쓸모가 있을 것이다.]
어쩐지 속마음을 노골적으로 읽힌 듯한 기분이라 부끄러웠지만, 하넨은 피식 웃으며 인형을 꾹 누르듯 끌어안았다. 인형은 [솜이 눌리고 있다. 숨을 쉴 수가 없다.] 따위의 엉뚱한 소리를 해 대며 바둥거렸으나 하넨은 적당히 무시하며 인형을 누르고 간지럽혔다.
이것도 이것대로 나쁘지 않다. 혼자서는 너무 느리다 할지라도, 소중한 이들이 조금씩 맞춰 주는 보폭을 따라 한 걸음, 한 걸음. 그렇게 나아가다 보면 분명 꽤 괜찮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런 기대를 늘 마음에 품고 걸어갈 수만 있다면, 분명 그걸로 충분하겠지.
“이 자식아, 처음부터 이럴 거면 좀 일찍 말해 주지! 그러면 내가 어제 그 고생을 안 해도 괜찮았잖아!”
[인형은 하넨의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다. 하넨은 구체적으로 무슨 고생을 했는지 나와 아르미온과 인형에게 들려주는 편이 좋지 않을까 싶다.]
“아,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못 들은 걸로 해! 아무 일도 없었지, 케르츠? 그렇지?”
“글쎄요, 우리 마법사님이 고생을 하긴 하셨죠? 저도 엉겁결에 같이 갔다가 이런저런 사건에 휘말리는 바람에…….”
“말 맞춰 주기로 했잖아, 나쁜 자식아! 이제 와서 말 바꾸기냐!”
햇빛이 창밖에서 스며드는 여관방 안에 시끌벅적한 웃음소리가 가득 찼다. 경쾌한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