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nowy Night
도살자에게는 아직 성기사의 영광이 없고, 만들어진 어린 용사에게는 아직 이름이 없던 시절. 혼란과 회한 속을 걷던 죄인의 이야기.
* * *
본의 아니게 신의 숙주가 된 어느 겨울날, 오염되지 않은 하얀 눈이 쏟아지는 새벽. 케르츠는 인형을 가슴에 올려놓은 채 아주 먼 옛날의 꿈을 꾸었다.
신의 사랑을 받는 저 작은 언데드는 모르겠지만, 한때 세상에 내리는 눈은 검거나 붉거나 그도 아니면 탁한 갈색이었다. 이 세상에 눈에 대한 낭만을 갖는 사람 따위는 없었다. 어차피 눈은 비가 얼어붙은 결과물이고, 비든 눈이든 하늘의 오염을 닦아 내어 그 오염을 지상으로 끌어 내리는 역할밖에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비나 눈 덕분에 일시적으로 대기가 맑아질 수야 있겠지만 이 저주받은 세계에서는 그나마도 시원찮다. 잠시 걷혔나 싶던 붉은 안개는 순식간에 다시 세상을 뒤덮고, 지면에는 저주와 오염과 병균이 득실득실 뭉친 물이나 얼음만이 흘러 다닐 뿐이다. 마실 수 있기는커녕 잘못 건드렸다간 피부병에 걸리기 일쑤다. 게다가…….
<있잖아, 눈 오는 날 밖에 나가면 도살자가 잡아간대.>
<거짓말. 그런 건 우리가 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어른들이 지어낸 이야기야.>
<정말이라니까. 도살자들은 평소엔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 곳에 숨어 살다가, 눈 오는 겨울이 되면 마을에 내려와서 아이들을 잡아먹는대. 그런 날 멍청하게 바깥을 나돌아 다녔다간 말이야, 배고픈 도살자가 왁 하고 덮쳐선 아이들을 밧줄로 묶어서 끌고 간단 말이야.>
<왜 그 자리에서 잡아먹지 않고 끌고 가는 거야?>
<넌 바보니? 요리를 해야 맛있게 먹을 거 아니야! 그러니까 자기 집에 데려가는 거지!>
눈 오는 날에 대한 이런저런 뜬소문이나 옛날이야기까지 덧붙여진 탓에, 사람들은 어지간해선 눈 오는 날 바깥에 나돌아 다니지 않는다. 그리하여 눈 오는 날 도시의 거리는 섬뜩하리만치 조용하다. 사람이라곤 아무도 나오지 않는 가운데 눈만이 도시를 뒤덮는다. 차라리 비가 내린다면 소리라도 요란하련만, 아무 소리도 없이 그저 사박사박 쌓이기만 하는 검붉은 눈은 마치 참살 뒤의 현장을 보듯 섬뜩하다.
그 공허한 폭설의 한복판, 가면과 후드를 뒤집어쓴 세 명의 여행자가 도시에 발을 들였다.
“정말로 아무도 없네요. 케르츠의 이야기가 맞았어요. 눈 오는 날엔 진짜 아무도 안 돌아다니는구나…….”
“우리도 빨리 여관이든 신전이든 잡아야 해. 이 눈을 오래 맞다간 옷이 삭아서 못 쓰게 된다고. 감기에 걸릴 수도 있어.”
벌레 쫓는 향초를 주렁주렁 매단 가면에, 후드에 달린 두꺼운 얼굴 가리개까지 합쳐져 서로의 목소리는 매우 둔탁하고 희미하게 들렸다. 그러나 용사와 하넨은 개의치 않은 채 주변을 둘러보았다. 건물의 창문이란 창문은 죄다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고, 심지어 어떤 건물은 아예 판자를 못질해 문을 틀어막기까지 했다.
단순히 눈과 추위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라면 저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 터였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케르츠를 바라보았지만, 정작 케르츠는 창문 따위에 시선조차 두지 않은 채 신전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아무래도 신전에서 묵기는 힘들겠군요. 신전 꼭대기에 큼지막한 붉은색 깃발이 묶여 있어요.”
“뭐가 묶여 있긴 해? 이렇게 눈이 많이 오는데 용케 그런 게 보이는구나.”
“하넨은 저게 안 보여요? 눈이 나쁜가요?”
“……너나 케르츠의 눈이 지나치게 좋은 거거든!”
신전까지의 거리가 지나치게 먼 건 둘째 치더라도, 저녁이라 어둑어둑하고 폭설로 시야가 거의 막히다시피 한 상황에서 깃발이 보인다는 건 인간의 시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시피 한 일이었다. 케르츠와 용사는 일반인을 초월하는 신체를 가지고 있지만 하넨의 시력은 보통 사람 수준이니 안 보일 만도 하다.
“너 말이야, 자기 시력이 좋다고 다른 사람더러 눈이 나쁘다느니 하는 식으로 말하면 안 돼. 설령 진짜로 눈이 나쁘다 쳐도 그런 말은 예의가 아니라고.”
“그런가요? 미안해요. 저는 예의에 대해 잘 몰라요. 앞으로는 조심할게요.”
하넨은 어이가 없다는 듯 투덜거렸지만 용사는 그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생후 24개월, 그러니까 태어난 지 고작 2년밖에 안 되는 생물이란 점을 감안하면 사실 이만해도 꽤 예의 바른 편이었다. 하넨 또한 그 점을 알았기에 용사를 더 혼내지는 않았고, 케르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말을 이어 갔다.
“아무튼, 저 깃발이 있다는 건 이 마을의 신전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아마 저 신전에는 신관도 없고 안쪽은 아예 폐허에 가까울 겁니다.”
“그럼 여관을 찾아야겠네. 신전도 망가진 도시에 여관이라고 제대로 갖춰져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찾아는 봐야지요. 정 안 되면 사람이 떠난 폐가라도 뒤져 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케르츠의 가면 안쪽에서 하얀 김이 흘러나왔다. 난생 처음 방문하는 도시에, 폭설 탓에 오래 돌아다니면 오래 돌아다닐수록 몸에 안 좋다. 체온이 내려가는 것도 곤란하지만 진짜 문제는 벌써 발목까지 쌓인 눈이다. 케르츠는 눈이 머금고 있는 붉은 [저주] 때문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우리 엄마가 봤어. 어느 겨울날, 웬 이상한 여자가 어린애의 목에 줄을 감고는 질질 끌고 가더란 말이야. 그 당시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도살자였대.>
<그게 도살자인 줄은 어떻게 알아?>
<그, 그건……. 아마 허리에 톱을 차고 있었으니까 도살자 아니었을까?>
<어쩌면 톱을 들고 다니는 여행자였을지도 모르잖아.>
<아, 아니야! 그런 날씨에 톱을 차고 어린애를 질질 끌고 갈 만한 사람이 도살자 아니면 어디 있겠어? 설령 도살자가 아니라 해도 이상한 사람인 건 확실해!>
<그런가? 듣고 보니 그렇기는 하네.>
붉은 안개는 인간의 정신을 좀먹고 나쁜 기억을 회상하도록 부추긴다. 이 오염된 세상에 내려진 수많은 저주 중 하나다. 그리고 그 안개를 한껏 머금고 지상에 내려온 눈은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의 정신을 이상하게 만든다.
[데 라누, 도느메리아, 하타엔.]
그는 검붉은 눈을 짓이겨 밟으며 걸었다. 먼 옛날, 그가 아직 도살자이기 전에도 이런 식으로 눈 오는 길을 걸은 적이 있었다. 물론 지금이나 그때나 혼자는 아니었다. 지금은 흑탑의 마법사나 신전이 빚어 만든 용사와 함께 걷는 중이지만, 그 시절의 케르츠는 어머니와 함께 길을 걷곤 했다. 가끔은 정신이 나간 채 케르츠에게 목줄을 채워 세상을 떠돌고, 가끔은 제정신으로 케르츠를 소중히 안은 채 걷던 선대 [케르츠] 말이다.
<빨리 가자, 핏덩어리야. 쌓인 눈을 들여다보지 말고 차라리 그 손으로 얼굴을 가려. 안 그러면 나쁜 생각을 하고 말 게다.>
<하지만 케르츠, 얼굴을 가리면 앞이 안 보이는걸요.>
<멍청한 녀석 같으니라고. 목줄이 채워져 있는데 앞이 보이든 안 보이든 무슨 상관이야. 추하게 넘어지지나 마라.>
그 당시만 해도 [케르츠]는 어머니가 가진 이름이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자기 자식을 ‘케르츠’라고 부르는 대신 ‘핏덩어리’라고 불렀다. 꼭 머리카락 색이 붉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고, 어린 케르츠가 여기 부딪치고 저기 나동그라지는 바람에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탓도 있었다. 얼굴이며 무릎이며 팔꿈치며 성한 곳 없이 늘 붉은 딱지가 져 있었으므로 핏덩어리라는 호칭이 묘하게 잘 어울리긴 했다.
멍청한 핏덩어리, 둔하고 눈치 없는 핏덩어리. 어린 케르츠가 유일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던 대상인 어머니는 늘 그런 식의 말을 툭툭 던지곤 했다. 물론 케르츠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미련한 케르츠, 쓰레기 같은 케르츠, 어머니가 한탄하듯 내뱉는 자기 비하 또한 귀에 딱지가 얹히도록 들었기 때문이다. 그저 어머니의 말버릇이려니 했다.
다만 뒤늦게 생각해 보니, ‘핏덩어리’에 대한 욕이든 ‘케르츠’에 대한 욕이든 결과적으로는 전부 지금의 케르츠가 떠안은 셈이었다. 어머니는 결국 자기 비하와 폭력성과 선조의 업만을 남긴 채 죽었고, 케르츠는 그 사람의 이름과 갑옷과 미련과 한탄을 고스란히 물려받았으니까.
어머니와 같이 눈길을 걷던 어린 시절이 계속 그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너무 커서 자꾸만 발을 헛디디게 만드는 장화, 맨발로 눈을 턱턱 밟는 어머니, 목을 콱 조여 오는 목줄과 자꾸만 밧줄의 쓸리는 목 근처 피부의 통증이.
“데 라누, 도느메리아, 하타엔…….”
“케르츠, 괜찮아요?”
“엔라트, 아이, 흐루민, 데, 하레미아탄.”
“야, 눈 때문에 힘든 건 알겠는데 여관 다 왔어. 그런 기도문을 외우고 있으면 저 안의 사람들을 겁을 먹는다고.”
케르츠는 그제야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용사와 하넨이 난처한 목소리로 그를 부르고 있었다. 심지어 케르츠는 자기도 모르는 새 기도문까지 중얼거렸던 모양이다. 심지어 그의 인면철 갑옷까지 기도문을 따라 흥얼거리고 있어서, 보고 듣는 사람의 입장에선 꽤나 거북할 수밖에 없는 꼴이었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케르츠의 정신은 밑바닥이 지나치게 좁아 넘어지기 쉬운 잔처럼 언제나 위태로웠으며, 이렇게 기도문이라도 외워야 조금은 마음이 진정되곤 하는 것을. 케르츠는 아무래도 조만간 용사에게 영혼의 조각을 조금 받아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벌써 8개월째 미치지 않고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3, 4개월에 한 차례씩 광증에 휩싸여 이성을 잃곤 했으니 최장 기록인 셈이었다. 용사가 사념을 정화하면서 생성해 내는 영혼 조각 덕분에 광증을 몰아낼 수는 있었으나 심리적으로는 언제나 불안정했다. 원래대로라면 지금쯤 미쳐야 하는데, 혹시 이미 미쳐 있으나 자각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이 자꾸만 떠올라서…….
“알겠습니다. 어서 들어가지요.”
가면이 표정을 감춰 주어 목소리만 연기하면 되었다. 케르츠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고개를 들었다. 하넨의 말대로 코앞에 여관이 있었다.
신전이 철수할 정도로 영락한 도시라면 여관도 제 기능을 못하거나 문을 닫기 일쑤인데, 다행히도 이 도시는 그 지경까지 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다소 허름하긴 하지만 간판도 제대로 걸려 있고 불 또한 켜진 상태였다.
케르츠는 곧장 나서서 여관 문을 두드렸다. 이런 일은 원래 케르츠의 담당이었다. 하넨은 평생을 흑탑에서만 살아온지라 이런 류의 잡일에 익숙지 않고, 용사야 워낙 나이가 어린 터라 사람 대하는 일에 서투르니 결국 남는 건 케르츠뿐이다.
물론 ‘담당’이라곤 해도 별로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저 여관의 주인이나 직원에게 방을 빌리고, 경우에 따라선 목욕물이나 식사도 제공받고 그에 따르는 대가만 지불하면 되는 일이니까.
하지만.
“저, 죄송하지만 오늘은 손님을 받지 않아요.”
마지못해 빼꼼 열린 여관 문 안쪽에서, 예상치도 못한 거절의 말이 돌아온 게 문제였다.
“뭐라고요? 잠깐, 손님을 안 받는다면 저 안의 사람들은 다 뭡니까? 설마 여긴 여관이 아니에요?”
“여관도 맞고, 저 안의 사람들이 손님인 것도 맞아요. 하지만 당신들은……. 당신들은 해가 지고 나서 이 도시에 들어왔지요? 그러면 안 돼요. 나가 주세요.”
아무리 케르츠라 해도 이런 사태를 예상하지는 못했다. 여관 주인의 태도에는 곤란함과 난처함이 노골적으로 어려 있었지만, 지금 곤란하고 난처한 건 오히려 케르츠 쪽이었다. 해가 지고 나서 도시에 들어왔으니 재워 줄 수 없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인가? 차라리 방이 없다는 식으로 말한다면 이해라도 할 텐데.
“웃기지도 않는군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이런 날씨에 여행객을 내쫓는단 말입니까? 그저 우리가 해가 진 후 들어왔다는 이유만으로?”
“미안해요. 하지만 어쩔 수가 없어요. 아마 다른 집에 찾아가도 다들 똑같은 답을 할 겁니다. 당신들은 이 도시에서 묵을 수 없어요.”
“우리가 신전에 간대도 마찬가지입니까?”
“신전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아마 거기 가신다면 후회할 거요.”
여관 주인도 이 날씨에 사람을 쫓아내는 건 마뜩잖았는지 조금 머뭇거렸지만, 그래도 케르츠 일행을 들여보내 줄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용사와 하넨은 케르츠가 상황을 설명해 주리라고 믿는 듯 이쪽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으나―곤란하게도 케르츠 또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없었다. 이미 주인이 없어 붉은 깃발만 나부끼는 신전에 들어가 자는 것조차 안 되다니, 대체 무슨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 저런단 말인가?
아니, 애초에 저 사람들의 이유 따위가 중요하기나 한가? 케르츠는 머릿속이 과열되어 엉뚱한 생각을 뱉어 내는 걸 보며 가만히 숨을 들이쉬었다. 그냥, 적당히 본보기 삼아서 몇 놈쯤 목을 꺾으면. 아니지. 여관 주인이 없어지면 여관에 이래라 저래라 할 사람도 없어지니, 당장 눈앞의 사람을.
“하지 마.”
“예? 뭘 말입니까.”
“너 지난번에도 여관방이 부족하다고 난동 부렸잖아. 용사 녀석이 그때 일로 얼마나 놀랐는지 기억은 하지?”
언제 그랬더라, 케르츠는 하넨의 말에 머릿속이 서서히 식는 걸 느끼며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듣고 보니 그런 일도 있었던 것 같다. 방이 다 차서 더 이상 손님을 받을 수 없다고 여관 주인이 우겨 대기에, 무심코 ‘세 명만 없어지면 우리가 머물 방이 생기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손을 움직였던가.
결과적으로는 세 명만으로 끝나지 않았고, 분노한 여관 사람들을 전부 살해하는 꼴이 되어 하넨에게 엄청나게 혼났던 기억이 겨우 떠올랐다. 충격과 혼란에 가득 찬 채 자신을 바라보던 용사의 얼굴까지 떠올리자 케르츠는 완전히 차분해졌다.
아무래도 이번에는 그러면 안 될 것 같다. 장차 미궁을 정화해야 할 용사의 정신에 흙탕물을 튀기는 짓을 해선 안 되니까. 게다가, 꼭 그 문제가 아니더라도 조금 신경 쓰이는 점이 있었다. 그러니까…….
“어째서예요?”
“네?”
“왜 해가 진 다음에 온 여행자들은 못 받아요?”
케르츠와 하넨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옆에서 고개를 갸웃하고만 있던 용사가 어느새 여관 주인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그랬다. 확실히 저건 꽤 신경 쓰이는 문제였다. 물론 세상에는 외지인을 배척하는 도시들도 많고, 그들 중 몇몇은 까다로운 조건을 붙여 그 조건에 부합하지 않는 여행자들을 쫓아내곤 하지만, 이렇게 이상한 조건을 붙여 가며 여행자를 쫓아내는 도시는 처음 보았다. 심지어 번듯한 여관까지 있는데도.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우리 마을의 예언자가 좋지 않은 예언을 해서 그래요.”
“예언? 예언이 뭔가요?”
“네? 예언이 뭐냐니요……?”
“예언이란 미래의 사건을 예측해 내는 일입니다, 용사님. 그런데 예언이라고요? 대체 무슨 예언이길래 이러는 겁니까? 이 폭설 속에서 사람을 쫓아낼 작정이라면 그 정도는 알려 줘도 괜찮지 않나 싶은데요.”
여관 주인이 용사를 수상쩍은 시선으로 보려던 찰나 케르츠가 재빨리 끼어들어 주의를 돌렸다. 물론 그는 예언 따위를 믿지 않는다. 예언이란 아무리 좋게 말해 보았자 아주 정교한 형태의 추론에 불과하고, 대부분의 경우 상상이나 사기나 기만에 불과하므로.
다만 케르츠가 관심을 갖는 건 그 예언이 어쩌다가 사람들의 신뢰를 얻었느냐 하는 점이다. 예언 자체는 망상으로부터 나왔다 치더라도, 사람들이 그 예언을 믿는 데는 분명 원인이 있을 것이다. 그 원인을 어떤 식으로든 해소한다면, 이 눈 오는 밤에 도시 바깥을 전전하지 않고 무사히 여관에서 잘 수 있을지도…….
“오늘 도살자가 이 도시에 온대요.”
“……예?”
“해가 진 이후에 도살자가 올 것이다. 절대로 그 사람을 이 도시에서 묵게 해 주면 안 된다. 그게 예언자의 이야기였어요. 왜, 그런 전설도 있잖아요, 눈 오는 날은 도살자가 바깥을 나돌아 다니며 아이들을 잡아간다는…….”
용사와 하넨의 시선이 다시 한 번 케르츠를 향했다. 케르츠는 대체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그리고―어쩌면 그 예언자라는 작자가 꽤 실력이 괜찮은 건 아닐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이제 와서 케르츠의 정체를 밝혔다간 정말로 쫓겨날 게 분명했으므로, 세 사람은 자신들의 신분을 과대 포장(?)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이거 보여? 용사의 검에 새겨진 이 문양. 당신도 상식이란 게 있다면 신전의 문양 정도는 알겠지. 보다시피 우리는 신전에서 왔어. 도살자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사람들이란 말씀이야.”
신전에서 왔다는 말이 아예 틀려먹지는 않았으므로, 그 말을 내뱉는 하넨의 얼굴에는 한 점 양심의 가책조차 없어 보였다. 물론 그 이야기를 듣는 케르츠의 입장에서야 조금 씁쓸했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런 걸 일일이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시, 신전에서 오셨다면 도살자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애초에 당신들, 도살자라는 게 뭔지 알기는 해? 도살자는 그냥 딱 보면 안다고. 주변에 막 검은 안개 같은 것도 어려 있고, 혼자서 막 이상한 기도문 같은 것도 외우고. 지금의 우리처럼 평범한 꼬락서니를 하고 있지 않단 말이야.”
“그래도, 분명 예언자가 말하기로는 그렇지만도 않다고.”
물론 이쯤 되면 케르츠도 내심 울컥했지만, 하넨의 말에 딱히 틀린 부분이 없었으므로 묵묵히 참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여관 주인 또한 하넨의 말에 내심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검붉은 눈발이 휘몰아쳐 앞이 거의 안 보일 정도인 이 상황에서 사람을 도시 밖으로 쫓아낸다는 건 죽으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아무리 절박한 상황이라고는 해도 죄책감이 없지야 않겠지.
“아까부터 자꾸 예언자라는 사람을 언급하는데, 애초에 우리가 그자를 만나 볼 수는 없겠습니까? 이 도시에 도살자가 온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는지, 왜 도살자를 들여선 안 된다는 식으로 말했는지 신경 쓰이는군요.”
“무슨 말씀이십니까? 도살자가 온다는 건 예지력으로 아셨겠지요. 게다가 도살자는 아이들을 납치하고 사람을 죽이는 위협적인 존재인데, 그런 존재를 안 들이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닙니까?”
“아니요. 당연하지 않습니다. 일단 도살자는 어린아이를 납치하지도 않을뿐더러…….”
“……?”
“……만약 이 도시에 도살자가 쳐들어온다면, 당신들이 해야 할 일은 문을 걸어 잠그고 도살자를 들이지 않는 게 아니라 당장 이 도시를 버리고 떠나는 일일 텐데요.”
그런 소리까지 해서 뭐 해, 하넨이 난처한 표정으로 입을 뻥긋거렸지만 케르츠는 꽤 진지했다. [도살자]는 어중간하게 숨거나 알량한 걸쇠 따위를 걸어 잠근다고 막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특히 광증에 사로잡혀 정신이 나간 도살자라면 더욱 그렇다. 이성을 완전히 잃은 채 무차별적으로 적의를 드러내고 생물을 공격하는 도살자는, 문이며 벽 따위를 쇠톱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때려 부수고 그 안에 숨은 자들을 끌어낸다. 마치 조개의 입을 열거나 게의 껍데기를 깨는 것처럼 손쉽게.
그러니, 설령 예언자가 정말로 미래를 내다본다 하더라도 그 미래는 반쪽짜리에 불과한 셈이다. 케르츠는 그 점이 못내 마음에 걸려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그 ‘예언자’라는 작자는 미래를 보긴 보았는지, 만약 미래를 본 게 사실이라면 어째서 ‘도살자를 들이면 안 된다’라는 식의 어중간한 경고만을 던졌는지 꽤나 신경이 쓰였다.
“그러니, 괜찮다면 그 예언자라는 사람을 만날 방법을 가르쳐 주시지 않겠습니까? 어쩌면 어떤 오해가 있는 걸지도 몰라요.”
“오해라니, 대체 당신이 말하는 오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예언자를 만나기는 어렵지 않을 거요.”
“그거 다행이군요.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습니까?”
거기까지 말하던 케르츠는, 용사가 낯선 소리를 들은 강아지처럼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는 모습을 발견했다. 케르츠는 청각을 곤두세운 채 용사가 고개를 돌린 방향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누가 오긴 오고 있었다. 저벅, 저벅, 폭설에 발걸음이 느려져 있지만 그래도 확실히 이쪽을 향하는 발걸음.
“아마 곧 만날 수 있을 거요. 슬슬 온다고 들었으니까.”
발소리는 점점 커졌고, 교차로 왼편에서 눈보라에 짓눌리다시피 한 인영이 휘청거리며 나타났다. 저 인영의 정체가 예언자라는 사실을 추측하기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멀리서 보더라도 한눈에 알 만큼 작고 땅딸막한 이였다. 날씨가 제법 추워 옷을 여러 겹 껴입었는데도 홀쭉한 꼬락서니를 보면 실제로도 제법 깡마른 체구가 아닐까 싶었다. 처음에는 느릿느릿 힘없이 다가오던 인영은, 케르츠 일행이 여관 앞에 서 있는 걸 목격한 탓인지 점점 걸음걸이가 급하고 빨라지기 시작했다.
“저 사람이야, 예언자가?”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요.”
하넨의 질문에 다소 무성의하게 답하면서 케르츠는 인영을 바라보았다. 이제 인영은 거의 뛰다시피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과연 저자는 무슨 근거로 그런 예언을 했는지, 만약 그 예언이 엉터리가 아니라 진짜라면 어떻게 해야 할지…….
‘혹시 그건가? 마을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 내가 반쯤 돌아서 마을 사람들을 다 죽여 버릴 예정이라든지. 결과적으로는 내가 마을 사람들을 죽일 예정이니까, 예언자는 그걸 막기 위해 내가 이 마을에 묵는 걸 반대했고, 또 나는 그 예언 때문에 난동을 부리기로 되어 있고…….’
생각하다 보니 뭔가 앞뒤가 안 맞았다. 먼 훗날 케르츠는 머리에 인형을 얹은 언데드 상인에게 ‘자기실현적 예언’이라는 개념을 배우겠지만, 그 개념을 모르는 상태의 케르츠는 그 가설이 꽤 모순적이라고만 여길 뿐이었다.
아니, 그럴 거면 차라리 예언을 포기하고 케르츠 일행을 받아들이는 쪽이 낫겠지. 용사와 하넨을 데리고 다니는 상태의 케르츠는 평소보다 훨씬 더 폭력성을 억누르는 상태여서, 정말 어지간히 몰리지 않는 이상 저들을 해코지하지는 않을 텐데. 그렇다면 뭘까. 어째서 예언자는 이 도시에 도살자를 묵게 해선 안 된다고 예언했을까.
아니, 잠시만. 그 전에 하나 신경 쓰이는 점이 있다. 그러니까 그 도살자라는 게…….
“아저씨, 아저씨! 그 사람들 누구예요?!”
높고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케르츠의 생각이 잠시 끊겼다. 변성기가 오기 전의 소년인지, 여성인지 분간이 안 가는 중성적인 음색. 물론 둘 중 어느 쪽도 아닐 가능성 또한 있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문제에 집착할 때가 아니다. 가면과 후드로 얼굴이 가려져 있지만 목소리만으로도 당혹감과 경악을 읽어 낼 수 있었다.
헐레벌떡 달음박질을 쳐 여관 앞까지 당도한 예언자는, 분명 여관 주인으로 보이는 ‘아저씨’를 불렀지만 시선은 줄곧 용사 일행에게 못 박혀 있었다. 거기까지는 이해가 가지만 한 가지 의아한 점이 있었다. 분명 이 사람이야말로 예언자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누구냐니?
“해가 지고 나서 이 도시에 온 손님이야. 네가 부탁한 대로 이 도시에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식으로 엄포를 놓기는 했는데, 신전에서 왔다는 사람들을 이 날씨에 쫓아내기도 난감하구나.”
“손님이요? 잠깐, 잠깐만요. 아직 달이 성벽 위로 올라오지도 않았는데 이 도시에 누가 올 리가 없어요. 이럴 리가 없는데.”
대화가 오가는 꼴을 보아하니 이 사람이야말로 예언자가 확실해 보였지만, 어쩐지 이자에게선 미래를 아는 자 특유의 확신이나 단호함 따위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차라리 일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아 당황한 어린아이 같은 느낌이라면 더 어울릴까.
“역시 이 사람들은 도살자가 아닌가? 하지만 네가 그랬잖냐. 정신이 나가지 않았을 때의 도살자는 보통 사람과 다를 바가 없어서, 겉모습으론 분간할 수 없으니 아무튼 다 내쫓으라고.”
“네, 제가 그렇게 말했죠. 말하기는 했는데…….”
의외로 이런 부분에서는 정확히 알고 있구나, 멍하니 생각하던 케르츠는 아까 하다가 끊겼던 생각을 문득 다시 떠올렸다. 그러니까 저 예언자는, 분명 ‘도살자’라고 애매하게 뭉뚱그렸을 뿐 ‘케르츠’라는 개인을 지정한 건 아니었다. 그렇다면 또 다른 가설 하나가 성립할 수 있다. 그러니까―애초에 그 [도살자]가 여기 있는 케르츠라는 보장이 어디 있지?
“아무튼, 도살자가 지금 오지는 않을 거라고요! 분명 조금 더 늦게 들이닥칠 거라 생각해서 지금 여기로 온 건데!”
케르츠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생각해 보면 그도 그렇다. 구체적으로 어디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세상에는 케르츠 말고도 서른한 명의 도살자가 존재한다. 물론 케르츠는 태어나서 한 번도 다른 도살자와 마주친 적이 없지만, 어쩌다가 우연히 다른 도살자와 만날 기회가 생겼는데 그게 하필 오늘이라 쳐도 그렇게까지 부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거기까지 계산이 끝난 케르츠는 곧바로 예언자의 멱살을 휘어잡았다. 이렇다 할 악감정이야 없지만, 예언자의 키가 워낙 작아서 이렇게 하는 편이 눈을 마주하기 쉬웠다.
“뭐, 무슨 짓이야, 갑자기……!”
“그러니까, 당신이 말하는 ‘도살자’라는 사람은 몇 시간쯤 지나야 온다 이거죠?”
저거 또 시작이네. 마치 한탄하듯 중얼거리며 고개를 젓는 하넨과 멀뚱히 고개를 갸웃하는 용사를 모른 척한 채, 케르츠는 예언자를 들어 올리고서 가면 너머의 눈을 노려보았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놀라고 당황했는지, 예언자는 목매달아 죽기 직전의 사람처럼 아등바등 다리를 흔들며 발버둥 쳤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도시에 못 머물 것도 없겠군요. 안 그렇습니까?”
“아니, 큭, 젠장, 네놈들, 네놈들은 뭐야. 분명 너희 같은 녀석들은 처음 보는데!”
“실제로 처음 보는 사이 아닙니까? 그게 뭐 어쨌다는 건지 모르겠군요. 하여튼 말입니다, 도살자가 이 도시에 쳐들어와서 구체적으로 무슨 짓을 벌일지가 좀 궁금한데 알려 줄 수 있겠어요? 내가 알기로는, 제정신인 도살자는 물건이나 좀 사고 도시를 떠나며 제정신이 아닌 도살자는 문을 걸어 잠그든 말든 다 때려 부수고 모든 걸 죽여 버리는데. 이 도시에 방문하는 도살자는 어느 쪽입니까?”
가면 너머의 눈동자가 꽤나 크게 동요했다. 케르츠는 혹여나 그 눈빛으로 진실과 거짓을 가릴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제법 주의 깊게 상대를 살폈다. 아직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다. 저이가 케르츠 아닌 다른 누군가를 쫓아내고 싶어 도살자의 핑계를 대는지, 아니면 정말 이 도시에 도살자가 쳐들어와 이 도시 전체를 망가뜨릴 운명인지…….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말하지. 이야기가 꽤 길고 복잡하니까.”
다만 케르츠는 남의 감정을 읽는 데 서툴러, 눈빛만으로 타인의 감정을 읽어 내는 재주를 부릴 수는 없었다. 예언자는 갑작스레 자기 멱살을 휘어잡는 이방인에게서 당혹감과 공포만을 느낄 뿐, 자기 예언의 참이나 거짓 따위를 고민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상대에게서 만족스러운 반응을 얻어 냈으니 그걸로 되었다. 케르츠가 멱살을 놓아주자, 예언자는 비틀거리며 여관 안으로 들어갔고 여관 주인은 떨떠름하게나마 케르츠와 일행들을 들여보내 주었다. 당장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성과였다.
* * *
허름한 외관과는 달리 여관 내부는 생각보다 넓고 깔끔했다. 바닥은 깨끗이 청소되었으며 걸을 때 삐걱거리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으며, 술집을 겸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 로비에는 테이블마다 음식과 술이 넉넉하게 올라가 있었다. 빈자리 하나 내지 않은 채 빼곡하게 들어찬 사람들은 이방인에 대한 경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케르츠와 일행을 흘끔거렸다.
이런 상황에서 이방인을 경계하지 않는 편이 더 이상할 테니 시선쯤이야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지만, 케르츠는 사람들의 깨끗한 낯짝과 사방에 진동하는 음식 냄새가 조금 더 신경 쓰였다. 이미 거의 다 무너져 버린 이 세계에서는, 어지간히 운 좋은 곳이 아니고서야 볼 수 없는 모습.
신전조차 포기하고 떠날 만큼 영락한 도시 주제에 기분 나쁠 만큼의 풍요로움이었다. 어쩌면 이 도시에는 뭔가 있는 게 아닐까. 케르츠는 미심쩍음을 마음 한구석에 간직한 채 하넨을 흘끔 바라보았다. 하넨 또한 케르츠와 비슷한 감상을 느꼈는지 떨떠름하게 시선을 교환했다. 아마 조금이라도 감이 좋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여관에서 이상함을 느낄 수밖에 없을 터였다.
물론 용사도 마찬가지였는데, 안타깝게도 용사는 감이 좋은 대신 눈치가 없어 그걸 또 예언자에게 물어보았다.
“이 도시는 다른 도시와 다르네요? 이런 도시는 처음 보았어요.”
“그래,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지. 사정이 복잡하긴 하지만.”
예언자는 난처한 듯 머리만 긁적거리며 말끝을 얼버무렸다. 그는 세 사람을 데리고 가장 안쪽의 방으로 들어갔고, 혹시라도 문밖이나 복도에서 엿듣는 사람이 있는지 몇 차례씩이나 살핀 후 문을 걸어 잠갔다. 아무래도 여관 주인이나 손님들이 이야기를 엿듣지 않을까 걱정하는 모양이었다.
‘이 도시 사람들에게 들켜선 안 될 이야기인가?’
어쩌면 예언과 관련된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추측하던 케르츠는 문득 커튼이 쳐지지 않은 창가 쪽을 바라봤다. 봐서 좋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음을 알면서도, 어째서인지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검붉은 눈발에만 시선이 갔다. 마치 눈의 저주에 사로잡히기라도 한 것처럼.
마지막까지 굴종하고 포기하지 않도록 하소서, 부디 나를 홀로 두지 마소서……. 맥락을 알 수 없는 기도문이 자꾸만 혀끝을 맴돌았다. 다행히도 지금의 케르츠는 기도문을 입 밖에 내지 않을 만큼의 자제심 정도는 갖추었고, 그는 가볍게 자기 혀를 깨물고는 예언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후드를 벗은 예언자는 초조한 낯으로 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당신은 정말 예언자이긴 한 겁니까? 보아하니 우리가 이 도시에 오리라는 사실까지는 예언해 내지 못한 모양인데.”
“……그래, 솔직히 예언 못 했어. 애초에 나는 진짜 예언자도 아니고. 하지만, 그래도 나는 오늘 밤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어. 이건 진짜야.”
예언자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고르는 동안, 용사는 화로 위에서 달궈지던 찻주전자를 가져와 제멋대로 차를 따랐다. 다만 그는 어째서인지 차를 한 모금 맛보고는 이상한 표정을 지으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슬쩍 맛을 보니 차의 맛에는 별 이상이 없고 뭐가 들어 있는 것 같지도 않았지만 케르츠는 차를 마시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예언자도 아니면서 어떻게 미래의 일을 안다는 거지? 혹시 오늘 밤 도살자가 온다는 소식을 누구에게 듣기라도 했나?”
하넨은 아무렇지도 않게 차를 홀짝거리며 예언자에게 질문했고, 예언자는 고개를 저었다. 하긴 그렇게 단순한 방법으로 알았다면 굳이 예언이라는 식의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렇다면 저자는 어떻게 오늘 밤의 일을 알까? 보아하니 단순한 추측이라기엔 꽤 확신을 가지고 있는 모양인데.
“그렇다면 몇 가지 신경 쓰이는 점이 생깁니다만. 우선, 당신이 진짜 예언자도 아니라면 대체 어떻게 지금까지 예언자 행세를 해 온 겁니까? 그리고 이 도시는 거의 몰락한 듯한 모양새인데도 여관의 사람들은 배부르고 풍족해 보이는데, 이건 대체 어떻게 된 거죠? 혹시 당신의 소행입니까?”
“둘 다 같은 맥락에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이야.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믿을지 모르겠는데…….”
“믿든 말든 우리가 판단할 문제니 일단 설명이나 하세요. 요즘 같은 세상에서 못 믿을 일은 또 어디 있답니까.”
자신이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해 미궁으로 향하는 도살자라는 사실을 밝힌다면 저 예언자는 믿기나 할까? 케르츠는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예언자를 바라보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예언자는 결국 마음을 다잡았는지 입을 열었다. 그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는 …….
“이 도시는, 멸망 직전의 한 달을 반복하고 있어.”
“……뭐라고요?”
“믿기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사실이야. 우리 ‘눈의 도시’는 이미 내가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81번을 멸망했어. 그리고 오늘 밤은, 이 도시가 82번째로 멸망하는 날이야.”
하넨과 케르츠는 경악한 낯으로 눈을 부릅떴다. 예언자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리 없는 용사는, 테이블 위 접시에 담긴 빵의 냄새를 킁킁 맡다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내려놓을 뿐이었다.
* * *
가짜 예언자, 아니, 사실은 그저 평범한 마법사에 불과한 데르사의 설명에 따르면 어째서인지 이 도시는 멸망하지도 살아남지도 못한 어중간한 상태를 꾸준히 반복하고 있다는 모양이었다.
“해가 완전히 저물고 사방이 어두워질 때가 되면 이 도시에 도살자가 찾아와. 그 도살자는 겉보기엔 멀쩡해 보이고, 보통 사람처럼 평범하게 돈을 내고 묵으려 하니까 아무도 그게 도살자인 줄 몰라. 그자가 갑자기 정체불명의 기도문을 외우며 사람을 죽이려 들기 전까지는.”
늘 허공을 떠다니는 붉은 안개보다도 두렵고, 하늘에 흩날리는 검붉은 눈발보다도 검은, 도살자의 몸을 휘감은 새까만 안개. 도살자는 자유자재로 형태와 크기가 변하는 쇠톱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사람들을 죽인다. 왜 죽이는지, 어떻게 하면 멈출 것인지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채. 애초에 주변 사람들의 말을 알아듣기나 하는지 의심될 정도로 비이성적으로…….
데르사의 묘사를 들은 케르츠는 확신했다. 그건 분명 진짜 도살자라고. 다만 왜 도살자가 하필 그 시점에 이 도시로 들어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원래 도살자들은 3~4개월 동안 광증에 사로잡혀 있다가 1개월 동안 제정신을 차리고, 그 1개월이 지나면 또 광증에 휩싸이는 식의 주기에 따라 움직이는데, 광증의 주기가 다가오기 직전에는 어지간해선 사람이 없는 곳으로 이동하려 들기 때문이다.
어쩌면 불가피한 사정 때문에 자신의 광증 주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게 아닐까? 케르츠는 막연히 그렇게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인면철 갑옷의 힘을 너무 많이 쓰거나 감정이 지나치게 격앙될 경우 이성은 깎여 나가고 광증이 찾아오는 주기 또한 빨라진다. 경험이 적은 도살자가 자신의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도시에서 광증에 휩싸였다면 아예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가끔은 내가 맨 처음으로 죽기도 해. 가끔은 맨 마지막에 죽기도 하고. 나도 이 일을 여러 번 겪으면서 별 짓거리를 다 시도해 보았으니까. 하지만 말이야, 몇 번을 해도 변하지 않는 건……. 이 도시는 도살자에 의해 멸망당하고, 다음 날 아침이 오면 정확히 모든 게 한 달 전으로 돌아가 있단 거야.”
“그러니까 네 말은, 이 도시가 시간의 흐름으로부터 완전히 이탈해 있단 거야? 그게 말이 되기나 하는 소리냐고!”
“나도 몰라! 우리 도시가 왜 이러는지 알면 내가 진작에 고쳤겠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 일이 있다면, 데르사가 이 원인 모를 멸망의 반복 속에서 유일하게 기억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대체 이 일이 왜 일어나는지, 어떻게 하면 자신이 태어난 이 도시의 멸망을 막을 수 있을지 알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그 과정에서 자기 말의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예언자 신세도 좀 하고, 미래를 알지 못한다면 얻을 수 없는 정보들을 공유하며 인망을 쌓았다. 그 과정에서 운 좋게 일이 잘 풀려서 겨울치고는 식량도 꽤 많이 얻었고, 마을도 꽤나 부유해졌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고작 한 달 가지고 그게 가능한가? 게다가, 이 정도로 윤택한 상황이라면 차라리 도시의 사람들과 함께 어디 도망가 있는 편이 나을 텐데.’
케르츠는 용사가 냄새만 맡고 내려놓은 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속살이 새하얗고 고소한 냄새가 나는 걸 보니 분명 꽤나 고급스러운 음식이었다. 이 정도의 음식을 당연하다는 듯 객실에 놓아둘 정도라면 식량이 부족하지는 않을 터. 다른 도시에 도망쳐 며칠쯤 버티다 돌아오면 도살자도 자기 갈 길을 가지 않겠는가?
여러모로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으나 케르츠는 일단 언급하지 않은 채 입을 다물었다. 아직 데르사의 설명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나는 어떻게든 이 도시에 찾아올 재앙을 막아 보고 싶어.”
“하지만 너무 어설픈 거 아니야? 그저 도살자를 안에 들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사태가 순순히 해결될 리는 없잖아. 도살자란 녀석들은 제정신일 때도 은근히 난폭한 구석이 있어서, 이런 식으로 어설프게 문을 닫아걸면 더 화를 내면서 모두를 때려죽일 텐데.”
워낙에 전적이 화려한 터라 케르츠는 아무 말도 못 한 채로 쓴웃음만 지었고, 데르사는 다소 긴장한 듯한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검을 끌어안은 채 무릎을 꿇은 기사의 모양이 조각된 돌. 용사는 그게 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지만, 하넨과 케르츠는 눈을 가늘게 뜬 채 그 돌을 바라보았다.
“묘비석이군요.”
“정확히는 개량한 형태의 묘비석이야. 원래보다 훨씬 더 효과를 증폭시킨……. 과연, 80번이 넘도록 마지막 한 달을 반복하면서 놀기만 하지는 않았군?”
두 사람이 칭찬하자 데르사의 얼굴빛에 희미한 생기가 돌았다. 그러니까, 이 야매 예언자가 만든 ‘묘비석’은 원래 황야에서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한 1인용 마법 도구다. 한밤중에 덮쳐 오는 강도를 대비하거나 무의미하게 세상을 떠도는 사념들의 공격을 피하는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이냐면…….
“묘비석? 그게 뭔가요, 케르츠?”
“간단하게 말하자면 죽은 척하는 마법 도구입니다. 다른 이들로 하여금 우리가 죽었다고 인식하게끔 하는 물건이지요. 저희야 인면철 갑옷의 주술을 이용해 밤을 보냈으니 쓸 일이 없었지만, 원래는 황야에서 꽤나 자주 쓰입니다.”
“그렇구나. 하지만 여기는 황야가 아니라 도시잖아요?”
“그래. 원래 도시에서 쓰는 물건은 아니지만, 도시에서든 황야에서든 피해야 할 대상이 있다면 유용해. 그리고 이 얼치기 예언자는 지금…….”
용사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지만, 하넨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는 데르사의 계획에 꽤 흥미가 있는 모양이었는데, 확실히 그도 그럴 만하다.
“도시 사람들 전체를 ‘죽은 사람’으로 위장시켜서, 멸망의 밤을 돌파해 보려는 거야.”
미친 도살자를 피한다는 목적 자체만 보자면, 데르사의 계획은 꽤나 훌륭했기 때문이다.
* * *
“달이 성벽 위로 올라오면 그때부터 의식을 시작할 거야.”
숫양 다섯 마리, 오리 열두 마리, 큼지막한 돼지 세 마리. 마력의 증폭을 위해 준비해 둔 제물을 한 마리씩 죽이는 것이 의식의 시작이다. 제물을 살해하는 위치 또한 중요하다고 한다. 도시 전체를 거대한 마법진의 일부로 상정하고, 마법진의 핵심 위치에서 제물을 죽여야만 마력이 효과적으로 증폭된다는 모양이다.
모든 제물을 희생시키고 나면 공방으로 돌아가 묘비석을 발동시킬 예정이라고 데르사는 말했다. 그 순간부터 도시의 모든 산 자들은 죽은 자처럼 보인다. 테이블에 앉아 술을 기울이는 사람들은 테이블 위를 굴러다니는 백골처럼 보이고, 침실에 들어가 잠을 청하는 사람들은 부패할 대로 부패해 구더기와 파리가 들끓는 시체처럼 보인다.
얼핏 보기에는 역겹고 소름 돋는 일이지만, 달리 생각하면 이만큼 안전한 조치도 없다. 아무리 도살자가 잔혹하다 한들 한 번 죽은 시체를 또 죽이려 들지는 않는다. 도살자는 이미 폐허가 된 것처럼 보이는 도시를 무의미하게 떠돌다가, 죽일 대상을 찾아 터덜터덜 황야로 떠날 것이다. 그러면 도시의 사람들은 아무 희생 없이 떠오르는 해를 볼 수 있겠지.
“괜찮은 계획이네.”
“그렇지? 괜찮은 계획이지?”
“한 가지 찜찜한 점이 있는 것만 빼면 말이야.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또 모든 게 한 달 전으로 돌아가면 그때는 어쩌려고?”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봐야지. 일단은 이 도시 사람들을 도살자로부터 지키는 게 급선무야. 그다음 일은 천천히 생각해도 늦지 않아.”
“그렇긴 하겠네.”
“아무튼, 이렇게 된 이상 너희도 괜히 나가려 들지 마. 건물 밖으로 나가면 묘비석의 영향에서 벗어나니까. 어차피 눈이 이렇게 많이 내리니 나갈 수도 없겠지만…….”
하넨이 데르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케르츠는 의자에 몸을 기댄 채 생각에 잠겼다. 데르사의 계획은 분명 괜찮아 보인다. 만약 케르츠가 광증에 걸린 채 이 도시에 발을 들였다 할지라도, 사방에 시체밖에 없다고 인지했다면 당연히 도시를 떠났을 테니까.
한 번 도시를 떠난 도살자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테니, 아침이 되어 묘비석의 효과가 풀리더라도 도시 자체는 안전할 거다. 운이 좋다면 그걸로 이 도시에 걸린 저주가 풀릴지도 모르고.
‘하지만 조금 걸리는 부분이 있는데…….’
무한히 같은 시간을 반복하는 주술이라니. 케르츠는 어머니로부터 인면철 갑옷을 이용한 온갖 주술을 배웠지만 그런 주술은 들어 본 적도 없다. 게다가 제정신이 아닌 도살자가 굳이 이 도시에 그런 저주를 걸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광증에 휩싸인 도살자는 어디까지나 생명의 말살을 위해 움직일 뿐, 한 도시의 인간을 영원히 살려 둔 채 시간만 되돌려 괴롭힐 정도로 이성적이지 못하니까.
게다가 도시 전체에 영향을 줄 정도로 대규모의 주술을 걸 작정이라면 미리부터 착실히 준비를 해 놨을 테다. 당장 데르사만 봐도 단 하룻밤의 주술을 위해 수십 마리의 동물을 제물로 바쳤는데, 시간의 흐름을 뒤틀 정도로 거대한 주술이라면 분명 그보다 훨씬 오래 공을 들여 준비를 해야 가능하겠지. 그건 도살자에겐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는 건, 도시의 시간을 되돌리는 주술을 건 사람은 도살자가 아니라 다른 누군가일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그 ‘누군가’의 정체는 과연 누구일지. 범인의 정체를 밝혀내지 못한 채 도살자만 막는다 하여 이 사태를 막을 수 있는지. 그리고…….
“엔라트, 아이, 흐루민, 데, 하레미아탄…….”
잘못하다간 우리까지 말려드는 거 아닐까? 케르츠는 그 불길한 가능성을 머리에서 떨쳐 내지 못했다. 만약 일이 잘못되어서 도시의 시간이 다시 한 달 전으로 되돌아간다면, 자신들이라 하여 그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운이 나쁘면 케르츠 일행까지 이 순환의 일부가 되어, 주술을 진짜 파훼하지 못하는 이상 영원히 이 도시에서 한 달을 반복해야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폭설과 추위와 도살자의 존재를 감수하고서라도 여관을 뛰쳐나가 도시에서 멀어져야 하는 건 아닐까? 땅을 깊게 파고 들어가 밤새도록 기도문을 외운다면 추위나 폭설도 어떻게든 될 테고, 설령 도시에서 허탕을 치고 나온 도살자가 미쳐서 공격해 온다 해도 맞서 싸우면 그만이다. 이쪽에는 케르츠뿐만이 아니라 하넨과 용사도 있으니 불리하지는 않다.
“데 라누, 도느메리아, 하타엔…….”
목이 답답하고 혀가 바짝바짝 마르는 터라 케르츠는 묘하게 시큼하게 느껴지는 차를 홀짝거렸다. 지금이라도 하넨과 용사의 뒷덜미를 잡고 도시 바깥으로 뛰쳐나가야 하는 건 아닌지, 모닥불이 훈훈한 여관방보다 오히려 눈보라 휘몰아치는 황야가 안전한 건 아닐지, 그가 심각하게 고민에 빠지던 찰나.
“케르츠? 왜 기도문을 외워요?”
손에 들려 있던 찻잔을 빼앗겼다. 불안한 얼굴의 용사가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용사가 빼앗아 간 잔을 멍한 눈으로 바라보던 케르츠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인면철 갑옷을 매만졌다. 갑옷 표면에 생겨난 얼굴들이 웅얼거리며 기도문을 읊는 걸 보면 자신이 기도문을 외우기는 했던 모양이다.
사람이 많은 곳에서, 그것도 데르사 같은 외부인까지 있는 상황에서 기도문을 외우다니 평소답지 않았다. 지나치게 긴장한 탓일까? 아무리 긴장했다고는 하나 용사까지 불안하게 만들다니 별로 좋은 행동은 아니었다.
“이상하게 기도문을 자주 외워요, 케르츠.”
“그러게요. 오늘 제가 좀 피곤한 모양입니다.”
“아니요. 오늘이 아니라.”
“네?”
“여기에 온 이후로 그런 것 같은데.”
케르츠는 반사적으로 용사의 안색을 살폈지만, 정작 용사는 찻잔의 물을 슬쩍 창문 너머로 버리고는 창밖만 계속 흘끔거렸다. 케르츠의 돌발 행동 때문이라기엔 오히려 케르츠를 신경 쓰지 않는 눈치라 조금 이상해 보였다.
혹시 저 어린 용사도 무언가 불안감을 느끼는 걸까? 케르츠는 용사의 옆모습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저이가 케르츠와 같은 수준의 추론을 해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나이는 어려도 신전에서 공을 들여 만든 존재니 보통 사람과는 근본부터 다르다. 어쩌면 저이는 본능의 차원에서 위험을 감지하고 있는지도…….
“저기, 케르츠.”
“왜 그러십니까.”
“바깥에 무언가 있어요.”
잠시만, 그게 아니던가? 갑자기 용사의 손가락이 스윽 움직이더니 거리를 가리켰다. 용사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보니 확실히 뭐가 보이긴 했다. 아무래도 용사가 아까부터 신경 쓰던 건, 이 마을 자체의 위험성이 아니라 저 이상한 형체가 아니었을까? 케르츠는 눈을 가늘게 뜨고 바깥을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도살자가 또 온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것의 형체를 확인한 순간 케르츠는 눈살을 찌푸렸다.
“아이가 저런 데에 있군요.”
“아이? 저게 아이인가요?”
“예, 아이겠지요. 기껏해야 열 살 정도 되어 보이는데요. 이 날씨에 저런 아이가 거리를 돌아다니다니……. 어쩐지 이상한데요.”
“아이라는 게 저곳에 있으면 안 되나요?”
용사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케르츠와 창밖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당시의 용사는 ‘아이라는 게 대체 뭔가요?’ 하고 묻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케르츠는 미처 거기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되짚어 생각해 보면 케르츠는 당시의 용사에게 별로 관심이 없었다. 물론 멸망을 막고 죄를 정화할 대상으로서 소중하게 대하고는 있었지만 그런 걸 관심이라고 칭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때문에 케르츠는, 용사가 ‘성장’의 개념을 모른다는 사실을 미궁 내부에서야 제대로 인식했다. 그 전까지는 그 점에 별로 관심도 없었고, 설령 안다 해도 건성으로 넘겼다. 용사에게 있어서 아이란 ‘케르츠가 아이라고 부른, 작은 인간 같은 생물’이었을 뿐이다. 아마 당시에는 변형 인간이나 인공 생물 비슷한 거라고 인식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당시의 케르츠는 설명 같은 걸 늘어놓을 기분이 아니었다. 구체적으로 이유를 말하자면 아이의 생김새 때문이었다. 허름하고 꾀죄죄한, 아무리 봐도 겨울을 버틸 수 없을 정도로 부실한 옷차림은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정말로 신경이 쓰이는 건…….
“목줄.”
“네?”
“저 아이, 목줄을 하고 있군요.”
바닥을 질질 끌 정도로 길게 이어지는, 마치 케르츠가 어린 시절 매고 다녔던 것처럼 익숙한 붉은색의 목줄. 케르츠는 어쩐지 그 목줄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 * *
케르츠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창밖의 아이를 바라보았다.
새삼스럽게 동정심이라도 느꼈냐면 그런 건 아니다. 오래전부터 멸망을 향해 달려가 이제는 종말을 코앞에 둔 이 세계에서 아이의 비극 따위에 가슴을 부여잡는 이들은 없다.
심지어 케르츠는 비극에 슬퍼하기보다는 오히려 비극을 만들어 내는 쪽에 가까운 인간이다. 광증에 휩쓸린 상태의 기억은 꽤나 모호했지만, 그래도 자신이 아이의 부모였을 누군가를 수없이 죽이고 아이 본인 또한 살해한 경험이 있음을 모르지는 않는다. 본의가 아니었다 하여 그 죄를 씻을 수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는다.
다만 그는, 마치 핏자국처럼 질질 이어지는 붉은 줄을 보며 자연스럽게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분명 그의 어머니 또한 케르츠에게 저토록 붉은 목줄을 묶어 주었다. 약하고 힘이 없어 늘 뒤처지기 쉬운 ‘핏덩어리’가 혹시라도 낙오되지 않도록, 자신이 광증에 잠식당해 제정신이 아닌 상태에서도 아이와 떨어지지 않도록, 혹은―제 부모와 사명과 운명이 두렵고 꺼림칙하다 여긴 아이가 모든 것을 거부하려 들더라도, 절대로 어딘가에 숨거나 도망치지 못하도록.
저 아이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닮았다. 그런 생각이 케르츠의 머릿속을 도무지 떠날 줄 몰랐다.
‘혹시 도살자의 자식인가? 아니, 확실히는 모르지. 어쩌면 노예 상인으로부터 도망친 노예일지도 모르고…….’
케르츠의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아이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어딘가를 향해 걷고 있었다. 다쳤는지 피로에 짓눌렸는지 분간이 안 가는 몸짓으로 다리를 질질 끌며, 마르고 허약한 몸뚱이조차 너무 무겁다는 듯 계속 무너질 것처럼 휘청거렸다.
관심이든, 꺼림칙함이든 불러일으킬 법한 모습이었으나 건너편 건물의 창문은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굳게 닫혀 있었다. 하긴 약속을 하긴 했던가? 해가 진 이후에는 그 누구도 들이지 말라고. 상대가 어린아이라 해도 그 약속은 유효한 모양인데…….
“어디로 가는 걸까요?”
케르츠와 함께 창문에 달라붙어 있던 용사가 조심스럽게 속삭여 왔다. 그러고 보니 저 아이, 주변을 두리번거리거나 건물 문을 두드려 도움을 청하는 기색조차 없이 묵묵히 어딘가를 향할 뿐이었다.
케르츠는 그 점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만약 우연히 이 마을로 흘러들어 온 평범한 아이라면 건물의 문을 두드려 구조를 청하는 게 당연할 텐데, 저 아이는 이 추위와 폭설 속에서도 구조 요청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마치 처음부터 목적지가 정해져, 그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 외에는 아무런 관심조차 없다는 듯 곧고 망설임 없는 걸음걸이였다.
게다가 수상쩍은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이의 모습을 한참 지켜보던 도중, 케르츠는 어느 순간 아이가 매우 먼 곳까지 이동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분명 여관 근처에서 무거운 걸음으로 걷던 아이는, 잠시 눈을 깜빡인 순간 여관에서 서너 블록은 떨어진 어느 건물 옆을 느릿느릿 지나가고 있었다. 아이가 달음박질을 하더라도 순식간에 거기까지 달려갈 수는 없을 터였다.
“용사님, 저건…….”
“움직였지요?”
단순히 걸음을 옮겼다는 뜻이 아님을 알기에 케르츠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용사 또한 케르츠와 같은 광경을 보고 있는 게 확실했다. 케르츠는 눈을 깜빡이지 않고 아이를 관찰하기로 마음먹었지만, 곧 그러는 게 별다른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상해요, 분명 천천히 걷고 있는데……. 왜 저렇게 빠르지요?”
분명 두 사람은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고, 아이는 달음박질을 하거나 수상쩍은 행동을 취하지도 않았음에도, 아이가 있는 장소는 몇 번이나 휙휙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마치 아이가 처음부터 거기에 있기라도 했듯이 말이다.
마치 책을 몇 페이지씩 뛰어넘어 가며 띄엄띄엄 발췌해서 보는 기분이었다. 아이의 행동은 연속해서 이어지고 있으나, 그걸 관찰하는 케르츠와 용사의 인식이 드문드문 끊어지는 탓에 어색하게 보이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두 사람은 숨을 죽인 채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미 너무 멀어져서 뒤를 돌아본들 케르츠와 용사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할 거리에 도달한 아이는, 어느 순간 자리에 멈춰서는 천천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붉은 깃발이 걸린 신전 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그 순간 두 사람은 흠칫 정신을 차렸다. 등 뒤에서 들려 온 목소리 때문이었다.
“케르츠? 용사? 둘 다 뭘 보고 있는 거야?“
마치 꿈에서 깨어난 듯한 충격이 케르츠의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리니, 하넨과 데르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 용사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케르츠와 창밖을 번갈아 확인하는 중이었다. 방금 그 광경이 케르츠 혼자만의 환상은 아니었다는 증거다.
“하넨, 창밖에 무언가 있었어요. 케르츠의 말로는 아이라고 하는 생물인데…….”
“아이? 그런 이름의 신종 사념이라도 있는 거야, 아니면 진짜 어린아이를 말하는 거야?”
“둘이 다른가요?”
“……진짜 어린아이입니다. 열 살 정도 되는 생김새였는데, 여관 근처에서부터 천천히 걸어서 방금 신전으로 들어갔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여기에서 신전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먼데, 고작 몇 초 사이에 천천히 걸어서 신전으로 들어갔다고? 환영이라도 본 거 아니야?”
“잠깐, 몇 초라고요?”
“그래, 너희가 창밖을 바라본 지 몇 초밖에 안 지났잖아. 아무리 오래 쳐 줘도 10초 정도?”
10초라고? 용사와 케르츠는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서로를 마주보았다. 그게 고작 10초일 리가 없다. 두 사람이 창밖을 바라본 시간은 적어도 2, 3분은 되었다. 아무리 짧게 쳐도 2분은 넘었을 텐데 그게 10초라니, 케르츠로서는 오히려 하넨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데르사까지 옆에 있는 상황에서 굳이 하넨이 그런 거짓말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케르츠는 확인하듯 데르사를 흘끔 바라보았다. 만약 하넨의 말이 정확하다면 데르사 또한 고개를 끄덕일 테고, 그게 아니라면…….
“아이라고? 너희들, 방금 어린아이를 봤어?”
……잠깐,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케르츠와 눈이 마주친 순간 데르사는 유령이라도 본 듯 삽시간에 얼굴이 새하얘졌다. 케르츠는 내심 당황했지만 일단 침착하게 굴려 애쓰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생각해 보면 이게 그렇게까지 나쁜 징조는 아니었다. 적어도 케르츠와 용사가 본 게 거짓은 아니라는 뜻이니까.
“예, 분명 어린아이였습니다. 매우 힘없이 걷고, 목에는 붉은 목줄을 차고 있었어요.”
“붉은 목줄? 확실해? 정말로 목줄을 한 아이였어?”
“예. 그런데 보는 내내 영 찝찝하더군요. 마치 몇 시간 분량의 환상을 드문드문 끊어서 본 것 같은 기분입니다.”
그 느리고 힘없는 걸음걸이라면 여기서 신전까지 걸어가는 데 몇 시간은 걸리겠지. 케르츠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데르사의 얼굴빛은 이제 아예 새파래졌다. 그런데 그 광경은 대체 뭐였을까. 어쩌면 그건 실제가 아니라 누군가의 환영이나 기억 주입술이었고, 창밖을 바라본 용사와 케르츠가 우연히 그 주술에 걸려들었는지도 모른다. 만약 주술에 의한 거라면, 대체 누가 그런 주술을 썼지?
“그 아이를 따라가지 마.”
“네?”
케르츠의 머릿속이 제대로 정리되기도 전에, 생각의 허리를 끊듯 데르사가 단호하게 말을 뱉었다. 용사가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자 데르사는 성큼성큼 다가와 용사의 손을 붙잡았다. 자못 심각한 표정이었다.
“아이가 신전으로 향했다고 했지? 그건 너희를 신전으로 이끌기 위한 함정일 거야.”
“함정이라니요? 대체 누가 그런 함정을…….”
“거기까지는 나도 몰라. 하지만 말이지, 그 환영이라면 나나 다른 사람들도 여러 번 봤어. 하지만 그 환영에 홀려서 신전으로 들어간 이들 중 살아 나온 사람은 아무도 없어.”
“당신도 들어간 적이 있습니까?”
“……난, 나는 무서워서 들어가지 못했어. 하지만 그 신전에 들어간 사람은 누구라도 반드시 행방불명된다고. 그것만큼은 장담할 수 있어. 그러니 너희도 부디 그 신전에는 들어가지 마.”
석연치 않은데. 케르츠는 가장 먼저 그 생각부터 떠올렸지만 그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다소 지나치리만큼 선명하고 뚜렷한 공포와 두려움이 그자의 표정에 달라붙어 있었던 탓이다. 아이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지도, 떠올리고 싶지도 않다는 듯 노골적이고 뚜렷한 거부의 사인에 용사 또한 떨떠름하게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그 신전은 들어가 봤자 아무것도 없어. 신관들은 두 달 전에 이 마을을 떠 버렸고, 그 이후로 신전에 중요한 물건 같은 건 아무것도 놔두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짐승 같은 게 들어가서 살고 있을지도 모르지.”
“짐승이라고요? 그럼 그 환영은 뭡니까?”
“내가 어떻게 알아! 어쩌면 환술 같은 걸 쓰는 짐승인가 보지! 신전 안에 뭐가 있든 간에, 그건 굳이 밖에서 건드리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하지 않아. 도살자처럼 아무 이유도 맥락도 없이 사람을 죽여 대지는 않는다고. 그거면 되지 않았어?”
데르사는 더 말하고 싶지도 않다는 듯 허겁지겁 문 쪽으로 걸어갔다. 케르츠는 데르사를 잡으려고 무심코 손을 뻗었지만, 그 순간 날아온 지팡이가 탁 하고 그의 손을 쳤다. 하넨이었다. 그는 쓸데없는 말 하지 말라는 눈빛으로 케르츠를 바라보더니,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창가로 다가가 바깥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영문을 모르겠네. 혹시 그 환영인지 뭔지 하는 거, 아직도 있나?”
“괜히 찾으려 들지 마! 봐서 좋을 것 없으니까. 하여튼 너희들, 궁금증을 해결하겠답시고 밖에 나가서 여기저기 쏘다니지 말고 얌전히 이 안에 머무르고 있어. 너희 때문에 내가 세운 계획이 엉망이 될지도 모르니까. 알겠어?”
“알았어, 알았다니까. 이 추운 날에 나가긴 어딜 나가겠냐. 그냥 푹 자고 있을 테니 걱정 놓으라고.”
마치 중요한 일이라도 생각난 듯 다급한 발걸음으로 데르사가 뛰쳐나갔다. 하넨은 데르사가 나가자마자 가만히 방문을 노려보더니 한숨을 쉬며 침대에 앉았고, 용사는 테이블에 놓여 있던 빵을 만지작거리며 놀다가 화톳불에 슬쩍 던져 넣었다. 케르츠는 가만히 자리에 선 채 바깥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분명 데르사는 씩씩거리며 복도로 뛰쳐나갔고, 여기는 2층이니 그가 계단을 밟고 내려가는 소리가 들려야 정상일 텐데.
“피곤하군요. 일단 자고 나서 생각해 봅시다.”
“응? 어, 그래도 되겠어? 너 되게 찝찝해 보이는 표정이었는데.”
“생각해 보니 이건 저희가 관여할 문제가 아닙니다. 저희가 신전으로부터 임무를 받았다고는 하나 이런 일을 처리하라는 명령을 받지는 않았고, 무엇보다 저희는 외부인입니다. 이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에 간섭할 권리가 없어요.”
하넨은 케르츠와 눈빛을 교환하며 용사에게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용사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케르츠가 귀를 가리켜 보이자 눈살을 찌푸리더니 가만히 바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다들 여행하느라 피곤했을 테니 일단 좀 잡시다. 푹 쉬어야 내일 일찍 일어나지요.”
“알았어. 그럼 다들 잘 자.”
하넨이 탁 소리가 나도록 전등을 끄고, 케르츠가 일부러 요란하게 부스럭거리며 침대에 눕자 용사는 케르츠를 따라 얌전히 침대에 누웠다. 그러고 나서 1분쯤 지났을까? 당연히 잠들지 않은 채 눈을 뜨고 있던 케르츠는 문밖에서 희미한 소리를 들었다.
누군가 발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복도를 걸어 내려가는 소리였다. 용사는 그제야 상황을 좀 이해한 듯 가만히 숨을 들이쉬었다.
* * *
“갔냐?”
“일단 아래층으로 내려갔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움직이는 건 위험하겠군요. 그 가짜 예언자가 아직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
케르츠와 하넨은 침대 삐걱거리는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 바깥에서 숨을 죽인 채 안쪽의 소리를 엿듣고 있었을 데르사를 상상하니 영 찝찝했지만, 그래도 곧장 행동에 나서는 건 다소 무모한 일이다.
케르츠는 용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뭔가 안 좋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건 알아도, 정확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세밀한 사태까지 이해한 것 같지는 않았다. 어차피 잘 이해하지도 못할 텐데 굳이 설명해야 할까? 케르츠가 잠시 머뭇거리던 사이, 용사의 어리둥절한 표정을 본 하넨이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석연치 않은 부분이 너무 많다고 생각하지 않아?”
“석연치 않다니요?”
“우선 가장 기본적인 부분부터 짚어 보자. 왜 신전은 이 도시에서 퇴거했을까? 이 방을 보라고. 장작도 많이 쌓여 있고 식량도 넉넉하지. 고작 한 달 노력한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넉넉하고 풍요로운 환경을 만들 수 있었으면 신전이 굳이 떠날 이유가 없어. 물론 신전이 퇴거한 지 한참 지나서 가까스로 조금씩 발전해 나가는 도시들도 있지만 이번에는 경우가 달라. 고작 두 달 전에 신전이 퇴거한 도시인데 한 달 만에 정상화된다는 건 명백히 부자연스러워.”
용사는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지만 케르츠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마법사님, 별생각 없는 줄 알았더니 의외로 케르츠와 거의 비슷한 수준의 추론을 하고 있던 모양이다. 하긴 마법사의 거짓말은 마법사가 가장 잘 알아채는 법이다. 어쩌면 하넨은 케르츠보다 더 빨리 이상을 감지했으면서도 그냥 모르는 척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저 마법사 말이야, 왜 명백한 위험 요소인 신전을 내버려 두고 도살자만을 신경 쓰고 있을까? 신전에 들어간 사람은 누구라도 행방불명된다면, 논리적으로 생각할 때 가장 먼저 조사해야 할 장소는 신전이야. 도살자야 그 달의 마지막 날에 방문할 뿐이지만 신전은 한 달 내내 조사할 수 있고, 무엇보다 그곳이 모든 사건의 근원일 가능성이 크니까.”
“으음……?”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 시간을 되돌리는 마법이라고! 그런 대규모 마법을 준비하려면 엄청난 밑 작업이 필요하단 말이야. 생판 모르는 외부인인 도살자가 그런 짓을 벌일 가능성이 크겠냐, 아니면 마을의 누군가가 버려진 신전을 근거지로 삼아 그런 짓을 벌였을 가능성이 크겠냐? 당연히 후자겠지! 그런데 저 녀석은 신전에 대해선 조사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어. 저 녀석이 멍청해서일 리는 없지. 마법사씩이나 하고 있으면 그 정도 머리는 돌아갈 테니까. 그러면 가능성은 둘 중 하나야. 저 녀석이 신전에 무언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있거나…… 아니면, 저 녀석이야말로 신전에서 무슨 일을 꾸미는 장본인이거나.”
케르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신전 이야기가 나왔을 때의 반응, 그리고 몰래 방 안의 대화를 엿듣던 아까의 행동을 감안하면 데르사가 신전에서 무슨 일을 꾸미고 있을 가능성은 한도 끝도 없이 커진다. 어쩌면 데르사는 묘비석을 증폭시켜 사람들을 숨기려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걸 핑계로 어떤 다른 거대한 사건을 벌이려 하는 걸지도…….
물론 케르츠의 반응과는 별개로 용사는 조금 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애초에 하넨의 설명도 친절이나 명료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데다가, 기본적인 상식이 결여된 용사가 하넨의 이야기를 온전히 이해하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용사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하넨의 말은 조금 어려워요. 그러니까, 이 도시가 하넨의 마음에 안 든단 거죠?”
“아니, 그 이야기가 아니잖아……. 너 진짜 혼난다.”
“두 살짜리 용사님에게 뭘 기대합니까. 게다가 그렇게 불친절하게 설명하면 당황해서 못 알아듣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고요.”
“못 알아듣지는 않았어요. 제가 생각하기에도 이 도시는 잘못되어 있어요. 그 잘못의 근원은 아마도 신전 안에 있을 테고.”
용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창가를 바라보았다. 아니, 정확히는 창밖으로 보이는 신전을 바라보는 거겠지. 어쩐지 하넨의 설명과는 약간 엇나간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적어도 지금 상황이 위험하다는 것만은 이해한 듯하니 다행이었다. 하넨도 그쯤에서 만족했는지 어깨를 으쓱하곤 입을 열었다.
“자, 그럼 하나 정해 둘까.”
“정하다니요?”
“목적지 말이야. 곧바로 이 도시를 빠져나갈지, 아니면 신전에 있다는 ‘짐승’의 정체를 확인하고 갈 건지. 어떻게 할래?”
“당연히 전자 아닙니까? 아까도 말했지만 우리는 어디까지나 외부인이에요. 이 도시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가 알 바는 아니지요.”
데르사도 케르츠 일행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것까지 막으려 들지는 않을 거다. 그는 신전에 가지 말라는 식으로 말하긴 했지만 도시 바깥으로 나가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았으니까. 아니, 어쩌면 그자는 케르츠 일행이 도망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지 않을까? 그편이 쓸데없는 위협을 줄일 수 있으니까.
“아니에요, 케르츠.”
“네?”
그 순간이었다. 뭔가 복잡한 생각을 하는 듯(두 살짜리가 복잡한 생각을 해 봤자 얼마나 복잡하겠냐만) 인상을 잔뜩 찡그리던 용사는, 케르츠의 팔을 붙잡고는 몇 번이고 고개를 저어 보였다. 어린아이처럼 철없는 행동이었지만 신체만큼은 성인이나 다름없었으므로 용사의 손아귀 힘은 꽤나 셌다.
“용사님, 왜 그러십니까?”
“지금 우리는 내부에 있어요.”
“도시의 내부에 있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 도시와 무슨 관계가 있는 것도 아니잖습니까.”
“그런, 음, 그런 이야기가 아니에요. 우리는 이 도시와 관계가 없지만, 그래도, 이 도시를 나갈 수 없어요. 이 도시와 얽혀 버렸으니까. 그러니 신전으로 가야 해요.”
그 지리멸렬한 설명에 용사 자신조차 답답해하는 눈치였으니, 듣는 입장인 케르츠와 하넨은 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이미 이 도시의 수상함을 알게 된 이상 이대로 두고 떠날 수는 없다는 뜻인 듯했다. 물론 이 상황에서 그런 ‘올곧은’ 선택을 할 수는 없다. 이 어린 용사는 세계를 구해야 할 운명을 짊어졌고, 이 도시에서 어영부영하다가 운명을 짊어진 용사가 죽기라도 하면 그거야말로 더 커다란 손실일 테니까.
“아뇨, 용사님. 그렇다 해도 우리는 이 도시를 떠나야 합니다.”
“저도 떠나고 싶어요. 하지만……. 그럴 수 없어요.”
“사람들이 걱정되어서 그런 겁니까?”
“그것도 없지는 않지만, 꼭 그 때문만은 아니에요. 그러니까, 음. 설명하기가 너무 어려운데…….”
설명하기 어려운 게 아니라 마땅히 댈 만한 이유가 없어서 끙끙거리는 건 아닐까? 미심쩍은 표정으로 용사를 한참 바라보던 도중, 케르츠는 무심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물론 달의 위치로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 가늠하려는 목적이었을 뿐 신전을 볼 생각은 없었지만…….
‘잠깐, 또.’
어린아이의 환상이 길거리에 잠시 나타났다 사라졌다. 이번에는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지치고 피로한 모습으로, 제대로 균형조차 잡지 못한 채 비틀거리며 걷던 아이는, 아까 그랬던 것처럼 순식간에 신전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순간 케르츠의 마음속에 의문이 어렸다. 목줄을 찬 저 아이는 왜 신전으로 향했을까. 만약 저 어린아이의 존재가 환영에 불과하다면 저 환영은 무슨 목적으로 만들어졌는가. 데르사는 아무도 신전에 접근하는 걸 원하지 않는 것 같지만 저 환영은 오히려 사람들을 신전으로 끌어모으려는 것 같지 않던가. 마치 누군가 자신을 따라오길 바라듯, 자신처럼 다른 이들도 신전에 발을 들이길 바라듯.
그리고 하나 더 신경 쓰이는 점이 있다. 만약 케르츠가 지금 당장 이 도시를 떠나 도망쳐 버린다면, 어쩌면 영영 모른 채 넘어가게 될지도 모르는 의문점이다. 애초에 도살자는 왜 이 도시에 왔을까? 당장에라도 광증에 잠식당할 듯 불안정한 상태의 도살자는 보통 도시에 접근하려 들지 않는데 말이다. 그 도살자는 대체 무슨 사정이 있어서 이 도시에 방문하고, 영원히 반복되는 시간의 저주에 묶여 버렸을까.
“신전에 가죠.”
“……케르츠? 너 진심이야? 어쩌다가 갑자기 마음을 바꿨어?”
“정 신전에 가야만 직성이 풀리시겠다면 그렇게 합시다. 다만 한 가지만 약속하지요. 용사님이 혹시라도 위험해질 상황이 닥친다면, 그때는 곧바로 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겁니다. 알겠지요?”
‘얽혀 버렸다’라는 용사의 그 한 마디처럼, 어쩌면 케르츠 또한 이 도시에서 벌어진 일을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환하게 밝아진 용사의 얼굴을 모른 척한 채 케르츠는 그대로 창문 쪽으로 다가갔다. 이미 아이는 사라지고 없지만, 케르츠는 아이가 빨려 들어가듯 사라져 버린 신전을 잠시 동안 바라보았다.
* * *
생각 없이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간 아래층의 사람들에게 들킬 게 뻔했으므로, 케르츠 일행은 창문을 통해 슬그머니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2층이라서 내려오기가 그렇게 어렵지도 않았고(하넨이 창틀에서 미끄러져 고꾸라질 뻔하긴 했지만 큰 문제는 아니었다), 워낙 폭설이 휘몰아치는지라 어지간히 집요하게 관찰하지 않는 이상 세 사람의 탈출을 목격하기도 힘들 듯했다. 케르츠가 슬쩍 근처의 건물을 올려다보니 모든 창문들이 닫혀 있었다. 근처의 골목에도 수상한 인영이 엿보이지는 않았다.
“이런 날씨여서 오히려 다행이군요. 이 정도로 눈이 많이 온다면 저희의 발자국도 가려질 겁니다.”
“다행이라면 다행이긴 한데, 진짜 춥다……. 이런 날씨에 황야로 뛰쳐나간다면 분명 얼어 죽을 거야. 젠장할.”
그나마 건물 벽에 바짝 붙으면 눈을 덜 맞으며 걸을 수 있었다. 세 사람은 후드를 단단히 여민 채 신전으로 향했다. 혹시 데르사가 따라붙을지도 모른다는 마음에 잔뜩 긴장했지만 다행히도 추적의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그자는 케르츠 일행이 탈출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다.
혹시라도 또 환상을 보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부지런히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케르츠와 용사는 어떤 환상도 보지 못했다. 다만 하넨은 두 사람과 달리 환영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는데, 대신 지팡이를 이리저리 쑤시며 주변을 탐색하다가 무언가 발견한 듯 한숨을 쉬었다.
“역시.”
“왜 그래요, 하넨?”
“그 사이비 마법사, ‘묘비석’의 힘을 증폭시켜 마을 사람들을 보호하려는 게 아니었어. 소마법진에 새겨진 술식이 완전히 달라.”
“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데르사가 거짓말을 했단 이야기지요?”
“맞아. 보통 이 정도 규모의 마법진을 발동시키려면 마법진의 중요 지점에 술식을 보조하는 소마법진들을 설치해 놓기 마련이거든? 그 소마법진만 살펴봐도 전체적인 마법진이 가동되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대강 알 수 있어. 그런데 이 소마법진들, 아무리 봐도 증폭의 술식과는 거리가 멀어.”
하넨은 이야기를 잘 알아듣지도 못하는 눈치인 용사에게 부지런히 설명을 늘어놓았다. 사실 케르츠도 하넨의 마법 장광설에는 별 관심이 없었기에, 그래서 언제쯤 핵심을 설명하려나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던 도중, 그의 머릿속이 일순간 멍해졌다.
“그러면 어떤 건데요?”
“이게 좀 이상하단 말이지. 이 마법진들은 ‘해제’나 ‘무력화’의 술식이야.”
“무력화라고요? 그러니까, 힘을 없앤다는 뜻 맞지요?”
“그 뜻이야. 주변에 걸려 있는 마법적인 힘을 제거할 때 주로 사용되는 마법이지. 그러니까 한 마디로, 이건 오히려 묘비석의 힘을 파훼할 때 어울리는 술식이거든? 대체 왜 이런 마법진을 발동시키려고 하지?”
피로감도, 수면욕도 아닌 인공적인 몽롱함에 케르츠는 일순간 휘청거렸다. 시야가 일시적으로 하얗게 명멸하고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그 버거운 어지러움 자체보다도, 어지러움의 원인이 무엇으로부터 기인했는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케르츠를 더 혼란스럽게 했다.
아니, 정말로 모르나? 기억해 내지 못하는 건 아니고? 무언가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는 듯한 위화감에 케르츠는 숨을 들이쉬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사실은 이유를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원래는 알고 있었는데, 어떤 이유에서 잊어버린 후 지금까지 떠올리지 못하는 것도 같았다. 느린 심호흡.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동안 입술은 계속 케르츠의 의지와 상관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기억을 떠올려야만 하나? 아니면 떠올려서는 안 되나? 어느 쪽이지? 지금 자신은, 대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케르츠 너, 기도문 좀 그만 외워.”
“……예?”
“누가 듣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아무리 거리에 아무도 없다곤 해도 조심해야지.”
“제가 기도문을 또 외웠다고요?”
“방금까지 외우고 있었잖아. 대체 왜 그래? 오늘따라 왜 그렇게 불안해 보여?”
그 순간 어지러움이 사라지고 머리가 맑아졌다. 몇 번 눈을 깜빡이니 당황한 낯빛의 하넨이 시야에 들어왔다. 물론 검붉은 눈보라 때문에 그다지 또렷하게 보이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그래서 현실감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지금 제가 좀 불안정한 모양이군요. 심려를 끼쳐 드려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할 것까지야 없고 그냥 걱정이 되니까. 정말 괜찮은 거야?”
“지금은 괜찮습니다. 아까는 좀 어지러웠지만요.”
사실은 다소 혼란스러웠지만 일단 하넨에게는 그렇게 말해 두었다. 그나저나 방금 무언가를 기억해 낼 뻔했는데. 기도문을 외우다 보니 전부 잊어버렸는지, 아니면 기도문 덕분에 기억날 뻔했던 것이 기도문을 멈추면서 기억에서 사라졌는지, 정확한 인과 관계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혹시 용사도 자신과 같은 현상을 겪지는 않았나 싶어 슬쩍 안색을 살폈지만, 용사는 별로 어지러워 보이지도 않았고 혼란스러워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순수하게 케르츠를 걱정하는 표정으로 바라볼 뿐. 다만 케르츠를 빤히 바라보던 용사의 시선이 일순간 그의 등 뒤로 향했는데, 그 순간 용사는 무언가 발견하기라도 한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도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 다행입니다. 누가 듣기라도 했으면 이상하게 여겼을 테니…….”
“……아니에요, 케르츠.”
“예?”
“저기 누군가 있어요. 보세요.”
아무도 없지 않아요. 그렇게 속삭이며 용사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켜 보였다. 곧장 고개를 돌린 케르츠와 하넨은 눈을 부릅떴다. 과연 용사의 말대로였다. 후드를 푹 눌러쓴 인영이 거리 저편에 서 있었다. 다행히도 그 인영은 케르츠 일행에게서 등을 돌리고 서 있었기에, 세 사람은 곧바로 근처의 골목으로 숨어들어 고개만 슬쩍 내밀었다.
“데르사일까요?”
“그건 아냐. 키가 훨씬 크잖아.”
데르사는 하넨보다도 작고 볼품없는 체구였던 데 반해 인영은 거의 케르츠만큼이나 키가 크고 체구가 좋았다. 게다가 저쪽은 큼지막한 배낭과 꾸러미를 등에 주렁주렁 매달고 있어서 누가 봐도 데르사와는 다른 차림새였다. 물론 그렇다고 안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말이다. 만약 저자가 이 도시 사람이라면, 생판 모르는 외부인인 케르츠 일행보다는 예언자 데르사를 믿을 게 분명하니까.
“일단 숨어서 살펴보자. 어쩌면 그냥 지나갈지도 모르니까.”
케르츠는 하넨의 말에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게 된다면야 좋을 것 같다. 하지만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점이 있었는데, 당장은 추측에 불과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신경을 안 쓸 수도 없는 문제였다.
만약 저자가 마을 사람이 아니라면? 짐 꾸러미를 잔뜩 짊어진 꼴이 제법 여행자처럼 보이는 데다가, 애초에 지금 이 마을 사람들은 데르사의 예언을 믿고 죄다 건물 안에 틀어박혀 있지 않던가. 이런 상황에서 저렇게나 아무렇지도 않게 바깥을 활보하는 이유는 두 가지 정도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첫째는 데르사의 예언을 별로 믿지 않는다든지, 둘째는.
[누구 안 계십니까? 아무도 없어요?]
쾅쾅, 제법 힘을 주어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멀리 떨어진 여기까지 들려왔다. 인영은 근처 건물의 문을 몇 차례씩이나 두드리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제법 걸걸한 사내의 목소리였다. 케르츠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벌써 달이 성벽 위에 올라왔나? 하늘이 먹구름으로 뒤덮여 제대로 시간을 확인하기가 어려웠지만, 어쩌면 지금쯤이면 아까 데르사가 말했던 그 시간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건물 안쪽에서는 한동안 반응이 없었지만, 워낙 사내가 집요하게 문을 두드리는지라 결국 포기한 듯 문이 빼꼼 열렸다. 사내는 허겁지겁 문을 붙잡고 질문을 쏟아 냈다.
[이봐요, 말씀 하나 묻겠습니다.]
[안 돼요. 당신 여기에 못 들여보내 줘요. 당장 나가세요.]
[제가 언제 들여보내 달라고 말이라도 했습니까? 아니, 그 전에. 들어가지 않아도 괜찮아요. 질문 하나만 대답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노골적인 당혹감이 어린, 하지만 그러면서도 상당히 정중하고 예의를 차린 말투였다. 건물 안쪽의 사람이 당황한 듯 잠시 머뭇거리자 사내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다시 질문했다. 다소 절박해 보이는 목소리였다.
[혹시 이 도시에서 어린아이를 못 보셨습니까?]
[어, 어린아이라고요?]
[제 딸인데 잠깐 방심한 사이에 놓쳐 버렸어요. 나이는 열 살입니다. 후드를 쓰고 있어서 잘 안 보이겠지만 일단 머리카락은 까맣고, 눈동자는 금색이라 눈에 띌 거예요. 키는 이만하고, 붉은 목줄을 목에 차고 있는데…….]
사내의 이야기가 계속되는 동안 세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용사와 하넨은 저 사내가 아까 그 아이의 부모라는 사실만 가까스로 눈치챈 모양이지만, 케르츠는 상대가 누구인지 거의 확신했다.
[잘 모르겠는데요. 오늘 같은 날에는 눈이 너무 많이 와서 누가 거리를 오가는지도 못 봤습니다.]
[그, 그러시군요.]
[게다가 저희 마을에는 미신이 있어서……. 이런 날씨에 어린아이가 바깥을 돌아다닌다면 봤더라도 무시했을 겁니다. 눈 오는 날 모르는 아이가 돌아다닌다면 그건 도살자의 아이일 거라는 옛날이야기가 있거든요.]
[…….]
[애초에 눈이 오는 날씨에 어린아이가 혼자 돌아다닌다는 게, 그, 부자연스러워도 너무 부자연스러운 상황 아닙니까? 그 아이를 집에 들이면 도살자가 아이를 찾으러 마을에 방문한다는 전설이 있어요. 물론 도살자가 아니라도 그런 아이를 집에 들이면 골칫거리가 뒤따라올 가능성이 있겠죠. 그래서 어지간하면 다들 모른 척하는데…….]
[…….]
사내는 망연자실한 듯 대답도 못한 채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너무한 거 아니야, 옆에서 하넨이 작게 중얼거렸지만 케르츠는 거기에 반응하지 않았다. 저건 야박하다기보단 차라리 당연한 태도였기 때문이다.
혼자 다니는 아이는 어딜 가나 골칫거리다. 좀도둑일 수도 있고 보호자로부터 도망쳐 왔을지도 모른다. 물론 어쩌다 보니 부모를 잃은 불운한 아이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쳐도 사람들이 아이를 돌봐야 할 의무는 없다. 이미 이 세상에 미래는 없고 자라난 아이를 기다리고 있는 건 멸망뿐이니까.
[정 걱정이 된다면 신전이라도 가 보실래요? 저기 도시 한가운데에 있는데.]
[신전이라.]
[신관들이 다들 짐 싸 들고 다른 도시로 가 버려서 붉은 깃발밖에 없지만, 갈 곳 없는 아이가 갈 만한 곳이 뭐 달리 있나요. 도움이 못 되어서 미안하네요.]
쾅, 매정하게 문이 닫히자 사내는 비틀거리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난동을 부리거나 화를 내지도 않고 그저 허탈한 듯한 모습이었다. 케르츠는 조심스럽게 골목에서 나와 사내에게 다가가려고 했다. 저 사내가 누구인지 알고, 저 사내가 왜 여기에 올 수밖에 없었는지 알기에. 그런데.
“어?”
케르츠가 사내에게 한 걸음 발을 내딛은 순간, 사내의 모습은 마치 연기처럼 스르륵 사라져 버렸다. 케르츠는 사내가 있던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또 흠칫 놀라고 말았다. 사내가 방금 전까지 두드렸던 건물의 문은 이미 누군가 두꺼운 판자로 덧대고 못질을 해 놓아서 열 수 없는 구조였다. 그렇다면 방금 그건, 설마……?
“너와 용사가 아까 봤다던 게 이 환영이야?”
환영이구나. 케르츠는 어딘가 허탈해져서 비틀비틀 뒤로 물러났고, 용사가 조심스럽게 케르츠의 어깨를 붙잡아 주었다. 하넨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거리며 문 주변을 어슬렁거렸지만 곧 별 성과가 없다는 걸 알았는지 근처로 돌아왔다.
“등장인물은 다르지만 비슷한 환상이었습니다. 저희가 본 건 어린아이가 거리를 돌아다니는 모습이었어요.”
“그러면 방금 그게 그 아이의 부모야? 자식한테 목줄을 채워 놓다니 대체 뭐 하는 작자인지…….”
“도살자입니다, 그 사내는.”
하넨과 용사가 동그란 눈으로 케르츠를 바라보았다. 물론 사내는 망토로 몸을 감싸고 있었으니 인면철 갑옷을 입었는지 확인할 수야 없지만, 그래도 케르츠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저 사내가 바로 이 도시에 찾아온다는 도살자다. 어째서 실체가 아니라 환영의 형태로 찾아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지, 진짜야?”
“자기 자식이 도망친 걸 알고 찾으러 온 거예요. 아무리 광증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할지라도, 자식을 잃어버린 채 광증에 휩싸이면 그때는 정말 돌이킬 수 없을 테니까……. 그러니 어쩔 수 없이 이 도시에 발을 들인 겁니다.”
단순히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으로 여기까지 찾아온 게 아니다. 왜인지는 아무도 명확히 설명할 수 없지만, 그래도 도살자의 피를 타고난 이라면 누구나 그 핏줄에 새겨진 본능으로 안다. 자신들의 광증은 결코 끊겨서는 안 된다. 이 목숨이 끊어지면 자식에게, 자식의 목숨이 끊어지면 자식의 자식이, 그렇게 끊임없이 대를 이어 이 저주받은 광증을 짊어지고 가야만 한다. 아무리 이 광증이 싫더라도, 이 운명이 증오스럽더라도, 이 병증을 물려준 자신의 부모와 선조가 원망스럽더라도.
그러니 그 사내도 어쩔 수 없었던 거다. 설령 곧 광증이 덮쳐 와 자신이 이 도시를 몰살시킬 예정이라 해도, 도시 하나의 운명보다는 광증을 짊어져야 할 자기 자식을 다시 붙잡아 오는 일이 더 절박하기에.
만약 그 가설이 사실이라면, 도살자는 정말 이 도시의 시간 왜곡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셈이다. 오히려 말려들었다면 말려들었을 뿐. 역시 이 도시의 시간 왜곡을 자행한 건 다른 사람이라는 추측에 다시 한 번 힘이 실렸다.
“그래서 네가 신전에 가겠다고 했던 거구나. 네 동료가 곤란한 상황에 처한 것 같아서.”
“동료 의식은 없습니다. 다만, 도살자가 자신의 저주받은 운명을 누군가에게 물려주지 못한 채 그대로 죽어 버린다면……. 그런 일은 있어선 안 돼요.”
대체 이 도시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다음 대의 도살자가 되어야 할 아이와 선대 도살자가 동시에 죽도록 두어선 안 된다. 그러면 광증을 이어받을 이가 아무도 없어지니까. 물론 아이의 입장에서 생각하자면 오히려 병을 이어받지 못한 채 죽는 쪽이 행복하겠지만, 그런 행복 따위는 사명의 존속에 비하면 정말이지 아무런 가치도 없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용사가 위험에 처한다면 도살자의 사정 따위 내버려 두고 그냥 도망칠 생각이지만 말이다. 지금 케르츠는 도살자의 업만큼이나 중요한 사명을 짊어졌고, 지금 자신의 곁에 있는 세계 최후의 용사가 죽는다면 이 세계의 미래는 정말로 끝장이다. 그러니 어설픈 동정심을 가져선 안 된다. 그 어린아이에게서 케르츠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는 일 따위, 절대로 해서는 안 된다.
케르츠는 가만히 숨을 몰아쉬며 각오를 다졌다. 그때 누군가의 손이 케르츠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고개를 들어 확인하니 용사였다.
“살아 있을 거예요.”
“네?”
“그 도살자, 분명 살아 있어요. 그럴 거예요.”
묘하게 확신에 찬 말투에 케르츠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제 딴에는 위로하는 건가? 딱히 도살자 본인의 목숨을 걱정하는 건 아니고 그저 사명이 이어지기만을 바랄 뿐이지만, 이 어린 용사의 눈에는 케르츠가 동료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었다.
위로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어차피 모르는 사람이니 죽어도 그렇게 슬프지는 않을 거라고, 그런 식으로 말하려던 케르츠는 문득 용사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케르츠는 묘한 사실을 깨달았다.
“아직은 살아 있어요.”
“잠깐, 용사님. 지금 무슨 말을……?”
“그러니까, 늦기 전에 어서 가야 해요. 여기서 더 늦어 버리면.”
그건 위로하는 표정이 아니었다.
용사는 케르츠를 붙잡은 손에 힘을 단단히 주었다. 이번에도 그 손아귀 힘은 제법 아팠다.
* * *
“기분 탓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는데……. 어쩐지 신전 근처로 가면 갈수록 건물이 허름해지지 않냐?”
“듣고 보니 그렇군요. 분명 도시 외곽의 건물들은 제대로 정비되어 있던 것 같은데.”
“그랬던가요? 워낙 눈이 많이 내려서 그때 어땠는지 자세히 보지를 못했어요…….”
“아무리 눈이 내렸다곤 해도 이 정도로 허름해 보이진 않았어. 뭔가 이상해.”
신전으로 향하는 내내 하넨은 영 찝찝하다는 듯 주변의 건물들을 올려다보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모르겠으나 시간이 가면 갈수록 눈보라가 잦아들어서, 하늘은 점점 맑게 개고 시야 또한 넓어졌다. 움직이기 수월해졌다는 점에서는 다행이지만 문제는 눈이 개인 후 드러난 도시의 모습이었다.
누가 보기에도 쇠락한 도시 그 자체였다. 창문마다 불이 켜져 있으며 질 좋고 튼튼한 목재로 지어진 외곽의 건물들과는 달리, 지금 그들이 보는 건물은 당장 무너지더라도 이상할 것 없을 정도로 허름하고 낡아 있었다. 창문은 대부분 깨져서 바람이 요란하게 드나들고, 벽이 무너지거나 문짝이 떨어져 나가 건물 안쪽까지 눈이 소복이 쌓여 있고, 심지어 어떤 건물들은 지붕이 무너져 있기까지 했다.
이건 명백히 부자연스러운 상황이었다. 어떤 도시를 가더라도 이런 경우를 찾기는 힘들다. 도시 외곽이 당장 무너질 듯 허름하고 중심부가 멀쩡한 경우는 케르츠 또한 수없이 많이 보았지만 그 반대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지금 이 상황을 말이 되게 설명하는 방법은 두 가지밖에 없었다.
첫 번째는 지극히 상식적인 추측이다.
“도시의 중심에서 무슨 엄청난 사고가 터져서, 사람들이 그걸 피하기 위해 죄다 외곽으로 도망친 거 아닐까?”
“일리 있는 말이군요. 어쩌면 신전에 아이를 데리러 갔다가 광증에 사로잡힌 도살자가 주변의 건물을 무너뜨렸는지도…….”
“잠깐만, 그 도살자가 벌써 건물을 무너뜨리고 사람들을 죽였다고? 아까 우리가 그 환영을 본 지 몇 분 지나지도 않았잖아.”
“듣고 보니 그렇군요.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학살을 자행하는 건 불가능할 테니…….”
“아니, 아니지! 아까 그건 환영이었으니까 그렇게까지 의미를 둘 필요는 없지 않나? 애초에 이 환영은 대체 뭐야?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 맞긴 하나? 애초에 환영이니까 가짜 아니야? 뭐가 뭔지 영문을 모르겠네!”
확실히 하넨의 말이 맞았다. 생각해 보니 아까 그건 어디까지나 환영일 뿐 실제로 일어난 일도 아니다. 아무리 잘 쳐줘도 ‘시간이 무한히 반복되는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났던 일들이 모여 생겨난 환영’에 불과하고, 비관적으로 생각하자면 누군가 케르츠 일행을 자기 입맛대로 조종하기 위해 꾸며 낸 가짜일지도 모른단 말이다.
그러나 어째서일까? 지금 케르츠의 머릿속에서는 환영과 실제가 제멋대로 뒤섞여, 뭐가 진짜고 뭐가 가짜인지조차 파악하기가 힘들었다. 건물 외곽에서 일어난 일이 진짜였는지, 아니면 아까 용사와 케르츠가 보았던 그 아이의 모습이 진짜였는지, 세 사람이 보았던 도살자와 마을 사람의 대화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긴 했는지.
그 순간 케르츠의 머릿속에서 기이한 생각이 뿌리를 내렸다. 이 상황을 말이 되게 설명하는 첫 번째 방법은, 이미 도살자가 신전 주변의 건물을 초토화시키고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설명은 말이 안 된다. 아무리 도살자가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쳐도 그 짧은 시간 안에 이렇게 많은 사람을 몰살시킬 수는 없고, 무엇보다 이 근처의 건물들에서는 사람의 기척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는다. 모두 죽어서 시체가 되었다 치면 피 냄새라도 진동을 해야 하는데 그조차도 없다.
그렇다면 두 번째 설명 방법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어쩌면 지금 자신들이 보는 광경이야말로 ‘진짜’일지도 모른다는 점이다. 자신들이 도시 외곽에서 보았던 장면들, 그러니까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는 건물이나 여관 내부의 훈훈함 따위가 오히려 거짓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빌어먹을, 이쯤 되니 나도 혼란스러워진다고! 저기 저 사람들 환영 맞지?”
“사람들이라뇨? ……저건 또 뭡니까!”
분명 아까 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었던 건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오고 있었다. 다만 저 사람들이 환영이라는 사실만큼은 제법 명백했는데, 마치 도화지 위에 그림을 계속 덧칠하기라도 한 것처럼 사람들의 모습이 계속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이 환영이 속임수를 위한 연막일 리가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저건 누가 봐도 환영이란 걸 알 수 있을 정도로 비현실적이고 조잡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무언가를 두려워하듯 경악과 공포에 가득 찬 얼굴로 어딘가를 향해 달려갔다. 잘 보니 그들은 하나같이 신전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하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케르츠는 어느 순간 명백한 위화감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 광경들이 전부 환상이라서 현실과는 다르다 치더라도, 지금 보이는 이 환상은 아까 케르츠가 보았던 두 개의 환상과 충돌을 일으키고 있었다.
“신전으로 도망간다고요? 대체 왜? 이상해요. 선후 관계가 맞지 않는데.”
“무슨 소리야? 이상하다니 뭐가?”
“생각해 보세요. 분명 환영 속의 도살자는 자식을 찾기 위해 신전에 발을 들이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이 사람들이 신전 안으로 도망치는 건 부자연스러워요. 오히려 신전에서 발광해 공격해 오는 도살자를 피해 밖으로 도망치는 쪽이 더 이치에 맞지 않겠냐는 말입니다.”
아니, 물론 환상 따위에 논리적 정합성 따위를 따질 수 없다는 건 케르츠 본인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위화감이야말로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요소라는 생각이 케르츠의 머릿속에 뚜렷하게 자리 잡았다.
애초에 왜 마을 사람들은 자기 집에 틀어박히는 대신 신전으로 도망치고 있지? 신전의 신관들은 이미 오래전에 퇴거해서 그곳에 간다 한들 누가 지켜 주지도 않을 텐데?
이런 상황에서 가해자로서의 경험을 반추하는 건 다소 우스운 일일지도 모르지만, 의지할 구석을 잃고 그 누구도 믿지 않는 인간들은 위험이 닥쳐왔을 때 자기 보금자리에 숨으려 들 뿐 단체로 어딘가로 도망치려 들지 않는다. 저렇게 일제히 한곳으로 도망친다는 건, 그곳에서 숨으면 누군가 자신들을 보호해 줄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대체 그 ‘누군가’는 누구지? 설마 데르사인가? 하지만 그 마법사는 ‘가짜 예언자’ 노릇을 시작한 이후에야 겨우 사람들의 신뢰를 얻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니, 애초에 이 마을 사람들이 도살자 때문에 도망치고 있는 게 맞긴 한가? 지금 케르츠의 눈에 보이는 건 엉망으로 뒤엉켜 도망치는 사람들밖에 없고, 그 사람들을 쫓아다니는 도살자는 보이지도 않는데.
그 순간 갑자기 무언가가 케르츠의 머리를 퍽 쳤다. 하넨의 지팡이였다. 갑자기 이게 무슨 봉변인가 싶어서 하넨을 바라보니, 백발의 마법사는 불안에 가득 찬 낯으로 씩씩거리며 케르츠를 노려보고 있었다.
“개자식아, 그 기도문 좀 작작 외워! 진짜 자꾸 왜 그래?!”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겁니까?! 이번엔 제가 외우지 않았어요!”
“뭐라고?”
“보세요, 제 인면철 갑옷도 아무런 반응을 안 하잖습니까! 오늘 제가 불안정했던 건 사실이지만 이번엔 제가 아니에요!”
아무리 오늘따라 정신이 오락가락한다고는 해도 이런 상황에서 거짓말을 할 생각은 없었다. 기도문에 공명해 꿈틀거렸어야 할 인면철 갑옷은 조금의 미동조차 없이 잠잠했고, 그 모습을 보고서야 하넨의 얼굴에 어린 분노가 당혹감으로 바뀌었다.
그나저나 기도문 소리가 들린다고? 대체 어디서? 케르츠는 정신을 바짝 차린 채 주변의 소리에 집중했고, 하넨의 말대로 누군가 중얼중얼 기도문을 외우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반사적으로 용사를 바라보니 용사는 오히려 차분하고 담담한 태도로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그의 손끝은 신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저기예요.”
그제야 케르츠는 깨달았다. 용사의 말대로, 저 멀리 신전 내부에서 누군가가 낮은 목소리로 [도살자의 기도문]을 읊조리고 있다는 사실을. 사방에서 울리는 비명 소리로 시끄러운데도 어째서인지 그 기도문만은 지나치게 또렷하게 들려서, 보통 사람 수준의 청력을 가진 하넨조차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용사가 두 사람의 말다툼을 아예 못 보기라도 한 양 태연하게 신전으로 걸어가자, 케르츠와 하넨은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용사의 태도 또한 아까부터 이상했다. 온갖 환상으로 혼란스러워하는 하넨이나 케르츠와는 달리, 저이는 신전으로 접근하면 접근할수록 오히려 확신에 가득 찬 것처럼 굴고 있었다. 마치 눈보라가 개면 갤수록 그의 머릿속을 뒤덮던 의혹 또한 점점 사라져 가는 것처럼. 케르츠는 하넨을 붙잡고 황급히 뒤를 따라가면서 용사에게 물었다.
“용사님, 혹시 뭔가 알고 계신 겁니까?”
“설명하기 어려워요. 원래 저는 설명 같은 거 잘하지도 못하고……. 머릿속에서도 생각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아요. 어지럽고, 멍하고, 제대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서.”
“하지만 알고 계시긴 한 거지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희미하게 알아요.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서 두 분한테 미안해요. 저도 완전히 알지는 못해서.”
어쩌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여겼던 저 미숙한 용사야말로 진짜 모든 걸 알고 있었던 게 아닐까? 케르츠는 용사의 뒤를 따라 다급하게 걸었다. 다만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 되짚어 보니, 당시 저이가 케르츠나 하넨에게 사과할 이유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케르츠는 ‘어차피 설명해 봐야 모를 거다’라고 내심 용사를 깔보았으며, 하넨은 나름대로 열심히 설명하려 했지만 용사의 눈높이에 맞춘 설명을 하지는 못했으니까. 물론 경중을 따지자면 케르츠 쪽이 조금 더 한심했다. 씁쓸한 과거였다.
“그래도, 신전에 가면 전부 알 수 있을 거예요.”
다행히도 환영들은 케르츠 일행과 닿자마자 사라져 버려서 걷는 데 방해가 되지는 않았고, 부지런히 걸음을 옮긴 끝에 세 사람은 마침내 신전의 입구까지 도달했다. 이제 저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 수 있을까, 그런 기대에 마음을 놓기도 전.
“너, 너희들도 여기 온 거야? 진짜 희한한 인연 한 번 다 있네…….”
세 사람은 가만히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멈춰 섰다. 선명한 당혹감과 혼란이 어린 표정의 데르사가, 신전 입구를 막아선 채 세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대체 저 가짜 예언자는 언제부터 자신들을 따라온 걸까? 케르츠는 데르사를 노려보며 천천히 쇠톱을 꺼내 겨누었다. 데르사는 케르츠가 도무지 자신에게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듯 당황해 물러났지만 그 모습에 속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처음부터 우리를 미행했나? 아니면 우리가 신전으로 곧장 향할 거라고 확신하고 움직인 건가?’
그게 아니라면 저자가 케르츠 일행을 앞질러 벌써 여기에 도착해 있을 리가 없다. 상황이 이쯤 되었으면, 저자가 악당이라는 사실은 이미 추측이 아니라 확신의 영역에 있다시피 하다. 아까 여관방에서 저자에게 들었던 설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생판 거짓이었거나, 설령 진실이라 할지라도 일부 중요한 요소가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는 당신이야말로 왜 여기에 있습니까? 신전 근처가 위험하다고 했던 건 분명 당신일 텐데요.”
“응? 그, 그게. 너희 말을 듣고 보니 좀 이상해서. 왜 내가 지금까지 신전을 탐색할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는지 말이야. 그래서 마지막으로 한번 점검하려고……. 그나저나 너희 나한테 왜 그래? 그 톱은 왜 들이대는 거고?”
차라리 시원스럽게 본색이라도 드러내면 좋을 텐데, 데르사는 마치 자신의 무고를 증명하기라도 하듯이 성당 입구에 바짝 붙어 덜덜 떨었다. 지나치게 연기력이 뛰어난지라 ‘어쩌면 이 모든 게 오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아주 잠깐 들 정도였다. 물론 오해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지금까지 봐 왔던 게 워낙 많았지만 말이다.
“우리가 말이지, 밤에 잠이 안 와서 산책을 했거든. 겸사겸사 네 마법진 설치 작업이 어떻게 돌아가나 보기도 하고 말이야. 그런데 네 소마법진이 이상하더라? 무력화라니, 대체 그게 왜 지금 이 상황에 필요하길래 설치해 놓았지?”
“무력화라고? 내가 그런 걸 설치했다니 무슨……. 잠깐만. 생각해 보니까 정말이네. 내가 대체 왜 그런 걸 설치했지?”
“신전으로 오면서 소마법진 일곱 개를 발견했는데 죄다 해제와 무력화 관련이었어. 실수로 한두 군데에서 착각한 수준이 아니라고.”
“맞아. 생각해 보니 내가 죄다 그런 식으로……. 대체 뭐 때문이었지? 내가 왜 그런 미친 짓을 한 거야?”
도저히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들이밀며 상대를 밀어붙이려던 하넨은 데르사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케르츠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니, 부정하려면 부정하고 긍정하려면 아예 다 긍정해 버릴 것이지, 자기가 하긴 했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는 건 또 무슨 소리인가? 무슨 장난을 치는 것도 아니고!
“어중간하게 둘러댈 생각이라면 차라리 그만두는 게 나을 겁니다. 적당히 모르는 척해 주었더니 정말 모를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아까 여관방에서,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척하면서 저희 방을 엿듣고 염탐했지요? 이건 대체 어떻게 설명할 겁니까?”
“염탐? 어, 잠깐만. 내가 그랬다고? 분명 그러긴 했는데…….”
“……?”
“왜 그랬지, 내가?”
상황이 이쯤 되니 이젠 정말로 양쪽 모두 혼란스러워졌다. 착각이나 실수였다는 식으로 어중간하게 얼버무리는 것도 아니고, 염탐씩이나 저질러 놓고도 부정하지 않는 주제에 자기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는 듯 어리둥절해한다. 이쯤 되면 정신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어서 저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용사님, 혹시 저자가 무엇 때문에 저런 행동을 벌이는지 설명하실 수 있겠습니까?”
케르츠는 여전히 데르사에게 칼끝을 겨눈 채 용사에게 가만히 속삭였다. 굳이 ‘설명할 수 있겠냐’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용사가 어렴풋이 알면서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해 입을 다무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혹시라도 설명하지 못하겠다고 말하면 어쩌나 싶었지만 다행히도 용사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러고는 입을 열었다.
“저 사람, 얽혀 있어요.”
“얽혀 있다니요?”
“처음부터 다른 것과 섞여 있었어요. 아니, 다른 것이 데르사를 먹어 치웠어요. 아직 완전히 먹어 치우지는 않아서 어느 정도의 자아가 남아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얽혀 버려서, 가끔은 자신을 얽어맨 대상의 뜻대로 따르는 거예요.”
도무지 무슨 이야기인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케르츠는, 여관방에서 나올 때 용사가 ‘자신들은 이 도시와 얽혀 있다’라고 말했던 걸 똑똑히 기억했다. 용사가 그때 사용했던 단어와 지금 사용한 단어가 완전히 같은 뜻인가? 그렇다면 저자와 케르츠 일행 사이의 공통점은 대체 무엇인가?
“그러니까, 아마도……. 데르사는 얽히기 전 했던 일과 얽혀 버린 이후 하는 일을 혼동하는 중이에요. 마치 케르츠가 그러는 것처럼.”
“저 말입니까? 갑자기 그게 무슨.”
“신전 근처까지 온 덕분에 겨우 기억났어요. 케르츠가 기도문을 외우는 이유. 케르츠도 지금 얽혀 버린 이후의 상황과 이전의 상황을 헷갈리고 있어요.”
대체 그게 무슨 소리인지 제대로 설명하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용사는 지금 이 수준의 설명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버겁다는 걸 알았기에 케르츠는 채근할 수조차 없었다. 그나저나 기도문이 문제라고? 대체 기도문을 외우는 행위에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거지? 그러니까…….
<이건 사실 보통 노래가 아니라 기도문이에요, 용사님.>
<기도문?>
<신관들의 기도문과는 같지 않지만요. 이걸 외우면 아무리 정신이 무너질 것 같은 상황이 찾아와도 최소한의 의식 정도는 유지할 수 있어요. 다시 말해, 이렇게 먹혔다 할지라도 당장 영혼이 잠식당하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아주 잠깐, 케르츠의 머릿속에 정체불명의 대화가 스쳐 지나갔다. 대체 언제, 무슨 맥락에서 나왔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 짤막한 대화. 그러나 케르츠는 본능적으로 눈치챘다. 이 대화의 내용이야말로 용사가 지금 하는 이야기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까 방금 그 대화는, 케르츠가 무언가에 ‘얽혀 버린’ 상황과 관련이 있는 거다.
그나저나 먹혔다고, 자신들이? 대체 무엇에게?
“그래도 케르츠 덕분이에요. 케르츠가 없었으면, 저나 하넨은 분명 진작에.”
“내가 뭐? 아니, 그 전에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얽혔다는 게 뭔데? 우리는 대체 뭐와 얽힌 거야? 설마 우리가 이 도시에서 무슨 주문에라도 사로잡혔단 거야?”
“정확히는 주문이 아니에요. 우리는 이 도시 자체에게 먹히고 있어요. 우리가 지금 보는 환상들은, 아마도 우리가 먹히면서 어쩌다 보니 만들어지는 찌꺼기일 뿐. 한정된 기억을 재료 삼아 너무 오랜 시간 동안 반복을 거듭하다 보니, 점점 그 내용이 이상해져서 결국 이렇게까지 되어 버린…….”
이건 용사 스스로 생각해 낸 결론인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알려 준 사실을 전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지. 어느 쪽이든 용사 딴에는 최선을 다한 설명이란 걸 알겠다. 하넨은 당황하며 용사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지만, 케르츠는 여전히 데르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용사는 이 이상으로 자세히 설명할 여력이 없다. 더 이상의 설명을 듣고 싶다면 용사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설명을 들어야 한다. 이를테면 지금도 문틈에서 흘러나오는 기도문을 외우는 장본인이라든지, 아니면…… 저 가짜 예언자라든지.
“역시 네가 제일 일찍 알아챘구나.”
“……!”
“어쩐지 여관방에서 계속 음식을 버리더라니. 저능아처럼 구는 주제에 쓸데없이 눈치만 빨라서는.”
히죽, 데르사의 입이 찢어질 듯 가로로 벌어졌다. 미소라기에는 지나치게 흉측한 낯짝이었다.
* * *
대화를 시도할 상황도, 물러날 상황도 아니었다. 어둠을 잡아먹고 부피를 키우기라도 한 듯 순식간에 거대화된 쇠톱이 데르사가 있던 자리에 내리꽂혔다. 그러나 손끝에 전해지는 감각이 없었다. 가짜 예언자를 반으로 쪼개는 감각까지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쇠톱이 바닥에 충돌하는 순간의 반동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던 터라 케르츠의 등골이 오싹해졌다.
[꿈 은 즐겁 게 꾸었어 ?]
마치 중력이 사라지기라도 한 듯한 감각이었다. 분명 케르츠의 시야에 들어오는 쇠톱은 지면을 파고들 정도로 세게 내리꽂혔으나 허공을 가른 듯 무게감이 없었다. 그의 두 발이 확실히 바닥을 짚고 있는데도 땅을 밟고 선 안정감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아서 몸이 저절로 휘청거렸다. 그는 뒤로 몇 걸음 물러섰지만 역시나 아무런 감촉도 느껴지질 않았다. 자신이 뭘 밟기나 했는지조차 의문이었다.
[꿈 은언제 쯤 그만 꿀작 정이야?]
“케르츠, 위!”
하넨의 외침에 케르츠는 반사적으로 몸을 날려 굴렀다. 하지만 그 순간 찾아온 건 오히려 누군가가 어깨와 가슴을 강하게 걷어차는 듯한 충격이었다. 자신이 옆으로 구른 게 아니라 신전 입구 근처의 기둥에 몸을 들이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제2의 공격이 그를 덮쳐 올 때쯤이었다. 케르츠는 허겁지겁 쇠톱을 들어 공격을 막아 냈지만 막아 내는 감각이 들기는커녕 다시 한번 배 속이 뒤집힐 듯한 충격이 덮쳐 왔다.
[도와줘 , 무언 가가나를 먹어치우 고 있어!]
새된 비명 같은 목소리가 케르츠의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분명 데르사의 목소리였지만 케르츠는 저게 인간의 목소리인지 인간 아닌 것의 흉내인지 제대로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한편으로는 사람을 조롱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진심으로 구조를 바라는 것 같기도 했다. 어느 쪽인지 확신할 수도 없었고, 설령 확신한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지도 알기 어려웠다.
‘기도문, 기도문을 외워야 해.’
다행히도, 가까스로 의식의 수면 위로 올라온 그 한 마디에 케르츠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다름 아닌 케르츠 본인이 용사에게 말했다. 기도문을 외워야만 영혼을 잠식당하지 않는다고.
[아으 흐 덴, 라프누테 옐 사이……!]
키이이, 마치 괴성을 지르는 듯한 이명이 머릿속을 휘몰아치고서야 케르츠의 이성이 또렷하게 돌아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누군가의 팔이 케르츠의 몸을 뒤로 휙 잡아당기고 있었다. 케르츠가 비틀거리며 물러나자 그의 코앞을 무언가가 확 스치고 지나갔다. 잘못하다간 저것이 케르츠의 머리를 절반으로 갈라놓았을지도 모른다. 방금 그건 환영이었던가? 처음부터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했나?
“이 멍청아, 갑자기 왜 정신을 놓고 있어!”
“허억, 저라고, 하, 윽…….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줄 압니까?!”
아슬아슬하게 잡아당긴 하넨이 거의 울 듯한 목소리로 고함치는 동안, 하넨의 지팡이에서는 선명한 노란색과 녹색의 안개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노란색 안개에 닿으면 전신이 마비되고 녹색 안개에 닿으면 쇠조차도 순식간에 벌겋게 녹아 액체처럼 뚝뚝 떨어져 버린다. 분명 실재하는 대상에게는 그 무엇보다도 위협적인 마법인데, 아니, 그래야 할 텐데.
“뭐야, 이건 또?!”
녹아내리기는커녕 오히려 그 안개 속에서 새로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마치 촉수처럼 생긴 수십 개의 줄기가 안개 안쪽으로부터 슬금슬금 기어 나왔다. 아니, 그건 줄기가 아니었다. 잘 보니 그건 인간의 척추뼈였다. 마치 몸에서 바로 뽑아내기라도 한 듯 피와 뇌수 따위로 범벅이 되고, 그 끝에는 손상되어 원형조차 알아볼 수 없도록 얼굴이 뭉개진 머리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젠장, 저것도 환상입니까?!”
[결국 끝 날세 계의 무엇을 믿 어 ? 누구도 이 어지기 기대하 지않 는 세계를 어째 서구하 려고 해?]
케르츠가 기도문을 외우며 있는 힘껏 쇠톱을 휘두르자, 척추의 모양을 한 촉수들은 비웃듯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사라져 버렸다. 저것 또한 실체가 없는 환영임이 분명했다.
다만, 그 환영이 내뱉는 말은 단순히 아무 말이나 지껄이는 게 아닌 듯했다. 케르츠와 하넨, 용사의 ‘사명’을 알지 못하면 할 수 없는 조롱과 비아냥이었다. 정말로 정신을 잠식당하고 있다는 사실이 체감되면서 희미한 두려움이 내장을 조여 왔다.
[세 계를 구원한들 사라지 지 않는죄가 있 어.]
[속죄를 거듭 한 들 과거 가지워 지지 는 않아.]
구역질을 닮은 거부감에 저도 모르게 목을 부여잡을 수밖에 없었다. 단순한 도발에 불과할 뿐 귀담아들을 가치조차 없는 이야기임을 알면서도 마음이 흔들리는 것만은 막을 도리가 없었다. 분명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받아들이고 싶지는 않은 진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고, 그 누구도 이해해 주길 바라지 않는 어설프고 우스꽝스러운 두려움.
신전에게 붙잡혀 사명을 떠맡은 이후로 늘 마음 한구석에 멍울져 있던 감정의 찌꺼기였다. 물론 사명의 달성이 우선이었기에 단 한 번도 그 찌꺼기에 시선을 둘 생각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찌꺼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를 리는 없었다.
설령 세상이 정화된다 할지라도 그 정화된 세상에 케르츠가 설 자리는 없을 거다. 무너져 가는 세계에서도 모두의 두려움과 혐오를 사는 대상이 올바른 세계에서라고 환영받을 리는 없다. 의무감은 있지만 기대감은 없다. 이 업이 끝나기를 바라지만 그 이후의 삶이 행복하기를 바라지도 못했다.
‘휘둘리지 마, 멍청한 생각에 휩쓸려선 안 된다고.’
어차피 지금도 행복과는 거리가 먼 주제에 미래의 행복이 보장되지 않았다 하여 좌절해서는 안 된다. 케르츠는 가까스로 마음을 다잡았지만 그래도 상황은 썩 좋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마치 아주 짙은 밀도의 검은 안개에 휩싸여 있는 듯한 감각이었다. 분명 하넨이 옆에 있는 걸 아는데도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았다. 이래서야 쇠톱을 휘두를 수도, 적을 공격할 수도 없었다.
기도문, 기도문을 또 외워야 하는데. 인면철 갑옷을 이용하는 주술로서의 기도문이 아니라, 마음을 다잡기 위한 광신도의 기도문을. 그래야만 환영으로부터 벗어나고, 영혼이 갉아먹히는 걸 막을 수가…….
‘잠깐, 애초에 내가 벗어나야 할 환영은 무엇이지?’
맥락조차 없이 불쑥 튀어나온 상념에 케르츠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건 정말이지 뜬금없으면서도 불길하기 짝이 없는, 그러나 한 번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입이 쭉 찢어진 채 기괴한 미소를 얼굴에 걸친 데르사도, 생으로 뽑혀 나간 척추와 머리의 묶음도, 그리고 지금 이 검은 안개도―전부 환영의 ‘본질’은 아니다.
용사는 자신들이 ‘먹히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처음에 케르츠는 그걸 다소 추상적으로 해석했다. 그러니까, 데르사나 이 마을을 잠식한 무언가가 환영으로 정신을 침식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한 일종의 비유인 줄 알았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생각해 보니 애초에 용사는 그런 식의 비유를 잘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신들이 먹히고 있다는 말은 문자 그대로 해석해야 한다는 뜻이다.
게다가 데르사는 용사에게 그렇게 말했다. ‘어쩐지 음식을 버리더라니.’라고. 되짚어 보니 그건 대체 무슨 뜻이었을까? 생각해 보면 용사는 끊임없이 여관방의 음식을 버리곤 했다. 빵을 한 입 먹고는 내버려 두었고, 케르츠가 마시던 찻잔을 빼앗아서 찻물을 창밖으로 버리고, 남은 빵은 죄다 화롯불에 넣어 버리고…….
‘잠깐, 설마 거기서부터……?’
거기서부터가 가짜였다. 전부 환영이었던 거라고! 케르츠는 그제야 눈이 번쩍 뜨이는 느낌이었다. 용사는 그 여관방의 음식들이 진짜가 아닌 걸 알았으니까 전부 버렸던 거다. 어쩌면 그건 핏물이나 썩어 빠진 구더기 덩어리였을지도 모르지. 겉모습이 근사해 보여서 눈치채지 못했다. 멍청하게도.
케르츠 일행이 길을 걸으면서 보았던 수많은 환영들이나, 환영이 아니라 현실이었다고 생각했던 도시의 모습들이나, 결국 환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조금 더 세밀한 환영인지 개연성 없이 어색한 환영인지의 차이만 있을 뿐. 용사의 표현에 따르면, ‘먹히면서 만들어지는 찌꺼기’라고 했던가. 그 ‘먹힌다’라는 단어를 조금 더 직설적으로 해석하자면.
‘어.’
그렇게 끊임없이 생각이 확장되던 중, 마침내 케르츠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어쩌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케르츠 자신조차도 환영일지도 모른다. 쇠톱을 휘두르는 자기 자신조차도 정말은 실존하지 않는다. 세차게 휘몰아쳐 얼굴을 때리는 바람도, 몸 여기저기가 얻어맞은 듯 얼얼한 통증조차도 진짜가 아니다.
이 모든 상황이 꿈이다. 그렇다면 꿈이 아닌 현실의 케르츠는 어디에 있는가. 현실의 케르츠는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가.
[케르츠, 케르츠! 기도문을 외워요!]
용사의 외침이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용사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용사는 두 사람이 허둥지둥하는 사이에 벌써 신전 입구를 열고 안으로 들어간 게 아닐까? 그 안에 들어가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했으니까.
[기도문을 외워야 해요, 그래야 더는 영혼이 먹히지 않는다고요!]
아, 그래. 맞는 말이다. 이 환영은 자신이 먹히면서 생겨나는 부산물, 영혼이 먹히지 않으면 환영 또한 더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서 얼마나 더 열심히 기도문을 외워야 하지? 지금까지도 몇 번이나 기도문을 외웠지만 이 꿈에서 깨어나지 않았잖은가.
아니, 용사가 말한 ‘기도문’이란 건 꿈속에서 외워 봤자 소용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꿈속에서 음식을 먹더라도 현실의 자신이 굶으면 배가 고픈 것처럼, 꿈속에서 기도문을 외우더라도 현실의 자신이 정신을 잃고 있으면 소용이 없는 거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 꿈에서 깨어날 수 있을까? 필사적으로 궁리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도중, 새까만 안개 속에서 무언가가 서서히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신전의 입구였다. 벽은커녕 건물조차 없이 그저 커다란 문만이 덩그렇게 놓여 있는 광경은 분명 비현실적이었지만 케르츠는 곧바로 짐작했다. 저것이야말로 현실로 가는 문이라는 사실을.
그는 망설임 없이 그 문을 향해 달렸다. 사방에서 온갖 사람들과 사념을 닮은 괴물들이 쏟아져 나왔지만 케르츠는 차라리 그것들을 보지 않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어차피 전부 환상이다. 아무리 위협적이더라도 현실의 자신에게는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저를, 부디 저를 버리지 마시고.’
이쯤이다 싶은 지점에서 활짝 손을 뻗자 문의 감각이 손끝에 닿았다. 팔에 있는 힘껏 힘을 주었더니 삐걱거리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와 동시에 세상이 무너지듯 사방이 진동했다. 눈을 감고 있음에도 등 뒤의 허상이 산산조각으로 흩어져 먼지가 되어 날리는 모습이 저절로 그려졌다.
이윽고 문이 완전히 열려, 케르츠가 문 안쪽으로 뛰어든 순간.
* * *
“흐, 허억……!”
차가운 물세례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케르츠는 눈을 번쩍 떴다. 이마와 등허리에 맺힌 식은땀의 축축함이 생경하면서도 또렷했다. 그와 동시에 전신을 큼지막한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특히 하반신과 팔꿈치 아래, 수십 수백 개의 바늘 위에 끈적하고 질척거리는 점액질이 듬뿍 얹힌 듯한 불쾌한 감각이 버거웠다. 게다가 입 안에는 피와 썩은 고기를 뒤섞은 듯한 역겨운 덩어리들이 가득 섞여 있어서, 케르츠는 비몽사몽간에 그걸 뱉어 버렸다. 그 덩어리들이야말로 자신이 무심코 먹었던 ‘음식’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조금 나중에야 들었다.
몇 번이고 헛구역질을 해 가며 덩어리를 다 뱉은 케르츠는 겨우 혀를 움직여 기도문을 읊조렸다. 순식간에 머릿속이 맑아지며 정신이 또렷해졌다. 어쩌면 자신은 아주 예전부터 이 기도문을 외우려 시도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띄엄띄엄 외운 기도문 덕분에 겨우 완전히 정신을 잃지 않았을 거라는 깨달음이 불현듯 찾아왔다.
‘여기는.’
시야에 들어오는 건 아까와 마찬가지로 어둠뿐이었지만 케르츠는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금방 깨달았다. 신전 안이었다. 그야 신전의 입구를 열고 들어왔으니 여기가 신전인 것도 당연하다고 여길 수 있겠지만, 유감스럽게도 이건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케르츠는 방금 입구를 열고 신전에 들어온 게 아니다. 그는 처음부터 이 신전에 있었다. 환영 속의 그가 도시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동안 케르츠의 몸은 이 신전에서 천천히 부식되어 가고 있었다.
환영 속의 용사가 자신들을 신전으로 이끌었던 이유는 단 하나, 환상 속의 케르츠와 현실의 케르츠가 존재하는 장소가 일치해야만 이 저주받을 환영을 파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용사는 환영 마법의 규칙을 이해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저 신전에 오면 환상을 깰 수 있을 거라는 직감에 따라 그렇게 행동했을 뿐이겠지만.
“정신이 들었어요, 케르츠?”
“……용사님.”
뻐근하여 제대로 돌아가지도 않는 목을 돌려 케르츠는 용사를 바라보았다. 애써 밝음을 쥐어짜 내는 목소리와는 달리 용사의 꼬락서니는 말이 아니었다. 피로 범벅이 된 얼굴과 녹아내린 갑옷은 물론이요, 팔다리는 정체불명의 검붉은 점액질에 파묻혀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어 보였다.
그러나 지금 케르츠가 저이를 동정하고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전신에서 느껴지는 감각을 미루어 짐작할 때 자신 또한 저 꼬락서니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하반신을 슬쩍 내려다보니, 지금 케르츠의 몸은 거의 허리 근처까지 점액질에 묻혀 있었다. 대체 어디까지 ‘먹힌’ 건지는 감조차 오지 않았다.
하넨은 어디 있으려나 싶어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노라니 바로 옆에서 끙끙거리는 소리가 났다. 역시나 점액질에 파묻히다시피 한 하넨이 반쯤 잠이 덜 깬 낯으로 힘겹게 눈을 뜨고 있었다. 용사의 얼굴이 그나마 환하게 밝아졌다.
“다행이에요, 둘 다 깨어났구나.”
“용사님 덕분입니다. 고마워요.”
“그래, 용사가 아니었으면 정말 어떻게 되었을지……. 케르츠 너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냥 천방지축 날뛰기만 하더라.”
“아무것도 모르는 건 마법사님 쪽도 마찬가지 아니었습니까?”
“시끄러워, 나는 환영 마법 전문이 아니라고! 좀 모를 수도 있지!”
하넨이 투덜거리면서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동안, 환영이 걷혀 맑아진 케르츠의 머릿속으로 그동안 잊혔던 기억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자신들이 왜 이 신전에 발을 들였는지, 어쩌다가 이토록 지독한 환술에 걸려들어 그 고생을 했는지……. 환영에 잠식당해 있을 때까지만 해도 완전히 마비되었던 현실 감각이 드디어 제 기능을 되찾았다.
‘폭설을 피하려고 이 도시에 왔던가. 거기까지는 환영 속에서의 상황과 똑같았지만…….’
환영과는 달리, 현실의 도시는 세 사람이 발을 들인 시점부터 이미 무너져 있었다. 건물은 정체불명의 공격에 의해 전부 무너지다시피 했고, 불빛이나 사람의 흔적이라고는 찾을 수 없었으므로 세 사람은 도시가 쇠락했음을 금방 짐작했다.
그저 눈보라를 피하는 게 목적이었기에 세 사람은 그나마 큰 피해를 입지 않은 자그마한 여관에 들어가 잠자리를 마련했다. 다른 건물의 허름한 판자를 떼어 와 창틈에서 들어오는 바람을 막고, 버려진 모포와 천을 최대한 모아다가 끌어안은 채 잠을 청했다.
다만 세 사람이 미처 몰랐던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검붉은 폭설이 도시 전체를 뒤덮은 탓에 눈치채기가 어려웠지만, 사실 이 도시가 엉망으로 파괴된 건 불과 며칠 전의 일이었으며 그 원인이었던 사념은 이 도시를 아직 떠나지조차 않았다. 아주 나중에 알게 된 사실에 따르면 사념이 도시를 집어삼킨 건 고작 81시간 전의 일이었다고 한다.
도시의 수많은 인간들을 잡아먹고도 만족하지 못한 사념은 기어코 새벽에 세 사람을 기습해 왔다. 사념의 형태는 단순하면서도 가장 대처하기가 끔찍했다. 도시의 꼭대기에 세워진 신전으로부터 쏟아져 나와, 끊임없이 불어나는 새까만 점액질과 살점과 선혈의 바다. 해일처럼 쏟아져 내려 사방을 뒤덮는 그 압도적인 물량은 그저 존재만으로도 인간에게 위협이 되었다.
쇠톱으로 벤다 하여 베어질 물체가 아니었다. 독성 안개로 녹이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칼로 물을 베는 게 불가능하듯 이 사념 또한 물리적인 타격만으로는 해치울 방도가 없었다. 도망치려 해도 이미 온몸이 점액질의 바다에 잠겨 있어 불가능하였으므로, 세 사람은 그저 점액질의 흐름에 따라 신전에 휩쓸려 갈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하지요, 케르츠?! 이렇게까지 부피가 엄청난 사념은 저도 정화시킬 수 없어요!>
<분명 어딘가에는 이 점액질 바다를 만들어내고 조종하는 본체가 있을 겁니다! 그 본체를 찾아내야 해요! 대체 어디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본체에 접근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아니, 점액질 바다가 알아서 세 사람을 본체가 있는 곳으로 데려다 주다시피 했다. 마치 중력의 흐름을 거슬러 가는 강물처럼 흘러가던 점액질은 그들을 신전까지 밀어 넣었고, 신전 한가운데에는 누가 봐도 ‘본체’로 보이는 거대한 수정체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수정 자체는 투명하고 반짝거렸지만 그 안쪽에서 왈칵거리며 흘러나오는 점액질과 핏덩어리를 보면 도무지 아름답다는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저것을 부수거나 정화할 수만 있다면 이 점액질의 바다 자체를 무력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저히 몸이 따라 주지를 않았다. 점액질의 집요한 습격에 갑옷은 물론이요 전신이 녹아내리는 듯하였고, 마치 근육이 끊어진 것처럼 팔다리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게다가…….
<젠장, 이 점액질……. 우리를 소화하면서 그 부산물로 환각 물질을 내뿜고 있잖아!>
어느 순간부터인가 전신의 감각이 몽롱해지고 머릿속에 안개가 낀 듯 사고가 무뎌졌다. 당시에는 그저 사냥감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마비약인 줄 알았는데, 방금 겪은 일로 판단하자면 단순히 개개인에게 환각을 불어넣는 수준이 아니라 사냥감 모두가 같은 환상을 공유하는 수준까지 이르렀던 모양이다. 대체 왜 사념이 그렇게까지 번거로운 짓을 했는지는 도무지 알 수 없었지만.
<아마도 기억을 이용한……. 한정된 기억을 재료 삼아……. 젠장, 머리가 어지러워서 도저히……!>
아주 나중에, 어린 언데드 상인에게 이 날의 이야기를 했을 때 언데드 상인은 묘한 가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어쩌면 그 점액질의 바다는 자기가 먹은 인간들의 영혼을 자신의 안에 ‘가둬’ 두고 싶었던 건 아니겠냐고. 광대한 바다를 헤엄치는 물고기처럼 케르츠와 일행들 또한 영혼의 바다에 갇혀, 끊임없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현실을 외면하게 될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물론 그건 정말로 나중의 이야기.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당시의 케르츠는, 그저 눈앞에 놓인 상황을 확실히 이해하는 데만 골몰할 뿐이었다.
“일찍 제대로 설명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여관에 있을 때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떠오르지가 않고, 그냥 뭔가 이상하다는 감각밖에는 들지 않아서.”
“아니야, 네 덕에 우리가 환영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으니까. 그나저나 [공동 환영]이라……. 이 사념에 붙잡혀 ‘먹히는’ 자들이 모두 동일한 환영을 공유하고 있던 건가?”
“그런 것 같군요. 아마 우리가 본 환영 중에는 다른 사람들의 기억도 섞여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 마을 사람들의 기억이라든지, 다른 도살자의 기억이라든지요. 어쩌면 몸은 이미 먹히고 환영 속 기억으로만 남은 이들도 있을지도 모르습니다.”
그러니까, 일단 정신을 차린 것까지는 좋은 일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빨리 깨어난 것 같아 다행이었다. 만약 너무 늦었더라면 정말로 못 깨어난 채 저 사념에게 먹혀 버렸을지도 모른다. 마치 데르사처럼. 그자가 마지막 순간에 좀 괴상한 모습을 보인 건 사실이지만, 용사의 말에 따르면 아마도…….
“야, 저거……. 그 데르사인가 뭔가 하는 녀석 맞지?”
주변을 부지런히 둘러보던 하넨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넨의 시선이 붙박인 장소를 확인한 케르츠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뽑혀 나간 목과 그 아래로 꼬리처럼 길게 늘어진 척추, 아직 온전히 먹히지 않고 주렁주렁 달린 내장. 사념에게 거의 다 먹히다시피 한 데르사는 머리만 남아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직도 눈을 감고 있는 걸 보면 아마 그의 환영은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이제 죽었거나.
다만 케르츠는 데르사보다 더 신경 쓰이는 점을 하나 발견했다. 아무래도 하넨은 데르사의 끔찍한 몰골에 정신이 팔려 미처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지만, 케르츠는 데르사의 뒤에 마치 석순처럼 돋아난 수많은 물체들을 바라보았다.
“용사님.”
“네?”
“데르사가 다른 무언가와 얽혀 있어서, 얽히기 이전과 이후의 상황을 헷갈린다고 용사님께서 말했지요.”
“그러긴 했지만……. 그게 왜요, 케르츠?”
“어쩌면 얽히기 전에는 꽤 좋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군요. 저게 바로 묘비석입니다, 용사님.”
케르츠는 찐득거리는 점액질들이 표면에 잔뜩 달라붙은 묘비석을 가리켜 보였다. 정상적인 묘비석과는 약간 다른, 마치 한 개의 묘비석을 뿌리 삼아 수십 개의 묘비석이 자라난 것 같은 형태의 묘비석들이 데르사의 뒤에 줄지어 세워져 있었다.
아마 저것이야말로 환영 속의 데르사가 발동하려던 마법진의 결과가 아닐까 싶었다. 다만 현실은 환영 속처럼 부유하지 못하니 돼지나 염소는커녕 오리 한 마리 제물로 바칠 수 없었겠고, 수많은 소마법진들의 보조를 받는 대규모 마법진도 그리지 못했을 테니 그 규모가 매우 축소되었겠지. 수천 명의 주민을 모두 살리지는 못한 채 고작 백여 명만 보호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다면 애초에 데르사는, 도살자가 아니라 이 사념들로부터 모두를 보호하기 위해 마법을 발동한 건가?”
“아마 그런 게 아닐까요? 아마 너무 오래 환영 속에 머물러서 사실 관계를 혼동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죽은 자를 공격하지 않는 건 사념이나 도살자나 마찬가지니까……. 어?”
그 순간 케르츠는 한 가지 잊었던 점을 깨달았다. 아까 보았던 그 환영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환상 속의 용사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도살자는 아직 살아 있다’라고. 그 말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세 사람이 깨어났으니 도살자가 벌써 죽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그 도살자는 어디에 있지?
“야, 잠깐. 그러고 보니 도살자는 어떻게 됐어? 일단 도살자가 이 사태의 원흉이 아니란 건 확실한데, 그 도살자가 실존하는 인물은 확실해? 그 녀석도 이 사념에게 먹힌 거야?”
하넨 또한 케르츠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찝찝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얼핏 보기엔 지금 이 신전에 살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셋밖에 없었다. 하넨과 케르츠는 반사적으로 용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다소 씁쓸한 낯을 한 용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용사를 따라 고개를 든 두 사람은…….
[무 력화마 법 이 완성되 었더 라면 좋았을 텐데.]
[묘 비 석이 너무 거추 장스러 워 이 도살자도 저 도살자도 그 이상 한기 도 문도.]
전신이 점액질 덩어리에 잠식된 채 천장에 매달린 한 사내의 모습을 보았다. 소리조차 낼 수 없는지 그저 입술을 달싹일 뿐인, 아무도 들을 수 없는 기도문을 읊조리는 도살자의 모습을.
천장에 매달린 사내의 모습은, 사실상 소규모의 사념과 별 차이가 없게 보일 정도로 징그러운 꼬락서니였다.
―부디 저희의 추함에 관용을 내리시지 마시고. 저희의 악행을 눈감거나 위로하지 마시고.
―부디 저희를 속박한 목줄을 놓지 마시고. 저희에게 책임질 수 없는 자유를 주지 마시고.
―부디 용서치 마시고, 죄인을 사랑하지 마시고…….
머리카락이며 볼에 달라붙은 점액질이 얼굴의 절반 가까이를 파먹어서 안구나 피부 아래의 근육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아예 점액질에 파묻히다시피 한 팔다리는 상태가 더 심각해서, 자세히 보면 근육마저 다 녹아내려 뼈가 다 드러날 정도로 상태가 심각했다.
심지어 몸뚱이 또한 장기를 담는 그릇의 역할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미 녹아내린 옆구리의 구멍으로 장기의 일부가 흘러나오는 게 아예 눈에 보였고,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아예 모든 내장이 쏟아져 내릴 지경이었다. 위치로 보아 아마도 케르츠와 하넨의 머리 위로 쏟아질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그러나 더 섬뜩한 것은, 그렇게 제 형태를 잃다시피 한 상태에서도 두 눈을 부릅뜬 채 살아서 기도를 읊조리는 모습이었다.
―부디 저희를 용서치 마시고.
―부디 저희를 버리지 마시고.
케르츠는 한숨을 목구멍 깊이 밀어내며 천장의 사내를 올려다보았다. 가장 눈에 띄는 도살자의 증거여야 할 인면철 갑옷은 녹았는지 벗겨져 나갔는지 형태를 찾을 수 없었고, 쇠톱 또한 잃어버렸는지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케르츠는 확신할 수 있었다. 저 사람이야말로 자신과 동료들이 환상 속에서 보았던 그 도살자임을.
저이가 지금 외우는 기도문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폐가 제 기능을 못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희미한 중얼거림이었지만 상관없었다. 입술을 달싹이는 모양만 보아도 케르츠는 저이가 무슨 기도문을 외우는지 금방 이해했다. 자신의 어머니도, 자신도 수백 수천 번은 반복해 외웠던 기도문이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언어와는 다른 체계의, 오직 속죄와 한탄을 위해서만 사용되는 언어. 한때는 한 교단의 증거였지만 이제는 그 누구도 기억해 주지 않는 저주받은 언어. 부모로부터 자식에게로 구전되어 겨우 명맥을 유지할 뿐인 저 언어를 읊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이가 도살자라는 증거는 확실했다.
‘게다가, 저 검은 안개.’
천장에는 검은 안개가 자욱했다. 신전의 절반을 가득 채운 채 넘실거리는 점액질 바다 때문에 쉽사리 눈치채기는 어려웠지만, 사실 점액질이 점유하지 않은 나머지 절반의 공간은 전부 저 검은 안개가 차지하고 있었다. 창밖의 달빛조차 침범하지 못할 만큼 농밀한 안개는 점액질을 짓누르고 깔아뭉개 쉽사리 움직이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었다. 어쩌면 사내가 저 처참한 상태에서 기도문이나마 외울 수 있는 것 또한 안개의 힘 덕분이 아닐까.
‘하지만 좋은 징조는 아닌데. 안개의 상태를 보니 저자는 이미 제정신이 아니야.’
저 검은 안개는 도살자가 현재 광증에 휩싸였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다. 도살자의 체내에 담긴 오염과 악함이 더는 억제되지 못한 채 몸 밖으로 흘러넘치는 게 저 안개의 정체니까. 환영 속의 데르사가 갑자기 미쳐 버린 도살자에 대해 언급한 건 어느 정도 진실이 담긴 이야기였던 셈이다. 그러나 케르츠는, 저 도살자가 ‘어쩌다 보니 갑자기 광증에 잠식된’ 것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저이가 외우는 기도문이 그 증거였다.
―부디, 마지막까지 저희를 포기하지 마시고.
분명 저 도살자는, 점액질 바다의 습격을 막기 위해 지나치게 무리를 하다가 이성을 놓치고 광증에 짓눌린 게 틀림없었다. 그 탓에 정신이 망가져 버린 상태에서도 자신이 마지막으로 외우던 기도문을 끊임없이 읊조리는 거다. 아마 지금의 도살자는 자기가 무슨 기도문을 외우는지 자각조차 못하고 있지 않을까. 자신의 기도문이 묘비석에 갇힌 사람들을 그나마 보호하고 있으며, 나아가 케르츠 일행이 점액질 바다에 침식되는 속도를 늦추고 있다는 사실 또한…….
문득 케르츠의 머릿속에 찝찝한 가설이 스치고 지나갔다. 어쩌면 저 도살자가 사람들을 인도해 신전으로 데려오지 않았을까?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케르츠의 상상일 뿐이지만 어쩐지 지금 이 상황에서는 가장 그럴듯한 추론 같았다.
도살자가 어딜 가나 환영받지 못하는 꺼림칙한 존재라고는 하나, 다른 한편으로 따지자면 도살자만큼이나 강력한 힘을 휘두를 수 있는 이들도 드물다. 갑작스러운 사념의 침입으로 패닉에 빠진 사람들이, 당장 강한 힘을 보여 준 사람에게 매달리고 그 사람의 지시에 따른다 해도 크게 이상할 건 없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꺼림칙했다. 그 추론이 사실이라면 저자는, 자기 딸이 추운 거리 한복판을 걷고 있어도 누구 하나 걱정해 주지 않았던 사람들을 위해 도망칠 기회조차 내팽개치고 나섰다는 뜻이니까.
케르츠가 깊게 숨을 들이쉬자 용사가 걱정 가득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 딴에는 케르츠의 기분을 환기시켜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케르츠도 기절한 내내 저렇게 기도문을 외웠던 것 같아요. 가끔 기도문이 끊기기도 해서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그랬습니까?”
“네. 케르츠의 기도문이 아니었으면, 아무리 저라도 완전히 정신을 차리지는 못했을 거예요.”
“정확히는 저와 저자의 기도문이 같이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어쩌면 저자가 기도문을 외웠기 때문에 저 또한 무의식적으로 기도문을 따라 외운 걸지도 몰라요.”
용사는 씁쓸한 얼굴로 천장과 케르츠를 번갈아 바라보았지만, 도살자는 밑에 있는 세 사람을 인식할 능력조차 상실한 듯 그저 멍하니 입술만 달싹거리고 있었다. 케르츠는 기도문을 크게 외쳐서 천장의 도살자의 관심이라도 끌어 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고작 그 정도로 무마될 광증이 아니다. 게다가 무기와 갑옷을 모두 잃고 팔다리마저 녹아내린 도살자를 깨워 봤자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고.
지금 케르츠가 주의를 집중해야 할 건 오히려 다른 쪽이다. 수많은 도시 사람들을 이미 삼켜 없앴고, 마법사 데르사와 도살자를 녹여 삼키는 중이고, 이제는 용사 일행까지 집어삼키려 드는 이 탐욕스러운 바다의 사념.
[거 추 장 스러 워.]
[거추 장 스 러워.]
[모 두녹아 서 똑 같 아 지면 거추장 스 럽지않 아.]
“하나만 묻자, 케르츠. 원래 사념이 말을 할 수 있었냐? 내 기억에 따르면 사념은 의지 같은 게 없거든?”
“마법사님의 기억이 맞을 겁니다. 원래 사념이 가진 건 순수한 악의뿐이고 의지나 자아 같은 건 존재하지도 않아요. 아마 저건……. 저 사념이 지금까지 흡수한 영혼들의 기억을 조합해서 아무 말이나 만들어 내는 게 아닐까 싶군요.”
데르사의 목소리, 도살자의 목소리, 아이와 노인과 남자와 여자의 목소리. 그 모두가 제멋대로 뒤섞여 수없이 많은 목소리가 불규칙하게 아우성치는 걸 보면 아마 그게 맞지 않나 싶다. 심지어 저 목소리는 말하는 속도조차 맞지 않아서, 누군가의 목소리는 더 늘어지고 누군가의 목소리는 일찍 끝나는 바람에 말을 제대로 알아듣기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케르츠는 자신의 말을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 케르츠 일행을 붙들어 둔 이 사념은 어쩐지 보통 사념과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도시 하나를 쓸어버릴 정도의 거대한 규모도 규모지만, 어느 정도의 지능까지 가지고 있는 것처럼 구는 게 진짜 문제다. 이 사념은 보통의 사념이라면 죽었으려니 하고 그냥 넘어갔을 법한 묘비석 안 사람들조차 잡아먹으려고 획책하고 있을 정도니까.
‘게다가 이 사념, 분명 환상 속의 데르사를 조종해 자기 뜻을 이루려 하고 있었어. 도살자를 도시에서 쫓아내 그 영향력을 줄이려 하고, 무력화의 마법진을 그려 묘비석을 없애려 들고…….’
케르츠는 마법에 대한 지식이 부족해서 ‘환영 속에서 외운 주문이 실제로 현실에 적용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 답할 수 없지만, 만약 주문이 진짜 발동되었다면 묘비석은 무력화 주문에 순식간에 해제되어 없어졌을 거다. 그리고 묘비석 내부에서 가까스로 보호받던 사람들은 무방비 상태로 점액질 바다에 떨어져 잡아먹혔겠지.
“그래도 저 사념, 어느 정도의 지능은 가지고 있는 것 같아. 조심해야 해.”
“그런데요, 하넨.”
“왜?”
“조심해야 하는 건 알겠는데 어떻게 조심해야 하지요? 지금 저희는 움직일 수조차 없잖아요.”
“그건 나도 알……. 우, 우와앗?!”
용사의 노골적인 질문에 퉁명스럽게 대답하던 하넨이 느닷없이 비명을 질렀다. 마치 용사 일행의 이야기에 반응하기라도 한 듯 점액질 바다가 거칠게 출렁거렸기 때문이다. 세 사람은 허겁지겁 발버둥 치며 바다에서 빠져나가려 애썼지만, 잘 보니 문제는 바다뿐만이 아니었다.
“무언가가 아래에서 움직이고 있어요! 조심하세요!”
케르츠가 비명처럼 고함을 지른 순간 점액질 바다에서 수십 마리의 ‘물고기’가 튀어 올랐다. 물론 바다에서 튀어나온다는 점에서 착안해 물고기라는 이름을 붙였을 뿐 진짜 물고기는 아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들은 전부 사람이었다. 팔다리는 이미 점액질에 녹아내려 사라졌고, 그나마 남은 거라고는 머리와 그 아래로 죽 이어진 척추뼈밖에 없어서―마치 척추뼈가 지느러미나 꼬리라도 되는 듯 꿈틀거리며 튀어 오를 뿐.
사람이라고 해야 할지 물고기라 해야 할지 혼란스러운 생김새의 그것들은 하나같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영혼은 이미 사념에게 전부 빼앗기고 남은 육신만이 사념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저편에서 축 늘어진 채 꿈틀거리던 데르사의 육체 또한 곧 파르르 몸을 떨더니 물고기처럼 수면 위로 튀어 올랐다. 그야말로 인면어 그 자체의 모습이었다.
[도와 줘아니 야 부디 너희라 도살 아나 가]
[너 희를 먹고천장 의도 살 자도먹어버 리 자 묘비석 의주 문은 천 천 히 풀어 도될거야]
아주 잠시 데르사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지만, 그 목소리는 뒤이어 터져 나온 수많은 목소리들에 묻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인면어들은 데르사를 중심으로 모여들어 파닥거리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아무리 봐도 공격 대형을 갖추는 모습이 노골적이었다. 지금 저 인면어들이 습격해 온다면 반항도 못하고 당해 버린다. 케르츠는 이를 바득 갈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더라면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할 게 아니라, 우선 팔다리의 주박을 푸는 데에 매달릴걸!
그때였다. 겁에 질린 채 하얗게 굳어 있던 하넨의 얼굴에 일순간 총기가 어렸다.
“젠장, 팔다리가 묶여서 도무지 어떻게 할 수가…….”
“야, 케르츠! 너 피 나올 정도로 혀 깨문 다음에 나한테 침 뱉어 봐!”
“뭐라고요? 마법사님, 평소 무슨 취향이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이 상황에서 뭘 하고 싶으신……?!”
“개자식아, 내가 이상한 취향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네놈의 부정한 피라면 어떻게든 촉매가 될 거라고! 일단 하라는 대로 좀 해!”
일단 급한 마음에 시키는 대로 순순히 행동하자, 하넨의 지팡이에 달린 액체 주머니가 갑자기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주변의 점액질이 쉭쉭거리며 녹기 시작했다. 고무를 태우는 듯한 역겨운 악취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팔다리를 단단히 붙들고 있던 점액질이 조금 흐물흐물해지자 케르츠는 망설임 없이 하넨의 허리를 붙들었다. 그가 하넨을 끌어안고 점액질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벽 쪽으로 뛰어오르자, 용사도 반대 방향의 벽으로 뛰어올라 검은 안개의 영역까지 기어올라 갔다. 팔다리의 피부가 다 녹아내린 듯 따끔거렸지만 다행히도 움직이는 데에는 지장이 없었다.
“이런 게 있으면 좀 진작에 하면 덧납니까?”
“나도 방금 겨우 떠올렸어! 게다가 방금 그걸로 저 사념을 완전히 죽이려면 널 원심 분리기에 집어넣어서 아예 즙을 짜내야 했을걸? 아무튼, 이제 어쩔 거야?!”
“어쩌긴요, 저 수정체를 부숴야지요! 이대로 도망친다 쳐도 저 사념이 작정하고 쫓아오기 시작하면 금방 붙잡힐 겁니다!”
일단 생각나는 대로 말하긴 했지만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점액질 바다를 돌파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보통 일이 아닌데,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는 수십 마리의 인면어까지 돌파하려면 보통 각오로는 불가능할 거다. 게다가 인면어가 고작 저것밖에 없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분명 이 점액질 바다의 바닥에는 지금껏 사념에게 희생당한 수많은 인간들이 가라앉아 있을 터, 그것들이 순차적으로 떠오르기 시작하면 말 그대로 수천 마리의 인면어를 뚫고 가야만 한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점이 있다면, 이쪽에는 사념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정화할 수 있는 용사의 존재가 있다는 점이었다. 점액질의 바다를 모두 정화하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했지만 본체인 수정체 정도의 크기라면 손만 가져다 대도 곧바로 정화할 수 있다.
그러니 이 싸움의 관건은 어떻게 용사를 수정체 근처까지 보내냐 하는 점이다. 용사가 천장을 타고 이동해서 있는 힘껏 점프한다면 어떻게든 거리는 닿겠지만, 인면어들이 그걸 눈치채고 일제히 용사를 향해 달려든다면 분명 그대로 물어뜯겨 물고기 밥이 되고 말 테니까. 게다가 천장에도 어느 정도 점액질이 달라붙어 있어서 잘못하면 거기에 붙들려 버릴지도 모르고.
케르츠가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 고민에 빠져 있던 동안, 하넨이 갑자기 입을 벙긋거리면서 용사에게 무언가 신호를 보냈다. 처음에는 어리둥절하던 용사는 곧 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야, 용사! 아까 그거 하자!”
“아까 그거……? 알았어요, 하넨. 이번에는 제대로 할게요!”
“예? 아까 그거라니 무슨 소리……. 마법사님?”
케르츠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반문하자 하넨이 그를 째려보며 옆구리를 콱 찔렀다. 뭔가 자기 나름대로 계획이 있긴 한 것 같은데, 문제는 하넨과 용사만 그 계획에 합의했고 케르츠는 뭔가 뭔지 전혀 이해가 안 간다는 점이었다. 케르츠가 당황해서 하넨을 바라본 순간, 저편의 벽에 있던 용사가 자못 비장한 목소리로 외쳤다.
“어서 가요, 둘 다! 여기서 제가 사념을 묶어 놓는 동안 두 사람이 도망치는 거예요!”
잠깐만, 뭐?! 케르츠가 뭐라 항변하기도 전에 용사가 이상한 고함을 지르며 물고기들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애초에 검을 잘 다룰 줄도 모르고, 설령 다룰 줄 안다 쳐도 절대로 선봉에 서서 위험을 자초해선 안 될 사람이 대놓고 희생을 이야기한다고? 당연히 안 될 말이었다. 그런 어처구니없는 일은 있을 수가 없다.
대체 저 어린애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케르츠는 당장 용사를 붙잡아 뒷덜미를 끌고 오려 했지만 그 순간 하넨의 팔이 케르츠의 목을 휘감았다. 평소 같았더라면 허약한 마법사의 손 따위 금방 떼어 낼 수 있었겠지만 몸 여기저기가 녹아 컨디션이 엉망인 상태에선 그나마도 버거웠다.
“뭐 하는 겁니까, 마법사님?!”
“여기선 우리라도 빠져나가는 수밖에 없어. 일단 용사가 여기서 시간을 벌면, 우리는 바깥으로 빠져나가서 저 사념을 처리할 대책을 강구하는 거야!”
“미쳤습니까! 우리가 이 몸을 희생해도 모자랄 판에 용사님을 방패 삼아 여기서 빠져나가자고요?! 대체 당신까지 왜 그래요?”
아니, 이 사람까지 어린애 장단에 맞추면 뭘 어쩌자는 거야? 케르츠가 어이가 없어서 소리를 지르든 말든 하넨은 그저 케르츠를 잡아끌고 창문을 가리켜 보일 뿐이었다. 케르츠와 하넨이 어처구니없는 촌극을 벌이는 동안 용사는 펄떡거리며 뛰어오르는 인면어들을 향해 마구잡이로 검을 휘둘렀다. 검술은 서툴러도 워낙 완력이 좋아서 그런지 인면어들이 픽픽 쓰러져 나갔다.
“어차피 이 사념이 용사를 완전히 소화시키려면 시간이 걸린다고! 그러니까 지금은 일단 바깥으로 빠져서, 이 사념을 무력화시킬 만한 마법을 준비해 오는 거야. 충분한 제물과 마법진이 있으면 이 점액질 바다 정도는 한 방에 녹여 버릴 수 있다고!”
“그 정도의 마법이라면 용사님도 같이 녹잖습니까! 당신 대체 왜 그래요, 갑자기!”
“안 녹아! 저 녀석이 얼마나 튼튼한데! 너야말로 멍청한 소리 하지 말고 어서 가, 지금 빠져나가지 못하면 우리까지 죽는다고!”
아예 막무가내로 떼를 쓰는 하넨의 태도에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 케르츠는, 이 인간을 창밖으로 냅다 던져 버리고 혼자 용사를 구출하러 갈까 좀 진지하게 고민했다. 물론 어느 쪽이든 지금의 케르츠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하넨을 창밖으로 던지자니 점액질이 슬금슬금 벽을 타고 올라와 창문 주변을 둘러쌌고, 용사를 구하러 가자니 어느새 몰려온 인면어들이 팔딱대며 케르츠를 포위하고 있어서 그조차도 버거웠다.
그 순간 하넨이 입을 뭐라고 벙긋거리며 케르츠를 노려보았다. ‘고집 부리지 마’도 아니고 ‘어쩔 수 없잖아’도 아닌, 명백히 다른 의미를 지닌 짜증의 문장. 케르츠는 잠시 하넨의 입을 바라보다가 조금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그 어색하고 떨떠름한 표정에 하넨이 픽 웃어 보이자, 그는 민망함을 지워 보이기 위해서인지 곧바로 하넨을 업었다.
“……미안합니다, 용사님! 뒤는 맡기겠습니다!”
졸지에 거꾸로 뒤집히고 만 하넨이 발버둥을 치든 말든 케르츠는 창가를 향해 몸을 날렸다. 물론 순탄한 일은 아니었다. 가까스로 창문 근처의 벽에 매달린 순간, 점액질들이 주욱 늘어나고 거기에 올라탄 인면어들이 썩어 들어가는 이빨을 드러낸 채 케르츠에게 달려들었다. 하넨이 허겁지겁 촛대를 잡고 벽에 달라붙자마자 케르츠는 쇠톱을 뽑아 들어 인면어들을 곧바로 쳐냈다. 머리가 함몰된 인면어들은 비명도 못 질러 본 채 바닷속에 풍덩 빠져 버렸다.
[갈 수없 어도 망 치지 마]
물론 사념이 거기서 물러나 줄 리는 없었다. 마침내 케르츠가 각오를 다진 걸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용사를 둘러싸고 있던 인면어 중 몇몇이 희번득 눈을 뜨며 케르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케르츠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쇠톱을 고쳐 잡자 점액질의 바다가 다시 출렁이더니 더 많은 인면어들이 출렁거리며 고개를 내밀었다. 수면에 머리만 내놓은 인면어들은 마치 익사자를 보는 것만 같아 보기가 거북했다.
[너희도 똑 같구 나 자 기만 살 겠 다고 도 살자를버 린 이 사 람들처 럼]
히죽, 수면 위에 떠올라 있던 인면어들의 얼굴에 일제히 기분 나쁜 미소가 어렸다. 마치 그게 신호라도 되듯 모든 인면어들이 한꺼번에 케르츠와 하넨을 향해 모여들었다. 용사는 당황한 것처럼 허둥지둥 굴며 인면어들의 관심을 끌려 했지만 인면어들은 당연하다는 듯 두 사람에게만 집중할 뿐이었다. 도망치지 않고 시간을 끌려는 사람과 도망치려고 작정하는 사람이 있다면 후자에 집중하는 쪽이 보편적일 테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지금, 용사와 케르츠와 하넨에게는 그 당연함이 필요했고.
“도살자를, 버렸다고요?”
[버려졌어 멍청하게도 버 려졌다 구 결국비 참하게남았잖 아이 렇게]
“도살자가 묘비석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걸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겁니까?”
[갑 옷도쇠톱 도 다 빼앗 기고이렇 게혼 자남았어 버려진거 야 버 려졌어]
흐흐, 마치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를 시작으로 인면어들이 일제히 튀어 올랐다. 하넨의 지팡이에서 흘러나온 연기의 벽이 인면어를 녹이고, 그조차도 뚫고 나온 인면어들은 케르츠의 쇠톱이 찍어 눌렀다. 다만 주변에서 점액질들이 벽을 타고 다가오며 점점 숨통을 조이고 있었기에, 하넨의 마법은 점액질을 태우고 녹이는 데에 집중되었고 인면어의 처리는 케르츠가 담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는 도 살자가 동료를버 리네 재 미있어재미 있다]
하넨이 땀을 뻘뻘 흘리며 점액질을 태우는 동안, 케르츠는 천장의 도살자를 흘끔거리지도 못한 채 부지런히 몸과 머리를 움직였다. 수많은 인면어들을 발로 차고 쇠톱으로 쳐내면서 그는 내심 의아한 마음을 가졌다.
어쩐지 갑옷과 쇠톱이 보이지 않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저 도살자가 인면철 갑옷과 쇠톱을 사람들에게 빼앗겼다고?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애초에 저 도살자가 그걸 빼앗도록 두지도 않을 테고, 마을 사람들 또한 사념에게 습격당하는 상황에서 굳이 자길 지켜 주는 사람의 유일한 장비를 빼앗지는 않았을 거다.
그렇다면 왜 저 사념은 그런 식의 결론을 내렸지? 잠시 의아해하던 케르츠는 곧 무언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어쩌면 저 도살자는 사념을 ‘속인’ 걸지도 모른다고. 케르츠는 자신이 무심코 쇠톱으로 찢어발기고 발로 걷어찼던 인면어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분명 그 중에는 아이의 얼굴이 거의 없었다. 흑발에 금안을 지닌 아이의 얼굴은 더더욱 없었고.
그 순간 케르츠는 도살자의 생각을 완전히 이해했다. 마치 자신이 버려지는 것처럼 보이도록 사념을 상대로 연기를 하면서, 저 도살자는 조금 더 ‘중요한 것’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마치 지금 케르츠와 하넨이 사념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해 연기하듯이.
[버 린대도 나갈 수는없 어 버려진대 도 비 참할뿐 이야 아무도 여 기에서 살아 나갈수는 없으 니 까]
“아뇨, 그자는 버려진 게 아닙니다. 왜 도살자의 갑옷이 없나 했더니 이제야 알겠군요.”
[뭐 ?]
“분명 저라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겁니다. 그는 아마 현재를 포기하는 대신 미래를 선택한 거예요. ……우리들처럼.”
[아, 어, 어?!]
그 순간, 벽에 붙어 우스꽝스럽게 검을 휘두르던 용사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하넨이 지팡이를 쳐들어 용사가 있는 벽의 점액질을 녹여 버리자, 용사는 순식간에 벽을 타고 기어올라 수정체를 향해 몸을 날렸다. 사념이 케르츠와 하넨 쪽으로 병력을 모두 집중한 덕분에 겨우 만들어진 틈이었다.
아무런 방해도 없이, 평범한 인간이라면 불가능할 거리의 도약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낸 용사는 검을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고는 그저 두 팔로 수정체를 끌어안았다. 점액질의 바다로 부글거리며 가라앉는 검을 보며 인면어들은 비웃듯 입매를 끌어 올렸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 웃어야 할 건 인면어가 아니라 용사였다.
[부서 지지 않아 고작 그걸로 부 서지지 어 잠 깐만 잠시 어 아 으]
“부서지지는 않겠지요. 그저 정화될 뿐.”
[아냐 아파 아 잘 못했 안 돼 살려 아 아냐 아니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는지, 수정체의 표면이 불안정하게 진동하고 그에 따라 점액질의 바다 또한 파도처럼 요동쳤다. 그러나 용사와 접촉한 시점에서 더 이상 저항은 의미가 없었다. 이 사념이 용사의 ‘정화 능력’을 알았더라면 애초에 접촉하려 들지도 않았겠지만 때는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거무튀튀한 자홍색을 띠던 수정체는 마치 불에 달구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점점 색이 밝아졌다. 질끈 감은 용사의 두 눈에서 눈물이 솟구쳤다. 처음에는 액체로 뺨을 적시던 눈물은 곧 정제된 형태의 조각이 되어 턱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매끄럽던 수정체의 표면에는 서서히 균열이 가기 시작하고, 끊임없이 혼탁한 점액질만을 토해 내던 수정체의 아랫부분에서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새하얀 빛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수정체가 완전한 백색으로 변한 순간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수정 조각들이 사방팔방으로 터져 나갔다. 산산조각이 난 수정체의 파편은 눈 깜짝할 사이에 바스러져 모래처럼 고운 입자가 되었고, 점액질이 막고 있던 창문이 일제히 열리면서 거센 바람이 신전 전체를 뒤흔들었다. 바람에 휩쓸린 새하얀 입자는 회오리치며 신전 전체를 가득 채우다가, 마침내 창문을 통해 바깥으로 흘러나가더니.
“뭐야, 이게…….”
수천, 수만 조각의 빛이 하늘 높이 퍼져나가 다시 지상으로 떨어져 내렸다.
마치 먼 옛날의 전설로 전해져 내려 왔던 ‘진짜 눈’을 보는 듯했다.
* * *
본체인 수정이 소멸하자, 수정체로부터 비롯된 점액질의 바다 또한 물거품처럼 초라하게 사라져 갔다.
케르츠는 떨어지는 용사를 받아 내기 위해 곧바로 몸을 날렸다. 점액질이 사라져 충격을 흡수해 줄 수도 없고, 의식을 잃은 탓에 제대로 된 낙법을 취할 수도 없는 이를 그냥 두면 다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타이밍이 늦지 않아, 케르츠는 곧바로 용사의 몸을 낚아채 무사히 바닥에 착지했다.
“야, 나는! 나도 데리고 가야지!”
“그 정도 높이는 혼자 내려오세요!”
“이 높이에서 어떻게? 잘못 떨어지면 다리 부러져!”
“그럼 잠시만 기다리시든지요! 이따가 내려 드리겠습니다!”
고작 2층 높이의 벽에서 촛대를 붙잡은 채 낑낑거리는 하넨을 내버려 두고, 초점 없는 텅 빈 눈으로 눈물을 흘리는 용사를 바닥에 눕힌 후 케르츠는 고개를 들었다. 지금 그가 받아 내야 할 건 용사 하나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벽과 천장에 달라붙었던 점액질마저 전부 녹아 사라지자, 천장에 매달려 있던 도살자가 지지대를 잃은 채 떨어져 내렸다. 케르츠는 힘껏 뛰어올라 도살자를 받아 냈다. 성인 남성이라고는 해도 팔다리가 없어진 도살자의 몸은 꽤나 가벼웠다. 이걸 그냥 떨어지게 내버려 두었더라면 꽤나 처참한 꼴을 보았을 게 분명하다.
도살자와 함께 그를 감싸던 검은 안개까지 지상으로 내려와, 신전 안은 여전히 새까맣고 주변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아직도 2층에서 소리 지르며 허우적거리는 하넨을 안아 데려온 후, 케르츠는 도살자의 앞에 앉아 몸을 숙였다.
“마법사님, 묘비석의 주문을 무력화시켜 주시지 않겠습니까?”
“어, 굳이? 안쪽에 있는 사람들이 알아서 열 수 있는 거 아니야?”
“원론적으론 그렇습니다만 저 안에 들어가면 바깥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가 어렵습니다. 우선 겁이 나서라도 못 열 테고, 어쩌면 너무 오래 갇혀 있느라 탈진해서 움직이지조차 못할지도 몰라요. 아직 굶어 죽지는 않았겠지만…….”
“하긴 그렇겠네. 그럼 넌 네 친구나 좀 보고 있어.”
친구가 아니라고 반박해 보려 했지만 하넨은 이미 묘비석을 향해 걷고 있었다. 케르츠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도살자의 안색을 살폈다. 마음 같아서는 용사에게 부탁해서 도살자의 광증을 정화해 보고 싶었으나, 지금 용사는 사념을 정화한 후유증으로 쓰러져 움직이지도 못하고 있었다. 용사의 상태가 회복되길 기다리는 것도 방법이라면 방법이겠지만 과연 그럴 여유가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저를, 저를 용서하지……. 놓아, 놓아두지 마시고…….
사실 여태까지 죽지 않고 버틴 게 기적이라 할 수 있었다. 이미 사지를 먹히는 과정에서 피를 너무 많이 흘렸고, 벌써 몸 안쪽에서 썩는 냄새까지 나는 걸 보니 아무리 도살자라도 살아날 가망이 없어 보였다. 회복초 한 조각이라도 있었더라면 그나마 명줄은 붙여 놓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으나 지금 용사 일행은 자신의 상처를 회복할 약초조차 가지지 못했다.
“이봐요. 제 말 들리십니까?”
―용서하지, 마시고. 용서하지 마시고.
“광증 때문에 대화를 이해할 능력조차 없는 건가……. 그래도 한 가지만은 대답해 주세요.”
―저의 목줄을, 저희 죄인을…….
[저는 마지막 죄인, 케르츠. 당신 또한 저와 같은 업을 짊어졌지요.]
흠칫, 아주 잠깐이나마 도살자의 눈매가 파르르 떨렸다. 제정신을 되찾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았으나 이 정도 반응이면 되었다. 같은 운명을 짊어진 이만이 사용할 수 있는 이 언어가 광증에 시달린 도살자의 마지막 관심이나마 붙들어 놓은 모양이었다. 케르츠는 도살자의 눈을 마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의 업은 끊기지 않았습니까? 새로운 업을 내려 받을 이에게는 충분한 자격이 있습니까?]
―…….
[그이는 자신이 내려 받을 이름을 알고 있습니까? 자신이 짊어져야 할 운명을 알고 있습니까? 자신이 후대에게 어떤 운명을 내려야 할지 알고 있습니까?]
―…….
[당신은 그이를 믿을 수 있습니까? 그이에겐 그 운명을 포기하지 않을 강함이 있어요?]
“당신에겐 있었나.”
희미한 웃음기가 어린, 거의 쥐어짜듯 가까스로 흘러나온 목소리에 케르츠는 입을 다물었다. 분명 생을 내려놓는 마지막 순간까지 광증에서 해방되지 못하리라고 믿었건만, 의외로 도살자의 눈빛에는 조금씩 총기가 어리고 있었다. 그 이유를 알지 못해 잠시 머뭇거리던 케르츠는 곧 묘한 현상을 눈치챘다.
도살자의 몸을 감싸고 있던 검은 안개가 서서히 다른 곳으로 옮겨 가고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묘비석이 있는 방향으로. 도살자의 안개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다른 곳으로 옮겨 간다는, 이 기묘한 상황으로부터 해석해 낼 수 있는 의미는 명백했다.
케르츠는 그제야 도살자―아니, 이 사내가 정신을 차린 이유를 이해했다. 사내는 이미 업을 내려놓은 것이다.
“당신은 그런 강함 따위 없어도 어떻게든 짊어졌을 테고……. 먼 훗날엔 강함이 없는 이에게도 이 업을 떠넘길 예정이지. 나도 마찬가지고.”
“확실히 그 말이 맞군요.”
“이름과 운명이라면 먼 옛날에 전했어. 걱정할 필요는 없을 거야. 도살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어떻게든 살아가기 마련이니까.”
“지금 죽어 가는 사람의 입에서 나올 소리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흐, 사내의 목구멍에서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가 나왔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본인도 걱정이 되기는 하는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열 살 어린애라고 했다. 아무리 도살자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는 하나, 어린아이가 살아가기엔 아무래도 험난한 세상이다.
“그래서, 당신이 맡아 주기라도 할 건가?”
“미안하지만 나에게는 다른 사정이 있습니다. 당신 딸은 못 맡아 줘요.”
“사정이라고? ……과연. 도살자 주제에 다른 사람과 같이 다니다니 별난 일이다 싶었는데. 그래서 네 자식을 밴 건 어느 쪽이지? 저 마법사인가?”
“그런 사정이 아니라……. 하여튼 미안합니다.”
케르츠는 반사적으로 하넨을 흘끔거렸지만 다행히도 저쪽은 아무것도 못 들은 듯 무력화 주문만 외우고 있었다. 도살자의 목소리가 꺼질 듯 작아서 다행이지, 하넨의 귀에 이 소리가 들렸더라면 사흘 밤낮은 짜증을 내며 잔소리를 퍼부었을 것이다. 케르츠는 ‘세계를 정화시키기 위한 원정’에 대해 설명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런 장광설을 늘어놓기엔 사내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럼 하나만 전해 줘. 그 아이에게.”
“무엇을요. 갑옷과 쇠톱은 이미 전하지 않았습니까?”
“한 마디만. 내가 미처 못 전한 말 한 마디만 전해 줘. ……죽지 말아 달라고.”
더는 말할 힘조차 없는지 사내의 목소리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러나 케르츠는 주의 깊게 청력을 집중해 사내의 마지막 말을 귀담아들었다.
“그 애는 죽고 싶어서……. 늘 죽고 싶다고 해서. 그래서 신전에도 갔고. 거기서 자기를 죽여 줄 줄 알고, 멍청하게도…….”
“…….”
“그래도, 죽지는 말아 달라고. 죽으면……. 죽으면 정말 다 끝이니까……. 살아 있다면, 희망은.”
“……!”
케르츠의 옆에서 누군가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흘끔 바라보니 용사였다.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한 걸 보니 깨어난 지 얼마 안 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사내의 마지막 말을 귀담아들어야 한다는 사실만은 또렷이 이해했는지, 용사는 가만히 케르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채 사내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살아 있으면 희망은, 분명……. 내 어머니도, 어머니의 아버지도, 그렇게……. 희망은 있을 거라고…….”
그나저나 희망이라, 도살자의 입에서 나오는 단어 중에서도 가장 모독적이고 어울리지 않는 한 마디였다. 물론 케르츠 또한 그 ‘희망’을 위해 이 여정을 이어 나가고 있기는 하지만, 케르츠는 이 사내처럼 희망을 자연스럽게 말할 자신이 없었다. 그의 어머니도, 아마 어머니의 어머니 또한 희망에 대해 이야기한 적은 없었으니. 그저 의무와 강박과 죄악감만이 있었을 뿐.
“희망이라고요.”
“그래, 희망은……. 분명 언젠가, 언젠가는. 이 업으로부터 속죄할 날이, 먼 훗날에는.”
“…….”
“분명 올 테니, 그러니, 부디 살아서…….”
점점 기어들어가듯 하던 사내의 말은 거기에서 멈추었다. 하다못해 입술조차도 달싹이지 않았다. 케르츠는 조심스럽게 사내의 코끝에 손을 대고, 가슴에 손을 댄 후,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사내의 눈을 감겨 주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케르츠를 바라보던 용사는, ‘죽었습니다.’라는 그의 한 마디 속삭임에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케르츠를 따라 하기라도 하듯.
케르츠는 가만히 고개를 돌려 묘비석 쪽을 바라보았다. 이제 사내를 완전히 떠난 검은 안개는 먹구름처럼 묘비석 위쪽에 고여 있었고, 아무것도 모르는 하넨은 아직도 무력화 주문을 외우는 데에 열중하고 있었다.
검은 안개 너머, 활짝 열린 창문 너머에서는 아직도 새하얀 가루가 떨어지고 있었다. 먼 훗날 들은 언데드 상인의 이야기대로라면 그 가루는 사람들의 영혼이었을까?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영혼이 그날 부서지고 가루가 되어 해방된 걸까? 물론 당시의 케르츠는 언데드 상인의 이야기 따위 알 리가 없었으므로, 그저 반짝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릴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용사님.”
“왜요?”
“먼 옛날에는 눈이 하얀색이었다고 합니다. 지금처럼 검붉고 질척거리고 이상한 냄새가 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새하얗고 깨끗했다고 해요. 마치 저 가루처럼.”
“그럼 지금까지 저희가 본 눈은 가짜 눈이에요?”
“가짜라기보단 오염된……. 뭐, 관점에 따라선 가짜 눈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렇게 따지자면 지금까지 용사님은 진짜 눈을 본 적이 없는 겁니다. 물론 저나 마법사님도 못 본 건 마찬가지지만.”
케르츠는 아무 생각 없이 말을 툭 던졌을 뿐이지만, 어린 용사는 케르츠의 말에 신기하다는 듯 눈을 반짝거렸다. 방금 눈앞에서 사람의 죽음을 보고도 금방 저렇게 표정이 밝아지다니 어린애는 어린애였다. 하긴, 이 세계에 사는 인간이라면 타인의 죽음 정도의 사소한 사건에는 금방 무뎌지기 마련이지만…….
“물론 지금 창밖의 저것도 진짜 눈은 아니고요. 저건 그냥 용사님이 정화한……. 그래, 찌꺼기 같은 겁니다.”
“저것도 찌꺼기밖에 되지 않아요? 그러면 진짜 눈은 얼마나 예쁜 건가요?”
“저야 모르지요. 본 적이 없으니까.”
“제가 세계를 정화하면 진짜 눈을 볼 수도 있겠지요?”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악의 근원을 제거하고 세계를 정화하면, 분명 진짜 눈도 내릴 테니까…….”
큰 기대 없이 내뱉은 말에도 용사는 기뻐하며 빙긋 웃었다. 그때쯤이었을까, 한창 주문에 열중하던 하넨이 드디어 무력화에 성공했는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석순처럼 주렁주렁 자라나 있던 묘비석이 삐걱거리며 일제히 문이 열렸다. 끼이이익, 기름칠되지 않은 문 수십 개가 열리는 불쾌한 소리에 눈을 찌푸리면서도 케르츠는 묘비석을 바라보았다.
정중앙의 묘비석에는, 자기 체구에 맞지도 않는 인면철 갑옷과 쇠톱을 소중하게 끌어안은 여자아이 하나가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 * *
그 순간 케르츠는 정말로 잠에서 깨어났다. 하얗고 깨끗한 진짜 눈이 창밖에서 나부끼고, 옆자리에선 고양이 꼬리를 단 마법사가 코를 골며 잠든 아늑한 침실 한가운데에서.
“…….”
고작 몇 시간 잠들었을 뿐이지만 아주 긴 여행을 한 듯한 기분이었다. 케르츠는 자기 어깨에 자연스럽게 달라붙은 인형을 내버려 둔 채 침대에서 일어났다. 느긋하게 창가로 다가가 창밖을 바라보자,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 가는 거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꿈에서 보았던 빛의 가루에 비하면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이것이야말로 진짜 기적이었다.
[반짝거리고 빛나지는 않을지라도, 저건 이 세계에 처음으로 내리는 순수한 눈입니다. 인형이 세온에게 깃들어 있었더라면 기쁨의 춤을 추며 눈밭을 뒹굴었을 것입니다.]
“……주무시는 줄 알았는데 깨어 있으셨군요.”
하긴 인형은 잠을 자지 않는다고 했던가. 춤을 추거나 볼을 쿡쿡 찌르기는커녕 얌전히 자신의 어깨에 달라붙은 인형을 어색하게 여기면서, 케르츠는 가만히 인형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인형은 케르츠의 손에 가만가만 머리를 비비적거릴 뿐이었다.
[잠든 건 신뿐입니다. 인형은 잠들지 않은 채 제 꿈을 구경했습니다.]
“그걸 구경하셨다고요? 그러고 보니 아까 그건 꿈이라기보다는 진짜 기억을 회상하는 것처럼 구체적이었습니다만……. 혹시 제 기억을 들여다보신 건 아닙니까?”
[굳이 인형이 그래야 할 필요는 없겠지요. 어떤 과거를 가졌든 저는 저입니다.]
케르츠가 손을 떼어 내자 인형은 기운차게 일어나더니 폴짝 뛰어 창틀로 옮겨 갔다. 장식용 봉제 인형처럼 얌전히 자리에 앉은 모습이 영 익숙하지는 않았지만 케르츠는 인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직 완전히 잠이 깨지 않았는지 꿈속의 감성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어쩐지 이 새벽에는 인형에게 뭐라도 말을 붙이고 싶었다.
“하나만 물어도 괜찮겠습니까?”
[저는 지난 몇 달 동안 성기사들을 찾아다니면서 세이라나를 다시 보길 기대했습니다. 아직 찾지는 못했지만 새로운 대의 세이라나는 분명 이 세상 어딘가를 떠돌아다니고 있겠지요. 저는 그 아이가 잘 지내고 있길 바랍니다.]
“적어도 죽지는 않았다니 다행이군요.”
[도살자는 원래 쉽게 죽지 않습니다. 성기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인형은 마치 케르츠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담담히 말했다. 제15계위의 성기사 세이라나. 그게 나중에 알게 된 그 도살자 부녀의 이름이었다. 묘비석에서 안전하게 탈출한 어린아이는 케르츠가 보는 앞에서 그 검은 안개를, 도살자의 광증을 완전히 받아들였다.
아이는 혼자 있기 싫은 눈치였지만 케르츠 또한 그 아이를 데려갈 수는 없었다. 미궁은 전투 경험조차 없는 미숙한 도살자가 발을 들일 곳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케르츠 일행이 이 아이가 성숙해질 때까지 지켜 줄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케르츠 일행은 해가 지자마자 곧바로 도시를 떠났다.
그 아이가 이후로 어떻게 되었는지는 모른다. 어쩌면 그 아이 또한 도시를 떠나 어느 인적 드문 곳으로 떠나지 않았을지. 이제 자신의 몸에 딱 맞을 만큼 작게 줄어든 도살자의 갑옷과,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광증에 적응하기 위해 홀로 필사적인 사투를 벌이지는 않았을지, 케르츠는 그저 추측만 했을 뿐이다. 다만…….
“그런데 그건 제가 하고 싶었던 질문의 대답이 아닙니다.”
[인형도 알고 있습니다.]
“대답하기 싫으신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다만 인형은 그 질문이 제 입에서 직접 나오는 걸 별로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러나 제가 그 질문을 완전히 떨쳐 내지 못한다면 인형은 그 질문에 대답해야 합니다.]
“…….”
[저는 문득 생각했습니다. 살아 있으면 희망은 존재한다고 말하던 그 도살자야말로, 저처럼 미숙한 도살자 대신 살아서 새로운 성기사가 되었어야 하는 게 아닌지.]
케르츠는 쓴웃음을 지으며 인형의 시선을 피했다. 남의 입으로 들으니 진짜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인 게 체감되었지만, 그래도 그런 꿈을 꾸고 나니 이 질문을 머릿속에서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일시적인 우울감 때문이란 걸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케르츠는 별로 대단한 인간도 못 되었다. 미궁을 나오고 나선 좀 나아졌지만 도살자의 업을 짊어졌던 시절에는 그저 고집 세고 제멋대로인 겁쟁이에 불과했다. 제 딴에는 세상의 모든 불합리와 비극을 짊어진 것처럼 굴었으나 사실 그걸 짊어진 이들은 케르츠를 빼고도 서른한 명이나 있었고, 그들 중에는 케르츠보다 훨씬 나은 이들도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마치 손쓸 방법도 없이 죽어 버렸던 그 사내처럼. 똑같은 죄를 짊어진 도살자였지만, 자신은 끝없이 광증으로 손을 더럽힐 운명이니 어쩔 수 없노라고 체념한 케르츠와는 달리 그자는 사람을 구하고 희망을 이야기했다. 차라리 그자가 케르츠 대신 붙잡혀 와 미궁을 탐험했더라면 조금은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차라리 그쪽이 더 자격이 있었던 건 아닐까.
“흐윽……?!”
그렇게 괜한 자기혐오에 빠져 있던 케르츠에게 갑자기 충격이 내리꽂혔다. 정신적인 의미가 아니라 물리적인 의미였다. 케르츠의 머리에 꽤나 강력한 발차기를 날린 인형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떼며 창가에 착 내려앉았다. 저 인형, 분명 푹신푹신하고 말랑말랑한 줄만 알았는데 발차기가 꽤나 묵직하다. 체감상 쇳덩어리로 머리를 후려 맞은 것 같다.
“가, 갑자기 뭘 하시는 겁니까?”
[비기인 솜인형 필살 헥토파스칼 드롭킥입니다. 세온의 기억 속에 있는 레슬링 경기에서 빌려 왔습니다. 아직은 폭력에 익숙한 구닥다리 성기사를 위한 인형의 친절이라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군요.]
“필살 헥토파…… 뭐요? 아니, 아무리 제가 폭력에 익숙하대도 그걸 친절이라고 하시면.”
[신의 시각으로 본다면, 누군가를 대신해 살아야 할 정도로 가치가 더 출중한 인간 따위는 없습니다.]
상대의 말은 듣는 척도 않고 제 할 말만 늘어놓는 인형의 모습에 케르츠는 쓴웃음을 지었다. 인형은 자신이 깃든 인간의 판단력과 감정을 빌려 행동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따지면 인형이 케르츠를 때리기로 판단한 건 케르츠 본인의 판단이나 마찬가지다. 멋대로 말을 끊는 버릇도 아마 마찬가지겠지. 케르츠는 그냥 인형의 대화에 장단이나 맞추기로 마음먹었다.
“냉정하시군요. 큰 관점에서 보자면 결국 누구든 마찬가지란 겁니까.”
[하지만 동시에, 누군가에게 생명의 우선순위가 밀려날 정도로 가치가 더 적은 인간 또한 없습니다. 그 도살자는 그 사람의 역할을 했으며 저는 저의 역할을 다했습니다. 거기에 슬픔이 있을지는 몰라도 불합리는 없습니다.]
인형은 다시 폴짝 뛰어오르더니 케르츠의 무릎에 안착했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필살 드롭킥이니 뭐니 하는 게 아니라 평범한 착지였다. 슬픔이라고는 없이 그저 유쾌함밖에 없는 움직임이었지만, 오히려 그 움직임에서 케르츠를 위로하려는 움직임이 읽혔다. 케르츠는 피식 웃으며 인형의 등을 토닥였다.
“당신의 말도 옳은 이야기입니다만……. 저는 분명 좋은 사람이 아니었어요. 당신도 알다시피 늘 제멋대로였고, 그런 주제에 결정적인 순간에 도움이 되지도 못하고 말썽만 피웠지요.”
[확실히 그렇긴 합니다. 세온과 인형이 없었더라면 저는 분명 용사님이나 하넨과 잘해 나가지 못했겠지요. 저는 스스로가 두 사람을 보호한다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 두 사람이 저를 보호해 주었던 걸지도 모릅니다.]
“…….”
[저는 쓸모라고는 하나도 없고 방해만 되는 멍청이였고 귀여우며 믿음직스러운 데다가 대단한 인형님을 의심하고 인형의 사역마였던 세온에게는 폭력만 휘두르는 불한당이어서 가치라고는 하나도 없는 인간이었습니다.]
“……?”
[지금이라도 인형님께서 너그러운 마음으로 지켜봐 주신 덕에 예전보다는 더 겸허함을 아는 인간이 되어서, 저는 언제나 진심으로 인형님을 존경하는 바입니다. ……라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형은 성기사의 신실함에 기뻐하며 우쭐거리고 있는 모양이군요.]
“……그거 진짜 제 생각 맞습니까? 어째 수긍이 가는 듯하면서도 은근히 기분이 나쁩니다만.”
아니, 잠깐만. 이 인형 정말로 온전히 케르츠의 판단력과 감정을 빌린 게 맞나? 세온에게 의지하고 있을 때와 묘하게 비슷한 깐죽거림에 케르츠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인형을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 존재는 오랫동안 세온과 함께 지내다 보니 장난치기 좋아하는 성격까지 옮은 걸지도 모르겠다. 인형은 대수롭게 여기지 말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더니, 케르츠의 허리에 붙어 마치 포옹하듯 얼굴을 묻었다.
[그 기분 나쁨을 소중히 여겨 달라고 인형은 말하고 있습니다.]
“……!”
[저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뿌리 깊은 자기혐오도, 사실은 저도 최선을 다했노라고 외치고 싶은 한 줄기 애처로운 자부심도, 양쪽 모두가 저 자신의 마음이니까요. 자기혐오를 내버린 인간은 오만해지지만 자부심을 내버리면 추해집니다. 둘 다 버리지 마세요.]
케르츠는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참지 못한 채 인형을 마주 끌어안았다. 손 안에 들어올 정도로 작고 소박한 크기의 인형이었지만 이럴 때만은 더없이 의지가 된다. 인형은 케르츠의 손 안에서 꾸물거리다가 어느새 쏙 빠져나와선 창틀로 옮겨 갔다. 아무래도 케르츠와 연결된 상태의 인형은 마주 보며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잠시 후, 케르츠는 다시 한 번 인형에게 손을 뻗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한 가지는 확실히 해 두겠습니다. 당신이, 또는 이 세상의 누군가가 부정하려 든다 할지라도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무엇을요?”
[저는 이 세상이 남겨 두고 간 마지막 도살자였고, 신의 앞에 선 첫 성기사입니다. 저는 늘 오염되어 있었지만 마지막 순간에는 오염을 판별하는 거름망의 역할을 했습니다. 저는 늘 희망을 부정했지만 결국 저 또한 희망의 일부였습니다.]
“……!”
하얗게 흩날리는 눈을 등진 채 선 인형은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그러나 케르츠는 인형이 웃는 것 같다고 제멋대로 생각했다. 케르츠가 손을 뻗자 인형은 케르츠의 손에 가볍게 머리를 비비더니 창문을 열었다. 서늘한 바람이 침실 안에 흘러 들어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인형은 바깥의 눈을 삭삭 긁어모아선 무언가를 만들기 시작했다. 딱 자기 몸통만 한 양의 눈을 어딘가에서 모아 온 인형은, 뭉뚝한 팔 끝으로 열심히 눈을 다듬고 굴리는 등 공을 들인 끝에…….
[그러니까.]
“…….”
[저의 삶과 죽음과 영혼의 종착지. 그 모든 영역에 걸쳐, 신은 언제나 저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
자그마한 눈사람 하나를 만들어 케르츠에게 보여 주었다. 팔다리도 없는 주제에 묘하게 인형을 닮은 눈사람이었다.
케르츠는 그날 밤 눈물이 날 정도로 웃어 젖혔고, 웃음소리에 깨어난 하넨이 힘껏 집어 던진 베개에 얻어맞은 후에도 한참을 웃었다. 급기야 케르츠의 정신 이상을 의심하며 걱정에 빠진 하넨은 인형의 [꿈을 꾸었기 때문입니다.]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하다가, 잠시 고민한 끝에 주전자에 찻잎을 넣고 차를 세 잔 끓였다. 인형은 차를 마시지도 않을 주제에 하넨이 내민 찻잔을 소중하게 끌어안았다.
두 사람과 인형 하나는 찻잔의 온기를 즐기며 해가 뜰 때까지 창밖을 바라보았다.
마침내 동이 트자, 거리에 쌓인 눈이 햇빛을 받아 온통 환하게 반짝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