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3. 이름을 가진 청년과 사랑하는 신성 생물
[아무리 오염에 사로잡혀 있었다고는 해도, 내가 사람들에게 사기를 친 것만큼은 사실이니까……. 전부 사과하고 앞으로는 새 삶을 살 거야.]
하넨에게 꼬리 절단 시술을 받은 고양이는, 사람들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용서를 구하겠다고 설명한 후 우리를 떠나보냈다. 처음에는 몰래 용사의 배낭에라도 숨어서 도시를 도망칠 작정이었지만 사람들을 속여서 돈을 벌어먹은 게 아무래도 영 찜찜했던 모양이다.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에 분노한 사람들이야 어쩔 수 없지만, 정령을 붙잡아 이득을 보려고 호시탐탐 노리는 사람들도 있을 테니 위험하지 않을까? 나는 내심 고양이가 걱정되었으나 인형은 괜찮을 거라며 대수롭지 않게 굴었다. 본연의 힘을 되찾은 정령이란 쉽사리 붙잡히거나 해코지를 당할 일이 없다는 게 인형의 설명이었다.
뭐, 고양이의 미래는 고양이에게 맡기도록 하자. 나름대로 정령이라니까 분명 잘해 내겠지. 우리는 고양이와 작별 인사를 하고는 바위 도시를 떠났다. 풀이 자라나기 시작한 지 몇 달 되지 않은, 지평선이 보일 정도로 끝없이 펼쳐진 초원을 걷다 보니 마치 소풍이라도 온 기분이었다.
[어쩌면 그 고양이는 바위 도시의 마스코트가 될지도 모른다. 고민을 상담해 주는 귀엽고 따끈따끈한 고양이는 누구에게나 사랑받을 게 분명하다!]
“확실히 그 고양이, 귀엽긴 귀여웠지. 나도 괜히 한 번 쓰다듬어 보고 싶더라.”
“세온, 쓰다듬고 싶을 정도로 고양이가 좋아요? 나와 연인이 되기로 했으면서? 나는 안 쓰다듬어 줄 거예요?”
“이, 이게 그런 문제는 아니잖아요! 그리고 제가 언제 용사님을 안 쓰다듬어 준다고 그랬어요?”
굳이 말하자면 고양이는 귀엽고, 용사님은 잘생겼으니까 카테고리가 완전히 다르잖아! 나는 그런 낯 뜨거운 생각을 하며 용사의 머리나 볼을 쓰다듬어 주었고, 용사는 기쁘다는 듯 웃으며 내 손에 볼을 비볐다.
케르츠와 하넨이 우리를 뜨뜻미지근한 표정으로 바라보았지만 나도 용사도 그런 걸 신경 쓰기에는 낯짝이 꽤 두꺼웠다. 원래 갓 사귀기 시작한 연인이란 누구나 철면피인 법이다. 좀 쓰다듬을 수도 있지 그게 뭐 어때서? 이제 슬슬 추워지니까 신체 접촉으로 온기를 나누는 것도 꽤나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나는 용사와 신나게 부비적거리면서 어린아이처럼 즐거워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한쪽은 실제로 어린아이지만 그런 사소한 문제는 이제 아무래도 좋다. 그저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행복하면 된단 말이야.
“이제 세온과 나는 연인이 맞지요?”
“그래요, 연인이에요! 나이 차이가 엄청 많이 나기는 하지만, 그런 사소한 건 아무래도 좋아요.”
“그 문제라면 신경 쓰지 말아요! 객관적으로 보면 세온이 저보다 훨씬 작고 어려 보이니까!”
“사, 사실이긴 한데 묘하게 분하네요……. 그래도 열 살 넘게 차이가 나는데!”
“세온은 볼이 말랑말랑하고 얼굴이 뽀얗게 생겼으니까, 제가 세온보다 열 살 많다고 해도 믿을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는 아니라고요! 제 나이가 그렇게 어리지는 않아요!”
용사는 지금껏 내게 어린아이 취급을 당한 복수라도 하듯 신나게 나를 놀려 대기 시작했다. 아니, 용사님이 나보다 열 살 많게 생겼다니 그건 좀 아니잖아. 용사님도 그렇게까지 나이 든 인상은 아니고 나도 그렇게까지 어리지 않은데!
“괜찮아요, 원래 이런 건 실제 나이의 문제가 아니라 귀여움의 문제예요! 인형도 봐요, 세상에서 제일 나이가 많지만 이렇게 작고 귀여우니까 어려 보이잖아요! 세온도 인형도 작은 아기 같아요!”
[인형은 어리지 않다! 용사야말로 어리고 멍청하다!]
그러니까 결국 콩깍지의 문제잖아! 나는 인형과 협공하여 용사의 옆구리를 간지럽히거나 쫓아다니는 등 요란하게 장난을 쳐 댔고, 우리 셋은 나잇값을 못 하는 어린애처럼 요란하게 소리를 지르며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였다.
하넨과 케르츠는 뭐가 그렇게 웃긴지 우리를 구경하며 한참 폭소를 터뜨렸다. 사실 하넨보다는 케르츠가 훨씬 더 많이 웃었는데, 하넨이 웃을 때마다 망토를 비집고 나온 꼬리가 살랑거리며 흔들려 시각적으로 더 웃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도망치던 용사조차도 하넨의 흰색 꼬리에 시선이 팔린 나머지 나와 인형에게 금방 붙잡히고 말았다.
기어이 용사를 붙잡은 나와 인형이 용사의 머리에 사이좋게 딱밤 두 대를 날린 후에야 추격전은 종료되었고, 웃느라 눈가에 눈물까지 맺혀 있던 케르츠는 한참 숨을 고른 끝에 겨우 진정하고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세온 씨.”
“네?”
“다른 세계의 사람이니 나이 세는 법에 다소 차이가 있으리라고는 생각합니다만, 당신 대체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저요? 어, 일단은 스무 살인데, 그건 우리나라에서만 그렇게 세던 거니까……. 제가 살던 곳에서는 엄마 배에 있던 10개월까지 나이로 쳐 주거든요. 그래서 태어나면 무조건 한 살.”
“그건 꽤 재미있는 기준이군요. 그래서 결국 열아홉 살이라는 겁니까?”
“그건 아니에요.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은 여기 기준으로 열여덟 살이고 생일 지나면 열아홉 살이에요! 열아홉 살이 넘어야 성인으로서의 모든 자격을 가질 수 있고, 투표에도 참여할 수 있고, 뭐 그런 식의 제한도 있었는데…….”
“잠깐만, 뭐? 너 심지어 성인도 아니었어?!”
“서, 성인 좀 아닐 수도 있지요! 그래도 한 달 정도만 있으면, 생일이 돌아와서 열아홉 살이니까 진짜로 성인이라고요!”
하넨과 케르츠는 어이가 없다는 듯 또 웃음을 터뜨렸다. 아, 아니, 성인 좀 아닐 수 있는 거지! 그렇다고 놀릴 것까지야 없잖아! 물론 내가 생각해 봐도, 음, 용사님더러 어리다며 머뭇거렸던 주제에 본인도 어린애였다면 좀 놀리고 싶을 만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딱 한 달만 더 기다리면 성인이라고! 생일 얼마 안 남았단 말이야!
[생일이 지난다고 해도, 생일이 얼마 안 남은 어린애에서 생일이 얼마 안 지난 애송이가 될 뿐이다.]
“넌 진짜 못됐다…….”
“그런데 당신 생일이 다음 달이라고요? 얼마 안 남은 모양인데, 구체적으로 언제입니까?”
노골적으로 어린애라며 놀려 대는 동료들 때문에 조금은 삐질 뻔했지만, 그나마 케르츠가 생일 날짜 쪽으로 화제를 돌린 덕분에 기분이 조금 풀렸다. 다른 동료들 또한 이 화제에는 제법 흥미가 생긴 듯 관심을 보였는데, 특히 용사는 눈을 잔뜩 반짝이며 호기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세온의 생일이 다음 달이에요? 내 생일과 같은 달이네요?”
“네, 신기하게도 그렇게 되었네요. 아무튼 제 생일은 12월 24일이요. 원래 세계에서는 크리스마스이브였는데 여기에는 그런 거 없지요?”
“크리스마스이브? 그게 뭔지 짐작도 안 가는 걸 보면 없는 모양인데.”
[이 세계에는 창조주의 아들이 태어난 날 같은 기념일은 없다. 기념일의 전날에 특별한 이름을 붙여 기념하는 사례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대충 그럴 거라고 예상했기 때문에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뭐, 원래 세계에서도 크리스마스이브처럼 기념일의 전날을 기념하는 사례는 거의 없었지만 말이야. 아마 이 세계에서 12월 24일이란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겨울의 어느 날로, 날짜 자체보다는 그 뒤에 다가올 새해가 더 기대되는 날이 아닐까 싶다.
처음에는, 일단 그렇게 생각했지만.
[다만 그 날짜는 조금 다른 의미로 특별하다.]
“다른 의미……? 요, 용사님?! 왜 갑자기 그렇게 흥분하셨어요?”
“세온, 이제 보니 저와 생일이 거의 같아요! 같은 달인 것만으로도 기쁜데 날짜까지 비슷할 줄은 몰랐어요!”
“거의 같다니, 얼마나 비슷한데요?”
“저는 12월 25일이에요! 세온의 생일이 제 생일보다 하루 빨라요!”
뭐, 진짜로? 용사의 생일이 12월인 줄은 알았지만 설마 하루 차이일 줄은 몰랐기에 나는 그저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 보니 창조주의 아들이 아니라 신성 생물의 생일이잖아? 그것도 세계를 정화한 신성 생물 말이야! 이쯤 되면 용사님의 생일도 기념일로 지정하는 게……. 아, 아악?!
“어, 어지러워요!”
“세온, 저와 생일이 하루밖에 차이가 안 나요! 이건 분명 운명이라고요! 대단해요!”
“아니, 저도 대단하다고 생각은 하는데요! 그런데 꼭 이렇게 껴안고 빙빙 돌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이게 그, 은근히 평형 감각을 마비시키는 그런 기분이 들게끔 해서……!”
“정말 신기해요! 24일에서 25일로 넘어가는 자정에 생일 축하를 하면 내 생일 축하도 되고 세온의 생일 축하도 되잖아요! 그때 생일 선물도 같이 교환하면 멋있지 않을까요? 어떻게 생각해요?”
그거 진짜 근사한 일이다. 그러니까, 용사가 또 내 허리를 붙잡아 들어 올리고 빙빙 돌지만 않는다면 좀 더 근사한 일이 될 텐데……! 용사는 자기 양에 찰 때까지 마음껏 빙글빙글 돌고 나서야 나를 내려 주었고, 나는 술 취한 것처럼 땅이 혼자 돌아가는 느낌에 휘청거렸다. 정작 똑같이 수십 바퀴를 돈 용사는 아무렇지 않아서 괜히 얄미웠다.
그나저나, 이렇게 연달아 생일이 이어지다니 이것도 인연이라면 꽤 재미있는 인연이다. 심지어 그 생일이 크리스마스이브와 크리스마스 당일이라니, 이쯤 되면 정말 운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분명 용사님과 나의 만남은 운명인 거야!
[내 생일 축하합니다, 내 생일 축하합니다!]
“뭐야, 아직 생일은 한 달이나 남았다고! 게다가 그런 화법으로 노래를 부르니까 이상하게 쓸쓸하잖아!”
[인형은 나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인형은 나의 생일을 축하합니다!]
“훨씬 낫긴 한데, 아무튼 아직 아니라고! 그 노래는 당일에 부르는 노래야! 게다가 무리하게 가사를 늘리니까 음정이 이상해지잖아!”
내가 딴지를 걸든 말든 인형은 혼자 즐겁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 댔고, 용사는 뭐가 뭔지 잘 아는 눈치도 아니면서 자기 나름대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사랑하는 세온의, 생일 축하합니다. 그런 가사를 부르는 용사의 목소리가 괜히 근사하게 들리는 바람에 나는 까닭 없이 얼굴이 달아오르고 말았다. 얼굴을 가득 달구는 열기를 어떻게든 무마시켜 보기 위해 나는 허겁지겁 화제를 바꾸었다.
“아, 아무튼! 그래서 저희가 한 달 후에 생일인데 말이지요. 이 세계에도 생일 파티나 생일 선물 같은 문화가 있는 거 맞지요? 아까 용사님이 선물 교환 이야기도 했고.”
“있긴 있지. 세상이 오염에 뒤덮인 시절이니 그렇게 대단한 행사를 하거나 선물을 교환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평소보다 조금 더 맛있는 걸 먹는다든지 가벼운 선물을 받는 정도는 우리도 했어.”
역시 그렇구나. 그렇다는 건, 나도 슬슬 용사님에게 줄 선물을 마련해야 한다는 뜻이네. 용사 또한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고개를 갸웃했는데, 용사의 선물이 무엇일지 내심 궁금했지만 용사에게 무슨 선물을 줘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별로 없었다.
사실 나는, 꼭 생일 선물이 아니더라도 용사에게 주어야 할 것이 있으니까. 지금까지는 도무지 못 주고 있었지만…….
“세온, 그러고 보니 저에게 줘야 할 것이 있지요?”
용사 또한 내 생각을 짐작하는지 생긋 웃으며 이쪽을 바라보았다. 사실 용사가 이만큼이나 인내심 있게 기다려 준 것 자체가 꽤나 신기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연애 문제에 정신이 팔린 것도 원인 중 하나겠지만, 그 점을 감안하더라도 용사는 제법 얌전히 나를 기다려 준 셈이다. 왜냐 하면…….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이렇게까지 오래 끌 생각은 아니었는데, 어떤 이름이 좋을지 고민하다 보니…….”
“괜찮아요! 특별한 날에 특별한 이름을 받을 수 있다면 그것만큼 좋은 일도 없을 테니까요.”
“그렇다고는 해도, 이름을 짓는 데 열 달이나 걸리다니 대체 얼마나 좋은 이름을 지어 주려고 그러는 거야? 나는 네가 인형처럼 까먹은 줄 알았는데.”
“까먹은 거 아니거든요! 개똥이 같은 이름이면 곤란하니까 최대한 신중히 고르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뿐이라고요!”
분명 용사는, 내가 자기의 ‘이름’을 지어 주기를 목 빠져라 기다리고 있었을 테니까. 물론 나도 용사의 이름에 대해 잊지는 않았다. 다만 사람의 이름을 짓는다는 것 자체가 그다지 쉬운 일은 아닌 데다가, 심지어 원래 세계도 아니고 이세계의 이름을 지어 주려니 이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단 말이지.
하지만 이제 더는 미루고 싶지 않았다. 드디어 용사님과 연인도 되었겠다, 생일 선물이라는 명분도 생겼겠다, 이제는 정말로 용사님에게 근사하고 멋진 이름을 지어주고 싶다.
“그럼 약속이에요, 세온!”
“무슨 약속이요?”
“이번 생일에는, 세온도 나도 서로를 행복하게 해 줄 만한 선물을 준비하기로 해요. 세온은 저를 위해 이름을 지어 주고, 저는……. 으음, 뭐가 되었든 세온을 행복하게 해 줄 만한 선물을 준비할게요.”
“무슨 선물을 준비할 생각인데요?”
“그건 비밀. 직접 확인해 봐요!”
용사는 더없이 즐거운 미소를 지은 채 내 손을 붙잡았다. 대체 무슨 선물을 준비하려고 저렇게 짓궂게 웃는지 모르겠지만, 용사님이 주는 선물이라면 분명 좋은 선물이리라는 근거 없는 확신에 나는 그저 마주 웃어 주기만 했다.
앞으로 남은 시간은 한 달, 그동안 나는 용사님의 이름을 지어야 하고 용사님은 나의 생일 선물을 고민해야 한다. 용사님도, 나도 서로에게 가장 뜻깊은 선물을 줄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 보자.
* * *
그날 이후로 나는 용사의 이름을 지어 주기 위해 이런저런 시도를 해 보았다.
“안녕하세요, 약초 향기가 참 좋네요! 이 약초 이름이 뭐예요?”
“그 약초요? 엔드라하라는 약초인데, 차로 달여 먹으면 머리가 정말로 맑아져요. 한 묶음 사실래요?”
“그럼 한 묶음 살래요! 그런데 하나 더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그쪽 이름은 어떻게…….”
“세온, 물건을 사는 줄 알았더니 상점 주인을 꼬시고 있었어요?!”
“꼬시는 거 아니에요! 이름이 궁금했을 뿐이라고요!”
사람들의 이름을 묻는 건 가장 기초적이면서도 손쉬운 방법이었다. 가게에 들러서 물건을 살 겸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럽게 상점 주인의 이름도 알게 되고, 그 주인과 연관된 여러 사람들의 이름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 방법의 단점은, 내가 상점 주인의 이름을 물으려 할 때마다 질겁하며 달라붙는 용사였다. 아니, 용사님 이름 지어 주려는 거라고요! 꼬시는 게 아니라!
“이 감자 스튜 맛있네요. 곁들여진 빵도 포실포실하니 먹기 좋고……. 그러고 보니 이 빵 이름은 뭐라고 해요?”
“그 빵? 메뉴판에는 레하스라고 적혀 있는데. 이 지방에서 많이들 만들어 먹는 빵인가 봐.”
“레하스라, 어감이 꽤나…….”
“그런데 너, 설마 빵 이름을 용사에게 붙여 줄 작정이야?”
“세온, 이름 짓기가 많이 힘들었군요. 하지만 괜찮아요! 세온이 붙여 준 이름이라면 빵이라도 좋아요!”
“아 진짜,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그냥 어감을 확인해 봤을 뿐이라고요!”
우리 세계의 기준으로 따지면 소보루 빵이나 샌드위치 같은 걸 이름으로 쓰는 셈이잖아! 그런 짓은 안 한다고! 그냥 나는, 혹시 내가 지으려는 이름이 음식 이름과 어감이 비슷하기라도 한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을 뿐이야!
아무튼 나는 용사의 이름에 어울리는 단어와, 어울리지 않을 법한 단어들의 정보도 하나하나 모아 기록했다. 다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내가 이런 식으로 모을 수 있는 건 그저 단어뿐인데, 아무래도 단어 자체의 발음만 들어서는 알 수 없는 세밀한 어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또 다른 방법을 써 보기로 했는데…….
[인형은 나의 부탁이 꽤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재미있다니, 나는 나름대로 진지한데.”
[우습다는 의미가 아니라 흥미롭다는 의미이다. 나는 인형의 ‘번역’ 없이 세상의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데, 확실히 그 시도는 용사의 이름을 짓는 데 제법 도움이 될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광장 한가운데, 인형은 분수 가장자리에 앉아 다리를 흔들거리며 그렇게 말했다. 역시 조금쯤은 도움이 되겠지? 적어도 안 하는 것보다야 나을 거 아니야.
그러니까 지금 나는, 이 세계의 사람들이 언어를 어떻게 ‘발음’하는지에 대해 알고 싶은 거다. 이 세계에 온 이후로 나는 용사 일행과 의사소통을 하는 데 아무런 지장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세계의 언어를 제대로 익힌 건 아니었다. 그런데도 지금껏 동료들과의 소통이 가능했던 건, 내 정신에 기생해 있는 인형이 소통 과정에 개입해 서로의 이야기를 번역해 주었기 때문이다.
인형은 ‘언어의 본질’이라느니, ‘신의 언어를 제외한 세상 모든 언어의 뿌리를 정신에 심어 놓아서’라느니, 아무튼 좀 난해한 이야기를 잔뜩 늘어놓았지만 내가 이해하지 못하자 그냥 번역이라고 대충 얼버무렸다. 어쨌든 그 번역 덕분에 나는 언어 공부를 할 필요 없이 제법 편하게 살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그런 식으로 상대방의 말뜻을 알아들을 수는 있어도, 상대방의 말이 어떤 식으로 발음되며 그렇게 발음된 소리가 어떤 느낌을 주는지 이해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나는 꽤 좋은 어감이라고 생각해서 이름을 지었는데 듣는 사람에게는 너무 오래되었거나 낯선 어감일지도 모르잖아. 아니면, 이름 자체만 보면 이상하지 않더라도 이름의 앞뒤에 어떤 단어가 오느냐에 따라 굉장히 이상한 발음이 될 수도 있고.
그러니까, 한 번쯤은 인형의 번역 없이 직접 이 세상의 언어를 들어 보고 싶단 말이야. 물론 인형과는 여전히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니 인형과의 의사소통에는 문제가 없고, 위험하다 싶으면 곧바로 다시 ‘번역’을 시작하면 되니 큰 문제는 없겠지.
“괜찮겠어요, 세온?”
“걱정하지 마세요, 설마 별일이야 있겠어요?”
용사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와 인형을 번갈아 보았지만 나는 그저 웃으며 어깨만 으쓱했다. 내가 인형을 들어 올리자 인형은 내 코끝에 자기 얼굴을 툭 건드렸다. 뽀뽀와 비슷한 듯 아닌 듯한 그 행위가 끝나고 나자, 아주 잠깐 머릿속에 안개가 낀 듯 사고가 흐릿해지더니.
“-------?”
자, 잠깐만. 뭐라고? 나는 순식간에 성격이 바뀐 주변의 소음에 질겁하며 귀를 막았다. 분명히 방금까지만 해도 익숙하게 들리던 모든 소리의 성질이 완전히 달라졌다. 그저 평범한 백색 소음으로만 받아들여지던 광장의 웅성거림은, 순식간에 알 수 없는 의미와 독특한 억양의 낯선 소음이 되었다.
“세온, -------?”
익숙하면서도 엄청나게 낯선 목소리에 기겁하며 돌아보니, 하넨이 왜 그러냐는 듯 떨떠름한 표정으로 정체 모를 문장을 늘어놓고 있었다. 뭐야, 저 사람의 억양이 원래 저렇게 독특했던가? 분명히 나는 저 사람의 목소리를 지난 1년 동안 꾸준히 들어 왔을 텐데, 그저 억양과 언어가 달라진 것만으로도 평소와는 굉장히 다른 느낌이어서 조금은 당혹스러웠다.
“----, ----------?”
케르츠 또한 내 상태가 염려스러웠는지 내 쪽으로 다가와 뭐라 말을 건넸다. 그나마 케르츠는 하넨보다 조금 덜 어색했는데, 다행히도 저 사람의 지금 억양은 예전에 신의 언어를 발음할 때와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케르츠는 하넨처럼 독특한 억양을 사용하지 않네. 단순한 지역 차이 때문인지, 하넨이 마법사라서 조금 더 리드미컬한 억양을 사용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나저나 이거, 내가 처음에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기분이 이상하다. 확실히 이 세계 사람들이 어떤 억양으로 어떤 발음을 하는지 아는 데에는 큰 도움이 되겠지만, 그래도 어딘가 생소하달까.
분명 방금까지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그 사람들이 맞는데, 그저 구사하는 언어가 달라졌을 뿐인데. 아니, 따지고 보면 저 사람들은 자기가 쓰던 언어를 그대로 쓰고 있을 뿐 내가 그걸 못 알아듣게 된 것뿐인데, 오직 그것만으로도 완전히 다른 사람들을 보는 것 같아서…….
“세온?”
언어라는 게 이렇게 중요하구나. 신기함과 두려움이 반씩 뒤섞인 마음으로 머뭇거리는데, 그런 내 모습을 보고만 있던 용사가 이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나는 괜히 겁을 먹은 나머지 한 걸음 물러서고 말았다. 아니, 물론 무섭기만 한 건 아니고 용사님이 어떤 억양으로 말하는지 좀 궁금하기도 한데. 그래도…….
“용사님? 저기, 그. 잠깐만.”
“용사님?”
“……어?”
뭐야, 방금 용사님이 제대로 된 말을 하지 않았나? 분명 이 사람도 내가 모르는 언어로 떠들어 대야 정상인데? 혹시 용사님은 인형의 번역 없이도 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나, 나는 어리둥절해져서 용사를 바라보았지만 곧 그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용사는 마치 메아리처럼 내 말을 똑같이 따라 하기 시작했다.
“용사님, 혹시 제 말 알아들어요?”
“용사님, 잠깐만. 용사님, 제 말 알아들어요?”
“뭐 하시는 거예요, 용사님?”
“제 말 알아들어요? 뭐 하시는 거예요?”
아, 이제 이해했다. 용사는 그저 내가 하는 말을 거의 똑같이 흉내 내고 있었을 뿐이다. 아무래도 내가 처음 듣는 언어로 말하자 그게 신기해서 따라 하는 모양인데, 그야말로 용사님이나 할 법한 일이라 나는 조금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내 말을 따라 하지 말고 이 세계의 언어를 말하라고!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용사의 옆구리를 퍽퍽 찔렀지만 용사는 아픈 티도 내지 않은 채 내 말을 거듭 따라했다. 그러더니…….
“용사님.”
“음?”
“-----. 용사님. -----. 세온.”
용사는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자기 얼굴과 내 얼굴을 연달아 가리켜 보이며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용사님, 용사님 하는 호칭을 반복하는 걸 보니 그게 자신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금방 이해한 모양이다. 그러고 보니 이 단어는 과연 용사님에게 어떻게 들릴까? 너무 우스꽝스러운 뉘앙스로 들리지만 않으면 좋을 텐데.
“세온, 용사님!”
“우리 용사님 똑똑하네요. 그게 이름인 걸 금방 아시네요?”
“용사님!”
“네, 네. 그게 신기하세요?”
“용사님, ----.”
어, 잠깐. 뭐라고? 용사는 자기 얼굴을 가리켜 보이더니 곧 어떤 낯선 뉘앙스의 단어를 입에 담았다. 가스피아, 대충 그렇게 발음하는 단어인데 아무래도 낯선 언어여서인지 발음이 정확하지는 않았다.
용사는 ‘용사님’ 하고 말하고는 그 이름을 발음하기를 몇 번쯤 반복했고, 나는 용사님이 뭘 하고 싶은지 금방 이해했다. 그렇구나, 그게 용사님의…….
[아 데으 레페테 케요 가스피아]
‘야, 너까지 장난치지 마! 너는 나와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말이 안 통할 리가 없잖아!’
[……이 세계에서는 용사를 가스피아라고 부른다. ‘사명을 짊어진 자’라는 의미이다. 아무튼, 용사는 내가 자기 말을 따라 해 주기를 바라는 모양이다.]
가스피아라, 이 세계의 언어로 따지자면 용사는 그런 호칭으로 불리는구나. 확실히 신화에 등장할 법한 근사한 이름이었지만 어쩐지 용사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이 사람에게는 뭐랄까, 조금 더 산뜻한 이름이 어울릴 텐데.
하지만 나는 일단 용사님이 시키는 대로 이름을 따라 불러 보기로 마음먹었다. 이름이 마음에 드는지 안 드는지는 별개의 문제로 치고, 일단은 낯선 언어나마 따라 불러 보며 억양과 발음에 익숙해지기 위해서였다.
“그러니까……. 가스피아, 용사님?”
“세온, -----!”
[용사는 기뻐하고 있다. 내가 더 따라 하기를 바란다.]
“---, -----!”
“음, ---, -----? 이렇게 하는 거 맞아요?”
용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이런저런 문장들을 말했고, 나는 천천히 그 문장을 따라서 발음했다. 나에게 익숙한 언어도 아니고, 케르츠나 인형에게서 종종 들었던 신어와도 확실히 다른, 독특한 억양과 어조를 지닌 언어를 발음하는 건 의외로 재미있는 일이었다.
게다가, 새삼스럽게 깨달은 사실이 하나 있는데……. 이 용사님의 억양은 의외로 차분하고 우아한 느낌이구나. 물론 용사가 내게 문장을 가르치느라 그런 것도 있겠지만, 그런 요소를 감안하더라도 용사의 어조는 꽤나 침착하고 부드러운 구석이 있었다. 말을 따라 하기 위해 용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노라니 나까지 마음이 차분해지는 느낌이었다.
다만 신경 쓰이는 점이 조금 있는데, 내가 천천히 용사를 따라 문장을 발음할 때마다 케르츠와 하넨의 표정이 이상해진다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걸음마를 시작하는 아이의 얼굴을 보듯 흐뭇한 표정이었는데, 점점 웃음을 참는 듯한 표정이 되더니 급기야 나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얼굴을 가리기까지 했다.
“--, ---. -------- - ----……. 자, 잠깐만. 그런데 이거 무슨 뜻이에요?”
[용사는 나에게 좋은 문장을 가르쳐 주고 있다.]
“구체적으로 누구한테 좋은 문장인데?”
[용사에게 좋은 문장이다.]
“------, ----------, ---------!”
[용사는 내가 다음 문장을 따라 하기를 바란다. 그렇게 해 준다면 정말로 기뻐할 듯하다!]
지금 놀림당하고 있는 거 같은데 착각인가? 묘하게 흥분한 인형의 저 태도만 봐도 대충 감이 잡히잖아! 용사는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는데, 어쩐지 그 표정에 어울리지 않는 흐뭇함과 즐거움이 가득 어려 있어서 나는 잠시 미적거렸다. 지금 저 문장을 직접 발음한다면 분명 쪽팔린 일이 벌어질 거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렇게 자각했지만…….
‘뭐 어때, 용사님이 저렇게 좋아하는데!’
설마 용사님이 몹쓸 짓이라도 시키겠어, 나는 그렇게 멋대로 납득하고는 용사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가볍게 심호흡을 하고는 입을 열자 용사는 아주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대체 뭘까, 모르긴 몰라도 나에게서 엄청나게 듣고 싶은 말인 것만은 확실한데. 뭔지는 몰라도 우선 발음이나 해 볼, 까…….
“------, ----------, --……. 우, 우와아악?!”
내 입에서 흘러나온 문장이 끝나기도 전, 쥐를 발견한 고양이처럼 눈을 반짝거리던 용사가 냅다 나를 덮치더니 얼굴에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나, 아니 그 전에 사람들이 잔뜩 돌아다니는 광장에서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어안이 벙벙해져서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는데 케르츠와 하넨이 또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솔직히 뭐가 뭔지 전혀 모르겠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용사님의 수작에 말려든 것만은 분명하다고!
“용사님, 자, 잠깐만요! 야, 다시 번역해 줘! 언어의 뿌리인지 뭔지 돌려달라고! 애초에 용사님이 뭐라고 그랬어? 나에게 뭘 시킨 거야?!”
[뽀뽀해 주세요!]
“뭐, 뭐라고?!”
[정확히는, 당신이 너무 좋으니까 잔뜩 뽀뽀해 주세요! 라고 말했다.]
“맞아요! 세온이 뽀뽀해 달라고 했으니까 잔뜩 뽀뽀할 거예요!”
인형이 다시 번역을 시작했는지 이제는 용사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렸다. 용사가 뽀뽀를 퍼부으며 즐거워하는 동안에도, 인형은 [그 밖에 용사가 언급한 문장으로는 ‘정말로 좋아해요!’ ‘평생 같이 살고 싶어요!’ ‘다른 사람과 같이 있지 말고 나하고만 있어 주세요!’ 등이 있다.]라며 나를 놀렸다. 용사의 얼굴이 눈앞을 가로막고 있어서 잘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 나를 놀리는 춤을 추고 있을 거다.
이 약삭빠른 용사님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분명 예전에는 귀엽고 사랑스러웠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이렇게 잔꾀가 많아졌지? 눈을 가늘게 뜨고 용사를 노려보자 용사는 그제야 민망해졌는지 배시시 웃어 보였다. 나는 용사님의 이름을 지어 주려고 이렇게 노력하는데 용사님은 나를 가지고 자기 욕심이나 열심히 채우고 있었잖아!
마음 같아서는 따끔히 혼을 내 줄까 싶었지만, 슬그머니 꼬리를 말고 눈치를 보는 용사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혼을 낼 기력조차도 사라지고 말았다. 기운이 빠진달까, 아니, 오히려……. 조금은 귀엽게 느껴진달까.
“……싫었어요?”
“정말이지, 뽀뽀를 하고 싶으면 말을 하시지요. 네?”
나는 허탈하게 웃음을 흘리면서 용사의 볼에 쪽 입을 맞췄다. 이렇게 쉽게 봐줘도 괜찮나 싶은 생각에 내심 아쉽기는 했지만, 얼굴을 붉히며 쑥스럽게 웃는 용사의 얼굴을 보니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뭐 어때, 우리 용사님이 뽀뽀 좀 하고 싶다는데! 우리가 뽀뽀 못하는 사이도 아니고, 뭐! 나는 용사를 붙들고 뽀뽀 공세를 퍼부었다. 용사는 물론이고 그 모습을 보는 주변 사람들까지 질색할 정도로.
[연인이 된다는 건 낯짝이 두꺼워진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왜, 부럽냐? 응?”
인형이 질렸다는 태도로 어깨를 으쓱하든 말든 나는 그냥 웃으며 용사에게 뽀뽀를 퍼부었다. 이름 짓는 데 도움이 되었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 시간이 무척 즐거웠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 * *
광장에서의 애정 행각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한눈에 산 우리는 재빨리 근처 여관으로 도망쳐 왔다. 늘 그렇듯 2인실 두 개를 잡은 후, 용사는 케르츠와 함께 무언가를 사러 가겠다며 바깥으로 나갔고 나와 하넨은 곧장 방으로 올라갔다.
최근 용사는 무언가를 사겠다는 명목으로 케르츠와 함께 나가서는 한참 동안 돌아오지 않는 일이 잦았다. 물론 그 이유를 모를 리는 없다. 용사도 나름대로 내 생일 선물을 준비하고 있는 모양이지. 과연 무슨 선물을 준비하고 있는지 내심 궁금하기는 하지만, 그걸 벌써 알면 재미가 없다. 자세한 사항은 생일날에 누릴 즐거움으로 남겨 두자.
방에 올라온 하넨과 나는 침대 위에 온갖 책들을 펼쳐 놓고 앉아선 그걸 뒤적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하넨은 미궁을 나온 이후로 세상을 돌아다니며 조금씩 모은 마법서들을 연구하며 시간을 보냈고, 나는 하넨의 마법서 중 그나마 좀 얇고 읽을 만한 것들을 구경하며 이름이 될 만한 단어들을 살폈다.
“이게 참 어렵네…….”
마법서의 내용도 어려웠고, 이름이 될 만한 단어를 찾는 것도 어려웠다. 나는 영문 모를 개념들이 수도 없이 나열된 마법서를 노려보며 인형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인형은 내 머리맡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마법서의 원문을 읽어 내렸지만 인형 본인도 지루해하는 눈치가 역력했다.
“네가 만든 세계의 규칙을 적은 책이잖아, 네가 지루해하지 마…….”
[신은 세계의 규칙을 만들었지, 한 문장을 열두 줄이나 질질 늘려서 서술하는 마법서를 만든 적은 없다. 게다가 반쯤 졸고 있는 사람에게 마법서를 읽어 주는 건 매우 지루한 일이다.]
“내가 졸았나? 어, 미안. 약간 외국어 공부하는 느낌이 들어서.”
나는 입가에 고여 흐르기 직전인 침을 재빨리 닦으며 정신을 차렸다. 하넨은 졸리지도 않은지 저 지루하기 짝이 없는 마법서를 진지하게 읽고 있었는데, 표정은 한없이 진지하고 심각한 주제에 하얀 꼬리를 이리저리 살랑거리는 모습을 보니 본인은 제법 재미를 느끼는 모양이다.
나는 졸음을 쫓을 겸 꼬리의 움직임을 한동안 쳐다보았고, 인형 또한 꼬리가 좌우로 흔들릴 때마다 고개를 좌우로 까딱거렸다. 시선을 느낀 하넨이 의아한 표정으로 이쪽을 보자 나는 자연스럽게 딴청을 부렸다.
“으음, 마땅히 괜찮은 게 없네요. 아무리 단어를 살펴봐도 어떤 걸 이름으로 삼아야 할지 모르겠어요.”
“신중하게 지어. 이름에는 힘이 있으니까. 그래서 원래 이름 짓는 일이 어려운 거야.”
“확실히 정론이긴 한데요…….”
“뭐, 불만이라도 있어?”
“그런 분께서 용사님이 제 이름을 마음대로 바꿔 부를 땐 가만히 계셨나요? 정말이지.”
용사의 이름을 잘 지어 줘야 한다는 데에는 나도 동의하지만, 저 사람한테 그 이야기를 듣고 싶진 않단 말이지. 내가 괜히 입을 삐죽거리자 하넨은 옛날 일을 잘도 들먹인다고 중얼거리며 피식 웃었다.
하긴 꽤 옛날 일이긴 했다. 이제는 모두가 나를 세온이라고 부르는 데도 제법 익숙해져서, ‘박세원’은 예전 세계의 이름이고 ‘세온’은 용사가 나에게 준 새로운 이름처럼 느껴질 정도니까.
그렇지, 나도 용사님식 작명을 적용해서 기존의 것과 비슷한 이름을 지어 줄까? 뭐가 되었든 ‘가스피아’ 비스무리한 이름을 지어준다든지. 아, 하지만 그거 잘못하다간…….
[어쩐지 ‘용용이’와 비슷한 어감의 이름이 완성될 것 같다.]
“나도 그거 방금 깨달았으니까 입 다물어. 아무튼, 제 이름은 이 모양이어도 용사님 이름은 제대로 지어 드릴 테니까 너무 걱정은 마세요.”
“응? 네 이름이 뭐 어때서? 네 이름도 제법 근사하잖아.”
“그렇게 영혼 없는 말씀 하지 마시고요.”
“아니, 영혼 없는 소리가 아니라 진짜로. 제법 괜찮은 뜻의 이름이잖아.”
괜찮은 뜻의 이름이라니?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하넨이 난데없이 재미있는 걸 보여 주겠다며 가방을 뒤지더니 가방에서 얇은 공책을 하나 꺼냈다.
처음에는 하넨의 연구 노트라도 되나 싶었지만 나는 곧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실제로 하넨의 연구 노트는 저것보다 훨씬 두꺼운 데다가, 무엇보다도―저 공책의 생김새는 그리울 정도로 익숙했기 때문이다.
“그걸 하넨 씨가 가지고 계셨어요?”
“원래는 케르츠에게 주려고 했는데, 정작 케르츠는 한두 번 읽고 다 외웠다면서 나한테 다시 주더라? 무슨 놈의 기억력이 그렇게 좋은지. 아무튼, 여기 이 부분 한번 읽어 볼래?”
말쿠테른의 성직자가 쓴 일기장이었다. 이거 아직도 가지고 있었구나, 하넨 씨. 이 일기장을 허겁지겁 읽으면서 세계의 진실을 탐색하던 때가 엊그제 같았는데 벌써 1년 가까이의 시간이 지났네.
나는 하넨이 손가락으로 짚어 준 부분을 바라보았다. 「우리에게는 희망이 필요하다.」라고 적힌, 간절함과 절박함이 담긴 성직자의 그 필체를. 내가 인형을 흘끔거리자 인형은 담담히 그 문장의 발음을 알려 주었다.
[에인트 라르에튀아 메톳 아 세온.]
“……세온?”
[굳이 번역하자면 희망이라는 뜻이다. 무너져 가는 상황의 판도를 바꿀 수 있을 만한, 결정적인 계기나 행운.]
잠깐만, 진짜로 그런 뜻이었다고? 하넨 씨가 그냥 해 본 말이 아니라? 나는 내심 놀란 나머지 인형과 하넨을 번갈아 바라보았고, 둘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하넨 씨는 처음부터 알고 계셨어요?”
“응. 용사에게 희망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냥 내버려 둔 거니까……. 사실 난 네가 이미 알고 있으리라고 생각했단 말이지. 아니면 인형이 너에게 알려 주거나.”
“전혀 몰랐는데요……. 애초에 이 솜뭉치는 제가 물어보지 않으면 잘 알려주지도 않고.”
나는 뽐내듯 어깨를 으쓱거리는 인형의 머리를 꾹꾹 눌렀다. 칭찬 아니야, 이 녀석아. 물론 모른다고 손해를 보는 종류의 정보는 아니지만, 그래도 좀 일찍 알려 줬다면 용사를 다시 보게 되었을지도 모르잖아!
“그나저나 용사님은 어땠을까요? 용사님도 이 단어를 알고 제게 그런 이름을 붙여 주었을까요?”
“글쎄다. 거기까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용사야 뭐 그냥 들리는 대로 발음하지 않았을까? 두 살이었잖아, 두 살.”
하긴 듣고 보니 그렇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넨은 자기가 말해 놓고선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금방 납득해 버리지 말라고, 네 애인이잖아!”
“그거야 미궁을 나온 후의 일이지요! 미궁을 탐험하던 시절에는 어렸잖아요!”
“그거야 그렇지만! 흠흠, 용사도 너한테 꽤 좋은 이름을 주었으니까 너도 힘내 봐. 애초에 용사는 네가 어떤 이름을 주든 좋아하겠지만.”
하넨은 괜히 헛기침을 하며 근엄한 척 분위기를 환기시켰고, 나는 적당히 고개를 끄덕여 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래 앉아 있느라 뻐근한 근육을 스트레칭으로 풀어 주며 창밖을 바라보니, 케르츠와 용사가 사이좋게 이야기를 나누며 여관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용사는 내가 아무 이름도 지어 주지 않은 채 키스만 하더라도 뛸 듯이 기뻐할지도 모른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겠지……. 설령 좋아하더라도 그건 이름 때문에 좋아하는 게 아니라 키스 때문에 좋아하는 거잖아.”
“그러고 보니 생각난 건데, 너네 키스는 했냐? 아까 보니까 용사가 너한테 뽀뽀밖에 안 하던데.”
“가, 갑자기 그런 건 왜 물어보시는데요? 그리고 용사님이랑 저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에요? 이미 했을 수도 있잖아요!”
“글쎄다? 서로 좋아서 죽고 못 사는 상태에서도 미적거리다가 8개월 만에 겨우 고백한 녀석들에게 크게 뭐가 기대되지는 않아서 말이지.”
“진짜 너무하시네요.”
“그래서 했어?”
“아, 안 했지만…….”
“그럼 그렇지. 용사가 고생이 많다, 진짜.”
하넨이고 케르츠고, 아주 나를 놀리는 데 단단히 재미가 들린 모양이다. 나는 박장대소를 터뜨리는 하넨을 무시한 채 창 바깥만 바라보았고, 이쪽으로 걸어오던 용사가 나를 발견했는지 양팔을 흔들자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예쁜 용사님, 생일 선물은 잘 구경하고 왔을까?
“응? 용사랑 케르츠가 왔어?”
“네. 지금 오고 있네요. 그나저나 하넨 씨, 아까 그 일기장 좀 저한테 빌려주세요.”
“알았어. 생각해 보니 내 마법서보다는 그 일기장이 너한테 더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다.”
나는 일기장을 받아 배낭에 넣고는 하넨과 같이 아래층으로 내려가 용사와 케르츠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날 밤, 나는 곤히 잠든 용사의 옆에서 밤새도록 일기장을 뒤적였다. 이거라면 좋은 이름을 지을 수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 * *
시간은 쏜살같이 흘러 어느덧 나와 용사의 생일이 다가왔다.
동료들이 준비해 준 생일 파티는 생각보다 꽤 근사했다. 원래 세계에서는 생일에 케이크를 먹는 풍습이 있었다는 말을 들은 케르츠는 어디선가 크림과 과일을 얹은 빵과 과자를 구해 왔고, 하넨은 생일 케이크에 딸린 폭죽을 모방하기라도 하듯 제법 멋진 불꽃놀이를 보여 주었다. 멸망 직전까지 다가갔다가 서서히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세계에서의 파티치고는 의외로 갖출 걸 다 갖추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동료들은 익숙하지 않은 이세계의 노래를 부르면서도 부지런히 박자에 맞춰 박수를 쳐 주었다. 나와 용사의 생일을 동시에 축하하는 테이블에는 케이크와 비슷하게 꾸며 놓은 디저트 두 개가 얹혀 있었는데, 한쪽에는 길쭉한 초 두 개가 꽂혀 있었고 다른 쪽에는 작고 짧은 초 세 개가 꽂혀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열아홉이지만……. 뭐, 저 자그마한 빵 위에 초를 많이 꽂을 수는 없으니까.’
노래가 다 끝나자 나와 용사는 자기 몫의 촛불을 후 불어 껐고, 테이블 한가운데에서 노래에 맞춰 춤을 추던 인형이 빵 나이프로 빵을 예쁘게 잘라 접시에 담아 주었다. 크림이 올라간 빵은 내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달콤하고 과일 또한 싱싱해서 정말로 생일 케이크를 먹는 느낌이 났다.
“둘 다 생일 축하해!”
“생일 축하합니다. 준비한 건 많지 않지만, 부디 기쁘게 받아 주었으면 좋겠군요.”
케르츠와 하넨은 각자 준비한 선물을 우리에게 건넸다. 우선 케르츠가 준비한 선물은 겉옷이었는데, 겨울이라서 제법 추운 날씨를 고려하면 그야말로 시기에 딱 맞는 선물이었다. 겉모습은 수수한 듯하면서도 안쪽에는 따뜻한 털이 덧대어져 있어서 입으면 제법 든든했다.
하넨은 칼집과 손잡이에 섬세한 장식이 세공된 자그마한 단검 한 쌍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었다. 두 개의 칼집을 나란히 놓고 보면 칼집의 장식이 하나의 그림으로 완성되어서 보이는 구조였다. 날이 잘 서 있어서 잡다한 용도에 쓰기도 좋고, 하넨이 직접 건 마법 덕분에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몸이 따뜻해진다는데, 사실 그런 것보다는 용사님과 쌍이 되는 물건을 가졌다는 게 가장 기뻤다.
“어때, 마음에 들어?”
“진짜로 근사해요. 이렇게까지 정성 어린 선물을 챙겨 주실 줄은 몰랐는데…….”
용사는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며 선물을 끌어안았고, 나 또한 함박웃음을 지은 채 선물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면 이 세계에 온 이후로 맞은 첫 생일이었다. 사실 선물을 받기 전까지만 해도 실감하지 못했는데, 이렇게 동료들에게 둘러싸여 축하를 받다 보니 마음 한구석이 뭉클해지는 감각이 솟아올랐다.
[두 사람을 위한 인형의 선물은 자정에 도착한다.]
“자정? 대체 뭘 주려는 생각인데?”
[때가 되면 안다.]
인형은 용사의 어깨에 올라가더니 그 볼에 가볍게 자기 얼굴을 가져다 댔고, 용사는 생긋 웃으며 인형의 볼에 뽀뽀해 주었다. 사실 인형이 선물을 주리라는 기대는 하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인형의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귀엽지만, 신의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엄청 대단해 보인단 말이야. 대체 뭘 주려고 뜸을 들이는지 짐작도 안 간단 말이지.
뭐, 어떤 선물일지는 모르는 편이 즐거울 테니 일단은 자정까지 기다려 보자. 그렇게 생각하며 가만히 웃고만 있는데 갑자기 용사가 무언가를 꺼내서 나에게 내밀었다.
“그렇지, 이건 세온의 선물이에요!”
“선물을 지금 주시게요, 용사님? 자정에 사이좋게 교환하기로 한 게 아니었어요?”
“세온의 생일은 오늘이니까, 일단은 지금 줄게요! 자정에는 자정 나름대로 즐길 만한 게 있고요!”
용사는 그렇게 말하면서 나에게 잘 포장된 선물 꾸러미를 내밀었다. 끈을 풀고 포장을 뜯자, 그 안에서는 중앙에 커다란 보석이 박힌 은빛 테의 반지가 나왔다. 한쪽 반지에는 사파이어를 닮은 파란 보석이, 다른 한쪽에는 흑진주처럼 오묘하고 윤기가 나는 까만 보석이 박혀 있었는데, 용사는 그중 파란 보석이 박힌 반지를 내게 내밀었다.
“이게……. 제 생일 선물이에요?”
“정말로 예쁘지요? 처음부터 한 쌍으로 만들어진 반지는 정말 드문데, 마침 저와 세온에게 어울리는 반지라고 생각해서 선물로 준비했어요. 이것 봐요, 보석 색이 저와 세온의 눈동자 색과 비슷하지요?”
듣고 보니 과연 그랬다. 나는 용사의 눈동자 색을 닮은 파란 보석을 한참 바라보며 입을 벌렸고, 용사는 그 반지를 조심스럽게 내 손가락에 끼워 주고는 내 볼에 입을 맞추었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훅 달아올라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데, 내 볼에 얼굴을 가져다 댄 용사가 가만히 속삭였다.
“있잖아요, 진짜 선물은 밤에 줄게요. 열심히 공부했으니까.”
“……진짜 선물이요? 아니, 그 전에 공부라니요?”
“인형이 그랬는걸요. 세온의 세계에서 오늘은 크리스마스고, 크리스마스는 연인의 날이라고.”
“그래서요……?”
“연인의 날에는, 아무래도 연인다운 걸 해야겠지요?”
용사의 그 말뜻을 이해한 순간, 나는 얼굴이 당장에라도 폭발할 듯한 기분에 뭐라 말도 못 하고 어버버거리기만 했다. “혹시 싫어요?” 하고 속삭이는 용사의 말에는 허겁지겁 고개를 젓기만 하고, 묘한 기류를 눈치챈 듯 웃기만 하는 동료들에게 화도 못 내고, 그저 인형이 내밀어 준 물 잔의 물만 벌컥거리며 들이킬 뿐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준비해 놓았던 케이크와 음식들을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식사가 모두 끝나고, 하넨이 어딘가에서 가져온 달짝지근한 술까지 한두 잔 마시며 한동안 담소를 나누고 나자 이제 슬슬 방에 들어갈 시간이 되었다. 케르츠와 하넨은 자기들의 방으로 들어가고, 나와 용사는 우리 나름대로 좋은……. 그러니까, 그, 아무튼 연인의 시간을 보낼 작정이었다.
그때, 갑자기 나와 케르츠를 번갈아 바라보던 인형이 내 어깨를 톡톡 쳤다.
[인형은 내가 용사와 즐거운 밤을 보내길 바란다.]
“응? 어, 그, 그러니까……. 케르츠 씨와 하넨 씨의 방에 가 있겠다는 소리지?”
[물론 그럴 예정이지만, 인형은 거기에 사소한 배려를 하나 더 덧붙이기로 마음먹었다. 용사와의 시간을 즐기는 데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인형은 잠시 나에게서 벗어나 케르츠의 감정을 빌릴 작정이다. 그 편이 나에게도 인형에게도 좋을 것이다.]
나는 인형이 꺼낸 뜻밖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니, 용사와의 사적인 시간을 보장하기 위해 다른 방에 가 있거나 정신 연결을 끊는 정도까지는 대충 예상했지만……. 내게서 벗어나 케르츠에게 가 있겠다고?
[걱정하지 않아도 좋다. 하룻밤을 보내고 난 다음에는 다시 돌아올 작정이기 때문이다.]
“그래? 그런 것도 할 수 있었어? 혹시 나 때문에 너무 무리하는 건 아닌가 싶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용사와 밤을 보내며 느낀 모든 감정이 인형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그러면 인형이 하넨과 케르츠의 앞에서…….]
“지, 진짜 고마워! 케르츠 씨, 우리 인형 잘 부탁해요! 오늘 밤만 신세 좀 질게요!”
인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허겁지겁 케르츠의 손을 붙잡고는 그 손에 인형을 떠넘겼다. 그, 아무리 내가 인형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쳐도, 나한테도 사생활이란 게 있기 마련이니까! 이럴 때는 좀 부탁을 해야지!
“자, 잠깐만요. 인형이 세온 씨를 떠나 제 감정을 빌리다니 그게 무슨……?!”
케르츠는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지만, 인형은 케르츠의 의사를 묻지도 않은 채 그의 머리 위로 쪼르르 올라가서는 그의 이마에 자기 얼굴을 가져다 댔다. 그렇게 잠시 의미 불명의 접촉을 유지하던 인형은 10초쯤 지나자 케르츠에게서 떨어져 나왔고,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자연스럽게 케르츠의 어깨로 이동하더니―묘하게 의젓한 자세로 양손을 모으고 앉아 나를 보았다.
[저는 인형의 의도를 알지 못해 다소 당황하고 있습니다.]
“……응?”
[하지만 결국 저는 신의 뜻에 따를 수밖에 없고, 무엇보다 세온 씨를 위한 일이라면 이해해 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는 듯하군요. 인형은 성공적으로 저에게 이동했습니다.]
“저기, 뭐 하는 거야? 케르츠 씨? 케르츠 씨가 지금 이야기하는 거야?”
“……제가 아닙니다. 이거 기분이 참 이상하네요. 세온 씨는 언제나 이런 기분으로 인형과 같이 다닌 겁니까?”
[인형은 오늘 밤 저의 판단력과 감정을 빌린 채 밤을 보낼 예정입니다. 인형 본인도 저의 판단력을 빌리는 걸 어색해하는 터라 오래 이럴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아무튼 오늘 밤은 두 분이 좋은 밤을 보낼 수 있을 것 같네요.]
케르츠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인형을 바라보든 말든, 인형은 케르츠의 머리를 퍽 때리고는 방 쪽을 가리켜 보였다. 됐으니까 어서 들어가기나 하라는 듯한 뉘앙스였는데, 분명 솜뭉치가 때리는 건데도 묘하게 둔탁한 소리가 나서 무서웠다. 나는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기분이 되어 인형을 바라보았다. 뭐야, 저거. 케르츠 씨가 두 명 있는 것 같아서 무섭다고.
하넨 또한 못 볼 것이라도 본 표정으로 슬금슬금 인형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는데―용사는 인형의 모습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지 그저 후련한 표정으로 나를 잡아끌었다.
“고마워요, 케르츠! 그럼 우리는 들어갈게요!”
“요, 용사님?”
“이제 우리 둘이 이야기할 시간이지요? 케르츠나 인형은 잊고, 오늘 밤은 오직 나와 세온 단둘이 보내는 거예요!”
하긴 그렇지. 인형이야 케르츠를 흉내 내도록 내버려 두면 된다. 지금은 그저 용사에게만 집중해야 할 시간이니까. 용사의 큼직한 손이 내 손을 꽉 붙잡자, 나는 뱃속에서 슬그머니 올라오는 간질거림에 미소를 지으며 용사와 함께 방으로 향했다.
그래, 오늘 밤은 나와 용사님의 밤이다.
다른 건 모두 잊고 오직 서로만을 생각하며 지내자.
* * *
깨끗하게 몸 구석구석을 씻고, 얇은 가운만 입은 채 침대에 앉아 용사와 마주 보려니 어쩐지 낯 뜨겁고 온몸이 배배 꼬였다.
‘처, 첫날밤 같잖아……. 아니지. 문자 그대로 첫날밤 맞는데?!’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한 나머지 자꾸 시선이 아래로만 향했다. 어차피 벗을 가운인데도 괜히 아쉬워서 자꾸만 옷자락을 붙잡게 되었다. 하지만 그것도 오래 가지는 못했다. 내가 하던 양을 빤히 구경하던 용사가 천천히 내 손을 붙잡아 옷자락에서 떼어 냈기 때문이다.
“싫으면 꼭 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그, 사람이. 꼭 싫어서만 머뭇거리는 건 아니라고요…….”
“그럼요? 부끄러워요?”
그렇다고 꼭 그렇게 정곡을 찔러야만 할까, 진짜! 용사는 정답을 맞힌 아이처럼 뿌듯하게 웃으며 옷자락에 손을 가져다 댔다. 용사가 내 옷을 벗겨 낸 것까지야 예상 내의 일이니까 그럭저럭 견딜 수 있었는데, 뒤따라 옷을 벗어 버린 용사의 알몸이 시야에 들어와 버리는 바람에 나는 작은 신음을 흘리며 뒤로 물러났다.
‘모, 몸이 저렇게 좋을 필요는 없잖아…….’
엉뚱한 생각이기는 했지만, 정말이지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게끔 하는 몸매였다. 힘도 세고 체력도 좋으니까 당연히 근육도 있을 거라고 생각이야 했는데 저 정도로 예쁘게 근육이 잡혀 있을 줄이야 몰랐다고! 내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그렇다기엔 너무, 그, 객관적으로 근사하니까……!
“또 부끄러워요? 세온은 부끄러움이 많네요.”
탄탄한 복근을 홀린 듯 바라보던 것도 잠시, 용사의 웃는 얼굴이 코앞까지 다가오는 바람에 나는 또 놀라고 말았다. 용사는 내 머리를 양손으로 상냥하게 붙잡고는 얼굴 여기저기에 깃털 같은 키스를 남기기 시작했다. 이마에, 볼에, 코끝에……. 이렇게나 낯 뜨거울 정도로 밀착해 있는데도 신기할 정도로 산뜻하고 가벼운 접촉에 오히려 더 몸이 배배 꼬였다.
용사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생긋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그대로 내 입술에 자기 입술을 겹쳐 왔다. 조심스러우면서도 나름대로는 용기를 낸 접촉이었다. 천천히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혀와 코끝을 맴도는 따스한 숨결에, 나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용사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후, 으읍…….”
자연스럽게 침대 위로 몸이 쓰러지고 용사는 내 위에 올라탄 자세가 되었다. 배를 짓누른 묵직한 무게와 맨살에 닿아 오는 따뜻한 체온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평소의 장난스럽던 접촉과는 아예 딴판인, 명백한 성적 뉘앙스가 어린 몸짓과 감촉이었다.
혀가 얽히고 입 안쪽의 여린 살점이 건드려질 때마다 아랫배가 간질간질하고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숨을 쉬기가 슬슬 버거워지고, 약간 벌어진 입가에서 타액이 줄줄 흐를 때쯤 용사는 천천히 입술을 뗐다. 그 또한 호흡이 제법 거칠었고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는 손길은 조금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떨림은 두려움이 아닌 흥분과 기쁨에서 오는 모양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용사의 장난기 어린 시선이 시야에 들어왔다. 얼굴이 달아올라 있기는 했지만 분명 그의 표정에는 기쁨과 즐거움이 어려 있었다.
“괜찮았어요?”
“이, 이런 건 어디서 배워 온 거예요?”
“배우지 않았어요. 그냥, 세온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잘 보면서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만 들었어요.”
“누가 그랬어요? 혹시 케르츠 씨가?”
“응? 아니에요. 케르츠는 키스 같은 거 제대로 해 본 적도 없다고 그랬는걸요. 이건 하넨이 해 준 말이에요.”
어, 그랬구나. 지난 한 달 동안 두 사람이 내내 붙어 다니길래 당연히 케르츠가 해 준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용사가 묘하게 짓궂은 표정을 짓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혹시 무슨 장난이라도 치려고 그러나, 의아함을 느끼며 용사를 바라보자 용사는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어느 쪽이 더 좋았나요?”
“어, 어느 쪽이라니요.”
“예전에 케르츠와 했던 것과 방금 했던 것, 어느 쪽이 더 좋았어요?”
“갑자기 무슨 말씀을……. 자, 잠깐만요. 그건 키스가 아니라 그냥 인공호흡 같은 거였다고요!”
“응. 분명 케르츠도 그렇게 말했지만요……. 그래도 듣고 싶어요. 어느 쪽이 더 좋아요?”
용사는 내가 시선을 피하지 못하도록 자기 체중으로 내 몸을 꽉 누르고는 눈을 마주쳐 왔다. 아니, 이런 질문은 굳이 그렇게 강요하듯 묻지 않아도 된다고요! 게다가, ‘케르츠도 그렇게 말했다’라고 이야기하는 걸 보니 케르츠에게도 이것저것 캐물은 게 분명하잖아!
“대답 안 해줄 거예요? 어느 쪽이 더 좋았어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난처함을 느끼던 것도 잠시, 마치 놀이라도 하듯 눈을 반짝거리는 용사를 보고 있노라니 괜히 웃음이 비어져 나오고 말았다. 어쩐지 알 것 같다. 내가 볼 때 이 용사님, 정말로 불안해서 그런 질문을 하는 게 아니다. 마치 예전에 광장에서 나를 붙잡고 이런저런 낯 뜨거운 문장을 말하도록 시켰던 것처럼, 그냥 이 어린 용사님은 나에게 듣고 싶은 말이 있을 뿐이니까.
“그걸 말이라고 해요? 당연히 용사님의 키스가 훨씬 좋았, 우, 우왓!”
그 말이 미처 끝나기도 전, 용사의 기쁨 가득한 웃음소리와 함께 또다시 뽀뽀 세례가 쏟아져 내렸다. 처음에는 아까와 마찬가지로 얼굴에 쏟아져 오던 키스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점점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해, 목덜미와 쇄골 부근을 지분거리고 가슴 근처를 깨물기 시작했다. 깨문다고는 해도 그렇게 아프지 않고, 자국조차 남지 않을 만큼 살짝살짝 건드리는 수준이었지만…….
이거, 이대로 내버려 두면 분명 끝까지 가겠지? 그 전에 조금 먼저 해 두고 싶은 게 있는데. 어쩌면 분위기를 깨는 꼴이 되지 않을까 싶어 조금 머뭇거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는 일단 아래로 향하려는 용사의 머리를 떼어 냈다.
“자, 잠깐만요.”
“……왜요? 역시 무서워요?”
“그게 아니라. 그,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에……. 미리 하나 하고 싶은 게 있어서.”
“뭔데요?”
“용사님 이름이요. 용사님에게 지어 주기로 했던 이름, 우선 전해 주고 싶어요.”
“지금이요?”
용사는 제법 당황한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렇게 말했다. 그, 그래. 내가 생각해도 좀 어이없는 소리인 건 이해해! 한창 일을 치르려 들기 직전에 이런 소리를 하다니 혹시 내키지 않아서 저러나, 뭐 그런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게 아니라고! 나는, 그러니까, 좀 중요한 문제가 있단 말이야……!
“그러니까, 그, 하면서 용사님이라는 호칭을 부르는 것보다야 이름을 부르는 쪽이 낫지 않을까요……?”
스스로 말하면서도 괜히 부끄러워지는 바람에, 내 목소리는 점점 모기 소리처럼 가늘어졌고 내 시선은 괜히 딴 곳으로 향했다. 그, 그치만. 이왕 선물을 줄 거면 그 선물을 좀 활용할 수 있는 타이밍에 주는 게 낫지 않겠냐고! 할 때는 종일 용사님, 용사님 해 대다가 하고 나서 이름을 알려 주면 조금 민망하기도 하고, 시기를 놓친 것 같고, 약간 그런 느낌이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용사의 안색을 살폈다. 차라리 웃어 주기라도 하면 나도 웃으며 넘길 수 있을 텐데, 어쩐지 이번에 용사는 웃지 않은 채 가만히 내 얼굴만을 쳐다보았다. 혹시 화가 났나? 아니면 내 이야기를 믿지 못하거나, 내가 핑계를 대고 있다고 생각하나?
“…….”
나는 용사의 침묵에 한동안 불안감을 느끼며 조심스럽게 그의 안색을 살폈다. 하다못해 뭐라 말이라도 해 주면 좋을 텐데! 싫으면 싫다고, 그냥 할 거 먼저 하자고, 그렇게 말해주지도 않고 그냥 그렇게 빨개진 얼굴로만 가만히 있으면……!
‘어, 잠깐.’
빨개진 얼굴? 나는 어리둥절해져서 용사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분명 용사의 얼굴은 붉었다. 그러니까, 마치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이름, 불러 줄 거예요?”
“네?”
“제 이름 말이에요. 그, 하면서 이름 불러 줄 거예요……?”
희미하게 떨리는 용사의 그 목소리에, 나는 겨우 용사님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구나. 역시 용사님도 조금은 부끄러웠던 거구나. 잔뜩 얼굴이 달아올라서는 내 시선을 피하는 용사님의 얼굴이 더없이 귀엽게 보여서, 나는 웃으면서 용사님의 볼에 뽀뽀를 해 주었다.
“그럼 불러야지요. 저도 이런 거 한 번도 해 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이럴 때 이름 한 번 안 부르면 조금은 섭섭하지 않겠어요?”
내가 그렇게 속삭이자 용사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내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힐 때도 저렇게 보였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우스워지고 말았다. 저런 재미를 용사 혼자서 누리다니, 앞으로는 나도 용사를 열심히 놀려야겠다. 그러면 더 사랑스러운 모습을 많이 볼 수 있겠지.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옆 테이블에 있는 펜과 종이를 가져왔다. 용사는 눈을 반짝거리며 종이를 바라보았고, 나는 지난 며칠 동안 열심히 글씨 쓰는 연습을 했던 기억을 살리며 최대한 멋진 필체로 용사의 이름을 적었다.
“아르미온……?”
“네. 이게 용사님의 이름이에요. 예전에 하넨 씨가 복원한 일기장 기억하시지요? 그 일기장을 읽던 도중 찾은 단어예요. 무슨 뜻인지는 아시죠?”
“알아요. ……선택, 선택이라는 뜻 맞지요?”
나는 용사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얼마든지 악을 선택할 수 있으면서도 선을 선택한다.」라는 문장에서 등장하는 ‘선택’이라는 단어가 바로 아르미온이다. 수백 년 전 단어니까 당연히 지금은 쓰지 않고, 심지어 그 옛날에도 다소 종교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어서 그다지 일반적으로 쓰이지는 않았다고 한다.
다만, 인형의 설명에 따르면 이 단어는 단순히 여러 가지의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른다는 뜻이 아니다. 아무리 고된 시련이 눈앞을 가로막더라도 마치 운명에 따라가듯 옳은 길에 마음이 이끌리는, 굳이 말하자면 ‘각오’라고 표현하는 쪽이 더 어울릴 법한 단어. 그게 바로 이 문장에서 등장하는 ‘아르미온’이다.
“세온과 닮은 이름이에요. 마치 형제 같아요!”
“그렇지요? 저와 닮은 이름이어서 고른 것도 있기는 하지만, 무엇보다도 용사님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해서 골랐어요. 용사님과 같이 있으면 언제나 힘이 나고,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을 듯한……. 그런 기분이 들어서.”
나는 그렇게 속삭이며 용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사람이 올바른 길을 걷기 위해서는 ‘희망’만으로는 부족하다. 희망이 그저 일순간 반짝이는 가능성으로만 끝나지 않도록, 희망의 길을 걷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자신의 의지로 선택을 내려야만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의 이름과 용사의 이름도 쌍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어찌 보면 너무 거창하게 의미 부여를 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나는 일기장에서 찾아낸 이 이름에 만족하고 있으며 용사 또한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용사의 손가락이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헤집었다.
“그 이름은 오히려 세온과 어울리는걸요. 나는 말이지요, 당신과 있으면 좋은 사람이 되는 기분이에요.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희망을 잃지 않을 것 같아요! 세온의 이름처럼!”
“용사님, 역시 다 알고 저를 그렇게 부른 거구나……. 어쨌든, 제가 지어 준 이름이 마음에 들어요?”
“물론이지요! 이제 저와 밤을 보내면서 그 이름을 부르면 되겠네요?”
그새를 못 참고 또 놀리려 든다. 나는 용사의 장난에 괜히 부끄러워져서 옆구리를 콱콱 찔렀지만, 아무래도 용사 쪽은 장난이 아니었는지 다시 내 목덜미에 목을 묻었다. 이 또한 아까처럼 지나치게 강하지 않은 접촉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그저 간지러움 정도밖에 느끼지 못하던 방금과는 달리 이번에는 낯설면서도 아랫배가 저릿저릿한 감각이 찾아왔다.
“흐, 읏…….”
어쩌면 그의 손이 점점 아래로 내려가고 있는 탓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손뿐만이 아닌가? 점점 하반신에 밀착해 오는 묵직한 부피감에 나는 흠칫 숨을 들이쉬었다. 자세라든지, 상황이라든지, 이런저런 것들을 감안했을 때 내 하반신에 닿을 만한 물체는 하나밖에 없었다.
“저 말이지요, 처음 해 보니까 모르는 게 정말로 많은데.”
용사는 조금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내 하반신에 자신의 것을 비볐다. 처음 해 본다는 말도, 모르는 게 많다는 이야기도, 분명 거짓 한 조각 담겨 있지 않은 진실일 텐데. 그런데 왜일까, 용사의 저 말이 의뭉스럽게 느껴지는 건.
“이렇게 커지면 좋은 거지요?”
알면서 묻는 거지, 지금?! 이미 발기할 대로 발기한 물건을 내 사타구니 사이에 꾹 누르며 용사가 질문했다.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눈빛을 정면으로 마주하니 저 사람의 실제 나이가 도무지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자기 나름대로 대답을 기대했는지 용사가 눈을 반짝였지만 나는 괜히 토라져서 시선을 휙 돌렸다. 물론 용사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는 또 달라붙어 왔다.
“어때요? 좋은가요?”
“……직접 느끼고 계시잖아요. 용사님 게 그 정도로 커졌다면 분명 좋다는 뜻이겠지요.”
“제 거 말고 세온 거요. 좋아요?”
시선을 돌린 대가인지 질문이 조금 더 직설적으로 변했다. 용사는 자기 것만큼이나 딱딱해진 내 성기를 아예 손으로 감싸 쥐고 문지르기 시작했다. 흐으, 움찔거리며 부끄러운 소리를 내자 용사는 또 웃더니 침대 아래에서 무언가를 꺼내 왔다. 투명한 액체가 담긴 병이었다. 병 입구를 열자 달큰한 향기가 퍼져 나왔고, 용사는 마치 젤처럼 흐르는 액체를―아니, 진짜 러브 젤을 내 사타구니 사이에 쏟아부었다.
“우, 우왓!”
“미약은 아니에요. 그저, 바르면 조금 더 예민해지는 향유라고 들었어요. 촉감이나 냄새도 좋고.”
“흣, 아으, 잠깐, 이, 이건.”
“그리고 이거 바르면 덜 아프대요. 처음 하면 다들 아프다고들 하니까…….”
향유 범벅이 된 내 성기에 용사의 성기가 비벼지자, 허리 아래가 온통 뜨겁고 저릿저릿해지는 감각에 히끅거리는 신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정말로 미약 아닌 게 맞는지, 그저 감각이 예민해졌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이상한 기분이 들다니 말이 되는지, 온갖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동시에 어떤 생각도 머릿속에 머물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그저 질척거리는 소리와 성기가 문질러지는 감각, 그리고 내 것을 거의 짓누르다시피 비비고 있는 용사의 성기가 시야에 들어올 뿐이었다. 나도 그렇게 작은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잔뜩 흥분한 채 내 성기에 닿아 있는 용사의 남근은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크기였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여서, 역시 보통 사람과는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 뿐인데…….
아니지. 생각해 보니, 단순히 보통 사람과 다르다고 감탄할 수준의 문제만은 아닌 듯한데.
“하아, 읏, 촉감은 그렇다 치고……. 그, 덜 아프다니요?”
“넣을 때요.”
“넣다니요?”
“몰라요? 맞다, 그러고 보니 세온도 처음이랬죠.”
“처음이긴 한데, 그. 넣다니 무슨.”
멍청이처럼 질문만 반복하던 나는,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깨달음에 기겁을 하며 몸을 뒤틀었다. 아니, 그.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아니잖아! 넣는 행위 자체가 싫다는 건 아닌데, 남자끼리 할 때 그런 식으로 한다는 사실을 아예 모르던 것도 아닌데, 그래도 저런 크기의 물건을 넣겠단 건 좀 너무……!
“잠깐만요, 용사님. 저 지금 언데드 아니고. 아니, 일단 죽지 않는 건 사실인데 그래도 느낄 건 다 느끼고.”
“응, 그러니까 하는 거예요.”
“아픔도 느낀다고요!”
“잘 풀어 주면 아프지 않다고 들었어요. 걱정 마요, 세온.”
“풀어 준다고 안 아플 정도의 크기가 아니잖아요!”
우리 세 살 용사님, 양심은 어디에? 나는 질겁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지만 용사는 변함없이 생긋 웃으며 손을 아래로 향했다. 아무리 봐도 내가 겁에 질려서 말도 안 되는 걱정을 한다고 여기는 모양인데, 이번에는 내 문제가 아니라고. 내가 아니라 용사님이, 정확히 말하자면 하반신이 문제란 말이야!
예전에 가시 함정에 추락해서 배를 관통당했을 때 어떤 느낌이었더라? 아니, 그 시절의 기억을 떠올리는 게 도움이 되긴 하나? 배를 관통당하는 것과 뒤를 관통당하는 것의 차이는 둘째치더라도, 그 꼬챙이보다 지금 내 시야에 들어오는 저게 더 굵은데?
나는 아까와 조금 다른 맥락에서 압도당하는 기분을 느끼며 숨을 들이쉬었다. 차라리 용사님이 가져온 저 향유가 미약 같은 거였더라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아픔은 안 느낄지도 모르니까. 아니, 아픔이 안 느껴지더라도 결국 찢어지는 건 마찬가지니 결과적으로는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손가락으로 조금씩 풀어 주면 괜찮아질 거예요. 자, 조금만 참아요…….”
예상했던 곳으로 향한 용사의 손가락이 천천히 입구를 문지르다가 안쪽으로 슬쩍 비집고 들어오자, 나는 낯선 이물감에 눈을 질끈 감았다. 분명 향유로 축축하게 젖어 있고 고작 손가락 하나 정도라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 생각 외로 괜찮지가 않았다. 고작 하나가 들어오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나 기분이 이상한데 이 이상은 아무래도 무리야.
역시 안 된다. 그만두게 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고 고개를 젓기만 하는데.
“괜찮아요, 세온.”
“……!”
“해 봐서 너무 아프면 그만 할게요. 다치게 하지 않을게요. 하지만……. 딱 한 번만, 믿어 줄래요?”
다정하고 상냥한 속삭임이었다. 이래서야 누가 어른이고 누가 애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조심스럽게 눈을 떠 보자 용사가 부드럽게 눈을 휘며 웃어 보여서, 저도 모르게 가슴이 쿵쿵 뛰고 뱃속이 간질간질했다.
“아, 알았다고요. 대신에 제가 그만두겠다고 하면 곧바로 그만두는 거예요. 알았죠?”
“그럴게요. 걱정하지 말고, 자…….”
대답과 동시에 그의 손가락이 비집고 들어와 천천히 내부를 넓혀 나가기 시작했다. 솔직히 지금은 이 손가락조차도 받기가 부담스러워서 자꾸만 숨이 떨릴 지경이었다. 내 것이 아닌 이물질이 몸에 들어와, 나조차도 건드린 역사가 없는 민감한 부위를 꾹 누르고 벌리고 헤집는다는 사실이 지나치게 낯설었다.
“괜찮아요, 세온. 힘 빼고.”
“읏, 흐으…….”
그래도 용사의 다정한 목소리와 계속해서 쏟아지는 키스 덕분에 그나마 긴장이 좀 풀렸다. 안쪽을 헤집는 손가락이 점점 늘어나고, 하반신의 열기가 머리 꼭대기까지 눅진하게 녹일 만큼 달아오른 상황에서는 그저 저이의 목소리와 입맞춤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생각만큼 나쁘지는 않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비집고 슬그머니 올라올 정도였다. 무작정 쑤셔 박기만 하는 게 아니잖아. 향유도 충분히 바르고, 이렇게 정성껏 안쪽을 풀어 준 다음 넣으면 의외로 무난하게 잘 들어갈지도…….
“착하다, 잘 참았어요. 이제 들어갈 테니까.”
“네, 들어……. 잠깐만, 뭐라고요?”
그래서였을까, 용사가 시키는 대로 막연히 허리를 들던 나는 입구에 와 닿는 묵직한 감각을 느끼고 나서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용사는 다시 내게 키스하며 몸을 겹쳐 왔고, 나는 입이 막혀 아무 말도 못 한 채 용사의 것을 몸 깊이 받아들여야만 했다.
“우읍, 흐, 으, 웃……!”
이쯤 아래를 풀어 줬으면 견딜 만하지 않을까, 3초쯤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던 생각은 허무하리만큼 빨리 무너지고 말았다. 눈앞이 핑그르르 도는 압박감과 함께 숨이 콱 틀어 막혔다. 다리는 아예 마비되다시피 하여 허공에 들어 올려진 채 부들부들 떨렸고, 떡 벌어진 입에서는 목이 졸리는 듯한 신음만 흘러나올 뿐 제대로 된 말 한 마디 흘러나오지 않았다.
“괜찮지요?”
안 괜찮다는 말이 입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았다. 견딜 만해서 그렇다기보단 그냥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고개를 저을 수도 없었다. 전신이 완전히 굳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히끅거리며 숨만 들이쉬자, 그걸 긍정의 의미로 해석한 용사가 서서히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흣, 하으, 아, 학, 흐으……!”
“착하지요. 힘 빼고, 그래, 그렇게…….”
고통인지 쾌감인지, 아니, 그런 단순한 단어만으로는 설명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압도적인 감각에 머릿속이 하얗게 물들었다. 맞닿은 살점이 천천히 앞뒤로 쓸리는 감각, 배 속 깊은 곳이 콱콱 짓눌리는 압력, 그 모든 감각이 지나치게 생경하면서도 강렬하여 혼이 나가 버릴 정도였다.
“읏, 세온, 세, 온……!”
흥분에 잔뜩 들뜬 용사의 목소리가, 그나마 지금 이 순간에 현실감 비슷한 것을 불어넣어 주었다. 쾌감에 물든 푸른 눈동자도, 흥분한 나머지 목덜미까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도, 하나같이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아름다워서 가슴이 두근거리며 뛸 정도였다. 내가 멍하니 용사의 얼굴을 올려다보자, 용사는 조금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 이마에 키스했다.
“좋아요, 세온?”
“좋……. 읏, 용사님, 거긴.”
“용사님?”
내 대답의 어딘가에 심기가 거슬렸는지, 갑자기 용사가 눈매를 살짝 찡그리더니 허리를 쳐올렸다. 나는 영문도 모른 채 흐끅거리며 몸을 뒤틀었지만 용사는 봐주는 일 없이 내부를 짓찧기만 할 뿐이었다.
“흐윽, 하, 읏……?”
“용사님이 아니잖아요.”
“무, 무슨 소리를.”
“이름, 불러 주기로 했으면서. 벌써 잊어버렸나요?”
심통이 난 듯, 심술을 부리는 듯, 용사는 웃으며 계속 허리 짓을 했다. 그래, 확실히 그런 이야기를 했지. 그 때문에 하던 걸 중간에 멈추기까지 했으면서 막상 본판에 들어가니 까맣게 잊고 있었다. 애초에 1년 가까이를 불러 오던 호칭을 갑자기 바꾼다는 사실 자체가 어색해서……!
“불러 줄 거지요?”
“당연히, 불러, 읏, 잠깐만요, 용사님!”
“또 실수한다.”
용사의 허리가 튕겨지자 머릿속에 하얀 전류가 튀는 듯한 감각이 덮쳐 왔다. 방금과는 분명 다른, 압박감이나 두려움보다는 오히려 쾌감에 가까운 감각에 몸을 부르르 떨자 용사는 더욱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마치 내가 왜 그러는지 완전히 이해한다는 듯이.
“이름 불러 주면, 기분 좋은 일 해 줄게요.”
기분 좋은 일이라니, 그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이해하기도 전 머릿속에 온통 불꽃이 튀었다. ‘기분 좋은 일’을 바란다면 지금이라도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다는 듯. 이 용사님, 아무리 생각해 봐도 협상 전략이 엉망진창이잖아. 협상을 제시해 놓고선 결과물을 곧바로 줘 버리는 경우가 어디 있어?
하지만 용사님의 그 전략은, 적어도 나에게는 제대로 먹혀들고 말았다.
“흑, 아으, 핫, 흐으……!”
배 안쪽이 엉망으로 헤집어지는, 그러면서도 지독한 쾌감을 주는 그 움직임에 나는 반쯤 울먹거리며 용사를 끌어안았다. 머릿속이 망가져 버릴 것만 같다. 버거움과 고통이 아예 사라진 건 아니지만, 여전히 숨조차 제대로 쉬기 힘들 정도로 힘겹지만, 그래도, 그걸 감당하다 못해 아예 잊게 만들어 줄 정도로 기분이 좋아서.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여서 시야가 뿌옇게 보이는 와중에도, 용사의 집요한 듯 상냥한 눈빛만은 여전히 선명할 정도로 강렬하게 인식되었다. 무엇을 원하는지 모를 리 없다. 처음부터 주기로 약속했던 거니, 지금 이 순간 불러 주자. 내가 저 사람만을 위해 만든 이름을.
“……아르, 아르미온.”
“……!”
“좋아, 좋아해요. 아르미온. 흣, 아으……!”
용사의, 아니, 아르미온의 목에 얼굴을 묻은 채 나는 가까스로 속삭였다. 마음 같아서는 더 크게, 더 힘차게 외치고 싶었지만 지금의 기력으로는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아주 잠깐 용사의 눈빛에 기쁨의 빛이 어리고, 그 얼굴이 환하게 빛나더니.
“나도요, 세온.”
대화는 그걸로 충분하고도 넘쳤다.
나와 용사는, 그저 서로를 끌어안은 채 절정에 다다랐다.
* * *
우리는 한동안 여운에 빠진 채 누워서 숨을 골랐다. 엉덩방아를 세게 찧기라도 한 듯 엉덩이가 얼얼하고, 한동안은 일어나지도 못할 정도로 다리가 후들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어딘가 개운하고 후련한 기분이었다.
“많이 아프진 않았지요?”
“솔직히 아프다기보단, 그, 정신이 없었는데……. 그래도, 음. 네. 좋았어요.”
“다행이다. 아프지 않다면, 앞으로는 이런 거 자주 해도 괜찮지요? 매일매일 해도 되나요?”
“이 못된 용사님이 절 말려 죽이려고 하시네. 이런 걸 어떻게 매일 해요.”
장난스럽게 웃는 아르미온의 볼을 슬쩍 꼬집던 나는, 무심코 창문 쪽에 시선을 두었다가 예상치 못한 장면을 목격했다. 새까만 겨울 하늘을 수놓는 하얀 점들. 처음에는 바깥이 너무 어두워서 눈치조차 채지 못했지만, 점점 하늘을 메우기 시작한 눈송이는 이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비중이 커져 있었다.
“어, 아르미온! 저거 봐요. 눈이에요!”
“눈이라니요?”
“봐요, 눈 내리잖아요! 눈 내리는 거 본 적 있어요, 아르미온?”
“본 적 없어요! 저, 태어나서 눈이라는 걸 처음 봐요!”
나와 아르미온은 가운을 걸치고 곧장 창가로 향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내가 휘청거리며 몸을 숙이자 아르미온은 창가까지 나를 부축해 주었다.
함박눈이 춤추듯 내리는 밤하늘을 두 눈에 담자, 아르미온의 표정은 경이로움과 기쁨으로 환하게 빛났다. 눈 내리는 밤하늘보다도 저 사람의 미소가 훨씬 아름다워서, 나는 창가를 바라보는 대신 그저 아르미온의 얼굴만 홀린 듯 바라보았다.
한참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문득 깨달았다. 이거 잘하면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되겠구나. 아니, 어쩌면 벌써 화이트 크리스마스인가? 나는 슬쩍 고개를 돌려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고, 어느새 시계가 자정을 가리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빙긋 웃었다. 정말로 축복을 받는 기분이야.
“눈 오는 거 보니까 좋아요?”
“네. 눈 오는 하늘을 보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세온과 함께 이런 아름다운 광경을 볼 수 있다는 점이 가장 기뻐요.”
“저도 용사님과 이런 광경을 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아요.”
“용사님? 또 그런다.”
그 순간 아르미온의 눈빛에 짓궂음이 담겼다. 나는 또 실수를 한 민망함에 쓴웃음을 지으며 곧바로 말을 정정했다.
“……아르미온과, 이런 광경을 볼 수 있어서 좋아요.”
아르미온은 그제야 만족한 듯 내 이마에 가벼운 키스를 남겼다. 그는 방금까지만 해도 홀린 듯 바라보던 밤하늘에 더는 미련이 없다는 듯 커튼을 쳤고, 가볍게 나를 안아 들고는 침대로 걸어갔다. 나는 몸을 받치는 단단한 팔과 따스한 체온을 만끽하며 그대로 눈을 감았다.
축복받은 날이었다.
나도, 아르미온도, 그리고 온 세상도.
* * *
케르츠와 하넨은 커튼을 치지 않은 채 눈 내리는 하늘을 하염없이 구경하고 있었다. 순백의 경이로움이 겨울밤을 가득 메우는 장면은 두 사람 모두에게 낯설면서도 신기한 모습이어서, 아무리 오래 쳐다보고 있어도 질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든 채 창문 옆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인형은 창틀에 얌전히 앉아 두 사람을 마주 보았는데, 평소에 비하면 매우 얌전하고 차분한 모습이어서 보는 사람이 다 어색해질 정도였다.
“이게 네 선물이었구나. 이렇게 새하얀 눈은 태어나서 처음 봐.”
[그렇습니다. 세온 씨의 세계에서는, 크리스마스에 눈이 오면 화이트 크리스마스라고 해서 행복의 징조로 여긴다고 해요. 괜찮은 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 그렇긴 한데……. 역시 그 말투 적응 안 돼! 갑자기 내용물이 완전히 바뀐 것 같다고! 너, 내가 아는 인형이 맞긴 맞지? 케르츠가 복화술이라도 하는 거 아니야?”
애초에 인형의 저 정보 주입이 복화술로 커버할 수 있는 영역이던가? 케르츠는 쓴웃음을 지었지만 그 또한 하넨의 심정을 이해했다. 역시 저건 인형답지가 않다. 춤을 추거나 팔다리를 쭉쭉 뻗지도 않고, 거들먹거리지도 않은 채 그저 얌전하고 차분하게 앉아만 있는 인형은 정말이지 딴 사람이라도 보는 것 같았다.
[사실 인형도 이 상황이 좀 어색하기는 한 모양입니다. 역시 저보다는 세온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네요. 제가 듣기에도 좀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고.]
“말투도 헷갈려! 네가 말하는 너라는 단어, 분명 케르츠를 칭하는 거지? 세온 아니지?”
[저는 저입니다. 세온 씨에게 돌아가면 세온 씨를 저라고 칭할 거예요.]
“그게 그런 원리였어? 아무튼 진짜 듣기 어색하네……. 혹시라도 나한테 기생할 생각은 하지도 마. 알았어?”
[그나저나 기생이라는 표현은 좀 어색하지 않나요? 명색이 신의 자아인데, 신의 선택을 받았다든지 화신이라든지 하는 표현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고 저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형은 어느 쪽이든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는 게 제일이라는 입장이지만요.]
“역시 세온이 나아. 세온에게 기생한 인형이 제일 좋아…….”
하넨은 질릴 대로 질렸다는 표정을 지은 채 바닥에 꼬리를 탁탁 쳤고, 케르츠는 남의 일인데 괜히 자기가 민망해져서 쓴웃음을 지었다. 마치 자신의 속내를 남에게 다 드러내는 기분이었다. 물론 인형은 어디까지나 케르츠의 판단력과 사고력을 빌렸을 뿐 케르츠의 마음을 읽는 게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의 말투와 행동을 따라 하는 인형을 보고 있노라면 기분이 묘할 수밖에 없었다.
세온은 이런 기분을 어떻게 견뎠을까. 아니, 애초에 세온은 인형의 정체나 행동 방식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만났으니 자연스럽게 익숙해졌겠지만……. 케르츠가 한숨을 내쉬자 하넨은 피식 웃으며 화제를 돌려 주었다.
“그나저나, 세온은 용사에게 과연 무슨 이름을 주었을까?”
“분명 좋은 이름을 주지 않았을까요? 좋아하는 사람의 이름이니 허투루 짓지는 않았을 겁니다. 내일 아침이면 확인해 볼 수 있겠죠.”
“그래. 내일 아침이면 우리도 용사의 이름을 알 수 있겠지……. 그나저나 생각난 게 있는데 말이야.”
“뭔가요.”
“너, 이름 지어 줄까?”
“제 이름이라면 이미 있지 않습니까. 갑자기 무슨 말씀이신지?”
뜬금없는 하넨의 제안에 케르츠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 마법사님은 갑자기 또 무슨 바람이 분 걸까. 세온이 이름을 짓는 과정을 오래도록 구경하고 나니 자기도 해 보고 싶어졌나?
“그건 말쿠테른의 32번째 성기사의 이름이지 네 이름은 아니니까. 세온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말이지, 세온이 살던 세계에는 개인의 이름과 그 개인이 속한 혈통의 이름이 따로 있었대. 그렇게 따지자면 네가 가진 건 혈통의 이름이지 개인의 이름이 아니야.”
“……재미있는 주장이군요. 그렇다는 건, 케르츠라는 이름은 따로 두고 조상들과는 다른 저만의 이름을 만들어 주겠다는 이야기입니까?”
“따지고 보면 그런 셈인데……. 됐어! 싫으면 말든가!”
하넨은 민망한 듯, 괜히 말했다고 후회하는 듯 울상을 지어 보였지만 케르츠는 그의 설명이 꽤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다. 물려받지 않은, 짊어지지도 않은, 오직 케르츠 자신만을 위해 준비된 이름. 서로 그런 이름을 주고받을 수 있는 용사와 세온이 부럽다는 생각을 한 번도 안 했다면 거짓말일 테니까.
“그래서 어쩔래? 잘은 못 짓지만 그래도 지어 줄까?”
“마음대로 하세요. 마법사님이라면 의외로 괜찮은 이름을 짓지 않을까요.”
“의외로라니, 넌 대체 나를 뭐라고 생각하는 건데……. 그나저나 넌 언제까지 마법사님이라고 부를래? 길거리에서 마법사님이라고 부르면 열 명쯤 뒤돌아볼 때쯤 되어서야 제대로 이름을 부를 테냐?”
“글쎄요. 마법사님이 제 이름을 지어 주고 나면, 저도 이름으로 부르는 걸 생각해 보지요.”
“생각은 해 보시겠다? 말 한번 예쁘게 한다, 진짜.”
짜증나는 자식, 하넨은 그렇게 중얼거리고는 고개를 휙 돌려 창밖을 노려보았지만 그 꼬리는 좌우로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케르츠는 하넨의 꼬리를 못 본 척한 채 그저 눈 오는 풍경만을 구경했다. 어느새 창틀에서 내려오더니 발치에 달라붙은 인형을 들어 올려 품에 안은 채, 케르츠는 소리 없이 내리는 눈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따스하고 상냥한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