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눈을 뜨는 도살자와 자라나는 용사님
용사가 기억하는 ‘바깥’의 하늘은 언제나 까맣고 붉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구름이 까맣고 구름 아래를 자욱하게 감도는 안개가 붉었으며 안개 틈새에서 먼지처럼 떠다니는 날벌레 떼가 또 검었다. 용사와 하넨과 케르츠는 벌레 떼가 입으로 들어오는 걸 막기 위해 언제나 코와 입을 가리는 가면을 뒤집어쓰고 다녔다. 가면 안에는 벌레를 쫓기 위한 약초나 향료가 들어 있어서, 후각이 예민한 용사는 가면 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드물게 벌레 떼가 자취를 감출 때면 하넨은 ‘오늘 날씨가 꽤 맑다’라는 식의 말을 꺼냈다. 그런 날이면 용사는 가면을 벗은 채 맨얼굴로 바깥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물론 그런 날이라고 해서 용사가 더 행복해지는 건 아니었다. 벌레 떼가 자취를 감춘다는 건, 미물인 벌레들조차도 무언가를 느끼고 도망칠 만큼 위험한 일이 벌어진다는 뜻이었다. 이를테면 사념이 나타난다든지.
사념을 받아들여 정화할 때면 용사의 눈앞은 빙글빙글 돌았고, 질퍽거리는 흙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기도하듯 정신을 잃어야만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차리면 얼굴에는 또 가면이 덮여 있었으며 하늘은 여전히 붉고 검었다. 사념이 사라져 안전해진 하늘에는 다시 윙윙거리며 벌레 떼가 몰려들었다. 절대 아름답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용사에게는 익숙한 풍경이었다.
미궁에 들어온 이후로는 붉은 하늘도 까만 벌레 떼도 보이지 않았고 당연히 가면도 쓰지 않았지만, 용사가 기억하는 ‘바깥’이란 언제나 가면 너머로 보이는 붉고 어두컴컴한 풍경 그대로였다. 사명 이외에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용사는 자신이 본 것 이외의 세상을 상상할 능력이 없었으므로, 용사는 이 세상이 언제까지나 어둡고 음울하기만 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서였을까? 용사는 살랑거리는 바람과 따스한 햇볕에 이질감을 느끼며 깨어났다. 푸르고 맑은 하늘과 하얀 구름은 아직도 용사에게 낯설고 어색했다.
“일어났어요, 용사님?”
짐마차가 덜컹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용사는 한참 동안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눈을 깜빡거렸다. 꿈에서 보았던 검은 구름과 지금 하늘에 펼쳐진 하얀 구름을 한참 비교하고 나서야 용사의 머릿속에 현실감이 돌아왔다. 볼에 달라붙은 푹신푹신한 가면……. 아니, 인형을 떼어 내고 고개를 돌리니 세온이 보였다.
용사는 그제야 겨우 떠올려 냈다. 지금 그는 여행을 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예전에 비해 훨씬 더 아름다워진 세상을 구경하러 가는 길이었다.
“우리 지금 어디까지 왔어요? 얼마나 더 가야 해요?”
“아직도 한참 더 가야 해요. 해가 질 때쯤에야 목적지에 도착한다고 하던데……. 그, 저기요. 용사님? 제가 이제는 통각이 돌아와서 그렇게 꾹꾹 누르면 아프거든요.”
“아파요? 그러면 이제부터는 살살 누를게요. 이 정도면 충분해요?”
용사에게 볼을 잡힌 세온은 용사를 빤히 바라보다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용사는 세온이 왜 웃는지 잘 몰랐지만 웃는 세온의 얼굴을 보면 기분이 좋아졌다. 뱃속 어딘가가 간질거리고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용사는 마주 웃어 보이며 세온의 볼을 주물럭거렸고, 세온은 묘한 표정을 지은 채 용사를 내버려 두었다. 두 사람 사이에 조금 묘한 기류가 흐르기 직전, 세온의 어깨에 올라타 있던 인형이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용사의 손을 탁탁 쳤다.
[말이 다소 흥분한 상태라서 이동 속도가 평소보다 조금 느리다.]
“말이 왜 흥분해요? 말에게 좋은 일이 있어요?”
[용사와 마찬가지로 변화된 세상에 익숙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호기심 많은 말이 자꾸만 이것저것 건드리고 다니는 통에, 마부가 그걸 말리려다가 사고로 잡아먹힐 뻔했다. 마부가 주기적으로 말을 달래야 하기 때문에 다소 천천히 이동하는 중이다.]
그렇구나, 말도 잔뜩 신이 났구나. 용사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짐마차 앞쪽을 흘끔 바라보았다. 머리가 다섯 개 달리고 어지간한 장정 예닐곱 명을 합쳐 놓은 듯한 크기에, 반쯤 벌어진 입에서는 거무튀튀한 침을 질질 흘리는 ‘짐꾼 말’이 짐마차를 부지런히 끌고 가는 중이었다. 예전에도 꽤나 자주 이용한 교통수단이었지만 세온은 아무래도 저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저거 진짜로 말 맞아?”
[평범한 말이다.]
“다리가 네 개라는 점 말고는 예전 세계의 말과 공통점이 전혀 없는데?”
[오염된 세계에서의 생존을 보장하기 위해 다소 개량을 거친 짐꾼 말이다.]
“이제 오염은 사라졌잖아. 그런데도 여전히 저 모습이야?”
[수백 년에 걸친 개량을 통해 만들어진 종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저 모습을 유지할 거다. 오염이 사라졌다고 해서 모든 게 한순간에 바뀌지는 않는다.]
“하긴 그렇겠지. 모든 게 한순간에 바뀐다면 오히려 그게 더 폭력적일지도 모르고……. 그나저나 용사님, 이제는 제 볼 좀 놓아주지 않으실래요? 볼이 잡혀 있다 보니까 발음이 자꾸 새는데.”
용사는 생긋 웃으며 세온의 볼을 놓아주었다. 이렇게 세온의 볼을 한동안 주물럭거리다가 놓아주면, 핏기가 없는 세온의 뺨이 발갛게 달아올라서 보기에 참 좋았다. 세온이 모든 감각과 감정과 인간성을 되찾으면서 새로이 생긴 변화였다.
처음 세온의 붉은 뺨을 보았을 때는 어디 다친 게 아닌가 싶어서 조금 겁이 났지만, 인형의 이야기에 따르면 세온의 뺨이 달아오르는 건 완전히 다른 이유인 듯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용사가 세온의 볼에 뽀뽀를 할 때와 거의 비슷한 이유에서 달아오르는 모양이다.
아무튼 아프지도 않고 건강에 해가 되는 것도 아니라니 용사는 그걸로 안심했다. 가끔 케르츠와 하넨이 세온의 붉어진 볼을 보고 피식거리며 웃을 때가 있었지만 그들조차도 용사를 혼내거나 꾸중하지는 않았다.
[세계를 뒤덮은 오염이 사라진다고 해서, 멸망 직전까지 몰렸던 생태계가 단번에 회복되지는 않는다. 생존을 위해 자리 잡았던 온갖 악습이 순식간에 뿌리 뽑히지도 않는다.]
세온의 볼을 놓아 준 용사는 자연스럽게 인형을 집어 들었다. 인형은 자못 멋진 척을 하며 세온에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고 있었지만, 용사는 지금껏 쭉 그래 왔던 것처럼 인형의 말을 대강대강 흘려들었다. 원래 두 살 어린아이에게는 의미심장한 뜻이 담긴 이야기보다 당장 눈앞의 장난감이 더 중요한 법이었다. 설령 그 장난감의 내부에 신이 꾸는 꿈이 들어 있다 할지라도.
[하지만 세상은 분명 변화한다. 천천히, 조금씩, 하지만 분명 긍정적인 방향으로……. 인형이 나에게 구조를 요청하고 있다. 용사는 내 볼을 잡아당길 때만 배려심을 발휘하고 인형을 잡아당길 때는 인형의 사정을 별로 봐주지 않는다. 볼이 꾹꾹 눌리고 팔이 잡아당겨지고 있다. 솜이 삐져나올지도 모른다.]
“아무리 잡아당겨도 보푸라기 하나 안 생기는 주제에 엄살 부리기는. 아무튼,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이제는 세계도 성장할 거라는 말이지? 조금씩, 하지만 확실하게.”
용사가 인형을 슬쩍 놓아주자 인형은 후다닥 도망쳐서는 하넨의 어깨에 올라갔고, 하넨과 케르츠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하넨과 케르츠 또한 예전과 비슷한 듯하면서도 조금 달랐다. 하넨은 로브에 달고 다니던 동물의 뼈를 전부 떼 버린 상태였고, 케르츠는 눈에 띄지 않기 위해 허름한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지만 그 아래에는 하얗고 금빛으로 반짝거리는 근사한 갑옷을 입고 있었다.
용사는 ‘성장’이라는 단어가 주는 뉘앙스가 참 마음에 들었다. 변화하지만 오염되지 않는다. 조금씩 달라지지만 그 내면에 담긴 소중한 것은 망가지거나 부서지지 않는다. 사람은 평생 완성되지 않는다고, 그저 아주 작은 모습으로 태어나 조금씩 성장해 갈 뿐이라고 말하던 세온의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당시에는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제 용사는 그 이야기가 무슨 소리인지 이해했다.
세계가 성장해 나가는 딱 그만큼, 자신도 성장했으면 좋겠다. 용사는 그렇게 생각하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살랑살랑 기분 좋은 바람이 불고 따뜻한 햇볕이 내리쬐고, 다음 마을로 향하는 짐마차에는 예전과 비슷하지만 조금은 달라진 동료들이 올라타 있었다.
즐거운 여행이었다.
* * *
“아직도 마을에 도착을 못 했네. 이렇게 시간을 지체해도 괜찮을까? 이러다가 그 도살자……. 아니, 성기사가 떠나 버리는 거 아니야?”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세요. 어차피 저도 성기사라는 호칭이 입에 붙지는 않았으니까. 아무튼,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광증에서 벗어난 도살자는 무턱대고 아무 데나 돌아다니지 않아요. 저희가 찾는 그 도살자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하넨과 케르츠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나는 잠든 용사의 머리를 무릎에 얹은 채 석양을 바라보았다. 해가 질 때쯤이면 도착할 거라며 호언장담하던 마부는 여전히 머리 다섯 달린 말과 씨름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아직도 저 동물을 말이라고 부르는 데에 조금 거부감이 있다. 머리가 다섯 개인 것까지는 백번 양보한다 치더라도, 내가 아는 말은 분명 초식 동물이다. 마부의 머리를 뜯어먹기 위해 다섯 개의 머리가 서로를 견제하며 히힝거리는 건 보통 말이 할 법한 짓이 아니란 말이다.
다만 이 세계 사람들에게는 말의 반란(?)이 별로 놀랍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투레질 소리가 요란한데도 쿨쿨 잘 자는 용사는 그렇다 치더라도, 케르츠와 하넨조차도 마부가 목숨을 건 고삐 쟁탈전을 벌이든 말든 자기들 할 이야기만 나누고 있었다. 물론 대화 주제는 앞으로의 일정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도살자를 만나는 건 조금 미루지요. 다음 마을에 도착하면 여관부터 들릅시다. 저녁도 먹고 푹 쉰 다음 내일 아침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게 낫겠어요.”
그럼 도살자는 내일쯤에야 만나겠구나. 앞으로의 일정을 대충 짐작한 나는 작게 하품을 하며 용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도살자는 케르츠를 말하는 게 아니다. 케르츠를 제외한 31명의 도살자 중 한 명에 대한 이야기다.
지금 우리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도살자들을 만나러 돌아다니는 중이다. 딱히 도살자들에게 용건이 있는 건 아니고, 그저 다른 도살자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신경 쓰인다는 케르츠의 의견을 반영한 결과일 뿐이었다.
‘신경이 쓰일 법도 하지. 얼굴 한 번 못 보기는 했어도 일단은 동료니까.’
우리는 케르츠를 제외한 나머지 도살자들이 어떤 상태인지 잘 모른다. 신이 감정을 되찾으면서 도살자들에게 봉인되어 있던 오염된 감정은 이미 사라졌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 모두가 성기사로 각성한 건 또 아닌 듯하다. 인형 녀석의 말에 따르면…….
[각오할 틈 없이 찾아오는 변화는 누구에게나 폭력이다. 말쿠테른의 후예들이라 하여 다를 바는 없다.]
[케르츠는 사태의 전말을 모두 목격했으므로 곧바로 말쿠테른 본연의 힘을 되찾을 수 있었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겪지 못한 이들이 쉽사리 그러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들에게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지금의 도살자들은 광증에서 벗어나기만 했을 뿐 완전한 성기사로 거듭나지는 못한 모양이다. 하긴 케르츠 저 사람도 처음에는 변화를 잘 받아들이지 못해서 나한테 얻어맞기까지 했지. 다른 도살자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니 이해하기가 쉬웠다.
아무리 광증에서 벗어났다고는 해도, 지금까지 자신들이 알고 있던 지식이 전부 거짓이었으며 이제부터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란 어렵겠지. 좋은 방향으로의 변화든, 나쁜 방향으로의 변화든, 누구에게나 변화에 적응할 시간과 계기가 필요하다.
[말쿠테른의 후예들이 어떤 식으로 변화에 적응해 나가는지 확인하는 일도 나름대로 보람찰 것이다.]
도살자들이 광증 없는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을지는 나도 케르츠만큼이나 궁금하다. 신력을 잃은 지금의 신관들은 도살자들의 상대가 안 된다고 들었지만, 그래도 신관들이 작정하고 덤벼들면 도살자들에게 위협이 될지도 모르니 조금은 걱정도 된다.
어차피 여행에는 목적이 있어야 즐거운 법이니까, 딱히 목적지가 없다면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도살자들의 상태를 살피는 것도 좋겠다. 도살자들은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 지내는 경향이 있다고 들었지만, 다행히도 인형이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할 수 있으니 그들을 찾기는 어렵지 않을 거다.
도살자가 갑자기 도망가 버리지 않는다면야 금방 만날 수 있겠지. 만날 수야, 있을 텐데…….
“시간도 넉넉하니 전투 준비도 충분히 해 갑시다. 도살자와 싸울 때 도움이 되겠지요.”
“그래. 전투 준비도……. 잠깐만, 뭐라고? 전투 준비를 왜 해?”
“도살자를 만나는 거잖아요. 당연히 싸울 각오를 다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광증도 없는 도살자하고 싸우긴 왜 싸워?”
“마법사님이야말로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군요. 생각해 보세요. 광증이 없는 상태의 제가 대단히 비폭력적인 사람이었습니까?”
쓸데없이 합당한 의견인지라 나와 하넨과 인형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하긴 맞는 말이다. 아무리 광증의 원인이 사라졌다고는 해도, 지금껏 불안정한 삶을 영위하며 세상을 떠돌던 도살자들이 갑자기 온화해질 리는 없다. 오히려, 갑작스럽게 광증이 사라지고 세상이 바뀐 탓에 정신이 불안정해졌을 가능성이 더 크겠지.
[케르츠의 말은 논리적으로 합당하다. 도살자와 싸우기라도 한다면 분명 힘들어질 테니, 만일의 상황을 위해 전투를 준비하는 일도 나쁘지 않다.]
저쪽에서 문답무용으로 공격해 올 수도 있으니 이쪽에서도 어느 정도 대비는 해 놓아야 한다. 물론 가장 이상적인 상황은 싸움 자체를 하지 않는 거겠지만, 케르츠의 태도와 인형의 말을 고려하면 어느 정도 각오를 다져야만 했다.
“애초에 환영받으리라는 기대는 하지도 마세요. 도살자들은 혼자 사는 걸 선호하고, 낯선 사람이 자기를 찾아오는 상황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도살자에게 용건이 있답시고 찾아오는 작자들 중 좋은 목적을 가진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으니까요.”
“같은 도살자라 해도 마찬가지일까?”
“마찬가지입니다. 상대가 언제 광증에 휩싸여 공격해 올지 모를 테니 오히려 더 경계하겠지요. 동료 도살자의 흔적을 발견하는 건 반가운 일이지만 도살자 본인을 만나는 건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니에요.”
“과연, 일종의 동족 혐오구나.”
케르츠는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주의사항을 읊어 대기 시작했다. 도살자들은 대체로 공격적인 성향이니까 겉보기에 온화해 보인다고 해서 방심하면 안 된다든지, 오랫동안 혼자 지낸 탓에 자기만의 규칙에 집착하거나 이상한 강박증을 앓고 있을지도 모르니 그 점에서 주의해야 한다느니, 묘하게 상세하면서도 실감이 넘치는 경고였다.
다만 인형은 무생물처럼 미동 하나 없는 모습으로 케르츠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나는 인형이 케르츠의 말을 들으며 재미있어 한다는 인상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물론 인형은 인형답게 아무 표정도 짓지 않고 아무런 눈빛도 보내지 않지만 그래도 알 수 있다. 이 녀석과 같이 지내면서 쌓인 경험이 얼만데. 내가 인형을 흘끔거리자 인형은 나에게만 슬쩍 정보를 전해 왔다.
[동족 혐오라기보다는 자기혐오다.]
‘갑자기 그게 무슨……. 아, 무슨 소리인지 알겠다. 저 사람 실제로는 다른 도살자들 만난 적 없지?’
[동료를 만나는 일은 케르츠에게도 꽤 괜찮은 성장의 계기가 될 것이다. 시야가 넓어질 테니까.]
아하, 그러니까 저 사람……. 나는 인형과 비슷한 심정이 되어 빙글빙글 웃으며 케르츠를 바라보았다. 케르츠는 별 해괴한 꼴을 다 보겠다는 듯 나를 흘끔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는데, 아무래도 이해하기를 포기한 모양이었다. 그는 나와 인형을 완전히 무시한 채 말을 이어 나갔다.
“그렇지, 이건 좀 예외적인 상황입니다만……. 어쩌면 도살자가 아이를 배고 있거나 아이를 밴 사람을 데리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이런 상황에선 좀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할 거예요.”
“아이를 밴 사람이라면, 그……. 아내를 말하는 건가요?”
“아내요? 이상한 표현을 쓰는군요. 아이를 밴 사람이 여자라는 보장이 있습니까?”
“네……?”
“설령 여자라 할지라도 아내라는 표현을 쓰고 싶지는 않군요. 사실상 납치당해서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처지일 테니까.”
잠깐, 방금 되게 이상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아이를 밴 사람이 여자라는 보장이 있냐니? 나는 인형을 흘끔 바라보았고, 인형은 고작 그런 문제로 놀라지 말라는 듯 내 옆구리를 쿡 찔렀다.
“도살자는 어지간해선 동료를 만들지 않습니다. 언제든 광증에 사로잡혀 동료를 공격할 수 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요. 예외가 있다면 저처럼 피치 못할 사정이 생겼거나, 자기 아이를 가진 사람을 데리고 다닐 때지요.”
“…….”
“그러니까, 상대가 남자든 여자든 도살자가 타인과 같이 다닌다면 주의해야 합니다. 반드시 그러리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높은 확률로 아이를 밴 상대를 납치해 데리고 다니는 상태일 테니까요.”
내가 할 말을 잃은 동안 하넨은 조금 다른 의미에서 질색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만, 납치라고? 제정신이 돌아왔을 때 사람을 만나서 관계를 가지는 게 아니었어?”
“말도 안 되는 소리군요. 제정신인 도살자가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잖습니까? 어차피 관계를 가져 봤자 광증 걸린 자식밖에 태어나지 않을 텐데요.”
“그야 그렇지만, 그 뭐냐. 사람 일이라는 게 꼭 이성적으로 돌아가지만은 않잖아. 이런 세상에서 자식 따위 낳아 봤자 소용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찌어찌 애 낳고 살아가는 게 보통 사람들의 심리란 말이야.”
“……애초에 상대 쪽이 질색을 할 겁니다. 언제 미쳐 버릴지 모르는 도살자의 애를 가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대부분의 도살자들은 광증에 휩싸여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 아무나 붙잡아 억지로 관계를 가지고, 상대가 아이를 가졌을 경우 열 달 동안 이리저리 끌고 다니다가 상대가 아이를 낳으면 그제야 놓아줍니다.”
“성기사의 후손치고는 꽤나 끔찍한 방식으로 번식을 하네.”
“좋아서 하는 게 아닙니다. 당신 말대로 사람 일이란 게 꼭 이성적으로 돌아가지만은 않지요. 아이 따위 가지기 싫어서 어떻게든 피해 보려고 노력하다가, 광증에 시달려 행동 제어가 안 되는 사이에 누군가를 덮치고 마는 식이라고요. 그러다가 결국에는 체념하고 아이를 키우는 거죠…….”
케르츠는 괴로운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였다. 인형은 케르츠를 위로하듯 다가가 어깨를 토닥거려 주었고, 케르츠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인형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인형이 신의 자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케르츠는 인형을 대할 때 꽤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다. 지금의 케르츠는 성직자로서의 정체성을 되찾았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조상이나 동족의 죄를 자책할 건 없다. 그렇게 대가 이어지지 않았더라면, 체내에 봉인해 두고 있던 신의 감정이 온 세상으로 퍼져 나가 세계의 멸망이 앞당겨졌을 것이다. 핏줄을 통한 봉인이 이어졌던 덕분에 용사가 태어나고 미궁이 정화될 때까지 세상이 버틸 수 있었다.]
“그렇다면 다행입니다만, 그래도 이미 저지른 죄를 부정할 수는 없으니…….”
[케르츠 본인은 아직 그 방면에서 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니 괜찮다. 더는 광증에 시달릴 일도 없으니, 앞으로 제대로 된 방식으로 아이를 가지면 된다.]
“어? 잠깐만, 케르츠 저 녀석 동정이야? 저 나이에?”
“지금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닐 텐데요, 마법사님……. 아무튼, 방금 제가 설명한 상태의 도살자는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는 상태니까 평소보다 더 주의해야 합니다. 여러모로 공격성이 높은 상태일 거예요.”
케르츠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대충 이해했기에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애를 임신한 사람이 도망가는 건 곤란한데 그렇다고 도망가게 내버려 둘 수도 없고, 그 와중에 낯선 사람이 찾아왔는데 그 사람이 아이를 해치는 건 곤란하고, 낯선 사람과 적극적으로 교전하는 사이 아이를 임신한 사람이 도망갈지도 모르고……. 아무튼 총체적 난국이란 거구나.
“뭐,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아이가 생겼을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도주를 돕는 쪽이 인도적인 결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야 그렇겠지. 누가 그런 상황에서 도살자와 같이 있기를 원하겠어?”
하넨과 케르츠가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나는 문득 고개를 돌려 마차 너머를 바라보았다. 마차가 느리기는 해도 착실하게 움직이고 있었는지 벌써 저 멀리에 마을의 윤곽이 보였다.
용사는 주변에서 무슨 이야기가 오가는지 알지도 못한 채 새근새근 잘 자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방금 그 이야기는 용사가 듣기엔 별로 좋지 않은 내용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성인인 상태에서 태어나 더는 성장하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을 만큼 순진한 사람이니, 케르츠의 이야기를 들었더라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꼬치꼬치 캐묻다가 결국에는 큰 혼란에 빠졌겠지. 자느라 안 듣길 잘했다.
‘그러고 보니 조금 걱정이네. 혹시 용사님이 도살자에게 이상한 소리라도 듣고 혼란스러워하면 어쩌지?’
[걱정할 필요 없다. 그것 또한 다 성장의 일부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다짜고짜 세상의 어둠부터 접하게 하는 건 좀 그렇지 않겠어? 왜, 용사님이 아기에 대한 잘못된 선입견을 갖게 된다든지.’
[과한 걱정이다. 애초에 나는 그 도살자에게 아기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모른다.]
‘듣고 보니 그렇기는 하네.’
김칫국이라도 마신다는 듯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는 인형의 태도에 괜히 머쓱해지고 말았다. 하긴 그렇기는 했다. 어쩌다 보니 화제가 임신과 아이 쪽으로 흘러가기는 했지만, 아직 우리는 상대 도살자가 독신인지 아닌지 알지도 못한다. 심지어 도살자가 공격적인 성향인지 아닌지도 확실히는 모르는 상태고.
[케르츠는 자기가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경고했을 뿐이다. 도살자의 성격은 사람마다 다르고, 도살자가 대를 이어 봉인하고 있었던 감정에 따라 달라지기도 한다.]
‘그렇구나. 케르츠가 다른 도살자에 비해 좀 폭력적인 성향이어서 저런 식으로 말했을지도 모르겠네.’
[도살자 중에는 온순하고 겁 많은 성격의 소유자도 많다. 너무 걱정할 것 없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쩌면 내가 너무 겁을 먹었는지도 모르지. 어쩌면 진짜 도살자는 독신인 데다가 온화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어서, 전투를 벌이기는커녕 느긋하게 대화나 좀 나누고 헤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악의 경우 공격적이고 말이 통하지 않는 데다가 애까지 딸려 극도로 신경질적인 도살자를 만날지도 모르지만, 원래 현실이란 최선과 최악 사이의 중간 지대 어딘가에 있는 법이다. 지금 내가 걱정하는 것만큼 용사님에게 타격이 갈 확률은 의외로 낮다는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제법 마음이 편해져서, 나는 용사의 머리카락을 괜히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깨어난 용사가 웃으며 내 손을 붙잡을 때쯤에는 이미 마차가 마을 입구에 다다라 있었다.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어제 내가 했던 걱정은 기우가 아니었다. 물론 세상 대부분의 일들은 최선과 최악 사이 어딘가에 있겠지만, 그렇다고 최악의 상황이 아예 안 일어나는 건 절대로 아니었으므로.
운 나쁘게도 우리는 최악의 상황을 마주하고 말았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숲속, 도살자의 거처를 찾아온 우리는 미궁 바깥에 나온 이후 처음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중이었다.
“라페누, 하르테, 라페누, 하르테, 메에, 라페누, 에으……!”
“케르츠, 이 정신 나간 새끼가 우리한테 뭐라는 거야! 광증에서 벗어난 주제에 공격은 왜 하는 거고!”
“모릅니다!”
“뭐, 이 자식아?! 네가 모르면 어떻게 해!”
“이자의 말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고 맥락도 없습니다! 게다가, 지금 이자는 도살자 특유의 광증에 시달린 게 아니에요! 그냥 본인이 미친 겁니다! 아무래도 갑작스러운 변화를 못 버티고 패닉에 빠진 게 아닌가 싶은데……!”
3미터는 족히 되어 보이는 어마어마한 존재감의 쇠톱이 케르츠의 머리를 덮쳐 왔다. 케르츠는 곧바로 검을 휘둘러 쇠톱을 쳐냈지만 무기의 크기가 크기인지라 적잖이 충격을 받고 물러났다. 하넨이 곧바로 안개를 이용해 상대의 시야를 가리지 않았더라면 뒤따른 공격을 막아 내지 못하고 그대로 고꾸라질 뻔했다.
평소 같았더라면 상대를 꼼짝없이 마비시켜 아예 무릎까지 꿇렸을 하넨의 안개는 오늘따라 그 효과가 영 미약했다. 상대의 인면철 갑옷이 주술을 외우자마자, 안개는 허무하게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고 도살자는 금방 시야를 되찾았다. 광기에 가득 찬 도살자의 눈이 다시 번뜩이며 케르츠를 노려보았다.
대대로 내려온 광증의 문제가 아니라 ‘본인이 미친 것’이라던 케르츠의 말대로, 도살자의 주변은 검은 안개 한 조각 없이 그저 깨끗하기만 했다. 다만 도살자의 눈은 반쯤 뒤집혀 희번덕거렸고 그 움직임은 본인의 안위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불안정하면서도 공격적이었다. 그저 제 눈앞에 존재하는 침입자의 목숨을 끊어 놓아야겠다는 강박 관념 이외에는 아무것도 머릿속에 들어 있지 않은 듯했다.
흙먼지가 가득 묻어 산발이 된 머리카락에, 케르츠에 비하면 훨씬 더 작고 왜소한 체구의 도살자 청년은 마치 길거리에서 동냥하러 다니는 걸인만큼이나 초라해 보였다. 광증에 휩싸였을 당시의 케르츠가 사람의 힘으론 어찌할 수 없는 짐승처럼 위협적으로 보였던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케르츠와 하넨에게 순식간에 제압당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처럼 무력해 보이는 청년이었지만―지금 두 사람은 오히려 저 청년에게 속수무책으로 밀리고 있었다. 아무래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 모양인데…….
“빌어먹을,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검보다는 쇠톱이……!”
[예전의 방식으로 싸우면 곤란하다. 이제는 도살자의 전투 방식을 버리고 신에게서 받은 힘을 쓸 때가 되었다. 기껏 힘을 빌려주어도 제대로 쓰지 않는 케르츠의 모습에 인형은 조금 시무룩해져 있다.]
케르츠는 넌더리를 내며 검을 고쳐 쥐었다. 케르츠의 검에 어린 신성력의 빛은, 일순간 불타오르는 듯하다가도 자꾸만 케르츠의 통제를 벗어나 엉뚱한 곳으로 흘러넘쳤다. 케르츠는 신성력을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 휘두르지 못한 채 사실상 힘에 휘둘리다시피 하고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알고는 있지만, 애초에 신성력이 제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데 어떻게 합니까!”
[원래 남에게 빌린 힘이란 다 그런 법이다. 열심히 노력해서 익숙해지자.]
인형의 이야기에 따르면 신성력은 신의 힘을 ‘빌려서’ 쓰는 거고, 자기 힘이 아니니까 당연히 통제가 어려운 듯하다. 통제만 가능하다면 폭발적인 힘을 낼 수 있지만 그게 안 되면 사실상 애물단지보다도 못한 게 신성력인데, 아무래도 지금 케르츠는 후자의 상태인 듯하다.
[신의 날개를 펼치면 신성력의 통제가 조금은 더 수월해진다.]
“그게 안 펼쳐지니 문제 아닙니까! 분명 지난번에는 제대로 펼쳐졌는데, 이번에는 왜……!”
[아무래도 케르츠는 요령이 부족한 모양이다.]
인형의 얄미운 말에 반박하지도 못한 채, 케르츠는 그저 이를 바득 갈며 검을 휘두를 뿐이었다. 그러나 자유롭게 형태를 변형시킬 수 있는 쇠톱과는 달리 성기사의 검은 길이와 무게를 마음대로 바꿀 수 없었다. 무기부터가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니, 적극적으로 공격하기보다는 상대의 공격을 막아 내기에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늘 쓰던 인면철 갑옷의 주술에 의지하지도 못하는 상태여서, 지금의 케르츠는 방어조차 어딘가 어중간했다. 도살자의 힘은 완전히 버렸는데 그렇다고 성기사로서의 힘을 충분히 활용하지도 못하니 전투에서 밀리는 게 당연했다.
“마법사님, 좀 더 강력한 독이라도 써서 행동을 저지시켜야 해요! 저 혼자서는 무리입니다!”
“내가 모르는 줄 알아?! 젠장, 세상이 변하고 나니 독 종류의 마법이 예전 같지 않다고!”
하넨 또한 제대로 싸우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다만 하넨의 경우에는 이유가 더 복잡했다. 우선 세계가 정화되면서 독과 저주의 속성을 띤 마력이 급격히 줄어든 점이 첫 번째 이유였다. 아직은 체내에 쌓인 마력으로 어떻게든 버티고 있는 듯하지만, 정화된 세상에서 독의 마력이 변변한 힘을 쓰지 못하는 탓에 마법의 구현 또한 전보다 어려워진 모양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게다가, 누군가가 있어! 이 도살자 말고도 누가 이 근처에 숨어 있다고!”
“뭐라고요? 누가 있단 말입니까?”
“나도 몰라! 아마 마법사일 거야! 결계석을 사용해 마력을 봉인시키는 방법이라니, 이렇게 고등한 대지 속성의 마법을 쓸 수 있는 마법사가 흑탑 바깥에 있었을 줄이야……!”
하넨의 주장에 따르면, 어딘지 모를 곳에서 끊임없이 하넨을 방해해 오는 정체불명의 마법사가 있다고 한다. 그것도 요즘은 찾기 힘든 ‘대지’ 속성의 마법사가. 나는 마법에 대해 모르니까 잘 체감이 안 되지만, 예전에 하넨에게서 그와 관련된 설명을 간단하게나마 들은 적이 있다.
오염이 정화되어 자연의 순환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세상에서는, 독과 저주의 마력이 저절로 쇠퇴하고 자연과 연관된 불, 물, 바람, 대지의 마력이 가장 강하다고 들었다. 오염이 사라진 탓에 쇠퇴한 독과 저주의 속성으로는 사대 속성을 이기기가 쉽지 않다고도 했다. 지금 하넨이 고전하고 있는 건 아마 그 때문인 듯하다.
더 큰 문제는 지금 하넨이 그 마법사의 정체는 물론이고 위치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분명 케르츠의 말에 따르면 도살자는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걸 선호하지 않아서 혼자 다닌다고 했는데, 대체 누가 저 도살자 청년을 도와서 우리를 공격하고 있는 거지? 마음 같아서는 나도 움직여서 상대의 정체를 찾아내고 싶은데……!
[어중간하게 움직여 봤자 짐 덩어리가 될 뿐이다. 용사와 함께 얌전히 후방에 숨어 있자.]
“아니, 그야 그렇지만……. 그나저나 너 진짜 너무하는 거 아니야? 어떻게 손가락 하나 까딱도 안 해? 진짜 안 도와줄 거야?”
[어차피 인형에게는 까딱할 손가락조차 없다. 그리고 인형은 말쿠테른의 후예와 마법사를 관찰하느라 바쁘다.]
“케르츠 씨와 하넨 씨 이야기야, 아니면 저쪽 이야기야?”
[양쪽 모두 관찰하고 있다. 어느 쪽이 더 뛰어난 적응력을 보이는지 천천히 살펴보자.]
“이기는 놈이 우리 편인 거냐고! 이 양심 없는 녀석아!”
[신은 누구의 편도 들지 않고 모두를 사랑한다.]
“이럴 때만 신 이야기 꺼내지 말고!”
그 와중에도 인형은 케르츠와 하넨을 돕기는커녕 태평하게 데굴거리며 놀기나 했다. 이 녀석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나는 내 어깨에 앉은 채 꾸벅꾸벅 조는 시늉을 하는 인형의 머리를 한 대 콱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곤란하게도 지금은 인형이나 때리며 기운을 낭비할 만한 상황이 못 되었다. 왜냐하면…….
“역시 신전에서 온 거였냐? 이 쥐새끼 같은 자식들아!”
“세온, 조심해요!”
그 순간, 정체불명의 돌멩이 몇 개가 나뭇가지 사이에서 날아왔다. 위험하다는 걸 자각하기도 전에 용사가 나를 감싸며 검을 휘둘렀다. 용사가 튕겨 낸 돌멩이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오더니, 어디에서 자랐는지조차 알 수 없는 덩굴이 삽시간에 솟아올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저걸 직격으로 맞았더라면 나와 용사는 진작 덩굴에 휘감겨 팔다리가 묶였을 게 분명하다.
아마 이 돌멩이를 던진 건 하넨이 말한 ‘그 마법사’겠지. 마법사치고는 묘하게 걸걸한 사내의 목소리여서 조금 뜻밖이었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저 마법사를 붙잡지 않으면 하넨은 제대로 힘도 못 쓴다고! 용사 또한 비슷한 판단을 했는지 나와 인형을 바라보았고, 나와 인형은 용사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온을 지켜 줘요, 나는 저 마법사를 잡을게요!”
용사는 인형에게 당부하고는 자리에서 훌쩍 뛰어올랐다. 도움닫기조차 없는 단 한 번의 도약으로 수 미터를 뛰어오른 용사는 곧바로 나뭇가지를 붙잡고 돌멩이가 날아온 방향으로 점프했다. 평범한 사람은 흉내조차 못 낼 법한 움직임에 당황한 듯한 상대가 신음을 흘리자, 용사는 그 소리 덕분에 정확한 위치를 파악한 듯 곧장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인형과 함께 후방에 남은 나는 문득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저 목소리, 아까 분명 ‘신전’이라고……. 설마 나와 인형의 대화를 절반만 듣고 이상한 오해를 한 건가? 나는 일단 마법사의 오해를 풀기 위해 이야기를 꺼내 보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의 나는 전투 능력이 없다시피 하니 이런 사소한 일이라도 시도해야 했다.
“다짜고짜 공격부터 하지 말고 이야기 좀 해요! 당신, 저 도살자와 같은 편 맞지요?”
“내내 죽이려고 쫓아다녔으면서 이야기는 무슨 이야기야! 젠장, 대체 우리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이러는 건데?!”
“당신들이 뭘 잘못해서 쫓아다니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그저 당신들과 이야기를……!”
“아니, 물론 저 자식이 가끔 맛이 가서 사람 좀 죽이고 돌아다니긴 했는데, 예전에는 그러든 말든 신경도 안 쓰고 내버려 두다가 갑자기 요 몇 개월 동안 이러는 이유가 뭐냐고! 설마 하늘이 저 모양이 된 게 도살자들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응?!”
역시나. 예상이 맞아떨어진 걸 확인한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아무래도 세상이 변화한 이후로 신전 측에서 도살자들을 제법 괴롭히며 돌아다닌 모양이었다. 지금 저 도살자가 멀쩡히 살아 있는 걸 보면 신전의 공격 자체는 위협적이지 않았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거추장스럽거나 당혹스럽기는 했겠지.
“저기, 저희는 그런 목적에서 온 게 아니에요! 신전하고도 아무런 관련이 없다니까요!”
“우리더러 그걸 믿으라고? 하는 말이며 옷 입은 꼬락서니들이 신전에서 온 게 뻔한데, 우리가 바보냐?!”
뭐라고 해명을 해 보려던 나는 용사와 케르츠의 복장을 떠올리고는 흠칫 입을 다물었다. 용사는 아직도 신전에서 받아 온 갑옷을 입고 있는 데다가, 인면철 갑옷이 벗겨지고 나타난 케르츠의 하얀 갑옷은 얼핏 보기에는 신전의 갑옷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다. 저쪽에서 오해하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아무튼, 부탁이니까 제발 우리 좀 내버려 둬! 가뜩이나 저 녀석도 미치광이가 되어 버렸는데 너희까지 이러기냐? 좀 꺼지라고!”
“그러니까 저 사람이 미쳐 버린 이유를 해결하려고……. 요, 용사님! 조심해요!”
나뭇잎이 우수수 쏟아지며 용사의 상반신이 아래로 고꾸라졌다. 언뜻 시야에 들어온 용사의 팔과 머리는 온통 나무 덩굴로 뒤얽혀 있었다. 다행히도 용사는 두 다리로 아슬아슬하게 나뭇가지를 붙든 채 버텼고, 그 상태에서 맨손으로 나무 덩굴을 뜯어내 순식간에 자유로워졌다. 용사가 다치지 않은 건 확실히 다행이지만…….
“저건 뭐 하는 놈인데 저렇게 잘 움직여? 너 혹시 신전에서 만든 강화 인간 같은 거냐?!”
“강화 인간? 그게 뭔가요? 제가 신전에서 만들어진 건 사실인데.”
“용사님, 그 이야기는 하면 안 되지요!”
“역시 신전에서 온 거 맞잖아! 입만 산 새끼가 어디서 사람을 속여 먹으려고!”
이래서야 설득이 전혀 안 된다고! 저쪽의 도살자는 아예 이성을 잃다시피 했고, 다른 한쪽은 워낙 덴 적이 많아서 극도로 경계심이 발달한 상태였다. 이래서야 원만하게 대화가 진행되는 쪽이 오히려 기적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일단은 대화를 포기하고 후퇴해서 다음 기회를 노리거나, 억지로라도 상대를 붙잡아 놓고 사정을 설명하는 정도가 지금 쓸 수 있는 방법인데…….
‘지금 후퇴하면 냅다 도망가 버릴 거야. 다음 기회 따위는 없다고. 게다가 저 사람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는 게 분명해!’
분명 광증에서 해방되었어야 할 성기사가 여태껏 미쳐 있는 모습도 그렇고, 하늘의 색이 바뀐 건 자기들 탓이 아니라는 저 마법사의 이야기도 그렇고. 어쩌면 저 사람들은 지금 이 세계에 벌어진 변화의 본질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형 또한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도살자의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알면 뭐라도 좀 해 봐! 놀고만 있지 말고!”
[인형은 놀고 있지 않다. 그저 양쪽 모두를 관찰하며…….]
“관찰하면서 재미있어하고 있잖아! 그게 노는 거지! 너 자꾸 그렇게 딴청 피울 거야?”
[관찰하며, 기다리고 있다.]
잠깐만. 기다리다니 뭘 기다려? 뜻밖의 이야기에 내가 잠시 멈칫한 사이, 저편에서 케르츠의 당혹감 어린 신음이 들려 왔다. 고개를 돌려 확인해 보니 그의 전신이 정체불명의 나뭇가지와 잎에 덮인 채 거의 형체조차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언뜻 보이는 칼끝과 붉은 머리카락으로 내부에 누가 있는지를 겨우 짐작할 정도였지만, 점점 더 복잡하고 무성하게 자라나는 가지와 잎 때문에 그 모습조차 곧 사라지고 말았다. 저대로 가다간 나무에 파묻혀 질식하는 게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
케르츠가 움직임을 완전히 봉쇄당한 사이, 도살자는 거의 무방비 상태가 된 하넨을 향해 쇠톱을 찍어 내렸다. 하넨은 운 좋게 쇠톱을 피하긴 했으나 그 반동으로 바닥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하넨의 지팡이에서 흘러나온 안개가 잠시 도살자의 시야를 막아 주고는 있어도 그것만으로는 오래 버틸 수 없다.
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어떻게든, 저 사람들을 설득해서 공격을 멈추게 하는 수밖에는……!
“해치려는 게 아니라니까요! 당신들에게 알려 주고 싶은 게 있어서 온 거예요! 그쪽의 도살자 씨, 최근 들어 낯선 변화를 겪지 않았어요? 뭔가 중요한 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냐고요!”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다소 불안했지만, 잠시 후 나는 이 질문이 핵심을 찔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케르츠를 가둔 채 끊임없이 자라나고 있던 나무의 성장 속도가 일순간 멈추었기 때문이다.
“너, 너희들. 설마 너희가 제이담을 미치게 한 원흉이야?!”
“미친 게 아니에요! 오히려 저 도살자 씨가 평생을 시달려 왔던 광증에서 해방될 기회가 온 거라고요! 지금 저 사람은 자기가 처한 상황에 적응하느라 저러는 것뿐이에요!”
“개소리 집어치워! 광증을 해소하는 방법 따위는 애초에 있지도 않아! 저 녀석의 광증은 애초에 병이 아니라 속죄의……!”
“속죄가 아니에요! 그건 오히려 세상이 멸망하는 걸 막기 위한 희생이었단 말이에요! 도살자 씨, 당신도 사실은 알고 있잖아요!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사실 머릿속으론 당신도……!”
“저 녀석에게 헛바람 불어넣지 마, 개자식아! 가뜩이나 힘든 애한테!”
애라니, 세상 어느 애가 저렇게 흉악하게 사람을 몰아붙여?! 마법사는 머리끝까지 화가 난 듯했지만, 불행 중 다행히도 도살자에게는 이 이야기가 먹혀든 모양이었다. 눈을 가린 안개가 어느 정도 사라졌는데도 도살자는 괴로움을 호소하듯 머리를 붙잡고 신음을 토해 내고 있었다. 내 말을 듣기는 들은 게 분명했다.
그사이 하넨은 케르츠를 옭아맨 나무를 어떻게든 치워 보려 애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워낙 나뭇가지와 잎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서 아무리 노력해도 잘되지 않는 듯했다. 독으로 나무 표면을 녹여 보려던 시도가 실패하자, 하넨은 갑자기 무언가를 각오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케르츠, 신성력으로 네 몸을 보호해! 독 계열로는 도저히 안 되겠다!”
“잠깐, 마법사님? 뭘 하려는 겁니까?!”
“저 새끼도 대지 계통의 마법을 쓰는데 나라고 못 쓰라는 법이 어디 있어! 전공은 아니어도 제일 자신 있는 걸로 시도는 해 봐야지! 나중에 회복초로 어떻게든 해 줄 테니까 일단 버텨!”
“회복초로 뭘 어떻게 해 준단 겁니까! 설마 당신……!”
그 순간이었다. 하넨의 지팡이에 담겨 있던 액체가 갑자기 부글거리며 끓기 시작하더니, 하넨의 머리카락이며 로브 사이에서 매캐한 연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하넨이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깨달은 나는 곧바로 그를 말리려 했지만, 곤란하게도 내가 목소리를 내는 것보다 마법이 발동되는 속도가 더 빨랐다.
난데없이 지팡이 끝에서 엄청난 기세로 불이 토해져 나왔다. 맥도 못 춘 채 흐물거리던 독 안개와는 차원이 다른 화력이었다. 확실히, 그 위력이 대단하다는 사실까지는 부정하지 않겠지만……!
“미쳤어요, 당신?! 지금 날 숯덩이로 태워 버리려고……!”
“버티라고! 성기사씩이나 되어서 그 정도도 못 버티면 그거 자격 미달이야, 너!”
“대체 무슨 상관인데요! 애초에 성기사의 자격을 왜 당신이 판단하는 겁니까?!”
솔직히 나도 하넨에게 미쳤냐며 고함을 지르고 싶었다. 하넨이 뿜어낸 불은 순식간에 다른 나뭇가지에도 옮겨붙더니 숲 전체로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래, 저렇게 시원스럽게 태워 버리면 케르츠를 속박하는 나뭇가지도 타 버릴 테고, 마력을 제약하는 결계석인지 뭔지도 무사할 리는 없겠지! 나와 용사님도 무사하지 못하리라는 게 문제지만!
“미쳤어, 저 마법사 새끼? 멀쩡한 숲에 불을 붙이다니 제정신이냐?!”
“죄송해요, 진짜 죄송해요! 하넨 씨가 원래 저렇게 막 나가는 사람이 아닌데……. 아, 아니. 원래 저런 성격이었던가?”
“너는 아무것도 안 하면서 입 좀 나불대지 마! 제이담, 도망치자! 여기 있으면 위험……. 읏?!”
상대 마법사 또한 어이가 없었는지 도살자를 데리고 도망치려 하는 듯했지만, 아무래도 마법사보다는 용사 쪽이 더 빨랐던 모양이었다. 머리 위의 나뭇가지들이 와지끈 부러지는 소리가 요란하더니 용사가 한 사내의 양팔을 붙들어 제압한 채 떨어져 내렸다. 마법사로 추정되는 거구의 사내를 바닥에 내리꽂은 용사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세온, 마법사를 잡았어요! 잘했지요?”
“어, 잘했어요! 잘하기는 했는데……. 저희가 지금 엄청 위험한 상황이거든요?”
“……코레토!”
그 순간이었다. 용사에게 붙잡힌 사내의 얼굴을 보자마자, 혼란스러운 낯으로 머리를 붙잡고 있던 도살자의 눈빛에 불꽃이 튀더니 순식간에 용사의 몸이 저 멀리 튕겨 나갔다. 영문도 모른 채 바닥에 나동그라진 용사의 머리를 향해 거대한 쇠톱이 휘둘러졌다. 하지만.
“제길, 이제 정신 좀 차리란 말입니다!”
강력한 불 덕분에 약해진 나뭇가지 사이를 겨우 뚫고 나온 케르츠가 곧바로 도살자의 뒷덜미를 붙잡아 바닥에 내리꽂았다. 케르츠의 등에는 일전에 보았던 빛의 날개가 가득 펼쳐져 있었다. 분명 방금까지는 빛의 날개가 자기 마음대로 펼쳐지지 않는다고 말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혹시 신의 날개를 제대로 펼치려면 생명의 위협 같은 게 필요한가?
[정확히 말하자면, 신성력의 사용에 익숙하지 않은 시기에는 생명의 위협 등의 요소가 도움이 된다. 일종의 충격 요법이라 할 수 있겠다.]
‘솔직히 말해. 너 케르츠 씨와 하넨 씨 연습시키려고 일부러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지? 응?’
[아무것도 안 한 게 아니다. 그저 두 사람이 충분한 역량을 발휘하기를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케르츠와 하넨을 연습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는구나. 하긴, 인형이 수수방관(?)한 덕분에 케르츠는 혼자 힘으로 신의 날개를 펼쳤고, 하넨은 독이 아닌 다른 속성의 마법을 사용할 생각을 했으니 어찌 보자면 성장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그 결과 숲 전체가 화마에 휩쓸렸다는 게 문제기는 하지만.
[불은 걱정할 필요 없다. 위험하지 않다.]
인형이 이 대형 화재를 무마할 수단을 준비했는지, 아니면 숲 따위는 내버려 두고 도망갈 작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비장의 수가 있긴 한 모양이다. 그때 도살자를 완전히 제압하는 데 성공한 케르츠가 신의 언어로 된 문장을 외우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인형이 해석해 주지 않으려는 모양인지 무슨 내용인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기도문의 일종이 아닐까 추측할 뿐.
[레 타한 메 소르딘, 레타누 아 하타에 카데란……!]
케르츠에게 뒷덜미가 눌린 도살자의 몸이 경련하듯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부정하듯 고개를 젓고, 괴로워하듯 힘겹게 흐느끼는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려 왔다. 하지만 나는 케르츠를 말리지 않았다. 저 사람이 무엇을 하려는지 이해했기 때문이다. 기도문의 내용을 모르더라도, 저 사람이 도살자에게 무엇을 전하고 싶은지는 충분히 알겠어.
도살자의 불안정한 모습을 보고 놀란 마법사가 달려들자, 금방 자리에서 일어난 용사가 그의 몸을 다시 붙잡아 바닥에 내리꽂았다. 마법사는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용사의 힘이 워낙 엄청나서인지 그에게서 빠져나가지는 못했다.
“놔, 새끼야! 이거 놓으라고!”
“조금만 기다려요, 못된 짓을 하려는 게 아니에요!”
“네놈이 지금 나한테 하는 게 못된 짓이야! 이거 놔, 젠장, 무슨 놈의 힘이 이렇게 세서……!”
마법사는 용사에게 이런저런 마법을 써 보려는 모양이지만, 원래 용사는 어떤 마법이든 내성이 있는지라 별로 효과는 없는 듯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저 마법사로서는 당연히 용사와 케르츠가 원망스럽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저 나중에 제대로 설명해 주는 수밖에는 없으니.
그나저나 저 사람은 도살자와 무슨 관계일까? 생김새를 보니 가족은 아닌 것 같고, 혹시 친구인가? 도살자는 혼자 지낸다고 케르츠가 말했는데, 사실 그건 케르츠의 인간성 문제일 뿐 도살자에게도 친구쯤은 당연히 있다든지…….
그 순간이었다. 용사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던 도중, 마법사의 망토가 흐트러지며 그 안이 살짝 보였다.
‘어?’
나는 망토 사이로 언뜻 보이는 마법사의 배를 보고 눈을 부릅떴다. 분명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배가 부풀어 있었다. 마치 저 안에 무언가 품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 그러고 보니. 왜 내가 그걸 잊고 있었지? 저 마법사가 도살자와 같이 다닐 이유라면 어제 케르츠에게 충분히 들었는데!
상대가 거구의 남성이라서 케르츠의 설명과 저 사내의 존재를 연관조차 못 시킨 게 문제였다. 인형에게 마법사와 도살자의 관계를 물어보려던 순간, 마침 케르츠에게 붙잡혀 있던 도살자의 갑옷에서 새하얀 빛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인면철 갑옷이 깨지고 그 안에서 새로운 갑옷이 드러나는 광경은, 일전에 케르츠가 각성할 당시에도 익히 보았던 모습이었다.
도살자의 상태를 확인한 인형이 갑자기 내 어깨에서 내려와 하늘을 향해 양팔을 들었다. 마치 무슨 일을 벌이기라도 할 듯한 모습이었다. 뭐야, 갑자기? 설마 기우제 춤이라도 추려고?
[이제 ‘관찰’이 끝났으니 도움을 주기로 하자.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도움을 주다니 인형은 매우 자비롭고 현명한 생물이다.]
“자기 입으로 그런 말을 하면서 부끄럽지도 않냐? 게다가, 일이 다 끝난 마당에 도움이라니 무슨…….”
그렇게 말하려던 나는, 하늘에서 떨어지는 차가운 감촉에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맑았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기 시작하더니, 사방에서 몰려온 비구름이 하늘을 까맣게 뒤덮었다. 나는 그제야 인형이 말하는 ‘도움’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기우제 춤이라도 추는 게 아니냐던 나의 추측은 사실상 절반쯤 맞아떨어진 셈이었다.
숲 전체의 불을 꺼트릴 기세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확실히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이만큼 반가운 도움도 드물었다.
* * *
인형이 불러온 비 덕분에 화재는 생각보다 빨리 진압되었다. 케르츠의 팔다리를 묶고 있던 나뭇가지와 덩굴은 완전히 타 버렸지만, 다행히도 숲의 나무들은 가지 끝자락만 불타 없어졌을 뿐 큰 피해를 받지는 않았다. 빗물을 잔뜩 머금은 옷과 신발이 좀 찝찝하기는 해도 숯덩이가 되어 죽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제정신을 되찾은 도살자와 그나마 경계심을 거둔 마법사는 우리를 임시 거처로 안내했다. 일단 들어가서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빗물이 고인 웅덩이를 밟지 않기 위해 조심하며 두 사람의 뒤를 따라갔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런 숲 한가운데에서 불을 붙이다니 제정신입니까? 대체 마법사님의 상식은 어떻게 되어 먹은 겁니까?”
“나중에 물 계열 마법으로 꺼 줄 생각이었어! 저 인형 녀석이 선수를 친 것뿐이라고!”
[하넨은 불 계열 마법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지만 물 계열에는 사실 별 관심이 없다.]
“과, 관심은 없어도 쓸 줄은 알거든?! 결과적으로는 다 잘 풀렸잖아! 그럼 됐지!”
하넨의 불 때문에 거의 화장당할 뻔했던 케르츠는 치가 떨린다는 듯 몸을 부르르 떨었고, 하넨은 민망한 낯으로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솔직히 이건 하넨 씨가 좀 심하지 않았나 싶다. 아무리 케르츠 씨를 꺼낼 방법이 마땅치 않대도 그렇지, 그렇다고 사람을 태워 버리는 건 너무하잖아.
“그럼 저 녀석을 꺼낼 만한 방법이 달리 있기라도 했냐? 당장 눈앞에서는 미친 도살자가 바둥거리고 있지, 저 녀석은 나무 덩굴에 파묻혀서는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보이지, 마법사 쪽은 대지 계열의 마법으로 막 공격해 오지, 하여간 나도 마음이 급했다고. 애초에 대지 계열 마법은 까마득한 옛날에 사장된 거 아니었나? 마지막으로 그쪽 계통의 마력을 가진 마법사가 흑탑을 나간 게 수백 년 전인데 저 녀석은 어떻게 그런 마법을 쓰는 거야?”
“그 흑탑을 나간 마법사의 후손이 나라서 말이지. 나 참, 세상이 희한하게 돌아가다 보니 흑탑 출신 마법사하고도 다 싸워 보네.”
우리보다 앞서 걷던 거구의 마법사가 혀를 차며 이쪽을 흘끔거렸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저 마법사는 이미 명맥이 끊긴 ‘순수한 대지의 마력’을 이어받은 유일한 후손이라고 한다. 오염된 세상에서는 하넨처럼 제물을 바치거나 자신의 피를 더럽혀 마력을 강화해야만 제대로 된 마법을 쓸 수 있는지라, 저렇게 순수한 마력을 온전히 간직했다면 사실상 마법사로서 살아가기를 포기한다는 뜻이라는 게 하넨의 설명이었다.
다만 이건 어디까지나 오염이 세상을 뒤덮고 있을 때의 이야기지, 오염이 사라지고 자연이 제 모습을 되찾은 지금은 순수한 마력이 오히려 더 강한 힘을 발휘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하넨이 열심히 대지 계열의 마법을 배운다 해도 저 거구의 마법사만큼 효율을 내기는 힘들다는 뜻이다.
“흥, 나도 지금부터라도 순수한 마력을 쌓으면 돼. 열심히 노력하면 저 정도는 금방 따라잡을 수 있으니까. 애초에 선대의 순수한 마력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마법사가 몇이나 된다고…….”
말은 그렇게 해도 하넨은 조금 기가 죽은 눈치였다. 자기가 평생토록 전공으로 하던 독과 저주 계열의 마법이 이제는 예전만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시무룩해진 모양이었다.
생각해 보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하넨 또한 우리 중 누구만큼이나 신의 감정을 돌려주기 위해 노력했는데, 결과적으로 그 노력 때문에 자신의 힘이 약해지다니.
[세상의 모든 변화는 양면적이다. 변화로 인해 늘 좋은 일만 일어나지는 않는다. 그래도 하넨은 마법에 대한 지식이 풍부하니 금방 새로운 마법에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뭐, 그렇다면야 하넨 씨에게는 다행인 일이지만.”
하넨 또한 실망하거나 인형을 원망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은 채 그냥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거구의 마법사는 묘한 표정으로 하넨과 인형을 바라보다가 도살자 청년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니, 이제는 도살자가 아니라 성기사라는 호칭으로 불러야 할까? 케르츠의 도움을 받아 각성한 도살자는 이제 인면철 갑옷이 아닌 새하얀 갑옷을 두르고 있으니까.
제정신을 차린 성기사 청년은 아까보다 훨씬 더 순진하고 유순한 인상이었다. 겉모습만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이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케르츠처럼 외골수에다가 제멋대로인 성격은 아닐 것 같았다. 아직도 조금 멍한 듯한 성기사 청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거구의 마법사가 나에게 말했다.
“아무튼, 아까 너희의 말을 듣지도 않고 무작정 공격한 건 사과할게. 그때는 이 녀석도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고, 무엇보다도 신전 녀석들이 워낙 우리를 귀찮게 해서…….”
“신전에서 공격해 왔다고요?”
“그래. 도살자 때문에 신력도 사라지고 하늘도 저 모양이 되었다면서 발광을 하는데, 쫓아내는 건 어렵지 않았지만 계속 덤벼드니까 엄청 성가시단 말이지. 이 녀석까지 정신이 나가서 더 불안하고……. 그런데 신관들의 신력이 갑자기 없어진 건 어째서야? 혹시 아는 바가 있어?”
과연, 케르츠에게 된통 깨진 신전 측에서 이제는 다른 도살자들을 괴롭히기로 작정한 모양이다. 신력을 잃었으니 예전만 한 영향력을 발휘하기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건 사실이었다.
케르츠가 신관들의 신력에 대해 설명을 하려던 찰나, 성기사 청년이 마법사의 옷자락을 붙잡고는 입을 열었다.
“……그들이 가두어 놓았던 신의 판단력이 풀려났기 때문이에요, 신관들이 신력을 잃은 건.”
“뭐라고?”
“하늘의 색이 변했을 때, 제게 쌓여 있던 감정이 해방되면서 다양한 지식이 주입되었어요. 너무 혼란스러운 이야기여서, 제가 아예 미치는 바람에 그런 말도 안 되는 망상을 보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더라고요.”
도살자 청년은 지금까지 있었던 일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을 늘어놓았다. 애초에 이 세상이 오염된 이유가 무엇인지, 신관들이 과거에 저질렀으며 지금까지도 저지르고 있는 죄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리고―이 세상이 정화된 과정에 대해서까지.
거구의 마법사는 이야기를 들어도 잘 모르겠다는 듯 갸우뚱거릴 뿐이었지만, 케르츠는 성기사 청년의 이야기를 꽤나 진지하게 들었다. 저 성기사, 신으로부터 생각보다 많은 진실을 전달받았구나. 그저 그 진실을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좀 걸렸을 뿐. 마법사에게 설명을 마친 성기사 청년은 확인을 필요로 하듯 케르츠를 흘끔 바라보았다.
“애초에 저희의 광증은……. 죄가 아니라 일종의 봉인이었던 거지요?”
“그런 셈입니다. 이제는 신의 감정이 해방되었으니 더는 그런 광증에 시달릴 이유가 없어요. 아마 저희의 후손들도 마찬가지겠지요.”
케르츠의 대답에 성기사 청년은 기쁜 얼굴로 마법사의 손을 잡았다. 그나저나 후손이라, 나는 문득 생각난 바가 있어 마법사의 배를 흘끔거렸다. 나뿐만이 아니라 하넨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마법사의 배를 바라보았는데, 저 사람도 나와 비슷한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다만 용사는 마법사의 배가 왜 부풀어 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 눈치였다. 나와 하넨이 쳐다보니까 덩달아 흘끔거리기는 했으나 정작 본인은 근심 어린 얼굴로 나와 하넨의 어깨를 툭툭 칠 뿐이었다.
“세온, 병든 사람을 그렇게 보는 건 실례래요. 하넨이 그렇게 가르쳐 줬는데.”
“저거 병 아니에요, 용사님…….”
“……이제는 하다하다 병자 취급까지 다 받네. 인공 자궁 처음 보냐?”
용사의 말이 어처구니없었는지 마법사는 웃음을 터뜨렸다. 인공자궁이라는 단어를 들은 하넨은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용사는 여전히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용사는 저 마법사가 병에 걸려서 배가 부풀어 있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나로 말하자면, 대충 상황이 이해는 가지만 하넨처럼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기도 난감한 처지였다. 그, 그러니까. 이 세계는 남자도 자연스럽게 자궁을 몸에 집어넣는 세계였단 말이야? 그래서 남자도 임신할 수 있었던 거고?
아마 저 배 속에는 성기사의 ‘후손’이 들어 있을 거다. 만삭에 가까울 정도로 부푼 걸 보면 산달이 얼마 남지 않았겠지. 애초에 저 마법사가 성기사 청년과 같이 행동한 이유도 그 때문일 테고.
“인공 자궁이라, 마법사라면 하나쯤 가지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은 물건이군. 설마 도살자의 자식이 가지고 싶어서 몸에 자궁을 넣은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있겠어?! 애초에 자궁을 넣고 싶어서 넣은 것도 아니고, 저 녀석의 애를 가진 것도 내 의도가 아니었다고! 저 새끼가 날 덮쳤단 말이야!”
“미, 미안해요! 덮치고 싶어서 덮쳤던 게 아니에요. 정말 미안해요, 코레토 씨!”
“하나 마나인 사과 좀 하지 마라, 멍청한 자식아! 심지어 9개월 전이랑 토씨 하나 안 틀린 소리나 지껄이고 앉았으면서. 너는 괜히 입 열어서 사람 속 터지게 하지 말고 가만히 있기나 해!”
성기사 청년은 마법사를 달래고 싶었는지 사과의 말을 꺼냈다가 본전도 못 찾고 기가 죽었다. 마법사에게 구박당하고 얌전히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어디의 빨간 머리 성기사와는 완전히 달라 보였다. 나는 저도 모르게 케르츠에게 시선이 갔다. 이상하네, 분명 케르츠 씨가 묘사한 바에 따르면…….
“……왜 그런 눈으로 날 보는 겁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마법사 씨. 도살자와 같이 지내는 게 뭐랄까……. 싫거나 그러진 않았어요? 방금 덮쳐졌다고 말씀하셨던 거 같은데.”
“어, 확실히 첫 만남이 개판이었던 건 사실인데. 그래도 같이 있다 보니 정도 들고 저 녀석이 잘해 주기도 하고, 그래서 그냥 같이 살고 있어. 도살자라는 족속도 광증이 없을 땐 제법 맹하고 순한 성격이라서 말이야, 광증만 없으면 평상시에는 제법 지낼 만하더라고. 좀 멍청해서 내가 돌봐 줘야 할 것 같기도 하고.”
광증이 없을 땐 제법 맹하고 순하고 멍청한 성격이라니, 대체 어느 도살자를 말하는 걸까? 적어도 우리 쪽의 케르츠 씨하고는 아무런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인데. 나는 다시 케르츠를 바라보았고 케르츠는 이제 노골적으로 질린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슬슬 저 사람도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치챈 모양이었다.
나는 저 마법사가 자기 합리화의 일환으로 저런 발언을 하는지, 아니면 진짜로 저쪽 도살자가 저런 성격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체구 차이나 성기사 쪽의 행동거지를 보면 어쩐지 후자 쪽에 무게가 실리기도 하는데. 저 성기사, 마법사보다 거의 머리 하나쯤은 더 작아 보인다고.
“혹시 성기사 씨가 때리거나 하지는 않아요? 상황이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머리를 벽에 이렇게 쾅 하고.”
“그, 그런 짓은 안 해요! 사람을 때리는 건 나쁜 짓이잖아요!”
내가 성기사 청년을 흘끔 바라보자 청년은 소스라치게 몸을 떨며 항변했다. 역시 초식 동물을 보는 듯한 모습이었다. 나는 다시 케르츠에게 시선을 돌렸고, 케르츠는 어이가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청년을 노려보았다.
“그렇다는데요, 케르츠 씨. 어떻게 생각하세요?”
“……광증에 사로잡힐 때면 최소한 수백 단위로 사람을 죽이는데 그런 도덕론에 의미가 있습니까?”
“그래도 하면 안 되는 건 변함이 없잖아요. 그, 사람을 죽이는 건, 저도 죄송하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제정신일 때는 최대한 참회하며 살려고 노력하고 있고……. 무엇보다 제정신일 때는 나쁜 짓을 하면 안 돼요! 그때는 나쁜 짓을 안 하고도 살 수 있으니까!”
“할 수 있는데도?”
“그, 저희가 일단은 성직자의 후손 아니었나요?”
케르츠와 성기사 청년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았고, 나는 도살자들의 성향 차이가 생각보다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구나, 도살자라고 다 속이 배배 꼬이고 성격이 나쁜 건 아니었어! 케르츠가 도살자 중에서도 유달리 성격이 더러웠던 건지, 아니면 저 성기사 청년이 도살자 중에서도 유달리 성격이 착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착한 척하지 마, 멍청아. 성직자의 후손이라는 놈이 허구한 날 발정 난 수퇘지처럼 사람을 괴롭혀 대냐?”
“그, 그건. 도살자는 아무래도 후손을 남기는 게 중요하니까.”
“지금 내 배에 있는 게 누구 애인지 까먹었어? 이미 자식이 있는데 발정 나서 덤비는 건 후손 문제가 아니잖아. 야, 말이 나와서 말인데. 원래 도살자란 놈들은 죄다 떡 치는 거 좋아하냐? 너랑 같이 다니는 저 녀석도 그래?”
“그건 아닌데, 아무래도 도살자들은 모두가 다양한 방식으로 조금씩 이상한 모양이네요…….”
아, 아니었구나. 이야기를 듣자 하니 저 성기사 청년도 마냥 착하지만은 않은 듯하다. 아무래도 저 성기사는 19세 미만 관람 불가 쪽 측면에서 주변 사람의 속을 썩이는 모양이다. 혹시 저 성기사가 봉인하고 있던 감정은 성욕 쪽이 아니었을까, 신의 성욕이란 게 있다면 그건 대체 어떤 감정일까 내심 궁금해질 때쯤…….
“저 사람, 배에 아기가 있어요?”
순간 등골을 타고 서늘한 기운이 쭉 흘러내렸다. 나뿐만이 아니라 케르츠와 하넨 또한 창백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고, 나는 뻣뻣한 목을 겨우 돌려 내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의아하고 어리둥절한 감정이 가득 담겨 있는 용사에게로.
“마법사 씨, 왜 아기를 배에 넣고 있어요?”
“음? 뭐라는 거야?”
“아기를 삼켰나요? 아니면 마법으로 집어넣었어요? 왜 굳이 배에 집어넣었어요? 들고 다니는 것보다는 넣고 다니는 게 편하거나 안전해서 그러는 건가요?”
“야, 야. 이 녀석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혹시 임신이 뭔지 몰라?”
모른다. 이 용사님은 임신이라는 개념 자체가 머리가 박혀 있지 않으니까! 그렇다고 지금 이 타이밍에서 알게 해 주는 것도 좀 이상하지 않나 싶어서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용사는 성큼성큼 마법사에게 접근했다.
마법사가 질겁하며 용사에게서 멀어졌지만, 용사는 오히려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마법사의 배를 들여다보았다. 어째서인지 한 손으로는 내 손을 꼭 붙잡은 채로.
“임신이 뭐예요? 아무튼, 아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세온의 말로는 아주 작은 사람이라던데.”
“이 녀석 정체가 뭐야. 혹시 백치냐? 응?”
“백치라니요, 그냥 좀 어린 것뿐이라고요! 원래 나이치고는 엄청 똑똑한 셈인데! 그나저나 용사님, 그런 이야기 실례예요. 제가 나중에 자세히 가르쳐 드릴 테니까…….”
“아기를 배에 넣고 있으면 그걸 임신이라고 하나요? 이야기를 듣자 하니 저 성기사 씨의 아이를 넣고 계신 것 같은데, 성기사 씨가 너무 작아서 아이를 대신 보관해 주고 계신 거예요? 정말로 착한 분이시네요!”
어떻게 추측을 해도 저런 식으로 하지? 용사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한 추측이었을 테지만, 그 추측의 결과물이 너무 상상 이상이어서 나는 그저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하넨과 케르츠는 이미 할 말을 잃었는지 그저 자리에 못 박혀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나도 용사님을 변호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잖아? 마법사 쪽은 둘째치더라도, 케르츠 옆에 서 있는 저 성기사 청년의 표정이 점점 싸늘해지고 있단 말이지. 분명 검을 든 손에 힘이 들어가고 있는 것 같은데, 설마 내 착각인가?
설마 용사가 이상한 말을 하는 건 아니겠지, 그냥 두 살 특유의 엉뚱한 질문이나 하고 말겠지, 나름대로 용사의 선의를 믿으려 애쓰며 끙끙거렸다.
하지만 나는 잊고 있었다. 처음 나를 만났을 때 용사가 얼마나 괴상망측하고 기상천외한 짓을 벌였는지에 대해서.
“저, 예전부터 아기를 한 번쯤 보고 싶었는데.”
“오지 마. 너, 뭐 하는 자식인지는 몰라도 다가오지…….”
“잠깐만 꺼내서 구경해 봐도 괜찮아요? 어떻게 꺼내요? 혹시 배를 열어서…….”
“……그 사람한테 손대지 마!”
용사의 그 어처구니없는 말이 끝나기도 전, 성기사 청년의 검집에서 뽑혀 나온 검이 용사의 목을 동강 낼 기세로 휘둘러졌다. 나는 눈앞이 아득해지고 말았다.
* * *
몇 십 분 후.
마법사와 성기사 청년이 임시 거처로 쓰는 동굴 한구석, 용사는 혼란에 가득 찬 표정으로 무릎을 꿇고 손을 든 채 얌전히 벌을 받고 있었다.
“뭐가 뭔지 전혀 모르겠지만, 그……. 잘못했어요.”
“차라리 저한테 묻지 그랬어요, 용사님. 저나 하넨 씨, 아니면 하다못해 케르츠 씨에게 먼저 물어봤어도 그런 대형 사고는 안 쳤을 거 아니에요.”
“하지만 아기가 너무 보고 싶어서……. 아직 덜 자란 아기인 줄 알았으면 그런 말은 안 했을 거예요. 미안해요.”
이 아기는 성기사와 마법사 둘 사이에서 생긴 아기다, 아직 완전히 자라지 못했으므로 아기를 배에서 꺼내면 높은 확률로 아기가 죽거나 아기의 건강에 문제가 생긴다, 애초에 사람의 배를 마음대로 가르겠다는 말을 하면 못 쓴다. 내가 그런 식의 설명을 필사적으로 늘어놓고 나서야 용사는 겨우 자신의 잘못을 이해한 모양이었다.
내가 용사를 이해시키는 동안 하넨은 패닉에 빠진 마법사를 설득했고, 케르츠는 당장에라도 용사를 죽일 기세로 달려드는 도살자 청년을 말리느라 진을 빼야만 했다. 그 자리에서 2차전이 벌어졌다 할지라도 이상하지 않았을 만큼의 위기 상황이었다.
“저는 시험관에서 만들어졌으니까 저 아기도 그런 줄 알았어요.”
“용사님은 특수한 사례예요. 보통 아기는 사람의 자궁에서 만들어진다고요. 그러고 보니 용사님, 애초에 자궁이 뭔지도 모르지요?”
“몰라요. 저한테는 자궁이란 게 없어요. 혹시 자궁이 없는 인간은 결함품인가요? 완성되지 못한 인간이에요?”
“그럴 리가 없잖아요! 저도 자궁 같은 건 없어요! 이 세계에선 남자도 자궁을 마음대로 넣을 수 있는 모양이지만……!”
그러고 보니 우리 용사님, 미궁을 정화하면서 정신이 좀 성숙해졌다고는 해도 머릿속은 여전히 꽃밭이었지……. 용사가 조금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나는 용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용사는 웃으면서 내 볼을 만지려 했지만, 곧 자신이 벌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는지 얌전히 손을 머리 위로 들었다. 과연 의미가 있는 벌인지는 모르겠으나 얌전히 벌을 받는 모습이 저쪽 사람들에게 좋은 인상을 주기는 한 모양이다.
“나 참, 보통 녀석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설마 두 살짜리일 줄은 몰랐네.”
“저희 용사님이 보기보다 좀 어려서요. 그, 뭐냐. 나쁜 뜻으로 말한 건 아니니까…….”
“알았어, 알았다고. 됐으니까 그 우스꽝스러운 짓 때려치워.”
마법사는 고개를 저으며 손을 내둘렀다. 생각보다 용사님의 나이가 어려서 싸울 의욕조차 나지 않는지, 마법사는 그저 심드렁해진 표정으로 나와 용사를 흘끔거릴 뿐이었다. 성기사 청년 또한 용사가 임신의 개념을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이해하자 맥 빠진 표정으로 한숨만 쉬었다.
용사는 두 사람의 눈치를 보더니 슬그머니 양팔을 내렸는데, 어른의 눈치를 보는 어린애 같은 행동과 성인 남성의 멀끔한 생김새의 격차가 마법사의 말마따나 제법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정말이지, 겉만 어른일 뿐 내면은 하나도 자라지 않았다니까. 내심 그렇게 생각하며 용사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는데.
“그나저나 어린 녀석치고는 싹수가 참 노랗네. 애 만드는 법도 모르는 주제에 치대기는 엄청 치대잖아.”
“네? 치대다니 무슨……. 용사님, 손. 손 어디 두시는 거예요.”
“손이 왜요?”
잠깐만. 내면이 하나도 자라지 않은 거 맞나? 용사가 팔을 내린 것까지는 좋은데 그 팔로 너무 자연스럽게 내 허리를 끌어안은 게 문제였다. 벌 받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사고를 치는 거야? 아니, 애초에 본인이 사고를 쳤다는 사실을 인지하고는 있는 거야?!
마법사는 재미있다는 듯 껄껄 웃음을 터뜨렸고, 나는 남의 허리를 안는 행위가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 설명하려다가 그냥 용사의 옆구리를 콱 꼬집었다. 용사는 별로 아파하지도 않았고, 그 모습을 본 마법사가 더 크게 웃는 바람에 나는 괜히 손해 본 기분이 들었다.
“그쪽 용사님, 너랑 아기라도 만들고 싶은 거 아냐?”
“저도 아기를 만들 수 있어요? 그치만 자궁이 없는걸요.”
“자궁이야 하나 집어넣으면 그만이잖아. 어차피 그쪽에도 마법사가 있으니 어려울 건 없을 텐데. 문제는 누구한테 집어넣냐 하는 점이지만 그거야 적당한 합의를 통해…….”
“애, 애한테 이상한 거 가르치지 마세요! 한창 뭐 만지기 좋아할 나이라서 그러는 것뿐이거든요!”
얼굴이 당장에라도 터질 듯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바람에 손부채질을 하느라 혼이 났다. 나는 다른 동료들이 조금이라도 도와주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하넨과 케르츠는 자기들끼리 웃으며 구경만 할 뿐 나를 도울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저 인간들, 얼마 전부터는 내가 용사에게 만져지든 말든 그저 흐뭇한 표정으로 보고만 있었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정말이지!
“그렇다고는 해도, 어느 정도 마음이 있으니 저러는 거 아니야. 아예 관심도 없었더라면 그렇게 달라붙지는 않을걸?”
“마법사 씨가 생각하는 그 관심이 아니라니까요? 그러니까 이 녀석은, 저를, 그 뭐냐……. 애착 인형 같은 존재로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애착 인형? 그게 뭐야? 그런 주술 도구는 들어 본 적도 없는데.”
“그러니까 아기들이 흔히 좋아하고 집착하는 인형 같은……. 아무튼, 저랑 용사님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요!”
“세온, 저랑 아무 사이가 아니에요? 진짜예요? 하지만 저한테 세온이라는 이름도 제일 먼저 알려 줬고, 나중에 제 이름도 지어 주기로 했으면서…….”
“그, 그게 아니라요, 용사님!”
애착 인형의 존재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 듯한 마법사와, 울먹거리며 더 달라붙는 용사의 사이에서 나는 그야말로 진퇴양난에 빠져 있었다. 아니, 그, 아무 사이도 아닌 건 맞는데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부정하기에는 어딘가 미안한 데다가 서운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아무 사이 맞다고 말하자니 저쪽이 너무 어리고, 잠깐,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무튼, 그렇고 그런 사이라기엔 용사님이 너무 어리다고요! 26개월! 아니, 이제는 시간이 좀 지났으니까 27개월!”
“알았어, 알았다고. 일단은 그런 걸로 하자. 저 녀석이 널 인형처럼 가지고 노는 걸 좋아한다 이거지?”
“네, 뭐. 대충 그런……. ……인정하고 나니 스스로가 엄청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아무튼 그런 관계예요. 애착 인형이란 건.”
나는 후끈거리는 얼굴을 끊임없이 부채질하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맞다, 애착 인형 하니까 생각난 건데. 아까부터 인형 녀석이 묘하게 조용하다. 인형은 어디서 뭘 하는 거야? 물론 그 녀석이 도와주리라는 기대는 안 하지만, 평소 같았더라면 그 누구보다도 빨리 나를 놀렸을 법한 녀석이 아까부터 눈에 안 띄는데…….
시야에서 벗어난 인형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던 도중, 나는 거처 구석에서 웅크린 채 몸을 숙이고 있는 성기사 청년을 발견했다. 분명 아까까지만 해도 마법사를 지키려고 신경을 잔뜩 곤두세웠던 것 같은데 지금은 마법사 쪽을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대체 뭘 하는 건지 궁금해져서 시선을 내리니, 인형이 성기사 청년을 올려다본 채 무언가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그렇군요. 당신의 뜻은 모두 이해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저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고, 무엇을 하더라도 괜찮다. 내키는 대로 돌아다녀도 좋고, 곧 태어날 아이를 돌보는 데 정성을 쏟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걸로 충분합니까? 하지만 신전은…….”
[신전이 동료들을 괴롭힐지도 모른다는 점이 신경 쓰인다면 동료를 모아 힘을 결집해도 상관없다. 그러나, 지금의 신전은 신력을 잃어 상당히 약해진 상태니 동료들에게 큰 피해를 끼치지는 못한다.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다. 마음 가는 대로, 지금의 자신을 가장 행복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행동하면 그걸로 충분하다.]
인형은 성기사 청년의 뺨을 톡톡 때리며 묘한 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매우 건방져 보이는 모습이었으나, 대화의 내용이나 저 둘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꽤나 의미심장한 상황이었다. 나를 비롯한 모두가 인형과 성기사를 바라보기 시작하자, 인형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종종거리며 내 옆으로 다가왔다.
[인형은 제이담과의 이야기를 끝냈다. 내가 놀림당하거나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자세히 구경하지 못한 점이 자못 아쉽지만, 제이담이 충분히 말뜻을 알아들었으니 그걸로 되었다. 나의 멍청한 모습이야 지금부터 놀리면 그만이다.]
“그래, 그래. 성기사 씨와 이야기가 잘 끝났다니 다행이네. 어쩐지 얄밉게 깝죽거리지 않는다 싶었더니 네 볼일 보느라고 그랬구나.”
[나는 인형의 관절을 반대로 꺾고 있다. 인형에게 관절이 있었더라면 분명 골절상을 입었을 거다.]
관절도 없으면서 엄살은 잘 떨어요, 하여간에. 언제나처럼 얄밉게 구는 인형을 좀 꼬집고 잡아당기고 비틀기는 했지만, 그래도 인형 덕분에 제법 분위기가 환기된 건 사실이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나를 놀리며 껄껄 웃던 마법사는 꽤 진지해진 얼굴로 도살자 청년에게 다가갔고, 두 사람은 자기들 나름대로 토론을 나누듯 목소리를 낮추었다.
[저들에게도 앞으로의 계획이 필요하다. 우리가 세상을 여행하기로 마음먹은 것처럼.]
“그렇기야 하겠지. 그나저나……. 너 의외로 저 사람들을 걱정하고 있었구나.”
[당연하다. 인형은 언제나 모두를 걱정하는 인도주의적인 성품을 지니고 있다.]
“분명 맞는 말인데 왜 네가 하니까 신용이 안 가냐.”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더 이상 인형을 괴롭히는 걸 그만두고 녀석의 폭신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물론 우리의 목적은 저 사람들의 상태를 확인하는 것일 뿐 애프터서비스까지 해 줄 의무는 없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이왕이면 저 사람들이 잘 살았으면 좋겠다.
물론 저 사람들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고 심지어 한 번은 싸우기까지 했지만, 그래도 저들 또한 멸망해 가는 세계에서 겨우 버티며 살다가 드디어 빛을 보았을 테니까. 이 세계가 원래의 아름다움을 되찾는 만큼 저 사람들의 미래 또한 밝고 평화로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누던 두 사람은 마침내 결론을 냈는지 우리에게 다가왔다. 성기사 청년이 인형과 케르츠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희는, 한동안 숨어 지낼 생각이에요.”
“숨어 지낸다고요?”
“네. 이 사람의 산달이 얼마 남지 않았기도 하고……. 신전의 손이 닿지 않는 안전한 곳으로 이동해서, 앞으로 몇 년 동안은 아기를 키우며 살 거예요. 아무래도 당신들처럼 세상을 돌아다니며 다른 도살자를 돕지는 못할 것 같아요.”
과연 그렇구나. 하긴, 이제 곧 태어날 아이를 돌보기 위해서는 그게 최선일 거다. 아무리 세상이 정화되었다고는 해도 아기를 데리고 여행하는 일은 위험이 따르는 데다가, 마법사 쪽도 출산 전후로 한동안 제대로 움직이기 어렵겠지.
“저희는 그저……. 이 정화된 세상에서 아기를 건강하게 키우고 싶어요. 되도록 좋은 것만 보고 즐거운 일들만 겪게 해 주어서, 적어도 저희보다는 더 나은 인간이 될 가능성을 아이에게 주고 싶어요.”
“이해합니다. 적어도 우리의 부모님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식을 키울 수 있을 테니, 그것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겠지요.”
“네. 저희의 부모님은 아무래도 자신들의 사명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으니……. 이제는 더 이상 사명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니까, 태어난 아기가 더 올곧게 성장할 수 있도록 최선을 향해 돕는 게 목표예요.”
케르츠는 희미한 미소를 띤 채 말했고, 나 또한 괜히 가슴이 뭉클해진 채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본인은 도살자라는 오명과 죄를 뒤집어쓰고 가혹한 삶을 살아왔다고 하나, 자식에게는 새로운 희망과 성기사로서의 자부심을 물려줄 수 있다. 분명 저 마법사와 성기사 청년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은 부모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겠지.
그때였다. 내 허리를 끌어안은 채 가만히 두 사람을 바라보던 용사가 무언가를 중얼거린 건.
“아기, 라…….”
우리 아기 만드는 법 이야기는 그만하기로 잠정 합의한 거 아니었나요?! 내심 질겁하며 용사 쪽을 돌아보던 나는, 조금 다른 방향에서 흠칫 놀라고 말았다. 방금처럼 순진무구한 표정이 아니라 제법 진지하고 심각한 표정이었다. 겉모습 그대로 20대 중후반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용사가 저렇게까지 진지한 표정을 짓는 모습은 흔치 않았다. 내심 용사의 속내가 궁금했지만, 용사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생긋 웃으며 금방 표정을 바꿔 버렸다. 마치 들키고 싶지 않은 생각이라도 한 것처럼.
“왜요, 세온?”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일단 아무것도 캐묻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본인이 저렇게 시치미를 떼는 걸 보니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나는 용사의 표정을 못 본 척하고는 인형을 끌어안았고, 인형은 내 반응에 재미있어하듯 품 안에서 꼼지락거렸다. 용사는 그 뒤로도 한동안 깊은 생각에 빠진 표정을 짓고 있었다.
* * *
어느새 동굴 바깥은 해가 저물었고, 우리는 그 자리에서 짐을 풀어 사이좋게 음식을 나누었다. 피차 그다지 넉넉한 처지는 아니었으나 배부르게 끼니를 때울 정도는 되었다. 하넨이 피워 놓은 모닥불 옆에 사람 여섯 명과 인형 하나가 둘러앉으니 제법 화기애애하고 푸근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물론 인형은 아무것도 안 먹고 모닥불 근처에서 데굴거릴 뿐이었지만.
식사를 하는 동안 우리는 앞으로의 일정을 어느 정도 교환했다. 일단은 이 동굴에서 하룻밤 묵은 후, 우리는 다른 도살자들을 찾아 떠나고 저 사람들은 다른 이들의 방해 없이 안전하게 아이를 키울 장소를 찾아 떠나기로 했다. 구체적으로 어디를 향할 작정인지는 피차 묻지 않았다. 그저 인연이 닿는다면 만날 수 있겠지.
식사를 끝낸 우리는 조금 일찍 잠들기로 했다. 아침부터 싸움박질을 벌이고 신경전을 하느라 다들 지친 탓이었다. 다행히도 동굴 형태의 임시 거처는 꽤나 넓은 편인지라, 불청객 네 명이 함께 누워 자더라도 충분할 만큼 공간이 넉넉했다.
모두가 담요를 뒤집어쓴 채 몸을 웅크리고 잠들었을 때쯤―나와 인형은 조용히 바깥으로 나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보름달이네.”
[보름달이다.]
“바깥에 나온 이후로 늘 생각했던 건데, 이세계라고 해도 달 자체는 꽤 평범하구나. 빨갛고 파란 쌍둥이 달이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재미있는 주장이다. 달의 숫자와 형태로 여기가 이세계인지 아닌지 결정된다면, 목성이나 토성 등은 나에게 이세계로 인식되는 걸까?]
“갑자기 과학적 지식으로 훅 치고 들어오지 마, 이 분위기 못 읽는 놈아.”
애초에 자기 세계의 과학 상식도 아니면서 갖다 붙이기는 잘도 갖다 붙인다. 킥킥 웃으며 인형의 옆구리를 간지럽히자 인형은 바둥거리며 내 손을 탁탁 쳤다. 나는 선심 쓴다는 듯 인형에게서 손을 떼고는, 익숙한 보름달과 낯선 별자리들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언데드 신세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욕구를 느낄 수 있게 된 지도 벌써 한 달이 넘어가지만, 나는 여전히 인간 시절보다 밥도 덜 먹고 잠도 덜 자는 생활을 하고 있다. 배고프긴 하지만 밥을 안 먹는다고 굶어 죽지는 않고, 가끔 졸음이 느껴지기는 하지만 최소한의 수면 시간만 채우면 피로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대충 세 시간 정도만 자면 몸이 알아서 깨어날 정도다. 굳이 이렇게 부지런할 필요도 없을 텐데.
그래서 모두가 잠든 밤이 되면 이렇게 바깥으로 나와 시간을 때우곤 했다. 때로는 주변을 뒤지면서 쓸 만한 약초나 돌멩이를 줍기도 하고, 때로는 인형과 함께 스트레칭을 하거나 바닥에 드러누워서 인형과 잡담을 하기도 한다.
다만 쓸 만한 물건들이 어디에나 굴러다니는 건 아니고, 스트레칭을 하거나 춤을 추던 도중 용사에게 걸리는 낯 뜨거운 상황이 종종 연출되기도 해서, 사실상 인형과 잡담을 나누는 시간이 가장 많다 할 수 있겠다.
물론 잡담이라고 해 봤자 별다른 건 없다. 아까처럼 심심풀이 땅콩 같은 대화를 나눌 때도 있고, 가끔은 낮에 있었던 일에 대해 생각을 교환하기도 한다. 이를 테면…….
“그러고 보니 생각난 건데. 용사 녀석, 아기 만드는 법도 모르면서 묘하게 아기에 집착하지 않았어?”
문득 생각난 바가 있어 인형에게 넌지시 말을 건네자, 인형은 맹한 얼굴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 혼자 호들갑을 떠는 건 아닌가 싶어 조금 민망해졌지만 그래도 나는 인형의 볼을 쭉쭉 꼬집으며 나름의 동의를 구해 보았다.
[……확실히 희한한 일이기는 하다.]
“그렇지? 예의상 말하는 게 아니라 진짜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 맞지?”
[용사의 감정이 단순한 호기심 수준을 벗어난 것만은 사실이다. 조금 더 진지한 생각에 빠진 게 분명하다.]
인형은 그렇게 말하며 내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엎드려 절 받기 수준의 답변이긴 했으나 인형도 아예 시큰둥한 태도를 보이지는 않았다. 혹시 짚이는 바가 있으면 이야기해 보라는 듯, 내 앞에 얌전히 앉아서는 이쪽을 빤히 바라본다.
“그렇지? 물론 지금껏 아기를 한 번도 본 적 없으니 호기심을 가지는 거야 이해가 되지만……. 아까 용사님은 좀 심각해 보였달까. 내심 간절해 보였달까. 그런 느낌을 받았단 말이지.”
아이를 꺼내서 보여 달라며 막무가내로 눈을 반짝이던 처음의 모습과는 달리, 분명 아까의 용사님은 생각이 많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는 다른 사람들의 눈도 있었고, 용사 본인도 속내를 들키기 싫어하는 듯해서 그냥 넘어갔지만……. 아무래도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이다.
대체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는 걸까? 혹시 슬픈 생각이라도 떠오른 건 아니겠지? 내심 걱정되는 마음에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데, 인형이 나에게 다가와서 무릎을 툭툭 건드렸다.
[용사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역시 그렇겠지? 그럼 내일 아침에 슬쩍 물어봐야겠네.”
[지금 물어봐도 괜찮다.]
“무슨 소리야. 지금 용사님은 자잖아. 자는 사람을 깨워서 물어보기에는…….”
“저한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세온?”
그때였다. 아무런 기척도 없던 등 뒤에서 갑자기 덮쳐 오는 손길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후다닥 등 뒤를 돌아보니, 잠기운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맑은 눈의 용사가 나를 바라보며 생긋 웃어 보였다.
“노, 놀랐잖아요. 자는 줄 알았는데.”
“자려고 했는데 세온이 없어서 나와 봤어요.”
“제가 없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안 자도 괜찮겠어요? 오늘 이런저런 일이 있어서 많이 피곤할 텐데.”
“괜찮아요. 어차피 잡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차서 잠도 오지 않고…….”
용사는 그렇게 말하며 내 옆에 앉았다. 생각이 많아서 잠을 못 잔다, 라. 분명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지만 두 살짜리 어린애에게 어울리는 일은 아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이 많길래 잠도 못 자는 걸까? 나는 오래 고민할 것도 없이 그 답을 찾아냈다.
“역시 아기 때문이지요?”
“어떻게 알았어요?”
용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나를 바라보았고, 나는 피식 웃으며 용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니, 모르는 게 더 이상하잖아.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지어 놓고선 눈치채지 않기를 바라는 게 오히려 부자연스러울 터였다.
그는 마치 인형을 흉내 내듯 내 손에 자기 머리를 문지르다가, 내가 괜히 머쓱해져서 손을 떼자 빙긋 웃으며 손을 잡았다. 손끝에 다가오는 온기가 간질간질했다. 나는 흠흠 헛기침을 하고는 슬쩍 화제를 전환해 보았다.
“아기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요? 꽤나 진지한 표정을 짓고 계시던데.”
“제가 그랬나요?”
“네. 혼자서 ‘아기…….’ 하고 중얼거리기도 하셨잖아요?”
“그걸 들었어요? 세온은 둔하니까 못 들었을 줄 알았는데.”
아니, 내가 그렇게까지 둔한 사람은 아니거든?! 물론 용사만큼 청력이나 육감이 좋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평균보다 못한 정도는 아니란 말이지. 대체 저 용사님은 나를 뭘로 생각하고 있는 걸까.
자기 얼굴을 가리고선 자기가 숨었다고 믿는 어린아이 특유의 자기중심성인지, 아니면 정말로 내가 둔하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건지 모르겠다. 내심 어이가 없어져서 용사의 손등을 콱 꼬집자, 용사는 잠시 내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그렇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아기를 보고 싶은 건 아니었어요.”
그런 말을 덧붙이고는 고개를 들었다. 보름달을 바라보는 듯한 용사의 옆얼굴은 아까만큼이나 심각하고 진지해 보였다. 내가 흠칫 놀라자 용사는 다시 내 손 위에 자기 손을 얹었다. 내 손이 그렇게 작은 편이 아닌데도 용사의 손은 내 손을 다 덮고 남을 정도였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럼 뭘 보고 싶었는데요?”
“아기가 어떤 식으로 성장하는지가 보고 싶었어요. 세온이 그렇게 말했잖아요, 원래 인간은 작은 모습으로 태어나서 점점 지금의 모습으로 자라난다고. 그러니까, 아기가 성인이 되는 과정을 옆에서 직접 지켜보고 싶었어요.”
“그러려면 엄청 시간이 걸리겠네요. 보통의 아기는 20년쯤 걸쳐서 천천히 자라니까.”
“20년씩이나 걸려요? 어째서요?”
“어째서냐니요……. 애초에 처음부터 성인의 모습으로 태어난 용사님 쪽이 더 신기한 케이스니까요. 제가 예전에도 말씀드렸잖아요? 아기가 성인이 되는 데에는 수십 년의 시간이 걸린다고.”
“듣고 보니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것도 같아요. 그렇구나, 그럼 바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지는 못하겠네…….”
아기 자체가 아니라 아기가 성장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고? 아쉽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는 용사의 모습은 둘째 치고, 나는 용사의 그 말이 더 신경 쓰였다.
저건 단순히 작고 귀여운 인간을 보고 싶다는 호기심 이상의 이야기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용사의 표정을 살피며 질문했다.
“왜 아기가 성장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는데요?”
“혹시 참고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거든요.”
“참고, 라니요……?”
“성장이요. 저는 사람이 어떻게 성장하는지 잘 모르니까, 실제로 눈앞에서 아기가 성장하는 모습을 구경하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줄 알았는데.”
저는 사람이 어떻게 성장하는지 잘 모르니까. 용사의 그 한 마디가 이상할 정도로 묵직하게 들렸다. 그 말이나 태도에서 우울함이나 슬픔 따위가 느껴지지 않는 건 다행이었지만, 나는 용사가 혹시라도 이상한 생각을 하지 않을까 싶어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꼭 육체적인 성장만이 성장이라고 할 수는 없어요, 용사님.”
“그건 알아요. 하지만 말이에요, 세온. 경험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지 않나요?”
“그야 그렇지만……. 무슨 경험이요?”
“아기 시절을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성장한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성장의 경험이 있겠지요. 하넨도 그렇고, 케르츠도 그렇고. 분명 세온도 그렇지요? 아기 모습의 자그마한 세온은 분명 귀엽고 사랑스러웠을 거예요.”
분명 사심 없이 하는 말일 텐데도, 손 위로 용사의 체온이 전해지다 보니 괜히 낯이 후끈거렸다. 그나저나 이 용사님 머릿속에서의 ‘아기’는 대체 어떤 이미지일까? 어쩌면 판타지에 등장하는 요정이나 호문클루스처럼 크기만 작은 성인 체형의 인간은 아닐까 하는 상상이 떠올랐다. 내가 상상의 나래에 빠져 있는 동안 용사는 이야기를 계속했다.
“하지만 저는 아기 형태가 없고 성장의 경험을 겪지도 못했지요. 처음부터 성인의 몸을 지닌 채로, 여기에서 더 자라지도 늙지도 않아요.”
“그야 그렇지만…….”
“그래서 아직 감을 잡지 못했어요. 사람이 어떻게 하면 성장하는지. 그러니까 성장에 도움이 될 만한 거라면 무엇이든 보고 싶을 뿐이에요.”
용사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내 손을 꽉 붙잡았다. 이쯤 되니 나도 용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대충 알 것 같다.
성장에 도움이 될 만한 걸 보고 싶다니, 그 이야기를 해석해 보면 결국 용사가 그만큼 성장을 갈구한다는 소리였다. 처음부터 성인으로 태어나서 육체의 성장을 겪은 적 없던 용사에게, 앞으로의 가능성을 잔뜩 품은 아기는 그 자체로 호기심과 동경의 대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용사의 손아귀에서 전해져 오는 단단함과는 별개로, 나는 이 용사님의 논리가 참 제멋대로인 데다가 허술하기까지 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제멋대로 가정을 이것저것 세우긴 했는데 그 가정이 다 틀려먹었잖아. 아기는 열심히 먹고 열심히 자고 보살핌을 받는 과정에서 저절로 성장하는 거고, 꼭 아기를 봐야만 사람이 어떻게 성장하는지 아는 것도 아니라고. 게다가 저 사람의 논리는 가장 결정적인 부분에서 문제가 있는데.
“진짜, 사람 마음이란 게 참 재미있다니까요.”
“네?”
“그렇잖아요. 항상 먼 곳에서, 내가 보지 못한 곳에서만 답을 찾아내려고 하잖아요. 가장 가까운 곳에서 답을 찾을 수 있는데도 말이죠. 지금의 용사님만 봐도 그렇잖아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세온, 왜 갑자기 그렇게 인형 같은 표정을 짓고 있어요?”
인형 같은 표정이라니, 애초에 인형은 표정이랄 게 없는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용사의 의견에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끄덕하는 인형을 모른 척한 채, 나는 빙긋 웃으며 용사의 손을 맞잡았다.
“애초에 인형은 제 판단력과 감정을 빌려서 행동하니까 저랑 닮은 게 당연해요.”
“아니에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어쩐지 저를 놀리는 것 같아서.”
“그럴 리 없잖아요. 용사님을 놀리다니 제가 그런 못된 짓을 왜 하겠어요?”
용사는 미심쩍은 눈으로 내 얼굴만 빤히 바라보았고, 나는 그 어리숙하고 순진한 모습에 더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아니, 놀리는 게 아니라 정말이지 우스울 수밖에 없잖아. 성장해 본 적이 없으니 다른 누군가를 통해 배우고 싶다니, 이 세계에 온 이후로 내가 본 사람들 중 가장 많은 성장을 이루어 낸 건…….
“성장의 경험을 겪은 사람을 그렇게나 보고 싶다면 거울을 보면 되잖아요?”
“……네?”
“용사님 말이에요. 저 미궁을 거치면서 용사님만큼 대단한 성장을 거친 사람도 드물 텐데.”
용사는 멍한 표정으로 나를 한참 바라보았다. 본인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성장을 바라는 용사의 모습에서 오히려 용사의 성장을 체감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외부에서 주입된 사명만이 전부인 줄 알았던 사람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스스로 생각하기 시작하고, 자기 판단으로 결정을 내릴 줄 알고, 그걸로도 모자라―이제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성장을 갈구할 줄도 안다. 저 모습이야말로 용사가 예전보다 확연히 성숙해졌다는 증거가 아닐까.
“제, 제가요?”
“그럼요.”
“하지만 저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는데요? 이것 봐요. 키도 그대로고, 하는 행동이나 생각도 그대로고.”
“키는 그렇다 쳐도 행동이나 생각의 변화는 스스로 알아채기가 어렵잖아요? 보세요. 지금보다 훨씬 더 쑥쑥 많이 자라고 싶다는 생각 따위, 예전의 용사님 같았으면 안 했을걸요.”
귀여워, 귀여워. 웃으면서 용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용사는 좋아해야 할지 부끄러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항상 용사가 보이는 의외의 행동에 휘둘리다가 모처럼 용사에게 한 방 먹인 것 같아 괜히 의기양양해졌다. 물론 용사 본인은 한 방 먹었다는 자각도 없는 듯 금방 생긋 웃어 버렸지만 말이다.
“……세온이 그렇게 말해 줘서 좋아요.”
“꼭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아닐걸요. 하넨 씨나 케르츠 씨도 분명 저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거예요.”
“그래도 세온이 말해 주니까 더 기쁜데……. 아무튼 말이지요, 세온의 말대로 이미 성장했다 할지라도 저는 조금 더 자라고 싶어요. 지금보다 훨씬 많이 성장해서 어른이 되고 싶어요.”
이미 성인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두 살배기가 그런 식으로 말하니 우스웠으나 용사의 표정은 꽤 진지했다. 하긴, 빨리 어른이 되기를 바라는 건 모든 어린애의 소망이지. 심지어 이 용사님은 이미 육체적으로 다 성장했으니, 육체와 정신 사이의 간격을 좁히길 원하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이 용사님, 벌써 두 살치고는 꽤 성숙해졌으니 주변 사람들이 부지런히 도와주면 금방 어른이 되지 않을까? 내심 기특한 마음으로 용사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용사가 조심스럽게 질문해 왔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이 성장할 수 있을까요? 혹시 세온은 방법을 알아요?”
“저라고 뭐 대단한 걸 알지는 못해요. 사실 성장에 특별한 요령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고요. 그저 새로운 지식을 배우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서 새로운 경험을 겪고, 그 와중에 새로운 감정도 느끼고……. 그러다 보면 용사님의 마음도 저절로 성장하지 않을까요?”
“새로운 감정?”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을 듣자마자 용사가 갑자기 눈을 반짝거렸다. 아니, 사실 이 용사님에게는 새로운 지식을 배우는 쪽이 더 중요하지 않나 싶은데. 하지만 용사는 지식 같은 데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는 듯, 내 손을 꽉 붙잡고는 위아래로 붕붕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새로운 감정을 느끼면 성장할 수 있어요?”
“어, 새로운 감정을 느끼면 무조건 성장한다기보다는……. 그 감정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않을까요?”
“해석이요? 해석 같은 건 자신이 없지만, 아무튼 새로운 감정은 많아요. 세상에 대해서도 새로운 감정을 느끼고, 하넨과 케르츠에 대해서도 새로운 감정을 느끼고, 그리고…….”
“요, 용사님? 너무 들뜬 거 같은데.”
“무엇보다도, 세온에게도 요즘 새로운 감정을 엄청 많이 느끼고 있어요! 이 감정을 충분히 받아들이면 나도 성장할 수 있을까요?”
아니, 그. 구체적으로 어떤 종류의 새로움인지 알아야 나도 확답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이왕이면 좀 천천히 이야기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지. 이런 식으로 사람의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밀고는, 반짝반짝한 듯 진지한 얼굴로 사람 빤히 쳐다보는 방식은 그렇지 않나?
“어떻게 생각해요, 세온?”
“네? 어, 음, 그러니까. 용사님 말이 맞지요. 맞긴 한데 이렇게 가까운 위치에서 말씀드리긴 좀…….”
“그래요? 세온은 조금 먼 위치가 취향인가요?”
“굳이 말하자면 그렇긴 한데, 그걸 꼭 취향이라고 말하긴 이상하지 않나 싶고, 저기, 용사님? 제가 먼 위치가 취향이라고 말했으면 좀 맞춰 주실 생각은 없나요? 왜 점점 가까이 붙는 것 같은 기분이……?”
저기, 인형님? 용사님이 자각 없는 덮치기(?)를 시도 중인데 좀 도와주실 생각은 없나요? 나는 필사적으로 인형에게 눈짓을 시도했지만, 어째서인지 인형은 나와 용사에게서 등을 돌린 채 양팔로 얼굴을 가린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저거 익숙한데. 예전에 슬퍼할 때 취하던 자세잖아. 하지만 어째서일까, 지금 인형의 팔을 내려서 표정을 살피면 재미있다는 듯 킥킥거리며 웃고 있을 것만 같다는 강렬한 예감이 들었다. 도와주기는커녕 외면이나 하다니, 저 솜뭉치 자식이 진짜……!
그때였다. 구원 투수를 바라며 필사적으로 팔을 버둥거리던 와중, 별로 바라지 않았던 목소리가 등 뒤에서 툭 던져졌다.
“……성장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는 줄 알았는데 제 오해였던 모양이군요.”
“케르츠? 안 잤나요?”
일을 벌였던(?) 용사 본인은 태연한 얼굴로 내게서 떨어져 나갔건만, 정작 나는 귀까지 벌겋게 달아올라 온몸이 후끈거릴 지경이었다. 조금 질렸다는 표정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케르츠가 오늘따라 이렇게 얄밉게 보일 수 없었다.
“자려고 했는데, 느닷없이 마법사 둘이 마법 관련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는 바람에 도저히 잘 수가 없어서……. 여기는 좀 낫지 않을까 싶었는데 딱히 그것도 아닌 모양이군요.”
“케르츠도 대화에 끼고 싶었구나. 그럼 우리 다른 이야기 할까요?”
“아뇨, 괜찮습니다. 용사님께서 하고 싶으신 이야기……. 흠흠. 하고 싶은 일 많이 하시고요.”
“저랑 용사님은 아무 일도 안 했어요! 그냥 용사님이 성장에 관심을 많이 가져서……!”
“성장이라, 확실히 그런 식으로 어른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지요. 어쩐지 아기 만드는 일에 관심을 가지시더라니.”
“……아기 만드는 일을 하면 어른이 되나요?”
“애한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 인간아! 당신 양심이 있어?! 예전엔 내가 헛소리하면 제멋대로 두들겨 팼던 주제에……!”
“그거야 사명을 마치기 전의 일이지요. 용사님은 이제 미궁 바깥으로 나왔으니, 성장을 위해 다양한 경험을 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저 인간이 진짜……!”
저 양심에 털 난 인간 같으니라고! 케르츠는 웃으며 다시 동굴에 들어가 버렸고, 나는 ‘아기 만드는 일’에 다시 꽂혀서 이런저런 질문을 해 대는 용사를 달래다가 그대로 밤을 새우고 말았다.
온갖 변명을 늘어놓아도 고개를 갸우뚱거리기만 하던 용사는 ‘케르츠도 하넨도 아기 만드는 일에는 경험이 없다’라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겨우 호기심을 거두었다. 생각해 보니 하넨이 동정인지 아닌지는 들은 바가 없어서 모르겠지만, 그냥 용사를 달래기 위한 희생이라고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 용사가 눈치 없이 하넨에게 물어보지만 않으면 될 테니 아무래도 좋은 일 아닐까?
다만…… 용사를 달래던 나는 조금 더 중요한 문제를 잊고 말았다. 용사가 말하는 ‘나에 대한 새로운 감정’이란 과연 무엇일지, 왜 하필 그 이야기를 하면서 내게 바짝 달라붙었는지, 그 점에 대해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나도 일부러 잊은 걸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은 나조차도 ‘용사에 대한 새로운 감정’을 정리하지 못했으니까. 용사와 체온이 닿을 때면 종종 전해지는 따스함, 가끔 용사의 웃는 모습을 볼 때면 뱃속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간질거림, 용사와 오래도록 시간을 보낼 때면 종종 느끼고는 하는 편안함, 그런 감정들에 대해서…….
그런 감정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용사뿐만이 아니라 나 또한 조금은 성장하지 않을까? 나는 그런 생각을 가슴 깊은 곳에 몰래 숨긴 채 용사와 긴 밤을 보냈다. 너무 깊은 곳에 숨겨서 나조차 자각하지 못할 생각이었다.
* * *
다음 날 아침, 해가 밝고 모두가 떠날 준비를 마치자 우리는 동굴 앞에서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저희에게 도움을 줘서 고마웠어요. 그럼 저희는 이만 다른 거처를 찾으러 떠날게요.”
“도움은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는걸요. 그럼 앞으로도 편안한 여행길 되세요. 마법사 씨도 순산하시고요!”
나는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성기사 청년은 예의 바르게 몸을 꾸벅 숙였고, 케르츠는 묘한 시원섭섭함과 안도감이 섞인 낯으로 성기사 청년을 바라보았다. 이제 저 사람들은 새로운 삶을 살 테고, 우리는 우리대로 다른 성기사들을 찾으러 가야겠지.
서로 등을 돌려 이별하려나 싶었던 순간, 우리를 바라보고 있던 거구의 마법사가 문득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용사에게 다가갔다. 그는 어리둥절해하는 용사의 귀에 대고 무언가를 속닥거리고는 성기사 청년에게 돌아갔고,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우리에게 손을 흔들고 떠나갔다.
“뭐야, 저 녀석? 용사에게 무슨 말을 한 거야?”
“용사님, 저 마법사가 무슨 말을 남기고 갔……. 잠시만요. 표정이 왜 그러십니까?”
용사의 표정을 확인한 하넨과 케르츠는 흠칫 놀라 뒤로 물러났다. 두 사람이 왜 저러나 싶어 의아해하던 나는, 곧 용사의 눈빛을 온몸으로 받고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지금 용사의 표정에는―온갖 호기심과 흥분감이 가득 담겨 있었으므로.
“아기.”
“네?”
“코레토 씨가 말했어요. 아기 가지는 행위는 꼭 아기를 낳지 않을 사람들이라도 할 수 있다고. 서로 좋아하는 사람들은 굳이 아이가 필요 없어도 아기 가지는 행위를 한다고.”
“코레토라면 아까 그 마법사 씨요? 저기, 용사님. 설마하니…….”
“세온, 나랑 아기 만드는 행위 해요! 난 세온이 좋으니까!”
용사는 그 날 이후로 일주일 동안 ‘아기 만드는 행위’에 대한 질문을 꺼내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나는 케르츠와 하넨과 인형의 미묘한 웃음을 뒤로한 채 용사에게서 이리저리 도망쳐 다녀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