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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Epilogue (23/28)

20. Epilogue

광장을 빠져나와 복도를 걷자 끝없이 긴 계단이 나타났다.

신의 언어가 새겨진 톱니바퀴가 빼곡하게 돌아가던 층도, 아득한 수평선 너머로 비석이 수없이 서 있던 층도, 보석을 바꿔 가며 중력을 조절하던 층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모든 층이 사라져 버린 것만 같았다. 신이 감정을 되찾아 온전해진 이 세계에, 더 이상 시련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러고 보니, 신의 감정을 되돌려 주는 과정에서 천장이나 벽이 무너지는 소리가 나기도 했지.’

지금쯤 우리가 지나온 층은 흔적도 남지 않고 흙 아래로 묻혀 버렸을 거다. 드디어 모든 게 끝났다 싶어 후련한 한편, 정든 고향을 떠나는 듯한 아쉬움에 괜히 몇 번쯤 뒤를 돌아보게 되었다. 인형은 내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우리는 함정도 사념도 없는 계단을 쭉 걸어 올라갔다. 물론 체력이 약한 나와 하넨에게는 제법 험난한 길이었지만, 용사가 나를 업고 케르츠가 하넨을 업자 그 문제는 금방 해결되었다. 나는 용사의 등에 가만히 머리를 기댔다.

이제는 나도 체온이 돌아왔을 테니 그다지 차가운 상태는 아닐 텐데도, 나를 업은 용사의 등은 이상할 정도로 따뜻하게 느껴졌다. 아마도 용사가 잔뜩 들떠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이제 전부 끝났나요? 저는 용사 말고 다른 목적을 가질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럼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싶어요, 용사님은?”

“아직은 잘 모르겠어요. 우선은 정화된 세계가 어떤 곳인지에 대해 알고 싶어요. 신이 감정을 되찾은 세계는 어떤 곳일지, 어떻게 바뀌었을지 구경할래요.”

용사는 잔뜩 들뜨고 신난 목소리로 재잘거리고 있었다. 나는 등에 업힌 상태라서 용사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잘은 모르겠지만, 분명 즐겁게 웃고 있을 거다. 하늘에서 내리쬐는 햇살처럼 밝은 미소겠지.

“그나저나 미궁을 나가고 나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세상의 오염이 정화되었으니 독이나 저주 계열의 마법은 분명 약해질 텐데. 새로운 마법을 연구할 수 있다는 건 모두에게 좋은 일이지만 기존에 그쪽 계열에서 먹고 살던 마법사들은 나를 죽이려 들 테고, 그럼 흑탑 내에서의 내 입지는…….”

한편 하넨은 케르츠에게 업힌 채 허탈하다는 듯 꿍얼거렸다. 이 상황에서 저런 것부터 생각해 내다니 묘하게 속물적이다 싶다가도, 어차피 신이 감정을 되찾는다 해서 유토피아가 찾아올 리는 없다는 사실을 떠올리니 금방 납득이 되었다.

생각해 보면 현실적인 고민이다. 세상의 오염이 정화되었다 해도 사람은 살아가야 하고, 예전보다야 좀 덜해졌다 할지라도 사람 사이의 갈등은 끊이지 않을 테니까. 어쩌면 세계의 정화를 계기로 새로운 분쟁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갈등이나 분쟁을 다 고려한다 해도 정화된 세계에는 새로운 가능성이 찾아오겠지만 말이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 하넨 저 사람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 나는 까마득한 옛날처럼 여겨지는 예전의 약속을 떠올리며 입을 열었다.

“아, 하넨 씨. 그러고 보니 할 이야기가 있는데요.”

“뭔데?”

“예전에 일기장의 재료를 찾았을 때, 하넨 씨에게 대가에 대해 말한 적 있잖아요.”

“그, 그랬지. 그런데 왜 지금 그걸.”

“미궁을 나가면 어떤 대가인지 알려 주겠다고 말했잖아요? 그러니 지금 말씀을 드릴게요.”

하넨은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터무니없는 대가라도 요구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역력한 표정이었지만 나는 그저 빙긋 웃기만 했다. 하넨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터무니없는 대가는 아니다. 어차피 이번 일로 흑탑의 입지가, 흑탑 내에서의 하넨이 위험해진다면―저 마법사에게는 오히려 좋은 기회일지도 모르고.

“저와 용사와 함께 세상을 여행해 주세요. 보디가드로서.”

“뭐, 뭐라고? 보디가드? 경호원 말하는 거야, 그거?”

“저는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이라서 이 세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고요. 물론 인형이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금의 세상이 어떤지 안내해 줄 사람 하나는 있으면 좋잖아요. 저랑 용사가 단둘이 돌아다닌다고 생각해 보세요. 순식간에 나쁜 사람들한테 다 털리고 이용당하는 미래가 상상되지 않으세요? 하넨 씨는 저희를 그렇게 내버려 둘 정도로 나쁜 사람인가요? 저희가 불쌍하지도 않으세요? 네?”

“너, 너 그렇게 사람 동정심 사는 척하는 걸 보면 어디 가서 굶어 죽지는 않겠다! 인형 녀석이 묘하게 능글거린다 싶었더니 역시 널 닮아서 그런 거였구나? 응?!”

하넨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지만 그 와중에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어차피 흑탑에 돌아가 봤자 좋은 꼴을 보지 못하니까 차라리 우리와 여행이라도 하는 게 낫다는, 설득력 있는 듯하면서도 묘하게 변명처럼 들리는 설명을 늘어놓으면서 말이다.

용사는 강하고, 인형은 저렇게 생겼어도 일단 신이니 꼭 하넨이 없더라도 여행 자체에는 문제가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예전에 용사가 꾸었다던 악몽을 떠올렸다. 역할이 없으면 모두에게 버려지고 잊힐 거라며 체념하고 슬퍼하던 용사.

그런 용사를 위해서라도, 용사가 모두와 함께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라도, 나는 두 사람이 여행에 합류해 주기를 바랐다. 물론 나도 저 사람들이 없으면 조금은 쓸쓸하겠지. 누가 뭐래도 이 세계에 와서 처음 만난 사람들이니까.

나는 용사의 등에서 내려와 케르츠에게 시선을 돌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케르츠를 설득할 만한 논리는 없다시피 했다. 케르츠가 성기사로서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떠나기라도 한다면 그저 그러라고 내버려 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나는 내심 케르츠도 함께 여행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케르츠가 또 예전의 버릇을 못 버리고 폭력을 행사하기라도 하면 그때는 정말로 갈라설 작정이지만, 솔직히 신의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된 저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조금 궁금했다.

용사도 나와 비슷하게 생각했는지, 내 허리를 아무렇지 않게 끌어안은 채 케르츠를 흘끔거리며 바라보았다. 케르츠는 내 허리를 감은 용사의 손을 잠시 바라보다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케르츠, 케르츠도 같이 와 줄 거예요? 세온과 하넨과 함께 여행을 떠나면 분명 즐거울 거예요!”

“……괜찮겠지요. 어차피 신전으로부터 당신들을 보호하려면 곁에 있어야 할 테니까.”

“네?”

“신전이 우리를 내버려 둘 리가 없잖습니까? 우리가 그들의 계획을 다 어그러뜨려 놓았으니 말입니다.”

처음에는 케르츠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기나긴 계단이 끝나고 마침내 지상으로 올라오자 우리는 그 말의 의미를 곧바로 깨달았다. 무너진 미궁의 잔해가 사방을 뒹구는 아득한 평야 너머, 회백색의 군대가 미궁의 입구를 포위하고 있었다. 수천 개의 금속 창이 햇빛을 받아 날카롭게 빛났다.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냐!”

군대의 선두에 선, 잿빛의 사제복을 입은 한 중년의 신관이 우리의 앞을 막아섰다. 용사는 긴장한 듯 나를 보호하며 뒤로 물러났고, 하넨의 안색 또한 나빠졌지만 정작 인형은 태평하게 용사에게 볼을 비비고 있을 뿐이었다.

“세온은 내가 지킬게요. 걱정하지 말아요.”

“아뇨, 용사님. 여기선 제가 나서지요. 저는 신전과 풀어야 할 앙금이 있습니다.”

케르츠는 그렇게 말하고는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용사는 여전히 잔뜩 긴장한 듯 날을 세운 모습이었지만, 인형은 용사를 달래듯 계속 볼을 비비고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나는 인형의 의중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이 녀석은 이번 일을 케르츠에게 맡기려는 모양이다.

“대체, 대체 무슨 생각으로 미궁을 무너뜨린 거지? 죄인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었더니 이토록 불경한 짓을 저지를 줄이야!”

“미궁은 우리가 무너뜨린 게 아니라 역할을 다하고 스스로 무너졌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이 저지른 과오를 원래대로 되돌렸을 뿐이고요.”

“더럽혀진 성기사 주제에 웃기지도 않는 소리를 하는군! 너희들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기나 하는 거냐?! 지상의 사제들이 모두 신력을 잃었어. 이는 멸망의 징조다! 저 파랗게 일그러진 하늘이 보이지도 않느냐!”

그러고 보니, 수백 년 동안 오염된 하늘만 바라보며 살던 사람이라면 푸른 하늘이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르겠구나. 사실은 저 푸른 하늘이야말로 정화의 증거라는 사실조차 모를 테고.

어째서 신관들이 신성력을 잃었는지 알 것 같았기에 나는 슬쩍 동료들과 눈빛을 교환했다. 용사는 꽤 복잡한 표정으로 신관을 흘끔거렸고, 하넨은 웃음을 참으려는 듯 묘한 표정으로 입매를 씰룩거렸다.

확실히 저 신관들은 신벌을 받을 예정인 모양이지만, 그래도 나는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상대는 군대였다. 수천 명의 군대가 앞을 가로막고 있는 상황에서 용사와 케르츠가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케르츠 혼자로도 충분하다.]

“정말이야? 충분해?”

[오히려 더 좋은 상황이다. 실존하지 않는 날개의 저주를 해소해 줄 기회가 왔다.]

실존하지 않는 날개의 저주라니, 그게 뭐더라? 고개를 갸웃하던 나는 곧 미궁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내가 인간성을 되찾았을 때의 일이었지. 용사가 멋대로 회복초를 과다하게 사용해 버려서 하넨과 케르츠가 저주에 사로잡혔던 사건 말이다. 존재하지도 않는 날개나 꼬리가 돋아나는 듯한 착각이라고 했던가.

그런데, 그 저주가 지금 이 상황과 대체 무슨 상관이지? 나와 용사, 하넨이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하는 동안에도 케르츠와 신관의 대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아니요, 이제 세계는 다시 태어날 겁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설마, 설마 신에게 죄를 지은 걸로도 모자라 모든 걸 무너뜨리려고 작정을……!”

“대체 언제까지 날조해 낸 죄를 들먹이면서 진실을 부정할 작정입니까!”

그 순간이었다. 나는 케르츠의 피 묻은 쇠톱에서 희미한 빛이 감도는 것을 눈치챘다. 징그러운 인면철로 만들어진 쇠톱 표면에 서서히 균열이 생기더니, 금속 조각이 하나둘 떨어져 나가며 빛의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우리는 인면철 아래에 자리 잡은 쇠톱의 진짜 모습을 발견했다.

그건 분명 검이었다. 상아색 검집에 금빛 문양이 수놓아져 있고, 칼자루 부분에는 붉게 빛나는 신의 문자가 빼곡하게 새겨진 형태였다.

“이제 있지도 않은 죄와 과거에 두려워하던 시절은 끝났습니다. 용사님도, 성기사들도, 그리고 신조차도, 거짓된 위협에 굴하지 않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겁니다.”

기괴한 형태의 핏빛 인면철 갑옷 또한 타들어 가듯 빛의 가루로 화하더니, 그 아래에서 새로운 갑옷이 드러났다. 검집과 마찬가지로 상아색의 빛나는 갑옷 표면에는 붉은색과 금색으로 신의 문자가 수놓아져 있었다. 그 모습은 분명 과거와는 달랐다. 이제 더 이상 도살자라고 부를 이유가 없는, 성기사의 형상 그 자체였다.

케르츠는 신어로 된 기도문을 읊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인형이 머릿속에 불어넣어 준 정보 덕분에, 우리는 케르츠의 기도문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런 일이!”

[신께서 가로되, 세계는 추악하면서도 아름다우며 나약하면서도 강인하며 증오스러우면서도 사랑스러운 것들로 이루어져 있도다. 신을 따르는 이들이여, 신께서 그대들에게 단 하나만을 명하니 들으라.]

“아냐,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

[세상을 사랑하라. 신은 오직, 그 한 가지만을 명하였다.]

케르츠의 등에서 찬란한 빛 한 쌍이 쏟아져 나왔다. 케르츠의 등 너머로 아득히 펼쳐진 푸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아름다웠다. 나는 볼에 가볍게 닿아 오는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감각을 모른 척하며 하늘을 바라보았다.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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