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빛을 찾아 헤매는 언데드
용사는 밝은 광장 한가운데에 서서 주변을 바라보았다.
재질을 알 수 없는 톱니바퀴 수천 개가 사방에서 덜거덕거리며 돌아가고 있었다. 톱니바퀴는 끓는 물처럼 부글거리고, 살아 있는 것처럼 한숨을 내쉬고, 슬퍼하는 것처럼 액체를 쏟았다. 각 톱니바퀴의 표면에는 신성한 문자가 새겨져 있어,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내내 수많은 유형의 문장들이 생성되었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비록 용사는 신의 언어를 읽을 수 없어 문장을 해석할 수는 없었지만, 그 문장들이 고통과 슬픔과 아픔을 담고 있다는 사실쯤은 알았다. 만약 톱니바퀴를 조금이라도 건드린다면 문장에 담긴 고통과 슬픔과 아픔이 전해져 그대로 미치거나 죽어 버리고 말 거다. 어쩌면 톱니바퀴 사이에 몸이 끼어 신체가 물리적으로 망가져 버릴지도 모른다. 물론 건드리지 않으면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으니 걱정할 건 없지만.
용사는 톱니바퀴 사이에 난 좁은 길을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저 걷기만 하면 이번 층의 출구에 도달할 수 있다. 지금까지 돌파해 왔던 수많은 층들에 비하면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쉬웠지만, 혼자 걷는 건 처음이라서 조금 쓸쓸한 건 사실이었다.
‘보고 싶어.’
하넨이 보고 싶다. 세온에게 못된 짓을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케르츠 또한 보고 싶다. 용사의 반생을 함께한 동료들이니 좋든 싫든 애착이 갈 수밖에 없었다. 다만, 지금 이 순간 용사가 가장 보고 싶은 건 세온이었다. 세온이 이름을 지어 주겠다고 했는데. 세온이 지어 준 이름으로 불리고 싶다고 소망한 적도 있었는데.
하지만 이제는 꿈꿀 수 없는 일이었다. 희망의 반대편에는 기만이 있기 때문이었다. 종이의 앞면과 뒷면을 분리할 수 없는 것처럼, 희망과 기만 또한 도무지 분리할 수 없어 기만을 버리고 희망만을 취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니 혼자 갈 수밖에 없었다. 아무런 책임도 없는 세온은 모르는 게 나을 테니까.
용사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느리게 내디뎠다.
* * *
“일단은 내가 용사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너희에게 공유하는 게 먼저겠지? 그래야 너희도 장님 신세를 면할 테니까.”
하넨은 난처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무언가 알고 있는 듯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를 듣자 하니, 아무래도 저 사람이 용사에게서 중요한 사실을 전해 들은 듯했다.
용사가 나에게 먼저 말해 주지 않았다는 점이 조금 서운했지만 지금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분명 용사가 하넨에게 먼저 진실을 말할 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둘이서 비석을 탐색하러 돌아다니던 도중 우연찮게 이야기가 나왔다든지, 아니면…….
괜히 찝찝해져서 뒷머리를 긁적거리는데, 하넨의 이야기가 잠시 멈추더니 어디서 부스럭거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천으로 된 무언가를 풀어내고, 팔락거리며 페이지를 넘기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곧바로 상황을 이해했다.
“용사에게 들은 이야기를 하기 전에, 케르츠 너한테 먼저 알려야 할 게 있어.”
“하넨 씨, 설마.”
“그래. 용사랑 같이 있을 때 초반 몇 페이지는 이미 확인했어. 마침 용사가 본 진실 중 일부가 이 일기장에 적혀 있어서 이야기가 나온 건데, 너랑 케르츠 쪽에서 그 사달이 나는 바람에…….”
그렇구나, 생각해 보니 슬슬 일기장의 복원이 끝날 시기였어! 케르츠와 떨어져 있던 그 시기야말로 일기장을 확인하기에 가장 적절한 때였을 테니, 하넨이 그때 일기장의 내용을 먼저 확인했던 이유도 납득이 간다. 용사가 하넨에게 먼저 진실을 이야기했던 이유도, 일기장이라는 유형의 증거가 확실히 존재해서 숨기려야 숨길 수 없었기 때문이겠지.
운이 좋다면 저 일기장에 다른 진실들 또한 적혀 있을지도 모른다. 하넨이 일기장의 글씨를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인지 능력을 확보하고 있다면 좋을 텐데……. 하지만 나는 곧 깨달았다. 우선 지금은, 케르츠에게 ‘일기장’의 존재를 알리는 게 먼저라는 사실을.
“일기장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케르츠의 무거운 목소리가 들려 왔다. 지금 케르츠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어떤 상태인지 명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아까 전에 비해 대화가 통하는 상태인 것만은 확실했다. 설마 저 사람을 안정시키기 위해 피나 타액을 먹여야 하는 건 아닌가 싶어 내심 겁이 났는데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던 모양이다.
다만 이제부터가 문제였다. 저 사람이 일기장의 존재를 인정하기는 할지, 설령 일기장을 인정하더라도 그 안에 적힌 내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다만, 지금 이 상황에서는 저 사람이 어떤 식으로 받아들이든 달래거나 비위를 맞춰 줄 수가 없는 상황이다.
“……예전에 세온이 주운 일기장이야. 수백 년 전 말쿠테른의 성직자가 죽으면서 남긴 유품 같더군. 어디서 주웠더라, 그거?”
“저도 정확히는 기억이 안 나는데……. 그, 예전에 케르츠 씨에게 주었던 구슬 팔찌 있잖아요. 정신을 안정시켜 주는 팔찌. 그 물건과 같이 주웠어요.”
“잠깐만요, 그 팔찌를 썼던 건 분명 한참 전의 일일 텐데……?!”
“왜 지금껏 너에게만 그걸 숨겼냐고 따지고 싶은 거냐? 네가 지금까지 한 짓을 생각해 봐, 이 염치없는 자식아! 복원되지도 않아 내용을 모르는 일기장을 네 앞에 들이밀었다간 진작 찢겨져 나갔을걸! 우리를 미혹하는 가짜 물건일지도 모른다면서!”
그나마 차분함을 유지하고 있던 하넨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다소 과격한 어조였지만 솔직히 나도 하넨의 의견에 동의했다. 하다못해 케르츠가 용사를 공격하지만 않았어도, 결과적으로 용사가 혼자 떠나 버리는 일이 벌어지지만 않았어도 조금은 동정심을 가졌을지 모르지만, 이제 와서 케르츠에게 동정심 따위가 생길 리는 조금도 없었다.
이제는 더 이상 케르츠에게 휘둘릴 만한 여유가 없다. 저 사람이 진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면, 계속 고집을 부리고 눈앞의 현실로부터 도피한다면……!
“하, 하지만. 저는. 전. 애초에 그 일기장 진짜라는 증거조차도…….”
“왜, 일기장을 직접 보지 못해서 못 믿겠어? 그럼 우선 네게 용사가 말해 준 진실을 알려 줄게. 그러면 네 눈으로 일기장을 직접 확인할 수 있겠지.”
“……!”
“용사가 말한 적 있었지? 멸망 당시에 죄인을 강에 던지는 야만의 풍습이 있었다고. 그거, 실제로는 지금의 교단이 말쿠테른의 평신도들을 향해 가했던 탄압이야. 그들은 죄 없는 평신도들을 붙잡아 악의 근원으로 몰아붙이고, 잔인하게 시체를 훼손해 강을 버렸어.”
“그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가.”
“말쿠테른의 성직자들이 강에 뛰어들어 순교했다는 건 후대에 전해진 거짓말이지. 실제로 몇 남은 성직자들은 성기사를 찾아가 그들의 정신을 되돌리려 하거나, 미궁으로 진입해 사태를 어떻게든 진압해 보려 했어. 성직자들이 자살을 시도한 것처럼 이야기가 와전된 건, 아마 오랜 세월 끝에 이야기가 단순화되었거나…….”
어둡기만 하던 시야에 불현듯 희미한 노이즈가 끼기 시작했다. 어쩌면 노이즈라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이건 시야를 가리는 노이즈라기보다는, 오히려 가려져 있던 시야의 일부가 서서히 드러나는 쪽에 더 가까웠다.
이게 바로 진실이 밝혀지는 과정일까. 그 생소한 현상에 놀라기는 했지만, 사실 지금 내 머릿속에 또렷하게 자리 잡은 장면은 오히려 따로 있었다. 실제로 보지 못한 장면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뚜렷한 상상. 무력하게 질질 끌려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이미 잔인하게 살해당해 짐짝처럼 강에 던져지는 시체의 모습.
“지금의 교단이, 일부러 왜곡된 소문을 퍼뜨렸거나.”
콰앙, 무언가가 부딪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시야가 밝아졌다. 물론 밝아졌다고는 해도 아까 전의 완전한 어둠에 비하면 그렇다는 뜻이고, 굳이 말하자면 지금 주변의 밝기는 달빛이 비추는 자정 무렵과 비슷한 정도였다. 낮처럼 모든 것이 명확하지는 않지만 주변의 윤곽 정도는 분간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가까이 있는 사람이라면 표정도 확인할 수 있다.
시야를 되찾자마자 가장 먼저 보게 된 광경은, 하넨이 질겁하며 뒤로 물러나는 모습이었다. 대체 뭐 때문에 저러지? 아까 그 소리는 또 뭐였고. 고개를 돌린 순간 나는 두 가지 모두를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퍽, 퍼억. 케르츠가 자기 머리를 몇 차례씩이나 바닥에 짓찧고 있었다.
“케, 케르츠 씨?!”
“뭐 하는 거야, 이 자식아!”
흐, 허억, 괴로운 숨소리와 신음이 요란한 소리에 뒤섞여 희미하게 들렸다.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케르츠에게 다가갔다. 자해 수준을 넘어 거의 자살 시도가 아닌가 싶은, 제 두개골을 으깨려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엄청난 기세로 제 머리를 땅에 들이박고 있었다.
나도, 하넨도, 반성을 하라고 했지 자해하라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다만 아주 예전에, 정신이 또렷하지 못했던 케르츠가 저런 식으로 머리를 들이박던 모습을 본 적이 있어 조금은 그의 상태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 충격적인 진실을 알게 되었으니 정신을 차리려고 저러나 보지.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상당히 혼란스러웠다. 그러니까, 뭐라고? 지금의 신전이 말쿠테른의 죄 없는 신도들을 죽여 놓고선 자기들이 하지 않은 척 은폐했다고? 그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짓이야?
설령 성기사들이 진짜 잘못을 했다 쳐도 그게 평신도들을 죽여도 될 명분은 아닐 텐데. 게다가 성직자들에 대한 이상한 소문까지 퍼뜨렸다는 건 누가 듣기에도 명백히 수상한 일이었다. 나조차도 당황할 만한 일인데, 신전에 붙잡혀 사명을 강요당하고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을 저 사람의 입장에서는 상당한 충격이 아니었을까.
예쁜 구석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인간이었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저렇게 내버려 둘 수도 없어서, 나는 기겁하며 케르츠를 붙잡고 일으켰다. 케르츠는 괴로운 신음을 흘리며 힘겹게 숨을 토해 냈다. ……그런데.
“이봐요?”
시야가 돌아오지 않은, 마치 장님처럼 초점이 맞지 않는 그 눈빛. 케르츠의 그 모습이 의미하는 바가 지나칠 정도로 명백했다. 눈앞에서 손을 몇 번 흔들어 보아도 인식하지 못하는 티가 역력했다. 아주 잠깐 케르츠에게 들었던 동정심이, 지금 이 순간 확 사라져 버렸다.
설마 인정하지 못한 건가. 자신이 들은 게 거짓말이라고, 하넨이 지어낸 허깨비 같은 소리라고 믿고 있어서, 그래서 시야가 돌아오지 않은 건가.
“저기, 이거 보여요? 당신도 하넨 씨 말 들었잖아요. 왜 아직도 그러고 있어요?”
“……”
“설마, 설마 당신, 진짜로.”
이 인간. 설마 이 지경이 되고서도 아무것도 인정하지 못하고. 그럴 리 없다고, 거짓말일 거라고, 그저 끊임없이 부정하고 외면하기만 하는 거냐고. 용사는 자기 탓이 아닌 진실조차 책임지기 위해 혼자서 가 버렸는데, 저 사람은 용사를 쫓아가기는커녕 자기 앞에 들이밀어진 진실의 편린조차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 말도 안 되는 나약함에 오히려 화가 치솟았다.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눈앞의 사람에게 폭력 따위나 휘두르는 주제에, 정작 자기가 무너지는 순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숨어 버리는 비겁함이 역겨웠다. 텅 빈 눈으로 아무것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그 무력한 꼬락서니를 보고 있노라니, 무덤덤해야 할 마음속에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거냐고, 이 벽창호 같은 인간아!”
있는 힘껏 케르츠의 급소를 걷어찼다. 휘청, 케르츠의 몸이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 * *
용사는 걷던 와중에도 몇 번씩이나 머뭇거렸다. 두 걸음 걷다가 멈춰서 한숨을 쉬고, 세 걸음 걷다가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보았다. 물론 용사의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리 걷는 속도가 느리다고는 해도 용사는 착실히 앞으로 나아가는 중이었고, 세온을 비롯한 다른 이들은 빛을 얻지 못했으므로 호수 근처를 벗어나지조차 못했을 터였다.
다른 이들이 따라오지 않아서 슬프다고 생각하다가도, 애초에 용사가 그들을 놓아두고 왔다는 점을 떠올리면 슬퍼할 까닭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다른 이들이 따라오는 쪽이 문제였다. 그들은 진실을 보지 못했으니 용사를 따라올 리가 없겠지만, 만약 그들이 어떤 식으로든 진실을 깨닫게 된다면……?
‘맞다, 그러고 보니.’
용사의 발걸음이 조금 더 빨라졌다. 아무것도 알려 주지를 않았으니 그들이 진실을 알 리 없다고 막연히 생각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럴 리가 없었다. 그들이 진실을 알 수 있는 경로는 두 가지나 있었다.
우선 첫째는 세온과 늘 함께 다니는 인형이었다. 그 인형은 지금까지 용사에게 많은 것들을 알려 주었고, 항상 용사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눈치였다. 어쩌면 인형은 용사를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모든 진상을 꿰뚫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인형 쪽은 별 걱정이 되지 않았다. 만약 인형이 일행에게 진실을 말할 작정이었다면 진작 말했을 테고, 그랬더라면 다른 일행들은 벌써 용사를 향해 허겁지겁 뛰어오고 있었을 테니까.
다만 문제는 두 번째 경로였다. 용사는 아직 하넨에게 일기장이 남아 있는 걸 기억해 냈다. 그 일기장에 얼마나 많은 기록이 담겨 있는지는 모르지만, 만약 세온 일행이 그 일기장을 이용해 진실에 접근한다면……. 서둘러야 할지도 모른다.
차라리 세온 일행이 따라와 준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아주 잠깐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지금은 그런 걸 바라선 안 될 노릇이었다. 용사는 고개를 젓고는 부지런히 걸을 뿐이었다.
* * *
대미지로 따지자면 아까의 자해 쪽이 더 클 텐데도, 나에게 걷어차인 케르츠는 한참 동안 웅크린 채 괴로운 숨만 고르고 있었다.
“흐윽, 아, 으으…….”
나는 자리에서 일어선 채 그 모습을 말없이 노려보았다. 저 사람이 완전히 무력화된 틈을 타 몇 대쯤 더 후려갈기고 싶다는 생각이 절반, 쓸데없이 무력해진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서서히 차오르는 허탈감이 나머지 절반이었다.
분명 정신적인 충격 때문일 거다. 아무리 명치를 정통으로 얻어맞았다고는 해도, 갑옷이 어느 정도 충격을 상쇄시킨 데다가 원래도 튼튼한 사람이다. 지금 저 사람을 진짜 괴롭히고 있는 건 받아들이고 싶지 않은 괴로운 진실이겠지.
대체 어디까지 글러 먹은 인간인 거야. 혼자 강한 사람인 척, 무너지지 않는 사람인 척하더니, 결국 꼴사납게 현실 부정 따위나 하고 있을 뿐이고. 그 형편없는 모습을 비웃어 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지금 저 사람을 비웃어 봤자 무슨 소용이 있나 싶어서 그저 허탈했다.
“일어나요.”
“…….”
“일어나라고요, 장님 시늉 하지 말고. 인형이 아까 말했잖아요? 이거 사실은 인지 능력의 문제라서, 진실을 받아들이면 지금까지 안 보인다고 믿었던 것들이 전부 보이게 된다고.”
“나, 나는……. 저는.”
저 사람을 두들겨 패는 것도 그다지 즐겁거나 속 시원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나는 케르츠와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인지, 사람을 때린다고 해서 마음이 안정되거나 속이 후련해지지는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은 후련해졌지만 단지 한 대 패는 것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응어리가 마음 깊은 곳에 있었다.
그래서 답답했다. 내가 진짜로 원하는 건, 저 사람에게 앙갚음을 하거나 저 사람을 깔아뭉개는 게 아니라…….
“이제는 변할 때가 되었잖아요.”
“…….”
“당신도 변할 수 있잖아요. 용사님이 그랬던 것처럼.”
내 말이 끝나자 케르츠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비록 그 얼굴은 처참하다고 할 만큼 일그러져 있었지만, 그 눈빛 또한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 시선은 분명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
“내가, 변할 수 있습니까?”
“그걸 저한테 물으시면 어떻게 해요. 케르츠 씨 하기에 달렸지요.”
“변할 수 있다고요?”
“저기, 케르츠 씨는 맞아야 학습하는 타입이에요? 의외로 사람 말 같은 건 못 알아들어요? 아니, 애초에 들으려고는 하는 거예요?”
비꼬듯 투덜거리면서도 일단 쪼그려 앉아 손을 내밀자, 케르츠가 내 손을 잡고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상당히 불안정한 모습이지만 시야는 확실히 회복한 모양이었다.
그거면 되었다. 물론 이 사람에 대한 불만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일단은 이 사람이 진실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지금은 용사를 추적하는 게 먼저니 이걸로 충분하다.
“저 녀석, 때리면 말을 듣는 타입이구나. 앞으로 저 녀석이 말을 안 들으면 나도 시도해 볼까.”
“하넨 씨까지 폭력적으로 굴지 마시고요. 아무튼, 앞으로 여섯 가지의 진실을 더 확보해야 용사님을 쫓아갈 수 있는 셈이네요. 그렇죠?”
하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우리에게 다가와 앉았다. 케르츠는 여전히 내 손을 놓지 않았지만, 나는 굳이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은 채 하넨의 일기장을 들여다보았다. 지금 우리가 의지할 수 있는 데라고는 오직 일기장뿐이었다. 인형 녀석은 처음부터 우리에게 도움이 될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였으니 어쩔 수 없다.
다만 문제는 어둠이었다. 아무리 시야가 회복되었다고는 해도, 어둠 속에서 글을 읽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넨은 아쉬운 대로 모닥불에 책을 가져다 댔지만 당연히 도움은 되지 않았다. 모닥불은 마치 온도를 잃기라도 한 것처럼 어둡고 불온하게 일렁거릴 뿐이었다.
하넨은 계속 일기장을 팔랑거리며 넘겼지만 역시 글자를 식별하기가 어려운 듯했다. 이래서야 여기에서 발이 묶이고 마는 게 아닌가? 난처한 심정으로 일기장을 뚫어져라 노려보던 도중, 나는 문득 시야를 스치고 지나가는 빛을 눈치챘다. 나는 흠칫 놀라 일기장을 붙잡았다.
“왜 갑자기 그래?”
“방금 분명 페이지 중 하나가 빛나지 않았어요?”
“페이지가 빛났다고? 진짜로?”
나와 하넨은 허겁지겁 일기장을 뒤졌다. 하지만 이상한 노릇이었다. 분명 아까 전까지만 해도 빛나는 글자가 보였던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다시 일기장을 넘기니 빛이 보이지 않았다. 대체 왜일까,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데 한동안 입을 다물고 있던 케르츠가 입을 열었다.
“읽지도 않고 넘기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무슨 소리예요, 그게? 애초에 이렇게 어두운데 어떻게 읽어요.”
“당신이 아까 말했잖습니까. 실제로는 전부 볼 수 있지만 우리가 그렇게 인지하는 것뿐이라고. 제대로 읽지도 않고 마구잡이로 넘기기만 하니 글자를 인식하지 못하는 건 아니냐고요.”
이건 또 무슨 논리야?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케르츠를 바라보았지만, 그의 말을 듣고 나니 문득 떠오른 점이 있기는 했다. 그러고 보니……. 분명 방금 전 나는 페이지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지?
지금까지 하넨과 나는, 어차피 어두운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못 읽을 거라는 생각에 다소 마구잡이로 페이지를 넘기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대충 페이지를 넘기는 대신 조금 진지하게 일기장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하긴, 아무리 어둡다고는 해도 빛이 아예 없는 건 아니라서 몇몇 글자들은 어설프게나마 인식할 수 있었다. 밝은 곳에서 글을 읽는 것에 비하면 엄청난 집중력을 요하는 작업이어서 문제였지. 그러니까, 「성기사들이…….」
“어?”
그저 단어 하나를 인식하기 시작했을 뿐인데, 새까맣기만 하던 페이지에 순식간에 은빛 글자가 퍼져 나갔다. 다만 일기장의 모든 페이지가 밝아진 건 아니고, 내가 인식한 부분부터 시작해서 몇몇 특정한 문단만이 밝게 빛났을 뿐이다. 뭐야, 이건.
[그 부분이 ‘진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뭐라고?”
[진실을 알면 볼 수 있다. 반대로 말하자면, 진실과 관련된 것이라면 보인다.]
“그런 건 좀 일찍 말해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너?”
[인형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용사를 마지막 층까지 보냈으니 일행의 역할은 끝이다. 나는 그저 용사 일행과 놀고 있을 뿐이다.]
“노는 거 아니거든? 용사를 찾으러 가는 거야, 매정한 녀석 같으니라고.”
옆에서 구경만 하고 있던 인형이, 마치 자기가 놀라운 발견을 해내기라도 한 듯 뽐내며 으스댔다. 자기는 아무것도 안 하면서 잘난 척하는 모습이 얄미웠지만 지금은 인형을 혼내는 게 중요한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아무튼 진실을 인식하면 딱 그 부분만큼의 시야가 돌아온다는 거지. 완전히 메커니즘을 파악하지는 못하겠지만 조금은 감이 잡힌다.
“일단 읽어 봐요. 아무래도 성기사와 관련된 내용 같은데.”
성기사라는 말을 꺼내자마자 케르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다지 아프지는 않지만 조금 압박감이 느껴졌기 때문에, 나는 아직도 케르츠에게 붙잡혀 있는 손을 슬쩍 빼냈다. 어쩌면 케르츠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과연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지 궁금해하며, 나와 하넨과 케르츠는 머리를 맞댄 채 은빛 글자를 살폈다.
「성기사들이 걱정된다. 내가 들었던 마지막 소문에 따르면, 성기사들을 붙잡으러 간 신관들이 전멸하는 사태가 여러 차례 발생해 결국 공식적으로 추적을 포기했다고 한다. 성기사들이 탄압으로부터 안전하다는 건 확실히 다행이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들이 받고 있을 고통이 염려된다.
불살의 계율은 성기사가 지켜야 할 제1계율이다. 지금의 성기사들은 소중히 지켜 왔던 계율조차 잊을 만큼 심각하게 망가져 있다. 마지막으로 케르츠를 만났던 날의 꿈을 꾸었다. 그의 마지막 모습이 아직도 눈에…….」
“어? 잠깐만요. 케르츠라고요?”
“아마 제 조상이겠지요. 애초에 제 이름은 조상의 이름을 물려받은 거니까요. 제 조상에 대한 진실이라도 밝히겠단 걸까요.”
담담한 척 말하고는 있었지만 케르츠의 목소리는 조금 불안정했다. 잡을 것을 잃은 케르츠의 손은 단단히 주먹을 쥔 채 부들부들 떨리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케르츠의 옆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이 일기장의 주인은, 자신이 만난 성기사의 후손이 지금 여기에서 일기장을 읽고 있을 거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머릿속에 떠다니는 괜한 생각을 떨쳐 내고는 일기장의 뒷부분을 읽어 내려갔다.
「……그의 마지막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하다. 다행히도 나는 운이 좋은 편이어서, 케르츠의 광증이 조금 가라앉았을 때 그를 잠시 만날 수 있었다. 그 상태에서도 피아 식별이 불가능해 나를 공격하려 했지만 말쿠테른의 문양이 생긴 팔찌를 끼워 주니 조금쯤 이성이 돌아왔다. 물론 얼마 안 지나 팔찌 자체가 망가져 버리긴 했지만……. 내가 미궁에 가져온 이 팔찌는 부디 망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케르츠를 비롯한 성기사들은 지나치게 큰 희생을 치렀다. 신으로부터 분리되어 그 누구도 제어하지 못하게 된, 폭주하는 감정의 일부를 그들이 나누어 짊어지지 않았더라면 세계는 이미 멸망하고도 남았을 거다.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을 짊어진 대가로 미쳐 버린 이들을 구원할 방법이 있다면 좋겠지만…….」
“잠깐만요. 감정을 짊어졌다니, 그게 무슨……?”
케르츠가 다소 당황한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일기장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한 건 나와 하넨 또한 마찬가지였다. 신으로부터 감정이 분리되었다는 게 무슨 소리야? 성기사들이 그걸 짊어졌다는 건 또 무슨 이야기고?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성기사들이 미쳐 버린 건 신의 악함에 오염되었기 때문이라며? 네가 그렇게 말했잖아, 케르츠.”
“저도 분명, 분명히 그렇게 배웠습니다. 모두가 그렇게 말해 왔어요. 심지어 제 어머니마저도 그렇게 절 가르치셨는데……. 그런데 갑자기 감정이라니요. 그게 무슨.”
얼마 전에 비하면 겨우 진정된 모습을 보이는 듯하던 케르츠의 목소리에 다시 두려움이 어렸다. 보아하니 일기장의 주인은 선대 케르츠에게서 진상을 어느 정도 전해 들은 것 같은데, 그게 지금의 케르츠가 알고 있는 정보와 완전히 다르다니. 그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혼란스러운 마음에 일기장의 글자를 멍하니 바라보던 도중, 나는 지난 층에서 용사가 정화했던 마지막 비석의 문장을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위층의 비석에 그런 문장이 있었지요. 우리가 죽인 신의 감정을 참회하며, 라고.”
“그, 그렇다면. 신의 악함을 봉인하는 과정에서 신의 감정을 실수로 죽이고 말았다든지. 그래서 감정과 연관된 악에 오염되었다든지…….”
“용사님이 무슨 말을 했는지 잊어버렸어요? 편애와 사랑, 분노와 정의, 기만과 희망. 누구의 입장에서는 악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또 누구의 입장에서는 선이라고 할 수 있는 감정들이지요. 그저 관점에 따라 다를 뿐.”
케르츠는 눈을 부릅뜬 채 일기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은빛 문자로 빛나고 있는 문장은 아직 끝나지 않았으므로, 나는 남아 있는 문장들을 더 읽어 내렸다. 그다지 많은 내용은 아니었지만…….
「나는 신전의 신관들이 조금 다른 방식으로 성기사들을 괴롭히는 건 아닐지 걱정이다. 신관들은 성기사들을 죽일 수 없지만 성기사들의 광증을 이용할 수는 있다. 광증에 시달리는 성기사들은 망상과 현실을, 가상의 적과 실제의 위협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만약 신관들이 세상에 가짜 정보를 퍼뜨려, 성기사들이 진실을 기억하지 못하도록 장난질을 친다면…….
특히 케르츠가 걱정이다. 그는 다른 성기사들에 비해 훨씬 더 불안정하다. 아마 다른 성기사들과는 다른 종류의 감정을 떠안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어떤 성기사는 신의 분노를, 어떤 성기사는 신의 질투를, 어떤 성기사는 신의 교만함을 떠안았다면…….
케르츠가 떠안은 것은 신의 두려움과 공포다.
궁지에 몰린 공포와 두려움은 분노보다도 더 비참한 왜곡을 자아낼지도 모른다.」
흐으, 케르츠가 괴로운 숨을 들이쉬었다.
시야 전체에 모래 같은 노이즈가 퍼져 나갔다. 아득히 먼 곳에서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듯한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 * *
<처음부터 신의 악함을 건드리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그것만이 옳은 길이었다. 우리는 틀리지 않았다. 틀린 건 말쿠테른의 성기사들이다. 그들이 중간에 개입하지만 않았어도, 분리된 신의 악함이 오염되어 바깥으로 퍼져나가는 일은 없었을 거다. 우리는 틀리지 않았다. 우리는 틀리지 않았다. 우리는 결코 틀리지 않았다…….>
용사의 머릿속에서는 수많은 기억들이 떠올랐다 사라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비석을 정화하면서 용사의 머릿속에 자연히 불어넣어진 기억들이었다. 3년도 채 살지 못해, 기억이라고 할 만한 게 별로 없는 용사는 이렇게나 많은 양의 기억들이 생소하면서도 거북했다.
그러나 용사는 기억으로부터 눈을 돌릴 수 없었다. 전부 용사가 감내해야 할 기억들이었다.
<조절하지 못하는 감정이라면 차라리 없는 게 더 행복할 거다. 후회하게 될 판단이라면 결국 내리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감정이야말로 지고의 악함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아무것도 못 느끼는 채로. 그것이야말로 지고의 선함이다.>
<신은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러길 원했기 때문이다. 신은 분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러길 원했기 때문이다. 신 또한 우리의 뜻에 동의했다. 중간에 판을 엎어 버리고 깨끗한 척을 한 건 성기사들의 잘못이다.>
<다시 한 번 시도할 수 있다면, 신의 감정을 오염시키지 않은 채 온전히 봉인할 수 있다면.>
용사는 이미 광장을 반 정도 가로질렀다. 앞으로 반만 더 가면 다음 층이고, 다음 층에는 성기사들이 완전히 봉인하지 못해 비대해진 신의 감정이 있다. 오래도록 방치되어 방치된, 신이 소중하게 여기던 감정의 부패를 깨끗하게 정화하는 것이 용사의 사명이다.
차라리 이름을 받지 못한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고 그는 생각했다.
기껏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부르지 못한다는 건 그것대로 슬픈 일이다.
* * *
새로운 진실을 인지하게 된 여파일까, 고요하기만 하던 광장은 언제부터인가 기계 돌아가는 덜컥거리는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아마도 이번 층에 산재해 있다는 함정에서 나는 소리가 아닐까 추측되었다.
다만 그 소리가 어디에서 나는지는 특정할 수 없었다.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해서, 소리만으로 함정의 위치를 파악해 이동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할 듯했다. 아직 남아 있는 진실을 더 찾아야 하는 걸까.
그래도 주변이 조금 더 밝게 보이는 건 다행이었다. 아직 함정의 위치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이제는 동료들의 얼굴도 제대로 보이고 일기장의 문자 또한 훨씬 더 수월하게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결국 지금의 신전은 신의 감정을 봉인하려고 시도했다는 거지? 성기사들은 그걸 막으려다가 실패했고.”
“그런 것 같습니다. 신에게서 분리되었던 감정들은 그 누구도 통제할 수 없게 되었고, 성기사들은 그 감정의 일부를 몸 안에 봉인한 탓에 광증에 시달렸고……. 봉인하지 못하고 남은 감정들은 사념이 되거나 세상을 오염시켰다, 그렇게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겠군요.”
우리는 일기장을 읽어 내려가며 이런저런 의견을 교환했다. 하넨은 호기심과 당혹감에 갈팡질팡하면서도 부지런히 일기장을 분석했고, 케르츠는 다소 창백한 얼굴이었지만 방금 전의 일로 각오를 다진 듯 제법 진지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아무것도 성장하지 않는 세계다. 그 무엇도 무너지지 않으니 새로운 것이 생겨날 자리가 없고, 그 어떤 판단도 내리지 않으니 무언가를 배울 수 있을 리 없다. 바위와 모래, 고인 물만이 가득한 황무지 같은 세계. 그들은 그런 세계를 이상적으로 여겼다.」
“그 무엇도 성장하지 않는 세계라니. 하긴, 욕구와 감정이 사라진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자가 되겠다는 욕구조차 없겠지.”
이 문장 또한 진실의 일부였는지, 다시 시야에 노이즈가 끼더니 주변이 조금 더 밝아졌다. 일기장을 읽으면 읽을수록 시야는 점점 밝아지고 톱니바퀴 돌아가는 소리 또한 보다 뚜렷하게 들려왔다. 일단 일기장을 읽기 시작하니 진실을 찾아내는 속도가 제법 빨랐다. 이 기세로 진실을 알아 간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용사를 쫓아갈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 무언가 부족했다. 무언가, 가장 결정적인 요소가 빠져 있다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떠다녔다. 과연 일기장만으로 모든 진실을 알 수 있을까? 이것만으로는 부족하지 않을까? 그런 불길한 생각이 자꾸만 떠올라, 뛰지도 않는 심장이 두근거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신관들이 그런 세계를 만들려 했으니 성기사들이 말리려 들었던 것도 무리는 아니었겠군요. 만약 그런 세계가 정말로 만들어졌다면……. 저기, 세온 씨. 이 인형 좀 치워 주지 않겠습니까. 조금 거슬리는데.”
“알았어요. 야, 너는 도움이 안 될 거면 이리 와서 구경이나 하고 있어. 정신 사납게 굴고 있어, 아까부터.”
일기장 옆에서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던 인형은, 이제 춤추는 것도 질렸는지 곧바로 내 어깨 위로 올라왔다. 나는 괜히 심통이 나서 인형의 이마에 꿀밤 한 대를 먹였다. 인형은 데구르르 바닥을 구르다가 다시 내 옷깃을 잡고 어깨로 올라왔다.
이 녀석, 어쩐지 이번 층에서는 우리를 전혀 도우려 들지 않는단 말이지. 우리는 용사를 돕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는데 굳이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 말하고, 우리가 용사를 기다리는 동안 장난삼아 놀기라도 하는 것처럼 굴고! 도와주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으니 사람 힘 빠지게 하지는 말아야 할 거 아니야?
저 녀석이 저렇게 심드렁하게 구니까 자꾸 불안해진단 말이야. 저 녀석, 어째서 우리가 진실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행위를 ‘놀이’라고 격하시키는 거지? 우리가 얼마나 용사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지, 용사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걱정하고 있는지 저 녀석도 충분히 알고 있을 텐데.
어째서 인형은 우리의 모든 행위가 무의미하다는 식으로 말하는 걸까? 어쩌면 저 녀석은, 우리가 결국 모든 진실에 도달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알아서 이러는 건 아닐까. 문득 떠오른 불길한 생각이 괴물처럼 자라나는 바람에 나는 괜히 인형을 노려보았다.
‘야, 너는 용사가 걱정되지도 않는 거야?’
[물론 나는 용사를 걱정하고 있다. 지금도 나는 용사의 상태를 걱정하고 있다.]
‘아니, 나 말고 너 말이야. 너. 지금 내 어깨에 앉아 있는 솜뭉치한테 내가 묻고 있잖아!’
[인형은 애착을 가질 수 없다.]
‘……뭐라고?’
[인형은 편견을 가질 수 없다. 인형은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인형은 슬퍼할 수 없다. 세계의 안정은 지켜졌다. 인형의 역할은 그걸로 끝이다. 그 이상의 동력을 가질 수 없다.]
이 녀석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평소처럼 자기 의사를 가지고 뜻을 전달한다기보다는, 고장 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소리처럼 무감각한 태도가 어딘가 섬뜩했다. 힘없이 내 볼에 자기 뺨을 비비기 시작하는 인형의 모습에 당황하는 것도 잠시, 내내 고개를 갸웃거리던 하넨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상한걸. 대체 왜 신의 감정이 세상에 퍼져 나가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오염되었지? 세온의 말대로 감정 자체는 중립적이잖아.”
[부패했기 때문이다.]
“부패?”
[감정은 본질적으로 부패하기 쉽다.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보살피지 않으면 저절로 악을 향해 기울어질 수밖에 없다. 세상의 오염과 사념과 광증은 감정의 부패로부터 비롯되었다.]
인형은 화제를 돌리고 싶었는지 재빨리 하넨의 질문에 대답했다. 부패라, 예전에 내가 인간성을 되찾았을 때 인형이 언급했던 그 부패와 비슷한 걸까? 분리된 감정은 악을 향해 향할 가능성이 한없이 높은 상태가 되었고, 그랬기에 악이라고 불릴 만큼 세상에 해로운 존재가 되었다. 뭐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은 모양이다.
[미궁의 최종 층에는, 성기사들조차 수습하지 못했을 정도로 뒤틀린 감정들이 방치된 채 있다. 그것이 부패한 결과가 신의 악함이다.]
“……뒤틀린 감정이라니.”
[신은 인간을 잔인하게 대하고 싶어 한다. 신은 인간을 벌레처럼 짓밟고 싶어 한다. 신은 자신의 힘으로 인간을 벌하고 학대하고 방치한 끝에 인간이 괴로워하는 꼴을 보고 싶어 한다. 인간이 잘못을 빌면서 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오물처럼 눈물과 피를 토해 내는 모습을 감상하고 싶어 한다. 그저 악의뿐이다. 악의 외의 다른 감정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인형은 그렇게 이야기하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코도 입도 없이 그저 까만 점 두 개가 눈처럼 찍혀 있을 뿐인, 표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밋밋한 그 면상이 묘하게 섬뜩하게 느껴졌다. 분명 인형이 흉흉한 소리를 내뱉고 있어서 그렇게 느껴지는 거겠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지금의 인형은 묘하게 무생물처럼 보였다.
[감당하지도 못할 주제에 신을 제 마음대로 주무르려 들고, 결국 신이 악을 제어하지 못하게 되어 세계가 멸망할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아무런 죄책감조차 느끼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신벌을 내리고 싶어 한다. 그것이 지하에 봉인된 부패한 감정의 원천이다.]
마치 아무런 감정조차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스스로는 아무런 판단도 하지 않고, 아무런 욕구도 없다는 듯이.
“자, 잠깐만. 그런 짓을 저지른 건 신관들뿐이잖아. 성기사들은 그걸 막고 싶어 했고. 그런데도 모든 인간들에게 그런 짓을 하는 거야?”
[부패하여 방향성을 상실한 감정이다. 어떤 식으로든 악을 향해 흐르기 쉽다.]
“그, 그야 그렇지만.”
[하지만 괜찮다. 제물이 최종 층으로 향하고 있으니 부패한 감정은 곧 정화될 것이다. 뒤틀린 분노와 증오와 우월감과 학대욕은 깨끗하게 사라져 흔적도 남지 않을 것이다.]
“제물?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 야…….”
팔랑, 종이를 거칠게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인형에게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옮겨 하넨과 케르츠를 바라보았다. 하넨은 어째서인지 일기장의 첫 페이지로 돌아가 다시 내용을 하나하나 읽어 나가고 있었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케르츠의 낯빛에는 명백한 당혹감이 깃들어 있었다.
“두, 둘 다 왜 갑자기 그래요?”
“일기장의 내용이 끝났어. 그런데 우리가 이 일기장에서 찾아낸 은빛 문자는……. 그러니까, 진실을 담은 내용은 고작해야 세 개뿐이야. 게다가 마지막 내용은 좀 충격적이고.”
“네? 뭐, 뭐라고요?!”
“앞으로 세 개의 진실을 더 찾아내야 하는데 더는 진실을 찾아낼 방법이 없다고! 게다가, 세온. 이 부분을 봐. 만약 우리가 늦으면 용사는……!”
나는 하넨이 가리킨 일기장의 한 페이지를 바라보았다. 페이지의 마지막 부분, 하넨이 손가락으로 짚은 부분을 천천히 읽자 그 부분의 글자가 은빛으로 환하게 빛났다. 그러니까 이게 일기장에서 얻을 수 있는 마지막 진실이라는 소리인데, 그 내용은…….
「미궁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도중 묘한 이야기를 들었다. 신관들이 [용사]라고 이름 붙인 아이들을 미궁에 보내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뜬소문이라고 믿고 싶기는 하지만, 소문에 의하면 그 아이들은 미궁의 지하에 제물로 바쳐져 악의 근원을 잠재우는 용도로 쓰여진다고 한다…….」
“자, 잠깐. 뭐. 제물이라니.”
나는 멍한 눈으로 인형을 바라보았다. 인형은 내 시선을 피하지도 않은 채 고개를 갸웃하더니, 담담한 태도로 대답을 꺼냈다.
[그 아이들은 가짜였으며 오히려 신을 분노하게 만들었을 뿐이지만, 다행히도 용사는 진짜다.]
“진짜라니, 설마 진짜 제물……?”
[미궁의 지하에 있는 뒤틀린 감정을 정화하기만 하면 세계는 멸망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 번 정화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신의 자아로부터 유리된 감정은 계속해서 부패할 수밖에 없으므로, 세계가 멸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미궁의 지하에서 끊임없이 그 감정을 정화해야만 한다.]
[…….]
[용사는 그걸 위해 만들어진 생물이다. 용사가 제물이 되어 미궁의 지하에 봉인된다면, 그걸로 세계는 멸망하지 않은 채 안정을 되찾을 것이다.]
대체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듣고 있는 거지.
인형은 그 말을 마치고는 팔 끝으로 얼굴을 가렸다. 마치 외면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 * *
용사는 계단을 한 걸음씩 걸어 내려갔다. 광장을 돌파할 때까지만 해도 제법 서둘러 걷던 용사의 발걸음은 다시 느려져 있었다. 이 계단이 영영 끝나지 않는다면 어떨까, 용사는 잠시 그런 상상을 했지만 당연하게도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몇 십 개의 계단을 내려가자 긴 복도가 나타났고, 그 복도 너머에는 광장이 자리 잡고 있었다. 최종 층이었다.
‘이건…….’
광장 자체는 그렇게까지 넓지 않았다. 끝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까마득하게 넓던 위층의 광장과는 달리, 이번 층은 평범한 광장보다도 더 작지 않나 싶을 정도로 보잘것없는 크기였다. 그러나 용사는 광장 안에 한 걸음 들어서자마자 무언가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감정이었다. 썩은 시체 더미 앞에 섰을 때 폐를 가득 채우는 악취처럼, 또는 작열하는 태양 아래 나왔을 때 전신을 짓누르는 열기처럼, 뚜렷한 형체는 존재하지 않지만 사람을 압도하는 감정이 광장 내부에 가득 차 있었다. 그저 발을 들인 것만으로도 사람의 목을 조르고 심장을 후벼 파는, 순수하리만치 완전하게 부패한 악의.
광장 내부의 색이 왜곡되어 사방이 무지개처럼 얼룩덜룩하게 일그러졌다. 지금 당장에라도 검을 뽑아 배를 쑤시고 목을 끊어 내야 할 것만 같은 피학적인 강박증이 전신을 지배했다. 모두가 네 탓이라며 누군가에게 혼이 나고, 살 가치 따위는 없으며 심지어 죽을 가치까지 없으니 영원히 여기서 괴로워하라며 조롱당했다.
맨정신으론 도저히 견디기 힘들었다. 용사 같은 신성 생물이 아니었다면 순식간에 그 감정에 지배당해 미쳐 버리고 말았을 터였다. 역시 동료들을 데리고 오지 않은 건 좋은 선택이었다.
용사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자신의 처지에 대해 상상하며 겁을 내던 시절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두려움이 그를 덮쳤다. 과연 자신이 이 감정을 정화할 수 있기나 할까. 잘못하다가는 이대로 감정에 먹혀 버리는 게 아닐까. 단지 광장에 들어선 것만으로도 밀려오는 두려움과 공포에 그는 덜덜 떨며 입을 틀어막았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각오를 다지고 들어가자. 용사는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며 광장 안을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그 악의는 광장 안에 들어가야만 효과가 발휘하는지, 복도에 선 채 들여다본 광장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처럼 보였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아무것도 없지는 않았다.
광장 한가운데에 무언가가 있었다. 명백히 이 광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무언가가.
* * *
무거운 침묵이 사방을 짓눌렀다.
미련이라도 가진 듯 일기장을 뒤적거리던 하넨의 손짓도 멈추었고,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케르츠는 그저 눈을 부릅뜬 채 인형을 노려볼 뿐이었다. 인형은 양팔로 눈을 가린 채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고,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요란한 소리만이 귀를 먹먹하게 만들었다.
“……멈춰야지요.”
멍하니 중얼거렸다. 멈춰야 해, 그 한 마디만이 머릿속을 꽉 채우는 바람에 그 밖의 생각이라고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인형은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미동조차 하지 않았지만, 하넨과 케르츠는 혼이 빠진 얼굴로 내 쪽을 돌아보았다.
“뭐라고요?”
“일단 용사를 멈춰 세워야지요. 그런 짓을 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어요.”
“어떻게 말입니까?”
“……그건.”
“세온, 일기장에는 더 이상의 진실이 적혀 있지 않아. 어쩌면 일기장을 통해 세 개의 진실을 더 알아낸 게 기적이었을지도 몰라. 이 상태에서 아래층에 내려갈 수 있을까, 우리가?”
하넨의 말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용사가 알려 준 진실 하나와 일기장을 통해 얻은 진실 세 가지, 총 네 가지의 진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것만으로는 광장을 무사히 돌파할 자신이 없었다.
주변이 제법 밝아진 건 사실이지만 눈에 띄는 곳에 산재해 있다던 함정은 전혀 보이지를 않았고,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소리 사이사이에 흐느낌과 액체가 질척거리는 듯한 소리가 섞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거리 감각이 모호해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이대로 함정을 돌파한다는 건 자살 행위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잖아. 용사가 끔찍한 감정을 끌어안고 홀로 봉인되도록 그저 내버려 두자고? 용사는 이 깊은 미궁의 지하에서 쓸쓸하게 망가져 버리면 그걸로 끝이고, 우리는 용사의 희생으로 이루어 낸 세상에서 우리끼리 행복하면 되는 거야? 그게 이 원정의 결말이라고?
말도 안 된다. 그런 결말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굳이 일기장이 아니더라도 진실을 찾아낼 방법이 어딘가에는 존재하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머리를 치열하게 굴리던 도중 아직도 눈앞에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인형에게 시선이 갔다.
“잠깐만. 너는 다 알고 있지?”
[…….]
“진실 말이야. 생각해 보니 너는 전부 알고 있잖아. 네 눈에는 이 광장이 어떤 형태인지 다 보일 테고, 우리가 밝히지 못한 나머지 세 개의 진실이 무엇인지도 파악하고 있을 거야. 내 말이 틀려?”
[인형의 역할은 끝났다. 세상은 안정을 되찾을 것이다. 일기장의 해석이 끝났으니 놀이도 끝이다.]
“놀이가 아니야,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겠어! 용사를 찾으러 가는 거라고! 그 녀석이 혼자 쓸쓸하게 죽어 버리지 않도록!”
[무엇을 위해서?]
흠칫, 저도 모르게 몸이 굳었다. 일순간 느껴진 위화감 때문이었다. 원래 인형이 의문문을 구사할 줄 아는 녀석이었나? 내가 기억하던 인형은 매사에 남 이야기를 하듯 딴청을 부리던 녀석이었는데. 항상 ‘나’를 주어로 쓰며, 인형 스스로의 의견은 어지간해선 내지를 않고, 늘 모든 것을 안다는 듯 으스대면서도 정작 물어보지 않으면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던 녀석인데.
그런 녀석이 질문을 한다고? 나에게?
[무엇을 위해서?]
“……뭘 위해서냐니, 당연히 용사를.”
[내가 이 세계에 소환된 목적은 악을 정화하고 세계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다. 용사를 돌보기 위해서가 아니다. 결과적으로 그 역할도 수행하기는 했지만.]
“…….”
[용사의 희생으로 세계는 안정을 되찾을 수 있다. 지금 용사를 멈춰 세운다면 당장 그의 목숨을 건질 수는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세계의 멸망을 막을 수는 없다. 지금의 신관들을 벌하는 건 세계의 멸망을 막은 이후에 해야 할 일이다.]
“…….”
[만약 그럼에도 용사를 구하고 싶다면 그에 합당한 이유를 제시해야 한다.]
어이가 없어져서 인형을 붙잡으려 했지만 인형은 자연스럽게 몇 발짝 물러났다.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양팔로 얼굴을 가린 채였다. 무관심한 듯, 외면하는 듯, 한편으로는 슬퍼하는 듯한 그 모습에 나는 허망하게 손을 떨구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하넨과 케르츠에게 시선을 돌렸지만, 그들 또한 괴로운 표정으로 인형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케르츠는 당장에라도 인형을 향해 주먹을 휘두를 듯 손을 덜덜 떨고 있었지만 그조차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 모든 게 지금의 신관들이 벌인 짓이고, 결국 아무런 잘못도 없는 용사만이 희생을 강요받는 구조지만……. 세계의 멸망이라는 거대한 명분 앞에서는 정말이지 어떤 말을 덧붙일 수도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대로 용사를 내버려 둘 수만은 없었다. 인형으로부터 진실을 전해 듣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인형을 납득시킬 만한 이유가 필요했다. 대체 어떤 이유를 대야 할지조차 알 수 없지만, 아무것도 말하지 않은 채 이대로 포기할 수만은 없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무엇이든 말하고 싶다. 말이 안 되어도 괜찮으니까, 세계 멸망이라는 압도적인 명분 앞에서 지나치게 초라해도 어쩔 수 없으니까, 그러니.
“그 녀석에게, 이름을 지어 주고 싶으니까!”
그 한 마디를 겨우 꺼낸 순간, 인형의 어깨가 흠칫 떨리는 것을 눈치챘다.
“그 녀석이 웃는 모습을 보고 싶으니까. 그 녀석이 자라는 모습도 보고 싶고, 자기가 정화한 세상을 여행하면서 신기해하는 모습도 보고 싶고, 맛있는 걸 먹으며 좋아하는 모습도 보고 싶고 즐거운 이야기를 들으며 좋아하는 모습도 보고 싶으니까!”
[……!]
“그 녀석도 미궁을 헤매면서 분명 혼란스럽고 힘들고 외로웠을 거라고! 그런 주제에 나를 달래고 내 이름을 물어봐 줬으니까, 유일하게 나를 달래 주고 걱정해 주었으니까, 그래서 그 녀석이 나한테 애착이 생긴 것처럼 나도 그 녀석에게 마음이 쓰이니까, 그러니까 구하고 싶어! 왜, 그거면 안 돼? 그런 하잘것없는 이유로는 안 되는 거야? 그러면 뭐 얼마나 대단한 이유가 있어야 해? 세계의 존망이라든지, 모두의 평화라든지, 뭐 그런 이유여만 하는 거야? 이 이상 무슨 이유가 필요한데, 응?!”
[…….]
“다른 방법은 없어? 용사도 살릴 수 있고, 세계의 멸망 또한 막을 방법은 없는 거야? 그런 이상적인 방법 따윈 없다고 대답할 작정이라면 그만둬. 정말로 방법이 없다면 그렇게 어중간하게 얼굴을 가리고 있는 건데? 왜 내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데? 대답해 봐!”
[…….]
그저 생각나는 대로 쏘아붙였다. 케르츠와 하넨이 멍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든, 머릿속이 엉켜서 퓨즈가 나갈 듯한 기분이 들든 아무래도 좋았다. 앞뒤가 조금 안 맞으면 어때? 그래도 나는 용사를 구하고 싶어. 그 녀석에게 해 주고 싶은 것도, 그 녀석이 내게 해 줬으면 하는 것도 많단 말이야.
이 기분을 조금 더 제대로 표현할 만한 단어가 세상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생각이 안 나니까 그만둘 거야. 나중에 용사 녀석을 만나면 그때 자세히 생각해 보는 걸로 할래. 지금은 우선, 용사 녀석을 어떻게든 쫓아가서 붙잡는 게 중요하니까……!
그때였다. 가만히 내 말을 듣고만 있던 인형이, 무언가 할 말이 생각났다는 듯 내게로 한 발짝 다가왔다.
[그렇다면, 나는 인형과 놀이를 하는 것도 괜찮겠다.]
“……뭐?”
[스무고개 놀이. 내가 살던 나라에는 분명 그런 놀이가 있었을 것이다. 나와 케르츠와 하넨은 ‘예’와 ‘아니오’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 스무 개를 던지고 인형은 거기에 대답한다. 인형의 대답을 통해 진실을 유추한다면, 용사가 부패를 정화하고 감정과 함께 봉인되기 전에 최종 층에 도달할 수 있을 터.]
“뭐야, 그게……? 알려 줄 거면 알려 주고 말 거면 말지, 왜 그런 애매한 방식을 쓰는 거야?”
[왜냐 하면 인형은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다니?”
[무언가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사라지자, 어떤 것이 중요하고 어떤 것이 중요하지 않은지 판단할 능력이 사라졌다.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사라지자, 어떤 것이 위험하고 어떤 것이 위험하지 않은지 판단할 능력이 사라졌다. 그리하여 신은 스스로 판단할 힘을 잃은 채 단 하나의 의무만을 위해 움직인다. 세상의 안정을 추구하는, 멸망을 막는 의무. 그 의무 이외의 것은 인간에게 맡겨야만 한다. 결국 행동하는 건 인간의 의지여야만 한다.]
갑자기 속사포처럼 설명을 늘어놓은 인형이 천천히 양팔을 내렸다. 한동안 가려져 있던 인형의 얼굴이 이상한 괴물처럼 변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지만, 막상 드러난 얼굴은 아까 전과 아무런 차이도 없는 밋밋한 면상이었다. 코도 입도 없이 까맣게 찍힌 눈 두 개뿐. 감정을 읽어낼 방법이라곤 아무것도 없고, 본인이 감정을 표현하고 싶다 할지라도 아무것도 표현할 수 없는, 마치 가면 같은 얼굴.
하지만 기분 탓일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무생물처럼 삭막하기 이를 데 없던 인형은 마치 생명을 얻기라도 한 듯 묘한 활기를 띠고 있었다. 인형은 그 까맣고 동그란 눈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놀이가 시작되었다. 이제부터 인형은 스무 개의 질문에 답할 것이다.]
마치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듯한 모습이었다.
* * *
용사는 광장 한가운데에 둥둥 떠 있는 상자를 바라보았다.
아직 어려서 충분한 지식이 없는 용사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사실 그 상자는 시체를 담는 관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관 가장자리에는 신의 언어로 된 문장이 장식처럼 새겨져 있고, 뚜껑은 열린 채 내부가 그대로 드러난 모습이었다. 내부는 붉은 벨벳으로 꼼꼼하게 마감되어 있었다.
관 자체는 화려했지만 정작 그 안은 텅 빈 채였다. 처음부터 아무것도 넣지 않아 비었을 수도 있고, 처음에는 무언가가 들어 있었는데 나중에 빠져나가 비어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용사는 후자일 것 같다는 직감을 받았다. 관 안쪽을 장식하고 있는 벨벳에 묘한 자국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작은 인형 하나가 그 안에 오래도록 누워 있다가 빠져나간 듯한 자국처럼 보였다.
그 자국을 멍하니 바라보던 용사는 갑자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곱 가지 진실을 직면하고도 여태 알지 못했던, 아주 중요한 무언가의 실마리를 잡은 듯한 모습이었다.
* * *
기회가 주어졌다. 예, 아니오, 둘 중 하나로만 대답할 수 있는 스무 개의 질문을 이용해 진실 세 가지를 알아내야만 한다. 단순 계산으로 따지자면 진실 하나를 밝히기 위해 여섯 번 정도의 질문이 허용된 셈이니, 될 수 있는 한 신중하게 질문을 생각해 내야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신속함이 필요했다. 이대로 미적거리며 시간을 끌다간 결국 용사가 최종 층에 봉인되어 버릴 테고, 그러면 우리는 용사를 구하러 가고 싶어도 구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최고의 질문을 뽑아내기 위해 미적거릴 만한 시간적 여유 따위는 없었다.
“어떤 질문을 하지요? 우선 ‘진실’의 종류가 어떤 것인지부터 물어봐야 할까요?”
“그래야 하겠죠. 다른 진실들과 마찬가지로 과거와 관련된 것인지, 성기사와 관련된 것인지, 신전과 관련된 것인지, 아니면 신과 관련된 것인지…….”
“성기사와 관련되었을 가능성은 솔직히 적다고 생각해. 내가 볼 때 그쪽과 관련된 진실은 이미 일기장에서 다 밝혀졌어. 우리는 일기장에서 밝히지 못한 무언가를 찾아내야 해.”
“그렇다면 신전 아니면 신이겠군요.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실마리가 잡히지 않습니다. 애초에 예 또는 아니오가 나오는 질문으로 물어봐야 하는 상황이니, 사실상 저희가 결론을 내리고 그 결론을 인형에게 확인받는 식이어야 하는데…….”
우리 세 사람은 사이좋게 머리를 맞댄 채 토론했다. 질문의 형태가 형태다 보니 쉽사리 질문을 던지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애초에 스무고개는 간단한 사물이나 동물을 맞추는 놀이지 세 개씩이나 되는 복잡한 진실을 맞추라고 있는 놀이가 아니었다. 만약 운이 나쁘다면 진실을 제대로 맞히지도 못한 채 질문 기회를 다 써 버리고 말지도 모른다.
“아무튼, 혹시 모르니까 기본적인 확인이나 해 보자. 첫 번째 질문이야. 남은 진실 중에 성기사와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아니다.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렇대. 일단 이런 건 소거법으로 갈 수밖에 없어. 가설이 떠오를 때마다 하나씩 확인하는 거야.”
하넨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인형을 노려보았다. 하긴, 소거법이야말로 스무고개 놀이의 정공법이다. 시간이 없으니 그런 방법이라도 쓸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부지런히 인형에게 질문을 던졌다.
두 번째 질문. 남은 진실 중에 지금의 신전과 관련된 내용이 있는가. 답은 [그렇다]였다. 세 번째 질문. 남은 진실 중에 용사와 관련된 내용이 있는가. 답은 [아니다]였다. 네 번째 질문. 남은 진실 중 봉인 당시의 상황과 관련된 내용이 있는가. 답은 [그렇다]였다.
그러니까, 봉인 당시의 상황과 관련된 진실을 하나 알아내야 하는구나. 두 번째 질문과 네 번째 질문이 겹치는 듯하다는 점이 조금 신경 쓰였지만, 아무튼 범위를 좁혔다는 건 좋은 일이었다. 봉인 당시의 상황이라……. 대체 어떤 상황이었던 걸까.
우리의 질문에 답하는 동안 인형은 춤을 추기 시작했다. 빙글 돌고, 폴짝 뛰고, 때로는 바닥에 엎어졌다가 씩씩하게 다시 일어나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울 법도 한데 묘하게 우습지가 않았다. 어째서일까? 마치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며 기우제 춤을 추는 듯한 간절함이, 인형의 춤에서 희미하게 읽히는 탓일까?
인형의 움직임을 무심코 눈으로 쫓던 케르츠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꽤 조심스러운 어조였다.
“하나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인형에게 질문해도 괜찮을까요.”
“뭔데, 케르츠? 일단 뭐든 해 봐. 시간이 별로 없어.”
“봉인 당시의 상황과 관련이 있다는 말을 듣고 나니 생각난 건데……. 분명 신은 저희의 인지를 뛰어넘을 정도로 전능한 존재입니다. 비록 지금은 힘을 잃었다 하나, 힘을 잃기 이전에는 분명 그러한 존재였을 겁니다. 그런데…….”
[…….]
“신관들이 어떻게 감히 신의 감정을 봉인했는지가 궁금합니다. 그들이 신에게 강제력을 행사했습니까? 감정을 억지로 떼어 내 봉인하기 위해?”
[아니다.]
“……아니란 말씀입니까?”
[신관의 힘은 신으로부터 비롯된다. 신의 힘을 바탕으로 신에게 강제력을 행사한다는 건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가, 따지고 보면 그것도 꽤 중요한 문제기는 하다. 대체 어떻게 신의 힘을 이용하는 자들이 그 힘으로 신 자체를 봉인했는지. 발상이 기괴한 건 둘째 치고, 성공 가능성이 한없이 낮은 일인데도 당당히 그런 짓을 벌여서 성공까지 했다는 사실 자체가 의아했다.
대체 어떻게 성공한 걸까. 강제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면 사기라도 친 게 아닐까 싶었지만, 신 정도의 전능한 존재라면 그런 사기에 넘어갈 리가 없다. 그렇다면……. 잠시 생각하던 도중, 나는 케르츠가 어떤 가설을 세웠는지 희미하게나마 눈치챘다.
케르츠는 인형의 대답에 크게 동요한 듯하더니, 긴 숨을 들이쉬고는 다시 질문했다. 꽤나 절박하고 괴로운 표정이었다.
“그렇다면, 설마 신은……. 신관들이 감히 신의 감정을 봉인하도록 내버려 두었단 말입니까? 신관들은 신의 묵인하에 그런 끔찍한 짓을 벌였습니까?”
[그렇다.]
치지직, 시야에 엄청난 노이즈가 끓어오르더니 안개가 걷히는 듯 무언가가 보였다. 톱니바퀴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는 허공처럼 보이던 모든 공간에 톱니바퀴가 가득 들어차, 묵직한 기계음과 함께 돌아가고 있는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현기증이 났다.
그러나 ‘길’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분명 톱니바퀴 사이에는 틈이 있다는 걸 알겠는데, 그 틈을 이용해 지나가면 안전하게 출구까지 갈 수 있다는 걸 확인했는데, 구체적으로 그 틈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파악하려고 하면 눈앞이 흐려지고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눈은 시각 정보를 받아들이는데 머리가 그 정보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다.
역시 아직은 부족하다. 지금의 인지 능력으로도 안전하게 함정을 돌파하는 건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건 둘째치더라도 대체 이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어째서? 대체 왜 묵인한 거야, 그런 말도 안 되는 짓을! 사실상 자기를 죽이라고 목을 내밀어 준 거랑 뭐가 달라!”
“차라리 신전의 신관들이 어떤 사악한 수를 써서 신을 속였다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대체 어째서입니까? 어째서 자신의 일부를 떼어 내는 계획에 동의했지요? 이해가,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케르츠와 하넨이 동요한 것만큼이나 나 또한 동요하고 있었다. 지금이야 신의 감정이 분리되어 신이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 없다지만, 그때 당시의 신은 분명 멀쩡한 상태에서 그 판단을 내렸을 거다.
그런데, 대체 어째서? 분명 신의 감정은 자기들을 멋대로 이용한 인간들에게 분노하고 있다고 말했잖아. 감당조차 하지 못할 감정을 다루려 든 이들을 경멸하고, 그들에게 신벌을 내리고 싶어 했던 것 같은데, 대체 무슨 이유로 그런 짓을 묵인한 거지?
“남은 진실 중에, 왜 신이 동의했는지와 관련된 내용이 있습니까?”
[그렇다.]
“혹시 협박을 받았기 때문이야?”
[아니다. 협박을 받아서 이루어진 동의는 동의라고 할 수 없다.]
“혹시 신관들과 거래를 했습니까? 신의 감정을 봉인하는 대신…….”
[아니다. 애초에 신관들에게는 그만큼의 대가를 지불할 능력이 없다.]
“혹시 동의하지 않으면 신에게 불리해지는 상황인 건?”
“저기, 하넨 씨! 케르츠 씨! 진정하세요, 좀!”
[아니다. 협박과 같은 맥락이다.]
하넨과 케르츠가 허겁지겁 질문을 퍼부었고, 그 질문을 멍하니 듣고 있던 나는 순간 불길함을 깨닫고 두 사람을 말렸다. 아니, 당황한 건 이해하겠지만 이런 식으로 질문을 소비해 버리면 안 된다고! 차라리 인형이 대답해 주지 않기를 바랐지만 인형은 두 사람의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해 주었고, 모든 대답이 끝나고 나서야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불필요하게 유사한 질문을 반복하는 건 현명한 행동이 못 된다. 벌써 질문 열 개가 지나갔다.]
인형의 그 냉정한 어조에 우리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방금 그게 열 번째 질문이었다니. 이것저것 질문하는 사이에 벌써 질문의 절반을 써 버린 셈이었다. 물론 진실 하나를 알아냈고 두 번째 진실의 실마리도 어느 정도 얻어 냈지만 문제는 이 다음이었다.
대체 어째서 신이 신관들의 행동을 내버려 두었는가. 이렇다 할 협박도, 사기도, 거래 요소조차 없었는데도, 신이 그들의 행동을 말리지 않아 성기사들이 중간에 개입하는 사태까지 벌어진 걸까.
정말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도저히 떠오르는 바가 없어, 우리는 창백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물론 인형에게 질문을 해서 추론해 낼 수도 있겠지만, 아까의 마구잡이식 질문 때문에 이미 질문을 많이 소모해 버린 상황이었다.
지금 추론을 위해 이것저것 질문을 던졌다간 마지막 진실을 알아낼 때 곤란해진다. 그러니, 어떻게든 우리들끼리 추론한 후 그 결론을 확인받는 방향으로 가야 하는데…….
“젠장! 신 본인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이걸 어떻게 추론해 내라는 거야, 진짜?!”
하넨은 분통을 터뜨리며 고개를 떨구었다. 확실히 신 본인을 눈앞에 데려와 멱살을 붙잡고 물어볼 수라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그러고 보니, 감정을 거세당한 신은 대체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듣자 하니 지금 신의 감정은 신의 자아와 유리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 말에 따르면 신의 자아는 감정과 유리되어서 이 세상 어디에 존재한다는 거잖아.
‘어, 잠깐만.’
그 시점에서 나는 무언가 묘한 점을 떠올렸다. 스무고개가 시작되기 전, 인형이 속사포처럼 쏟아 냈던 의미 불명의 이야기.
인형은 스스로 판단하지 못한다고 했다. 신이 무언가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잃었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마음을 잃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인형이 신의 사자라서 그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조금 다른 가설을 떠올렸다.
내가 그 가설을 입 밖으로 내기 직전,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던 하넨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설마, 신 또한 신관들의 의견에 마음이 움직인 거야?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삶이 의외로 편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자, 잠깐만요.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너도 종종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잖아. 언데드인 세온이 부럽다고.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못하니까 꽤나 편해 보일 것 같다고. 어쩌면 신 또한 그런 생각을 했을지도 몰라.”
“……!”
“질문 하나 하자. 신이 가진 감정에는 양면성이 있어서,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도무지 떼어 낼 수 없다고 했지? 그렇다면 신이 가진 부정적인 면 때문에 세상에 큰 피해가 온 적도 있어?”
[그렇다. 진실과는 큰 상관이 없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설명하자면, 실제로 성기사의 역할은 신이 가진 추악하고 충동적이고 폭력적이고 겁 많고 이기적인 부분으로부터 세상을 보호하는 데에 있었다. 반면 신관의 역할은 신의 아름답고 좋고 본받을 만한 부분을 세상에 퍼뜨리는 데에 있었다.]
인형의 담담한 대답에 하넨과 케르츠가 미간을 찌푸렸다. 아니, 어쩌면 인형의 대답 때문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결국 신이 신관들의 구슬림에 넘어갔단 말입니까?”
“…….”
“신 스스로도 자신의 감정이 가진 부정적인 측면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 부정적인 측면이 세상을 망가뜨리는 걸 원하지 않아서, 그래서 신관들의 그 제안에 동의한 거였습니까? 그런데 성기사들이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그걸 막으려 했던 거고요?”
[엄밀히 말하자면, 신은 스스로가 가진 악함에 대한 가능성을 두려워했을 뿐이다.]
다시 한 번 노이즈가 끼었다. 뿌옇게 보이던 톱니바퀴에 새겨진 정체불명의 신어가 또렷하게 시야에 들어오고, 안전하게 지나갈 수 있는 톱니바퀴의 틈새 또한 인식되었다. ‘길’이 드러난 셈이었다.
이걸로 함정을 지나갈 수는 있다. 문제는 출구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수 없다는 점이지만, 어차피 출구는 광장 반대편에 있을 테니 적당히 어림짐작으로 확인하다 보면 의외로 금방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일곱 번째 진실이야 용사 본인을 만나서 들으면 될 테고, 정 안 되면 함정을 돌파하면서 스무고개 놀이를 재개하면 될 테니, 이쯤에서 슬슬 출발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어쩐지 지금 이대로 출발해서는 안 될 것만 같았다. 춤추기를 멈추고 다시 얼굴을 가리기 시작한 인형을 보아서라도 그러면 안 되는 데다가……. 무엇보다도, 나는 인형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하나 있었다. 아주 중요한 질문.
[악함에 대한 가능성을 없애면 악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 성장하지 않는다면 노화하지도 않는다. 변화하지 않는다면 사라지지도 않는다.]
“…….”
[인간이 진심으로 그걸 바란다면 어쩔 수 없다고 신은 생각했다. 어쩌면 그것이 인간을 위한 더 나은 길일지도 모른다고 신은 판단했다. 비록 그 판단이, 결과적으로는 전혀 옳지 않았다 할지라도.]
하넨과 케르츠는 허탈한 얼굴로 인형의 대답을 듣고 있었다. 인형은 얼굴을 가린 채 고개를 푹 숙여, 마치 슬퍼하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다가 녀석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녀석은 아까 그랬던 것처럼 한 걸음 물러났지만, 이번에 나는 녀석에게 두 걸음 다가갔다.
이 녀석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진실이니 뭐니, 그런 문제를 떠나서 확인하고 싶은 점이 하나 있었으므로.
“있잖아, 아직도 너는 그렇게 생각해? 그 생각에 변함이 없어?”
[……?]
“잠깐만요, 너라니……. 설마 인형에게 묻고 있는 겁니까? 신에게 묻는 게 아니라?”
“그런 구분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네요.”
내가 케르츠에게 담담히 대답하자, 케르츠와 하넨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인형의 앞까지 다가가 주저앉았다. 인형은 더 이상 물러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다소 매몰찬 태도로 몸을 돌렸다.
[방금 것은 질문으로 치지 않겠다. 지금 인형의 생각을 묻는 데에는 의미가 없다. 왜냐하면, 어차피 인형은 나에게 기생해서 나의 사고방식을 기반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대답할 거라고 생각했어. 저기, 하넨 씨. 제가 질문 하나만 해도 괜찮을까요?”
“무, 무슨 질문을 하려고 그러는데? 진실에 대한 질문이라면 굳이 안 물어봐도 괜찮아.”
“진실에 대한 질문은 아닌데, 그래도 확인해 둬야 할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사실 처음부터 좀 궁금했던 질문이기는 한데.”
인형은 내게서 등을 돌린 채 오도카니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이 녀석이라면 분명 내가 무슨 질문을 할지 알고 있겠지. 내 생각을 다 파악하고 있으니까. 나의 정신에 연결되어 있고, 기생되어 있으니까. 그런데 이 시점에서 궁금한 게 있는데 말이지.
대체 이 녀석은 왜 나에게 기생해 있을까?
“너, 예전에 그런 말을 한 적 있지? 너는 나에게 기생해 있기 때문에 나에 대해서라면 뭐든 알 수 있다고.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상하단 말이지. 객관적으로 보면 내가 너에게 기생해 있지, 네가 나에게 기생해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말이야.”
[…….]
“너는 나에게 기생해서 무언가를 빌려 쓰고 있어. 하지만 나는 너에게 이득이 될 만한 게 아무것도 없는 숙주란 말이지. 케르츠 씨처럼 힘이 세길 해, 하넨 씨처럼 마법을 부리길 해? 심지어 나는 살아 있지도 않아.”
[…….]
“물론 내가 용사 일행에게 물건을 팔기는 했지만, 그 정도는 너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잖아? 아무리 생각해 봐도 굳이 네가 나에게 기생해야 할 이유가 없어. 딱 하나를 제외하면 말이지.”
하넨과 케르츠는 무슨 질문인지 전혀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야 당연했다. 이건 처음부터 나와 인형 사이의 문제였으니까.
생각해 보면 이 문제를 처음에 제대로 짚고 넘어갔어야 했는데, 나는 인형이 단순한 신의 사자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을 뿐 그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의문을 지니지를 않았다. 하지만…….
“설령 이 질문이, 용사가 알게 된 진실과 아무 상관없는 내용이라도 좋아. 그래도 묻고 싶어.”
[…….]
“너는 혼자서는 제대로 된 판단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지?”
[…….]
“너는 감정과 욕구를 분리당한 신의 자아라서, 혼자서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아무런 판단조차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어. 판단력을 되찾기 위해서는 타인의 감정과 욕구에 의지할 수밖에 없고, 그래서 너는 내게 기생해 있는 거야. 내 말이 맞아?”
[……그렇다.]
바보 같을 정도로 시원스러운 대답이었다.
왜 진작 물어보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