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무너지는 자와 나아가는 자
코와 입으로 끊임없이 물이 쏟아져 들어왔다. 시야가 밝아졌다 어두워졌다를 반복하며 이리저리 흔들렸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으나, 그것만으로는 지금 내가 어느 정도의 폭력에 휩쓸리고 있는지 도저히 측정할 수가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방금 그 말은 역시 케르츠의 가장 약한 곳을 건드렸다. 하긴 당연하지, 나야 부아가 치밀어서 꺼내 본 말이라지만 저 사람에게 있어서는 상상하기만 해도 엄청난 타격이 돌아올 이야기였을 테니.
“아냐, 그, 말도. 있을 수, 있을 수 없으니까. 상상하고, 난, 상상하고 싶지도.”
케르츠가 뭐라고 말하는 것 같기는 한데 내용을 알아듣기가 너무 힘들었다. 폭행을 당하는 와중이라 정신이 없어서 그런 건 아니고, 그저 케르츠가 너무 작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마치 광인처럼, 아니, 원래도 다소 불안정하긴 했지만 지금은 아예 스스로를 컨트롤하지조차 못하는 것처럼 제 목소리를 억눌러 중얼거리고 있었다.
차라리 큰 소리를 내고 고함을 질렀더라면 훨씬 나았을지도 모른다. 언행이 일치하는 모습은 보는 사람에게 나름의 안정감을 선사하기도 하니까. 오히려 지금처럼, 약간 쉰 목소리로 들리지도 않는 헛소리를 중얼거리는 모습이 훨씬 더 불길하고…….
훨씬 더, 위험해 보였다.
“돌아가고 싶지. 벗어날, 벗어날 수가 없어. 어차피 나는. 난…….”
가까스로 시야가 밝아진 순간 눈에 들어온 광경은, 이제 얼굴조차 확인하기 힘들어졌을 정도로 케르츠의 주변을 짙게 감싼 안개였다. 저 새까만 안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떠올린 순간 소름이 쫙 돋는 기분이 들었다. 이거 좀 위험한데? 진짜 어떻게 해야 하는 거 아냐?
“케르, 컥, 흡, 케르츠 씨.”
“의미, 의미는 없을지도, 모르지만. 결국 죄를 벗어나지 못하고. 이성이 있다 해도 좋은 길을, 나을 길을 선택하는 법은 없고. 그래도, 그래도.”
어떻게든 설득하고 싶었지만 이미 너무 늦어 있었다. 저 사람이 말하는 맥락을 조금도 모르겠다. 마치 다른 언어로 지껄이는 이야기를 듣는 양 모든 것이 불명확해서, 그저 이해하려 시도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아니, 어쩌면 케르츠는 언제부터인가 아예 다른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광장 안을 메우고 있는 붉은 안개와는 농도와 분위기부터 다른 새까만 안개, 마치 고장 난 텔레비전의 노이즈처럼 거슬리게 귓가를 울리는 괴상한 소리, 뜻을 못 알아듣는 건 아니지만 평서문보다는 기도문을 훨씬 많이 닮은 케르츠의 언어.
용사와 오래 떨어져 있었던 것도 아닌데. 용사에게 꾸준히 정화를 받았을 테니 체내에 부정적인 기운이 쌓인 것도 아닐 텐데. 그저 정신적으로 타격을 입은 것만으로도 저렇게까지 상태가 안 좋아지다니.
어쩌면 저 사람의 마음 깊은 곳에는, 사념을 닮은 불안정한 광증이 언제나 넘실거리고 있었던 건 아닐까. 용사에게 정화를 받아 광증이 넘치지 않도록 관리하고는 있지만, 광증을 담고 있는 용기에 지나친 충격이 가해지면 그런 관리 따위가 무용해질 정도로 순식간에 모든 것들이 터져 나오는…….
방금 그 말은 괜히 했던 걸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아주 잠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야 이계에서 온 외부인이니 모르지만, 저 사람에게 있어서 원정의 실패는 세계의 멸망이다. 단지 물리적인 의미의 멸망이 아니라, 저 사람이 인식하는 세계의 멸망 말이다.
용사의 정화 능력이 없으면, 세상의 악함을 모두 정화하지 않으면, 영원히 미쳐서 이성을 잃고 지상을 떠돌아야만 하는 사람. 저 사람에게 있어서, 자신이 믿던 희망의 소멸은 도무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충격일 테니…….
‘하지만.’
까드득, 신체의 어느 단단한 부위가 우그러져 가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반발심이 치솟았다. 정말로 괜히 한 말인가? 차라리 입을 다물고 있는 게 나았을까? 모두가 입을 다물고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면 케르츠 저 사람은 조금도 바뀌지 않을 텐데?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미궁의 중심이다. 용사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용사가 숨기고 있는 진실이 얼마나 강력한지는 나도 모르겠지만, 용사가 케르츠에게 그런 식으로 질문을 했을 정도면 분명 진실은 가혹할 거다. 그게 진실일 리 없다고, 지금껏 알고 있던 정보만이 사실이고 그 외에는 전부 오염이나 변질의 결과라고 고집을 부렸다간, 저 사람이 정말로 무너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도 바뀌어야 한다. 저대로 내버려 두어선 안 된다. 감정도, 도덕도, 욕구도 모르던 용사가 어느 순간부터인가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 것처럼, 마찬가지로 저이도…….
“뭐 하는 거야, 이 미친 새끼야!”
그 순간이었다. 케르츠의 몸이 쇼크를 받기라도 한 듯 크게 흔들리더니, 새까맣던 시야가 한순간에 밝아지고 하넨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저만치에서 들려왔다. 겨우 고개를 돌리니 저 멀리에서 지팡이를 쳐든 하넨의 모습이 보였다.
하넨의 지팡이 끝에서는 황색의 연기가 흘러나와 케르츠의 팔다리를 감싸고 있었다. 구속력이 강해 보이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마비독 같은 성분으로 되어 있는지 케르츠가 도무지 힘을 쓰지 못했다. 케르츠는 실에 연결된 꼭두각시처럼 반쯤 주저앉은 채 휘청거렸다.
케르츠에게서 자유로워진 건 좋은데, 몸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그대로 물에 머리를 박은 채 엎어지고 말았다. 팔다리를 허우적거리며 어떻게든 일어나 보려고 시도하자 누군가의 손이 곧바로 내 어깨를 붙잡아 일으켜 세웠다. 용사의 손이었다.
나는 어느새 곁에 다가온 용사의 가슴에 몸을 기댄 채 물을 토해 냈다. 어쩐지 가슴 부위에서도 물이 흘러나온다 싶더니 물이 아니라 피였다. 입에서 흘러나오는 물뿐만이 아니라 가슴팍에서 흘러나오는 액체의 양도 만만찮았다. 폭행의 과정에서 가슴에 구멍이라도 뚫린 게 아닌가 싶었지만 정확한 부상의 원인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모르기는 몰라도…….
“놔요, 이거. 무슨 말을 하려나 내버려 뒀더니 저런 소리를.”
“하지 마요, 여기서 세온에게 더 손댔다간 가만 안 둘 거예요!”
지금 내 몸 상태가 확실히 엉망이기는 한가 보다. 순하기 그지없던 용사가 저렇게까지 심하게 화를 내는 걸 보면.
“하지만 말을 하니까. 해선 안 될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그러니 조용히 시켜야. 난, 난 듣고 싶지가. 아무것도 모르면서, 왜.”
“세온이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괴롭히지 말라고요! 설령 세온이 잘못된 말을 했더라도, 지금 케르츠는 잘못을 따지는 게 아니라 그냥 세온한테 화풀이를 할 뿐이잖아요!”
용사는 나를 보호하듯이 내 어깨를 끌어안고 물러섰다. 다소 방어적인 태도였지만 그 목소리만큼은 지금껏 들어왔던 용사의 어떤 목소리보다도 더 공격적이고 날이 서 있었다. 대체 내가 어떤 상태인 건지, 용사가 나를 발견했을 때 케르츠가 나한테 뭘 하고 있었는지 짐작하기조차 무서울 정도였다.
괜히 몸을 부르르 떨자 용사가 내 어깨를 붙잡은 손에 조금 힘을 주었다. 지금까지는 두 살짜리라 생각해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던, 나보다도 더 성숙한 성인 남성의 목소리와 손아귀 힘이 괜히 낯설었다. 한편으로는 그 낯선 단호함에 안심되었지만, 사실 다른 한편으로는 불길한 예감이 올라왔다. 그러니까…….
“당신도.”
“……?”
“당신조차도, 결국 세온의 의견에 동조할 겁니까?”
하넨의 몸이 일순간 휘청거리더니 그의 지팡이에 어린 연기가 흩어졌다. 황색 연기는 케르츠의 몸을 감싼 검은 안개에 먹혀 순식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하넨은 잠시 인상을 찡그렸지만 이쪽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지금 개입하면 곤란하겠다는 생각에서였는지, 아니면 케르츠가 충분히 이성을 차렸다고 판단해서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불안해졌다. 아무리 봐도 지금의 케르츠는 이성을 되찾은 것 같지가 않았다. 광증에 사로잡혔을 때만 케르츠의 전신을 감싸곤 하던 검은 안개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겉보기에는 멀쩡한 소리를 내뱉는 것처럼 보이지만, 치솟아 오르려던 광증이 가까스로 가라앉은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상황이 뒤집힐 증거가 생기면 언제든 손바닥 뒤집듯 사명을 저버릴 거예요? 그게 당신이 말하는 변화란 겁니까?”
“요, 용사님한테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용사님하고는 관계없잖아요!”
“관계없을 리가 없지요. 애초에 용사님이야말로 가장 이 문제와 밀접한 사람 아닙니까? 그렇죠, 용사님도 사실은 저 의견에 동조하고 있는 거죠? 믿음과 신념 따위는 있지도 않은 거지요? 신념을 버리고 믿음을 저버리면 세상이 어떻게 될지, 우리의 희망은 어떻게 되는 건지, 그런 건 생각조차 안 하고?”
케르츠는 비틀거리며 용사에게 한 걸음씩 걸어갔다. 용사에게 쉴 새 없이 질문을 꺼내고 있지만 애초에 용사가 대답할 수조차 없는 질문이었고, 처음부터 케르츠는 용사에게 답을 바라지조차 않는 눈치였다. 용사는 케르츠의 질문에 당황한 듯 잠시 머뭇거렸지만, 아까 전과는 달리 무언가 각오한 표정으로 케르츠를 마주 보았다.
나는 직감했다. 지금 이 상황은 얼마 전 벌어졌던 싸움의 연장선이고, 지금 하넨이라도 와서 말려 주지 않는다면 정말 큰일이 나리라는 것을. 아니, 차라리 얼마 전의 싸움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때까지만 해도 케르츠는 용사를 지나치게 몰아붙이지 않을 정도의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고, 용사 쪽은 자신의 의견에 확신을 가지지 못해 쉽사리 케르츠에게 반박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 보였다. 지금 케르츠는 나와의 싸움으로 이성을 잃어서 평소 같은 자제력을 기대할 수 없었고, 용사도 어째서인지 아까 전에 비해 조금 더 단호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운이 나쁘면, 어쩌면.
“만약 신의 악을 정화하는 게 소용없다는 증거를 얻는다면, 당신은 정말 이 원정을 그만둘 겁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거예요?”
그 순간, 용사의 얼굴에 희미한 당황이 어렸다. 나조차도 캐치해 낸 그 감정을 케르츠가 놓칠 리 없었다.
한동안 서늘한 침묵이 감돌았다.
“정말?”
케르츠가 한 걸음 다가왔다. 용사는 내 어깨를 붙잡은 채 뒤로 한 걸음 물러났지만, 그건 두려움이나 망설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신중함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용사의 차분함과는 별개로 나는 조금 불안해졌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로 큰 싸움이 벌어질 것 같았다.
“진심으로 포기할 겁니까?”
“…….”
“그런 상황이 온다면, 당신의 사명을, 의무를 포기해 버릴 생각이냐고요. 정말로.”
나는 용사가 아니라고 대답할 줄 알았다. 나뿐만이 아니라 하넨도, 심지어 이성을 잃은 케르츠조차도 그런 기대를 조금쯤은 품고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하지만 용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마치 본심을 흘렸을 때 벌어질 상황을 고민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용사의 침묵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케르츠의 낯 또한 그만큼 일그러졌다. 그 침묵을 어떻게든 무마하고 싶은 마음에 나라도 입을 열어 볼까 고민했지만, 언제부터인가 용사의 어깨에 달라붙어 있던 인형이 다가오더니 내 뺨을 툭 때렸다.
[내가 할 일이 아니다.]
뺨을 얻어맞아 기분이 나쁜 것도 잠시, 여기서 더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무언의 압박이 느껴져 흠칫 입을 다물고 말았다. 어쩌면 인형은 처음부터 이 상황을 예견하고 있던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숨이 턱 막혀 왔다.
역시 케르츠에게 괜한 소리를 한 걸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결과적으로 상황이 이렇게 되기는 했지만, 케르츠를 저런 식으로 내버려 두는 것도 올바른 길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계기가 되었으니 오히려 다행이다. 다만, 여기서부터는 내가 개입해 봤자 역효과가 날 뿐이다.]
인형은 그렇게 말하며 뭉뚝한 팔 끝으로 내 얼굴을 닦아 주었다. 인형의 팔 끝에 묻어나는 피를 멍하니 보고 있노라니 머릿속이 좀 차분해졌다. 따지고 보면 인형의 말이 옳다. 지금부터는 내가 개입할 상황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용사를 믿고 용사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뿐.
내 어깨를 붙잡고 있던 용사의 손아귀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잠시 망설이던 용사는, 곧 묘한 단호함이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말로 합당한 근거가 있다면, 포기할 수도……. 아니. 포기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뭐.”
“물론 아직은 확신할 수 없어요. 그 근거가 진짜로 합당한지, 아니면 제가 제멋대로 내린 결론인지. 하지만, 눈앞에 진실이 놓여 있는데도 그 진실을 외면하거나 무시할 수는 없어요.”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용사는 여전히 어른에게 혼나는 걸 두려워하는 아이의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그 입매는 고집스러웠고 눈빛에는 묘한 확신이 있었다. 반면 케르츠는 제가 서 있는 발밑이 와르르 무너지기라도 하는 듯 불안정해 보였다.
“취소해요.”
“못해요, 난. 나는.”
“그 말, 취소하라고요. 내가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잖아.”
아니, 이미 무너졌다. 다른 모든 사람에게는 무성의하거나 무례한 모습을 보였어도 용사에게만은 정중한 태도를 고집하던 사람이었는데, 지금의 케르츠에게서는 자신이 마지막까지 고집하던 최소한의 존중과 예의마저도 서서히 벗겨져 나가고 있었다.
케르츠는 비틀거리며 한 걸음씩 이쪽으로 다가왔고 용사는 그에 맞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용사가 물러날 때마다 케르츠는 제 눈앞의 동아줄을 누가 치우기라도 하는 듯 상처 받은 표정이 되어 갔다. 마치 어린아이가 되어 가는 듯한 모습이었다. 맹목적으로 따르던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세상으로부터 배신당한 어린아이 같은.
“당신, 솔직히 말해. 나한테 거짓말을 했지요?”
“……!”
“나에게 숨기는 게 있지요. 우리에게 밝힌 정보 중에 거짓이나 왜곡이 섞여 있는 거지요. 그렇지 않아? 지금까지 당신이 내게 밝힌 정보만으로 생각해 보면 당신이 이런 식으로 나올 이유가 없는데. 대체 뭘 봤어요? 무엇이 당신을 이렇게 만든 겁니까?”
케르츠의 손이 허리춤의 쇠톱으로 향했다. 그저 위협용일 거라 믿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애초에 케르츠가 용사에게 위협을 한다는 상황 자체가 그다지 정상적이지는 않았다. 본래대로라면 일어나는 것조차 비정상적이라 해야 할 사태가 너무 자연스럽게 벌어지고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케르츠의 저 막무가내 같은 추측이 아예 거짓만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실제로 용사는 케르츠에게 무언가를 숨겼다. 자신이 본 걸 말하긴 했지만 모든 걸 곧이곧대로 말한 것 같지 않고, 어쩌면 자신이 본 것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일정 부분 왜곡이나 거짓을 섞었을지도 모른다. 나조차도 용사가 무언가를 숨긴다는 사실만 알 뿐 정확히 무엇을 숨겼는지는 모를 정도다.
“이게 당신이 말하는 변화입니까?”
“숨긴 건 미안해요. 왜곡한 것도, 당신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도 미안해요.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요, 전부 말하기엔, 너무 무겁고 괴로워서……!”
“이젠 다 인정하겠다 이겁니까? 숨기고, 거짓을 말하고, 변명을 하고. 예전처럼 착한 용사님이 아니네. 그렇죠?”
나는 용사를 믿고 있다. 용사가 무언가를 숨긴 데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분명 용사 나름의 생각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지금 와서 케르츠 저 사람에게 그 믿음을 기대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처음부터 용사가 케르츠에게 그만큼 믿음을 주지도 못했거니와, 케르츠 또한 자신의 불안감을 억누르고 누군가를 신뢰할 만큼 성숙한 인간이 못 되어서.
“당신의 변질을 그저 지켜만 봐야 합니까, 내가? 응?”
“변질……?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에요. 저는, 제가 그걸 숨긴 건 케르츠를 위해서.”
“제발 정신을 차려, 이 멍청한 용사님. 지금 당신 모습이 예전과 같다고, 이게 오염이나 변질이 아니라고,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거냐고!”
콰앙, 굉음과 함께 사방으로 물보라가 튀었다. 파국은 생각보다 훨씬 더 노골적이고 직접적인 방향으로 찾아왔다.
순식간에 몸이 붕 뜨는 듯한 느낌을 받았지만, 그건 공격의 여파라기보단 나를 보호하기 위한 용사의 움직임 때문이었다. 나를 붙잡고 훌쩍 뒤로 뛰어 첫 공격을 피해 낸 용사는 허리춤의 검을 칼집째로 휘둘러 케르츠의 쇠톱을 쳐 냈다. 쇠톱은 충격을 받아 반쯤 휘다시피 했지만 인면철답게 순식간에 원래의 모습으로 복구되었다.
“케르츠, 너 지금 무슨 짓이야?!”
“안 돼. 더는, 더 오염되게 둘 수는 없어. 원래도록, 예전으로 돌려놓도록 내가……!”
“오염된 건 아무리 봐도 네 쪽이라고! 이 멍청한 새끼가!”
하넨의 지팡이 끝에서 아까의 황색 연기가 다시 피어올랐다. 이번에는 검은 안개를 충분히 뚫을 수 있을 만큼 짙은 연기였지만, 케르츠의 몸놀림이 워낙 민첩한 탓에 황색 연기는 아까처럼 쉽사리 그의 팔다리를 묶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연기의 위력이 강하다 해도 직접 피부에 닿거나 흡입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모양이었다.
케르츠는 하넨에게는 아랑곳하지조차 않은 채 곧바로 용사에게 달려들었다. 이미 이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지만, 그와 별개로 케르츠의 공격은 정확하고 압도적이었다. 차라리 술에 취한 양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쇠톱이라면 피하기도 쉬웠을 테고, 쇠톱을 휘두르는 팔을 붙잡아 움직임을 막아 내기도 어렵지 않았을 텐데!
“케르츠, 케르츠! 이러지 말아요!”
케르츠에 비하면 분명 용사 쪽이 더 제정신일 테지만, 용사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휘청거리며 공격을 막아 내는 데에만 급급했다. 물론 지금의 용사는 케르츠처럼 능동적으로 싸우기 힘든 상황이었다.
애초에 케르츠에게 상처를 입힐 생각이 없다 보니 아직 검집에서 검을 뽑지조차 않았으며, 그저 케르츠의 공격을 피하고 막아내기만 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공격을 피해 내는 것조차 지금의 용사에게는 쉽지 않았다.
“괜찮아요, 세온?!”
카각, 쇠가 갈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용사의 검이 케르츠의 쇠톱을 가로막았다. 용사가 조금이라도 늦었더라면 쇠톱에 갈리는 건 내 머리통이 되었을 거다. 물론 큰 타격은 없겠지만, 방금까지 내가 케르츠에게 폭행을 당했던 모습을 기억하는 용사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그런 모습을 두고 볼 수 없는 모양이었다.
“저기, 전 괜찮아요! 여차하면 인형이 막아 줄 테니까!”
[인형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
“아, 안 막아 줘? 젠장, 너 진짜 이러기야?!”
아니, 그야 뭐, 이 상황에서 인형이 방어막을 쳐 주면 노골적으로 용사 편을 드는 거나 마찬가지이긴 한데! 개입하면 안 된다고 저 녀석이 처음부터 말하긴 했는데! 그렇다고 해도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니야?! 케르츠 저 사람, 이미 피아 구분조차 안 되어서 용사든 나든 상관없이 공격하고 있잖아!
“당신이 부추겼지요, 당신과 저 인형이, 용사가 오염되도록 부추겨서!”
아니, 처음부터 저 사람은 나와 용사 모두를 겨냥하고 있었다. 도중에 겨냥이 빗나가거나 해서 나를 잘못 공격한 게 아니라, 애초에 용사가 오염된 원인 중 하나를 나로 지목한 채 공격을 퍼부었을 뿐이다. 그래서 용사 또한 나를 어디 다른 곳에 치워 놓고 싸우는 게 아니라 나를 적극적으로 방어하는 식으로 싸웠던 거고……!
“부추기지 않았어요! 게다가, 애초에 왜 오염이라고 생각하시는 건데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고민하고 망설이고 자기 의견을 바꾸기도 해요! 용사님도 마찬가지고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짊어진 죄나 의무조차 없으면서 헛소리 지껄이지 마! 희망도, 사명도 없어도 살 수 있는 당신이 대체 뭘 알아!”
콰앙, 비석 하나가 쓰러지면서 물보라가 사방으로 튀었다. 시야를 가리는 까만 물보라에 용사가 멈칫한 사이 케르츠가 사나운 기세로 치고 들어왔다. 감이 좋아서인지 운이 좋아서인지 가까스로 공격을 막아 내긴 했지만, 완전히 막아 내지 못하고 자세가 무너진 탓에 용사는 순식간에 열세에 몰렸다.
“사명이 없다면 무엇에 기반해 걸어가야 합니까? 희망이 없다면 무엇에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까? 왜 나에게서 그런 것들을 빼앗으려 해요? 내가 뭘 잘못했습니까? 네?”
용사의 몸은 뒤로, 또 뒤로 밀려나기만 했다. 거대한 쇠톱을 막으려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하기도 하고, 등 뒤가 비석으로 막혀 멈칫한 사이 머리가 반으로 쪼개질 뻔하기도 했다. 인형은 그 꼴을 뻔히 보면서도 도우려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고, 하넨은 원거리에서 몇 차례씩이나 케르츠를 막으려 시도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가 않았다.
이대로는 역시 승산이 없다. 케르츠를 물리적으로 제압해 진정시킨다는 전략은 이미 물 건너간 게 확실했고, 이대로 가다간 오히려 우리 쪽이 케르츠에게 제압당해 버릴 게 틀림없었다. 기어코 우리를 쓰러뜨리고 난 케르츠가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건 아마 케르츠 본인도 명확히 모를 거다. 그래서 더 무서웠다.
“빼앗지 말아요. 없애 버리지 마. 내 죄도, 내 사명도, 거짓이거나 없는 일이라고 말하지 마. 당신들이 보기에는 보잘것없지만, 그래도, 그래도 내게는.”
적어도 나는 이 상황을 타개할 만한 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하넨의 마법 또한 대부분 검은 안개에 막혀 제대로 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마 인형이라면 케르츠를 멈춰 세울 만한 비장의 수를 가지고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기본적인 보호막 하나 제공해 주지 못하는 녀석에게 그런 걸 바랄 만큼 내가 비현실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좀 도와달라고, 나는 마음속으로 힘껏 외쳤지만 인형은 그저 내 품 안에 매달린 채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이쯤 되면 최소한 내 몸이라도 지켜 주지 않을까 기대했는데 녀석은 그저 요지부동이었다. 대체 왜 저렇게 고집을 부리는 건지, 하다못해 상황을 타개할 힌트라도 주면 안 되나 생각하던 도중.
인형이 흘긋 나를 올려다보았다. 녀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녀석이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빼앗고 싶지 않아요!”
“그럼, 그러면 왜 그러는 겁니까. 대체 나한테 왜……!”
“빼앗고 싶지 않으니까 그러는 거예요! 케르츠의 소중한 것도, 신의 소중한 것도!”
잠깐, 뭐라고?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용사의 발이 케르츠의 명치를 정확히 가격했고, 케르츠는 충격에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케르츠가 받은 충격은 물리적인 충격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거대한 쇠톱을 지지대 삼아 겨우 넘어지지 않은 케르츠는, 경악에 가득 찬 눈으로 용사를 노려보았다.
“무슨, 지금 무슨 소리를.”
“신전에서 들었어요. 신은 편애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신은 모든 사람들을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사랑하고 그건 누군가에게 편애로 보일 수 있어요.”
“……편애?”
“신은 분노하지 않는다고 신전에서 들었어요. 하지만 신은 정의로운 존재고 잘못된 것에 격노할 수밖에 없어요. 격노하는 감정을 잃은 자는 정의를 체감할 수가 없어요.”
나는 일순간 용사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용사가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는 어렴풋하게 추측할 수 있었다. 어쩌면 용사는 자신이 이번 층에서 접했던 ‘신의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지도 모른다. 지금껏 이해하기 힘들다는 핑계를 대며 어중간하게 얼버무렸던, 그 감정들에 대해.
“무엇을 본 겁니까. 대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가…….”
“신은 실망하지 않는다고도 들었어요. 하지만 실망은 기대를 기반으로 한 행위에요. 처음부터 기대하지 않았다면, 신뢰하지 않았다면 실망조차 존재하지 않아요.”
“무엇을 봤냐고요. 무엇에 대해 이야기하는 거냐고요. 난, 나는 전혀.”
어쩌면 인형이 용사의 말을 설명해 주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내린 순간 나는 묘한 사실을 깨달았다. 인형은 용사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방금 케르츠가 부숴 넘어뜨려 버린 비석, 윗부분은 부서지고 아랫부분만 겨우 서 있는 그 비석에 새겨진 문양이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문양의 뜻을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그 문양이 다른 비석에 새겨진 것과는 다른 ‘특별한 문장’이라는 것만큼은 알 수 있었다.
언제부터 저 비석은 저기에 있었을까. 분명 이 주변의 비석은 나와 케르츠가 아까 전에 다 확인했던 것 같은데. 용사와 내가 케르츠의 공격을 피해 물러나던 도중 새로운 비석이 있는 곳까지 온 걸까?
아니, 그 전에. 인형 녀석은 저 비석에 특별한 문장이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나처럼 방금 전에 눈치챈 걸까, 아니면……. 용사가 어떤 ‘자격’을 갖출 때까지 그저 기다리고만 있었던 걸까?
용사의 말에 정신이 팔린 케르츠는 마지막 비석이 발견되었다는 사실을 아직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인형은 용사의 어깨 위로 건너가더니 용사의 머리를 톡톡 쳤고, 용사는 인형을 잠시 바라보더니 비석의 문양으로 시선을 돌렸다.
“모르겠어요. 저도 확신할 수 없어요. 지금껏 제가 배워 왔던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아서, 도무지 입 밖으로 꺼낼 용기가 안 났어요. 하지만.”
첨벙, 첨벙. 인형을 어깨에 얹은 용사가 느린 걸음으로 비석을 향해 다가가는 동안에도 케르츠는 멍하니 용사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저 비석의 문장을 정화하게 내버려 두면 다음 층으로 가는 계단이 열릴 텐데. 아니, 그 문제는 둘째치더라도, 저 비석을 정화하고 나면 용사는 마지막 신의 기억을 얻게 될 텐데. 지금 이 상황에서 그래도 되는 걸까.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무언가 중요한 비밀을 알고 있는 듯한 용사의 말에, 기이한 각오가 느껴지는 용사의 뒷모습에 나는 괜히 압도당하고 말았다. 문양을 코앞에 둔 용사는 긴 한숨을 들이쉬자, 인형은 비석에 적힌 문장을 천천히 읽어 내렸다.
[진실을 받아들일 각오가 되었다면 최후를 향해서. 우리의 뒤틀린 외경을 참회하며…….]
“만약 제가 본 것이 진실이라면, 그 진실에서 눈을 돌릴 수는 없어요.”
[우리가 마침내 죽이고 만 신의 감정을 추모하며.]
용사의 손끝이 하얗게 빛나는 문양에 닿았다.
세상을 깨끗하게 태울 듯한 빛이 광장 전체를 뒤덮었다.
* * *
빛이 사그라들고 난 광장은 이전에 비해 훨씬 더 어두워져 있었다.
강한 빛이 사라진 탓에 주변이 상대적으로 어둡게 보인다든지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마치 대낮이 가고 해질녘이 찾아오기라도 한 것처럼, 광장 전체가 순식간에 어둑어둑해져 서로의 얼굴조차 또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용사의 주변에 어린 빛무리 덕분에 주변을 분간할 수는 있었다.
갑작스러운 어둠에 적응하기 위해 눈을 깜빡이고 있는데, 어디선가 차가운 물 한 방울이 툭 떨어져 볼을 적셨다. 흠칫 놀라 고개를 든 순간 나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격했다.
‘구름?’
아무리 어두워도 그쯤은 분간할 수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천장이 있었던 자리에는, 당장에라도 비를 토해 낼 듯 새까만 먹구름이 잔뜩 뒤덮여 있었다. 아니, 이미 비를 토해 내고 있었다.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가벼운 물방울은 어느 새 제법 묵직해지더니, 순식간에 굵은 빗줄기가 광장 전체를 뒤덮었다. 붉은 폭우였다.
녹물처럼 불길한 색의 빗줄기를 온몸으로 맞으며, 용사는 그 자리에 웅크린 채 미동조차 하지 않고 있었다. 이성적으로 따지면 사념을 정화한 후유증 때문이라고 판단하는 게 맞겠지만, 마음 한구석에서는 까닭 없는 불안감이 덜컥 올라왔다.
“요, 용사님.”
비틀거리며 용사를 향해 걸어갔다. 용사의 어깨에 앉아 있던 인형은, 내가 근처에 다가오자 용사에게는 아무 미련도 없다는 듯 폴짝 뛰어 내 어깨에 옮겨 왔다. 그 모습이 얄밉다고 생각할 틈도 없이 일단 용사부터 살폈다. 용사는 가만히 몸을 웅크린 채, 느리고 무겁게 숨을 들이쉬고 내쉬기를 반복할 뿐이었다.
기절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아니면 차라리 기절해서 아무 생각도 못 하는 쪽이 나았을지. 불안감에 끙끙거리며 용사를 부축하려는 순간, 하넨의 경악한 목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사방으로 퍼져 왔다.
“자, 잠깐만. 저게 뭐야……?! 저 비석은 대체 뭔데!”
당연히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비석이겠지. 이번 층의 모든 특별한 비석을 정화했으니까! 그러나 하넨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순간 나는 하넨의 심정을 완전히 이해했다. 비석이 생기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조금 더 근본적인 수준의 문제가 있어서.
“저게, 비석이라고?”
나는 용사를 끌어안은 채 멍하니 중얼거렸다. 광장의 중앙에 출몰한 ‘비석’은 우선 크기부터가 엄청났다. 구름을 뚫을 만큼 아득한 높이에, 그 너비나 두께는 보통의 비석을 수백 개쯤 합쳤다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보는 이를 압도했다. 크기로만 따지자면 비석의 형태를 한 건물에 가까울 정도였다.
게다가 문제는 크기만이 아니었다. 애초에 하넨이 비석이라고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저게 비석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거다. 사방이 어두운 데다가, 쏟아져 내리는 폭우 때문에 시야가 뚜렷하지 않아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비석은 끊임없이 꿈틀거리며 맥동하고 있었다. 마치 수백, 수천 개의 생물체를 아무렇게나 꿰매 붙여 놓은 것처럼 개별적이고 불규칙한 움직임이었다.
“……가야 해요.”
그때였다. 내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숨을 고르던 용사가 작게 중얼거렸다. 가다니, 대체 어디로. 나는 그렇게 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이 상황에서 용사가 향할 목적지라고는 한 군데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야, 당연히 가야지. 아래층으로 가는 계단을 만들어 주는 비석이 생겼으니 내려갈 수밖에 없잖아. 하지만 말투가 이상해. 왜 혼자 갈 것처럼 말하는 거야? 마치 우리를 두고 당장 떠나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나는 덜컥 솟아오르는 두려움에 용사의 어깨를 꽉 붙잡았고, 용사는 그제야 나를 올려다보며 웃어 보였다. 마치 나를 달래기라도 하려는 듯한 웃음이었다. 지금은 분명 내가 용사를 달래야 할 상황일 텐데.
마치 지금까지의 용사가 아닌 딴 사람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 생경함에 당혹감과 두려움마저 느껴져, 나는 들이쉴 필요도 없는 숨을 괜히 들이쉬었다. 용사를 붙잡아야 한다는, 지금 이대로 용사를 보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용사님, 무엇을 보았어요?”
“가야 해요.”
“이제는 말해 줘도 괜찮잖아요. 뭘 봤어요? 무엇을 느꼈어요? 신의 감정을 죽였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대체 이 미궁에서는, 신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건데요?!”
“미안해요. 나, 나는 가야 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것뿐이에요. 내가 가지 않으면 안 돼요.”
“당연히 가야지요! 케르츠도, 하넨도, 저도 인형도 모두 같이!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예요? 네?”
“……오지 않아도 괜찮아요.”
용사가 천천히 손을 들어 내 뺨을 만졌다. 어린아이처럼,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 말랑한 것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이 아니라, 마치 연인을 대하기라도 하듯 조심스럽고 다정한 손길이었다.
물론 그런 다정함 같은 건 필요 없었다. 지금 나에게, 다른 동료들에게 필요한 건 용사의 제대로 된 설명이었다. 대체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오지 않아도 괜찮다니,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고!
“어차피 미궁의 중앙에 반드시 도착해야 하는 건 저뿐이에요. 다음 층은 저 혼자로도 괜찮을 테니까, 오지 않아도 괜찮아요.”
“괜찮을 리가 없잖아요! 아니, 용사님은 둘째 치고 저희가 안 괜찮아요! 저나 하넨은 그렇다 치고 케르츠 씨는 어쩔 건데요? 저렇게 내버려 두고 갈 거예요?!”
사실은 얄미워서라도 걱정하지 않으려 했지만, 용사를 잡아야겠다는 마음이 급하다 보니 케르츠라도 붙잡아 들이밀 수밖에 없었다.
케르츠는 자리에 주저앉은 채 멍하니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사실 우리를 진짜 보고 있기는 한지조차 의문이었다. 방금 용사가 한 말의 충격을 조금도 흡수하지 못한 기색이 역력해, 핑계가 아니더라도 확실히 위험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용사는 조금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눈치였다. 그저 조금 슬픈 듯한 눈으로 케르츠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날 뿐이었다.
“케르츠에게 전해 주실래요? 케르츠는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다고. 아, 세온을 때린 거 빼고요.”
“눈앞에 있잖아요, 직접 말해요! ……아니, 그 전에! 어째서 혼자 가려고 하는지 전혀 모르겠어요! 방금 전까지만 해도 혼자 갈 생각은 확실히 없었잖아요! 네?!”
“……케르츠의 조상들도, 다른 성기사들도, 정말이지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저는 절 만든 사람들이 저지른 실수에 대한 책임이 있어요. 그러니까 저 혼자 내려가야 하는 거예요.”
용사를 만든 사람들이라니, 설마 지금의 신전을 말하는 건가? 신전에서 무슨 잘못을 했는지, 설령 신전이 무언가 잘못을 했다 쳐도 그게 왜 용사의 책임이 되는지, 무엇도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아 그저 답답할 뿐이었다.
나는 용사에게 뭐라고 반박해 보고 싶었지만, 그 순간 하늘이 돌연 번쩍이더니 요란한 천둥이 내리꽂혔다. 일순간 사방을 밝힌 빛은 저 멀리 우뚝 서 있는 비석의 형태를 제법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 순간 나는 숨을 헉 들이쉬었다.
비석의 표면에 달라붙어 꿈틀거리고 있는 것들이 이제야 보였다. 그건 시체였다. 새까맣게 타고, 누렇게 썩어 들어가고, 줄줄 흘러내리는 것들이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기분 탓일까? 나는 어쩐지 그 시체들이 용사를 부르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나 케르츠나 하넨이나 인형이 아닌, 오직 용사만을.
정말로 죗값을 갚으라고 요구하듯이.
“대체 뭘 보았는지, 그것만이라도 말해 주시면 안 돼요? 네?!”
그렇게 말하며 용사의 옷깃을 붙잡아 보았지만, 용사는 단호하게 내 손을 떼어 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비석이 크게 꿈틀거렸다. 길게 늘어난 시체의 팔이, 아니, 차라리 촉수라고 불러도 좋을 무언가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더니 용사를 붙잡았다. 용사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은 채 자신의 몸을 휘감는 촉수를 바라보았다.
“신은 인간을 기만하지 않는다고, 기만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만.”
“네?”
“기만과 희망은 사실 종이 한 장 차이일지도 모르겠어요.”
“……!”
“나, 먼저 내려갈게요. 지금까지 고마웠어요.”
팔다리와 몸이 온통 촉수에 휘감긴 채 용사는 그대로 비석을 향해 질질 끌려갔다. 당황한 하넨이 촉수를 향해 지팡이를 휘둘렀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촉수에 휘감긴 용사를 집어삼킨 비석은 일순간 크게 꿈틀거리더니, 곧 사방으로 검고 붉은 점액을 토해 내면서…….
붕괴하기 시작했다.
미궁이 무너질 기세로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비석은 종기를 짜내어 고름을 뱉어내듯 몸부림치며 대량의 점액을 토해 냈다. 점액이 쏟아져 나오는 양에 비례해 비석의 크기는 점점 작아졌지만, 그게 용사의 정화 때문이라고는 도무지 생각되지 않았다. 누가 보더라도 저건 정화라기보다는 자기 소멸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비석의 대부분이 사라질 때까지도 용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폭우가 너무 거세서 보이지 않는 거라고, 어쩌면 용사는 아직도 저 안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자기 최면을 걸어 보았지만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다는 사실을.
여기서 기다린다고 해서 용사가 나타날 일은 없다. 용사는 자기 혼자 아래층으로 내려가 버렸다. 우리를 이 폭우 속에 내버려 두고서.
“일어나, 이 멍청한 도살자 새끼야! 사고는 혼자 다 쳐 놓고선 책임도 안 질 작정이냐!”
나는 고래고래 소리치며 절규하는 하넨의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촉수와 비석을 공격해 용사를 되찾아 보려고 시도하던 하넨은, 소용없는 짓이라는 사실을 겨우 깨달았는지 이제 케르츠의 멱살을 붙잡고 흔들었다. 그러나 소용 없기로 따지자면 둘 다 별 차이는 없었다.
케르츠는 하넨이 붙잡고 흔드는 대로 멍하니 휘둘리기만 할 뿐이었다. 분노도, 의욕도, 그 밖의 모든 동력조차 잃어버린, 지금 이 상황에서는 그야말로 최악이라 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어떻게 해요, 하넨 씨! 용사님이 저렇게 가 버렸는데……!”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당연히 쫓아가야지! 그러니까 당장 일어나, 케르츠! 네놈이 싼 똥 정도는 네가 치워야……?!”
반응조차 없는 케르츠에게 의미 없이 퍼부어지던 하넨의 고함이 일순간 멈추었다. 몸의 균형이 갑자기 무너진 탓이었다. 분명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발목을 적실 정도에 불과했던 물은 어느새 허리까지 잠길 정도로 수위가 올라와 있었다. 폭우 때문이었다.
물론 현실적으로 따지고 보면 말이 안 되는 소리기는 했다. 아무리 비가 많이 온다 할지라도 고작 몇 분 사이에 이만큼 물이 불어난다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문제였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상식이니 비상식이니 하는 걸 따질 상황이 못 되었다. 이 상황에서 중요한 건 무엇 때문에 물이 불어났는지를 따지는 게 아니라……!
“뭐야, 물이 어디로 흘러가는 거야?!”
어느 순간부터인가, 우리는 불어난 물살에 휩쓸려 어디론가 떠내려가고 있었다. 하넨이 몸의 균형을 잃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대체 어디로 떠내려가는 걸까, 이 광장에 물이 빠질 곳이라고는 전혀 없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문득 생각난 바가 있어 고개를 들었다. 단 한 군데, 짐작 가는 곳이 있었다.
“아래층이에요!”
“뭐, 뭐라고?!”
“지금까지의 정화 과정을 생각해 봐요! 비석이 사라지고 나면 항상 그 밑에 공간이 있었잖아요! 이번에도 마찬가지예요. 중앙의 비석이 사라지면서 아래층으로 가는 길이 뚫린 거라고요!”
“그게 말이 되냐! 원래 저 자리에는 멀쩡한 바닥이 있었잖아!”
“지금 말이 되고 안 되고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논리적이고 비논리적이고를 떠나서, 우리를 휩쓸어 가는 물의 흐름이 광장의 중앙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만약 광장의 중앙에 거대한 구멍이 생겼고, 그 구멍을 통해 아래층으로 내려갈 수 있다면, 우리를 내버려 두고 떠나 버린 용사를 붙잡는 것도 아예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물론 석연찮은 점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용사는 분명 우리를 두고 가겠다는 듯한 뉘앙스의 말을 남기고 사라졌는데, 이렇게나 쉽게 용사를 따라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일이 과연 가능하기나 할까? 어쩌면 우리는 이대로 용사와 헤어져 전혀 엉뚱한 장소를 헤매야 하는 게 아닐까?
‘몰라, 하지만 지금은 뭐든 시도해 볼 수밖에 없다고!’
어차피 물의 흐름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광장을 채우고 있던 비석은 전부 사라져 있었고, 주변은 온통 물뿐이어서 붙잡을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수위는 점점 높아져 어느 새 목까지 잠길 만큼 물이 차올랐고, 물의 흐름은 점점 거세져 떠다니는 것만으로도 벅차고, 입구까지는 너무 멀어서 헤엄을 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떠내려 갈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면 희망적인 방향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희망과 기만은 종이 한 장 차이라던 용사 녀석의 말이 머릿속을 잠시 스치고 지나갔지만 나는 애써 그 말을 뇌리에서 치워 버렸다.
이미 폭우라는 단어로도 설명되지 않는, 마치 폭탄처럼 마구잡이로 투하되는 대량의 물이 하늘에서 쏟아졌다. 하넨은 케르츠가 물에 잠기지 않도록 붙잡은 채 필사적으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내 어깨에 올라앉아 있던 인형은 어느 새인가 내게서 떨어져 아무렇게나 떠내려가고 있었지만, 가라앉지도 않고 물 위를 둥둥 떠다니는 모양새가 묘하게 안정적이어서 별로 걱정은 되지 않았다.
내가 예상했던 대로, 비석이 사라진 자리에는 엄청난 크기의 공동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하늘에서 쏟아져 내려온 물은 그 공동 아래로 흘러내려가고 있었다. 마치 거대한 폭포를 보는 듯한 압도적인 모습이었다.
“조심해, 떨어진다!”
“하넨 씨나 조심해요! 전 어떤 꼴이 되더라도 괜찮지만 하넨 씨와 케르츠 씨는 잘못 떨어지면 죽잖아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겨우 떴다. 추락에 대한 공포는 없었지만 공동 아래로 펼쳐진 아득하고 새까만 어둠이 어딘가 불안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용사는 저 아래에 없을지도 모른다. 방금 보았던 그 서글픈 미소가, 각오에 가득 찬 뒷모습이 용사의 마지막 모습일지도 모른다.
그 사실이 더없이 불안해, 뛰지 않아야 할 심장이 자꾸 쿵쿵거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너야말로 아무것도 잘못하지 않았어, 이 멍청아.’
물론 제대로 설명도 안 해 주고 멋대로 떠나 버린 것만 빼면 말이야! 나는 이를 바득바득 갈며 공동을 노려보았다. 다시 만나기만 해 봐라. 그때는 정말 혼쭐을 내 줄 테니까! 케르츠가 종종 그러는 것처럼 난폭하게 혼낼 생각까지는 없지만 엉덩이 몇 대는 때려 줄 수 있는 거잖아. 등짝도 몇 대쯤 때려 주고, 가끔 울먹거리면 뭘 잘했냐고 혼내기도 하고, 그러고 나선, 그러니까…….
‘사실 화 같은 건 나지 않았다고, 그러니 혼자 죽어 버리지 말라고, 그렇게 달래면서 꼭 끌어안아 줄 테니까.’
까마득한 추락감과 함께 공동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눈을 부릅떠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뿐이었다.
* * *
풍덩, 비교적 얌전한 소리와 함께 호수 비슷한 장소에 빠졌다.
어둠 속에서 한참을 허우적거린 끝에 겨우 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땅 비슷한 것을 짚고 허둥지둥 위로 올라오니, 머리 위에서 쏟아져 내리는 물소리를 제외하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기를 기대하며 몇 차례씩이나 눈을 깜빡거렸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케르츠 씨? 하넨 씨? 어디 계세요?”
목청을 높이며 주변을 더듬거리는데 푹신한 것이 만져졌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가락 끝으로 툭툭 찌르자, 인형의 팔로 추정되는 뭉뚝한 것이 내 손에 달라붙었다. 역시 인형 녀석도 무사히 내려왔구나. 너무 어두워서 보이지는 않지만.
[사실 지금 내가 건드리고 있는 건 인형이 아니라, 인형과 감촉만 비슷한 괴이한 생김새의 신성 생물일지도 모른다.]
“그럼 꼬집거나 쭉쭉 잡아당겨도 돼? 애초에 이 미궁에 나랑 너랑 용사 말고 신성 생물이 있긴 있었나?”
[사실 내가 건드리고 있는 건 인형이 맞다. 인형은 꼬집히거나 잡아당겨지는 행위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도 장난을 치는 걸 보니 확실히 인형이 맞다. 인형 녀석은 다람쥐처럼 내 팔을 붙잡고 기어오르더니, 내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을 꾹 짜내 주었다. 고맙기는 한데 하넨과 케르츠가 보이지 않는 점이 영 찝찝했다. 너무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점 또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주변을 이리저리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첨벙거리며 헤엄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넨과 케르츠인 듯했다.
“젠장할, 더럽게 무겁네! 아무리 갑옷 무게가 있다고는 해도……!”
“하넨 씨, 거기 계세요?”
“어, 케르츠가 물 먹고 가라앉아서 꺼내 오느라 좀 고생했다. 젠장할, 지팡이도 챙겨야 하고 이 녀석도 챙겨야 하고 정신이 없네! 예쁜 짓도 안 하는 주제에 무겁기는 더럽게 무거워서!”
첨벙거리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져 오더니, 푸하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얼굴에 물이 튀었다. 하넨이 물 위로 올라온 모양이었다. 듣자 하니 케르츠도 무사한 듯하고, 하넨이 모닥불이라도 만들어 주면 시야도 확보될 테니 한숨 놓을 수 있을 거다.
이 공간은 지나치게 어둡단 말이지, 빛이 없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생각하며 얼굴에 튄 물을 닦아 내고 있는데, 하넨이 의아하다는 듯한 어조로 내게 말을 던졌다.
“너 왜 그래?”
“왜 그러냐니요? 그나저나 하넨 씨, 모닥불이라도 좀 피워 주세요. 광장 안이 어두워서 하넨 씨 얼굴도 안 보이네요.”
“내 얼굴이 안 보이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왜 갑자기 장님 시늉을 하고 있어?”
“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여기가 좀 많이 어둡긴 하지만 내 얼굴까지 안 보일 정도는 아니잖아. 아까부터 내 쪽은 보지도 않고 엉뚱한 곳만 기웃거리고 있길래 나한테 화라도 났나 싶었는데……. 혹시 시력에 이상이라도 생긴 거야?”
잠깐만. 하넨 저 사람,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지? 그렇게까지 어둡지는 않다고? 나는 시야에 이상이라도 생겼나 싶어서 눈을 몇 차례 비벼 보았다. 혹시 내 눈에 심각한 손상이 생겼는데 통증이 없어서 모르고 있는 건가?
하지만 이상한데. 영혼 조각이 충분히 공급되기만 한다면, 내 몸은 아무리 심한 손상이 생기더라도 자연히 상처가 회복된다. 이렇게까지 오래 시야가 회복되지 않을 리는 없단 말이야.
“일단 모닥불은 피워 줄게. 그래도 안 보이면 네 시야에 문제가 있는 거야.”
화르륵, 불이 타오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내 시야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역시 내 눈이 망가진 게 맞다고 생각하며 눈을 비비는데, 하넨이 적잖이 당황한 듯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뭐야.”
“왜 그래요, 하넨 씨?”
“왜 모닥불을 피웠는데 주변이 밝아지지를 않지? 불이 밝지 않고 어둡게 보여.”
이번에는 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설마 나만 시야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니라는 소리인가?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눈치챘을 때쯤, 한동안 잠잠하던 케르츠가 끙 소리를 내며 부스럭거렸다. 아무래도 물을 먹고 잠시 기절했다가 이제 겨우 깨어난 모양이었다.
솔직히 저 사람에게 할 말이 많았지만, 지금은 나와 하넨에게 생긴 시야의 문제를 해결하는 게 급선무였다. 케르츠가 부스럭거리는 듯한 소리가 한동안 들리더니 갑자기 무언가가 내 뺨을 확 붙잡았다. 그게 케르츠의 손이라는 걸 깨달은 나는 기겁을 하면서 물러났다.
“누구, 잠깐만. 세온……. 당신입니까?”
“네, 저 맞아요. 솔직히 아까 케르츠 씨가 저지른 짓에 대해 좀 따지고 싶기는 한데……. 일단 하나만 물어볼게요. 지금 앞이 보이세요?”
“앞이, 눈앞이 보이냐고요? 아뇨,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습니다만.”
“지금 하넨 씨가 모닥불을 피웠는데요. 소리 들리지요?”
“모닥불을……. 불을 피웠다고요? 그럴 리가. 불이 있는데 이렇게 어두울 리가 없어요.”
케르츠가 내 코앞에서 손을 흔드는 기척이 느껴졌다. 내 어깨에 앉아 있던 인형이 탁 하고 케르츠의 손을 쳐 내자, 케르츠는 놀란 듯 작은 신음을 흘리며 물러났다. 확실히 케르츠 또한 나와 마찬가지로 앞이 안 보이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대체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설마 단체로 시력에 이상이 생긴 건가? 나와 케르츠는 아예 앞이 안 보이고, 하넨은 뭐가 보이기는 하는데 사방이 어둡게 보이는 상태인 것 같고…….
“야, 너는 뭐 보이는 거 없어? 방금 케르츠의 손을 쳐 낸 걸 보니 뭐가 보이긴 하는 거 같은데.”
나는 인형을 붙잡고 볼로 추정되는 부분을 쭉쭉 잡아당겨 보았다. 인형은 싫은 티를 내며 바둥거렸지만 도망가지는 않았다. 내 시야가 고장 나서 쫓아오지 못할 걸 알고 나름의 배려를 해 주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지금 내게 필요한 건 배려가 아니라 설명이다. 대체 왜 모두의 시야에 이상이 생긴 건지, 여기는 어디인지, 용사는 어디로 가야 찾을 수 있는지, 뭐 그런 것들 말이다.
[이번 층에서 나는 인형의 시야를 빌릴 수 없다.]
“뭐라고?”
[하지만 인형에게서 간단한 설명 정도는 들을 수 있다. 이번 층은 다른 층에 비해 매우 밝은 편이다. 광장 여기저기에 함정이 산재해 있지만 숨겨진 함정 같은 건 없고, 시야가 완전히 확보되어 있다면 얼마든지 안전지대만 골라 이동할 수 있다. 다만,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는 함정에 걸리는 건 둘째치더라도 출구가 어디인지 찾을 수조차 없다.]
“설마 지금 네 시야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거야? 그런데 왜 우리 눈에는 어둡게 보이는 건데? 우리 눈에 문제가 생긴 거야? 방금 우리가 떨어진 호수에 시력을 감퇴시키는 약품 같은 게 섞여 있다든지…….”
[그렇지는 않다. 나와 하넨과 케르츠의 시력에는 아무런 이상도 없다. 문제는 시력이 아니라 인지 능력에 있다.]
인형은 그렇게 말하면서 내 손을 빠져나오더니, 내 얼굴에 달라붙어 가만히 볼을 비벼 주었다. 분명 인형이 내 코앞에 있을 텐데도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이게 시력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인지 능력이라는 건 또 무슨 소리지?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 일단 하나만 제대로 대답해 줘. 왜 나와 케르츠는 아무것도 안 보이고 하넨은 조금이라도 보이는 거야?”
[시야의 문제가 아니라 인지 능력의 문제라고 인형이 말한 바 있다. 나와 케르츠의 인지 능력이 완전히 망가지고, 하넨의 인지 능력이 어느 정도 남아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확보하고 있는 진실의 숫자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진실의 숫자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하넨은 용사로부터 한 가지의 진실을 전해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약간의 인지 능력을 확보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의 하넨은 함정도 볼 수 없고, 출구가 어디인지도 알 수 없다. 그의 인지 능력을 벗어나는 영역에 있기 때문이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진실이라니, 그게 대체……?”
[함정에 빠지거나 목숨을 잃고 싶지 않다면 그저 여기에서 기다리면 된다. 용사가 최종 층에 도착해 자신의 의무를 다하고 나면, 인지 능력도 저절로 돌아오고 지상으로 올라가는 길도 생길 테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이대로 용사 혼자 보냈다가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데! 용사를 내버려 둔 채 우리들만 나갈 수는 없다고! 나는 인형을 한 대 때리고 싶었지만 그 순간 내 얼굴에 달라붙어 있던 인형이 떨어져 나갔다. 바닥에 인형이 착지하는 소리가 제법 가벼웠다.
[하지만, 만약 다음 층으로 도달해 용사를 되찾고 싶다면.]
인형이 어디로 가는지, 어떤 동작을 하고 있는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기분 탓일까, 나는 인형이 평소처럼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도 바로 내 앞에서.
[모든 진실을 직면하면 된다. 마치 지난 층의 용사가 그랬던 것처럼.]
툭, 인형이 가볍게 뛰었다가 착지하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춤을 추고 있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