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극한직업 던전상인 3-15. 과거를 꿈꾸는 대미궁 (17/28)

15. 과거를 꿈꾸는 대미궁

세온, 세온 하고 내내 노래를 부르던 용사는 소음 공해에 깨어난 하넨이 귀를 잡아당기고 나서야 조금 얌전해졌다.

그 소란이 벌어진 와중에도 케르츠는 깨어나지를 않았다. 그는 지금까지 못 잔 걸 보충하기라도 하듯 죽은 듯이 수면을 취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나마 아까보다는 개운해진 안색으로 일어난 하넨은, 자신과 용사의 담요까지 동원해서 케르츠를 멍석말이 신세로 만들어 버렸다. 푹 자라는 배려인지 평소 품고 있었을 앙심의 반영인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용사에게 케르츠를 먼 곳에 옮겨 놓으라고 부탁한 하넨은 하품을 쩍쩍 하며 모닥불 옆에 앉았다. 어중간한 시점에 깼더니 잠이 확 달아났다며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표정을 보아하니 피로는 어느 정도 풀린 것 같아 다행이었다.

“세원이라고, 그래서?”

“어, 하넨 씨는 제대로 발음해 주시네요.”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는 건 중요하니까. 하다못해 저주를 걸 때에도 발음이 틀리면 효과가 없잖아.”

“예시를 들어도 엄청 흉흉하게 드시네요.”

하넨은 내 이름을 듣더니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용사는 세온과 세원의 차이가 뭔지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고, 나는 저주니 뭐니 하는 소리에 괜히 등골이 서늘해져서 애매하게 입매만 끌어 올렸다. 하넨은 내 반응을 보더니 픽 웃음을 흘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냥 예시일 뿐이야. 내가 너에게 저주를 걸 리가 없잖아. 아무튼 이름이란 건 그만큼 중요해.”

“그렇게 중요한 걸 여태 물어보지도 않은 분한테 듣고 싶은 말은 아닌데요.”

“아니, 그거야……. 너도 용사와 같은 신성 생물이니 당연히 이름 따위 없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러고 보니 저 인형은 이름 같은 거 없어?”

[인형은 인형일 뿐이다. 굳이 말하자면 솜이 채워진 푹신푹신한 어린아이 모양의 머리 좋고 능력 있고 대단하신…….]

“없다네요.”

양팔로 내 무릎을 때리려던 인형은, 케르츠를 옮겨 놓고 돌아온 용사에게 끌려가 장난감 신세가 되었다. 나는 그 모습을 흘끔 바라보며 자루 안의 내용물을 꺼냈다. 하넨이 부탁한 나머지 재료들이었다.

“아무튼, 하넨 씨가 상인이라고 부르고 싶으면 그렇게 부르셔도 돼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상관없는 거야? 케르츠 말로는 네가 이름 관련 문제로 엄청 화냈다던데.”

“아니, 그거야 뭐. 그때는 사실 뭐든 꼬투리 잡아서 화내고 싶은 기분이었으니까요……. 게다가, 이름조차 안 물어볼 정도로 제게 관심이 없었던 게 속상했던 거지 이름 자체가 문제였던 건 아니고요. 그냥 제 이름이 뭔지 알아만 두시면 그걸로 충분해요.”

“그런 문제였구나. 그럼, 일단은 세온이라고 부를게.”

“제대로 발음할 수 있으면서 왜 하필 그쪽이에요?”

“그야 용사가 그렇게 부르잖아? 호칭은 이왕이면 통일하는 쪽이 좋지. 저 녀석, 세온 세온 하고 노래를 부르며 좋아하고 있는데 이왕이면 기분 맞춰 주는 게 낫지 않겠어?”

이름이 중요하다고 말한 지 1분도 채 안 지난 것 같은데요, 하넨 씨? 뭐, 결국 이렇게 될 것 같다고 예상은 했지만……. 내가 어이없는 심경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든 말든, 하넨은 내가 꺼낸 ‘진실을 보는 눈의 눈물’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다만 그는 내 눈치를 보듯 괜히 민망한 표정으로 흠흠거렸는데, 대충 이유는 짐작이 갔다.

“그나저나, 너한테 대가를 주긴 해야 할 텐데……. 아까도 말했지만 영혼 조각이 충분하지 않아서 어쩌지. 아까 써 버린 회복초까지 다 합치면 우리가 가진 걸 다 털어도 무리야.”

“영혼 조각은 됐어요. 이번에는 대가를 다른 걸로 받을게요.”

“다른 거? 뭐 받고 싶은 거라도 있어?”

“굳이 말하자면 유형의 물건은 아닌데……. 그나저나, 이 재료들이 있으면 그 일기장을 원래대로 복원할 수 있어요?”

“음, 가능해. 지금 당장이라도 복원을 시작할 수 있어. 복원 과정에 며칠쯤 시간이 걸리겠지만 말야.”

내가 재료들을 하넨 쪽으로 밀어 놓자, 하넨은 대체 뭘 원하느냐는 듯 미심쩍은 표정을 짓긴 했지만 일단 재료를 받아 들었다. 얼핏 손해처럼 보이는 행동일지도 모르지만 나로서는 일단 최선의 선택이었다.

지금 용사 일행의 사정이야 빤하니까 없는 영혼 조각을 내놓으라고 떼를 쓸 수도 없고, 어차피 이 재료는 하넨의 손에 들어가야 제 역할을 다할 수 있다. 게다가, 내가 지금까지 관찰한 바에 따르면 하넨은 이런 식으로 거래를 하고 모른 척 입을 씻을 수 있는 성격이 못 된다. 빚지고는 못 사는 사람이란 말이지.

“너무 터무니없는 걸 요구하면 안 돼. 알았지?”

“네, 네. 적당히 요구할 테니 걱정 마세요.”

재료를 받은 하넨은 곧 팔을 걷어붙였다. 그는 지금까지 받은 재료들을 재주껏 섞더니 무슨 시약 같은 걸 만들기 시작했다. ‘어떤 용액을 담더라도 녹지 않는 용기’에 재료를 조금씩 집어넣자 사방으로 자욱한 연기가 퍼져 나왔다.

슬쩍 냄새를 맡기만 해도 몸에 이상이 생길 것 같은 불길한 연기였지만, 다행히도 그 연기는 멀리 퍼지지 않은 채 하넨의 지팡이로 죄다 흘러갔다. 연기가 흡수되면 흡수될수록 지팡이의 표면이 보라색으로 빛났고, 지팡이에 매달려 있던 투명한 주머니 중 하나에는 마치 수은처럼 반짝거리는 액체가 서서히 채워졌다.

하넨은 제법 정신을 집중하는 듯 인상을 있는 대로 찡그렸다. 자세히 살펴보니, 하넨의 지팡이에 달려 있는 수많은 주머니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희미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연기를 정제한 결과로 보이는 수은 비슷한 액체가 조금씩 모이는 동안, 다른 주머니에 담긴 액체의 양은 끊임없이 늘어났다 줄어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다양한 종류의 액체를 이용해 연기를 증류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좋아, 잘 되고 있어. 성공하기만 하면 수천 년 전의 물건도 복원할 수 있어. 내 전공은 아니지만 그럴듯하게 되고 있단 말이지.”

“전공이 아니라고요?”

“너도 알잖아? 내 전공은 독과 저주인 거.”

“아니, 알긴 아는데…….”

전공도 아닌 걸 함부로 시도했다가 실패하면 어쩌려고 그렇게 자신만만하셨어요. 그 말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은 채 나는 하넨이 하는 양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어느 정도 액체가 모이자 하넨은 배낭 속에 소중하게 간직해 두었던 듯한 일기장을 꺼냈다. 말쿠테른의 성직자가 쓴 그 일기장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 일기장, 얻기는 한참 전에 얻었는데 아직도 내용을 모르고 있네.’

하넨이 제대로 일기장을 복원한다면 그 안의 내용 또한 알 수 있겠지. 어쩌면 알고 싶지 않았던 내용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나는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애써 떨쳐 내 버렸다. 가능성이 아예 없지야 않겠지만 지금은 좋게 생각하자고, 좋게.

지팡이가 연기를 전부 흡수하자, 하넨은 지팡이의 아랫부분으로 일기장을 몇 차례 툭툭 쳤다. 그쯤부터는 용사도 내 곁에 와서 하넨이 하는 양을 구경했다. 용사는 뭐랄까,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전혀 모르지만 아무튼 하넨이 신기한 일을 벌이니 재미있어하는 눈치였다.

“용사님, 용사님.”

“왜요, 세온?”

“이거, 일단 케르츠 씨한테는 비밀로 해 주세요. 일기장이 다 복원되고 나면 깜짝 선물처럼 보여 줄 거예요.”

“알았어요. 깜짝 선물.”

알고 싶지 않은 내용이 나온다면 숨겨야 할 테니 지금은 일기장의 존재 자체를 숨기는 게 낫다. 용사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고 끄덕이는지, 아니면 나와 속닥거리는 게 즐거운 건지 긴가민가했지만 일단은 용사를 믿어 보기로 마음먹었다.

투명한 주머니에 담겨 있던 액체가 서서히 줄어들더니 일기장의 표면에 은빛 장막이 생겼다. 아니, 표면뿐만이 아니었다. 그 누구도 손대지 않았건만 일기장의 페이지가 저절로 넘어가기 시작하더니, 일기장의 페이지마다 은빛 액체가 코팅되듯 스며들었다. 마치 책 전체를 수은으로 적시기라도 하려는 듯한 모습이었다.

하넨은 거의 몇 시간 동안 지팡이를 붙잡은 채 일기장에 액체를 주입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마침내 모든 페이지에 은빛 액체가 스며들자, 하넨은 그제야 긴 한숨을 쉬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아, 이제 사나흘만 이대로 두면 일기장이 원래대로 복원되겠지.”

하넨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일기장을 천으로 둘둘 감쌌다. 그러니까, 이제 사나흘만 지나면 내가 여기저기 쏘다니면서 일기장의 재료를 모았던 결과가 나온다 이거지? 부디 쓸모 있는 내용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그나저나 너, 대체 무슨 대가를 얻고 싶은데? 설마 사기꾼 같은 제안은 아니겠지. 처음에는 소원 세 개만 들어 달라고 했다가 세 번째 소원으로 소원 100개 늘리기 같은 걸 한다든지, 뭐 그런 거 말이야.”

“우와, 이 세계에도 그런 게 있어요? 어쨌든 그런 건 아니에요. 솔직히 좀 혹하기는 했지만.”

아니, 어린애도 아니고 소원 100개 늘리기가 대체 뭐야? 나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거리면서 ‘부탁’에 대해 떠올렸다. 굳이 말하자면 사기는 아니었다. 그냥, 아까 용사 녀석에게 들었던 부탁을 조금 모방할 뿐이다. 생각해 보니 나도 미궁을 빠져나간 이후의 대책은 있어야 할 것 같아서.

“혹하다니, 이 능구렁이 같은 상인 녀석이.”

“안 한다니까요, 안 해. 그러니까요, 일단 이 미궁을 나가고 나서…….”

나는 담담히 말을 꺼내려다가 흠칫 몸을 떨었다. 저 멀리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려온 탓이었다. 나와 하넨은 동시에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저 멀리에서 모포에 돌돌 말린 케르츠가 허우적거리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그야 자고 일어났더니 온몸이 모포에 말려 있으면 조금은 당황하겠지만, 케르츠가 저런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광경은 제법 귀한 구경거리였다.

“흠흠. 그냥 나중에 말해 줘.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한 것만 아니라면 어지간해선 들어줄게.”

“그럴게요. 뭐, 시간이야 많으니까.”

우리보다 먼저 일어난 용사와 인형이 케르츠를 모포에서 탈탈 털어 내는 모습을 보며, 나와 하넨은 가볍게 웃음을 교환했다. 케르츠는 비몽사몽간에 모포에서 굴러 나왔다.

* * *

“세온, 안색이 점점 안 좋아지고 있어요. 어디 아파요?”

“아니요, 아픈 건 아니고……. 다시 언데드로 돌아가려나 보네요. 이제야 열여덟 시간이 지났나.”

멍석말이 비슷한 꼴로 자다 일어난 케르츠가 겨우 일어나 얼굴을 씻고 머리를 감았을 때쯤, 불현듯 내 팔다리가 뻣뻣하고 차가워져 갔다. 갑자기 날씨가 추워진 것도 아닌데 뭐가 문제인가 당황했지만 금방 깨달음이 찾아왔다. 이게 바로 언데드로 돌아간다는 신호구나.

분명 원래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뿐인데도, 전신의 감각이 둔해지고 몸이 차가워지는 느낌이 그다지 달갑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 ‘달갑지 않다’라는 감정조차도 곧 희미해져 갔다. 머리로는 느끼지만 가슴으로 체감하지는 않는, 사실 감정이라고 부르기도 모호한 사고방식의 흔적만이 남았다.

가볍게 뺨을 꼬집었다. 뺨이 눌리는 감각이 느껴지기는 했지만 조금도 아프지 않았다. 내가 가볍게 자리에서 일어나자, 머리의 물기를 대충 짜내던 케르츠가 내 쪽을 흘끔 바라보았다.

“세온 씨가 원래대로 돌아갔으니, 이제 다음 층으로 내려가도 괜찮겠군요.”

“세온이라니, 결국 케르츠 씨도 그렇게 부르시네요.”

“애초에 부르라고 알려 준 이름 아닙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적어도 케르츠 씨는 제대로 불러 줄 거라고 예상했거든요. 아니면 그냥 평소대로 상인이라고 부르거나.”

“당신은 제게 대체 무슨 기대를 갖고 있는 건가요.”

“어, 기대라기보단 선입견이나 편견에 가까운데요?”

“무슨 말인지 알 것 같군요. 뭐, 정 싫다면 상인이라고 부를까요?”

“됐어요. 어차피 제대로 안 불러 줄 거면 다른 사람들과 통일이라도 하세요.”

나는 피식 웃으며 짐 꾸러미를 쌌고, 그동안 용사 일행 또한 아래층으로 내려갈 준비를 했다. 그나저나 다음 층에는 과연 어떤 함정이나 사념이 기다리고 있을까. 지난 층과 이번 층을 돌파하는 것만으로도 아주 진이 다 빠질 지경이었는데, 설마 다음 층에는 더한 게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그나저나, 이 미궁은 대체 어디까지 내려가야 끝이 보이는 걸까. 애초에 우리는 어디까지 온 거지? 반절은 돌파한 거야? 문득 떠오른 궁금증이 머릿속을 슬금슬금 채우고 있는데, 짐을 얼추 다 싼 케르츠가 지나가듯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저희가 정말 많이 왔군요.”

“하긴, 많이 오기는 왔지요. 얼마나 더 가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얼마 안 남았습니다. 계산대로라면 앞으로 몇 주 안에는 최종 층에 도착할 겁니다.”

“그렇군요, 진짜 얼마 안 남았……. 잠깐만요. 뭐?”

몇 주 안에 최종 층에 도착한다니, 지금의 진행 속도를 생각해 보면 몇 층만 더 내려가면 된다는 소리 아니야? 나는 반사적으로 인형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나와 케르츠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인형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나는 하넨과 용사를 흘끔 바라보았지만 그들 또한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조금이라도 놀라는 기색조차 없었다. 케르츠는 내가 그것조차 모른다는 사실이 의아했는지 갸웃하며 설명을 덧붙였다.

“이 미궁은 총 12층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지금 저희가 있는 곳……. 그러니까 일주일 동안 사념과 싸웠던 이 층이 9층이지요.”

“9층이라, 그럼 4분의 3 정도 온 셈이네요.”

“그런 셈이지요. 12층은 최종 층, 즉 신의 악함이 기거하는 장소고요. 앞으로도 이런 식으로 층 전체가 통합되어 있을 거라 가정하면……. 아마 마지막 층에는 사념이나 함정이 없을 겁니다.”

“어, 그러면.”

“네. 사실상 10층과 11층만 돌파하면 되는 셈입니다. 두 층만 더 버티면 우리가 목적하는 장소에 도착할 수 있어요.”

용사 일행의 표정에는 성취감과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지금까지 겪어 왔던 숱한 고난들에도 결국 끝이 있다는, 이제 조금만 더 나아가면 세계를 정화할 수 있다는 믿음이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기운을 북돋아 주는 모양이었다.

짐을 다 챙긴 일행들은 아래층으로 향하는 계단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원정의 끝은 생각보다 훨씬 가까운 곳에 있었구나, 나는 그 사실에 꽤 복잡한 감정을 느끼며 그들의 뒤를 따랐다. 아직 이 미궁에 대해서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우리가 미궁의 중심에 훨씬 더 근접해 있었다니.

[안심하기는 이르다. 아직 두 층이 더 남았다.]

‘그거야 그렇지만……. 하긴, 말이 좋아 두 층이지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거대한 공간일지도 모르겠네. 어쩌면 훨씬 더 돌파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고.’

나는 어깨에 앉은 인형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계단을 내려갔다. 백여 개의 계단을 내려가자 긴 복도가 보였고, 우리는 그 복도를 쭉 걸어간 끝에 커다란 광장에 도착했다. 과연 이번 층에는 어떤 함정이 기다리고 있을까. 아니, 어쩌면 수많은 사념들이 기다리고 있지는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비석?”

알고 보니 둘 다 틀렸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묘지의 바다였다.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넓은 광장은 발목까지 오는 깊이의 물에 잠겨 있었으며, 수면 위에는 천장까지 닿을 정도로 압도적인 크기의 비석이 수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비석 앞에는 이미 말라붙은 꽃을 묶은 다발이 둥둥 떠다니고 있어서, 마치 누군가를 추모하기라도 하는 듯한 숙연함이 광장 전체를 메우고 있었다.

우리는 그저, 발걸음을 멈춘 채 그 압도적인 풍경을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 * *

세상의 모든 생명들이 수면 아래에 가라앉은 세계에 발을 들인 느낌이었다.

그 무엇도 움직이지 않는 적막 속에서 가장 먼저 움직임을 보인 건 하넨이었다. 그는 바닥에 고인 물에 지팡이 아랫부분을 가볍게 적시더니 지팡이의 반응을 주의 깊게 살폈다. 아무래도 이 물이 안전한지 아닌지를 확인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지팡이의 윗부분에서 흰 빛이 몇 차례 반짝이자 하넨은 그제야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그냥 맑은 물이야. 산성 용액은 애초에 아니고, 저주가 걸려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오래 고여서 썩어 있지도 않고. 아마 마셔도 괜찮을 만큼 깨끗할걸.”

“이런 곳에 고여 있는 물이 맑다는 사실 자체가 수상쩍긴 합니다만……. 움직임에 방해가 되지 않는 것만큼은 다행이군요.”

케르츠는 그렇게 대답하더니 수면에 둥둥 떠다니는 꽃다발을 건져서 살폈다. 무슨 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국화를 닮은 하얀 꽃잎이 인상적이었다. 이 세계에도 추모의 의미로 묘지에 국화를 놓는 문화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비석 앞에 놓인 꽃에 추모 이외의 어떤 다른 의미가 있는지 상상하기란 좀 어려웠다.

[내가 생각하는 그 목적이 맞다. 이것들은 모두 추모비다.]

“이 비석들이 전부 다 추모비라고? 뭘 추모하기 위한 건데?”

[많은 것들.]

인형은 그렇게만 대답하고는 물에 퐁당 뛰어들어 헤엄을 치기 시작했다. 우리에게야 발목까지밖에 안 잠기는 깊이지만 인형에게는 몸의 절반 정도가 잠길 만큼의 깊이였다. 분명 말투는 심각한데, 팔다리를 바동거리면서 헤엄을 치는 인형의 모습은 안 어울릴 만치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저러다 물 먹은 솜인형이 되어 침몰하는 거 아닌가 생각했지만 인형은 멀쩡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 물에 잠기든 더러운 것이 묻든 항상 뽀송뽀송하고 깨끗한 모습을 유지하곤 했지. 아마 지금 당장 건져 내서 꾹 짜내 봐도 물 한 방울 안 나올 거다.

[각 비석마다 추도하는 대상은 다르다. 직접 읽어 보면 알 수 있다.]

“읽어 보라고는 해도……. 이 많은 것들을 전부?”

[어차피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위해선 비석의 내용을 해석해야만 한다.]

인형이 첨벙거리며 헤엄을 치는 소리에 광장을 메우던 정적이 깨졌다. 용사 일행은 그제야 조심스럽게 광장 안으로 발을 들였다. 그들은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비석 앞으로 다가가 고개를 들었다. 못해도 5미터는 되어 보이는 높이의 새까만 비석은 아무런 무늬조차 없었다. 비석 하단에 새겨진 정체불명의 문양만 제외하면 말이다.

쪼그려 앉아야만 볼 수 있을 정도로 낮은 위치에 수십 개의 문양이 줄지어 새겨져 있었다. 미적인 요소라고 보기에는 눈에 잘 띄지도 않고 그다지 장식적이지도 않았는데, 나는 한참 동안 문양을 들여다보고서야 그게 글자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추측해 냈다.

내 옆에서 문양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케르츠가 손을 뻗어 문양을 만졌다. 마치 손끝으로 점자를 읽어 내리기라도 하듯 조심스러운 모습이었다. 혹시 읽을 수 있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케르츠의 얼굴을 살피던 나는 기이한 사실을 깨달았다.

분명 케르츠의 표정에는 복잡 미묘한 애상이 어려 있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해질 때쯤 케르츠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우리, 신을 따르는 이들은 모든 것을 기억하고 모든 것을 참회하노라. 죄의 무게를 짊어지고도 진실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그에 합당한 이유가 필요할지니. 그렇게 적혀 있군요.”

“신의 언어인가요, 케르츠?”

“예. 신어를 쓰고 읽는 방법을 배우기는 했지만, 막상 신어가 적혀 있는 구조물을 이 눈으로 보는 건 처음이군요. 확실히 저희가 미궁의 중심에 접근해 가긴 하는 모양입니다.”

케르츠는 용사의 질문에 담담히 답했다. 나는 케르츠가 동요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금방 파악했다. 신을 따르는 이들이라 하면 성직자들이다. 어쩌면 용사를 만들어 낸 신전의 사람들을 뜻하는 걸지도 모르지만 다른 가능성도 절반쯤은 있다. 아니, 체감상으로는 후자 쪽의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인다.

케르츠는 자신의 선조들이 새겼을지도 모르는 글귀에서 천천히 손을 떼고 물러났다. 케르츠가 물러나자 용사가 성큼 그 자리를 꿰찼다. 마치 신기한 그림이라도 보는 듯한 그 표정을 보아하니 용사는 신의 언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저도 신의 언어를 읽을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요.”

“신전에서 용사님에게 신의 언어를 가르쳐 주지 않은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겁니다. 어떤 신관들은, 도살자들이 미쳐 버린 이유가 신의 언어를 정신에 새기고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하지요.”

“별로 믿기지는 않는 이야기인데……. 정말인가요?”

“저는 모릅니다. 굳이 신의 언어가 아니어도 미치기 좋은 환경에서 자라난지라.”

나는 저 멀리에서 평화롭게 헤엄치고 있는 인형을 흘끔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인형이 내 영향을 받아 불안정해졌을 때 저 녀석이 신의 언어를 쓰지 않았나? 신의 언어가 정신 건강에 별로 좋지는 않은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용사는 별로 납득하지 못한 표정을 지은 채, 케르츠를 흉내 내듯 조심스럽게 문양을 만졌다. 그 순간이었다.

“……어?”

용사의 손끝이 문양에 닿자 갑자기 문양이 희게 빛나기 시작했다. 문양에서 퍼져 나온 빛은 마치 균열처럼 비석 전체로 퍼져 나갔고, 비석은 그 거대함이 무색할 정도로 순식간에 먼지로 부스러져 사라지더니 용사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그야말로 한순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용사는 흡수의 충격이 상당했는지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용사의 얼굴에는 명백한 고통의 흔적이 어려 있었다. 당황한 케르츠와 하넨이 곧바로 용사의 상태를 살폈다.

“괜찮아, 너? 갑자기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괜찮아요. 그런데 이 비석, 이거…….”

“왜 그러시죠? 혹시 이 비석에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이, 이 비석들, 그 자체로 사념이에요. 워낙 악의가 희미해서 만지고 나서야 알았어요.”

“이것들이 사념이라고? 전혀 사념처럼 생기지 않았는데?”

“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단지 정화되기 위해 있는 사념들이에요. 정화되면서 제 머릿속에 무언가를, 무언가를 남기는데…….”

비틀거리던 용사는 잡을 것을 찾아 손을 뻗었고, 나는 곧바로 용사에게 다가가 손을 잡아 주었다. 용사는 내 어깨에 머리를 대더니 가만히 숨을 골랐다. 이제 보니 용사의 이마에는 진땀이 맺혀 있었고 손은 떨리고 있었다. 평소에 사념을 정화할 때에 비해 훨씬 더 불안정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비석이 남긴 건, 제 머릿속에 남은 건 분명 도움이 되는 정보예요. 저는, 어, 그러니까, 옳은 비석을 찾아야 해요.”

“옳은 비석이라고요?”

“네. 옳은 비석을 모두 찾아서 정화시키면 다음 층으로 가는 길이 드러나요. 옳은 비석을 다 정화시키기 전까지는 다음 층으로 갈 수 없다고, 이 비석이 제게 전해 줬어요.”

“일종의 정보 주입인가. 도움이 되는 정보라면 다행이긴 한데……. 야, 야! 너 괜찮아?”

용사는 내 품에 안긴 채 그대로 졸도해 버렸다.

감긴 눈꺼풀 사이에서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의 눈물이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기절한 용사를 데리고 복도 안쪽으로 돌아왔다. 용사는 몇 분 지나지 않아 다시 정신을 차렸는데, 제법 충격이 컸는지 계속 내 품에 머리를 기댄 채 뺨을 비벼 댔다.

충격 때문에 그러고 있는 건지, 아니면 그냥 내 품에서 뺨을 비비는 행위가 좋아서 그러고 있는지 좀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밀쳐 낼 마음도 없었기에 나는 일단 용사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용사는 어린애처럼 내 허리를 끌어안은 채 숨을 골랐고, 하넨과 케르츠는 방금 전 일어난 일에 대해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무래도, 비석을 정화하는 건 일반 사념을 정화하는 것보다 더 많은 부담이 되는 모양이군요. 아무 비석이나 정화하면서 얻어걸리기를 기대하는 전략은 포기하는 게 낫겠습니다.”

“애초에 물리적으로 무리야. 최소한 수천 개는 될 법한 비석들을 어느 세월에 다 정화해?”

“확실히 그렇지요. 게다가 비석 밑에 뭐가 있을지도 신경을 써야 합니다. 아까 그 비석 아래에는 분명 빈 공간밖에 없었지만……. 어쩌면 비석 아래에 함정이나 강력한 사념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요.”

비석이 사라진 자리에는 사람 몇 명이 앉아 있어도 넉넉할 법한 빈 공간이 있었다. 물론 그 빈 공간은 순식간에 물로 차 버렸고, 신이 나서 수영을 하던 인형이 그 아래로 꼬르륵 가라앉는 해프닝이 벌어졌을 뿐 그 외의 문제는 없었지만……. 이 광장에 존재하는 모든 비석 아래에 텅 빈 공간만 있으리라고 추측하는 건 너무 순진한 짓이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야. 어쩌면 도움이 되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일이 항상 그렇게 잘 풀릴 거라는 보장은 없지.”

“비석을 정화하고 나면 일시적으로 용사님이 무력화되는데, 그 상태에서 함정이나 사념에 휩쓸리기라도 하면 정말로 위험해질지도 모릅니다. 신중하게 움직여야 해요.”

무턱대고 아무 비석이나 정화했다가 위험에 빠지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물론 내게는 예전에 얻은 함정 감별용 보석이 있으니 함정 자체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지만,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사념의 경우에는 분명 대처하기 어려울 거다. 용사가 기절한 상태에서 싸우려면 케르츠나 하넨도 분명 힘들겠지.

그렇다는 건, 비석을 정화하지 않으면서도 ‘옳은 비석’을 찾아낼 방법이 필요하다는 건데……. 과연 어떤 방법일까? 잠시 고민하던 케르츠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어쩌면 문장이 힌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다른 비석들도 슬쩍 살펴보았는데, 그 비석들의 하단부에도 신어로 된 문장이 새겨져 있더군요.”

“아까 그 비석에 새겨진 문장과 같은 문장이었어?”

“자세히 읽지는 못했지만 분명 다른 문장이었습니다. 그 문장들이 괜히 새겨져 있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문장이라, 확실히 일리가 있어. 함정이나 사념이 숨겨져 있는 비석에는 그 사실을 암시하는 문장이 적혀 있을지도 몰라. 수수께끼 풀이라도 하라는 소리인가?”

“귀찮게 되었군요. 함정 돌파나 전투보다야 안전하겠지만, 의외로 이번 층은 장기전을 각오해야 할지도…….”

아래층으로 가기 위해선 비석의 내용을 해석해야 한다던 인형의 말이 이런 뜻이었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용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용사는 내 품 안이 마음에 들었는지, 어느 정도 진정되고 나서도 품 안에서 빠져나가려고 하지를 않았다.

* * *

무조건 ‘옳은 비석’을 찾아내는 데에만 집착하기보다는, 비석에 적힌 문장을 하나하나 살피면서 전체적인 경향성을 파악하는 게 먼저다. 우리는 그렇게 방침을 세운 후 다시 광장 안으로 발을 들였다.

“비석에 새겨진 문장에는 분명 일정한 패턴이 있을 거야. 문장의 패턴에 따라 비석의 종류를 나눌 수 있을지도 몰라. 함정이 설치된 비석에는 함정과 관련된 문장이 적혀 있고, 사념이 숨어 있는 비석에는 사념과 관련된 문장이 적혀 있다든지.”

하넨은 제법 자신감 넘치게 주장했고, 실제로 그의 추측은 어느 정도 맞아 들어갔다. 하루를 꼬박 들여 비석에 새겨진 문장을 조사해 본 결과, 확실히 문장들 사이에는 일정한 패턴이 존재했다. 비석에 적힌 문장의 패턴을 살피기만 해도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들은 대체 무엇을 참회하는가? 우리가 죽인 악함에 대한 참회인가, 악함으로 인해 망가진 우리에 대한 참회인가?]”

“[그들은]이라. 그러면 이 비석은 휴식 공간이네.”

“이 비석을 정화하면 쉴 수 있는 거예요?”

“예, 용사님. 힘드시겠지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용사는 반가워하며 비석의 문양에 손을 가져다 댔다. 산산이 조각나 잿더미로 화한 비석이 용사의 몸 안으로 흘러 들어갔고, 그와 동시에 땅이 진동하면서 몇 미터 반경의 지면이 서서히 솟구치기 시작했다.

발밑이 움직이는 감각에 몸이 조금 휘청거리긴 했지만, 나는 크게 놀라지 않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진동이 금방 가라앉는다는 걸 경험으로 체득했기 때문이다. 케르츠 또한 쓰러지는 용사의 몸을 능숙하게 안아 지탱했다.

그렇게 몇 십 초쯤을 기다리자, 진동이 멈추고 예닐곱 명이 팔다리를 뻗고 누워도 충분할 만한 공간이 수면 위에 완전히 드러났다. 휴식 공간이었다.

“이렇게 쉴 수 있는 공간이 간간이 나와서 좋네요. 용사님이 무리를 하는 감이 있어 마음이 좋지는 않습니다만…….”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쉬고 싶어질 때마다 복도 쪽으로 돌아갈 수는 없잖아.”

하넨이 지팡이를 휘둘러 물기를 쓸어 내자 바닥은 순식간에 건조해졌다. 조금 서늘하긴 하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편안하게 앉을 수 있다. 케르츠는 기절한 채 눈물을 흘리고 있는 용사를 바닥에 눕혔고, 나와 하넨도 바닥에 앉아 한숨을 돌렸다.

이 드넓은 광장 바닥에는 전부 물이 고여 있다. 잠깐 걸을 때는 큰 문제가 없지만, 아무리 그래도 평지를 걷는 쪽보다는 물속을 걷는 쪽이 힘들 수밖에 없다. 발목까지 온다고는 해도 물을 헤치고 걸어야 하니 오래 걸으면 걸을수록 지치기가 쉽다. 처음에는 헤엄을 치며 신나게 놀던 인형도 이제는 지쳤는지 내 어깨 위에서 축 늘어져 있을 정도였다.

무엇보다도 앉거나 누워서 쉴 수가 없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다. 엉덩이를 적실 각오를 한다면 앉는 것까지야 어떻게든 되겠지만 물이 고인 장소에서 누워 잘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니, 체력 회복을 하고 싶다면 입구 쪽 복도까지 돌아가 거기서 쉬거나……. 아니면 이렇게 휴식 공간을 마련해 주는 비석을 찾아 정화해야 한다.

인형이 용사의 볼에서 흘러나와 굳은 영혼 조각을 유리병에 담는 사이, 케르츠는 하넨에게서 백묵을 빌리더니 바닥에 여덟 개의 단어를 적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단어라기보다는 문장의 첫 어절만 따 와서 적은 것뿐이다.

[믿음을], [감정이], [그들은], [희생이야말로]……. 그는 신어를 커다랗게 적은 다음 그 아래에 우리가 알아볼 수 있는 글자로 작게 뜻을 적었다. 하넨이 그 단어의 생김새라도 외워 두려는 듯 집요하게 노려보는 동안 케르츠는 담담히 입을 열었다.

“대부분의 비석에는 이 여덟 개의 단어가 포함된 문장이 새겨져 있지요. [믿음]이나 [감정]이 새겨진 비석 아래에는 아무것도 없고, [그들]이 새겨진 비석 밑은 휴식 공간입니다. 그리고 [희생]과 [절망]을 포함한 나머지 다섯 문장이 적힌 비석 아래에는 함정과 사념이 가득하고요.”

백여 개가 넘는 비석을 하나하나 다 살피며 패턴을 확인하고, 용사가 무리하지 않도록 조심해 가며 각 종류의 비석을 정화해 본 끝에 알게 된 사실이다. 말만 들으면 그다지 어려워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는 제법 고되고 힘든 작업이었다.

비석은 크고, 광장은 넓고, 용사는 한번 비석을 정화하면 적어도 몇 분 동안은 움직이지 못했다. 비석 밑에서 사념이 나오기라도 하면 케르츠와 하넨이 앞장서서 버티고, 나는 용사를 데리고 다른 곳에 도망가 있고, 용사는 겨우 깨어나 피곤한 상태에서 다시 사념을 정화하기 위해 힘을 써야 했다. 꽤나 아슬아슬하고 위험한 과정이었다.

그래도 탐색의 소득은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비석, 함정과 사념이 기다리고 있는 비석은 굳이 정화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 용사가 정화해야 할 비석은 휴식 공간을 마련해 주는 비석 정도밖에 없다. 아니면…….

“이 여덟 종류 외의 다른 문장이 새겨진 비석이라면, 역시 시작 지점의 그거밖에 없었지.”

“용사님에게 정보를 주입했던 그 비석 말이군요.”

“그래. 이제부터 우리가 찾아야 할 건 특이한 문장이 새겨진 비석이 아닐까? 용사가 말했던 [옳은 비석]에는 지금까지와 다른 특이한 문장이 새겨져 있을지도 몰라.”

모든 비석을 일일이 정화할 필요가 없고, 그저 새로운 문장이 적힌 비석을 찾아 정화하기만 하면 된다. 말로만 들으면 꽤 근사했지만 사실 이 또한 아득한 이야기였다.

겨우 깨어났는지 부스럭거리는 용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나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 비석의 행렬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저 걸어서 반대편에 도착하는 것만을 목표로 해도 며칠은 걸릴 정도로 넓은 이 광장에서, 고개를 숙여야 보이는 높이에 있는 문양을 일일이 하나씩 확인해야 한다.

멀리서 보기엔 다 똑같이 생긴 저 비석들 중에서 ‘다른 문장’이 새겨진 비석을 찾으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아니지. 시간은 둘째치더라도, 사막 한가운데에서 바늘 하나를 찾는 수준의 짓을 반복해야 하다니……. 정신력 소모도 분명 꽤나 클 거다.

“쉽지는 않겠군요.”

“그야 그렇겠지. 젠장, 대체 이 많은 비석들을 언제 다 뒤지고 있냐고. 대충 보기에도 수천 개가 훌쩍 넘는 비석들을! 어쩌면 1만 개는 될지도 몰라!”

수많은 비석들을 보며 아득함을 느낀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하넨과 케르츠의 얼굴도 제법 어두워졌다. 정신을 차렸는지 어느새 일어나 앉은 용사도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뭔가 만지작거릴 게 필요한 듯 내 옷자락을 붙잡길래, 손을 슬쩍 내밀어 주었더니 아예 내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이렇게라도 불안감을 가라앉히고 싶은 걸까.

물론, 엄밀히 따지고 보면 불안을 느낄 정도의 일은 아니다. 시간을 충분히 들이기만 하면 언젠가는 아래층으로 내려갈 수 있을 테니까. 다만 조금 시간을 단축할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그러니까, 예를 들면…….

“있잖아요.”

“왜 그러십니까, 용사님?”

“위에서 그랬던 것처럼 조를 나눠 움직이면 어떨까요?”

“조를 나눈다고? 확실히 일리가 있네.”

“그렇군요. 어차피 이 광장에는 위험한 것도 없으니 조를 나눠 움직이는 게 더 효율적일지도 모릅니다.”

내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던 용사가 문득 입을 열었다. 하넨과 케르츠는 용사의 제안이 제법 솔깃한 눈치였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제안이었다. 하다못해 두 조로 나누기만 해도 지금보다 진척 속도가 두 배는 빨라질 거다. 물론 두 조로 나뉜 상태에서 갑자기 기습당하기라도 하면 대처하기가 곤란해지겠지만, 어쩐지 이 광장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이곳은 추모의 공간이다. 일부러 비석을 건드리지 않는 이상 공격당하는 일은 없을 거다.]

“진짜 공격당하지 않는 거야? 그러면 다행이네.”

“그래도, 길을 잃거나 불의의 사고가 생겼을 때 예방책은 있어야 하니까 혼자 움직이는 건 위험하겠지? 두 명씩 나눠서 움직이기로 하자.”

“그럼 나는 세온이랑 갈래요! 세온이랑 인형이랑 같이 가고 싶어요.”

용사는 눈을 빛내며 손을 붕붕 흔들었고, 용사에게 잡힌 내 한쪽 손도 덩달아 위아래로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용사의 반대편 손에 붙잡힌 인형도 위아래로 흔들리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어쩐지 저 녀석, 처음부터 나나 인형과 같이 가려고 이런 제안을 한 것 같은데? 딱히 그게 싫다는 건 아니지만, 제 딴에는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나름대로 수를 쓰는 모습이 조금 귀엽다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용사의 노림수는 별로 이루어질 것 같지 않았다. 용사의 말을 들은 하넨과 케르츠가 고개를 갸웃했기 때문이다.

“아니요, 그것보다는 다른 식으로 조를 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만.”

“다른 식이요?”

“일단 세온과 인형은 따로 움직여야 할 것 같아. 위층에서도 그랬잖아. 세온은 인형과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유사시에 무슨 일이 생겼을 때 곧바로 상황을 전달할 수 있어. 그러니까 세온과 인형은 다른 조에 있었으면 해. 괜찮겠지, 세온?”

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고, 인형은 용사의 손아귀에서 슬쩍 빠져나와 하넨의 옆으로 걸어갔다. 용사는 조금 아쉬운 표정을 짓긴 했지만 금방 납득한 듯했다. 다만, 인형은 놓쳤어도 나까지 놓치고 싶지는 않았는지 이제는 아예 양손으로 내 팔을 잡았다.

“그, 그럼 세온이라도.”

“그렇게 되면 저와 마법사님과 인형이 한 조, 세온과 용사님께서 한 조가 됩니다만……. 그것도 별로 효율적이진 못할 것 같군요.”

“왜요?”

“인형은 신어를 구사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한 조에 한 명 정도는 신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도록 조를 짜는 쪽이 편리하겠지요.”

“어, 저 녀석이 신의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고?”

“마법사님은 그때 주무시고 계셔서 모르셨겠지만, 세온이 인간성을 되찾았을 때 저 인형도 불안정해져서 신어를 마구잡이로 뱉어 냈습니다. 신어를 능숙하게 말할 수 있다면 읽을 수도 있겠지요.”

케르츠는 그렇게 말하며 인형을 바라보았고, 하넨과 용사 또한 인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인형은 갑자기 주목받는 상황이 되자 조금 당황하는 듯하더니 곧 뽐내는 자세를 취했다. 나는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뜨리지 않기 위해 애써 입을 막아야 했다.

아무튼 케르츠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겠다. 인형 녀석은 분명 신의 언어를 읽을 수 있을 테니, 인형 조와 케르츠 조로 나눠서 움직인다면 따로 움직이면서도 신의 언어를 무리 없이 해석할 수 있다. 만약 케르츠와 인형이 한 조가 되어 움직인다면, 나머지 한 조는 비석에 새겨진 문장을 해석할 방법이 전혀 없다는 문제가 생긴다.

“그러니 저와 인형이 한 조가 되는 상황도 별로 바람직하지는 못합니다. 차라리 이건 어떨까요. 예전에 두 갈래 길에서 그랬던 것처럼, 저와 세온이 한 조가 되고 마법사님과 용사님과 인형이 한 조가 되는 겁니다.”

“다, 다른 방법은 없어요? 그러니까. 세온과 인형은 한 조가 되면 안 되고. 케르츠랑 인형도 한 조가 되면 안 되고. 그러면…….”

“너는 뭘 또 그렇게 계산하고 앉았어? 어차피 몇 시간에 한 번씩 휴식 장소에 모여야 하니까 그때 실컷 볼 수 있잖아. 포기해, 그냥.”

용사는 나름대로 계산을 해 보려는 듯 끙끙거리며 애를 썼지만, 결국 자기가 만족할 수 있는 방향으로 조를 짜는 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곧 그만두고 말았다. 원래 의도했을 상황과는 아예 반대로 돌아가 풀이 죽은 모습이 역력해 보는 나조차도 괜히 안쓰러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게다가,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의 조 편성은 나도 별로 내키지가 않는데…….

“저기, 이번에는 광증에 시달려서 사람 패고 그러시면 안 돼요.”

“……영혼 조각을 충분히 챙겨 가죠.”

왜 하필 케르츠일까. 하다못해 하넨만 되었어도 좀 편안한 마음이었을 텐데. 폭력으로 점철된 저 사람과의 인연을 되짚어 보며 영 떨떠름한 표정을 짓든 말든, 케르츠는 신경조차 쓰지 않은 채 그대로 바닥에 드러누웠다. 조금 더 쉬고 나서 출발하려는 모양이다. 나는 어느새 다가와 무릎베개를 시도하는 용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휴식 시간을 흘려보냈다.

* * *

[용사의 전언이다. 세온은 잘 걷고 있나요.]

‘잘 걷고 있다고 전해 줘. 케르츠 씨도 잘 걷고 있어.’

[용사의 전언이다. 졸리거나 피곤하지는 않나요.]

‘안 피곤하다고 전해 줘. 애초에 말이지, 난 이제 인간성이 사라졌으니까 졸리거나 피곤하지 않다고.’

[용사의 전언이다. 케르츠는 괜찮나요. 아파하면서 머리를 붙잡거나 힘들어하거나 하지 않나요. 혹시 세온을 때리지는 않나요.]

‘별로 그래 보이지는 않는다고 전해 줘. 그런데 말이지, 혹시 용사 녀석이 많이 심심해하고 있어?’

[인형의 전언이다. 인형은 용사에게 이런저런 폭력을 당하고 있다. 주로 만지작거려지거나 볼을 부비적부비적 문대지거나 이리저리 흔들리는 종류다.]

‘그냥 너랑 놀고 싶어 하는 거잖아. 잘 놀아 줘. 보아하니 많이 심심한 듯한데.’

용사와 헤어져 따로 행동하기 시작한 지 한 시간이 훌쩍 넘었지만 전혀 헤어진 기분이 들지 않았다. 용사가 인형을 통해 끊임없이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몸을 숙인 채 비석의 글자를 읽고 있는 케르츠를 잠시 흘끔거리다가, 고개를 돌려 반대편의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용사와 하넨은 저 너머 어딘가에서 인형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겠지. 내 이야기든, 비석에 적힌 문장에 대한 이야기든.

어쩌면 그 사람들, 인형이 비석에 적힌 문장을 설명해 줄 때는 귀 기울여 듣다가 용사의 장난감 취급에 항의할 때는 귀신처럼 딴청 부리며 아무것도 못 들은 시늉을 할지도 모르겠다. 인형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잠깐 들기는 했지만, 막상 직접 그 장면을 보면 나도 말리지 않은 채 재미있어하고 있겠다는 생각이 뒤따라와 괜히 웃음이 나왔다.

보이지도 않는 용사의 흔적을 찾아 기웃거려 보다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찰박거리는 물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케르츠가 일어나 걷고 있었다. 비석을 확인해 보니 이미 백묵으로 그은 커다란 X자 표시가 남겨져 있었다. 나는 케르츠에게 무언가 말을 걸까 고민하다가, 그저 입을 다문 채 그의 뒤를 따라갔다. 저 사람 보폭이 워낙 커서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그렇게 몇 분쯤 걸은 후, 다음 비석에 도착한 케르츠는 다시 몸을 숙인 채 비석의 문장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케르츠의 옆에 선 채 그 모습을 멀뚱멀뚱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도와줄 일이 아무것도 없네. 그냥 옆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거 말고는…….’

몸이야 편했지만 어쩐지 기운이 빠졌다. 차라리 뭐라도 도울 일이 있으면 지금보다는 덜 지루할 것 같았다. 신의 언어를 모르니 문장 해석을 도울 수도 없고, 그렇다고 용사 일행 쪽에 특별한 이변이 일어난 것도 아니니 연락책으로서의 본분을 다하지도 못한다.

정말이지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인 셈이었다. 인형이 간간이 용사의 전언을 전해 주기라도 하니까 그나마 견딜 만하지, 그나마도 없었더라면 지금쯤 나는 지루해서 미쳐 버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케르츠의 옆모습이나 빤히 바라보았다. 케르츠는 비석의 문장을 읽고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고, 백묵으로 비석에 X자 표시를 그렸다. 또 허탕인 모양이었다. 그는 별로 실망한 기색도 없이 백묵을 주머니에 집어넣었지만 그의 표정에는 명백한 지루함이 어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 사람도 참 심심하기는 하겠다. 별다를 것도 없는 비석의 문장이나 들여다보고 있는 게 뭐 얼마나 재미있겠어. 차라리 나라도 말을 걸어 볼까? 조금이라도 분위기 개선을 시도해 보고자 하는 마음에, 나는 케르츠의 옆에 다가가 흠흠 헛기침을 했다. 케르츠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보았다.

“왜요, 무슨 소식이라도 들으셨습니까?”

“용사님이 아까 인형을 통해서 물어보더라고요. 혹시 케르츠 씨가 피곤하거나 아파 보이지는 않으시냐고. 괜찮으세요?”

“세온 씨에게만 묻기는 민망하니 덤으로 제게도 물어보는 거군요. 저야 괜찮습니다만.”

케르츠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답했다. 다행히도 기분은 별로 나빠 보이지 않는 눈치였지만, 그야말로 정곡을 찌르는 한 마디에 덩달아 쓴웃음이 나오는 것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하긴 뭐, 저 어린 용사님이 던진 질문의 9할 정도는 나를 향한 거였지 케르츠를 향한 게 아니었다. 그나마 케르츠에게 던져진 질문조차도, 케르츠 본인의 안부가 궁금하다기보단 ‘케르츠가 광증에 휩쓸려 나를 때리지는 않냐’ 쪽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었으니까.

물론 그 사실을 곧바로 인정해 버리는 건 케르츠에게 다소 실례되는 일이었으므로, 나는 일부러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분명 용사 녀석도 케르츠를 걱정하고는 있을 거라고. 나에 비하면 훨씬 강한 사람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덜 걱정되는 측면이야 있겠지만…….

“진짜 너무하시다. 대체 용사님한테 얼마나 기대가 없으신 거예요?”

“기대가 아니라 예측에 가깝습니다만. 원래 우리 용사님은 남에게 그런 걸 묻는 성격이 아니었어요. 당신과 어느 정도 친해지기 전까지는.”

“그냥 용사님이 케르츠 씨를 어려워하는 건 아니고요?”

“그런 문제는 아닙니다. 당신도 알잖습니까? 예전의 용사님은 조금 더 무뚝뚝한 성격이었어요.”

“……그랬던가요?”

“용사님과의 첫 만남이 어땠는지 떠올려 보시죠. 제가 당신 머리를 으깬 건 선명하게 기억하면서, 용사님이 대뜸 검부터 휘두르신 건 편리하게 까먹었나요?”

맞다, 그런 일도 있었지. 나는 까마득하게 먼 옛날처럼 느껴지는 일을 떠올리며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인형이 보호막을 펼쳐 막아 주지 않았더라면 제법 크게 다쳤을지도 모른다. 물론 죽지도 않았을 테고, 아픔을 느끼지도 않았겠지만 어느 정도 충격을 받기는 했을 거다.

지금 다시 떠올려 보니, 그때의 용사는 이렇다 할 감정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굴었다. 어쩌면 윤리 의식조차 희박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용사의 나이가 어리다고는 해도, 검을 휘두르면 사람이 죽거나 다친다는 걸 아예 모르지는 않았을 거다. 신전에서 교육을 받고 케르츠와 하넨과 함께 열 달 동안 바깥을 여행했을 테니까 그 정도는 알았겠지.

어쩌면 그 당시의 용사는 내가 죽든 말든 아무래도 좋았을지도 모른다. 그저 사념을 정화할 수 있다면, 자신의 사명을 다할 수만 있다면 그 외의 일은 별로 관심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당신에게 애착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용사님은 많이 변했어요. 감정이 생기고, 욕구가 생기고, 자기 욕구를 채우기 위해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정말로 큰 변화지요.”

“……그런가요.”

“방금 용사님이 조를 나누자고 제안하셨던 걸 기억하지요? 예전의 용사님이었다면 그런 제안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물론 예전의 용사님에게 자기주장이랄 게 아예 없었던 건 아니지만……. 솔직히 당신도 알잖습니까. 용사님이 어떤 의도에서 그런 제안을 했는지.”

“알긴 알아요. 저와 단둘이 가고 싶어서 그랬겠지요.”

“결국 자기 욕구를 위한 제안이지요. 용사님이 저렇게 적극적으로 자기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솔직히 저도 처음 보는군요.”

어쩐지 대화가 묘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거 같은데. 대화를 나누고는 있지만 분위기를 띄우기는커녕 오히려 더 가라앉히는 대화였다. 나는 케르츠의 안색을 슬금슬금 살폈다. 만약 하넨과 이런 대화를 했더라면 나도 이렇게까지 걱정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래서, 그게 마음에 안 드세요? 케르츠 씨는.”

질문이라기보단 사실상 확인에 가까웠다. 저 사람, 용사가 있는 자리에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내심 용사의 변화를 언짢아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 어쩌면 조를 나누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이 이야기를 꺼내기로 작정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케르츠가 용사의 변화를 바라지 않는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저 사람은 내가 용사에게 영향을 주는 걸 꾸준히 경계해 왔고, 용사가 내게서 부정적인 영향을 받아 원정에 차질이 생길까 봐 걱정해 왔다. 분명 이번에도 비슷한 잔소리가 쏟아지겠지, 내심 그렇게 각오하면서 케르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데.

“질문 하나 해도 괜찮습니까?”

“네?”

아니, 질문은 내 쪽에서 먼저 했잖아. 그러면 내 질문에 먼저 대답해야지! 나는 그렇게 항의하고 싶었지만 케르츠가 들은 척도 안 할 걸 알았기 때문에 그냥 입을 다물고 말았다. 저 사람이 그런 식의 항의를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나와 저 사람의 관계가 지금처럼 어색하지는 않았을 거다. 제멋대로인 작자 같으니라고.

“비록 지금은 언데드로 돌아왔어도, 인간성을 되찾았을 때의 일을 기억하고는 있지요?”

“그렇기는 한데요.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세요?”

“어떻게 평가하고 계십니까?”

“뭘요?”

“인간성을 되찾았을 때와 인간성을 잃었을 때, 어느 쪽이 당신에게는 더 만족스러웠냐고 묻는 겁니다.”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에 당혹감이 차올랐다. 저건 대체 무슨 의도의 질문일까? 저 사람이라면 당연히 인간성이 없을 때의 내 모습을 더 좋아할 테고, 내 대답을 듣는다고 해서 저 사람의 선호도가 특별히 바뀔 것 같지는 않은데……. 아니, 그 전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용사 이야기를 하다가 왜 갑자기 내 인간성 이야기가 나오는 거야? 용사 녀석의 감정이 조금 더 풍부해진 것과 내 인간성 사이에 무슨 연관성이 있는데?

케르츠는 천천히 다리를 움직여 다음 비석을 향해 걷기 시작했고, 나는 부지런히 그 뒤를 따랐다. 첨벙거리는 물소리를 제외하면 사방이 그저 조용했다. 내가 한동안 대답을 않자 케르츠가 다시 입을 열었다.

“순수하게 질문하는 겁니다. 화를 내거나 언짢아하는 게 아니에요.”

“그쪽이 언짢아하면 뭐 어쩔 건데요. 아니, 애초에 그런 질문은 왜 하시는데요?”

“그저 궁금해서 물어본 것뿐인데요.”

“그야 궁금하니까 물어보셨겠지요. 제 말은, 왜 갑자기 그런 게 궁금해지셨냐고요. 애초에 케르츠 씨는 어떤데요? 어느 쪽이 더 마음에 들어요?”

“제 의견이 중요한가요? 어차피 당신 문제인데요. 당신이 방금 말했듯이, 제가 당신의 인간성을 마음에 들어 하든 말든 어쩌겠습니까. 결국 중요한 건 당신의 의견이지요.”

하여간에 말 한 번 얄밉게 한다니까! 괜히 짜증이 치솟기는 했지만, 그래도 케르츠의 갑작스러운 변화가 묘하게 신경 쓰이기는 했다. 무턱대고 내게 언짢음을 드러내기만 하던 예전과 비교하면 확실히 차이가 보였다.

지금의 케르츠는 마치 무언가를 확인하고 싶은 듯한 눈치였다. 원래부터 자기 확신에 차 있어서 옆에서 누가 뭐라든 듣지도 않던 예전의 모습에 비하면 분명 어딘가 달랐다. 케르츠는 용사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지만, 정작 그 이야기를 꺼내는 케르츠 본인 또한 예전에 비해서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저 궁금할 뿐입니다. 감정을 되찾았을 때의 당신은 인간성을 잃어 무감정했을 때의 모습을 어떻게 평가했는지, 다시 인간성을 잃은 지금은 감정을 되찾았을 때의 당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

“갑작스럽게 밀려드는 감정의 혼란스러움을 두려워하셨습니까? 아니면 오히려 감정 없는 공허함을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겨우 되찾은 감정을 기뻐하셨습니까? 아니면, 반대로 겨우 되찾은 평온함을 달가워하고 있습니까?”

그러니까, 용사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왜 갑자기 그런 이야기로 흐름이 바뀌었는지가 가장 궁금한데……. 저 사람이 자기 마음대로 화제를 바꾸는 거야 그렇게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지금 내가 궁금한 건 왜 케르츠가 화제를 갑자기 이쪽으로 바꿨냐 하는 점이다.

저 사람, 설마 용사의 변화와 나의 인간성을 겹쳐 보고 있는 건가? 용사의 감정이 조금씩 풍부해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인간성을 되찾은 나와 인간성이 없던 시절의 나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어쩐지 그럴듯한 가설처럼 보이기는 했다. 조금 엉뚱한 연결이기는 했지만, 그런 식으로 추측해 보면 케르츠가 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지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그렇다면 저 사람은 결국, 용사의 변화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다는 걸까. 그래서 나에게 내 감정의 변화를 어떻게 생각하냐는 식으로 질문하는 걸까…….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다가 흠칫 놀라고 말았다. 이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케르츠의 표정에서, 문득 묘한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다시는 인간성을 되찾고 싶지 않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상황이 되는 한 언제든지 인간성을 되찾고 싶다고 생각합니까? 인간성을 되찾는 행위가 당신의 주체성에……. 당신이 어떤 결정을 내리게끔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오히려 인간성 없는 상태가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까?”

집요함. 지나친 몰입. 어째서인지 지금의 케르츠는, 어딘가 결핍된 듯한 표정으로 나의 반응을 살피고 있었다. 단순한 호기심에서 나올 만한 감정은 절대 아니었다. 저 사람, 지금 남의 이야기……. 그러니까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 맞지?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라?

그 희한한 모습에 내심 당황해서 케르츠를 빤히 바라보다가 갑작스럽게 떠오른 생각이 있어 곧바로 입을 열었다. 묘하게 폭주하고 있는 케르츠의 사고방식에 찬물을 끼얹을 필요가 있었다.

“저기, 거기에 대해 답하기 전에 먼저 말해 두고 싶은 게 있는데요. 일단 전 케르츠 씨가 아니에요.”

“무슨 뜻인가요.”

“제가 인간성을 되찾거나 잃는 상황은, 케르츠 씨가 광증에 시달리거나 이성을 되찾는 상황과 다르잖아요. 그걸 겹쳐서 생각하시지는 말라는 거예요.”

조금 뜬금없는 대답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점만큼은 확실히 해 두고 싶었다. 케르츠 저 사람, 지난번에 내가 인간성을 되찾은 모습을 보았을 때 조금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단 말이지. 평소 같았더라면 내게는 관심조차 없었을 텐데 굳이 이 상황에 그런 걸 묻는 것도 조금 수상쩍고. 게다가, 정말로 감정 이입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면 저렇게까지 집요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굳이 말을 꺼낸 거였다.

어쩌면 내가 헛다리를 짚은 게 아닐까 싶어 내심 불안했지만, 케르츠는 헛소리하지 말라고 일축하는 대신 가만히 멈춰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조금은 안정된 듯한 서늘한 눈빛이었다.

“다릅니까?”

“다르지요. 그리고 말이지요, 용사님도 케르츠와는 다른 건 마찬가지고요.”

“……그렇죠. 확실히 다르지요. 당신 말이 맞기는 하네요.”

“용사님의 감정이 풍부해진다고 해서, 용사님이 무언가에 대한 욕구를 가지게 된다고 해서, 그 감정 때문에 용사님이 미치거나 자기 뜻에 어긋나는 짓을 저지르지는 않아요. 감정은 광증이 아니잖아요.”

문득 예전에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사람은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혐오한다기보다는,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기는 하지만 존재 자체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무언가를 혐오한다고. 어쩌면 케르츠가 저렇게 결벽증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도 그런 혐오의 일환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하지만, 때로는 감정이나 사사로운 욕구에 휩쓸린 나머지 올바른 길을 선택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꼭 광증 수준까지 가지 않더라도 그런 일은 종종 일어나곤 하지요.”

“감정이 없다고 해서 늘 올바른 길만 선택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자기 욕구를 자각조차 하지 못하는 것보다는 자기 욕구가 무엇인지 알아 두는 게 더 낫지요. 어쩌면 그것도 성장의 증거일지도 모르고.”

자제력도, 이성도 없이 자기 욕구에만 휩쓸려 행동하고, 심지어 때로는 자기 욕구조차 아닌 즉흥적인 분노에 정신을 빼앗겨 살아오던 세월이 아주 오래되었다면. 그러다가 아주 가끔 이성을 되찾아 그런 자신의 모습을 혐오하고, 심지어 이성을 되찾은 상태에서도 종종 감정에 휘둘려 아무렇게나 행동하며 살아간다면.

“하지만……. 어쩌면 가능성이 생길지도 모르잖습니까. 자기 욕구를 옳음보다 중시하게 될 가능성이.”

“가능성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이죠. 선택하는 건 자기 몫이고.”

그렇다면 타인의 감정이나 욕구에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할 수도 있지 않을까. 타인의 감정을 두려워하고 욕구를 염려하게 되는 건 아닐까. 욕구를 가지기만 하면 무조건 거기에 휩쓸려 고꾸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나는 잠시 케르츠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저 사람이 반박하거나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케르츠는 조금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어 보일 뿐 이렇다 할 반감을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가요. 당신의 의견은 대충 알겠습니다.”

“왜요, 마음에 안 들어요?”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그냥……. 좀 더 생각을 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어쩌면 신도 당신과 같을까요?”

“신이요?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됐습니다. 그저 제 생각일 뿐이에요. 그나저나, 새로운 문장을 발견하려면 앞으로 얼마나 더 걸릴지 모르겠군요. 조금이라도 소득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나는 노골적으로 말 돌리기를 시도하는 케르츠에게 딴지를 걸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만두었다. 뭐, 본인의 머릿속이 복잡하다면 나름대로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겠지. 그나저나 용사 일행은 지금쯤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 소득이 있기는 할까? 케르츠가 꺼낸 화제에 대해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데.

“어?”

갑자기 시야에 뿌옇게 노이즈가 끼더니 낯선 영상이 그 위에 덧씌워졌다. 그게 인형의 시야 공유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갑작스럽게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이 변하는 바람에 휘청거리자 케르츠가 내 몸을 받아 주었고, 나는 케르츠에게 몸을 기댄 채 인형이 전해 주는 정보에 집중했다.

‘뭐야, 갑자기?’

[새로운 문장이 적힌 비석을 발견했다. 용사가 비석을 정화함으로 인해 광장의 본질이 바뀌었다.]

인형의 것으로 추정되는 시야 한가운데에 용사가 있었다. 인형은 하넨의 어깨에 앉은 채, 은빛 머리카락을 손잡이처럼 붙잡고 용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용사가 마주 보고 있는 비석은 이미 균열이 퍼져 나갈 대로 퍼져 나가 붕괴하기 일보 직전이었고, 부서진 비석 조각은 용사의 몸 안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평범한 정화 과정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신이 전능하다면 신의 악함 또한 전능하다. 선함이 악함을 이길 수 있다면 악함 또한 선함을 이길 수 있다.] ……그게 이 문장의 뜻이야?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하넨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인형의 시야가 용사에게서 벗어나 아래로 향했고, 나는 저 비석의 정화 과정이 지금까지의 정화 과정과는 꽤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뭐가 다르냐면…….

“광장 전체의 물이 검게 변하다니……. 대체 용사님 쪽에서 뭐가 일어나고 있는 겁니까, 세온 씨?”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맑기 그지없던 물이, 마치 잉크를 쏟아붓기라도 하듯 새까맣게 물들고 있었다.

* * *

“물의 색깔만 바뀌었을 뿐이야. 이렇다 할 성분 변화는 없어. 그저 우리 기분이 좀 나빠진 거 빼고는 아무런 부작용도 없으니 그 점에 대해서는 안심해도 괜찮아.”

“예, 그건 참 다행이군요. 적어도 물이 맹독으로 바뀌어 다리가 녹아 없어지는 것보다야 낫겠지요. 물론 저 비석을 건드리지 않는 게 최선이었겠지만요.”

“아니, 그. 미안하긴 한데 말이지.”

“새로운 문장을 발견하셨다면 저희에게 말 한 마디라도 먼저 해 주셨어야지요. 저희에게는 말도 없이 갑자기 정화부터 해 버리시면 어쩌자는 겁니까?”

평소 같았더라면 케르츠의 날 선 태도를 좋게 보지 않았겠지만 이번만큼은 예외였다. 용사 일행과 합류하기 위해 정신없이 달려오는 동안, 나 또한 정신이 반쯤 나가서는 헛소리만 지껄였으니까. 그나마 케르츠가 정신을 붙잡고 앞서 달리지 않았더라면 나는 엉뚱한 방향으로 달리다가 길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투명하기 그지없던 물이 삽시간에 검게 물든 장면은 의외로 시각적 충격이 어마어마했다. 마치 늪에 발이 빨려 들어가듯, 금방에라도 발밑에서 무언가 튀어나와선 우리의 발을 붙잡아 넘어뜨리기라도 할 듯, 아니면 우리가 아니라 용사 일행이 그런 상황에 닥쳐 있을 듯한 불길함과 초조함이 머릿속을 꽉 메웠다. 분명 인형을 통해 하넨의 저 설명을 몇 차례씩이나 반복해 들었는데도 소용이 없었다.

결국 나와 케르츠는 허옇게 질린 얼굴로 하넨 일행이 있는 곳까지 달려왔고, 하넨은 적잖이 당황한 듯 우물쭈물했다. 다만 하넨에게도 항변할 만한 명분은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따지고 보면 이 일의 진짜 원흉은 하넨의 부주의함이 아니기도 했다. 오히려…….

“야, 나도 말리려고 했어! 그런데 인형 녀석이 괜찮다고 했단 말이야! 아래층으로 내려가려면 결국 정화해야 할 비석이라고 저 솜뭉치가 부추기는 바람에……!”

사태의 진짜 원흉인 인형은, 마치 자신에게는 아무런 잘못도 없다는 듯 태연하게 용사의 어깨에 올라간 채였다. 나는 가만히 한숨을 내쉬며 인형을 바라보았다. 용사가 자기에게 스킨십을 시도할 때는 그렇게 싫다며 칭얼거렸던 주제에, 이제 녀석은 용사의 볼에 자기 볼을 부비적거리며 우리의 말싸움을 모른 척하고 있었다.

용사는 다른 비석에 등을 기댄 채 훌쩍거리며 인형의 위로를 받고 있었다. 코가 빨갛고 눈이 엄청 충혈되어 있는 걸 보니, 정화의 후유증이 아니라 진짜로 감정이 북받쳐서 우는 것 같았다. 마치 악몽을 꾸기라도 한 것처럼 괴로움에 가득 찬 그 표정을 보고 있노라니 나까지 괜히 기분이 안 좋아질 정도였다.

“그래요, 마법사님의 말이 맞다면 저 인형에게 우선 물어봐야겠군요. 대체 무슨 생각인 겁니까?”

[인형은 용사에게 정보를 제공했을 뿐이다. 인형은 타인에게 자신의 의사를 강제하지 않는다.]

“말장난하지 마, 너. 용사가 네 이야기를 들으면 곧바로 비석을 정화하려 들 걸 알고 그런 거잖아.”

[어차피 정화해야 할 비석이다.]

인형은 그렇게만 말하고는 다시 용사를 달래기 시작했고, 용사는 인형을 집어 들어 축축한 눈가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금 한숨을 내쉬며 용사에게 손수건을 건넸다. 용사는 손수건을 내미는 내 손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곧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보더니 나를 끌어안았다. 아니,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으라고요. 내 옷깃으로 닦지 말고.

그나저나 인형이 저런 식으로 나오니 나나 케르츠도 기운이 빠질 수밖에 없었다. 하긴 저 녀석, 미궁의 구조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으니 이 비석을 건드렸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당연히 알았겠지. 알려 줘도 별다른 피해가 없을 거란 걸 아니까 용사에게 선뜻 정보를 제공해 줬을 테고.

게다가 인형은 말 그대로 부추기기만 했을 뿐이다. 결국 그 부추김에 넘어간 용사의 잘못도 없다고는 할 수 없었다. 하넨의 설명에 의하면, 인형이 용사에게 비석에 대해 설명해 주자 호기심에 가득 찬 용사가 멋대로 비석을 정화해 버렸다고 하는데……. 딱 보기에도 호기심의 대가를 충분히 치른 듯한 용사에게 차마 화를 낼 수는 없었다.

지금 용사는, 보통 비석을 정화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심한 쇼크를 받은 모습이었다. 우리가 한참 동안 달려온 끝에 하넨 일행과 합류했는데도 한동안 그 사실을 눈치조차 채지 못한 양 굴었으니까. 단지 발을 담그고 있는 물의 색이 바뀌어서 놀란 정도가 아니었다.

혹시 비석을 정화하는 과정에서 용사가 어떤 정신적 타격을 받은 건 아닐까? 포옹을 풀고 용사의 얼굴을 바라보자, 용사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머쓱하게 시선을 돌렸다. 옆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던 케르츠가 씁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용사님, 저희가 올 때까지 기다리셨어야죠.”

“미안해요. 하지만, 그. 인형이 괜찮다고 해서. 이걸 전부 정화하면 예전에 신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제대로 알 수 있다고 해서, 그게 궁금해서…….”

용사는 우물쭈물하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렇구나. 이걸 정화하면 예전에……. 잠깐, 뭐라고? 용사가 꺼낸 뜻밖의 이야기에 나와 케르츠는 얼굴을 마주 보았고, 용사는 혼날 일을 두려워하는 어린아이처럼 나와 케르츠의 눈치만 살폈다.

물론 이제 와서 용사를 혼낼 리는 없었다. 나와 케르츠의 시선은 자연히 인형에게 옮겨졌고, 인형은 태연하게 용사의 머리 위로 기어 올라가더니 우리를 내려다보며 설명을 덧붙였다.

[광장의 이면을 완전히 일깨워 신의 과거를 직면하면,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길이 열린다.]

“광장의 이면이라고……? 아니, 그 전에. 신의 과거를 직면한다는 건 또 무슨 소리야?”

[이곳은 추모와 기록의 공간이다. 무엇을 추모하는지조차 모르는 채 묘지를 떠도는 이에게 길이 열릴 리 없다.]

추모와 기록의 공간이라니, 분명 처음에는 추모의 공간이라고만 했잖아. 나는 인형에게 그렇게 항의하려다가 곧 입을 다물었다. 생각해 보니 당연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추모는 슬픈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해 행하는 일이다.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해서는 과거에 대해 기록해 둘 필요가 있겠지.

그런 맥락에서 생각해 보면 충분히 이해가 가지만……. 내가 인형의 말을 곱씹으며 고개를 갸웃하는 동안 케르츠는 용사에게 말을 건넸다.

“그렇다면, 용사님이 보셨다는 신의 과거라는 건 어떤 내용이었나요?”

“아픈 걸 봤어요.”

“아픈 거라뇨?”

“지금은 떠올리고 싶지 않아요. 나중에, 조금 덜 아파지면 말할게요. 하지만 지금 말해야 할 게 하나 있어요.”

아픈 거라니, 설마 용사는 ‘신의 과거’를 보았기 때문에 저만큼이나 큰 충격을 받은 걸까? 케르츠는 신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워낙에 용사가 진저리를 치고 있었으므로 일단 화제를 돌려 주었다.

“무엇이지요? 혹시 이 광장에 대한 정보입니까?”

“네. 신의 과거를, 앞으로 여섯 개 더 보아야 해요.”

“……여섯 개?”

“특별한 문장이 새겨진 [옳은 비석]은 총 일곱 개. 그 중 하나가 방금 정화한 비석이에요. 나머지 비석들에는 과거가 하나씩 담겨 있어요. 앞으로 여섯 개의 과거를 더 보아야 해요. 그래야 내려갈 수 있어요.”

“그것도 인형이 말해 줬습니까, 용사님?”

“아뇨, 이건 비석이.”

“비석이 정보 주입을 해 주었군요. 이해했습니다.”

아직도 충격이 완전히 가시지 않았는지 용사의 말은 띄엄띄엄 끊기는 데가 있었지만 무슨 말인지 대충 이해는 갔다. 그러니까, 결국 ‘옳은 비석’은 용사에게 신의 과거를 보여 주는 역할을 한다는 건가? 신의 과거를 하나씩 직면하다 보면 결국 이 공간이 무엇을 추모하기 위한 곳인지 알 수 있고, 모든 진실을 알고 나면 다음 층으로 넘어갈 수 있다는 거지.

‘대충 이번 층의 규칙이 어떤지 윤곽이 잡히기는 하는데……. 신경 쓰이는 점이 많네.’

왜 하필이면 인간의 과거가 아니라 신의 과거지? 신의 과거를 한꺼번에 보여 주지 않고 일곱 개로 나눠서 보여 주는 이유는 또 뭐고? 신의 과거가 드러날 때마다 광장의 형태가 바뀌는 듯한데, 나머지 여섯 개의 과거를 다 찾고 나면 이 광장은 과연 어떤 모습이 될까?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는 의구심을 하나하나 되짚느라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사이, 케르츠가 나 대신 입을 열었다.

“일단 휴식 장소로 돌아갑시다. 조금 쉬시고, 충분히 진정된 후에 자세한 이야기를 더 해 주시지요.”

“알았어요. 지금 당장 이야기해 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하지만…….”

“네?”

“모르겠어요. 대체 신에게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나는 용사가 더 말해 주기를 내심 기대했지만, 용사는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는 터덜터덜 휴식 장소로 발걸음을 뗐다. 용사의 머리 위에 앉아 있던 인형이 용사의 어깨로 내려가자 용사는 인형의 머리를 몇 차례쯤 쓰다듬어 주었다.

기분 탓일까, 마치 용사가 인형을 위로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 * *

휴식 장소에 돌아가자마자 용사는 피로를 호소하며 자리에 누워 버렸다. 내 무릎을 베개 삼고 인형을 꼭 끌어안은 채 누운 용사는 금방 잠이 들었고, 우리는 용사가 자고 있는 동안에 휴식을 취하며 방금 전의 일에 대해 의견을 나누기로 했다.

하넨이 모닥불을 피우고 케르츠가 요리를 하는 동안, 달리 할 일이 없었던 나는 찰랑거리는 검은 물을 바라보기만 했다. 하넨의 말에 따르면 이렇다 할 해로울 성분은 없는 모양이지만 그래도 영 꺼림칙했다.

앞으로도 비석을 정화할 때마다 이런 식의 변화가 생기는 거겠지? 이번에는 다행히도 큰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앞으로의 변화 또한 그러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모든 비석이 정화된 후 드러난 광장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지금까지 우리가 지나왔던 층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을 압도적인 폭력을 선사할까, 아니면…….

“아, 그런데 편안해 보이긴 하네.”

“뭐가요?”

“바깥의 강은 원래 이런 색이잖아. 무색투명한 물은 인위적으로 정제하거나 만들어 내야 있는 거고. 생각해 보면, 이 광장처럼 맑은 물이 호수처럼 넘쳐 나는 쪽이 더 이상하지.”

“그, 그런가요.”

“혹시 비석을 정화할 때마다 이 광장이 지상의 모습을 닮아 가는 걸까? 있을 법한 일인데.”

하넨의 말을 들으니 어쩐지 등골이 오싹했다. 무심코 케르츠 쪽을 바라보니 케르츠 또한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구나. 이 사람들의 입장에선 이 새까만 물이 오히려 일반적이구나. 분명 머리로는 알고 있는 사실인데도, 아무래도 나는 바깥의 풍경을 직접 본 적이 없다 보니 잘 체감되지가 않았다.

“확실히 있을 법한 일이군요. 그렇다면, 인형이 말한 ‘광장의 이면’이라는 건 지상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 상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가능성은 있어 보이지? 뭐, 비석 몇 개를 더 정화해서 확인해 봐야 알 수 있는 문제겠지만…….”

지상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한다니, 저 사람들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 있지만 내 기준에서는 꽤 끔찍한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아니, 끔찍하다기보다는 비참하다는 표현이 맞을까.

어쩌면 모든 비석을 정화하고 난 ‘광장의 이면’은 생각 외로 슬픈 장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소름이 돋을 듯한 기분을 무마하기 위해 용사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자, 용사는 잠결에도 내 손을 양손으로 꼭 붙잡아 거기에 뺨을 가져다 댔다. 인간성을 되찾은 것도 아니라 감각이 꽤 무뎌진 상태인데도 등골이 묘하게 간질간질했다.

“그나저나 용사 이 녀석, 대체 뭘 봤길래 이렇게 힘들어하는지 모르겠네.”

“신의 과거라고 하니 더 찝찝하군요. 대체 어느 시점의 과거인지, 어떤 종류의 과거였기에 용사님이 저렇게까지 동요하는지. 심지어 저희에게도 말하기를 꺼릴 정도라니…….”

‘나중에 말하겠다’라며 나름대로 약속을 하기는 했지만, 용사가 저런 식으로 대답을 회피하는 건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다. 평소의 용사라면 펑펑 울면서라도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설명하려고 노력했을 텐데…….

과연 얼마나 충격적인 광경을 보았기에 저러는 걸까? 나는 비어 있는 손으로 인형을 쿡쿡 찔러 보았지만, 인형은 용사의 품 안에서 뒤척이는 척하면서 아예 등을 돌려 버렸다. 뭘 물어보든 대답하지 않겠다는 제스처였다. 역시 중요한 순간에는 도움이 안 되는 녀석이라고 생각하며 투덜거리는데, 케르츠가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분명 인형이 그런 표현을 썼지요. 신의 과거와 직면해야 한다고……. 혹시 신의 과거와 직면하는 일 자체가 이번 층의 시련일까요?”

“시, 시련이라니요?”

“이 미궁은 최종 층으로 향하는 이들에게 시련을 주기 위해 존재합니다. 매 층마다 나타나는 함정도, 저희의 앞을 가로막는 사념들도 따지고 보면 그 시련의 일부지요. 그 시련을 통과해야만 다음 층을 향할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겁니다.”

듣고 보니, 초창기에 인형에게서 그런 설명을 들은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신의 과거와 직면하는 일 자체가 시련이라고? 그게 정말일까?

“어쩌면 비석을 정화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변화가 이번 층의 시련일지도 모르지만……. 만약 지상의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는 수준에서 그친다면 그다지 대단한 시련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저희가 돌파했던 시련들에 비하면 어린애 장난 수준이지요.”

“혹시 이번 층에서 잠깐 쉬어 가라는 취지는 아닐까? 지난 층이 워낙 엄청났으니까, 적당히 쉬어 가라는 의도에서.”

“별로 그럴 것 같지는 않군요. 이 미궁은 탐험자의 사정을 배려해 주지 않잖습니까.”

하넨은 조금 풀이 죽은 듯 한숨을 쉬었다. 하긴, 생각해 보면 이 미궁은 우리의 사정 따위 배려해 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차라리 기만하면 기만했지.

지금까지의 패턴을 감안해 보면, 아래로 내려가면 내려갈수록 쉬워지기는커녕 오히려 더한 시련이 기다리고 있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이번 층에서는 전투도 그다지 자주 나타나지 않고, 나타나는 사념 또한 지난 층에 비하면 그다지 강하지 않다. 그렇다면 이번 층에서는 아예 다른 방향의 시련을 맞닥뜨리게 되리라는 게 케르츠의 주장인데…….

“어쩌면, 비석을 정화할 때마다 주어지는 ‘신의 과거’가 용사님의 정신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치게 될지도 모릅니다. 저희가 해야 할 일은 용사님의 정신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키는 걸지도 몰라요.”

케르츠는 다소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마쳤다.

용사는 케르츠의 말을 듣는지 마는지 새근새근 잠들어 있을 뿐이었다.

자고 일어난 용사는 아까보다 훨씬 더 진정된 모습이었다. 일어나자마자 배고픔을 호소하며 식은 고기를 집어 먹고 난 용사는, 이제 슬금슬금 자신에게서 도망치려 드는 인형과 추격전을 벌이며 한참 동안 신나게 놀았다. 새까만 물 색깔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잘 노는 걸 보니 저 녀석도 지상의 까만 물에 익숙해져 있던 걸까.

당장에라도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우리는 용사가 충분히 기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기다려 주었다. 저 녀석에게도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기는 하겠지. 마침내 추격 놀이가 끝나자, 용사는 붙잡은 인형을 전리품처럼 들고는 우리의 앞에 와서 앉았다.

“이제는 말해 줄 수 있겠어? 네가 보았다는 그 ‘신의 과거’가 대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있는 만큼만 해도 괜찮아요? 정리가 안 되는 부분이 많아서 전부 설명하기는 힘들어요.”

“정리가 안 된다면야 어쩔 수 없지. 일단 네가 설명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해 봐.”

하넨이 흔쾌히 답하자 용사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신의 과거’라고 하였으니 당연히 신에 대한 이야기를 할 줄 알았건만―실제로 용사가 묘사한 것은 세상이 오염되어 가는 과정이었다.

“파란 강을 보았어요. 강물이 신의 악함에 오염되어 붉게 물들다가, 결국 새까맣게 가라앉는 모습을.”

햇빛에 반짝거리던 맑은 강물이 삽시간에 핏빛으로 물들고, 강에 의지해 살던 물고기와 동물들은 골격과 체형이 점점 변하기 시작했다. 핏빛 강물을 마신 사람들은 병에 걸리거나 정신이 망가져, 물을 정화할 수단이 없는 이들은 그대로 오염되거나 정화 수단을 가진 이들의 노예가 되었다.

심지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강물의 오염은 점차 심각해져 갔다. 핏빛이기는 해도 바닥이 보일 만큼 맑던 강물은 점점 탁해지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아예 새까매지고 악취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강을 정화해야 한다는 명목 하에 오히려 오물이 쏟아져 내렸기 때문이다. 주로 인간의 분변과 피와 시체로 이루어진 오물이.

거기까지 설명한 용사는 어째서인지 케르츠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케르츠는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듯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결국 용사는 흠흠 헛기침을 하더니 말을 이어 나갔다.

“악을 죽여서, 세상을 악이 없는 깨끗한 곳으로 만들면……. 그러면 다시 원래의 아름다운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 믿는 이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악한 자들을 많이 죽였어요.”

“신전에서 그런 일을 벌였다고 들은 적은 있습니다. 물론 올바른 방법은 아니었지요. 결국 실패했으니까요. 죄인을 죽여 강에 희생시키는 것만으로 신의 악함을 정화할 수 있을 리 없었겠지요.”

“틀린 방법이었던 건가요?”

“틀린 방법이지요. 제 조상들이 속한 교파……. 말쿠테른의 성직자들 중에도 그런 식으로 순교를 택한 이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기저기 떠돌다가 주워들은 이야기입니다만.”

용사는 묘하게 납득이 안 간다는 듯 케르츠를 빤히 바라보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케르츠는 그걸로 설명이 끝났다는 듯 덤덤하게 용사를 마주 볼 뿐이었다. 대체 케르츠에게 무슨 말을 하려고 저러나, 내심 궁금해진 나머지 질문을 꺼내려고 할 때쯤 하넨이 문득 떠오른 바가 있다는 듯 먼저 입을 열었다.

“잠깐만, 인신 공양 류의 이야기야 뭐 그렇다 치고……. 조금 신경 쓰이는 점이 있는데.”

“왜 그러십니까, 마법사님?”

“그게 신의 과거라고? 용사가 말한 대로라면 이건 신의 과거가 아니라 인간의 과거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화제가 바뀌었으니 결국 나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도 하넨이 꺼낸 그 의문을 가지고 있기는 했다. 인간의 과거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굳이 ‘신의 과거’라고 부른다면 거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터. 과연 용사는 무슨 이유에서 신의 과거라는 명칭을 사용했을까? 어쩌면 정말로 중요한 건 그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게다가 신경 쓰이는 점이 하나 더 있었다. 용사의 묘사는 분명 충격적이었지만, 그렇다고 눈물을 펑펑 쏟거나 엄청난 후유증을 유발할 정도는 아니었다. 지금껏 용사가 얼마나 끔찍한 사념과 맞서 싸웠는지를 감안하면, 이렇게까지 용사가 충격받은 모습을 보인다는 건 명백히 이상했다.

어쩌면 뭔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용사는 하넨의 질문에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는 대답했다.

“왜냐 하면……. 신이 보았으니까요.”

“신이 보았다고요?”

“물론 제가 본 건 인간의 세상이에요. 하지만 신의 시선으로 보았기 때문에 신의 과거예요. 신이 겪은 일이 아니더라도, 신이 보고 신이 들었고 신이 기억해요.”

신이 보고 신이 들었으니 신의 과거라니……. 보통 그런 걸 과거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굳이 따지자면 그렇게까지 틀린 논리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동료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용사는 용기를 얻기라도 한 듯 말을 이어나갔다.

“중요한 건 감정이에요. 그 모습을 보고 본래 신이 느꼈어야 할 감정.”

“느꼈어야 할 감정, 이라고?”

“그 감정이야말로 신의 과거예요. 신이 망가져서 지금은 느끼지 못하지만, 본래의 신이라면 분명 느꼈을 감정. 저는 그걸 느꼈는데…….”

용사의 얼굴이 다시 어두워졌다. 아까 전처럼 슬퍼하거나 괴로워하지는 않는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용사는 다시 입을 다물더니 조금 우물쭈물하기 시작했다. 말하기 싫다기보다는 말하기 어렵다는 듯한 기색이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뭐라고 말해야 할지 조금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용사는 한참을 망설였다.

그렇게 몇 십 초쯤 지났을까, 결국 용사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 감정의 이름이 뭔지 모르겠어요.”

“모르신다고요.”

“네. 그저 엄청나게 힘겨운 감정이란 것만 기억해요. 마치 슬픔과 비슷하지만 훨씬 더 복잡해서, 한 가지 방식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어서……. 그래서 감정에 이름을 붙일 수가 없어요. 제가 감히 신의 감정에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요?”

그렇게 말한 용사는 가만히 고개를 떨구었고, 나와 다른 동료들 또한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그저 입을 다물었다. 용사가 본래 감정 표현을 어려워한다는 것도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무엇보다도 상대가 신의 감정이라는 점이 문제였다. 평소 같았더라면 뭐라고 한 마디라도 충고의 말을 꺼냈을 케르츠조차 지금은 그저 입을 다물 뿐이었다.

“조금만 더 고민해 봐도 괜찮을까요?”

“고민이라니?”

“그 감정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좀 생각해 보고 싶어요. 생각하다 보면 정답에 근접한 무언가를 얻어 낼 수 있을지도 몰라요.”

“좋은 생각이네. 천천히 고민해 봐. 이제 겨우 과거 하나를 접했을 뿐이니까, 더 많은 과거를 직면하다 보면 어떤 식으로든 실마리가 잡힐지도 몰라.”

그나마 하넨이 용사를 격려해 주자, 용사는 희미하게 웃으며 몇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아까 그건 정말 뭐였을까? 분명 케르츠에게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화제가 바뀐 김에 아예 입을 다물기로 결심했는지 이제 용사는 더 이상 케르츠를 보지 않았다.

혹시 케르츠가 뭔가 눈치채지는 않았는지 슬쩍 표정을 살폈지만, 케르츠는 아까나 지금이나 별로 눈치챈 바가 없는 듯했다. 이상하네. 원래 저 사람 눈치가 꽤 좋은 편인데. 관찰력도 좋은 편이고 용사에 대한 관심도 없지 않으니 오히려 나보다 더 일찍 눈치채면 챘을 텐데…….

내가 케르츠를 빤히 바라보자, 케르츠는 금방 내 시선을 눈치챈 듯 이쪽을 바라보더니 다시 용사를 바라보았다. 이렇다 할 의구심도 없어 보이는 낯이었다.

“얼마든지 생각해 보셔도 괜찮습니다. 마법사님의 말대로 아직 정보를 더 모아야 하니, 충분히 정보가 모인 후 천천히 대답해 주셔도 좋아요. 다만, 이것 하나만큼은 약속해 주세요.”

“약속……?”

“네. 용사님께서 결론을 내리셨다면 그 결론에 대해 저희 모두에게 솔직히 말씀해 주셔야 합니다. 일부분만 말하거나, 아니면 내용을 왜곡해서 설명하시거나. 그런 짓만큼은 절대로 하시면 안 됩니다.”

“…….”

“저희의 목표, 아니. 어쩌면 생존과 관련된 문제일지도 몰라요. 그 부분은 절대로 속이시면 안 됩니다. 알겠지요?”

“알았어요. 숨기거나 속이지 않을게요.”

용사는 생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케르츠는 그걸로 만족했는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나는 용사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고개를 갸우뚱할 뿐이었다. 용사의 표정에 묘하게 확신이 없어 보이는 건, 과연 내 착각일까?

[나는 오랜 노력과 연구 끝에 용사의 표정을 읽는 방법을 배웠다. 용사님 표정 읽기 자격증 시험 같은 게 있다면 분명 1급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세상에 그런 자격증 시험이 어딨어? 아니, 애초에 넌 자격증 시험이 뭔지 어떻게 아는 거야? 내 기억에서 몰래 훔쳐봤냐?’

[내가 알고 있는 것이라면 인형 또한 무엇이든 알 수 있다.]

‘자랑이다, 자식아.’

나는 가벼운 한숨만 내쉬고는 인형에게 손을 뻗었다. 손에 들고 있던 인형을 내게 건네주면서, 용사는 조금 어색하고 서투른 미소를 지어 보였다.

* * *

[인간이 신을 이해하지 못했다면, 신 또한 인간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였다.]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아니, 물론 여기는 미궁 지하 10층이니까 하늘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머리 위가 붉은 안개로 자욱해졌을 뿐이다. 거기에 정체불명의 웅웅거리는 소리가 합쳐지니 속이 뒤집힐 듯한 거부감까지 더해졌다. 마치 피를 잔뜩 머금어 뚱뚱하고 붉게 물든 모기떼가 천장에 바글바글 달라붙어 우리를 노리는 것만 같았다.

두 번째의 ‘옳은 비석’을 찾아내 정화하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도 않았다. 앞으로는 절대 독단으로 비석을 정화하지 않기로 용사와 단단히 약속하고, 다시 한 번 조를 짜서 주변을 탐색하고, 마침내 찾아낸 두 번째 비석 앞에서 문장의 뜻을 다시 고민하다가 우선 정화부터 해 보기로 마음먹고…….

겉으로 드러난 현상만 놓고 보자면 첫 번째 정화와 그다지 다를 게 없었다. 용사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정화의 후유증으로 괴로워했고, 광장에는 아마 지상에도 존재하지 않을까 추측되는 붉은 안개와 정체불명의 소음이 가득 들어찼다. 하넨의 설명을 듣자 하니, 이번에도 심리적인 타격만 줄 뿐 실질적인 위협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것도……. 이것 또한 지상의 그 안개와 비슷하군요. 성분은 어떻습니까, 마법사님?”

“바닥의 검은 물과 마찬가지야, 실제로는 무해해! 그저 정신적인 압박감만 줄 뿐이야!”

“하넨 씨, 그럼 이 소리는 뭐예요? 벌레 소리 같은 게 나잖아요!”

“진짜 벌레가 아니야! 그저 실체 없는 허깨비에 불과해, 저것들은! 사실 진짜 문제는…….”

하넨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용사였다. 분명 푹 쉬고 만전의 상태에서 비석을 정화했을 텐데도, 용사는 상당한 괴로움을 호소하며 내 어깨를 붙잡고 있었다. 어깨에 느껴지는 압박감이 상당한 걸 보니 어쩌면 멍이 들지도 모르겠다. 물론 용사가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닐 테고, 어차피 멍 조금 들어도 크게 문제는 없긴 하지만……!

나는 용사의 어깨를 끌어안고 등을 쓰다듬으며 부지런히 용사를 달래 보았다. 정화의 영향인지 실제 고통에서 흘러나오는지 모를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용사는 내내 숨을 헐떡이고 괴로운 신음을 토해 냈다. 첫 번째 비석을 정화했을 때보다도 더 격렬한 반응이었다.

“어쩐지 불안한데. 비석을 정화하면 정화할수록 용사에게 가해지는 충격이 더 심해지는 거 아니야?”

“이제 고작 두 번째인데도 이렇게 힘들어하면 앞으로는 어떻게 해요? 조금이라도 고통을 줄일 방법이 없어요?”

“일단 이걸 좀 먹여 봐. 영혼의 조각을 먹이면 당장 사념을 토해 내지는 않을 거야.”

잘못하다간 사념을 제대로 정화시키지 못하고 토해 내는 게 아닌가. 하넨도 그런 걱정을 했는지 나에게 영혼의 조각 몇 개를 건넸다. 나는 용사의 코에 영혼의 조각을 대 주었다. 이게 아픔을 줄여 주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이걸 흡수해서 조금이라도 안정을 되찾았으면 좋겠는데…….

“괜찮아요, 용사님. 아픈 것 정도는 금방 가라앉을 거예요. 그러니까.”

“흑, 아으, 흐으으…….”

용사는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끙끙거렸다. 거칠게 숨을 고르는 과정에서 영혼의 조각을 흡수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용사는 여전히 고통스럽고 불안정해 보였다. 나는 하넨의 어깨에 앉아 있는 인형을 흘끔 바라보았다. 혹시 용사의 고통을 달랠 방법을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였지만, 인형은 내 시선을 눈치채자마자 고개를 몇 번 저었다.

진짜 이럴 때는 도움이 안 된다니까! 어차피 기대도 안 했지만 괜히 실망해서 시선을 떨구었을 때, 용사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인형이 갑자기 내게 무언가를 전해 왔다.

[용사의 전언이다.]

응? 전언이라니, 바로 옆에 있는데 무슨 전언이야. 나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용사를 바라보았다. 용사는 여전히 고통에 가득 찬 얼굴로 신음을 흘리고 있었지만, 그 와중에도 힘겹게 고개를 들고는 나와 시선을 맞추려 애쓰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깨달았다. 이 녀석이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거구나. 그것도 나에게만.

[성기사들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혼란스러운 표정의 용사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아까 용사가 왜 케르츠를 그렇게 빤히 바라보았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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