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생명을 모방하는 18시간
“상인에게도 회복초를 줄까요?”
“상인은 언데드입니다. 애초에 살아 있지도 않으니까 회복초 같은 건 안 먹힐 거예요.”
“하지만 아파 보이는데. ……아, 조금씩 꿈틀거리고 있어요. 상처가 붙고 있어요. 괜찮은 거겠지요?”
괜찮지 않아. 애초에 내가 모은 회복초를 쓰고 있으면서 무슨 생색을 내는 거야. 당장에라도 입을 열어 그렇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목구멍이라 할 만한 것이 망가져 있어 작은 소리를 내기조차 버거웠다.
신체 어딘가에서 눈물이 흐르는 듯한데 워낙 몸에서 흐르는 게 많아 그중 어느 게 눈물인지 알 수 없었다. 아무렇게나 뒤틀린 관절에서, 터진 내장에서도, 보여선 안 될 내부가 드러나 있는 신체 어딘가에서도, 악취 나는 액체가 울컥거리며 꾸준히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무색무취한 눈물 정도는 흘려 봤자 티조차도 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마도 그래서겠지. 나는 이렇게나 아파 죽겠는데, 정작 저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구는 이유는. 내 눈물을 못 보니까 내가 아프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거야. 알면 저럴 수가 없어. 사람이 그렇게 이기적일 리는 없다고.
“이상해요. 상인, 평소에는 아무리 다쳐도 아프지 않다고 말했는데……. 지금은 너무 괴로워 보여요.”
“확실히 상태가 이상해 보이긴 하군요. 하지만 저로서는 상인의 상태가 어떤지 알 도리가 없어서……. 차라리 마법사님이 깨어 있었더라면 나았을 겁니다.”
“그치만 하넨은 기절해 있잖아요.”
“그러게요. 이 마법사님, 사념이 물러나자마자 그대로 기절해 버리다니……. 고생을 많이 하신 건 사실이지만 참 속 편한 분이군요.”
“상인, 많이 아픈 건 아니겠지요? 괜찮겠지요?”
상인, 상인, 하고 용사가 계속 우는 소리를 했다. 사람 마음이란 게 참 간사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다른 사람들이 내 아픔을 신경 써 주지 않는 게 서러웠는데, 막상 용사가 나를 붙들고 징징거리기 시작하니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짜증스러웠다. 조용히 좀 해 봐. 나도 아픈데 너까지 징징 짜면 나더러 어쩌란 거야. 설마 이 상황에서도 내가 네 보모 역할을 해야 해?
[덴 루인 나 메놈 후 라에에 메우 테르마 라푸르르르]
저 솜뭉치 자식은 또 뭐가 문제인데. 응? 톱니바퀴 사이에서 갈리다가 나온 건 나인데 왜 네놈이 우는 소리를 하는 거야? 게다가 남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소리로 사람 속을 뒤집어 놓기나 하고! 최소한의 예의란 게 있다면 말이야, 최소한 옆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비명을 질러야 아픈가 보다 하고 공감이라도 해 주지 않겠어?
저 녀석, 결정적인 순간에는 결국 아무 도움도 안 되었잖아! 괜히 사람 불안하게 만들기나 하고. 저 녀석, 사념들에게 붙잡혀서 뜯겨지고 배 속의 솜이 바깥으로 다 나올 지경이 되어도 내 탓만 할 녀석이야. 내가 모자라서 인형이 이렇게 너덜너덜해졌다고, 내가 더 좋은 언데드였다면 인형도 안전하게 지켜 줄 수 있었을 거라고, 뭐 그런 식으로 징징거리기만 했겠지.
내가 저 인형하고 같이 지낸 시간이 얼만데, 그 능구렁이 같은 속을 모를 줄 알아? 아주 사람 복장 터지게 하려고 작정을 했어!
“그나저나, 저 인형의 상태가 문제인데……. 이봐요, 대체 신의 언어로 무엇을 말하고자 합니까. 애초에 지금 그쪽은 어떤 상태인 거죠?”
[네프르르르 다에게인 이 하에 말쿠테른 드 란베타]
“저는 제 조상의 과오를 알지만 그 원인은 모릅니다. 그러니 속죄를…….”
[히베르 니 메우타세타타 우 란베타 말쿠테른 메에]
아, 그래. 잘한다, 잘해. 나는 내버려 두고 케르츠하고 아주 잘 놀고 있네. 나쁜 자식. 나는 이렇게 아픈데 달래 주지도 않고. 자기하고 말 통하는 녀석하고만 놀고 나는 아주 따돌리겠다 이거지? 그나저나 저 녀석, 무슨 방언이라도 터진 거야? 아니면 신기라든가? 뭐 따지고 보면 그게 그거긴 할 텐데.
[라파누 지우그 에 아스메루너 네으 탄]
“모르겠군요. 미안하지만 전혀 못 알아듣겠습니다.”
“케르츠, 인형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일단 신의 언어라는 건 알겠습니다만, 그래서 그 언어로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가늠이 안 잡힙니다. 뭔가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모양인데 앞뒤가 안 맞아서 이해하기 어려워요. 차라리 상인과 대화를 시도하는 쪽이 더 빠르지 않나 싶군요.”
흥, 무능하기 짝이 없는 자식. 신의 언어를 쓸 거면 제대로 쓰지, 설마 케르츠조차 못 알아들을 정도로 지리멸렬하게 지껄이고 있었던 거야? 괜히 우스워져서 비웃음을 흘리고 싶었지만,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너무 아파서 그만두었다. 사실 안 움직여도 아픈 건 마찬가지였다. 몸이 마음대로 뒤틀리면서 뼈가 맞춰지고 신경이 이어지는 감각은 그야말로 끔찍했다.
이렇게, 이렇게까지 아플 거라고는 말 안 했잖아. 나쁜 인형 자식. 나쁜 사념. 무능하고 나쁜 용사 일행. 고작 30분을 덜 버텨서 내가 이렇게까지 심한 꼴을 당하게 하고. 나쁜, 못된 자식들. 하지만, 그치만.
“그런데 이 회복초, 정체가 뭔지 아십니까? 이상할 정도로 회복력이 좋은데. 혹시 부작용 같은 게 있는 건 아니겠지요?”
“고양이 귀나 강아지 귀가 나는 기분이 드는 회복초라고, 예전에 상인에게 들었어요.”
“고양이 귀……? 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요. 어쨌든 다행입니다. 상인이 제때 와 주지 않았더라면 저와 마법사님은 분명 죽고 말았을 거예요.”
그래도, 내가 아무 쓸모도 없는 일을 한 건 아니지? 용사나 인형과 멀쩡하게 대화를 하고 있는 걸 보니 케르츠는 무사한 모양이야. 용사야 나를 구해 줄 정도였으니 당연히 무사할 테고, 듣자하니 하넨 또한 기절하기는 했어도 목숨에 큰 지장은 없는 것 같아.
그리고 인형도……. 그래, 분명 무사하겠지. 조금 이상한 소리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사념 녀석들한테 잡혀서 배 속의 솜 덩어리를 빨아 먹히거나 하지 않았어. 그건 참 다행이야.
내 곁에 아무도 없지 않아서 다행이야. 내 아픔에 의미가 없지 않아서 다행이야. 내가 용사에게 불어넣어 주었던 희망이, 결국 아무 소용도 없지 않아서 다행이야.
[메에, 나페누.]
어느 순간부터인가, 인형이 내 볼에 자기 머리를 비비고 있었다.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그러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직 살갗이 복원되지 않아 피가 울컥거리며 솟는 상처에 머리를 비벼 대니 솔직히 좀 아팠지만, 고통과는 별개로 그 행위에서는 묘한 안도감이 느껴졌다.
‘못 알아듣겠어, 멍청아.’
머릿속으로 투덜거려 보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답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모양이다. 그나저나, 인형 녀석은 대체 왜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토해 내기 시작한 걸까. 그렇게까지 불안하지는 않고, 조금 시간이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올 거라는 예감이 들기는 하지만 그래도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마치 인형 녀석이 아예 다른 존재가 되어 버린 것 같아서.
아니, 물론 진짜로 다른 존재가 되지는 않았을 거야. 지금의 내가 감정을 가졌다고 해서 과거와 다른 사람이 되지는 않은 것처럼.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예전과 완전히 똑같지도 못해.’
살점과 뼈가 제멋대로 꿈틀대며 재생되는 감각은 지독하게도 아프고 징그러웠다. 예전에는 이렇게 징그러운 감각인 줄 몰랐다. 함정에 뛰어들어 몸이 갈려 나가는 고통도 몰랐고, 사념이 나를 향해 달려드는 순간의 두려움도 몰랐다. 모르니까 아무렇지도 않았다. 마치 게임 속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마음 놓고 미궁 안을 활개 칠 수 있었다.
하지만 앞으로도 그럴 수 있을까? 고통을 알고 두려움을 알고 그 밖의 모든 어둡고 음습한 감정들을 떠올려 버렸는데 다시 예전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굴 수 있을까? 아무리 용사 일행의 생존에 안도했다고는 해도, 일순간 마음속에 엉겨 붙었던 공포와 두려움과 원망은 분명 사실이었다. 앞으로 열여덟 시간 동안은 인간의 모습을 흉내 내야 할 테니, 분명 그 시간 동안에도 괴로운 감정은 계속 축적되어 가겠지.
아마, 예전의 나와 앞으로의 나는 같지 않을 거다.
멍하니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신체가 재생되는 시간이 유난히 길고 고통스러웠다.
* * *
깨진 안구가 원래의 형태로 복구되고, 눈꺼풀이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 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 모르겠다.
“상인, 나 보여요?”
어쩐지 몸이 흔들린다 싶더니, 눈시울이 빨갛게 달아오른 용사가 내 어깨를 조심스럽게 두드리고 있었다. 그만해, 거기 덜 나은 부위라서 건드리면 아파. 제 딴에는 상냥하게 군답시고 구는 모양인데 당하는 입장에서는 상냥하게 아프다고. 아니, 사실 상냥함 따위는 추측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고 체감상으로는 순수하게 아프기만 하다니까.
하지 말라고, 그거 아파! 싫은 티를 내고 싶어 목에 힘을 주자 끄으 하는 신음만 흘러나왔다. 적어도 소리가 나온다는 점에서는 장족의 발전이었지만, 뚫린 목에서 소리와 함께 물 같은 게 왈칵 흘러나오는 건 좋지 않았다. 심지어 용사는 내 신음을 반대로 받아들였는지 잔뜩 기쁜 티를 내며 내 어깨를 흔들었다. 그만하라니까! 이 멍청한 애새끼야!
“왜, 왜 표정이 그래요? 불편해요?”
참 일찍도 깨달으셨네. 내 표정을 뒤늦게야 확인했는지 용사가 허겁지겁 손을 떼어 냈다. 혼난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는 용사의 모습을 보니 괜한 연민이 들려다가도, 한편으로는 그것도 모르는 용사의 둔함에 부아가 치밀어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런 걸 꼭 말로 해야만 알아? 눈구멍이 있으면 봐, 딱 보기에도 아프게 생겼잖아!
할 수 있다면 당장에라도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어째서 너는 그렇게까지 멍청한 거냐고, 어째서 일일이 말해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지를 못하냐고,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며 화를 내고 싶었다. 하지만.
“혹시 아파요? 상인은 언데드라서 아픈 거 못 느낀다고, 케르츠와 하넨이 그렇게 말했는데. 사실은 다 느낄 수 있었던 거예요?”
“…….”
“미안해요. 지금 상인이 어떤 상태인지 모르겠어요. 인형도 아파 보이고, 상인도 아파 보이는데 왜인지 모르겠어요. 어째서 아픈지, 어떻게 하면 아프지 않게 되는지, 말해 줬으면 좋겠어요.”
“…….”
“말할 수 있겠어요? 아니면 조금 더 쉬어야 해요? 혹시 회복초 필요해요?”
용사는 아직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단순히 놀람이나 슬픔 따위의 일차적인 감정뿐만이 아니라, 무지로 인한 혼란이 그 얼굴에 어려 있었다. 그제야 겨우 깨달았다. 이 사람들은, 내가 지금 어떤 상황인지 조금도 알지 못한다.
물론 모르는 게 당연하다. 말한 적이 없으니까. 내가 사념들의 주목을 끌기 위해 인간성을 거의 부패시키다시피 했다는 것도, 지금의 내가 감정과 통각을 되찾아 지독하게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것도, 저 사람들이 알 리 없다. 말하지 않으면 모르니까. 모르는 상황에서는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으니까.
저 사람들이 아는 나는, 그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언데드일 뿐이다. 피떡이 될 정도로 몸이 망가지더라도 우는 소리 한 번을 안 하고, 어지간히 심한 일을 당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며 툭툭 털고 일어나는 둔한 언데드 상인. 그런 사람이 갑자기 아무 설명도 없이 고통을 호소한다면 당황하고 난처한 반응을 보이는 게 당연하다.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뱃속에서 꿈틀거리는 짜증과 실망의 감정은 도저히 어쩔 수 없는 노릇이어서.
“내버려, 흐, 둬요.”
“마, 말할 수 있어요? 이제 괜찮아진 거죠?”
“……것도 모르면서.”
“네?”
“아무것도 모르면서, 괜히 얼쩡거리지 말고 사람 좀 내버려 두라고요! 좀!”
울컥 솟아오르는 짜증을 토해 내자 용사가 흠칫 놀라 물러났다. 그 멍청한 모습에 더 짜증이 치솟았다. 어차피 도움도 안 될 거면서 왜 그렇게 옆에서 얼쩡거리고 있는 거야? 지금 이 상황에서 회복초 같은 게 도움이 될 것 같아?
내가 단순히 아파서 이러는 걸로 보여? 톱니바퀴에 끼여 부러지고 뒤틀리고 터진 몸이 원래대로 회복되면 내가 나아질 것 같아? 애초에 회복초 같은 건 먹히지도 않는다고. 난, 나는 이미 죽어서. 죽은 주제에 어설프게 인간의 감각과 감정과 생각을 흉내 내고 있을 뿐이란 말이야.
차라리 예전처럼 감각도 감정도 죽은 채로 지냈으면 좋았을 텐데, 저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들을 구해 보겠답시고 최악의 방식으로 인간다움을 흉내 내는 바람에…….
“미안해요, 그냥, 그……. 혼자 있게 내버려 두면 되나요? 그러면 괜찮아져요?”
용사는 나를 달래고 싶었는지 조심스럽게 물러났지만, 이제는 그 행동조차도 짜증스럽게 느껴졌다. 뭐, 구해 준 은혜도 모르고 날 혼자 내버려 두겠다고? 그러고도 너네들이 사람 새끼냐?
아니, 물론 내가 내버려 두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내가 구해 줬잖아. 나 아니었으면 케르츠고 하넨이고 다 죽었을 게 분명하잖아. 그런데 날 그냥 방치해 두겠다고? 이렇게 아프고 괴로운데 자기들은 쏙 빠져나가고 나와 인형은 아프든 말든 그저 내버려 두겠다고? 어떻게 그럴 수 있어?
‘내가, 대체 지금 뭘 어쩌고 싶은 건지 모르겠어.’
갑자기 머리가 핑글 돌며 어지럼증이 솟구쳤다. 물론 피를 엄청나게 쏟았으니 빈혈로 어지러운 것도 당연하기는 하겠지만, 그거하고는 약간 다른 의미로 눈앞이 아득해졌다. 대체 나는 뭘 어쩌고 싶은 걸까? 부정적인 감정이 끓어올랐다가 거품처럼 허무하게 사라지기를 반복해서, 솔직히 신체적인 고통보다도 감정의 기복이 더 괴로웠다.
모르겠어. 이렇게 혼란스러운 게 인간성이던가? 분명 나도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인간이었는데, 별로 대단한 일이라는 자각조차 없이 평범하게 웃고 울고 화를 냈던 것 같은데,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행위가 이상할 정도로 버겁고 고통스러웠다.
차라리 아무것도 안 느끼던 시절이 더 좋았어. 아주 희미한 본능의 동요를 감정으로 착각하던 시절이 훨씬 편안하고 아늑했어. 대체 인간성 따위가 왜 필요한 거야. 인형 녀석은 나한테 뭘 바라는 거야. 내 얼굴에 머리만 비비지 말고 제대로 말해 보라고. 넌 대체 왜 내가 인간성을 찾기를 바랐던 건데?
‘싫어. 그냥, 그냥 싫어.’
제멋대로 요동치는 감정의 기복 자체가 혐오스러웠다. 어쩌면 감정의 기복이 표정으로 고스란히 드러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아예 소름까지 돋았다. 아니, 물론 나는 저 사람들에게 이미 볼꼴 못 볼꼴을 다 보였지만. 이리저리 다치고 터지고 피가 흐르고 녹아내리는 흉측한 꼴들을 보였으니 여기서 뭘 더 부끄러워할 필요가 있겠냐만, 그래도…….
“내 가면.”
“네?”
“가면 어디에 있어요? 내가, 그, 늘 쓰고 다니던 거 있잖아요. 염소인지 양인지, 아무튼 머리뼈로 된 가면. 그거 어디 있어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참 뜬금없는 질문이다 싶었다. 용사 또한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는지 눈이 동그래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 나에게는 그게 필요했다. 그래, 사실은 그냥 혼자 있고 싶어. 남한테 지금 이 꼴을 보이고 싶지도 않고. 나 자신도 감당 안 되는 감정을 토해 내고, 토해 낸 결과물을 보면서 스스로 더럽다고 여기느니 차라리 아무것도 내보이고 싶지 않다고.
“모르겠어요. 어디 있는지……. 하지만 어쩌면.”
“…….”
“함정. 함정 때문에 짓이겨졌을지도 몰라요. 그 톱니바퀴가 상인 머리도 짓이겨 버렸으니까. 그저 추측이긴 하지만요. 미안해요, 그.”
어쩔 줄 몰라 끙끙거리는 용사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기분은 더 최악으로 떨어져 내렸다. 하긴 당연한 일이긴 했다. 사람 머리도 부술 정도의 톱니바퀴였는데, 아무리 튼튼하다곤 해도 뼈에 불과한 그 가면이 버티는 게 더 이상하다. 평상시 같았더라면 인형이 보호 마법으로 어떻게든 해 주었겠지만 그때는 인형도 상태가 좋지 않았다. 당연히 보호해 주지 못했을 거다.
알고는 있지만, 어쩐지 서러웠다. 정말이지 아무래도 좋은 사소한 일인데도 괜히 억울함이 치솟았다. 어차피 요즘은 잘 쓰고 다니지도 않았는데. 가끔 함정에 들어가야 할 때가 오면 괜히 한 번씩 써 보고 그러는 게 전부였는데.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가라앉고 비참한 마음이 드는지.
“가면이 필요해요? 나중에 하넨이 만들어 줄 수 있을지도 몰라요. 깨어나면 물어볼게요.”
“필요 없어요. 어차피 잘 쓰고 다니지도 않았고. 그나저나 저 사람, 괜찮은 거예요? 옷은 피투성이에 꼴이 아주 엉망인데.”
“회복초를 썼으니까 괜찮을 거예요.”
“누가 내 거 마음대로 쓰랬어요? 양심이 있긴 해요? 내가 당신들 구해 준 걸로도 모자라 물건까지 뜯겨야 해요?”
“허락 없이 써서 미안해요. 하지만, 당장에라도 하넨과 케르츠가 죽을 것 같아서. 그래서 어쩔 수가…….”
“그걸 왜 설명하고 앉았어요? 내가 그것도 모를 것 같아요?”
“상인? 아까부터 왜 그래요? 어디 아파요?”
“아파요, 빌어먹을! 난 항상 아팠어요! 내 멍청한 몸뚱어리가 둔해서 지금까지는 아픈지 안 아픈지도 모르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에게 화를 내고 있다는 자각이 없지는 않았다. 내가 단순히 트집을 잡고 있을 뿐이라는 사실도, 용사가 어떤 식으로 나오든 나는 결국 부당하게 꼬투리를 잡고 늘어지게 되리라는 것도 알았다. 알아서 화가 나고 더 비참했다. 내가 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지?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야?
“이봐요, 괜히 용사님에게 화내지 말고 뭐가 문제인지 제대로 말해요.”
케르츠가 그제야 나섰다. 마치 용사를 보호하기라도 하는 듯한 그 행동거지에 까닭 없는 부아가 치솟았다. 엉망으로 구멍이 나서 차라리 버리는 게 나을 인면철 갑옷과, 아직 완전히 낫지 않아 뼈까지 드문드문 드러난 손등과 팔목에 시선이 가자 다시금 화가 솟았다. 아무도 책임져 주지 않는 서러움에 대한 분노와 짜증이었다.
“괜히? 지금 내가 괜히 화를 낸다고 했어요?”
“대체 당신과 저 인형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겁니까? 설명도 안 하고 대뜸 화부터 내면 어쩌라는 건데요?!”
“내가 화도 내면 안 돼요? 사람이 화 좀 낼 수도 있는 거 아니야? 용사님이야 그렇다 쳐도 당신이 나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돼, 이 비겁한 새끼야! 당신은 화날 때마다 사람을 묵사발로 만들고 제멋대로 굴면서 나는 그러지 말라고? 왜? 당신은 그럴 능력이 있고 나는 살아 있지도 않고 이렇다 할 힘도 없는 언데드라서? 그런 게 어딨어, 그런 불공평한 게 세상에 어딨냐고!”
악다구니를 쓰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도 속이 시원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화내는 걸 그만둘 수도 없었다. 분노의 관성이란 생각보다 훨씬 더 강하고 압도적이어서, 한번 터지기 시작하면 자기가 그만두고 싶다 해서 쉽사리 그만둘 수조차 없었다.
“나도, 나도 한때는 사람이었어요. 어떻게 화내는지, 어떻게 짜증내는지, 어떻게 아파하는지 다 안다고요. 당신들만 그럴 줄 아는 거 아니야.”
“혹시 지금 통각을 느끼고 있는 겁니까? 그래서 이러는 거예요, 상인 씨?”
“그 상인이니 뭐니 하는 소리 좀 그만하면 안 돼요?! 나도 이름 정도는 있었어! 이제 와서는 아무 짝에도 쓸모없지만! 이름 불러 주던 사람들은 죄다 죽어 없어졌거나 못 만나거나 하는 꼴이 되었지만!”
“당신, 이름이나 가족이 있었어요?”
“그럼 없었겠어요? 누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인 줄 아나? 하긴 궁금하지도 않았겠지, 애초에 나는 당신들 동료도 아니니까! 잡담이나 몇 마디 나눌 줄은 알아도 그 이상은 가까워질 생각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을 테니까!”
이 분노가 정당한지 아닌지를 이제 와서 판별할 기력조차 없었다. 가려운 곳을 벅벅 긁듯이 속이 후련하면서도, 상처 위에 겨우 덮인 딱지를 있는 힘껏 떼어 내듯이 아프고 쓰렸다. 모르겠어.
솔직히 나, 지금 무슨 소리를 듣고 싶은지도 모르겠어. 물론 말하는 것만으로도 마음 속 종기를 짜내듯 시원한 건 사실이지만, 지금 이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분명 후회한다는 자각이 있긴 하지만. 뭐랄까, 그런 문제가 아니라.
사실은 조금 다른 걸 기대했어. 다른 걸 원하고 갈구했어. 스스로도 무엇을 원하고 기대하는지 모르는 멍청한 소망이기는 했지만…….
“작작 좀 해요, 우리를 구해 준 건 고맙지만 이건 대체……!”
“소리 지르지 마요, 케르츠!”
그때였다.
성큼 다가온 용사의 체온이, 마치 달래고 어르듯 덮쳐 온 것은.
“나쁜 꿈이구나.”
껴안겼다. 그 사실만 겨우 깨달았을 뿐 용사의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지금 당장은 알량한 언어보다는 얼굴을 푹 덮은 체온이 더 사람을 압도했다. 머리를 누르듯 쓰다듬고, 피가 말라붙어 버석거리는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리는 느낌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아늑하고 몽롱했다.
“상인, 나쁜 꿈을 꾼 기분이구나.”
용사가 거듭 입을 열어 말했지만, 여전히 용사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잘 이해하지 못했다. 꿈이라니, 무슨 꿈? 나는 꿈을 꾸는 게 아니야. 오히려 꿈에서 깨어나 현실에 내동댕이쳐진 기분이라고. 차라리 이게 꿈이었으면 좋겠어.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아파요? 괴롭고, 혼란스럽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고.”
“…….”
“어떻게든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도 마음에 안 들고, 벗어나고 싶은데 벗어나는 건 무섭고. 그런 상태예요?”
“…….”
“나, 꿈꾸고 나면 늘 그렇게 무서워서. 그런데 상인이 지금 그래 보여서. 상인이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 왜 아픈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그런 기분이지요? 내가 맞게 이해했어요?”
아니, 사실은 몰라도 상관없지 않을까 싶었다. 어차피 나는 용사 녀석의 말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어. 딱히 지금 내가 혼란스러운 상태라서 그런 게 아니라, 원래 사람은 사람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거야.
나도 그렇고, 저 용사 녀석도 그렇고. 아무리 서로를 이해하는 것처럼 보여도 결국 어디선가 빗나가. 봐, 지금 용사 녀석도 저러잖아. 다 아는 척 조심스럽게 말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몰라. 두 살짜리 멍청이 주제에. 아는 것도 없으면서 괜히 아는 척 허세나 부리고.
아니, 아닌가? 어쩌면 의외로 정확하게 알고 있나? 꿈이니 뭐니 하는 헛소리를 빼면 의외로 맞는 것 같기도 한데. 몰라.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나, 만져 볼래요? 따뜻한 걸 만지면 조금은 기분이 좋아져요. 차가운 거여도 기분 좋아지는 건 마찬가지지만.”
“…….”
“만지는 건 싫어해요? 그러면 다른 거 할래요? 상인, 울 수 있어요? 울고 나면 조금 개운해질지도 몰라요. 울고, 얼굴도 닦고, 코도 풀고, 그러고 나면 어딘가 지치면서도 후련해질 테니까. 네?”
저것 봐, 엄청 자기중심적이잖아. 내가 자기랑 똑같은 수준인 줄 아는 거야? 이 미궁에서 남의 볼 만지는 걸로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은 용사 녀석밖에 없을걸. 자기가 좋아하니까 나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다니 그거야말로 엄청 이기적이라고.
우는 것도 말이야, 두 살짜리 용사나 되니까 울어도 귀여워 보이지. 지금 내가 눈물이며 콧물을 쏟아 내며 엉엉 울기 시작하면 그냥 부끄러울 뿐이라고. 자존심 때문에라도 못 해, 이 멍청한 녀석아. 멍청하고, 단순하고, 순진하고…….
‘맹목적이고, 진심이고.’
사실 용사가 하는 말이 얼마나 논리적이고 합리적인지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정말 중요한 건 감정이었다. 그 조심스러운 목소리에서, 쩔쩔매는 듯 조금 떨리는 손가락에서 전해져 오는 진심을 뿌리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뱃속 어딘가가 저릿저릿했다.
용사의 손길과 목소리에서는 묘한 절박함이 느껴졌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난처하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해 보고 싶어서. 예전에 보고 들은 것이나마 필사적으로 따라 해서 도움을 주고자 하는…….
‘이 녀석, 대체 뭘 따라 하고 있는 거야.’
나는 문득 깨달았다. 지금 용사의 행동은 일종의 모방일지도 모른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등을 문질러 주고, 만지고 싶은지 울고 싶지는 않은지 꾸준히 묻고……. 어린아이가 소꿉놀이를 하듯이, 자기가 본 부모의 모습을 모방해서 한껏 부모 흉내를 내듯이. 그렇다면 지금의 이 녀석은 대체 누구의 행동을 따라 하고 있는 걸까.
어쩌면 용사는, 자기가 악몽을 꾸었을 때 내가 예전에 해 주었던 행위를 그대로 흉내 내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이해해 보고 싶은 마음. 아프지 않게 해 주고 싶은 마음으로.
그 사실을 자각하자,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이 울컥 치솟았다. 대체 이걸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애초에 표현할 수 있기는 할까.
“이름을 못 물어본 건 미안해요. 그치만, 나도 이름 없어서. 이름 없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데에 다들 익숙해져서, 그래서 나도 케르츠도 하넨도 묻는 걸 까먹어 버렸어요. 분명 그럴 거예요.”
“…….”
“나중에 이름 가르쳐 줄래요? 상인, 지금은 많이 피곤해 보여요.”
그렇지, 생각해 보니 저 녀석은 아예 이름이 없구나. 별로 새삼스러운 일도 아닌데 괜히 허탈해져서 힘이 쭉 빠졌다. 힘이 빠졌다고 해도 자리에 주저앉거나 넘어지지는 않았다. 용사가 내 몸을 단단히 받쳐 주고 있어서였다. 그 안정감이 좋았다. 어리고 순진한 주제에 한편으로는 단단하고 흔들리지 않는 이 녀석의 모습이 싫지 않았다.
“괜찮아요. 이제 힘든 일은 다 끝났어요.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조금만 쉬어요.”
어쩌면 나는 이걸 바라고 있었던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의식 한구석으로 가라앉아 갔다. 체온과 손길, 더는 아프지 않을 거라는 확신, 이제는 다 괜찮을 거라는 위로의 속삭임. 언데드에게도 희망이 필요하다던 인형의 말이 머릿속 어딘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 희망. 처음부터 그거면 충분했을지도 모른다.
당장에라도 소리 내어 엉엉 울고 싶은데 울 수가 없었다. 딱히 심리적인 이유가 있어서 그렇다기보다는, 그저 잔뜩 지쳐서 울 힘조차 없다는 설명이 더 정확할 것 같았다. 나는 멍하니 숨을 고르고는 겨우 입을 열었다. 아까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서 그런지 목이 쉬어 있었다.
“조금만……. 이대로 자도 괜찮아요?”
“잘 수 있어요? 예전에는 잘 수 없다고 이야기했잖아요.”
“지금은 잘 수 있을 것 같아요. 설명은 나중에 할 테니까 조금만, 아주 조금…….”
정신이 새까만 물감으로 덧칠되는 듯한 감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용사는 계속 등을 토닥이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지만 그 감촉은 서서히 멀어져 갔다.
* * *
시답잖은 꿈조차 꾸지 않은 채 그저 오래도록 잠들었던 것 같다.
모닥불 타오르는 소리에 희미하게 의식이 깨어났지만, 몸을 푹 감싸고 있는 따뜻함이 좋아 굳이 눈을 뜨지는 않았다. 원래 모닥불의 온기가 이렇게 따뜻하던가 하는 의문이 머리 한구석을 스쳐 지나갔으나 곧 잊어버렸다. 괜한 의문을 제기했다가 갑자기 따뜻함이 사라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겁이 나서였다.
그러다가 숨이 막혀서 정신을 차렸다. 따뜻한 건 좋은데 답답해.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어서 조금 고통스러워. 폐에 산소가 좀 덜 들어오는 것뿐인데 왜 이렇게 힘들지?
‘아니, 힘든 게 당연하잖아.’
사람은 숨을 쉬는 동물이지. 숨을 안 쉬면 죽어. 한동안은 잊다시피 했지만 막상 깨닫고 보니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지금의 나는 이미 죽어 있으니까 숨을 좀 안 쉰다고 한 번 더 죽지는 않지만, 그래도 몇 분 정도 숨을 안 쉬면 죽을 정도로 고통스럽긴 할 거다. 역시 인간성 같은 건 안 되찾는 게 나았어.
그런데 왜 숨이 안 쉬어질까? 뭔가에 막힌 것 같은데. 치우려면 치울 수도 있겠지만 그러면 이 온기가 사라질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눈을 뜨지도, 감지도 못한 채 꾸물럭거리던 와중 타이밍 맞게 친절한 설명이 뒤따라왔다.
[용사가 나를 인형처럼 껴안고 자는 중이라서 그렇다. 인형은 꼭 껴안아도 괜찮지만 생물은 숨구멍 없이 꼭 껴안으면 숨이 막혀서 괴로워한다.]
아, 그렇구나. 용사가 나를 껴안고……. 잠깐만, 지금 뭐라고 했어? 나를 감싸고 있는 팔을 치우고 허겁지겁 일어나자,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곤히 잠들어 있는 용사가 시야에 들어왔다. 방금 전까지 느꼈던 온기는 용사의 체온이 분명했다. 그야 그렇겠지, 모닥불의 온기가 아니겠지. 그렇다는 건, 내가 지금까지 이 녀석에게 안긴 채 좋다고 골골거리며 잠이나 잤다는 소리인데…….
까닭 모를 낯 뜨거운 감정에 온몸이 배배 꼬였다. 아니, 그. 건장한 성인 남성한테 안겨서 기분 좋게 잠드는 취미 같은 거 원래는 없었거든? 아니지. ‘원래는’이라고 표현하니까 마치 이제는 생긴 것 같은 뉘앙스잖아. 지금도 없어. 진짜 없다고.
방금 그건 그냥, 인간성을 되찾은 후유증 같은 그런 감정인 걸로. 그런 걸로 하자. 역시 인간성이 나빠. 저 못된 인형 녀석이 나를 꼬드겼어. 물론 내가 실제로 인간성을 되찾기로 결정한 건 인형의 꼬드김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유 때문이었지만, 아무튼 탓할 대상이 필요하니까 인형을 탓하기로 하자. 그러면 인형을 제외한 모두가 행복해져.
그러고 보니 인형 녀석은 어디 있지? 아까 분명히 인형의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이리저리 주변을 둘러보던 도중, 문득 느껴진 시선에 나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목덜미에 소름이 쫙 돋는 감각이었다.
“일어났습니까?”
“……아, 네.”
용사는 잠들어 있고, 하넨도 여전히 기절한 상태였지만 케르츠는 처음부터 눈조차 붙이지 않은 듯했다. 구멍이 뚫리고 표면이 우그러진 인면철 갑옷은 벗어서 아무렇게나 방치해 두고, 아직도 다 낫지 않아 핏방울이 맺힌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낸 모습이 그야말로 패잔병의 꼬락서니였다.
그는 주변의 함정을 부숴 얻은 듯한 잔해를 모아 모닥불을 피워 놓았다. 평소에는 하넨이 마법으로 제법 그럴듯한 모닥불을 만들어 줬던 것 같은데,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고작 모닥불 하나 만들려고 하넨을 깨우기는 그랬던 모양이지. 모닥불은 크기도 작고 그다지 따뜻해 보이지도 않아서, 모닥불에 손을 녹이고 있는 케르츠의 모습을 묘하게 초라해 보이게끔 했다.
‘김이 새는데.’
이쪽을 바라보는 케르츠의 얼굴에는 피로감이 잔뜩 묻어나 있었다. 차라리 평소처럼 빤빤하니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트집이라도 잡아 보련만, 저렇게 궁상맞고 처량하게 앉아 있는 꼴이 대놓고 뻔뻔한 모습보다 더 얄밉단 말이지.
괜히 입을 삐죽거리며 케르츠를 노려보자, 케르츠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이번에는 내가 어떻게 나올지 관찰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차라리 괜찮냐고 말 한 마디라도 건네준다면 덜 얄미웠으련만!
“몸은 좀 괜찮아졌습니까?”
“거참 일찍도 묻네요. 엎드려 절 받는 꼴도 아니고.”
“아까는 미안했습니다. 당시에는 저도 여러모로 경황이 없었던지라.”
아니, 취소다. 차라리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덜 얄미웠을지도 모르겠다. 저렇게 산뜻한 어조로 사과해 버리면 꼬투리를 잡을 수도 없잖아. 조금 더 감정을 담아 사과해 주세요, 따위의 억지를 부리기에는 나도 제정신이 많이 돌아왔고 말이지.
게다가, 몇 시간쯤 푹 자고 나니 뱃속에서 부글부글 끓고 있던 분노와 서러움도 많이 사그라들어 있었다. 분명 저 사람에 대한 짜증이 완전히 풀린 건 아닌데, 그렇다고 다시 열을 올려서 소리를 질러 댈 정도로 의욕이 넘치지도 않았다.
마치 감정에 찬물이 끼얹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확 타오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내부까지 완전히 식지도 않은 미적지근한 상태. 나는 괜히 떨떠름해진 기분을 전환하기 위해 애써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혹시 솜뭉치 녀석 못 봤어요? 어째 안 보이는데.”
“인형이라면 제 뒤에 있습니다. 자는 것 같군요.”
“잔다고요?”
“당신이 잘 수 있다면 인형도 잘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까부터 미동도 없이 가만히 있길래 자는 줄 알았습니다. 처음 몇 시간 동안은 신어로 알 수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더니 이제는 그것도 안 하길래.”
분명 아까 녀석의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케르츠는 자기 등 뒤에서 인형을 집어 들어 나에게 내밀었다. 확실히 녀석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얌전히 앉아만 있었다. 어쩌면 진짜 자는 걸지도 모른다. 방금 그건 일종의 잠꼬대나, 아니면 내 착각일지도 모르고…….
[인형은 자고 있다.]
“거짓말하지 마. 자는데 어떻게 대답을 해.”
[인형은 자고 있다. 움직이지 않은 채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며 기억을 되새김질하고 있다. 내가 잘 수 있으니 인형도 이제 잘 수 있다.]
“너, 사실 잔다는 게 어떤 개념인지 잘 모르는 거 아니야? 그냥 가만히 있는 거랑 자는 건 아예 다른 상태라고.”
[……아무튼 인형은 자고 있었다. 이제 잠에서 깨어난 걸로 치자.]
인형은 기운차게 기지개를 하더니 케르츠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내가 보기에는 그냥 가만히 앉아 있었던 것 같지만, 본인이 자고 있었다고 빡빡 우기니 그냥 그런 걸로 쳐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그래도 이제 제대로 의사소통이 되는 걸 보니 제법 건강해지긴 했구나. 스트레칭을 한답시고 나름 열심히 몸을 움직이는 인형을 바라보며, 나는 괜히 웃음을 흘렸다.
“이젠 괜찮아졌나 보네?”
[인형은 나의 상태에 영향을 받는다. 내가 괜찮아졌으니 인형도 괜찮아졌을 것이다.]
“그거참 다행이다. 그런데, 잠깐만……. 너 분명 내 정신에 기생하고 있다고 했지. 그래서 내 상태에 영향을 받는 거고. 이제 그 이야기에 대해 해명할 때가 되지 않았어?”
[인형은 자고 있다. 아무래도 상태가 안 좋아진 모양이다.]
“이 자식, 너 그렇게 딴청 부리고 그러면 진짜 혼난다? 응?”
다시 자는 척을 하려던 인형은 속임수가 안 먹힌다는 걸 눈치챘는지 재빨리 도망쳤고, 나는 녀석을 잡기 위해 제법 필사적으로 뛰어야 했다. 다만 체력이 안 좋은 게 문제였다. 물론 언데드 상태로 머무르던 시절에도 막 그렇게까지 체력이 좋은 건 아니었는데, 적어도 그 당시에는 지치거나 힘들다는 감각을 전혀 못 느꼈단 말이지.
인형의 페이스에 맞춰 이리 뛰고 저리 뛰려니 숨이 가쁘고 발바닥이 터질 듯 아팠다. 몇 달쯤 숨도 쉬지 않고 살아가다가 갑자기 전신의 생명력을 다 끌어 쓰면서 뛰어다니려니, 지치는 건 둘째 치고 엄청 생소했다.
“너 거기 안 서? 응?”
[인형은 자고 있다. 나의 이야기를 들을 수 없는 모양이다.]
“자긴 뭘 자, 이 자식아! 자는 녀석이 그렇게 팔팔하게 뛰어다니냐?!”
[몽유병이다.]
“아주 갖다 붙이긴 잘 해요! 거기 서, 지금 서면 봐준다! 응? 안 서면 죽어, 진짜!”
하지만 한편으로는 즐거웠다. 근육이 저리는 듯 땡기는 감각도, 이마를 타고 줄줄 흘러내리는 땀방울도, 이 세계에 온 이후로 아예 외면하고 있었던 무언가를 마음속에서 조심스럽게 끌어내는 것만 같았다.
인형은 한참 동안 도망 다니다가 내가 지쳐 죽을 때쯤 되자 겨우 붙잡혀 주었다. 애초에 인형은 통증이나 피로 따위를 못 느끼니까, 내가 붙잡았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붙잡혀 줬다는 표현이 맞겠지.
나는 다리 사이에 인형을 끼우고는 있는 힘껏 꼬집고 간지럼을 태웠다. 인형이 촉각을 느낄 수 있는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녀석은 감각을 느끼기라도 하는 것처럼 팔다리를 휘저으며 바동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기분이 꽤 유쾌해졌다.
어쨌든 인형을 붙잡았으니 이제 이것저것 물어봐야겠다. 어째서 갑자기 신어인지 뭔지 하는 말로 지껄이기 시작했는지, 애초에 기생이라는 건 무슨 뜻인지. 그나저나 갑자기 몸을 무리하게 움직여서 그런지 팔다리가 쿡쿡 쑤셨다. 에고, 죽겠다. 물론 실제로 죽지는 않겠지만 그냥 기분이 그랬다.
끙 소리를 내며 바닥에 눕는데, 도저히 모르려야 모를 수 없을 정도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물론 케르츠의 시선이었다.
“뭐, 뭔데요? 내가 무슨 구경거리라도 돼요?”
갑자기 목청을 키우려다 보니 약간 소리가 삐끗했다. 오히려 더 우스꽝스럽게 보이겠다 싶어서 내심 머쓱해졌지만, 정작 케르츠는 내가 그러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조금 가라앉은 눈으로 이쪽만 빤히 바라보았다.
단지 쳐다보는 게 아니라 무슨 진지한 고민이라도 있는 듯한 표정이라 더 난감했다. 아니, 무슨 문제가 있다면 말이라도 좀 똑바로 해 줄 것이지! 저렇게 빤히 보기만 하면 뭘 어쩌자는 거야?
“왜 그러냐고요.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만……. 당신 말입니다. 대체 뭐가 어떻게 변한 겁니까?”
“설마 놀란 거예요? 새, 새삼스럽게 뭘 그래요. 그냥 인간성이 생긴 것뿐이에요.”
“인간성이라고요?”
“네, 뭐……. 당신들한테 달려든 사념들이 워낙 끈질겨서, 잠시 주목 좀 끌어 보려고. 그냥 두면 당신들이 죽게 생겼지, 인형 녀석은 도움도 안 되지, 저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고요. 솔직히 하고 나서 엄청 후회했어요. 그냥 내버려 둘걸. 인간성 따위 되찾아 봤자 아프기만 할 뿐인데.”
나는 인형 녀석의 머리를 꾹꾹 주무르며 표정을 가다듬었다. 인형은 싫은 티를 내며 바동거렸지만, 아예 도망가지는 않는 걸 보니 그럭저럭 견딜 만한 모양이다. 다만 자기가 도움이 안 되었다는 말이 좀 서운했는지 계속 내 손을 탁탁 치며 불만을 표시했다.
아무튼 케르츠는 영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나저나 저 사람, 설마 내가 땀을 흘리고 지치는 모습을 보여서 그거 때문에 놀란 건가? 원래는 땀을 흘리긴커녕 통각조차 안 느끼던 내가 갑자기 이런 모습을 보여서?
그야 저 사람 입장에서 놀랄 만한 일이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저렇게까지 떨떠름한 표정을 지을 건 없지 않나 싶었다. 그렇게 놀랄 거면 내가 화를 내고 아픔을 호소할 때 놀랐어야지. 그때는 멀쩡히 있다가 이제 와서 놀랄 이유가 있나 싶었다. 나는 그냥 평소처럼 인형과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좀 벌였을 뿐인데.
아무튼 케르츠 쪽이 입을 다물고 있으니 나라도 뭔가 말해야 했다. 어차피 인간성에 대해 설명하기는 할 생각이었으니까 지금 이 사람에게 먼저 해 버릴까. 그러면 저 사람도 조금이나마 충격에서 벗어날지도 모르지.
“그, 뭐냐. 제가 굳이 말은 안 했지만……. 용사님이 만들어 내는 영혼 조각 있잖아요. 그걸 많이 섭취하면 잠시나마 생전의 인간성을 되찾을 수 있거든요.”
“…….”
“맞다, 오해하진 마세요. 딱히 그것 때문에 영혼 조각을 모은 건 아니고, 평소에는 그냥 몸이 썩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 모았을 뿐이라고요. 애초에 인간성을 되찾은 것도 이번이 처음이고.”
“…….”
“감각이나 감정이 돌아오는 게 기본 기능이고요. 그 뭐냐, 제가 생전에 가지고 있었던 그런 것들은 다 가지고 있다고 보면 돼요. 그렇다고 언데드 상태에서 벗어나는 건 아니라서 다쳐도 딱히 죽거나 하진 않고……. 그 인간성에 이끌려서, 저를 인간으로 착각한 사념이 쫓아오거나, 그런 응용이 가능하기도 하고.”
“…….”
“아까 좀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거나 화를 낸 이유도……. 갑자기 감정이 돌아와서 그런 것도 있어요. 제가 좀 과하긴 했지만, 그래도 사람이 아프면 좀 화낼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죽을 만큼 아플 걸 알면서도 사념들을 유인하고 함정에 뛰어드는 게 쉬운 일인 줄 알아요? 나 아니었으면 당신들 다 전멸했을 텐데.”
괜히 공치사를 하는 느낌이 들어 민망했지만 나는 꿋꿋하게 고개를 쳐들었다. 공치사면 어때서. 내가 지금 저 사람한테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 정도는 들어야 할 상황 아닌가? 내가 사념들의 시선을 끌어 주지 않았더라면 저 사람들은 지금쯤 사념 밥이 되었을걸.
게다가 저 사람들, 내 허락도 없이 회복초를 왕창 써 버렸잖아? 아무리 급박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다 쳐도, 대체 얼마나 남의 회복초를 마음껏 들이부었길래 저렇게까지 금방 나은 건지 어이가 없었다. 이쯤 되면 자루 안을 들여다보기가 두려울 정도인데.
“아무튼, 이게 계속 그런 건 아니고, 열여덟 시간이 지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요. 케르츠 씨가 아는 평소의 그 모습 있잖아요.”
“언데드의 모습 말이군요. 아무런 고통도,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맞아요, 그거 말이에요. 지금까지 몇 시간이나 지났는지는 모르겠는데…….”
[여섯 시간 정도 지났다. 내가 원래대로 돌아가려면 앞으로 열두 시간 정도 남았다.]
“야, 장난해? 그것밖에 안 지났다고? 어쨌든 열두 시간이 지나면 원래대로 돌아가요. 그 전까지는 계속 이렇게 통증도 느끼고 변덕스럽게 화도 내고……. 아무튼 그럴 거예요.”
“…….”
“그러니까 고마운 줄 알면 제 비위도 좀 맞춰 주고, 제가 화내든 말든 그냥 그러려니 하라고요. 아까처럼 때릴 것처럼 화내고 소리 지르지 말고!”
내가 당당하게 선언하자, 인형 녀석도 내 흉내를 내듯 으스대며 케르츠에게 삿대질을 해 댔다. 그러자 케르츠는 미묘한 표정으로 나와 인형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인형 녀석이 우스운 짓을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아니면, 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말문이 막혔나?
‘제가 언제 때릴 것처럼 화내고 소리를 질렀습니까?’ 하는 식의 반박이 돌아올 거라 예상하며 나는 케르츠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야, 뭐. 실제로 저 사람이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평소에는 그런 거 자주 했잖아. 아무리 내가 언데드라고는 해도, 머리를 짓이기거나 팔을 떼어 내는 등의 폭력적인 짓을 자주 저지르곤 했으니까.
솔직히 저 사람은 폭력성을 좀 줄일 필요가 있어. 명색이 성직자의 후손이라는 작자가 저렇게 주먹을 쉽게 휘둘러서야 되겠어?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입을 삐죽거리자, 케르츠는 나를 한참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겨우 입을 열었다.
하지만 실제로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내 예상과 완전히 딴판이었다.
“……그러니까, 열두 시간이 지나면 마치 지금의 신처럼 돌아갈 거라 이 말이군요.”
“네?”
“사람을 사랑하지도 미워하지도 못하고, 편견을 가지지도 고통을 표현하지도 못하고.”
“그, 그건 또 무슨 소리예요?”
“당신이 혼란에 빠져 있던 동안 인형이 했던 이야기입니다만……. 뭐, 모르면 됐습니다.”
“인형이 그런 소리를 했다고요? ……야, 야. 너 케르츠에게 그런 소리를 했어?”
[인형은 모르는 일이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인형은 딴청을 부리듯 고개를 젓고는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아무래도 자는 척을 하려나 보는데, 안 통한다는 걸 알면서도 꾸준히 시도하는 모습이 멍청하다고 해야 할지 얄밉다고 해야 할지 가늠이 안 왔다.
“장난치지 말고. 똑바로 말해, 케르츠에게 무슨 소리를 했어?”
[장난이 아니다. 인형은 부패의 영향으로 잠시 이성을 잃었고, 그 동안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인형은 알 도리가 없다.]
“진짜야? 그냥 핑계 대는 건 아니고?”
[핑계가 아니다. 이번에는 인형을 믿어 주어도 괜찮다. 아무래도 감정에 휩쓸린 나머지 몇몇 불필요한 문장을 만들어낸 모양이다.]
내가 인형을 집어 들어 옆구리를 쿡쿡 찌르자, 녀석은 반항하는 대신 그냥 내 손을 붙잡고 자기 머리를 비비기 시작했다. 장난치고는 묘하게 진지한 반응이었다. 어쩌면 부패니 뭐니 하는 이야기는 핑계가 아니라 진짜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나에게조차 도무지 밝히고 싶지가 않아서 억지 핑계를 대서까지 숨기고 싶거나.
결국 나는 조금 김이 새고 말았다. 케르츠에게 캐물으면 인형이 정확히 무슨 소리를 했는지 알 수야 있겠지만, 인형은 물론이고 어쩐지 케르츠조차도 그 화제를 더 이어 나가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저 사람의 표정을 보아하니, 인형이 이대로 입을 다물고 있으면 은근슬쩍 딴 소리를 지껄일 것 같은데.
……이래서야 더 캐물을 수도 없게 생겼네. 내가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젓자, 나와 인형 사이의 대화가 끝났다고 판단했는지 케르츠가 입을 열었다. 역시나 다른 화제였다.
“그나저나, 결국 지금 이게 당신의 본래 모습이라 이거죠. 평소의 모습은 언데드화로 인해 만들어진 모습이고?”
“네? 뭐,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아니, 맞나?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긴 하네요. 감정이나 감각이 없어서 조금 더 무디게 행동했던 것도 있으니까.”
“역시 그랬군요. ……몰랐습니다.”
“뭐, 뭘요.”
“그러니까, 당신은……. 항상 아무렇지도 않은 듯 굴었잖습니까? 희망도 신념도 없으니 그저 죽어 있을 뿐이라고,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말하던 사람이니……. 생전이라고 해서 특별히 성격이 다르지는 않을 줄 알았는데.”
내가 그런 말도 했었나? 고개를 갸웃하다가 겨우 떠올렸다. 맞다, 그런 이야기를 농담처럼 꺼냈던 적도 있기는 있었지.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조금 섬뜩한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래도 당시에는 나름대로 진심이었다. 언데드에게도 희망이 필요하다던 인형의 말을 비웃고, 용사를 위로하긴 하지만 내심으로는 그 위로의 힘을 불신하고…….
그다지 오래전의 일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그 시절의 나와 지금의 나는 완전히 딴사람인 것만 같았다. 일순간 느낀 생경함에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아, 나는 민망함을 외면하기 위해 괜히 입을 열어 보았다.
“그거야 뭐……. 그게 왜요, 갑자기 제가 변하니까 이상해 보여요?”
“조금은요. 솔직히 평소의 당신을 부러워하고 있었습니다. 예전에도 말한 적이 있지만, 감정도 감각도 없는 삶이란 꽤나 평화로워 보여서.”
“네, 네. 그러시겠지요. 간헐적으로 미쳐서 사람을 패고, 남 기분 생각 안 하고 아무렇게나 말하는 것보다야 감정 없이 사는 게 더 나을 것 같기는 하네요.”
“맞다, 그러고 보니 당신은 제가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걸 싫어했죠. 저번에도 그 문제로 화를 낸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있었지요. 케르츠 씨 입장에서야 너무 하찮아서 기억도 안 날 정도겠지만.”
이 사람, 예전에 나랑 이 문제로 싸웠던 거 거의 까먹다시피 하고 있었구나……. 어이가 없기는 했지만 케르츠가 너무 평소대로 굴고 있어서 오히려 화조차 나지 않았다. 내가 이 사람한테 무슨 기대를 하겠어. 다른 사람의 기분 따위는 아무래도 좋고, 그저 자기가 무언가에 꽂히면 거기에만 몰두해 버리는 인간인데.
“그래서, 제가 화내는 모습을 보니까 엄청 낯설었어요? 실망하고?”
“아뇨, 사실 그때에는 별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저 당신이 왜 그러는지가 궁금했을 뿐, 딱히 실망하거나 그러지는 않았어요. 애초에 제가 그런 문제로 실망할 이유도 없고.”
“그럼 뭐예요. 아까는 왜 그런 표정 지었어요?”
“그거야 당신이……. 잠깐만요. 당신, 그때 자기가 어떤 표정 짓고 있었는지 알기는 합니까.”
“무슨 표정이요?”
나는 괜히 입을 삐죽거리면서 케르츠를 흘겨보았다. 그래도 이제는 저 사람에게 크게 휘둘리지 않아 다행이다. 이제는 나도 저 사람의 패턴을 좀 파악했단 말이지. 감정이 생기긴 해지만 그래도 경험이 쌓였으니, 이제 더는 저 사람 때문에 짜증 나는 일도 없을 거다.
……라고, 생각했는데.
“풋.”
“왜, 왜 갑자기 웃어요?”
“아니, 됐습니다. 그만하죠.”
“뭘 그만해요. 혼자 시작하고 혼자 그만하다니 사람 놀려요?”
갑자기 피식 웃음을 흘리는 케르츠의 모습에 괜히 놀라고 말았다. 아니, 상대방을 짜증 나게 하는 수준을 넘어 이제는 놀래키기까지 해? 단순히 웃는 표정을 짓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 미소의 이면에 담긴 감정이 진짜 문제였다.
마치 뒤통수를 한 대 세게 후려 맞은 듯한 표정이었다. 충격을 받았지만 그걸 도저히 드러내고 싶지는 않아서, 마치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해 억지로 웃어 보이는 듯한 웃음이었는데 그게 케르츠와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아서 문제였다.
내가 멍하니 케르츠를 바라보자, 그의 무방비한 표정은 곧 원래의 예의 차린 미소로 돌아갔다. 그는 머쓱해졌는지 슬쩍 시선을 돌리며 말을 내뱉었다.
“그만하자고요. 어쨌든 알겠습니다. 원래의 당신은 제가 알던 모습과는 많이 달랐군요. 그래서 용사님도 당신에게 이끌린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슨 소리인지 통 모르겠는데요.”
“저도 잘 모르겠군요. 많은 생각이 듭니다. 그렇게 빛나던 것을 잃고 얻은 평안함이니 나름의 가치가 있는지, 아니면 그럼에도 지나친 희생이었는지…….”
“……저기요?”
“미안합니다. 그만하자고 먼저 말한 건 제 쪽이었죠. 더는 말하지 않을게요. 어쨌든 고맙습니다. 아까 당신이 말했던 대로, 앞으로 열두 시간 동안은 최대한 당신의 편의에 맞춰 주도록 하죠.”
케르츠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뒷맛이 영 미적지근한데 화해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서 대놓고 화내기도 그렇고. 그렇다고 이대로 넘어가자니 어딘가 찝찝하고……. 나는 인형을 흘끔 바라보았지만 인형은 내 무릎 위에서 평화롭게 스트레칭을 하며 놀고 있었다. 어깨가 뭉치는 것도 아니면서 팔을 쭉쭉 뻗고 있다.
저 녀석, 묘하게 케르츠하고 죽이 잘 맞는단 말이지. 그럴 거면 케르츠하고 살아, 이 못된 녀석아.
[성장을 위해서는 의심이 필요하다.]
또 영문 모를 소리만 지껄이고 있지. 어쩐지 예전에 용사 녀석에게 했던 말과 비슷해 보이는데.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케르츠 쪽을 바라보던 나는 문득 묘한 사실을 깨달았다.
이건 좀 딴소리일지도 모르겠는데……. 케르츠 저 사람, 아까부터 자꾸 쇠톱으로 등을 때리고 있지 않나? 그것도 제법 세게. 내가 미심쩍은 눈으로 바라보자, 케르츠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당신이 가지고 있는 회복초 말입니다. 대체 정체가 뭡니까?”
“네? 무슨 회복초요? 그러고 보니 케르츠 씨, 고작 여섯 시간밖에 안 지난 거치고는 엄청 빨리 나으셨는데……. 대체 뭘 쓰신 거예요.”
“저도 모릅니다. 용사님이 멋대로 가져와서 쓰셨으니까요. 고양이 귀나 강아지 귀 어쩌고 말씀하시던데.”
“고, 고양이 귀?”
“저는 딱히 귀가 나는 기분이 안 들지만 등이 꽤 거북하군요. 마치 날개가 생겨서 움직이기라도 할 듯한 느낌입니다. 혹시 짚이는 바가 있으십니까?”
잠깐, 그거 설마. 나와 인형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동시에 고개를 돌려 용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짚이는 바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이건 도저히 모를 수가 없는 수준이라서……!
“용사님, 당장! 지금 당장 일어나세요! 대체 케르츠 씨와 하넨 씨한테 무슨 짓을 하신 거예요!”
케르츠는 황당한 표정으로 나와 용사의 해프닝을 바라보았다. 부스스 잠에서 깨어난 용사는, 자기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도 이해하지 못한 채 맹한 표정으로 눈을 비비고 있을 뿐이었다.
* * *
“케르츠, 날개가 생겨요? 진짜 근사해요! 어떤 날개가 생기는데요?”
“케르츠 씨한테 진짜 날개가 생기는 게 아니에요! 있지도 않은 날개의 감각이 느껴지는 환상통이라니까요! 저기, 용사님은 괜찮아요? 회복초를 쓰고 난 이후로 이상한 감각 같은 거 느껴지지 않아요?”
“저는 회복초 안 썼어요. 케르츠가 감싸 주어서 다치지 않았어요.”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얄밉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인형은 뭉툭한 팔 끝으로 용사의 무릎을 퍽퍽 내리쳤다. 제 딴에는 용사의 잘못을 혼낸다고 그러는 모양이었는데, 정작 용사는 인형이 자기랑 놀고 싶어 한다고 인식했는지 생긋 웃으며 인형을 들어 올렸다. 인형이 본전도 못 뽑은 채 용사에게 볼을 잡아당겨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와 케르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뭔데, 너희들. 뭐 때문에 이렇게 시끄러운 거야. 가뜩이나 골이 울리는데 너희들 때문에 더 머리가 아프다고…….”
“마법사님, 혹시 환상통 같은 거 안 느껴지십니까? 있어선 안 될 부위가 아프다든지, 당장에라도 돋아날 것 같다든지.”
“어쩐지 아까부터 꼬리뼈 근방이 쿡쿡 쑤시더라니. 뭐 저주라도 걸렸냐? 그 사념들이 우리에게 저주를 건 거야?”
“아뇨, 상인이 가져온 회복초를 잘못 쓰는 바람에.”
난장판이 벌어지는 바람에 어영부영 잠에서 깨어난 하넨은, 당연하게도 노골적인 불쾌감과 짜증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나마 안색만은 멀쩡해 보이는 케르츠와는 달리 하넨은 아예 얼굴이 누렇게 떠 있었다.
딱히 환상통의 영향이라기보다는 기본 체력의 문제가 아닐까 싶었다. 용사 일행 중에서도 제일 오래 쉬었으면서 제일 골골거리다니, 저 사람 저래도 괜찮은 건가? 아니, 상식적으로 생각하자면 죽을 뻔하다가 살아났으니 안색이 안 좋은 것도 당연하긴 한데…….
“뭐, 환상통과 관련된 부작용이야?”
“그렇습니다. 있지도 않은 부위가 돋아나는 착각이 드는 저주라고 하던데……. 저 같은 경우에는 등에서 날개가 돋아날 듯한 느낌이 자꾸만 드는군요.”
“고작 그런 거 가지고 소란 피우지 말라고. 난 또 무슨 대단한 저주라도 걸린 줄 알았네.”
“……해소 방법이 있는 겁니까?”
“실제로 하나 달아 주면 되는 거잖아. 그런 류의 저주는 환상 속에서만 영향을 미치는 거라서, 일단 현실 세계로 끌어내 버리면 쪽도 못 쓰고 나가떨어진다고.”
하넨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더니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대수롭지 않다는 듯 태연하게 구는 하넨의 모습에 내심 당황하다가, 저 사람이 독과 저주를 전공으로 하는 마법사라는 사실을 겨우 깨달았다. 그렇구나, 자기 분야의 문제니까 해결책도 금방 찾는 모양이네. 불치병이 아니었구나.
……잠깐, 그 문제가 아니잖아. 하나 달아 주면 된다니, 사람의 몸에 날개나 꼬리를 다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었나?
“달아 주다니, 어떻게 말입니까?”
“인공 신체를 만드는 마법 같은 건 그다지 어렵지도 않아. 탈부착이 가능한 형태로 만들어서, 환상통이 심해질 때 잠깐 부착하고 있다가 상태가 나아지면 떼어 버리면 돼.”
“그걸로 충분한가요? 떼면 다시 상태가 악화되는 거 아닙니까?”
“이런 식의 저주는 말이지, 있지도 않은 부위가 아프다는 모순이 가져다주는 절망감으로부터 힘을 얻는 거야. ‘지금은 꼬리가 없지만, 언제든지 꼬리를 붙일 수 있으니 괜찮다’ 같은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 잡히기만 해도 꽤 증상이 완화된다고. 뭐, 미궁 안에서는 인공 신체를 만들 재료가 없으니 한동안 환상통에 시달려야겠지만…….”
하넨은 자꾸만 꼬리뼈 부위를 주먹으로 퍽퍽 쳤다. 말은 저렇게 해도 지금 당장 불편하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이 세계, 탈부착형 인공 신체를 아무렇지도 않게 달 수 있다고 말하는 걸 보아하니 의외로 생명 공학 쪽으로 발달한 걸까. 아니, 날개나 꼬리 같은 걸 인공 신체라고 말하는 시점에서 어딘가 신체 개조의 냄새가 풀풀 나는데. 키메라라든지.
“상인 씨가 재료를 모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못 모아. 이 미궁 안에는 살아 있는 동물이 없잖아. 기껏해야 사념밖에 없는데 그걸로는 인공 신체를 못 만들고……. 어쨌든 한동안 참고 있어, 케르츠. 미궁을 나가면 내가 어디서 박쥐 날개라도 구해다가 달아 줄 테니까. 그리고 나는……. 쥐 꼬리라도 달면 되려나.”
역시 키메라잖아. 동물의 신체를 사람 몸에 달고도 무사하다니 이건 생명 공학의 영역도 넘어섰다. 박쥐 날개를 단 케르츠가 더 우스꽝스러울까, 아니면 쥐 꼬리를 단 하넨이 더 우스꽝스러울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죽은 사람이 언데드가 되어 움직이는 시점에서 현대 과학 같은 건 아무래도 좋은 문제인데.
아무튼, 지금 당장은 아니라도 나중에 증상을 치료할 수 있다니 다행이었다. ‘꼬리’ 운운하는 소리를 들은 용사가 눈을 빛내며 하넨에게 이것저것 캐물으려 했지만, 타이밍 좋게 인형이 용사의 얼굴에 달라붙어서 볼을 퍽퍽 때려 준 덕분에 용사가 하넨을 괴롭히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넨은 용사의 모습에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불을 피웠고, 케르츠는 당연하다는 듯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지금까지와 다름없는 평화로운 휴식 시간이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용사 일행이 전멸하기 일보 직전이었다는 사실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다.
나는 모닥불에 손을 가져다 댄 채 멍하니 그 온기를 즐겼다.
분명 예전과 똑같은 온기의 모닥불일 텐데, 지금 이 순간 손끝으로 전해지는 온기는 이상할 정도로 아늑하고 따뜻했다.
막 자고 일어난 터라 일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전혀 모르던 하넨은, 나와 케르츠에게 그간의 이야기를 전해 듣고는 꽤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야기를 듣자하니 네가 엄청 고생한 모양이네……. 정말로 고마워. 너 덕분에 나와 케르츠가 살았어. 네게 진짜 큰 빚을 졌다.”
“됐어요, 이제 와서 뭘……. 어차피 그쪽이 전멸하면 저도 몸을 유지할 방법이 없는걸요.”
말이야 그렇게 했지만 괜히 기분이 좋았다. 그래, 이런 칭찬이라도 들어야 보람도 생기고 기분도 좋지! 엎드려 절 받는 것 같다는 느낌이 안 드는 건 아니었지만, 그거야 내가 케르츠에게 제대로 된 감사 인사를 못 받아서 그렇지 하넨의 입장에선 나름대로 진심일 거다. 나는 그럭저럭 뿌듯함을 느끼며 하넨에게 웃어 보였다.
“너한테는 이래저래 신세를 지네. 괜히 미안해지게.”
“괜찮다니까요, 진짜. 그렇게 미안하시면 돈으로 갚으시든지요. 사념을 엄청 잡았을 테니 영혼 조각도 많이 모았을 거 아니에요?”
“용사랑 케르츠 녀석이 써 버려서 그렇게 많이 모으지도 못했어. 그렇게 영혼 조각을 써 댔는데도 용사 녀석은 막판에 몸에 무리가 오지, 케르츠와 나는 죽을 뻔했지……. 아무튼 줄 수 있는 만큼은 대가를 줘 볼게. 회복초도 그렇고, 그 밖의 일도 그렇고.”
하넨은 그렇게 말하며 내게 슬쩍 눈짓해 보였다. 그 눈짓의 의미를 모를 리는 없었다. 맞다, 그러고 보니 저 사람에게 받을 대가가 또 있었지. 나는 아직 자루에 들어 있을 ‘진실을 보는 눈의 눈물’을 떠올리며 머리를 긁적였다. 생각해 보니 그걸 모으느라 용사 일행과 타이밍이 안 맞았던 것 같기도 한데…….
어쨌든, 나중에 하넨에게 그 물건에 대한 대가도 받아야겠다. 영혼 조각만으로는 부족할지도 모르니 개인적으로 다른 대가도 요구해 볼까? 흑마법사에게 요구할 만한 대가라면 과연 뭐가 있을까, 머릿속으로 부지런히 계산기를 두드리고 있는데 갑자기 하넨이 질문을 던졌다.
“그나저나, 네 이야기를 들으면서 하나 신경 쓰이는 점이 있는데…….”
“네? 뭔데요?”
“그래서 부패라는 게 뭐야? 사념을 끌어모으는 수단이라는 것까진 알겠는데, 그 이상의 변화가 뭔지는 잘 모르겠네. 지금의 너, 솔직히 평소와 별로 다르지 않아 보이거든?”
“아뇨, 아까 전에는 엄청 달랐는데요. 막 케르츠 씨한테 화도 내고.”
“그거야 당연한 거 아냐? 나도 저 벽창호 같은 녀석하고 같이 있으면 화도 내고 소리도 지르고 그러는데. 그런 거 말고, 있잖아. 부패 하면 연상될 법한 엄청 음습하고 어두운……. 그런 건 안 느껴진단 말이지. 혹시 나중에 부작용으로 뭐 이상한 일이라도 벌어지는 거 아니야?”
어, 듣고 보니 그러네. 케르츠와 용사는 하넨의 말을 듣고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지만,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인형에게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 나도 몰라. 인형 녀석이 나중에 설명해 주겠다 그러고는 어영부영 넘겨 버렸단 말이야. 나도 워낙 상황이 급박하다 보니 설명을 들을 만한 여유가 없었고…….
[인형은 갑작스러운 시선에 부끄러워하고 있다.]
“괜히 장난치지 말고, 이 솜뭉치 자식아. 그래서 결국 부패라는 게 뭐야? 나중에 설명해 준다고 해 놓고 이제 와서 입 씻기야?”
[인형에게는 입이 없다. 어쨌든, 부패라고는 해도 나의 본성 자체가 바뀐 건 아니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본성이 바뀌지는 않았다고? 그럼 뭐가 바뀐 건데?”
[바뀐 건 가능성뿐이다. 굳이 비유하자면, 저울의 추가 지나치게 한쪽으로 기울어 있는 정도의 상황이다.]
처음에는 부끄러운 척 고개를 돌리더니, 그 전략이 안 먹힌다는 걸 깨닫자마자 인형은 자리에서 일어나 빙글빙글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저건 또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가능성? 추가 한 쪽으로 기울어 있어?
[나는 천장에 매달려 있는 천칭을 보고 있다. 천칭의 양쪽 접시에는 두 가지 물건이 올라가 있다. 나는 두 가지 물건 중 하나만을 얻을 수 있다. 둘 다 얻는 건 불가능하다.]
“……흐음.”
[그런데 천칭은 한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져 있어서, 기울어진 쪽의 접시에는 손이 쉽게 닿지만 반대편의 접시는 까치발을 들고 서도 쉽사리 손이 닿지 않는 위치에 있다. 참고로 이건 물건의 무게 때문에 생긴 문제가 아니라 천칭 자체의 고장으로 인해 생긴 문제다.]
“뭐야, 그거. 지금 내 상황을 비유하는 거 맞긴 해?”
[나는 두 가지 물건 중 하나를 집고 싶어 한다. 위치상으로 보자면 기울어진 쪽 접시의 물건을 잡기가 훨씬 쉽고, 반대편 접시의 물건을 잡는 건 매우 어렵다. 머리를 써야 하거나 노력을 들여야 하거나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그런 상황이라면, 나는 아무래도 기울어진 쪽 접시의 물건을 잡을 가능성이 높다.]
천칭, 물건, 기울어진 접시. 점점 알쏭달쏭해지는데.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인형을 빤히 바라보았다. 인형은 빙글빙글 돌고 뛰고 팔을 휘두르면서 제법 근사한 춤을 추고 있었다. 나는 인형의 춤에 주의를 빼앗길 뻔하다가, 곧 정신을 차리고 비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확실히 그 상황이라면 기울어진 쪽의 물건을 잡는 게 편하겠지.
하지만……. 인형의 비유에는 조금 이상한 점이 있다. 그러니까, 뭐가 문제냐 하면.
“그러니까, 가능성이 높을 뿐이지?”
[그렇다. 가능성이 높을 뿐이다.]
“만약 내가 기울어진 쪽 물건이 아니라 반대쪽 물건을 바란다면, 굳이 가능성이 높다고 해서 원하지도 않는 물건을 잡지는 않겠지?”
[기울어진 쪽의 물건 또한 내 욕구를 해결하는 데에는 도움이 된다. 노력 대비 효율을 따지자면, 반대편의 물건을 잡기 위해 노력하느니 기울어진 편의 물건으로 만족하는 게 더 나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는 해도, 내가 정말로 반대편 접시에 있는 물건을 바란다면 굳이 기울어진 쪽 물건을 잡지는 않을 거야. 아무리 그쪽 물건을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다고는 해도 말이지. 안 그래?”
내가 그 말을 입 밖에 꺼내자마자, 인형은 느닷없이 춤추기를 멈추더니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내심 당황하면서도, 나는 인형이 묘하게 기뻐하고 있다는 감상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인형은 내 옆으로 다가와 무릎을 탁탁 쳤다.
[그래서 나 또한 그랬다.]
“무슨 뜻이야?”
[천칭의 한편에는 선한 행위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악한 행위가 있다. 부패는 그저 나의 저울추를 악함 쪽으로 지나치게 기울여 놓았을 뿐이다. 대부분은 그 상황에서 악을 선택하겠지만, 그럼에도 선을 선택할 수 있다면……. 그건 분명 좋고 바람직한 일이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인형을 바라보았다. 인형은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저편으로 걸어가 춤추기 시작했는데, 그 춤은 아까 전에 비해 조금 더 힘차고 역동적으로 보였다. 아니, 잠깐만. 설마 고작 이걸로 설명 끝이야? 비유를 했으면 그 비유에 대한 알아듣기 쉬운 설명도 좀 같이해야 하는 거 아니야? 이것만으론 전혀 모르겠는데?
용사와 하넨, 케르츠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인형에게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가 꽤 궁금했던 모양이다. 잠시 고민하던 끝에, 일단 내가 이해한 만큼의 설명만 용사 일행에게 늘어놓기로 마음먹었다.
“인형이 뭐라고 합니까? 혹시 부패의 부작용이라도 있답니까?”
“어, 그런 것 같지는 않고……. 그냥 뭐, 제가 좀 심술궂게 굴 가능성이 높아지나 봐요?”
인형이 잠시 발을 헛디딘 것 같은데 내 착각이겠지. 갑자기 묘하게 서툴러진 인형의 춤을 느긋하게 구경하면서 나는 모닥불에 손을 가져다 댔다. 요리를 마친 케르츠가 프라이팬을 치운 덕분에 편하게 온기를 쬘 수 있었다.
“그것뿐입니까? 그러면 안심해도 괜찮겠군요. 그나저나 고기가 다 구워졌는데 드실 겁니까? 당신, 인간성을 되찾으면서 식욕도 생겼다면서요.”
“안 먹어요. 배가 고프긴 한데 좀 굶는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그런 고기는 별로…….”
“네 심정이 이해는 가지만, 네가 그런 식으로 말하면 늘 그런 고기를 먹는 우리는 뭐가 되냐?”
“듣고 보니 그러네요. 미안해요.”
인형은 춤을 추고, 용사 일행은 나름대로 식사를 하고, 모닥불은 따뜻하고……. 나는 작게 하품을 하며 웅크려 앉았다. 뭐, 부패니 뭐니 하는 건 다른 문제로 치더라도 인간성을 되찾은 게 꼭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아. 온기도, 적당히 몸을 누그러뜨리는 노곤한 피로감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저 편안하게 느껴졌다.
배부르게 식사를 마친 용사 일행은 다시 모닥불 앞에 드러누워 모포를 덮었다.
이제 슬슬 다음 층으로 이동하려 들 줄 알았는데 조금 더 쉬려는 모양이다. 지금까지의 휴식으로는 충분히 체력을 회복하지 못한 걸까? 하긴, 겉보기에는 멀쩡해졌다 할지라도 사념들에게 먹혀 죽기 직전까지 갔다가 되살아났으니 몸이 성할 리는 없겠다. 아무리 회복초의 효능이 좋다 할지라도 몸이 망가졌다 복원된 후유증까지 없애 주지는 않으니까.
‘게다가 저 사람들, 다친 건 둘째치더라도 일주일 동안 내내 싸웠다는데……. 당연히 피로가 쌓여 있겠지.’
자세히 살펴보니, 케르츠와 하넨은 아직도 안색이 좋지 않았다. 케르츠가 불침번을 서느라 눈을 붙이지 못했다든지, 하넨의 기초 체력이 안 좋다든지 하는 문제를 떠나서 두 사람 모두 제법 지쳐 보였다. 그리고 용사는…….
“용사님도 주무세요. 푹 자야 체력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자야 하나요?”
“……푹 자야 체력을 회복할 수 있다니까요. 이번 층에서 충분히 쉬고 만전의 준비를 마쳐야 다음 층에서 버틸 수 있을 겁니다.”
“알았어요. 그럼 저도 잘게요.”
눈 온 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강아지처럼 눈이 말똥말똥하고 표정이 해맑지만 아마도 지쳐 있을 거다. 케르츠가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분명히 지쳐 있겠지. 응, 지쳐 있는 걸로 치자. 다른 동료들에 비해 다친 곳이 거의 없어서 멀쩡해 보일 뿐 분명 체력적으로는 한계일 거야. 아마도, 그렇겠지?
“상인도 자나요? 아니면 우리가 자는 사이에 다음 층으로 내려가나요?”
“저요? 음……. 저는 그냥 좀 쉬고 있을게요. 감정이나 감각이 없어지려면 아직 열 시간도 넘게 남았으니까.”
“다행이다. 먼저 가진 않는 거지요?”
대놓고 반색을 하는 용사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뭐, 어차피 나도 지금 당장은 다음 층으로 내려갈 생각이 없다. 이번 층에서도 이렇게나 난장판을 겪었는데 다음 층에서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 알고 덥석 내려가겠어? 내려가자마자 함정에 걸리거나 사념과 조우하기라도 하면, 제대로 된 전투 능력조차 없는 나는 정말이지 도망칠 구석조차 없다고.
용사 일행과 같이 움직여서 최소한의 안전이라도 보장받거나, 아니면 앞으로 열두 시간쯤 더 버텨서 인간성을 어떻게든 털어 내거나. 어느 쪽을 선택하든 간에 지금 아래층으로 내려갈 이유는 없다. 용사 일행이 누워서 숙면을 취하는 동안, 나는 뭘 할 거냐면…….
“이제 춤은 그만 추고 이리 와 봐.”
[인형은 베개도 쿠션도 아니다.]
“베개도 쿠션도 아닌 주제에 그렇게 푹신한 네 잘못이야. 잔말 말고 오기나 해.”
안 올 것처럼 투덜거리던 인형은 결국 데굴데굴 구르다시피 하며 내 쪽으로 다가왔고. 나는 인형을 쿠션처럼 끌어안은 채 모닥불 앞에서 노닥거리기로 마음먹었다. 이왕 감정을 되찾았으니 잠시 감상에 젖어 있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졸리면 인형 녀석을 머리에 베고 잠이라도 좀 자는 거야. 푹신푹신하니 베개로는 딱이잖아?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다른 존재의 희생을 유발하는 건 좋지 않은 일이다.]
“일단 남을 멋대로 언데드화시킨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내가 한동안 얌전히 있어 주니까 까먹은 줄 알았지, 응?”
결국 인형은 반박을 포기한 채 얌전히 내 품에 안겼다. 주변이 조용해지자 용사 일행은 금방 잠이 들었다. 하넨은 그렇게 오래 자 놓고도 또 잠들어서는 새근새근 숨소리만 냈고, 케르츠 또한 그간의 피로가 쌓여서인지 죽은 듯 잠들었다. 용사 또한 안 졸리다며 말똥말똥하게 굴던 모습이 무색할 정도로 잘 자고 있었다. 역시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도 속으로는 피곤했구나.
세 사람이 새근새근 숨 고르는 소리를 제외하면 사방이 그저 조용했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빠진 채 모닥불을 바라보다가, 가끔 인형을 베개 대용으로 삼은 채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잠에 빠질 듯 몽롱해졌다가 다시 깨어나는, 마치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듯한 느낌은 내가 기억하던 감각보다 훨씬 더 기분 좋았다. 한참을 그러다 보니 잠기운이 서서히 날아갔다. 충분히 자고 난 다음의 상쾌함이 전신을 감싸자 나는 눈을 뜨고 인형을 놓아주었다.
베개 노릇을 해 주던 인형이 꼬물거리며 빠져나가 스트레칭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녀석을 바라보다가 괜히 일어나 스트레칭을 따라해 보았다. 우두둑, 관절 어긋나는 듯한 소리가 났다. 개운하긴 한데 솔직히 좀 무서웠다.
[스트레칭은 관절 유연성과 근육 이완에 좋다. 자주 해 주는 게 좋다.]
‘그런데 넌 왜 하는 거야? 관절도 근육도 없잖아.’
[……정신 건강에도 좋다.]
이 녀석, 그냥 사람 흉내를 좋아하는 거 아니야? 보아하니 인간의 수면이라든지 춤이라든지 하는 걸 이것저것 따라하고 싶어 하는 것 같던데. 괜히 입가가 실룩거리고 웃음이 비어져 나오는 걸 참아 내며 팔을 위로 쭉 뻗고 빙글빙글 돌렸다.
확실히 개운하기는 하다. 인형도 이 개운함을 느낄 수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정신 건강에는 좋아 보인다. 나는 인형과 나란히 서서 스트레칭을 하면서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었다. 물론 용사 일행이 깨면 안 되니 생각만으로 소통할 수밖에 없었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아까 부패니 뭐니 하는 이야기 말이야.’
[심술을 부리기 쉬워졌다는 표현은 지나치게 단순할지도 모른다. 인형은 그것보다 훨씬 더 대단하고 심오한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어, 그런 거였어? 그렇게까지 큰 변화는 없길래 난 또 대수롭지 않은 일인 줄 알았지.’
[그건 나의 본성이 선한 행위를 향한 방향성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갑자기 어려운 소리를 하네. 어쨌든 내가 착한 사람이란 뜻이야? 자식, 갑자기 비행기 태우기는.’
한쪽 발을 뒤로 쭉 뻗고 다리 늘리기를 하던 인형이 잠깐 발을 헛디뎠다. 저 녀석, 아까도 저러더니 또 저러네. 역시 어설픈 데가 있단 말이야. 사람 흉내를 좋아하긴 하는데 근본적으로는 사람과 다른 존재라서 그런가.
‘야, 내가 그렇게 착하지는 않아. 내가 평소에는 언데드여서 욕심 없이 살았을 뿐이지 사실은 이기적이기도 하다고.’
[그래도 나는 고통을 감내하고 용사 일행을 구했다. 여전히 용사 일행을 아끼는 마음을 느끼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아니, 그거야 뭐, 상황이 상황이었으니까……. 애초에 말이지, 내가 작정을 하고 함정에 들어간 게 아니라고. 만약 그때 내가 도망칠 구석이라든지, 안전하게 내 몸만 지킬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면. 그랬더라면 안 구했을지도 몰라.’
[세상의 모든 행위는 환경과 맥락에 영향을 받는다. 자기 의지만으로, 어떤 도움 없이 행해진 선만이 선은 아니다.]
‘너, 묘하게 어려운 말 잘한다…….’
[그리고 중요한 건 경향성이다. 언제나 선할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없다. 다만, 스스로가 선을 원하면 결국에는 선을 택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인간을 조금 더 강하게 만든다.]
‘말이라도 고맙네, 뭐.’
[꼭 혼자서만 선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 때로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의지가 되는 누군가에게 마음을 기대며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충분한 것이다.]
인형은 그렇게 말하고는 힘차게 마무리 기지개를 켰다. 이 녀석, 묘하게 희망론 같은 거 좋아하는구나. 제법 어른스러운 설교 같은 것도 좋아하고…….
나는 목을 빙글빙글 돌리고는 스트레칭을 마쳤다. 그나저나 몸을 움직이고 나니 배가 고프고 목이 말랐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물을 한 모금도 입에 안 댔는데. 배가 고픈 건 어떻게든 참을 수 있다 쳐도 목이 마른 건 참기가 힘들다.
인형이 용사의 물병을 슬쩍해 와서 내밀길래 그걸 마셨다. 수통 안에는 달그락거리는 돌 같은 게 있었는데, 예전에 케르츠와 단둘이 다닐 때 얼핏 들은 바에 의하면 이 안에 있는 ‘우는 돌’이 자동으로 물을 만들어 낸다고 한다. 물론 진짜로 돌에게 생명이 있어서 그 눈물을 마시는 건 아니고, 그냥 저절로 물을 만들어 내는 특성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들었다.
‘뭐, 설령 진짜 눈물이라 쳐도 이런 상황에서는 마실 수밖에 없겠지만.’
생각해 보면 나도 매일 용사의 눈물을 마시는 거나 다름없다. 매일 내가 흡입하는 영혼 조각은 용사의 눈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아무튼, 물을 다 마신 나는 수통 뚜껑을 닫고는 수통을 원래 있던 곳에 되돌려 놓으려 했다.
그러니까, 이게 원래 어디 있었더라? 허리춤에 있던가? 잠들어 있는 용사를 잘 살펴보니, 벨트 한쪽에 수통을 걸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고리 같은 게 있었다. 거기에 수통 입구를 끼우면 어떻게든 될 것 같은데, 이게 은근히 잘 끼워지지가 않았다. 처음 하는 거라 잘 되지가 않는 걸까.
잘 안 끼워지는데, 그냥 적당히 옆에 내버려 둬도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이왕이면 제대로 꽂아 두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상인, 왜 제 바지를 벗겨요?”
머리맡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란 나머지 뒤로 나동그라졌다. 허둥지둥 고개를 들자, 어느 새 눈을 뜬 용사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잠기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눈빛이었다.
“아, 아, 아니에요! 그냥 목이 좀 말라서! 물 좀 마시고 다시 집어넣어 놓으려고! 그, 허락 없이 물건에 손대서 미안해요!”
“허락 없이? 무슨 소리예요? 아까 인형이 물통 빌려가도 되냐고 물어봤잖아요.”
“……네?”
나는 인형에게 시선을 돌렸고, 인형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기만 했다. 맞다, 인형 녀석은 텔레파시 비슷한 걸로 의사소통을 하지. 그러니 내 귀에 안 들리는 방식으로 용사와 의사소통을 했을 거다.
어쩌면 이 용사님, 인형이 갑자기 물통 빌려 가겠답시고 귀찮게 구는 바람에 잠에서 깬 거 아닐까? 내심 미안한 마음이 들어 괜히 머리를 긁적이는데, 용사가 내게서 물병을 받아 가며 생긋 웃었다.
“물통은 제가 넣어 놓을게요. 그런데, 이제는 아까 그거 안 해요? 막 팔다리 쭉쭉 뻗고 이렇게, 이렇게.”
“스트레칭이요? 그거라면 이미 다 했는데……. 자, 잠깐만요. 용사님, 대체 언제부터 깨어 계셨던 거예요?!”
나는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뒤로 물러났고, 용사는 “인형이 팔다리 뻗기 시작할 때부터요!” 하고 태연히 대답하며 손을 뻗었다. 그러니까, 그 뭐냐. 이 녀석, 결국 처음부터 다 봤으면서 나한테 들키기 싫어서 자는 척했던 거잖아! 어쩐지 방금 깬 것치고는 눈에 반짝반짝 총기가 돌더라니!
딱히 보여선 안 될 꼴을 보인 건 아닌데, 그래도 내가 인형 흉내를 내며 이리저리 팔다리를 뻗던 모습을 다 보고 있었으리라 생각하니 어쩐지 민망했다. 마치 밥 먹고 놀다가 자는 등의 시답잖은 내용만을 기록해 놓은 일기장이나마 남에게 보이면 부끄러운……. 약간 그런 느낌이라고!
“방금 그거, 건강해지는 운동이죠? 인형한테 들었어요!”
“너도 공범이었냐, 이 솜뭉치 자식아!”
[인형은 공범이라 할 정도의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그저 용사가 깨어났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애초에 나는 인형에게 용사가 깨어 있는지 자고 있는지조차 물어보지 않았다.]
“방금 전의 그 운동을 해서 그런가요? 상인, 이제는 아주 건강해졌어요! 정말로 좋아 보여요.”
이 인간들, 아니, 이 신성 생물 비스무리한 것들이 진짜……! 나는 어이가 없어서 인형과 용사를 흘겨보았지만, 용사는 늘 그렇듯 조금도 의식하지 않은 채 팔을 뻗어 내 볼을 만지작거렸다. 마치 밀가루 반죽 주무르듯 주물럭거리는 건 둘째치더라도, 솔직히 얼굴이 너무 가까워서 좀 부담스러웠다. 아니, 언데드일 때에는 괜찮았는데 인간성을 되찾고 나니 좀 낯 뜨거운데, 이거.
“왜 그래요, 상인? 혹시 아파요?”
“아, 안 아픈데……. 그, 꼭 이렇게 붙어 있어야 해요?”
“붙어 있으니 좋아요! 상인, 예전에 비해 훨씬 따뜻하고 부드러워졌어요. 차가운 상인도 좋지만 따뜻한 상인도 좋아요.”
“예, 좋아해 주시는 거 자체는 나쁘지 않은데, 음…….”
아무래도 내게 체온이 돌아왔다는 사실을 신기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어린애다운 호기심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지 못할 정도야 아니지만, 그래도 코앞에 용사의 얼굴이 들이밀어지고 반짝반짝한 눈망울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으니 당연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아니, 뭐냐. 부담스러운 것도 부담스러운 건데, 어쩐지 뱃속이 간질거리고 얼굴에 열이 오르는 듯한 기분도 들어서. 이 기분을 구체적으로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상했다. 용사가 조금 더 떨어져 주면 이런 기분이 안 들 것 같은데…….
이걸 어쩌나, 난처한 마음에 끙끙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용사가 고개를 갸웃했다. 아무래도 내가 난처해하는 걸 깨달은 모양인데, 그러면서도 떨어지기는커녕 더 달라붙고 있었다.
“맞다. 상인이 왜 그런 표정 짓는지 알겠어요.”
“그, 그래요? 아시겠으면 저희가 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상인이 아니에요.”
“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상인이 아니라니? 용사는 정답을 맞히기라도 한 듯 의기양양한 표정이었지만 정작 나는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혹시 인형은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싶어서 인형을 흘끔 보았지만, 인형은 가만히 앉아서는 묘하게 의뭉스러운 태도로 나와 용사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상하다, 뭔가 짐작 가는 바가 있으면서도 재미있어하면서 구경만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용사에게 시선을 돌린 순간, 나는 조금 놀라서 흠칫 떨었다. 용사의 표정은 제법 진지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궁금해질 정도로.
“상인이 아니라, 따로 이름이 있다고 했어요.”
“……!”
“나중에 물어보겠다고 했는데 계속 상인이라고 부르고 있었네요. 그것 때문에 기분이 상했으면 미안해요. 혹시 지금 물어봐도 괜찮아요?”
어, 잠깐만. 그 문제였냐? 생각지도 못한 용사의 이야기에 멍하니 입을 벌리자, 용사는 제 딴에는 정답을 맞혔다고 생각했는지 생긋 웃어 보였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져서 용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니, 확실히 나중에 이름을 알려 달라는 이야기를 이 용사님에게서 들은 건 사실이지만……. 왜 하필 지금?
이름에 대해 물어볼 생각이었다면, 케르츠나 하넨이 깨어 있던 몇 시간 전에도 충분히 타이밍이 나오지 않았나? 오히려 그때 물어보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용사는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치만, 상인 이름. 제일 먼저 불러 보고 싶어서.”
“네?”
“다들 깨어 있을 때 물어보면, 케르츠나 하넨이 먼저 부를지도 모르잖아요. 다들 자고 있을 때 물어보면 제가 제일 먼저 부를 수 있으니까.”
대체 이건 무슨 저세상 논리야? 나는 내심 어이가 없어져서 용사를 바라보았지만, 용사는 부연 설명 따위 덧붙일 마음이 조금도 없는지 그저 나를 보며 생글생글 웃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 미소에서 묘한 뿌듯함과 들뜸이 느껴지는 건, 분명 내 착각이 아닌 것 같은데.
“상인, 이름 가르쳐 줄 수 있어요? 저한테만 먼저.”
“먼저 알든 나중에 알든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이상한 거에 집착하시네. 그나저나, 정말이지 용사님밖에 없네요. 이름 같은 것도 물어봐 주고.”
괜히 웃으면서 용사의 머리를 쓰다듬자 용사는 칭찬받는 강아지처럼 달가워했다. 정말이지, 이 세계에서 그나마 나를 챙겨 주는 건 용사 녀석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인형 녀석조차도 ‘나’라는 두루뭉술한 표현만 쓸 뿐 내 이름은 불러 주지 않았는데. 나는 쑥스러움을 감추기 위해 일단 입을 열었다.
“박세원이에요. 세원이라고 불러도 괜찮아요.”
“세, 세온?”
“발음이 좀 새는 거 같긴 한데……. 뭐 비슷한 발음이에요. 한자로는 세상 세, 원할 원인데, 여기는 한자가 없으니 큰 의미가 없으려나.”
“세온, 예뻐요. 예쁜 이름이에요.”
“세원이라니까요.”
이 용사님, 분명 세원이 아니라 세온으로 발음하고 있는데? 글자로 써서 보여 줄 수도 없어서 내심 곤란했지만, 한편으로 생각해 보자면 세원이나 세온이나 뭐가 그리 다르나 싶었다. 어차피 발음으로 따지면 그게 그건데.
게다가, 분명 ‘박세원’이라고 알려줬는데도 계속 세온이라고만 한다. 그러고 보니 여기 사람들은 성이라는 개념 자체가 희박한 거 같기도 하고……? 케르츠도 그렇고 하넨도 그렇고, 자기 이름만 말했을 뿐 성을 붙여서 풀 네임을 말하지는 않았지. 애초에 진작부터 무너져 가는 세계라서 성 같은 요소에 의미 부여를 안 하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 호칭은 앞으로 ‘세온’으로 고정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용사의 표정이 좀 진지해졌다.
“있잖아요. 예전에 제가 했던 이야기 기억해요?”
“어떤 이야기요?”
“미궁을 나가면 뭘 하고 싶은지에 대한 거요.”
“아, 그런 게 있었죠. 그게 왜요?”
“나, 미궁을 나가면 이름을 가지고 싶어요! 지금은 그냥 용사지만, 용사가 아니게 되어도 이름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름이요?”
“네. 그 이름, 상인이……. 아니, 세온이 지어 줬으면 좋겠어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분명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어조인데도 용사의 목소리에는 묘한 무게와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그 말을 마치고 나를 바라보는 용사는, 마치 앓던 이를 뽑기라도 한 것처럼 후련하고 개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쩌면 용사는 자는 척하면서 내게 무슨 말을 할지 고민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바람에 조금쯤 기분이 복잡해졌다. 두 살짜리가 자기 하고 싶은 말을 진지하게 만들어 내려면 나름대로 고민을 많이 했을 텐데. 게다가 그 ‘하고 싶은 말’이라는 게, 태어나서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했던 이름을 지어 달라고 부탁하는 일이라면…….
“어때요?”
“……좋아요. 뭐, 못할 것도 없겠지요.”
“진짜요? 지어 주는 거예요?”
나는 가만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마자 용사가 눈을 반짝거리더니, 내 어깨를 잡고 벌떡 일어나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제 딴에는 춤을 추려는 게 아닌가 싶은데, 아무래도 그 춤이란 게 인형이 추는 춤을 뜻하는지 계속 나를 잡고 그저 이리저리 돌거나 뛰어다니기만 했다. 하긴, 용사로서는 인형의 춤을 빼면 어디서 춤을 접할 기회조차 없었겠지만…….
아무튼 용사는 그것만으로도 잔뜩 신이 난 모양이었고, 인형은 우리가 춤추는 모습이 재미있어 보였는지 우리를 이리저리 따라다니며 빙글빙글 돌았다. 나는 그냥 용사에게 붙잡힌 채 이리저리 따라다니기만 할 뿐이었지만, 단지 그것뿐인데도 묘하게 기분이 들뜨는 것을 느꼈다. 아마 용사는 나보다도 훨씬 더 기분이 들떠 있을 거라 생각하니 그것도 나름대로 기뻤다.
눈앞이 핑핑 돌고 어지러운 한편, 가슴에서 쿵쿵거리는 진동이 느껴지고 배 속이 서서히 따뜻해졌다. 기이한 온기였다.
[3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