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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조금쯤 붕 떠 있는 용사님 (14/28)

12. 조금쯤 붕 떠 있는 용사님

등을 바닥에 붙이고, 조금 더 편하게 팔다리를 뻗어 누운 채 허공을 보았다.

마치 천장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실제로는 벽일지, 아니면 바닥일지 알 수 없었다. 물론 어느 쪽이든 좋았다. 아득한 허공은 하늘이고, 시야를 제법 가리고 있는 큼직큼직한 방과 복도들은 구름이라고 상상하면 그만이니까. 머리맡에 앉은 인형이 물끄러미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 훅 가는 게 순식간이구나.”

방금 위험했어,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정신 건강 하나는 끝내준다고 자부했는데. 자살 충동이란 남의 일 중의 남의 일, 나에게는 절대로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했나 싶어 무서워졌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죽는 건 싫단 말이지. 똥밭을 구르더라도 이승이 좋다는 말도 있잖아. 감각도, 감정도 무뎌진 좀비 같은 신세가 되었다고는 해도 죽는 것보다야 사는 게 더 낫다. 대체 어쩌다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 스스로도 놀랄 지경이었다.

[많이 피로하기 때문이다.]

“나는 언데드라서 피로 같은 거 안 느끼거든? 생전의 습관이 만들어 낸 가상의 피로 같은 거 아니야?”

[정신적 피로는 별개의 문제다.]

“…….”

나는 손가락을 들어 인형의 이마를 콩 때렸고, 인형은 아픈 시늉을 하며 내 옆을 데굴데굴 굴렀다. 하여간에 한 마디도 안 지려 든다. 귀찮은 인형 자식. 뭐, 저 녀석이 중간에 도와준 덕분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말이다.

[피로가 쌓인 상태에서 돌아다니는 건 좋지 못한 일이다. 긍정적인 생각을 해서 기분 전환을 시도해 보자.]

“예시를 들어 봐. 이 미궁에서 할 수 있는 긍정적인 생각이 뭔지.”

인형은 뭉툭한 팔 끝으로 내 볼을 퍽퍽 때렸다. 자기 딴에도 뭐가 없긴 했나 보다. 글쎄, 과연 뭐가 있을까. 생각을 오래 하면 할수록 기분이 점점 안 좋아질 뿐인데. 내가 여기에서 죽는다고 해도 원래 세계의 사람들은 아무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가 닿자 기분은 그야말로 최악이 되었다.

내 생각을 읽어 냈는지 인형이 다시 내 곁으로 다가왔다. 아까처럼 내 볼에 자기 얼굴을 비비는 걸 보니 나를 달래려고 꽤 애를 쓰는 모양이다.

[내가 죽는다면 인형은 매우 슬퍼할 것이다.]

“진짜? 어차피 넌 내가 없어도 잘 돌아다닐 것 같은데.”

[인간은 친구나 동료를 잃는다고 해서 그 기능을 잃거나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친구나 동료를 잃으면 어떤 인간이든 슬퍼한다.]

“내가 네 친구야? 어쩐지 꼬봉이나 부하 같은 느낌이 드는데.”

[설령 내가 인형의 꼬봉이나 부하라 할지라도 그동안 인형과 유대감이 쌓였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야, 빈말로라도 친구라고 해 주지 그걸 덥석 받아들이냐? 요 못된 녀석 같으니라고.”

애쓴다, 애써. 나는 킬킬거리며 인형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를 달래기 위한 빈말인지, 녀석 나름의 진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래도 나름의 위로를 듣고 나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하긴, 나도 이 인형 녀석이 없으면 조금은 슬프겠지. 제법 오랫동안 같이 지냈으니까. 어쩌면 이 녀석에게도 감정이란 게 있어서 내가 없으면 허전함이나 쓸쓸함을 느끼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나는 조금 진부한 인간인지라, 누군가가 나의 부재를 슬퍼해 준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안심하게 된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의존해 삶의 의욕을 얻는다는 건 그다지 자립적이지 못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뭐 어때. 지금 이런 환경에서는 그런 식의 자기 위안이라도 필요한데.

아, 그렇지. 어쩌면 용사 일행이 슬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살자 그 인간은 속을 알 수 없는 데다가 의외로 냉정해 보여서 슬퍼할지 안 슬퍼할지 모르겠지만, 하넨은 어째 마음이 약해 보이니까 의외로 의기소침해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뭐냐. 용사 녀석은…….

[용사다.]

“응? 아, 뭐. 용사 녀석도 엄청 슬퍼할지도 모르겠네. 그 녀석, 어린애라서 그런 데에 영향을 많이 받을지도 모르니까. 아무리 친하지 않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갑자기 옆에서 없어지면 상실감을 느낄지도 모른단 말이야.”

[아니, 용사다.]

“응? 그러니까 내가 지금 용사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 그 녀석은 내가 없어지면 어떻게 반응할까?”

인형은 묘한 기색으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나는 괜한 감상에 빠진 나머지 웃어 보이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그 녀석, 죽음의 개념이란 건 이해하고 있을까? 어제까지 같이 있던 동료를 더 이상은 못 만난다든지, 그런 경험을 자주 해 봤을까?

두 살이 갓 넘은 어린애니까 그런 경험을 안 해 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 바깥세상은 꽤나 가혹하니 누군가가 죽는 모습을 제법 많이 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과연 어느 쪽일까. 나중에 본인을 만나면 확인해 볼 수 있을까, 그런 엉뚱한 생각에 골몰해 있는데.

[그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저편에서 용사가.]

응? 멍하니 고개를 돌린 순간, 나는 인형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깨달았고 허겁지겁 바닥을 굴러 옆으로 피했다.

“우, 우와……!”

콰앙, 요란한 소리가 코앞에서 터져 나왔다. 내가 온 곳과는 아예 다른 방향에서 ‘떨어져’ 내린 용사가, 방금 전까지 내가 누워 있던 장소에 그대로 처박혔다.

용사는 몇 번 바닥을 구르더니 그대로 움직임을 멈췄다.

덩달아 내 머릿속 또한 정지되었다. 뭐지, 이거.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아니, 차라리 하늘에서 돌덩이나 사념 같은 게 떨어졌다고 해도 이만큼 놀라지는 않았을 거다. 그런데……. 대체 왜 뜬금없이 용사가?

‘아니, 아예 뜬금없지는 않나?’

생각해 보면 용사 일행도 슬슬 이 광장에 진입했을 시기이긴 했다. 용사 일행과 헤어진 이후로 닷새나 지났으니, 오히려 용사 일행이 안 보이면 걱정해야 할 법한 상황이기는 한데……. 그런데, 하넨과 케르츠는? 왜 동료들은 안 보이고 이 녀석 혼자 요란하게 추락한 거야?

“주, 죽었나?”

[용사는 튼튼하다. 죽지 않았을 거다.]

“아니, 방금 콰앙 하는 소리 났잖아. 엄청 높은 데에서 떨어졌잖아. 몇 번 구른 것 같기도 한데 멀쩡할 리가 없다고.”

나는 조심스럽게 용사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몸을 뒤집어 보았다. 요란하게 떨어졌으니 제법 아플 텐데 비명은커녕 희미한 신음조차 없고, 옆에서 누군가가 몸을 멋대로 뒤집는데 일어나기는커녕 여전히 눈을 감고 있다. 왜 이렇게 반응이 없지? 설마 죽은 거 아니야? 설마 ‘우리의 여행은 여기에서 끝났습니다!’ 같은 전개냐고!

“저기, 용사님. 죽으면 안 돼요. 지금 당신이 여기서 죽으면 하넨 씨랑 케르츠 씨가 곤란해져요.”

[죽지 않았다. 숨을 쉬고 있다.]

“그 두 사람은 둘째 치고 나는 어쩌라고요. 그 사람들이야 자력으로 탈출하면 그만이지만 나는 영혼 조각 없으면 안 된다고요. 정말로 흐물흐물해져서 죽어 버리고 만다고요. 저기, 용사님? 설마 진짜 죽은 건 아니죠?”

[죽지 않았다. 충격으로 잠깐 기절해 있을 뿐이다.]

“아니, 혹시 아까 제가 죽는 생각 좀 했다고 이런 식으로 벌 내리는 건 아니지요? 사람이 살다 보면 우울증 좀 걸릴 수도 있고, 죽고 싶다는 생각 좀 할 수도 있는 거지, 그렇다고 진짜로 움직임을 멈추고 싶다는 건 아니었는데……! 아니, 꼭 내가 곤란해지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나도 조금은 슬플 거라고요. 당신이 이런 식으로 죽어 버리면……!”

“상인?”

다행히도 그런 전개는 아닌 모양이었다. 용사는 내 목소리에 반응했는지 눈을 번쩍 떴다. 색 예쁜 벽안이 그다지 흐리멍덩하지 않은 걸 보니 정신도 제법 멀쩡한 듯했다. [죽지 않았다.] 하고 말하며 인형이 내 옆구리를 찌르자, 나는 그제야 좀 민망해져서 물러났다. 솜뭉치 자식, 용사가 안 죽은 걸 알았으면 진작 좀 말하지!

[두 번이나 말했는데 내가 못 들었을 뿐이다. 원래 사람은 겁에 질리면 이성이 마비되기 마련이다]

“아, 시끄러워! 사람이 못 들을 수도 있는 거지!”

눈을 몇 차례 깜빡이며 주변을 둘러보던 용사는, 나를 보자마자 반가운 낯을 하며 벌떡 일어났다. 방금 전에 하늘에서 떨어져 몇 번쯤 바닥을 구른 사람의 움직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날렵했다.

“내가 지금 꿈을 꾸나요? 왜 상인이 여기 있어요? 혹시 저를 찾아왔어요?”

“아니, 오히려 그쪽이 절 찾아온 거에 가까운데요. 하늘에서 쿵 하고 떨어졌잖아요. 괜찮아요?”

“괜찮긴 한데, 조금 아파요.”

“역시 어디 다친 거죠?”

“머리가 아파요. 여기 봐요. 혹 난 거 같아요. 얼굴도 좀 긁혔고.”

나는 용사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얼굴도 조금 긁혔고, 봉긋하게 혹이 나긴 했는데……. 설마 그걸로 끝? 혹시 어디 아픈 데 더 없냐고 물었지만 용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였다. 스트레칭을 하듯 팔다리를 쭉쭉 움직이는 모양새를 보니 정말로 멀쩡한 모양이었다.

이 사람, 그 높이에서 떨어져 엄청 굴렀는데 생채기 조금 나고 끝인 거야? 내가 똑같이 추락했더라면 거의 변사체 수준으로 처참한 꼴이 되었을 텐데 대체 어떻게 멀쩡한 거지. 역시 용사님 파워 같은 게 있나?

‘그러고 보니, 살점 뭉개지는 소리나 뼈 부러지는 소리가 아니라 무슨 돌덩이 같은 게 부딪치는 소리가 났지. 저 용사님 엄청 튼튼하네…….’

어쨌든 크게 다치지 않았으니 다행이다. 예상 밖으로 매우 건강한 용사의 모습을 보며 괜히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데, 머리 위 아득한 곳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왔다. 자세히 들어 보니 케르츠 씨의 목소리였다.

“용사님, 용사님! 괜찮으신 겁니까?”

“어, 괜찮으신 것 같아요! 케르츠 씨 맞지요?”

“……상인? 당신이 왜 거기 있어요? 설마 용사님을 찾아온 겁니까?”

“대체 왜 당신들은 그렇게 사고방식이 자기중심적이에요? 제가 여기 있는데 이 용사님이 퍽 하고 떨어져 내린 것뿐이라고요!”

역시 다른 일행들도 근처에 있기는 했구나. 그나저나 저 사람들, 대체 어디 있는 거지? 고개를 한껏 들어 머리 위를 살폈지만 도무지 모습이 보이지를 않았다. 목청을 엄청 높여 고함을 질러야 겨우 소리가 닿을 정도로 멀리 있는 모양이었다. 모종의 사고로 용사 혼자서 여기까지 추락해 온 모양인데…….

나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며 용사님을 바라보았다. 구김살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순진한 얼굴이 태연하게 나를 마주 보았다. 그 태평함이 어쩐지 얄미워서 나는 괜히 툴툴거려 보았다.

“바보예요? 중간에 보석을 바꿔 끼우든 하지 어쩌다가 여기까지 떨어졌어요?”

“떨어지던 도중에 보석 주머니를 잃어버려서……. 바꿔 낄 수가 없었어요.”

용사의 얼굴이 그제야 조금 시무룩해졌다. 저런, 곤란하게 되었다. 아마 보석 주머니는 용사가 추락해 온 경로 어딘가에 둥둥 떠 있지 않으려나. 아무래도 용사의 펜던트에 꽂혀 있는 보라색 보석이 지금 용사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보석인 듯했다.

뭐, 보석이야 나한테 있으니까 용사와 내가 함께 움직이면 괜찮겠지만, 진짜 문제는 어떻게 다른 일행에게 용사를 돌려보내느냐 하는 점이다.

“중간에 어떤 터널 같은 데가 있었는데, 거기서 떨어지던 도중에 보석 주머니를 놓쳤어요.”

용사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으로 어딘가 가리켜 보였다. 확실히 무슨 터널 같은 게 보였다. 거대한 방―정확히 말하자면 가시로 가득한 함정이 있는 방이 진로를 가로막고 있는 와중에, 그 방 한가운데에 사람 한 명이 가까스로 지나다닐 수 있을 법한 입구가 뚫려 있었다.

방의 다른 곳에 떨어진다면 가시에 꿰뚫려 죽겠지만 저 입구를 통해 들어가면 무사히 함정 반대편으로 나갈 수 있는 구조로 보였다. 이 용사님은 운이 좋은 건지, 아니면 재주가 좋은 건지. 노리고 들어가려 해도 힘들 법한 통로를 아무렇지도 않게 통과하다니.

어쨌든, 일행에게 돌아가기 위해서는 저 터널을 통과해야 할 것 같았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 터널의 입구가 점점 좁아지고 있다는 점인데.

“어, 잠깐. 저거 지금 서서히 닫히고 있지 않아요?”

“와, 정말 닫히고 있네요. 신기하다.”

“지금 신기하고 자시고 할 상황이 아니에요! 저거 닫히면 당신 못 돌아간다고요!”

소리를 질렀지만 이미 때가 늦었다. 터널은 어느새 완전히 막혀 버리고 말았다. 물론 다른 보석을 이용해 어떻게든 길을 찾아보면 목적지에 못 도착할 건 없겠지만, 케르츠나 하넨이 있는 장소에 곧바로 돌아가는 건 아무래도 힘들어 보였다.

“저기, 케르츠 씨! 들려요? 터널이 막혔어요!”

“예, 이쪽에서도 보입니다! 이렇게 되어서야 그쪽으로 갈 수가 없겠는데……! 미안하지만, 우리 용사님 좀 이쪽으로 데리고 와 주실 수 있겠습니까?”

“쉽지는 않을 거 같은데……. 우선 노력은 해 볼게요!”

혹시 식량이 있냐고 묻자 용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난번에 헤어졌던 일을 교훈 삼아, 적어도 한 사람당 사흘분의 식량은 짊어지고 다니기로 했다는 모양이다. 좋아, 식량이 있다면 급할 건 없다. 용사님을 데리고 천천히 저쪽으로 움직이면 되겠지. 방법이야 찾으면 될 테고.

나는 한숨을 쉬며 용사를 바라보았다. 용사는 자기가 미아 신세가 되었다는 사실도 모르는 듯 생글생글 웃고만 있었다. 동료들과 헤어졌다는 자각이 희미한 건지, 아니면 동료들과 헤어진 충격보다 나와 만난 반가움이 더 큰 건지는 모르겠다. 분명 둘 다 복합적으로 작용할 거라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이리 와 봐요, 용사님. 볼 긁힌 거 치료해 줄게요.”

나는 가방에 있는 회복초 잎 끄트머리를 떼어 내 갈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사건 때문인지, 방금 전까지의 정신적 피로감은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왜 약초 짓이긴 거에 물을 섞어요? 예전에는 물을 섞지 않았던 것 같은데.”

“이 약초는 다른 약초에 비해 효과가 좋거든요. 몇 배더라, 열세 배? 그래서 굳이 많이 쓸 필요가 없어요.”

“열세 배씩이나 효과가 좋아요? 대단하다. 그러면 열세 배는 더 귀하고 비싼 약초인가요?”

“글쎄요, 그렇게 산수 계산을 하듯 딱 말할 수는 없을 텐데…….”

짓이긴 약초의 즙을 물에 희석시켜 바른 것뿐인데도 용사의 상처는 순식간에 아물었다. 용사의 볼은 아기처럼 보드랍다고까지 할 수는 없어도 제법 말랑거리는 편이었다. 약초 즙을 손가락 끝에 묻혀 상처에 바를 때마다 손가락 끝에서 묘한 탄력이 느껴졌다.

어린 용사가 남의 볼을 만지면서 좋아했던 이유를 조금쯤 알 것도 같다고 생각하며, 나는 근처에서 굴러다니던 인형을 집어 들어 그걸로 용사의 볼을 슥슥 닦아 주었다. 본의 아니게 수건 역할을 하게 된 인형은 항의하듯 바둥거렸지만 녀석의 희생 덕분에 용사의 얼굴이 깨끗해졌다. 거참 잘생겼네. 신전에서도 나름대로 미적 요소를 고려해 가면서 이 녀석을 만든 걸까?

“좋아, 이제 말끔해졌네요.”

“고마워요.”

머리의 혹도, 볼의 생채기도 없어진 용사는 평소처럼 반짝반짝한 얼굴로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그 태평한 미소가 묘하게 얄미워 보여서 볼을 슬쩍 잡아당기자, 용사는 싫어하기는커녕 더 밝게 웃으며 내 볼을 쭉 잡아당겼다. 아무래도 내가 자기처럼 볼 만지기 놀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놀이라, 뭐 나쁘지는 않겠지. 어차피 지금 용사님에게는 식량도 충분하고, 이 광장에는 사념이 없으니 케르츠와 하넨 일행이 용사의 부재로 곤란해질 걱정도 없다. 용사님이 만족할 때까지 놀아 줘도 괜찮을 거다.

“어쨌든 말이지요. 이 약초, 효과가 좋은 건 사실이지만 너무 많이 바르면 부작용이 생기거든요. 그래서 많이 바르면 안 되는 것도 있어요.”

“부작용이 뭔데요?”

“무슨 뜻인지에 대해 묻는 거예요, 아니면 어떤 종류의 부작용인지가 궁금한 거예요?”

“부작용이 뭔지는 알아요. 하넨이 자주 쓰는 단어예요. 어떤 종류인가요?”

“아, 그건 아시는구나. 그러니까 말이지요. 잘못하면 동물 귀나 꼬리나 날개 같은 게 난다고 착각하는 증상이……. 왜, 왜 그래요?”

“이걸 바르면 상인한테 동물 귀나 꼬리가 나요?”

“아니, 실제로 난다기보다는 난다고 생각하게 되는……. 저기요. 지금 약초를 바른 건 제가 아니라 용사님이거든요? 왜 제 이야기가 나와요?”

“상인한테 이걸 바르면 상인도 동물 귀를 가지게 되나요? 저는 동물에 대해 잘 모르지만, 예전에 책에서 고양이를 본 적은 있어요. 두 발로 서서 근사한 옷을 입고 장화를 신은 그림이었어요. 정말 귀여웠는데 지금은 세상에 없는 동물이래요. 상인에게 고양이 귀가 나기도 하나요?”

“아니, 일단 저는 언데드라서 이 약초의 효과가 안 나고요…….”

애초에 이 용사님이 책에서 보았다는 고양이는 제법 많이 미화된 모습 같은데……. 아니지, 판타지 세계의 고양이는 원래 옷을 입고 이족보행도 하나? 어쨌든 나는 묘한 데에 꽂혀서 정신을 못 차리는 용사님을 설득하면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냈다.

이 용사님은 고양이 귀 언데드 같은 걸 봐서 대체 어쩌겠다는 거야. 일행과 떨어지고, 보석 주머니까지 잃어버려서 나라도 없으면 옴짝달싹 못하는 처지인 주제에 엄청 해맑고 즐거워 보였다.

나는 괜히 피식거리며 용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 용사님은 대체 어떻게 이렇게나 해맑을 수 있는 걸까? 나처럼 인간성을 잃어서 감정이 희박해진 것도 아닐 텐데, 조금 튼튼한 건 사실이지만 나보다 고생을 덜 하지도 않을 텐데, 그런 것치고 너무 밝고 순순해서 보는 것만으로도 주변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든단 말이지. 혹시 이것도 용사님 파워인가?

“그럼 강아지 귀는요? 안 되나요?”

“그건 저하고 타협을 할 만한 문제가 아니에요, 용사님……. 애초에 귀가 나는 부작용이 아니라니까요. 일종의 환상통 같은 거예요, 환상통.”

“그래도요. 강아지 귀가 좋아요, 고양이 귀가 좋아요?”

“굳이 말하자면 전 개보다 고양이를 더 좋아하는데요. 집에서 고양이를 키워서. 그러고 보니 우리 집 고양이는 지금 어쩌고 있으려나. 친척집에서 적당히 맡아 길러 줬으면 좋겠는데.”

“고양이를 본 적 있어요? 실제로 보면 어때요? 늠름하고 우아한 동물인가요?”

“아니, 저희 집 고양이는 용사님 상상하곤 많이 다를 텐데요. 두 발로 걷지도 않고 옷도 안 입어요. 그래도 귀엽기는 해요.”

“역시 귀엽지요? 저도 한 번쯤 직접 보고 싶어요!”

용사와 어울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얼마 전까지 머릿속을 채우고 있던 우울감이나 침체감이 어느새 둥실둥실 떠올라 사라지고 말았다. 분명 용사를 돌보느라 약간 탈진하긴 했는데, 마치 한참 동안 웃고 난 다음처럼 조금쯤 가볍고 유쾌한 탈진감이 몰려왔다.

이제 당분간은 죽느니 마느니 하는 생각 따위 안 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괜히 웃고 있는데, 문득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마치 사람의 눈치를 살피는 듯한―용사의 시선이었다.

“상인, 이제 덜 아파졌어요.”

“네? 무슨 소리예요?”

“아까 전에는 아픈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지금은 좀 나아 보여요. 다행이다.”

“아픈 표정이라니요, 제가 언제.”

“처음 만났을 때 말이에요.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아픈 얼굴 하고 있었는데. 분명 기억하고 있어요.”

아, 설마.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용사를 마주 보았다. 묘한 감정을 담은 푸른 눈이 물끄러미 나를 보고 있었다. 용사는 내 볼을 향해 다시 손을 내밀며 고개를 갸웃했고, 나는 괜히 민망해져선 바닥에 놓여 있던 가면을 푹 뒤집어썼다. 어쩐지 민낯을 들킨 기분이었다.

‘저 용사님, 이상한 데에서 눈치가 빠르다니까.’

용사가 내 기분을 풀어 주려고 엉뚱한 소리를 한 건지, 아니면 자기도 진심으로 이야기하던 도중 내 기분이 좀 나아졌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뿐인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든 괜히 민망했다. 간만에 쓰는 가면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며 얼굴에 맞추고 있는데 용사가 재차 입을 열었다.

“왜 아픈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물어봐도 돼요?”

“아까 하늘에서 용사님이 떨어졌잖아요. 혹시 죽지는 않았나 해서 놀란 거예요.”

나는 인형이 혹시라도 엉뚱한 소리를 하지는 않나 흘끔거리며 그렇게 둘러댔다. 다행히도 인형 녀석은 우리의 대화를 못 들은 척하며 바닥에서 데굴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용사에게 거짓말을 하려니 양심이 켕기기는 했지만 지금은 진심을 말하는 게 영 부끄러웠다. 저 용사님에게 어설픈 위로를 원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용사가 내 심정에 공감해 주기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저 녀석은 그냥 아무것도 모르는 채 있는 편이 낫다.

“그래서 아픈 표정을 지었어요?”

“네. 용사님이 죽기라도 하면 저는 그냥 썩은 시체에 불과하잖아요. 물론 진짜로 그런 상황이 되면 이 인형 녀석이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아 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뭐냐……. 기본적으로 저는 용사님이 없으면 몸을 유지할 수 없다고요.”

다행히도 용사는 내 거짓말에 그럭저럭 납득한 듯했다. 따지고 보면 아예 거짓말은 아니라고 생각하며 쓰린 양심을 달랬다. 게다가, 봐. 용사 녀석도 엄청 기뻐하고 있잖아. 물론 용사는 나와 있을 때면 대체로 생글생글 웃는 얼굴을 유지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지금 녀석은 훨씬 더 들뜬 티가 역력한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들었어요. 죽으면 안 된다고 상인이 막 외치는 소리요.”

“어, 그거 들으셨어요? 기절해서 못 들으신 줄 알았는데.”

“어렴풋하게는 들었어요. 반쯤은 환상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잘 들어 보니까 상인의 목소리더라고요. 그래서 금방 일어났어요.”

“그랬군요.”

“상인이 그런 말을 해 줘서 기뻤어요. 제가 없으면 슬플 거라고 말해 줘서.”

“그게 기뻤어요?”

“네.”

그러고 보니 그런 이야기도 했지. 양심이 꾸준히 쿡쿡 찔려 오는 탓에 나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가면이 없었더라면, 아니, 내가 언데드가 아니라서 감정적 동요가 빨리 나타나는 편이었더라면 금방 용사에게 속내를 들켰을지도 모른다. 어설프게 진실이 섞인 변명은 오히려 온전한 거짓말보다도 양심을 쿡쿡 찔렀다.

남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용사는 내 가면을 벗기려다가 그만두고는 대신에 내 손을 잡았다. 볼에 비하면 별로 말랑말랑하지도 않을 손가락을 만지작거리고 꾹꾹 누르는 모습이 묘하게 진지해 보여서, 나는 용사가 손가락을 만지든 말든 그저 내버려 두었다.

“많이 기뻤어요.”

“그렇게 기뻤어요?”

“네. 그 말을 해 준 게 상인이어서 기쁜 것도 있고, 그리고…….”

그 말을 한 게 나여서 기뻤다고? 그러고 보니, 예전에 인형이 나한테 그런 말을 한 적 있었지. 용사가 나에게 애착이 생긴 모양이라고. 애착이 생긴 상대에게 소중하게 여겨진다고 생각하니 그게 기뻤던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머쓱해졌다. 나는 머쓱함을 무마하기 위해 잠시 고개를 돌렸고, 그 탓에 용사의 표정을 잠시 보지 못했다.

“그리고……. 아니, 아니에요.”

“네?”

“아무것도 아니에요. 어쨌든 저, 상인이 그런 말을 해 줘서 좋았어요. 많이 고마워요.”

다시 용사의 얼굴을 보니 용사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는 무언가 더 말하려다가 그만두고는 생긋 웃었다.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던 건지 조금 궁금해졌지만, 본인이 별로 말하고 싶은 눈치가 아니었으므로 적당히 넘어가 주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뭐. 나중에 들을 기회가 생기겠지.

“아뇨, 별말씀을……. 용사님도 같은 상황이었다면 저한테 똑같이 말해 줬을 거잖아요?”

“같은 상황이요?”

“네. 만약에 제가 죽을 위기에 처했다면 용사님도 제게 똑같이 말해 주었겠지요. 제가 죽으면 슬퍼질 거라고. 설마 안 그럴 거라고는 말하지 않겠죠?”

괜히 용사의 마음을 캐물으려 드는 대신, 나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용사는 내 말에 혼이 빠졌는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손을 흔들었다. 상인이 죽으면 슬플 거라고, 정말로 슬퍼서 상상도 하기 싫다고, 앞으로도 쭉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울 것처럼 반복했다. 아니, 저기요. 이렇게까지 엄청난 반응이 돌아올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는데.

“상인, 죽지 말아요. 죽으면 안 돼요. 네?”

“아, 안 죽어요! 제가 진짜 죽는다는 게 아니라 말이 그렇다는 거지……! 생각해 보니 제가 괜한 소리를 했네요. 우리 용사님 상처받게. 괜한 소리 해서 미안해요, 네?”

나는 그 후로도 눈물이 그렁그렁한 용사를 달래느라 제법 오랜 시간을 공들여야 했다. 용사를 다독이고 달래는 시간 동안, 마음 한구석에 따스한 온기가 조금 고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 * *

“으음, 아무리 계산해 봐도 저 터널을 우회해서 접근할 방법은 안 보인단 말이지.”

하넨은 입술 아래를 연필로 꾹꾹 누르며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미로의 구조와 보석의 위치, 떨어지는 속도와 각도 따위를 계산해 놓은 노트를 아무리 노려보아도 이쪽에서 용사 쪽으로 접근할 만한 방법은 마땅찮았다.

케르츠는 하넨의 노트를 흘끔 바라보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표정만 봐서는 노트의 내용을 이해하고 끄덕이는 건지, 아니면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예의상 끄덕여 보는 건지 알 수는 없었다. 정황을 따져 보면 후자 같지만.

하넨이 알기로 케르츠는 머리가 꽤 좋고 신학적 지식이 풍부하지만, 수학은 아예 꽝이었다. 애초에 배운 적조차 없다는 듯했다. 기본적인 돈 계산이나 할 줄 알지 미지수나 함수의 개념조차 제대로 모르는 녀석이니 속도나 각도 계산을 위한 수식을 이해할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저쪽의 상인 씨가 방법을 찾아 주는 수밖에 없겠는데……. 저쪽도 뾰족한 수는 없는 모양이군요. 여태까지 대답조차 없는 걸 보니.”

“그러게 말이야. 애초에 저 녀석, 지금까지 언데드다운 방법으로 이 미로를 파헤치고 다녔을 테니 용사와 같이 다니는 건 좀 버거워할지도 몰라.”

“언데드다운 방법이요? 아, 함정을 몸으로 적당히 때우는 방식 말이군요. 설마 상인이 그 방법으로 용사님을 데리고 다니기라도 하면 곤란한데.”

“그 녀석한테도 생각이란 게 있을 테니 어느 정도는 조심하겠지. 너무 걱정하지는 말라고.”

설마 용사와 함께 사이좋게 함정에 뛰어드는 멍청한 짓을 하지는 않을 거다. 상인도 상인이지만 같이 있는 인형도 꽤 머리가 좋은 편이니 그 정도의 조심성은 갖추고 있겠지. 하넨의 말에 케르츠 또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미심쩍음이 어린 표정이었지만 크게 긴장한 눈치는 아니었다.

그나저나 상인 녀석, 부탁한 재료는 잘 모으고 있을까? 못 하겠다고 말하지는 않은 걸 보면 어딘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긴 하던데……. 하넨은 그렇게 생각하며 작게 하품을 했다. 머리가 조금 멍했다.

“뭐, 그래도 한시가 시급한 상황은 아니군요. 상인도 같이 있고, 적어도 사흘은 버틸 식량을 챙겨 줬으니 천천히 기다려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러니 마법사님.”

“응?”

“이왕 이렇게 된 거 눈 좀 붙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잠이 많이 부족해 보이는데.”

하넨은 흠칫 놀라 케르츠의 표정을 살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느긋한 시선이 하넨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좋게 말해서 느긋한 시선이지 실제로는 좀 무감각한 시선이었다.

물론 케르츠의 말 자체만 따지고 보면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다. 실제로 하넨은 최근 잠이 좀 부족한 편이었다. 케르츠와 용사가 자는 동안 상인에게서 얻은 일기장을 복원하고 해석하는 데에 매진했기 때문이다.

“아, 안 피곤하거든?”

“허세 부리실 것 없어요. 요즘 밤마다 뭘 하시는 것 같던데 그것 때문에 피곤하신 거 아닙니까?”

“미궁에서 밤낮이 어딨어? 그리고 너, 설마 내가 자는 사이에 사람을 몰래 훔쳐보기나 했던 거야?”

“딱히 보려고 해서 본 건 아닙니다. 가끔 꿈자리가 뒤숭숭해서 잠이 깰 때가 있었던 것뿐이에요.”

하넨의 얼굴이 떨떠름하게 일그러졌다. 케르츠가 저런 식으로 나오기 시작하면 하넨이 화를 내 봤자 꼴이 이상해질 뿐이다. 혹시 일기장을 들킨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 그의 마음은 조금 불안해졌다.

아니, 물론 일기장을 들킨다고 해서 큰일이 생기는 건 아니다. 어차피 내용을 해석하고 나면 언젠가는 보여 줄 생각이었고, 지금은 그저 케르츠의 심기가 불편해지는 걸 우려해서 숨기고 있는 것뿐이니까. 다만, 지난번의 일이 있고 나서부터는 케르츠의 기분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아 하넨은 그게 못내 신경 쓰였다.

지금 하넨이 일기장을 해석하고 있는 걸 들켰다가, ‘역시 원정의 목적을 의심하고 있는 거 아니냐’ 따위의 추궁이라도 들으면 분명 엄청 싸우게 될 거다. 조금 더 설득한 끝에 저 녀석의 의견이 유해지고 나면 그때 일기장 이야기를 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넨은 딴청을 부리기 위해 짐짓 표정을 바꾸어 보았다.

“그, 그냥. 뭐냐……. 연구 좀 하고 있었던 거야. 별것 아니라고.”

“연구요?”

“그래. 이 보석들 말이지, 겉보기엔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바깥에서는 어지간해선 찾을 수 없는 원소 마력이 깃들어 있다고. 원소 마력의 마지막 편린이 사라진 지도 벌써 이백 년이 넘었는데, 봐. 이 보석들은 순수한 원소 마력을 품었어. 이 정도로 많은 양의 마력을 품은 보석은 세상이 멀쩡했을 때도 드물었을걸. 대단하지 않아?”

“바깥세상에서는 이백 년 전에 사라진 마력이라니 확실히 대단해 보이는군요. 저는 마법에 대한 지식이 없습니다만.”

“불, 물, 바람, 땅의 기본 원소는 물론이고 별과 빛과 어둠과 허무처럼 어지간해서는 느끼기 힘든 희귀 원소까지 포함되어 있어. 이렇게 깊고 하늘조차 보이지 않는 미궁 한가운데에서 별의 마력이 느껴지다니 이것도 이것대로 재미있는 일 아니겠어?”

“네, 그런가요. 그러니까 저는 마법에 대한 지식이…….”

“정작 지상은 하늘이 구름으로 가득 차서 별조차 보기 힘들잖아. 심지어 지상에는 완전한 어둠조차 없어. 어둠 속에는 언제나 빛조차 되지 못하는 불쾌한 침전물이 떠다니니 사람들은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잖아. 이렇듯 세계가 오염되면서 원소 마력이 쇠약해졌다는 게 마법사들의 정론인데 말이지, 정작 오염의 근원인 이 미궁 안에 이렇게 순수한 원소가 존재한다는 점에 대해 신경이 쓰여서 내가 잠이 안 오고.”

“알겠습니다. 무슨 뜻인지 알겠으니까.”

하넨이 짐짓 눈을 빛내며 열변을 토하자 케르츠는 질색을 하며 시선을 피했다. 전략 자체는 나쁘지 않게 먹힌 듯했다. 마법사 아닌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케르츠 또한 마법 이론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하넨이 신난 척하며 청산유수로 말을 늘어놓자 급격히 대화의 흥미를 잃고 말았다.

“그리고 현재는 쇠퇴한 원소 마력이 전부 보석의 형태로 형상화되어 있는데 독이나 저주 같은 변형 마력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점도 꽤나 흥미롭지. 독과 저주는 세계의 오염에 기생해 있는 속성이기 때문일까?”

“…….”

“아, 그렇지. 내가 예전에 이야기했나? 본래 세계가 오염되어 있지 않았던 시절에 독이나 저주는 비주류 중에서도 비주류였는데, 세계가 오염된 이후로는 그 어떤 마법도 쓸 수 없어서 마법사들이 필사적으로 노력한 끝에 겨우 건져 낸 게 독과 저주의 마법이야. 그 마법 말고 새로운 마법은 전혀 개발되지 않아서 세상에 도움을 줄 수도 없는 상황이고. 마법사들도 좋아서 흑탑에 틀어박혀 눈 가리고 아웅을 하는 게 아니라는 말인데…….”

하넨이 혼신의 연기를 다한 덕분에 케르츠는 의심을 어느 정도 거둔 모양이었다. 스스로의 연기에 아예 몰입해 버린 하넨이 본래 목적조차 잊은 채 한동안 케르츠를 붙잡고 수다를 떨긴 했지만, 어차피 그 수다로 고통받는 건 케르츠 한 사람밖에 없었으므로 하넨은 별로 개의치 않았다.

“예, 예. 그 이야기라면 들었습니다. 지난번에 마법사님에게 말 한 번 잘못한 이후로 꾸준히 들었지요. 마법사들이 눈 가리고 아웅을 했다는 식의 발언은 제가 잘못했으니 좀 봐주십시오. 네?”

했던 이야기 또 하지 말고 슬슬 입 좀 다물라는 완곡어법을 눈치챈 하넨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어 보였다. 케르츠의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리는 데에 성공했으니 더 이상 꾸역꾸역 이야기를 이어 나갈 이유는 없다.

“아니, 뭐. 잘못했다고 할 거까지야 없어. 틀린 말도 아닌데. 안 그래?”

“말은 그렇게 하면서 은근히 삐지신 게……. 아니지. 방금 그 말은 실언이었습니다. 아무튼, 연구는 잘 되어 가십니까?”

“그럭저럭 잘 되어 가. 덕분에 좀 피곤하긴 하지만…….”

며칠 동안의 작업 덕분에 일기장에 묻은 피를 제거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아직은 그게 전부였다. 사람이 잠을 줄이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넨은 동료들에 비해 체력이 훨씬 더 약한 편이었다.

용사처럼 타고난 체질이 인간의 수준을 넘어선 것도 아니고, 케르츠처럼 몸이 좋은 것도 아닌 주제에 남들보다 잠을 줄인 탓에 최근에 하넨은 제법 피로했다. 짬짬이 일기의 내용을 읽고 싶어도 체력이나 집중력이 받쳐 주지를 않았다. 나중에 시간이 좀 나면 그때 읽든가 할 수밖에.

“개인적인 욕심 채우겠답시고 걱정시켜서 미안해. 컨디션 조절을 하기는 해야 되는데.”

“너무 무리하지는 말아 주세요. 중요한 순간에 체력이 부족해 곤란해질 수도 있으니. 자, 일단 좀 누우시죠.”

하넨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는 짐 꾸러미에서 모포를 꺼냈다. 다만 케르츠 쪽은 잘 생각이 별로 없는 듯 그대로 앉아만 있었다. 하긴, 한쪽이라도 깨어 있어야 나중에 상인과 연락이 되긴 하겠지만……. 하넨이 베개로 쓰기 위해 모포를 둘둘 말고 있는데, 케르츠가 자기 무릎을 툭툭 쳤다.

“무릎베개라도 하시겠습니까?”

“뭐? 아, 아니. 됐어. 불편하게 뭘…….”

“잠깐 정도라면 크게 불편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왕 주무실 거 편하게 주무시죠.”

아예 틀린 말은 아니었으므로, 하넨은 잠시 미간을 찌푸리긴 했지만 결국 케르츠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모포를 덮은 채 누웠다. 역시 저 도살자는 사람을 애 취급한다. 하넨이 두 살배기 용사도 아니고, 설마 하넨이 무릎베개를 해 줘야 푹 잘 수 있는 어리광쟁이라고 믿는 걸까.

아니면 원래 스킨십이 헤픈 타입일지도 모른다. 용사를 상대로도 곧잘 머리를 쓰다듬어 주거나 무릎베개를 해 주곤 했으며, 생각해 보니 저 언데드 상인하고도 종종 묘한 일이 벌어져서 시체 성애자 의혹을 사곤 했으니까. 물론 정확히 말하자면 의혹을 샀다기보단 하넨이 혼자 오해한 쪽에 가깝지만, 하넨은 그 사실을 편리하게 무시해 버렸다.

‘정말이지, 성직자의 후손이라는 놈이 저래서야 쓰겠냐고.’

괜히 얼굴을 찌푸리던 하넨은, 고개를 숙여 자신을 보고 있던 케르츠와 눈을 마주치자 괜히 민망해져서 눈을 감아 버렸다. 대체 지금 무슨 엉뚱한 생각을 한 걸까. 다른 생각을 할 필요가 있었다. 이를 테면, 그래. 성직자. 아마 케르츠와 같은 교파에 속했을 성직자의 일기라든지.

과연 수백 년 전의 성직자들은 무슨 생각으로 신의 악함을 봉인하려 했을까. 수백 년 전 케르츠의 조상이었을 성기사들은 어째서 그걸 방해한 걸까. 결국 방해에 성공했으면 떳떳하기라도 할 것이지, 어째서 자신들의 대의조차 제대로 밝히지 않아 후손들에게 찝찝한 죄책감만을 안겼는지.

마법사다운 호기심이 절반, 동료의 과거에 대한 속된 호기심이 나머지 절반이었다. 결국 합쳐 보면 종류만 다양할 뿐 순수한 호기심에 불과하다는 말이었지만, 그래도 하넨은 이 미궁에서 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미궁에서 벌어진 일의 전말을 알게 된 케르츠가 어떤 식으로 반응할지도 조금 궁금했고.

물론 미궁에서 벌어진 일의 전말이 밝혀질 경우 원정 자체에 회의감을 가지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거야 나중에 생각해 볼 일이었다. 일단 핏자국이 없어진 일기장을 읽으며 최소한의 내용을 건지고, 나중에 상인이 일기장을 복원할 재료를 가져오면 그걸 이용해 조금씩 일기장을 해석해 나가고…….

그렇게 부지런히 머리를 굴리던 하넨은 어느 순간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깊은 잠이었다.

* * *

푸른색 보석을 이용해 약간 중력을 받고 나서, 충분히 각도가 나왔다고 판단했을 때쯤 중간에 보석을 주황색으로 바꿔 끼웠다. 나와 용사의 몸은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속도가 붙었다 싶을 때쯤 주황색 보석을 펜던트에서 빼고, 주황색 보석이 정중앙에 박혀 있는 가시 함정을 노려보았다.

“지금이야, 던져!”

자루 안에 들어 있던 인형이 마법을 쓰자, 나를 업고 있던 용사의 몸이 강한 충격을 받기라도 한 것처럼 앞으로 휙 밀려나 버렸다. 구체적으로 무슨 마법인지는 모르고 그냥 방어 마법의 응용이라는 것만 알 뿐이지만, 어쨌든 사람 하나의 이동 궤도쯤이야 충분히 바꿔 놓을 수 있었다.

다만, 이왕 마법을 쓸 거라면 내 이동 궤도도 좀 바꿔 줬으면 좋았을 텐데. 용사의 몸은 본래의 이동 궤도에서 벗어나 가시 함정으로 멀어졌고, 내 몸은 원래 궤도대로 쭉 움직여 함정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나는 일단 눈을 감아 보았다. 물론 눈을 감는다고 해서 뭐가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기분은 좀 더 나아질 테니까.

푸슉, 좀 미묘한 소리가 귓가를 스친 직후 용사가 바닥에 착지하는 소리가 이어서 들려 왔다. 제법 요란하게 착지한 모양이지만 기껏해야 얼굴 좀 까지고 말았을 거다.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저기, 용사님? 잘 착지하신 거 맞지요? 저 이거 좀 빼 주세요. 다행히도 혀는 안 꿰뚫린 거 같은데 어쩐지 시야가 어두워서……. 어디 계신지 하나도 안 보이네요?”

“상인, 상인이 죽어요! 상인이 뼈 꼬챙이에 찔려서 죽고 말았어요!”

“저는 이미 죽었으니까 더 죽을 일도 없거든요! 울지 말고 일단 저부터 빼 주지 않으실래요?”

잔인함의 측면에서 보면 19세 미만 관람 불가 딱지를 붙여야 할 모습일 테고, 그런 모습을 보고 난 두 살 어린애의 정신적 충격은 이루 말로 할 수 없겠지만 지금은 그런 사소한 걸 따질 상황이 못 되었다. 아니, 애초에 저 용사님은 사념 처리가 전문이잖아. 그러면 적어도 이것보다는 충격적인 꼬락서니를 많이 봤겠지.

“잠깐만 기다려 봐요! 그, 일단 팔부터 빼내고……!”

“꼬챙이를 자른 다음에 빼면 더 쉽지 않을까요? 저 지금 기분이 되게 이상한데.”

몸에서 길쭉한 꼬챙이가 쭈욱 뽑혀 나가는 기분은, 뭐랄까. 감각이 어느 정도 무뎌진 상황에서도 좀 징그러운 느낌이었다. 용사는 내 말을 듣자마자 검을 뽑아 들었고, 내 몸을 꿰뚫고 있는 꼬챙이를 잘라낸 다음 내 팔다리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나는 몇 분 만에 용사에게 구조되어서 바닥에 드러누웠다.

“괜찮아요, 상인?”

“에, 예에……. 괜찮아요. 좀 쉬면 상처도 금방 복구될 거예요.”

대체 이게 무슨 우스꽝스러운 쇼냐. 나는 괜히 우스워져서 피식 웃었다. 용사는 내가 웃는 걸 보고 안도했는지 내 손을 주물럭거리며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자기 딴에는 나를 달랜다고 그러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조금쯤은 흥미 본위적인 마음이 섞여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지금 이게 무슨 꼴이냐면……. 나와 용사는 케르츠 일행에게 합류하기 위해 부지런히 이동하는 중이다. 용사가 나를 등에 업은 채 이동하다가, 가끔 함정이 보이면 방금 전처럼 인형이 마법으로 용사를 밀쳐서 함정 바깥으로 던지는 식이다.

사실 처음에는 용사를 내 등에 업고 이동하려고 했다. 용사가 보석 주머니를 잃어버렸으니 중력의 영향을 공유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그 주장을 내보이자마자 인형과 용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제가 상인을 업어요?”

“아니, 거꾸로예요. 저한테 업히라고요.”

“하지만 상인은 작은데요?”

“저기, 제 키는 그럭저럭 평균 정도거든요? 작지 않다고요.”

“하지만 저보다는 작아요. 저 업을 수 있어요?”

[나는 지금 비현실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용사와 나 사이의 체격 차이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고작 몇 센티 차이인데! 나는 분통을 터뜨리고 싶었지만 시험 삼아 용사를 한 번 업어 보고는 금방 납득하고 말았다. 못 업는다, 이 인간. 키 차이야 어떻게든 부정해 본다 치더라도 체격이나 몸무게의 차이가 너무 컸다. 본인도 꽤 근육이 있는 데다가 갑옷으로 중무장까지 한 용사를 업고 돌아다니려니, 통각이 없는 상태에서도 몇 초 만에 억 소리가 절로 났다.

용사는 뭐가 그리도 신이 났는지 매우 좋아하며 나를 업었다. 처음에 녀석은 아예 나를 공주님 안듯 안겠다고 떼를 썼지만, 나중에 하넨과 케르츠 일행에게 그 꼴을 보일 걸 생각하니 도저히 엄두가 안 나서 내가 극구 반대했다. 그래서 결국 용사에게 업히는 정도의 선에서 타협할 수 있었다.

아무튼, 한참 동안 바닥에 엎어진 채 숨을 고르고 나니 몸이 재생되고 시야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눈을 뜨자마자 용사의 신기해하는 얼굴이 코앞에 들이밀어진 건 반갑다고 해야 할지 떨떠름하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제 하넨과 케르츠를 찾아봐야 한다. 제법 많이 이동한 것 같은데 이제 슬슬 보이지 않을까?

“저기 있어요. 저 멀리. 하넨이 케르츠한테 무릎베개하고 자고 있어요. 많이 피곤한가 봐요.”

“우와, 저게 보여요? 저는 무슨 얼룩이나 점 같은 걸로 보이는데.”

“상인, 아직 시야가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은 거 아니에요?”

“그건 아닌데요. 제 시야는 이게 최대치라서…….”

용사는 머리 위 저 멀리에 둥둥 떠 있는 복도를 가리켜 보였다. 확실히 뭔가 빨간 게 보이긴 하는데 내 시력으로는 그 정도가 한계였다. 이 용사님 진짜 눈 좋구나. 나는 내심 감탄하며 혀를 내둘렀다. 원래 용사의 신체 능력이 보통 사람을 훌쩍 뛰어넘는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면 거의 몽골인 수준 아닌가? 분명 용사 녀석이 특이한 거겠지?

“저쪽에서도 우리가 보일까요?”

“보일 리가……. 어, 뭐가 조금 움직이네요.”

“케르츠가 손 흔들었어요! 우리를 봤나 봐요!”

어이가 없어 입을 벌렸다. 이 인간들, 대체 시력이 어떻게 되어 먹은 걸까. 혹시 판타지 세계 인간들은 이 정도 시력이 디폴트 아니야? 물론 하넨의 사례를 생각해 보면 케르츠와 용사만이 비정상적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야 없겠지만 말이다.

어쨌든, 서로가 보이는 위치까지 왔으니 제대로 오긴 온 모양이다. 물론 아직도 엄청 멀리 있고, 저기까지 한 방에 가는 경로는 못 찾겠으니 제법 빙빙 돌아야 하겠지만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저 사람들도 별 탈 없이 건강해 보인다.

우리가 케르츠와 하넨의 모습을 확인하고 있는 동안, 인형은 꼬물꼬물 바닥을 돌아다니며 뼈 꼬챙이를 주워서 모으고 있었다. 저 녀석은 지금 뭘 하는 거지?

인형은 옆구리에 꼬챙이를 여러 개 끼워 오더니 용사에게 피투성이 뼈 꼬챙이를 내밀었고, 용사는 무슨 말을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이고는 검으로 뼈 꼬챙이를 잘라 주었다. 자루에 집어넣기 알맞은 크기로 뼈가 잘리자 인형은 기쁨의 춤인지 뭔지 모를 걸 추기 시작했다.

“너는 내가 꿰뚫렸던 뼈를 모으면서 뭘 그렇게 좋아하는 거야? 어디다가 쓰려고?”

[하넨이 부탁한 재료 중 하나다. 잡념을 먹는 괴물의 뼈다.]

“그런 괴물 뼈가 왜 이런 곳에서 함정 노릇이나 하고 있는데? 정말이지 이 미궁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게다가 하넨 씨는 왜 이런 게 필요하단 거야?”

잡념을 먹는 괴물의 뼈라. 굳이 말하면 해충보다는 익충에 가까운 뉘앙스였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겠지. 어쨌든 나는 괜히 입을 삐죽거리며 뼈를 자루에 쑤셔 넣었다.

어쩌면 하넨 그 인간, 일기장도 복원하고 겸사겸사 자기 사리사욕도 채울 겸 별로 쓸모없는 재료도 섞어서 적어 준 거 아니야? 아니면, 그 뭐랄까. 영업 비밀 같은 거 있잖아. 자기 비밀을 지키기 위해 페이크 재료를 섞어 넣었다든지.

마법에는 일자무식인 나한테 굳이 그런 짓을 해서 무슨 이득이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괜히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 투덜거리고 있는데, 옆에서 호기심에 가득 찬 목소리가 들려 왔다.

“하넨이 이거 필요하대요?”

맞다. 이놈의 입! 슬쩍 옆으로 시선을 돌려 보니 용사가 눈을 반짝거리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저번에 하넨에게 조언을 들었는데도 또 까먹어 버렸다. 변명할 거리가 궁한 건 둘째치더라도, 내 변명을 용사가 믿어 주기는 할지도 의심스러운 상황이었다.

뭐라고 변명하지? 만약 사실을 말해야 한다면 뭘 말해야 하지? 치열하게 머리를 굴리며 끙끙거리고 있는데, 용사의 입이 열리더니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연구를 위한 재료인가요? 하넨은 연구를 좋아하니까.”

“여, 연구요? 네, 뭐. 그런가 봐요. 무슨 연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살았다! 다행히도 용사는, 내가 변명하기도 전에 자기 나름대로의 이유를 찾아 혼자 납득해 버린 모양이었다. 연구라, 정말로 좋은 핑계지. 하넨에게도 그렇고 나한테도 그렇고. 화제가 이런 식으로 흘러간다면 내가 굳이 변명해야 할 필요는 없는 듯하다.

“무슨 연구인지는 몰라요?”

“그, 저는 원래 마법에 대한 걸 아무것도 모르니까요. 설명해 봤자 못 알아들을 거라고 막 사람 무시하면서 아무것도 안 알려 줬어요.”

“틀린 말은 아닐 거예요. 저도 한 번 들어 봤는데 정말로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어요.”

용사는 진지하게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의 호기심 많은 용사답지 않게 약간 창백하게 질린 표정인 걸 보니, 하넨 저 작자는 남에게 설명을 할 때 배경지식 따위를 고려하지 않는 성격이 아닐까 싶었다. 두 살짜리 어린애한데 대체 얼마나 설명을 해 댔으면 용사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걸까.

“하넨, 언젠가 ‘뜨겁지 않은 불’을 만들어 보고 싶대요. 지금은 못 만드나 봐요. 세계가 망가지는 바람에 불의 마법을 쓰기가 힘들어졌다고 들었어요.”

“불 마법을 쓰기가 힘들다고요? 그 사람, 그냥 모닥불 정도는 피울 수 있지 않아요?”

“모닥불은 피울 수 있지만 그 정도가 한계라고 들었어요. 옛날 사람들은 훨씬 더 대단한 마법을 쓸 수 있었대요. 전 들어도 잘 모르겠지만.”

“흐음.”

“하넨은요, 세계가 정화되고 나면 옛날 마법을 연구하는 게 소원이래요.”

그래도 새로 나온 화제는 순조롭게 흘러갔고, 나는 용사에게 질문도 하고 맞장구도 적당히 쳐 주면서 이야기를 이끌어 나갔다. 이제 용사가 방금 전 이야기에 의구심을 가질 염려는 없다고 봐도 되겠지? 내심 마음을 놓으며 용사의 얼굴을 흘끔 바라본 순간, 나는 묘한 사실을 깨달았다.

“있잖아요, 나는 세계를 정화하고 나면 무얼 해야 할까요?”

분명 밝은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용사의 얼굴이 묘하게 굳어 있었던 것이다. 늘 생글생글 웃는 얼굴만 짓는 용사의 평소 모습을 고려하면 참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뭐지, 왜 갑자기? 내심 당황한 마음에 용사의 표정을 더 살피자, 용사는 내 시선을 눈치챈 듯 곧바로 입꼬리를 끌어 올려 보였다. 상당히 어색한 표정이었다.

“제가 이상한 질문을 했네요.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해도 될 텐데.”

“네? 아니, 뭐. 나중에 생각해도 되긴 하겠지만……. 갑자기 왜 그래요? 표정이 안 좋아요.”

“제 표정이 안 좋아 보여요? 아마 잘 시간이라서 그런가 봐요. 봐요, 하넨도 자고 있잖아요.”

아무리 봐도 졸음과는 상관이 없어 보이는데.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묻고 싶은 욕구가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아무래도 용사가 입을 열고 싶지 않은 눈치인지라 쉽사리 질문하기도 곤란했다.

나는 구원 투수라도 바라는 심정으로 인형을 흘끔거렸지만 어쩐 일인지 저쪽도 반응이 신통찮았다. 녀석은 용사에게 머리를 기댄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저 녀석은 꼭 곤란한 일이 생기면 저렇게 무생물 시늉을 하더라, 얄밉게시리!

“자고 일어나면 멀쩡해질 거예요. 조금만 자고 싶어요. 그래도 될까요?”

“네, 뭐. 큰 문제는 없겠지요……. 정 피곤하시다면 조금 쉬세요.”

“고마워요.”

용사는 조금 웃어 보이더니 내 무릎에 자기 머리를 베고 눈을 감았다. 너무 자연스럽게 무릎베개를 시도하는 게 아닌가 싶어 내심 어이가 없었지만, 그래도 용사의 기분이 풀린다면 무릎 좀 내준들 어떠랴 싶었다. 어쩌면 진짜일지도 모르지, 자고 일어나면 멀쩡해질 거라는 그 말이…….

나는 금방 새근새근 잠이 든 용사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오늘따라 그 얼굴이 묘하게 안쓰러워 보였다.

용사는 코 고는 소리 하나 내지 않은 채 새근새근 잘 잤다.

모포는 목까지 착실히 올려서 덮고, 품에는 인형까지 안고 자는 모습이 새 나라의 어린이 그 자체였다. 물론 겉모습만 보자면 훌륭한 성인 남성이었고, 취향 문제를 떠나서 객관적으로 평가하기에도 근사하게 생겨서 꼭 잠자는 숲 속의 왕자님 같은 모습이지만 그래도 근본적으론 잘 자는 어린애였다. 보고만 있어도 괜히 기특했다.

그나저나 인형 녀석은 아직도 용사에게 폭 안긴 채 장난감 시늉이나 하고 있다. 저 녀석, 용사가 조물락거릴 때는 싫다느니 구해 달라느니 바둥거리지만 사실은 장난감 취급을 당하는 상황을 좋아하는 거 아니야?

나는 입은 다물고 머릿속으로 생각만 해서 인형을 불렀다. 또 입을 열었다가 용사를 깨우고 싶은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야, 야.’

[인형은 용사를 원활하게 재우기 위해 장난감 노릇을 해 주었다. 이제 용사가 잘 자고 있으니 움직여도 될 것이다.]

인형은 마치 내 부름을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용사의 품 안에서 슥 빠져나왔다. 나오자마자 부지런히 스트레칭을 하고 땅딸막한 다리나마 쭉쭉 뻗는 모습을 보니, 본인도 모포 안에서 가만히 있는 건 의외로 답답했던 듯하다. 진짜로 답답했던 건지, 아니면 답답했던 시늉을 하는 건지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너는 인마, 왜 아까 같은 상황에서도 말 한마디가 없냐? 사람 민망해지게.’

[고민은 성장의 필수적인 과정이다. 걱정할 것 없다. 굳이 고민하는 상태에서 벗어나도록 설득하는 것보다는, 그저 고민하도록 내버려 두는 게 더 나을 수도 있다.]

인형은 그렇게 말하더니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나름대로 발레 흉내를 내는지 다리를 들거나 팔을 쭉 뻗는 시늉을 했으나, 아쉽게도 발레를 하기에는 저 녀석의 신체 비율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녀석은 바닥에 콰당 넘어지더니, 기죽은 기색도 없이 씩씩하게 몸을 다시 일으켰다.

[인간은 누구나 시행착오를 겪는다. 용사는 지나치게 빨리 신체의 완성을 겪은 인간이기 때문에 시행착오의 경험이 부족하다.]

‘음, 그러니까……. 유년기나 사춘기 때 생략했던 고민을 지금 하고 있다는 뜻인가? 뭐 그런 식으로 이해하면 돼?’

[꼭 유년기나 사춘기 때에만 하는 고민은 아니다. 미래에 대한 고민은 인간의 공통적인 본성이다. 유년기든, 청년기든, 심지어 노년기의 인간조차도 때로는 미래를 고민한다.]

‘흐음.’

[용사라 한들 그 본성에 반하는 행동을 할 이유가 없다. 나는 미래를 걱정하지 못하지만 용사는 미래를 걱정할 수 있다.]

갑자기 내 이야기가 왜 나와? 인형 이 자식, 은근히 나 돌려 까고 있는 거 아냐? 나는 괜한 얄미움을 느끼며 인형을 노려보았지만, 생각해 보니 틀린 말이 아니었으므로 크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아, 뭐. 그래. 내가 미래를 걱정하기를 두려워하고, 인간성을 되찾기를 꺼리는 건 사실이지.

하지만 아무래도 좋은 꼴이 예상되지 않는데 꾸역꾸역 미래를 걱정하는 것도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일 아니야? 나도 이런 미궁에 처박혀 있지 않았더라면, 대학에 다니고 친구들과 놀러 다니는 삶을 살았더라면 당연히 미래에 대해 생각했을 거라고.

‘뭐, 따지고 보면 용사 녀석도 그다지 좋은 삶은 아니지만…….’

용사의 자는 얼굴을 보고 있노라니 괜히 좀 부끄러워졌다. 미궁을 탐험하면서 온갖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하는 건 용사나 나나 마찬가지일 텐데, 그래도 용사는 미래를 걱정하고 있잖아. 생각해 보면 용사가 적어도 나보다는 충실한 삶을 살고 있는 게 아닐까?

[오랫동안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결국엔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린다. 신은 미래를 걱정하지 않지만 나는 미래를 걱정할 수 있어야 한다.]

‘대체 그건 무슨 근본 없는 논리야? ……뭐, 이런 이야기는 그만하자. 지금은 용사 이야기나 하자고.’

나는 괜히 우물거리며 화제를 돌렸다. 어쨌든, 저 솜뭉치 녀석의 말에 따르면 지금 용사는 크게 걱정할 만한 상태가 아닌 거지? 물론 녀석의 슬퍼 보이는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기분이 조금 안 좋아지는 건 사실이지만, 그거하고는 별개로 지금 용사는 지극히 평범하고 건설적인 고민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 녀석이 나보다 낫네, 뭐.

‘이 녀석도 생각이 많겠지. 이 녀석은 자기가 세계의 정화를 위해 태어났다고 믿는 모양이니까…….’

[실제로 그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건 사실이다. 용사는 정교하게 설계된 인간이며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태어났다.]

‘자기가 가지고 싶어서 가진 목적이 아니잖아. 그냥 남이 주입해 준 목적일 뿐이지.’

[하지만 가진 게 그 목적밖에 없다면 불안을 느낄 법도 하다. 아이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고들 하나, 때로는 어린아이의 상상력이 더 협소할 때도 있는 법이다.]

어린아이의 상상력이 더 협소하다, 라. 알쏭달쏭하면서도 어쩐지 알 것 같은 이야기라서 나는 고개만 끄덕였다. 하긴 아이들은 자신이 배운 것 이내에서 상상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다. 너의 목적은 이것밖에 없다, 하는 식으로 어렸을 때부터 배워 온 아이라면, 지금껏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목적 이외의 다른 목적을 상상하는 것조차 너무 어렵겠지.

그렇다면, 용사에게 있어 ‘목적’을 달성한 후의 삶은 과연 무엇일까? 그런 궁금증을 떠올리며 용사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던 도중, 나는 묘한 사실을 깨달았다. 손가락 끝이 축축했다.

‘응?’

[용사가 식은땀을 흘리고 있다.]

분명 아까 전까지만 해도 이마가 뽀송뽀송했던 것 같은데, 지금 용사는 덥지도 않으면서 이상할 정도로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정신이 번쩍 들어 용사의 얼굴을 살피니 안색이 창백했다.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용사님? 왜 그래요?”

대답은 없었지만 용사의 어깨가 희미하게 떨렸다. 미간을 찌푸리고, 약간 벌어진 입에서는 끙끙 앓는 소리까지 나는 모습이 어째 심상치 않아 보였다. 혹시 어디가 아픈가? 원래 튼튼하던 사람이 무슨 일로 이렇게 힘들어하지? 아니지, 아무리 용사가 튼튼하다고는 해도 근본적으로는 살아 있는 인간이다. 가끔은 병이 나도 이상하지 않다.

“야, 야. 어떻게 좀 해 봐. 병이야? 이 용사님, 혹시 질환 같은 거 있어?”

[아무래도 나는 조만간 인간성을 한 차례 되찾아 봐야 할 것 같다.]

“너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용사가 아픈데!”

[보통의 인간이라면, 이런 상황에서는 질환이 아닌 다른 가정을 먼저 떠올리곤 한다.]

질환이 아니라고? 그러면 왜 이렇게 힘들어하지? 묘하게 나를 한심하게 여기는 듯한 인형의 어조에 당황하면서도, 나는 일단 용사의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 주었다. 일단 열은 없는 것 같아 다행인데, 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힘들어하는 걸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문득 묘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잠을 자면 꿈을 꾸지.’

잠을 자면 꿈을 꾼다. 그리고 그 꿈이 늘 좋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그 당연하면서도 알기 쉬운 가정이 지나치게 생경해서 나는 오히려 놀라고 말았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 미궁에 들어온 이후로 단 1분도 잠을 청하지 않았다. 당연히 꿈을 꾼 적도 없었다. 구체적으로 얼마나 오래 깨어 있었던 거지? 몇 주? 아니면 몇 달? 이 미궁은 햇빛이 들어오지 않아서, 시간의 개념을 도무지 짐작할 수가 없는데…….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상황이 아니었다. 인형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제야 알겠어. 악몽이구나. 이 용사님이 악몽을 꾸고 있어. 그리고 악몽을 꾸면 깨워야지. 가까스로 거기까지 결론을 내린 나는 용사를 조심스럽게 흔들어 깨우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아, 아아……?!”

“왜, 왜 갑자기 그래요?”

용사가 용수철처럼 몸을 튀며 일어났다. 기상이라기보다는 진저리에 가까울 정도로 격렬한 반응에 나는 깜짝 놀라 몸이 굳어 버리고 말았다. 내가 반응하지 못한 그 짧은 시간 사이, 용사는 기껏 몸을 일으킨 보람도 없이 양손으로 어깨를 쥐어뜯으며 몸을 웅크렸다. 성대를 쇠가 찢는 듯 괴로워하는 소리가 생경했다.

“요, 용사님?”

“아으, 으, 흐윽……!”

얼마나 손에 힘을 세게 주었는지 손가락 끝이 새하얗고 마디가 도드라져 있었다. 그 잔뜩 긴장한 손이 명백한 성인 남성의 것임을 새삼스럽게 깨닫기에 앞서, 용사가 지금 이 순간 느끼고 있는 공포와 긴장감이 얼마나 큰지가 먼저 다가와 당혹스러웠다. 일단 용사를 진정시켜야 할 것 같았다.

“괜찮아요, 용사님. 네? 여기 무서운 거 없어요. 아무것도 없어요.”

“싫어, 싫어.”

“제가 누군지 알아보시겠어요? 저예요, 상인. 제가 싫어요?”

“싫어, 미워. 다 미워.”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리는 목소리에 패닉이 잔뜩 어려 있었다. 지금 용사는 내가 누군지 알아보지도 못하는 게 분명했다. 이 상태에서는 무슨 소리를 하던 안 들을 게 분명했다. 일단 고개부터 들게 하고, 지금 이 상황이 악몽 속 어느 한 장면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시켜 줘야만 한다고 나는 판단했다. 하지만.

“일단 고개 좀 들어 봐요. 안 좋은 꿈을 꿨어요? 저 좀 봐요, 용사……?!”

용사의 어깨를 잡고 몸을 돌린 순간, 나는 흠칫 놀라 몸을 굳히고 말았다.

용사는 지금껏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다들 밉다며 훌쩍거리던 그 목소리는 단순한 칭얼거림이 아니었다.

“요, 용사님……?”

저도 모르게 혀가 굳고 어깨가 뻣뻣해졌다. 당장 사람을 달래야만 하는, 익숙하지 않은 상황에 대한 거북함 탓이라는 핑계는 절반치의 정답조차도 못 된다. 그건 분명 용사의 표정 때문이었다.

서러움과 슬픔, 원망, 그리고 어쩌면 불특정 다수에 대한 분노. 내면에서 터져 나올 정도로 강렬하지만, 정작 본인에게 그 감정의 종류를 묻는다면 스스로도 분간해 내지 못할 수많은 감정들이 그 얼굴에 어려 있었다.

“용사예요, 아직은?”

“네?”

아직도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지금까지 보아 왔던 것 중에 가장 흐리멍덩한 벽안이 멍하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은 용사냐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그 문장의 맥락을 파악하기 전에 우선 용사의 감정부터 전해져 왔다. 분명 절박함이었다. 의미조차 제대로 알기 힘든 질문을 던지고 있는 주제에, 지금의 용사는 지나치리만치 절박해 보였다.

“용사가 다 끝나면, 그다음에는 뭐예요? 무언가 남아 있지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네? 조금 더 천천히 말해 보세요, 용사님. 우선은 진정하고요.”

“설마 아무것도 없다고는 말하지 않을 거죠? 여전히 나한테도 무언가 남아 있지요? 다 없어지는 건 아니지요? 케르츠도, 하넨도, 그리고, 그리고…….”

대체 무슨 소리를, 다시 한번 그런 질문이 입 밖으로 흘러나가기 직전에야 나는 겨우 정신을 차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제 알겠다. 아니, 이제 알 것 같다는 수준을 넘어서 아주 또렷하게 직감할 수 있었다. 이 용사님, 설마.

“없어지지 않아요.”

“정말요?”

“그럼요. 자, 만져 보세요. 당장 제가 여기 있어요. 제가 누군지 알겠어요?”

“……차가워.”

“그렇죠? 봐요, 이렇게 차갑잖아요. 그럼 제가 누구겠어요.”

“사, 상인? 상인이다.”

“맞아요. 저는 없어지지 않아요. 여기 이대로 있어요. 용사님이 일을 다 끝내더라도 분명 저는 여기 있을 거예요.”

악의 근원을 정화하고 나면 그걸 위해 만들어진 나는 어떻게 될지, 혹시나 시체로 다시 돌아가 버리는 건 아닌지, 사실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마치 확실한 사실처럼 용사에게 말했다. 용사에게도, 나에게도 그편이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기에.

그제야 정신이 좀 돌아온 듯, 용사는 천천히 눈을 깜빡이더니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제법 눈빛이 또렷해 보였다. 원망과 분노에 빳빳하게 굳어 있던 얼굴이 흐물흐물 풀리더니, 딱 그 나이의 어린아이다운 순진함이 다시 그 얼굴에 깃들었다. 지금 이 모습이 딱 좋다고, 역시 용사는 아무리 잘생겼어도 이 표정이 어울린다고 막연히 생각할 때쯤.

“흐, 흐어어…….”

용사의 묵직한 체온이 어깨 위에 얹혀 왔다.

나에게 몸을 기대어 안기다시피 한 채, 용사는 그대로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우는 아이를 달래 본 적은 없었다. 물론 지금 내 품에 안겨서 눈물을 짜내고 있는 건 아이가 아니라 용사님이지만, 나이대만 고려하자면 사실상 별 차이는 없어 보였다. 어느 쪽이든 달래는 방법을 잘 모르는 건 마찬가지고. 나한테 동생이 있긴 했지만 그 녀석은 잘 울지도 않았고, 굳이 공을 들여서 달래기까지 할 필요도 없었단 말이야.

어쨌든 나는 최선을 다해 용사를 달래 보았다. 부지런히 용사의 등을 토닥여 주고 머리카락도 쓰다듬어 주었다. 용사의 성격을 감안하면 볼을 비비거나 뽀뽀를 하는 방법도 먹힐 것 같긴 한데 솔직히 그건 최후의 방법으로 남겨 두고 싶었다. 그, 뭐랄까. 아무리 이 용사님이 두 살이라고 해도 겉모습은 명백한 성인 남자란 말이야. 아무래도 적극적으로 뽀뽀 같은 걸 하기에는 좀 민망한 감이 있어서…….

“흑, 흐으…….”

“여기다 코 풀어요. 팽 하고. 아니, 그. 제 옷에다 풀라는 게 아니라 용사님 손수건에다가요.”

다행히도 내 노력이 먹히긴 했는지, 시간이 지나자 용사는 점점 안정을 되찾아 갔다. 손수건에 대고 코를 풀고 난 용사는 조금 충혈된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직 울고 난 흔적이 사라지지 않아 조금 서러운 인상이기는 하지만 정작 본인은 꽤 진정된 듯했다. 작은 토끼나 강아지 같아서 귀엽다는 생각까지 드는 걸 보면 이제 나도 슬슬 글러 먹었나?

뭔가 할 말이 있기는 한 것 같은데, 정작 용사는 나를 바라만 볼 뿐 직접 말을 내뱉지는 않았다. 말해도 될까 말까 망설인다기보다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자체가 정리가 안 되는 모양이었다. 한참 동안 말을 고르던 용사는 뜬금없이 이상한 말을 내뱉었다.

“하넨이 없어서 그래요.”

“네?”

구체적으로 뭐가 ‘그렇다’는 건지 모르겠다. 기분이 안 좋은 이유에 대한 걸까, 아니면 악몽을 꾼 이유에 대한 걸까. 본인도 자기 설명이 부족하다는 걸 알기는 하는지, 용사는 무언가를 더 설명하기 위해 머뭇거리며 말을 골랐다.

“그러니까, 음……. 평소에는 말이지요. 하넨이 수면독으로 재워 줘요. 그게 있으면 뒤척이지도 않고 중간에 깨지도 않고 깊이 잘 수 있어요. 그래서 악몽 같은 것도 안 꿔요. 그런데, 오늘은 하넨이 없어서.”

“수면독……? 수면제 말씀하시는 거죠, 그거?”

“무슨 차이예요? 몰라요. 하넨은 수면독이라고 그랬어요.”

그 마법사, 대체 자기네 용사한테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가볍게 혀를 찼다. 하지만 하넨도 독이라는 사실을 딱히 숨기지는 않았고, 용사 본인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걸 보면 의외로 부작용은 없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바깥 세계에서는 수면독이 불면증 치료제 같은 역할을 하는 걸지도 모르지.

[딱히 그렇지는 않다. 보통의 인간은 수면독을 먹으면 죽는다. 용사에게는 독이 통하지 않아 보통의 수면제처럼 사용할 수 있는 것뿐이다.]

“아, 그래? 그냥 이 사람이 튼튼한 거였구나. 어쨌든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기껏 설명을 해 줬는데 내가 대충 넘겨들어서 화가 났는지, 인형은 괜히 내 옆구리를 팡팡 두드렸다. 나는 성의 없이 인형의 뒷덜미를 붙잡으며 용사를 바라보았다. 인형과 내가 투닥거리는 게 재미있었는지 꽤 흥미로운 표정으로 구경하던 용사는, 갑자기 내가 자기 쪽을 바라보자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바라보았다.

“그래서 말이죠, 용사님.”

“네?”

“무슨 악몽을 꿨길래 그렇게 울었어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인형은 내게서 고개를 돌려 용사를 빤히 바라보았고, 나와 인형의 시선 공격을 동시에 받은 용사는 멍하니 눈을 깜빡거렸다. 조금 난감한 눈치였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악몽을 왜 꾸었냐 하는 건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 동료들과 떨어져 있는 상황이기도 하고, 이런 음침한 미궁을 탐험하면서 악몽 하나 안 꾸면 그게 더 이상한 일 아닐까 싶기도 하고. 게다가, 원래 꿈이란 건 본인이 꾸기 싫다고 안 꿀 수 있는 문제가 아니잖은가. 이유도 맥락도 없이 갑자기 악몽을 꿀 때도 있긴 하니까.

어쨌든, 중요한 건 무슨 악몽이냐 하는 점이다. 대체 어떤 꿈을 꾸었길래 용사는 그렇게 서럽고 괴롭고 화가 난 표정을 지었던 걸까? 언제나 유순하고 생글생글 웃기만 하던, 미움이나 증오 따위의 감정은 조금도 가지지 않을 것 같던 사람이 그런 표정을 짓게 할 정도라면 대체 얼마나 심한 악몽이었을까?

어쩌면 용사가 대답을 꺼리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다행히도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용사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잠시 망설이고만 있을 뿐이었다. 민망한 듯, 조금 두려운 듯 표정이 가지각색으로 바뀌던 용사는, 잠시 내 눈치를 보더니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많이 혼낼 거예요?”

“혼내다니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악몽을 이야기해서 혼난 적이라도 있어요?”

“신전에서는 자주 혼났어요. 하넨이나 케르츠한테는 말한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아마 혼낼 거예요. 상인도 혼낼 거지요?”

“혼내지 않아요. 애초에 꿈을 꾼다고 혼낼 리가 없잖아요. 분명 하넨 씨나 케르츠 씨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혼내지 않아요?”

“네. 혼내지 않을 테니까 그건 신경 쓰지 마세요. 말하기 싫다면 말하지 않아도 되지만, 제가 혼낼까 봐 말하고 싶은데도 숨기지는 말아 줬으면 좋겠어요.”

대체 이 용사님은 신전에서 무슨 교육을 받은 거야? 악몽을 꾼다는 이유만으로 혼이 난다니,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처사였다. 대체 신전 녀석들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용사를 가르친 걸까, 하긴 이래저래 구린 냄새가 나더라니…….

내심 어이가 없어서 속으로 투덜거리고 있는데, 마침내 용사가 용기를 냈는지 슬그머니 입을 열었다. 제법 느릿한 어조였다.

“가끔은 그런 꿈을 꿔요. 내가 없어져도 아무도 슬퍼해 주지 않는 거.”

“……아무도 슬퍼해 주지 않는다고요?”

“물론 지금은 아니에요. 지금 내가 죽으면 케르츠도 하넨도 다들 슬퍼해 줄 거예요. 하지만 꿈에서는 항상 나중의 이야기가 나와요.”

“나중이요?”

“악을 정화하고 나서, 이 미궁에 더 이상 머물 필요도 없고, 그런……. 아주 나중의 이야기요. 그때가 되면 내가 죽어도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그냥, 나만 내버려 두고 다들 떠나 버려요. 다들 할 일이 많다면서.”

생각보다 더 무거운 이야기에 눈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럭저럭 표정이 풀려 있던 용사는, 꿈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점점 표정이 어두워지고 어깨가 축 처졌다. 하지만 용사의 태도보다 더 신경이 쓰이는 건, 용사의 악몽이 가진 불필요할 정도의 현실성이었다. 두 살치고는 생각보다 상상력이 풍부하구나, 하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야.

용사의 저 악몽은 단순한 꿈이 아닌 것 같았다. 오히려 현실의 고민이 악몽의 형태를 통해 나타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나는 용사의 안색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나쁜 꿈이었네요. 실제로는 그럴 리가 없겠지만요.”

“분명 실제로도 그럴 거예요.”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건 그냥 꿈이라고요.”

“그치만, 내가 악을 정화하고 나면 내가 없어져도 곤란해지는 사람은 없어요. 그때가 되면 슬퍼하는 사람도 없을 거예요. 그건 좋은 일이에요.”

“그게 왜 좋은 일이에요?”

“다른 사람을 슬프게 하는 건 나쁜 일이에요. 다른 사람을 슬프게 하지 않는 건 좋은 일이에요. 제가 죽어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다는 건, 제가 죽어서 누가 슬퍼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에요. 다른 사람들이 슬퍼하는 것보단 나 혼자 슬퍼하는 게 더 좋으니까.”

이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설마 저 소리도 신전에서 배웠나?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정작 용사 본인은 당연하다는 듯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은 좀 우울해 보이기는 해도 흔들림 하나 없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왜 말이 안 돼요?”

“왜냐니요, 사람이라면 누구나 친구의 죽음에 슬퍼해요.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에요. 그런데 그런 식으로 슬퍼하지 않는 게 더 낫다니…….”

“그치만, 어차피 쓸모없는 사람의 죽음이라면 아무도 슬퍼하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어요. 나는 어차피 악을 정화하는 걸 목적으로 태어났으니까, 그 목적을 이루고 나면 아무 데에도 쓸모가 없어요……. 쓸모도 없으면서 남을 슬프게 하는 건 좋지 않아요.”

그러나 납득할 수는 없었다. 분명 용사의 눈빛과 태도는 흔들림이 없었지만, 그와는 별개로 용사의 이야기 자체는 완전한 궤변이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슬픔보다는 마음의 평온함을 주고 싶다는 심정이야 아예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지만, 지금껏 함께 미궁을 돌파해 왔던 동료가 죽었을 때 슬퍼하지도 않는 평온함에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 건 그냥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는 꼴인데.

게다가 아무리 용사가 자연적으로 태어난 게 아니라 목적을 가진 채 태어난 인간이라 할지라도, 스스로가 죽는 상황에서 자기감정보다 자신의 쓸모라든지 남의 기분을 먼저 생각하는 건 조금 너무했다. 단순히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 차원이 아니라, 일종의 강박 관념 같은 느낌도 들고…….

‘아직 두 살이잖아. 어린애가 벌써부터 저렇게 생각하면 안 되는데.’

하지만 정작 용사 본인은 자신의 주장에 한 점 부끄러움도 없다는 듯 서글프게 웃어 보이기만 할 뿐이었다. 그 미소에서 느껴지는 묘한 맹목이나 집착은 분명 나 혼자만의 착각이 아닐 거다.

분명 그건 일전에 케르츠를 보았을 때 느꼈던 감각이었다. 묘한 자기 확신에 사로잡힌 모습. 아주 어렸을 때부터 철저하게 교육받은 채 자라서, 다른 의견을 받아들이면 지금껏 자신이 살아온 모든 삶을 부정하게 된다고 믿는 사람.

물론 케르츠와 용사가 완전히 똑같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케르츠는 이미 성인으로서의 자아가 완성되어 더는 누가 말하든 듣지도 않을 사람이라면, 적어도 이 용사님은…….

“쓸모없지 않아요.”

“……네?”

“용사님이 신전에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저는 몰라요. 하지만, 설령 신전에서 정해 준 목적을 달성한 다음이라고 쳐도……. 그래도 용사님은 쓸모없는 사람이 아니에요.”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놀랐는지 용사의 눈이 조금 동그래졌다. 아직 어린 이 사람이라면 조금은 바뀔 수 있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던 그 주장은 사실 그렇게까지 옳은 것도 아니라고, 세상에는 얼마든지 다른 관점과 다른 해석이 있을 수 있다고, 그 사실을 조금이라도 깨달을 수 있다면.

“그, 그치만.”

“애초에 목적이 없다고 해서 쓸모도 없고 가치도 없다는 생각 자체가 이상하다고요. 목적 없이 그냥 자기 하고 싶은 거 하고 사는 삶도 충분히 의미가 있고, 그런 삶을 살더라도 죽고 나서 누군가의 슬픔을 받을 정도의 가치는 있어요. 사람은 그냥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고요.”

“그래도, 저는 달라요. 저는 처음부터 목적을 가지고.”

용사는 조금 혼란스러운 낯으로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무래도 내 말을 받아들이기가 그다지 쉽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사실 나도 그렇게까지 달변가인 건 아니고, 사람을 설득하는 데 무슨 재능이 있지도 않아서 할 말이 조금은 궁했다.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저 용사님을 설득해야 할까. 용사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걸 보면, 차라리 조금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해 보는 편이 나을 것 같은데…….

“정 받아들이기 힘들면 이렇게 생각하는 건 어때요? 악의 근원을 정화하고 나면, 정화한 이후의 다른 목적이 나름대로 있을 거라고.”

“다른, 목적이요?”

그제야 용사의 눈이 동그래졌다. 마치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다행히도 이 관점의 이야기는 그럭저럭 먹혀들어가는 모양이어서, 나는 재빨리 말을 덧붙여 보았다.

“그래요. 옛날이야기에서야 나쁜 놈을 물리치고 나면 이야기가 끝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악의 근원을 정화하고 나서도 이야기는 계속되고, 시간은 흘러가고, 용사님에게는 다른 목적이 생겨요.”

“다른 목적. 저한테도, 다른 목적이…….”

“그리고 그 목적은 말이지요, 다른 사람이 정해 주는 게 아니라 용사님 스스로가 정할 수 있어요. 그거 꽤 멋진 일 아닌가요? 악의 근원을 정화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으니까, 이제는 상으로 용사님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되는 거예요.”

용사의 눈이 묘하게 반짝거리면서 빛났다. 사실 어찌 보면 무책임한 발언이라 할 수도 있다. 그래도 지금은 이 용사님에게 가능성을 보여 주고 싶었다. 악의 근원을 정화하면 용사로서의 목적은 끝날지도 모르지만, 용사가 아닌 다른 목적과 지향점을 가진 삶이라면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저 사람에게 알려 주고 싶었다.

“하지만, 어떤 목적을 가져야 할지는 모르겠어요.”

“지금은 모를 수도 있지요. 하지만 가끔 시간이 나면 말이지요, 그 이후에 대해 생각해 봐요. 악의 근원을 정화하고 나면 뭘 하고 싶은지, 무엇을 보고 싶은지, 무엇을 갖고 싶은지. 혹시 생각하기가 어렵다면 하넨한테 물어봐요. 분명 화내지 않고 대답해 줄 거예요.”

차마 케르츠에게 물어보라고는 못 하겠다. 그 사람은 뭐랄까, 딱 봐도 내일이 없는 삶을 사는 것 같아서 용사한테 도움이 되기는커녕 방해만 될 거 같단 말이지. 물론 케르츠도 용사에게 영향을 받아 조금 성격이 유해진다면 좋은 일이긴 하겠지만, 가뜩이나 자기 생각에 혼란을 겪고 있을 용사님에게 그런 역할까지 바랄 수는 없는 노릇이지.

어쨌든, 내 말을 듣고 기운을 얻었는지 용사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나조차도 괜히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아서, 나는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 이제 기운 차려서 하넨 씨와 케르츠 씨가 있는 곳으로 가요. 적어도 지금은, 아무도 용사님이 없어지는 걸 원하지 않는다고요. 네?”

“고마워요. 나, 상인이 좋아요!”

“좋아요?”

“네. 상인의 말이 좋아요. 상인은 좋은 사람이에요.”

용사는 나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까 전에 비해 기력을 꽤 되찾은 모습이었다. 역시 저 사람은 웃는 모습이 어울린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고개를 들어 케르츠와 하넨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슬슬 저 사람들과 합류해야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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