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재료 찾아 삼만 리
모닥불이 있던 곳으로 돌아가 보니 용사가 잠에서 깨어 있었다.
잠든 케르츠에게 무릎베개를 해 준 채로 정체불명의 자장가를 흥얼거리던 용사는, 나와 하넨을 발견하자마자 눈을 빛내며 반가워했다. 표정을 보아하니 푹 자고 일어나서 개운한 모양이었다. 시간으로 따지자면 그렇게 오래 자지도 않았을 텐데, 용사라서 원래 회복력이 보통 사람보다 빠른 걸까?
“오늘은 다들 여기저기 왔다 갔다 하네요.”
“응?”
“케르츠도 볼일이 있어서 어딘가에 갔다가 방금 왔어요. 지금은 깊이 자고 있고요.”
용사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케르츠의 이마를 쓰다듬어 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사람은, 케르츠의 볼일과 우리의 볼일이 거의 일치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케르츠는 정말로 깊이 잠들어 있었다. 아무래도 모닥불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쓰러지듯 잠든 것 같았다. 피로에 찌든 얼굴을 보아하니 당분간 깰 것 같지도 않았다.
“케르츠가 정말로 피곤해 보여요. 괜찮은 걸까요?”
“괜찮을 거야. 그, 뭐냐……. 우리와 만나기 전에 광증에 시달린 적 있잖아. 그래서 피로가 엄청 쌓였나 봐. 좀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지겠지. 그나저나 너는 다 잤어?”
“다 잤어요. 이제는 하나도 안 피곤해요. 자고 일어났더니 다들 없어졌길래 자다가 길을 잃은 줄 알았어요.”
“자다가 길을 잃는 건 또 뭐야? 네가 무슨 몽유병도 아니고.”
“그, 용사님. 길을 잃은 게 아니라 일행을 잃은 거라고 표현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그런가요? 저는 모르는 게 많아서 정확한 표현을 쓰기가 힘들어요. 알려 줘서 고마워요.”
용사는 하넨의 이야기에 갸우뚱하다가 내 설명을 듣고서야 어린애처럼 기뻐했다. 하넨과 케르츠가 무슨 언쟁을 벌였는지, 나와 하넨이 무슨 비밀 약속을 했는지도 전혀 모르는 순진한 모습이었다. 내가 괜히 묘한 기분을 느끼며 용사의 시선을 슬쩍 피하자, 하넨이 흠흠 헛기침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어쨌든 난 상인하고 거래 좀 할게. 그 동안 케르츠가 잘 자나 안 자나 지켜봐 줘.”
“케르츠는 굳이 옆에서 지켜보지 않아도 잘 자는데요?”
“혹시 이 녀석이 악몽이라도 꾸면 달래 줄 사람이 필요하잖아. 지금까지 네가 했던 것처럼 자장가도 불러 주고, 머리도 쓰다듬어 주고 안아서 달래기도 하고……. 어쨌든 그래야 해.”
“그러면 케르츠에게 도움이 될까요?”
“물론이지. 분명히 도움이 될 거야. 맞다, 혹시 혼자 하기 벅차면 이 솜뭉치 녀석이랑 같이 해도 돼.”
하넨은 허락도 받지 않은 채 인형의 뒷덜미를 잡아 용사에게 건넸고, 용사는 인형이 도망갈 틈도 주지 않은 채 재빨리 인형을 받아 들어선 볼을 비비기 시작했다.
인형은 [내가 볼 때 인형은 도움을 원하는 것 같다. 구호 요청을 보내고 있다.] 따위의 소리를 하며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했지만 나는 슬쩍 모른 척했다. 용사가 저렇게나 기뻐하니 굳이 뺏고 싶지 않은 건 둘째치더라도, 인형 녀석이 부지런히 재롱을 떨며 용사의 관심을 끌어 줘야 나와 하넨이 원활하게 거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좌판을 펼치는 사이 하넨은 용사에게서 영혼 조각이 든 병을 빌렸다. 사실 오늘의 좌판은 평소에 비해 좀 부실한 점이 없잖아 있었다. 회복초나 소독초, 진통용 약초 정도의 간소한 물건밖에 없는 걸로도 모자라 그나마도 죄다 피범벅이었던 탓이다. 하지만 하넨은 투덜거리지도 않은 채 물건을 척척 골랐다.
평소에 그랬듯이 진통용 약초와 회복초를 산 하넨은, 원래 주던 것의 두 배가 훌쩍 넘는 양의 영혼 조각을 슬쩍 내게 찔러 넣어 주었다. 일기장 자체의 대가였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부족한 감이 좀 있지만, 앞으로 재료를 교환하면서 계속 받으면 되니까 큰 문제는 없을 거다. 한꺼번에 영혼 조각을 잔뜩 지출하면 케르츠가 조금쯤 의심할지도 모르고…….
“케르츠한테는 정신적 위자료를 줬다고 둘러댈게. 실제로 너, 광증에 걸린 상태에서 엄청나게 두들겨 맞았다며. 거기에 대한 보상으로 조금 더 얹어 줬다고 핑계 대지 뭐.”
“잠깐만요. 생각해 보니 핑계가 아니라 진짜로 위자료 주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벼룩의 간을 털어라, 이 나쁜 자식아. 남은 영혼 조각을 다 넘기면 우리는 뭘로 버티라고?”
대체 누가 누구더러 나쁘다는 건지. 나야말로 저 사람들 때문에 괜한 고생을 하고 있는데. 나는 입을 삐죽거리며 영혼 조각을 받아 유리병에 집어넣었다. 어쩔 수 없지, 지금은 저 사람들의 사정도 별로 좋지 않으니 나중에 두고두고 뜯어 가는 수밖에.
케르츠는 잘 자고 있었고, 용사는 아이 돌보는 보모를 흉내 내며 케르츠를 보살피는 데에 정신이 팔려 있었으므로 나와 하넨의 거래는 별 탈 없이 무사히 성사되었다.
“이번엔 살 만한 게 별로 없었네. 다음번에는 좋은 물건을 가져와 줘.”
“알았어요. 하넨 씨가 좋아할 만한 물건을 찾아올게요.”
나는 하넨과 슬쩍 눈빛 교환을 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하넨이 아까 적어 줬던 목록의 그 물건들을 가져오겠다는 뜻이다. 과연 이 미궁 속에서 그 물건들을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인형이 별 말 없이 담담하게 구는 걸 보면 의외로 가능성이 있을지도 모른다. 못 찾겠으면 못 찾는다고 진작 말을 했겠지.
나는 인형 쪽을 흘끔 바라보았다. 녀석은 용사의 품 안에서 꿈틀거리며 나름대로 잘 놀고 있었다. 물론 본인은 용사의 괴롭힘과 폭거(?)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필사적인 몸부림을 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인형과 용사는 제법 잘 어울려 보였다.
다만, 신경 쓰이는 점이 하나 있었는데. 어쩐지 용사가 인형을 붙든 채 계속 말을 걸고 있는 거 같아서…….
“있잖아요, 상인과 하넨은 어디에 다녀왔어요?”
[…….]
“하넨이 상인과 무슨 이야기를 했어요?”
[…….]
“비밀 이야기예요? 둘만이 간직하는 이야기?”
저 용사님, 대체 인형을 붙들고 뭘 질문하는 거야? 인형이 뭐라고 대답하는지, 아니, 애초에 대답을 하고 있는지조차 의문이긴 했지만, 어쨌든 용사는 제법 집요하게 질문을 거듭하고 있었다.
설마 인형 녀석이 하넨과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을 냅다 불어 버릴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불안해졌다. 비밀 이야기라니, 혹시 용사가 무언가를 눈치챈 건 아니겠지? 아니면 케르츠가 자기 전에 용사에게 무슨 말을 했거나……?
내가 조금 떨떠름한 표정으로 인형을 바라보자, 인형은 뭉뚝한 팔 끝으로 용사의 손을 툭툭 치더니 뭐라고 손짓을 했다.
“응, 그렇게 친하지는 않아요?”
[…….]
“아니에요. 하넨을 좋아해요. 예쁘고, 머리카락이 반짝거리고, 나한테 잘해 줘요. 저는 하넨과 친해요.”
[…….]
“하넨과 친하지만, 상인하고도 친해지고 싶어요. 아직은 친하지 못해서.”
[…….]
“다행이다. 하넨하고도, 케르츠하고도 그렇게까지 친하지는 않아요?”
다행히도 용사는 나와 하넨 사이에 있었던 대화에 대해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용사의 표정에는 한 점의 의구심조차 없었다. 그저 뭐가 그렇게 좋은지 생글생글 웃기만 할 뿐이었다.
[애초에 용사는 그 비밀 대화에 대해 물어본 게 아니다. 완전히 다른 문제에 대해 묻고 있다.]
인형은 내 표정이 조금 한심해 보였는지 간단한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그런가? 뭐, 다행이긴 하지만 그럼 구체적으로 뭐에 대해 질문한 거지? 어쩌다가 저런 이야기가 나오는 거야?
하긴, 용사의 표정을 잘 살펴보니 단순한 즐거움뿐만이 아닌 노골적인 안도감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구체적으로 뭐 때문에 안심했는지 몰라서 조금은 어리둥절하지만 말이다.
‘저 용사님, 혹시 소외감이라도 느꼈던 건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하긴, 자고 일어나니 동료들은 다 사라지고 혼자 남았다면 소외감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동료들이 자기만 내버려 두고 사라진 건 아닐까, 혹시 자기를 싫어하는 건 아닐까, 뭐 그런 종류의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대도 이상하지는 않다.
어쩌면, 동료들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언데드 상인을 자기보다 더 좋아하는 건 아닐까 걱정했을지도 모르지. 용사에게 있어서 하넨과 케르츠는 사실상 유일한 동료나 마찬가지인데, 그런 동료를 갑자기 나타난 나한테 빼앗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면 조금 우울했을지도 모르겠네.
물론 실제로는 용사의 착각에 불과하겠지만 말이다. 하넨과 케르츠에게 있어 나는 결국 외부인에 불과하고, 두 사람 모두 용사와 나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당연하다는 듯 용사를 고를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빙긋 웃고 있는데, 문득 용사가 무언가를 생각해 낸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있잖아요, 있잖아요.”
[…….]
“하넨, 혹시 상인을 만졌어요?”
잠깐만, 저건 대체 어떤 대화에서 나온 맥락이야?! 용사의 저 질문에는 나뿐만 아니라 하넨조차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용사는 눈을 빛내며 하넨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하넨의 손에 들린 유리병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넨은 괜히 찔끔했는지 유리병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저, 저기요? 무슨 그런 이상한 말씀을.”
“어쩌면 만졌을지도 몰라요. 상인은 서늘하고 말랑말랑해서 만지기 좋으니까. 어쩌면 뽀뽀라도……?”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용사님.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입을 벌렸다. 하넨과 나 사이에 나눈 대화가 들통나지 않은 것까지는 좋은데, 어쩐지 대화가 완전히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기분이었다.
아니, 애초에 저 용사님. 설마 처음부터 그게 신경 쓰였던 거야? 하넨이 몰래 날 어디로 데려가서 만졌는지 아닌지 하는 게? 도무지 어떻게 하면 그런 식으로 생각이 흘러가는지 이해하기가 힘든데. 설마 내가 저 용사님의 버릇을 좀 이상하게 들여 놓은 거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아마 하넨도 나와 비슷한 심경인 모양이었다. 그는 한숨을 푹 쉬더니 용사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듯 쓰다듬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멍청한 놈아. 내가 너냐?”
“그래도, 혹시.”
“혹시는 무슨 혹시야. 애초에 말이지, 이 상인이 무슨 장난감 인형도 아니고. 원래 만지거나 뽀뽀하는 건 아무한테나 막 하는 게 아니야.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게 아닌 이상, 엄청나게 좋아하는 사람한테만 하는 거라고. 알겠냐?”
“엄청나게 좋아하는 사람? 그러면 하넨은 상인하고 뽀뽀 안 해요?”
“안 해. 난 저 녀석을 그렇게까지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넨은 묘하게 거들먹거리며 용사에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성교육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정론 그 자체였지만, 하넨의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묘하게 우스웠다. 마치 인형 녀석이 거들먹거리거나 뽐낼 때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달까.
하넨 저 사람, 제법 잘난 척하고는 있지만……. 애초에 연애 경험이 있기는 한 거야? 연애는커녕 누군가와 손 한 번도 못 잡아 본 거 같은데.
“그리고 말이지, 엄청 좋아한다는 건 어느 한쪽에만 해당하는 게 아니야. 둘 다 서로를 좋아해야 해.”
“둘 다요?”
“그래. 네가 저 녀석을 엄청 좋아하더라도, 저 녀석이 널 안 좋아하면 말짱 꽝이란 소리야. 알겠냐?”
“상인, 저 안 좋아해요? 혹시 저 싫어해요?”
“아니, 싫어하지야 않겠지만……. 뽀뽀할 만큼 좋아하지는 않을지도 모르지.”
용사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무룩해졌다. 확실히 하넨의 말이 맞긴 했지만, 내가 뽀뽀씩이나 할 정도로 용사를 좋아하는 건 아니긴 하지만……. 용사의 풀죽은 표정을 보고 있노라니 기분이 좀 이상해졌다.
음, 그러니까. 저 녀석이 실제로 어린애라는 점을 고려하면 굳이 기를 죽이고 싶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겉껍데기는 멀쩡한 성인 남성인 녀석과 뽀뽀를 하며 즐거워할 정도는 아니고……. 저걸 어떻게 달래야 하나, 내심 고민하면서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데.
“그럼, 어떻게 하면 상인이 좋아해요?”
반짝, 일순간 용사의 눈빛이 엄청난 기세로 빛났다. 이거 좀 불길한데. 지금의 저 용사님, 케르츠에게 무릎베개를 해 주고 있지 않았더라면 당장에라도 이쪽으로 다가올 기세잖아. 어린애라서 그런가, 무언가에 한번 꽂히면 묘하게 집착이 강한 것 같았다. 마치 손에 닿을락 말락 한 장난감이라도 보는 듯한 모습이잖아.
나는 슬금슬금 좌판을 접고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인형 또한 내 생각을 눈치챈 듯 용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슬그머니 이쪽으로 다가왔다. 역시 이런 면에서는 쿵짝이 잘 맞는단 말이지. 이번에 붙잡혔다간 나나 인형이나 용사에게 엄청 시달릴 게 분명하다고. 상인이 뭘 좋아하는지 알아야겠다느니 뭐라느니 하면서.
“영혼 조각을 주면 좋아해요?”
“아니, 그건 영혼 조각을 좋아하는 거지 널 좋아하는 게 아니잖아. 애초에 얼마 남지도 않은 영혼 조각을 그런 데에 쓰지 말라고.”
“만지게 해 주면 좋아해요? 볼이라든지, 뺨이라든지.”
“저 녀석이 너냐? 그리고 볼이나 뺨이나 그게 그거잖아!”
“하지만……. 어, 상인이 도망가요!”
“도망 아니거든요? 볼일 끝나서 가는 것뿐이거든요? 팔 거 다 팔았다고요!”
인형을 한쪽 어깨에 얹고, 빈 자루를 나머지 한쪽 어깨에 들쳐 멘 채 자리에서 일어나자 용사가 그제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일단 도망가자. 내버려 두면 하넨이 알아서 잘 달래 주겠지. 아니면 좀 있다가 케르츠가 일어나서 달래 주거나.
어쨌든 지금 여기에서 밍기적거린다면 용사에게 붙잡혀서 귀찮은 질문 공세를 받을 게 분명하다. 운 나쁘면 볼을 내어 줘야 할지도 모르고.
“하지만 아직 못 물어본 게 많은데! 있잖아요, 좋아하는 게 뭐예요?”
“어, 제가 좀 생각해 보고 나중에 답변해 드릴게요!”
좀 앞뒤가 안 맞는 답변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나는 용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쫓아오기 전에 부리나케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깨에 얹힌 인형은 작별 인사라도 하듯 내 등 뒤로 손을 흔들어 보였다. 간만의 이별이었다.
* * *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복도를 걸었다. 용사 일행과 헤어져 혼자 자유롭게 돌아다니고 있노라니 묘한 홀가분함이 느껴졌다. 물론 지금도 인형 녀석은 내 어깨에 걸터앉은 채 하넨에게 받은 쪽지를 읽고 있으니, 엄밀히 말하자면 혼자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그런 사소한 문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내가 용사 일행을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그 사람들과 같이 행동하다 보면 저도 모르게 괜히 긴장하게 된단 말이지. 차라리 인형과 단둘이 있는 게 심적으로는 훨씬 편하다.
‘이제 영혼 조각도 넉넉하게 얻었으니까, 당분간은 그 사람들과 떨어져 지내도 큰 문제가 없을 거야.’
나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영혼 조각이 든 유리병을 꺼냈다. 비록 일기장의 값이나 케르츠에게 두들겨 맞은(?) 위자료를 다 받아 내지는 못했으나, 그래도 하넨에게 받은 영혼 조각은 유리병을 제법 채울 만큼 많았다.
이 정도면 당분간은 영혼 조각 걱정 없이 여기저기 잘 돌아다닐 수 있겠다. 몸이 썩고 허물어져 움직임에 불편함을 느끼는 일은 없겠지.
[하넨이 요구한 재료를 모아서 가져다주면 더 많은 영혼 조각을 얻을 수 있다.]
“그거야 그렇겠네. 그나저나 그 재료들……. 혹시 이 미궁에서 구하지 못하는 재료가 섞여 있다던가 하면 곤란한데. 미궁 안에서 다 모을 수는 있는 거겠지?”
[인형은 모르는 일이다.]
“뭐라고? 야, 이 자식아. 네가 그렇게 말하면 어떻게 해? 난 너만 믿고 있었는데!”
[애초에 아무 생각 없이 덥석 약속을 받아들인 건 내 쪽이다. 인형은 그저 가만히 있었을 뿐이다. 생각해 보면 나도 참 무책임했다. 앞으로는 조금 더 책임감 있는 언데드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아니, 이 자식이. 그걸 이제야 말하면 어떻게 해?! 내가 어이가 없어져 입을 떡 벌리든 말든, 인형은 다리를 까닥까닥 흔들며 하넨의 쪽지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쩐지 아까부터 묘하게 얌전하다 했더니, 설마 하넨의 쪽지 중에서 어떤 재료를 얻을 수 있고 어떤 걸 얻을 수 없는지 분간하느라 저러고 있었던 거야?
혹시 못 얻는 재료가 있으면 어떻게 하지? 실제로는 나오지도 않는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입을 다물고 있는데, 인형이 쪽지를 꼬깃꼬깃 접어 자루에 집어넣었다. 태평한 태도였다.
[못 한다고 말한 적은 없다. 지금 내 어깨에 앉아 있는 위대하고 대단한 인형님의 도움을 받는다면 분명 모든 재료를 모을 수 있을 것이다.]
“……야.”
[하넨이 요구하는 모든 재료들은 미궁 속 어딘가에서 얻을 수 있다. 애초에 하넨 또한 미궁 속 사정을 감안해 가며 재료 목록을 작성했을 것이다. 몇몇 재료들은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위치에 있고, 몇몇 재료들을 얻기 위해서는 험난한 여정이 필요하겠지만, 그래도 인형의 도움을 받는다면 문제는 없다.]
“그럼 처음부터 그렇게 말해야지! 간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이 자식, 꼭 이렇게 얄밉게 굴 때가 있다니까! 나는 인형의 머리에 딱밤을 세게 한 대 먹였다. 인형은 내 어깨에서 툭 떨어져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지만,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내 어깨 위로 기어 올라왔다. 나는 녀석을 다시 때려 볼까 하다가 그냥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괜히 내 손만 아플 게 분명하다. 어차피 통각 따위 있지도 않긴 하지만.
[일단은 모으기 쉬운 재료부터 수집해 보자. 대부분의 재료들은 이번 층이나 다음 층에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나머지 재료들 또한 미궁의 중앙에 도착하기 전에는 다 모을 수 있다.]
그거참 다행이네. 나는 인형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어쨌든 앞으로의 계획은 얼추 잡힌 셈이다. 지금까지 해 왔던 것처럼 팔 만한 물건을 찾되, 일기장을 복원시키기 위한 마법의 재료들도 겸사겸사 모아 하넨에게 가져다주면 된다. 그리고 하넨이 일기장을 복원시키고 나면, 이 미궁의 비밀 또한 알 수 있을지도…….
‘이 미궁의 비밀을 알고 나면, 그다음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갑자기 머릿속이 멍해졌다. 수백 년 전 미궁의 중심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말쿠테른의 성기사들은 과연 무엇 때문에 다른 이들을 배신했는지, 그걸 알고 나면―그다음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사고가 불투명해지고 머릿속이 어지러워졌다.
‘으, 이거 약간 고질병이란 말이지.’
나는 끙끙거리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그러니까 이건, ‘현재 이 상황’과 큰 관련이 없는 문제에 대해 생각할 때면 종종 생기는 증상이었다. 아마 지금쯤 죽거나 크게 다쳤을 가족들과의 추억을 떠올리는 등 과거와 관련된 기억을 떠올린다든지. 미궁의 중심에 도달해 악의 근원을 파괴하고 난 후의 일, 그러니까 미래에 대한 가정을 한다든지.
그런 류의 문제에 대해 생각할 때면 늘 이렇게 머릿속에 안개가 낀 기분을 느끼곤 했다. 예전에 인형이 해 준 설명에 따르면 ‘인간성의 상실’에 따라오는 일종의 부작용이라고 하던데, 오히려 내가 느끼기에는 일종의 자기방어 작용 같았다. 일부러 깊은 생각을 하지 않음으로써 좌절감과 우울감을 줄이는 효과도 있는 것 같아.
‘어찌 보면 이쪽이 더 현명한 걸지도 모르지. 지금 당장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고민해서 뭐 해?’
어차피 인생이란 한 치 앞도 모르는 거다. 아무리 열심히 고민해 봤자 예상 밖의 일이 벌어지면 말짱 도루묵인데 뭘. 일기장의 내용이 밝을 수도 있고 어두울 수도 있겠지만, 일기장의 전문을 보지 않은 상태에서는 결국 무슨 추측을 하든 소용이 없다.
일단, 머리가 어지러우니 조금 다른 방향으로 사고의 흐름을 돌려 보자. 되도록이면 현재 상황과 밀접한 생각을 하는 거야.
“그나저나 용사 녀석, 나에 대한 집착이 점점 늘고 있지 않아?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를 만지기 좋은 장난감 정도로만 취급했던 것 같은데, 요즘은…….”
[집착이라기보다는 애착이라는 표현이 더 적합하다. 아마 용사는 나에게 애착을 가지기 시작한 모양이다.]
“애착이라고? 집착이나 애착이나 그게 그거 아니야?”
[어린아이에게는 애착의 대상이 필요하다. 건전한 애착 관계는 정신적인 성장에 큰 도움이 된다.]
다행히도 생각의 흐름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내가 방금 전까지 한 생각에 대해 아는지 모르는지, 인형은 가정 시간에나 배울 법한 잡다한 설명을 태연하게 늘어놓고 있었다. 애착이라, 신기한 소리를 하고 있네. 나는 그 용사님의 가족도 동료도 아닌데.
[나는 용사의 성장에 도움을 주고 있는 셈이다.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그렇다면야 다행이지만. 하긴, 감정이 풍부해지는 건 좋은 일이겠지? 내 입장에선 좀 귀찮겠지만, 용사 녀석이 건강한 감정을 배울 수 있다면야…….”
[감정이 풍부해지는 건 좋은 일이다. 본래 용사는 특정한 감정을 느낄 수 없다.]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인형의 이상한 이야기에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용사가 감정을 느낄 수 없다니. 그런 것치고는 웃기도 잘하고 종종 시무룩해지기도 하던데. 호기심도 제법 많아 보이고.
[용사는 본래 애착을 가질 수 없다. 용사는 본래 편견을 가질 수 없다. 용사는 본래 탐욕스러울 수 없다.]
“뭐야, 그게. 신전에서 용사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뜻이야?”
[그렇다. 신전에서는 용사가 완성된 인간이기를 바랐다. 마치 신이 그렇듯이.]
“하지만, 지금의 용사는 별로 그래 보이지 않던데……. 게다가 방금 네 입으로 말했잖아. 애착을 가지는 건 정신적인 성장에 도움이 된다고. 앞뒤가 안 맞지 않아?”
[……어쨌든 나는 잘하고 있다. 걱정할 것 없다.]
인형은 할 말이 궁해졌는지 어물쩍 말을 돌렸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잘하고 있다니 그러려니 해야지. 신전에서 말하는 ‘완성’이라는 개념과, 이 인형이 말하는 ‘성장’이라는 개념이 다르다는 건 대충 알겠다. 그리고 나는 완성보다는 성장 쪽이 더 마음에 든다.
그나저나 조금 우스꽝스러운 일이었다. 인형의 말에 따르면 나는 용사에게 애착을 가르쳐 주고 용사를 성장시키고 있다고 하지만, 정작 지금의 나는 애착이니 뭐니 하는 감정이 희미하단 말이지. 물론 감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어딘가 미지근하달까. 내 행동에 별다른 영향조차 주지 않을 정도로 허술하고 밍밍한 감정이다.
[나도 원한다면 언제든 애착을 가질 수 있다. 영혼 조각은 넉넉하다.]
“애착만 가지는 게 아니라서 문제지. 막말로 말이야, 내가 제대로 된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면 케르츠에게 어떤 평가를 할 것 같아? 그 작자가 내 몸을 걸레짝으로 만들어 놓은 게 벌써 두 번째인데.”
[하지만, 너무 오랫동안 인간성이 결여되어 있으면 인격과 사고방식에 확연히 변화가 생긴다.]
괜히 흠칫했다. 인형은 속을 알 수 없는 묘한 얼굴―아니, 원래 얼굴이랄 것조차 없긴 하지만, 어쨌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저 녀석이 내 속을 읽기라도 한 걸까? 아니다, 애초에 저 녀석은 내가 무슨 생각을 하든 다 알고 있었지. 어쩌면 방금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 알고도 모른 척을 해 준 걸지도 모른다.
[상황에 휩쓸려 관성에 따라 움직이기 쉽다는 뜻이다. 스스로의 판단에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니라.]
“…….”
[결국에는 스스로 판단하는 능력을 상실하고, 주변 상황에 대한 의구심조차 가지지 않게 된다. 좋지 않은 일이다.]
“알았어. 나중에 여유가 되면 해 볼게. 적어도 하루쯤 아무것도 안 하고 처박혀서 질질 짤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면 말이야.”
나도 어물쩍 말을 돌리고는 고개를 들었다. 한참 걷다 보니 다음 광장이 보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미처럼 생긴 사념이 자리 잡고 있었던 광장이지만, 그 사념은 광증에 사로잡힌 케르츠의 활약 아닌 활약으로 죽어 없어진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이 광장을 자세히 조사해 보지 못했지. 나는 광장을 한 바퀴 돌며 구석진 곳을 살폈고, 벽 한편에 생긴 균열에서 여러 종류의 약초가 자라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 약초는 평범한 회복초보다 열세 배쯤 더 효과가 좋다.]
“열세 배씩이나? 그거 좋네. 하넨 씨한테 비싸게 팔아야지.”
[하지만 부작용이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너무 많이 먹으면 착란 현상이 일어난다.]
“착란 현상?”
[자신의 신체에 새로운 부위가 생겨났다고 믿는 강박증에 시달리게 된다. 이를 테면 날개라든지, 꼬리라든지, 동물 귀라든지.]
“……뭐야, 그게.”
[있지도 않은 날개를 믿고 비행을 시도하거나, 청각이 좋아졌다고 착각한 나머지 환청을 진짜 소리로 인식한다든지, 다치지도 않았는데 신체 일부가 잘려 나간 듯한 환상통에 시달리는 등 이런저런 정신적 문제가 생긴다.]
흐음, 그렇구나. 나는 성의 없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약초를 뽑아 자루에 넣었다. 어차피 내가 먹을 게 아니니 아무래도 좋다. 하넨에게 약초에 대한 지식이 있을 테니 알아서 적당히 복용하겠지.
나는 용사 일행에게 동물 귀나 꼬리가 달린다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실제로 귀나 꼬리를 달아 주는 약초가 아니잖아.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내가 엉뚱한 생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이 인형은 그 옆의 약초를 가리켜 보였다.
[저 약초의 즙은 먹는 이의 시간을 되돌린다. 조금만 먹어도 노인을 어린아이로 만들어 줄 정도로 효과가 좋다.]
“어, 진짜? 이거 완전 불로장생초네.”
[장생이라는 표현에는 어폐가 있다. 시간을 되돌리는 과정을 견뎌 내지 못하고 육체가 죽어 버리기 때문이다. 죽은 사람의 시체는 생전에 비해 훨씬 더 어려져 있다고 한다.]
“뭐야, 그러면 의미가 없잖아.”
[죽지 않는 존재에게는 의미가 있다. 이를테면, 무생물이라든지.]
설마 나더러 이걸 먹으란 건가? 언데드가 된 것도 서러운데 갓난아기까지 되라고? 어이가 없어 인형을 바라보던 나는, 인형이 자루에서 꼬깃꼬깃한 쪽지를 꺼내는 걸 보고서야 녀석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진작 좀 말하지!
“아, 일기장이구나.”
[그렇다. 물론 일기장 또한 시간을 되돌리는 과정을 견디지 못하고 훼손될 가능성이 있지만, 하넨이 다른 약초를 섞어서 마법적 처치를 한다면 일기장의 훼손을 막을 수 있다.]
일기장의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 내용을 판독할 수도 있겠지. 무슨 소리인지 알겠다. 인형은 자루에서 작은 연필을 꺼내더니 쪽지의 목록 중 하나에 크게 x자 표시를 했다. 마치 장보기 목록을 없애는 듯한 기분이어서 꽤 재미있었다.
나와 인형은 그 이후로도 부지런히 광장을 뒤지며 재료를 찾았다. 인형의 말에 따르면 이번 층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는 두 가지, 다음 층에서 얻을 수 있는 재료는 일곱 가지라고 한다. 나머지 재료는 그다음 층이나 다다음 층에 드문드문 분포해 있다고 들었다.
두 번째 재료는 이번 층의 마지막 광장에 있었다. 새 모양의 사념이 몸을 웅크린 곳, 굳이 표현하자면 둥지 비슷한 곳에 작은 알 같은 돌이 하나 있었다. 사념은 내가 그 알을 가져가든 말든 별로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이건 무슨 알이야? 뭐, 생명과 관련된 마법이라도 걸려 있나?”
[평범한 절구다.]
“응?”
[알을 반으로 가르면 절구로 쓸 수 있다. 안은 텅 비어 있다.]
“……아니, 이걸 절구로 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는데?”
[화학 물질 및 마법 물질에 강하다. 어지간한 혼합물이 묻어도 녹지 않는다. 위험한 약품을 혼합할 때 매우 유용하다.]
“그, 그래? 잘은 모르겠지만……. 이것도 일단 재료는 재료인 거지?”
인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쪽지를 들여다보더니, ‘약초의 영향을 받지 않는 튼튼한 재질의 용기’라는 문장에 X 표시를 했다. 과연 하넨이 원하는 용기가 이 절구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중에 하넨 본인에게 보여 줘서 확인해 보면 되겠지.
어쨌든 중요한 건 다음 층이다. 다음 층에서는 무려 일곱 개의 재료를 모을 수 있다고 하는데, 인형의 말을 듣자 하니 운이 나쁘면 재료를 못 보고 놓칠 수도 있으며 어떤 재료들은 얻기가 매우 힘들다고 한다. 되도록이면 하나도 놓치지 않고 다 모을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다음 층은 그저 돌파하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지는 곳이다. 전략을 잘 짜서 움직여 보자.]
“어떤 곳이길래?”
[보면 안다.]
저 녀석이 저런 소리를 할 때면 항상 예상치도 못한 일이 벌어지던데. 나는 조금 떨떠름한 기분을 느끼며 계단을 내려갔다. 돌파하는 것만으로도 진이 빠지다니, 설마 다양한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뜻인가? 예전 층에도 함정 정도는 있었는데…….
하지만, 다음 층에 도착한 순간 나는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이건 단순히 광장에 함정이 많은 정도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게 뭐야.”
[이번 층은 하나의 광장으로 통합되어 있다. 이 광장을 통과하기만 하면 다음 층으로 이동할 수 있으니, 잘만 움직인다면 매우 빠르게 돌파할 수도 있다.]
개소리하지 마. 이걸 어떻게 하면 빠르게 돌파한다는 거야? 나는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지도 못한 채 멍하니 광장을 바라보았다. 천장도, 바닥도, 저 너머의 벽조차도 너무 멀어서 보이지 않을 정도의―그야말로 엄청난 규모였다. 마치 사고를 당해 폭발한 중세식 우주 정거장에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
[중세에는 우주 정거장이 없다.]
“알아, 이 솜뭉치 자식아. 그냥 비유가 그렇단 거지.”
반쯤 허물어져 나가 내부가 훤히 드러난 방과 복도가 허공에 둥둥 떠다닌다면, 그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우주 정거장을 연상할 수도 있지 않나? 나는 차마 광장 안으로 발을 들이지 못하고 계단 앞 복도에 선 채 거대 광장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런 광경은 솔직히 영화 속에서도 보기 힘들 텐데. SF풍 구조물이 허공에서 둥둥 떠다니는 것도 아니고, 투박하기 이를 데 없는 돌벽으로 이루어진 구조물이 우주 쓰레기처럼 고요히 허공에 떠다니는 광경은 정말이지 사람의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천장도 바닥도 워낙 아득히 먼 곳에 있다 보니 광장 자체가 하나의 작은 우주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니, 이 광장 말이지. 건축학적으로 가능한 구조긴 한 거야? 위층에서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계단의 높이를 생각해 보면 천장이 저렇게 높은 건 말이 안 되는데.”
[사소한 문제는 따지지 말자. 살다 보면 바깥보다 안이 더 넓은 공간을 만날 때도 있는 법이다.]
“설명하기 귀찮아서 그런 거 아니야? 애초에, 난 살아 있지도 않거든?”
[그냥 비유가 그렇다는 거다. 어쨌든, 이 광장에는 공간 왜곡을 비롯한 다양한 마법이 걸려 있다. 바깥보다 안이 더 넓은 것도 그 탓이다.]
나는 인형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흠칫 놀랐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발이 바닥에서 몇 센티미터쯤 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내 어깨에 앉아 있던 인형 또한 초보 우주비행사처럼 기묘한 자세를 한 채 허공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어쩌면 이 광장에는 아예 중력이 존재하지 않는 걸지도 모른다. 이것도 인형이 말한 마법의 일종일까? 잘못하다간 벽에 닿지도 못한 채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는 꼴이 될 것 같아서, 나는 머뭇머뭇 한 손으로 벽을 붙잡았다. 다행히도 벽은 제법 표면이 거친 데다가 아슬아슬하게 손가락을 박아 넣을 수 있는 틈새까지 있어서 붙잡기 어렵지는 않았다.
잘만 하면 벽을 붙잡은 채 광장 반대편까지 이동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런 식으로 이동하려면 최소한 일주일쯤은 걸릴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어쨌든 안전한 방법을 선택하자면 그런 방법도 있기는 있단 뜻이다.
“뭐, 적어도 추락사할 걱정은 없어서 다행이네.”
[이론적으로는 추락사할 수 있다. 아니, 오히려 추락사가 제일 위험하다.]
“추락사가 제일 위험하다니 그게 소리야? 이 광장은 무중력 공간이잖아. 그냥 벽에 붙어서 조심조심 기어가면 광장 반대편에 도착할 수 있는 거 아니야?”
[나의 생각에는 일견 합리적인 부분이 있지만, 아쉽게도 이 광장의 출구는 광장 반대편에 있지 않다. 정확히는 광장의 정중앙에 있다.]
“정중앙이라고? 잠깐만, 설마……. 허공에 떠 있다는 거야?”
인형은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나에게 팔을 뻗었다. 아무래도 슬슬 우주 비행사 놀이가 질린 모양이었으므로, 나는 인형의 팔을 잡아 내 어깨에 적당히 앉혀 주었다. 녀석은 내 옷자락을 꼭 붙들고 자기 몸을 고정시켰다.
그나저나, 정중앙이라……. 그렇다면 벽에 달라붙어 이동하는 전략은 사실상 쓸모가 없다는 뜻이다. 아무리 벽에 달라붙어 움직이더라도 광장의 주변부만을 맴돌 뿐, 그 방법으로는 광장 중심에 도달할 수 없을 테니까.
나는 허공에 떠 있는 방과 복도들을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어쩌면 저 복도와 방은 장식용이 아니라, 광장의 중앙으로 향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는 걸지도 모른다. 아마 어떤 식으로든 추진력을 얻어 방과 복도 사이를 도약해야 광장의 정중앙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지만, 워낙 거리가 멀다 보니 평범하게 점프하는 걸로는 충분한 추진력을 얻지 못할 텐데……. 혹시 이렇다 할 방법이랄 게 있나?
[어쩌면 해답은 의외로 가까운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주변을 잘 살펴보자.]
나는 인형의 말에 고개를 갸웃하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주변이라고 해 봤자 딱히 뭐 보이는 게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깎아지른 듯한 절벽 정도가 보일 뿐인데……. 나는 인형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 보았지만 녀석은 태평하게 내 어깨에 달라붙어 있기만 했다. 이 정도는 나 혼자 능력껏 해 보라는 뜻인가.
‘설마 계단을 조사해야 하나?’
그러고 보니 계단을 내려오면서 주변을 주의 깊게 살피지는 않았다. 나는 몸을 돌려 계단 근처를 뒤진 끝에 겨우 답을 얻어 냈다. 처음에는 너무 어두워서 보지 못했는데, 잘 보니 계단 쪽의 벽에 네모 모양으로 파인 공간이 있고 그 안에 커다란 나무 궤짝이 들어 있었다.
실제로 궤짝은 꽤 무거워서 혼자 들기 버거웠지만, 무중력 상태가 적용되는 곳까지 오니 궤짝의 무게조차 느껴지지 않아 큰 무리 없이 옮길 수 있었다. 나는 궤짝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했다. 궤짝 안에는 묘한 물건들이 있었다. 모양은 똑같고 색만 다른, 음울하게 빛나는 수십 개의 보석들과…….
“펜던트?”
[로켓이다. 뚜껑을 열면 안에 보석을 꽂을 수 있는 공간이 보인다.]
펜던트나 로켓이나 그게 그거 아닌가? 어쨌든, 거의 보석의 수만큼이나 많은 펜던트들이 궤짝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원래는 제법 비싼 물건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잔뜩 녹슬고 색이 변해서 낡고 허름해 보였다. 금전적 가치는 아무래도 좋은데, 마법적인 가치를 따지자면 어떨까?
나는 인형의 말대로 펜던트의 뚜껑을 열어 보았다. 보석을 넣는 공간으로 추정되는 각진 홈이 보였다. 궤짝 안에서 아무 보석이나 집어 들어 무심코 펜던트에 끼워 넣으려던 도중, 나는 문득 손동작을 멈추고 인형을 바라보았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무표정이긴 한데, 그저 나를 물끄러미 관찰하고 있을 뿐이긴 한데…….
“솔직히 말해. 너, 지금 재미있어 하고 있지?”
[나는 책임감 있는 언데드는 아니지만 눈치가 대단히 빠른 언데드다. 인형은 칭찬하는 의미에서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는 모양이다.]
“칭찬이 아니라 놀리는 거잖아. 그나저나, 이 보석을 펜던트에 꽂으면 어떻게 돼?”
[추진력을 얻는다.]
“어디로?”
인형은 대답 대신 뭉툭한 팔 끝으로 내 발밑을 가리켜 보였다. 그러고 보니 바닥에는 자그마한 보석 장식이 수놓듯 장식되어 있었다. 이런 류의 장식은 미궁 곳곳에서 흔히 찾을 수 있어서, 이 장식 또한 그런 수많은 장식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녹색이다.]
“음, 녹색이네.”
[그러니까 녹색 보석을 끼워 보자. 펜던트를 목에 건 다음 보석을 끼우는 게 올바른 순서다.]
“그 순서대로 하면 어떻게 되는데?”
[안전하게 보석의 효과를 확인할 수 있게 된다.]
두루뭉술한 대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나는 일단 인형이 시키는 대로 펜던트를 목에 걸었다. 분명 이 공간은 중력이 적용되지 않는 공간일 텐데, 펜던트를 목에 건 순간 마치 정상적인 중력을 적용받기라도 하는 것처럼 손끝에 무게감이 전해졌다. 어쩐지 이 펜던트의 역할을 알 것 같다고 생각하며 녹색 보석을 펜던트에 끼우자.
“우, 우왓?!”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할 걸 그랬다. 역시 나는 책임감 없고 조심성 없는 언데드다.]
“일찍도 말한다, 자식아! 네가 미리 경고를 했어야지!”
순식간에 중력이 돌아왔다. 정확히 말하자면 중력이 돌아온 건 나뿐이었다. 나는 갑작스러운 중력에 적응하지 못한 나머지 균형을 잃은 채 바닥을 나뒹굴었지만, 궤짝과 인형은 아무 이상도 없이 허공에 둥둥 떠 있었다.
아니, 이렇게 될 거라고 예상을 못한 건 아니지만 말이야. 그래도 경고 정도는 해 주면 안 되나? 만약 내가 다른 색의 보석을 꽂았더라면 어딘가 알 수 없는 곳으로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을지도 모르잖아!
내가 끙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동안, 인형은 궤짝에 고개를 박고 안을 뒤적거리더니 여덟 개의 보석을 내게 내밀었다. 빨간색, 주황색, 노란색, 파란색, 남색, 보라색. 그리고 흰색과 검은색. 지금 내가 초록색 보석을 가지고 있는 걸 감안하면 총 아홉 개의 보석을 얻은 셈이었다.
[보석을 펜던트에 끼우면, 가장 가까운 장소에 있는 보석을 기준으로 중력이 적용된다.]
“중력? 아까 추진력이라고 하지 않았어?”
[결과적으로는 추진력이나 마찬가지다. 중력을 잘 이용할 경우 원하는 곳까지 저절로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직접 실험해 보자.]
나는 인형이 가리키는 방향을 흘끔 보았다. 허공에 둥둥 떠 있는 복도 중 한 곳의 벽에 붉은 보석 장식이 박혀 있었다. 나는 펜던트에서 녹색 보석을 빼내고, 빨간색을 제외한 모든 보석들을 작은 가죽 주머니에 넣어 단단히 붙잡은 후 자세를 조금 바꾸었다. 인형은 당연하다는 듯 내 자루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내 소지품 시늉을 하려는 모양이다.
“펜던트에 아무 보석도 없을 때에는 무중력 상태가 되니까……. 이 상태에서 어느 정도 준비를 해야겠네.”
조심스럽게 벽을 붙잡고 자세를 바꿔, 이대로 ‘추락’하면 붉은 보석이 박힌 복도에 안정적으로 착지할 수 있도록 한 후……. 나는 펜던트에 붉은 보석을 끼워 넣었다. 순식간에 아찔한 추락감이 찾아왔다. 좋아, 어떤 방식으로 이동하는 건지 이제 알겠어! 알겠는데……!
콰득 하고 경쾌하게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광장 안을 울렸다. 너무 신나게 떨어졌구나.
“우와, 뼈 부러졌어. 다리뼈가 부러지다 못해 아예 밖으로 튀어나왔잖아. 게다가 엉덩이뼈도…….”
[중간에 보석을 뺐더라면 조금 더 안전하게 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충격으로 아예 으스러지다시피 한 다리뼈를 맞추기 위해 끙끙거렸다. 일찍 좀 말해 주지, 하고 인형을 탓하는 것도 이제는 지쳤다. 나는 인형 녀석이 아까 왜 추락사 운운했는지 겨우 이해했다. 확실히 추락사를 걱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광장에서 이동하려면 그저 끝없이 추락하는 식으로 움직여야 하니까.
“뭐 어때, 원래 첫 시도는 누구나 어설픈 법이잖아. 그러고 보니 생각난 건데, 보석을 펜던트에서 빼면 곧바로 중력이 사라지는 거야? 아니면 서서히 줄어드는 거야?”
[중력 자체는 곧바로 사라지지만, 관성 때문에 한동안은 계속 날아가게 된다. 공기 저항 때문에 속도는 점점 느려지는 모양이다.]
“공기 저항이라고 해 봤자 얼마 되지도 않을 것 같은데. 차라리 곧바로 다른 보석을 끼워서 브레이크를 거는 게 더 낫지 않겠어?”
[그것도 좋은 방법이다. 타이밍을 잘 맞춘다는 전제 하에서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용사 일행이 걱정이네. 그 사람들은 잘못 추락하면 죽을지도 모르잖아. 나야 뭐 여기저기 부딪쳐 가면서 배운다 쳐도, 그 사람들은 그러기도 쉽지 않을 텐데.”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광장 입구를 흘끔 바라보았다. 중력이 바뀌었기 때문에 광장 입구가 마치 머리 위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눈대중으로 어림짐작하기에도 꽤 먼 거리였는데, 체감상으로는 빌딩의 8층 정도 되는 거리에서 떨어진 것 같았다.
광장 입구에서 첫 복도에 떨어지는 것만으로도 이 정도의 거리니, 아마 앞으로는 더 먼 거리를 ‘추락’해야만 다음 장소에 도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용사와 케르츠는 제법 튼튼하니까 어떻게든 견딜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들 또한 사람인데……. 게다가 하넨은 신체의 내구도가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고.
[용사 일행에게는 그들 나름의 방법이 있을 것이다.]
“그야 그렇겠지. 뭐, 너라면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게다가, 용사 일행은 광장만 돌파하면 그만이지만 나는 광장을 샅샅이 뒤지면서 재료를 찾아야 한다. 오히려 내 쪽의 난이도가 더 높다.]
아, 맞다. 듣고 보니 내가 남 걱정할 때가 아니었네.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천장과 벽이 무너져 구멍이 뚫린 복도 너머로 수많은 다른 방과 복도들이 보였다. 아마 재료를 다 찾기 위해서는 저 방과 복도들을 다 뒤져야겠지.
아무래도 험난한 여정이 될 것 같다.
나는 괜히 한숨을 푹 내쉬며 다리를 주물렀다.
* * *
“아, 이만큼 멀리 뛰었으면 됐지 뭘 더 얼마나 뛰라는 거야?!”
나는 신경질적으로 짜증을 부리며 펜던트에서 보석을 빼냈다. 나름대로 조심한다고 했는데 또 함정에 처박히고 말았다. 별로 대단한 함정은 아니고, 그저 잠깐 동안 전기 쇼크를 줄 뿐인 함정이었지만 그래도 별로 기분이 유쾌하지는 않았다. 아무리 통증이 없다 해도 같은 함정에 열 번쯤 머리를 처박으면 누구나 넌더리가 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자루 안에서 인형이 슬그머니 팔을 내밀더니 내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제 딴에는 위로해 준답시고 하는 모양이었지만, 몇 번째 같은 방식으로 위로를 받으니 영 약발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아까는 정말로 아슬아슬했다. 한 번만 더 해 보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확실히 될 것 같기는 한데……. 조금 쉬었다 하자. 머리에 쥐가 날 것 같아.”
나는 함정 한가운데에 박혀 있는 보라색 보석과, 내가 가야 할 지점에 박혀 있는 보라색 보석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렇게 같은 보석이 여러 군데에 박혀 있을 때가 가장 골치 아픈 상황이었다.
그러니까 문제가 뭐냐면, 이 펜던트는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보석’을 기준으로 중력을 바꿔 버린다는 점이었다. 보석이 하나일 때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지만, 문제는 두 개 이상의 보석이 거의 비슷한 거리에 박혀 있을 경우에 생긴다. 어중간한 위치에서 보석을 끼울 경우 내가 가려는 방향과는 아예 반대로 처박혀 버리는 상황이 자주 벌어졌다.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무중력 상태에서 내가 가려는 방향으로 최대한 힘껏 도약해 거리를 좁힌 다음 보석을 끼워야 한다. 함정 쪽의 보석보다 목적지 쪽의 보석과 가까울 경우 그쪽으로 중력을 받아 추락할 테니까. 지금 내가 시도하고 있는 게 그 방법이었다.
그 방법이 마음에 안 든다면, 운 좋게 반대편 어딘가의 보석으로부터 중력을 적용받길 기대하며 아무 보석이나 끼워 보는 수밖에 없다. 물론 운이 나쁠 경우 아예 엉뚱한 방향으로 튀어 나갈 가능성이 있으니 별로 좋은 수단은 아니지만 말이다.
“머리 아파.”
[엄밀히 말하자면 나는 통각을 느끼지 못한다. 생전의 습관이 만들어 낸 가상의 통증이다.]
“진짜로 아프다는 게 아니라, 이 멍청한 솜뭉치야. 여기 구조가 너무 복잡해서 머리에 쥐 날 것 같다고!”
나는 끙끙 앓으며 머리를 부여잡았다. 이 광장에 발을 들인 지도 벌써 닷새째, 정말이지 이번 광장은 지금까지 만난 그 어떤 함정보다도 짜증나고 돌파하기도 어려웠다. 층 전체가 통합되어 있으니 일반 광장을 돌파하는 것보다야 난이도가 높지 않을까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보이지도 않는 어느 으슥한 위치에 박힌 보석 때문에 코앞에 있는 길을 두고도 빙빙 돌아가지를 않나, 기껏 온갖 전략을 다 써 가면서 도달한 길이 알고 보니 막다른 곳이어서 다시 돌아 나와야 하질 않나. 이 미로를 돌파하기 위해 내가 했던 고생을 읊어 보자면 사흘 밤낮을 꼬박 새워도 부족하다.
이렇게 복잡한 미로를 돌파하면서 하넨이 부탁한 재료까지 다 모으려니 정말이지 죽을 맛이었다. 재료를 모은다는 이유에서 안 가도 될 길을 들쑤시지만 않았어도 지금쯤 다음 층으로 가는 입구를 찾지 않았을까? 내가 지금까지 한 고생을 영혼 조각으로 환산하자면, 영혼 조각 대신 차라리 용사 녀석을 사 와도 거뜬할 거라고.
“대체 이 미궁은 어떤 끔찍한 변태 새끼가 만든 거야? 아니지, 이렇게 크고 복잡한 미궁을 누구 한 사람이 만들었을 리는 없으니 일단 이 보석 미로를 만든 놈부터 족치자. 어떤 놈이야?”
[미궁의 설계자나 건축자를 닦달한다고 해서 현재 상황이 나아지는 건 아니다.]
“아, 진짜…….”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형 녀석은 도움도 안 되는 소리나 하고 있고, 이대로 어설프게 쉬어 봤자 감만 떨어질 테니 그냥 지금 움직이는 게 나을 거다.
펜던트에 노란색 보석을 끼우자 위아래의 감각이 바뀌면서 머리가 핑그르르 돌았다. 제 타이밍에 보석을 빼면 꼴사납게 넘어지거나 다치지 않을 수 있다. 아까 전에 내가 도약을 시도했던 복도로 돌아온 후, 나는 다시 한번 있는 힘껏 달리면서 보석을 갈아 끼웠다. 성공해라, 이번에는 제발 좀 성공하라고……!
“돼, 됐다……?!”
방금 전까지와는 아예 다른 방향으로 몸이 기울기 시작했다. 함정 쪽이 아니라 목적지 쪽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추락하던 도중 뾰족하게 튀어나온 어느 돌덩어리에 어깨가 부딪치는 바람에 한쪽 팔이 거의 떨어져 나갈 정도로 찢겨 나갔지만, 어차피 상처야 좀 기다리면 금방 원래대로 돌아올 테니 괜찮다. 거기까지는 그럭저럭 좋았는데…….
“우왁!”
다만 팔이 부딪친 충격 때문에 제때 보석을 빼낼 수 없어서, 나는 중력을 조금도 감소시키지 못한 채 그대로 목표 지점의 바닥에 머리를 처박고 말았다. 쾅, 이라기보다는 철푸덕. 고기 뭉개지는 듯한 소리가 쓸데없이 징그러워서 기분 나빴다.
거꾸로 떨어진 탓에 아예 얼굴이 갈려 나간 것 같은데, 시야가 확보되지 않는 건 둘째 치고 혀조차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목구멍에서는 무슨 피 끓는 소리 같은 게 났다. 인형에게 무언가 말해 보려다가 잘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고는 포기했을 때쯤, 자루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인형이 바깥으로 나온 모양이다.
[처참한 꼴이 되었다. 무리하게 움직이지 말고 회복을 기다리는 게 좋겠다.]
“…….”
[구체적으로 얼마나 처참한지 들어 봤자 기분만 나빠질 게 분명하다. 다행히도 내 팔은 아슬아슬하게 몸과 붙어 있다. 보석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니 안심해도 좋다.]
“…….”
[인형은 내가 회복을 기다리는 동안 하넨이 부탁한 재료를 얻어 보기로 마음먹었다. 이 방에서는 마법의 반작용을 상쇄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 신상을 찾을 수 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도 않았지만 인형은 내 마음을 제멋대로 읽은 듯 종종걸음으로 어딘가 걸어가 버렸다. 뭐,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으니 그걸로 된 거겠지. 귀찮은 일은 인형 녀석에게 맡겨 두고 나는 엎어져 있기나 하자. 눈앞도 깜깜하고,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고, 몸도 움직이지 않으니 마치 시체가 된 것 같았다.
그 상태로 몇 분쯤 미동도 없이 누워 있노라니, 문득 엉뚱한 생각이 머릿속 한구석을 흘러갔다.
‘차라리 이대로 시체가 되면 더 편하지 않을까?’
시체가 되면 굳이 이 고생을 할 이유도 없을 텐데. 그 엉뚱한 생각의 설득력이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강했던 탓에, 나는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을 느꼈다.
생각해 보니 이거 그럴듯하잖아. 시체가 되면 내가 굳이 이 고생을 할 필요가 없는데. 머리 아픈 미로를 돌파해 나갈 필요도 없고, 마법사 녀석이 부탁한 재료를 모으러 돌아다닐 필요도 없고, 언제 제멋대로인 도살자한테 걸려 묵사발이 될지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어린 용사 녀석이 볼 한 번 만져 보겠다고 졸졸 따라다니는 걸 어르고 달래지 않아도 되고…….
차라리 그만두게 해 달라고 인형에게 부탁이라도 해 볼까. 되면 좋은 거고 안 되면 마는 거지. 어차피 인형은 혼자서도 미궁을 잘 돌아다닐 테니 내가 없어도 크게 불편하지는 않을 테고.
딱히 우울한 건 아니다. 그냥, 이 상태에서 더 이상 움직이기를 포기하는 것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선택지 중 하나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나쁜 선택지는 아니잖아. 어차피 인간은 누구나 죽는 생물이고, 나는 원래 세계에서 죽었어야 하는데 어쩌다 보니 죽은 몸을 이끌고 조금 더 돌아다녔을 뿐이라고 생각하면.
[위험하다.]
‘응?’
그때였다. 인형의 양팔이 내 머리를 잡더니 슥 들어 올렸다. 눈을 몇 번 깜빡이자 내 코앞에 있는 인형의 모습이 보였다. 아, 시야가 회복되었구나. 멍하니 생각하며 인형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인형이 내 뺨에 자기 얼굴을 가져다 댔다.
[신은 판단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판단해야 한다.]
“뭐?”
[신은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의심해야 한다.]
“갑자기 왜 그래, 너.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나 하고 앉아선…….”
[나는 스스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꾸준히 의심할 필요가 있다. 그러지 않으면 스스로의 악함마저 잃어버리게 된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볼에 닿은 부드러운 천의 감촉을 느끼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우 깨달았다. 방금 전의 내가 꽤 이상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등골에 소름이 돋는 듯한 오싹함을 느끼며 일어나 앉자, 인형은 이렇다 할 말 한 마디 없이 나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인형의 옆에는 자그마한 나무 조각상 하나가 놓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