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아직은 무가치한 교리 문답
“어, 깨워서 죄송해요. 많이 시끄러우셨어요?”
“애초에 오래 잘 생각도 없었어. 배가 불러져서 잠깐 졸긴 했지만……. 위층에서 좀 오래 자고 왔거든.”
하넨은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빗어 내리며 나와 인형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하넨의 금빛 눈동자는 졸음기 하나 없이 또렷했다. 잠깐 졸기는 했겠지만 적어도 몇 분 정도는 깨어서 나와 인형의 대화―아니, 정확히는 인형에게 이런저런 말을 거는 내 목소리를 듣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나는 조금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시선을 피했다. 어, 그러니까. 이걸 어떤 식으로 이야기해야 하지? 저 사람이 내 이야기를 어디까지 들었는지, 애초에 케르츠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는지 하나도 가늠이 안 오니 어디까지 이야기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니까…….
“신의 악함 운운하는 부분부터 들었어.”
“……거의 다 들으신 셈이네요.”
“내가 듣고 싶어서 들은 줄 아냐? 애초에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고 싶다면 어디 멀리 떨어진 데 가서 하라고! 아니면 굳이 입을 여는 대신 정신 교감을 하거나. 너랑 인형처럼 정신이 연결되어 있으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잖아.”
“듣고 보니 그런 방법이 있었네요.”
“너 바보냐? 왜 네가 정보를 숨기는 방법을 내 입으로 설명해 줘야 해?”
너무 정론이라서 반박할 말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이건 내가 바보짓을 한 게 맞다. 그냥 입을 다문 채 머릿속으로 생각하기만 해도 인형은 충분히 알아들을 텐데, 내가 버릇처럼 인형과 대화를 시도하다 보니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아니, 그래도 말이야. 깨어 있으면 깨어 있다고 진작 말을 하면 좀 좋아? 들을 건 다 들어 놓고 나중에야 슬그머니 입을 열다니!
하넨은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흘겨보면서도, 내게서 정보를 더 캐물을지 말지 선뜻 결정하지는 못하는 듯했다. 그는 이미 여러 차례 빗어 내려서 깔끔해진 머리카락을 신경질적으로 계속 빗어 내리기만 했다.
“미궁 지하에 있는 게 신의 악함이라는 건 무슨 소리야? 애초에 케르츠가 성기사의 후손이라니, 그건 또 무슨 말이고? 저 녀석은 도살자잖아.”
“네, 도살자기는 한데……. 저기, 혹시 케르츠 씨한테 뭐 들은 거 없어요?”
“저 녀석, 원래 자기 이야기는 거의 안 해. 물론 말수가 적은 편은 아니지만 대체로 영양가 없는 이야기만 지껄이니까……. 그런데 너, 지금 그거 케르츠 본인에게 들은 소리야? 네 인형이 알려 주거나 어디서 주워들은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하넨은 조금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케르츠를 흘끔 바라보았다. 혹시 깨어 있기라도 하다면 차라리 이야기하기가 수월할 텐데, 지금의 케르츠는 딱 보기에도 곤히 자고 있었다. 광증으로 날뛴 후유증 때문에 제법 피곤했던 모양이다.
보아하니 하넨은 케르츠에게서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듣지 못한 것 같은데, 만약 케르츠가 자신의 과거사를 하넨에게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거라면……. 아니, 설령 케르츠 본인이 신경 쓰지 않는다 해도 남의 이야기를 함부로 하는 건 좋지 않다. 이거 결국 뒷담화나 다름없잖아.
[이미 까발릴 건 다 까발려졌다. 케르츠가 성기사의 후손이고, 악의 근원이 사실은 신의 악함이라는 것까지 알고 있으면 그 이상은 숨겨 봤자 별 소용도 없다. 나중에 케르츠가 일어나면 무릎 꿇고 손 들고 있는 벌을 10분쯤 받아 보자.]
“나는 언데드라서 그런 류의 벌 같은 거 의미도 없거든? ……아니, 애초에 네 잘못도 있잖아! 너 사실은 알고 있었지? 하넨 씨가 깨어 있는 거?”
[인형은 전능하지도 전지하지도 않다. 나의 무신경함을 인형에게 전가해 보았자 소용없는 노릇이다.]
이 얄미운 녀석 같으니라고! 나는 인형을 엎어 놓고 엉덩이를 몇 번쯤 때릴까 고민하다가, 나를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는 하넨의 시선을 눈치채고는 그만두었다. 그사이 인형은 느긋하게 하넨의 품 안으로 기어 들어가서는 평범한 무생물 흉내를 내기 시작했는데, 이제 와서 저 녀석 탓을 더 해 봤자 뭐가 나아지지도 않을 거다.
상황이 이쯤 되면 뭘 숨기거나 얼버무리기도 힘들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하넨에게 방금 이야기의 맥락을 설명했다. 아까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잠든 두 사람과 조금 떨어진 장소까지 가서 이야기를 한 건 물론이었다. 이야기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하넨의 표정은 점점 이상해져 갔다.
“……어쩐지 신전 녀석들이 이상할 정도로 도살자한테 집착하더라니, 설마 그 이유에서였을 줄이야.”
내 이야기를 다 들은 하넨은 가볍게 혀를 찼다. 내색하지 않으려 애쓰는 눈치였지만 적잖은 당혹감이 그의 얼굴에 어려 있었다. 역시 이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게 나았을까, 처음에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괜히 너한테 들었다. 성기사에 대한 이야기는 차라리 케르츠 본인한테 물어보는 게 나았을 텐데. 혹시 이거 민감한 이야기 아니야? 막 말하고 그래도 돼?”
“뭐, 그렇기는 한데……. 케르츠 씨도 딱히 비밀로 해 달라고 말하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렇다곤 해도, 남의 어두운 이야기를 엿듣는 건 별로 좋은 일이 아니니까…….”
이렇게까지 무거운 이야기일 줄은 몰랐지. 하넨은 조금 민망한 표정으로 머리를 벅벅 긁으며 중얼거렸다. 하넨이 방금 얻은 정보를 이용해 케르츠를 상처 입히거나 이상한 짓을 저지르지는 않을 거다. 저 사람, 종종 신경질적으로 굴기는 해도 묘한 데에서 상냥한 성격 같으니까.
게다가 운이 좋다면 하넨에게서 관련된 정보를 더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저 사람은 마법사고 나름대로 지식이 풍부한 것 같으니, 방금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무언가 새로운 사실을 추론해 낼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흠흠, 본론으로 돌아가서……. 성기사라는 존재가 과거 교단에 존재했다는 건 알고 있었어. 세계에 오염이 퍼지기 시작한 이후로 그들이 사라져 버렸다는 것도.”
“그것까지는 알고 계셨던 거예요?”
“그 정도야 당연히 알지. 난 그게 신관들의 신력이 크게 약해진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세계가 오염된 탓에 신으로부터 직접 힘을 받아 쓰는 이들조차 자연스럽게 사라진 줄 알았는데, 설마 그들이 타락해서 도살자가 되었을 줄은……. 정말이지 상상도 못 했어.”
“하지만 하넨 씨도 말쿠테른이라는 명칭은 알고 계셨잖아요. 듣자하니 말쿠테른은 이단의 교파라고 하던데.”
“아니, 내가 아는 거라곤 도살자들이 말쿠테른이라는 집단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뿐이었어. 그게 교파의 명칭이라는 것조차 처음 알았고……. 애초에 말쿠테른이 이단으로 규정된 시기가 언제야? 네 말이 맞다면 거의 오백 년 전의 일이지?”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오백 년이면 나라 하나가 생겼다 사라질 만한 세월이다. 그 정도면 이단이라는 불명예조차 잊힌 채 그저 부정적인 선입견만 남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심지어 세상이 오염될 대로 오염되어 생존조차 버거워진 상황이니 정확한 기록이 남아 있기도 힘들겠지. 광증에 사로잡혀 무차별적으로 사람들을 죽이고 다니는 도살자들이 자기변호를 할 정도의 이성을 가지고 있을 리도 없고, 설령 이성이 돌아왔다 해도 자기혐오와 죄책감 때문에 굳이 스스로의 정체를 밝히려 들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게다가 교단의 녀석들, 이단의 사상을 박멸한다는 명목 하에 온갖 고문서들을 불태우고 다닌다고. 자기들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내용이 적혀 있다면 심지어 마법서까지 태워 버릴 정도지. 분명 뭔가를 숨기고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어.”
“그, 그런 일까지 저질렀다고요?”
“그래. 수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표면적으로 우리 흑탑은 지금의 교단과 협력 관계를 맺고 있어서 말이야. 그런 상태에서 저쪽의 치부를 캐내려 들었다간 그야말로 전쟁이니 섣불리 건드리지도 못했지.”
암묵적으로 봐주고 있는 거야, 하넨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그렇게 중얼거리며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가뜩이나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세계, 그나마 멀쩡한 집단까지 전쟁을 벌이기 시작하면 멸망을 가속시키기만 할 뿐이란다. 설령 협력 상대에게서 조금 구린내가 난다 할지라도 일단은 모른 척 협력하는 수밖에 없다는 게 흑탑―그러니까, 현존하는 유일한 마법사 협회의 공식적인 입장이라는 모양이다.
이건 또 새로운 각도의 이야기였기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사실 나는 미궁 바깥의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는 잘 모른다. 내가 미궁 바깥에 대해 아는 거라곤 그저 ‘멸망해 가고 있다’라는 단편적인 사실뿐이니까. 그나마도 내가 직접 본 게 아니라 인형을 통해 들은 이야기일 뿐이고.
그러니까, 하넨의 이야기에 따르면 바깥의 신관들이 이단 제거를 핑계로 자신들의 과거를 일부러 숨기려 한다는 건가? 듣고 보니 영 수상쩍은데.
“어쨌든 케르츠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니, 적어도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겠지. 저 녀석이 종종 광증에 시달리기는 해도 허언 증상은 없으니까. 그렇다면, 이 미궁의 지하에 있는 건 신의 악함이라는 뜻이지? 용사는 신의 악함을 정화하는 셈이고?”
“그런 셈이지요.”
“나는 악의 근원이 신과는 아예 별개의 존재라고 생각했단 말이야.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고? 따지고 보면 인간이 신의 힘을 이용해 신의 일부를 죽인다는 소리인데, 그래도 괜찮은 거야?”
하넨은 조금 창백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확실히 듣고 보니 조금 이상하긴 했다. 시선을 돌려 인형을 바라보자, 얌전하게 무생물 시늉을 하던 인형이 간단한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신은 인간에게 힘을 주고 인간은 자신의 판단으로 힘을 사용한다.]
“그렇다고는 해도, 인간이 신의 뜻에 어긋나거나……. 그, 신의 분노를 사는 짓을 저지르면 신이 힘을 빼앗아 갈 수도 있는 거 아니야? 나는 이 세계의 신이 어떤 존재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거 아냐.”
[신은 편견을 가지지 않는다. 신은 분노하지도 않는다.]
“신이란 분이 꽤 개방적인 모양이네……. 잠깐만. 네 말대로라면, 악의 근원을 정화하는 건 신의 뜻이 아니라 인간의 뜻이란 소리야?”
[악의 근원을 정화하든, 내버려 두든 그건 인간이 결정할 일이다. 신은 결정하지 않는다.]
뭐야, 그게. 마치 자기 일 아니라는 듯 이야기하는 인형의 모습에 나는 내심 당황하고 말았다. 애초에 저 녀석은 신의 사자 비슷한 역할 아닌가? 애초에 나를 언데드로 되살린 것도 용사가 미궁 중앙에 도착해 악의 근원을 정화하도록 돕게 하기 위해서잖아?
인형의 태도에 찝찝함을 느끼며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데, 하넨은 내 질문을 듣고 무언가 이해했다는 듯 갑자기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반응을 보아하니, 역시 악의 근원을 정화하겠다는 건 신의 뜻이라기보단 교단의 뜻이구나. 결국 인간 전체의 뜻이라고 하기도 그렇네.”
“뭐, 맥락상 따지고 보면 그렇기는 하지요……. 하지만 바깥의 사람들도 다들 악의 근원을 정화하고 싶어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세상이 더 이상 오염되지 않으니까…….”
“흐음, 과연 그럴까?”
하넨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며 웃어 보였다. 어딘가 음흉한 웃음이었다. 저 사람이 왜 저러나 고개를 갸웃하던 나는, 곧 하넨의 말뜻을 이해하고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등골이 오싹해지며 저도 모르게 얼굴이 굳었다.
잠깐만, 설마. 세상에는 악의 근원을 정화하는 걸 방해하고자 하는 이들도 있다는 말인가? 게다가 하넨의 반응을 보아하니, 어쩌면 하넨은 악의 근원을 정화하기를 바라지 않으면서도 이 미궁에 들어왔다든지…….
“뭐야, 이걸 속아? 너 진짜 순진하기는 한 녀석이구나.”
[나는 하넨이 장난을 쳤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이 작자들이 진짜! 하넨의 품에 안긴 인형은 재미있다는 듯 팔을 흔들어 보였고, 하넨은 사람을 앞에 두고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박장대소를 했다. 내가 멍하니 하넨을 바라보자, 그는 하도 웃어서 눈가에 고인 물기를 닦아 내고는 어깨를 으쓱했다.
“나는 아니야. 그럴 작정이었다면 애초에 너한테 이런 말을 하지도 않았겠지.”
“사, 사람 놀래키지 마세요!”
“고작 그런 걸로 놀라는 네가 더 문제 아니야? 무슨 새가슴도 아니고. 하지만 말이지, 흑탑에서 이번 원정을 떨떠름하게 생각하는 마법사들이 많았던 건 사실이야.”
“왜요?”
“세마하 교단 녀석들이 정말로 세계의 재건을 목적으로 하고 있을까, 그런 의문을 가지고 있었거든. 그 녀석들은 병적으로 순수성에만 집착하고 있으니까.”
인형이 슬그머니 하넨의 품 안에서 빠져나오더니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나는 기이한 불길함에 잠시 머뭇거렸고, 하넨은 단어를 고르듯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입을 열었다.
“흑탑 내에서는 그런 의견을 제시한 마법사들도 있어. 어쩌면 교단이 진짜로 바라는 건, 악의 근원을 제거하고 세상을 정화하는 게 아니라…….”
“……다른 건 다 의심해도 좋지만, 원정의 목적에 의심을 가지지 말 것. 분명 그런 조건으로 저희와 합류하셨다고 들었습니다만.”
잔뜩 잠긴 목소리가 복도 너머에서 들려왔다.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려 보니, 케르츠가 피로에 충혈된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잘 자고 있던 걸 확인하고 왔는데. 나와 하넨이 당황해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자, 케르츠는 손가락 끝으로 자기 갑옷을 툭툭 건드려 보였다. 나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라서 고개를 갸웃했지만 하넨의 얼굴은 곧 낭패감으로 물들었다.
“빌어먹을, 내가 상인 녀석더러 바보라고 할 처지가 아니었구나.”
“갑옷이 저를 깨우더군요. 제가 자고 있을 때 일행이 주변에서 사라지면 알리게끔 주술을 걸어 두었습니다. 혹시라도 용사님이 혼자 돌아다니다가 길을 잃을까봐 해 놓은 조치였는데…….”
그러고 보니 케르츠의 인면철 갑옷 표면에 작은 얼굴이 하나 도드라져 있었다. 알 수 없는 언어로 케르츠에게 무언가를 쉴 새 없이 속삭이던 얼굴은, 케르츠가 손바닥으로 그 얼굴을 몇 차례 쓸어내리자 곧 사라져 버렸다.
하넨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보아하니 케르츠가 걸어 놓은 주술에 대해 알고는 있었지만 잠깐 까먹었던 모양이다. 저 인간, 잘난 척은 혼자 다 하더니만 은근히 허술해 빠졌잖아!
“정작 용사님은 잘 주무시고 계시더군요. 마법사님의 수면독 덕분인 것 같습니다.”
“그래. 내가 상인 녀석이랑 이야기 좀 하려고 멀리 떨어져 있었어. 걱정시켜서 미안해.”
“아뇨. 별일 없었다니 다행입니다. 하지만……. 대체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는지요?”
케르츠의 시선이 느릿하게 나에게로 옮겨졌다. ……무릎 꿇고 손 들고 있어야 하나? 잘못했다고 싹싹 빌어야 하나? 나는 인형을 흘끔 바라보았지만 녀석은 느닷없이 바닥에 주저앉아 관상용 인형 시늉을 하기 시작했다. 저거 책임 회피 맞지? 나는 모르쇠 하고 있겠다는 거 아니야, 저 얄미운 솜뭉치 자식!
“죄송해요. 그, 어쩌다 보니 하넨 씨에게.”
“혹시 제 이야기를 했나요? 그거라면 아무래도 좋습니다. 어차피 기회가 되면 마법사님에게도 이야기하려던 거였고……. 굳이 숨겨야 할 이유가 있던 것도 아니니까요.”
“그, 그래도.”
“정말로 그건 상관없습니다. 다만 제가 신경 쓰이는 건…….”
“나는 원정의 목적을 의심하지 않아. 다만 그 원정을 계획한 교단 녀석들에 대해서라면 의심이 차고 넘치는 것뿐이지. 그것도 안 돼?”
나와 케르츠의 대화를 지켜보기만 하던 하넨이 날 선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요.” 하고 케르츠는 대답했지만, 태도를 보아하니 하넨의 말을 별로 믿지는 않는 눈치였다. 그의 눈빛은 조금 가라앉아 있었고 표정 역시 약간 굳어 있었다.
저 표정, 어디에서 본 거 같은데……. 묘한 기시감에 고개를 갸웃하던 나는, 예전에 케르츠가 내 입을 다물게 하려고 내 머리를 벽에 뭉개 버렸을 때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는 사실을 겨우 깨달았다.
저 사람이 왜 저렇게 긴장해 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어리고 맹목적인 용사가 엉뚱한 고민을 하지 않게끔, 동료인 마법사가 원정의 목적을 의심하지 않게끔……. 그러니까, 악의 근원을 정화하는 일이 조금이라도 잘못될까 봐 노심초사하고 있는 건가. 어딘가 결벽증적인 느낌까지 드는 그 집착에 오히려 내 기분이 이상해지고 말았다.
“애초에 너도 교단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잖아?”
“예,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원정의 목적을 의심하지는 않지요. 교단을 미심쩍게 보는 것과 원정의 목적을 의심하는 건 다른 문제 아닙니까.”
“그래, 그래. 무슨 뜻인지는 알겠어. 네가 뭘 걱정하는지도 알고는 있는데 말이지……. 그게 정말 다른 문제가 될 수 있기는 해? 애초에 이 원정을 계획한 게 그 자들인데?”
하넨의 목소리에는 조금 언짢음이 섞여 있었다. 아무래도 케르츠가 계속 날 선 자세로 나오자 하넨 쪽도 조금은 짜증이 났던 모양이다. 게다가 저 사람, 케르츠를 달래기 위해서 ‘원정의 목적을 의심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거듭했지만 실제로는 의심하는 티가 역력했다. 케르츠도 그 사실을 파악한 듯 노골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솔직히 마법사들이 의구심을 가질 만도 하잖아? 교단에서는 애초에 왜 이 미궁 안에 악의 근원이 있는 건지 아무런 해명조차 하지를 않았는데.”
“그들이 해명할 필요가 있습니까?”
“해명하지 않는 게 교단의 자유라면, 자세한 내막을 추측하는 것도 마법사들의 자유겠지. 어쩌면 이 미궁의 지하에 있는 건 교단이 저지른 죄의 흔적이 아닐까, 교단은 악의 근원을 제거하면서 자신들의 치부도 함께 지우려는 건 아닐까 하는 게 마법사들의 여론이야. 물론 증거가 없으니 교단 측에 따지고 들 수는 없지만 말이야.”
이대로 가다가는 싸움 나겠는데,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두 사람을 말릴 수는 없었다. 애초에 싸움의 원인을 제공한 게 나였기도 하고, 두 사람의 싸움에 내가 끼어들 만한 명분이 있지도 않아서…….
“상인에게 이야기를 들었다면 그 정설이 틀렸다는 것도 알겠군요. 엄밀히 말하자면 이 미궁의 지하에 있는 건 제 조상들의 치부입니다. 이제는 진실을 알았으니 된 거 아닙니까?”
“진실? 나는 별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뭐라고요?”
“네 조상들이 봉인을 방해하는 바람에 신의 악함을 뒤집어썼다는 건 알겠어. 신의 악함이 제대로 봉인되지 않은 탓에 세상이 이 모양이 되었다는 것도 이해했고. 그런데 말이지, 조금 더 근본적인 질문 하나 해 볼까? 애초에 왜 성직자들은 신의 악함을 굳이 분리해 봉인하려는 시도를 했지?”
케르츠의 얼굴은 점점 싸늘하게 굳어 가고 있었지만 하넨은 신경 쓰지 않은 채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잠깐만. 하넨 저 사람, 아예 싸울 걸 각오하고 이야기를 꺼냈나? 물론 지금 이 상황에서 어중간하게 싸움을 멈춘다면 그것도 그것대로 찝찝하기는 하겠지만…….
“고등하고 복잡한 존재를 두 가지 성질로 분리해 정제한다는 건 함부로 할 만한 일이 아니야. 하다못해 한 인간의 인격을 둘로 분리해 다른 그릇에 담는 실험조차 부작용이 너무 심해 금지되고 있어.”
“…….”
“그런데 뭐, 신의 악함을 분리해서 선한 부분만 섬기고 악한 부분은 가두려 했다고? 오히려 제대로 되는 게 더 이상하지 않아? 그런 식으로 신의 일부를 가두어도 괜찮은 거야?”
“…….”
케르츠는 서늘한 표정을 지은 채 하넨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반박할 말이 없어서 입을 다물고 있는지, 아니면 하넨이 어디까지 말하나 두고 보려는지 나로서는 판단할 수 없었다. 무서워진 나는 바닥에 앉아 있는 인형을 괜히 끌어안아 보았다. 하다못해 장난이라도 쳐 줬으면 좋으련만, 인형은 여전히 무생물처럼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왜 오늘따라 너는 말이 없어, 불길하게시리? 나는 애꿎은 인형만 탓하면서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말하는 건 하넨 혼자뿐이었고 케르츠는 팔짱을 낀 채 묵묵히 상대를 노려보고만 있었다. 언제까지 이 일방적인 대화가 이어지려나 하는 생각에 괜히 초조해질 때쯤.
“애초에 교단이 순수한 목적에서 악을 봉인하려고 한 게 맞기는 해? 교단 녀석들, 설마 신의 힘을 이용하고 싶어서 과욕을 부렸다가 일이 잘못된 건…….”
“이용이라고요.”
케르츠의 입이 겨우 열렸다. 단 한 문장을 내뱉었을 뿐인데도 하넨은 놀란 고양이처럼 흠칫 어깨를 떨었다. 케르츠는 하넨이 더 말하기를 기다리듯 잠시 침묵했지만, 끝내 하넨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제야 제 말을 이어 갔다.
“그럴 리가 없잖습니까. 성직자들이 감히 신의 힘을 이용하려 들었다니, 역시 어쩔 수 없는 마법사님이시군요. 마법사들은 힘에 집착할 줄은 알아도 힘을 두려워할 줄은 모르니까.”
“그, 그게 무슨 소리야.”
빈정거리는 듯한 그 말투에 화를 낼 법도 하건만, 하넨은 화를 내는 대신 당황한 듯 머뭇거렸다. 어쩌면 케르츠의 태도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케르츠의 얼굴은 여전히 조금 긴장한 듯 굳어 있었다. 상대를 깔보기보다는 오히려 무언가에 두려움을 느끼는 듯한 그 태도에, 나도 저절로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과거의 성직자들이 왜 신의 악을 봉인하려고 했는지는……. 그게 옳다 그르다를 떠나서, 적어도 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진심이야?”
“마법사님도 알고 계시겠지요. 악의 근원이 구체화된 형태가 사념이라는 것쯤은. ……상인 씨는 언데드라서 사념에게 공격당하지 않으니 이해가 잘 안 갈 수도 있겠군요. 그렇다면, 지난 층에서 제게 공격당한 걸 생각해 보시죠. 제 광증에 대해서요. 따지고 보면 제 광증도 신의 악함을 뒤집어쓴 결과니 말입니다.”
갑자기 화살이 내 쪽으로 돌아오자 나는 흠칫 놀랐지만, 케르츠는 내 쪽을 잠시 흘끔거리기만 했을 뿐 다시 하넨에게 시선을 돌렸다. 딱히 내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기보단, 그냥 내가 옆에 있다는 사실을 안 까먹었을 뿐이구나. 나는 괜히 인형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그것들의 성질에 대해 생각해 보십시오. 그 녀석들에게는 논리가 통하지 않아요. 왜 이러냐고, 하지 말라고 부탁하거나 협상을 시도한다 해서 들어먹지도 않아요.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어떻게 하면 상대를 진정시킬 수 있을지 고민해 봐야 소용이 없어요. 애초에 이유 같은 건 있지도 않으니까.”
“…….”
“그건 정말이지 무조건적입니다. 통제할 수 없는 적의와 살의에요. 인간은 그 힘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이해하기는커녕 도망가거나 눈앞에서 치워 버리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신의 악함이란 근본적으로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어요.”
케르츠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서 희미한 고집과 집착이 읽혔다. 하넨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자, 그는 가볍게 한숨을 쉬더니 조금 다른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저는 마법사님의 부모가 어떤 사람인지 모릅니다만.”
“왜 갑자기 심한 소리를 하려고 해?”
“아뇨. 부모님 욕을 하려는 게 아니라, 예시를 들어 보려는 겁니다. 내 부모가 나를 낳았는데, 그 부모가 가끔 아무 이유도 없이 나를 증오한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
“물론 평소에는 나를 보살피고, 나를 먹이고 재우고, 나에게 사랑을 듬뿍 쏟아 주겠지요. 그런데 어느 순간 불현듯, 내가 딱히 무언가를 잘못한 것 같지도 않은데, 갑자기 태도가 변해서는 나를 미워하고 나를 괴롭히고 나를 버리고 떠나는 겁니다. 그러면 갓난아기의 입장에서는 기분이 어떨 것 같습니까?”
갑자기 왜 부모님 이야기가 나오나, 갸웃하던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말뜻을 이해했다. 그러니까, 부모는 신을 비유하고 자식은 인간을 비유한다는 거지? 나는 소름이 돋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케르츠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차라리 항상 못되게 군다면 부모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릴 수라도 있을 겁니다. 자식을 낳아 놓고선 제대로 보살피지도 않은 채 학대하기만 할 뿐이라면 그건 명백히 부모의 잘못이니까요.”
“…….”
“부모가 나를 괴롭히는 이유를 안다면 조금은 나을지도 모릅니다. 개선할 여지라도 있으니까요. 내가 최선을 다해 노력한다면, 부모가 원하는 자식이 된다면 부모가 날 사랑해 줄 거라고 희망이라도 가질 수 있을 겁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
“나는 아무런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는데, 정말 방금 전까지만 해도 서로를 사랑하고 행복했던 것만 같은데 갑자기 채찍질이 날아오고 밥을 굶게 된다면……. 그렇다면, 나는 그 부모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요?”
이번에는 반대로 하넨 쪽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나야 아까부터 계속 꿀 먹은 벙어리 신세였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어쩐지 하넨과 같이 몰아붙여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케르츠는 화를 내지도, 따지는 듯 말하지도 않았지만 그의 말은 이상할 정도로 묵직했다.
“순수하게 부모가 나쁜 사람이라고 매도할 수 있을까요? 평소에는 그렇게나 잘해 주고 나를 사랑하는데? 그렇다고 순수하게 내 탓을 할 수 있을까요? 나는 아무 잘못도 한 게 없는데, 예전에는 똑같은 행동을 했더라도 이렇게 대접받지 않았는데? 아무리 평소에 정성껏 사랑받았다 할지라도, 언제 어느 순간에 아무 이유 없이 나에게서 등을 돌릴 부모와 함께 있다면 돌아 버릴 정도로 괴로운 것도 당연하지 않을까요?”
조금 상황에 안 맞는 비유 아니냐고, 중간중간에 논리적 비약이 있지 않느냐고. 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케르츠의 얼굴을 보면 저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그 묘하게 고집스러운 입매와 충혈된 눈에서 감정이 읽혔다. 사람을 압도하는 감정이었다.
나는 케르츠의 말을 다시 곱씹어 보았다. 부모의 상냥한 부분을 사랑하고, 부모의 선함과 훌륭함을 존경한다. 하지만 부모의 변덕스럽고 악한 부분은 도저히 사랑할 수 없고 견딜 수조차 없다. 차라리 노력해서 부모를 화나게 하지 않을 수라도 있다면 좋을 텐데, 부모가 어째서 때때로 악해지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노력할 방법조차 알 수 없다.
나는 그런 부모를 겪어 본 적 없다. 하지만 만약 우리 부모님이 그런 사람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런 부모의 밑에서 자란 사람이라면 자기 부모에게 과연 어떤 감정을 가졌을까.
“……그, 그건.”
“무서운 일이지요. 그런 부모의 자식으로 태어났다면 어떻게든 독립하는 것만이 답이겠지만, 만약 그 부모에게서 도망치지도 못하는 환경이라면 어떨까요.”
부모가 신이고 인간이 자식이라면, 자식은 어떤 발악을 하더라도 부모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스스로가 노력해도 부모가 바뀌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자식이 할 수 있었던 최선의 선택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런 생각까지 들자 갑자기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수백 년 전의 성직자들이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
“…….”
“적어도 그들은 신을 사랑하려고 노력했을 겁니다. 이용하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거예요.”
자식이 아무리 노력해도 상황이 변하지 않는다면, 애초에 어떻게 노력해야 할지조차 모를 정도로 부모가 변덕스러운 존재라면. 부모의 저 변덕스러움을 바꾸면 된다. 케르츠는 지금 그런 논리를 펼치고 있었다.
어딘가 어긋난 것 같은데, 부정할 만할 말이 생각나지를 않았다.
하넨은 고집스럽게 입을 다문 채 케르츠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할 말이 궁한 건지, 아니면 할 말을 머릿속에서 최대한 정제하고 있는 건지 확신하기가 어려웠다.
마음 같아서는 나라도 케르츠에게 무슨 말을 하고 싶었지만, 솔직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논리의 문제가 아니었다. 지금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서 뭐라 반박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지만, 저 사람이 내세우는 논리 중 어느 부분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건 확실히 직감할 수 있었으니까.
다만 케르츠의 저 가라앉은 표정이, 그 눈빛에서 느껴지는 기이한 집착이 사람의 입을 다물게끔 하고 있어서.
“자기 입맛에 맞는 부분만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잘라 내는 게 사랑이야?”
한참 만에 겨우 흘러나온 하넨의 목소리는 제법 무거웠다. 언짢은 기색이 가득했지만 케르츠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흰자위가 붉게 충혈된 눈은 조금의 흔들림조차 없었고, 고집스러운 입매 또한 그저 묵묵히 다물린 채였다. 하넨은 재차 입을 열었다.
“이 부분은 내가 좋아하니까 내버려 두고, 저 부분은 내가 싫어하니까 잘라내서 안 보이는 데에 처박아 놓고? 사람과 사람을 사랑할 때도 그런 식으로 하지는 않아.”
“올바른 방법이라고 말한 적은 없습니다.”
“올바르지도 않고 사랑도 아니야. 그저 멍청하게 눈 가리고 아웅 하는 행위일 뿐이지.”
“눈을 가렸다고요……. 제 생각에 그 표현이 어울릴 만한 행동을 한 이들은 따로 있어 보입니다만.”
하넨의 표정이 희미하게 일그러졌다. 케르츠가 하넨을 겨냥하고 그런 말을 한 건 확실해 보이지만, 구체적으로 무슨 맥락인지는 짐작할 수가 없었다. 하넨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려는 걸 가까스로 참는 듯 몇 번 심호흡을 했다. 사실 이건 좀 의외였다. 하넨의 성격상 당장 화를 터뜨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마법사들이 눈을 가린 채 탑에 틀어박혔다고 해서 성직자들의 잘못이 없어지는 건 아니야.”
“…….”
“그래, 백번 양보해서 수백 년 전의 성직자들이 정말 신을 사랑하려 노력했다고 치자. 그 같잖은 노력이 성공했을 경우 세상이 아름다워지고 낙원이 찾아온다고 가정하자고.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실패할 경우 벌어질 일에 대해 전혀 고려하지 않았어. 책임지지 못할 경애가 지금의 세상을 이 모양을 만들었지.”
이번에는 케르츠가 할 말을 잃을 차례인 듯했다. 그는 조금 가라앉은 눈빛으로 하넨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이렇다 할 표정 변화는 없어 보였지만 할 말을 고민하고 있는 건 확실해 보였다.
하넨 또한 제법 심각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단어들 중 최대한 적절한 것만 고르려는 듯 천천히 말했다.
“그건 심지어 지상의 인간들을 위한 행동도 아니었을 거야.”
“…….”
“난 그런 무책임함을 신에 대한 사랑이라 인정할 수 없고.”
“…….”
“지금의 교단이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기는커녕 앞장서서 과거를 은폐하려 드는 것도 꼴사납다고 생각해. 그래서 나는 여전히 교단을 믿을 수 없어. 이 정도는 너도 인정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하넨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물었다. 케르츠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분명 케르츠가 또 새로운 반론을 내놓을 텐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든 탓에 나는 조금 긴장했지만…….
“……예. 마법사님이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지 알겠습니다.”
케르츠의 대답은 의외로 시원했다. 완전히 동의하는 듯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날을 세운 말을 내뱉지도 않았다. 방금 전까지의 태도를 보면 얼마든지 반론을 내놓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는 게 이상하게 여겨졌지만, 나는 곧 그 이유를 눈치챘다.
“그들의 결정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무조건적으로 그 사실에 동의해 달라고는 하지 않습니다. 마법사님의 말대로, 과거의 성직자들은 책임지지 못할 짓을 벌였던 걸지도 모르지요. 설령 그게 사랑이었다 할지라도 그들의 행동이 완전히 옳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래. 거기까지는 이해해 줘서 다행이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 조상들이 지은 죄가 없어지지도 않고, 악의 근원을 정화하는 우리의 목적에 의미가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악의 근원을 정화하는 것 이외에 이 세계를 구할 방법이 없다는 것 정도는, 마법사님도 인정하고 있겠지요.”
“그건……. 나도 인정해.”
“그렇다면, 적어도 용사님이 악을 정화하기 전까지는 마법사님이 가지신 의문을 잠시 접어 두실 수는 없을까요. 악이 정화되고 모든 일이 끝난 후, 그때 지금의 교단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고민해도 늦지는 않을 겁니다. 제 말이 틀립니까?”
한 걸음 물러섰다. 나는 케르츠의 태도에서 그런 인상을 받았다. 여전히 그의 눈동자는 벌겋게 충혈되어 있었고 표정도 조금쯤 굳어 있었으나, 얼마 전까지 희미하게 엿보이던 광기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하넨의 이야기에 완전히 동의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넨과 싸우고 싶지도 않다는 태도가 희미하게 엿보였다. 여전히 그 눈빛에는 희미한 언짢음이 남았지만 적어도 지금 고집을 부리지 않으려는 건 확실했다. 하넨 또한 그 사실을 눈치챘는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케르츠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알았어. 어차피 지금 당장 의심해 봤자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겠지. 불필요한 의심은 오히려 원정을 해치는 꼴이 될 테고.”
“…….”
“네 의견에 동의하는지 아닌지는 별개의 문제로 치더라도, 널 불안하게 만든 점은 미안해.”
“아니요, 어쩌면 제 쪽이 너무 민감했는지도 모릅니다. 아까 조금 무례한 발언을 한 것도 있고……. 그 점에 대해선 사과하겠습니다.”
케르츠는 그렇게 말하고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숨길 수 없는 피로가 그 얼굴에서 묻어나고 있었다. 하넨과 실랑이를 하느라 체력을 쓴 탓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근본적인 문제는 수면 부족 아닌가 싶었다. 생각해 보니 저 사람, 광증에 걸려 그 난리를 치느라 피곤할 텐데 한 시간도 제대로 못 잔 상태고…….
“돌아가서 조금 더 쉬어도 될까요? 다소 변명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피곤한 상태에서 말을 하다 보니 다소 감정이 격앙된 것도 있었습니다.”
“그래. 확실히 너 엄청 피곤해 보인다. 조금 자고 와.”
“마법사님은요?”
“나는 상인과 조금 더 이야기하다가 돌아갈게. 별로 졸리지는 않으니까.”
케르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용사가 있던 곳으로 돌아가 다시 눈을 붙이려는 모양이었다. 케르츠가 복도 저편으로 멀어졌을 때쯤에야, 하넨은 진이 빠졌다는 듯 끙 소리를 내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내내 무생물처럼 미동도 없던 인형은 그제야 내 품에서 빠져나가 하넨의 무릎을 쓰다듬듯이 두드려 주었다. 아마 본인은 어깨를 두드려 주고 싶었던 모양이지만 신장의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뭐야, 이 녀석은. 아까까지는 아무것도 안 했으면서 이제 와서 위로하기냐?”
“그 인형이 원래 그래요. 자기 불리할 땐 모른 척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가 나중에야 나타나서 잘난 척하고.”
“하긴 좀 얄미워 보이기는 하더라만……. 아야. 아야야. 때리긴 왜 때려?”
인형이 하넨의 무릎을 탁탁 때리기 시작하자 하넨은 낄낄거리면서 녀석의 옆구리를 간지럽혔다. 과연 촉각이 있는지조차 의문스럽긴 했지만 인형은 바둥거리면서 하넨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고, 당연하다는 듯 내 머리 위에 올라와 앉았다.
나는 하넨에게서 도망쳐 내게로 온 녀석을 조금 괴롭혀 볼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하긴, 이 녀석이라고 별 수 있었겠어? 방금 대화는 어디까지나 하넨과 케르츠의 싸움이었으니 이 녀석도 끼어들기가 민망했겠지.
나는 머리 위의 인형을 집어 들어 적당히 끌어안은 후 하넨을 바라보았다. 그는 꽤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괜히 말싸움만 했잖아. 진 빠지게.”
“그래도 화해하셨잖아요?”
“네 눈엔 그게 화해한 걸로 보이냐? 그냥 덮어 둔 거야. 너와 인형 녀석은 늘 있는 게 아니니 빼고, 용사는 너무 어려서 뭐가 뭔지도 모르니 그 녀석까지 빼면 이 미궁에서 의지할 건 한 사람밖에 안 남는다고. 그 상황에서 대놓고 싸울 수 있겠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러니까, 굳이 따지자면 전략적 화해구나. 서로의 의견에서 납득이 안 가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서로 의지해야 하는 상황에 상대의 감정을 상하게 할 수는 없다. 그러니 공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전까지는 적당히 덮어 두겠다는 소리네.
“지금 내가 케르츠와 싸워 봤자 좋을 일은 하나도 없어. 게다가 조금 씁쓸한 점도 있었고.”
“씁쓸한 점이라니요?”
“솔직히 나는 케르츠가 한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다 개소리라고 생각하지만.”
아니, 개소리라니 그건 좀 심하지 않나. 하넨은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듯 신경질적으로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그나마 조금 정돈되었던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부스스해졌지만, 그는 별로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입을 삐죽거렸다.
“케르츠 녀석의 광증, 대를 이어서 계속 전해져 내려온 거잖아.”
“네? 뭐, 그렇지요.”
“그렇다면 그 녀석의 부모도 광증을 앓았겠지? 어머니 쪽이 도살자였을지, 아버지 쪽이 도살자였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네가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바깥세상에는 그런 소문이 있었어. 어떤 도살자들은 노예 꼬맹이를 목줄 채워서 끌고 다닌다더라, 하는. 그런데 신기하게도 성인을 노예로 데리고 다니는 사례는 없다는 거야.”
나는 흠칫 놀라서 고개를 들었고, 하넨은 가볍게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하넨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지 알 것 같았다. 아마 그 소문 속의 꼬맹이는 노예가 아니라 도살자의 자식이 아니었을까. 성인을 노예로 데리고 다니는 사례가 없는 이유는, 도살자가 성인이 된 자식에게 자신의 광증과 이름을 물려주기 때문이고…….
새까만 그림자에 휩싸인 채 기도문을 흥얼거리며 걷는 도살자와, 목줄에 매인 채 비틀비틀 그 뒤를 따라가는 어린아이의 모습이 저도 모르게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마도 그 몸은 비쩍 말랐을 테고, 그 아이를 구해 주려는 사람은커녕 아이에게 접근하는 사람조차 없었을 거다. 그 상황에서 아이는 어떤 생각을 하고 누구에게 의지했을까? 과연 광증에 걸린 도살자는 자식에게 무엇을 어떻게 가르쳤을까?
그렇게 생각하다 보니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광증에 걸려 정상적인 판단을 하지 못하는 도살자가 어떻게 자기 자식은 구분할 수 있는지, 애초에 자식이 제대로 된 교육과 보호를 받을 수는 있는지, 그런 점들이 신경 쓰이긴 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점이 있다면.
“어렸을 때부터 광증에 걸린 부모를……. 신의 악함을 바로 눈앞에서 접하며 살아왔고, 나이가 들어서는 강제로 그걸 물려받아야 했다면.”
“…….”
“그러면 당연히 신의 악함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겠지. 게다가 상대가 부모라면 어떻게든 상대를 이해해 보고 싶기도 했겠고. 꼭 부모만 이해하고 싶은 게 아니라, 이런 사태를 만들어 낸 선조들에 대해서도 조금은 이해해 보고 싶었을지도 모르고.”
“…….”
“그렇게 생각하니 영 찝찝한 거야. 어쩐지 진심으로 말싸움할 마음도 안 나고 말이지. 애초에 내가 말싸움으로 그 녀석을 이겨 봐야 뭐가 남냐? 그 녀석은 지금 교단의 일원도 아니야. 그냥 교단에 붙잡혀 이 캄캄한 미궁에 밀어 넣어진 멍청한 도살자일 뿐이지…….”
하넨은 툴툴거리며 모포를 둘둘 말더니 그걸 베고 누웠다. 잘 생각이 없다더니 방금 전의 일로 조금은 피곤해진 모양이었다.
그렇구나. 케르츠의 그 추측, 과거의 성직자들을 변호하기 위한 이야기였다기보다는 오히려 스스로를 납득시키기 위한 이야기였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케르츠의 기이한 집착과 절박감은 거기에서 왔을 수도 있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이던 도중, 문득 하넨의 표정이 시선에 들어왔다. 찜찜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시무룩해 보인다고 해야 하나. 나는 하넨의 그 표정이 갑자기 신경 쓰였다. 케르츠도 케르츠지만, 하넨 저 사람도 참…….
“뭐랄까, 하넨 씨는…….”
“왜, 할 말 있어?”
“아뇨, 그냥. 생각보다 더 케르츠 씨를 아끼고 걱정하시는 거 같아서.”
“너는 또 무슨 헛소리를 하고 있어, 갑자기?!”
당황한 눈치가 역력한 하넨이 베고 있던 모포 꾸러미를 던지자, 내 품 안에 안겨 있던 인형이 쏙 빠져나와 뛰어오르더니 모포 꾸러미를 허공에서 잡아챘다. 이럴 때는 묘하게 손발이 맞는 녀석이라니까.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진 하넨과, 태연하게 모포를 들고 가 하넨에게 덮어 주는 인형을 바라보면서 나는 킥킥거리며 웃었다. 저 마법사님도 솔직한 성격은 못 되는 모양이었다.
“어쨌든, 당분간은 그냥 나 혼자 고민해 보려고. 케르츠 녀석이나 용사한테는 최대한 티 안 내고…….”
인형은 하넨의 머리 밑에서 짜부라진 채 미약하게 꿈틀거리고 있었다. 사람을 놀리는 듯 거들먹거리며 춤을 추던 인형을 아니꼽게 보던 하넨이 난데없이 지팡이를 휘두르더니 인형을 붙잡아 버린 탓이었다.
지팡이에서 흘러나온 황색 안개에 붙잡혀 버린 인형은 그대로 붙잡혀 하넨의 베개가 되었다. 진짜 맘먹고 빠져나오려면 얼마든지 빠져나올 수 있을 텐데 얌전히 베개 역할을 하는 걸 보면, 인형 녀석도 지금의 처지가 그다지 싫지는 않은 게 아닐까 싶었다.
“내 생각엔 말이지, 케르츠 녀석도 나랑 비슷하게 생각하고 있을 거야. 내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그래도 나와 싸워서 사이가 엉망이 되는 건 내키지 않는다든지.”
“뭐, 그래 보이긴 했지요.”
“어설프게 설득하려 해서는 먹히지도 않을 거야. 굳이 지금 당장 설득해야 하는지도 의문이고.”
“하지만 언젠가는 설득하실 생각이 있는 거지요?”
“당연하지. 교단 녀석들이 무슨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 모른 채 악의 근원을 정화했다가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게다가…….”
하넨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씁쓸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나는 케르츠하고는 달라. 저 녀석은 악의 근원을 정화하는 일 자체에만 집착하고 있지만, 만약 악의 근원을 정화했을 때 세상이 더 망가질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나는 하기 싫어.”
“하긴, 수백 년 전 성직자들의 전철을 밟기라도 하면 그것도 그것대로 문제죠.”
“케르츠는 죄를 씻기 위해서라면 자기 자신조차 희생할 것처럼 굴지만……. 나는 세상을 보다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여기에 온 거야. 그 녀석 같은 원죄는 없어.”
“…….”
“애초에 말이지, 왜 신에게는 악함이 있었던 걸까? 아무리 신이라 해도 완전히 선할 수는 없었던 걸까, 아니면 신의 악함 또한 어딘가에 필요해서 그랬던 걸까? 만약 후자였다면 과연 우리가 신의 악함을 완전히 정화해도 되는 걸까? 신의 악함을 전부 정화하면 지상의 오염은 사라지겠지만, 혹시 뭔가 다른 부작용이 생기는 건 아닐까?”
“……아직은 모르는 일이지요.”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인형 쪽을 흘끔 바라보았다. 녀석의 입장에서는 꽤 기분 나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지만, 정작 인형은 하넨이 어떻게 생각하든 아무래도 좋다는 양 태연하게 엎어져 있을 뿐이었다. 다만 녀석은 내 시선을 눈치챈 듯 고개를 슥 들어 나를 보았다.
[성장을 위해서는 의문이 필요한 법이다.]
그러고는 다시 베개 시늉을 했다. 묘하게 태평한 반응이었다. 음, 잘은 모르겠지만 하넨이 의문을 가지는 것 자체가 인형에게는 예상 내의 일이라는 거지? 게다가 어떤 측면에서는 하넨의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큰 문제가 없다니 그걸로 되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 보았던 일기장에 그런 내용도 있었지. 악할 수 있는데도 선을 선택하는 게 미덕이라나, 뭐라나.’
의문을 나름대로 극복하고 성장하는 게 저 인형이 바라는 걸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그것보다 더 깊은 의도가 있는 걸지도 모르고…….
내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하넨은 다시 한번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더니 몸을 일으켜 모포를 정돈했다. 인형 노릇을 하고 있던 베개, 아니지. 베개 노릇을 하고 있던 인형은 일어나지 않은 채 데굴데굴 몸을 굴려 내 쪽으로 이동해 왔다.
“뭐, 네 말이 맞아. 아직은 아무것도 모르지. 그러니까 하는 말인데……. 미궁을 면밀히 조사하다 보면 조금이나마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단서라니요?”
“생각해 봐. 교단 녀석들, 사태가 이 지경이 되고 난 이후로 미궁에 한 번도 안 왔을 리는 없잖아? 하다못해 사태 조사를 위해서라도 미궁에 들렀을 거라고.”
“그, 그렇겠네요.”
“정화의 기운을 가진 용사 녀석과 같이 다니는 우리들조차도 이 미궁을 돌파하기는 어려워. 그런데, 기껏해야 신관들 따위가 이 미궁을 제대로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아? 분명 중간에 사념에게 잡혀 죽거나 함정에 빠져서 죽었겠지.”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하넨 씨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함정을 조사하다 보면 죽은 신관들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물건이나 일기 등을 해석해 보면 사건의 내막이나 교단의 꿍꿍이를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대충 그런 이야기 같다. 분명히 일리 있는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런데 이상하다. 왜 이렇게 기시감이 느껴지지? 내가 지금 뭘 까먹고 있는 것 같은데.
“상인 너, 혹시 여건이 된다면 함정들을 살피면서 성직자들의 시체를 뒤져 보지 않을래? 물론 그 녀석들이 기록 같은 걸 꼼꼼히 해 뒀다는 보장은 없지만, 만에 하나 녀석들의 기록이라도 찾아낸다면 조금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거야.”
“……기록이요?”
“그래. 꼭 지금 교파의 성직자가 아니라도 돼. 그, 뭐냐. 어쩌면 말쿠테른의 성직자들이 이 미궁에 왔을 수도 있잖아. 그 녀석들의 기록이라도 얻을 수 있다면…….”
“자, 잠깐만요. 그러고 보니.”
나보다도 인형 쪽의 반응이 더 빨랐다. 자리에서 발딱 일어난 인형은 허겁지겁 내 자루를 뒤지더니 무언가를 꺼내 가져왔다. 나는 그걸 보고서야 깨달았다. 내가 무엇을 잊고 있었는지.
“왜 그래, 갑자기?”
“있었어요, 기록! 이래저래 정신이 없어서 까먹고 있었는데!”
“설마 인형이 들고 있는 이거 말이야?”
“맞아요! 이거, 그. 말쿠테른의 성직자가 가지고 있던 일기예요!”
“넌 그걸 왜 이제 말해?!”
[나는 아주 멍청하다. 케르츠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일기에 대한 건 조금도 떠올리지 못했다.]
머릿속을 흐르는 인형의 내레이션에 어이가 없어진 나는 인형의 꿀밤을 한 대 때렸다. 까먹은 건 자기도 마찬가지면서 꼭 나만 멍청한 사람 만들기는!
‘아니지, 어쩌면 안 까먹은 거 아니야?’
일기장의 존재를 알고 있으면서도 내가 어쩌나 보려고 가만히 있었다든지, 뭐 그런 가능성도 있기는 있다. 물론 이 인형 녀석도 그다지 똑똑한 편은 아닌지라, 가끔 똑똑해야 할 때 멍청하고 멍청해도 될 때 똑똑한 경향성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 일기장에도 제법 의미심장한 내용이 많았던 걸로 기억한다. 말쿠테른의 성직자들은 처음부터 악의 봉인을 떨떠름하게 여겼다느니, 뭐라느니. 워낙 실속이 없고 내용을 해독하기도 어려워서 사실상 거의 잊다시피 하고 있었는데.
일단 나는 인형이 들고 있는 일기장을 재빨리 낚아채 하넨에게 보여 주었다. 일기장을 몇 페이지쯤 넘기던 그는, 일기장 여기저기에 얼룩져 있는 검붉은 자국에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기분 탓인가? 예전에 봤을 때보다 더 지워진 부분이 많은 거 같은데.
“뭐야, 이거 내용을 거의 알아볼 수도 없잖아? 게다가 페이지가 달라붙어서 제대로 떼어 내기도 어려워.”
“페이지가 달라붙었다고요? 제가 봤을 때까지만 해도 그런 건 없었는데…….”
[나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일기장을 적셨다. 일기장의 일부가 내 피에 젖어 제대로 읽을 수 없게 되었다.]
잠깐, 일기장에 내 피가 묻었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일기장에 피 묻을 만한 일이 있었나? 어리둥절해져서 고개를 갸웃하던 나는, 얼마 전 광증에 걸린 케르츠에게 공격당해 부상을 입었던 일을 겨우 떠올려 냈다. 그러고 보니 머리가 뭉개지고 팔이 날아간 적도 있었지. 그 정도 상처라면 피가 많이 나왔을 만도 하다.
[평상시였다면 인형이 보호 마법으로 자루 안의 물건들을 보호해 주었겠지만, 그 당시의 나는 인형과 제법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래서 일기장이 제대로 보호받지 못했다.]
뭐야, 그럼 이제 읽지도 못하게 된 거야? 원래 일기장도 내용의 일부가 얼룩져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지금의 일기장은 피범벅이 되어서 페이지가 거의 달라붙어 있었다. 기껏 찾아낸 정보원이 이렇게 허무하게 망가지다니, 나는 조금 기가 죽었지만 어쩐 일인지 하넨의 표정은 그다지 어둡지가 않았다.
“그래도 마법적인 문제가 있는 건 아니라서 다행이네.”
“네?”
“누가 훼손 마법을 걸어 놨다든지 하는 건 아니잖아. 그럼 복원할 수 있어. 물론 재료가 있을 때의 문제겠지만.”
“그 복원이라는 게……. 어느 정도를 말하는 거예요? 핏자국은 지울 수 있어요?”
“핏자국은 확실히 지울 수 있어. 여기 이 오래된 얼룩은 지우기가 좀 힘든데, 이것도 마법 재료만 있다면 어떻게든 없앨 수는 있을 거야. 문제는 미궁 안에서 재료를 찾을 수 있냐 하는 거지만.”
뭐야, 그러면 일기장의 내용 전체를 확인할 수도 있다는 건가? 뜻밖의 전화위복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하넨은 내 얼굴을 보고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가방을 뒤지더니, 작은 수첩을 꺼내 뭐라고 적어선 종이를 찢어 내게 건넸다.
“미궁 안에서 이 재료들을 모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혹시라도 여기저기 뒤지다가 이것들을 발견한다면 모아서 내게 가져다줘. 그러면 내가 일기장을 복원해서 내용을 알려 줄게.”
“맨입으로요?”
“일기장의 내용을 알려 준다니까? 어차피 이 일기장, 너 혼자서는 복원 못 하잖아.”
“제가 그 일기장의 내용을 봐서 뭐 해요. 일기장의 내용이 필요한 건 하넨 씨 쪽이잖아요?”
끙, 하넨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지금 하넨은 영혼 조각을 가지고 있지 않으니 닦달해 봤자 당장 영혼 조각을 얻을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런 문제는 확실히 해 둬야 한다고.
물론 나도 이 일기장의 내용에 호기심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이 일기장은 내 거고, 일기장의 내용을 알고 싶은 건 어디까지나 하넨 쪽이다. 그러면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건 하넨이잖아.
“……후불로.”
“얼마 줄 건데요?”
“가격 협상은 나중에 하자. 넌 아직 재료를 가져오지도 않았잖아. 재료를 가져오면 그 재료의 가치에 따라 그때그때 영혼 조각을 줄게. 넌 일단 재료를 찾아보기나 하라고.”
“흠, 노력해 볼게요. 그런데 그 일기장의 존재를 케르츠 씨에게 알려 주긴 할 거예요?”
“글쎄, 어떻게 할까? 알려 주는 것도 좋긴 하겠지만 지금 당장 케르츠를 자극하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아. 어차피 지금 당장은 내용을 식별하기가 힘들기도 하고…….”
하긴 그렇겠다. 어차피 지금 보여 줘 봤자 피에 젖어 내용을 잘 알기도 힘들고, 아까 전의 일 때문에 케르츠도 제법 예민해져 있을 거다. 굳이 이걸 지금 보여 줘서 자극시킬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지.
“일단 이 일기장을 나에게 넘겨줄 수 있겠어? 핏자국을 없애는 것 정도는 지금도 할 수 있으니까. 네가 가지고 다니다가 운 나쁘게 함정에 걸려서 일기장이 갈기갈기 찢어지기라도 하면 안 되잖아?”
“이젠 인형이 상품을 보호해 줄 테니까 괜찮거든요? 그리고 하넨 씨라고 함정에 안 걸리라는 법 있어요?”
“뭐, 틀린 말은 아니네. 그러면 네 마음대로 해. 네가 가지고 다니든, 나에게 넘기든.”
나는 조금 얼굴을 찡그렸지만 일단 일기장을 하넨에게 건네주었다. 어쨌든 핏자국 정도는 지금 지울 수 있다니 믿어 봐야지. 게다가, 하넨은 머리가 좋으니까 일기장의 일부를 읽고 무언가 내가 눈치채지 못한 사실을 깨달을지도 모른다.
“이따가 일기장 값 내셔야 해요.”
“야, 내가 핏자국 없애는 건 공짜로 해 주잖아. 그걸로 대체하면 안 되냐?”
“말도 안 되는 소리 마세요. 애초에 일기장을 넘기는 것 자체가 제 입장에서는 손해인데.”
“알았어, 알았다고. 짠돌이 녀석 같으니라고.”
하넨은 일기장을 받아 가방 깊은 곳에 쑤셔 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슬슬 용사 일행에게 돌아갈 모양이었다. 나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뒤를 따라 복도를 걸었다.
복도를 걷는 동안 우리는 방금 전 일기장에 대해서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어쩐지 비밀 공모라도 꾸미는 느낌이라 기분이 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