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광증에 시달리는 도살자
쉬는 시간마다 일기를 읽으며 정보를 얻으려 노력해 보았지만, 내가 처음 보았던 페이지 이상의 정보를 얻기는 어려웠다.
‘자기 이야기만 잔뜩 써 놓았네. 뭐, 일기니까 당연한 거지만…….’
이름 모를 도시를 돌아다니고, 미궁에 같이 들어갈 동료를 구하고, 미궁을 탐험하며 함정을 파훼하는 등의 내용이 일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모험 소설을 감상하는 기분으로 읽으면 아예 못 볼 정도는 아니었지만 솔직히 조금은 지루했다. 어쩔 수 없지, 성직자에게 필력을 기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나마 교리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 읽을 만했다. 성직자답게 신학에 대한 고민이 많은 모양인데, 이 사람은 묘하게 ‘선’과 ‘악’의 개념에 집착하고 있었다. 힘의 유무와 상관없이 스스로 선악을 선택할 수 있어야 진정으로 올곧은 사람이라는 정론적인 이야기였다.
「……은 전능하면서도 ……때문에 위대한 것이다. 얼마든지 악할 수 있으면서도 결국 선을 선택한다. 우리 ……종파의 가르침 또한 ……. 아무리 종파가 다르다고는 해도 성직에 몸담은 자들이 그 진리를 모른다니, …….」
그나저나, 군데군데 지워진 이 내용은 대체 뭘까. 인형이 대답해 주지 않았기에 나는 혼자서 추측할 수밖에 없었다. 핏자국이나 물로 얼룩져 번진 자국이 없었더라면 조금 더 추리하기가 편할지도 모르는데.
악의 근원이 어딘가에서 분리된 것까지는 알겠는데 대체 무엇으로부터 분리되었는지, 지금 세력을 잡고 있는 교파가 악의 근원을 분리해 봉인한 것까지는 알겠는데 왜 일기의 주인공은 그 선택을 비난하는지. 너무 빈 구멍이 많아서 그저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악이란 건 뭘 말하는 거야?’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가? 순수한 악의 근원이라는 게 존재하기는 하나? 그런 철학적인 생각에 허우적거리며 걷고 있는데, 머리 위에 앉아 있던 인형이 내 가면 윗부분을 톡톡 쳤다.
“왜?”
[독특한 구조의 광장이 나타났다.]
독특한 구조? 요즘은 오히려 평범한 구조의 광장이 드물지 않던가? 발끝만 보면서 걷고 있던 나는 내심 어리둥절해져서 고개를 들었다. 복도 너머에는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새로운 광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확실히 일반적인 구조가 아닌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 해도 새삼스럽게 특별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저 얇은 돌벽이 광장을 절반으로 나누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래도 왼쪽 길과 오른쪽 길을 선택해서 갈 수 있는 구조인 모양인데…….
“그냥 왼쪽 길로 가면 되는 거 아니야? 오른쪽 길은 지옥도나 마찬가지고.”
나는 주머니에서 보석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은 후 광장을 바라보았다. 왼쪽 길에는 사념이 득실득실해서 평범한 사람이 들어갔다간 곧바로 찢겨 죽을 것 같은 구조고, 오른쪽은 사념 하나 없이 텅 비어 있다. 물론, 정확히는 ‘텅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일 뿐이지만.
나는 바닥에 내려놓았던 보석을 다시 집어든 후 오른쪽 길에 시선을 두었다. 보석의 효과를 받은 채로 오른쪽 길을 보면, 붉다 못해 아예 검게 느껴질 정도로 풍경의 색이 다르게 보였다. 함정 밭이라는 뜻이다. 그것도, 잘못 건드렸다간 그대로 사망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위험한 함정.
어차피 사념이 있는 쪽으로 가면 공격받을 염려도 없을 테니 상관없지 않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왼쪽 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다가 흠칫 멈춰 섰다. 광장 건너편에 있는 두 개의 문이 이상하게 신경 쓰였던 탓이다. 문 옆에 레버처럼 생긴 게 각각 하나씩 붙어 있었다.
나는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머리 위의 인형을 집어 들어 마주 보았다. 인형은 이제 눈치챘냐는 듯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레버 두 개를 동시에 작동시켜야만 양쪽 문이 함께 열리는 구조다. 어느 하나만 작동시켜선 효과가 없다.]
“어, 그럼 좀 까다롭겠다.”
[애초에 이 광장은 두 명 이상의 동료들이 협력해서 열어야 하는 구조다. 사념들 사이에 있는 스위치를 누르면 오른쪽 공간의 함정이 일부 해제되고, 오른쪽 공간의 함정 중 일부가 발동되면 왼쪽 공간의 사념이 일부 사라지는 식이다.]
“뭐야, 이거. 그러니까 일종의 퍼즐이란 거잖아?”
인형 녀석이 ‘독특한 구조’라고 했던 이유를 이제 알겠다. 지금까지는 아무리 함정이 어렵다 해도 혼자서 돌파할 수 있는 구조였는데, 이 광장은 아무리 뛰어난 실력이 있다 해도 혼자서는 돌파할 수 없는 구조였다. 오히려, 협력하기에 따라선 능력이 좀 부족하다 해도 어떻게든 함정을 돌파할 수 있고…….
그러면 내가 왼쪽 길, 인형이 오른쪽 길로 가야 하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왼쪽 길로 발을 들이려 했지만, 인형이 고개를 저으면서 내 손을 탁탁 쳤다.
[저 레버는 일반적인 기계 장치가 아니다. 레버를 작동시키기 위해서는 마력을 불어넣어야 한다.]
“마력?”
[인형은 마력을 불어넣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아무런 능력도 없는 무능한 언데드기 때문에 마력 같은 걸 불어넣을 재주가 없다.]
“너란 놈은 말을 해도 꼭 그렇게……. 됐다. 어쨌든 사실이기는 하니까.”
내가 혀를 쯧 차며 한숨을 쉬자, 인형은 내 손에서 쏙 빠져나오더니 내 바짓단을 붙잡고 쭉쭉 잡아당겼다. 가지 말라는 노골적인 의사 표현이었다. 아니, 하지만 말이야. 안 가면 어쩔 건데? 어쨌든 언젠가는 이 광장을 돌파해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잖아.
“그럼 이 문은 어떻게 지나가?”
[용사 일행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생각해 보니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용사 일행도 이 광장을 지나가긴 지나가야 할 테니까. 모두가 힘을 합쳐 돌파한다면 오히려 더 안전하고 빠르게 지나갈 수 있을 테니, 인형의 제안은 확실히 좋은 아이디어 같았다.
나는 오던 길을 거꾸로 돌아가 용사 일행을 찾아보기로 마음먹었다. 오던 길을 다시 돌아가는 데에는 의외로 시간이 많이 걸렸지만, 그렇다고 마냥 앉아서 기다리는 것도 지루했으므로 그저 소일거리 삼아 걸었다. 이미 뒤진 곳도 한 번 더 뒤져서 상품이 될 만한 게 있는지 확인도 하고, 이미 다 읽어 내용을 외우다시피 한 일기장을 괜히 다시 뒤적거리다 보니 그럭저럭 시간이 흘렀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아까 내가 일기와 팔찌를 얻었던 함정 근처까지 가자, 복도 저 너머에서 용사 일행의 실루엣이 보이고 이야기를 나누는 목소리도 들려왔다. 나는 용사 일행에게 함정에 대해 경고해 줘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지만…….
“마비 독 냄새가 역겹군. 함정이야.”
“마비 독 냄새? 그런 냄새가 나나요? 하넨은 냄새를 잘 맡아서 신기해요.”
“나는 독을 다루는 마법사니까. 독에 대한 거라면 아무리 희미한 흔적이라도 금방 알지. 아마 이 근처의 벽이나 바닥이 뒤집히면서 유독 가스로 가득 찬 비밀 공간에 갇히게 되는 구조일 거야. 이 정도면 하급 함정이로군. 탐지 마법을 쓸 것도 없어.”
저 일행이 함정 때문에 고생할지도 모른다고 내심 기대했던 나는 조금 민망해지고 말았다. 아니, 뭐. 저 사람들이 함정에 안 걸려드는 게 더 낫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 딴에는 매우 까다로운 함정이라고 생각했던 게 저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니 괜히 부끄럽단 말이지.
나는 용사 일행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케르츠는 바닥에 작은 돌을 던졌고, 바닥이 휙 회전하는 걸 보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함정의 범위를 대충 알겠다고 중얼거린 그는 곧바로 하넨을 안아 들었다. 좀 민망한 자세로.
“이, 이 멍청이가 뭐 하는 거야!”
“뭐 하냐니요, 함정이 있으니 뛰어넘어야 할 거 아닙니까?”
하긴 하넨은 체력이 안 좋으니 멀리뛰기 같은 건 못하겠지. 함정이 안정화될 때까지는 바닥이 다시 움직이지 않을 테니 굳이 뛰어넘을 것 없다고 설명해 줄까 했지만, 공주님처럼 안긴 하넨이 바둥거리는 모습이 재미있어서 나는 일단 그 모습을 구경했다.
케르츠는 하넨이 바둥거리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뒤로 몇 걸음 물러나더니, 가볍게 도움닫기를 하고는 함정을 뛰어넘었다. 사람이 저렇게 멀리 뛸 수 있나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도약이었다. 심지어 성인 남자 하나를 안았는데 저렇게나 가볍게 뛰다니.
용사는 케르츠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더니 그를 따라하듯 가볍게 함정을 뛰어넘었다. 이쪽은 심지어 도움닫기도 없이 그저 훌쩍 뛰어서 케르츠와 비슷한 거리를 뛰었는데, 사람을 안고 뛴 게 아니란 걸 감안해도 이 정도면 솔직히 대단했다.
나는 조금 입을 벌린 채 세 사람을 바라보았고, 함정을 가볍게 돌파한 용사 일행은 복도에 서 있던 나를 발견했다. 용사와 케르츠는 꽤 반가워하는 눈치였지만…….
“상인이다.”
“이번에는 꽤 일찍 만났군요.”
“……저, 저 자식은 왜 하필 이 타이밍에 저기 있는 거야!”
케르츠에게 공주님처럼 안겨서 함정을 뛰어넘은 꼴을 보인 게 좀 부끄러웠는지, 하넨은 씩씩거리며 성을 내기 시작했다. 나는 재미있어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꾸벅 인사만 해 보였다. 하넨은 재빨리 케르츠의 품에서 빠져나왔고, 아니나 다를까 용사는 내게 달려와서 가면을 벗기고는 볼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오래간만이에요.”
“저기요, 원래 요즘 용사들은 볼을 만지는 식으로 인사를 해요?”
“그런 건 아니지만 볼을 만지작거리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요. 차갑고 말랑말랑해요. 영혼 조각은 더 드릴게요.”
“아니, 저기요? 제 볼은 상품 같은 게 아닌데요…….”
내가 이 용사의 버릇을 잘못 들인 게 분명해. 나는 아주 당연하다는 듯 내 볼을 만지는 용사의 손을 떼어 냈고, 용사는 생글생글 웃으며 순순히 물러났다. 조금 서운해 보이긴 하지만 별로 싫어하는 기색은 없었다.
이 용사님이 착하긴 착해, 상식이 없어서 문제지……. 이렇게 생각하는 시점에서 나도 용사에게 익숙해지긴 한 걸까.
“너 이 자식, 용사한테 이상한 걸 가르쳐 주지 말라고. 어린애한테 대체 무슨 버릇을 들이는 거야?”
“좀 덜 만지게 해 보려고 그런 것뿐이라고요! 실제로 영혼 조각은 받지도 않았잖아요! 그나저나……. 여러분에게 드릴 말씀이 있어요.”
나는 용사 일행에게 간단히 상황을 설명했다. 저쪽 광장에 함정의 길과 사념의 길로 각각 분리된 공간이 있는데, 그 공간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협력이 필요할 것 같다고. 나 혼자서는 지나갈 수 없으니 같이 협력해서 지나가는 게 어떻겠냐고.
“쪽수가 많으면 쉽게 파훼할 수 있는 구조 같군. 뭐, 한번 가 볼까?”
용사 일행은 두 팀이 협력해서 움직여야 하는 구조의 함정을 신기하게 여기는 것 같았지만 그뿐이었다. 특히 하넨은 제법 으스대며 광장까지 따라왔다. 하지만, 막상 광장을 직접 보자 그들의 얼굴빛은 조금 안 좋아졌다.
“정확한 타이밍에 양쪽 스위치를 작동시켜야 무사히 광장 저편까지 갈 수 있어. 조금이라도 늦으면 안 될 테니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어야겠는데.”
“어려운 함정입니까, 마법사님? 일단 왼쪽 길의 사념을 전부 없앤 다음 오른쪽 길의 함정을 돌파하면 크게 무리는 없을 것 같은데.”
“그랬으면 좋겠지만 골치 아픈 마법이 광장 전체에 걸려 있어. 불살의 금제.”
“……아, 그건 좀.”
케르츠는 질색을 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설명을 들어 보니, 이 광장 내부에는 그 어떤 존재도 죽여서는 안 된다는 일종의 ‘제한’이 걸려 있는 모양이다. 물론 제한이 적용되는 대상은 광장을 통과하기 위해 찾아온 모험가들뿐이고, 사념에게는 별도의 제한이 걸려 있지 않은 모양이다. 사념은 마음대로 우리를 죽일 수 있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 뭔가를 죽이면 어떻게 되는데요?”
“금제를 어기면 그 피해가 우리에게 고스란히 돌아와. 이 경우에는 우리가 앗아간 만큼의 생명이 사라지는데, 즉 이 광장에 있는 사념 세 마리만 죽여도 우리 일행이 전멸한다는 소리지. 물론 다치게 하는 것 정도는 상관없겠지만……. 이래서야 용사의 정화 능력을 쓸 수도 없어.”
용사는 하넨의 말에 조금 시무룩해진 듯 고개를 숙였다. 뭐야, 이거 생각보다 어렵잖아. 오른쪽의 함정 길은 그렇다 쳐도, 왼쪽의 사념 길을 아무도 죽이지 않고 통과해야 한다고? 나야 그렇다 쳐도 용사 일행들에게는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닌데?
“그래도 희망이 아예 없지는 않아. 오른쪽 함정을 발동시키면 왼쪽 벽의 사념 중 일부가 사라지는 구조의 마법이 파악되었으니……. 그런데, 상인. 너 그 인형과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네? 그렇기는 한데요.”
“그럼 혹시 우리를 도와줄 수 있겠어? 인형은 함정 쪽, 너는 사념 쪽에서 따로 움직이는 식으로.”
하넨은 내가 떨떠름하게 여긴다고 생각했는지 조금 더 설명을 추가했다. 일단 저 안으로 들어가고 나면, 벽이 시야를 가로막아 벽 너머의 상대가 뭘 하고 있는지 알기가 어렵다. 동시에 레버를 내려야 하는 상황에서 서로의 상태를 확인하지 못한다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나와 인형처럼 정신이 연결되어 있다면 즉각적으로 서로의 상황을 알 수가 있다. 게다가 인형은 작은 몸집으로 함정을 파훼할 수 있고, 나는 사념에게 공격당하지 않는 특성을 이용해 스위치를 쉽게 건드릴 수 있다. 그러니 나와 인형이 정신적으로 교류하며 용사 일행에게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다는 게 그의 이야기였다.
“대가는 섭섭하지 않게 치를게. 일단은 도움을 받는 셈이니까.”
“아뇨, 뭐 대가까지야. 어차피 저도 혼자서는 이 광장을 못 지나가서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어요. 저한테는 마력이 없어서 양쪽 레버를 동시에 작동시킬 수가 없었거든요.”
“뭐, 그러면 서로 돕는 셈이 되겠군. 잘 부탁해. 어쨌든 조를 나눠 볼까? 누가 함정 쪽으로 가고, 누가 사념 쪽으로 갈지.”
용사 일행은 자기들끼리 모여 앉아 나름대로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사념 쪽에는 용사가, 함정 쪽에는 하넨과 케르츠가 가지 않을까 싶었다. 하넨은 마법사라서 마법으로 이루어진 함정을 파악하는 데 능숙하고, 용사는 아무리 정화 능력이 봉쇄되었다고는 해도 제법 움직임이 빠르니까…….
“너는 케르츠와 같이 왼쪽 길로 가. 케르츠가 인면철의 마력으로 레버를 작동시키면 되겠지. 나와 용사는 네 인형을 데리고 오른쪽 길로 갈게.”
어, 잠깐만. 뭐라고? 하넨의 말이 끝나자마자 케르츠는 빙긋 웃으며 내 쪽으로 다가왔다.
저 사람의 미소가 묘하게 무서워 보이는 건 단지 내 착각일까.
* * *
오른쪽 길 앞에 선 하넨은 용사와 인형을 붙잡고 앞으로의 전략을 설명했다. 다만 그는 직접적인 설명을 늘어놓는 것보다 용사 일행의 주의를 끄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소모해야만 했다.
용사는 인형의 뺨을 잡아당기거나 도망치려는 인형을 붙잡는 데에 재미가 들렸는지 하넨의 설명을 거의 흘려듣다시피 했고, 인형 또한 용사에게서 도망치는 데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설명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결국 용사가 꿀밤을 한 대 맞고, 인형을 만지는 대신 그냥 끌어안고 있는 정도로 타협한 이후에야 하넨은 제대로 된 설명을 이어 나갈 수 있었다.
“일반적인 마법으로 이루어진 함정이라면 어지간해선 내가 파훼할 수 있어. 다만, 저 안에는 직접 스위치를 눌러서 꺼야 하는 함정들도 다수 존재해.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벽이 움직이기 시작하면 감춰졌던 스위치가 보일 거야. 그런 함정들은 인형이 움직여서 꺼 주면 돼.”
“그럼 저는 뭘 해야 하나요?”
“너는 날 업고 내가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면 돼. 저 안에는 인지 계통의 함정들도 꽤 있는데, 대체로 균형 감각을 흐트러뜨리거나 환상통을 유발하거나 신체의 인식을 일그러뜨리는 것들이 많아. 그런 마법들까지 일일이 파훼하기에는 시간이 없을 테니, 그런 쪽에 면역이 있는 네가 내 팔다리가 되어 움직여 줘야 해.”
저 사람, 짧은 시간 안에 뭘 엄청 많이 생각해 뒀네. 역시 마법사라서 머리가 좋은 건가? 나는 괜히 케르츠를 흘끔거리며 올려다보았고, 케르츠는 무슨 일이냐는 듯 빙긋 웃으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우리는 저런 거 안 해요?”
“저런 거라니요?”
“그, 뭐랄까. 브리핑? 작전 회의? 뭐 그런 거 있잖아요.”
“작전 회의 같은 걸 하기엔 너무 전략이 단순하지 않나요? 당신은 사념이 사라지게 하는 스위치를 누르고, 저는 그동안 사념에게서 열심히 도망을 다니다가 문 옆의 레버를 내려야겠지요. 어쩌다 보니 짐 꾸러미 처지가 되었네요.”
아하하, 케르츠는 멋쩍은 듯 웃어 보이며 어깨를 으쓱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실제로 짐 꾸러미가 되는 건 내 쪽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사념에게 공격당하지 않는다는 이점을 가지고 있지만 신체 능력에 있어서는 보통 사람 수준밖에 안 된단 말이지.
반면 저 사람은 사념에게 공격당한다는 단점이 있더라도 나보다 신체 능력이 월등히 뛰어난 편이니, 의외로 저 사람이 스위치란 스위치는 다 눌러 버리고 나는 저 사람을 따라가는 데에만 급급할지도 모르지.
물론 어느 쪽이든 큰 상관은 없을 거다. 그저 이 광장을 통과하기만 하면 충분하니까.
[광장에 발을 들이는 순간 인형과 나는 서로의 시야를 공유하게 된다. 나는 인형에게 지시를 받아 직접 스위치를 누르거나, 케르츠에게 사념의 시선을 끌어 달라고 부탁하는 식으로 움직이면 된다.]
나와 케르츠는 왼쪽 길 앞에, 하넨과 인형과 용사는 오른쪽 길 앞에 섰다. 가벼운 심호흡을 들이쉰 후 우리는 조심스럽게 길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등 뒤에서 문이 닫히고, 지금까지는 우리에게 관심이 없어 보이던 사념들이 일제히 나와 케르츠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달려요, 어서!”
쏟아지는 수많은 뼈의 칼날들에 기겁하며, 나와 케르츠는 가장 가까운 곳의 스위치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오른쪽 벽 너머에서는 쇳조각 같은 게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일단 인형과 시야가 연결되어 있으니 어떤 상황인지 보고 싶으면 볼 수야 있겠지만 그랬다간 오히려 집중력이 흐트러질 게 분명했다.
애초에 지금은 이쪽 길을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지금은 그저 스위치 앞까지 무사히 도착하는 데 온 신경을 집중할 수밖에 없다.
[하넨과 용사와 인형은 아직 무사하다. 나는 사념의 네 번째 옆구리에 있는 스위치를 발견했다.]
‘저걸 누르면 돼?’
[아직은 아니다. 지금 하넨과 용사가 딛고 있는 발판이 완전히 사라지기 직전에 누르면 된다.]
사실 지금은 누르고 싶어도 누를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수십 개의 팔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사념의 몸뚱이를 노려보았다. 분명 저 사념의 옆구리에서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스위치 하나가 보이기는 했지만, 문제는 저 사념이 마구잡이로 움직이고 있어서 도저히 스위치를 누를 기회가 안 잡힌다는 점이었다.
나는 사념의 공격으로부터 완전히 안전한 게 아니었다. 사념이 날 공격하려 들지 않는 건 사실이지만, 사념이 아무렇게나 눈먼 공격을 뿌려 대면 잘못하다가 내가 맞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케르츠 씨! 혹시 저 사념의 팔을 자를 수 있겠어요?”
“일단 해 보죠!”
케르츠 또한 스위치를 발견했는지 곧바로 그 사념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사이 나는 인형 쪽의 상황을 파악했다. 조금 정신을 집중하자, 아마도 인형의 것으로 추정되는 시야가 머릿속에서 동영상처럼 떠올랐다.
마법으로 이루어진 듯한 반투명한 팔이 하넨과 용사를 향해 뻗어지고 있었다. 실제로 물리적인 압박을 주는 건 아닌 듯하지만 정신을 쇠약하게 하는 데에는 확실히 효과가 있는 듯, 하넨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그동안 용사는 하넨을 업은 채 자신에게 날아오는 쇠톱날을 피하고 있었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흠집 하나 없어 보이던 바닥은 용사가 발을 딛는 대로 균열이 퍼져 나갔다. 용사는 벽으로부터 튀어나오는 쇠뇌와 톱날을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 다니고 있었다. 용사는 빨리 앞으로 나아가고 싶은 눈치였지만, 앞길을 막은 채 돌아가고 있는 거대한 톱니바퀴 때문에 머뭇거리고 있는 듯했다.
‘저 스위치를 누르면 톱니바퀴가 사라지는 건가?’
“지금이에요!”
그 순간, 케르츠의 톱이 사념의 팔 세 개를 순식간에 끊어 놓았다. 사방으로 튀는 피와 사념의 비명 때문에 나는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사념이 요란하게 바둥거리며 케르츠를 공격하자 그는 몸을 날려 뒤로 물러났고, 나는 그 틈을 타서 곧바로 사념의 품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물론 여전히 위험하기는 했지만 여러 개의 팔이 떨어져 나간 덕분에 그럭저럭 틈이 생겼다.
일단 사념의 품 안으로 기어들어 가기는 했지만, 아직 용사 쪽의 발판이 다 무너지지 않았으므로 나는 지금 당장 스위치를 내릴 수 없었다. 분명 인형은 발판이 다 무너지기 직전에 스위치를 내리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나는 잠시 숨을 돌리는 틈을 타서 케르츠를 흘끔 바라보았다. 케르츠는 사방에서 쏟아져 오는 사념들의 공격을 피해 내고 있었다. 짐 덩어리니 뭐니 엄살은 피웠지만 역시 신체 능력이 대단했다. 아니, 오히려 예전에 몇 번 봤던 것보다 더 잘 싸우는 것 같기도 한데…….
‘어, 잠깐만.’
방금 저 사람의 몸 주변에서 까만 그림자 같은 게 일렁거리지 않나? 나는 순간적으로 케르츠의 주변을 감싸다가 사라진 그림자에 시선을 두었다. 내가 잘못 본 건가? 아니면 그냥 사념의 일부가 저 사람 주변을 감싸고 있었던 것뿐인가?
[준비해야 한다.]
내가 거기에 신경을 쓰려는 찰나, 인형의 신호가 머릿속을 팍 스치고 지나간 탓에 나는 정신을 차렸다. 용사 일행이 밟고 있는 바닥은 이미 균열투성이고, 일부는 완전히 무너져서 더 이상 버티기가 힘들 듯했다.
더 있으면 발판이 무너지게 생겼다는 판단이 들자마자 나는 곧바로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자마자 오른쪽 길을 막고 있던 톱니바퀴가 벽 안쪽으로 접혀 들어갔고, 용사는 하넨을 업은 채 앞으로 뛰었다.
[다음 스위치로 이동해야겠다.]
“앞으로 가요! 다음 스위치를 작동시켜야 해요!”
나와 케르츠는 다음 스위치가 있는 방향을 향해 달리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벽에 달라붙어 있던 사념이 순식간에 부풀어 길을 막았다. 아예 앞으로 지나가지도 못할 정도의 부피감을 자랑하는 사념은, 피부에 난 수십 개의 구멍에서 누런 액체를 마구 뿜어내기 시작했다.
“저, 저건?”
“산성액이군요. 저건 좀 힘들겠는데……!”
케르츠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오른쪽 길의 인형이 벽을 붙잡고 날렵하게 이리저리 점프하면서 천장의 스위치를 작동시켰다. 천장에는 수많은 쇠사슬이 얽혀서 있어서 보통 사람은 스위치에 손을 집어넣기도 어려울 지경이었지만 인형은 작은 몸을 이용해 쇠사슬 사이의 빈틈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인형이 스위치를 누르자마자, 그와 동시에 부풀어 있던 사념이 바람 빠진 풍선처럼 팍 쪼그라들어 버렸다. 더 이상 산성액을 뱉어내지도 않았다. 아무래도 인형이 누른 스위치가 이쪽의 사념을 무력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모양이었다.
“어서 가요!”
죽지 않은 듯 아직 희미하게 꿈틀거리는 사념을 지나쳐, 우리는 다음 스위치를 향해 부지런히 달렸다. 아직 갈 길은 멀었지만, 어떤 식으로 협력해야 할지 감이 잡혔다.
하넨의 지팡이 끝에서 흘러나온 검푸른 빛이 벽 한편을 막고 있던 보호막을 녹여 없앴다. 용사가 팔을 뻗어 보호막 안쪽의 버튼을 누르자, 케르츠를 덮쳐 오던 머리 세 개 달린 사념이 전기를 맞은 듯 몸을 파르르 떨었다. 나와 케르츠는 그 틈을 타서 앞으로 나아갔다.
“됐어, 거의 다 왔어!”
그다지 넓지도 않은 광장에 무슨 놈의 사념과 함정이 이렇게 많은지 모르겠다. 우리는 지난 몇 시간 동안 셀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사념과 함정을 돌파해 왔다. 매 순간이 긴장의 연속이었지만 적어도 지금까지는 일이 잘 돌아가고 있었다. 협력은 그럭저럭 순조로웠고, 우리 일행은 어찌어찌 상처를 입지 않은 채 광장을 돌파해 나가고 있었다.
우리는 광장의 끝까지 거의 도착한 상태였다. 케르츠가 레버 주변에 달라붙은 거미 모양의 사념들을 떼어 내고, 하넨이 자기 쪽 레버에 걸린 방해 마법을 해제하자 나는 이제 거의 마음을 놓다시피 했다. 제법 어렵고 험난한 여정이기는 했지만 무사히 돌파했다는 게 중요하다.
[내가 셋을 세면 양쪽에서 레버를 동시에 내리는 게 좋겠다.]
“……셋 셀게요! 다 세고 나면 레버를 내려 주세요! 하나! 둘!”
케르츠는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하나, 둘, 셋 하고 크게 숫자를 외쳤다. 어차피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 숫자를 세는 것뿐이었으므로 굳이 느리게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숫자를 세던 와중 아주 잠깐 딴생각에 빠져들었다.
‘그러고 보니, 이 함정에서는 뭐 건질 거 없나?’
지나치게 배부른 욕심이란 걸 알면서도 괜히 그런 생각을 했다. 운이 좋다면 무언가 상품 하나를 건질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았다. 물론 지금 이 상황에서 천장을 기어올라 상품이 될지도 모르는 장식을 긁어 낼 생각은 없었고, 그저 습관적인 행동이었을 뿐이었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그 습관적인 행동을 조금만 더 일찍 했더라면 좋았을지도 모르는데.
“셋……?!”
천장에는 장식 대신 핏빛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지금까지는 사념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차마 보지 못했던 문장이었다. 아니, 어쩌면 우리가 탈출하기 직전이 되어서야 저 문장이 새로 나타났는지도 모르지. 사실 어느 쪽인지는 아무래도 좋지만……!
「한쪽은 문 너머로, 한쪽은 바닥 아래로.」
나는 그 문장의 뜻을 이해하자마자 숨이 턱 막히고 말았다. 이걸 함정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조심해요, 다들!”
내가 비명처럼 외쳐 보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하넨과 케르츠는 내가 경고하기도 전에 동시에 레버를 당겼고, 무언가가 철컹 열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추락감이 전신을 덮쳐 왔다. 예전에 지름길을 사용할 때마다 느꼈던 감각이긴 했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어딘가 공포스러웠다.
우리 쪽의 문은 열리지 않았다. 대신 바닥이 열렸을 뿐이다.
나와 케르츠는 그대로 아래층을 향해 추락하고 말았다.
* * *
쾅, 요란한 충돌감과 함께 몸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케르츠의 희미한 신음이 머리맡에서 들려왔다. 제법 높은 곳에서 떨어졌으니 아프기는 하겠지. 아니, 저 사람은 언데드가 아니니까 단순히 아픈 수준을 넘어서 어디 한 군데 다쳤다 해도 이상하지는 않을 거다. 어쩌면 어디 한 군데 부러졌을지도…….
“괜찮아요, 케르츠 씨? 어디 안 다쳤어요?”
“딱히 다친 데는 없는 거 같습니다. 그쪽은……. 그, 괜찮습니까?”
“저는 애초에 언데드니까 뭐……. 예전에도 이런 식의 지름길을 이용한 적이 많고요.”
케르츠의 목소리에 고통의 기색이 없는 걸 보니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는 지금 우리가 어떤 환경에 처해 있는지 고민해 보았다. 일단 주변은 조용했고, 앞뒤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사방이 캄캄했다. 우리가 비밀 공간에 갇혔는지, 아니면 그저 좀 어두운 광장에 떨어졌을 뿐인지 잘은 모르겠다.
“아무리 언데드라고는 해도, 우와……. 일어날 수는 있겠습니까?”
“일어날 수 있긴 한데……. 저희가 어디 있는 거죠? 주변이 캄캄해서 앞이 안 보이는데.”
“잠깐, 하나도 안 어두운데요? 그냥 평범한 광장이잖아요. 당신 지금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데요.”
“그럼 제가 뇌진탕인 모양이네요. 시야가 까만 걸 보니까. 저기, 잠깐 기다려 주실래요? 조금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
그러고 보니 거꾸로 떨어지면서 머리를 좀 세게 부딪친 거 같은 느낌도 들고, 내 상태를 확인한 케르츠가 좀 기가 막힌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같고. 이제 보니 케르츠가 아니라 오히려 내 쪽이 문제였구나. 어쩌면 잘못 떨어지는 바람에 머리가 절반쯤 함몰된 게 아닐까?
나는 최대한 편하게 누운 자세를 유지한 채 눈을 여러 차례 깜빡였고, 잠시 시간이 지나자 다행히도 시야가 돌아왔다. 확실히 다른 광장과 마찬가지로 주변 분간은 될 만큼 밝은 곳이었다. 내가 떨어진 곳 주변에 핏자국이 있기는 한데 이건 아무래도 내가 흘린 거 같다.
광장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이 미궁이 양심은 있는지 안전한 광장에 떨어뜨려 놓은 모양이었다. 고개를 돌려 보니, 조금 걱정스러운 표정의 케르츠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형편없이 추락한 나와는 달리 생채기 하나 없는 말끔한 모습이었다.
“이제 좀 괜찮아 보이는군요. 다행입니다.”
“대체 아까는 어땠길래 그런 표정으로 봐요? 어쨌든, 이상한 비밀 공간 같은 데 떨어지지 않은 건 다행이네요. 그냥 아래층에 떨어진 것뿐이니.”
“확실히 그래 보이기는 하지만……. 혹시 지금도 인형과 정신이 연결되어 있습니까? 저쪽의 상황을 알고 싶은데요.”
아, 그러고 보니. 나는 머릿속으로 인형을 몇 차례 불러 보았다. 혹시 아래층으로 떨어지면서 정신 연결이 끊겼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도 그건 아닌 모양이었다. 곧 머릿속에서 영상이 떠오르고, 평범한 복도로 추정되는 풍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아마 용사 일행은 문을 열고 광장을 빠져나와서 다음 복도에 진입한 듯하다.
만약 내가 조금 더 빨리 눈치챘더라면 우리도 문을 열고 나올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잠시 그렇게 생각했지만 곧 헛된 희망이었음을 깨달았다. 용사 일행이 빠져나온 문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나는 소름이 쫙 돋는 걸 느꼈다.
‘야, 잠깐만. 이건 좀 너무하지 않냐?’
……애초에 문이 하나밖에 없었다. 용사 일행이 나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오른쪽 길의 문 말이다. 그러니까 나와 케르츠가 있었던 쪽의 문은 사실상 문 모양의 장식이었을 뿐이고, 우리는 왼쪽 길을 고른 시점에서 이미 아래로 추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었던 거다.
그 사실에 괜한 찜찜함을 느끼고 있는데, 아마 하넨의 것으로 추정되는 목소리가 머릿속을 쩌렁쩌렁 울렸다. 걱정스러운 듯한 용사의 얼굴까지 불쑥 클로즈업된 걸 보니, 저쪽 일행은 아마도…….
[그렇게 태평하게 굴러다니고 있지 말라고, 이 솜뭉치 자식아! 저쪽 상황이 어떤지 말이라도 해!]
저쪽은 확실히 별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하넨의 반응을 보아하니 인형 녀석도 건강하게 데굴거리고 있는 것 같고. 나를 걱정하지도 않을 정도로 태평해 보이는 건 조금 짜증이 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지금 상황이 그렇게까지 심각하지는 않다는 증거라고 볼 수도 있다.
[지름길? 다음 층? 상인, 케르츠랑 같이 다음 층으로 간 거예요?]
[둘 중 하나가 밑으로 떨어지는 구조? 그것뿐이야? 그 이상의 위험은 없어?]
인형이 무언가 설명을 하기는 하는지, 용사와 하넨의 일그러진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들었다. [모두들 무사하다. 어서 용사 일행 및 인형과 합류해야겠다.]라는 인형의 정보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자,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케르츠에게 말했다.
“다들 무사해 보여요. 용사도, 하넨도, 인형도 무사히 밖으로 나온 것 같고.”
“그럼 다행이군요. 이제 식량 고갈 문제가 생기기 전에 합류하기만 하면 되겠군요.”
“식량이요?”
“네. 지금 마법사님과 용사님은 하루 이틀 버틸 정도의 식량밖에 없습니다. 나머지는 제가 가지고 있고요. 아무리 빨리 간다 쳐도 앞으로 사나흘은 걸릴 텐데…….”
“잘못하다간 미궁에서 굶어 죽게 생겼네요.”
“그런 셈이죠. 그래도 식수가 부족하지는 않으니, 최대한 빨리 합류하면 어떻게든 되기는 할 겁니다. 며칠 굶는다 해도 물만 있으면 죽지는 않으니까요.”
물 한 방울 없는 이 미궁 안에서 식수를 어떻게 구하는 걸까, 나는 그 점이 내심 궁금해졌지만 굳이 묻지는 않기로 마음먹었다. 좋게 생각하자. 어쩌면 물이 저절로 솟아나는 마법 물병 같은 거라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지. 어차피 내가 마실 물도 아니고.
그나저나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지? 용사 일행과 합류하기 위해서는 역주행을 해야 할 텐데, 어느 방향이 정주행이고 어느 방향이 역주행인지 알 수가 없다. 내가 광장을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는데 인형이 머릿속에 정보를 주입해 주었다.
[천장에 파란 장식이 있는 쪽으로 가면 용사 일행과 인형을 만날 수 있다. 빨간 장식이 있는 쪽으로 가면 오히려 멀어지는 결과가 생긴다.]
‘아, 고마워.’
[인형은 마력 절약을 위해 정신 연결을 끊을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원격 정신 연결은 마력을 너무 많이 쓰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걷는다면 앞으로 사흘에서 나흘 정도만 더 있으면 만날 수 있다. 나는 지금껏 의지해 왔던 든든한 인형과 잠시 이별한다는 사실에 불안감을 느꼈지만 마음을 굳게 다잡았다. 울지 않을 거다.]
‘야, 어차피 언데드라서 눈물 같은 거 나오지도 않거든?’
하여간에 제 좋을 대로 생각하는 녀석 같으니라고.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음을 피식 흘렸다. 진심으로 내가 자기를 그리워한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그냥 내 긴장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농담이라도 하는 건지.
물론 어느 쪽이든 아예 거짓은 아닐 거다. 실제로 나는 지금껏 인형에게 제법 의지해 왔으니 인형이 없으면 약간 불안한 것도 사실이고, 인형의 농담 덕분에 조금은 긴장감이 풀린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긴장이 풀리고 조금 마음이 누그러지려는 찰나, 인형이 묘한 설명을 덧붙였다.
[도살자의 상태가 조금 위험해 보인다.]
‘잠깐, 뭐?’
[나는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도살자의 광증은 한번 도지면 가라앉히기가 꽤 어렵기 때문이다.]
아까 전 케르츠의 주변을 감싸던 검은 그림자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인형이 의도적으로 끌어내 준 기억인지, 아니면 저절로 떠오른 기억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그림자가 케르츠의 광증과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저절로 따라왔다.
잠깐만. 그러니까 지금 식량이나 식수만 문제가 아니란 소리지? 나 지금 영혼 조각이 얼마 없단 말이야. 당장 몸을 유지할 만큼의 조각 몇 개만 가까스로 남아 있는 상황인데.
[인형은 나에게 약간의 정보를 줘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영혼의 조각이 없을 때 광증을 억제하거나 응급 처치를 하는 방법으로는…….]
인형은 나에게 어떤 정보를 알려 주고는 그대로 연결을 끊어 버렸다. 잠깐, 이 자식. 뭐라는 거야? 나는 이 녀석이 농담하는 거라고 믿고 싶었지만, 이미 정신적인 연결이 끊어진 상태라서 인형을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정보의 진위를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인형 녀석이 내게 장난을 친 적이 하루 이틀이 아니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인형이 이런 일로 장난을 치는 성격은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어쩔까 고민하던 나는 일단 가면을 벗어서 자루 안에 적당히 쑤셔 박았다.
물론 괜찮겠지만, 케르츠 씨가 광증에 걸릴 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대비’ 정도는 해 둬야겠지. 정말로 인형이 알려 준 방법을 써야 하는 상황이라면 가면이 오히려 방해가 될 테니까.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얼굴을 소매로 박박 닦은 뒤 케르츠 쪽을 흘끔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광증의 흔적이라고는 없이 표정은 담담하고 눈빛 또한 명료해 보였다. 내가 왜 가면을 벗었는지에 대해서도 별로 신경 쓰는 것 같지도 않고.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듯 미간을 찌푸리던 케르츠는, 문득 무언가 떠올랐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하나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네?”
“아까 떨어지기 전에 조심하라고 했잖습니까. 설마 바닥이 무너질 줄 알고 있었던 건가요?”
“천장의 새빨간 글씨를 봤어요. ‘한쪽은 문 너머로, 한쪽은 아래로.’ 어쩌고 적혀 있던데. 혹시 못 보셨어요?”
“아뇨, 전혀 못 봤습니다만. 사념을 상대하던 도중 몇 번 천장을 본 적 있었고, 나가기 직전에도 한 번 보았지만 그런 글씨는 못 봤어요.”
“진짜 못 봤다고요? ……아, 어쩌면 보석의 효과일지도 모르겠네요. 어쩐지 글씨가 빨갛더라니.”
저 사람은 그 점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구나. 나는 주머니에서 보석을 꺼내서 보여 주었고, 케르츠는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보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진작 용사 일행에게 보석을 팔았더라면 영혼의 조각을 꽤 많이 받았을지도 모르는데. 그러면 지금 케르츠의 광증 때문에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테고. 물론 이것도 따지고 보면 결과론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말이다.
“함정을 간파하는 보석이라, 꽤 귀한 물건이군요. 그런데…….”
혹시 케르츠가 이걸 자기한테 넘기라고 흥정이라도 하는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던 나는 문득 케르츠의 시선을 눈치챘다. 그의 시선은 붉은 보석을 보는 듯했지만 사실은 묘하게 빗나가 있었다. 그러니까, 구체적으로 뭘 보고 있냐면…….
“저 팔찌.”
“네?”
나는 케르츠가 가리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자루 입구로, 예전에 얻었던 구슬 팔찌가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맞다, 그러고 보니 저 팔찌도 있었지. 착용자의 정신을 맑게 해 준다고 했었던 것 같은, 데…….
“…….”
“왜, 왜 그래요?”
“저거, 어디서 구한 겁니까? 파는 거예요?”
케르츠는 서늘한 표정으로 그 팔찌를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직 광증의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표정이었지만 나는 저도 모르게 쫄고 말았다. 묘하게 가라앉은 시선이 무서웠다. 죄 지은 것이라곤 하나도 없는데도 괜히 긴장하게 될 정도였다.
저 사람, 주변 사람을 겁먹게 하는 뭔가가 있다니까. 나는 일단 케르츠의 질문에 대답했다. 괜히 변명하는 듯한 말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얼마 전에, 그. 어떤 함정을 조사하다 얻은 거예요. 시체에서.”
“흐음, 시체라.”
“정신을 맑게 해 주는 효과가 있는 물건이래요. 케르츠 씨, 무슨 광증 같은 게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이 팔찌를 끼고 다니면 좀 나아질지도 모르는데 하나 살래요? 보세요, 디자인도 괜찮고, 새겨진 문양도 꽤 예쁘고.”
“……예쁘다고요?”
케르츠는 내 말끝을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아니, 문양 예쁘잖아. 그게 뭐 어쨌단 거지? 분명 별것 아닌 질문일 텐데도 저런 표정으로 말하니 엄청나게 의미심장한 이야기처럼 여겨졌다. 괜히 잔뜩 쫄아서 구슬에 새겨진 문양을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의 케르츠가 폭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푸, 푸하하……!”
뭐야, 왜 갑자기 웃는 거지? 아까까지만 해도 엄청 무서운 표정 짓고 있던 주제에? 사람을 비웃는 건지, 아니면 너무 웃겨서 못 견디는 건지 알 수 없는 그 폭소에 나는 조금 어리둥절해지고 말았다.
한참을 웃고만 있던 케르츠는, 내가 당황한 걸 눈치챘는지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방금 전까지의 서늘함은 이미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미안합니다. 그러고 보니 당신은 여러모로 지식이 부족하지요.”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예요? 무슨 지식 말하는 건데요?”
“저기요, 제가 이걸 차고 용사님 앞에 갔다간 이단으로 몰려서 목이 잘릴 겁니다. 당신이 구슬에 새겨진 문양의 의미를 알고 있었더라면 예쁘다느니 하는 소리는 하지 않았겠지요.”
이단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게다가 저 순수한 용사님이 사정도 듣지 않고 다짜고짜 목을 자르려 들 정도로 엄청난 이단이라고? 내가 어리둥절해져 케르츠를 바라보자, 케르츠는 재미있다는 듯 나를 바라보며 질문했다.
“당신이 털었다는 시체, 어떤 시체였지요? 혹시 뭐라도 아는 바가 있습니까?”
“턴 게 아니라 그냥 좀 조사한……. 아니, 따지고 보면 그게 그건가. 잘은 모르겠지만, 몇 백 년 전 사라진 교파의 성직자라는 이야기를 인형에게서 들은 적 있어요.”
“몇 백 년 전 사라진 교파라, 딱히 틀린 말은 아니군요. 딱 절반뿐인 진실이라서 문제지.”
“……?”
뭐야, 이 사람. 설마 그 교파에 대해 알고 있는 건가? 그러고 보니 이 사람은 도살자치고 묘하게 이것저것 많이 알고 있었지. 케르츠는 내게서 팔찌를 받아 들고는, 마치 염주알을 세기라도 하듯 구슬을 만지작거렸다. 조금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이 팔찌, 괜찮다면 잠시만 제게 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안 그래도 광증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는데 잘 되었군요. 이것도 미봉책에 불과하기는 합니다만.”
“이게 효과가 있어요?”
“조금은 있을 겁니다. 그러니까……. 용사님과 마법사님을 만날 때까지는 충분히 버틸 수 있겠지요.”
뭐야, 생각만큼 걱정할 필요는 없었잖아? 나는 아까 인형이 알려 주었던 ‘엉뚱한 정보’를 떠올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까 그 녀석이 알려 준 정보는 구슬 팔찌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내용이었다.
그 녀석, 분명 나를 놀리려고 일부러 이상한 정보를 알려 준 게 분명해. 내가 괜히 입을 삐죽거리고 있는데 케르츠가 웃으며 말했다. 아마 내가 제대로 된 거래가 성사되지 않아 기분이 상했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지금 당장은 영혼 조각이 하나도 없어서 대여료를 드릴 수 없지만, 나중에 용사님 일행과 합류하면 그때 드리죠.”
“뭐, 안 될 거야 없죠. 어차피 케르츠 씨가 미쳐 버리면 저도 곤란해지니까……. 대신 대여료는 나중에 확실히 주셔야 해요.”
“네, 네. 드리고말고요. 그나저나…….”
“……네?”
“교파라니, 정말 오랜만에 듣는 말이군요. 그렇게나 호의적인 명칭을 써 주는 사람들도 요즘은 거의 없다시피 한데.”
이 사람,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묘한 불길함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지만 정작 케르츠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생긋 웃고는 그대로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나는 밍기적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케르츠의 뒤를 따라갔다.
* * *
사념에게서 도망치고, 함정의 틈바구니에서 빠져나왔다. 나와 케르츠는 처음에 예상했던 것보다는 무난하고 안전하게 광장을 돌파해 나갔다. 함정을 식별해 주는 보석 덕분에 함정을 피해 가는 건 크게 어렵지 않았고, 케르츠의 몸놀림이 워낙 민첩한지라 사념이 득실거리는 광장도 큰 무리 없이 지나갈 수 있었다.
“생각보다는 힘들지 않네요? 제 인형과의 정신 연결도 끊겼고, 사념을 없애 줄 용사도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하나 싶었는데…….”
“역주행의 과정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겁니다. 본래 이 미궁은 들어오는 자에게 가혹하고 나가려는 자에게는 관대하니까요.”
“그런 문제예요?”
“그런 문제지요. 이 층에서 만난 사념들도 진심으로 저를 공격하려 들지는 않았으니까요.”
아까 그게 진심을 다한 공격이 아니었다고? 내가 보기에는 그 사념들의 공격도 엄청 위협적이었는데. 만약 내가 인간이어서 사념들의 관심을 끌었다면, 그 사념들의 공격을 피하긴커녕 순식간에 썰리고 말았을 거다. 내가 좀 질린 표정을 짓자 케르츠가 빙긋 웃었다.
“함정들도 마찬가지 아니었습니까? 역방향으로 통과했으니 그나마 쉽게 지나갈 수 있었지, 저걸 정방향으로 통과하려면 꽤나 힘들었을 겁니다. 아마 지금쯤 용사님과 마법사님은 엄청 고생하고 계시겠지요.”
“그쪽은 인형이 있으니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요. 그 녀석, 겉보기엔 그냥 솜 덩어리처럼 보여도 의외로 도움이 될 때가 많고요.”
우리는 이런저런 잡담을 나누며 부지런히 걸었다. 아니, 사실 부지런히 걷는 건 내 쪽이고 케르츠는 나와 보폭을 맞추느라 조금 천천히 걷는 중이었다. 지금 나는 가진 영혼 조각을 전부 써 버린 상황인지라 신체가 조금씩 부패하는 중이고, 무리해서 움직였다간 고관절이나 복부 등의 신체 부위가 무너져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나마 천천히 움직이면 좀 괜찮지만…….
‘케르츠 저 사람은 좀 괜찮나?’
나는 걷는 내내 케르츠를 흘끔거리며 바라보았지만, 다행히도 케르츠의 주변에는 그림자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케르츠가 차고 있는 구슬 팔찌가 도움이 되기는 하는 모양이다. 이대로 용사 일행과 합류할 때까지 케르츠가 제정신을 유지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나저나, 저 사람은 멸망한 교파에 대해 뭘 알고 있는 걸까?’
나는 아까 전부터 내내 그 점에 대해 신경 쓰고 있었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단순히 오래되어서 사라진 교파라고 생각했지만 알고 보니 이단으로 몰려 사라진 교파. 선악에 이상할 정도로 집착하던 성직자의 일기.
분명 케르츠는 그 교파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는 눈치였지만, 문제는 저 사람이 그 무언가를 나에게 알려 주고 싶지 않아 보인다는 점이었다.
‘저 사람, 그 교파와 무슨 연관이 있는 걸지도 몰라.’
단순히 지식으로만 알고 있을 뿐이라면 저렇게까지 과민하게 반응할 리가 없다. 알려 달라고 끈질기게 부탁한다면 의외로 알려 줄지도 모르는 노릇이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러기가 꺼려졌다. 적어도 지금은 저 사람을 자극해서 좋을 게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케르츠가 걸렸다는 광증이 구체적으로 어떤 질환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안 좋은 기억을 일깨우면 광증이 더 심해질지도 몰라.’
솔직히 나는 정신병에 대해서 잘 모르지만, 트라우마라든지 PTSD라든지 하는 기본적인 개념 정도는 주워들은 적이 있었다. 팔찌를 통해 겨우 광증을 억누르고 있는 사람의 아픈 구석(?)을 거슬려 봤자 좋을 게 없다.
나중에 용사 일행과 합류하고, 저 사람이 광증에서 안전해지고 나면 그때 물어봐도 늦지 않을 거다. 그때쯤 되면 케르츠뿐만이 아니라 하넨에게도 이것저것 물어볼 수 있겠지. 물론 용사의 눈치를 봐야 할 테니 깊은 수준의 정보를 얻지는 못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 방법이 훨씬 안전하기는 할 거다.
“얼마나 더 가야 용사님이나 마법사님과 합류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거의 사흘쯤 걸은 것 같은데.”
“얼마 안 남았을 거예요. 힘내세요.”
“예, 힘내야지요. 하지만 걱정이 되는 건 어쩔 수 없군요. 분명 허기 때문에 저쪽의 속도가 꽤 느려졌을 텐데…….”
“분명 인형이 그것까지 다 계산해서 예상 시간을 알려 줬을 거예요. ……아마도?”
“아마도, 인가요.”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언제 용사 일행과 만날 수 있을지 확신하지는 못한다. 그 솜뭉치 녀석에게는 묘하게 허술한 데가 있어서, 대체로 정확한 정보를 주긴 하지만 가끔씩 소소한 뭔가를 빼먹곤 하니까. 어쩌면 이번에도 단순한 거리 계산만 했을 뿐 체력이나 허기 등의 요소를 까먹고 안 고려했을지도 모르지.
어쩌면 지금쯤 용사 일행은 배가 고파서 어느 복도에 늘어져 있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늘어져 있기라도 하면 다행이지, 기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지나치게 무리하다가 크게 다치기라도 했다면 상황이 더 안 좋은 셈이다. 하지만…….
“아, 아니에요! 분명, 분명 그것까지 계산했을 거예요! 제 인형은 대단하니까!”
“너무 과장할 것 없습니다. 당신이 그 인형을 미덥잖게 생각하는 것쯤은 알고 있어요.”
“그냥 맞춰 주시면 안 돼요? 제가 지금 그쪽 안심시키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잖아요.”
지금은 그냥 인형을 믿을 수밖에 없다. 앞으로 반나절에서 하루쯤 지나면 만날 수 있을 거라 믿고, 그저 부지런히 걸을 수밖에. 케르츠도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피식 웃어 보였다.
“노력해 줘서 고맙습니다. 하긴, 생각해 보니 당신 주장도 일리는 있군요. 어쩌면 그 인형이 용사님 쪽의 허기까지 고려해서 시간을 알려 준 걸지도 모르니까요.”
“그렇죠? 그냥 그렇게 믿으세요. 그래야 조금이나마 덜 걱정될 테니까.”
나와 케르츠는 서로를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어 보였다. 그럭저럭 누그러진 듯한 케르츠의 모습에 안심하며 고개를 돌리려던 도중, 나는 케르츠의 팔목에 문득 시선이 갔다. 광증의 발현을 막아 주는 구슬 팔찌를 찬 오른쪽 팔목. 분명 그 구슬은 새하얀 진줏빛이어야 하지만.
‘……잠깐.’
나는 저도 모르게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팔찌가 검었다. 다행히도 완전히 새까맣지는 않지만, 원래의 진주색과 비교하면 명백히 탁해진 회색빛을 띠고 있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파악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케르츠 저 사람, 단순히 용사 일행 쪽만을 걱정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 최대한 빨리 합류하지 않으면 본인도 위험해질 것 같아서 저렇게 불안한 모습을 보이는 건 아닐까? 지금은 뛰지도 않는 심장이 벌렁거려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나는 일단 진주 팔찌를 못 본 척한 채 걸었다. 케르츠 본인도 별로 밝히고 싶지 않은 눈치고.
‘조금만 서두르자. 앞으로 반나절에서 하루 정도만 더 있으면 될 테니까.’
우리는 그대로 다음 광장으로 발을 들였다. 광장 안에는 살덩어리를 잡아 찢어 늘려 놓은 것 같은 생김새의 사념들이 거미줄처럼 늘어져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강해 보이지 않지만…….
“본체는 따로 있군요. 어디 숨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본체가 있어요? 이 실처럼 생긴 것들이 본체 아니에요?”
“이 광장에 있는 건 일종의 거미나 다름없습니다. 거미줄 사념을 건드리면 그 진동을 느낀 사념이 공격해 오는 구조지요.”
과연, 그렇구나. 나는 우선 케르츠를 뒤에 남겨 둔 채 광장 안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사방에 늘어져 있는 살덩어리 실들은, 거미줄이라기에는 그다지 끈끈하지 않지만 훨씬 더 질기고 튼튼해서 끊기가 쉽지 않을 듯했다. 내가 광장의 가운데까지 허우적거리며 걸어갔을 때쯤, 나는 머리 위에서 묘한 한기를 느꼈다.
“……우, 우와.”
나는 식은땀이 날 것만 같은 기분으로 머리 위의 사념을 바라보았다. 수십 개의 얼굴, 그것도 눈꺼풀이 열린 채로 고정되어 시뻘겋게 충혈된 눈을 한 얼굴들이 더덕더덕 꿰매져 있는 사념이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진동을 느끼고 어디선가 나타난 모양인데, 다행히도 녀석은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금방 흥미를 잃은 듯 천장으로 올라가 버렸다. 언데드는 안 먹는다 이거지? 뭐, 대충 예상했던 결과기는 하지만……. 내가 사념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케르츠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역시 저 녀석이군요. 아무래도 당신이 저 녀석의 주의를 좀 끌어 줘야겠습니다.”
“저 녀석, 저한테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이는데요? 그냥 가 버렸잖아요.”
“그건 당신이 미동 없이 가만히 있어서 그런 겁니다. 물론 당신이 언데드라서 그런 것도 있기는 하지만요. 저 녀석은 장님이라서, 주변에서 소리가 나거나 움직임이 있으면 무조건 그쪽으로 갑니다. 아마 지금 돌 같은 걸 던져서 맞춰도 그런 식으로 반응할걸요.”
“장님이라고요? 저를 똑바로 보던데요? 막 충혈된 눈으로.”
“겉보기에 그렇게 보일 뿐 실제로는 아무것도 못 봅니다. 애초에 이 거미줄이 있는 것도 저 녀석이 장님이라서 그런 거고요.”
그렇구나. 나는 어떻게 저 녀석을 유인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곧 방법을 생각해 냈다. 그러니까, 케르츠가 광장을 통과할 때까지만 시간을 벌어 주면 된다는 거지? 그다지 오래 벌지는 못하겠지만…….
“최대한 빨리 가셔야 해요. 오래는 시간 못 끌어 줘요!”
“알았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케르츠는 곧 인면철 갑옷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노래를 들은 사념은 느릿하게 몸을 일으키더니 광장의 입구 앞까지 이동했다. 누군가가 다른 곳에서 시선을 끌어 주지 않으면 저 녀석은 계속 저기에서 버티고 있을 거다.
그동안 나는 살덩어리 거미줄을 붙잡고 아득바득 위로 기어 올라갔다. 처음에는 이러다 미끄러져 떨어지는 게 아닐지 의심이 되었지만, 의외로 발 디딜 곳도 많고 살덩어리 줄도 튼튼한 편이라서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올라가는 도중에 부패한 신체의 일부가 떨어져 나갈지도 모른다는 점이 걱정될 정도였다.
곧 케르츠의 노래가 멈추었다. 아무래도 준비가 다 된 모양이었다. 이미 광장의 오른쪽 천장까지 올라간 나는, 양손으로 머리 위의 거미줄을 단단히 잡고 근처의 거미줄에 발을 디딘 후……. 있는 힘껏 자리에서 점프하기 시작했다.
“열까지 셀게요! 다 세고 나면 출발하세요!”
“……!”
거미줄의 진동과 내 목소리까지 합쳐지자 제법 자극이 되었는지, 사념은 곧바로 내가 있는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녀석은 거미처럼 다리로 이동하는 게 아니라 마치 공처럼 이리저리 구르듯 이동했는데, 거미줄과 가까이 있는 얼굴이 이빨로 거미줄을 물어서 붙잡는 식이었다. 그 모습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비효율적이었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그로테스크해 보였다.
“……다섯, 여섯, 일곱, 여덟……!”
물론 그런 것치고는 의외로 움직이는 속도가 빨라서, 녀석은 순식간에 내가 있는 천장 구석까지 이동해 왔다. 아무래도 이거, 케르츠가 어지간히 빨리 움직이지 않는 이상 제대로 돌파하기가 어려울 것 같은데.
하지만 지금은 이 방법밖에 없었다. 그저 케르츠의 민첩성과 순발력을 믿는 수밖에. 사념의 얼굴이 내 쪽으로 들이밀어지고, 마치 냄새를 맡듯 킁킁거리던 얼굴이 실망감으로 물든 채 뒤로 물러날 때쯤―
“아홉, 열!”
케르츠가 곧바로 달려 나갔다. 이미 거대한 형태로 변형된 케르츠의 쇠톱은 마치 허공을 가르듯 매끄럽게 거미줄을 갈랐고, 케르츠는 마치 날듯이 광장을 가로질러 뛰었다. 케르츠 저 사람, 의외로 마음먹으면 엄청 빨리 이동할 수 있잖아?
이상을 눈치챈 사념이 곧장 케르츠를 향해 이동했지만, 케르츠가 지금 이 속도로만 이동한다면 충분히 따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일단 저 사람이 광장을 빠져나가기만 하면 더 이상 쫓아가지는 못할 테니 크게 위험하지는 않을 것 같다.
‘됐어, 이제 나도 슬슬 내려가면…….’
나는 거미줄을 붙잡고 부지런히 아래로 내려갔다. 케르츠와 사념의 움직임 때문에 거미줄이 마구 흔들리기는 했지만 내려가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케르츠가 광장을 반쯤 가로질렀을 때쯤 이변이 생겼다.
‘뭐, 뭐야?!’
갑자기 사념의 생김새가 변하기 시작했다. 얼굴이 절반으로 쩍 갈라지더니 그 안에서 촉수 비슷한 것이 뻗어 나오고, 그 촉수는 고무줄처럼 쭉쭉 늘어나 케르츠를 향해 뻗어져 나갔다. 케르츠 또한 사념의 변화를 깨달았는지 더 서둘러서 뛰었지만, 잘못하다간 따라잡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슬아슬한 모습이었다.
“조심해요, 케르츠 씨!”
케르츠는 대꾸도 하지 않은 채 그저 출구를 향해 달릴 뿐이었다. 다행히도 촉수의 정확도는 그다지 높지 못했는데, 본체가 장님이라서 제대로 맞추기가 꽤 어려운 모양이었다. 본체 쪽도 정확도를 노리기보다는 그저 마구잡이로 휘두르다 보면 하나쯤은 걸릴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는 아슬아슬하게 촉수와 거리를 유지한 채 달렸고, 마침내 출구 근처까지 거의 도달했다. 조금만, 이제 조금만 더 달리면 이 광장에서 탈출할 수 있을 텐데……!
“읏!”
그 순간이었다. 눈먼 촉수 중 하나가 운 나쁘게도 케르츠의 오른팔을 스치고 지나갔다. 붙잡은 것도 아니고 그저 스쳤을 뿐이니 옷자락이나 좀 스치고 지나갔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어째서인지 케르츠의 몸은 그것만으로도 크게 요동쳤다. 뭐지? 설마 방금 공격으로 오른팔을 다치기라도 한 건가? 아니면…….
‘어, 잠깐만.’
그 순간 나는 목격했다. 케르츠의 오른팔에서 끊어져 나간 팔찌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을 아무렇게나 구르는 회색 구슬을.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건지 겨우 이해했을 때쯤.
[……!]
안개처럼 아득한 그림자가 광장 전체를 뒤덮었다.
나는 그대로 거미줄에서 추락해 바닥에 굴러떨어졌지만, 충격보다 먼저 찾아온 건 오히려 두려움이었다.
마치 짙은 안개가 깔리기라도 한 것처럼 사방이 뿌옇고 어두웠다.
‘이 안개, 분명 케르츠의 광증에서 비롯된 거겠지?’
케르츠가 말한 ‘광증’이 단순히 정신병을 의미하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고 막연히 짐작은 했지만, 그래도 고작 팔찌가 끊어진 것만으로 이렇게 순식간에 발병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광증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저주 같았다. 지금껏 부적으로 인해 겨우 막고 있던 저주가, 해방되자마자 순식간에 사람을 좀먹는 듯한 그 모습에 본능적으로 두려움이 솟았다.
나는 끙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일단은 케르츠의 상태를 확인해야만 했다. 지금 저 사람이 어떤 상태인지를 파악해야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든,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접근해 진정시키든 선택할 수 있을 테니까. 어쩌면 케르츠도 아직은 조금 정신을 붙잡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은.
그나저나,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하반신이 무너져 내리기라도 했는지 자세 잡기가 영 쉽지 않았다. 나는 뭐라도 붙잡기 위해 허공에 팔을 내밀어 허우적거렸다. 하다못해 살덩어리 거미줄이라도 붙잡으면 걷기가 한층 수월해질 텐데…….
‘어?’
스륵, 손가락 사이로 무언가 끈적거리는 감촉이 지나갔다. 이게 뭔가 싶어 손가락을 살펴보니 검붉은 살점 같은 것이 손가락에 잔뜩 묻어나 있었다. 아무리 봐도 이게 내 피 같지는 않은데, 어디서 나온 살점이지?
대체 이 붉은 살점의 정체가 무엇인지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검은 안개가 슬금슬금 물러나기 시작했다. 안개가 어느 정도 물러나고, 시야가 확보되고 나서야 나는 살점의 정체를 이해했다.
‘뭐야, 거미줄이 녹고 있잖아?’
철퍽, 철퍽. 살점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제법 요란했다. 제법 튼튼하고 질기던 살덩어리 거미줄이 마치 푸딩이라도 되는 것처럼 흐물흐물 녹아 떨어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아까 검은 안개에 노출된 것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듯한데. 저 안개, 분명 케르츠의 광증과 관련이 있는 거겠지? 대체 저 사람의 광증이란 건 어떤 증상이야? 설마 진짜 저주라도 되나?
거미줄이 사라진 탓인지 사념의 본체는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아니, 꼭 거미줄이 없어서 허우적거리는 것만은 아닌 듯했다. 거미줄을 녹여 버린 검은 안개는 본체에게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 쩍 벌어진 입에서는 피가 울컥거리며 쏟아지고 잔뜩 충혈되어 있던 눈은 실핏줄이 다 터져서 피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정상적으로 움직일 수조차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다.
“케, 케르츠 씨?”
나는 케르츠의 이름을 부르며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검은 안개가 가라앉은 것까지는 좋은데, 어쩐지 그 안개가 자연적으로 사라졌을 것 같지는 않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애초에 안개는 사라진 게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특정한 장소에 압축되어 있을 뿐.
“……!”
그 순간이었다. 자세를 제대로 못 잡고 이리저리 휘청거리던 사념을 향해 새까만 덩어리가 덮쳐들었다. 마치 아까 전까지 광장을 뒤덮고 있던 안개를 있는 힘껏 구겨 넣고 응축시켜 만든 것만 같은 덩어리였다. 어쩌면 저게 케르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 순간, 사념이 뭉개졌다.
과장이 아니라 말 그대로였다. 무슨 즙 같은 게 팍 터져 나가나 싶더니, 사념은 그저 형체도 남지 않은 채 검은 덩어리에 흡수되어 버렸다. 대체 저게 뭐야? 멍하니 생각하면서도 나는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일단 저 안개의 덩어리가 사념을 흡수한 것까지는 좋지만 저게 사념만 흡수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연기처럼 일렁거리는 안개 덩어리에서 나는 기이한 살의를 느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위험하다는 감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저게 케르츠라도 문제고, 케르츠가 아니어도 문제다. 어쨌든 저것과 멀어져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뒤덮었다.
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텅 빈 광장 안에 움직이는 거라고는 나 하나뿐이니, 검은 안개가 자연스럽게 내 쪽으로 시선을 돌리는 것도 당연했다.
[엔라트, 아이, 흐루민, 데, 하레미아탄…….]
흥얼거리는 듯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 귓가라는 표현은 조금 이상할지도 모르겠다. 소리라기보다는 오히려 평소에 인형이 내 머릿속에 집어넣어 주던 정보에 더 가까운 감각이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 직접 울려 퍼지는 노래임에도 나는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 수 있었다. 당연히 케르츠였다.
케르츠가 노래를 부를 때마다 안개가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마치 케르츠의 인면철 갑옷을 떠올리게 하는 움직임이었지만, 아무런 감정도 없이 입만 움직이던 인면철 갑옷의 얼굴과는 달리 지금 저 안개는 명백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저 무조건적인 살의. 방향도,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 무차별적인 의도.
당장 도망쳐야 한다. 아니면 숨기라도 해야 한다. 분명 머릿속으로 그런 생각이 스쳐 지나가기는 했지만, 나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 멈춰 섰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노래의 뜻을 알 것 같아.’
신이시여, 저희의 죄를 용서하지 마시옵고, 우리의 사악을 묵과하지 마시옵고. 분명 예전에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던 언어가 이제는 저절로 머릿속에서 해석되었다. 광증으로 인해 케르츠의 기도문이 더 강력해진 게 아닐까 싶었지만, 지금 그런 사소한 문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신에게 호소하는 기도문이라기보단 차라리 스스로에 대한 학대에 가까운, 어딘가 간절해 보이는 노래. 그 이상한 노래에 홀린 나머지 그저 잠깐 머뭇거렸을 뿐인데.
“우, 우왓?!”
그 순간이었다. 갑작스럽게 시야가 어두워지나 싶더니, 몸이 꼴사납게 바닥에 나동그라지고는 무언가가 위에 올라탔다. 그 무언가가 케르츠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검은 안개 너머에서 흘러나오는, 이글거리는 초록색 안광이 지독하게 선명했다. 공포인지 분노인지, 무언가 정체불명의 감정에 사로잡힌 표정이 차라리 끔찍해 보였다. 일단 제정신이 아닌 건 확실하구나. 나는 깨달으나 마나 별 의미 없는 사실을 되새김질하며 필사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데 라누, 도느메리아, 하타엔…….]
케르츠는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이건 확실히 예전에 들어 본 적 있는 멜로디였다. [부디 제가 이성을 잃도록 버려두지 마시고, 저를 버리지 마시고.] 내 기억이 맞다면 저건 분명 정신을 놓지 않기 위한 주술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지금 케르츠의 상태를 보아하니 별로 효용은 없는 것 같았다. 오히려…….
“우, 우와앗!”
더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이게 할 뿐. 케르츠의 양손이 내 머리를 붙잡더니 있는 힘껏 바닥에 짓찧었다. 퍽, 퍼억, 살점이 무너지고 뼈가 깨지는 듯한 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갑자기 시야가 까맣게 물들었다. 뇌라든지 시신경이라든지, 아무튼 내가 모르는 어느 부위에 이상이 생긴 게 틀림없었다.
나는 케르츠를 말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그의 팔을 붙잡았지만 케르츠는 그나마도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케르츠의 손아귀에 붙잡힌 왼쪽 어깨가 이상한 각도로 비틀린다 싶더니 갑자기 팔이 움직이지 않았다. 어쩌면 아예 뽑힌 걸지도 모르겠다. 우드득 하고 요란한 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의외로 가능성은 있었다.
그나저나 대체 이 사람의 목적은 뭘까. 그냥 눈앞에 보이는 움직이는 것들을 전부 해체하는 일? 대체 뭘 위해서?
‘멈춰야 해. 어쨌든 멈춰야 한다고.’
방법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인형이 마지막으로 전했던, 장난인지 진심인지 모를 정보가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정보가 진짜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지금으로선 거기에라도 기대야만 했다.
이대로 더 머뭇거리다간 진짜 큰일 나겠다. 뒤통수가 함몰되고, 왼팔이 뜯겨 나가고 결국 사지가 분해되어 움직이지도 못하게 되는 것보다야 ‘그거’ 한 번 하는 게 낫잖아!
[라, 라헤므, 엔스테르다, 스루미나드…….]
게다가, 지금 이 상황은 명백히 저 사람에게도 고통을 주는 것 같고 말이지. [이 고통을 무디게 하지 마시고, 이 아픔에 익숙하게 하지 마시고, 이 죄책감이 사라지도록 하지 마시고…….] 저거 누가 봐도 자기 학대잖아. 과연 주변 상황을 인식하고 저러는 건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저 사람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와 저 사람의 행동은 정말이지 모순되어 있어서.
케르츠가 내게서 뽑아낸 왼팔을 바닥에 몇 차례씩이나 내리쳐 짓이기는 동안 나는 필사적으로 오른팔을 들었다. 겨우 한 손으로 케르츠의 머리를 붙잡고, 케르츠가 내 거슬리는 오른팔조차 뜯어내려 하기 직전에.
‘나중에 대가로 영혼 조각 뜯어낼 거야, 진짜로……!’
무언가 닿는 감촉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축축하고 말캉거리는 감촉을 보아하니 내가 어디 이상한 데에 입을 가져다 대지는 않은 모양이다. 혀를 넣고 타액을 교환해야 제대로 광증을 가라앉힐 수 있다던 인형 녀석의 조언에 충실히 따르려 노력하며, 나는 일단 케르츠에게 입을 맞췄다.
케르츠의 노랫소리가 뚝 그쳤다.
단순히 입이 막힌 탓인지, 아니면 충격을 받은 탓인지는 나도 모를 노릇이었다. 그보다 전신의 기력이 쫙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에 소름이 돋을 것 같았다.
일단 시야가 돌아오기는 했는데 몸 여기저기가 영 부실했다. 얼굴의 절반은 함몰되었는지 눈은 한쪽밖에 보이지 않고, 예전에 감아 놓은 압박 붕대 안쪽으로 내장이 흐물흐물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예전에 인형이 한 조언을 생각했다. 이 ‘응급 처치’를 하고 나면 한동안은 움직일 수 없을 테니 조심하라고.
[내 몸을 움직일 수 있게 해 주는 근본적인 ‘신성함’의 일부를 케르츠의 신체에 임시로 옮겨 주는 작업이다. 영혼의 조각을 흡수하는 것보다도 효과가 빠르니 금방 광증이 가라앉기는 하겠지만, 이 작업이 끝나고 나면 나는 신체의 대부분을 움직일 수 없게 된다. 케르츠에게 전부 네 탓이니까 책임지라고 윽박지른 후 업어 달라고 부탁하면 된다.]
언데드 상태라서 감각이며 감정이 둔해진 게 그나마 다행이라 할 지경이었다. 그게 아니었더라면, 생애 처음으로 하는 키스를 시커먼(여러 가지 의미에서) 사내 녀석에게 해 버렸다는 사실이 억울해서 화병이 났을지도 모르니까. 사실 이런 상황에서 첫 키스니 뭐니 하는 게 무슨 소용이겠느냐만, 그래도 사람 기분이란 게 있으니까.
나는 힘이 빠진 나머지 입술을 떼고 그대로 바닥에 고꾸라져 버렸다. 그래도 주변의 검은 안개가 점점 사라지는 것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케르츠의 주변을 뒤덮고 있던 안개는 환상처럼 스르륵 허공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선명하게 번뜩거리던 초록색 안광도, 완전히 자아를 잃은 채 정체 모를 감정에 휩쓸려 있던 케르츠의 표정도, 전부 서서히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뭐, 무슨……?”
케르츠의 입술이 달싹이더니 당혹스러운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아까 전까지 흥얼거리던 장송곡 비슷한 노래는 이제 더 이상 부르지 않으려는 모양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거, 사실 장송곡이 아니라 기도문 아니었나? 예전에 의미를 모르고 들을 때에는 장송곡이려니 했는데 의미를 알고 보니 사실상 참회의 노래 같은 거잖아.
“이봐요, 상인 씨? 괜찮아요? 지금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지금 당신이 보기에……. 제 꼴이 괜찮아 보여요?”
혀를 움직일 정도의 힘조차 없어서 발음이 자꾸만 뭉개졌다. 케르츠는 멋쩍게 고개를 저어 보이더니 일단 내 위에서 내려왔다. 당황한 표정으로 입가를 닦는 걸 보니 방금 무슨 행위가 오고 갔는지는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다. 젠장, 기억 못 했으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입 씻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러니까, 당신이 미쳐서 제 머리도 바닥에 찧고, 제 팔도 뜯어내고……. 그러고 보니 맨정신일 때에도 제 머리 막 벽에 처박고 그러지 않았어요? 의외로 제정신일 때랑 미쳤을 때의 상태가 비슷하시네?”
“제가……. 그러니까, 팔찌가. 광증이 도져서. 그나저나, 제가 어떻게 제정신으로 돌아온 겁니까? 당신 뭘 했어요?”
“그거 좀 쉬었다가 대답하면 안 돼요? 지금 저 자괴감 들려고 하는데. 이래저래 정신도 없고…….”
머리가 멍해서 그런지 뚫린 입에서 아무 말이나 막 나왔다. 물론 케르츠도 아무 말이나 막 하고 있으니 저쪽이 나를 비웃을 처지는 못 되었다. 케르츠는 할 말을 잃은 듯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바닥에 털썩 누웠다.
우리는 사념조차 없이 텅 빈 광장에 누운 채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마치 술 처먹고 사고(?)를 친 다음 날 아침 같은 기분이었다. 왜 하필 비유가 떠올라도 이따위 비유가 떠오르는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더 나은 비유를 찾아내기에는 지금의 내가 너무 지쳐 있었다.
지금 당장 잠들 수 있기라도 하면 참 좋을 텐데.
나는 완전한 시체가 된 듯한 느낌을 받으며 그대로 눈을 감았다.
* * *
배고프고 지친 용사는 꿈을 꾸었다.
아주 오래전, 그러니까 용사가 미궁에 들어오기 전의 기억이었다.
[사슬의 죄인, 제14계위 제이담! 결락의 수호자, 제15계위 세이라나!]
신관들의 목소리는 헛된 메아리처럼 울려 퍼질 뿐이었고, 방패를 든 이들의 목숨은 무의미하며 덧없었다. 새까만 그림자는 신관들이 무엇을 하든 개의치 않은 채 주변의 것들을 먹어 치웠다. 애초에 상대조차 되지 않는 싸움처럼 보였다. 용사는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해졌다.
“대체 무엇을 위해 시간을 끌고 있는 건가? 저 우스꽝스러운 이름들은 다 뭐고? 아니, 애초에 왜 우리가 도살자 따위를 잡으러 와 있는지 그것부터 설명해야 하지 않나?”
“말쿠테른의 도살자는 총 서른두 명입니다. 도살자는 대를 이어 지위를 승계하며, 그 과정에서 후계자에게 자신의 이름을 물려주지요. 그러므로 도살자의 이름은 제1계위에서 제32계위 중 하나로 반드시 정해져 있습니다.”
“하, 무슨 뜻인지 알겠군. 수백여 년의 세월 동안 사용되어 온 이름이라면 그 이름이 가지는 힘 또한 엄청날 터. 신성력으로 도살자의 이름을 호명하여 그 영혼을 구속하겠다는 전략인가?”
“순식간에 이해하시는군요, 마법사님. 역시 흑탑에 도움을 요청하길 잘 했습니다.”
“쓸데없이 띄워 줄 것 없어. 그나저나 너희들, 너무 비효율적으로 행동하는 거 아니야? 그럴 거면 미리 상대의 이름을 알아 오라고! 이 자리에서 일일이 서른두 명의 이름을 다 부르는 머저리 짓을 하지 말고!”
“대체 저희가 어떻게 도살자 개개인을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항상 저렇게 미쳐 있어서 대화조차 성립되지 않는 자들인데요.”
용사는 하넨과 신관의 이야기를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는 대화에 끼어드는 대신 그림자의 싸움을 구경하며 하넨의 반짝거리는 은빛 머리카락을 땋았다.
용사는 그럭저럭 손재주가 좋은 편이었고, 하넨의 지저분한 장발은 순식간에 곱게 땋은 머리로 바뀌었다. 하넨의 머리카락을 다 땋은 용사가 빙긋 웃자 하넨은 조금 질렸다는 표정을 지으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용사는 그 표정의 의미를 잘 몰랐지만, 하넨이 자신을 싫어하는 것 같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가끔 큰 소리를 지를 때가 있기는 하지만 하넨은 대체로 용사에게 상냥한 편이었다. 신관들과는 반대였다. 그들은 용사에게 단 한 번도 큰 소리를 지르지 않았지만 용사에게 조금도 상냥하지 않았다.
“그래서, 도살자의 이름을 구속하기만 하면 되는 건가?”
“아뇨.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저자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광증을 충분히 씻어 내야만 저자의 존재가 가치를 가집니다. 그래서 저희가 용사님을 이 자리까지 데려온 거고요.”
[……26계위 렌다라! 추락한 사자, 27계위 이에드!]
몇 명째인지 모를 사람이 그림자에게 먹혀 끔찍한 비명을 토해 냈다. 공허한 이름을 외쳐 대는 신관들의 목소리와, 그저 버티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희생자들의 비명 사이로 희미한 흥얼거림이 들려왔다.
용사는 그 흥얼거림이 아주 오래된 노래라는 걸 깨달았다. 신관들이 그의 머릿속에 주입해 준 정보 중에는 수백 년 전 과거의 찬송가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디 가려는 거야, 너? 지금은 위험하니까 기다려야 해. 괜히 다가갔다간 네 목까지 썰릴지도 모른다고.”
“그치만.”
“급할 것 없으니까 몇 분만 더 기다려. 그나저나, 대체 저 녀석의 이름은 뭐야? 이 시점이 되어서도 이름이 밝혀지지 않다니…….”
그림자를 향해 다가가려던 용사는 하넨의 만류에 얌전히 걸음을 멈췄다. 하지만 그림자에서 시선을 떼지는 않았다. 저 그림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을 죽였다. 사람을 죽이는 건 죄를 짓는 일이고, 죄를 짓는 건 좋지 않은 일이다. 말려야만 한다.
게다가, 저 그림자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몰라도―용사가 보기에 그 사람은 많이 아프고 지쳐 보였다. 용사가 정화해 주면 금방 나을 것처럼 보였다.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걸까, 용사가 고개를 갸웃하며 그림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도중이었다.
[최후의 죄인, 32계위 케르츠!]
그 순간 흥얼거림이 멈추었다. 신관들이 높이 쳐든 지팡이 끝에 푸르스름한 신성력이 모이더니, 빛의 문자로 이루어진 쇠사슬이 그림자를 옭아매기 시작했다. 빛의 쇠사슬은 그림자를 완전히 구속한 후 억지로 그 무릎을 꿇렸다. 신관들은 입을 모아 재차 외쳤다. 아까 이름을 불렀을 때와 마찬가지로 신성력이 깃든 말이었다.
[말쿠테른의 서른두 번째 죄인, 케르츠! 선조의 오래된 죄를 외면하지 말지어다! 속죄를 위해 굴종하라!]
마치 사람의 것이 아닌 듯한 비명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저 비명이 그림자의 것인지, 아니면 그림자 내부에 있는 사람의 것인지는 용사도 알 수 없었다.
“가라. 저 괴물을 잠식하고 있는 광증을 정화해.”
하넨의 곁에 서 있던 신관이 손가락으로 그림자를 가리켜 보이자, 용사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는 그림자를 향해 다가갔다. 가까이에서 관찰하니 그림자 내부에 묶여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 입은 떡 벌어진 채 비명을 토해 내고 있었고, 이글거리는 초록빛 안광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그 사람의 앞에 다가간 용사는 정중하게 무릎을 꿇었다. 조심스럽게 양손을 들어 상대의 머리를 잡은 후, 그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가져다 댄 순간.
용사는 정신을 잃었다.
사념이나 그 비슷한 것을 정화할 때면 언제나 겪는 증상이었다.
“아, 으으.”
머리가 깨질 듯한 통증에 끙끙거리며 용사는 잠에서 깨어났다. 평소의 그는 꿈도 꾸지 않고 푹 자는 편이었지만 사실 그건 하넨이 주입해 주는 수면독의 영향 때문이었다. 수면독 없이 잠들 때면 용사는 꽤 자주 꿈을 꾸곤 했다.
꿈의 대부분은 과거의 기억을 되새김질하는 내용이므로 사실 악몽이라고까지 할 건 없었지만, 그래도 꿈을 꾸고 나면 몸 상태가 별로 개운하지 않고 머리가 아팠다. 그래서 용사는 꿈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넨은 복도 한구석에 머리를 처박은 채 잠들어 있었다. 그는 며칠 동안 굶어서 조금 쇠약해진 상태였다. 용사는 원래 튼튼해서 며칠쯤 굶어도 상관없지만 하넨은 달랐다. 허기는 사람의 체력과 정신력을 갉아먹기 마련이고, 마법을 쓸 때 고도의 정신력을 소모하는 하넨은 용사보다 몇 배쯤은 더 힘들어 보였다.
용사는 슬그머니 하넨의 옆으로 다가가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식은땀 범벅이 된 하넨의 이마를 거의 다 닦았을 때쯤, 어딘가에서 나타난 인형이 용사의 머리 위로 기어올라 왔다. 용사는 인형을 손쉽게 붙잡아 얼굴을 마주 보았다.
“어디에 다녀왔어요?”
[인형은 저 앞까지 정찰을 다녀왔다. 이 복도의 끝에는 다음 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고, 거기에서 조금 더 이동하면 나와 케르츠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다행이다. 거의 다 왔네요.”
용사는 생긋 웃으며 인형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인형이 말하는 ‘나’라는 건 아마 언데드 상인을 의미하는 거겠지.
처음에는 인형의 이상한 말투에 익숙해지지 못해 조금 고생했지만 자주 듣다 보니 그럭저럭 익숙해졌다. 다만, 용사는 인형이 대체 왜 저런 말투를 쓰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인형이 나름대로 설명해 주기는 했지만 그 설명도 이해하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인형은 무생물이다. 무생물은 생각할 수 없다.]
[나는 한때 생물이었던 무생물이다. 무생물이지만 생물로서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인형은 혼자의 힘으로 사고할 수 없으므로 나의 사고방식을 빌려서 생각하고 판단한다. 인형의 정신은 사실상 나의 정신에 기생해 있다시피 하다. 나에게는 비밀이지만.]
[인형은 본래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없다. 인형은 본래 누군가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없다. 인형은 본래 특정한 감정을 느낄 수 없다. 인형은 본래 생각할 수 없다. 인형은 본래 편견을 가질 수 없다. 인형은 본래 탐욕스러울 수 없다. 인형은 본래 질투할 수 없다. 인형은 본래 분노할 수 없다. 인형은 본래 비난할 수 없다. 인형은 본래 비탄할 수 없다. 인형은 본래 환희할 수 없다. 인형은 본래 애착을 가질 수 없다. 인형은…….]
[방금 들은 이야기는 잊는 게 좋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쪽이 나을 거다.]
뭐가 뭔지 알 수 없었으므로, 용사는 인형의 제안대로 그 이상한 이야기들을 그냥 잊어버리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인형의 말 중 일부는 용사에게 매우 친숙하게 받아들여졌다.
<용사는 편견을 가져서는 안 된다. 용사는 탐욕스러워서는 안 된다. 용사는 애착을 가져서는 안 된다.>
용사가 신전에 머물던 시절, 그를 훈육하던 신관들이 버릇처럼 하던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언데드 상인은 신성 생물이라고 들었다. 인형은 언데드 상인과 친한 모양이고. 어쩌면 신성 생물이라면 다들 저런 이야기 한두 번쯤은 듣고 살아가는 걸지도 모른다.
“상인과 케르츠는 괜찮을까요?”
[조금 험한 꼴을 겪었을지도 모르지만 아마 괜찮을 것이다.]
“험한 꼴?”
[용사는 꿈을 꾸었다. 케르츠가 광증에 사로잡혀 있던 시절의 꿈이다.]
“내가 그런 꿈을 꾼 줄 어떻게 알았어요? 신기하다……. 어쨌든, 케르츠가 또 광증에 시달리나요? 상인에게 심한 짓을 해요?”
[인형이 나에게 응급 처치 방법을 알려 주었으니 아마 나는 괜찮을 것이다. 조금 기분이 안 좋기는 하겠지만. 용사와 하넨이 빨리 아래층에 도착한다면 두 사람 모두 조금은 편해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결국 빨리 일어나서 아래층으로 가자는 이야기였다. 물론 용사는 지금 당장 움직일 생각이 없었다. 기력도 떨어졌고, 배도 고프고, 무엇보다도 하넨이 아직 자고 있기 때문이다. 용사 본인은 잠이 오지 않았으므로 더 잘 생각이 없었지만, 하넨이 다 자고 일어날 때까지는 기다려 줄 생각이었다. 하넨이 시름시름 앓거나 기운이 없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
용사는 인형을 꼭 끌어안고 앉은 채 케르츠와 언데드 상인을 걱정했다. 케르츠는 강하고, 가끔은 좀 무서운 사람이지만 광증에 시달릴 때면 괴로워한다. 케르츠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볼 때면 용사의 마음도 좋지는 않다.
언데드 상인은 광증에 시달리지 않지만 작고 약하고 보잘것없다. 언데드라서 사념에게 공격당하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툭 건드려도 다칠 것처럼 연약하기 때문에 걱정이 된다. 덤으로 볼이 말랑말랑하고 서늘해서 만지면 기분이 좋다. 이건 별로 관련 없는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빨리 보고 싶다.’
용사는 멍하니 복도 너머를 바라보았다. 벌써 사흘째 두 사람을 보지 못했다.
익숙한 사람을 만나지 못한다는 건 참 쓸쓸한 일이라는 걸 용사는 막연히 깨달았다.
* * *
“슬슬 움직일 때가 되었는데요. 일어날 수 있겠습니까?”
“방금 당신에게 제가 움직일 힘까지 다 줘 버려서 손가락 하나 까딱 못하거든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책임 좀 지세요.”
“책임이라고요? 잠깐, 당신 남자 아닙니까? 게다가 살아 있지도 않고. 게다가 제가 당신에게 책임을 져 봤자 광증 걸린 애밖에 안 태어날…….”
“아직도 제정신이 안 돌아왔어요? 그냥 나 좀 업으라고요. 진짜 죽지도 못하는 처지에 죽고 싶어지게끔 만드네, 이 인간이.”
“……제가 생각하기에도 제정신은 아닌 발언이었군요. 미안합니다.”
“미안한 줄 알면 업어 줘요. 아, 저번에 하넨 씨한테 했던 것처럼 공주님 안기는 하지 마세요. 콱 죽어 버릴까 보다.”
“방금 죽지도 못하는 처지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나저나 공주님 안기라니, 당신 참 이상한 표현을 자주 쓰는군요. 혹시 왕국이 존재하던 시절의 사람입니까?”
워낙 서로에게 충격적인 사건을 겪고 나서 그런지 나나 케르츠나 제정신은 못 되었다. 명백히 서로가 헛소리를 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아무 말이나 되는 대로 내뱉었다.
케르츠는 내 뽑혀 나간 왼팔을 잠시 바라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며 나를 업었다. 한쪽 팔이 없는 데다가 온몸의 힘이 빠져나간 상태라서 업히는 것조차 힘에 부쳤지만, 적어도 스스로 걷는 것보다는 나았다.
광장을 빠져나가 복도를 한참 걷는 동안 제법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케르츠는 체력을 상당히 소모한 상태에서 나를 업고 걷느라 제법 지친 모양이었고, 나는 나대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도 힘든 상황이었으므로 입을 열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그저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서로의 체력을 위해서는 가장 나은 셈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의 침묵은 별로 달갑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케르츠에게 할 이야기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케르츠가 궁금해할 만한 점도 있고, 내가 케르츠에게 궁금한 점도 있다. 나는 우선 전자부터 이야기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맞다, 아까 케르츠 씨의 광증을 가라앉힌 거 말인데요.”
“그러고 보니 그 이야기를 아직 듣지 못했죠. 뭘 어떻게 한 겁니까? 설마 당신에게도 조금이나마 정화의 능력이 있는 겁니까?”
“아뇨, 딱히 그런 건 아니고……. 아까도 짧게 언급했던 것처럼, 제 몸을 유지하고 움직이게 하는 신성한 힘인지 뭔지를 당신에게 거의 줬어요. 이제 잘못하다간 신성 무생물에서 그냥 무생물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고요. 당신 하나 구하려다가 제가 시체로 되돌아가기라도 하면 우리 인형은 어쩌죠? 혼자서 이 험난한 미궁에서 잘 해낼 수 있을까요?”
사실 반쯤은 과장이자 장난이었다. 내가 가진 ‘신성함’을 전부 준 게 아니니까 진짜로 무생물이 될 일은 없고, 일단 인형과 합류하기만 하면 녀석으로부터 다시 신성함을 얻을 수 있으니 크게 걱정할 일은 없다고 설명을 들었다. 게다가 그 인형 녀석, 의외로 내가 없어도 기운차게 구르고 춤추고 돌아다닐 게 분명하다. 굳이 걱정할 필요는 없겠지.
나는 최대한 장난스럽고 과장된 어조로 말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워낙 몸에 힘이 없고 혀가 제대로 안 움직이다 보니 본의 아니게 조금 느리고 심각한 어조가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대답해 오는 케르츠의 목소리는 조금 가라앉아 있었다.
“아무리 제 광증을 멈추기 위해서라고는 해도……. 그런 무모한 짓을 하다니요.”
“그러면 어떻게 해요? 사지가 뽑히고 내장까지 잘근잘근 끊어지는 것보다야 한동안 남의 등에 업혀서 축 늘어져 있는 게 낫죠, 뭐.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말고요.”
조금 더 경쾌하게 말해 보았지만 케르츠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평소였더라면 적당히 능글맞게 받아쳤을 인간이 갑자기 침묵을 지키자 괜히 기분이 이상해졌다. 나는 얼마 전 들었던 케르츠의 기도문을 문득 떠올렸다.
[이 죄를 용서하지 마시고, 이 죄책감이 사라지게 하지 마시고.]
어쩌면 저 사람은 겉보기에 비해 자기혐오적인 성향이 강한 게 아닐까? 물론 그게 저 사람의 본성일지, 아니면 광증이 낳은 부작용인지는 모르겠지만.
“미안하긴 해요?”
“……흠.”
“그러면 제 질문 몇 가지에 답이나 해 주세요. 어차피 걷는 동안 지루한데 심심풀이 삼아서.”
“질문이라고요?”
“네. 정 대답하기 싫은 질문이라면 대답 안 해도 괜찮지만…….”
나는 질문을 꺼내기 전 조금 망설였다. 과연 이게 쉽사리 물어봐도 될 질문인지 판단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못 물어볼 건 또 뭔가 싶었다. 나는 저 사람의 광증 때문에 전신이 해체될 뻔했는데 이 정도 질문은 해도 괜찮지 않겠어?
“그 광증, 대체 정체가 뭐예요? 왜 광증에 시달릴 때 기도문을 읊는 거죠? 그리고 애초에 도살자라는 건 뭐고요? 당신, 사실 도살자인 척하는 성직자 같은 거 아니에요?”
대답 안 해도 괜찮다고 말한 것치고는 쓸데없이 구체적이고 집요한 질문이었다. 처음에는 아차 싶었지만 이제 와서 물러날 수는 없었으므로 나는 조금 뻔뻔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차피 케르츠는 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지도 못할 테지만 일단은 뻔뻔하게 나가고 싶었다.
케르츠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러고 보니 내 쪽에서도 케르츠의 표정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는 건 좀 불편하네. 저 사람, 알려 줄 생각이 있긴 한 건가? 아니면 적당히 둘러댈 만한 말을 찾느라 입을 다물고 있는 건가?
“이거 어렵네요.”
“어렵다니, 뭐가요?”
“당신이 대체 어디까지를 알고 어디까지를 모르는지……. 당신은 용사님과는 조금 다른 의미에서 대하기가 어려운 사람이군요. 용사님은 아예 아무것도 모르시니 처음부터 하나하나 다 알려 주면 되는데, 당신은 평범한 지식조차 갖춰져 있지 않은 주제에 묘한 구석에서 아는 게 풍부하니…….”
케르츠는 조금 생각에 잠긴 듯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어쨌든 무언가 알려 줄 생각이 있기는 한 모양이다. 아니, 굳이 말하자면 나는 인형이 알려 준 몇 가지 지식을 제외하고는 이 세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나는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서 조금 입을 다물었고, 케르츠는 내 침묵을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말을 이어 나갔다.
“뭐, 그냥 옛날이야기 듣는 기분으로 들어 주세요. 아마 교단에서는 이 이야기를 금기시하고 있겠지만, 어차피 이제 와서는 큰 의미 없는 이야기고.”
“……교단에서 금기시하는 이야기라고요? 그런 거 저한테 막 말해 주고 그래도 돼요?”
“뭐 어떻습니까? 애초에 당신은 존재 자체로도 교단의 금기나 마찬가지인걸요. 신성한 언데드의 존재는 신을 모독한다느니 뭐라느니, 분명 입에 거품을 물며 당신을 제거하려 들 겁니다.”
“그런 것치고는 그쪽 용사님이 절 엄청 좋아하시던데요. 진짜 금기 맞긴 해요?”
“용사님이야 뭐, 두 살이잖습니까. 일반 신관들보다야 모르는 게 많지요. 아마 그분은 저에 대해서도 잘 모르실 겁니다.”
하긴 용사는 거래나 장난감의 개념도 잘 모르는 어린애다. 교단에서 뭔가 배웠다 한들 그걸 백 퍼센트 소화하지는 못했겠지. 어쨌든, 하고 화제를 돌린 케르츠는 흠흠 헛기침을 했다. 아마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려는 모양이다.
“‘말쿠테른의 도살자’라는 호칭, 들어 본 적 있지요? 기억합니까?”
“예전에 하넨 씨가 언급한 적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기억이 나기는 해요. 그런데 그건 왜요?”
“본래 말쿠테른은 도살자 집단을 칭하는 단어가 아니었습니다. 뜻도 아예 달랐고 범위도 훨씬 더 포괄적이었지요. 그리고……. 굳이 말하자면 당신은 이미 말쿠테른의 상징을 본 적 있어요.”
말쿠테른의 상징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나는 케르츠의 망토와 쇠톱을 주의 깊게 살폈지만 이렇다 할 상징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케르츠는 내 시선을 눈치챈 듯 조금 웃었다.
“제가 가지고 있던 게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이 제게 줬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게 무슨 소리인지……. 어, 설마. 그 구슬 팔찌 말씀하시는 거예요?”
케르츠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주머니에서 구슬을 하나 꺼내 보였다. 아까 끊어진 구슬 팔찌의 일부를 주워 온 모양이었다. 나는 구슬 팔찌의 문양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이건 좀 예상 밖의 이야기였다. 어쩐지 그 팔찌에 새겨진 문양을 아는 듯한 눈치더라니, 설마 그게 도살자들 본인의 상징이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단 말이야.
‘아니, 어쩌면 도살자의 상징이 아닐지도 몰라.’
분명 케르츠는 말쿠테른이 도살자 집단을 칭하는 단어가 아니라고 했다. 게다가 애초에 이 팔찌를 가지고 있었던 건 도살자가 아니라 성직자였고. 아까 광증에 걸린 케르츠가 외웠던 기도문이라든지, 이런저런 정황을 바탕으로 추측해 볼 때…….
“……말쿠테른 교파. 수백 년 전까지만 해도 어엿한 정식 종파였으나, 이제는 그 이름을 아는 자들조차 거의 없는 이단의 교파입니다.”
“이, 이단의 교파라고요?”
“네. 성기사들을 중심으로 한 다소 고지식하고 보수적인 교리를 따르는 종파였지요. 물론 고지식하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상대적인 기준이고, 어디까지나 지금 교단의 과격파들에 비해 그렇다는 이야기지만 말입니다.”
나는 조금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사람, 저따위로 굴면서 원래는 성직자였다니 영 안 어울리는데. 하지만 어쩐지 이상했다. 보통 이단이라고 하면 과격하고 급진적이어서 사람들에게 배척당할 것 같은 이미지일 텐데, 어째서인지 케르츠의 설명만 들으면 지금의 교단이 이단이고 말쿠테른 교단 쪽이 정교인 것처럼 들렸다.
물론 교파의 일원으로 보이는 케르츠가 하는 말이니만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는 해도 신경 쓰이는 점이 하나 더 있었다.
“성기사는 또 뭐예요? 그런 것도 있어요?”
“네. 신을 섬기는 서른두 명의 기사로, 사실상 말쿠테른 교단이 가진 권위의 원천이었습니다. 그들이 악에 오염되어 광증에 사로잡히지만 않았더라도 교파 전체가 이단으로 몰리지는 않았겠지요.”
“악에 오염되었다니, 그 악이란 게 설마…….”
“예. 이 미궁의 지하에 있는 악의 근원을 말하는 겁니다.”
케르츠는 시원스럽게 대답했고, 나는 문득 성직자의 일기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 성직자는 ‘누군가’와 같이 오고 싶었지만 그 누군가가 광증에 사로잡혀 있어서 함께 오지 못했다고 했다.
설마 그 누군가는 성기사였던 걸까? 성직자는 자기 교파의 핵심 인물인 성기사에게 도움을 청하려 했지만, 정작 성기사는 광증에 사로잡혀 같은 교파의 성직자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던 건가?
그런데, 성기사들은 대체 어쩌다가 악의 근원에 오염된 거지? 내 궁금증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케르츠가 입을 열었다.
“과거, 말쿠테른 교파의 성기사들은 세마하 교파……. 그러니까, 지금 교단을 차지하고 있는 교파의 신관들과 협력하여 신의 악함을 봉인하고자 했습니다.”
“신의 악함이라니요? 신이 악해요?”
“신은 본디 전능한 존재니 선할 수도 있지만 동시에 악할 수도 있겠지요. 신의 선함은 저희에게 축복이 되지만 신의 악함은 거역할 수 없는 재앙으로 돌아옵니다. 성기사들과 신관들은 신을 섬기는 몸으로서 그러한 재앙을 막고자 했던 거겠지요. 신으로부터 악함을 분리해 낸 후 이 미궁에 봉인하면, 신의 악함으로 인해 사람들이 피해를 보지는 않으리라고 생각했던 겁니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건 인형에게 들은 적 없는 이야기였는데. 인형은 그냥 ‘미궁의 지하에 악의 근원이 있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했을 뿐, 그 악의 근원이 정확히 어디로부터 온 건지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일종의 사탄이나 마왕처럼 신과 대립하는 무언가를 미궁 지하에 가둬 놓은 줄 알았는데……. 애초에 그 악의 근원조차도 신의 것이었다고?
“그 봉인인지 뭔지 하는 건 어떻게 되었는데요?”
“딱 보면 알잖습니까? 당연히 실패했지요. 애초에 성공했더라면 세상이 이 모양이 되지도 않았겠지요. 그리고…….”
“……?”
“봉인이 실패한 건 성기사들의 배신 때문이었습니다.”
케르츠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싸늘하게 들리는 건 기분 탓일까, 아니면 사실일까. 나는 숨을 죽인 채 침묵했고, 케르츠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왜 그들이 신을 배신하고 동료 성직자들을 배반했는지, 그 이유를 정확히 아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심지어 성기사들의 후손조차도 그 이유를 알지는 못해요.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
“그들이 악의 봉인을 거부하고 중간에 악을 해방시키려 했다는 것, 그 과정에서 악에 물드는 바람에 대가 바뀌어도 씻기지 않는 영원한 광증에 시달리게 되었다는 것. 광기에 물들어 생명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기 시작한 그들은 성기사로서의 자격을 완전히 잃고, 어느 순간부터인가 도살자라고 불리기 시작했답니다.”
“자, 잠깐만요. 도살자?!”
“그 이후로, 본래 신으로부터 직접 선택받아 선출되던 성기사들은 마치 환속한 이들처럼 자식을 낳아 자식에게 자신의 광증과 허울뿐인 정체성을 물려주었습니다. 운 나쁘게도 도살자의 자식으로 태어난 이들은 이미 더럽혀진 이름과 명예롭지 않은 역사와 아무도 듣지 않는 참회의 노래와 자신이 짓지도 않은 죄를 영원토록 후대에 물려주는 저주에 사로잡혔다고 합니다. 아마 지금도 지상에서는 서른한 명의 도살자가 광증에 사로잡힌 채 어딘가를 방랑하고 있겠지요.”
“그, 그럼……. 케르츠 씨는.”
“그렇게 수백 년이 지나고 세상은 멸망해 가는 와중에, 어쩐 일인지 세마하의 신관들은 미쳐서 목적지조차 없이 방랑하던 도살자 하나를 붙잡아다 선조의 죄를 갚으라는 사명을 부여했답니다. 이걸로 옛날이야기는 끝. 이야기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는 나도 몰라요.”
분위기를 전환하고 싶기라도 했는지, 케르츠는 묘하게 경쾌한 어조로 이야기를 마치고는 웃어 보였다. 물론 듣는 내 입장에서는 조금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저 사람, 인성이 저 모양 저 꼴이기는 해도 근본적으로는 성기사의 후예라는 뜻이잖아. 솔직히 하는 행동만 보면 믿기지 않을 지경이지만…….
“악의 근원을 없애면 이 광증이 나을까요?”
“……그걸 저에게 물어 보셔도.”
“악의 근원을 없애면 선조의 죄도 사라지는 걸까요? 선조의 명예를 회복할 수 있는 걸까요? 아니, 솔직히 그런 건 아무래도 좋으니……. 적어도 후손들에게는 이 저주 같은 광증을 물려주지 않을 수 있을까요?”
아무래도 케르츠는 나에게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저 신세 한탄이라도 하듯이 중얼거리고만 있을 뿐. 나는 머릿속이 복잡해진 나머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솔직히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위로를 해야 할지, 아니면 그저 침묵을 지켜야 할지. 나는 조금 복잡한 심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듯하던 복도 저편에 계단이 하나 보였다. 아마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같았다.
“어쩌다 보니 괜한 이야기까지 하고 말았군요.”
“아니에요. 애초에 제가 먼저 질문한 것도 있고……. 이야기해 줘서 오히려 고맙지요.”
나는 일단 그렇게 대답했지만, 어쩐지 케르츠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이렇게까지 무거운 이야기일 거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는데. 뭐, 뒤늦게 생각해 보니 한 사람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가 가볍기만 할 리는 없겠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묘하게 찝찝한 구석이 있는 이야기였다. 성기사들은 어째서 동료들을 배신한 걸까? 설마 신의 악함을 자신들의 힘으로 삼기라도 하려다가 실패했나? 아니, 애초에 신의 악함이란 건 뭘까? 신의 선한 면과 악한 면 중에서 악한 면만 따로 떼어서 봉인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잘 이해가 가지 않아서…….
“케르츠다! 케르츠와 상인이 저기 있어요, 하넨!”
[나는 멀리서 인형이 달려오는 모습을 보았다. 인형은 기쁨의 춤을 출 예정이다!]
그 순간 계단 위에서 무언가 작은 물체가 휙 하고 뛰어내려 왔다. 그게 인형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쯤, 계단 위쪽에서 용사와 하넨이 반가운 낯으로 우리를 향해 달려왔다. 다들 지쳐 보이긴 했지만 제법 밝은 표정이었다. 나는 머리에 달라붙어 온 인형을 떼어 내는 데 집중하느라 머릿속을 가득 채운 의문을 잠시 잊어버리고 말았다.
* * *
“케르츠랑 상인, 아파 보여요. 사념이 두 사람을 아프게 했나요?”
“아뇨, 사념이 문제가 아니라 케르츠 씨의 광증이 갑자기 도져서……. 야, 솜뭉치. 어서 내 신성함 돌려 줘. 케르츠 씨 진정시키느라 다 써 버렸단 말이야.”
“광증? 맞다, 그것까지는 우리가 생각을 못 하고 있었네……! 상인 녀석이 묵사발이 되어서 나타난 게 그것 때문이었구나! 그나저나 케르츠 너, 어떻게 광증에서 회복된 거야?”
케르츠가 두 사람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설명하는 동안, 인형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내 코에 자기 얼굴을 톡 가져다 댔다. 온몸에 묘한 따뜻함이 퍼져 나간다 싶더니 서서히 팔다리에 힘이 돌아왔다. 몸의 상처는 회복되지 않았지만 이제는 평소처럼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너, 설마 방금 나한테 뽀뽀한 거냐?”
[인형에게는 입이 없지만 굳이 설명하자면 비슷한 행위라 할 수 있다.]
“뭐, 코에 뽀뽀한 것 정도면 귀여운 애교로 봐줄 수도 있지만……. 잠깐만. 야, 이제 보니 굳이 입에 혀 넣어 가면서 키스할 필요가 있었어? 그냥 뽀뽀만 해도 되는 거 아니야?”
[나는 무능한 언데드기 때문에 그 정도의 신체적 접촉이 없으면 신성함을 제대로 전달해 줄 수…… 없을 것이다. 아마도.]
“그런데 왜 말하면서 고개를 돌려? 나 똑바로 보고 말해. 응?”
인형은 내 품에서 쏙 빠져나오더니 후다닥 도망가기 시작했다. 나는 녀석을 쫓아 뛰어가려다가 몸의 균형이 맞지 않아 앞으로 고꾸라졌다. 한쪽 팔이 없고 한쪽 눈이 안 보이는 상태에서 달린다는 건 꽤 어려운 일이라는 새삼스러운 깨달음만 얻었을 뿐이다.
그사이 인형은 다람쥐처럼 용사의 머리 위로 기어 올라갔고, 용사는 인형을 머리에 얹은 채 나를 일으켜 주었다. 인형 녀석은 용사의 머리에 달라붙어서 이쪽을 빼꼼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상인?”
“그 솜뭉치 저한테 주세요. 저 녀석이 나를 속였어. 너 인마, 솔직히 말해. 굳이 케르츠한테 키스까지 할 필요는 없었던 거 맞지? 그렇지?”
[어쩌면 케르츠에게 나의 살점을 잘라 먹이거나 대량의 혈액을 먹여도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떤 식으로든 케르츠가 나의 체액이나 신체 일부를 섭취하면 신성함을 전달할 수는 있기 때문이다.]
“그런 건 좀 일찍 말하라고! 어차피 저 사람한테 당해서 묵사발이 되고 있었으니까 살점이든 피든 얼마든지 먹일 수 있었잖아! 그런데 하필 키스를……!”
[인형은 최대한 쉽고 안전한 방법을 고안했을 뿐이다.]
아니, 분명 인형 딴에는 최대한 온건한 방법을 알려 준답시고 한 거겠지만 그래도 내 입장에서는 억울하기 그지없었다. 그런 방법이 있었으면 진작 알려 줬어야지! 살점을 먹이거나 키스를 하거나, 둘 중 한 가지 방법을 선택할 수 있기라도 했더라면 훨씬 덜 억울했을 거라고!
나는 인형에게 화풀이를 하기 위해 팔을 뻗었지만, 그 순간 인형을 머리에 얹고 있던 용사가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기이한 불길함을 느끼면서 물러났지만…….
“키스가 뭔가요?”
그 순간,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던 하넨과 케르츠까지 동시에 이쪽을 바라보았다. 케르츠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고, 하넨은 꽤 묘한 표정으로 나와 케르츠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그. 용사님. 그게 사실은…….”
“케르츠랑 키스를 했어요? 키스란 건 정확히 무슨 행위를 말하는 거예요? 혹시 나하고도 할 수 있어요?”
“용사님, 그. 저와 상인은 그걸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상황 때문에 억지로…….”
“어떻게 하는 거예요?”
키스가 뭔지 알 리가 없는 용사님은 호기심에 가득 찬 얼굴로 나와 케르츠를 번갈아 바라보았고, 나와 케르츠는 진땀을 빼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아무것도 모르는 저 순수한 용사님을 대체 어떻게 설득해야 할까. 나는 하넨이 구원군이 되어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흘끔 시선을 보냈지만, 아무래도 상황은 완전히 반대로 돌아갈 것 같았다.
“……케르츠. 너 역시.”
“마, 마법사님. 조금 오해가 있으신 거 같은데, 그. 일단 제 말 좀 들어 보시고.”
“오해는 무슨 오해야, 이 자식아! 역시 그거 맞지, 너? 시체 아니면 안 서는 거지? 응? 내가 탑 안에서도 온갖 이상성욕자들을 봤지만 설마 너까지……. 아, 진짜!”
“그런 거 아니라고요, 하넨 씨!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예요? 케르츠 씨가 서긴 뭘 서요?!”
아무것도 몰라서 상대하기 어려운 용사와, 뭘 어설프게 많이 알아서 오히려 설득하기 어려운 하넨 때문에 나와 케르츠는 진땀을 빼야만 했다. 나는 하다못해 인형 녀석이라도 도와주지 않을까 기대했다. 내가 인형을 간절하게 바라보자, 다행히도 인형은 용사의 어깨를 툭툭 치더니 무언가를 손짓 발짓하며 설명했다.
“응? 그런 거예요?”
[…….]
“그렇구나. 딱히 하고 싶어서 하는 건 아니구나.”
잘 한다, 솜뭉치! 드디어 날 좀 도와주는구나! 하넨은 둘째치더라도 용사는 어떻게든 설득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품은 채 나는 인형과 용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일단 용사를 설득하고 나면 하넨을 설득하기도 쉬워지겠지. 하지만…….
“응? 키스를 하면 상인의 몸을 복원시켜 줄 수 있어요? 굳이 영혼 조각이 아니어도 되나요?”
“……자, 잠깐. 용사님? 저 솜뭉치 녀석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그렇구나. 뽀뽀 정도는 상인도 안 싫어할 거라고요?”
인형은 용사의 어깨를 격려하듯 툭툭 치더니 뭉뚝한 팔 끝으로 나를 가리켜 보이고는 재빨리 어딘가로 도망갔다. 저 자식, 도와주기는커녕 오히려 방해만 잔뜩 하고 있잖아! 혹시 장난치면서 즐기고 있는 거 아니야?!
나는 불길한 예감에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어 보였지만, 용사는 생글생글 웃으며 나를 향해 다가오기만 할 뿐이었다. 하넨의 표정이 점점 험악해지고, 케르츠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리는 걸 보며 나는 조금 졸도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행히도, 용사는 내 볼과 코끝에 몇 번 입 맞춘 것만으로도 대단히 좋아하는 눈치였다.
‘겉모습은 저래도 두 살짜리 아기잖아. 남들 하는 건 다 한 번쯤 따라해 보고 싶을 나이니까, 뭐…….’
나는 혼자서 들뜨고 기뻐하고 있는 용사를 바라보며 일단 마주 웃어 보였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용사의 뽀뽀가 그렇게까지 싫지도 않았다. 덩치만 컸지 실제로는 두 살을 가까스로 넘은 어린애의 접촉은 묘하게 소심한 편이었고, 입술이 닿을 때마다 따뜻한 기운이 몸 전체로 퍼져 나가는 감각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다.
게다가 인형이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는지, 용사의 입술이 닿을 때마다 여기저기 문드러져 있던 상처 부위가 서서히 회복되어 갔다. 떨어져 나가 흔적만 가까스로 남아 있었던 왼팔도 이제 완전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고, 고마워요.”
“영혼 조각, 줘야 하나요?”
“그러실 거 없어요. 지금 용사님이 저한테 뽀뽀하면서 체내에 저장되어 있는 영혼 조각을 주신 거나 다름없으니까……. 그나저나, 좋아요?”
“좋아요! 상인 볼, 차갑고 말랑말랑해요. 게다가 뽀뽀할 때 상인이 짓는 표정도 좋아요. 귀여워.”
“아, 예. 그러신가요.”
귀엽기는 두 살짜리 어린애가 귀엽지, 내가 귀엽지는 않을 텐데. 뭐, 본인이 저렇게 좋아하는데 굳이 찬물을 끼얹고 싶지는 않았다. 나와 용사가 나름대로의 접촉(?)을 이어 나가는 사이 인형이 하넨에게 나름대로 설명해 주었는지, 어깨에 인형을 얹은 하넨의 표정은 그럭저럭 누그러져 있었다.
“어쨌든……. 무사히 합류해서 다행이야. 다들 지쳐 보이니까 먹을 것도 먹고, 잠깐 눈도 붙이자.”
“그러고 보니 마법사님, 꽤 오래 굶으셨죠? 얼굴이 반쪽이 되셨네요.”
“거의 이틀을 꼬박 굶었어……. 오늘은 그 빌어먹을 토끼 고기조차도 진수성찬처럼 느껴지겠군.”
그렇게 용사 일행은 모닥불을 피우고 배를 채운 뒤 잠을 청했다. 물론 음식을 먹을 필요도, 눈을 붙일 필요도 없는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지난 며칠 동안 케르츠가 토끼 고기를 손질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보았기 때문에 식욕이 없는 게 차라리 다행으로 여겨지기는 했다.
모두가 몸을 웅크린 채 잠든 와중, 장작불이 타닥거리는 소리를 제외하고는 그저 사방이 고요했다. 나는 잠든 이들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용사 일행과 재회한 이후로 요란한 해프닝이 많아서 잠시 잊고 있기는 했지만, 조금 주변이 차분해지고 나니 이런저런 상념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나는 무심코 시선을 돌려 인형을 바라보았다. 인형은 용사가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고른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는 용사의 옆에서 빙글빙글 돌며 춤추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기쁨의 춤을 출 예정이라느니 하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저게 기쁨의 춤인가? 그냥 팔을 흔들며 제자리에서 빙빙 돌고 있을 뿐인 것 같은데.
“많이 친해진 것 같네. 용사랑 잘 지냈어?”
[인형은 용사와 매우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용사한테 주물럭주물럭당하면서?”
인형은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내 옆구리를 콱 찔렀다. 인형의 뭉뚝하고 푹신한 팔 따위가 옆구리를 찌른다 해서 아플 리는 없었지만 나는 킥킥거리며 녀석의 머리에 딱밤을 먹였다. 어쩌면 이 녀석도 용사의 스킨십 아닌 스킨십에 익숙해졌는지도 모른다.
저 용사님, 뭐랄까. 그 순진한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뭐가 되었든 선뜻 해 주고 싶어지는 마력이 있다. 새끼 고양이나 유모차에서 쿨쿨 자고 있는 갓난아기를 볼 때와 비슷한 기분이 든달까. 뭐, 실제로도 어리긴 하지만 말이다.
나는 피식 웃으며 용사를 바라보다가, 그 옆에서 기진맥진해 잠들어 있는 케르츠에게 시선을 던졌다. 맞다. 그러고 보니 저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에 대해 이것저것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지. 인형에게 몇 가지 물어볼 것도 있고…….
[케르츠가 한 이야기의 대부분은 사실이다. 이 미궁의 지하에 있는 건 신의 악함이다. 신의 악함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악, 그러므로 지상의 인간들은 그 악함을 ‘악의 근원’이라고 부르고 있다.]
역시 내가 무슨 질문을 할지 짐작하고 있었구나. 그야 당연한 일이겠지만……. 그런데 이 녀석, 왜 그걸 진작 말해 주지 않은 거야? 보나마나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위의 대답만 돌아올 테니 굳이 질문해 봤자 별 소득은 없겠지만.
[인간은 신의 악함을 두려워했다. 사람의 악함은 사람의 감정으로 납득할 수 있고 사람의 힘으로 극복할 수도 있지만, 신의 악함은 사람의 감정으로 납득할 수 없고 사람의 힘으로 극복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신앙을 가진 이들조차도 신의 악함까지 경애할 수는 없었다.]
“뭐, 이해가 아예 안 가는 건 아니네. 그래서 성직자라는 작자들이 신의 악함을 미궁 지하에 봉인하려고 한 거야? 인간이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서?”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로 만들어졌다. 그들은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존재를 사랑하도록 만들어지지 못했다. 어쩔 수 없다.]
인형은 태연하게 말하고는 팔을 위로 쭉 뻗어 스트레칭을 했다. 워낙 팔이 짤막해서 머리 위까지 손이 닿지도 않는 듯했지만, 인형은 그것만으로도 꽤 개운해진 눈치였다. 나는 피식 웃으며 녀석을 바라보았다. 솜밖에 없어서 어디 근육이 뭉친 것도 아닐 텐데. 아니, 어쩌면 스트레칭이 아니라 저것도 춤 동작 아닐까?
“그런데, ‘대부분은 사실’이라는 게 구체적으로 무슨 뜻이야?”
[…….]
“어느 부분은 거짓이란 뜻이야? 아니면, 케르츠 씨가 잘못 아는 부분이 있단 뜻이야?”
[굳이 말하자면 후자 쪽이다.]
“역시 그렇구나. 아무리 케르츠 씨가 성기사의 후손이라곤 해도, 무려 몇 백 년 전의 일이니까 조금은 잘못 알고 있을 수도 있겠지.”
케르츠는 과연 어떤 부분을 잘못 알고 있을까?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인형을 바라보았지만, 어쩐지 인형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얌전히 바닥에 앉아 시선을 돌렸다. 처음엔 이 녀석이 뭘 숨기는 건가 싶었지만 곧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형은 단순히 내게서 시선을 돌린 게 아니었다. 오히려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을 뿐이다. 구체적으로 어딜 보고 있었냐면.
“너, 인형과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냐?”
“하, 하넨 씨.”
“아까부터 뭐라고 쫑알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만……,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기에 성기사니 뭐니 하는 이야기가 나와?”
은발의 마법사가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난 데에 대한 언짢음과, 내 이야기에 대한 호기심이 복잡하게 섞인 눈빛이었다.
[2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