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의뭉스러운 솜인형
용사 일행이 망가뜨린 것으로 추정되는 함정을 통해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데에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인형과 함께 아래층의 복도를 걸었다. 인형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통통 튀어 올라오더니 내 머리에 안착했고, 나는 손을 들어 인형 녀석을 끄집어 내렸다. 인형은 항의하듯 바둥거리며 내 손을 탁탁 쳤지만 나는 당연하게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혼자서도 걸을 수 있으면서 괜히 남의 머리에 올라타지 말라고.”
[인형은 본디 무생물이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자연스러운 상태다. 움직이지 않기 위해서는 내 머리 위에 올라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따지자면 나도 원래는 시체니까 죽어 있는 게 자연스러운 상태거든? 헛소리하지 말고. 게다가, 너 나한테 설명해 줄 거 있지 않아?”
인형은 찔끔했는지 발버둥을 멈추고 축 늘어졌다. 어쩌면 불쌍한 척을 하고 싶은 걸지도 모르지만, 평소에 쌓아 온 업보(?)가 있으니만큼 당연하게도 먹히지는 않았다. 나는 인형의 배를 꾹꾹 누르며 녀석을 채근했다.
“우선 하나 확인 좀 하자. 신성 생물이란 게 구체적으로 뭐야?”
[이미 나는 하넨에게 설명을 들었다. 신과 가까운 존재를 일컫는다.]
“아니, 그게 뭐야. 신과 가깝다는 게 혈연관계나 그런 걸 말하는 거야, 아니면 성질이 그렇다는 거야? 그러고 보니 애초에 나는 뭐야? 신성 생물이야? 아니야?”
인형은 맹한 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물론 천 위에 까만 눈이 달려 있는 것뿐이니 표정이라 할 것도 없기는 하지만, 이 녀석과 오래 지내다 보면 눈치라든지, 표정이라든지 하는 것쯤은 어찌어찌 짐작해 낼 수 있다. 이 녀석, 대답하기 싫어하고 있는 거 맞지?
[근원으로 구분한다.]
“뭐?”
[근원이 신과 가까울수록 신성 생물에 가깝다. 신의 힘을 이용해 만들어졌으면 신성 생물, 인간의 힘을 이용해 만들어졌으면 인공 생물에 해당한다. 사실 넓게 보자면 일반적인 언데드 또한 인공 생물에 해당한다. 애초에 생물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기는 하지만.]
“그럼 인간은 신성 생물이야? 이 세계의, 그, 신화가 어떻게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보통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라고 분류하잖아.”
[최초의 인간이라면 그럴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인간을 만드는 건 인간이다. 인간이 성기와 성기를 마찰하여 정액을 자궁으로…….]
“무슨 뜻인지 알겠으니까 설명은 거기까지 해. 그래서 나는 신성 생물이야, 아니야?”
[나는 무생물이지만 신의 힘을 이용해 만들어졌다. 용사 일행은 내가 신성 생물이라고 믿고 있으며 그 믿음은 그다지 틀렸다고 보기 어렵다.]
“흠, 그러니까. 완전한 신성 생물까지는 못 되더라도 그 비슷한 무언가쯤은 된다는 소리구나. 굳이 말하자면 신성 무생물 정도?”
인형은 고개를 끄덕끄덕하더니 내 손아귀에서 쏙 빠져나갔다. 제 딴에는 내 질문에 다 대답해 줬다고 믿고 있는 모양이다. 물론 내 질문은 끝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방금 전에는 그저 하넨이 이야기해 준 정보의 보충 설명만 들었을 뿐이니까. 나는 녀석을 다시 붙잡아 얼굴을 마주하고는 물었다.
“그러면 너는? 너 아까 신성 생물이 아니라고 했잖아. 그럼 뭔데?”
흠칫했다. 이 녀석, 분명 흠칫했어. 인형은 재빨리 내 손아귀에서 벗어나더니 내 머리 위에 앉아 버렸다. 내가 다시 녀석을 붙잡으려 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더 붙잡으려 들었다간 아예 도망가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결국 나는 녀석을 붙잡길 포기했다. 어차피 머리 위에 앉아 있으니까 물리적인 거리는 그럭저럭 가까운 편이고.
[이 인형은 겉 부분이 천으로 되어 있고, 안쪽은 푹신푹신한 솜으로 채운 뒤 바느질을 이용해 정성껏 꿰맨 물건이다.]
“……그것뿐?”
[이 인형을 구성하고 있는 솜은 매우 귀한 목화솜이다. 형질 변형 식물도 아니고, 인공 생물의 털이나 잔해를 섞지도 않은 순수한 솜이기 때문에 오래 끌어안고 있어도 건강에 해롭지…….]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이 녀석이 어디서 사기를 쳐?”
[인형은 진실만을 설명하고 있다.]
인형은 딴청을 부리며 내 가면의 윗부분을 통통 두드렸다. 노골적인 대답 회피였다. 이 녀석, 역시 자기한테 유리한 정보가 아니면 제대로 주려고 하지를 않는단 말이지. 그게 자기 나름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단순히 자기 치부라서 숨기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런 못된 녀석. 부려먹을 건 다 부려먹으면서 이런 것 하나 안 알려주다니. 내가 조금 삐진 티를 내며 자리에 앉아 버리자, 인형은 내 머리를 툭툭 쳐 보다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정보를 제공했다.
[인형은 애초에 무생물이다. 그래서 신성 생물이 아니다.]
“뭐야, 그게. 어쨌든 너도 신의 힘으로 움직이기는 한다는 거지?”
[굳이 설명하자면 그렇긴 하다.]
“그러니까 나랑 비슷한 존재라는 뜻이네. 하지만, 아까 용사 일행이 내가 신성 생물이냐고 물었을 때에는 딱히 부정 같은 거 하지 않았잖아.”
[그건 나의 편의성을 위해서였다. 그들이 내가 신성 생물이라고 믿는다면 앞으로의 거래가 매우 편해질 것이다.]
“단지 그것뿐이야?”
[비록 신성 생물이 아니더라도 나는 대단한 존재다. 나는 신의 힘을 직접 받아 되살아난 언데드란 말이다! 용사 일행은 나를 존경해도 좋을 것이다.]
인형은 바닥에 착 내려앉더니 뽐내듯 으스대기 시작했지만, 나는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존경은 무슨 존경이야. 나는 그냥 신성 생물 비슷한 존재지만 용사 녀석은 노골적으로 신성 생물인데……. 게다가 이 녀석, 지금 이 행동도 딴청의 일환인 거 맞지? 내 질문에 진지하게 대답해 줄 생각은 여전히 없는 거잖아.
나는 인형을 집어 들어 주물럭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지금 이 녀석을 채근해 봤자 뭘 제대로 가르쳐 줄 것 같지도 않다. 게다가 지금의 나는 저 녀석에게 의지하지 않고선 혼자 뭘 하기 어려운 상태기도 하고. 저 녀석이 하는 이야기를 하나하나 다 의심하고 들었다간 아무것도 믿을 수 없기도 하다.
게다가, 인형의 정체가 무엇인지가 그렇게까지 중요한 정보냐 하면……. 따지고 보면 그건 아니란 말이지. 이 녀석에게도 자기 정체를 대답하고 싶지 않은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지도 모르고.
결국 나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인형은 내 머리 위에 올라가고 싶기라도 한지 나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내가 걸음을 옮기기 직전.
[사실 이 인형의 설명과 행동은 신용하지 않는 게 좋다.]
“뭐?”
[인형은 전능하지 않으며 설명과 행동에 큰 제약이 있다. 그게 바로 내가 이 세계에 온 이유이다. 인형이 채우지 못하는 부분은 내가 직접 채워야 한다. 그렇게 빈 부분을 채워 가다 보면 언젠가는 지금과 다른 길이 열릴지도 모른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갑자기 인형이 엉뚱한 설명을 하기 시작했는데. 나는 조금 떨떠름한 심정으로 인형의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인형은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폴짝 뛰어올라 내 머리 위로 올라탔다. 가면에 붙은 염소 뿔을 운전대처럼 이리저리 잡아당기는 걸 보니 어서 앞으로 가라는 뜻인 듯했다.
“야, 방금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빈 부분?”
[나는 저 앞의 벽과 바닥이 이상할 정도로 불그스름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제로 붉다기보다는 마치 내 시야에 이상이 생긴 것만 같은 모습이다.]
인형은 방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다른 화제를 꺼냈다. 처음에는 인형이 딴청을 부리느라 이상한 소리를 하나 싶었지만, 경험상 인형은 이런 문제에서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인형을 채근하는 대신 곧바로 복도 저편으로 시야를 돌렸다.
확실히 녀석의 말대로였다. 피가 묻은 것도, 벽의 재질이 다른 것도 아닌데, 마치 내 시야가 얼룩지기라도 한 것처럼 복도 저편의 풍경이 붉게 일그러져 보였다. 물론 실제로 내 시야에 이상이 생긴 건 아니었다. 몸을 돌려 지금껏 내가 걸어왔던 복도를 보자, 붉은색은커녕 얼룩 한 점 없이 시야가 깨끗하기만 했으니까.
[내가 예전에 얻었던 보석의 효과가 발동되었다.]
“보석? 무슨 보석을…….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어느 광장에 있던 여인 장식의 눈에서 빼낸 보석이 있었지. 나는 주머니에서 지난번에 얻었던 붉은 보석을 꺼냈다. 양쪽 눈을 다 얻으면 무슨 효과가 있다고 인형이 가르쳐 주었는데, 어쩌다 보니 한쪽 눈밖에 못 얻었다. 그러고 보니, 한쪽 눈의 보석만으로 얻을 수 있는 효과가 뭐였더라……. 맞다, 함정 탐지 역할이었나?
“그럼 저 벽과 바닥이 함정인가? 무슨 함정이야?”
[바닥에 발을 디디면 벽과 바닥이 반 바퀴 돌아서, 유독 가스가 분출되는 벽 반대편의 비밀 공간에 그대로 갇혀 버리는 함정이다. 꽤 쉬운 구조의 함정이지만 한번 들어가면 자력으로는 탈출할 수 없다. 다만, 갇히지 않은 동료가 있을 경우 바깥에서 바닥을 다시 한번 건드려 주면 탈출 가능성이 생기는 모양이다.]
벽 뒤의 비밀 공간이라니, 영화 속에서 한두 번쯤은 봤을 법한 정석적인 구조의 함정이었다. 게다가 동료가 도와준다면 얼마든지 빠져나올 수 있잖아. 물론 빠져나오기 쉽다는 건 동료가 있을 때의 이야기일 테고, 만약 위층에서 동료를 다 잃고 내려온 사람이라면 자력으로는 빠져나오지 못하겠지.
게다가, 신경 쓰이는 점이 더 있다면…….
“와, 이제는 복도에도 함정이 있네. 예전에는 광장에만 있더니.”
이 정도 함정이라면 모험가들의 의표를 찌를 만하다. 바로 위층까지만 해도 ‘광장은 위험한 공간일 수도 있지만 복도는 안전하다.’라는 규칙이 있었는데, 그 규칙이 갑자기 사라진다면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겠지.
나도 이 보석이 없었더라면 저곳에 함정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거다. 운 나쁘면 동료와 함께 사이좋게 비밀 공간에 갇히는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미궁의 중심으로 가면 갈수록 점점 함정이 많아진다. 어쩌면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는 걸지도 모른다.]
아니, 이제부터 시작이라기엔 지난 층에서 용사 일행이 전멸할 뻔했는데요. 물론 그건 그 사람들의 힘이 부족해서라기보단 용사가 자기 역량을 모르고 무리해서 생긴 일이었지만. 어쨌든 지금까지도 충분히 험난했는데 앞으로는 더 험난할 예정이라니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나저나 이 함정을 어떻게 지나가야 하려나? 최대한 빨리 뛰어가면 함정이 완전히 발동되기 전에 건너편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계산을 하고 있는데, 폴짝 바닥에 뛰어내린 인형이 문득 엉뚱한 제안을 해 왔다.
[함정 안쪽에는 모험가들의 시체가 있을지도 모른다.]
“듣고 보니 그렇겠네. 모험가들의 시체에서 짐을 챙길 수 있으려나?”
[내가 안쪽에서 시체를 뒤지고 나면 바깥에서 인형이 길을 열어 줄 거다.]
“……믿어도 돼?”
나는 인형을 흘끔 바라보았다. 아니, 분명 제안 자체는 합리적이다. 비밀 공간 안에서 유독 가스가 흘러나온다 쳐도 나에게는 별 영향이 없을 테고, 바깥에서 인형이 바닥을 건드려 줄 경우 금방 나올 수 있으니 크게 위험할 것도 없다. 하지만 문제가 있다.
‘그러니까, 이 녀석이 딴 마음을 먹으면 나는 빠져나오지도 못한 채 평생을 저 함정 안에서 썩어야 한다는 소리잖아.’
내가 인형을 흘겨보자 인형은 내 어깨 위로 올라오더니 위로하듯 어깨를 통통 두드려 주었다. 마치 힘을 주기라도 하는 것 같은 제스처였지만…….
[나는 인형에 대한 신뢰와 함정 안쪽에 대한 호기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다. 과연 이 인형을 믿어도 괜찮을까? 혹시 뒤통수를 치는 건 아닐까? 어쩌면 자기 정체를 알려 주기 싫어진 인형이 나를 함정 안에 가둬서 죽이려고 수작을 부리는 건 아닐까?]
“네가 그런 식으로 말하면 어쩌자는 거야?! 야, 불안해서 못하겠다. 네놈이 들어갔다 와. 내가 밖에서 건드려 줄게.”
[나는 인형이 혹시라도 중요한 물건을 빼돌리는 건 아닐까 의심하고 있다.]
“짜증나는 자식!”
물론 저 녀석이 진지하게 물건을 빼돌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아무래도 인형은 내가 직접 저 안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모양이었다. 하긴, 내가 인형을 빼내기 위해 함정이 있는 바닥을 잘못 건드렸다가 나까지 갇혀 버리면 그것도 그것대로 곤란하겠지. 나는 그다지 재빠르거나 순발력이 좋은 편이 아니라 잘못하다간 둘 다 사이좋게 함정에 갇히고 만다.
결국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는 함정 앞에 섰다. 내가 붉게 빛나는 바닥 위에 발을 올리자마자, 갑자기 사방이 휙 돌아가더니 주변의 풍경이 180도로 바뀌었다.
* * *
어느 정도 예상이야 하고 있었지만, 갑작스럽게 바닥이 움직이는 충격에 대비하기에는 내 운동 신경이 썩 좋지 않았다. 나는 몸의 균형을 잃고 엉덩방아를 찧을 수밖에 없었다.
“아야얏…….”
딱히 아픈 것도 아닌 주제에 괜히 끙끙거려 보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아까 전까지 있었던 복도와 크게 구조가 다르지는 않지만 훨씬 더 좁은 공간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만 머리를 다친 것 같지도 않은데도 이상할 정도로 시야가 뿌옇다는 점이 이상했는데, 알고 보니 원흉은 유독 가스였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니 천장의 균열 비슷한 곳에서 샛노란 연기가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일종의 마비 독이다. 흡입할 경우 근육 신경이 마비되는 증상이 있으며 오래 노출될 경우 호흡 곤란 등의 증상으로 사망에 이를 수 있다. 물론 나는 언데드라서 오래 노출되어도 큰 상관이 없을 듯하다.]
“그렇구나……. 자, 잠깐만. 이게 뭐야.”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이 갑자기 기울어져 경사로 비슷한 형태가 되었다. 내 몸은 그대로 경사로 아래쪽을 향해 굴렀고, 정체불명의 방 비슷한 공간에 떨어지고서야 겨우 멈추었다. 끙끙거리며 몸을 일으켜 앉으니 녹이 잔뜩 슨 갑옷을 입은 백골이 코앞에서 나를 반기고 있었다. 함정에 갇힌 채 그대로 죽어서 뼈만 남은 걸까.
수십 구의 시체가 경사로 아래쪽의 방을 나뒹굴고 있었다. 아무래도 여기는 일종의 시체 수납소인 모양이다. 함정에 걸려든 희생자를 여기에 가둬서 죽게 만들려는 게 아닐까 싶은데…….
[경사로 위로 올라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인형의 한 마디에 묘한 불길함을 느낀 나는, 허겁지겁 시체 한 구를 붙잡은 채 경사로 위로 기어 올라갔다. 내 판단은 의외로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10초도 채 지나지 않아 경사로가 서서히 위로 올라가기 시작하더니 아까 전의 평평한 바닥으로 돌아왔다. 이제 내 눈앞에는 평범한 벽만 보일 뿐, 아까 전의 그 공간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나는 땀이 나지도 않으면서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기분에 사로잡혔다. 뭐야, 이거. 내 행동이 조금이라도 늦었다간 그 시체 수납소 같은 곳에 완전히 갇히는 꼴이 되었을지도 모르잖아!
“야, 이런 게 있었으면 진작 말을 해 줬어야지!”
[나는 시체 수납소에서 시체 한 구를 노획했다! 훌륭한 성과다! 인형이 제때 경고해 준 덕분에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어쨌든 경고는 해 줬단 거냐, 이 악마 같은 솜뭉치 자식아…….”
이거, 생각보다 더 엄청난 함정이었구나. 나는 숨이 차지도 않으면서 가슴을 부여잡고 괜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이 함정, 단순히 벽 너머 비밀 공간에 갇히는 수준이 아니다. 내가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더 치밀한 함정이다.
복도의 벽이 반 바퀴 돌면서 희생자가 비밀 공간으로 들어오면, 우선 마비 독을 분사해 희생자가 움직일 수 없게 만든다. 그다음 바닥을 기울여 경사로를 만들어서 희생자를 시체 수납소에 떨어뜨린다.
희생자를 시체 수납소에 떨어뜨리고 나면 바닥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고, 시체 수납소는 사실상 입구가 봉쇄되고 만다. 독에 걸려 근육이 마비된 상태에서는 경사로를 기어오를 수 없으므로, 희생자는 눈앞에서 퇴로가 막히는 꼴을 그저 보고 있어야만 한다.
이렇게 시체 보관소에 갇힌 상태에선 아무리 동료가 바깥에 있다 해도 탈출할 수 없을 거다. 동료가 직접 안쪽으로 들어와 시체 보관소에서 희생자를 끄집어내야 할 텐데, 잘못하다간 그 과정에서 동료까지 마비 독에 당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래도 지금의 나는 괜찮다. 바깥에서 인형이 바닥을 건드려 주면, 바닥이 180도 회전하면서 무사히 바깥으로 나올 수 있다.]
“그것 참 고마운 이야기네……. 그럼 지금 건드려. 어서 나가고 싶으니까.”
[지금은 곤란하다. 아직 함정이 완전히 안정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 몇 분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함정이 안정화될 것 같다.]
뭐, 이 자식아? 설마 나를 내보내 주기 싫어서 핑계를 대는 거 아니야? 나는 잠시 동안 그렇게 생각했지만, 바닥 아래에서 정체불명의 째깍거리는 소리와 무거운 돌 같은 게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냥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진짜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인형이 이런 문제로 거짓말을 한 적은 없으니까.
‘어쨌든, 일단 시체 하나를 건졌으니 이거나 좀 뒤져 볼까?’
내가 붙잡아 온 시체는 몸의 일부분만 가리는 경갑과 얇은 로브를 입은 백골이었다. 별로 짐이 많아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차피 급하게 경사로를 올라오려면 가벼운 시체를 고를 수밖에 없었다.
보아하니 검사나 기사처럼 직접 나가서 싸우는 타입은 아닌 듯한데, 그렇다고 해서 마법사인 것 같지도 않았다. 일단 지팡이도 없는 데다가(어쩌면 시체 수납소 어딘가에 떨어져 있는 걸지도 모르지만) 경갑 아래에 받쳐 입은 로브도 하넨이 입고 있는 뼛조각 달린 로브와는 완전히 다르게 생겼다.
그러니까, 굳이 말하자면…….
‘성직자 같은 복장인데.’
시체의 옆구리에는 작은 가방이 달려 있었다. 나는 가방에 달라붙은 먼지를 몇 번 툭툭 털어낸 후 입구를 열었고, 그 안에서는 제법 두꺼운 공책 하나와 정체불명의 문양이 새겨진 구슬을 꿴 팔찌가 나왔다.
공책은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진주처럼 하얗고 광택이 나는 구슬이 꿰어진 팔찌는 제법 귀한 물건처럼 보였다. 내가 구슬에 새겨진 문양을 만지작거리자 인형이 문양에 대한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한때 신을 경애하는 상징으로 쓰였던 문양이다. 가지고 있으면 정신을 맑게 해 준다.]
“……한때?”
[이 문양을 사용하는 교파가 수백 년 전 사라졌기 때문이다. 지금의 신전은 이것과 다른 문양을 사용한다.]
“교파라니, 그건 또 뭐야? 기독교와 불교의 차이 같은……. 뭐 그런 건가?”
[그것과는 뉘앙스가 다르다. 섬기는 신이 같지만 교리의 해석이나 신을 대하는 태도 등에서 차이를 보일 뿐이다.]
“흐음, 그렇구나. 그러니까……. 개신교와 천주교 정도의 차이인가. 나는 종교 같은 거 잘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팔찌를 챙겨 주머니에 넣었다. 이미 사라진 종파의 문양이라니 별로 잘 팔릴 것 같지는 않지만, 정신 집중에 도움이 된다는 식으로 어필하면 하넨에게는 꽤 괜찮은 값에 팔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나저나, 문제는 이 공책인데…….
[일기장이다. 아쉽게도 상품이 될 것 같지는 않겠다.]
“그야 그렇겠지. 남의 일기장 따위를 돈 주고 살 정도로 용사 일행이 넉넉한 처지도 아니고.”
그럼 이건 놔두고 갈까, 나는 잠시 그렇게 생각하다가 곧 마음을 고쳐먹었다. 상품이 아니라고 해서 무조건 쓸모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이 세계의 지식이 부족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의외로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이 일기장에 적혀 있는 건 수백 년 전의 지식일 가능성이 크다.]
“뭐 어때? 그러면 수백 년 전의 역사에 대해 알게 되는 거잖아. 어쨌든 손해는 아니야.”
나는 일기장의 표지를 슬쩍 넘겨 내용을 살폈다. 혹시라도 못 읽는 글자가 나오면 어쩌나 싶었는데 의외로 해독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일기장에 쓰인 건 한국어가 아니고, 꼬부랑거리는 데다가 묘하게 획수까지 많아서 어느 나라 글자인지도 모를 지경이었지만 그 뜻은 자연스럽게 머릿속으로 스며들어 왔다.
‘그러고 보니, 용사 일행도 딱히 한국어를 쓰는 건 아니지만 어찌어찌 의사소통은 되고 있었지……. 인형이 도움을 준 덕분인가?’
어쨌든 나는 아무 페이지나 펼치고는 그 내용을 읽어 보았다. 적어도 일기장의 주인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알아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안은 채.
「……xx년 xx월, 열세 번째 일기.
……들에게 찾아가 보았지만 역시 대부분이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사실 그 누구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상황까지 광증이 진행된 모양이었다. 나는 더 이상 정화의 권능을 사용할 수 없어 ……할 수는 없었다. 결국 ……실패했다. 그들의 공격으로부터 살아 나온 것이 오히려 기적이라 할 수 있겠다. 잠시 정신을 차린 ……에게서 사건의 전말을 들은 것만이 유일한 수확이라면 수확이지만, 그들과 함께 미궁에 들어가는 건 역시 불가능하다.
…….
……로부터 편지가 왔다. 그 멍청한 짓을 그만두라는 내용이었다. 잘못하다간 ……때문에 더 큰 위험에 처할지도 모른다는 주장이었다. 물론 나도 그쯤은 알고 있지만 어쩔 수 없다. 지금의 ……은 선악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악을 뿌리 뽑겠다는 주장을 하는 바보들이다. 처음부터 ……을 분리해서 악함을 제거하겠다는 발상이 잘못되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선함의 원동력이란 결국 악으로부터 나오고, 그들이 생각하는 악함의 원동력이란 결국 선으로부터 나올 뿐인데.」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글자를 해독할 수 있는 것까지는 좋은데, 군데군데 얼룩진 부분이 있어 글자의 완전한 식별이 불가능했다. 아무리 인형이라고 해도 안 보이는 글자를 만들어 낼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가까스로 식별한 부분 또한 나에게는 큰 도움이 되지 않는 내용이었다. 미궁에 들어갈 동료를 확보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찾아갔다가 오히려 공격당하고 도망쳐 나왔다는 내용과, 어떤 사람이 일기의 주인공이 미궁에 들어가려는 걸 만류했다는 내용 정도가 전부였다. 마지막에 적힌 선악에 대한 이야기는 약간 개똥철학처럼 들리기도 하고.
뭐, 이건 어디까지나 일기장이니 그 내용이 꼭 내게 도움이 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아무래도 일기장의 맥락을 다 파악하려면 바깥으로 나가서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히 읽어 봐야 할 것 같다. 띄엄띄엄 읽어서는 뭐가 뭔지 모르겠어.
다만, 그 페이지의 마지막 문장이 내 시선을 끌었다.
「악의 근원을 ……로부터 분리해 이 미궁에 봉인한 건 ……들이 벌인 최악의 실수였다. 분명 그 판단으로 인해 먼 훗날 세계가 ……거다.」
뭐야,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악의 근원은 처음부터 미궁 지하에 있었던 게 아니라, 무언가로부터 분리된 후 따로 봉인되었다는 소리인가? 나는 그 부분의 내용을 조금 더 자세히 읽어 보려고 했지만, 그 순간 갑자기 벽과 바닥이 확 움직였다.
“우, 우왓?!”
빙글, 몸 전체가 180도로 회전하는 듯한 감각은 어딘가 익숙한 데가 있었다. 가까스로 일기장을 놓치지 않은 채 바닥을 붙잡자, 곧 익숙한 복도가 시야에 들어오고 맹한 얼굴의 인형이 내 앞으로 총총 다가왔다. 아무래도 이 녀석은 함정이 안정화되자마자 냅다 바깥의 함정을 건드려 버린 모양이었다.
“이 자식아, 꺼내 줄 거면 예고라도 하고 나서 꺼내 주지……!”
[인형은 몇 분 후에 나를 꺼내 주겠다고 이미 예고한 바 있다. 소소하지만 상품으로 팔 수 있는 물건을 획득했다. 인형은 기뻐하고 있다.]
인형이 제멋대로 팔다리를 흔들며 기쁨의 춤을 추든 말든, 나는 허겁지겁 함정의 범위에서 벗어나 숨을 돌렸다. 이 자식, 혹시 내가 읽어선 안 될 부분을 읽는 게 싫어서 일부러 이 타이밍에 함정을 건드린 거 아니야?
[인형은 내가 품 안에 숨긴 일기장을 모른 척해 주기로 한 모양이다.]
“안 숨겼거든. 그냥 혹시라도 페이지가 떨어져 나갈까 봐 붙잡은 것뿐이거든. 그리고 너, 어차피 나와 시야를 공유하는 것 같은데 숨겨 봤자 무슨 의미가 있어?”
굳이 말하자면 시야만 공유하는 건 아니겠지. 이 인형은 내 시각과 청각은 물론이고 사소한 기분이나 생각까지도 다 엿보고 주절주절 설명해 주니, 이 녀석에게서 무언가를 숨긴다는 것만큼 의미 없는 행동도 없을 거다. 이렇게 생각하니 묘하게 섬뜩하기도 하네.
“그나저나, 아까 일기장을 읽어 보니 악의 근원이 무언가로부터 분리되어 봉인되었다는 내용이 나오던데. 그게 무슨 뜻인지 혹시 알아?”
[페이지의 내용이 완전하지 않다. 내가 그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선 정보가 더 필요하다.]
“모르는 거야, 아니면 은근슬쩍 모르는 척하면서 모호하게 표현하는 거야? ……됐다. 일기를 더 읽다 보면 힌트가 나올지도 모르지.”
나는 일기장을 다시 한번 확인했고, 아까 내가 읽던 페이지가 떨어지지 않고 멀쩡하다는 걸 확인한 후 일기장과 팔찌를 자루 안에 집어넣었다. 이걸 한꺼번에 다 읽는 건 아무래도 힘들 것 같으니, 미궁을 조사하다가 쉬고 싶을 때쯤 조금씩 읽어 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