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투덜거리는 마법사님 (8/28)

7. 투덜거리는 마법사님

죽은 듯 기절해 있던 하넨이 깨어난 건 수십 분 후의 일이었다.

그때 나는 케르츠와 약초값을 흥정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용사는 요리조리 도망치는 인형을 기어코 붙잡아서 주물럭거리며 가지고 노는 중이었다. 의외로 용사는 순발력이 좋았다. 나나 하넨은 몇 시간쯤 끙끙거려도 못 잡았을 인형을 아주 손쉽게 붙잡아선 가지고 놀았다.

인형은 나에게 [인형은 용사에게 붙잡혀 이상한 고초를 당하는 중이다. 인형은 나에게 도움을 요구하고 있다.] 따위의 구호 요청을 시도했지만 나는 용사를 그냥 내버려 두었다. 용사가 인형의 팔다리를 뜯어낼 기세로 잡아당기는 것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두 살짜리 어린아이가 장난감을 좀 가지고 노는 중이니 굳이 말릴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용사는 하넨이 끙 소리를 내며 어깨를 부르르 떨자마자 인형을 바닥에 내려놓고 하넨에게 다가갔다. 장난감에 대한 관심보다는 동료에 대한 관심이 더 큰 모양이었다. 용사가 하넨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자 하넨은 크게 숨을 들이쉬더니 곧 눈을 떴다.

“하넨, 괜찮아요?”

나와 케르츠는 흘끔 하넨을 바라보았다. 흐릿한 눈으로 주변을 바라보던 하넨은, 조금 멍한 표정을 지으며 용사를 바라보더니 갑자기 미간을 팍 찡그렸다.

나는 당연히 고통 때문에 그런 줄 알았다. 정신을 차리기는 했지만, 목이나 손등에 불거져 있는 혈관은 아직도 이상한 색으로 물들어 있었으니까. 아마 독 때문에 저렇게 얼굴을 찡그리는 걸지도 모른다고 나는 막연히 추측했다.

그러니까, 하넨의 입이 열리더니 벼락같은 고함을 지르기 전까지만 해도 말이다.

“이……, 이 멍청하기 짝이 없는 자식아!”

“우왓.”

“그러길래 내가 뭐랬냐! 몸이 안 좋다 싶으면 무리하지 말고 곧바로 쉬자고 몇 번을 말했어!”

“우리 마법사님, 또 시작이시네…….”

케르츠가 한숨을 푹 내쉬며 어깨를 으쓱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한두 번 있었던 일이 아닌 듯했다. 용사는 놀란 토끼처럼 눈이 동그래져선 바닥에 주저앉았고, 하넨은 용사의 가슴팍이나 옆구리 같은 곳을 쉴 새 없이 살피며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미, 미안해요. 괜찮을 줄 알고 움직였는데 괜찮지 않았어요.”

“어떤 게 안 괜찮은 상태인지 내가 지난번에 설명해 줬잖아! 시야의 초점이 제대로 안 맞거나, 움직임이 네 생각보다 반 박자쯤 늦게 나가거나, 걷기가 버거워서 앉고 싶어지거나 하면 그게 피곤할 때의 증상이라고! 내가 이런 것까지 일일이 설명해야 하는 것도 웃겨 죽겠는데 심지어 설명한 것조차 까먹어?! 대체 머리가 얼마나 나쁜 거냐!”

“까먹지 않았어요. 그치만, 하넨도 케르츠도 다들 괜찮아 보여서.”

“우리 기준이 아니라 네 기준에서 생각해야지! 무리할 필요도 없는데 왜 굳이 무리를 해? 쉬엄쉬엄 간다고 해서 악의 근원이 어디로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쉴 때는 제대로 쉬어야지 왜 고집을 부려선!”

대체 왜 저렇게 소리를 지르는 거지, 당황해서 머뭇거리던 나는 하넨의 이야기를 어느 정도 듣고 나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그러고 보니. 케르츠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잊고 있기는 했지만, 이 사람들 방금 사념과 싸우다가 전멸할 뻔했지. 아무래도 하넨은 그 일 때문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모양이었다.

“나나 케르츠가 널 때리길 해, 혼내길 해? 뭐가 그렇게 싫어서 우리 눈치를 봐? 잘못 움직였다간 우리 모두가 위험해진다고!”

아니, 지금 열심히 혼내고 있으면서 대체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건지. 용사는 잔뜩 기가 죽어서는 고개만 숙이고 있었고, 하넨은 잔뜩 성질을 내며 용사의 머리를 붙잡은 채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용사는 하넨에게 붙잡혀 제대로 도망가지도 못한 채 하넨의 고함을 듣고 있어야만 했다. 워낙 저 마법사의 표정이 험악하다 보니 용사가 주눅이 드는 것도 당연했다. 저렇게 소리를 질러서야 안 아플 사람도 아프겠다. 용사도 이제 막 정화를 마친 상태니 많이 힘들 텐데.

나는 어쩔까 고민하던 끝에 케르츠의 옆구리를 쿡쿡 찔러 보았다. 남의 싸움 구경하듯 태평하던 케르츠가 의아한 시선으로 날 바라보았다.

“왜요?”

“저거 말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용사님이 엄청 기죽었는데.”

“기가 죽은 건 알지만 어쩔 수 없어요. 이번 일은 용사님이 잘못한 것도 있으니까요. 우리 용사님, 묘하게 자기 몸 상태에 관심이 없는 성격이라 무리를 하는 일이 많거든요.”

“그, 그래도.”

“지금 용사님에게 주의를 주지 않으면 나중에 또 비슷한 일이 생길 거예요. 연속으로 사념을 정화하는 일은 당연히 힘들 텐데, 저와 마법사님이 멀쩡해 보이니까 자기도 멀쩡한 줄 알고 무리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거든요. 지나치게 피로한 상황에서는 정화가 제대로 안 되는 사태도 벌어지고…….”

“…….”

“자기 한계에 대한 이해가 아직 부족한 분이에요. 계속 저렇게 행동하도록 내버려 두면 큰일 납니다. 이번에야 당신이 도와줘서 한숨 돌렸지만, 다음번에는 정말 엄청난 사태가 벌어질지도 몰라요.”

케르츠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하넨과 용사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아까 용사가 사념을 토해 낸 건 자기가 힘든 줄도 모르고 지나치게 무리를 한 탓이라는 듯했다. 이번에 용사 일행이 큰일 날 뻔했던 것도 사실이고, 케르츠의 말 또한 확실히 틀린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그렇기는 해도…….

‘아직 두 살짜리잖아, 저 용사님.’

두 살이면 자기 객관화가 좀 안 될 수도 있고, 자기 몸에서 오는 신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는 거지. 그것 가지고 저렇게까지 혼낼 필요가 있나? 평소에는 엄청 정성껏 챙기면서 이럴 때는 묘하게 냉정한 케르츠가 야속해서, 나는 괜히 그의 옆구리를 다시 찔러 보았다.

“그래도 이럴 때는 혼내는 거 아니에요. 용사님 본인도 얼마나 서럽겠어요.”

“아뇨, 뭐. 그렇기야 하겠지만.”

“아까 케르츠 씨가 그러지 않았어요? 저 용사님은 머릿속이 백지장 같아서 주변의 말에 큰 영향을 받는다고. 그쪽 용사님이 서러워져서 엇나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사춘기 때는 그런 식으로 엇나가는 경우가 많다고요.”

“사춘기란 건 또 뭡니까? 당신은 종종 이상한 단어를 쓰곤 하는군요. ……뭐, 대강 요지는 이해했습니다. 당신 말도 틀린 말은 아니죠. 사실 하넨 씨도 잘한 건 없고.”

하넨이 잘한 건 없다니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케르츠는 보충 설명을 하는 대신 쓴웃음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고, 하넨에게 잔뜩 혼나고 있는 용사님의 옆으로 다가갔다. 용사는 화내는 사람이 두 배로 늘어났다고 생각했는지 잔뜩 긴장했지만 케르츠는 그저 놀리듯 하넨에게 말을 건넬 뿐이었다.

“저기요, 마법사님. 용사님 일 때문에 놀란 건 알겠지만 너무 화낼 것까진 없잖아요? 용사님도 중간에 정화에 실패해서 사념을 토해 낼 줄이야 몰랐겠지요.”

“그러니까 혼을 내야 하는 거야. 안 그러면 다음번에도 똑같은 실수를 저지른다고.”

“그냥 훈육하는 것뿐이라면 어쩔 수 없지만……. 애초에 마법사님이 허세를 부리지 않았더라면 용사님도 저렇게까지 무리하지는 않았을 텐데요.”

“뭐야?”

“애초에 우리 용사님이 누굴 보고 저런 버릇을 익혔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케르츠의 그 한 마디에 하넨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어, 그러니까. 지금 하넨 저 사람이 남 탓할 처지가 아니다 이 말인가? 그러고 보니 하넨은 다른 동료들에 비해 오래 기절했다 일어났는데도 제법 피로해 보였다. 처음에는 마법을 너무 많이 쓴 탓에 기력이 떨어진 줄만 알았는데, 만약 그게 아니라면…….

“난 무리하지 않았어! 허세도 안 부렸고!”

“무리하셨잖아요. 저 사념과 싸우기도 전부터 이미 좀 지쳐 있으셨으면서.”

“하나도 안 지쳤거든? 심지어 난 지금도 멀쩡해! 용사의 기력이 회복되기만 하면 저런 사념쯤이야 한주먹거리라고!”

“지금도 허세 부리고 계시네요. 가슴에 손을 얹고 말씀하실 수 있으세요?”

“너 지금 날 무시하는 거야? 내가 고작 몇 시간쯤 계속 걸었다고 지칠 것 같아? 사람을 하찮게 보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그래요? 그럼 한번 자리에서 일어나 보실래요? 정말 기력이 남아 있다면 그 정도쯤이야 할 수 있겠지요.”

“못할 건 뭐가 있……. 우, 우왁!”

무리했구나. 하나도 안 멀쩡하네.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다리가 꼬여 처참하게 넘어진 하넨의 모습을 보자마자 나와 인형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인형 녀석도 표정 변화는 없었지만 대충 나와 비슷하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케르츠는 어이가 없다는 듯 하넨에게 손을 내밀었고, 하넨은 케르츠의 손을 탁 치고는 끙끙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나름대로 자존심을 세우려는 모양이었지만 솔직히 역효과처럼 보였다.

넘어지면서 어딜 잘못 부딪쳤는지, 아니면 피곤해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하넨의 코에서 코피가 줄줄 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넨이 손등으로 코 밑을 닦다가 흠칫 놀라자 케르츠가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요, 마법사님. 괜히 용사님한테 화내느라 진 빼지 마시고 좀 쉬었다 가시죠? 상인 씨도 보고 있는 마당에 꼴사납게 굴지 마시고.”

“……상인이라니?”

하넨은 동그래진 눈으로 케르츠를 잠시 바라보다가, 다소 놀란 낯으로 후다닥 내 쪽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내 옆까지 와서 앉아 있던 인형이 하넨에게 인사하듯 손을 흔들어 보였다. 물론 상대는 인사를 받아 주기는커녕 얼굴이 점점 홍당무처럼 달아오르고 있었지만.

나는 옆에서 태평하게 손이나 흔들고 있는 인형의 머리를 꾹 눌러 버렸다. 아니, 지금 이거 저 사람 입장에서는 제법 쪽팔린 상황이라고. 하지만 이미 상황을 수습하기에는 조금 늦은 것 같아서.

“너, 너는 왜 아직도 안 가고 거기 있어? 있으면 있다고 기척이라도 해야지!”

아니, 내가 잘못했으니까 일단 진정하시고요. 마법사님.

용사는 나와 하넨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하넨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그럭저럭 사려 깊은 행동이라 할 수 있겠다.

* * *

“흠흠, 어쨌든 아까는 구해 줘서 고마웠다. 네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큰일 날 뻔했어. 그리고, 좀 멍청한 꼴을 보여서 미안하기도 하고…….”

몇 분 후, 하넨은 들고 있던 손수건으로 코끝을 꾹 누른 채로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퉁명스러웠지만 말투는 나름대로 정중했다. 부끄러운지 귓불까지 벌겋게 달아올라 있는 꼴을 보고 있노라니 조금 우습기는 했지만, 케르츠나 용사는 당연하다는 듯 생략하고 있던 감사 인사를 저 사내에게나마 받으니 조금은 기뻤다.

일단 나는 아무것도 못 본 척하며 가볍게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용사는 하넨의 기분이 풀린 게 기뻤는지 옆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었는데, 아까 전까지 하넨에게 잔소리를 들었던 건 벌써 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케르츠 또한 그저 재미있다는 듯 두 사람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나저나, 네가 케르츠를 치료해 준 거 맞지? 약초의 대금은 받았어? 케르츠가 이미 치렀나?”

“안 그래도 그 문제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케르츠 씨와 흥정을 하느라고.”

“흥정? 아니, 뭐 그럴 것까지야 있나. 구해 준 공이 있으니 이번엔 그냥 괜찮게 줘도 되지 않겠어, 케르츠?”

“그렇기야 하지만……. 아까 마법사님이 잠들어 있던 사이에 저 인형이 영혼 조각 엄청 챙기던데요? 용사님 돌보는 척하면서 은근슬쩍.”

“저기요, 그거 다 용사님한테 탈탈 털려서 회수됐거든요? 물론 우리 인형이 조각 좀 꿍치려고 수작 부린 건 사실이지만!”

“……저놈의 인형이 진짜!”

하넨은 인형을 붙잡기 위해 손을 확 뻗었지만, 당연하게도 인형은 도망가 버렸으며 하넨의 손은 빈 허공만 갈랐다. 그는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주는 듯했지만, 실제로는 지팡이를 휘두르지도 않은 채 바닥에 내려놓았다.

‘저 사람, 생각보다 물렁한 성격 아니야?’

늘 죽을상으로 얼굴을 찌푸리고 있어서 성격이 나빠 보이긴 하지만, 잘 보면 의외로 허당일지도 모르겠다. 생각해 보니 아까 용사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던 것도 자기 딴에는 용사를 걱정하느라 그랬던 것 같고……. 나는 한숨을 푹 쉬는 하넨의 얼굴을 바라보며 내심 그렇게 생각했다. 하넨은 내 등 뒤에 숨은 인형을 잠시 노려보다가 화제를 바꿨다.

“뭐, 어쨌든.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쉬면서 한숨 돌리는 시간이 필요하겠어. 내가 몇 시간이나 기절해 있었지?”

“아니, 몇 시간까지 갈 것도 없어요. 하넨 씨가 기절해 있던 건 고작해야 몇 십 분 정도니까.”

“고작 그것밖에 안 되었어? 그럼 더 쉬어야겠네. 용사 녀석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는 앞으로 못 나아가.”

“미안해요.”

“아니, 이건 네가 사과할 문제가 아니야. 사람이 쉴 때는 쉬어야지.”

용사는 자기 때문에 일정이 지체된다고 여겼는지 하넨의 눈치를 보았지만 정작 하넨은 피식 웃으며 용사의 머리만 쓰다듬을 뿐이었다. 그가 가볍게 지팡이를 휘두르자 아무것도 없던 바닥에 화르륵 불이 타올랐다. 여기서 야영을 하며 쉰 다음 완전히 회복되고 나면 그때 출발하려는 듯하다.

인형은 모닥불을 쬐고 싶은지 졸래졸래 모닥불 앞에 가 앉았지만, 어느새 배낭에서 프라이팬을 꺼내 든 케르츠가 인형의 뒷덜미를 붙잡아 옆으로 치웠다.

“우선은 가볍게 식사라도 하죠. 조금 이른 감이 없잖아 있습니다만…….”

“아니, 마지막으로 식사를 한 이후로 광장 두 군데를 지나쳐 왔으니 그렇게 이르지도 않아. 배도 채우고 잠도 좀 자자.”

케르츠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배낭을 뒤져 천으로 싸인 고깃덩어리를 꺼냈다. 딱 세 사람이 먹으면 충분할 만한 양이었다. 그는 능숙하게 고기를 잘라 프라이팬에 올리고 굽기 시작했다.

그저 소금을 뿌리고 열을 가할 뿐인 단순한 조리법이었지만, 지글지글 고기가 익는 소리가 제법 요란해서 꽤 본격적으로 요리를 하는 듯한 모습이 연출되었다.

“상인은 고기 안 먹어요? 배고프지 않아요?”

“예? 저, 저는 언데드라서 식사 같은 건 안 해도 괜찮아요. 애초에 식욕도 없고.”

“……안 먹을 수 있으면 안 먹는 게 나아. 너나 많이 먹어, 용사.”

고기가 다 구워지자 하넨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용사에게 고기를 먹여 주었고, 용사는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고기를 우물우물 씹었다. 저 반응을 보아하니 역시 제대로 된 고기는 아닌 모양이었다.

대체 무슨 고기길래 저러는 거지? 나는 쓸데없는 궁금증에 고개를 갸웃하다가, 갑자기 솟아오르는 불길함에 곧바로 추측을 그만두고 말았다.

이건 진짜 궁금해하면 안 된다. 미궁 바깥에도 제대로 된 가축이 없다고 들었고, 미궁 안에는 애초에 용사 일행이나 나를 제외한 생물체가 없으니 정상적인 방법으로 얻은 고기일 리가 없잖아. 알든 모르든 결과적으로는 찝찝해질 게 분명하니 그냥 고민 자체를 말아야 한다. 어차피 내가 먹는 고기도 아니고…….

고기의 정체가 뭔지 모르는 듯한 용사와, 고기의 정체를 알든 말든 아무래도 좋아 보이는 케르츠만이 태평한 얼굴로 고기를 먹었고, 하넨은 마치 쓴 약초를 억지로 씹는 듯한 찝찝한 얼굴로 고기를 우적우적 씹고 있었다. 나는 모닥불 옆에 앉은 채 그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고 보니 신기할 정도로 식욕이 없네. 아무리 출처 불명의 음식이라고는 해도.’

나는 조금 씁쓸한 기분을 느끼며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간이었으니까 인간이었을 시절의 버릇이 조금쯤은 남아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지금의 나는 마치 원래부터 음식을 조금도 먹지 않았던 것처럼 아무런 욕구도 들지 않았다.

조각 두 개를 더 소모하면 감정을 비롯한 식욕이 돌아올 거라고 예전에 인형이 말하긴 했지만, 실제로 조각을 한꺼번에 세 개씩이나 소모해 본 경험이 없어서 별로 체감이 안 된다. 애초에 저런 이상한 고기에 식욕을 느끼기 위해 굳이 감각을 되찾고 싶은 마음도 없고…….

이래도 저래도 기분이 이상한 건 사실이다. 조금 뚱한 얼굴로 프라이팬을 바라보고 있는데, 부지런히 음식을 먹던 하넨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너.”

“네?”

“문득 생각난 건데 말이야. 넌 어쩌다가 언데드가 되어서 이런 미궁을 돌아다니고 있는 거야?”

아니, 왜 하필 이 타이밍에 그런 소리를. 생각해 보면 아예 맥락 없는 이야기도 아니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꽤 갑작스러운 이야기였기에 나는 조금 머뭇거렸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케르츠가 조금 당황한 눈치로 하넨을 말리려 했다. 내가 그 화제에 민감하게 반응할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확실히 당황스러운 질문이기는 하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말해도 상관없고 안 말해도 상관없는 문제였다. 나는 어쩔까 고민하다가, 적어도 간단한 이야기 정도는 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결론을 내렸다.

뭐, 조금 복잡한 사정이 있기는 해도 아예 못 말할 이야기는 아니다. ‘이세계에서 갑자기 끌려와서’ 운운하는 소리를 저 사람들이 믿을지 안 믿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굳이 내가 모든 이야기를 다 해야 하는 건 아니다. 적당히 얼버무려도 큰 문제는 없겠지.

“뭐, 사고를 당해서요.”

“사고?”

“네. 분명히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깨어나 보니 이 미궁이더라고요. 옆에는 이 인형이 있었고. 듣자 하니 이 인형이 죽어 가던 저를 언데드 상태로 살려 놓은 모양이더라고요. 일단 고마운 건 사실이지만 뭐랄까, 한편으로는 좀 얄밉기도 하고. 누가 언데드로 만들어 달랬냐고요.”

나는 내 어깨에 앉아서 다리를 흔들고 있는 인형의 뒷덜미를 잡고 들어 올렸다. 인형은 자세가 불편한지 놔 달라는 듯 팔다리를 바동거렸지만 나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이 녀석에게는 나름대로 애증을 가지고 있다. 분명 이 녀석 덕분에 내가 죽지 않았고, 이 녀석이 나나 용사 일행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으니 지금 당장 이로운 녀석인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 녀석은 결국 자기 목적을 위해 나를 되살린 거란 말이지.

이 녀석의 행동이 결과적으로 내게 도움이 된다고는 해도, 이 녀석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조금쯤 기분이 이상해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그러니까, 내가 실 달린 꼭두각시가 되고 이 녀석이 내 머리 위에 앉아 실을 이리저리 잡아당기는 기분이랄까. 분명 내가 선택해서 움직이는데 결과적으로는 이 녀석이 유도한 선택지를 고르는 것 같달까.

내가 조금 떨떠름한 기분으로 인형을 바라보고 있는데, 갑자기 하넨의 표정이 묘하게 바뀌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잖이 당황한 듯한 눈치였다.

“엥? 야, 잠깐만. 그러면 네 쪽이 사역마였어?”

“네? 지금 그게 무슨 소리…….”

“아니, 나는 지금껏 네가 본체고 이 인형이 사역마인 줄 알았단 말이야. 그런데 사실은 거꾸로라고?”

아니,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하넨을 바라보았지만, 하넨은 오히려 경악한 눈으로 나와 인형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저 사람이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모양인데.

“저, 저는 사역마 같은 거 아니거든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사역마 맞잖아! 이제 보니까 인형이 널 따라다니는 게 아니라 네가 인형을 따라다니는 거였어?”

“아니라니까요! 이 인형이 절 되살린 건 맞지만 그렇다고 제가 이 인형의 사역마가 되는 건 아니거든요?!”

어, 잠깐만. 혹시 사역마 맞나? 일단 부정하고 싶어서 빡빡 우기기는 했지만 생각해 보니 하넨의 말이 맞는 것도 같았다. 그러니까, 사실 나는 저 사람이 말하는 사역마라는 게 뭔지도 잘 모르는데. 어감이나 맥락을 고려해 봤을 때, 내가 인형에게 종속되는 상태를 뜻하는 단어가 아닐까 막연히 추측할 뿐.

“사역마가 아니면, 그럼 뭔데?”

결국 나는 하넨의 질문에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어, 그러니까. 나는 이 인형의……. 뭐지? 자존심 가는 대로 대답하자면 내가 이 인형의 주인이라는 식으로 답하고 싶었지만, 솔직히 그런 소리를 입 밖에 꺼내면 인형 본인은 둘째 치고 내 자괴감이 엄청날 것 같았다. 실제로 나는 이 인형의 안내에 따라 움직이고 있고, 이 인형 덕분에 이런저런 보호를 받고 있으니까.

내 침묵이 길어지자 하넨의 표정이 점점 미묘하게 변했고, 결국 내 침묵에 내가 질리고 말아서 생각나는 단어를 아무거나 입 밖으로 내뱉어 버렸다.

“그, 그러니까……. 꼬, 꼬봉이요?”

“……꼬봉? 그게 뭐야?”

“그러니까. 그……. 굳이 말하자면 부하 같은 거? 똘마니?”

아니, 순간 떠오르는 게 없어서 말하긴 했지만 말해 놓고 나니 차라리 사역마라고 인정해 버리는 게 낫지 않나 싶을 정도로 자존심이 팍 상하고 말았다. 생각해 보니 사역마나 똘마니나 결국 그게 그거잖아! 내 손에서 벗어나 바닥에 착지한 인형이 고개를 들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쩐지 나를 한심하게 여기는 표정이었다.

하넨과 케르츠 역시 조금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웃어야 할지, 당황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는데, 마치 아까 내가 하넨의 울먹거리는 모습을 보며 당황할 때 지었을 법한 그런 표정이었다.

어쩌면 내 얼굴은 아까 전의 하넨만큼이나 달아올라 있을지도 모른다. 죽은 몸이라 혈액 순환도 안 되는 주제에 얼굴에 피가 몰린다면 그것도 꽤 웃기긴 하겠지만.

나는 괜히 민망해져서 인형의 옆구리를 슬쩍 꼬집었다. 인형이 항의하듯 내 손을 팡팡 때렸지만 당연하게도 대미지는 별로 없었다. 하넨은 제법 당황한 낯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아니, 있잖아. 그. 애초에 너는 뭘 이용해서 그 몸을 유지하고 있는데?”

“네?”

“언데드 상태에서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마력이 필요하잖아. 마력이 없으면 몸이 붕괴해서 완전히 썩어 버리고. 네 몸이 썩지 않도록 마력을 공급해 주고 있는 게 누구야?”

어, 잠깐만.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마력이라니?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주머니에서 영혼 조각이 든 유리병을 꺼내 흔들어 보였다. 하넨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해 보였고, 나는 손가락으로 유리병을 가리켜 보였다.

“어, 그러니까. 그 유리병이 뭐?”

“이거 흡수해서 몸을 유지하고 있는데요.”

“……잠깐만, 뭐? 그게 어떻게 가능해? 정화된 영혼을 마력 대용으로 쓴다고?”

아니, 원래 언데드는 다 그런 거 아니었어?

그게 말이 되냐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하넨의 모습에, 나는 오히려 당황하고 말았다.

“왜, 왜 그러는데요?”

“말도 안 돼. 애초에 너 같은 언데드가 정화된 영혼을 모으는 것 자체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는데……. 그런데 그걸로 몸을 복원해?”

“아니, 정화된 영혼이란 게 뭐가 그리 대단해서 그래요? 그냥 사념을 정화하고 남은 쪼가리잖아요.”

“쪼가리라니.”

하넨은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심지어 옆에서 내 이야기를 듣던 인형조차도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는데, 하넨은 그렇다 쳐도 저 녀석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 조금 짜증이 났다. 아니, 그렇게 대단한 거면 네놈이 설명을 해 줬어야 할 거 아니야. 지금까지 입 싹 씻고 있다가 이제 와서는!

“너, 역시 평범한 언데드는 아니군. 그 정도의 기본 지식도 갖추질 못하다니 덜떨어져도 한참은 덜떨어졌어. 평균 이하의 언데드야.”

“저기요, 하넨 씨. 당신이 아는 지식이 세상 모두가 알고 있는 상식이란 법은 없거든요?”

“이 정도는 기본 상식이거든? 두 살짜리 어린애한테 물어봐도 알겠다!”

“정화된 영혼이니 뭐니 하는 고급 어휘를 구사하는 두 살짜리 어린애가 어딨어요! ……어, 용사님? 그쪽 이야기한 거 아니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주실래요?”

용사가 물끄러미 이쪽을 바라보자 어쩐지 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 그. 애초에 저 사람은 규격 외의 두 살이니까 나와 같은 선상에서 비교하면 안 되잖아. 나보다 키도 크고, 힘도 세고, 게다가 저 사람은 신전에서 인생의 절반가량(그래 봤자 고작 1년 남짓이지만)을 보냈고…….

아니, 애초에 난 이계에서 온 사람이잖아. 그러면 정화된 영혼인지 뭔지에 대해 잘 모를 수도 있지. 나는 뒤늦게 반박을 해 보려고 입을 열었지만 하넨이 한 박자 빨랐다.

“뭐, 그 정도로 무식한 것도 불쌍한 노릇이니 내가 설명해 주지.”

[이 사람에게 설명을 듣느니 차라리 인형에게 설명을 듣는 게 자존심 덜 상할 것 같다. 이미 늦었지만.]

인형은 얄밉고 하넨은 짜증난다. 하넨을 걷어찰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일단은 인형의 옆구리를 콱 꼬집어 보았다. 애초에 이 녀석이 제 입맛에 맞는 정보만 제공하고 나머지에 대해선 입을 싹 씻어 버린 게 원인이니 이 녀석이 맞는 게 합당하다. 물론 인형 본인은 꼬집히기 싫다는 듯 내 손을 탁탁 때렸지만 말이다.

어쨌든, 하넨의 이야기에 따르면…….

“용사가 정화한 영혼의 조각은, 주변의 물체들을 가장 순수한 상태로 만들어 주는 물건이야.”

“순수한 상태요?”

“그래. 예를 들어, 신관들이 조각을 흡수할 경우 체내의 오염이 씻겨 나가 보다 정결한 신성력을 쓸 수 있지. 평범한 인간이 조각을 흡수할 경우 신체의 독이 정화되고 정신에 뿌리박힌 광증을 잠재울 수 있어. 예를 들어 케르츠처럼.”

“……광증이라고요?”

“그래. 놀랍게도 광증을 잠재운 멀쩡한 상태가 저거다. 원래대로라면 말쿠테른의 도살자 놈들하고는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해.”

딱히 그런 뜻에서 반문한 건 아니었습니다만. 괜히 찔려서 케르츠를 흘끔 바라보았지만 케르츠 본인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아니, 그게 아니라. 애초에 나는 저 사람에게 정신병이 있다는 사실조차 처음 알았다고. 그냥 원래 폭력적인 성격인 줄 알았지.

‘그러고 보니, 아까 인형이 케르츠의 입에 영혼 조각을 물리라고 했던 게 그거 때문인가? 광증이 도질까 봐?’

제정신인 상태에서 남의 머리를 수박 으깨듯 벽에 짓이길 정도인데 광증까지 도지면 과연 어떻게 되는 걸까, 그 점이 매우 신경 쓰였지만 나는 굳이 더 캐묻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세상에는 굳이 몰라도 되는 일들도 있는 법이다.

“그리고 이 영혼의 조각은, 신에 보다 가까운 존재일수록 효과가 강하고 신과 먼 존재일수록 그 효과가 떨어져.”

“신과 가까운 존재라면, 아까 말한 신관이라든지……. 아, 혹시 용사도 포함되나요?”

“굳이 말하자면 용사가 가장 신과 가깝다고 볼 수 있지. 저 녀석은 신전에서 수백 년 만에 제작해 낸 성공작이라서, 그 순수함으로만 따지면 아슬아슬하게 신성 생물의 반열에 들어가. 영혼 조각을 흡수하면 죽기 직전의 상처조차도 치유할 수 있는 수준이야.”

신성 생물이라니, 잘은 모르겠지만 어감이 엄청나다. 무슨 유니콘이나 드래곤 같은 생물에게 붙을 만한 이름이 사람에게 붙다니. 나는 잠시 그렇게 생각했지만 곧 기분이 이상해지고 말았다.

말이 좋아 신에 가까운 거지, 실제로는 단순한 ‘생물’이고 인간으로서 대접을 받지는 못하는 것 같은 미묘한 어감이기도 해서……. 나는 내심 동정 어린 마음으로 용사를 바라보았지만 곧 그 동정심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리고, 굳이 말하자면 네놈은 인공 생물조차 못 되는 모독적인 무생물.”

“모, 모독이라뇨.”

“삶과 죽음의 섭리를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만큼 모독적인 짓이 어디 있겠어. 시체가 되어 땅으로 돌아가야 할 몸뚱이를 어거지로 움직이고 있으니, 영혼 조각을 흡수해 봤자 순수한 시체로 되돌아갈 뿐이야. 그게 가장 자연스럽고 순수한 상태니까.”

“꼭 말을 그렇게 하셔야겠어요?”

“아, 아니. 악의에서 한 말이 아니라 사실이 그렇다는 말이야. 속 좁은 녀석 같으니라고.”

하넨은 내 기분이 상했다고 생각했는지 적당히 얼버무렸지만 나는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하긴 지금 남 동정할 처지가 아니지. 적어도 용사는 생물이기나 하지 나는 무생물 취급이잖아.

아무래도 이 세계에서 언데드란 ‘마법을 이용해 자기 몸을 방부 처리한 자들’이 대다수고, 대부분의 언데드들은 어느 정도의 마법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게다가 별로 좋은 대접을 받는 것 같지도 않고.

나는 괜히 입을 삐죽거리며 고개를 돌렸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어딘가 이상했다. 저 사람의 말대로라면, 원래의 나는 영혼의 조각을 흡수하기는커녕 조각을 만지지도 말아야 하는 거 아닌가?

“그나저나 너, 정말로 그 조각을 흡수할 수 있는 거야? 그냥 흡수한다고 착각하는 게 아니라?”

“착각이라니, 그건 또 뭐예요.”

“아니, 그럴 수도 있잖아. 사실은 마력을 흡수하고 있지만 일종의 속임수에 걸려들어서 영혼 조각을 흡수하고 있다고 믿는다든지.”

“진짜 너무하신다……. 정 못 믿겠으면 흡수하는 모습이라도 보여 드릴까요?”

마침 영혼 조각의 지속 시간이 다 되어 가는지 몸 여기저기가 무너지는 듯한 감각이 찾아왔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나는 일단 가면을 벗고 영혼 조각을 흡수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로 마음먹었다. 어쨌든 직접 보면 믿지 않을까? 물론 저 사람들이 믿든 안 믿든 그건 크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만…….

‘어쩌면 내 약점을 알려 주는 꼴이 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밝혀지게 될 사실이니까.’

어차피 저 용사 일행과 나는 앞으로도 계속 얼굴을 맞대고 지내야 한다. 언젠가는 정체가 밝혀질지도 모르는 상황에 굳이 사실을 숨겨 봐야 소용없을 거다. 일단 뼈 가면을 벗고, 흐물흐물 녹아내리는 얼굴의 감각을 애써 무시한 채 코끝에 영혼 조각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우와.”

“……!”

“뭐야, 이게 어떻게 가능해?!”

이래저래 다양한 반응이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나는 조금 부끄러워지고 말았다.

인형은 자기가 뭔가 해낸 것도 아니면서 묘하게 뽐내는 듯한 자세를 하고 있었다.

“이건 사실상 신성 생물 수준인데. 말이 안 되잖아.”

“아뇨, 굳이 말하자면 신성 생물은 제가 아니라……. 저, 저기요, 용사님. 남의 볼을 그렇게 주물럭거리시면 못 써요. 네?”

“그치만 신기해서. 나중에 영혼 조각 줄 테니까요. 네?”

내가 이 용사님에게 못된 걸 가르쳤나? 나는 용사에게서 벗어나 보려고 안간힘을 썼으나 용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얼굴을 주물럭거렸다. 아프거나 불편하지는 않은데, 잘생긴 20대 중후반의 남성이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내 볼을 주물럭거리는 느낌이란 아무래도 좀 낯간지러웠다. 껍데기만 근사할 뿐 그 안에 26개월짜리 어린아이가 들어 있다는 사실을 필사적으로 떠올려 내니 좀 나아지긴 했지만 말이다.

이 용사님, 어쩌면 내가 자기하고 친척쯤 된다고 생각하는 거 아닐까? 듣자 하니 신성 생물이란 게 그다지 흔한 것 같지도 않고. 하넨이 이야기하는 걸 들으니 이 시대에는 용사를 제외한 신성 생물이 거의 없다시피 한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과연 내가 저 사람들이 말하는 신성 생물인지 뭔지에 해당되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굳이 말하자면…….

“아니, 신성 생물은 아마 제가 아니라 저거. 저 녀석일 거예요.”

“……고개를 젓는데?”

“저 자식, 저거 못된 거 봐. 너 용사한테 주물럭주물럭당하기 싫어서 거짓말하는 거 아니야?”

인형은 용사가 내 뺨을 죽죽 늘리든 말든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춤을 추고 있었다. 예전에 나도 저 녀석을 용사의 장난감으로 던져 준 적이 있으니만큼 저 녀석에게 의리를 요구할 처지는 못 되지만, 그래도 사실관계는 정확히 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왜 대답이 없어.

아마 진짜 신성 생물은 저 인형이고, 나는 그 인형의 힘으로 되살아난 사역마쯤 되는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스스로가 사역마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는 건 꽤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지금으로선 그게 가장 합리적인 가설 같으니까. 물론 그 가설조차도 아직은 완전히 확신할 수 없지만.

“하긴, 신성 생물이 굳이 썩은 내를 풀풀 풍기는 언데드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도 이상할 테니……. 어쩌면 저쪽이 신성 생물이고 네가 그 부하쯤 되는 걸지도 모르지. 아까 뭐랬더라? 꼬봉? 똘마니?”

“저기, 그렇게 사람 놀리는 듯한 표정 짓지 말아 주실래요?”

하넨은 아까 내가 쓴 표현이 재미있었는지 계속 웃고 있었다. 저 인간, 성격이 아예 나쁜 것 같지는 않은데 묘하게 사람 신경 긁는 데에 재주가 있단 말이지. 같은 말을 해도 좀 좋게 하면 안 되나? 맨날 멍청하다느니 무식하다느니 썩은 내 난다느니 하는 소리만 하고 말이야.

“뭐, 어느 쪽이 신성 생물이고 어느 쪽이 그 부하인지를 따지는 건 큰 의미가 없겠지요. 중요한 건 당신들이 만들어진 목적일 테니까. 혹시 우리 일행을 돕기 위한 목적으로 이 미궁에 머물고 있는 겁니까?”

우리의 실랑이를 지켜보고만 있던 케르츠가 담담하게 말했다. 케르츠는 용사나 하넨과 마찬가지로 신기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생각에 잠긴 듯한 낯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딱히 적개심을 가진 것 같지도 않으니 일단은 다행이라 할 수 있겠다.

“네? 뭐, 따지고 보면 아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저기요, 용사님, 그렇다고 해서 제가 당신 장난감이 되기 위해 여기 머무는 건 아니거든요?”

“장난감이 뭔가요? 어쨌든, 당신은 나와 하넨과 케르츠와 같은 편이지요? 당신은 저희를 돕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생물이고요?”

용사는 기쁜 듯 생글생글 웃으면서 내 뺨을 쭉쭉 잡아당겼다. 새로 친구를 사귄 어린아이처럼, 아니, 어린아이답게 조금 들뜬 모습이었다.

아직 나이가 어려서인지 피아 식별이 단순한 용사는 이미 내가 자기편이라고 완전히 확신하고 있는 듯한 눈치였다. 케르츠와 하넨은 조금 심경이 복잡한 듯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나를 경계하는 듯한 눈치는 아니었다.

나와 인형이 진짜로 신성 생물이라면 용사 일행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큰 데다가, 무엇보다도―방금 용사 일행은 나와 인형에게 도움을 받아 목숨을 구한 상황이니까. 나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어쨌든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요. 제가 당신들이 말하는 신성 생물인지 아닌지 잘은 모르겠지만, 어쨌든 앞으로 신세를 많이 져야 하는 건 사실이니까.”

여기에서 뭉개고 있다간 용사 녀석에게 계속 내 볼을 내어 줘야 할 것 같았기에, 나는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뒷걸음질을 쳤다. 인형은 내 뜻을 눈치챘는지 어느새 좌판을 정리하고 물건들을 자루에 집어넣고 있었다. 이럴 때는 묘하게 행동력이 좋은 녀석이었다.

인형이 모든 정리를 끝내자, 나는 용사의 아쉬운 표정을 모른 척한 채 가볍게 손을 흔들고 자루를 짊어졌다. 용사 일행과 헤어지고 나서 조금 한가해지면 방금 들은 이야기에 대해 인형에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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