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순진무구한 용사님
용사 일행과 거래를 한 덕분에 텅 비었던 내 유리병은 영혼 조각으로 가득 찼다.
하넨은 내가 미로를 탐험하면서 챙긴 물건을 제법 비싸게 사들였다. 그가 가장 관심을 가졌던 건 먼지에 뒤덮이고 피가 묻은 보석이었다.
주인의 생명을 빨아들였거나 죽은 주인의 옆에서 오랜 시간 동안 방치된 보석은 높은 확률로 저주를 받는데, 이 보석의 경우 양쪽 모두의 조건을 만족시켰으므로 확실히 저주받아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었다.
저주받은 보석을 촉매로 해서 마법을 사용하면 그 위력이 배가된다고 한다. 나는 마법에 대해 잘 모르지만 하넨 본인이 저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면 꽤 귀한 물건인 모양이다.
하넨이 물건을 사고 나서 용사를 돌보는 동안 케르츠도 하넨 몰래 물건을 샀는데, 그가 산 것은 의외로 쓸모가 없어 보이는 오르골이었다. 하넨에게 이 물건을 산 걸 비밀로 해 달라고 신신당부하는 모습을 보면 실제로도 쓸모가 없을 가능성이 높았다.
다만 객관적인 관점에서만 쓸모가 없어 보일 뿐 케르츠 본인에게는 제법 의미가 있는 물건이었던 모양인데, 케르츠는 오르골 옆면에 새겨져 있는 ‘이에드’라는 단어를 몇 번이고 주의 깊게 살폈다. 그 단어가 누군가의 이름인지, 어떤 집단의 이름인지, 그도 아니면 어떤 뜻을 가진 단어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그럭저럭 만족스러운 거래를 마친 후, 용사 일행은 지난번에 그랬던 것처럼 모닥불 옆에 누워서 수면을 취했다. 나도 용사 일행을 흉내 내며 모닥불 옆에 드러누웠다.
지난번에는 용사 일행이 깨어나기 전에 일찌감치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어쩐지 이번에는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그때 지름길을 찾겠답시고 이리저리 들쑤시다가 괜히 미로에 빠지는 바람에 고생을 하지 않았던가. 정신적 피로 때문에라도 조금쯤은 쉬고 싶었다.
게다가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인간이었다. 낮에는 일어나서 활동하고, 밤에는 잠을 자는 걸 당연하게 여겼단 말이다. 물론 지금은 수면욕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라서 아무리 노력해도 잘 수가 없지만, 그래도…….
[비록 지금의 나는 인간이 아니지만, 인간의 휴식을 흉내 내는 행위는 심리적 안정감을 가져다준다. 흉내가 아니라 정말로 자고 싶은 거라면 영혼 조각 두 개를 더 흡수하면 된다.]
“됐어, 인마. 그랬다간 악몽이나 실컷 꾸고 말 게 뻔한데.”
[인형에게도 마력을 회복할 시간이 필요하다. 나도 꽤 지친 상태니까 몇 시간쯤 쉬었다 가는 게 좋을 것 같다.]
“사실은 자기가 쉬고 싶은 거면서 핑계 대기는.”
인형이 내 옆구리를 팡팡 발로 차든 말든 나는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근육이 축 늘어지는 듯한 노곤함이나, 꿈과 현실의 경계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헤매는 몽롱함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 휴식은 마음에 들었다.
모닥불이 타닥거리며 타는 소리, 어느 틈엔가 내 품을 비집고 들어와 휴식을 취하고 있는 인형, 새근새근 숨을 고르며 잠들어 있는 용사 일행들. 저 기이하면서도 알기 어려운 사람들은 지금쯤 무슨 꿈을 꾸고 있을까. 미궁 바깥의 꿈이라도 꾸는 건 아닐까?
만약 지금 내가 잠들어서 꿈을 꾸게 된다면, 어쩌면 원래 세계의 꿈을 꿀지도 모른다. 내가 인간이었던 시절. 먼 옛날처럼 회상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은 한 달도 채 안 된 최근의 일. 수능 결과에 일희일비하고, 대학교 합격 소식에 뛸 듯 기뻐하고, 졸업식을 마치고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교정을 나오던 그 모든 순간들이…….
그 모든 순간들이, 지금 떠올려 보니 마치 남의 일 같았다. 아마 감정이 거세된 상태라서 그런 것 같다. 내 감정이 온전한 상태였더라면 지금 어떤 기분을 느끼고 있을지 좀 궁금하기는 하지만 굳이 알고 싶지는 않았다.
아까 케르츠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무지의 역설. 원래부터 모르는 개념이라면 그 개념에 잠식당할 이유가 없다. 어쩌면 내가 감정을 되찾을 수 있으면서도 되찾지 않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일지도 모른다. 감정을 모른다면 감정에 잠식당하지 않는다. 가뜩이나 별로 행복하지 않은 상황인데 우울감까지 떠안고 싶지는 않았다.
‘자꾸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네.’
잘 것도 아니면서 누워 있자니 온갖 잡생각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불면증이 우울증을 불러오기 쉽다는 이야기를 예전에 어디서 들은 적 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참 일리 있는 말이었다.
인형 녀석도 내가 우울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는지, 내 가면을 툭툭 건드리며 나를 깨우려 하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내 가면을 벗기려 하고 있었다. 조심조심 뿔 부분을 잡아당기며 가면을 벗기더니, 이마 위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나는 품에 안겨 있는 인형을 쓰다듬어 주었다. 기특한 녀석, 이런 상황에서 위로를…….
[인형은 내 품에 얌전히 안겨 있다. 휴식을 취하면서 마력을 충전하고 있다.]
‘응?’
잠깐만. 듣고 보니 그랬다. 아직도 인형은 내 품에 안긴 채 꼬물거리고 있는데, 그럼 지금 내 가면을 벗기고 머리카락을 만지는 건 대체……? 어느새 볼로 내려간 손가락이 내 볼을 꾹꾹 누르고 쭉 잡아당겼다. 마치 놀이라도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인형의 것일 리가 없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인간의 살결. 나는 눈을 떴다.
“진짜로 차가워…….”
“뭐 하시는 건가요, 용사님.”
우왓, 작은 소리를 내며 용사가 흠칫 물러났다. 동그래진 눈을 보니 제법 놀란 모양이었다. 물론 지금 이 상황에서 진짜 놀라야 할 건 내 쪽이었다. 대체 왜 남의 가면을 멋대로 벗겨선 볼을 잡아당기고 있는 거야, 저 작자는? 원래 예의를 배우지 못한 사람이란 건 알지만 이건 또 이것대로 상식 바깥의 일이었다.
“자고 있던 게 아닌가요?”
“언데드는 원래 잠을 자지 않아요. 그냥 좀 쉬고 있던 것뿐이에요.”
“몰랐어요. 신기하다.”
“아니, 지금 신기해할 게 아니라 사과해야 할 상황 아닌가요……. 대체 남의 볼은 왜 만지는 거예요?”
내가 인상을 잔뜩 찡그린 채 투덜거리자, 용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자신이 왜 사과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이라서 나는 어이가 없어지고 말았다. 용사는 한동안 눈치라도 보듯 내 얼굴을 살피다가, 어쨌든 내 질문에 답해야겠다고 판단했는지 입을 열었다.
“케르츠가.”
“네?”
“그 사람이, 당신 얼굴.”
“제 얼굴이요?”
“당신 살갗, 체온이 없다고. 서늘해서 좋았다고 해서. 그래서 궁금했어요.”
아니, 그걸 믿냐?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그만 헛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나는 그제야 용사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저 용사는 아까 케르츠가 딴청을 부리느라고 했던 이야기를 그대로 믿어 버린 모양이었다.
“만지면 안 되나요? 아까 케르츠가 만졌을 때 가만히 있어서 괜찮은 줄 알았는데.”
“아뇨, 그. 아까 그건…….”
나는 할 말이 궁해진 나머지 잠시 머뭇거렸다. 엄밀히 말하자면 케르츠 그 사람은 얼굴을 만진 게 아니라 내 입을 막았지. 그 사람이 내 입을 막은 데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었고, 그 사람이 그러지 않았더라면 우리가 미로에서 못 빠져나올 가능성이 컸기에 그냥 내버려 둔 거였다.
하지만 그 사정을 모르는 용사는, 내가 케르츠가 얼굴을 만질 때에는 가만히 있다가 자기가 얼굴을 만지니 화를 낸다고 생각할 가능성이 높았다. 나는 아까 전의 일을 자세히 설명할까 하다가 결국 그만두었다.
“뭐, 만진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만져도 돼요.”
“진짜요?”
“대신 만질 때마다 영혼 조각 하나씩.”
“음……?”
“아까 케르츠가 저하고 거래할 때 영혼 조각 조금 더 얹어 줬잖아요. 그거 사실은 아까 얼굴 만져서 그런 거예요.”
“그런 거예요?”
“그럼요. 이것도 일종의 거래예요. 물물 교환.”
물론 생판 거짓말이었고, 실제로는 하넨에게 오르골 거래를 비밀로 해 주는 대가로 조금 더 값을 받은 것뿐이었지만 용사는 신기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어떻게 이런 뻔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나 싶었지만, ‘거래’나 ‘미로’ 따위의 기본적인 관념조차 모르는 사람이니 속는 것도 당연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어린아이를 속이는 듯한 기분이 들어 속이면서도 영 떨떠름했다.
“그럼, 방금 내가 당신의 얼굴을 만졌으니 영혼 조각을 줘야 하는 거예요?”
“아뇨. 이번에는 영혼 조각을 줄 필요까진 없고……. 그냥 제 질문이나 몇 가지 대답해 줘요.”
용사는 조금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아까 다른 동료들이 나와 거래를 하면서 영혼 조각을 상당히 소모해 버렸기 때문에, 설마 또 영혼 조각을 낭비해야 하나 제법 걱정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뭐, 내가 그렇게까지 악덕 상인인 것도 아니고. 이미 충분한 양의 영혼 조각을 모은 상황에서 더 욕심을 낼 이유는 없으니까.
“우선 첫 번째 질문. 나이가 몇 살이에요?”
내가 그렇게 질문하자 용사는 어리둥절한 듯 눈을 깜빡였다. 아니, 그런데 이거 진짜로 궁금했다고. 물론 저 사람이 실제로 몇 살이든 간에 그 나이가 정신 연령과 일치하지는 않겠지만, 그렇다 쳐도 궁금한 건 궁금한 거였다. 생긴 건 동화 속 왕자님처럼 근사하게 생겨선 어린아이처럼 굴어 대니 나이가 궁금할 수밖에 없잖아.
‘생각해 보면 저 사람, 생긴 게 제법 서구적이어서 실제 나이를 가늠하기가 힘들단 말이지.’
서양인은 동양인을 실제보다 어리게 보고, 동양인은 서양인을 실제보다 더 나이 많게 본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심지어 저 사람은 서구적인 걸 넘어서 판타지 세계의 사람이다. 실제보다 훨씬 더 어린 나이라 해도 이상할 건 없단 말이다. 어쩌면 나보다도 더 어릴지도 모르지.
“잠시만요. 조금 세어 봐야 해서.”
용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중얼거리며 무언가를 계산하기 시작했다. 아니, 네 나이잖아. 이제 와서 계산하고 있지 말라고. 나는 어이가 없어져서 용사의 손을 바라보았다. 용사는 이것저것 계산하면서 손가락을 꼽고 있었는데, 대체 무슨 계산을 저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지는 나도 모를 노릇이었다.
“……에서 키벤까지가 스물둘. 키벤에서 시트메까지 열여섯에, 거기서 파훔까지 마흔넷. 그러면 둘로 합치고. 그러니까 거기까지가 스물넷. 그리고 마지막 여관까지가 스물다섯, 미궁에 들어온 이후로 스물여섯……. 아닌가? 그보다 조금 덜한가? 빼먹은 부분이 있나?”
대체 저게 무슨 계산이지? 애초에 나이 계산이 맞기는 한가? 중얼거리는 것만 들어선 뭐가 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나는 자리에 앉아서 용사의 계산법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애초에 용사 본인에게 묻는 건 틀려먹은 방법이었나? 그냥 케르츠나 하넨에게 묻는 게 더 나았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 무렵.
“스물여섯이요. 아마도.”
“아, 그래요? 그럼 저보다 여섯 살 더 많으시…….”
“스물여섯 달.”
“……뭐라고요?”
“신전에서의 열여섯 달, 신전을 나와서 하넨과 케르츠와 같이 여기까지 온 게 열 달. 합치면 스물여섯 달이 맞을 거예요. 중간중간 계산이 어긋날 수는 있는데, 나중에 하넨과 케르츠에게 한 번 더 물어볼게요.”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입을 떡 벌렸다.
의외로 저 용사는 실제 연령과 정신 연령이 일치하는 편이었다. 아니, 어쩌면 정신 연령 쪽이 더 높을지도.
“저, 저기. 진짜 26개월?”
“네. 제가 기억하는 날짜를 다 합치면.”
용사는 순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저 작자가 나를 놀리는 건가 싶었지만, 용사의 말이 사실이라는 가정 하에 생각해 보니 지금껏 석연찮았던 수많은 문제들이 금방 납득되었다.
평범한 성인 남성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일반 상식이 결여되어 있던 용사의 언행. 마치 아이 돌보듯 굴던 하넨과 케르츠의 태도. 용사가 20대 중후반의 남성이라고 생각하면 꽤 이상하지만, 두 살짜리 어린애라면 이상할 게 하나도 없다. 아니, 오히려 두 살치고는 지나치게 성숙한 용사님이라고 칭찬해 줄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그렇지만……. 어딜 봐서 저게 두 살이야? 겉모습만 보면 나보다도 나이가 더 많아 보이잖아! 아무리 다른 세계라고는 해도 이건 좀 너무하지 않나 싶었다.
“어, 그. 질문 하나만 더. 용사님은 태어날 때부터 그 모습이었어요?”
“무슨 뜻인가요?”
“원래는 작았는데 이렇게 커졌는지, 아니면 태어날 때부터 지금 이 모습이었는지. 어느 쪽이에요?”
“어떤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어요. 처음에는 작았다가 점점 커지는 생물도 있어요?”
“원래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땐 작았다가 몇십 년쯤 있으면 커지거든요?”
“처음 듣는 이야기예요. 저는 원래부터 이런 모습이었는데. 작다는 게 얼마나 작은 건가요?”
“그러니까, 보통은 이 인형 정도의 크기에서 시작하는데…….”
“그렇게 작은 인간이 어떻게 큰 인간이 되지요? 이상해요.”
용사는 혼란스럽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며 인형을 들어 올렸다. 인형은 반항도 안 하고 얌전히 용사의 손에 들려 있었는데, 그 와중에도 [신생아의 평균 신장은 약 50cm이며 이 인형보다는 더 크다] 따위의 쓸모없는 정보를 내게 주입하고 있었다.
시끄러워, 30cm나 50cm나 그게 그거지 뭐.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저 용사가 급속도로 성장해서 저 모습이 되었는지, 아니면 태어날 때부터 저 모습인지가 좀 궁금했다. 물론 그걸 꼭 알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좀 호기심이 생긴달까.
“용사님이라서 다른 사람과는 성장 과정이 다른 건가……. 아니, 혹시 여기 사람들은 다 그렇게 시작해요? 처음부터 성장이라는 개념이 없고 성인으로 태어나는 건가?”
“잘 모르겠어요. 애초에 성장이라는 게 뭔가요?”
“미안해요. 용사님에겐 너무 어려운 이야기였나.”
정말로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용사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딱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이상할 정도로 미안해졌다. 아니, 생각해 보니 잘못까지는 아니더라도 별로 어른(?)스럽지는 않은 태도였다. 지금 나는 그저 내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용사에게 무리한 질문을 하는 것뿐이니까.
용사가 정말로 두 살이고 원래부터 저 모습이었다면 ‘성장’의 개념을 모를 수밖에 없다. 자신도, 케르츠도, 하넨도, 주변의 모든 사람도 원래부터 그 모습으로 태어나 쭉 살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
용사에게 무언가 질문해 봤자 별 소용이 없겠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단념하려던 도중, 용사가 갑자기 눈을 빛내며 입을 열었다.
“아, 혹시 성장이란 건 완성과 같은 의미인가요?”
“완성이요?”
“네. 아직 완성되지 못한 인간이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완성되는 건가요? 당신이 말하는 성장이란 그런 뜻이에요?”
아니, 그. 완성과 성장은 약간 뉘앙스가 다르지 않던가? 왜 갑자기 완성이라는 단어가 여기에서 튀어나오는지 어리둥절하던 도중, 나는 아까 미로를 헤매던 도중 인형이 한 이야기를 가까스로 떠올렸다.
용사 일행에게 있어 미궁의 탐험은 일종의 의식이라고 인형은 말했다. 비어 있는 내부가 차오르고, 외부의 더러운 오물을 씻어 내고, 완성되지 못한 존재가 완성되기 위한 종교적 의식.
어쩌면 저 용사는 그 이야기를 하는 걸지도 모른다. 신전에서 자신을 키워 준 이들에게 전해 들었거나, 아니면 케르츠나 하넨에게 전해 들었겠지. 성장의 개념을 모르는 용사가 그나마 이해할 수 있는, ‘완성’에 대한 개념에 대해서.
용사의 입장에서는 나름대로 내 말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는 걸지도 모르겠지만, 어쩐지 나는 그 완성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완성되지 못한 인간이라는 표현 또한 썩 좋게 들리지 않았고.
“으음……. 같은 개념은 아니에요. 별로 비슷한 것 같지도 않은데.”
“구체적으로 어떻게 달라요?”
“보통의 인간은 아무리 성장해도 완성되지 않아요. 애초에 ‘완성된 인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제게는 좀 어색하네요.”
“완성되지 않을 거라면 무엇 하러 성장하나요?”
“애초에 완성되기 위해 성장하는 게 아니라서요…….”
나는 말재주가 좋지 않지만 어떻게든 논리적으로 설명해 보려 노력했다. 그러니까, 성장이란 사람이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겪는 자연스러운 과정. 어른이 된 이후로 육체적 성장은 멈추지만 정신적 성장은 계속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애초에 어느 정도 성장하고 나면 그 이상 성장하지는 않을 수도 있고, 특히 육체의 경우 성인이 되면 더는 성장하지 않는 게 기본이고…….
용사는 내 지리멸렬한 설명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고 듣는 건지, 아니면 모르지만 일단은 이해하기 위해 듣고 있는 건지 잘 알 수는 없었다. 후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어렴풋이 짐작은 했지만, 그래도 설명하다 보면 조금쯤은 용사가 내 말을 이해해 줄지도 모른다고 막연히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그건 나 혼자만의 기대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그러니까, 그. 사람이란 게 꼭 완성되기 위해 태어나는 건 아니잖아요?”
“어째서요?”
“어째서냐니요.”
“모든 것들은 완성되기 위해 태어나지 않나요? 저도 그렇고.”
용사는 혼란스럽다는 듯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켜 보인 순간,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어딘가 겉돌고 있었다. 용사와 나의 대화에, 용사가 가지고 있는 관념과 내가 가지고 있는 관념 사이에, 무언가 중요한 결락이 존재했다.
“저는 악을 정화하고, 이 미궁의 중심에 도달하고, 그리하여 완성된 용사가 되어 악을 정화하기 위해 태어났어요.”
“……!”
“완성되지 않는다면 저에게 의미는 없을 거예요. 미궁 바깥에서 고통받는 수많은 이들이 그렇듯이. 저는 그렇게 배웠는데, 제 배움은 틀린 건가요?”
“아니요, 그건…….”
나는 머뭇거리며 말끝을 흐렸다.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용사의 맑은 시선이 갑자기 부담스러워졌다. 그 어린아이다운 순진함 너머에서, 스스로가 아는 바에 대한 무조건적인 맹목이 얼핏 읽혀서였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용사는 과연 순수한 자신의 의지에 따라 여기에 온 걸까? 겉보기에 딱히 강압에 의해 온 것 같지는 않지만, 애초에 두 살밖에 안 된 사람이 온전히 자기가 생각해서 내린 결정으로 이런 미궁에 들어온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
과연 이 용사는 어떤 식의 삶을 살았을까. 신전에서 지냈다는 열여섯 달 동안, 이 용사는 누구에게 의지하고 무엇을 사랑하고 어떤 가치를 소중히 여기도록 길러졌을까. 신전으로부터 벗어나, 케르츠와 하넨과 함께 이 미궁으로 향하던 열 달 동안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을까.
나는 무언가를 말하려다 망설이기를 반복했다. 과연 내가 이 용사에게 무엇을 말해야 할지, 무언가 말할 자격이 있긴 한지 알 수가 없었다. 인형이 도와주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내심 바랐지만 정작 인형은 용사의 품에 안긴 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마치 진짜 무생물처럼 움직임조차 없었다.
“있잖아요, 용사님. 그.”
내가 무언가를 말하려던 찰나, 스륵 무언가 일어나는 소리가 들리더니―갑자기 목과 뒤통수에 강한 충격이 느껴졌다.
“우, 우왓?!”
“너무 복잡한 이야기를 하면 안 되지요, 상인 씨. 우리 용사님이 겁먹잖아요.”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지만 퍽 하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뒷머리가 벽에 세게 부딪친 게 틀림없었다. 눈앞에 별이 번쩍이고, 시야가 순간적으로 암전되긴 했지만 상황을 파악하는 것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케르츠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저 사람, 대체 언제부터 깨어 있었던 거야?
눈을 몇 번 깜빡거리자 겨우 시야가 제대로 돌아왔다. 케르츠는 내 목덜미를 붙잡은 채 벽에 누르듯 밀어붙이더니, 내 눈의 초점이 돌아왔다 싶자 빙긋 웃어 보였다. 평소와 별로 다를 바 없는 상냥한 미소였지만 그의 손아귀 힘은 생각보다 꽤 셌다. 만약 내가 통증을 느낄 수 있었더라면 꽤 괴로웠을 거다.
“해야 할 이야기와 할 필요 없는 이야기 정도는 구분할 수 있어야지요.”
“케, 케르츠 씨.”
“말해 봤자 소용없는 이야기를 굳이 꺼내는 이유가 뭔가요?”
분명 상냥해 보이는 미소였지만 어딘가 언짢은 기색이 읽혔다. 소용없는 이야기라니, 나는 무언가 반박하려 했지만 이내 목구멍이 턱 막히고 말았다. 물론 케르츠가 목을 조르다시피 밀어붙이고 있으니 물리적으로도 막혔겠지만, 그, 뭐랄까. 조금 더 심리적인 의미에서.
‘말해 봤자 소용없다, 라…….’
나는 용사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 탓에 말문이 완전히 막혔다. 스스로의 완성을 위해 미궁의 중앙으로 향하는 용사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어 하는 건가?
미궁을 돌파하는 것 말고도 얼마든지 다른 목표가 있을 수 있다고, 용사가 소중하게 여기는 가치는 어쩌면 누군가에게 주입당한 걸지도 모른다고, 그런 식의 훈계라도 늘어놓아야 하나? 내가 무슨 자격이 있다고?
애초에 용사가 정화한 영혼을 소비해야 몸을 유지할 수 있는 나에게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시피 하다. 게다가 그런 말을 해 봤자 큰 의미도 없을 거다. 일단 여기까지 들어온 이상 나가지도 못할 테고, 나간다 한들 바깥 또한 용사에게 있어 그다지 행복한 곳은 아닐 테니까.
그렇다면, 내가 무슨 말을 하든 결과적으로 소용이 없다. 아마 케르츠도 그걸 아니까 나를 말린 거겠지.
“죄송해요. 제가, 그. 실언을 했네요.”
“실언이죠?”
케르츠는 고개를 갸웃해 보이며 나를 바라보았고, 내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내 목덜미를 놓아 주었다. 나는 괜히 목을 주무르며 자세를 가다듬었다. 목뼈, 내 목뼈가 살짝 접질린 거 같은데. 용사는 갑작스러운 케르츠의 행동에 놀란 듯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만 있었다.
“왜 상인을 괴롭혀요?”
“괴롭힌 게 아니에요. 그냥, 상인이 이상한 이야기를 하지 않도록 말렸을 뿐.”
“말린 거예요?”
“그럼요……. 아야. 아야야. 뭘 잘했다고 때려요?”
용사의 품 안에서 쥐죽은 듯 있던 인형이 팟 하고 케르츠의 머리에 달라붙어 얼굴을 때리기 시작했다. 사실상 솜방망이로 때리는 행위에 가까웠으므로 타격은 거의 없어 보였지만, 그래도 제법 성가시기는 했는지 케르츠는 인형을 떼어 냈다. 인형을 바닥에 내던지려던 케르츠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꼈는지 잠시 멈칫했다.
“뭐라고요? 용사의 완성에 필요하다고요? 그 질문이?”
“……?”
“글쎄요. 전 별로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책임지지 못할 이야기를 해 봤자 괴롭기만 할 뿐입니다.”
어, 잠깐만. 저 사람 지금 인형과 이야기하는 건가? 케르츠는 인형을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기울였고, 인형은 순식간에 케르츠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더니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인형이 내민 뼈 가면을 다시 쓰며 슬쩍 질문했다.
“너, 나 말고 다른 사람하고도 이야기할 수 있었어?”
[아무래도 용사는 꽤 피곤한 모양이다. 케르츠는 용사가 충분한 휴식을 취하길 원하고, 내가 자리를 떠나든 말든 한동안은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을 듯하다. 인형과 함께 지름길로 이동해 새로운 상품을 찾아보자.]
“아니, 딴청 부리지 말고……. 뭐, 분위기가 이렇게 되었으니 여기에서 오래 머무르기도 좀 그렇긴 하지만.”
여기서 더 독촉해 봤자 인형에게서 제대로 된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기에,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케르츠는 방금 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으며 손을 흔들어 보였고, 용사는 나와 케르츠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소심하게 손을 흔들었다.
“아까는 용사님에게 이상한 이야기 해서 미안했어요.”
“뭐, 저야말로 갑자기 밀어붙여서 미안했습니다. 아무래도 저는 용사님의 입장을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는지라.”
“아뇨, 뭐……. 저도 섣불리 말한 건 사실이고. 그럼 나중에 또 봐요.”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화를 내기도 참 민망한 일인지라, 나는 그저 어깨만 으쓱해 보이고는 인형과 함께 복도를 걸었다. 어쩐지 찝찝한 이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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