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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묘한 상부상조 (4/28)

4. 기묘한 상부상조

그 날 용사 일행은 소금 이외에도 이런저런 생필품을 구입했다. 케르츠는 좌판 옆을 굴러다니는 인형을 집어 들고 이것도 상품이냐고 물었다가 인형에게 코끝을 얻어맞았고, 하넨은 내가 모아 둔 치료용 약초와 진통성 마약을 몇 묶음 구입했다.

희한하게도 하넨은 약초보다 마약 쪽의 가격을 높이 쳤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면 다친 부위를 치료하는 약이 단지 통증을 없애 줄 뿐인 마약보다 더 효능이 좋을 텐데 어째서일까? 내가 고개를 갸우뚱하자 하넨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치료하는 것보다는 안 다치는 게 더 중요해.”

“이걸 먹는다고 해서 안 다치게 되나요?”

“통증 때문에 집중력이 흐트러지지 않으니 아무래도 다칠 일이 적지. 독의 세밀한 조절에 도움이 돼.”

바꿔 말하자면, 하넨이 독 마법을 쓸 때는 필연적으로 고통이 발생한다는 뜻이다. 나중에 케르츠에게 들은 건데, 하넨의 지팡이에 주렁주렁 매달린 주머니에 담긴 액체는 정신 집중과 통증 둔화를 위한 약품이라고 한다.

그런 약품들에라도 의존하지 않으면, 절절 끓어오르는 독이 혈관을 타고 흐르는 고통에 정신이 망가져 버린다나. 내가 영혼 조각을 넉넉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감각을 되찾지 않는 것과 비슷한 이유라고 생각하니 이해가 쉬웠다.

거래를 마친 용사 일행이 모닥불 근처에서 수면을 취하는 동안 나는 생각에 잠겼다. 대체 이 세계의 마법은 어떻게 되어 먹었길래 이렇게 이상한 걸까? 아니, 따지고 보면 마법만 이상한 것도 아니겠지.

그냥 이 세계 자체가 이상하기 짝이 없다. 미궁 바깥은 미궁 바깥대로 악에 오염되어 부패해 있고, 미궁 내부는 미궁 내부대로 끔찍한 사념에 잠식당해 있다. 이런 이상한 세계에 제대로 된 미래가 있긴 한 걸까?

[이 세계의 미래는 용사와 그의 동료들과 상인인 나와 인형의 활약에 달려 있다.]

“아니, 뜬금없이 나까지 거기 끼워 넣지 말아 줄래?”

아예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거만한 포즈로 허리에 양팔을 얹고 있는 인형의 모습은 묘하게 우스꽝스러웠다. 실제로 세계의 미래를 짊어지고 있을 용사 일행은, 인형이 나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쿨쿨 잠만 잘 자고 있었다.

한 명은 세상 물정 모르는 백치고, 한 명은 고통을 줄이기 위해 진통성 마약에까지 의존하는 마법사고, 나머지 한 명은 사람 잡는 백정으로 추정되는 도살자지만―이런 이상한 세계의 미래를 책임지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니 묘하게 어울렸다. 나는 모닥불이 타닥거리는 소리를 감상하며 그들의 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 * *

나와 인형은 용사 일행이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일찌감치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형은 내게 지름길을 알려 주겠다며 앞장섰다. 인형이 향하는 쪽은 용사 일행이 왔던 방향, 즉 역주행이나 다름없는 방향이었지만 나는 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 용사에게 있어선 장애물에 불과했던 함정이 우리에게는 지름길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한참을 걷던 우리는 다음 광장에 도착했고, 광장 바닥을 가득 메운 낯선 함정을 발견했다.

[용사 일행은 아무래도 이 함정을 돌파해 온 모양이다.]

“이걸? 그 작자들 진짜 대단도 하네.”

나는 내심 감탄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평범한 돌바닥으로 이루어져 있던 다른 광장과는 달리, 이 광장의 바닥은 희고 검은 체크무늬의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물론 저게 평범한 대리석 바닥일 리는 없다. 왜냐하면…….

“잘못된 바닥에 발을 디디면 감전되는 거지?”

[그렇다. 감전되는 걸로도 모자라 바닥이 꺼지면서 아래로 추락한다. 가벼운 물건이라면 추락하지 않고 감전당하기만 할 뿐이지만, 사람 정도의 무게라면 반드시 추락한다.]

“그리고 언데드인 나는 좀 감전된다 해도 죽지 않고……. 알았어. 이게 아래층으로 가는 지름길이라 이거지.”

내가 그 사실을 금방 알아낼 수 있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몇몇 발판 위에서 작게 잘려진 고기 조각이 아직도 감전된 채 파팍 소리를 내며 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어떤 발판이 함정 발판인지 알아보기 위해서 용사 일행이 던진 걸로 추측된다.

“맞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된 발판을 밟으면 어떻게 돼?”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괜히 인형에게 질문해 보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정도가 일반적인 추측이겠지만……. 어쩐지 일이 그렇게 쉽게 풀릴 것 같지 않단 말이지. 원래부터가 미쳐 돌아가던 세계다. 정답을 맞힌다고 해서 특별히 상을 줄 리는 없다.

[정신적으로 쇼크를 받는다. 파팟 하고. 꽤 고통스럽다.]

“육체가 망가질 것이냐 정신이 망가질 것이냐, 하는 문제구나. 그 마법사가 마약을 사 간 것도 당연한 일인가?”

[전기 자극을 받으면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쇼크가 와서 사망한다. 그나마 쇼크가 덜한 쪽을 택하는 게 좋다.]

“알아, 안다고……. 어쨌든 이리로 내려가는 거 맞지?”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자루 입구를 열었다. 인형은 당연하다는 듯 내 자루 속에 들어갔고, 나는 자루를 등에 짊어진 채 전기 자극을 주는 쪽의 바닥을 밟았다.

“……!”

전신이 미친 듯이 떨리는, 만약 내가 통각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끔찍한 통증을 겪었을 정도의 전기 자극이 전신을 덮쳐 왔다. 몸이 추락해 가는 감각과 함께 치직거리는 소리가 났다. 몸이 구워지는 소리였다. 그리고 몇 초 후, 콰앙. 전신이 아래층 바닥에 짓이겨지듯 추락했다.

‘으아, 이거 쇼크가 장난 아닌데.’

몸이 내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제멋대로 들썩거렸다. 안구마저 전기에 구워졌는지 눈앞이 아예 보이지 않았고, 머릿속마저 멍해져 정말이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몇 분쯤 버티자 서서히 몸이 회복되었다. 아직 영혼 조각의 효과가 적용되고 있었기에, 내 몸은 당장 즉사할 정도로 심한 전기 충격을 받았음에도 서서히 원래 상태로 돌아왔다.

한참이 지나자 몸이 회복되었는지 시야가 천천히 돌아왔다. 나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자루 입구가 열리더니 그 안에서 인형이 기어 나왔고, 어쩐지 헤롱거리는 듯한 발걸음으로 내 쪽으로 걸어왔다.

“괜찮냐?”

[인형에게는 스스로를 보호할 수단이 있어서 괜찮다. 자루 속의 상품은 안전하게 지켜졌다.]

“맞다, 그러고 보니 너 보호막 같은 거 쓸 수 있었지……. 잠깐만.”

[인형은 나에게 보호막을 적용시켜 주는 것을 잊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아무 차이도 없다. 나의 옷과 뼈 가면도 보호 마법 덕분에 큰 손상 없이 안전하다.]

“옷이랑 가면에까지 보호 마법을 걸어 줬으면서 왜 나한테는 안 걸어 줘, 이 능구렁이 같은 자식이! 너 일부러 그런 거 아니야?”

[인형은 마력을 아껴야 한다. 사용할 수 있는 마력의 양이 적기 때문이다.]

“자랑이다, 이 솜뭉치 자식.”

나는 인형의 엉덩이를 발로 뻥 찼고, 인형은 데굴데굴 굴러가다가 벽에 콩 부딪쳐 머리를 박았다. 상품을 지켜 줄 정신이 있으면 나도 좀 지켜 주라고! 물론 결과만 따지면 아무 차이도 없고, 그냥 기분이 좀 찝찝할 뿐이긴 하지만…….

‘어? 잠깐만.’

반대편 벽에 머리를 박았다가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인형의 모습을 구경하던 도중, 나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러고 보니 여기는 어디지? 위층 광장에서 함정을 타고 밑으로 떨어졌으니 당연히 아래층 광장에 떨어졌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광장치고는 지나치게 주변이 좁았다.

“복도라고 치기에도 지나치게 좁은 건 마찬가지인데.”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원래 이 미궁의 구조는 정직하다고 할 정도로 단순하고 반복적이다. 물론 방금 보았던 체크무늬 바닥처럼 변칙적인 사례가 있기는 했지만, 그런 변칙적인 상황에서도 광장의 폭이나 천장 높이 같은 요소는 어지간해선 변하지 않았다. 복도 또한 마찬가지고.

그런데 이 주변은 어쩐지 이상했다. 일반적인 복도는 네다섯 명이 나란히 걸을 수 있는 폭에 천장은 고작해야 2미터 정도 높이인데, 이 복도는 천장이 엄청나게 높은 반면 일반적인 복도보다 훨씬 더 폭이 좁았다. 고작해야 두 사람이 나란히 걸을 수 있는 폭일까.

‘내가 위층의 광장에서 떨어졌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천장이 높은 건 어찌어찌 이해할 수 있는데, 폭이 이렇게까지 좁은 건 어째서지?’

게다가 신경 쓰이는 점이 더 있었다. 원래 이 미궁에는 갈림길이라 할 만한 게 전혀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일직선으로 이어져 있을 뿐이다. 그런데, 지금 복도 건너편에 보이는 건 분명히…….

“저거, 갈림길 아니냐? 어떻게 생각해?”

[아무래도 미로의 함정에 떨어진 것 같다. 광장 내에 작지만 복잡한 형태의 미로가 설치되어 있어 침입자를 헤매게끔 한다.]

“장난하냐? 미궁 안에 또 미로가 있다고? 무슨 놈의 미궁 설계를 이렇게 해?”

나는 어이가 없어 눈앞의 갈림길을 바라보았다.

기껏 함정을 타고 내려왔는데 또 함정에 갇히다니, 이건 대체 무슨 상황이냐고.

* * *

“미로에서 빠져나가려면, 그 뭐더라……. 좌수법? 우수법?”

[미로의 벽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가정 하에, 벽에 손을 짚고 걸을 경우 미로의 모든 벽을 훑을 수 있다. 미로에서 탈출하는 가장 보편적인 방법이다.]

“이 미로에서도 그 방법이 통할까?”

[정신을 똑바로 붙잡고 있다면 통할지도 모른다. 다만, 지금 나는 미로 중간에 떨어진 상황이기 때문에 입구로 나오게 될지 출구로 나오게 될지는 알 수가 없다.]

“하긴 그렇겠네. 게다가 이 미궁은 어느 복도든 똑같이 생겨서, 내가 나온 곳이 입구인지 출구인지 알 방법도 없고…….”

나는 예전에 모험가의 시체에서 얻은 백묵으로 오른쪽 벽에 화살표를 남기면서 천천히 걸었다. 단순히 벽에 손을 대는 것만으로는 내가 제대로 가고 있는지 신용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갈림길 중 하나를 적당히 골라 걷고, 길이 막혔을 때에는 다시 돌아 나오며 반대편 벽에 화살표를 남겼다. 양쪽 벽 모두에 화살표가 그려져 있는 곳은 이미 한 번 들어갔다 나왔던 골목이니까 더 이상 들어가지 않았다. 대충 그런 원칙을 지켜 가며 움직이니 크게 헤맬 일은 없었다.

다행히도 미로 내부는 평화로웠다. 바닥에서 갑자기 쇠꼬챙이가 튀어나온다든지, 머리 위의 벽이 열리면서 산성 액체가 쏟아진다든지, 그런 류의 갑작스럽고 성가신 함정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신경 쓰이는 점이 있었는데, 이 미로에 묘하게 다른 모험가들의 시체가 많았다는 점이다.

“함정도 없는데 시체는 엄청 많네.”

위층에서 추락사한 걸로 추정되는 모험가의 시체가 절반, 미로의 막다른 골목 벽에서 목을 매단 채 자살해 있는 모험가들이 나머지 절반이었다.

그들의 시체에서 쓸 만한 물건들을 찾아낼 수 있었던 건 제법 좋은 일이었지만 어쩐지 기분이 이상했다. 추락사한 시체들이야 어쩔 수 없다 쳐도, 함정 하나 없는데 자살한 채 백골이 되어 있는 시체들이 지나치게 많았다. 그 점이 마음에 걸렸다.

[아주 정교하게 설계된 미로는 그 자체로 주술적인 효과를 만들어 낸다. 이 미로에서는 헤맬 수밖에 없으며, 영원히 이 미로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개념’을 사람의 머릿속에 강력하게 박아 넣는다. 그 개념에 사로잡혀 있는 한 올바른 길을 찾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시피 하다.]

“단지 그것만으로도 사람이 자살하는 거야?”

[영원히 이곳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절망감, 자신이 미로의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알 수 없다는 불안감, 미로 자체가 스스로의 의지로 살아 움직이는 것 같다는 의구심이 사람의 정신을 망가뜨린다.]

“어, 하지만 내 정신은 멀쩡한데?”

[모든 주술은 절차가 중요하다. 내 경우에는 미로 중간으로 난입해 왔기 때문에 절차가 일부 훼손되었다. 덕분에 내게 걸린 주술의 효과는 미약하다.]

“주술치고는 뭔가 허술한데……. 하긴 뭐, 보통은 이런 경로로 아래층에 내려오려고 시도하지 않으니까.”

게다가 지금의 나에게는 감정이 희박하다. 불안감, 절망감, 의구심 따위의 감정은 지금의 내가 느끼기에는 너무 강렬한 감정이다. 아마 제대로 된 입구로 들어와 주술에 사로잡혔다 할지라도 절망감에 빠져 자살하거나 하지는 않았겠지.

“잠깐만, 그러면 용사 일행은? 그 사람들은 이 미로에 들어오면 어떻게 돼? 괜찮을까?”

[그들에게는 그들 나름의 방법이 있을 것이다.]

태평하게 내 머리 위에 앉아 있던 인형은 가벼운 몸놀림으로 뛰어내려 바닥에서 걷기 시작했다. 용사 일행이 미로를 헤매다가 다른 모험가들처럼 자살할 거라고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 그야말로 담담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이었다.

‘용사 일행을 믿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저 그들에게 무관심한 것뿐일까?’

따지고 보면 인형의 태도에는 조금 묘한 데가 있었다. 내가 인형이라면 이세계에서 데려온 낯선 인간보다는 자기 세계에서 고생하고 있는 용사 일행에게 더 애착이 갈 것 같은데, 인형은 오히려 용사 일행에게 무관심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까.

애초에 이 녀석은 어째서 용사 일행을 직접적으로 돕지 않는 거지? 내가 좀 떨떠름한 표정으로 인형을 바라보자, 인형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조금 더 설명을 늘어놓았다.

[이 미로와 마찬가지로, 악의 근원을 가두고 있는 미궁에는 그 자체로 주술적이고 종교적인 효과가 있다.]

“……어, 그러니까. 혹시 미궁 전체에 대한 이야기야? 이 작은 미로를 말하는 게 아니라?”

[미궁 전체에 대한 이야기다. 아주 예전에나 통할 법한 이야기지만, 본래 미궁은 무언가를 완성시키기 위한 공간이었다. 반복되는 구조의 미궁에서 중심을 향해 걷는 행위는 그것만으로도 일종의 종교적 의식이 된다. 비어 있던 내부가 차오르며 외부의 불순물이 씻겨 나가고 미완성이었던 것이 완성된다.]

“뭐, 뭐야 그게? 비어 있다느니, 미완성이라느니. 그럼 지금의 용사 일행은……?”

[그들 또한 아직은 미완성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지금껏 이곳에 발을 들였던 수많은 이들이 그랬듯이. 용사 일행은 의식을 통해 스스로 완성되어야 하며, 그 과정에서 필요 이상의 도움이 있어선 안 된다. 스스로 완성되어야만 악의 근원을 정화할 수 있다.]

한 마디로, 미궁을 돌파하는 과정 자체도 꽤 중요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모양이다. 용사로서 완성되어 악의 근원을 정화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나름대로의 시련을 겪어야 한다는 건가?

하지만, 어쩌면 그 시련 때문에 목숨을 잃을지도 모르지. 나는 갈림길 저편에 보이는 또 다른 모험가의 시체를 바라보며 잠시 멈췄다. 어쩌면 저 모험가 또한 용사였거나 용사의 동료였던 건 아닐까. 지금 미궁 어딘가를 방황하고 있을 케르츠와 하넨, 그리고 이름 모를 금발의 용사처럼. 인형은 내가 멈추든 말든 아무래도 좋다는 듯 총총 걸었다.

[용사 일행은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미궁의 중앙까지 도달해야 한다. 그러나 용사의 힘만으로는 미궁을 돌파하기 어렵다. 이 미궁은 무언가를 좋은 방향으로 완성시키는 식으로만 작동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미궁의 중심부에 도사리고 있는 악의 근원이, 미궁의 본질을 오염시켜 부작용을 만들어 냈다. 반복되는 구조의 미궁을 계속 걷다 보면 비어 있던 내부에 오물이 고이고, 외부에는 또 다른 불순물이 달라붙고, 본래 선하던 것이 악한 형태로 완성된다. 실제로 미궁에 진입했던 수많은 용사들이 그 이유 때문에 파멸했다.]

“…….”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는 이 미궁의 주술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아니, 어쩌면 세계의 규칙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할지도 모른다. 규칙과 상관없이 변칙적으로 움직일 수 있어야 하며, 그러면서도 용사 일행만큼은 올바른 절차를 거쳐 미궁을 돌파할 수 있도록 과하지 않은 한도 내에서 도움을 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용사가 파멸하지 않고 제대로 된 형태로 완성될 수 있도록.]

“그 누군가가 나라는 소리잖아, 결국.”

솔직히 말하자면 너무 뜬구름 잡는 소리라서 절반 이상 흘려들었다. 지나치게 형이상학적인 설명이었다. 제대로 된 절차에 따라 미궁을 돌파해야만 미완성이던 용사가 완성되지만, 제대로 된 절차에 따라 미궁을 돌파하면 순수하던 용사가 파멸할지도 모른다니. 대체 그게 무슨 이상한 모순인지.

[나는 용사 일행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 않는다. 그저 물물 교환을 할 뿐이다. 동등한 가치의 물건을 교환하는 행위는 사실상 조력이라고 볼 수 없으므로, 그 정도 도움이 의식의 절차를 크게 훼손하지는 않는다.]

어쨌든 인형이 말하고 싶은 바가 뭔지는 알겠다. 그러니까, 적극적으로 개입해 용사 일행을 돕는 행위는 용사 일행의 성장을 방해할 수 있으니 규격 외의 존재인 나를 데려와서 최소한의 도움만 주겠다는 이야기구나. 솔직히 꼭 나여야 할 이유가 있나 싶기는 하지만, 뭐 인형 본인에게도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겠지.

나는 느긋하게 오른쪽 벽에 화살표를 그렸다. 그러고 보니 백묵의 길이가 많이 짧아졌다. 분명 내가 처음에 백묵으로 표시하기 시작했을 때까지만 해도 손가락만 한 길이 정도는 되었는데, 지금 이 백묵은 고작해야 손톱만 한 길이였다.

“그러고 보니, 내가 이 미로에서 얼마나 오래 헤맨 거지?”

나는 주머니에서 영혼 조각이 든 병을 꺼내려 했다. 슬슬 여섯 시간이 가까워진 것 같으니 다음 조각을 흡수할 준비를 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나는 주머니 속 병을 붙잡은 순간 기이한 불안감을 느꼈다.

이상하다, 병이 왜 이렇게 가볍지?

[나는 이 미로에서 약 엿새 정도를 돌아다녔다.]

“자, 잠깐만.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헤맨 건 고작해야 몇 시간일 텐데.”

[나는 미로의 입구를 통해 들어오지 않았으므로 주술의 효과를 매우 미약하게 받았다. 만약 주술의 효과를 제대로 받았더라면, 나는 못해도 수십 년 동안 이 미로에서 헤매다가 절망감에 자살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다행인 일이다.]

다급히 병을 꺼내 확인해 보니, 병 안에는 영혼 조각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정말이지 텅 비어 있었다. 이건 말도 안 된다. 분명 아까 용사 일행과 거래를 하면서 영혼 조각을 꽤 많이 모아 놓았는데?

딱히 뚜껑이 열려 있던 것도 아니니 흘리거나 쏟은 것 같지도 않은데, 그런데도 영혼 조각이 다 없어졌다는 건 말도 안 되었다. 단 하나, 말이 되는 가정이 있다면―인형의 말대로 진짜 6일이라는 시간이 지났으며 내가 자기도 모르게 영혼 조각들을 다 써 버렸다는 가정뿐이다.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자루를 뒤져 백묵 주머니를 확인했다. 분명 예비용 백묵이 열 개쯤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확인해 보니 그 주머니도 비어 있었다. 당황해하던 나는 아까 인형이 내 머릿속에 집어넣어 줬던 정보를 겨우 떠올렸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미로가 자아내는 주술. 이 미로에서는 헤맬 수밖에 없으며, 영원히 이 미로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개념’을 사람의 머릿속에 강력하게 박아 넣는다고. 그 개념에 사로잡혀 있는 한 올바른 길을 찾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시피 하다고. 나는 그 이야기를 거의 흘려듣다시피 했지만, 어쩌면…….

[엿새 동안 인형은 나를 보호해 주었다. 지난번에 전기 쇼크를 보호해 주지 못했던 일이 자못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보호라니, 대체 뭘 보호했다는 거야? 애초에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데? 왜 6일씩이나 시간이 지났는데도 나는 모르고 있었던 거야?”

[자신이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순간 주술의 효과가 극도로 강화되므로, 인형은 내가 올바르게 길을 찾고 있다고 믿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나의 시간 감각을 망가뜨렸다.]

“실제로는 줄곧 헤매고 있었는데 올바르게 길을 찾고 있다고 믿는 게 무슨 소용이야?!”

[이 미로에서는 헤매고 있다는 자각을 갖는 쪽이 더 불리하다. 오히려 올바르게 길을 찾고 있다는 믿음이 제대로 길을 찾는 데 도움이 된다. 하지만 인형의 마력이 부족해서 더 이상은 보호 조치를 유지할 수 없다. 곤란한 일이다.]

지금껏 백묵 열 개를 썼다는 사실을 겨우 기억해 내고 나니,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미로의 벽을 바라보았다. 이미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는데도 헉 하고 숨을 들이쉴 수밖에 없다.

미로의 벽은 내가 새긴 화살표 모양의 표식으로 가득 뒤덮여 있었다.

현기증이 일어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방향도 불규칙하고, 크기도 제각각인 화살표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내 머릿속까지 화살표 범벅이 될 것 같았다.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자 인형이 내 바짓단을 붙잡고 슥슥 잡아당겼다. 딴에는 걱정하는 듯한 눈치였다.

[벽을 계속 보는 건 좋지 않다. 주술의 영향이 강해질 뿐이다.]

“그럼,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해?”

[인형의 마력은 시간이 지나면 회복된다. 일단은 앉아 있는 게 좋겠다. 지금 이 상태에서 돌아다녔다간 출구에서 더 멀어질 뿐이다.]

인형은 나를 올려다보며 바짓단을 몇 차례 더 잡아당겼다. 그 맹한 듯 멍청한 얼굴에 부아가 치밀면서도 한편으로는 힘이 빠져서, 나는 잠시 인형을 바라보다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이 녀석의 말에도 일리는 있다. 지금 이 상황에서 패닉에 빠져 움직이는 것보다는, 적어도 나보다는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인형의 조언에 따르는 게 더 낫겠지. 인형의 마력이 회복되기 전에 영혼 조각의 효과가 다할 것 같다는 불길한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래, 좀 앉자. 마침 옆에 해골 친구도 있으니 주머니도 좀 털고.”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아무 표식도 없는 바닥을 보고 있노라니 확실히 울렁거림이 좀 가라앉는 것 같았다. 어차피 헤맬 거라면 제정신이라도 유지해 가며 헤매야지.

내 옆에는 이미 수백 년 전에 죽은 걸로 추정되는 모험가가 백골이 되어 나뒹굴고 있었다.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주머니를 적당히 털어 보았지만, 죽은 지 너무 오래되어서 그런지 어지간한 소지품들은 다 썩거나 못 쓰게 되었다. 나는 조금 의기소침해지고 말았다.

“이 사람도 용사였을까?”

[평범한 모험가다. 미궁이 악으로 완전히 잠식되기 전에는, 자신이 미궁을 정화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은 채 미궁에 들이닥치는 모험가들이 많았다. 이제는 없지만.]

“그렇구나. 그런데 이 사람은 평범한 철 갑옷이네. 인면철이 아니라.”

[인면철은 일반적인 철에 비해 희귀하다. 인간이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오염에 노출되어야만 생성되는 금속이기 때문에 아무나 입을 수는 없다.]

“그렇구나……. 어, 잠깐만. 그러면 케르츠는? 도살자라면서 그런 희귀한 갑옷을 입고 있어?”

[이 세계의 도살자는 내가 살던 세계의 도살자와 다른 개념이다. 그들은 특수한 집단이다.]

특수한 집단이라. 나는 케르츠가 전투를 시작하기 전에 흥얼거리던 자장가 비슷한 노래를 떠올렸다. 그게 실제로 자장가인지, 아니면 특정한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마법 주문인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히 그 노래를 부를 때의 케르츠는 평범한 도살자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오히려…….

“지금 다시 생각해 보니 말이야.”

[장송곡 같은 분위기였다. 마치 지금 들리는 노래처럼.]

응? 나는 인형의 설명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확실히 장송곡 같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지금 들리는 노래라니……?

“하, 바르, 베르사미아, 텔라하, 한데스트레…….”

그 순간 귓가에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분명 낮고 음울한 음색인데도, 어째서인지 듣는 순간 머릿속에 돌풍이 부는 것처럼 정신이 확 드는 목소리. 나는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법 먼 곳이기는 하지만, 분명 어딘가에서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 사람들, 설마 벌써 여기까지 온 거야?”

[6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지름길이 아닌 정상적인 길을 이용하더라도 충분히 도착했을 법한 시간이다.]

듣고 보니 그랬다. 벌써 따라잡혔다고 생각하니 지름길을 이용한 메리트가 없어서 좀 분했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나 지금 영혼 조각이 하나도 없단 말이야. 잘못하다간 이 미로에 갇힌 채 움직이지도, 죽지도 못하는 신세가 된다고. 저 사람들이 구하러 와 주면 나도 이 미로에서 나갈 수 있을 텐데…….

어, 잠깐만. 지금 내가 기뻐할 상황이 아닌데. 잘못하면 저 사람들도 이 미로에서 헤맬 수 있다는 소리잖아!

“저 사람들이라도 도우러 가야 하는 거 아니야?”

[돕지 않아도 괜찮다.]

“아니, 괜찮을 리 없잖아. 저 사람들은 입구에서 직접 들어오는 거니까 주술의 효과를 제대로 받을 테고, 잘못하다가 저 사람들까지 이 미로에서 헤매기 시작하면 진짜로 답이 없다고.”

게다가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다. 설령 용사 일행이 운 좋게 미로를 빠져나간다 쳐도, 그들과 내가 중간에 만나지 못한다면 소용이 없다. 길이 조금이라도 엇나간다면 나와 저 사람들은 영영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저 사람들이 미로를 탈출해 쭉쭉 나아가는데 나 혼자만 뒤에 남겨져 미로를 헤매는 신세가 된다면, 그때는 진짜로 답도 없는 거잖아.

[그들에게는 그들의 방법이 있다.]

“아니, 방법이고 뭐고를 떠나서 일단 합류라도 하는 게 낫지 않아? 노랫소리가 들리니 위치를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잖아. 아니지, 이럴 게 아니라 내가 소리라도 쳐 봐야겠다. 적어도 서로의 위치 정도는…….”

내가 목청을 높여 소리를 치려는 찰나, 갑자기 무언가 폭발하는 듯한 굉음이 터져 나왔다. 벽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진동이 센 걸 보니 아무래도 폭발은 이 근방에서 발생한 듯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내가 비틀거리며 자세를 바로잡으려던 도중 또 한 번의 폭발이 벌어졌다. 와르르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가 뒤따라 들려왔다.

“뭐, 뭘 하는 거야?!”

“데 라누, 도느메리아, 하타엔…….”

그 이후로도 폭발음과 무언가 무너지는 소리가 주기적으로 들려 왔다. 폭발음 사이사이로 흥얼거리는 듯한 노랫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설마 케르츠가 쇠톱으로 무언가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었지만, 이번에는 예전처럼 중년 남성과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섞여 들리지 않았다. 적어도 인면철을 사용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는데……. 이쪽으로 오고 있는 건가?’

쾅, 우르르, 규칙적으로 울리는 소리와 진동은 점점 그 강도가 세지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미로의 구조상 이렇게 일직선으로 내가 있는 방향으로 오는 건 불가능할 텐데 대체 뭘 어떻게 하고 있는 거지? 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사실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왜냐면―

“우, 우와악?!”

“……상인?”

바로 다음 순간, 바로 내 앞에 있던 벽이 엄청난 기세로 무너졌기 때문이다. 무너진 벽 너머에서 나타난 건 태연한 얼굴의 용사였다. 아무래도 지금까지 나던 소리는 벽을 부수는 소리였나 보다.

나는 곧바로 깨달았다. 이 인간들, 처음부터 미로를 돌파하려는 생각은 요만큼도 없고……. 아예 벽을 부숴 가면서 일직선으로 이동하려는 거였어?!

“이상해요, 케르츠. 벽 틈새에 상인이 있어요.”

“케르츠에게 말 걸지 마. 저 녀석이 노래를 불러야 주술의 영향을 그나마 덜 받는다고. 그나저나 저 상인은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어쩐지 한동안 안 보인다 했더니.”

“뭘 하냐니요, 어쩌다 보니 미로에 떨어져서 그대로 갇혀 버렸……?!”

내가 설명을 이어 나가려던 찰나, 뒤에서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고 있던 케르츠가 갑자기 내게 달려들더니 내 입을 막아 버렸다. 갑자기 입을 막힌 나는 항의의 의미에서 읍읍 소리를 내 보았지만 워낙 힘이 센 작자라 뿌리치기가 어려웠다. 뼈 가면을 들어 올리고 그 아래로 들어와 입을 막은 손은 제법 커다랗고 단단했다.

케르츠는 한 손으로 내 입을 막고, 다른 한 손으로 검지를 들더니 자기 입 앞에 가져다 댔다. 쉿,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빙긋 웃어 보인 후 그는 다시 노래를 불렀고, 나는 그제야 그의 의도를 눈치채고는 저항을 멈추었다. 내 얼굴을 덮은 사람의 뜨끈뜨끈한 체온이 참 묘했지만 나는 일단 가만히 있기로 했다.

“미로가 뭔가요, 하넨?”

“방금 그 이야기는 못 들은 걸로 해.”

“제가 알 필요 없는 이야기인가요?”

“그래. 그나저나 용사, 네가 보기에 여기는 어디지?”

“벽이 많은 곳이요.”

“그래. 벽이 많지. 벽이 길을 막고 있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뚫으면 돼요. 지금껏 그랬던 것처럼. 그런데 왜 벽의 틈새에 상인이 들어 있었던 건가요?”

“나도 몰라. 아마 벽 틈에 들어가 있는 걸 좋아하나 보지.”

안 좋아하거든요. 전혀 안 좋아한다고. 나는 어이가 없어서 하넨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특유의 찡그린 얼굴로 나를 외면할 뿐이었다. 용사는 신기한 사람이라도 보듯 나를 물끄러미 구경했는데, 어쩌다 보니 내가 벽 틈에 들어가 있는 걸 좋아하는 변태 취급을 받고 있는 것 같아서 영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대충 알 것 같았다. 용사는 장갑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고는 다음 벽 앞에 섰고, 케르츠는 나를 붙잡고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귓가를 작게 스치고 지나간 속삭임은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무지의 역설. 원래부터 모르는 개념이라면 그 개념에 잠식당할 이유도 없겠지요.”

“예?”

그 말을 곱씹기도 전에 용사의 주먹이 벽을 강타했다. 콰앙, 별로 무게를 싣지도 않은 것 같은 가벼운 주먹이 벽에 닿은 순간 폭발음과 함께 벽이 터지듯 무너져 내렸다. 잠깐만, 아까 전까지 벽을 무너뜨린 게 설마 용사 저 사람이었어? 나는 당연히 케르츠의 소행인 줄 알았는데?

저 사람, 의외로 힘이 장사였구나. 사실 사념을 정화하는 능력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줄 알았는데……. 놀라움 반, 멋쩍음 반이 뒤섞인 기이한 심정으로 용사를 바라보고 있는데, 내 입을 막고 있던 케르츠의 손이 슥 떨어져 나갔다.

무너진 벽 너머를 본 나는 그 이유를 금방 이해했다. 백묵 자국 가득하던 미로의 벽 대신, 이미 수차례씩이나 보아서 익숙해진 미궁 복도의 벽이 펼쳐져 있었다. 진짜로 저기가 출구라고? 이제 보니 나, 출구에서 꽤 가까운 위치에서 헤매고 있었구나.

“다음 복도가 나왔어요.”

“잘했어요, 용사님.”

“그런데 케르츠는 왜 상인의 입을 막고 있었나요?”

“아, 언데드 살갗이 어떤 느낌인지 궁금해서. 체온이 없어서 서늘하니 좋더라고요.”

“저도 만져 보아도 괜찮나요?”

“저기, 구해 준 것까진 고맙지만 저는 구경거리가 아니거든요?”

나는 툴툴거리면서도 재빨리 미로 바깥으로 뛰어나갔다. 미로 밖으로 한 발짝 나가자마자 머릿속이 확 맑아지고 시야가 또렷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슬쩍 뒤를 돌아보니 용사가 정성 들여 부수어 놓은 미로의 벽들이 보였다.

이제 보니 미로 자체의 규모는 별로 크지도 않았다. 사람이 무려 6일 동안이나 헤매고 다닐 만한 규모의 미로는 결코 아니었다. 용사와 하넨이 담담한 표정으로 미로를 빠져나오고, 그들의 뒤를 따라 마지막으로 미로 바깥으로 나온 케르츠가 나를 보며 빙긋 웃었다.

“우리 용사님의 상식이 부족한 건 곤란한 일이지만 이럴 때에는 도움이 된단 말이지요. 저 공간, 인지 계통의 마법이 걸려 있었어요. ‘미로’라는 개념을 알고 있었더라면, 미로는 헤매는 장소라는 지식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으면 백 퍼센트 헤맬 수밖에 없는 마법.”

“그, 그 정도는 저도 알고 있었거든요? 어쩌다 보니 엿새 동안이나 헤매긴 했지만…….”

“엿새 동안이나 헤맸다고요? 거참 큰일이었군요.”

“조, 조금 헤맬 수도 있지요! 그나저나 해결책이 엄청 단순 무식하네요. 벽을 부수는 걸로 해결이 된다니.”

“용사님이 미로에 대해 전혀 모르니까 가능한 전략이었지요. 조금이라도 미로에 대한 선입견이 있었으면 저 미로의 벽은 결코 부서지지 않았을걸요. 이 미궁의 함정이 그렇게 만만한 편은 아니어서.”

“그렇구나. 그런데 아까 그 노래는 뭐였어요? 당신이 흥얼거리던 거 맞죠?”

“그건 저와 마법사님을 위한 주술. 조금이라도 정신을 놓으면 미로 속으로 들어가 헤매 버릴지도 모르니까요.”

이야기의 화제가 되고 있는 용사 본인은, 나와 케르츠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만 갸웃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나저나 케르츠의 이야기를 듣고 나니 다시 한번 실감이 났다. 자칫 잘못했다간 내가 저 안에서 영영 못 빠져나왔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너, 엄청 얼빠진 놈이구나? 그런 대비책도 안 세워 놓고 미로 안에 들어가다니.”

“저도 지름길이 있다는 소리만 듣고 속아서…….”

[인형은 나를 속이지 않았다. 그저 아래층에 어떤 함정이 있는지 잠시 잊었을 뿐이다.]

어느새 내 머리 위로 올라온 인형은 항의하듯 내 머리를 퍽퍽 때렸고, 하넨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사람을 비웃는 듯한 웃음이라 기분이 이상했지만, 일단 미로를 빠져나온 것만으로도 기력이 다 빠졌기 때문에 차마 반론할 기분조차 들지 않았다.

“너도 의외로 별것 아닌 놈이었군. 이런 미궁을 혼자 돌아다니는 걸 보니 강하고 요령 좋은 녀석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저에게 유리한 상황에선 유리하고, 불리한 상황에선 불리한 거죠 뭐. 사실 저는 용사님이나 다른 분들처럼 그렇게 강한 것도 아니고.”

“이렇게 된 거 서로 돕고 살지요. 혹시 저 미로 안에서 건진 물건 없습니까? 있으면 좀 보여 줄래요?”

용사 일행은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모닥불을 피우고 쉴 자리를 마련했다. 나는 진이 빠진 채 복도 벽에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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