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조금 이상한 용사 파티
자그마한 영혼 조각 하나만으로도 내 몸은 순식간에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손이 피투성이긴 하지만 손가락뼈도 전부 붙었고, 걸을 때마다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 같던 고관절도 이제는 멀쩡하고, 함몰되어서 아예 기능을 상실했던 안구도 완전히 회복되어서 이제는 제대로 앞을 볼 수 있게 되었다.
“두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는 게 생각보다 좋은 일이었구나.”
[인형은 나의 회복을 축하하며 기쁨의 춤을 추고 있다.]
“고맙긴 한데 왜 이렇게 찝찝하냐……. 내가 한결 쓸모 있는 부하가 되었다는 생각에 기뻐하고 있는 거 아니야?”
[인형은 나의 회복을 축하하고 있다.]
“그래, 그런 걸로 치자. 괜히 캐물어 봤자 내 꼴만 우스워지고.”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쁨의 춤이랍시고 빙글빙글 돌고 있는 인형을 보고 있노라니 묘하게 얄미우면서도 고마웠다.
나는 최대한 좋은 방향으로 생각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하긴 뭐, 원래대로라면 죽었을 목숨이 어찌어찌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지금의 나는 운이 꽤 좋은 셈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저 녀석은 사실상 내 생명의 은인인 셈이지.
“화해하자, 우리. 어차피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우리는 운명 공동체나 다름없고.”
[인형에게는 나와 인형이 싸움을 했다는 자각 자체가 없는 모양이다.]
“속 편한 녀석.”
나는 툴툴거리며 녀석의 이마에 딱밤을 먹였다. 어쨌든, 나는 나름대로 성실한 상인이 되어 용사 일행과의 거래에 힘써 보기로 마음먹었다. 썩어 문드러진 시체가 되어 움직이지도 못한 채 미궁 어딘가를 나뒹구느니, 용사 일행이라고 불러 주기도 싫은 괴팍한 사람들에게 물건이라도 팔아서 몸을 유지하는 게 낫지.
나는 다시 가면을 뒤집어쓰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함몰된 얼굴은 원래대로 돌아왔으니 더는 뼈 가면을 뒤집어써야 할 이유가 없지만, 그래도 가면을 쓰는 쪽이 안 쓴 쪽보다는 마음이 편했다.
“그 사람들, 얼핏 보기에도 나보다 나이가 훨씬 많아 보였으니까. 내가 갓 성인이 된 애송이라는 걸 알게 되면 은근히 무시할지도 몰라.”
[이미 조금쯤은 무시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시끄러워, 이 솜뭉치 자식아.”
인형은 내가 항의하든 말든 개의치 않은 채 내 머리에 꾸물꾸물 올라왔고, 나는 더 실랑이를 벌이지 않기로 마음먹고 묵묵히 걸었다.
‘삐걱거리는 몸 이끌고 다니다가 멀쩡한 몸으로 걷기 시작하니까 정말이지 신세계네.’
그 날 이후로 나는 용사 일행이 필요로 할 만한 물건을 찾기 위해 여기저기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한번 영혼 조각 맛을 보고 나니 이제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함몰되어 한쪽이 보이지 않는 시야로 비틀비틀 걷는 것보다는 생전의 몸 상태를 유지한 채 똑바로 걷는 쪽이 훨씬 나았다.
하지만 내가 생전의 인간성까지 전부 되찾은 건 아니다. 영혼 조각을 사용한 덕분에 몸이 원래대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아직 나는 통각이나 감정 등의 요소들을 되찾지 않았다. 딱히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 되찾지 못했다기보다는 이 미궁에서 적응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되찾지 않은 쪽에 가까웠다.
‘이 미궁, 실제로는 엄청난 악취투성이고 바닥도 장난 아니게 까끌거린단 말이지. 차라리 감각이 없는 쪽이 더 견디기 편해.’
딱 한 번, 감각을 되찾으면 어떤 기분이 들지 호기심이 생겨서 영혼 조각 두 개를 동시에 흡수한 적이 있다. 하지만 감각을 되찾은 순간 내가 느낀 거북함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나는 이 지하 미궁에서 이렇게 지독한 피 냄새가 난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아예 사람을 갈아서 회반죽 대신 썼다고 해도 믿을 정도의 피 냄새, 그리고 살점이 부패하는 썩은 내…….
그뿐만이 아니었다. 평범한 돌로 이루어져 있는 줄만 알았던 바닥은 맨발로 걷기에는 지나치게 따가웠다. 왜 이렇게 바닥이 따가운가 싶어 발밑을 확인해 보니, 돌바닥 사이사이에 뾰족뾰족한 하얀 가시 같은 게 잔뜩 박혀 있었다.
[뼛조각이다.]라고 담담하게 설명하던 인형의 모습에 정말이지 비위가 상해서 견딜 수가 없더라. 대체 이 미궁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아니, 사람 아닌 무언가가 죽어 나간 걸까.
‘솔직히 토하는 줄 알았다니까. 어차피 토악질씩이나 할 만큼 뭘 먹지도 않았지만.’
이 미궁에서는 ‘인간성’을 되찾는다는 게 썩 유리한 일이 못 된다. 나는 아주 잠시 감각을 되찾은 것만으로도 그 사실을 직감했다. 고작 감각을 되찾았을 뿐인데도 그렇게나 견디기가 힘들었는데, 그 상황에서 제대로 된 감정까지 되찾는다면 그때는 정말 어떻게 버텨야 할까. 솔직히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무서울 정도였다.
게다가, 복도를 걸으면서 이런저런 공상을 하다가 문득 생각난 가설이 하나 있었는데…….
“묻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내가 인간성을 완전히 되찾으면 사념들이 나를 공격하는 거 아니야?”
[유의 사항에 추가하는 걸 잊었다. 인형은 나에게 매우 미안해하고 있다.]
그럼 그렇지. 인형은 진심으로 미안하다는 듯 고개를 꾸벅 숙였지만, 나로서는 저게 진심인지 가식인지 알 방도가 전혀 없었다. 이래서야 영혼의 조각을 한꺼번에 많이 흡수해서 얻는 이득이 전혀 없잖아.
이건 악취로 힘들어하거나 우울감에 시달리는 등의 감정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 나의 생사가 달린 문제였다. 지금 내가 이 미궁을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는 이유는, 미궁에서 가장 큰 위협이 되는 ‘사념’이라는 녀석들이 나를 공격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그 점에 있어서는 내가 용사 일행보다 우위에 있었다. 용사 일행은 사념이 지나치게 많은 공간을 뚫고 가는 대신 적당히 우회해서 지나가곤 했지만, 나는 사념이 있든 말든 별로 개의치 않은 채 마음대로 길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심지어 나는 어느 방에 있는 거대한 사념의 목구멍을 통해 미궁의 다음 층으로 빠르게 넘어가기도 했다. 그 사념은 일반적인 사념에 비해 엄청나게 거대해서, 몸뚱이가 광장의 절반을 꽉 채우는 걸로도 모자라 아예 바닥을 뚫고 아래층까지 공간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였다. 녀석의 목구멍으로 들어갔더니 그대로 아래층의 광장으로 떨어졌다. 몸에 끈적거리는 점액이 묻긴 했지만 감정이 무뎌져서인지 그럭저럭 견딜 만했다.
용사 일행이 나와 같은 짓을 시도했더라면 사념의 배 속에 갇힌 채 그대로 소화되어 버렸겠지만, 다행히도 나는 언데드인지라 소화되지 않고 그대로 녀석의 하반신(?)으로 나올 수 있었다. 용사 일행이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찾기 위해 고생하는 동안 나는 언데드 전용 특급 지름길을 이용한 셈이었다.
사념에게 공격당하지 않는다는 게 이렇게나 편리한 기능인데, 고작 강렬한 감정 따위를 되찾아 보겠답시고 그 편리한 기능을 포기하라니. 단순히 편리하고 불편하고의 문제를 떠나서, 사실상 엄청난 위험을 감당해야 하는 문제잖아.
[하지만 실제로 공격당하지는 않는다. 사념들은 그저, 나를 인간으로 착각한 나머지 가까이 다가올 뿐이다.]
“그게 그거잖아. ……아닌가? 그냥 다가오기만 할 뿐 실제로 공격하지는 않는단 거지?”
[인간성을 되찾은 나는 멀리에서 보기에 인간과 매우 흡사하기 때문에 사념들의 이목을 끈다. 하지만 가까이에서 자세히 보면 근본이 인간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사념들에게 직접적으로 공격당하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사념을 끌어들이는 인간 자석……. 아니, 언데드 자석 같은 꼴이 된다는 거네. 내가 제대로 이해한 거 맞아?”
인형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공격당하지 않는다니 다행이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어쩐지 뒷맛이 찝찝했다.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인간성을 되찾는다고 해도 나는……. 근본적인 차원에서 인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거잖아.
“있잖아. 혹시…….”
[모르겠다.]
“응?”
[용사가 과업을 이루었을 때 내가 원래 세계로 돌아갈 수 있을지, 아니면 하다못해 인간이 될 수는 있는지, 인형은 확신하지 못한다. 가능성이 없다고는 못 하겠지만 해 주겠다고 큰소리를 땅땅 치지도 못한다. 사실 못하겠다고 고백하는 쪽이 더 진실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와, 최소한의 립 서비스도 안 하는구나. 솔직한 건지 뻔뻔한 건지 모르겠네.”
[이 세계의 신은 전능하지 못하다. 악의 근원을 제거하면 더 이상의 오염을 막을 수는 있겠지만, 신이 원래의 전능성을 되찾을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전능하지 못하다니, 어쩌면 신조차도 악에 오염된 걸까.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인형은 평소다운 무표정으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정도도 제대로 못 하냐며 인형을 비웃으려던 나는, 어쩐지 인형의 무표정이 슬프게 보여서 흠칫 놀랐다. 내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쩌면 인형이 진심으로 나를 돕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이지 이 녀석은 속내를 모르겠다. 착한 놈인지 나쁜 놈인지, 나를 도우려는 건지 단순히 나를 이용해 먹으려는 건지, 둘 다인지 둘 다 아닌지 가늠이 안 선다. 다만 방금 전 녀석의 설명으로 한 가지 추측할 수 있는 점이 있다면…….
“너, 혹시 신의 사자 같은 역할이야?”
인형은 묵묵히 몸을 돌리더니 종종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부정하지 않는 걸 보니 내가 아예 잘못 짚지는 않은 모양이다. 별로 그 사실을 떳떳하게 밝히고 싶지도 않은 눈치였지만 말이다.
나는 인형을 따라 묵묵히 복도를 걸었다. 그나저나 용사 일행은 어디쯤에 있으려나? 이 미궁에는 이렇다 할 갈림길이 없고, 내가 지름길을 이용해 먼저 아래층으로 내려왔으니 그 녀석들과 길이 엇갈렸을 리는 없는데…….
‘어, 잠깐만.’
노랫소리? 나는 복도 저편에서 희미한 흥얼거림 같은 소리를 들었다. 이렇게 먼 거리에서 그렇게 작은 소리가 어떻게 들리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의외로 이런 밀폐된 공간에서는 먼 곳의 소리도 제법 크게 울린다. 애초에 이 미궁에는 내 발자국 소리나 목소리 말고는 이렇다 할 소리도 없는 만큼 더더욱 다른 소리를 듣기가 쉬웠다.
[용사 일행의 소리다. 용사 일행의 전투를 구경하러 가는 것도 재미있을지도 모른다.]
어, 잠깐만. 전투라고? 나는 내심 어리둥절해져서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전투를 하는데 왜 자장가 소리가 들려? 거 신기한 일이네. 사실 나도 그 괴상한 용사 일행이 어떤 식으로 사념과 싸울지 좀 궁금했으므로, 정보의 탈을 뒤집어쓴 저 제안에 따라 보기로 마음먹었다.
안 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기는 했지만, 나는 그 예감을 무시한 채 복도를 걸었다.
* * *
흥얼거리는 듯한 자장가 소리는 어쩐지 케르츠의 목소리를 닮아 있었다. 아니, 케르츠의 목소리였다.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서 들으니 확실했다.
평온한 듯, 한편으로는 나른한 듯, 음울하면서도 차분하기 그지없는 노래를 부르는 목소리. 저 광장 너머에 용사 일행이 있을 거라고 나는 추측했다.
“그런데 전투라니?”
[전투를 구경하는 건 재미있는 일이다.]
“아니, 남이 싸우는 거 구경하는 일은 언제나 재미있지만……. 지금 싸우는 분위기는 아니잖아? 케르츠인가 뭔가 하는 그 사람이 용사한테 자장가라도 불러 주는 거 아니야?”
[보면 안다.]
복도 끄트머리에 도착하자 나는 인형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내가 추측한 대로 광장 반대편에는 용사 일행이 서 있었지만 그들은 나를 보는 대신 광장 안을 가득 뒤덮고 있는 살덩어리와 그 중앙에서 맥동하고 있는 종양을 보고 있었다.
‘우와, 이거 진짜 엄청난 규모잖아.’
사념이 광장의 절반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경우는 몇 차례 본 적 있지만, 이렇게 사념이 광장 전체를 잠식한 광경은 처음 보았다.
광장의 벽과 천장에는 살점과 기름덩어리와 종양이 이끼처럼 자글자글 붙어 있었다. 차라리 그냥 살점이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살점 하나하나에 생명이 깃들어 있는 듯 제멋대로 꿈틀거리는 모습이 보기에 썩 좋지는 않았다.
심지어 바닥에는 고름과 상처로 가득한 팔들이 잔뜩 돋아나 있었다. 팔들은 마치 무언가를 붙잡고 싶기라도 한 것처럼 간절하게 손을 뻗으면서 버둥거렸다. 비위가 약한 사람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역겨움을 느끼며 토악질을 하고 싶어질 법한 광경이었다. 다행히도 나는 시선 둘 곳이 없어 난감할 뿐 그렇게까지 견디기 힘들지는 않았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광장 입구 근처에도 수많은 팔들이 돋아나 있었다. 다만 그 손들은 내가 데면데면한 타인이라도 되는 양 내게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데, 아마 내가 광장 안에 들어가 손들을 자근자근 짓밟으며 걷는다 해도 마찬가지의 반응을 보일 거다.
물론 상대가 용사 일행이라면 이야기는 다르다. 그들은 나처럼 죽은 채 살아 있는 존재가 아니라, 엄연히 살아 있는 사람이니까.
“―라, 라헤므, 엔스테르다, 스루미나드…….”
그 와중에 신경 쓰이는 점이 있었다. 대체 케르츠 저 사람은 왜 이 상황에서 자장가 같은 걸 부르고 있는 거야? 너무 먼 곳에 있어서 표정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케르츠의 목소리는 이런 거북한 광경을 눈앞에 두고 있다기에는 지나치게 평온했다. 대체 이 상황에서 왜 저런 자장가를…….
‘잠깐, 저게 자장가이긴 한가?’
문득 머릿속을 스친 의문에 숨이 콱 막혔다. 어차피 숨을 쉬지도 않지만 일단 기분이 그렇다는 뜻이다. 얼핏 듣기에 노래의 형태를 갖추고 있기는 하지만, 어쩌면 저건 자장가 같은 귀여운 노래가 아닐지도 모른다. 지나치게 낮고 차분한 음색이라서 자장가라고 착각했을 뿐.
“―라, 라헤므, 엔스테르다, 스루미나드…….”
그 순간,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목소리가 끼어들어 케르츠와 함께 합창을 부르기 시작했다. 아주 어린 아이의 것처럼 높고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와, 중년 남성의 목소리처럼 낮고 굵은 목소리. 용사의 목소리도, 마법사 하넨의 목소리도 저런 목소리는 아닐 터였다. 그렇다는 건……?
[인면철은 자아를 가진 금속을 일컫는다.]
나는 등줄기에 소름이 돋는 느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멀어서 잘 보이지 않기는 했지만, 인형의 설명을 듣고 나서 다시 떠올려 보니 케르츠의 갑옷 표면은 묘하게 울퉁불퉁했다. 그 요철이 사람의 얼굴을 닮아 있는 건 단지 내 착각일까?
어쩌면 저 노래는 일종의 주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순간, 케르츠가 사뿐하게 광장 중앙으로 몸을 날렸다. 제법 늘씬한 장신인데도 마치 무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듯 가벼운 몸놀림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귀를 막아야 할 것 같다.]
“……!”
내가 허겁지겁 귀를 막자마자 폭발하는 듯한 비명 소리가 광장 안을 메웠다. 그 어떤 언어로도 형용하기 어려운 그 괴이한 음색은, 통각이 없는 나조차도 귀가 아프다고 느낄 정도로 날카롭고 고통이 어려 있었다.
심지어 그 음색은 귀 없는 것들에게도 고통을 주는 모양이었다. 천장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살점이 일제히 터져 나가자, 그 여파로 광장 전체에 피가 눈보라처럼 쏟아져 내렸다. 케르츠는 피의 안개와 하나가 되기라도 하려는 듯 광장의 중앙으로 뛰어 들어갔다.
“무모하게 움직이지 마, 이 멍청아! 또 팔이 날아가고 싶은 거냐!”
언짢은 기색이 역력한 하넨의 목소리가 비명의 틈새에서 아슬아슬하게 퍼졌다. 안개처럼 시야를 가로막던 피의 안개가 슬슬 가라앉을 때쯤, 광장 저편에서 검푸른 안개가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다. 아무래도 하넨의 마법인 듯했다.
“알았다니까요, 우리 마법사님은 어쩌면 저렇게 잔소리도 심하실까!”
시원시원한 목소리와 함께 케르츠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이었다. 예전에 보았을 때까지만 해도 망토였던 것은, 이제 박쥐의 피막처럼 넓게 펼쳐져 비행에 가까울 정도로 말도 안 되는 높이의 도약을 돕고 있었다.
케르츠의 목표는 광장 중앙에서 꿈틀거리고 있는 거대한 종양이었다. 그는 종양을 향해 있는 힘껏 쇠톱을 내리찍었지만, 종양의 표면에서 갑자기 여러 개의 팔이 돋아나 케르츠의 몸을 붙잡으려 했다.
케르츠는 공격에 실패했으나 예상하기라도 한 것처럼 능숙하게 몸을 뒤틀어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여러 개의 팔들 중 하나가 케르츠를 붙잡으려 들자 케르츠는 그 팔을 향해 발차기를 날렸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분명 평범했던 부츠의 밑창에 갑자기 단검처럼 길고 뾰족한 가시들이 돋아났다. 가시에 꿰뚫린 팔은 새까맣게 변하며 부풀더니 폭발하고 말았다. 다만 저 폭발은 가시의 효과가 아니라 주변을 감싼 녹색 안개의 효과인 듯했다.
“상처를 입히는 걸로 족해! 그러면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예, 예. 분부대로 하죠!”
대답은 따박따박 잘했지만 실제로 그럴 생각은 없어 보였다. 케르츠는 천장에 달라붙다시피 해서 기회를 노리더니 다시 종양을 향해 몸을 박찼다. 한 손으로 다루기에도 충분해 보이던 크기의 쇠톱이 갑자기 자라나기라도 하듯 몸을 부풀렸고, 케르츠는 그 어마어마한 크기의 쇠톱을 있는 힘껏 휘둘러 종양을 찍어내렸다.
수많은 손들이 아우성이라도 치듯 케르츠의 쇠톱을 막아 내려 했지만, 이미 케르츠 본인보다도 더 커다랗게 부풀어 있는 거대한 쇠톱을 막아 내기란 역부족이었다. 바닥에서 돋아난 손들이 종양을 보호하기라도 하려는 듯 아우성치며 늘어났으나 그 손들은 검은 안개에 닿자마자 허무하게 녹아내렸다. 종양의 일부가 터지면서 역겨운 액체를 줄줄 흘렸다.
“읏!”
아무래도 그 액체에 맞으면 꽤 위험한 듯, 케르츠는 질겁하며 다시 후퇴해 벽에 달라붙듯 안착했다. 그 뒤로도 비슷한 패턴의 공방이 반복되었다. 케르츠가 쇠톱을 이용해 종양에 상처를 입히면, 진녹색의 안개가 그 상처로 몰려들어 상처를 터뜨리거나 곪게 만든다. 아무래도 저 마법사가 사용하는 마법은 독 계열의 마법이 아닌가 싶었다. 물론 나는 마법에 문외한이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에 불과했지만.
저 사람들, 생각보다 꽤 강한 사람들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전투를 감상하던 도중 나는 기이한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잠깐만, 그런데 용사 녀석은 이 전투에서 무슨 역할을 하는 거지? 왜 싸우지도 않고 가만히 있기만 하는 거야?
“지금이야, 정화해!”
다시 한번 거대한 쇠톱이 종양을 절반으로 가르며 터뜨린 순간, 뒤에서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던 용사가 하넨의 앞으로 나섰다. 그는 어딘가 무기력해 보일 정도로 느린 몸놀림으로 새하얀 롱 소드를 들어 종양을 향해 겨누었다. 저게 뭐 하는 짓인가 싶어, 조금 더 자세히 상황을 보려고 고개를 들이민 순간―
엄청난 빛이 광장 전체를 뒤덮었다. 나는 눈부신 나머지 눈을 질끈 감으려다가, 애초에 통각이 마비되어 있으니 눈이 아플 리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겨우 눈을 떴다. 그 순간 나는 경이로운 광경을 목도했다.
방 전체에 흩뿌려져 있던 더러운 것들이, 마치 불타오르듯 새하얀 재가 되어 용사의 몸 안으로 흡수되고 있었다. 용사가 치켜든 롱 소드에, 용사의 금빛 머리카락에, 차분한 벽색 눈동자와 하얀 갑옷과 푸른 망토에, 아예 용사의 온몸에 스며들듯 흡수되어 사라졌다.
“우, 우와…….”
차라리 성스럽다고 하는 게 더 어울릴 법한 그 광경에 나는 그저 입을 떡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런 필살기 같은 능력이 있으면 처음부터 쓸 것이지 왜 빈둥빈둥 놀다가 나중에나 쓰냐고, 다른 동료들이 피 터지게 싸우는 동안 왜 뒤에 가만히 있었느냐고, 그런 치졸한 의문 따위는 제기할 틈조차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빛과 오물이 모두 사라지고 나자 용사는 털썩 쓰러지듯 바닥에 주저앉았고, 바닥을 나뒹굴고 있던 케르츠는 그와 교대하기라도 하듯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히도 이번에는 별다른 상처가 없는 모양이었다.
“으으, 눈이……. 음? 저건?”
눈을 비비며 힘겹게 일어나던 케르츠가 문득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아까 전부터 내 옆에서 꼬물거리는 감각이 느껴졌다. 뭔가 싶어 옆을 바라보니, 어느새 인형이 내 자루 안에서 물건들을 이것저것 꺼내서는 좌판을 차리고 있었다. 묘하게 행동력 좋은 녀석 같으니라고.
케르츠를 부축하려는 듯 광장 중앙으로 다가오던 하넨 또한 내 쪽을 바라보며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야 뭐, 저 사람들 입장에서는 당연하겠지. 분명 뒤에 두고 지나쳤던 상인이 복도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니 꽤 어이가 없긴 할 거다.
“저 상인 녀석, 분명 우리보다 더 뒤처지지 않았나? 그런데 왜 저기 있어?”
“진짜네요. 심지어 사념이 길을 막고 있기까지 했는데……. 어떻게 저기에 있는 거죠?”
“음, 그러니까……. 영업 비밀이라고 생각해 주시지 않을래요? 그나저나 만나서 반갑네요!”
나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두 사람에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조금 더 여유롭게 굴 수 있었더라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그 정도로 연기력이 따라 주지는 않았다.
* * *
케르츠와 하넨은 광장 한구석에 모닥불을 피우기 시작했다. 사념과 전투를 치르느라 피로가 쌓였으니, 일단은 좀 쉬고 나서 물건을 보든 흥정을 하든 일을 진행하겠다는 입장이었다. 어차피 나도 지금 당장은 거래가 급하지 않으니 몇 시간 정도는 기다려 줄 수 있다.
다만,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하넨이 마법으로 모닥불을 피우고 케르츠가 그 옆에서 음식을 준비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어째서인지 용사는 아까 자리에 주저앉은 이후로 실 끊어진 인형처럼 일어나지를 않았다. 저렇게 오래도록 일어나지 않으면 걱정할 법도 한데 두 사람은 용사를 걱정하는 기색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저기요, 저 사람 저렇게 내버려 둬도 괜찮아요? 어디 아파 보이는데.”
“우리 용사님이요? 딱히 아픈 건 아니에요. 정화하느라 좀 시간이 걸릴 뿐이지.”
“정화……?”
“방금 사념을 흡수했으니 정화를 해야겠지요? 정화가 끝나면 알아서 올 테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꽤 커다란 걸 흡수했으니 시간이 좀 걸릴 거예요.”
어쩐지 용사 신세가 찬밥 신세인데. 케르츠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지만, 나는 어쩐지 걱정이 되어서 용사의 옆으로 다가갔다. 타오르는 모닥불 옆에서 온기를 쬐던 인형도 졸래졸래 나를 따라왔다.
저 녀석, 처음에는 나에게 칼을 휘두르고 내 머리 위에 영혼 조각을 쏟는 만행을 저질렀지만 근본이 나빠 보이진 않단 말이지. 하넨이 멍청하다는 말을 대놓고 할 정도면 기본적인 상식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제대로 된 상식을 가르치면 의외로 친한 사이가 될지도 모른다. 나는 앞으로의 고객(?)과 친분을 쌓아 보겠다는 야심을 품은 채 녀석의 옆에 다가갔다. 하지만, 용사의 옆에 쪼그려 앉은 나는 영 떨떠름한 광경을 목격했다.
“이봐요, 용사님……? 당신 왜 울어요?”
숨을 거세게 몰아쉬지도, 어깨를 떨지도 않은 채 용사는 지나치게 조용히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뺨은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턱으로 흘러내린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리기까지 할 정도였다. 나는 당황한 나머지 용사의 어깨를 잡고 몇 차례 흔들어 보았지만 용사는 그 자세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대답은 또 왜 안 해요? 저기, 어디 아파요?”
“뭐 하는 거야, 너?”
내가 당황한 나머지 쩔쩔매는 동안, 저편에서 다가온 하넨이 언짢은 낯으로 내 손을 탁 쳐냈다. 왜 이 사람은 동료가 울고 있는데 달래는 시늉도 안 하나 싶었지만, 정작 하넨은 내가 용사를 건드리면 큰일이 나기라도 할 것처럼 인상을 찡그렸다.
“뭐 하냐니요, 사람이 울잖아요. 달래야 하는 거 아니에요?”
“멍청하기는! 네 눈에는 이 녀석이 괴로워서 우는 걸로 보여?”
그게 무슨 소리인지 조금 더 자세히 질문하려던 도중, 나는 바닥에 무언가 돌멩이 비슷한 것이 툭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 이건 눈물방울이 떨어져 내리는 것처럼 가벼운 소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조금 더 묵직하고 둔탁한 소리.
“그럼 아니에요?”
“당연히 아니지. 정화 중에 함부로 건드리지 마, 잘못하다 사념을 토해 내기라도 하면 네가 책임질 테냐?”
바닥에 정화된 영혼 조각 하나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아무래도 방금 난 소리는 이게 떨어지면서 난 소리인 모양이었다. 고개를 들어 용사의 얼굴을 다시 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그의 눈에서 흘러내리던 눈물은 순수한 액체가 아니었다. 아니, 분명 눈에서 흘러나올 때까지는 액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정화된 영혼이란 거, 이런 식으로 생성되는 거였어요?”
“그래. 이 녀석이 흘리는 건 눈물이 아니라 정화된 영혼이야. 이게 굳으면 네가 원하는 그 영혼 조각이 되는 거고.”
눈물이 굳어 돌이 되었다. 빠를 때는 아예 턱에서 떨어질 때부터 굳어 자그마한 돌멩이가 되었고, 조금 느릴 때는 바닥에 방울져 떨어진 눈물 여러 방울이 한데 뭉쳐 커다란 돌멩이가 되었다.
나는 조금 떨떠름해진 기분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눈물을 통해 사념을 정화하고 깨끗한 영혼을 만들어 낸다니. 한편으로는 안쓰러웠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어딘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거, 아프진 않대요?”
“우리야 모르지.”
“본인한테 물어보면 되잖아요.”
“이 녀석은 사념이 정화되는 순간을 기억하지 못해. 자기 보호 차원에서.”
“자기 보호라고요?”
“방금 우리가 사념과 싸우는 모습을 봤지? 그렇게나 끔찍한 사념이 네 안으로 흘러들어 온다고 생각해 봐. 맨정신으로 버틸 수 있겠어?”
“……!”
“뭐, 어쩌면 아플지도 모르지만……. 어쩔 수 없지. 이것도 이 녀석의 사명이니까.”
하넨은 용사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명 용사를 소중히 여기기는 하는 듯한 태도였지만, 그는 망설임 하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모닥불 쪽으로 돌아갔다.
인형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용사를 잠시 바라보다가, 바닥에 떨어진 영혼 조각을 모아 유리병에 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영혼 조각을 주머니에 몰래 숨기는 수작을 부리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은 용사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저번에 용사가 인형을 보았을 때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던 걸 보면 용사 쪽에서는 인형을 아예 모르는 모양이지만, 인형은 분명 용사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을 텐데. 나는 인형이 용사의 상태에 대해 무언가 말해 주지 않을까 기대했으나 인형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설명해 줄 마음이 별로 없는 모양이다.
나는 용사의 옆에서 조금 더 자리를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인형이 유리병에 조각을 모으는 걸 기다릴 겸, 용사가 깨어나는 것도 기다릴 겸해서였다. 동료들은 이미 익숙해져서 아무렇지도 않은 눈치였지만, 아무래도 나는 눈물을 흘리는 사람을 가만히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아무리 무뎌졌다고는 해도 최소한의 감정은 남아 있단 말이지.
그렇게 몇 분이나 지났을까? 용사의 볼을 흐르던 눈물이 서서히 말라붙고, 인형이 영혼 조각을 모두 주워 유리병에 담았을 때쯤 용사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어?”
“일어났어요, 용사님?”
“상인.”
“네?”
“기억하고 있어요. 상인. 정화된 영혼을 주면 답례로 물건을 주는 사람이에요. 케르츠가 가르쳐 줬어요.”
답례라기보다는 대가 쪽이 맞을 텐데. 아니, 그 전에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삿대질하면 못쓴다. 물론 외양으로만 보면 용사 쪽이 나보다 훨씬 더 나이가 많아 보이지만, 아무리 나이가 많다 해도 삿대질은 예의가 아니지.
용사는 자신이 무례를 저지르고 있다는 자각조차 없이 매우 해맑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케르츠가 이 사람을 덜 가르친 건지, 아니면 학습 능력의 한계로 이 정도의 지식 습득이 최대였던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지. 케르츠도 그렇고, 하넨도 그렇고 별로 진지한 선생님처럼 보이지는 않으니까.
“어째서 여기에 있지요?”
“그, 어쩌다 보니 마주쳤어요.”
“그래요? 이번에도 거래를 하나요?”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저는 정화된 영혼이 필요하니까.”
“그렇구나. 거래하기 전에, 우선 고기를 먹으러 가요.”
“고기요?”
“큰 사념을 정화하고 나면 고기를 먹고 쉬고 자요. 하넨이 그렇게 규칙으로 정해 놨어요. 그러니까 우선은 그것부터 해야 해요.”
두 사람이 진지하게 가르쳤다 해도 별로 다를 바는 없겠구나, 어쩐지 그런 생각이 들어서 김이 좀 빠졌다. 이 사람, 아무리 봐도 행동거지나 말투가 이상하다. 생긴 것만 보면 케르츠와 거의 동갑, 그러니까 2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데 꼭 어린아이처럼 군다.
아니, 따지고 보면 어린아이도 이 사람보다는 나을 거다. 적어도 어린아이에게는 자기 의지라는 게 있으니까. 하지만 이 사람은 그나마도 없다는 듯 굴어서…….
‘혹시 백치인가? 아니면, 신전에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키운 건가? 용사로서의 사명을 다하게끔 하기 위해서?’
내가 이런저런 가설을 세우는 동안 용사는 내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래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으니 힘들어서 내 손을 잡은 거라고 생각했는데 딱히 그런 이유 같지는 않았다. 용사가 그대로 나를 이끌고 모닥불을 향해 걸었기 때문이다. 마치 내 손을 잡는 일이 즐겁기라도 한 듯한 표정으로. 대체 이 녀석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깨어났어? 생각보다 일찍 왔군.”
“누군가가 정화된 영혼을 다 모아 줬어요. 제가 할 일이 줄어들어서 일찍 올 수 있었어요.”
“그 인형이 도와준 건가. ……잠깐. 인형 녀석, 또 지난번처럼 도둑질이라도 한 거 아니야? 그 인형 이리 내. 주머니 확인 좀 하자.”
인형은 실제로 삥땅을 치지도 않았으면서 하넨의 손아귀에 잡히지 않기 위해 도망을 쳤고, 하넨은 인형을 붙잡기 위해 광장 안을 부지런히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마법사는 체력과 달리기 속도가 형편없었고 인형은 생각 이상으로 순발력이 좋아서 의외로 좋은 구경거리가 되었다. 고기를 굽던 케르츠는 그 우스꽝스러운 추격전을 구경하며 피식거리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상인 씨, 당신이 벌여 놓은 좌판에 소금이 있던데.”
“아, 그거요? 어느 모험가의 시체에서 발견했어요. 다른 건 다 썩었는데 소금은 안 썩더라고요.”
“그거나 좀 삽시다. 영혼 다섯 개 줄게요.”
“생각보다 후하게 주시네요. 그래도 괜찮아요?”
“뭐, 소금도 일종의 생필품이니 어쩔 수 없지요. 마침 소금이 다 떨어져서 며칠째 밋밋한 고기만 씹고 있었다고요. 마법사님이 알면 쓸데없는 데에 영혼을 낭비했다고 잔소리를 듣겠지만, 정작 음식이 맛없다고 가장 열심히 투덜거리는 사람은 마법사님이니 아마 괜찮을 겁니다.”
하긴, 소금 중요하지. 나는 미각은 둘째 치고 식욕 자체가 없어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지만, 이 사람들은 건강을 위해서라도 어느 정도의 소금을 섭취해 줘야 하니까. 맛있는 식사는 정신 건강에도 꽤 도움이 될 테고.
‘어, 잠깐만. 그러고 보니…….’
좌판에 돌아가서 소금 통을 들고 오던 나는 문득 묘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이 사람들은 모든 감각이 멀쩡하잖아. 내가 고작 몇 분 맡고 질색을 했던 피 냄새도 계속 맡고 있을 테고, 잘 때는 바닥에 누워 잘 테니 아무리 모포를 깔고 자도 한기가 바닥에서 올라올 텐데…….
“자, 여기요. 그런데 케르츠 씨.”
“네?”
“이렇게 피 냄새가 진동하는 곳에서 용케 식사를 하시네요.”
“하하, 우스운 소리 다 하시네요.”
케르츠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고기에 소금을 뿌렸다. 노릇노릇하게 구워진 고기를 자른 그는 제일 먼저 용사에게 고기를 먹여 주었고, 용사는 당연하다는 듯 고기를 받아 우물우물 씹었다.
“저는 도살자라서 피 냄새에 익숙해요. 아마 피 냄새의 절반쯤은 저에게서 날 걸요.”
케르츠는 농담처럼 말하며 웃었지만 아무리 봐도 농담 같지가 않았다. 게다가 저 사람이 말하는 ‘도살자’라는 게 돼지나 소 따위를 잡는 도살자인 것 같지도 않고. 예전에 인형이 준 정보에 따르면, 이미 바깥 세계에서 돼지나 소 따위의 평범한 가축은 거의 씨가 마른 모양이니까.
나는 모닥불 옆에 놓인 쇠톱에 흘끔 시선을 보냈다. 쇠톱 표면은 아직도 피가 마르지 않아 번들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