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2화
저문 햇살 대신 들어찬 달빛이 창백한 피부 위로 은은하게 내려앉았다.
가지런히 내리깐 속눈썹 너머 자리한 황금빛 눈동자는 오롯이 나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비현실적이고 아름다운 광경에, 나는 순간 하던 생각을 멈추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저렇게 생길 수 있지?’
루스의 아름다움이 빛 아래에 선 천사의 모습과 비슷하다면, 어르신의 아름다움은 그야말로 깊은 심연에서 피어난 진주 같았다.
세상에 홀로 빛나는 것처럼, 모든 이목을 집중시키는 존재.
누구든 홀릴 수밖에 없고, 그 강인한 아름다움에 복종할 수밖에 없는…….
“네 그 쓸데없는 고집만 아니었으면 진즉 레어에 가둬 놓고 보듬었으련만.”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어르신의 중얼거림이 끝나기 무섭게,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번쩍 뜨고 말했다.
사람 정신 번쩍 들게 하네, 진짜.
“마음이 그렇다는 말 아니냐. 게다가 내 진정 그리 마음먹으면 네가 날 싫어할 테고.”
“당연하죠.”
“그리고 난 네게 미움받고 싶지 않으니, 애초에 내가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지.”
그가 기다랗고 유려한 손가락을 뻗어 내 뺨에 닿을 듯 말 듯 가져다 댔다.
자신이 가장 애지중지하는 보석을 어루만지는 손길과도 비슷했다.
나는 뺨에 와 닿은 차가운 손가락에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가, 곧 큼큼 헛기침을 내뱉었다.
“플라멘이 들으면 당장 역정 낼 소리 하시네.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돼요.”
“내게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말도 있단 말이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저한테 진다고 말한단 말이에요?”
“그거랑 이거랑은 다른 문제지. 아쉬운 쪽이 지는 거 아니겠느냐.”
그건 맞지만, 어르신이 그렇게 말하니까 조금 어색하네.
나는 여전히 나만 뚫어지게 바라보는 어르신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아까 했던 말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남이 했다면 당장 ‘이 사람 나 좋아하나?’라고 생각하게 할 만큼 노골적이고 다정한 발언들이라서.
“솔직히 말해 보세요, 어르신. 솔직히 평생 저랑 살고 싶으시죠?”
하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어.
저건 플러팅이 아니라, 오랜만에 만난 손녀를 보내고 싶지 않아 하는 할아버지의 마음인 거지.
이내 다시 그를 바라보며 물어보려니, 어르신이 흐응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기울였다.
“네 무슨 대답을 바라는지 모르겠으나, 드래곤은 평생이니 영원이니 같은 단어는 잘 꺼내지 않는다. 그게 어떤 무게를 지니고 있는지 가장 잘 아는 족속이니까.”
“…….”
“하물며 같은 시간을 살 수 없는 상대에게는 더더욱 그런 말을 꺼내지 않지.”
나는 순간 당황해 멀뚱히 두 눈을 깜빡였다.
그냥 손주 재롱 좋아하는 할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말한 건데, 저렇게 누구 하나 매혹할 듯 굴 일인가.
“하나 그 상대가 너라면 한 번은 묻고 싶구나.”
곧 어르신이 흑비단 같은 머리카락을 드리우며 부드럽게 눈꼬리를 휘었다.
그의 눈동자는 어둠 속에서 피어오르는 여명처럼 황홀하게 빛나고 있었다.
“내 나의 영겁을 모조리 바칠 테니, 너의 순간을 내게 주지 않을 테냐?”
언제나처럼 낮고, 나른하고, 그래서 더 신비로운 목소리가 고요한 회랑을 휘돌 듯 맴돈다.
감히 세월을 헤아릴 수 없는 깊은 눈동자는 늘 그렇듯 여전히 반쯤 장난스럽게 접혀 있었다.
나는 감히 시선을 피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가만히 그를 들여다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서 툭 말을 내뱉었다.
“그런다고 레어에 안 박혀 있어요.”
“하여간 눈치 하나는 빠른 것 같으니라고.”
동시에 어르신이 김샌다는 것처럼 입술을 한 번 삐죽였다.
나는 그제야 막힌 숨을 풀어내고서 혀 아래 고여 있던 침을 목구멍 너머로 꿀꺽 삼켰다.
와, 하마터면 얼굴에 홀릴 뻔.
“여담이지만 확실히 어르신이 곁에 있으면 제가 얼굴에 홀릴 일은 적어질 것 같아요.”
“그 허여멀건 녀석한테 홀린 녀석이 할 말은 아닌 것 같구나.”
“아니, 그건…….”
솔직히 얼굴에 홀렸다기보다는, 그 분위기랑 마음이랑 목소리랑 아무튼 이것저것 합쳐진 결과인 것 같은데.
괜히 찔리는 마음에 그를 따라 입술을 씰룩이자, 어르신이 내 머리 위에 손을 덮으며 그대로 쑤석이기 시작했다.
“어쨌든, 내 말을 흘려듣지 말거라. 가장 우선해야 할 건 언제까지나 네 몸이고 네 영혼이야.”
“네, 유념할게요.”
“정 모르겠다 싶으면 그 심장의 주인이 누구인지 떠올리고.”
“넵, 진짜 유념할게요.”
잊지 말자.
내가 망가지면 나만 죽는 게 아니고 어르신도 같이 나락 가는 거다.
‘어르신은 차라리 그걸 바라는 것 같지만.’
쿵쿵 달음박질하는 심장의 박동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또 한 번 나직하게 웃음을 흘렸다.
“대답이라도 못 하면.”
“제가 지금까진 조금 미덥지 못한 행보를 보인 건 맞지만, 솔직히 앞으로도 속을 썩일 것 같지만? 별개로 어르신 말씀은 언제나 마음 깊이 새기고 있어요.”
툭 까고 말해서 앞으로 몸을 사리겠다는 약속은 할 수 없었다.
사람들의 꿈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맹세도, 위급한 순간에 뛰어들지 않겠다는 말도 꺼낼 수 없었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이라는 걸 알고 있으니까.
‘그래도 한 가지는 지킬 수 있어.’
정말로 위급한 순간이 오면, 그때에는 이 심장의 주인이 피해를 보지 않게 할 것.
심장을 포기하더라도, 끝내 내가 다시 한번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그게 저를 살려 주고 길러 주신 어르신에 대한 예의니까요.”
이걸 말해 봤자 당장 꿀밤밖에 더 안 맞겠지만.
속마음을 숨기고 번듯하게 입꼬리를 빼 당기려니, 어르신이 슬쩍 미간을 좁히고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나는 모든 연기력을 동원해 아무렇지 않게 미소 짓다가, 이내 길게 기지개를 켰다.
“아무튼, 아까 하던 얘기로 돌아와서. 저는 클레어의 상태를 한번 살피고 돌아갈게요. 어르신은 먼저 쉬고 계세요.”
내가 보러 안 가면 또 큰 무례를 저지른 게 아닐까 하면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게 뻔하니까.
“내 쉴 곳이 어디 있다고.”
내 말에 어르신이 한 번 코웃음을 치고서 대답했다.
“이곳의 냄새는 별로지만, 별개로 마력은 내게도 퍽 이로운 것이니. 나는 마력을 좀 보충하고 오마.”
“앗, 그런 거면 같이 가도 되지 않나요? 금방 나올 텐데.”
“되었다. 손님이 몽땅 사라진 걸 알면 인간들이 놀라지 않겠느냐.”
그러고서 그는 귀찮다는 듯 몇 번 손을 내젓더니, 이내 흔적도 없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는 그가 떠난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곧 뒷머리를 긁적이며 빙글 뒤돌았다.
클레어나 보살피러 가야지.
* * *
“이건 마정석 수출국 및 수출량을 정리한 보고서고, 이건 리넥스 내 마정석을 제련할 수 있는 사제들의 명단입니다. 그리고 이 서류는 관련 책임자들의 명단이고요.”
이튿날 아침, 산뜻한 얼굴로 나를 반긴 성황이 내가 앉을 틈도 없이 서류를 내밀었다.
나는 엉거주춤하게 그가 내민 서류들을 받아 들고서 감사 인사를 건넸다.
“이렇게 꼼꼼하게 챙겨 주시다니, 감사해요. 반발이 심했을 텐데…….”
“하하, 반발이야 적당한 당근과 채찍으로 누르면 그만이죠. 제게는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내 말에 성황이 새삼스럽지도 않다는 듯 눈매를 접어 웃으며 말했다.
저렇게 온화하고 상냥한 얼굴로 저런 발언을 한다니.
‘진짜 적이 아니라서 다행이다.’
만약 리넥스가 이쪽을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아마 꽤 애먹지 않았을까.
친구라서 다행이다. 장하다, 과거의 미에나!
“어라.”
그가 건넨 서류를 일차적으로 빠르게 훑고 있으려니, 곧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책임자 명단에 이반도 있네요.”
“저번에도 말했다시피, 이반은 여러모로 능력이 출중한 아이여서요. 이것 말고도 맡은 일이 몇 개 더 있습니다.”
“어린애를 너무 혹사하는 것도 좋지 않아요, 성하.”
“당연히 옳은 말임을 알고 있습니다만, 레이디에게 들으니 감회가 새롭군요.”
달리 말하자면, 너도 이렇게 일이 많은데 남 걱정할 때냐는 소리였다.
걱정인지 핀잔인지 알 수 없는 성황의 말에, 나는 멋쩍게 웃음을 흘리고서 화제를 돌렸다.
“우선 주신 자료를 토대로 살펴볼 테지만, 리넥스 내에, 그것도 신전 안에 끝없는 밤의 병을 퍼뜨리는 자가 있을지도 몰라요.”
“…….”
“그럴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정말로 혹시라도 신전 깊숙이에 그 배후가 숨어 있다면.”
그래서 리넥스에 큰 타격이 오게 된다면.
“그때도 성하께서는 망설임 없이 저를 도와주실 수 있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