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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 필요하신가요? (151)화 (151/154)

제151화

“누, 누나?”

대신전에서 듣기에는 퍽 낯설기 그지없는 호칭에, 가장 먼저 클레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곧바로 두 손으로 입을 가로막고 눈치를 살피는 걸 보면, 아무래도 충동적인 중얼거림인 듯싶었다.

너도 놀랐니, 나도 놀랐단다.

“이반.”

결국 성황이 점잖은 목소리로 이반을 불렀다.

그러자 이반이 그제야 제 무례를 깨달은 듯 허둥지둥하며 손사래를 쳤다.

“앗, 죄송합니다. 다시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분을 만나니 반가운 마음에 그만…….”

“저도 괜찮아요, 성하. 이런 호칭은 상당히 오랜만이라 조금 놀랐을 뿐인걸요.”

그도 그럴 것이, 평소에 누가 나를 누나라고 부르겠니.

나는 다시금 시선을 올려 내 앞에 선 청년을 바라보았다.

“잘 지냈니, 이반?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많이 자랐죠.”

“응, 그렇네. 하마터면 못 알아볼 뻔했어.”

특유의 푸른 눈 덕분에 바로 생각나기는 했지만.

내 말에 이반이 순하게 눈매를 접어 웃었다. 그에 따라 살짝 찌푸려지는 눈썹이, 영락없는 소년의 미소였다.

이렇게 어린애가 벌써 대사제라니.

“그런데 어떻게 이반에 대한 기억은 그대로 남아 있는 건가요?”

새삼 세월의 흐름을 체감하고 있는 사이, 성황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그의 눈동자는 여전히 자애로운 빛을 띠고 있었지만, 온유한 호기심 이면에는 제법 날카로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나를 의심하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게, 저도 잘 모르겠어요.”

그렇게 물어봤자 저는 아는 게 없답니다.

나는 입술 끝을 아래로 쭉 늘어트리고서 입을 열었다.

“제 추측으로는 죽은 육체에 그나마 남아 있던 영혼, 그 안에 든 기억이 아닐까 싶거든요. 실제로 어르신과의 기억도 나름대로 남아 있었고.”

“기억할 필요가 없으니 기억에 없는 거겠지.”

“어르신, 제발 좀.”

꼭 이렇게 갑자기 초를 친다니까.

“그 기억 속에 저도 있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요. 뭐, 다들 그렇게 생각하겠죠.”

다행히 어르신의 발언은 깔끔히 넘기기로 한 건지, 성황이 자못 아쉬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반은 뭐가 그렇게 즐거운지 연신 방긋방긋 웃는 낯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루스랑 비슷한데, 어쩐지 뭔가 좀…….’

나는 괜히 그의 시선을 피해 성황을 마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게 사실, 끝없는 밤의 병에 걸린 주변인의 꿈에 들어가 꽃을 뽑으면 기억이 돌아오는 것 같기는 하거든요. 물론 사례가 하나밖에 없어서 일반화할 수는 없지만…….”

“꿈에 직접 들어갈 수 있다고요?”

동시에 이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물었다. 클레어 역시 이반과 비슷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참, 내 능력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 없었지. 근래엔 다들 내 능력을 아는 사람들만 만나다 보니 그만.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직접 들으니 더 신기하군요.”

성황 역시 흥미로운 눈빛을 띤 채 자그맣게 혼잣말했다.

나는 내 말실수를 수습하려다, 결국 길게 한숨을 내쉬고 시인했다.

“비밀로 해 주세요. 주목받는 건 별로 즐기지 않는 편이라.”

“물론이죠. 원한다면 발설 금지 계약 마법도 발동할 수 있어요. 발설 시 혀를 자르는 조건으로…….”

“그건 참아 주세요, 성하.”

우리가 신뢰가 없나요, 뭐가 없나요. 굳이 사람 혀를 잘라야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저에 대한 기억은 모두 간직하고 계신 건가요, 누님?”

상상만 해도 끔찍한 광경에 눈을 질끈 감으려니, 이반이 곧 화제를 돌렸다.

“꼭 그런 건 또 아니야. 내가 너를 도와줬다는 사실이랑, 네 얼굴은 뚜렷하게 기억나지만…….”

이외의 것들은 안개가 낀 것처럼 또 뿌옇게 흐려서.

“할아버지에 관한 기억은 없는 거군요.”

내 말에 이반의 낯빛에 순간 옅은 그늘이 스몄다.

“으응, 그렇지.”

저 표정을 보니 내 탓도 아닌데 괜히 죄책감 드는 기분인걸.

나는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어쨌든 다시 만나서 정말 기뻐요.”

다행히 이반도 이 이야기는 더 꺼내고 싶지 않았는지, 그가 곧 언제 그랬냐는 듯 멀끔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그제야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날, 누님께서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새 삶을 얻지 못했을 거예요.”

그사이 이반은 평소처럼 방긋 웃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새 누나에서 누님으로 호칭이 바뀌었군.

“그때 도와줬던 거?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는데, 뭐.”

그리고 제대로 기억나지는 않지만, 그때 아마 나를 도와줬던 사람이 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마 지크프리트 씨려나.’

그 정도로 험악한 얼굴이면 애들이 싸우다가도 냅다 도망갈 테니.

“그렇지 않아요. 그리고……, 제게는 굉장히 의미가 컸거든요.”

내 말에 이반이 단호히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제게 그렇게 손을 내밀어 준 사람도, 연고를 준 사람도. 제 조부를 제외하고는 누님이 처음이었어요.”

“…….”

“그래서 더 기뻐요. 다시 돌아오셔서, 저를 기억해 주셔서.”

말을 마친 이반이 입꼬리를 반쯤 빼 당겨 웃었다. 나는 그의 푸른 눈동자를 한참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머리 위에 포갰다.

“힘들었겠네.”

마을 아이들에게 괴롭힘당하고, 조부를 잃고.

그렇게 리넥스에 건너올 때까지, 그리고 이곳에 머무는 동안에도.

혼자 얼마나 힘들었을까.

“정말로…….”

나보다 한 뼘은 더 큰 이반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으려니, 곧 그가 내 쪽으로 슬쩍 상체를 굽히며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곧바로 어르신이 내 손을 잡아챈 까닭에 쓰다듬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쓸데없이 무른 것.”

이내 그가 잡은 손을 내려놓으며 핀잔하듯 말을 내뱉었다.

성황은 순식간에 얼어붙은 분위기를 풀어 보려는 듯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사이에 끼어들었다.

“레이디에게 구원받은 자들이 참 많군요. 이러니 사람들에게 성녀로 추앙받는 거겠죠.”

“예?”

아니, 그건 또 어떻게 아셨대?

나는 하던 생각을 모두 멈추고서 입을 떡 벌리고 성황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성황이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검은 머리카락에 녹색 눈을 가진 여자가 끝없는 밤의 병에서 사람들을 구원한다는 이야기는 이미 상당히 퍼졌는걸요.”

“으…….”

“처음에는 누구인가 싶었는데, 오늘 이렇게 만나니 알 수 있었어요. 조금 전 당신의 발언으로 확신하게 됐고요.”

“제 입이 방정이네요, 진짜.”

뭐, 성황이라면 내가 말하지 않고도 이미 알았을 것 같지만.

내 말에 그가 종소리처럼 맑은 웃음소리를 퍼뜨렸다.

그러고서 그는 창밖을 흘긋 바라보더니, 손뼉을 한 번 쳤다.

“해가 벌써 이렇게나 저물었군요. 한담은 이쯤 하고, 지금은 우선 석찬을 즐기는 게 어떨까요?”

“앗, 좋아요.”

안 그래도 여기 와서부터 제대로 먹은 게 없어서 배고팠는데.

나는 고민할 겨를 없이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반 역시 별다른 말 없이 얌전히 수긍했다.

여전히 시선은 내게 향한 채였다.

그 시선을 자꾸 마주하려니…….

‘어쩐지 집에 두고 온 강아지가 생각나는군.’

‘루’로 시작해서 ‘스’로 끝나는, 비 맞은 강아지 한 마리 말이야.

물론 집에 두고 온 것도 아니고, 진짜 강아지도 아니지만.

나는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수려한 얼굴을 떠올렸다가, 이내 고개를 홰홰 저었다.

지금은 우선 밥부터 먹자.

조사도 밥심이다.

* * *

“정찬을……, 진짜 작정하고 준비한 것 같아요.”

무슨 코스요리가 끝나질 않아?

그렇게 한바탕 식사가 끝난 후, 나는 든든하게 찬 배를 통통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어르신이 코웃음을 치며 손가락 끝으로 내 볼을 콕 찔렀다.

“이제 보니 새끼 돼지 한 마리가 여기 있구나. 와이번도 너보다는 조금 먹을 테다.”

“절 위해 준비했다는데 어떻게 거절해요.”

“그런 것치고는 그 인간 여자는 적당히 먹고 멈추는 것 같다만.”

“클레어는 더 먹으면 정말로 체할 것 같다고 해서 그런 거고.”

실제로도 안색이 새파래지는 바람에 양해를 구하고 먼저 돌아갔잖아.

‘이따 상태 좀 살피러 가 볼까.’

이미 의사를 보냈을 것 같긴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또, 또.”

“아얏.”

바로 그 순간, 어르신이 이번에는 손톱을 세우고서 내 이마를 툭 두드렸다.

나는 곧바로 두 손으로 이마를 감싸 쥐고서 그를 바라보았다.

“네 몸을 우선시하래도, 끝까지 남만 먼저 생각하지. 이 아둔한 것아.”

“아니, 하지만 걱정되는 걸 어떡해요?”

“그런 주제에 네 정녕 내 걱정은 안 하느냐?”

곧이어 그가 이마를 두드리던 손을 옆으로 틀어, 내 머리카락을 움켜쥐고는 말을 이었다.

“내 계약자는 참 무심하기도 하지.”

“…….”

“남들을 생각하는 만큼 한 번이라도 내 생각을 해 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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