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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 필요하신가요? (150)화 (150/154)

제150화

“아, 미안해요.”

곧바로 성황이 눈썹 끝을 누그러뜨리며 사과를 건넸다. 나는 괜찮다는 듯 생긋 미소 지었다.

“갑작스레 찾아뵌 제 잘못인걸요. 신경 쓰지 마세요. 자리 비켜 드릴까요?”

아무리 친우라도 국가적 기밀을 들려주고 싶지는 않을 것 같은데.

살짝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하자, 클레어 역시 재빠르게 자리를 벗어날 준비를 했다.

성황은 이번에도 부드러운 웃음을 흘리고서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손님을 모시는 시간에는 방해하지 말라고 말했던 건 저인걸요.”

“그런데도 갑자기 찾아올 정도면 꽤 급한 일일 텐데…….”

“그러니 더더욱 제가 나가 봐야죠. 잠시 집무실에서 이야기하고 올게요.”

“아니, 그치만…….”

아무리 그래도 성황이 자리를 떠나는 게 맞아?

여전히 엉거주춤 선 상태로 입을 벙긋거리고 있으려니, 어르신이 내 팔을 잡아당기며 담담하게 말했다.

“왜 자꾸 스스로 작아지려 하느냐? 정신 사나우니 얌전히 앉아 있거라.”

“어르신.”

“너는 저치의 친우고, 놈이 인정하는 이 나의 계약자고, 나아가 이 일의 책임자가 아니더냐.”

“…….”

“때로는 네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이용하는 것도 중요하단다.”

오만하게 빛나는 황금색 눈동자가 온전히 나를 담아냈다.

나는 반사적으로 침을 꿀꺽 삼키고서 그의 말을 곱씹었다.

하긴, 내가 눈치를 볼 이유는 사실 없기는 하지.

어찌 됐든 성황이 나를 초대했고, 드래곤의 계약자……는 지금 나올 이야기는 아니고.

아무튼 비공식적일지언정 나는 황제의 사신이라고 볼 수 있었다.

‘내 태도가 곧 루스의 태도.’

유스틴이었다면 이곳에서도 자신을 낮추지 않고 자신을 성황과 동등한 입장으로 여겼겠지.

“게다가 넌 나중에 그 녀석과 혼인이라도 하면―”

“어르신!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 드래곤이 잘나가다가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적어도 여기서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지고하신 분의 말씀이 맞습니다. 스스로 낮추려 들지 마세요.”

황급히 어르신의 말을 막으려니, 성황이 여전히 웃는 낯으로 말을 건넸다.

어쩐지 조금 전과는 달리 눈까지는 전해지지 못한 웃음이었지만.

“그나저나, 방금 그 발언은 조금 이따 자세히 들어 보는 게 좋겠군요.”

곧이어 그가 산뜻하게 마지막 말을 내뱉고서 거침없이 응접실 바깥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여튼 쓸데없는 소리는.”

나는 괜히 어르신을 한 번 노려본 후, 고개를 돌려 응접실 바깥 상황을 흘긋 바라보았다.

성황을 불러낸 이는 검은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정돈한, 퍽 헌앙한 남자였다.

어쩐지 앳된 면이 돋보이는 걸 보면, 성인식도 갓 치른 것처럼 보이는데.

‘젊은 사람이 고생하네…….’

분명 윗사람들이 미루고 미뤄서 가장 말단을 보낸 거겠지.

괜히 안쓰러운 마음에 위로의 눈빛을 보내려니, 줄곧 성황에게 닿아 있던 눈동자가 한순간 내게 향했다.

나는 그 시선을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뭔가 익숙한데.’

멀리서도 눈에 띄는, 루스만큼이나 깊고 푸른 눈동자.

언젠가 마주친 적 있는 것 같은…….

“아, 아?”

잠깐만, 나 정말 기억나는 것 같아.

나는 일순 피어오르는 기억에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이반?”

“흐음?”

작게 중얼거리자, 어르신이 흥미롭다는 듯 비음을 흘렸다.

“나를 제외하고도 네가 잃지 않은 기억도 있나 보구나.”

“그러게요, 이상하네.”

내가 생각해도 진짜 이상한데, 쟤 정말로 이반 맞는 것 같아.

나는 어느새 사라진 두 사람의 빈자리를 바라보며 멍하니 두 눈을 깜빡였다.

유스틴에 대한 기억처럼, 이것저것 조각나고 잘려 정확하게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거 하나는 기억해.’

카타르타 지역에서 만난, 아이들에게 괴롭힘당하던 자그마한 소년.

“강렬한 기억이었나?”

아니면 이 육체에 남은 영혼 중에 이반에 대한 기억이 있던 걸지도 모르겠네.

잠깐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이내 숨을 푹 내쉬고서 소파에 몸을 기댔다.

‘나중에 대화 나눠 봐야지.’

어쨌든 지금은 과거 안면이 있던 사람을 만나러 온 게 아니니까.

* * *

처음의 걱정과는 달리, 성황과의 대화는 퍽 편안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내가 마음을 좀 내려놓은 탓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성황이 나를 너무 편하게 대해 준 덕분이었다.

별개로 영양가 있는 정보를 얻어 내지는 못했지만.

“이곳에 며칠 더 머무르다가 간다고 했죠?”

“앗, 네. 성국에서 관리하는 마정석 외에도 불법 수출되고 있는 마정석이 있을 수 있으니까요.”

“마정석이 제련된 상태를 봐서는 그럴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그렇다고 가능성을 아예 닫아 버려서는 안 되겠죠.”

“세상에는 잘못된 길로 빠져든 전문가가 많으니까요.”

“어쨌든, 저로서는 레이디가 이곳에 더 머무른다니 환영할 일이에요. 머무는 동안 불편한 점이 있다면 언제든 말해 주세요.”

곧이어 성황이 곱게 웃으며 말했다. 그야말로 꽃 같은 미소였다.

‘이 예쁜 얼굴로, 정말로 그 나이가 넘었단 말이지…….’

나는 대화 막바지에 들은 그의 나이를 떠올리고서 파르르 속눈썹을 떨었다.

불로장생을 연구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당장 성황에게 들러붙지 않았을까.

드래곤도 아닌 인간이, 이렇게 늙지도 않고 20대의 외관을 유지할 수 있다니.

“아, 그러고 보니.”

나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하고 있으려니, 성황이 곧 작게 감탄사를 내뱉으며 입을 열었다.

“일전에 응접실에 찾아왔던 대사제를 알고 있던 눈치던데요.”

“앗, 그게 티가 났나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성황을 바라보았다.

물론 처음에 깜짝 놀라서 입 밖으로 소리 내 중얼거리기는 했지만, 들릴 정도는 아니었는데.

“제가 귀가 좋은 편이라.”

곧이어 그가 사르르 눈꼬리를 휘어 웃었다.

“원한다면 그를 만나게 해 줄 수 있어요. 이반도 당신을 알아보는 눈치더라고요.”

“앗, 그래요?”

심지어 나는 머리 색도, 눈 색도 바뀌었는데도?

“제 친우로 소문난 사람이 방문했으니, 알 수밖에 없었겠죠. 적어도 대신전 내에서는 당신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을 정도니까요.”

“오, 그래요…….”

그건 조금 부끄러운데.

어쩐지 오는 내내 아닌 듯하면서도 계속 나를 쳐다보더라.

괜스레 솟아오르는 부끄러움에 입술을 오므리는 사이, 성황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이반은 다른 아이들에 비해 신관이 늦게 된 경우지만, 그만큼 잠재력이 뛰어난 아이예요. 그 나이에 벌써 대사제가 되었을 정도로요.”

“오…….”

“일각에서는 저를 이은 차기 성황 후보로 생각하고 있을 정도고요.”

이야기를 꺼내는 그의 수국 같은 눈동자는 자부심과 애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보니 영락없이 손자 자랑하기 바쁜 할아버지군.

“이반을 많이 아끼시나 봐요.”

“아무래도 눈이 갈 수밖에 없죠. 저와 상황이 꽤 비슷했으니까요.”

이어 그가 아득한 기억을 더듬듯이 허공에 시선을 두며 말했다.

“이반은 친조부가 사망하고 난 뒤 리넥스로 건너왔어요. 출신지가 다른 탓에 처음에는 시기와 질투도 많이 받았죠.”

물론 그 원인에는 특출난 재능도 있었더라며, 그가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달리 말하자면 시기와 질투를 받은 경험 역시 성황이 직접 겪었던 상황인가 보군.

“어느 날 그가 말하더군요. 자신은 당신에게 받은 은혜가 있다고.”

“…….”

“그것마저도 닮았어요.”

내내 허공을 응시하던 시선이 내게로 향했다.

나는 내 모습을 올곧게 담아내는 그의 옅푸른 눈동자를 바라보다가, 결국 멋쩍게 미소 지었다.

“과거의 저는 참 멋진 사람이었던 것 같아요.”

“지금의 당신도 그래요. 모두를 위해 이렇게 발 벗고 나서고 있잖아요.”

“제 원래 성격이 그런걸요. 능력이 있다면 누구든 이렇게 나섰을 거예요.”

“글쎄요, 미에나. 남을 위해 이렇게까지 나설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

“모두를 굽어보는 입장에서 말하기 조금 그렇지만, 이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러니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요.

말을 마친 성황이 나를 따라 맑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서 그는 누군가를 기다리듯 벽에 걸린 괘종시계를 바라보았다가.

“아, 왔군요.”

곧 응접실의 문을 바라보며 또 한 번 눈을 휘어 웃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그의 시선 끝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그 너머에는 어쩌면 당연하게도, 이반이 서 있었다.

“당신이라면 거절하지 않을 것 같아, 미리 불러 뒀거든요. 들어오렴, 이반.”

곧이어 그가 노래하듯 낭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내 앞으로 뚜벅뚜벅 다가오는 남자를 바라보며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내 앞에 멈춰 선 청년이, 짙푸른 눈동자를 반달처럼 휘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누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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