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9화
“문제요?”
우리 이제 막 리넥스에 왔는데요?
나는 반사적으로 소리를 줄이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우리의 대화를 필사적으로 모르는 척하는 건지, 혹은 정말로 들리지 않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몸에 이상이 생긴 건가요? 그렇다면 당장 의원을―”
“아뇨, 그런 건 아니고…….”
클레어 역시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내 귀에만 들릴 정도로 소곤소곤 입을 열었다.
“이 지반에 스민 마력이 너무 강대해서, 다른 사람들의 마력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아요.”
“오.”
나는 곧장 입술을 오므렸다.
그건 조금 큰 문제인데.
‘역시 성국은 성국이라 이건가?’
나는 그냥 신의 이름을 빌렸을 뿐인 종교 집단인 줄로만 알았는데.
“그야 당연한 이야기지 않으냐.”
바로 그때, 뒤쪽에서 따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하게도 어르신의 음성이었다.
“이곳은 본디 너희 인간들이 ‘신’이라 불렀던 존재들이 오랫동안 버티고 선 곳. 그러니 마력이 스미지 않았을 리 없지.”
“신이라 불렸던 존재…….”
물론 어르신은 사실을 말한 거겠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이곳 사람들 앞에서 하기에는 조금 불경한 발언인 것 같기도 하고.
“어쨌든 그럼 저희의 계획 하나는 어그러진 거나 다름없네요.”
한 명은 아예 마력을 감지하는 방법 자체를 모르고, 가장 능력이 좋아야 할 드래곤은 하필이면 그 마력을 추적할 수 없는 상태니.
“죄, 죄송해요…….”
내 말에 클레어가 불쑥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클레어가 미안해할 부분이 아니죠, 이건. 잘못하지 않은 일에는 사과하는 거 아니에요.”
예전에도 누군가한테 이런 말을 해 준 것 같은데.
뿌연 안개처럼 불투명한 과거를 한쪽으로 밀어 넣으며, 나는 클레어에게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범인이 꼭 리넥스에 있으리란 보장도 없고, 아직 저희가 할 일은 많이 남아 있으니까요.”
“미에나…….”
“힘내 봐요, 우리.”
리넥스에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진 빠져 있으면 안 되잖아.
이번에는 주먹을 불끈 쥐고 말하니, 곧 클레어 역시 손을 말아쥐고서 결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시금 해맑게 미소 짓고서 언제 그랬냐는 듯 자연스럽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음, 좋아. 여전히 이쪽 대화는 들리지도 않는 것처럼 구는군. 그래 봤자 나중에 성황한테 다 보고 올릴 테지만.
‘성황이라.’
듣기로는 역대 최연소 성황이라고 했지만, 어찌 됐든 나와는 나이 차가 많이 날 텐데.
‘그런데도 나를 꼬박꼬박 친우라고 불러 주고 이렇게 귀빈 대접까지 해 주고 있단 말이지.’
대체 과거에 나와 무슨 사연이 있었길래, 타국의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해 주는 걸까.
아니면 내가 딸 같고 손주 같았나? 충분히 가능성 있어.
“성하, 손님을 모셔 왔습니다.”
이런저런 생각에 빠진 사이, 곧 우리를 안내하며 앞장서 걷던 사제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나는 하던 생각을 모두 지워 내고서 꿀꺽 침을 삼켰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최소 중년 이상의 남성이, 어쩐지 온화한 미소를 짓고서 나를 반겨 줄 것만 같은…….
“들여보내렴.”
하지만 닫힌 문 사이로 들린 목소리는 내 상상과는 사뭇 달랐다.
뒤이어 활짝 열린 문 너머로 마주한 얼굴은…….
“성……, 하?”
순간 사고회로가 멈춘 탓에, 반사적으로 입에서 멍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나는 활짝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
‘엄청 젊잖아.’
기껏해야 나보다 몇 살 더 많아 보이는 얼굴인데. 최연소 성황이라더니, 정말로 갓난아기일 때 취임한 거야?
혹시 내 소꿉친구?
“드디어 다시 만나게 되는군요.”
그사이 성황이 부드럽게 눈꼬리를 휘며 인사를 건넸다.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 생각했던 사람을 이리 마주하니 감회가 아주 새로워요.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
“아, 그, 존귀하신 성황을 뵙나이다.”
나는 그제야 반쯤 정신을 차리고서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동시에 머리 위로 옥구슬이 흘러내리는 것만 같은 청아한 웃음소리가 굴러떨어졌다.
“이미 언질을 받기는 했지만, 정말로 기억을 잃은 게 맞나 보군요.”
“…….”
“그리 긴장할 필요 없어요. 당신은 제게 남은 유일한 친우고, 그런 만큼 당신에게 해가 될 일은 일절 하지 않을 테니까.”
곧이어 곳곳에 흉터가 남은 커다란 손이 내 시야 안으로 불쑥 파고들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어느새 내 앞으로 다가온 성황을 조심스레 마주 바라보았다.
그러자 성황이 자애로운 미소를 띠고서 덧붙여 말했다.
“그럴 수도 없을 테고요.”
푸른 수국 같은 눈동자는 어느새 나를 거쳐 내 뒤에 선 어르신에게 향해 있었다.
“그때 마주했던 방어 마법의 주인이시군요. 귀한 분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네놈, 내 아이에게 저주 마법을 걸려 했던 녀석이로구나.”
“저주 마법이라, 그렇게 느끼실 수 있겠군요. 하지만 맹세컨대 레이디에게 해를 끼치고자 했던 건 아닙니다.”
“흥, 그렇지 않고서야 네 녀석이 이 땅에 발을 딛고 서 있을 수 없지.”
이윽고 어르신이 코웃음을 치고서 성큼성큼 응접실 안으로 발을 옮겼다.
나는 그들의 대화를 멀뚱히 경청하다가, 어르신의 손짓에 하는 수 없이 발을 옮겼다.
나한테 저주 마법을 걸려고 했다가 막혔다는 거지? 진짜 친구 맞아?
“첫 만남 때의 이야기예요.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거지만, 친우가 되자는 이야기를 꺼낸 건 레이디고요.”
뒤이어 성황이 한 떨기 꽃처럼 처연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내 표정을 읽은 듯싶었다.
“갑작스럽게 비보를 들었을 땐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제 위치가 성가시다고 느껴지기는 또 처음이더군요.”
이런 자리에 있는 탓에 애도의 뜻을 전하기도 힘들었다며, 그가 가볍게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어디까지나 당신과 이렇게 다시 대화를 나눌 수 있으니 하는 말이지만요.”
“아하하, 하하.”
나 역시 그를 따라 어색하게 웃으며 눈동자를 되록되록 굴렸다.
기억이 없으니 제대로 맞장구도 못 치고, 어색해 죽겠네.
‘와중에 하필이면 상대는 성황이고.’
루스랑은 다른, 뭔가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확 풍겨서 그런가.
부드러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지만 말실수하면 국가 외교가 망하고 전쟁이 날 것 같은…….
어라, 나 이런 생각 예전에도 한 적이 있었나?
“마음 같아서는 온종일 붙잡고 그간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만…….”
이런 내 마음을 눈치챈 건지, 성황이 사람 좋게 미소 지으며 손가락 끝으로 제 턱을 톡톡 두드렸다.
“지금은 이 먼 곳까지 직접 달려와야 했던 소중한 친우의 용건을 먼저 들어 보는 게 좋겠군요.”
“감사합니다.”
역시 나는 일 이야기가 좋아.
나는 냉큼 마주 미소 짓고서 넌지시 말문을 열었다.
“성하께서는 혹시 끝없는 밤의 병에 대해서 알고 계시는지요?”
“최근 솜니움을 중심으로 퍼지고 있는 병 말이죠. 저희 측에서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몇 번 치료 사제를 보내기도 했는데, 별로 효용은 없더군요.”
“이건 병이 아니라 저주에 가까운 형태라서요.”
“저주…….”
“특정한 마력을 접한 사람이 그 마력이 빚어낸 꿈에 갇히는 형식의 저주가 아닐까 하고 추측하고 있어요.”
가진 마력이 많지 않은 사람일수록 더 쉽게 휘말리는 듯하고.
‘그래서 오베론에서도 유스틴만 쓰러졌던 거야.’
모두 함께 점심을 먹었지만, 나와 루스, 그리고 지크프리트 씨는 지닌 마력이 강한 편이었으니.
‘잠깐만, 그런데 지크프리트 씨도 옛날에…….’
뭔가, 유스틴과 비슷한 일이…….
“레이디?”
“아.”
뚜렷하게 떠오르지 않는 기억에 끙끙대고 있으려니, 성황이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나를 불렀다.
나는 고개를 휘휘 내젓고서 계속해서 본론을 말했다.
“그리고 최근에 조사를 계속한 끝에, 이 마정석에 담긴 마력이 문제인 것 같다는 결론에 다다랐어요.”
이내 나는 품속에 넣어 두었던 마정석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그러자 성황이 자연스레 그것을 받아 들고서 고개를 기울였다.
“이건……, 저희가 수출하는 마정석이군요. 이런 제련 방식은 이곳에서밖에 쓰지 않으니까요.”
“그 마정석에 담긴 마력이 바로 이 모든 일의 원인이에요.”
자기네 거라고 시원시원하게 인정해서 좋군.
“아시다시피 이곳에서는 타인의 마력을 제대로 감지하기 어려워요. 애초에 저희는 마력 감지에 특화되어 있지도 않고요.”
곧이어 그가 곤란하다는 듯 작게 인상을 찌푸리며 말을 건넸다.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바라고 이곳에 온 건 아니에요. 다만 자칫 리넥스에 곤란할 수 있는 부탁을 하나 하고 싶은데…….”
“마정석을 수출하는 국가나 단체의 목록을 알려 달라는 거겠죠?”
“성하께서 어떻게 저와 친우가 되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네요.”
말이 잘 통해.
내 말에 성황이 내내 찌푸리고 있던 미간을 풀고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물론 민감한 부분이 맞긴 하지만, 이번에는 협조할 수밖에 없겠군요. 끝없는 밤의 병을 두고 볼 수도 없고, 또 하나뿐인 친우의 부탁이기도 하니.”
“헤헤, 감사합니다.”
“명단만으로는 꼬리를 잡기 어려울 듯하니, 이왕이면…….”
곧이어 그가 무언가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성하, 잠시 실례해도 괜찮겠습니까? 급한 보고 사항이 있어…….”
별안간 응접실 바깥에서 낮고 정중한 목소리가 흘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