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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 필요하신가요? (147)화 (147/154)

제147화

“흐음?”

내 말에 어르신이 흥미롭다는 듯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꽤 늦게도 물어보는구나. 나는 네가 죽음에서 깨어나자마자 물어볼 줄 알았건만.”

나른하게 내뱉어지는 목소리에는 묘한 웃음기마저 담겨 있었다.

‘다행히 예민한 부분을 건드린 건 아닌 모양이야.’

혹시라도 말하기 싫은데 괜히 들쑤시는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나는 헤실헤실 미소 지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때는 제가 이걸 물어봐도 되는 건가 싶었거든요. 대답 여하와는 관계없이 제 할 일은 이미 정해져 있기도 하고요.”

“지금 말을 꺼낸 이유는 네게 그 정도 자격은 생겼다고 생각하는 걸 테고.”

“아니, 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솔직히 우리가 알고 지낸 세월이 몇 년인데, 이 정도는 이제 물어봐도 되지 않나 싶습니다만.

괜히 뺀질거리는 웃음을 내건 채 말을 흐리자, 어르신이 나를 따라 슬며시 눈꼬리를 휘었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그래도 네 그 정도 눈치는 있는 줄 알았더니.”

어르신이 언제 그랬냐는 듯 살벌하게 정색하고서 나를 응시했다.

나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아 짧게 딸꾹질을 내뱉었다.

엄마야, 잘못 건드렸나 보다.

“꼬, 꼭 대답을 들으려는 건 아니었어요. 물론 들으면 좋았겠지만? 그렇다고 막 음, 제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듣고 싶지는 않달까?”

하긴, 어르신 기준으로 10년은 드래곤 새끼발톱의 때만큼도 못하긴 하지.

제가 또 감히 인간의 기준에서 생각해 버렸군요.

‘아, 확 그냥 뛰어내릴까.’

어떻게 하면 이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성심을 다해 고민하던 찰나였다.

“……하하.”

어찌할 바 모르고 고개만 푹 숙인 채 눈치를 살피는 사이, 별안간 머리 위에서 나직한 웃음소리가 굴러떨어졌다.

나는 순간 깜짝 놀라 숙였던 고개를 바짝 치들었다.

그러자 어르신이 조금 전과는 비교되지 않는 다정한 표정으로 나른하게 입을 열었다.

“이제는 좀 괜찮아진 줄 알았더니, 네 아직도 나를 못 믿는 모양이구나.”

“어르신?”

“내 너를 해할 리가 있겠느냐. 하물며 네가 내 심장에 검을 꽂더라도, 나는 여전히 너를 아낄 거란다.”

몇 번을 말해 줘도 제대로 알아듣지를 못하니.

곧이어 어르신이 쯧쯧 혀를 차며 손가락 끝으로 내 이마를 가볍게 눌렀다.

나는 그에게 눌린 이마 중앙을 두 손으로 감싸고서 묶인 숨을 천천히 풀어냈다.

그러니까, 저 드래곤이 지금 나를 놀렸다는 거지…….

“그런 걸로 사람 놀리는 거 아니에요, 어르신!”

나는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서 빽 소리를 내질렀다.

“게다가 보통은 신뢰하는 상대라도 그런 식으로 살벌하게 정색하면 당황한다고요! 이건 누군가를 믿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에요.”

게다가 평소에 더 믿고 있던 사람이면 충격은 몇 배가 된단 말이야.

어르신의 장난에 입술을 삐죽이는 사이, 그가 큼지막한 손을 들어 올려 내 머리를 슬슬 쓰다듬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전보다 살짝 낮아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글쎄, 어려운 질문이구나.”

내 질문에 대한 대답.

나는 곧바로 자세를 고쳐 앉고는 그의 말을 경청했다.

그러자 어르신이 또 한 번 느른하게 눈을 휘어 웃었다.

“이제 와 이유를 찾기에는 너무 멀리 와 버린 것 같지 않니. 내가 알던 것들은 이미 스러지고 없는데.”

“그런 것치고는 필사적으로 찾고 계시던데요.”

솔직히 아까 그 표정을 거울로 보여 줬으면 이런 말 못 할 텐데.

“당연하지 않겠니. 그것이야말로 내 모든 고통의 원인인데.”

내 말에 어르신이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말했다.

그러고서 그는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곧 손가락으로 내 머리카락을 가지고 놀며 덧붙여 말했다.

“그 찌꺼기와 더불어 말이다.”

특유의 황금빛 눈동자는 이번에도 옅은 살기를 머금고 있었다.

‘루스가 여기 없어서 다행이다.’

찌꺼기라고 말하는 걸 보면 솜니움의 수호룡 이야기일 텐데.

이곳에 없는 남자를 등 뒤로 숨기는 상상 따위나 하고 있으려니, 어르신이 곧 살기를 거두고서 다시 말을 잇기 시작했다.

“네 이미 나의 진언을 들어 알고 있겠지만, 나는 ‘최후를 지켜보는 자’로서 이곳에 존재한단다.”

“…….”

“나만 홀로 이곳에 묶여 이 지긋지긋한 세계의 말로를 지켜봐야 하지. 그것이 나의 형벌이다.”

나 또한 하던 생각을 멈추고서 다시금 그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형벌이라.’

플라멘이나 어르신이 간간이 말하던 단어였다.

“하나 이 세계가 끝나려면 내가 버텨 온 시간보다 더 오랜 세월이 흘러야 한단다. 설령 이 땅의 모든 것들이 스러진다고 해도, ‘세계’가 끝나는 것은 아니니.”

“…….”

“살아갈 의미가 없는 세계에서 영겁을 버틴다는 게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 유한한 생을 사는 인간은 감히 상상할 수 없을 게다.”

이 세계가 멸망할 때까지 수많은 존재의 삶과 죽음을 방관하는 것. 그날까지 떠나지 못하고 이 세계에 묶여 있는 것.

‘그게 바로 어르신의 형벌…….’

나는 멍하니 어르신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살아온, 앞으로 살아갈 아득한 세월을 가늠하는 듯 그의 눈동자는 하늘을 가득 물들인 어둠 속을 향해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제는 나도 잘 모르겠구나. 최초에 생각했던 이유마저 바래, 잔열처럼 남은 감정만을 붙들어 좇고 있으니.”

여전히 바래지 않은 반짝임을 머금고서.

“이마저도 없으면 내가 살아 있는 이유는 완전히 사라지고 마니, 이렇게라도 강박적으로 굴 수밖에.”

그러니 이 감정이 습관이 되고, 또한 습관이 감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며 어르신이 짧게 덧붙였다.

나는 그런 어르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말고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면 지금은요?”

동시에 허공에 닿아 있던 어르신의 시선이 내게 향했다.

구름 위로 올라온 탓에 쏟아질 듯 넓게 퍼진 은하수와 그 아래의 어르신이 퍽 묘한 분위기를 뿜고 있었다.

인간은 감히 시선조차 마주할 수 없는, 지고한 존재처럼.

그러나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또 한 번 물었다.

“지금도 그런가요?”

어르신은 아무 말 없이 나를 마주 바라보며 천천히 속눈썹을 팔랑였다.

그야말로 신화 같은 풍경이었다.

내게 심긴 드래곤의 심장이 아니었다면, 아마 지금쯤 이 침묵을 감당하지 못하고 시선을 피했겠지.

“묘한 질문이로구나.”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곧이어 어르신이 부드럽게 눈매를 접어 웃고서 정적을 깨트렸다.

“네 지금 내 생의 이유가 되어 주겠다는 것이냐?”

반쯤 접힌 눈동자 사이로 드러난 시선이 어찌나 집요한지, 나는 순간적으로 침을 꼴깍 삼키고서 그제야 눈동자를 굴렸다.

“아니, 뭐, 제가 있을 때만이라도 어르신이 삶의 이유를 찾으면 좋지 않을까 해서요……. 어르신도 제가 있으면 꽤 즐겁다고 하셨고…….”

물론 인간의 생은 짧고, 어르신의 삶은 영원하겠지만.

그래도 이런 식으로 하나씩 삶의 이유를 재조립하다 보면, 언젠가는 삶 자체를 즐길 수 있지 않을까?

“…그래, 너는 누군가 제 생을 함부로 낭비하는 꼴을 보지 못하지.”

이윽고 어르신이 다정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이 깜찍한 것아, 네 드래곤의 집착을 물로 보는 모양이구나.”

“아니, 그건 아닐걸요…….”

어쨌든 어르신이 그 오랜 세월 동안 위그드라실을 찾아다녔던 것만 보더라도 물로 보지는 못할 것 같은데.

“그래도 찾기는 해야 한단다. 어찌 됐든 나의 해묵은 숙원이고, 결국에는 다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 요소니까.”

그사이 어르신이 담담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했다.

“내가 그것을 죽일지 살릴지는 찾은 다음에 정하면 되는 일 아니겠니.”

나는 순간 작게 입을 벌리고서 그를 바라보았다.

아니, 잠깐만.

“설마 세계수를 직접 죽이려고 찾아다녔던 거예요? 그게 가능해?”

게다가 세계수를 찾아 죽이면 이 세상이 망하는 거 아니야?

설마 나는 지금 이 세상을 멸망시키기 위한 여정을 보내고 있던 거?

“실패하더라도 비로소 안식을 맞이하겠지. 나쁘지 않은 일이란다.”

“아니, 그게 어떻게 나쁘지 않은 일이에요!”

어쩐지 자기 심장에 칼을 꽂아도 예뻐해 줄 거라는 소리를 하더라니!

‘물론 어르신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하지만 역시 내 눈앞에서 데스 매치를 벌이는 건 좀 아니지 않나요?

“저, 죄송하지만 어르신. 세계수를 찾는 건 찾는 거지만 역시 세계를 멸망시키려거든 제가 죽은 후에 해 주시면 안 될까요?”

계약은 계약이니 어쩔 수 없다지만, 적어도 내가 보는 앞에서 그런 짓은 안 하셨으면 좋겠는데.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계약이고 뭐고 어르신의 튜닉 자락을 붙잡고 싶지만!

“신기하구나, 너라면 세계를 멸망시키지 말아 달라 부탁할 줄 알았는데.”

“그게 가장 좋기는 하지만요…….”

솔직히 말은 ‘죽은 후에 해 달라’라고 했지만, 역시 나 때문에 세계가 멸망하는 건 조금 많이 그래.

“걱정하지 말거라. 세계수가 쓰러진다고 하여 당장 이곳이 멸망하는 것은 아니니. 별개로 그것이 내린 형벌은 파괴되겠지만.”

“그래 봤자 당장은, 이잖아요.”

“스러지지 않는 게 존재할 것 같으냐. 어찌 됐든 모든 건 마지막을 맞는단다.”

어르신이 이번에는 내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러니 명심하거라, 네가 모두를 구할 수는 없어.”

“…….”

“네 것이 아닌 의무감에 매몰되었다간, 너 자신을 잃는 수가 있다.”

조금 전 세계수를 죽일 거라고 선언했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한없이 다정하고 또 상냥한 모습이었다.

나는 자애롭게 반짝이는 황금빛 눈동자를 응시하다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명심할게요, 어르신.”

* * *

그로부터 며칠 후.

유스틴으로부터 리넥스 성황에게 답신을 받았다는 소식이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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