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5화
“오늘도 정말 수고 많았어요.”
아, 그냥 평범한 인사였군.
나는 그제야 잔뜩 긴장했던 어깨에 힘을 풀고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뿐인걸요. 폐하께서도 온종일 돌아다니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말수도 별로 없었고.
‘심지어 표정도 안 좋았었지.’
물론 아픈 기색은 없어 보였지만.
입꼬리가 미세하게 내려간 게, 내색은 안 했어도 자꾸 신경 쓰였단 말이야.
“괜찮으세요?”
“네?”
내 물음에 루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아무래도 내 질문이 뜬금없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나름대로 다 생각을 거치고 나온 질문이었는데.
“절 걱정해 주시는 건가요?”
뒤이어 루스가 또 한 걸음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노을을 머금은 그의 푸른 눈동자는 언제나처럼 환희에 가득 차 반짝이고 있었다.
“당연히 걱정하죠. 폐하께서 쓰러지기라도 하시면 정말로 큰일이잖아요.”
“당신이 절 걱정하는 건, 어디까지나 제가 황제이기 때문인가요?”
이내 내게 바짝 다가선 그가 다정히 물었다. 나는 등 뒤에서 바르작대는 꽃송이들에 차마 발을 물릴 생각도 못 하고 꿀꺽 침을 삼켰다.
“그건…….”
“그건?”
주홍빛에 물든 하얀 머리카락이 비스듬히 꺾인 고개를 따라 흐트러진다.
사람을 홀리려 작정한 것처럼,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나를 올곧게 담아내는 눈동자, 가지런히 내리깔린 기다란 속눈썹, 성화에서 튀어나온 듯 아름답고 성스러운 미소까지.
“어, 당연히, 음, 아니죠.”
저번부터 자꾸 얼굴로 사람 심장을 공격하는 거 아니냐고!
나는 차마 루스와 시선을 마주칠 수 없어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대답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 위로 자그마한 웃음소리가 굴러떨어졌다.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적어도 저는 미에나 앞에선 황제가 아니라 ‘루스’로 지내고 싶거든요.”
“그런 거면 지금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아니었으면 지금쯤 나는 바닥에 이마를 붙이고 성은이 망극하다는 소리나 하고 있었겠지.
“하하…….”
내 말에 루스가 또 한 번 옅게 웃음을 터뜨렸다.
어느새 그는 대화하기 알맞은 정도로 내게서 멀어진 상태였다.
“미에나가 제 곁에 있어 주기만 한다면 힘든 일이 뭐가 있겠어요. 저는 정말 괜찮아요.”
그러고서 그는 타오르는 노을을 등진 채 천천히 말을 건넸다.
“다만, 오늘은 조금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해요.”
몇 시간 전과는 달리, 완연한 미소를 입가에 내걸고서.
“저도 당신을 걱정했으니까요.”
나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조금 전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긴장감이 몸을 휩쓰는 기분이었다.
저 푸른 눈동자에 잡아먹힐 것 같아서, 나를 향한 변함없는 애정 아래 언뜻 이질적인 감정이 비친 것만 같아서.
“아무리 꿈을 드나든다고 해도, 분명 몸에 무리가 갈 수밖에 없는데. 그런데도 당신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사람들을 구하러 가죠.”
“…….”
이전까지는 늘 첫사랑에 빠진 소년 같은 눈빛이었다면, 지금은 완연한 성인의 느낌이었다.
다정하면서도 조금은 어둡고, 조금 더 농밀하면서도 끝내 제 감정을 제어하는 듯 옅게 일렁이는 눈동자가 빈틈없이 나를 담아냈다.
“물론 당신을 막을 생각은 없어요. 제게는 그럴 자격도 없고, 이성적으로 따져도 사실 당신의 판단이 늘 옳으니까요.”
게다가 결국에는 제 백성들이고요.
루스가 짧게 덧붙이고서 다시금 입꼬리를 빼 당겼다. 이전과는 달리 살짝 힘없어 보이는 미소였다.
“이건 그저 제 이기심이에요. 그래서 미에나 앞에서는 최대한 티 내지 않으려 했는데, 보기 좋게 실패했네요. 신경 쓰게 만들어서 죄송해요.”
“앗, 아니에요. 저라도 다른 사람이 저처럼 굴면 당연히 걱정했을 건데요, 뭘.”
“저는 미에나라서 그런 거예요.”
나는 이번에도 뭐라고 답할 수 없어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그사이 루스는 여전히 내게 더 다가오지 않은 채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미에나가 제게 신경 써 줄 때는 그저 기쁘고 달갑기만 했는데, 그 대상이 제가 아니게 되니 조금은 답답하고 조급해져요.”
마치 처음 마주하는 감정을 음미하는 사람처럼, 웃는 듯 오묘한 표정을 내보이며.
“독점하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당신을 막을 생각도 없는데. 그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데.”
“…….”
“어쩌면 질투일지도 모르겠어요. 저는, 이런 감정을 처음 느껴 봐서.”
모든 게 당신이 처음이라서.
“이게 질투일까요?”
달콤한 디저트를 처음 먹어 보는 아이처럼, 풋사랑을 처음 느낀 소년처럼.
눈앞의 남자가 이런 말을 하는 것조차 중죄인 양 잔뜩 풀 죽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이건 너무 자극이 강한데.’
말하는 것만 보면 사람 여럿 꼬셔 봤을 것 같은데, 진짜 내가 처음이라고?
“저는…….”
차마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또 한 번 침을 꿀꺽 넘긴 순간이었다.
“곤란하게 만들었다면 죄송해요, 미에나.”
루스가 도리어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고개를 숙였다.
처량하기 그지없는 모습에, 나는 무심코 그를 따라 한 발짝 발을 내디뎠다.
순간 나조차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폐하께서는, 그러니까.”
이 질문을 입 밖으로 꺼내도 되는 걸까? 괜히 사람 마음을 들쑤시는 건 아닐까?
알 수 없는 감정들과 혼란스러운 마음이 목구멍을 휘돈다. 하지만 이조차도 내뱉어지는 말은 막아 내지 못했다.
“저를 좋아하시나요?”
사실 물어볼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그의 말과 행동이, 눈빛과 표정이 늘 답을 말해 주고 있었으니까.
그런데도 나는 답을 듣고 싶은 걸까? 왜 물어본 거지?
나는 어쩌고 싶은 걸까.
“좋아한다는 감정의 기준은 참 어려운 것 같아요.”
그사이 루스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뜨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특히나 저는 언제나 감정을 억제당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이런 걸 정의하는 데에 더더욱 익숙하지 않고요.”
“…….”
“제가 미에나를 처음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제 안의 ‘좋아한다’라는 감정의 정의는 우정, 혹은 양육자를 향한 애정에 가까웠겠죠.”
누군가 들었다면 이상하다고 생각할 법한 발언이었다.
자기를 좋아하냐고 물었을 뿐인데, 이런 이야기부터 꺼내다니.
하지만 저 말을 하는 사람이 루스라서. 그의 과거를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그가 어떤 상황에서 살아왔는지 정도는 알고 있으니까.’
유스틴과의 대화를 통해, 전령으로 나누었던 그와의 대화를 통해 그가 얼마나 부조리한 환경에서 살아왔는지 알고 있었기에.
저 말의 무게를 알 수 있었다.
그런 만큼 내게는 더 무겁게, 크게 와 닿을 수밖에 없었다.
“당신이 없던 동안에는, 솔직히 아직 잘 모르겠어요. 이 감정을 정의할 새 없이 그저 당신을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는 생각만 했으니까요.”
차근차근 과거를 되짚던 루스의 눈동자가 내게 향했다.
“다시 만나고 나서는, 처음에는 그저 기뻤고……, 당신이 제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이번에는 그 맑은 눈동자를 피하려 들지 않고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이제는 그 시선 끝이 온전히 제게 닿기를 바라요.”
“…….”
“닿고 싶고, 더 가까이 가고 싶고, 보지 못했던 순간만큼, 그 이상으로 미에나를 제 눈에 담아내고 싶어요.”
크고 단단한 손가락이 내 손을 붙잡을 듯 말 듯 다가왔다.
그러다가도 그는 근처에서 멈춰서고서 다시금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쨌든 미에나의 질문에 대답하자면, 저는 언제나 당신을 좋아해요.”
마치 내게 허락을 구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그건 분명 이전과 같은 감정은 아닐 거예요.”
조심스럽고 다정했으며, 안절부절못하는 소년처럼 풋풋하고 사랑스러웠다.
“단순히 우정이나 경외를 넘어서.”
“…….”
“미에나를 좋아해요.”
그러고서 그는 저조차도 이 말이 익숙지 않다는 듯 잠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좋아해요.”
한숨을 내쉬듯, 또 한 번 작게 중얼거렸다.
나는 어느덧 그의 머리 위를 감싼 어스름을 바라보며 가만히 두 눈을 깜빡였다.
퍽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미에나에게 제 감정을 강요할 생각은 없어요. 언제나 이야기하는 거지만, 저는 미에나가 싫은 행동은 하지 않으니까요.”
곧이어 루스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두 손을 들어 올리며 해명했다.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게 퍽 불안한 모양이었다.
저 모습마저 퍽 웃기고, 귀엽고, 또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워서.
“솔직히 평소에 폐하께서 저를 바라보는 눈빛만 봐도 모를 수가 없는 사실이기는 했어요.”
나는 가볍게 너털웃음을 내뱉고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먼저 물어봐 놓고 발을 빼는 것 같아 죄송하지만, 전 아직 폐하와는 달리 가진 기억이 별로 없잖아요. 그런 만큼 제가 받고 느끼는 감정이 죄다 급작스럽고 낯설 수밖에 없어요.”
솔직히 나도 아직 내 마음을 모르겠는걸. 정말로 얼굴에 홀린 걸지도 모르고.
나는 밤하늘보다 더 반짝이는 루스의 푸른 눈동자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러니, 음, 이렇게 하는 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