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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 필요하신가요? (144)화 (144/154)

제144화

그 뒤로도 우리는 지도에 표시된 몇몇 지역을 더 돌며 사람들을 구해 내고 조사를 이어 나갔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흐른 후.

마정석이 발견된 지역을 더 돌아보겠다는 어르신을 뒤로한 채 돌아온 황궁 후원에서.

“역시 마정석을 바꿔치기한 배후와 황제를 제거하려는 세력은 같은 것 같죠?”

“섣불리 판단하면 안 되겠지만, 내가 보기에도 그쪽으로 힘이 실리는 것 같네.”

“리넥스 측에는 제가 따로 연락을 넣겠습니다. 어디까지나 비공식적인 만남이니, 언제 답이 올지는 모르겠지만요.”

지크프리트 씨의 말을 받은 유스틴이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바람결을 따라 흩날리는 꽃송이를 흘긋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공작님만 믿고 있을게요. 정말 제 이름을 대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저 역시도 당신과 성황의 관계를 정확히는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서신을 무시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스스로를 믿으세요.”

“그게 믿으라고 믿어지나요.”

황제에 이어 이웃 나라의 성황까지 휘어잡았었다니.

‘솔직히 이젠 놀랍지도 않지만.’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나를 믿어 보자고! 나는 인맥의 왕, 권력의 마스터, 숨은 실세…….

“저, 미에나.”

바로 그 순간, 자그마한 목소리가 불현듯 귓속을 파고들었다.

나는 괜히 부끄러워지는 마음에 큼큼 헛기침을 내뱉고서 고개를 돌렸다.

“네에, 말씀하세요.”

저는 아무 생각도 안 했습니다.

“혹시 잠깐 대화 가능하실까요?”

상냥하게 미소 지으며 말하려니, 클레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여전히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단둘이 하고 싶은 이야기구나.

나는 곧바로 루스와 유스틴에게 눈짓을 보내고서 클레어의 어깨를 조심스레 잡아끌었다.

‘적당히 으슥하지 않으면서도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장소가 어디 있을까.’

괜히 겁주고 싶지는 않은데.

“여, 여기면 될 것 같아요…….”

뒤이어 클레어가 고개를 슬쩍 들어 올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무엇이 그녀를 긴장하게 만든 건지, 클레어의 어깨에는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오늘 정말 고마웠어요, 클레어. 덕분에 모르고 넘어갈 뻔했던 사실도 알아챌 수 있었고요.”

이럴 땐 역시 칭찬이지.

“아녜요, 미에나. 도움이 될 수 있어서 기쁜걸요…….”

내 말에 클레어가 뺨을 붉게 물들였다.

그러다가도 곧 다시 주위를 둘러보더니, 언제 웃었냐는 듯 우물쭈물 입술을 깨무는 게 아닌가.

‘뭐지?’

오늘 처음 만났을 때도 이렇게까지 낯을 가리지는 않았는데.

“편하게 말씀하세요, 클레어.”

나는 또 한 번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자못 다정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클레어가 한 차례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기다란 속눈썹을 아래로 내리깔며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저, 저는 미에나를 의심하는 게 아니고, 정말로 이상해서……, 하지만 이걸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고…….”

그 연둣빛 눈동자에는 저조차도 알 수 없다는 듯한 혼란과 불확신으로 물들어 있었다.

대체 뭐길래 이렇게 뜸을 들인담?

“실은 말이에요…….”

그렇게 또 한참이 지나고서야, 클레어가 눈을 꾹 감고서 말을 내뱉었다.

“그 마정석에 들어 있던 마력과 미에나의 마력이 상당히 일치해요.”

“네?”

확실히 뜸 들일 만한 말인데.

“물론 지금 미에나의 마력은 미에나 곁에 계시던 지고하신 분의 마력과 더 비슷해요. 그, 그렇지만 마정석 안에 있던 마력과도 제가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비슷해서…….”

“흐음.”

“다, 다시 말하지만 절대 미에나를 의심하는 건 아니에요! 어찌 됐든 전체적인 마력도 다, 다르고, 미에나가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건 저도 잘 알고 있으니까…….”

살짝 고개를 꺾으며 흥미를 표하자, 클레어가 황급히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제법 귀여워, 나는 작게 웃음을 터뜨리고서 안심하라는 듯 클레어의 손을 그러쥐었다.

“저도 알아요. 안 그랬으면 저한테 이렇게 먼저 말해 주지 않았겠죠.”

“마, 맞아요. 믿어 주셔서 감사해요……. 사실 그곳에서 마정석을 건네드리면서 같이 말해 드리고 싶었는데, 그분의 표정이 너무 살벌하셔서 차마…….”

“어르신 표정이 좀 무시무시하기는 했죠.”

어느 정도 면역이 된 나조차도 순간 숨을 멈췄을 정도였으니까.

‘아무래도 이건……, 어르신한테 아직 말하면 안 될 것 같지.’

몇 시간 전에 보인 반응도 그렇고, 평소에 세계수를 입에 담았을 때 보여 주던 말과 행동도 그렇고.

‘어르신은 위그드라실을 혐오한다.’

위그드라실을 찾아내려는 이유도 아마 좋은 건 아니겠지.

그 상황에서 내 마력에 세계수의 힘이 깃들어 있다는 사실을 말하면…….

“음, 좀 많이 무서워지는데.”

나 갑자기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될 것만 같아.

상상만 해도 소름 끼치는 상황에 어깨를 잘게 떤 찰나였다.

“저, 그리고…….”

클레어가 이번에도 토끼처럼 입을 오물거리며 내 눈치를 살폈다.

나는 곧바로 잡념을 밀어 넣고서 슬며시 고개를 기울였다.

“아직 하고픈 말이 남아 있다면,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저는 귀여운 여자아이를 아주 좋아한답니다. 겁먹지 마세요.

“저, 혹시 공작님과는…….”

믿음과 상냥함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방싯방싯 미소 지으려니, 클레어가 이번에도 뜸을 들이며 천천히 질문했다.

“고, 공작님과는, 기억이 모두 돌아온 후에 결혼하실 생각이실까요?”

“예?”

나는 순간 모든 사고가 멈춰 멍하니 입을 벌렸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람?

공작님이면 유스틴? 유스틴이랑 나? 나랑 유스틴이? 뭐를?

‘아, 약혼.’

그러고 보니 옛날에 나랑 유스틴이 서로 죽고 못 사는 약혼자로 소문 났었지.

클레어도 그걸 맹신하는 사람이었구나.

“있잖아요, 클레어.”

이런 오해는 빨리 풀어 주는 게 상책이다. 나는 두 팔을 뻗어 클레어의 어깨를 잡아채며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그건 사실 다 거짓말이에요. 공작님과 저는 실제로 약혼한 적도 없는걸요.”

“네에?!”

동시에 클레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화들짝 외쳤다.

오늘 들은 목소리 중에 가장 큰데.

“하, 하지만. 그렇다기에는, 미에나가 안 계신 동안 공작님께서 너무…….”

“무슨 일입니까?”

바로 그 순간, 멀리 있던 사람들이 이쪽으로 하나둘 다가오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클레어의 목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차라리 이렇게 된 이상 서로 사실관계를 바로 하는 게 낫겠군.

나는 어느새 다가온 유스틴을 향해 또박또박 말을 건넸다.

“클레어가 공작님이랑 제가 약혼한 사이라고 여태 오해하고 있어서요. 설마설마했는데 진짜 지금까지 아무런 해명도 안 하고 계셨던 거예요?”

이러다 네 혼삿길 막히면 내 잘못되는 거 아니야?

“이제는 공작님께서도 결혼 적령기시고, 또 이렇게 계속 오해하는 사람이 생길 수 있으니 이쯤에서 공개적으로 해명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가던 나는 무심코 느껴지는 시선에 차마 끝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스틴이 옅게 미소 짓고 있던 까닭이었다.

이 소문 때문에 가장 곤란한 건 자신일 텐데도.

“글쎄요.”

곧이어 유스틴이 뒤따라온 루스를 한 번, 나를 한 번 바라보더니 손을 내 얼굴 쪽으로 뻗어 왔다.

“공작님……?”

그리하여 잠깐의 찰나 끝에.

“저는 이대로도 좋은데요.”

그가 이전보다 짙은 미소를 지은 채 어느새 거둬 간 손을 들어 올렸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그의 손가락 끝에는 얇은 머리카락 하나가 들려 있었다.

나는 입을 쩍 벌리고서 멍하니 유스틴을 바라보았다.

이, 이 자식 갑자기 왜 이래?

누가 머리카락 떼 주면서 이런 말을 하냐고!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여러분도 들어가서 쉬십시오.”

그러고서 그는 자신이 던진 폭탄을 수습할 생각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뒤돌아 후원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아, 그, 저, 저희도, 이만…….”

심지어는 클레어 역시 눈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이내 삐걱삐걱 사무엘의 손을 붙잡고 순간 이동 마법진을 펼쳤다.

나는 그때까지도 유스틴의 말을 제대로 입력하지 못하고 입술을 달싹이다가.

“미에나?”

“아.”

루스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서 입을 딱 다물었다.

어느새 사람이 빠진 후원은 놀라울 만큼 고요하기 그지없었다.

그 속에 남은 두 사람, 그것도 하필이면 지난번에 나한테 손가락 키스를 한…….

“아니, 그.”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더더욱 어색해지는 마음에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뭐지, 이 어색함은?

“아, 아무래도 그. 공작님께서 몇 년 동안 쌓여 있던 장난기를 지금, 음, 발출하시는 것 같네요. 하하.”

게다가 나는 왜 루스한테 변명을 내뱉고 있단 말인가.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한 상황에 횡설수설 말을 꺼낸 순간이었다.

“미에나.”

내가 한 발짝 물러선 만큼, 루스가 내 쪽으로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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