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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 필요하신가요? (143)화 (143/154)

제143화

“마정석이구나.”

뒤이어 어르신이 내 어깨 위로 불쑥 머리를 들이밀며 말했다.

나는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검은 머리카락을 다른 손으로 걷어 냈다.

“경작지에서 가져온 거면, 지난번에 폐하께서 말씀해 주셨던 농경 재배용 마정석인 건가요?”

제가 이제 막 사회에 나온 기억 잃은 초년생이라, 세상 물정에 해박하지 않습니다.

“맞아요. 해충이 꼬이지 않게 결계 역할도 하고, 겨울에도 알맞은 온도를 유지할 수 있는 효과도 내주죠.”

“말로만 들어도 유용하네요.”

그 정도면 농업계의 혁명 아니야? 이건 대체 어떤 천재가 개발한 거야?

“미에나가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이런 생각을 해낼 수 없었을 거예요.”

루스가 부드럽게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말했다. 평소와는 달리 눈까지는 전해지지 못한 반쪽짜리 미소였다.

내가 이 천재적인 생각을 가르쳐 줬다는 건 고사하고서라도, 애 표정이 좋지 않은데.

“폐하의 주요 정책 중 하나죠. 즉위와 동시에 배급을 시작했으니까요. 그런데 이게 원인이라면…….”

곧이어 유스틴이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말을 건넸다. 나는 상황을 파악하고서 입술을 입 안으로 말아 넣었다.

새로 즉위한 황제가 야심 차게 내놓은 정책이 도리어 끝없는 밤의 병의 원인이 되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는 순간 민심은…….

“부정할 수 없는 실책이죠.”

루스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야말로 차분하기 그지없는 모습에, 도리어 내가 안절부절못하며 그를 달래기 시작했다.

“어, 그, 제가 가르친 거라면서요. 그러면 역시 책임은 저한테 있는 거 아닐까요?”

차라리 평소처럼 비 맞은 강아지 얼굴이라도 하면 모를까, 저렇게 담담하니까 오히려 더 걱정되잖아!

“엄밀히 말하자면 미에나가 아니라 미에나가 제게 남겨준 책에서 도움을 받은 거예요. 게다가 어찌 됐든 이걸 실행에 옮긴 건 저니까요.”

“아니, 그건…….”

맞는 말이긴 한데.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데굴데굴 눈동자를 굴렸다.

농업 생산량과 백성의 편의를 위해 개발한 건 맞잖아. 본인도 마정석에 이런 문제가 생길 줄 어떻게 알았겠어?

‘하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정책 실패가 맞긴 하니까.’

게다가 그 피해가 일파만파로 커지고 있으니, 솔직히 말하자면 이건 부정할 수 없는 중죄…….

“그, 그전에, 잠시……!”

바로 그 순간, 클레어가 작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러고서 그녀는 제게 몰린 시선에 흠칫 몸을 떨었다가, 내가 들고 있던 마정석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마정석에 문제가 있는 건 맞지만, 수, 수식의 문제는 아니에요.”

“그 말인즉…….”

“마정석 자체의 문제라는 소리군.”

“맞습니다.”

이번에는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사무엘이 확답했다.

나는 쓰임을 다 해 빛바랜 마정석을 바라보다가, 무심코 떠오르는 생각에 툭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공작님. 이 마정석은 어떤 식으로 백성에게 보급되는 건가요?”

“직수입한 마정석을 공정해 미리 개발된 수식을 넣은 뒤, 농업 생산지에 배급하는 형식입니다.”

“농업 생산지에는 이런 곡창지대 말고도 다른 지역들도 포함된 거죠?”

“맞습니다.”

내 말에 유스틴 또한 이상함을 느낀 듯,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나는 마지막으로 확인하고자 이번에는 루스와 시선을 맞추고서 다시 한번 질문했다.

“이런 식으로 황실에서 보급하는 물건에는 보통 황실 문양을 새기기 마련이죠? 도난 및 재판매 방지를 위해서요.”

아랫마을에 내려가서 장을 볼 때 종종 그런 이야기를 듣고는 했었다.

이건 황실 직인이 찍혀 잘못 다뤘다간 큰코다친다고.

하다못해 수배 전단도 함부로 뗄 수 없게 황실 직인을 붙여 놓는데. 이렇게 탐나는 물건에 문양을 새겨 넣지 않을 수 있을까?

“네, 맞아요.”

곧이어 루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동시에 나는 기다렸다는 듯 그에게 마정석을 내밀었다.

“이 마정석, 황실의 문양이 새겨져 있지 않아요.”

“그렇다는 건.”

“누군가 마정석을 일부러 바꿔치기했을 가능성이 커요.”

내 말에 유스틴이 마정석을 들여다보고는 허, 하고 짧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클레어가 유스틴한테는 보여 주지 않고 곧바로 내게 가져온 모양이었다.

“곡창지대 말고도 마정석이 보급된 지역은 꽤 있었는데, 최초 발원지는 그곳들을 전부 포함하지 않았어요.”

“…….”

“곡창지대의 마정석만 바꿔치기해도 피해가 클 테니, 굳이 품을 들이지 않아도 되었던 거겠죠.”

“어, 어쩌면 모든 지역을 바꿔치기할 만큼의 마정석이 없었던 걸 수도 있고요…….”

클레어가 조곤조곤 말을 보탰다. 나는 이번에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넓은 지역들을 마정석 하나로는 감당할 수 없는 탓에, 이 지역만 하더라도 수많은 마정석이 필요할 터였다.

“이유가 뭐든, 결론은 하나지만요.”

누군가 일부러 이 일을 꾸몄다.

루스를 곤란에 빠뜨리기 위해, 아주 악질적으로.

“솔직히 아니길 바랐지만, 제 가설에 힘이 실리는 대목이네요.”

황제를 시해하려는 자와 끝없는 밤의 병을 퍼트린 자가 동일인일 거라는 가정.

괜히 텁텁해지는 기분에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려니, 루스가 곧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다행이에요. 적어도 이 일을 꾸민 자가 누구인지, 후보를 좁힐 수 있으니까요.”

“폐하께서는 전 황태자가 살아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동시에 유스틴이 한쪽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그의 시체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지. 그러니 가능성은 열어 둬야 해.”

“그건 맞지만, 그 폭발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은…….”

“어찌 됐든 그 역시 드래곤의 후손이야. 회복에 시간이 걸릴 뿐, 일단 목숨이 붙어 있다면 불가능할 것도 없지.”

무슨 일인지 정확히 모르겠지만, 일단 내가 살아 있는 시점에서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조용히 경청하며 또 한 번 또르르 눈동자를 굴렸다.

그 시선의 끝에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어르신이 자리하고 있었다.

어르신은 왜 또 그런 얼굴이시람?

“신기한 일이구나.”

곧이어 그가 내내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인간이 탐지할 수 있는 마력을 내가 감지하지 못했다니.”

그 어조는 평소처럼 느른하고 여유로웠으나, 스민 목소리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오싹했다.

심지어는 나조차도 순간 소름이 끼칠 정도로.

“어쩌면 그리 신기한 일이 아닐지도 모르지.”

곧이어 그가 나를 올곧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가 감지하지 못하는 마력이 딱 하나 존재하니 말이다.”

나는 차마 침을 삼킬 생각조차 하지 못한 채 멍하니 그를 마주 바라보았다.

그가 감지하지 못하는 마력.

어르신이 받은 형벌.

“위그드라실이군요.”

그토록 찾아 헤맸던, 내가 몇 번이고 종이비행기를 날려도 찾지 못했던 바로 그 이름.

“위그드라실?”

혼잣말과도 다름없는 중얼거림에, 지크프리트 씨가 덩달아 인상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나는 퍼즐 조각을 맞추듯 그간의 단서를 짜 맞추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그런 거였어요. 종이비행기를 날릴 때마다 끝없는 밤의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이끌어 준 것도, 꽃의 형태로 나타난 것도.”

사람들이 영양소를 섭취하지 못했음에도 특별히 상태가 나빠지지 않았던 것도.

모두 위그드라실의 힘이어서, 그 마력이어서 그랬던 거야.

“이제야 내 진심으로 너희를 도울 이유가 생기는구나.”

곧이어 어르신이 한쪽 입매를 비틀어 웃으며 나른하게 고개를 꺾었다.

내게 지어 주던 다정한 미소와는 상반되는 웃음이었다.

흔적을 찾자마자 저런 미소를 짓다니, 나 조금 불안해지는데.

“그렇다면 당장 중요한 건 마정석을 바꿔치기한 이를 찾는 거겠군요.”

곧이어 유스틴이 차분하게 말을 건넸다.

“레이디의 말대로, 곡창지대의 마정석을 모두 바꿔치기하려면 꽤 많은 양이 필요합니다.”

“…….”

“그 정도의 마정석을 수출할 수 있는 곳은, 제가 알기로 하나밖에 없고요.”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 머릿속에도 어느 한 곳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유스틴과 나눴던 대화들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가 나를 찾아왔던 결정적인 이유. 우리의 첫 만남이자 이후 사업의 발판이 된 계약.

“리넥스.”

실로 오랜만에 발음하는 그 이름에 어쩐지 그리움이 묻어 있는 것 같은 건 내 착각일까.

나는 스스로도 알 수 없는 흐릿한 감상에 고개를 기울였다.

그사이 유스틴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서 말을 이었다.

“중간 유통지를 거쳤든 거치지 않았든, 리넥스 측에 문의하면 알 수 있겠죠.”

“하지만 리넥스에서 저희의 문의를 받아 줄까요……?”

다짜고짜 ‘마정석을 언제 누구한테 팔았는지 좀 봅시다’라고 하면 극구 거절할 것 같은데.

“당연히 괜찮습니다.”

하지만 이런 내 걱정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유스틴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

“당신이 있으니까요.”

나는 내 과거의 행적을 생각하기를 포기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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