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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 필요하신가요? (142)화 (142/154)

제142화

“이,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소심한 성격을 대변하듯 작고 차분한 목소리가 귓속을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순하게 내려간 눈꼬리는 순수한 기쁨으로 활짝 휘어 있었다.

그녀의 뒤에 선 남자는 여자와 달리 서늘한 분위기를 뽐내고 있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그녀 못지않게 상냥했다.

나는 무언가 기억날 듯 말 듯한 느낌에 멍하니 두 눈을 깜빡이다, 곧 정신을 차리고서 인사를 건넸다.

“아, 그, 안녕하세요. 이미 들으셨을지 모르겠지만 제가 아직 기억이 온전치 않아서…….”

“앗, 네. 사정은 공작님께 이미 들었어요. 너무 부담 갖지 않으셔도 돼요. 저, 저희는 그저 은혜를 갚기 위해 온 거니까요…….”

“저야말로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한걸요. 그러면, 혹시, 음, 이름이…….”

내 말에 여자가 배시시 웃으며 답했다.

“클레어 에카르트예요. 편하게 클레어라고 불러 주세요.”

“사무엘입니다.”

클레어를 따라 입을 연 사무엘이 곧 루스와 어르신을 마주하고는 움찔 몸을 떨었다.

그러자 클레어가 사무엘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채며 속삭이듯 말했다.

“괜찮아, 사무엘. 폐하께서는 그 일과 아무런 연관이 없어. 오히려…….”

“……알고 있어요.”

저기, 죄송하지만 전 모르겠는데요.

‘오히려 다음에 뭔데?’

사람 궁금해지게, 왜 말을 하다가 마는 거야?

“어, 어쨌든 저희가 도움이 될 수 있어서 정말 기뻐요. 어렸을 땐 늘 레이디께 도움만 받았었으니까요…….”

그사이 클레어가 화제를 돌리며 배시시 미소 지었다.

유스틴은 마치 자신이 한 일처럼 뿌듯한 미소를 짓고는 말을 보탰다.

“그들은 당신이 후원 재단을 설립한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때 당신이 구출해 낸 아이들은 양질의 교육을 받고 있거나, 이미 성인이 되어 후원 재단의 큰 축을 맡고 있고요.”

“기억이 날 듯 말 듯 하네요. 제가 뭔가 무모한 작전을 펼쳐서 공작님께 혼난 기억은 있는데.”

“무모했죠.”

“아주 무모했지.”

“그 일을 말하는 거라면, 그래. 내 결계가 아니었다면 너는 나를 만나기도 전에 수명을 다했겠지.”

“어르신마저?”

유스틴이나 지크프리트 씨는 그렇다고 쳐도, 어르신은 또 어떻게 알고 말하는 거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자, 어르신이 한 번 코웃음을 내뱉고서 클레어와 사무엘을 바라보았다.

황금을 녹여 낸 듯한 눈동자는 흥미롭게 반짝이고 있었다.

“평범한 인간치고는 꽤 우수한 마력을 지니고 있구나. 이 몸을 찾아온 인간 중에도 그런 자들이 몇몇 있었지.”

“저, 저희는…….”

“그렇게 겁먹을 필요 없단다. 내 계약자에게 호의를 지닌 미물에게는 살심이 들지 않으니.”

“어르신, 예쁜 말!”

아까부터 자꾸 인외 티 내는 발언만 잔뜩 흘리고 있는데, 그러다 골치 아파지는 수가 있다고요.

“저 정도의 인간들이 내 정체를 모를 리 있겠느냐. 아득히 지고한 존재라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이런 내 마음을 읽은 건지, 어르신이 곧바로 덧붙여 말했다.

나는 고개를 돌려 클레어와 사무엘을 흘긋 바라보았다.

그러자 클레어가 눈을 토끼처럼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나 저희가 발설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은 하, 하지 않으셔도 돼요. 어차피 저희는 친구도 없고…….”

“여기에 서로 말고 친구 있는 사람이 있긴 해?”

클레어의 말에 지크프리트 씨가 툭 말을 꺼냈다. 동시에 안 그래도 조용했던 실내가 더더욱 고요해졌다.

나는 그 진실의 조동아리를 한 번 째려본 후 클레어의 손을 부드럽게 맞잡았다.

“클레어야말로 너무 긴장하지 않아도 돼요. 순수한 선의로 저를 도우러 와 주신 거잖아요.”

“레이디…….”

“그러지 말고 저도 미에나라고 불러 주세요. 기억은 나지 않지만, 과거의 저도 클레어와 친구가 되길 바랐을 거예요.”

이렇게 작고 귀여운 여자애랑 친해지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

“미, 미에나…….”

곧이어 클레어가 수줍게 볼을 붉히며 내 이름을 되뇌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유스틴의 목소리가 훈훈한 분위기를 비집고 들었다.

“회포는 나중에 풀고, 우선은 일에 집중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맞는 말이긴 한데, 타이밍이 이러니 약간 질투하는 것 같네요.”

설마 정말 나 말고 친구 안 사귄 건 아니겠지?

우스갯소리로 말을 내뱉으려니, 서늘한 시선이 곧장 달라붙었다.

심지어 클레어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뺨을 붉게 물들인 채 나와 유스틴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나 옛날에 유스틴 약혼자 행세했었지, 참.’

아무래도 제가 영 좋지 못한 발언을 한 것 같습니다.

“혹시 지도에 표시된 지역 중에 아직 제 힘이 닿지 못한 데가 있나요? 만약 있다면 그쪽을 먼저 살피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나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파란 점이 찍힌 지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정말 다행스럽게도, 유스틴이 곧바로 내 말을 받아 주었다.

“들어온 보고에 따르면 대부분 아직 깨어나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꿈에서 꺼낸 이후에도 추가적인 조치가 시급할 겁니다.”

“아, 정말 급하네요.”

여기서 시시덕거리고 있을 때가 아니었잖아.

나는 곧바로 고개를 들어 나를 둘러싼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이 많은 사람들을 구하기에는 턱없이 적은 인원.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저 앞으로 달릴 뿐.

“클레어와 사무엘, 그리고 공작님. 세 분께서는 작물과 재배지를 조사해 주세요.”

나는 그들을 차례로 바라보며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저와 어르신, 러셀 경과 폐하는 우선 끝없는 밤의 병에 걸린 사람들을 구하고 상태를 살필게요.”

마음 같아선 어르신도 조사 조에 넣고 싶지만, 마을 사람들을 꿈에서 꺼내는 순간마다 ‘찌꺼기’가 쌓일 테니 어쩔 수 없지.

“……알겠습니다.”

“열심히 할게요……!”

내 말에 유스틴과 클레어가 각자 고개를 끄덕이며 나지막이 말했다.

나는 감사의 표시로 미소를 지어 보인 후, 여전히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루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동시에 루스가 언제나처럼 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미에나의 말이면 뭐든 좋아요.”

나는 불현듯 느껴지는 위화감에 고개를 슬쩍 꺾었다.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저 입술 각도를 보아하니, 어쩐지 뭔가를 숨기고 있는 느낌…….

‘아니지, 정신 차리자.’

내가 저 사람을 본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입술 각도까지 계산하고 있냐.

“그럼 잘 부탁드려요, 여러분.”

나는 다시금 클레어와 사무엘 쪽으로 몸을 돌리며 손을 건넸다.

당장 중요한 건 사람 목숨이다.

일에나 집중해야지.

* * *

몇 시간 후.

“내가 보기엔 정말로 위그드라실 교든 미에나 교든, 종교 하나쯤은 세워질 것 같다.”

빠르게 사람들의 꿈에서 꽃을 뽑은 뒤 정신을 차리자, 지크프리트 씨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나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아니, 그렇잖아. 난데없이 나타나서 근처 재단 지부 사람들을 모조리 끌어오더니, 급기야 병에 걸린 사람들을 구해 내고.”

“게다가 그 인간들은 네 모습을 깨어서도 잊지 못하지.”

“어르신까지 왜 그러세요…….”

이런 말 할 시간에 깨어난 사람들을 한 번 더 살피겠어.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서 어르신의 품에서 바르작거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병의 발원지라는 것은 결국 다른 지역과 비교해 사람들이 잠에 빠진 지 오래됐다는 뜻.

한시도 쉬지 않고 사람들을 구하러 다니려니, 내가 다 진이 빠질 지경이었다.

유스틴이 급하게 불러온 후원 재단 사람들이 없었다면 더 힘들었겠지.

‘거기다 환자들의 상태도 의외로 괜찮았고.’

나는 이곳에 와 살폈던 환자들의 상태를 떠올리며 고개를 꺾었다.

처음에는 동물처럼 겨울잠을 자는 느낌이라고 생각했는데.

‘계속 마주하다 보니 뭔가 그거랑은 다른 느낌인 것 같단 말이지.’

마치 꿈속의 꽃이 영양분을 공급하는 것만 같은…….

“깨어난 건 확인했으니 나는 다시 사람들 살펴보러 갔다 온다.”

생각에 빠진 사이, 지크프리트 씨가 내 머리를 한 번 쑤석거리고서 빠르게 자리를 떴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부드러운 바람이 허공을 휘돈다 싶더니, 곧 조금 떨어진 지점에서 세 사람의 인영이 드러났다.

“다, 다녀왔습니다……!”

뒤이어 클레어가 부드럽게 웃으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 사무엘은 바람에 뒤엉킨 클레어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고 있었다.

“확실히 이 둘을 영입한 건 잘한 선택인 것 같더군요.”

그들 사이에 더는 머무르고 싶지 않다는 듯, 유스틴이 곧바로 내게 다가오며 입을 열었다.

클레어 역시 종종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르며 유스틴의 말을 받았다.

“저, 경작지에서 이런 걸 발견했는데, 아무래도 조금 이상해서요.”

이윽고 나는 클레어가 건넨 물건을 받아 들며 입술을 오므렸다.

“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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