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7화
입 밖으로 내뱉어지는 호칭은 낯선 듯싶으면서도 무척이나 익숙했다.
“대공자님.”
나는 다시 한번 그를 부르며 옅게 미소 지었다.
아직 내가 찾지 못한 기억에 비하면 지극히 작은 편린에 불과했으나, 되돌아온 기억은 마치 처음부터 내 머릿속에 존재했던 듯 자연스레 퍼즐을 맞추었다.
퍽 신기한 기분이었다.
“……미에나?”
내 말에 유스틴이 인상을 찌푸리다 말고 나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차분하다 못해 서늘하게 느껴졌던 은빛 눈동자는 평소답지 않은 의아함과 혼란으로 가득 물들어 있었다.
표정 한번 볼만하군.
“오래 살고 보니 천하의 유스틴 에버딘이 바닥을 굴러다니는 모습을 다 보네요.”
나이 지긋하신 마을 주민들 앞에서 할 말은 아닌 듯싶지만.
짐짓 장난스럽게 우스갯소리를 내뱉자, 유스틴의 얼굴이 한층 더 우스꽝스럽게 변모했다.
저건 입매가 올라간 걸까 내려간 걸까. 웃는 건지 우는 건지 화내고 싶은 건지 모르겠네.
“설마, 기억이…….”
곧이어 그가 내 쪽으로 천천히 기어 오며 드문드문 말을 꺼냈다. 평소 유스틴의 성격과 행동을 생각하면 퍽 어울리지 않는 광경이었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그대로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하하하!”
“뭐야, 무슨 일이야?”
뜬금없는 폭소에 사람들을 통제하던 지크프리트 씨가 빠르게 이쪽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스틴은 여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 멀뚱히 나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손을 건네며 말을 건넸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기에는 조금 웃기지만, 오랜만이에요.”
“당신, 진짜로.”
“설마 기억이 돌아온 거야?”
유스틴의 말이 끝나기 전에, 지크프리트 씨가 내 어깨를 잡아채며 물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으며 답했다.
“모든 기억이 돌아온 건 아니에요. 아무래도 대공자님……, 유스틴을 꿈에서 구하는 과정에서 뭔가 영향을 받은 듯싶어요. 돌아온 기억이 모두 그와 관련된 것들이거든요.”
이런 식으로 기억을 되찾게 될 줄은 몰랐는데.
“그거 신기한 일이구나.”
바로 그 순간, 머리 위에서 낮고 느른한 목소리가 굴러떨어졌다.
나는 곧장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공을 바라보았다.
“어르신!”
“내게 잡일을 시켜 놓고 또 이리 일을 벌이다니, 이래서야 내 네 곁을 떠날 수 있겠느냐.”
곧이어 그가 내 이마를 아프지 않게 톡 치고서 핀잔했다.
나는 헤헤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여전히 유스틴에게 건넨 손을 거두지 않았다.
“일어나요, 유스틴.”
아까는 생각할 틈 없이 냅다 ‘대공자’라고 불러 버렸지만, 어쨌든 이곳은 보는 눈이 많으니.
손을 위아래로 흔들며 재촉하려니, 그제야 유스틴이 느릿하게 팔을 뻗어 손을 맞잡았다.
10년 사이에 훌쩍 자란 커다란 손과 내 손이 빈틈없이 맞물렸다.
“당신 설마, 내 꿈을……?”
“당연하잖아요, 안 들어가면 사람이 죽는데. 물론 당신 꿈에 다른 누구도 아닌 저만 계속 나온 건 꽤 의외였지만―”
“거기까지만 말하세요.”
“뭘 부끄러워하고 그래요. 제가 바로 당신이 그려 왔던 최고의 인재라는 사실쯤은 알고 있는데.”
그 어린 나이에 자신과 사업을 구상하고 같이 사기도 칠 수 있는 ‘친구’가 또 어디 있겠는가.
‘나 같아도 못 잊지.’
꿈속에서 유스틴이 한 발언들은 단순히 친구라기에는 조금 더 진득했지만, 나는 이제 알고 있다.
유스틴은 인재에 미친 사람이라 인재 앞에서는 그런 발언을 스스럼없이 한다는 걸.
“아무튼, 그동안 저희 사업 잘 이끌어 주셔서 감사해요. 그쪽 관련으로는 아직 기억이 다 돌아오지 않아서, 앞으로도 한동안은 힘내 주셔야겠지만요.”
나는 맞잡은 손을 끌어당겨 그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그나저나 그동안은 대체 왜 그렇게 심술을 부린 거예요? 하마터면 원래 성격이 그런 건가 착각할 뻔했잖아요.”
사람이 살아 돌아왔는데 기쁜 기색 하나 안 보이고.
뒤이어 가까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들리게끔 작게 말하자, 유스틴이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답했다.
“심술부린 건 아닙니다. 상황이 따라 주지 않았을 뿐이죠.”
“그렇다기엔 처음 재회했을 때 반응도 심상치 않았는데요.”
“그건…….”
“됐어요. 저라도 1년 동안 별짓 다 했던 친구이자 동업자가 기억을 깡그리 잃었다고 하면 어이없었을 테니까.”
물론 감정과 이해는 별개의 영역이지만, 유스틴이라면 그럴 수 있지.
스스로 생각을 정립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유스틴의 표정이 또 한 번 묘하게 물들었다.
“그런 거 아니니까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세요.”
“제가 무슨 생각하는지도 모르시면서. 전 다 이해해요.”
“대체 뭘 이해한다는 겁니까?”
“그야…….”
“저, 잠깐만, 미에나. 회포를 푸는 것도, 저 도련님을 살린 것도 다 좋은데 말이다.”
내가 무언가 입을 열려던 순간, 지크프리트 씨가 내 어깨를 툭 치며 멋쩍게 말을 건넸다.
“일단 저 상황부터 해결하는 게 어떻겠냐.”
나는 그제야 고개를 돌려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성녀님이 기적을 일으키셨어…….”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내내 입을 벌리고 있던 사람이 멍하니 말문을 텄다.
그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에서 끝없는 밤의 병에 걸린 환자를 살려 내셨어!”
“성녀님 만세!”
급기야 분위기에 편승한 사람들이 저마다 소리 높여 외치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아무래도 여길 빨리 떠야겠어.
* * *
다시 돌아온 솜니움 황궁 안.
나는 내 곁에 선 채 불만스럽게 눈을 부라리는 어르신을 애써 모른체하며 헤헤 미소 지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네요.”
물론 레어로 돌아가면 어르신한테 혼날 각오를 해야겠지만.
“내 함부로 마법을 쓰지 말라고 그렇게 이야기했거늘.”
“하지만 어쩔 수 없었잖아요. 사람이 많은 곳에서 리처드 8세를 부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사람들을 뿌리칠 수도 없는 상황이었으니.”
조금만 더 있다가는 아예 숭배까지 갈 것 같았단 말이야.
‘그럴 바에는 차라리 조금 무리하더라도 순간 이동 마법을 사용하는 게 낫지.’
그런데도 어르신이 그나마 이렇게 순순히 곁에 있는 이유는…….
“폐하께서는 괜찮으신가요?”
바로 이 드래곤의 축복을 이어받은 황제 덕분 되시겠다.
“걱정해 주시는 건가요? 정말 기뻐요…….”
내 말에 루스가 눈을 반달처럼 휘어 웃으며 조곤조곤 속삭였다.
저런 반응을 보니 괜찮은 게 분명하군. 역시 드래곤의 축복이야.
나는 그를 따라 마주 미소 짓고서 다시 어르신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무튼, 어르신의 조사 결과를 들어 봐도 오늘 간 곳에서는 별다른 소득이 없는 것 같네요.”
“적어도 탐지 범위 이내에선 수상한 마력은 느껴지지 않았단다. 농경지에서 희미하게 마력이 분포되어 있기는 했지만.”
“그건 농사에 마정석을 이용한 까닭이겠죠.”
“처음부터 모든 걸 알 수 있을 수는 없죠. 표본이 조금 더 필요할 것 같습니다.”
곧이어 유스틴이 가볍게 팔짱을 끼며 말했다.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고는 생각을 이어 나갔다.
어르신을 제외하고도 네 사람 중 오직 유스틴만 쓰러진 이유가 뭘까?
‘황궁을 벗어난 이후로는 항상 같이 행동했으니, 그전에 감염이 되든 저주를 받든 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 정도의 대규모 저주는 사실상 불가능하단 말이지.
어르신을 능가하는 힘을 지닌, 신적인 무언가가 아니고서야…….
“우선 저는 계속해서 꿈을 살피면서 사람들을 구할게요. 겸사겸사 병의 분포나 진행 방향도 확인하고요.”
“저 또한 후원 재단의 외부 조사가 끝나는 대로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아무리 당신이라고 해도 제국을 전부 살필 수는 없을 테니까요.”
“부탁드릴게요, 대공자……, 아니, 공작님.”
기억이 부분적으로 돌아온 이후로는 자꾸 ‘대공자’라는 호칭이 입에 붙는단 말이야.
‘그러고 보니 10년 사이에 대공자에서 어엿한 공작 작위까지 받았네.’
새삼스레 느껴지는 세월의 흔적에 슬쩍 미소를 지은 순간이었다.
“폐, 폐하! 여기 계셨군요!”
저 멀리서 누군가가 헐레벌떡 다가오며 소리쳤다.
보아하니 계속해서 루스를 찾아다닌 모양인데. 괜히 미안해지는걸.
“개인 시간을 보낼 때는 찾지 말라고 했을 텐데.”
곧이어 루스가 시리도록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나를 대하던 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음성이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정말 기뻐요’ 같은 말을 하면서 쑥스럽게 웃었으면서.
“무슨 일이지?”
곧이어 그가 턱을 치켜올리며 물었다. 남자는 이러한 루스의 모습이 익숙하다는 듯, 숨을 고를 생각도 하지 않으며 말을 내뱉었다.
“외, 외람된 말씀이오나, 아무래도 도서관에 침입자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