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6화
“공작님!”
나는 황급히 쓰러진 유스틴을 끌어안아 부축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사람이 갑자기 쓰러지다니.
이건 마치…….
“무슨 일이야?”
곧이어 지크프리트 씨와 루스 역시 내 옆으로 다가와 앉으며 물었다.
나는 유스틴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대며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열도 없고 숨도 고른 걸 보면 열병은 아니에요. 사실 이런 걸 고려할 필요도 없이, 보나 마나 끝없는 밤의 병일 테지만요.”
“이렇게 갑자기 나타난다고? 그것도 이 도련님 혼자서만?”
“그건…….”
나는 차마 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솔직히 아직 감이 안 잡혀.’
황궁을 벗어난 이후로 줄곧 다 함께 행동했는데, 왜 하필 유스틴만 끝없는 밤의 병에 걸린단 말인가.
지크프리트 씨도, 나도, 루스도 모두 아무런 이상이 없는데.
이렇게 갑작스럽게, 아무런 예고도 없이…….
“침착해요, 미에나.”
바로 그 순간, 크고 따뜻한 손이 내 손등 위에 포개어졌다.
“당장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고, 미에나는 그걸 해낼 수 있으니까요.”
고개를 들어 올리자, 특유의 티 없이 맑고 푸른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혼란했던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히는, 깊고 굳은 신뢰의 눈빛.
“……맞아요.”
나는 짧은 순간 루스와 시선을 맞추고서 길게 숨을 내쉬었다.
원인을 파악하는 건 나중의 일이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건 명확했다.
“우선 주위 통제 좀 부탁드릴게요, 러셀 경. 지금 다들 깜짝 놀라신 것 같은데.”
“그래, 알았다.”
내 말에 지크프리트 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 주위로 몰린 사람들을 뒤쪽으로 물리기 시작했다.
“폐……, 루스.”
평소 같으면 어르신께 나를 맡겼겠지만, 당장은 그가 근처에 없으니 어쩔 수 없지.
나는 웅성거리는 주민들의 눈길을 애써 무시한 채 루스에게 침착하게 말을 걸었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약에 제가 한 시간 이상 깨어나지 않으면 그때는 어떻게 해서든 어르신을 찾아와 주세요.”
물론 그전에 어르신이 내 낌새를 눈치채고 돌아올 테지만.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 정말 얼마 안 걸릴 거예요. 머리 땅에 부딪히지 않게 해 주시고요.”
“미에나?”
“그럼 잘 부탁드려요!”
마지막으로 루스에게 신뢰의 눈빛을 쏘아 보낸 후, 나는 그대로 마법 주문을 외웠다.
동시에 촛불이 꺼지듯 의식이 점멸한다 싶더니, 곧 지독히도 익숙한 풍경이 펼쳐졌다.
나는 바로 앞에 드러난 빛나는 문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문이 밝긴 밝네. 역시 황제의 최측근이라 이건가.
[아무튼, 어떻게 된 게 그냥 넘어가는 날이 없나 몰라.]
분명 옛날에도 어디 놀러 갔다 하면 이런 식으로…….
[옛날에도?]
또 한 번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나는 유스틴의 문 앞에 선 채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면 이전에도 이런 기시감을 느낀 적 있었지.
정확히는 내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보는 게 맞겠지만.
[유스틴 에버딘.]
나는 그의 문 위에 걸린 명패를 바라보며 나지막이 이름을 되뇌었다.
지난번 시두스 저택에서 사업 현황표를 살펴봤을 때, 에버딘 가문이 시두스 가문과 협업을 시작한 시기가 정확히 내가 죽은 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시두스 가문에 후원했던 흔적도 발견할 수 있었고.
‘이걸로 봐서는 나랑 나름대로 친밀했던 관계였을 것 같은데.’
대체 어떻게 연이 닿은 건지는 전혀 감이 안 잡힌단 말이야.
어쨌든 우선은 이 남자의 꿈에 들어가 꽃을 뽑아야 하겠지만.
[정당방위입니다. 화내지 마세요.]
이윽고 나는 문고리를 잡아당기고서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
나는 꿈을 가득 채운 풍경에 섣불리 발을 떼지 못하고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꿈속의 배경은 낯선 듯하면서도 어쩐지 지독하게 익숙한 공간이었다.
적어도 한 번은 와 본 적 있는, 나와 연관이 깊은 장소.
[아무리 대공가라고 할지라도, 제 연명 치료비를 대는 건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 될 거예요.]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새어 드는 빛 자락, 그 비스듬한 선에 반쯤 걸친 기묘한 소녀.
오랜 빗질로도 숨길 수 없는 윤기 없는 잿빛 머리카락, 생기 없이 움푹 파인 볼을 가진 소녀가.
[제 무엇을 보고 이렇게 공격적으로 투자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번에는 대공자님의 감이 틀렸을 수도 있어요.]
누구보다 반짝이는 눈빛으로 차분하게 말을 건넸다.
머리카락 색도 눈동자 색도 달랐으나, 저 아이는 분명 나였다.
[대공자님?]
[아.]
10년 전의 내가 한 발짝 앞으로 다가가자, 그 앞에 서 있던 소년이 무심코 감탄사를 내뱉었다.
당연하게도 유스틴 에버딘이었다.
‘진짜 어리네.’
물론 저 때의 나보다는 연상 태가 나지만, 그래도 역시 애는 애야.
나는 그의 꿈에 피어난 꽃을 뽑을 생각을 잠시 접어 두고서 눈앞에 펼쳐진 상황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어차피 꽃이야 금방 뽑을 수 있으니, 내가 모르는 나의 과거를 살펴보고자 하는 마음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폐광산을 제값의 몇 배에 팔려고 하는 사람이 했다기에는 너무 양심적인 발언이라.]
곧이어 어린 유스틴이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그러고서 그는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가.
[설령 제 감이 틀려도 괜찮습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격이어도 괜찮습니다.]
조금 전과는 달리 희미하게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살 수만 있다면, 그런 것쯤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습니다.]
동시에, 시야가 한순간에 뒤바뀌었다.
이번에 드러난 풍경은 시두스 저택이 아니었다.
하늘로 뻗은 수평선에 맞춰 넓게 펼쳐진 모래사장, 마음을 간질이는 청량한 바람.
닿을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철썩이는 얕은 파도 앞.
[이런 곳에서는 신발을 벗는 게 예의라니까요, 대공자님.]
익숙하다는 듯 맨발로 모래를 밟고 선 소녀가 엉거주춤 서 있던 남자아이의 손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여행의 낭만, 기본 중의 기본!]
그러자 소년은 하나로 질끈 묶인 채 바람결을 따라 살랑이는 소녀의 머리카락을 응시하다가.
[아무리 여행을 많이 다녀도, 당신처럼 엉터리 예의를 가르쳐 주는 이는 없더군요.]
끝내 소녀를 따라 비스듬히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이제는 당신보다 여행의 낭만을 더 즐길 수준은 됐을 겁니다.]
현실에서는 마주한 적 없던 상냥하고 다정하기 그지없는 웃음이었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익숙하고, 어쩐지 눈에 익은 바로 그 미소.
나는 불현듯 한 가지를 깨달았다.
‘어쩌면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
끝없는 밤의 병은 사람이 욕망하는 바를 토대로 가장 행복한 순간을 끊임없이 보여 주고 반복한다.
유스틴의 꿈속에서 반복되는 모든 순간에는, 빠짐없이 내가 존재했다.
[잔말 말고 손잡아요.]
왁자지껄한 거리 위에서 그에게 손을 내미는 어린 미에나.
[읏즈 므스으.]
유스틴과 왈츠를 추며 부끄러운 듯 잇새로 말을 내뱉는 미에나.
그리고 그런 과거의 나를 바라보는 유스틴의 눈빛은, 지금의 내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다정하고 상냥해서.
[후원자와 피후원자, 동업자의 관계보다는……, 그래.]
다시 한 바퀴 돌아온 꿈, 이번에는 유스틴이 부드럽게 눈꼬리를 휜 채 말을 건넸다.
[친구가 좋겠군요.]
그 순간 나는 홀린 듯 그의 앞으로 천천히 다가가기 시작했다.
나로서는 이게 진짜 있었던 일인지, 혹은 유스틴의 꿈이 불러낸 환상인지 알 수 없었지만.
[만약에 이게 모두 사실이라면.]
설령 당신이 어린 미에나에게 건넨 말은 진짜 과거가 아닐지라도, 당신이 지금 마주한 이 모든 상황이 정말 우리의 과거라면.
[기억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스미는 죄책감에 가슴이 아릿하게 조여들었다.
단순히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과, 내가 잃은 기억을 직접 마주하는 건 큰 차이가 있었다.
이렇게 찬란한 시절을 홀로 기억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얼마나 서운했을까.
‘그렇대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내게는 이 모든 기억이 여전히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져서.
[꿈에서 깨어나도 너무 부끄러워하지는 마세요.]
나는 괜히 한번 너스레를 떨고서 어린 미에나의 가슴에 핀 꽃에 손을 가져다 댔다.
다행히 유스틴은 별다른 저항 없이 내 행동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보통 다른 사람은 꽃을 뽑지 못하게 하려고 날 방해하던데, 역시 유스틴이라 이건가.
[일어나서 만나요.]
곧이어 피어난 꽃을 망설임 없이 뽑아낸 순간이었다.
‘동업자가 아픈 건 싫으니까요.’
‘나중에 시간 되면 놀러 오세요. 진짜로 리처드 8세 태워 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