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3화
귀하의 말과 행동을 보건대, 저희가 여간 사이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만.
자못 진지하게 질문을 던지자, 전령새의 부리가 딱 다물렸다.
심지어 쉴 새 없이 내 손에 머리를 비비던 행동도 멈춘 채였다.
‘왜, 뭔데.’
내가 너무 어려운 질문을 했니? 아니면 답변하기 힘든 거야?
설마, 알고 보니 내가 황제의 정혼자였다든가…….
― 글쎄요.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잠시 인형처럼 멍하니 서 있던 전령새가 그제야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 직관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역시 스승과 제자였으려나요.
“스승이요?”
― 미에나가 제게 세상을 가르쳐 줬으니까요.
그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더더욱 우리 사이를 짐작할 수 없어져 고개를 갸웃거렸다.
10년 전이면 나도, 저 사람도 아주 어릴 때가 아니던가?
그런데 스승과 제자라니.
― 물론 이건 제가 스스로 생각한 거고, 정확히 말하자면 미에나는 제 첫 친구예요.
“첫 친구요.”
스승과 제자보다 더한 게 나왔는데.
나는 듣기만 해도 무거운 단어를 입에 담고서 침음을 삼켰다.
‘사업에 후원에, 심지어 황제의 스승이자 첫 친구라니.’
10년 전의 나는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녔단 말인가.
“그러면 제가 폐하께 혹시 막, 데미안이라고 부르고 그랬었나요?”
사실은 나를 찾아 헤맸던 게 그날의 무례를 따지기 위함이라든가.
괜히 오싹해지는 마음에 재빨리 묻자, 건너편에서 나지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아뇨, 그렇지 않아요.
휴, 다행이다. 아무리 그래도 황제가 될 사람한테 최소한의 예의는 차렸던 모양이구나.
믿고 있었다고, 미에나!
― 미에나는 절 항상 루스라고 불렀어요. 루미니스, 줄여서 루스.
“오…….”
3초의 믿음이 처참히 깨지는군.
나는 곧바로 입술을 오므리고서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어렸을 때 나는 굉장히 대담한 아이였구나. 황자의 이름을 바꿔서 부를 정도라니.
반응을 봐서는 다행히 큰 무례로 받아들이지 않은 모양이지만.
― 데미안이라는 이름은 제가 그곳을 나온 후, 선황제가 내린 거예요.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마음씨 넓은 황제가 계속해서 사근사근 말을 이었다.
― 그래서 제게는 큰 의미가 없는 이름이지만, 미에나가 원한다면…….
그러고서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 미안해요, 미에나. 저는 역시 미에나가 절 루스라고 불러 줬으면 좋겠어요.
자못 부끄러운 듯, 이전보다 작고 여린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나는 순간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가 이내 정색하며 말했다.
“제가 감히 어떻게요.”
― 하지만 아까 에버딘 공한테는 유스틴이라고 불렀잖아요.
“아니, 그건 반사적으로…….”
나는 순간 눈을 빠르게 끔뻑였다.
그걸 기억하고 있었단 말이야?
“그건 공작님께서 갑자기 이름을 정정해 주셔서 그런 거고, 지금은 꼬박꼬박 공작님이라고 부르고 있잖아요.”
옛날이면 몰라도 지금은 절대 그렇게 못 부르지.
내가 기억은 없어도 신분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다 알고 있는데.
“아, 맞아. 그 김에 이야기하자면, 부디 공대도 거둬 주세요. 러셀 경이나 공작님께는 편하게 하대하시는 것 같던데.”
내친김에 내내 마음에 담아 왔던 이야기까지 꺼내자, 이번에는 전령새가 작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야말로 아쉬움이 가득 담긴 한숨이었다.
― 하지만 미에나 앞에서는 이게 습관이 되어 버린걸요. 경외하는 이에게 어떻게 말을 쉽게 할 수 있겠어요.
“악, 폐하.”
― 게다가 제가 말을 놓으면 미에나도 편하게 말해야 하는걸요. 그때 그랬잖아요. 우리는 친구니까, 서로 말 편하게 하자고…….
“아악!”
나는 곧장 소리를 내질렀다.
진짜 내가 그랬다고?
기억 잃었다고 아무 말이나 막 하는 거 아니야?
― 지금 당장 그렇게 해 주기를 바라는 건 아니에요. 저만 해도 지금까지도 미에나한테 경어를 쓰고 있는걸요.
곧이어 그가 산뜻하게 입을 열었다.
그에 맞춰 전령새 역시 그 콩알만 한 눈을 휘어 방긋방긋 미소를 짓고는 괜히 날개를 올렸다 내렸다 하며 눈치를 살피는 척했다.
나는 그 모습을 괜히 밉지 않게 흘겨보다가, 곧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보쇼, 사람이 귀여워서 봐주는 줄 아십시오.
이 복슬복슬한 새의 모습만 하지 않았어도, 아니, 일전에 특유의 순진한 표정만 짓지 않았어도…….
― 어쨌든, 아까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이윽고 그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 미에나는 제게 이름을 주고, 빛을 알려 주고, 살아가는 법을 알려 줬어요.
나는 또 한 번 숨을 멈추고서 그의 말을 잠자코 경청했다.
― 그래서 저는 당신이 말한 대로, 당신이 이끈 대로 살아왔어요.
언젠가 다시 만날 날을 그리며.
차분하고 다정한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침실 안에 울려 퍼졌다.
나는 감히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하고 가만히 고개를 기울였다.
내가 마주하기엔 아직은 조금 버거운 감정.
― 부담을 주려고 한 말은 아니었어요. 저는 미에나가 영영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도 괜찮아요. 그냥, 당신을 만나면 꼭 이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이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건지, 그가 곧 덧붙여 말했다.
― 늘 직접 알려 주고 싶었어요.
온 마음을 담아낸 듯, 내뱉어지는 한 자 한 자가 무엇보다 묵직했다.
― 당신의 존재로 인해 포기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다는 걸.
“…….”
― 미에나가 그만큼 멋지고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나는 괜스레 가슴 한구석이 뭉클해져, 멋쩍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부담스러운 게 정상인데. 다른 사람이 했으면 정말 못 견뎠을 텐데.
목소리가 다정해서 그런가, 저 유순한 표정이 상상되어서 그런가.
‘다행이야.’
기억은 없을지언정, 이렇게 다시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뿐이었다.
― 사실 지금도 믿기지 않아요. 저는 언제나 미에나를 꿈에서만 만났거든요.
이윽고 전령새가 내 손바닥 위로 총총 올라오고서 조잘거렸다.
그 모습이 정말로 신난 아이처럼 보여, 나는 무심코 웃음을 흘렸다.
“지금 주무시면 꿈에서 또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요.”
― 하지만 미에나가 바쁠 거 아니에요. 끝없는 밤의 병을 조사하느라 다른 사람의 꿈에도 들어가야 할 테고요.
오, 이렇게 정곡을 찌른다고?
― 그래도……. 미에나가 저를 다시 만나러 와 준다면, 저는 정말 기쁠 거예요.
뒤이어 그가 자그맣게 덧붙이고서 입을 다물었다. 나는 날개 뒤로 머리를 숨긴 전령새를 바라보며 또 한 번 소리 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한 제국의 황제가 자꾸 이렇게 귀엽게 굴 거냐고.
“말씀하신 대로 제가 잠든 후에는 조금 바쁘지만, 그전까지는 마침 한가하네요.”
― 앗, 그러면…….
“그러니 현실에서 폐하께서 원하시는 만큼 이야기를 나눠 보는 건 어떨까요? 저는 폐하의 첫 친구니까.”
― 좋아요……!
내 말에 전령새가 화들짝 고개를 치켜들며 외쳤다.
나는 결국 참을 수 없어 소리 내어 웃어 젖혔다.
가족이었다면 그 무게에 짓눌려 이렇게 하지 못했을 텐데. 오늘만 봐도 저택에서 도망쳐 나오지 않았던가.
‘기억이 없는 상태에서도 친구 정도는 다시 할 수 있어서 그런가.’
아니면 전령새가 너무 귀엽게 느껴져서 그런가.
어쩌면 이 남자가 차마 거부할 수 없는 분위기를 뿜어서 그런 걸지도 몰라.
나는 그대로 침대맡에 턱을 괴고서 작은 전령새와 조잘조잘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 지쳐 잠에 들 때까지.
* * *
“눈 밑에 이 그늘 뭐지?”
며칠 뒤, 황궁 내 외진 후원.
지크프리트 씨가 나를 마주하자마자 툭 말을 내뱉었다. 나는 괜히 눈 밑을 꾹꾹 누르며 대꾸했다.
“잘못 보신 것 같습니다만.”
“아니야, 확실해.”
이 예리한 사람 같으니라고.
‘밤을 지새운 건 아닌데.’
요 며칠 이야기 나눈다고 평소보다 늦게 자기는 했지만.
나는 그의 곁에 서서 해사하게 웃고 있는 루스를 흘긋거리며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었다.
저 사람은 나보다 늦게 잤으면서 어떻게 잡티 하나 없이 뽀얀 거지?
그나저나 유스틴은 왜 눈 밑 그늘이 나보다 짙은 거야?
“그보다 공작님, 혹시 밤새서 일하시는 건 아니죠?”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근래에 일이 많았으니까요.”
내 말에 유스틴이 옅게 한숨을 내쉬고서 답했다.
저 눈 밑 그늘 길이를 봐서는 하루 이틀 밤새운 게 아닌 것 같은데.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잠은 줄이면 안 돼요. 잠이 부족하면 단명한다고요.”
“그래, 말마따나 네가 할 말은 아닌 것 같구나.”
동시에 어르신이 한쪽 눈썹을 씰룩이며 말했다. 나는 그를 한 번 흘겨본 후 다시 유스틴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언가를 회상하듯, 조금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보다, 오늘 해야 할 일에 관해 이야기하죠.”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 유스틴이 내게서 시선을 돌리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나 역시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각지의 정보가 취합되려면 한동안 기다려야 할 것 같아서, 그사이에 제가 직접 발로 뛰어 봤거든요.”
그래 봤자 평소에 하던 것처럼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꿈에 들어가 꽃을 뽑은 게 전부지만.
“저번에 공작님께서 주신 영지 관리인 명단을 대조해 봤더니, 오베론 지역에서 집단으로 발병된 걸 알게 됐어요. 그래서 오늘은 그쪽을 조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나는 잠깐 말을 멈추고서 씨익 미소 지었다.
“다들 와이번 좋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