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8화
물론 내 추측이 지나친 비약일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열에 아홉은 비약으로 생각할 정도였다.
‘하지만 내 직감이 말하고 있어.’
이건 단순한 전염병이 아니라고.
황제 시해와 끝없는 밤의 병, 두 개의 사건에 분명 내가 알지 못하는 연결 고리가 있다고.
“……충분히 고려해 볼 만한 이야기군요.”
잠깐의 침묵이 흐른 후, 유스틴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각각 별개로 사건을 조사하되, 앞서 말한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게 좋겠습니다.”
나는 속눈썹을 팔랑이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계속 인상만 쓰고 있길래 터무니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할 줄 알았는데. 제법 의외네.
“당연히 러셀 경이 겪었다는 증상과 이번에 퍼진 병이 서로 다를 가능성도 놓쳐서는 안 되겠죠. 정말로 전염병일 가능성도 있으니까요.”
“사실 발병 양상으로 봤을 땐 전염병에 더 가깝기는 하지. 황도에 퍼지기 시작한 건 비교적 최근이고, 그전에는 마을 단위로 환자가 발생했으니.”
“……제 생각보다 환자가 더 많았던 모양이네요.”
나는 이제야 슬슬 ‘끝없는 밤의 병’에 대해 알게 되었는데.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것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내가 한 사람을 살리는 동안, 한쪽에서는 열 사람이 쓰러진다.
내가 레어에 머무는 사이 얼마나 많은 사람이 꿈에서 깨지 못하고 스러져 갔을까.
“……미에나.”
바로 그때, 유스틴의 목소리가 조심스레 귓속을 파고들었다.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사람들을 살리지 못했다고 한들 그건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알고 있어요.”
나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유스틴의 말은 옳았다.
사람을 살리지 못했다고 한들, 이건 내 의무가 아니니 내 잘못이 될 수 없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부채감이 느껴지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서.’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이라서.
“그냥, 아쉬운 거죠.”
내가 주변의 문도 함께 살폈으면 조금은 더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꿈에서 깨어날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종이비행기를 날렸더라면, 그랬다면.
“아쉬워할 시간도 없습니다.”
곧이어 그가 단호하게, 그러면서도 이전과는 달리 희미한 열감이 느껴지는 눈빛을 띠고서 말을 이었다.
“앞으로 생각해야 하는 건 어떻게 하면 사람을 더 살릴 수 있느냐죠.”
“…….”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이 병인지 저주인지 모를 현상의 원인을 찾아 제거하는 거고요.”
나는 그 냉철한 눈동자를 잠시 들여다보다가, 이내 한숨을 푹 내쉬고서 다시금 미소 지었다.
아까와는 달리 조금 더 힘이 실린 웃음이었다.
“당신 말이 옳아요.”
떠나간 사람들을 잊지 않되, 이 참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게 바로 내가 할 수 있는, 내가 해야 하는 일이었다.
나는 생각을 마치고서 이번에는 황제를 바라보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말인데,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이번 ‘끝없는 밤의 병’ 사건 조사에 저도 참여할 수 있을까요?”
“…….”
“갑작스럽다는 건 알아요. 아무리 옛날에 알던 사이라고 해도, 다시 만난 지 얼마 안 된 상황에서 이렇게 구는 건 당황스러우시겠죠.”
이상하게 보이는 거 인정해. 수상쩍게 느껴져도 할 말은 없어.
“사실 끝없는 밤의 병에 관해서는 저도 따로 조사를 진행하려고 했거든요. 제가 찾아야 하는 게 있는데, 자꾸 일이 꼬여서…….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만.”
나는 손가락 끝으로 뺨을 긁적이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사실 굳이 폐하를 알현하려고 한 이유 중 하나가 이거거든요.”
이건 어르신에게도, 플라멘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나의 진심이었다.
‘그 둘은 내가 끝없는 밤의 병을 조사하기 위해 황궁에 가겠다고 하면 말릴 게 뻔했으니까.’
물론 현상금을 받고 싶다는 마음도 진심이긴 했지만.
“저 의외로 유능하거든요. 게다가 지크프리트 씨가 말한 대로, 아마 지금 상황에서 이 병을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을 테고요.”
중간중간 다른 임무도 같이 수행해야 하긴 하지만, 맡겨 주신다면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나름의 자기 PR을 담아 힘차게 말을 마친 순간이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갑자기 천장 위로 새하얀 빛이 내려온다 싶더니, 이내 나풀거리는 옷자락이 내 시야 가득 담겼다.
나는 순식간에 뒤바뀐 거대한 마력의 흐름을 마주하고서 반사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어르신?”
냄새난다고 황궁 안으로는 안 들어오겠다고 했던 사람이, 이렇게 난데없이 나타난다고?
“이게 무슨……, 분명 결계가 있을 텐데?”
유스틴 역시 난데없이 나타난 존재에 깜짝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중얼거렸다.
많이 놀라셨죠, 저도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희 어르신은 그런 인간의 상식 따위는 아득히 넘어서는 존재라서요…….
“그 있느니만도 못한 결계 따위, 내 알 게 뭐냐.”
곧이어 주변의 시선을 모조리 무시한 채 내 앞에 다가선 어르신이 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아얏!”
딱,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이마에 둔탁한 통증이 퍼졌다.
“아파요, 어르신!”
“이 맹랑한 것이 감히 나를 속이려 들지 않았느냐. 내 너를 아끼니 이 정도에서 그치는 것이다.”
“속이다니, 제가 언제요!”
진실을 조금 숨기기는 했지만, 그래도 속이지는 않았는데.
자못 억울함을 담아 그를 올려다보자, 어르신이 또 한 번 손을 들었다.
“이렇게 갑자기 나타나지 않는 이상, 너는 내 앞에서 이런 말을 꺼내지도 않았겠지. 괘씸한 것.”
이어 그가 또 한 번 내 이마에 딱밤을 날리려던 순간이었다.
“당신께서 어떤 지고하신 존재인지는 알지 못하겠으나.”
하얗고 기다란 손가락이 어르신의 손목을 붙잡아 챘다.
“이곳은 엄연히 제 공간입니다.”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어르신의 손목을 붙잡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힘을 담지 않았다고는 하지만, 감히 어르신의 손목을 붙잡는다고?
“흐음.”
곧이어 어르신이 느른하게 고개를 꺾으며 콧소리를 내뱉었다.
동시에 나는 속으로 간절히 기도를 외기 시작했다.
“이제 보니 네놈, 그 찌꺼기의 자손이구나. 냄새가 지독한 걸 보면, 그중에서도 피가 진한 녀석이고.”
제발저사람을죽이지말아주세요.제발저사람을죽이지말아주세요.제발저사람을…….
“뭐, 되었다. 내 아이도 그에게 받은 것이 있으니.”
그러나 내 예상과는 달리, 어르신은 별다른 횡포 없이 그가 붙잡은 손을 뿌리칠 뿐이었다.
다행이야, 내 기도가 통했어.
“갑작스럽게 난입해서 죄송합니다. 저희 어르신이 이런 데에는 상식이 거의 없다시피 해서…….”
나는 곧바로 어르신의 반대쪽 손을 붙잡아 내 뒤로 끌어당긴 후, 세 사람을 향해 멋쩍게 미소 지었다.
“러셀 경은 이미 아시겠지만, 이분이 바로 절 살려 주시고, 몇 년 동안 돌봐 주신 분이세요.”
무섭지만 착한 어르신입니다.
“……그럼 그때 그 와이번도.”
“와이번? 혹시 리처드 8세요?”
“기억을 잃었다면서, 대체 왜 그런 건 변하지 않는 겁니까?”
내 말에 유스틴이 진심으로 학을 떼며 말했다.
그사이 어르신은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네 그들을 도울 때마다 힘이 쌓이는 것도 말해야지.”
“즈응흐 흐스으, 으르슨.”
왜 갑자기 나타났나 했더니, 날 방해하려고 작정했나 보군.
“그렇게 계속 힘이 쌓이면 이번에는 내가 손쓸 수도 없이 죽어 버린다는 것도.”
“그게 무슨 뜻입니까?”
어르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세 사람의 시선이 매섭게 꽂혔다.
나는 어색하게 웃음을 흘리며 황급히 수습에 나섰다.
“하하하, 그건 어르신이 도와주시면 바로바로 제거할 수 있잖아요.”
“애초에 내게는 말하지 않고 떠날 작정이었으면서? 거짓말하는 아이는 도울 생각이 없단다.”
“아, 언제는 쉽게 죽게 두지 않는다고 하셨으면서!”
“그 말은 결국 저 사람의 말이 사실이라는 뜻 아닙니까?”
내 말에 유스틴이 또 한 번 날카롭게 물었다. 심지어 그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격양된 상태였다.
나는 어르신의 입가에 걸린 의기양양한 미소를 마주하고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제가 졌습니다, 어르신.
“……어르신도 이 조사에 함께 끼워 주세요.”
나는 결국 하는 수 없이 입술을 삐죽 내밀고서 말했다.
몰래 장거리 순간 이동 마법으로 돌아다니려고 했는데, 이렇게 된 이상 꼼짝없이 마법은 봉인이군.
“어르신께서 함께해 주시면 아무 문제도 없어요. 조금 전에 말 나왔던 것도 해결되고요. 진짜예요.”
“하지만…….”
“이것만큼은 진실이란다. 내 나의 계약자를 죽도록 놔둘 만큼 천치는 아니니.”
일순, 황금빛 눈동자가 잠시 황제에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어쩐지 어르신이 자꾸 황제를 도발하려는 것 같단 말이지.
꼭 뭔가를 시험하려는 것처럼.
“……좋습니다, 다만.”
그렇게 잠깐의 정적이 지나고.
황제가 여전히 나를 시야 가득 담은 채,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