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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 필요하신가요? (127)화 (127/154)

제127화

그렇게 한바탕 소란 아닌 소란이 지나간 후.

“그러니까, 당신 말대로라면.”

내가 지크프리트 씨에게 했던 이야기를 반복하는 내내 나를 말없이 노려보던 남자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잔뜩 가라앉은 데다 형편없이 갈라져, 황제에게 쏘아붙이던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목소리였다.

“죽었던 것은 확실하나 모종의 이유로 다시 살아났고, 죽기 이전의 기억은 모두 사라졌다.”

“네, 맞아요.”

“그 상태로 9년 동안 내내 한곳에서 요양하다가 모종의 이유로 황제 암살 계획을 알아채 막으러 왔고, 그때 폐하를 만났다.”

“바로 그거예요.”

이 집 요약 잘하네.

슬며시 웃으며 대꾸하자, 나를 바라보던 남자의 얼굴이 또 한 번 일그러졌다.

화가 난 건지 짜증 난 건지, 혹은 기쁜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러면 내가 누구인지도, 당신과 내가 어떤 관계였는지도. 당신이 내게 맡긴 것들도 모두.”

곧이어 그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뜨며 말을 이었다.

“모조리 잊었다는 거군요.”

“그런, 그렇죠…….”

제 의지는 아니지만 일단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괜히 찔리는 마음에 눈을 돌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푸른 토파즈를 닮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내내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듯, 나와 눈이 맞자마자 사르르 눈꼬리를 휘었다.

황제는 원래 위엄이 넘쳐야 하는 거 아니야? 저렇게 강아지 같아서 어떻게 해?

“어우, 어우. 적응 안 돼.”

음, 확실히 모두한테 저러는 건 아닌가 보군.

나는 옆에서 어깨를 바르르 떠는 지크프리트 씨를 엿보고서 은은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황제는 여전히 예쁜 미소를 띠고서 말을 꺼냈다.

“미에나가 기억을 잃었든, 잃지 않았든 그게 무슨 상관이겠어요.”

“…….”

“중요한 건 살아 있다는 거죠.”

그거면 자신은 정말 괜찮노라고, 그가 나긋하고 다정하게 말했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를 따라 미소 지었다가, 곧 내게 닿은 흉흉한 시선에 입꼬리를 반쯤 내렸다.

아무래도 그 의견은 아직 옆 분과 협의가 안 된 듯해요, 폐하.

“이 상황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 혼자 모든 기억을 잃었다는데, 그게 어떻게 중요하지 않습니까?”

“당연하지 않나, 기억이 어찌 사람의 생명보다 중요할 수 있겠어?”

“어차피 폐하께선 그녀가 죽었다는 사실도 안 믿으셨잖습니까.”

“그야 당연하지.”

내내 반달처럼 접혀 있던 눈동자가 확신을 담은 채 반짝였다.

“내 소원이 닿지 않았으니까.”

나는 순간 알 수 없는 섬뜩함에 휩싸였다.

단순한 신뢰를 아득히 넘어선, 맹신에 가까운 눈빛. 그 안에 빈틈없이 들어찬 건 분명 경외에 가까운 애정이었다.

그 애정이 향하는 곳은…….

“그, 그나저나 모두 저와 면식이 있는 분들이시라니 참 신기하네요. 하하, 하.”

하마터면 홀릴 뻔했네.

나는 황급히 그에게서 시선을 떼며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자 검은 머리의 남자가 여전히 인상을 찌푸린 채 대꾸했다.

“아까도 말했잖습니까. 당신이 이 상황을 만들어 낸 장본인이라고.”

“애초에 네 유언이 이거였으니, 말 다 했지. 나한텐 폐하께서 즉위하시면 당장 옆에서 직접 지켜 달라는 부탁을 남겨 놓고 갔는걸.”

“아하하, 그렇구나.”

그걸 유언으로 전했다니, 나도 참 영악한 사람이었구나.

‘반대로 말하자면 그만큼 저 남자를 아꼈다는 소리일 테고.’

대체 저 사람과 나는 어떤 사이였던 걸까.

나는 또 한 번 황제를 바라보고서 꿀꺽 침을 삼켰다.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나를 알고 있는데, 반대로 나는 그들을 알지 못하니 머릿속이 뿌옇게 흐려지는 느낌이었다.

그러면서도 막연하게 그들에게서 편함과 그리움을 느끼는 게, 더더욱 이상하게 느껴져서.

“혹시 이거 지금 제가 사과해야 할 타이밍일까요?”

딱히 제 잘못은 아닌 듯합니다만.

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말을 꺼내자, 지크프리트 씨가 고개를 내저으며 말을 건넸다.

“네가 사과할 일이 뭐가 있다고. 저 도련님이 신경 쓰여서 그러는 거면, 신경 쓰지 마. 애초에 네가 누구인지도 못 알아봤는데, 뭘.”

“모습이 모두 바뀐 사람을, 그것도 이미 죽은 걸로 알고 있던 사람을 어떻게 단번에 알아봅니까?”

저기 있는 황제는 나를 단번에 알아본 것 같지만, 일단은 입 다물고 있는 게 좋겠지.

“그러고 보니 러셀 경은 미에나를 대체 어떻게 알아본 겁니까?”

그사이 남자가 날카롭게 도끼눈을 뜬 채로 지크프리트 씨에게 물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그렇게 나를 매섭게 바라봤으면서, ‘미에나’라고 부르는 건 더없이 익숙해 보인 까닭이었다.

‘게다가 조금 떨리고 있었지.’

내 이름을 발음하는 것조차 힘겨운 것처럼.

“그야 딱 보면―”

“처음엔 못 알아보고 작업 걸지 말라고 하셨으면서.”

이윽고 나는 지크프리트 씨의 말을 가로채고서 생긋 미소 지었다.

순간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한 말인데, 어쩐지 굉장히 익숙한 느낌이군.

“……그 불길한 꿈에 갇힌 사람을 능숙하게 빼내 오더군. 그게 가능한 사람은 내가 알기로 한 명밖에 없으니까.”

곧이어 지크프리트 씨가 한 번 헛기침을 내뱉고서 순순히 진실을 토해 냈다.

나는 그제야 경위를 파악하고서 속으로 탄성을 내뱉었다.

어쩐지 곧바로 태도가 돌변한다 싶더라니, 그런 이유였구나.

“전에도 제가 이런 식으로 사람을 구한 적 있었나 봐요.”

“……그랬었죠.”

“그뿐이겠어, 심지어 그중 한 명이 나였는데.”

지크프리트 씨가 씁쓸한 미소를 띤 채 말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이상한데.’

어쩐지 아귀가 맞지 않아.

“저, 궁금한 게 있는데요.”

나는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러셀 경과 그쪽…….”

“유스틴.”

“유스틴의 말을 들어 보면 제가 죽기 전에도 이 병일지 저주일지 모르는 현상이 발생했던 것 같은데, 정작 사람들 사이에서 퍼지기 시작한 건 최근인 것처럼 보이거든요. 제 생각이 맞을까요?”

하임 산맥 근처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봐도 그렇고, 오늘 사람들이 보인 반응을 봐도 그렇고.

“……맞습니다.”

내 말에 유스틴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황궁에 보고되기 시작한 것도, 사람들이 이 현상에 ‘끝없는 밤의 병’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모두 1년이 채 되지 않은 일이죠.”

“그 당시에 이 병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염이 되었었나요?”

“아뇨,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마을 사람들은 신벌이라고 여겼었지.”

지크프리트 씨가 덧붙여 말했다.

나는 그들의 말을 조합하며 유스틴을 따라 느릿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때 당시에는 병으로 취급받지 않았던 현상이, 이제 와 각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다는 건…….

“이전에도 생각한 거지만, 이름처럼 진짜 ‘병’은 아닐지도 모르겠네요.”

뒤이어 나는 조심스럽게 추측을 건넸다.

“실은 암살 계획을 알아챌 수 있었던 것도, 그 병에 걸린 사람의 꿈에 들어갔다가 운 좋게 알게 된 거였거든요. 물론 둘이 어떠한 상관관계도 없을 가능성도 있지만…….”

어쩐지 구린내가 난단 말이지.

“본격적으로 병이 퍼지기 시작한 시기도 폐하께서 즉위하시고 난 이후 아닌가요?”

“……그것도 맞습니다.”

“제가 지난번에 떠나기 전에 요셉 해링턴을 조사해 보라고 했던 거, 기억하시나요? 제가 그 사람의 꿈에 들어갔던 건데.”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내 물음에 황제가 싱긋 미소 지으며 답했다.

“본격적으로 조사하기도 전에 죽었다는 소식을 접했지만요.”

“오.”

나는 입술을 한 번 오므리고서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죽은 사람을 조사해 보라고 했으니, 확실히 수배 전단에 오를 만했네요…….”

“수배령을 내려서 언짢았다면 미안해요, 미에나. 하지만 단 한 번도 당신을 이번 일의 용의자로 의심한 적은 없어요.”

곧이어 그가 또다시 강아지처럼 활짝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는 그저 절 구해 준 은인을 찾고자 했던 거예요. 미에나, 당신을요.”

“앗, 그렇다면 양심의 가책 없이 현상금을 제가 받아 가도 될까요?”

“당연하죠. 당신이 원한다면 이 황궁을 드릴 수도 있어요.”

“아뇨, 그건 좀.”

제발 옆 좀 보세요, 폐하. 모두가 당신을 미친놈처럼 바라보고 있잖아요.

“크흠, 아무튼.”

나는 큼큼 헛기침을 내뱉어 주의를 환기하고서 다시 말문을 열었다.

“요셉 해링턴이 죽었다니, 제 추측에 조금 더 힘이 실리는 것 같아서 말씀드리자면…….”

동시에 세 사람의 시선이 내게 꽂혀 들었다.

“요셉 해링턴은 이번 암살 시도가 새어 나가지 못하도록 입막음 당한 걸 거예요. 처음엔 끝없는 밤의 병을 이용해서 처리하려 했지만, 제가 살려 버렸으니 직접 죽인 거겠죠.”

“그 말인즉…….”

나는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서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끝없는 밤의 병을 퍼트리는 사람과 폐하를 시해하려고 하는 범인이 동일 인물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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