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기 그지없는 복도 위로 내 나지막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발소리 하나 없이 앞서 걸어가는 남자를 바라보며 넌지시 입을 열었다.
“음, 저기요.”
“그러고 보니 내 이름도 기억이 안 나겠네. 지크프리트 러셀이야. 옛날의 너는 러셀 경이라고 불렀지.”
“아하, 그렇군요.”
드디어 이름을 알아낸 건 좋지만, 이걸 물어보려고 한 건 아닌데.
“그러면요, 러셀 경.”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를 지금 어디로 데려가고 계시는 건가요……?”
황궁이면 분명 사람도 시녀도 많을 게 분명한데, 이렇게까지 주변에 사람이 없을 일인가?
심지어 조금 전에는 결계를 작동시키는 것처럼 보였지.
‘무슨 비밀 아지트에 가는 것처럼.’
설마 이거 감옥으로 직행하는 루트는 아니겠지?
이 사람이 나한테 이상한 짓을 할 것 같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지만…….
“어디로 가기는.”
곧이어 지크프리트 씨가 나를 흘긋 바라보며 답했다.
“너를 찾고 있는 사람한테 직접 데려다주려는 거지.”
“황제 폐하께, 직접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아니, 물론 최종적으로 황제를 만나게 되겠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폐하께서는 제가 원한다고 이렇게 바로 만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지 않나요?”
최소 몇 다리는 더 거쳐야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물론 그렇긴 한데.”
곧이어 지크프리트 씨가 가던 걸음을 완전히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특유의 짙푸른 눈동자는 처음 만났을 때와는 달리 깊은 애정과 장난스러움으로 물들어 있었다.
“누구 덕분에 내가 황제의 최측근이 되었으니까.”
“오, 그렇군요.”
누가 봐도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는 속뜻을 담은 발언이군.
“그리고 다른 누구도 아닌 너잖아. 그분이라면 분명 이걸 원하실 테니.”
곧이어 지크프리트 씨가 몸을 돌리고서 다시금 앞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잠자코 그의 뒤를 따르며 머리를 굴렸다.
‘현 황제와 나는 이미 예전부터 알던 사이였던 것 같고.’
황제의 최측근인 이 사람과도 내가 꽤 깊게 연관되어 있었는데, 심지어 방금 발언으로 미루어 봤을 때 두 사람을 연결해 준 게 나인 것 같다.
‘나 대체 뭐하던 사람이야?’
평범한 사람인 줄 알았던 내가, 기억을 잃기 전엔 이 세계를 주무르던 실세?!
“아, 그러고 보니.”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거대한 마력의 흐름이 느껴지는 문 앞에 멈춰 선 지크프리트 씨가 입술 끝으로 호선을 그렸다.
“아마 폐하 옆에 한 사람 더 있을 거거든.”
“앗, 네.”
말조심해야 한다는 이야기려나?
“걔도 네가 그렇게 만든 거야.”
“앗, 네에…….”
아무리 생각해도 죽기 전의 나는 범상치 않은 인물이었던 게 분명해.
곧이어 지크프리트 씨가 결계에 손을 가져다 대자, 맞닿은 부분에서부터 환한 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 빛은 지크프리트 씨의 몸을 수색하듯 그의 주위를 맴돌더니, 결계를 조금씩 살라 먹어 사람 한 명이 지나갈 만한 통로를 만들어 냈다.
어르신의 결계와는 다른 느낌이네.
인간 마법사가 만든 결계인가?
‘어르신이 같이 있었으면 꽤 흥미로워했을 텐데.’
찌꺼기의 흔적이 많이 묻은 곳은 들어가기 싫으니 여기는 혼자 다녀오라나 뭐라나.
달리 말하면 그만큼 이곳이 안전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들어와.”
곧이어 지크프리트 씨가 목소리를 낮추고서 내게 속삭이듯 말을 건넸다. 나는 덩달아 조심조심 걸으며 그의 뒤를 따랐다.
결계 내부는 어쩐지 익숙한 듯하면서도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퍽 다른 느낌이었다.
도서관처럼 넓게 펼쳐진 책장의 향연, 그리고 어떤 마법을 쓴 건지는 몰라도 은하수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천장.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느낌인데.’
그러고 보면 내 꿈 공간이랑도 상당히 비슷해 보이는 것 같고.
대신 그곳은 영혼이 찢긴 여파인지 거의 난장판 수준이지만.
“혹시나 잘못되면 어쩌려고 그런 무모한 짓을 벌였던 겁니까?”
알 수 없는 향수를 일으키는 공간을 둘러보는 사이, 누군가의 목소리가 불현듯 귓속을 파고들었다.
동시에 지크프리트 씨가 조용히 하라는 듯 검지를 입술 끝에 가져다 대었다.
“터지지 않게 조심하라고 했을 때부터 이상함을 느꼈어야 했는데.”
“그 발언은 딱히 폭발을 염두하고 한 건 아니었어.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 아닌가.”
“어쨌든 저 몰래 그런 짓을 벌인 건 사실이잖습니까.”
“직전에 모두 알아챘으면서.”
지크프리트 씨의 뒤를 따라 걷는 내내, 두 사람의 목소리가 계속해서 번갈아 들려왔다.
신경질적인 목소리와 그와는 대조되는 무감정한 음성.
설전을 벌인다기에는 한쪽이 일방적으로 복장을 터뜨리는 것 같은데.
“암살 시도 현장을 가시적으로 드러내지 않았으면 이렇게 숙청을 정당화할 수 없었겠지. 그대도 그걸 알고 있으니 물러선 거 아닌가.”
“당신께서 계신 곳에 직접 폭발을 일으킬 줄 알았더라면 물러서지 않았을 겁니다.”
“그래서 알리지 않은 거야.”
또 한 번, 고저 없는 목소리가 느른하게 실내에 울려 퍼졌다.
나는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며 필사적으로 못 들은 척했다.
그때 그 폭발을 본인이 직접 일으킨 거였다니, 엄청난 비밀을 들어버린 기분인데.
“하여간 누굴 닮아서 저렇게 무모한지 몰라, 그렇지?”
그사이 지크프리트 씨가 내 귓가에 자그맣게 속삭이고서 눈꼬리를 휘었다.
그러고서 그는 다시 상체를 바로 하고서 큼큼, 헛기침을 내뱉더니.
“폐하, 제가 황궁 해자 앞에서 웬 수상한 자를 잡아 왔습니다.”
곧이어 내 손을 그러쥔 채 앞으로 성큼성큼 나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입을 떡 벌린 상태로 꼼짝없이 그에게 끌려갔다.
수상한 자를 잡아 왔다니.
“잡아 온 게 아니고 제가 제 발로 온 거거든요?”
이건 엄연히 내 현상금이라고요!
무심코 말을 내뱉으려니, 곧 두 사람의 시선이 집요하게 내게 달라붙었다.
서늘하다 못해 온몸이 얼어붙을 것만 같은 냉혹한 눈빛.
나는 순간 어깨를 움츠렸다가, 이내 쓰고 있던 후드를 아래로 내리며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지고하신 제국의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동시에 내게 향해 있던 푸른 눈동자가 조금 전과는 달리 순수한 환희와 기쁨으로 물들었다.
그와는 달리 은빛 눈동자는 여전히 서늘하게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저 정도면 눈빛으로 사람 하나 죽이는 것도 가능하겠다.’
나는 그의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품 안에서 전단을 꺼내 들었다.
“아무래도 폐하께서 저를 찾으시는 듯하여…….”
그래서 제가 직접, 제 발로, 황궁까지 찾아왔습니다.
‘좀 더 예의를 갖춰야 했나?’
어째서인지 이 사람은 황제라기에는 뭔가 귀엽고 안쓰러운 느낌이 들어서, 자꾸 편해진단 말이지.
“……맞아요. 내내, 그동안 계속 당신을 찾고 있었어요.”
그래, 특히 이렇게 아래에서 나를 바라보는 게 진짜 강아지 같아서…….
잠깐만, 아래에서?
“폐하?”
나는 순식간에 내 앞에 다가와 무릎을 꿇어앉은 황제를 마주하고서 반사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마저도 왼손을 그에게 붙잡힌 탓에 완전히 물러설 수 없었지만.
“드디어 저를 찾으러 와 주셨네요.”
모두의 위에 군림하는 제국의 지고한 태양이, 내 앞에 무릎 꿇은 채 다정히 속삭였다.
“미에나.”
심지어는 내 손바닥에 제 뺨을 슬며시 기대기까지 한 상태였다.
‘뭐지, 이 당황스럽고 귀여운 행동은?’
이런 행동에도 화가 나지 않는 걸 보면, 역시 얼굴이 개연성인가?
“미에나?”
바로 그때, 앞쪽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미에나라니, 그게 무슨…….”
뒤이어 그가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혼잣말하듯 말을 내뱉었다.
“그녀와는 머리 색도, 눈동자 색도 다르지 않습니까.”
자못 오만하게 느껴졌던 그의 은빛 눈동자는 혼란에 물들어 퍽 안쓰럽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황제는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나를 빤히 올려다보며 또 한 번 입을 열었다.
“미에나가 어떤 모습이든, 저는 알아볼 수 있어요.”
“…….”
“내내 당신만 그렸으니까.”
말을 마친 그가 칭찬해 달라는 것처럼 두 눈을 환하게 휘어 웃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의 하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려다가, 제정신을 되찾고서 숨을 들이켰다.
하마터면 저 얼굴에 홀려서 불경죄를 저지를 뻔.
‘그보다 이거 지금 완전 난장판 아니야?’
황제라는 사람은 나한테 무릎을 꿇고 있질 않나, 보좌관으로 보이는 사람은 아예 넋이 나갔고.
“저기, 러셀 경. 이 상황 좀…….”
당신이 날 여기까지 데려왔으니 수습 좀 해 주십시오!
마지막 실낱같은 희망을 안은 채 러셀 경을 바라본 순간이었다.
“네 죄다, 네 죄야.”
내내 웃음을 참고 있었던 건지, 지크프리트 씨가 빨개진 얼굴을 한 채 간신히 말을 토해 냈다.
“크흡, 저 표정 진짜…….”
그러고서 그는 급기야 뒤를 돌아 간헐적으로 웃음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나는 생각을 포기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