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화
네, 미에나입니다.
어쩐지 요즘따라 남한테 제 이름을 많이 불리는 것 같네요.
“절 아세요?”
어쩐지 낯익은 얼굴이다 싶더니, 정말로 아는 사람이었을 줄이야.
잡혀 있던 팔의 손바닥을 뒤집어 도리어 그의 손목을 꼬옥 그러쥐며 말하자, 남자의 눈동자에 희미한 의아함이 스쳤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를 잡아먹을 듯 흉흉했던 기세 역시 살짝 옅어진 채였다.
그러면서도 나를 붙잡은 손아귀 힘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지만.
“널, 아냐고.”
곧이어 그가 쩍 갈라진 음성으로 드문드문 입을 열었다.
“지금 그딴 걸 질문이라고…….”
앗, 이 사람 눈동자가 또 빙글 돌아 버렸잖아.
“아니, 아니. 저한텐 이게 필수적인 질문이거든요.”
죄송한데 제가 기억이 없어서요.
우선 이 사람에게 내 상태를 설명해 주기 위해 숨을 들이켠 찰나.
“힘을 그리 쓰면 안 되지.”
웃음기 섞인 나른한 목소리가 온화하게 울려 퍼진다 싶더니, 순식간에 주변 공기가 서늘하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허억……!”
심지어 웅혼한 기세가 거세게 내려앉은 탓에, 곳곳에서 억눌린 숨소리가 튀어나왔다.
“인간이 이리 모여 있는데 함부로 기운을 흘리면 겁을 먹지 않겠느냐.”
실례지만 당신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르신, 하지 마세요!”
여기에는 방금 막 잠에서 깨어난 환자도 있다고!
황급히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 고개를 돌리자, 어르신이 그제야 생긋 웃으며 풀어놨던 기운을 흩트렸다.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원래대로 돌아온 주변 공기를 확인하고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못 살아, 진짜.
“죄송하지만 그분 좀 근처 의료원으로 데려다주실 수 있을까요? 일단 깨어나시긴 했지만, 진찰이 필요할 것 같아서요.”
“앗, 네……!”
내 말에 쓰러진 남자를 부축하고 있던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감사의 뜻으로 고개를 숙인 후, 다시 시선을 돌려 두 사람…… 한 사람과 한 인외를 차례로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저희는 자리를 좀 옮기는 게 좋을 것 같네요.”
애꿎은 사람들 괴롭히지 말고, 우리 일은 우리끼리 해결 봅시다.
* * *
그렇게 사람들을 피해 근처의 외진 골목에 들어온 후.
나는 여전히 잔뜩 굳은 채 나를 노려보는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일단 제 이름은 미에나가 맞고요. 아무래도 저희가 옛날에 아는 사이였던 것 같은데, 애석하게도 저는 기억을 잃은 상태라서요.”
그러니 그렇게 나를 잡아먹을 듯 노려봐도 얻어 가는 건 없을 겁니다.
‘오히려 아까 같은 상황이 안 일어나면 다행이지.’
웬일로 어르신이 조용하다 싶었어.
조금 오래 참나 싶더니, 갑자기 이렇게 확 터뜨릴 줄이야.
“……아까 그 기운.”
곧이어 남자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뜨며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지금까지 내내, 하임 산맥에 있던 거냐?”
“와, 그걸 맞히시네.”
아무래도 저희가 제 예상보다 더 깊이 얽혀 있던 모양이군요.
그 기운만으로 하임 산맥을 떠올릴 정도면, 어르신의 레어에 들어왔던 적 있단 소리일 텐데.
“떠올리는 것도 괴로워서 그쪽엔 눈길조차 주지 못했는데, 정작 너는 그곳에 있었다고.”
“앗, 네에…….”
그 정도로 나를 아꼈단 말이야?
“하지만 너는 그때 정말 죽었었어.”
이윽고 그가 선뜻 이해하지 못한 목소리로 다시금 말했다.
“저 사람이 네 시체를 훔쳐서…….”
“예?”
나는 순간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시체를 훔쳐 가? 그건 또 무슨 기괴한 발언이람?
“훔치다니, 불경한 발언이구나. 내 이 아이를 구하기 위해 심장까지 바쳤건만.”
그러자 골목 벽에 비스듬히 기대 있던 어르신이 나른하게 말을 내뱉었다.
“작은 인간아. 내 네가 이 아이를 아끼는 마음을 모르지 않는다만, 조금 더 시야를 넓히는 게 좋겠구나.”
작은 인간이라니, 설마 저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인가요?
맨손으로 곰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처럼 보이는데?
“너는 인간이지만 타고난 감이 있으니 어렴풋하게 느낄 수 있겠지.”
“…….”
“이 아이는 영혼이 온전치 못해. 단순히 기억의 문제가 아니라, 저 몸에 영혼을 고정하는 데만 해도 9년이 걸렸지.”
이것 때문에 처음으로 다시 날짜를 세기 시작했다며, 어르신이 짧게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자 남자는 나와 어르신을 번갈아 바라보다 말고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스럽게도 아까와는 달리 확실히 진정한 듯한 모양새였다.
“그래, 살아 있으니 된 거지. 살았으면…….”
그러고서 그는 몇 번이고 같은 말을 되뇌다가.
“우선 그러면 네 부모님부터 만나러 가자. 네가 모습은……, 좀 많이 바뀌긴 했지만, 두 사람이라면 바로 알아볼 거야.”
숙였던 고개를 번뜩 들어 올리고서 결연하게 입을 열었다.
나는 이번에도 눈을 크게 뜨고서 빠르게 도리질했다.
“어, 아뇨. 그건 조금.”
“그건 조금이라니? 왜?”
“일단 저는 제 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어요. 이 상태로 만나 봤자 그분들이 바라는 반응은 할 수 없을 거예요.”
“바라는 반응을 할 수 없다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어? 자식이 살아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것만으로도―”
“그래서 더 안 된다는 거예요.”
나는 그의 말을 끊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내 기억이 어떻든 간에, 사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거였다.
“저는 아직 완전히 건강해진 게 아니라서요.”
아무리 내가 모든 기억을 잃었다고 한들, 단 한순간도 부모님을 궁금해하지 않았을 리 있겠는가.
심지어 플라멘은 내가 살던 저택에 와 본 적도 있다고 하였다. 원한다면 몸이 회복되는 대로 그곳으로 데려다줄 수도 있다고 했고.
하지만 바로 그게 문제였다.
‘몸이 회복되는 대로.’
“다시 만난 딸이 또 시한부라는 말을 들으면, 그분들 마음은 대체 어떻겠어요.”
“뭐……?”
내 말에 남자가 경황없는 눈으로 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는 다시금 작게 한숨을 내쉬고서 천천히 설명을 늘어놓았다.
“이 병……, 그러니까 제가 가진 힘은 시간이 지날수록 쌓여 가는 특성이 있어서, 원인을 제거하기 전까지는 같은 상황이 반복될 뿐이에요.”
지금은 드래곤의 심장을 받아 버티고 있다지만.
‘이 정도 성장세면 과연 몇 년이나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그러니 최대한 방법을 찾되, 방법이 없다면 몸이 망가지기 전에 세계수를 찾아 어르신과의 계약을 마치고 심장을 돌려준다.
그게 바로 내 계획이었다.
비록 어르신은 찬성한 적 없지만.
“내가 있는 한 그리 쉽게 죽지 않을 거라고 몇 번을 말하니.”
내 말에 어르신이 황금빛 눈동자를 우아하게 휘며 말했다. 나는 곧바로 코웃음을 내뱉었다.
“이건 소원 마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다고 직접 못 박으셨으면서?”
“요 깜찍한 것이, 이제는 내게 대들기도 잘하는구나.”
“제가 좀 강심장이라.”
어쨌든 지금으로선 이 세계 최강의 심장을 지니고 있잖습니까.
나는 어르신을 향해 깜찍하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서 다시금 남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무튼, 제가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고 한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슬픔을 모르는 건 아니에요.”
“…….”
“그래서 저는 그분들이 같은 고통을 다시 겪게 하고 싶지 않아요.”
어르신은 내게 줄곧 이렇게 말해 주고는 했다.
너의 부모는 그 어떤 인간보다도 제 자식을 사랑했으며, 너 역시도 그 어떤 인간보다 제 부모를 사랑했노라고.
“물론 저도 이렇게 손 놓고 있다가 죽을 생각은 없으니, 어떻게든 힘내 보려고 해요. 제 부모님은……, 일이 모두 해결되면 제가 직접 찾아뵙고 싶고요.”
“……그러다 너무 늦을 수도 있어.”
“그래도 이건 저만 감당하면 되는 일이니까요.”
설령 때가 늦는다고 해도, 나만 감당하면 되는 일이지.
괜히 잘살고 있는 사람들을 들쑤실 필요는 없잖아.
“너는 진짜, 어떻게 기억을 잃었어도 그렇게 한결같이…….”
이윽고 그가 깊게 침전한 푸른 눈동자를 내게서 떼어 내고는 헛웃음을 내뱉었다.
허망한 듯, 조금은 그리운 듯.
뒤이어 여러 감정이 뒤섞인 듯한 표정이 그의 안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래, 네 말대로 그건 일단 됐다 치고.”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남자가 커다란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고서 다시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까는 해자 앞에서 대체 뭘 하려고 했던 건데?”
“아, 그거요.”
드디어 이 주제로 넘어왔군.
나는 곧장 눈을 반짝이며 품 안에서 수배 전단을 꺼내 들었다.
“황궁에서 이런 전단을 뿌렸더라고요. 아무리 봐도 저인 듯해서, 직접 찾아가서 현상금 좀 받으려고요.”
저는 당신이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우리 인연이 예사롭지 않은 것 같으니 한번 도와주지 않으렵니까?
말을 마치고 활짝 웃으려니, 남자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러고서 그는 수배 전단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더니, 끝내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하, 하하. 이러는 걸 보니 진짜 미에나가 맞긴 맞네.”
“헤헤.”
아무렴, 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사람이 바뀌는 건 아니잖습니까.
나 역시 그를 따라 생글생글 미소 짓자, 남자가 언제 그랬냐는 듯 무섭게 정색하고서 말을 내뱉었다.
“웃지 마, 이거 지금 네 욕이야.”
“넵.”
나는 잽싸게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그는 또 한 번 가느다랗게 미소 짓더니, 제법 변덕스러운 목소리로 넌지시 입을 열었다.
“어쨌든, 그거라면 내가 확실히 도와줄 수 있기는 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