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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 필요하신가요? (124)화 (124/154)

제124화

짧은 찰나, 내 머릿속으로 수만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로브 속의 얼굴을 알아본 건가? 나를 사로잡고 현상금을 독차지하려는 수작?

“황궁 앞에서는 마법 사용 금지인 거 몰라? 어디서 귀하게 자라다 온 마법사인지는 몰라도, 잡혀가고 싶지 않다면 계속해 보시지.”

그사이 남자가 으름장을 놓듯 말을 늘어놓았다.

아무래도 내가 순간 이동 마법을 사용하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아직 마법진이 밖으로 드러난 것도 아닌데 대뜸 알아챈 것도 그렇고, 마법사를 상대로 대뜸 협박하는 것도 그렇고.

상당히 강한 사람인 것 같은데.

“제가 시골에 살다가 나와서 그런 걸 몰랐네요. 죄송합니다.”

눈앞에서 당장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지.

고개를 돌려 슬쩍 사과를 건넨 순간이었다.

“음?”

나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딱 봐도 험상궂게 생긴 얼굴, 리본으로 동여맨 붉은 머리카락, 그리고 황실 근위대 제복까지.

분명 나는 황도 내 사람과 안면이 없는데. 황실 근위대 사람과는 더더욱 인연이 없는데도.

‘왜 이렇게 익숙한 거지?’

마치 옛날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처럼…….

“저, 죄송한데요.”

나는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

“저희 혹시 전에 어디서 본 적 없나요?”

나는 기억을 못하지만, 이렇게 익숙할 정도면 저 사람은 나를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얼굴이 보여야 봤는지 안 봤는지 판단을…….”

내 말에 남자가 투덜대다 말고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고서 그는 자신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쓱 훑더니.

“아, 아……!”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뭐야, 뭔데.’

진짜로 우리 아는 사이였던 거야?

황제에 이어서 황실 근위대 사람까지 날 알다니, 혹시 내가 바로 황실의 숨겨진 사생아?

“미안하지만 나한텐 그런 작업 안 통한다. 내게는 평생을 약속한 사람이 있어.”

……는 개뿔.

“아무래도 제가 사람을 잘못 본 것 같네요. 실례했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저런 사람이랑 얘기해 봤자 시간만 허비할 게 분명해.

판단을 마친 즉시, 나는 그를 향해 반쯤 돌렸던 상체를 되돌리며 빠르게 인사를 건넸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그쪽은 볼일 끝났는지 몰라도 난 이제 시작인데, 이거 어쩌나.”

남자가 내 손목을 붙잡고서 능청스럽게 중얼거렸다.

뭐야, 방금까지만 해도 저쪽에 있었으면서 대체 어느 틈에?

“내 앞에서 그렇게 수상하게 굴어 놓고, 어물쩍 넘어가려 하다니.”

“아니, 저기…….”

저희가 정말 수상해 보이는 건 알겠지만, 의외로 별 목적이 없는 사람들이거든요.

그냥 황궁 들어가서 500만 페온과 나의 신변을 교환하기만 하면 되는데?

게다가 어르신 앞에서 나를 붙잡아 협박해?

‘까딱 잘못했다간 큰일 난다.’

이 사람이 얼마나 강하든, 빡친 어르신을 이길 수 있는 인간은 적어도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으니.

“일단 이걸 좀 놓고 얘기해야 할 것 같은데요.”

안 그럼 당신이 위험해요.

걱정을 듬뿍 담아 그에게 진심 어린 충고를 내뱉은 순간이었다.

“사람, 사람이 쓰러졌다!”

별안간 지척에서 누군가의 우렁찬 고함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남자가 나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고서 소리가 난 곳을 향해 뛰어가기 시작했다.

오, 투철한 살신성인 정신.

“저희도 따라가요, 어르신.”

뒤이어 나 또한 어르신에게 말을 건네고 사람이 모인 곳으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고 보니 어르신이 얌전하네.

그 성격상 나한테 오는 위협은 진즉 제거하고도 남았을 텐데.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이윽고 나는 인파 사이를 헤쳐 나가고서 쓰러진 사람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조금 전의 남자 역시 이미 자리를 잡은 채 쓰러진 사람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구토를 하거나 피를 흘리진 않았습니까? 쓰러지기 전에 특별한 이상 증세가 있었다거나.”

“모, 모르겠어요.”

“숨은 정상적으로 쉬고 있고, 맥박도 정상인데…….”

그가 능숙하게 환자의 상태를 살피며 중얼거렸다.

황실 근위대 제복을 입고 있으면서, 하는 행동은 영락없는 구급대원이네.

근위대 사람들은 원래 다 이런 건가?

“……끝없는 밤의 병.”

바로 그때, 누군가의 자그마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틀림없어. 끝없는 밤의 병이야!”

이번에는 또 다른 누군가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끝없는 밤의 병이라니.

‘벌써 황도까지 퍼진 건가?’

그렇다면 종이비행기를 날리는 것만으로는 사람들을 다 구할 수 없을 텐데.

“어르신.”

어쨌든 이 사람이 정말 끝없는 밤의 병에 걸린 거라면, 내가 해결할 수 있다.

판단을 마친 즉시, 나는 어르신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동시에 어르신의 금빛 눈동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형형하게 빛났다.

“내가 말린다 한들, 너는 기어코 이 인간의 영혼에 들어가겠지.”

“헤헤.”

“되었다. 이럴 줄 알고 내 너와 동행한 거니.”

말을 마친 어르신이 마음대로 하라는 듯 손을 슬쩍 저어 보였다.

어르신의 허락도 떨어졌겠다, 더 거리낄 건 없지.

“이런 위급 상황에서는 아무리 황궁 앞이라도 마법 사용 가능하죠?”

“무슨 짓을 하려고…….”

“당연히 사람 살리는 짓이죠.”

말을 마친 나는 눈을 감고서 망설임 없이 속으로 마법 주문을 읊었다.

동시에 잠깐 의식이 흐려진다 싶더니, 순식간에 풍경이 뒤바뀌었다.

나를 둘러싼 수많은 인파 대신, 끝없이 펼쳐진 검은 공간.

나의 꿈 통로였다.

[역시 마법이 편하다니까.]

그 시끄러운 상황 속에서도 냅다 잠들 수 있다니.

‘내 몸은 어르신이 알아서 해 주실 테니, 맡겨 두고.’

그럼 빠르게 해치워 볼까.

나는 기지개를 한 번 켠 뒤 가까이 나타난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누가 봐도 이 사람이군.]

낮이라 잠든 사람이 거의 없어서 다행이야.

[실례합니다.]

나는 곧바로 문고리를 잡아당긴 후,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사람을 홀리는 것처럼 알록달록하고 몽환적인 풍경.

[우리 둘이 평생 함께하는 거야, 애나…….]

동화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배경 한복판에, 한 남자가 어떤 여자를 끌어안은 채 행복에 겨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역시나.’

나는 이를 확인하자마자 그들에게로 다가가기 시작했다.

‘끝없는 밤의 병’에 걸렸다는 환자들은 보통 이런 식의 꿈을 꾸고는 했다.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을 쟁취하는, 혹은 가장 행복한 순간을 반복하는 꿈.

‘그리고 그 욕망의 근처에는 꼭 꽃이 펴 있었지.’

마치 그 욕망을 먹고 자라는 것처럼, 화려하게.

[폈네, 폈어.]

그것도 아주 활짝 폈네.

나는 여자의 가슴에 꽂힌 채 하늘하늘 흔들리는 꽃을 바라보며 푹 한숨을 내쉬었다.

꽃을 보니 끝없는 밤의 병 맞네.

[그러고 보면 이게 진짜 병인지 저주인지도 알아내야 하는데.]

언제까지고 내가 쓰러진 사람들 뒤를 쫓아다닐 수는 없으니, 원인을 뿌리 뽑는 수밖에.

짧은 투덜거림 후, 나는 꽃을 향해 손을 뻗었다.

동시에 남자가 건들지 말라는 듯 거세게 반항했다.

[안 돼!]

[돼!]

어차피 나한테 한 주먹거리도 안 되면서.

나는 그의 반항을 가뿐히 뿌리치고서 덧붙여 말했다.

[이런 허상에 빠지지 말고, 현실을 살아가세요.]

곧이어 여자의 가슴에 꽂힌 꽃을 가볍게 꺾어 손에 들자, 술을 감싼 꽃잎이 하나둘 민들레 홀씨처럼 흩날리더니.

쿵, 쿵!

크게 균열 진 남자의 꿈이 거대한 소리를 내며 조각조각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깨진 유리 조각처럼 붕괴하는 꿈을 뒤로한 채 눈을 감았다.

“일어났다, 일어났어!”

“두 사람 다 깨어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조금 전과는 달리 사람들의 시끌거리는 소리가 양쪽 귀를 어지럽혔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속눈썹을 팔랑였다.

이런 식으로 강제로 잠에서 깨는 건 느낌이 영 이상하단 말이야.

눈뜨자마자 어르신의 용안과 마주하는 건 꽤 기분 좋은 일이지만.

“오늘도 아름다우시네요, 어르신.”

어쨌든 소기의 성과도 달성했겠다, 나름대로 농담을 건네며 어르신의 품을 벗어난 찰나였다.

“아얏.”

별안간 손목 쪽에서 또 한 번 찌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나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내 손목을 붙잡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잔뜩 핏발 선 그의 푸른 눈은 혼란과 경악, 그리고 알 수 없는 확신에 물들어 있었다.

“너.”

이전에 내 손목을 잡았던 때와 같은 능청스러움은 온데간데없이.

“너, 설마…….”

어쩐지 목이 멘 듯, 조금은 화가 난 듯,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가 낮게 읊조렸다.

“미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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