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화
그 양반이 어딜 나갈 리는 없는데, 오늘은 왜 이렇게 조용하담?
내 질문에 플라멘이 매우 담담한 어투로 답했다.
“당신과 함께 식사하겠다고 식당에서 기다리고 계시는데요.”
그 어조가 너무나도 담담하고 당연한 나머지, 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하, 뭐 하나 했더니 식당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구…….
“그 이야기를 왜 지금 해? 제일 먼저 말했어야지!”
괜히 연장자 밥상에 앉혀 두고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는 사람 됐잖아!
사람 밥상 앞에 혼자 두고 다른 짓 하는 것만큼 버르장머리 없는 행동이 없는데!
나는 곧바로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문을 박차고 나갔다.
그러자 등 뒤에서 플라멘이 고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더러운 꼴로 마스터를 만나겠다고요? 씻는 건 바라지도 않으니 옷이라도 갈아입으란 말입니다!”
“안 더럽다고, 이 결벽증아!”
하여간 하루에도 이불 열다섯 번 터는 정령 아니랄까 봐, 엄청 따지네!
나는 빠르게 복도를 질주하며 플라멘을 향해 혀를 내밀었다.
물론 달리지 않고 순간 이동한다면 바로 향할 수 있었지만…….
‘어르신은 내가 마법을 쓰는 것 자체를 별로 반기지 않으니까.’
그렇다고 아예 안 쓸 수는 없으니, 여기서라도 아끼는 수밖에 없지.
“다녀왔습니다!”
곧이어 식당으로 들이닥친 후, 나는 짐짓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기다란 식탁 끝에 앉아 있던 어르신이 느긋하게 눈매를 휘어 웃었다.
“큰 소리가 울리길래 레어가 무너지는 건가 싶었는데, 이제 보니 네 뛰는 소리였구나.”
저렇게 농담을 던지는 걸 보니 화는 안 나셨군. 애초에 이런 걸로 화낼 사람……, 드래곤이 아니긴 하지만.
“제가 나가기 전에 저녁 함께 먹자고 미리 말씀하시지는. 제가 그대로 잠들었으면 어쩔 뻔했어요?”
“네가 일어날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겠지.”
“으이구.”
어차피 자기는 굳이 무언가를 먹지 않아도 되는 몸이면서.
나는 설레설레 고개를 내젓고서 그의 좌측에 앉았다.
식탁 위로는 갖가지 육류 요리며 샐러드까지, 내가 좋아하는 요리가 짜임새 있게 준비되어 있었다.
보나 마나 플라멘의 솜씨군.
아까 메롱 했던 건 취소해야지.
가장 먼저 카프레제 샐러드를 포크로 찍어 입에 넣은 순간이었다.
“그래, 오늘은 루미나레에 갔다 왔다고.”
밥 먹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어르신이 불현듯 말을 걸었다.
나는 입 안에 있던 음식을 우물우물 씹어 넘기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엔 람파스라고 한다니까요. 아무튼, 진짜 잠깐 다녀왔어요. 어디 다른 데로 샌 것도 아니고.”
“그래, 다른 데로 새지 않고 곧장 그 찌꺼기의 성으로 향했지.”
“헤헤.”
황도에 갔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건 각오하긴 했는데, 황궁에 간 것까지 들키다니.
“게다가 이런 불결한 것도 묻혀 오고.”
곧이어 어르신이 나른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동시에 내 주위로 청량한 바람이 요요히 스쳐 지나갔다.
“또 ‘그 꿈’에 들어간 게지.”
“으헤헤.”
아이고, 내 밑천 다 드러나네.
이러다 침대 밑에 있는 비밀 일기장까지 들키겠어. 물론 난 일기를 안 쓰지만.
이번에도 어리숙하게 웃으며 얼버무리자, 어르신의 한쪽 눈썹이 슬쩍 치켜 올라갔다.
나는 곧바로 웃음을 멈추고서 변명을 늘어놓았다.
“저도 억울해요. 맨날 위그드라실의 이름을 적으면 바닥으로 떨어지거나 이상한 곳으로 안내하거나 둘 중 하나란 말이에요.”
“이상한 곳으로 안내한다고 굳이 들어가는 것도 억울하다는 게냐?”
“이왕이면 확실히 해야죠.”
종이비행기가 굳이 그쪽으로 안내한 이유가 있을 텐데, 그냥 가면 섭섭하잖아.
내 말에 어르신이 못마땅하다는 듯 여전히 표정을 풀지 않고서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러다간 밥 먹다가 체하겠네.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서 비슷한 듯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그 이상한 현상 말이에요. 사람들 사이에서는 ‘끝없는 밤의 병’으로 불리는 것 같더라고요.”
“끝없는 밤의 병.”
“저번에 플라멘이랑 아랫마을 내려갔을 때 들었어요. 한 번 쓰러진 이후로 깨어나지 못하고 잠만 자는 사람이 늘었다더라고요.”
거기까지 들었을 때 어딘가 기시감이 들었지만, 그건 지금 중요한 게 아니니 일단 넘어가고.
“근데 그날 밤에 종이비행기가 딱 그 사람의 꿈으로 안내한 거 있죠?”
나는 스테이크 위에 예쁘게 올려진 로즈메리 잎을 옆으로 치우며 말을 이었다.
“평소에 하던 것처럼 꿈에 들어가서 꽃을 꺾긴 했는데, 그 사람이 깨어났는지는 아직 확인을 못 했어요. 조만간 플라멘이랑 식자재도 살 겸 다시 내려가 보려고요.”
생각해 보니 황제 시해 계획을 세웠던 요셉이라는 사람도 그 병에 걸렸었다는 건데.
‘그런데도 용케 계획은 실행됐네?’
어쩌면 배후가 한 명이 아닐 수도 있겠어. 아니면 그 사람이 중간 다리였다든가.
“이상하게 아까부터 자꾸 신경 쓰인단 말이야…….”
정치 싸움에 뛰어드는 건 내 성격에 정말 안 맞는데, 왜 자꾸 생각나는 거지?
알고 보면 나, 정치계의 거물이 되고 싶어 하는 타입?
평소와는 다른 내 모습에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찰나였다.
“그 마을 말이다.”
어르신이 여전히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으며 넌지시 제안했다.
“이번에는 나랑 같이 가자꾸나.”
나는 스테이크를 썰던 칼질을 멈추고서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동시에 내 손아귀를 벗어난 나이프가 테이블 위로 떨어져 땡그랑, 맑은 소리를 자아냈다.
“어, 진짜요?”
평소에는 레어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으려 하던 양반이,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
“그곳에서 쓰러지는 인간을 마주하면 직접 해결하겠답시고 너도 따라 쓰러질 걸 빤히 아는데, 내 가만히 두고 볼 수 있겠느냐?”
“에이, 설마 그렇게까지 하려고요.”
“그렇게까지 하겠지.”
“대체 과거의 내가 무슨 짓을 하고 다녔길래.”
어르신이 저렇게까지 확신하는 걸 보면 근거가 없는 건 아닐 텐데.
작게 툴툴대자, 어르신이 느긋하게 입꼬리를 빼 당겨 웃으며 다시금 입을 열었다.
“미에나.”
갑자기 이름을 부르다니,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조금 불안해지는데.
“아무리 네가 내 심장을 가졌다고 한들, 지금 네 몸은 온전하지 않다.”
“……알고 있어요.”
“그런 상황에서 내가 없이 네가 능력을 남발하면, 그 성치 않은 몸이 어떻게 되겠느냐?”
목소리는 분명 상냥하기 그지없었으나, 그 속에는 단단한 뼈가 숨어 있었다.
나는 그대로 침을 꼴깍 삼키고서 이리저리 눈동자를 굴렸다.
도와줘, 플라멘.
나 진짜 얌전히 씻으러 갈게.
“하지만 어르신, 생각해 보세요. 눈앞에 누가 쓰러져 있으면 사람 된 도리로 일단 살리려고 하지 않겠어요?”
“너처럼 냉큼 나서는 인간은 흔치 않단다.”
“아니, 제가 언제 냉큼 나섰다고.”
물론 그럴 것 같긴 하지만, 그게 당연한 거잖아.
“네 그 성격을 나무라려는 게 아니다. 말했잖니, 나는 그런 너를 귀하게 여긴다고.”
곧이어 어르신이 나를 어르듯 다정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게다가 너는 말린다고 말려질 아이도 아니고.”
“하핫.”
“그러니 내 직접 네 곁을 지키는 수밖에 없지. 플라멘 그 녀석은 이런 부분에서는 영 세심하지 않으니.”
방금도 분명 제가 먼저 나를 만났으면서 내가 묻혀 온 찌꺼기를 그대로 남겨 놓지 않았느냐며, 어르신이 나지막이 혼잣말했다.
나는 작게 키득거리며 놓쳤던 나이프를 다시 손에 쥐었다.
이유가 뭐든 어르신이랑 같이 아랫마을로 내려가는 건 환영이지.
‘그 김에 인간 사는 세상도 다시 좀 구경시켜 드리고.’
황도의 지명을 람파스가 아닌 루미나레로 말할 정도니, 따지자면 몇백, 길게는 몇천 년 만의 외출이 아닌가.
“제가 기막히도록 재밌게 안내해 드릴게요. 저만 믿으세요.”
어르신의 효도 관광, 내가 책임진다!
* * *
그렇게 날씨 좋은 날을 고르고 또 골라, 대망의 첫 아랫마을 나들이.
마침 장날이 열려 왁자한 시장 골목 내로 공격적으로 호객하는 상인들과 천진한 아이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속에 선 나와 어르신은…….
“어라.”
시장으로 들어가는 골목 어귀에 붙은 벽보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정확히는 새로 붙인 현상수배 전단을.
그냥 혹시라도 아는 얼굴이 있나, 그렇다면 제보하고 현상금이나 두둑이 챙길까 하고 가볍게 보고 넘기려던 것뿐인데.
어째서…….
“어, 이 얼굴이 여기 있으면 안 되는데.”
나는 현상범 게시판에 떡하니 붙어 있는 몽타주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시선 끝에 걸린 건, 누가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다른 수배 전단보다 훨씬 크고 정교한 몽타주였다.
내 얼굴이 그려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