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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 필요하신가요? (121)화 (121/154)

제121화

다시 만나면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미에나 시두스가 없는 10년을 버티는 내내, 데미안은 같은 고민을 수없이 반복했다.

다시 만나면 왜 자신을 찾으러 오지 않았느냐 말할까.

나는 지금껏 당신만을 기다려 왔다고, 오로지 당신을 다시 만나기 위해 이 수라장을 견뎌 왔다고 해야 할까.

그것도 아니라면 당신이 너무 보고 싶었다고, 다시 만나서 그저 기쁘다고 말할까.

“…….”

하지만 그의 오랜 고민은 이 순간 흔적도 없이 무너져 내렸다.

자신이 몇 번이고 덧그려 왔던 모습과는 사뭇 다른, 그렇지만 늘 변함없이 빛나는 모습을 마주한 찰나.

벅차오르는 마음은 그 어떤 형태로도 변하지 못하고, 머리를 새하얗게 비우는 바람에.

“……미에나.”

이리저리 뒤섞인 감정은 결국 마땅한 문장을 찾지 못하고 뭉툭한 이름이 되어 굴러떨어졌다.

“어, 그…….”

그 목소리에 이끌린 듯, 그녀가 발코니 앞으로 한 발짝 다가선 찰나였다.

“괜찮으십니까, 폐하!”

“아래쪽에 암살자가 있다! 당장 생포해!”

뒤쪽에 있던 사람들이 곧바로 물밀 듯 루스의 주변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소란 아닌 소란에, 여자는 다시금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서고서 데미안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데미안은 순간 숨이 턱 막혀 쥐어짜듯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잠깐……!”

또 제 앞에서 사라지지 마세요.

나를 두고 가지 마세요.

그러나 그 어떤 말도 막혀 버린 목구멍 밖으로 나올 생각을 하지 못하고.

“요셉 해링턴을 조사해 보는 게 좋을 거예요.”

이내 그녀의 발아래로 둥그런 마법진이 떠오른다 싶더니, 찬란한 빛과 함께 여자의 모습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데미안은 희미하게 흩뿌려진 빛의 잔영을 바라보며 난간을 세게 움켜쥐었다.

떠난 자리에도 여전히 찬란함은 남아 있어서.

‘미에나.’

이윽고 데미안이 느릿하게 두 눈을 감았다가 뜨며 숨을 내쉬었다.

꿈에서와 같이 아름다운 밤하늘.

그러나 결코 꿈이 아닌, 현실의 미에나.

비로소 현실이었다.

* * *

“와, 아슬아슬했다.”

하마터면 몰래 황궁에 침입한 거 그대로 들킬 뻔.

레어로 순간 이동한 후, 나는 내 침대에 벌렁 드러누우며 팔딱이는 가슴을 진정시켰다.

얘들아, 나 황제랑 눈 마주쳤다. 짱이지? 심장 떨어질 뻔.

‘설마 한패로 생각하지는 않겠지?’

그렇다기에는 내가 그 사람을 성벽에 날려 버린 전적이 있으니, 이상한 오해는 하지 않을 거라 믿습니다.

“아, 로브 쓰고 갈걸!”

몰래 처리만 하고 가려고 했는데, 하필 거기서 딱 마주칠 줄이야.

뒤늦게 떠오르는 생각에 허공에 발길질하던 순간이었다.

“외출하고 돌아오면 바로 씻고 옷부터 갈아입으라고 몇 번을 말합니까, 계약자!”

귓속으로 날카로운 잔소리가 칼날처럼 파고들었다.

이 레어의 훌륭한 잡일꾼……, 아니, 대정령 플라멘이었다.

“플라멘은 내가 온 걸 대체 어떻게 바로바로 아는 거야? 대단해, 최고야. 최고의 정령, 추천합니다.”

“그런 식으로 말해 봤자 하나도 안 즐겁습니다. 빨리 옷부터 갈아입으세요. 이불에 먼지 다 묻는단 말입니다.”

“에잉, 조금만 더 누워 있을래. 방금 막 장거리 순간 이동해서 피곤하단 말이야.”

게다가 나처럼 밖에 안 나가는 사람은 한 번 외출할 때마다 체력이 반씩 깎인단 말이다.

침대에 누운 채 몸을 한 번 뒹굴어 뒤집자, 플라멘이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저 반응이 재밌어서 더 놀리게 된다고 말하면 화내겠지?

“그러게 갑자기 황궁까지는 왜 간 겁니까? 평소에는 왠지 기분 나쁘다고 황도 근처에도 안 가던 인간이.”

곧이어 그가 여전히 퉁명스럽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다른 사람 꿈에서 황제를 시해하려는 계획을 봐 버린 걸 어떡해.”

나는 그냥 세계수를 찾으러 다니려던 것뿐인데, 하필이면 그런 장면을 맞닥뜨려서.

꿈 주인의 이름은 황제에게 곧장 전달해 줬으니, 알아서 잡겠지.

이럴 줄 알았으면 꿈 문이 있던 지역도 대강 파악해 둘 걸 그랬나.

“언제는 제국이 어떻게 돌아가든 신경 쓰지 않겠다고 하던 사람이?”

그사이 플라멘의 빈정거리는 목소리가 또 한 번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요즘 세상이 너무 흉흉해서, 내가 너무 바빠지니까 홧김에 말한 거고.”

그 쉬운 길을 택하지 못해 지금도 이렇게 돌아다니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어쩐지 이번 황제는 자꾸 신경이 쓰인단 말이지.’

시해 계획을 마주하자마자 당장 달려가야겠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데미안 미드가르트라고 했나.”

플라멘이 아랫마을에서 가져왔던 신문의 기사를 떠올리고서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기사에서 읽기로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행보 하나하나가 파격적인, 그야말로 철혈의 황제라던데.

‘실제로 봤을 땐 그런 것보단 좀 더…….’

나는 조금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달빛을 반사해 희미하게 반짝이던 새하얀 머리카락, 나를 올곧이 바라보던 푸른 눈동자.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유약한 표정이, 잠깐 마주했을 뿐인데도 너무나 외로워 보여서.

“안아 주고 싶게 생겼는데.”

“저요? 싫습니다.”

내 중얼거림에, 플라멘이 파드득 몸을 떨며 진심으로 질색했다.

나 또한 진심으로 어이가 없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입을 뻐끔거렸다.

아니, 나도 싫거든요?

“그나저나, 기껏 황도까지 갔으면 얻은 게 하나쯤은 있겠지요.”

내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을 제대로 읽은 건지, 곧 플라멘이 큼큼 헛기침을 내뱉고서 화제를 돌렸다.

“당신의 기억 말입니다.”

그 정성이 갸륵하여, 나는 입술을 한 번 삐죽이고서 잠자코 묻는 말에 답을 내놓았다.

“아직 한참 멀었지. 애초에 이 정도로 움직일 수 있게 된 것도 불과 얼마 전의 일인데.”

고작 황도 한 번 다녀온 걸로 모든 기억이 떠오르면 그게 기억 상실이겠어? 그냥 맡긴 기억 찾기지.

“제 도움은 받지 않겠다고 할 게 뻔하고요.”

“누구한테 무슨 이야기를 듣든, 내가 기억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으니까.”

오히려 이야기와 기억이 짜 맞춰지지 않아 혼란만 가중될 게 분명해.

나는 플라멘에게서 시선을 떼 천장을 바라보며 입술을 입 안으로 말아 넣었다.

그러니까, 내 상황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이거였다.

죽었다가 깨어났더니 기억이 사라졌습니다, 따란.

‘기억나는 거라고는 내가 한 번 죽었다는 것, 그리고 어르신이 나를 살렸다는 사실.’

거기에 어르신의 계약까지.

‘네게 내 영혼을 일부 심어 놓아 다행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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