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0화
연회장 내에 화려하게 울려 퍼지는 음률 속,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방패 삼은 이들의 목소리가 조곤조곤 허공을 맴돌았다.
“폐하께서는 이번에도 늦으셨군요.”
“그게 뭐 새삼스러운 일입니까? 주인공이 늦는 거야 당연하지요.”
뒤이어 연회장 구석에 서 있던 무리 중 한 명이 짐짓 눈치 보는 척 목소리를 낮추며 입을 열었다.
“사실 저는 오늘 연회가 열리지 않을 줄 알았습니다.”
“예?”
“요즘 솜니움 제국이 영 뒤숭숭하지 않습니까.”
동시에 사람들의 눈매가 저마다 가느스름하게 변모했다.
“그러고 보면 얼마 전에도 누군가 독살을 시도했다고 했었죠.”
“그런데도 폐하께선 몇 시간 뒤에 멀쩡한 모습으로 회의장에 들어오셨다지요?”
“역시 드래곤의 축복이군요.”
“그러면 뭐 하겠습니까, 아직 에버딘 가문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지지 기반도 없지 않습니까.”
“반대로 이야기하자면 에버딘 가문의 위세가 대단하다는 소리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선황과 전 황태자가 동시에 사고를 당했다고 한들, 갑자기 나타난 아무것도 모르는 황자를 황제로 옹립하는 건 적잖은 불만이 일어나기 마련.
그러나 에버딘 가문의 그 어린 공작은 당연하다시피 이를 해내지 않았는가.
“그러고 보니 그 소문도 들으셨습니까?”
그 순간, 한 남자가 은밀히 입을 열며 화제를 집중시켰다.
“그때의 사고 말입니다. 솔직히 저희가 보기에도 어딘가 석연찮은 부분이 많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전 황태자의 시신은 발견되지도 않았고 말입니다.”
“그, 그건 그렇소만.”
“―실은 그 황태자가 죽지 않고 도망쳤다는 이야기가 있더군요.”
동시에 그의 주변에 있던 호사가들이 한차례 작게 술렁였다.
“그런…….”
“그 말이 사실이라면, 에버딘 공작은 속이 제법 쓰리겠습니다. 기껏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지지한 황제가―”
마지막 말은 채 끝맺어지지 못하고 허공으로 사라졌다.
어느 순간부터 저를 응시하는, 서늘한 은빛 눈동자를 마주하게 된 까닭이었다.
“좋은 일이지 않습니까.”
곧이어 유스틴이 그들에게로 한 걸음 다가서며 가볍게 입을 열었다.
“그 모든 위협에도 제 폐하께선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이리 성대한 탄신 연회까지 여셨으니 말입니다.”
말을 마친 유스틴이 부드럽게 눈매를 휘어 웃었다.
동시에 옹기종기 모여 있던 귀족들이 각자 헛기침을 내뱉으며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큼, 크흠. 음료가 모자라는군요. 저는 잠시…….”
“저, 저도……!”
유스틴은 그들을 뒤쫓는 대신 심드렁한 표정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실제로 제국 분위기가 좋지 않은 것도 사실이니.’
1년 전 갑작스레 나타난 황자, 그 직후 벌어진 선황제와 황태자의 불미스러운 사고.
그것만으로도 이미 제국은 한 차례 큰 혼란에 휩싸이지 않았던가.
‘이건 아마 그가 빈 ‘소원’ 때문이겠지만.’
이어 연회장 내를 훑던 유스틴의 시선이 어느 한 곳에 고정되었다.
이제 막 소년 태를 벗은, 황제라기에는 아직 어리고 미숙해 보이는 황제의 모습.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황자라니.”
그네들이야말로 정말 아무것도 알지 못하니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거겠지.
‘당장 이번에 꾸민 일만 하더라도 그런 말은 못 할 텐데.’
생각을 마친 유스틴은 곧바로 데미안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폐하.”
곧이어 데미안의 앞에 다다른 그가 나지막이 입을 연 순간이었다.
“이만하면 되었으니, 공은 이만 들어가 보는 게 좋겠어.”
그보다 한발 앞서, 데미안이 나긋한 목소리로 먼저 말을 건넸다. 그러자 유스틴은 슬쩍 눈썹을 치켜올리고서 물었다.
“설마 혼자 계시려는 겁니까? 지금은 러셀 경도 자리를 비우지 않았습니까.”
“그야 그에게는 따로 처리를 맡겼으니까.”
“게다가 일부러 한 마리를 흘리도록 지시를 내린 상황이고요.”
“그래, 하지만.”
잠깐 느른히 고개를 꺾은 데미안이 이전과 같이 담담한 태도로 답했다.
“터지지 않도록 조심해야지.”
“설마…….”
이내 무언가를 알아차린 유스틴이 작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데미안이 옅게 미소 짓고서 말을 이었다.
“그대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아.”
“…….”
“그대라면 걱정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사실도 알고 있겠지.”
깊고 푸른 대양 같은 눈동자가 아무런 감정도 담아내지 못한 채 휘어졌다.
“나는 드래곤의 축복을 가장 짙게 이어받은 자잖아.”
유스틴은 그와 시선을 맞추다 말고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알겠습니다. 다만 다음번부터는 미리 언질이라도 주시죠.”
“그러면 그대가 반대할 테지.”
“그걸 알면서도…….”
이런 식으로 일을 벌인 후 제게 통보하는 버릇은 이상하게도 그녀를 빼닮아서.
무심코 생각에 빠진 유스틴이 이내 천천히 고개를 내저으며 다시금 머리를 숙였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렇게 유스틴이 먼저 자리를 벗어나고.
그가 떠난 빈자리를 바라보던 데미안이 곧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시에 장내의 시선이 모두 그에게 쏠렸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마주할 수 없었던 수많은 눈길.
데미안은 그 시선을 대수롭지 않게 무시하며 천천히 발코니로 향했다.
‘미에나.’
이내 탁 트인 하늘 위로 시선을 옮긴 데미안이 길게 숨을 내쉬었다.
구름 한 점 없이 맑게 갠 밤하늘 사이로 드러난 별은 저마다 반짝임을 뽐내고 있었다.
마치 제 존재를 증명하려는 듯이.
‘저는 당신이 알려 준 대로 살고 있는데.’
그깟 시선이든 독이든, 하다못해 암살자든. 무엇에도 굴하지 않고 착실히 생을 살아가고 있는데.
그런데도 지금의 자신은 별 하나 없었던 칠흑 속에 갇힌 그때와 다른 게 없는 것 같아서.
“……제가 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어요.”
곧이어 데미안이 허공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연 순간이었다.
바스락―
별안간 아래쪽에서 자그마한 인기척이 들려오더니.
꽈앙!
어마어마한 폭음과 함께 발코니 주변이 짙은 연기로 가득 차올랐다.
“이게 대체 무슨!”
“저, 저쪽은 폐하께서 계신 발코니가 아닙니까!”
“폐하께서 습격당하셨다!”
동시에 연회장 내부에서부터 가느다란 비명과 고함이 길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수라장의 한복판.
그 중심에 선 데미안이 여상스러운 태도로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이리 계획대로 움직여 주니.”
혼자 있는 틈을 타 습격할 거라는 사실쯤은 지나가는 아이라도 예상할 수 있을 텐데.
폭발로 튀어 오른 잔해가 데미안의 볼을 스친 듯, 벌어진 상처 아래로 기다란 선혈이 흘러내렸다.
데미안은 장갑 끝으로 상처를 쓸고서 한쪽 입매를 비틀어 웃었다.
“이리 우둔한 자들에게 당하기도 참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어.”
곧이어 그가 허리춤에 찬 검집에 손을 갖다 대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뺨에 나 있던 상처는 어느새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혈흔의 흔적만을 머금은 채였다.
“크윽…….”
곧이어 자욱했던 연기가 서서히 걷히고.
화원 아래 숨어 있던 암살자가 난데없는 폭발에 휘청이던 몸을 가누며 자그맣게 신음을 흘렸다.
데미안은 제 뒤로 모여든 사람들을 흘깃 일별하고는 모두에게 들릴 정도의 크기로 입을 열었다.
“지난번 암살 시도도 모자라, 황제의 탄신 연회에 이리 간 큰 짓을 벌이다니.”
그러자 암살자가 스스로 더 당황한 목소리로 황급히 입을 열었다.
“이, 이건, 우리가 한 게……!”
당연히 아니겠지.
이 폭발은 자신이 직접 설치한 장치였으니.
“자객인 주제에 목소리까지 드러내다니, 수준을 알 만하군.”
곧이어 그가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검을 휘두르려던 순간이었다.
“아이고, 불장난도 정도껏 하지.”
부드러운 바람이 데미안의 뺨을 간질이듯 스치고 지나갔다.
그 뒤로 이어진 것은 누군가 성벽에 부딪히는 둔탁한 충격음이었다.
데미안은 순간 눈을 크게 뜨고 성벽에 처박힌 암살자를 바라보았다가, 홀린 듯 발코니 아래로 시선을 돌렸다.
“어이쿠. 힘 조절이…….”
그 아래 선 것은 한 여인이었다.
황제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에는 관심조차 없는 듯, 쓰러진 암살자를 가지런히 눕히고서 중얼거리는 모습은 차라리 우스꽝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러나 데미안은 차마 웃을 생각도, 무어라 말을 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아래만 응시했다.
하나로 질끈 묶은 잿빛 섞인 검은 머리카락, 장밋빛으로 물든 생기 넘치는 뺨, 역시나 활기를 가득 담은 연둣빛 눈동자.
어느 하나 그녀를 닮지 않은 것투성이뿐이었으나.
“…….”
“……엇.”
영겁 같은 찰나가 지나고, 자유로이 움직이던 눈동자가 이내 데미안이 선 발코니로 향했다.
그 순간 데미안은 숨을 쉬는 법조차 잊고 하릴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금방이라도 떨어져 내릴 것만 같은 은하수 아래로, 혼란과 두려움으로 웅성거리는 인파를 뒤로한 채.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홀로 동떨어진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