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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 필요하신가요? (119)화 (119/154)

제119화

사랑하는 니케.

당신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 그래도 젊었을 땐 꽤 자주 썼던 것 같은데.

어쩌면 펜을 잡는 일 자체가 굉장히 오랜만인 것 같기도 해. 저번에 당신이 먼저 떠난 후로는 처음이지, 아마?

이제 와서 무슨 주책인가 싶기도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털어 내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순간이 있잖아.

미에나, 그 아이가 떠났어.

당신도 알고 있겠지. 당신의 유언을 전해 준 그 애 말이야.

꿈에 들어온 녀석을 보고 나서야 확실히 실감이 나더라고.

아, 정말로 얘가 당신의 유언을 전해 준 거구나. 그렇다면 얘는 당신의 유언을 들으면서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걸까, 하고.

그 녀석은 당신을 많이 닮았어. 씩씩하고, 당차고, 자신이 하는 일에 주저하는 일이 결코 없었지.

하늘은 왜 이런 사람들을 먼저 데리고 가는 걸까.

어쨌든, 한동안은 형님 부부를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당분간은 시두스 저택에 머무르려 해.

그도 그럴 것이, 발인 전에 미에나의 시신이 사라졌거든.

이상한 일이지? 죽은 사람이 갑자기 벌떡 일어난 것도 아니고, 시신만 흔적도 없이 사라지다니.

그 녀석 성격이라면 죽었다 깨어난 즉시 저택으로 돌아와야 마땅한데, 그건 또 아니라서…….

아마 누군가 시신을 훔쳐 간 것 같아. 끝까지 사건을 몰고 다닌다니까.

범인은 수소문하고 있어. 찾으면 아마 목숨줄 지키기 어려울 거야.

일단 내가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

어쨌든 이 일로 다들 난리가 났어. 모쪼록 빨리 되찾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마지막 가는 길은 가족과 함께하고 싶어 하던 애인데, 면목이 없어.

차라리 내가 지키고 있었다면…….

흘러 버린 일을 후회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지. 그래도 어딘가에 털어놓고 싶었어.

오랜만에 편지 쓰는 건데 온통 그 아이 일이라니. 앞으로도 가끔 이야기를 꺼낼지도 몰라.

정이 많이 들었었나 봐.

그래도 당신을 가장 많이 떠올릴 거라는 사실은 변치 않으니까.

그럼 다음에 봐, 내 사랑.

―페터가.

* * *

사랑하는 니케.

끝내 그 아이의 몸을 찾지 못하고 도망치듯 떠난 이후로, 남쪽을 돌아다니다가 북쪽으로 가기 전에 잠깐 황도를 들렀어.

시두스 저택도 3년 만이었지.

두 사람한테 아이가 생겼더군.

그 녀석을 하나도 닮지 않았어.

억울해 보이는 눈매도 아니고, 푸른 눈동자는 더더욱 아니었지.

건강해 보였어.

사랑을 많이 받은 태가 나는 게, 기쁘기도 하고, 다행이기도 하고.

기분이 이상해.

그냥, 조금 이상하네.

새로운 아이가 싫다는 건 전혀 아니야. 걔는 나를 좀 싫어하는 것 같지만. 나를 보자마자 울더라고.

오래 떠도느라 수염을 제대로 못 깎아서 그런가? 애초에 나는 애들한테 워낙 인기 없는 사람이었으니.

그래서 더 이상했어.

오늘은 자꾸 기분이 묘하네. 떠나기 전에 무덤에 들렀다 가야지.

아 참, 당신한테는 프레지타 지역에서 특별히 얻어 온 꽃을 가져가려고 해.

그럼 그때 봐, 내 사랑.

―페터가.

* * *

사랑하는 니케.

오늘은 니아트 지역을 지나는데, 그 꼬맹이를 마주쳤지 뭐야.

당신은 직접 본 적이 없으니 모르려나? 이름이……, 맞아.

클레어 에카르트와 그 호위.

그 아이가 구한 사람 중 하나였지.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내 허리를 간신히 넘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머리가 내 가슴에 닿을 정도로 컸더라니까.

오늘 갑자기 여관에서 펜을 잡은 것도 그 이유야.

꼬마 아가씨가 훌쩍 자란 모습을 보니까, 참 싱숭생숭하더라.

그 녀석도 지금쯤 그렇게 크지 않았으려나 싶기도 하고.

원체 작은 녀석이라 그보다는 작을 것 같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 녀석들은 친구들이랑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전국을 유람하고 있다더라.

나랑 비슷하면서도, 나보다 더 기특한 녀석들이지.

다음엔 나도 집에서 뭐라도 들고 같이 여행하는 기분이라도 낼까 봐.

내일은 일찍 나가야 하니 이만 자야겠다.

나중에 봐, 내 사랑.

―페터가.

* * *

사랑하는 니케.

오늘은 드디어 카타르타 지역에 도착했어. 이제 막 여관에 짐을 푼 참이야.

이쪽으로 가는 건 무의식적으로 피하고 있었는데, 이제 남은 곳이 별로 없더라고.

물론 아직도 하임 산맥까지는 발을 들일 용기가 없지만.

아무튼, 이 지역도 그때와는 많은 게 달라졌어.

예전에는 사람이 사는 데가 맞나 싶을 정도였는데, 지금은 꽤 관광 마을처럼 보이더라고.

다만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었는데, 그때 우리를 안내했던 노인과 아이는 마을에 없더라.

마을 사람들 말로는 주술사는 몇 해 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하는데, 그 뒤로 아이도 행방불명이라나.

그 말을 들으니 어쩐지 또 그 녀석이 생각나더라.

그 애랑 함께했던 몇 달이 9년이 지나도록 이렇게 선명할 줄은 몰랐는데. 그렇지?

물론 내게 가장 익숙한 시간은 당신이랑 보낸 그때 그 시절이지만.

언제나, 많이 그리워하고 있어.

그럼 다시 볼 그날까지, 잘 지내.

―페터가.

* * *

미에나 시두스.

이 이름을 대체 얼마 만에 적어 보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오늘은 니케가 아니라 너한테 말해야겠다 싶더라고.

이 소식을 누구보다 기다린 건 바로 너일 테니까.

솜니움에 새 황자, 아니, 새 황제가 나타났다.

하얀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 네가 말한 그대로야.

네 말이 맞았다.

이번에도 네가 옳았어.

솔직히 이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아직도 감은 잘 안 잡힌다만.

네가 그토록 찾으려 했던 남자애가 바로 그 사람인 거겠지.

너는 숨기려 했던 것 같지만, 그 정도는 나도 눈치채고 있었어.

자그마치 10년이야.

네가 그 부탁을 하고 떠난 지도.

하여간 웃기는 녀석이라니까.

내가 그사이에 네 부탁을 까먹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말하고 사라진 건지.

그래도 안 잊었어.

한 번도 잊은 적 없다.

빌어먹게 오래 걸렸지만, 비로소 너와의 마지막 약속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다음에 너한테 갈 때는, 그래. 오랜만에 근위대 제복을 입고 가겠지.

오래 기다렸지?

이제는 나한테 맡기고 쉬어라.

대신 나는 니케를 부탁하마.

―지크프리트 러셀.

* * *

황도 람파스,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기로 소문난 퀴에스 본궁.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사이로, 한 남자가 거침없이 발을 옮겼다.

훤칠하게 큰 키, 보기 좋게 넘겨 정돈한 검은 머리카락, 은은한 짜증을 담은 서늘한 은빛 눈동자까지.

“하.”

이제는 완연한 성인으로 자란 유스틴 에버딘이 길게 한숨을 내쉬고서 복도 끝에 자리한 문을 노려보았다.

‘처리해야 할 안건이 산더미인데.’

기존의 업무는 차치하고서라도, 근래 새로이 보고받은 일들이 제 집무실 한구석에 가득 쌓여 있거늘.

“탄신연이라.”

제 생일이 언제인지도 제대로 모를 인간이 탄신연을 챙기는 건 웬 말이란 말인가.

게다가 요즈음에는 특히 황궁 분위기도 흉흉하기 그지없는데.

“유스틴 에버딘입니다, 폐하.”

그렇대도 자신이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일은 이미 정해져 있으니.

곧이어 유스틴 에버딘이 언제 그랬냐는 듯 말끔하게 표정을 정돈하고서 낮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쪽에서 언뜻 부드러운 듯하면서도 차갑기 그지없는 미성이 흘러나왔다.

“들여보내.”

이내 문이 열리기 무섭게, 유스틴이 황제의 집무실 안으로 성큼성큼 발을 옮기며 입을 열었다.

“기껏 탄신 연회를 여셨으면서, 왜 아직도 이곳에 계시는 겁니까?”

동시에 집무실 끝자락에 서 있던 남자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에 따라 붉은 노을조차 채 숨기지 못한 새하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흐트러졌다.

“……아직 때가 안 되었으니까.”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무감한 목소리 너머, 깊이를 알 수 없는 냉랭한 벽안이 유스틴의 속을 꿰뚫듯 지그시 응시했다.

유스틴은 그 눈빛을 피하지 않으며 옅게 한숨을 내쉬었다.

새 황제, 데미안 미드가르트의 이러한 눈빛이야 이미 익숙했다.

세상 밖으로 나온 남자를 처음 마주한 후로 지금까지, 그는 늘 이렇게 죽은 눈을 한 채 살아왔으니까.

‘그녀가 부탁했던 아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생각에 잠겼던 유스틴은 무심코 떠오른 이름에 잠시 숨을 멈췄다.

벌써 10년이 훌쩍 지났는데도, 아직도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심장이 이렇게 옥죄어 오니.

떠올리지 않는 게 이롭다.

무슨 수를 써도 잊을 수 없으니, 차라리 깊은 곳에 몰아넣고 숨겨 버리는 게 나았다.

‘그걸 알고는 있지만.’

저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마다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이제는 정말 출발하셔야 합니다.”

유스틴이 다시금 길게 숨을 내뱉고서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데미안이 유스틴을 빤히 바라보다 말고 툭 말을 건넸다.

“이번 탄신연은 평소보다 더 조심해야 할 거야. 틀림없이 벌레들이 꼬일 테니까.”

“알고 있습니다.”

“특히 그대는 터지지 않게 조심하도록.”

“……예?”

베이지 않도록 경계하라거나 독에 당하지 않게 유의하라는 말도 아니고, ‘터지지 않게’ 조심하라고?

유스틴이 순간 이해하지 못하고 되묻자, 데미안의 표정 없는 낯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아무것도 아니야. 이만 출발하지.”

너무나도 옅은 탓에, 금방 사그라들고 말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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