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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 필요하신가요? (116)화 (116/154)

제116화

유스틴과 이야기를 마친 후 찾아간 곳은 다름 아닌 루스의 꿈이었다.

루스와 가장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시간상 안 될 것 같더라고.

어르신이 상시 잠듦 상태인 것과 달리, 루스는 아침에 깨고 밤에 자는 새 나라의 어린이였으니까.

‘하지만 역시 루스한테 말하는 게 가장 어려운데.’

루스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이미 내 상태를 잘 알고 있다.

‘나한테 말은 안 해도, 다들 나름대로 헤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지.’

하지만 루스는…….

[미에나, 얼굴에 구름이 꼈어요.]

바닥을 바라보며 생각하는 사이, 시야 안쪽으로 루스의 얼굴이 불쑥 끼어들었다.

나는 순간 하던 생각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뜬 귀여운 소년을 멀뚱히 바라보았다.

저 초롱초롱한 눈동자를 봐.

완전 천사가 따로 없잖아.

‘이런 애한테 어떻게 죽음에 관해 설명하겠냐고!’

아직 루스는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법을 알지 못하는데, 하필이면 처음이 나야!

심지어 첫 친구인데! 루스한테는 나 말고는 더 없는데!

‘나중을 대비해 놓기는 했지만…….’

나는 결국 한숨을 푹 내쉬고서 루스의 손을 조심스레 그러쥐었다.

언젠가는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동안 네가 받을 상처를 생각하느라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

하지만 이제는 정말 헤어질 시간이고, 언제까지고 이렇게 숨기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있잖아, 루스. 오늘은 공부하지 말고 나랑 이야기 좀 할까?]

[저는 좋아요.]

내 말에 루스가 해사하게 웃으며 답했다.

나는 심장 한쪽이 찌르르 아려 오는 고통을 애써 무시하며, 그의 손을 붙잡은 채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일단 배경은……, 밤하늘로 하자.

루스는 은하수를 좋아하니까.

[그러니까…….]

아름답게 펼쳐진 은하수 밑, 나는 루스의 순수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헤어짐을 모르는 아이에게 우리가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죽음을, 어떻게 알려 줘야 할까.

‘……이건 정말 나도 모르겠다.’

결국 마땅한 해답을 찾지 못한 나는 되는 대로 말을 내뱉었다.

[네가 내 앞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내 줬을 때, 기억해?]

당연히 기억하고 있겠지.

너는 잠깐 본 것도 허투루 넘어가지 않고 모두 기억하는 아이니까.

[그때 내가 그랬잖아. 네가 첫 번째 길을 고른다면, 나는 내 힘이 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서 너를 가르칠 거라고.]

내 말에 루스가 말없이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그리고 미안해서.

나는 일그러진 미소를 담고서 천천히 고해했다.

[요즘 들어서는 내가 과연 최선을 다한 게 맞나, 그런 생각이 들어.]

나는 너에게 아직 알려 주지 못한 게 많은데. 네게 보여 주지 못한 세상이 많은데.

[그래서 네게는 늘 미안한 마음뿐이야.]

내 섣부른 마음이 너를 더 힘들게 만든 건 아닌지, 도움이 필요해 보이는 아이를 지나치지 못한 알량한 위선이 널 더 고통스럽게 하는 건 아닌지.

루스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늘 해 왔던 고민의 실타래가 마지막까지 풀리지 않고 저 멀리 널브러져 있는 것만 같았다.

내 미련, 속상함, 분노와 죄책감에 한데 엉킨 채로.

[미에나.]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루스가 나를 올곧게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미에나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요. 저는 미에나를 만나기 전까지는 정말 아무것도 알지 못했잖아요.]

[…….]

[그런데 미에나가 저를 발견해 주고, 미에나의 소중한 시간을 저를 만나는 데 써 주고.]

나보다 반 뺨은 더 작은 소년이, 나보다 더 단단한 눈빛을 하고서 말을 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를 포기하지 않아 줘서.]

[루스.]

[단 두 문장으로만 이루어져 있던 제 세상이 이렇게 넓어졌어요.]

조금은 쑥스러운 듯, 살짝 떨리면서도 여전히 다정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미에나를 통해 앎의 기쁨을 배우고, 경험의 소중함을 배우고, 미래의 설렘을 배우고.]

[…….]

[행복을 배웠어요.]

그간 자신이 배운 단어를 이용해, 제 진심을 모두 드러냈다.

[미에나가 아니었으면 저는 평생 이 모든 걸 알지 못했을 거예요.]

[나는…….]

[그러니 미에나가 제게 미안해할 필요는 어디에도 없어요. 잘못하지 않은 일에 사과하면 안 된다고 알려 준 건 미에나잖아요.]

조곤조곤 말을 이어 나가던 루스가 잠시 숨을 고르며 생긋 웃었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미소였다.

[……루스, 네 이름의 뜻이 뭔지 알고 있어?]

나는 복받치는 감정을 목구멍 너머로 간신히 밀어내며, 꽉 막힌 목소리로 천천히 말을 건넸다.

[루미니스, 루스.]

이제는 쓰는 사람도 없어 사어가 된 단어지만.

[바로 ‘빛’이라는 뜻이야.]

[…….]

[너는 누구보다 밝게 빛나는 빛이야. 네가 새까만 꿈을 꾸고 있었을 때조차도, 너는 늘 빛났어.]

비단 그의 꿈 문이 빛나는 이유에서가 아니었다.

루스는 늘 반짝였고, 늘 눈부셨다.

[어둠 속에서 빛은 더 밝게 빛나는 법이라지만, 너는 이왕이면 밝은 곳에 머물렀으면 좋겠어.]

[밝은 곳에서…….]

[물론 어두운 곳도 밝게 비춰 주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한테 손도 내밀어 주면서.]

네 빛으로 이 세상을 더 밝게 비춰 주기를.

다른 사람의 손에 들린 등불이 아닌, 스스로 빛나는 별이 되어서.

‘내가 없더라도.’

네가 빛나는 세상에, 더는 내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그럼 이건 기억해, 루스?]

나는 치밀어 오르려는 눈물을 애써 눌러 담으며 다시금 질문했다.

[나를 네 세상의 유일한 사람으로 두면 안 된다고 했던 말.]

[미에나?]

동시에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루스의 표정에 가느다란 실금이 그어졌다.

[나는 네 첫 친구일지언정, 마지막 친구는 아니라고 했던 말. 잘 기억해야 해. 너는 앞으로 많은 사람을 만날 테고, 다양한 관계를 맺을 거니까…….]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예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루스가 내 손을 꼭 붙잡고 되물었다.

나는 엄지로 그의 손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루스, 이젠 눈치도 제법 빨라졌네. 이 할미는 걱정을 덜었어요.

내가 없어도 잘 헤쳐 나가겠구나.

[있잖아, 루스. 나는 앞으로 아주 긴 여행을 떠날 거야.]

차마 루스 앞에서 ‘죽음’이라는 단어를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언젠가 시간이 흐르고, 그가 더 자란다면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풀어 설명해 줄 뿐.

[다시는 돌아올 수 없고, 그래서 너를 만나러 올 수도 없어.]

[저, 저도 데려가 주세요!]

[그건 안 돼. 이번엔 나 혼자 가야 하는 여행이니까.]

요 어린 자식이 감히 어딜 따라오려고.

단호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말하자, 루스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빠르게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저를 찾을 수 없어서 그런 거라면, 제가 밖으로 나갈게요.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나갈게요. 제가 나가서 미에나를 보러 갈게요. 네?]

그 모습이 너무나도 간절하고 다급해 보여서, 기껏 참은 눈물이 흘러내릴 정도였지만.

[밖으로 나가겠다고 해 줘서 기쁘지만, 그래도 안 돼.]

너는 이곳에 남아야 한다.

너는 살아야 해.

[버리지 마세요, 미에나. 공부도 열심히 할게요. 미에나가 하자는 대로 다 할게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급기야 루스가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나를 붙잡았다.

나는 곧바로 그의 두 어깨를 잡아채며 강경하게 외쳤다.

[나는 널 버리는 게 아니야! 나는 언제나 네 곁에 있을 거야. 네가 나를 기억하는 한, 언제나.]

[그, 그럼 왜…….]

[사람은 언제나 이별을 겪어. 그건 우리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이번에도 그런 경우고.]

[…….]

[사실 나도 네 곁에 있고 싶었어.]

네가 밖으로 나오는 그 순간에 내가 함께하고 싶었어.

네가 마주할 세상 속에, 그 옆에 내가 있기를 바랐어.

하지만 그럴 수 없으니까.

[내가 한 말 잊지 마.]

나는 루스의 푸른 눈을 들여다보며 계속해서 말했다.

[내가 없어도, 잠깐 혼자가 되더라도. 평생 혼자일 거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는 말. 기억하고 있지?]

[하지만, 미에나가 없으면 전…….]

[날 네 세상의 유일한 사람으로 두지 말라고 했잖아. 앞으로 너는 더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될 거야. 네가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이 마음을 잊지만 않는다면.]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안배를 해 두고 갈 테니, 너는 가는 걸음을 주저하지 않기를.

[늘 명심해, 루스.]

뒤이어 나는 그의 하얀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옅게 미소 지었다.

[네 인생의 주인은 너고, 누구도 너를 함부로 강제할 수는 없어.]

[…….]

[언제나 네가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살아야 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네가 원하는 대로 살아.]

이것이 내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유언이자 부탁이었다.

스스로 삶을 살아 나가기를.

그저,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 * *

[……아이고, 고되다.]

그렇게 우는 루스를 어르고 달래 작별 인사를 나눈 후.

나는 어르신의 문 앞에 선 채 잠시 숨을 골랐다.

그래도 마지막엔 루스도 어렴풋이 상황을 알아차린 모양이었지. 그 눈빛과 발언만 보면 전혀 인정하지 못한 모양새였지만.

심지어 마지막에 루스는 이렇게 말했더란다.

‘미에나가 저를 만날 수 없는 곳으로 간다고 해도, 제가 꼭 미에나를 찾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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