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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 필요하신가요? (113)화 (113/154)

제113화

“읏즈 므스으.”

“제가 언제 웃었다고 그럽니까.”

“즈금 읏그 그스즈느으.”

누가 봐도 실실 웃고 있고만, 어디서 감히 발뺌이야?

내가 춤을 못 추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건 어쩔 수 없는 거잖아.

춤을 춰 본 적이 있어야 말이지.

“그렇게 잇새로 말하지 마세요. 이가 상합니다.”

곧이어 유스틴이 부러 입술 끝을 내리며 차분하게 말했다.

그 얄미운 입꼬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삐죽 솟아올랐지만.

옛날에는 나보고 표정 못 숨긴다고 뭐라 하더니, 요즘엔 자기가 더 표정을 못 숨긴단 말이지.

“저랑 첫 춤을 추는 걸 영광으로 아셔야죠. 원래는 아버지랑 첫 춤 추려고 했단 말이에요.”

“평생의 영광으로 여기겠습니다.”

“아니, 뭐. 그 정도까진 아니고.”

그래 봤자 생일 파티에서 춤추는 건데, 평생의 영광은 조금.

나는 괜히 멋쩍어지는 마음에 몇 번 헛기침을 내뱉고서 말을 돌렸다.

“바쁘신데도 이렇게 완벽하게 준비해 주셔서 감사해요. 갑작스럽게 부탁해서 꽤 곤란하셨을 텐데.”

“당신 부탁인데 당연히 들어드려야죠. 사실 에버딘의 이름이 있으면 그다지 어렵지 않은 일이고.”

“대신 소문은 퍼지겠죠.”

대공자가 제 약혼자를 위해 이렇게까지 하더라, 어린 녀석이 벌써 세기의 사랑을 하더라, 같은.

“생각해 보니 큰일이네, 대공자님 이러다 혼삿길 진짜 다 막히는 거 아녜요?”

“저번에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고.”

“아니…….”

너는 몰라도 너희 부모님은 좀 피눈물 나지 않을까?

죄송합니다, 대공님, 대공비님.

제가 냅다 아드님의 혼삿길을 막아 버렸어요.

“그런 사소한 건 넘어가고.”

그사이 유스틴이 나를 깔끔하게 턴 시키며 물었다.

“마음에 들었습니까?”

와, 이렇게 한 바퀴 돌았는데도 골이 안 울리네.

나는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까 말했잖아요, 완벽하다고.”

“…….”

“오늘은 모두에게 잊지 못할 좋은 추억이 될 거예요.”

모두의 기억 속에 오늘이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기를.

그리하여 아픈 미에나 시두스가 아닌, 웃으면서 춤을 추던 미에나 시두스를 떠올리며.

이 순간으로 평생을 추억할 수 있다면, 그렇게 모두 현실을 살아갈 수 있다면.

“그거면 됐어요.”

그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하니까.

‘이것도 사실 모두에게 주는 선물이 아니라 내 욕심에 가깝지.’

이대로 그냥 눈을 감기엔 마음에 걸리는 게 한두 가지여야 말이지.

“……당신은.”

유스틴이 무언가 입을 열려던 순간이었다.

“미아, 이번엔 아빠랑 춤추자꾸나.”

선율이 잠시 멎는다 싶더니, 연신 우리 주변에서 알짱거리던 아버지가 냉큼 사이로 끼어들었다.

첫 춤을 빼앗겼다는 사실이 뼈 아프셨나 보군.

“네, 좋아요!”

그래도 일단 끝인사는 해야지.

나는 곧바로 고개를 살짝 숙여 유스틴에게 인사를 건넨 후, 줄곧 잡고 있던 손을 빼냈다.

그러자 유스틴은 조금 전 지었던 표정을 말끔히 지워 내고서 예의 바르게 미소 지었다.

그 안에 담긴 것은 분명 연민이요 동정이었다.

저거 봐, 요즘엔 진짜 표정 못 숨긴다니까.

“너랑 이렇게 춤을 출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그사이 내 앞에 선 아버지가 나지막이 말을 건넸다.

나는 유스틴에게서 시선을 떼 아버지를 바라보며 입술로 호선을 그렸다.

“살면서 이런 날도 한 번은 있어야죠.”

“그렇지, 이런 날도 있는 법이지.”

아버지 역시 나를 마주 보며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 보면 아빠는 춤 잘 추시려나? 언뜻 데뷔탕트 무도회에서 어머니를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는 것 같은데.

아니, 그보다도…….

“그런데 아버지 어깨에 손을 올린 채로 춤을 추기에는 제 팔이 너무 짧은 것 같아요.”

아빠는 너무 길쭉하고, 나는 너무 땅딸막해서 어깨에 손을 올리고 춤을 추기는 조금 힘들 것 같은데.

이 상황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 잠깐 고민하던 찰나였다.

“우악?”

잠깐 고민하던 아버지가 나를 번쩍 안아 들고서 활짝 미소 지었다.

“이렇게 하면 되겠구나.”

이렇게 하면 더는 춤이 아니게 되는데요.

‘아무렴 좋지만.’

나는 그를 따라 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하면 다음부터는 사람들이 다 나를 안고 춤을 추겠지?

춤 못 춰서 놀림 받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잘 됐어.

“미아.”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나를 안아 든 채 능숙하게 스텝을 밟던 아버지가 넌지시 입을 열었다.

“아침엔 경황이 없어 이 말을 못 했구나. 생일 축하한다.”

“헤헤, 감사해요. 사랑해요, 아빠.”

“나도 많이 사랑한단다. 정말, 정말 많이. 너를 많이 사랑해.”

곧이어 그가 잘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우리 부부에게 와 주어서 얼마나 기쁜지, 행복한지 몰라.”

아버지의 눈동자 속 내 모습이 이리저리 일그러졌다. 내게 보여 주는 미소 역시 살짝 구겨져 있었다.

나는 줄곧 아버지의 어깨에 올려놓았던 팔을 뺨에 가져다 대며 조곤조곤 말했다.

“이 좋은 날에 왜 울고 그러세요.”

“…….”

“울지 마세요, 전 정말 괜찮아요.”

아빠도 괜찮아질 거예요.

숱한 세월을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괜찮아질 때가 올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매번 예행연습을 해 왔던 거니까.

매해 마지막 인사를 준비했으니까.

“오늘은 계속 웃으면서 하루를 보냈으면 좋겠는데, 안 될까요?”

나는 부러 더 환하게 미소 지으며 아버지의 입술 끝을 쭉 늘렸다.

그러자 아버지는 그런 나를 한참 바라보다가.

“그래, 미아. 네가 원한다면 뭐든 들어줘야지.”

나를 번쩍 들어 올리고서 다시금 빛나게 미소 지었다.

나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비극의 무대가 끝난 후 커튼콜에 오른 배우처럼, 그저 환하게.

* * *

“많이 피곤하지, 아가.”

그렇게 꿈만 같았던 생일 연회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

어머니가 무릎 위에 머리를 베고 누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느릿느릿 말을 걸었다.

나는 가물가물해지는 정신을 억지로 부여잡으며 슬며시 미소 지었다.

“솔직히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해요.”

아버지와의 춤이 끝나자마자 어머니한테 토스 당하고, 그렇게 또 지크프리트 씨에게, 티나에게 넘겨지고.

급기야는 시두스 저택의 사용인들이 모두 자기와 춤을 춰야 한다고 우긴 탓에, 나중엔 결국 손잡고 둥글게 둥글게까지 했더란다.

“이런 연회는 다시 없을 거예요.”

거창한 예의나 격식 없이 모두가 즐길 수 있었던 무도회라니.

“그래서 더 오래 기억되겠지.”

오랜 춤으로 인해 헝클어진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어머니가 자장가를 부르듯 다정히 소곤거렸다.

그녀의 얼굴에는 어느덧 떠오른 달빛이 희미하게 머무르고 있었다.

“그래도 조금 아쉬워요.”

보통 같으면 이제부터 본격적인 연회가 시작될 텐데.

가뜩이나 이제는 겨울이라 낮보다 밤이 더 길고, 밤에는 샹들리에 불빛이 훨씬 예쁘고.

‘가면무도회도 재밌었을 거야.’

누가 누구인지 모른 채로 춤을 추면 즐겁잖아. 물론 다 아는 얼굴이니만큼 가면을 쓴다 해도 누가 누구인지 바로 알아보겠지만.

“……어쨌든 너무 즐거웠어요.”

손끝이 서서히 떨려 온다.

심장이 점점 조여 오고, 이제는 너무나 익숙한 통증이 희미하게 번지기 시작했다.

정령의 눈물 효과가 점차 떨어지고 있다는 신호였다.

사실 계속 졸음이 몰려왔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연회가 끝나고 이래서 다행이야.’

연회 중간에 쓰러졌다면, 즐거운 시간이고 뭐고 다 깨졌을 텐데.

“우리에게 좋은 추억을 남겨 줘서 고맙구나, 아가.”

“……헤헤.”

나는 다시 한번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누군가는 유난이라고 할지도 몰랐지만, 사실 내가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추억 만들기 이외에도 또 있었다.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아서.’

곧 끝난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서.

모두에게 인사를 전할 수는 없으니, 이렇게라도 웃으면서 인사할 시간을 만들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보다도…….

“있잖아요, 엄마.”

나는 자꾸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간신히 끌어 올리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마지막 인사를 나눠야 하는 시간이 오면.”

아마도 곧.

“그때는 우리 가족끼리 조용히 인사하고 싶어요.”

“…….”

“우리끼리만요.”

생각해 보면 가족끼리만 놀러 갔던 경우는 거의 없었지.

그러니 마지막 여행만큼은 오롯이 가족끼리만 함께하고 싶어서.

“왜, 왜 그런 말을…….”

“그냥……, 지금 말해 둬야 할 것 같아서요.”

오늘처럼 다 같이 방에 몰려들면 어떡해. 생각만 해도 정신없다.

“……그래, 그러자꾸나.”

잠깐의 정적이 지나고.

점점 더 흐려지는 의식 속, 어머니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나는 눈을 감은 채 칭얼거리듯 말했다.

“제가 눈을 떴을 때, 꼭 옆에 계셔야 해요.”

“당연하지, 아가.”

“저 아직 안 가요…….”

“……그래.”

“저, 여기 있어요…….”

“그래, 우리 아가.”

세상 모든 게 완전히 흐려질 듯 덮쳐 오는 수마 속, 이마 위로 짧은 입맞춤이 그 어느 것보다 또렷하게 느껴졌다.

“나도 언제나 여기 있단다.”

나는 그제야 안심하고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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