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1화
“가을은 참 짧은 것 같아.”
한 것도 없는데 벌써 늦가을이네.
침대맡에 앉아 조곤조곤 입을 열었다. 그러자 티나가 협탁에 세숫물을 내려놓고서 나지막이 긍정했다.
“정말로 그러네요.”
그녀의 목소리는 누군가 목을 콱 조른 듯이 잔뜩 메어 있었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겠지.’
가을이 짧은 게 아니라, 그저 내가 눈을 뜨고 있는 시간이 현저히 짧아진 것뿐이라는 사실을.
‘이제는 내가 루스가 잠들기를 기다리는 지경에 이르렀으니까.’
심지어는 루스를 만나고도 시간이 많이 남아서, 근래에는 어르신과 대화하며 하루를 보내고는 했다.
그래도 루스나 어르신이랑 대화하면 괜히 마음이 편안해진단 말이지.
나를 ‘그런’ 눈빛으로 쳐다보지 않아서 그런가.
“아가씨, 오늘 몸 상태는 좀 어떠세요?”
그사이 티나가 입꼬리를 간신히 끌어당기며 물었다.
어라, 꽤 익숙한 레퍼토리인걸.
나는 이전의 기억을 떠올리고서 담담하게 말을 늘어놓았다.
“먹은 것도 없는데 게워 내고 싶고, 온몸이 쑤시고, 가슴은 타들어 가는 것 같고. 평소랑 똑같아.”
“농담하지 마시고요…….”
“역시 기억하고 있네.”
그때도 분위기 수습을 못 해서 애 좀 먹었었는데.
“정말 괜찮아.”
처음 겪는 일도 아닌걸.
나는 마지막 말을 요령 좋게 목구멍 뒤로 밀어 넣고서 싱긋 미소 지었다.
끝이 다가오는 걸 조금씩 체감할 때마다, 이상하게 감정은 도리어 차분해졌다.
숨을 죄어 오는 격통이 심장을 파고들 때마다, 그래도 아직 살아 있음을 깨닫고는 했다.
그러니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지.
“부모님은 어디 가셨어?”
보통 때 같으면 내가 잠에서 깰 때마다 옆을 지키고 계시는데.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며 묻자, 티나가 물 묻힌 손수건으로 내 뺨을 닦아 내며 답했다.
“잠깐 외출하셨어요. 금방 돌아온다고 하셨으니, 조금만 기다리시면 곧 오실 거예요.”
“하긴, 한창 바쁘실 때구나.”
내가 벌인 사업을 진행하는 데만 해도 몸이 남아날 틈 없을 텐데.
‘그러고 보면 최근에는 리넥스에 세운 국외 은행도 본격적으로 영업을 시작했다 그랬지?’
이런 연유로 유스틴도 요즘 계속 바쁜 모양이고.
나는 화병에 꽂힌 은방울꽃을 바라보며 길게 숨을 내뱉었다.
매번 편지랑 꽃을 보내 주는 게, 이런 면에서는 참 세심하단 말이야.
편지라기보다는 사업 진행 현황 보고서에 더 가깝기는 하지만.
‘이 계절에 은방울꽃이라니.’
이 꽃은 마법으로 피워 낸 게 아니면 외국물 좀 먹었겠구나.
“조금 더 쉬시겠어요?”
곧이어 내 얼굴을 다 닦아 낸 티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곧바로 고개를 내저었다.
“이왕 일어난 김에 창밖 구경 좀 하고 싶은데. 좀 부축해 줄래?”
이제 산책은 조금 힘들겠지만, 그래도 바람은 좀 쐬고 싶어서.
“……그럼요, 아가씨께서 하고 싶으신 대로 따를게요.”
내 말에 티나가 또 한 번 입술을 억지로 말아 올리며 가느다랗게 미소 지었다.
그러고서 그녀는 의자 하나를 창가 가까이 가져다 놓은 뒤, 나를 조심스럽게 안아 의자에 앉혔다.
티나한테 공주님 안기를 당할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티나는 생각보다 힘이 세구나.”
“아가씨가 너무 가벼운 거예요.”
“둘 다인 거로 하자.”
여기서 토론 시작되면 끝이 없어.
나는 말을 마치고서 의자를 조금 더 끌어당겨 창틀에 턱을 괴었다.
벌써 나뭇잎이 다 떨어졌네. 저거 밟을 때 나는 바스락 소리가 듣기 좋은데.
‘옛날에는 저기서 티나랑 곧잘 놀기도 했고.’
아이들의 순수한 까르르 낙엽 놀이 같은 건 아니었지만.
“기억나, 티나? 옛날에 내가 저 나무 아래에서 깜빡 잠들었을 때, 티나가 낙엽 모아서 나 이불 덮어 줬잖아.”
그걸 본 부모님이 내가 땅에 묻힌 줄 알고 기함하셨더랬지. 애를 거기서 재우면 어떡하냐고 혼나기도 하고.
“그, 그때 자고 계셨던 거 아니었어요? 어떻게 기억하시는 거예요?”
티나가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워, 나는 순순히 그날의 진실을 알려 주었다.
“잠깐 졸았던 건 맞는데, 깊게 잠들지는 않았었어.”
“그럼 그냥 일어나시지……!”
“에이, 재밌잖아.”
나는 앙상한 나뭇가지 끝에서 위태로이 흔들리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때는 정말 작아서, 커다란 낙엽 몇 장만 모으면 몸이 대부분 가려지고 그랬었는데.”
“맞아요, 정말 작으셨죠.”
“그런데 이제 내 몸을 가리려면 낙엽이 아주 많이 필요할 거야.”
“……그러게요. 정말로요.”
뒤따른 대답 사이로 희미한 물기가 느껴졌다.
나는 부러 뒤를 돌아보지 않고서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냥 시간이 이렇게 많이 흘렀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뿐인데, 분위기가 또 망했군.
요즘엔 내가 무슨 말을 하든 이런 분위기로 흘러가서, 이젠 조금…….
“에비!”
“히익!”
바로 그 순간, 내 머리 위로 수많은 낙엽이 우수수 쏟아져 내렸다. 나는 순간 깜짝 놀라 파드득 어깨를 떨었다.
“러셀 경……! 깜짝 놀랐잖아요.”
“놀라게 하려고 한 거야. 두 사람 다 무슨 나라 잃은 표정을 하고 있길래.”
“나라 잃은 표정은 무슨. 그런데 러셀 경은 어디 다녀온 거예요?”
옷차림새를 보니까 저택에 있던 건 아닌 것 같은데.
평소에는 내 껌딱지였으면서?
“그런 게 있어. 가끔은 내 개인 시간을 즐길 때도 필요하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제 곁에 붙어 있겠다고 말했던 사람이 누구더라.”
“사람 비밀 함부로 캐내는 거 아니다.”
호오, 평소라면 어디 다녀왔다고 순순히 말했을 사람이 그렇게 숨기니까 더 이상한데.
나는 몇 가지 가정을 추렸다가, 불현듯 어느 하나를 떠올리고서 작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곧 제 생일이네요.”
“…….”
“설마 제 생일 선물 준비하느라?”
“아, 몰라. 말 안 해 줘.”
하하, 반응을 보니 확실하군.
내 눈을 속일 수는 없지.
“굳이 안 챙겨 주셔도 돼요, 러셀 경. 저는 이미 갖고 싶은 건 다 가졌는걸요. 러셀 경의 작고 소중한 봉급을 제게 쓰는 건 조금…….”
“어휴, 얄미워. 막말로 좀 모르는 척하면 어디 덧나냐?”
“눈에 빤히 보이는 걸 어떻게 모르는 척하겠어요.”
게다가 놀리는 맛이 이렇게 좋은데.
나는 눈꼬리를 휘어 웃으며 지크프리트의 생생한 반응을 즐기다, 이내 뒤따르는 생각에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생일엔 제가 여러분한테 뭔가를 해 주고 싶어요.”
거창한 건 아니더라도, 소중한 추억이 될 수 있을 만하게.
“네가 어떻게…….”
내 말에 지크프리트 씨는 무심코 말을 내뱉었다가.
“뭐 해 줄 건데?”
이내 뒷머리를 쑤석거리며 대화의 방향을 바꾸었다.
나는 여전히 생글생글 웃는 낯으로 담담하게 답했다.
“비밀인데요.”
내가 그걸 알려 주겠습니까, 휴먼.
“이 녀석이?”
동시에 지크프리트 씨의 표정이 보기 좋게 뒤바뀌었다.
‘역시 이 맛이지.’
아유, 즐겁다! 아유, 재밌다!
“형님한테 순 이상한 것만 배웠지, 아주?”
“꺄악! 러셀 경, 침실 안으로 낙엽 뿌리지 마세요! 나중에 치우기 힘들단 말이에요! 아가씨께서도 러셀 경 그만 놀리셔요!”
“에이, 재밌잖아.”
이제 조금 시두스 저택 같은걸.
나는 바람 빠진 웃음을 몇 번 흘리고서 머리 위에 붙은 낙엽을 뗐다.
“아무튼, 제 생일엔 다들 일정 비워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부모님이랑, 시간이 된다면 대공자님도…….”
“말 안 해도 당연히 그럴 생각들일 거다. 그건 걱정 안 해도 돼.”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사실 진짜 걱정해야 할 건 그게 아니긴 하지.
“그리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침 일찍 저를 깨워야 해요. 러셀 경은 일찍 일어나시니까, 부탁 좀 드릴게요.”
“노력은 해 보겠다만, 진짜 뭐 하려고?”
“그런 게 있어요.”
나는 속에서 퐁퐁 튀어나오는 아이디어들을 차곡차곡 분류하며 장난스럽게 미소 지었다.
적어도 절대 잊지 못할 생일이 되게 만들어 주마.
* * *
그렇게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 이제 막 해가 뜨기 시작한 이른 아침.
“아우, 찌뿌듯해.”
시두스 저택의 정원사인 데빈이 상쾌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길게 기지개를 켰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조금 피곤한 감이 없잖았으나, 앞으로의 일을 위해서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았다.
“아가씨께서 일어나시기 전에 깜짝 선물을 준비해야지.”
우리 아가씨가 고양이를 좋아하는지 강아지를 좋아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깨기 전에 뭐든 완성해 보자.
생각을 마친 데빈이 정원용 가위를 집어 들고서 저택 바깥으로 나서려던 찰나였다.
타다닥, 탁.
가볍고 경쾌한 발걸음 소리가 고요한 복도를 타고 흘렀다.
“누가 아침부터 시끄럽게…….”
성인의 것이라기에는 무척 가볍고 재빠른 소리에, 데빈이 무심코 고개를 돌린 찰나였다.
“……?”
데빈은 그대로 턱이 빠질 듯 입을 벌리고서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지금 뭔가 하얗고 몽실몽실한 머리카락을 한 무언가가 빠르게 지나간 것 같은데.
근데 그게 아무리 봐도 우리 귀여운 아가씨인 것 같은데.
아가씨가, 달리기를?
“내가 헛것을 봤나?”
평소답지 않게 일찍 일어나서 잠이 아직 덜 깬 건가?
순식간에 사라진 형체에, 데빈이 눈을 비비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아니, 야, 미에나!”
잔뜩 당황한 얼굴의 지크프리트가 복도를 잽싸게 뛰어간다 싶더니.
“흐흠!”
이번에는 특유의 명랑하고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시두스 저택 내에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오늘만큼은! 일찍! 일어나셔야죠!”
정말 믿기지 않게도, 미에나 시두스의 목소리였다.
“왜냐면! 오늘은! 제 생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