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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이 필요하신가요? (109)화 (109/154)

제109화

[잠들었네.]

아빠한테 안기기 전까지만 해도 사방이 시끄러워서 잠들 수 있을까 싶었는데.

나는 순식간에 뒤바뀐 풍경을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케이프가 알아서 주변 소음을 차단해 줬나? 그 정도로 두껍기는 했지.

[오늘도 역시 컨디션 좋고.]

뒤이어 팔이며 허리를 몇 번 돌린 후, 나는 곧장 루스의 꿈이 있는 곳으로 터벅터벅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꿈에서는 이렇게 오래 걸어도 끄떡없는데, 현실에서는 그 조금 걸었다고 기절하듯 잠들어 버리다니.

‘그나저나 이제는 황제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몸이 안 좋아지네.’

죽을 때가 다 되니 조금만 스트레스받아도 쓰러져 버린다니까.

나는 오늘따라 유난히 더 얼마 없는 꿈 문들을 지나치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개복치보다 더하지, 더해.’

심지어 개복치는 세간에 알려진 것처럼 픽 하면 죽는 것도 아니라며.

[아무튼 내 탓은 아닌 듯.]

따지고 보면 이건 모두 황제가 나를 화나게 해서 그런 거 아니겠어?

그러니 참지 않는다.

‘먹인다, 엿. 이룬다, 루스 자유.’

누가 이기나 해 보자고.

[안녕, 루스!]

망설임 없이 루스의 꿈에 들어가 늘 하던 인사를 건네자, 수많은 책 더미 사이로 하얗고 동그란 머리가 불쑥 튀어 올랐다.

[안녕하세요, 미에나!]

[공부하고 있었구나?]

책들이 무슨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로 쌓여 있네.

혹시라도 나 없을 때 심심하지 말라고 닥치는 대로 책을 훑어보게 하기는 했지만, 정말로 그걸 다 외웠을 줄이야.

[이 천재성을 꼭 올바른 곳에 썼으면 좋겠어…….]

[네?]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오늘은 공부 대신 다른 거 하려고 하는데.]

[다른 거요?]

내 말에 루스가 손에 들고 있던 책을 툭 떨어트리며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나는 뽀얀 뺨을 꼬집어 주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방긋 미소 지었다.

[응, 즐거운 거.]

이름하여 ‘돌아온 현장 체험 학습’ 시간이다!

말을 마친 직후, 나는 그대로 손을 들어 손가락을 서로 맞부딪쳤다.

동시에 서재를 방불케 했던 책 더미들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주위로 깊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미, 미에나?]

뒤이어 루스가 내 옷자락을 슬며시 잡아끌며 작게 중얼거린 순간이었다.

마치 자그마한 요정이 숲속의 길을 밝히듯, 강가의 연등이 피어오르듯.

마정석 등불이 하나둘 켜지며 자리를 밝히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한없이 어두웠던 거리가 어느덧 찬란한 빛에 휩싸여 처음과는 다른 분위기로 물들었다.

[와아……!]

그 모습을 바라보던 루스는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아직 여기서 놀라기엔 이르지.

‘생각해 보면 루스한테 군중이 밀집된 곳을 보여 준 적은 없으니까.’

빛을 산란하며 흩뿌려지는 분수 아래를 뛰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필두로, 사람이 만들어 내는 다양한 선율이 꿈속을 가득 채워 나갔다.

바구니에 든 꽃을 파는 아이, 가판대 아래로 굴러떨어진 사과를 줍는 아주머니,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길거리 악사와 저마다 이야기꽃을 피우는 사람들까지.

[이건…….]

[오늘이 건국제거든.]

[건국제.]

루스가 황홀경에 빠진 표정으로 멍하니 정면을 응시하다가, 번뜩 정신을 차리고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같이 구경할래?]

동시에 자그마한 손이 망설임 없이 내 손바닥 위에 포개어졌다.

[응, 좋아요!]

[잃어버리지 않게 손 꼭 잡고.]

사람이 갑자기 많아졌는데도 의외로 겁을 안 내네.

이렇게 돌아다니면서 특정 외양을 가진 사람에 대한 공포를 잊게 하는 것도…….

[와, 미에나! 저쪽으로 가 봐요! 저쪽에 사람이 많아요!]

겁이 없어도 너무 없는 거 아니니?

[잠깐만, 그렇게 뛰면 내가……!]

나는 반사적으로 루스를 멈춰 세우려다, 불현듯 내 상태를 깨닫고 그를 따라 어색하게 다리를 뻗었다.

맞네, 이곳에서 나는 건강하지.

너무 현실 같아서 잠깐 헷갈렸어.

‘마음껏 뛰어도, 마음껏 먹어도 되는 곳.’

그러나 현실은 아닌, 허구의 공간.

[이런 건 처음 봐요, 미에나.]

그사이 목적지에 다다른 루스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말했다.

나는 곧바로 잡념을 지워 내고서 그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엎어 놓은 세 개의 컵과 옆에 놓인 자그마한 주사위까지.

그러니까 이건…….

[내기판이잖아.]

하필 관심을 가져도 이런걸?

‘아까 슬쩍 보고 지나친 거였는데, 이거까지 재현될 줄이야.’

전문 도박장도 아니고, 돈만 걸지 않는다면 못 할 이유는 또 없지만.

[저 사람이 주사위가 든 컵을 이리저리 섞은 후에, 처음 주사위가 담긴 컵을 맞히는 거야.]

[아하…….]

[잠깐 재미로 하는 건 괜찮지만, 함부로 돈이나 재물을 걸어선 안 돼. 알았지, 루스?]

불법도박 신고는 국번 없이 1301.

내 말에 루스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를 향해 방긋 웃어 준 뒤, 내기판 앞에 앉은 사람을 슬쩍 조종했다.

[자자, 꼬마 신사분. 한번 맞혀 볼라우?]

[앗, 네……! 해 볼게요!]

대답을 마친 루스가 컵 앞에 쪼그려 앉아 눈을 부릅떴다. 나는 그의 뒤에 서서 씩 미소 지었다.

이참에 발도 못 들이게 도박의 쓴맛을 보여 주지.

가라! 손이 보이지 않는 야바위꾼의 실력!

[이거요.]

그렇게 한바탕 불꽃 튀던 뒤섞임이 끝나고, 가만히 지켜보던 루스가 망설임 없이 손가락을 뻗었다.

정확히 주사위가 숨겨진 컵이었다.

‘아니, 우리 아기 말랑 강아지한테 도박사의 재능이? 아니면 우연인가?’

나는 여전히 미동 없이 컵을 응시하는 루스를 바라보며 다시금 야바위꾼을 조종했다.

[자, 이것도 한번 맞혀 보시지!]

[이거…….]

[이, 이 녀석. 꽤 하는데? 이번에는 어려울 거다!]

[어, 이쪽이요.]

[이번엔 기필코……!]

그렇게 몇 번의 판이 지나고.

[어, 이번에는 컵이 아니라 옷소매 사이로 흘러가던데…….]

[……졌다.]

마지막 판마저 정확히 정답을 고르자, 나는 결국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동체시력의 끝판왕. 내기의 신.

당신을 야바위꾼의 천적으로 임명합니다.

[저 사람 손이 정말 빨라요, 미에나. 잠깐이라도 눈을 깜빡이면 놓칠 것 같았어요.]

내기판에서 빠져나온 루스가 만족스러운 듯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나는 강아지 산책을 끝마친 주인처럼 허름하게 마주 미소 지었다.

보통은 깜빡이지 않아도 놓쳐…….

‘이것도 드래곤의 축복을 진하게 이어받은 결과인 걸까?’

기억력도 그렇고, 동체시력도 그렇고. 보통 인간의 범주를 아득히 넘어선 걸 보면 맞는 것 같은데.

[어, 저건 뭐예요?]

이런저런 생각을 흘리며 걷는 사이, 루스가 손가락으로 어느 한 곳을 가리키며 물었다.

나는 무심코 고개를 돌려 루스의 손끝이 향한 곳을 바라봤다가 황급히 발을 멈췄다.

아이고, 야외 공연장이잖아!

‘이건 안 보여 주는 게 좋겠어.’

까딱 잘못하다가는 내게도 루스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만 끼칠 게 분명하다.

[아하하하, 루스. 저거 말고 우리 불꽃놀이 볼까? 밤하늘에 별이 뜨는 것처럼 불꽃이 펑펑 터지는 건데.]

[별이요? 좋아요!]

내 말에 루스가 뻗었던 팔을 내리며 해맑게 눈꼬리를 휘었다.

루스가 별을 좋아해서 다행이야.

사실 배우의 얼굴을 바꾸면 되는 일이긴 하지만…….

‘황제가 떠오를 것 같단 말이지.’

그런 상황에서 까딱 꿈을 잘못 조종했다간 그야말로 파국이 될 테니, 미리 조심하는 수밖에 없지.

[자, 그럼.]

뒤이어 나는 루스를 마주 바라보며 그를 따라 해맑게 외쳤다.

[명당으로 갑시다!]

* * *

자고로 불꽃놀이는 하늘과 가까이서 보는 게 제일인 법.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는 투명 계단을 만들어 하늘로 모셔 봤답니다.

[예쁘다, 그렇지?]

저마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터지는 폭죽 아래.

나는 밤하늘을 수놓다 사라지는 불꽃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슬쩍 고개를 돌려 루스에게 말을 걸었다.

벌써 몇 시간째 이어지는 불꽃놀이가 질리지도 않는지, 루스의 눈동자는 여전히 생기 넘치게 일렁이고 있었다.

‘불꽃놀이 보여 주기를 잘했네.’

작년에 저택에서 불꽃놀이를 구경해서 다행이다.

[오늘 너무 즐거웠어요.]

그사이 루스가 여전히 하늘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서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보는 것도 처음이고, 어떻게 노는지 직접 구경한 것도 처음이고, 또 불꽃놀이도 처음이라…….]

[사실 나도 그래, 루스.]

[그래서 미에나랑 함께 있으면 제가 정말로 살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루스가 어느덧 시선을 옮겨 나를 직시하며 말했다. 나는 푸른 눈동자 안에 담긴 내 모습을 바라보며 옅게 미소 지었다.

……나도 그래, 루스.

[너는 살아 있어, 루스.]

[…….]

[그리고 넌 앞으로도 계속 살아갈 거고. 꿈에서 깨어나도 그 사실을 절대 잊으면 안 돼.]

너는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네!]

루스가 이번에도 힘차게 답했다.

듣는 사람이 절로 힘이 날 만큼 명료하고 활기찬 대답이었다.

좋아, 내 교육이 조금씩 빛을 발하고 있는 것 같군.

[그러면…….]

내가 무언가 말을 꺼내려던 순간이었다.

분명 발아래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야 하는 허공이 잘게 떨려 오기 시작했다. 루스가 꿈에서 깨고 있다는 전조였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구나.

[내일 만나자, 루스!]

나는 하나둘 무너지는 꿈을 뒤로한 채, 루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건넸다.

평소에는 내가 루스보다 일찍 깼는데, 오늘은 상당히 피곤했던 모양이지?

그래도 다른 사람의 꿈에서 튕겨 나오면 알아서 깨게 되니까…….

[……엥?]

그러나 이런 내 예상과는 달리, 루스의 꿈에서 빠져나온 나를 반긴 건 아침 녘의 햇살도, 새벽의 어스름도 아니었다.

주위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완전히 검은 공간.

꿈의 통로였다.

[뭐야, 이건.]

왜 꿈에서 안 깨어나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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